⊙ 6년간 네 차례나 충청남도 서산 약탈한 왜구
⊙ ‘왜구는 제국주의 이념의 선구자’, 한반도 약탈한 왜구 영웅시하는 일본
⊙ 금동관음상 소장하고 있던 관음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선조가 세운 절
金瓊任
⊙ 64세. 서울대 미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애크런 로스쿨 연수.
⊙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駐 튀니지 대사 역임. 現 중원대 초빙교수.
⊙ 저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 ‘왜구는 제국주의 이념의 선구자’, 한반도 약탈한 왜구 영웅시하는 일본
⊙ 금동관음상 소장하고 있던 관음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선조가 세운 절
金瓊任
⊙ 64세. 서울대 미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애크런 로스쿨 연수.
⊙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駐 튀니지 대사 역임. 現 중원대 초빙교수.
⊙ 저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 <왜구도권(倭寇図巻)> (세로32㎝x가로523㎝) 일부. 도쿄대 사료편찬소 소장. 명군과 왜구의 해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왜구의 원래 모습을 전하는 유일한 사료로 간주된다.
왜구는 한반도의 문화재를 그냥 두지 않았다.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 말인 1375년부터 1381년까지 6년 동안 왜구는 서산을 최소 4차례 이상 침략했다. 서산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로 간 것도 왜구와 관련 있지 않을까. 왜구가 언제 어떻게 서산에 침구해 왔는가를 확인하기 전에 왜구의 실체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구는 누구인가?
‘왜구’라는 이름은 5세기 초 광개토왕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비문에는 ‘영락 14년(1404년, 永樂은 광개토왕 연호), 대방(帶方)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궤멸했다…’라는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때의 ‘왜구’는 왜인의 침입 정도의 뜻이었을 것이다.
1223년 ‘왜(倭), 구(寇)금주(金州·김해)’라는 《고려사》의 기록을 시작으로 역사에 재등장한 왜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연안 지역을 집요하게 침구했다. 이때부터 왜구는 ‘한반도와 중국연안의 해상에서 또는 연안 지역에 상륙하여 약탈과 납치,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던 일본인 해적단’이라는 의미의 역사적 용어로 고착되었다.
원래 왜구는 8세기 무렵부터 일본 세토내해(瀬户内海)에서 바다를 생업으로 삼던 연안 주민들이 생존을 위한 자구책으로 해적질을 하며 ‘악당(惡黨·아쿠토)’으로 불린 것이 기원을 이룬다. 이들은 인근 호족들을 위한 수군으로 활약했다. 해양술이 발달하면서 13세기부터는 인접국으로 약탈영역을 확대했다. ‘왜구’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일본의 남북조 내란 시기 왜구는 일본 호족들의 휘하에서 대규모 군사집단으로 성장했다. 1350년 이후 1392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왜구는 극성을 부리다가 1419년 세종의 대마도 정벌로 근절되었다. 이것이 고려 말, 조선 초의 왜구였던 전기왜구(前期倭寇)다.
이후 왜구는 명나라의 엄격한 해금정책에 반발하는 중국의 상인들과 결탁하여 중국연안에서 대규모 밀무역과 약탈에 종사했다. 이것이 후기왜구(後期倭寇), 즉 가정왜구(嘉靖倭寇·가정은 명나라 세종의 연호로 1522~1566년에 해당)다. 이후 왜구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금구(禁寇)정책으로 종식되었고 임진왜란 시기 왜군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와 조선, 일본에서는 일찌감치 왜구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고려 우왕 때 왜구의 격퇴에 공이 큰 정지(鄭地)는 “(일본) 온 나라가 모두 도적인 것은 아니고 그 반란인들이 쓰시마, 이키(壱岐島)에 근거지를 두고 우리 변방에 침입하는 것입니다”(고려사 우왕13년, 1387)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조선 초에는 왜구의 근거지를 나타내는 용어로서 대마, 이키, 규슈(마쓰우라·松浦)의 ‘3도 왜구’가 정착되었다. 일본정부(무로마치 막부) 역시 1376년 고려에 보내는 서신에서 ‘규슈의 난신’과 ‘서변해도의 완고한 백성’이 왜구임을 인정했다. 이같이 오래 전부터 한일 양국 간에 확고하게 인식된 왜구의 실체는 규슈의 반란군들과 인근 도서지역 해민들이었다.
왜구를 영웅시하는 일본
일본에서 왜구에 대한 연구는 메이지유신 이래 본격적으로 진전되었다. 일본이 제국주의 기치를 들기 700여 년 전에 이미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 해역을 침구했던 왜구는 일본역사에서 가치 있는 존재였다. 왜구→임진왜란→일본제국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대륙진출 역사를 개시한 선구자로서 찬양되어 마땅했다. 왜구는 자랑스런 일본인으로 각인되었다.
오늘날에도 왜구에 대한 일본인들의 긍지는 면면히 분출되고 있는데, 최근 서점가를 강타한 햐쿠타 나오키(百田尙樹)의 《해적이라고 불린 사나이》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석유재벌 이데미쓰 사조(出光佐三)를 국제 석유자본에 맞서 전후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한 영웅으로 찬양하면서 그를 ‘해적’으로 부른 것이다. 이 소설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페이스북에서 강력하게 추천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렇지만, 왜구는 약탈, 살상, 방화, 납치를 자행했던 집단인 만큼 당시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정부에도 용납될 수 없었던 불법적인 존재였다. 더구나 오늘날 전시약탈이 국제범죄로 확고히 정착된 마당에 역사적으로 수백 년간 집요하게 인접국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던 왜구는 평화, 선진적인 이미지를 뒤집어쓴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 대외적으로는 부담스럽고 곤란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는지, 1980년대부터 일본인 학자들의 왜구 재해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왜구에 대한 기록은 피해국인 고려와 조선, 중국에는 상당히 남아 있지만 일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목적이 없었던 약탈자들이 기록을 남길 리 없었기 때문이다. 왜구에 관한 자료공백은 학자들의 역사 재해석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1980년 중반부터 후지타 아키요시(藤田明良·덴리대학 교수),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전 도쿄대학 교수), 다카하시 기미아키(高橋公明·나고야대학 교수) 등 저명한 일본의 사학자들은 전기왜구는 일본인과 고려 및 조선인들로 구성되었고, 후기왜구는 중국인 다수와 일본인 소수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왜구-다민족설’을 주장했다.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도쿄대학 명예교수·사학회 전이사장)는 당시 국가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규슈와 한반도 및 중국연안 등 환동중국해의 주민들은 국경과 국적, 민족의 경계를 초월한 경계인들(marginal men)의 집단이라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사에키 고지(佐伯弘次·규슈대학 교수)는 동아시아 전 지역에서 활동했던 왜구는 동아시아적인 규모에서 검토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주장의 배경에는 ‘왜구’라는 용어가 고려와 중국에서 붙인 이름으로서 일본인에 대한 경멸의 뜻이 담겨 있으며 또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왜구의 폭력적인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침략적인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는 반발이 있다. 미야자키 마사카쓰(宮崎正勝·일본 중앙교육심의회 전문위원)는 국적을 전제로 왜구를 논의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며, “글로벌 교육이 진전된 일본에 비해 강렬한 내셔널리즘이 관통해 있는 한국, 중국의 역사교육이 문제”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새로운 사료의 발견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단지 사료해석의 관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왜구 이미지 순화하려는 일본 역사학계
‘다민족설’ 또는 ‘고려인·일본인 연합설’은 어디에 근거를 둔 주장인가? 《고려사》에 기록된 4개의 기사가 전부이다. 1382년(우왕8년)과 1383년 및 <고려사 열전>(31, 조준(趙浚)전)에는 화척(禾尺·백정)과 재인(才人) 수십 명이 왜적을 가장하고 방화와 약탈을 하다 관군에 잡혀 처벌되었고 그들이 약탈한 말(100~200필)을 회수했다는 것이다.
이들 학자는 한 번에 500척에 달하는 대규모 왜구선단이나 1000여 명에 육박했다는 왜구 기병들에 관한 《고려사》의 기록에 비추어 왜구가 고려인의 내응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말을 다루는 화척이나 제주인이 왜구로 나섰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고려정부의 통제 밖에 있던 제주도 등 변방의 해도에는 고려인, 중국인, 일본인들이 잡거하며 왜구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사료적 근거는 전혀 없다.
고려 말 왜구의 약탈횟수가 500회를 상회하는 차제에 4개의 기사를, 그것도 왜구가 수그러드는 1382년, 83년의 간단한 기사를 근거로 고려인 왜구를 주장하거나, 변방에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다는 고려조정의 무능을 암시하며 사료에도 없고 역사적 상황에도 부합하지 않는 다민족 잡거설이나 경계인설을 내세우는데, 이들은 1419년 세종의 대마도 정벌로 전기왜구가 근절되었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에는 약탈자 왜구의 모습에서 일본인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해외로 진출한 자랑스러운 왜구는 일본인이지만, 동북아 연해에서 약탈을 자행한 수치스러운 왜구는 다민족으로 포장하여 왜구의 악행을 분담시키려는 일본인 학자들의 불순한 저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편에서는 왜구의 이미지를 순화시키는 연구도 상당히 진전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교역자로서 왜구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왜구가 원래 사무역과 밀무역을 행했던 교역자였다는 인식이 학자들과 일반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왜구-다민족설’을 주창한 다나카 다케오 교수는 원래 자위와 정당방위를 위해 무장한 상선단이 교역에 방해를 받으면 왜구로 돌변하는데, 고려정부의 무역제한이 큰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고려정부의 혼란과 무능이 왜구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역과 정당방위를 내세워 왜구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왜구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왜구에 관한 한, 적어도 《고려사》의 기록에는 교역자로서 왜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사학자 세키 슈이치는 보다 솔직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 저서 《대마와 왜구》에서 전기왜구가 고려와 조선에서 약탈해 온 미곡과 포로는 다시 매매되었기 때문에 전기왜구는 약탈자로서의 측면과 해상(무역인)으로서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 초 흥리왜선(興利倭船·일본교역선)이 중국에서 약탈한 물품을 조선에서 매각했던 관행과 흥리왜선이 방비가 허술한 곳에서는 약탈을 하고 병기가 있는 곳에서는 장사를 했다는 《태종실록》의 내용을 소개하며 흥리왜선과 왜구가 표리일체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왜구가 약탈물을 되팔았기 때문에 왜구와 상인의 동일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는 약탈물을 일단 매매하면 상거래로 간주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약탈 문화재를 대하는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으로서 경계를 요하는 점이다.
왜구의 서산 약탈 일지
《고려사》에 따르면, 서산은 5차례 왜구의 침구를 받았다.
<1352년 3월 강화에서 남하하는 왜선을 서주 방호소에서 공격
1375년 9월 영주(천안), 목주(목천), 서산, 결성
1377년 4월 여미(서산군 해미)
1378년 9월 서주, 철주(평안도 철산), 논산, 공주, 익주(익산), 전주
1380년 5월 결성, 홍주
1381년 9월 서천, 서주, 보령, 부여>
1352년 3월 왜구가 서산지역에 처음 출몰하지만 이때의 왜구는 상륙하지는 않았다. 고려 침구 초기에 왜구는 경상, 전라도의 조운선 약탈과 개경의 함락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서해안의 비교적 소읍이었던 서산은 1370년대에 이르러서야 집중적인 침구를 받은 듯하다. 서산 북쪽의 아산만 일대의 고을이 수십 차례 침구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를 보이는데, 이것은 서산 북쪽의 부춘산(187m)과 성왕산(252m)이 서산을 두 겹으로 에워싸고 있어 속전속결을 요하는 왜구가 아산만으로부터 침입하기에는 쉽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포구 마을인 서산은 남쪽의 천수만을 통해 보다 쉽게 침구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서산 남쪽 천수만과 간월만 연안에 위치한 한적한 부석사는 왜구의 단순한 침구를 받은 외에도 천수만을 통해 충청도 내륙에 침입하는 왜구의 임시 주둔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의 상세한 기록에 의하면 왜구의 서산 침구 상황은 다음과 같다.
1375년 9월 서산과 결성 침구
1375년 9월 대규모 왜선이 인천 부근의 덕적도와 자연도를 점령하자 고려조정은 최영과 이성계에게 한강유역을 맡겨 왜구의 북상을 저지했다. 북상에 실패한 왜구는 이후 이 두 섬을 거점으로 남하하여 천안과 목천을 침구했다. 이때 한강을 지키고 있던 최영이 왜구를 치겠다고 나섰지만 조정에서는 수도권 일대를 책임진 최영의 출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구는 고려군의 반격을 받지 않고 마음껏 이 지역을 약탈했을 것이다.
이어서 왜구는 서산과 결성(結城·현재 홍성군 결성면)을 침구했는데, 두 고을 모두 처음 약탈당한 것으로 보인다. 결성은 서산의 남쪽바다인 천수만(淺水灣)의 동쪽 연안가 고을인데, 부석사가 있는 부성현까지는 바닷길로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왜구가 서산과 결성 두 곳을 동시에 침구했다는 것은 왜구가 천수만으로 들어와서 결성을 거쳐 서산을, 또는 서산을 거쳐 결성을 약탈했음을 말해 준다. 고려군의 추격을 받지 않았을 때였던 만큼 느긋하게 천수만 또는 간월만 포구에 정박하고 두 고을을 샅샅이 털었을 것이다. 이때 천수만을 끼고 결성과 서산의 중간에 위치한 도비산의 부석사가 약탈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1377년 4월 해미(海美) 침구
1377년 4월, 강화와 김포에 나타난 왜선이 고려군의 반격을 받고 남하하던 중 서산의 여미현(餘美縣·현재의 해미·海美 일대)을 약탈했다. 여미현은 서산 동쪽의 고을로 도비산에서 간월만을 가로질러 10km 이내에 있다. 여미현은 서쪽 간월만을 제외하고 3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왜구가 이곳을 침구했다면 분명히 간월만을 통해서였을 것이며, 왜구가 간월만에 들어왔다면 해미의 간월만 맞은편 마을인 부성현과 부석사도 재차 약탈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1378년 9월 서산, 1379년 8월 해미 침구
왜구가 서해안 일대 해상권을 장악한 가운데, 1378년 9월 다시 서산을 침구했다. 이때의 왜구 대선단은 천수만으로 들어왔다기보다는 서산 서북쪽의 가로림만을 통해 침구한 듯한데, 서산 남쪽의 도비산까지 침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1379년 8월 왜구는 해미를 다시금 침구하고 이어서 평북 해안가의 정주와 곽산을 침구했는데, 이때의 왜구는 전라도 서해안에서 북상하면서 간월만으로 들어와 해미를 침구하고 다시 서해안으로 나가 북상하여 평안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해미가 침구된 경우 맞은편 도비산 일대가 재차 침입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380년 5월 결성·홍주, 1381년 9월 서산 침구
1380년에도 왜구는 100척의 선단으로 결성과 홍주를 침구하고 남하하다 군산에서 금강을 타고 부여, 유성, 옥천 등 내륙으로 들어갔다. 결성과 홍주가 침구된 것은 왜구가 천수만으로 들어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이때 천수만 북쪽 연안의 부성현이 또 한번 약탈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381년 9월 왜구는 다시금 서산을 침구하는데, 이때의 왜구가 택한 경로를 보면 서천→서산→보령→부여 등지로 추정할 수 있다. 서해안으로 올라온 왜구가 서천에서 천수만으로 들어와 서산을 약탈하고 천수만으로 다시 남하하여 보령에서 금강을 타고 충청도 내륙으로 들어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단 왜구가 천수만으로 들어와 서산을 약탈했다면 천수만 연안에 위치한 부석사가 무사할 리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381년을 마지막으로 왜구의 서산 침구는 더 이상 없다. 고려의 군사적 반격으로 왜구의 퇴조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376년 7월 최영의 홍산(鴻山·부여)대첩, 1377년 10월 고려의 화통도감 설치, 1380년 8월 왜구의 500척 선단을 궤멸하는 진포(鎭浦·금강입구)대첩, 1380년 9월 이성계의 황산(荒山·지리산 부근)대첩으로 해상과 내륙에 침입한 왜구가 격퇴되었고, 1389년 2월에는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박위(朴葳)의 대마도 정벌을 고비로 왜구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서산을 침구한 왜구는 누구인가?
왜구는 1350년 경인년(庚寅年)부터 창궐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는 일본의 남북조 내란(1336-1392)이 규슈를 무대로 격화되고 있을 때였다. 규슈에서 가마쿠라 막부(1185-1333)이래 규슈 동북부 지쿠젠국(筑前国·현재 후쿠오카현)과 대마도, 이키를 지배해 온 쇼니씨(少弍氏)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해 온 무로마치 막부의 북조군(北朝軍)과 반군(反軍)인 남조군(南朝軍)에 대항하여 삼파전이 벌어질 무렵이었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떼가 아니었다. 남북조 내란에 동원된 결과 왜구의 군비는 정규군 수준으로 강화되었고, 그 활동도 과거의 소박한 식량약탈을 넘어 병량미 획득이라는 군사적 목표에 맞추고 있었다.
이영 방송통신대 교수는 경인년 왜구의 배후에는 쇼니 요리히사(少弍賴尙)와 그의 심복 소 쓰네시게(宗經茂·대마도주)가 있다고 보았는데, 남북조 양측과 결전을 앞둔 쇼니씨가 병량미 획득을 위해 고려를 침구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교수는 쓰시마와 이키를 장악한 쇼니씨와 그 휘하 세력이 규슈지역의 전란에서 병량미 확보와 일시적 도피를 목적으로 침구해 온 것이 경인년 이래의 왜구발생의 메커니즘이라고 추정했다. 고려 연안에서 불과 50km 떨어진 대마도를 장악한 쇼니씨가 규슈 전쟁의 사투에서 대마도 왜구를 손쉽게 동원했음은 수긍할 수 있는 설명이다.
1375년 9월 서산을 침구한 왜구 또한 쇼니씨와 그 부관 소씨(宗氏) 휘하의 대마도 왜구임은 분명하다. 직접적인 이유는 서산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에 존재하기 때문이지만 그 외에도 서해안에서 가장 위험한 뱃길이었던 태안반도 부근의 천수만을 침구한 왜구는 고려 연안의 뱃길에 정통한 대마 왜구일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부석사 불상과 고노씨의 악연
부석사 불상을 누가 약탈하여 대마도에 기진했는가를 말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1973년 출판된 《대마미술》의 <조선의 불상> 편에 나온다. 필자 기쿠타케 준이치(菊竹淳一)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이다마초(豊玉町) 관음사의 연혁에 의하면, 대영6년(1526년) 윤12월 고노 헤이사에몽모리치카(河野平左衛門盛親)가 조선에 건너가 악행을 자행하여 일가족들로부터 절연을 당한 결과, 불교를 깊이 믿게 되어 대영7년(1527년)에 귀국하여 관음사를 열었다 한다. 왜구의 한 집단이었다고 생각되는 고노씨(河野氏)가 창립한 관음사에 1330년 제작의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왜구에 의한 불상 등의 일방적 청구가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고노씨는 대대로 세토내해의 이요국(伊予国·현재의 애희메현·愛媛県) 최대 규모의 수군 호족이었다. 1274년 및 1280년 여몽 연합군 일본침입 시, 고노가의 수군 장수 미치아리(河野通有)가 하카다에서 공을 세운 것을 계기로 규슈에 진출했는데, 그 무렵 일족이 대마로 흘러들어가 아소만(浅茅湾)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대마도 중앙부에 위치한 아소만의 서쪽으로 크게 터진 입구는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부터 유명한 어항이자 왜구의 소굴로 명성을 떨쳐 왔다. 이곳에 정착한 고노씨 일족도 어업에 종사하는 한편 왜구로 이름을 떨친 듯하다. 관음사가 위치한 사이다마초 고즈나(小綱)를 비롯하여 가이구치(貝口) 등지가 고노씨의 근거지인 것이다.
아소만의 남쪽 오자키(尾崎)는 대마의 유력자이자 또 하나의 유명한 왜구의 일족이었던 소다씨(早田氏)의 근거지이다. 아소만 일대는 1419년 세종의 대마도 정벌 목표였고, 삼포왜란 때 안골포를 공격한 왜구의 선단도 이곳에서 출발했다. 고노씨의 근거지인 사이다마초는 조선군이 대마군과 결전을 벌였던 지역으로도 유명한데, 격전지였던 누카(糠)에는 대마인 전몰자 비석이 있다. 오늘날 고노씨 후손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그는 세토내해 수오구니(周防国·현재의 야마구치현·山口縣)의 고노씨 지류인 임씨(林氏)가 본가이지만 부친이 이토(伊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서 이토 성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관음사를 열었다는 고노 모리치카는 13대 대마도주 소 요시모리(宗義盛)의 매부(妹夫)로서 제14대 도주 소 모리나가(宗盛長) 정권에 반발하여 1526년 도주의 측근을 살해하고 도주를 자살하게 만든 인물이다. ‘관음사의 연혁’에 소개된 1526년 고노가 조선에서 저지른 악행에 관하여는 현재 추측할 만한 기록이나 단서가 없다.
기쿠다케 교수는 ‘고노씨가 창립한 관음사에 1330년 제작의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왜구에 의한 불상 등의 일방적 청구가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록 ‘일방적 청구’라는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합의가 아닌, 즉 교류나 매매가 아닌 일방적 탈취였다고 밝히고 있다. 분명히 왜구에 의한 약탈물임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부석사 불상은 서산과 결성 두 고을이 동시에 약탈당했던 1375년 9월(또는 해미가 약탈당했던 1377년 8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 ‘고노(河野)’라는 왜구의 두목이 약탈해 가서 그의 근거지 대마의 고즈나에 보관해 오다가 1526년 그의 후손 고노 모리치카가 고즈나에 관음사를 열고 집안에 보관되어 왔던 이 불상을 안치했다고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약탈 이후에도 전매되지 않고 약탈자 집안에서 전해져 오다 그 후손이 세운 관음사로 다시 자리를 바꿔서 보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쿠다케 교수가 이같이 상세하게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972년 대마도 현지조사에서 관음사 측으로부터 상당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기쿠다케 교수가 근거로 밝힌 ‘관음사의 연혁’이 누가 작성한 문서이며, 현재 어디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1972년 기쿠다케 교수는 이 연혁을 보았음이 틀림없으며, 이때 관음사 측의 설명도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의 글을 추측만으로 썼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관음사 측의 양해 없이 일방적으로 ‘관음사 연혁’을 소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부석사 불상이 약탈되었다는 한국 측의 주장은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불상의 복장물→《고려사》→‘관음사 연혁’(《대마미술》에 소개)이라는 일련의 확실한 기록으로 불상의 소유권 약탈과 점유가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불상 복장물은 이 불상이 서산 주민들에 의해 조성되어 영원히 부석사에 모시기 위해 봉안되었다는 서산 부석사의 소유권을 확인하고 있으며, 《고려사》의 기록은 불상이 1375년(또는 1377년) 왜구에 의해 약탈되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불상이 대마도 관음사에 안치되는 배경을 적은 ‘관음사 연혁’은 어떻게 대마도 관음사가 불상을 점유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제 이 모든 증거를 참고해서 한일 양국은 조만간 입장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왜구는 누구인가?
‘왜구’라는 이름은 5세기 초 광개토왕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비문에는 ‘영락 14년(1404년, 永樂은 광개토왕 연호), 대방(帶方)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궤멸했다…’라는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때의 ‘왜구’는 왜인의 침입 정도의 뜻이었을 것이다.
1223년 ‘왜(倭), 구(寇)금주(金州·김해)’라는 《고려사》의 기록을 시작으로 역사에 재등장한 왜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연안 지역을 집요하게 침구했다. 이때부터 왜구는 ‘한반도와 중국연안의 해상에서 또는 연안 지역에 상륙하여 약탈과 납치,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던 일본인 해적단’이라는 의미의 역사적 용어로 고착되었다.
![]() |
1903년 일본에서 발행한 화보집 <조선의 명소와 유적>에 ‘고구려 호태왕릉비-삼국시대 고구려’라는 해설과 함께 실린 광개토왕비 사진. |
일본의 남북조 내란 시기 왜구는 일본 호족들의 휘하에서 대규모 군사집단으로 성장했다. 1350년 이후 1392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왜구는 극성을 부리다가 1419년 세종의 대마도 정벌로 근절되었다. 이것이 고려 말, 조선 초의 왜구였던 전기왜구(前期倭寇)다.
이후 왜구는 명나라의 엄격한 해금정책에 반발하는 중국의 상인들과 결탁하여 중국연안에서 대규모 밀무역과 약탈에 종사했다. 이것이 후기왜구(後期倭寇), 즉 가정왜구(嘉靖倭寇·가정은 명나라 세종의 연호로 1522~1566년에 해당)다. 이후 왜구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금구(禁寇)정책으로 종식되었고 임진왜란 시기 왜군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와 조선, 일본에서는 일찌감치 왜구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고려 우왕 때 왜구의 격퇴에 공이 큰 정지(鄭地)는 “(일본) 온 나라가 모두 도적인 것은 아니고 그 반란인들이 쓰시마, 이키(壱岐島)에 근거지를 두고 우리 변방에 침입하는 것입니다”(고려사 우왕13년, 1387)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조선 초에는 왜구의 근거지를 나타내는 용어로서 대마, 이키, 규슈(마쓰우라·松浦)의 ‘3도 왜구’가 정착되었다. 일본정부(무로마치 막부) 역시 1376년 고려에 보내는 서신에서 ‘규슈의 난신’과 ‘서변해도의 완고한 백성’이 왜구임을 인정했다. 이같이 오래 전부터 한일 양국 간에 확고하게 인식된 왜구의 실체는 규슈의 반란군들과 인근 도서지역 해민들이었다.
![]() |
왜구의 기원지 세토내해(瀬戸内海)와 혼슈지역(점선)과 왜구의 주요 근거지 3도(작은원). 위로부터 대마, 이키(壹岐), 마쓰우라. |
왜구를 영웅시하는 일본
일본에서 왜구에 대한 연구는 메이지유신 이래 본격적으로 진전되었다. 일본이 제국주의 기치를 들기 700여 년 전에 이미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 해역을 침구했던 왜구는 일본역사에서 가치 있는 존재였다. 왜구→임진왜란→일본제국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대륙진출 역사를 개시한 선구자로서 찬양되어 마땅했다. 왜구는 자랑스런 일본인으로 각인되었다.
오늘날에도 왜구에 대한 일본인들의 긍지는 면면히 분출되고 있는데, 최근 서점가를 강타한 햐쿠타 나오키(百田尙樹)의 《해적이라고 불린 사나이》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석유재벌 이데미쓰 사조(出光佐三)를 국제 석유자본에 맞서 전후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한 영웅으로 찬양하면서 그를 ‘해적’으로 부른 것이다. 이 소설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페이스북에서 강력하게 추천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렇지만, 왜구는 약탈, 살상, 방화, 납치를 자행했던 집단인 만큼 당시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정부에도 용납될 수 없었던 불법적인 존재였다. 더구나 오늘날 전시약탈이 국제범죄로 확고히 정착된 마당에 역사적으로 수백 년간 집요하게 인접국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던 왜구는 평화, 선진적인 이미지를 뒤집어쓴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 대외적으로는 부담스럽고 곤란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는지, 1980년대부터 일본인 학자들의 왜구 재해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왜구에 대한 기록은 피해국인 고려와 조선, 중국에는 상당히 남아 있지만 일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목적이 없었던 약탈자들이 기록을 남길 리 없었기 때문이다. 왜구에 관한 자료공백은 학자들의 역사 재해석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1980년 중반부터 후지타 아키요시(藤田明良·덴리대학 교수),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전 도쿄대학 교수), 다카하시 기미아키(高橋公明·나고야대학 교수) 등 저명한 일본의 사학자들은 전기왜구는 일본인과 고려 및 조선인들로 구성되었고, 후기왜구는 중국인 다수와 일본인 소수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왜구-다민족설’을 주장했다.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도쿄대학 명예교수·사학회 전이사장)는 당시 국가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규슈와 한반도 및 중국연안 등 환동중국해의 주민들은 국경과 국적, 민족의 경계를 초월한 경계인들(marginal men)의 집단이라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사에키 고지(佐伯弘次·규슈대학 교수)는 동아시아 전 지역에서 활동했던 왜구는 동아시아적인 규모에서 검토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주장의 배경에는 ‘왜구’라는 용어가 고려와 중국에서 붙인 이름으로서 일본인에 대한 경멸의 뜻이 담겨 있으며 또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왜구의 폭력적인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침략적인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는 반발이 있다. 미야자키 마사카쓰(宮崎正勝·일본 중앙교육심의회 전문위원)는 국적을 전제로 왜구를 논의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며, “글로벌 교육이 진전된 일본에 비해 강렬한 내셔널리즘이 관통해 있는 한국, 중국의 역사교육이 문제”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새로운 사료의 발견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단지 사료해석의 관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왜구 이미지 순화하려는 일본 역사학계
‘다민족설’ 또는 ‘고려인·일본인 연합설’은 어디에 근거를 둔 주장인가? 《고려사》에 기록된 4개의 기사가 전부이다. 1382년(우왕8년)과 1383년 및 <고려사 열전>(31, 조준(趙浚)전)에는 화척(禾尺·백정)과 재인(才人) 수십 명이 왜적을 가장하고 방화와 약탈을 하다 관군에 잡혀 처벌되었고 그들이 약탈한 말(100~200필)을 회수했다는 것이다.
이들 학자는 한 번에 500척에 달하는 대규모 왜구선단이나 1000여 명에 육박했다는 왜구 기병들에 관한 《고려사》의 기록에 비추어 왜구가 고려인의 내응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말을 다루는 화척이나 제주인이 왜구로 나섰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고려정부의 통제 밖에 있던 제주도 등 변방의 해도에는 고려인, 중국인, 일본인들이 잡거하며 왜구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사료적 근거는 전혀 없다.
고려 말 왜구의 약탈횟수가 500회를 상회하는 차제에 4개의 기사를, 그것도 왜구가 수그러드는 1382년, 83년의 간단한 기사를 근거로 고려인 왜구를 주장하거나, 변방에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다는 고려조정의 무능을 암시하며 사료에도 없고 역사적 상황에도 부합하지 않는 다민족 잡거설이나 경계인설을 내세우는데, 이들은 1419년 세종의 대마도 정벌로 전기왜구가 근절되었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에는 약탈자 왜구의 모습에서 일본인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해외로 진출한 자랑스러운 왜구는 일본인이지만, 동북아 연해에서 약탈을 자행한 수치스러운 왜구는 다민족으로 포장하여 왜구의 악행을 분담시키려는 일본인 학자들의 불순한 저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편에서는 왜구의 이미지를 순화시키는 연구도 상당히 진전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교역자로서 왜구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왜구가 원래 사무역과 밀무역을 행했던 교역자였다는 인식이 학자들과 일반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왜구-다민족설’을 주창한 다나카 다케오 교수는 원래 자위와 정당방위를 위해 무장한 상선단이 교역에 방해를 받으면 왜구로 돌변하는데, 고려정부의 무역제한이 큰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고려정부의 혼란과 무능이 왜구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역과 정당방위를 내세워 왜구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왜구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왜구에 관한 한, 적어도 《고려사》의 기록에는 교역자로서 왜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사학자 세키 슈이치는 보다 솔직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 저서 《대마와 왜구》에서 전기왜구가 고려와 조선에서 약탈해 온 미곡과 포로는 다시 매매되었기 때문에 전기왜구는 약탈자로서의 측면과 해상(무역인)으로서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 초 흥리왜선(興利倭船·일본교역선)이 중국에서 약탈한 물품을 조선에서 매각했던 관행과 흥리왜선이 방비가 허술한 곳에서는 약탈을 하고 병기가 있는 곳에서는 장사를 했다는 《태종실록》의 내용을 소개하며 흥리왜선과 왜구가 표리일체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왜구가 약탈물을 되팔았기 때문에 왜구와 상인의 동일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는 약탈물을 일단 매매하면 상거래로 간주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약탈 문화재를 대하는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으로서 경계를 요하는 점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산은 5차례 왜구의 침구를 받았다.
<1352년 3월 강화에서 남하하는 왜선을 서주 방호소에서 공격
1375년 9월 영주(천안), 목주(목천), 서산, 결성
1377년 4월 여미(서산군 해미)
1378년 9월 서주, 철주(평안도 철산), 논산, 공주, 익주(익산), 전주
1380년 5월 결성, 홍주
1381년 9월 서천, 서주, 보령, 부여>
1352년 3월 왜구가 서산지역에 처음 출몰하지만 이때의 왜구는 상륙하지는 않았다. 고려 침구 초기에 왜구는 경상, 전라도의 조운선 약탈과 개경의 함락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서해안의 비교적 소읍이었던 서산은 1370년대에 이르러서야 집중적인 침구를 받은 듯하다. 서산 북쪽의 아산만 일대의 고을이 수십 차례 침구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를 보이는데, 이것은 서산 북쪽의 부춘산(187m)과 성왕산(252m)이 서산을 두 겹으로 에워싸고 있어 속전속결을 요하는 왜구가 아산만으로부터 침입하기에는 쉽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포구 마을인 서산은 남쪽의 천수만을 통해 보다 쉽게 침구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서산 남쪽 천수만과 간월만 연안에 위치한 한적한 부석사는 왜구의 단순한 침구를 받은 외에도 천수만을 통해 충청도 내륙에 침입하는 왜구의 임시 주둔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의 상세한 기록에 의하면 왜구의 서산 침구 상황은 다음과 같다.
1375년 9월 서산과 결성 침구
1375년 9월 대규모 왜선이 인천 부근의 덕적도와 자연도를 점령하자 고려조정은 최영과 이성계에게 한강유역을 맡겨 왜구의 북상을 저지했다. 북상에 실패한 왜구는 이후 이 두 섬을 거점으로 남하하여 천안과 목천을 침구했다. 이때 한강을 지키고 있던 최영이 왜구를 치겠다고 나섰지만 조정에서는 수도권 일대를 책임진 최영의 출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구는 고려군의 반격을 받지 않고 마음껏 이 지역을 약탈했을 것이다.
이어서 왜구는 서산과 결성(結城·현재 홍성군 결성면)을 침구했는데, 두 고을 모두 처음 약탈당한 것으로 보인다. 결성은 서산의 남쪽바다인 천수만(淺水灣)의 동쪽 연안가 고을인데, 부석사가 있는 부성현까지는 바닷길로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왜구가 서산과 결성 두 곳을 동시에 침구했다는 것은 왜구가 천수만으로 들어와서 결성을 거쳐 서산을, 또는 서산을 거쳐 결성을 약탈했음을 말해 준다. 고려군의 추격을 받지 않았을 때였던 만큼 느긋하게 천수만 또는 간월만 포구에 정박하고 두 고을을 샅샅이 털었을 것이다. 이때 천수만을 끼고 결성과 서산의 중간에 위치한 도비산의 부석사가 약탈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1377년 4월, 강화와 김포에 나타난 왜선이 고려군의 반격을 받고 남하하던 중 서산의 여미현(餘美縣·현재의 해미·海美 일대)을 약탈했다. 여미현은 서산 동쪽의 고을로 도비산에서 간월만을 가로질러 10km 이내에 있다. 여미현은 서쪽 간월만을 제외하고 3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왜구가 이곳을 침구했다면 분명히 간월만을 통해서였을 것이며, 왜구가 간월만에 들어왔다면 해미의 간월만 맞은편 마을인 부성현과 부석사도 재차 약탈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1378년 9월 서산, 1379년 8월 해미 침구
왜구가 서해안 일대 해상권을 장악한 가운데, 1378년 9월 다시 서산을 침구했다. 이때의 왜구 대선단은 천수만으로 들어왔다기보다는 서산 서북쪽의 가로림만을 통해 침구한 듯한데, 서산 남쪽의 도비산까지 침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1379년 8월 왜구는 해미를 다시금 침구하고 이어서 평북 해안가의 정주와 곽산을 침구했는데, 이때의 왜구는 전라도 서해안에서 북상하면서 간월만으로 들어와 해미를 침구하고 다시 서해안으로 나가 북상하여 평안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해미가 침구된 경우 맞은편 도비산 일대가 재차 침입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380년 5월 결성·홍주, 1381년 9월 서산 침구
1380년에도 왜구는 100척의 선단으로 결성과 홍주를 침구하고 남하하다 군산에서 금강을 타고 부여, 유성, 옥천 등 내륙으로 들어갔다. 결성과 홍주가 침구된 것은 왜구가 천수만으로 들어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이때 천수만 북쪽 연안의 부성현이 또 한번 약탈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381년 9월 왜구는 다시금 서산을 침구하는데, 이때의 왜구가 택한 경로를 보면 서천→서산→보령→부여 등지로 추정할 수 있다. 서해안으로 올라온 왜구가 서천에서 천수만으로 들어와 서산을 약탈하고 천수만으로 다시 남하하여 보령에서 금강을 타고 충청도 내륙으로 들어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단 왜구가 천수만으로 들어와 서산을 약탈했다면 천수만 연안에 위치한 부석사가 무사할 리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381년을 마지막으로 왜구의 서산 침구는 더 이상 없다. 고려의 군사적 반격으로 왜구의 퇴조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376년 7월 최영의 홍산(鴻山·부여)대첩, 1377년 10월 고려의 화통도감 설치, 1380년 8월 왜구의 500척 선단을 궤멸하는 진포(鎭浦·금강입구)대첩, 1380년 9월 이성계의 황산(荒山·지리산 부근)대첩으로 해상과 내륙에 침입한 왜구가 격퇴되었고, 1389년 2월에는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박위(朴葳)의 대마도 정벌을 고비로 왜구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서산을 침구한 왜구는 누구인가?
왜구는 1350년 경인년(庚寅年)부터 창궐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는 일본의 남북조 내란(1336-1392)이 규슈를 무대로 격화되고 있을 때였다. 규슈에서 가마쿠라 막부(1185-1333)이래 규슈 동북부 지쿠젠국(筑前国·현재 후쿠오카현)과 대마도, 이키를 지배해 온 쇼니씨(少弍氏)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해 온 무로마치 막부의 북조군(北朝軍)과 반군(反軍)인 남조군(南朝軍)에 대항하여 삼파전이 벌어질 무렵이었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떼가 아니었다. 남북조 내란에 동원된 결과 왜구의 군비는 정규군 수준으로 강화되었고, 그 활동도 과거의 소박한 식량약탈을 넘어 병량미 획득이라는 군사적 목표에 맞추고 있었다.
이영 방송통신대 교수는 경인년 왜구의 배후에는 쇼니 요리히사(少弍賴尙)와 그의 심복 소 쓰네시게(宗經茂·대마도주)가 있다고 보았는데, 남북조 양측과 결전을 앞둔 쇼니씨가 병량미 획득을 위해 고려를 침구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교수는 쓰시마와 이키를 장악한 쇼니씨와 그 휘하 세력이 규슈지역의 전란에서 병량미 확보와 일시적 도피를 목적으로 침구해 온 것이 경인년 이래의 왜구발생의 메커니즘이라고 추정했다. 고려 연안에서 불과 50km 떨어진 대마도를 장악한 쇼니씨가 규슈 전쟁의 사투에서 대마도 왜구를 손쉽게 동원했음은 수긍할 수 있는 설명이다.
1375년 9월 서산을 침구한 왜구 또한 쇼니씨와 그 부관 소씨(宗氏) 휘하의 대마도 왜구임은 분명하다. 직접적인 이유는 서산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에 존재하기 때문이지만 그 외에도 서해안에서 가장 위험한 뱃길이었던 태안반도 부근의 천수만을 침구한 왜구는 고려 연안의 뱃길에 정통한 대마 왜구일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부석사 불상과 고노씨의 악연
![]() |
고노 미치아리. 대몽전에서 부상을 입은 모습. 대몽전을 그린 13세기 작자미상의 회화 <蒙古襲来絵詞>의 일부분. 궁내청 소장.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
‘사이다마초(豊玉町) 관음사의 연혁에 의하면, 대영6년(1526년) 윤12월 고노 헤이사에몽모리치카(河野平左衛門盛親)가 조선에 건너가 악행을 자행하여 일가족들로부터 절연을 당한 결과, 불교를 깊이 믿게 되어 대영7년(1527년)에 귀국하여 관음사를 열었다 한다. 왜구의 한 집단이었다고 생각되는 고노씨(河野氏)가 창립한 관음사에 1330년 제작의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왜구에 의한 불상 등의 일방적 청구가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고노씨는 대대로 세토내해의 이요국(伊予国·현재의 애희메현·愛媛県) 최대 규모의 수군 호족이었다. 1274년 및 1280년 여몽 연합군 일본침입 시, 고노가의 수군 장수 미치아리(河野通有)가 하카다에서 공을 세운 것을 계기로 규슈에 진출했는데, 그 무렵 일족이 대마로 흘러들어가 아소만(浅茅湾)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대마도 중앙부에 위치한 아소만의 서쪽으로 크게 터진 입구는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부터 유명한 어항이자 왜구의 소굴로 명성을 떨쳐 왔다. 이곳에 정착한 고노씨 일족도 어업에 종사하는 한편 왜구로 이름을 떨친 듯하다. 관음사가 위치한 사이다마초 고즈나(小綱)를 비롯하여 가이구치(貝口) 등지가 고노씨의 근거지인 것이다.
아소만의 남쪽 오자키(尾崎)는 대마의 유력자이자 또 하나의 유명한 왜구의 일족이었던 소다씨(早田氏)의 근거지이다. 아소만 일대는 1419년 세종의 대마도 정벌 목표였고, 삼포왜란 때 안골포를 공격한 왜구의 선단도 이곳에서 출발했다. 고노씨의 근거지인 사이다마초는 조선군이 대마군과 결전을 벌였던 지역으로도 유명한데, 격전지였던 누카(糠)에는 대마인 전몰자 비석이 있다. 오늘날 고노씨 후손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그는 세토내해 수오구니(周防国·현재의 야마구치현·山口縣)의 고노씨 지류인 임씨(林氏)가 본가이지만 부친이 이토(伊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서 이토 성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관음사를 열었다는 고노 모리치카는 13대 대마도주 소 요시모리(宗義盛)의 매부(妹夫)로서 제14대 도주 소 모리나가(宗盛長) 정권에 반발하여 1526년 도주의 측근을 살해하고 도주를 자살하게 만든 인물이다. ‘관음사의 연혁’에 소개된 1526년 고노가 조선에서 저지른 악행에 관하여는 현재 추측할 만한 기록이나 단서가 없다.
기쿠다케 교수는 ‘고노씨가 창립한 관음사에 1330년 제작의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왜구에 의한 불상 등의 일방적 청구가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록 ‘일방적 청구’라는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합의가 아닌, 즉 교류나 매매가 아닌 일방적 탈취였다고 밝히고 있다. 분명히 왜구에 의한 약탈물임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부석사 불상은 서산과 결성 두 고을이 동시에 약탈당했던 1375년 9월(또는 해미가 약탈당했던 1377년 8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 ‘고노(河野)’라는 왜구의 두목이 약탈해 가서 그의 근거지 대마의 고즈나에 보관해 오다가 1526년 그의 후손 고노 모리치카가 고즈나에 관음사를 열고 집안에 보관되어 왔던 이 불상을 안치했다고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약탈 이후에도 전매되지 않고 약탈자 집안에서 전해져 오다 그 후손이 세운 관음사로 다시 자리를 바꿔서 보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쿠다케 교수가 이같이 상세하게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972년 대마도 현지조사에서 관음사 측으로부터 상당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기쿠다케 교수가 근거로 밝힌 ‘관음사의 연혁’이 누가 작성한 문서이며, 현재 어디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1972년 기쿠다케 교수는 이 연혁을 보았음이 틀림없으며, 이때 관음사 측의 설명도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의 글을 추측만으로 썼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관음사 측의 양해 없이 일방적으로 ‘관음사 연혁’을 소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부석사 불상이 약탈되었다는 한국 측의 주장은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불상의 복장물→《고려사》→‘관음사 연혁’(《대마미술》에 소개)이라는 일련의 확실한 기록으로 불상의 소유권 약탈과 점유가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불상 복장물은 이 불상이 서산 주민들에 의해 조성되어 영원히 부석사에 모시기 위해 봉안되었다는 서산 부석사의 소유권을 확인하고 있으며, 《고려사》의 기록은 불상이 1375년(또는 1377년) 왜구에 의해 약탈되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불상이 대마도 관음사에 안치되는 배경을 적은 ‘관음사 연혁’은 어떻게 대마도 관음사가 불상을 점유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제 이 모든 증거를 참고해서 한일 양국은 조만간 입장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