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마도 관음사 전 주지, “(관음상 사태에 대한 한국 측 논리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과
다를 바 없다”
⊙ 조선의 억불정책을 메이지유신 시기의 폐불훼석(廢佛毁釋) 정책과 동일시하는 일본
⊙ 왜구의 한반도 약탈 외면하는 일본의 일부 극우 언론
金瓊任
⊙ 64세. 서울대 미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애크런 로스쿨 연수.
⊙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駐 튀니지 대사 역임. 現 중원대 초빙교수.
⊙ 저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다를 바 없다”
⊙ 조선의 억불정책을 메이지유신 시기의 폐불훼석(廢佛毁釋) 정책과 동일시하는 일본
⊙ 왜구의 한반도 약탈 외면하는 일본의 일부 극우 언론
金瓊任
⊙ 64세. 서울대 미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애크런 로스쿨 연수.
⊙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駐 튀니지 대사 역임. 現 중원대 초빙교수.
⊙ 저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한국인으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는커녕, 약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분노를 넘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조선에 교역을 하러 건너간 일본인들이, 조선이 불교를 탄압하며 불상을 몰수하고 파괴하는 참상을 보다 못해 불타는 절에서 불상을 구출해 낸 것을 약탈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실례가 아닌가? 불상이 대마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마인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오랫동안 지켜 온 불상을 훔쳐가서 생떼를 쓰며 돌려주지 않고 있으니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재인식했다. 도둑질한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과 다를 바 없다.”
대마도 관음사 주지로 30년간 재직하다가 장남에게 주지직을 물려준 관음사의 전 주지 다나카 세쓰코(田中節孝) 씨가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2013년 2월 26일 대전지법 민사부가 서산 부석사의 불상 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수용해 관음사에서 불상을 정당하게 취득했다는 것이 재판에서 확정될 때까지 불상의 반환을 금지한다는 판결을 내린 뒤 이틀 후에 보도된 기사다.
다나카 전 주지의 분노의 발언은 다분히 국내용으로 보인다. 무인사찰의 허술한 관리하에서 나가사키현 지정의 문화재인 관음사 불상이 도난당한 것도 큰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큰 문제를 야기시킨 데 대한 필사의 해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외교 무대에 오른 ‘약탈의 역사’
일본 측이 인터폴에 의뢰한 한국 절도단의 관음사 불상 절취사건은 역으로 일본의 과거 한국 문화재 약탈의 오랜 전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식으로 반전의 결과를 가져왔다. 대마도 작은 섬 안에 백수십여 구의 한국불상이 우글거린다는 걸 일본인들도 잘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불상이 대마도로 건너온 경위가 지금까지도 불명이다. 일본의 혁혁한 해외진출 역사의 그 원조가 되는 왜구의 존재를 약탈자로서 주목 받게 만든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나 임진왜란보다 2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14세기 고려 말부터 일본이 조직적으로 한국 문화재를 약탈해 온 ‘약탈의 역사’가 양국 외교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나카 전 주지는 전력을 다해 왜구의 약탈 혐의를 벗겨내고자 맹렬히 한국 측을 공격하고 있다. 한마디로 ‘적반하장’이라는 말이다. 다나카 전 주지는 다분히 일본 내 혐한기류에 기대는 인상마저도 주고 있다.
대마시의 교육위원회 문화재과 역시 ‘(불상이) 조선의 불교탄압 과정에서 반입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언론을 통해 밝혔다. 《뉴스위크》 일본판에 실린 관음상 관련 기사는, ‘다나카 전 주지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면서, ‘일본인들이 부석사 불상을 구제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종교적 차원의 대단한 뜻이기보다는, 헐값에 좋은 불상을 구했던 경우가 아니었을까?’라는 설명을 붙였다. 다나카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는 듯하다.(2013.3.25.자 《뉴스위크》 일본판, “대마의 슬픈 불상은 어떻게 구제될 것인가?”)
부석사 불상 논쟁에 무심한 일본 학계
이 사건 초기부터 일본의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고 않고 있다. 한국 측에서는 문명대 전 동국대 교수, 정영호 전 단국대 교수 등 원로학자들을 위시한 다수 전문가들이 불상의 약탈 여부와 처리방향을 둘러싸고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하고 있는 점과는 크게 대조를 보인다.
유구무언인가? 일본 학자들은 1972년 대마도 소재 문화재의 조사 보고서인 <대마미술>에서 한일 경계지역에 위치한 대마도에 한국 문화재가 산재하는 현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대부분 불에 타 파손된 대마도의 조선불상들이 “평상이 아닌 상황에서 유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완곡하게나마 약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다.
특히 기쿠다케 준이치(菊竹淳一) 교수는 부석사 불상이 관음사로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왜구에 의한 일방적 청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미 오래 전에 일본 학자들은 왜구의 한반도 문화재 약탈 가능성을 일정 부분 인정했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약탈논쟁에 뛰어들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본인 학자들이 침묵하는 보다 큰 이유는 부석사 불상을 포함하여 고려 후기의 불상이 그들의 관심 밖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기의 불상이 일본 불교예술에 다대한 영향을 끼친 데 비해, 고려불상은 일본 불교예술에 전혀 수용되지 못했다. 고려불화나 범종, 대장경이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경우이다.
고려불상, 특히 후기 고려불상이 환영받지 못했던 이유는 고려시대와 동시대인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에 일본 특유의 미의식이 생겼기 때문인 듯하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노송나무 목제불상이 상징하는 일본적 심미감을 토대로 한 독자적인 불교 조각예술이 발전했다. 이와 함께 고려후기 불상에서 엿보이는 원나라풍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고려후기의 불상은 한국과 일본에 확인된 것만 100여 구가 남아 있다. 이 중 30여 구가 일본에 존재하는데, 대마도, 규슈 등 서일본 지역에 몰려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고려후기의 불상은 일본불교의 입장에서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미술사적으로, 문화사적으로 일본 학계에 매력있는 주제 또한 아니었다.
極右 언론이 주도하는 일본 여론
학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부석사 불상의 약탈논의에는 일절 끼어들지 않고 있다. 오로지 도난품으로서 불상의 반환을 요구할 뿐이다. 일본의 언론 역시 한국 절도단들에 의한 불상의 도난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부 언론, 특히 일부 극우 언론은 이에 더해 다양한 논평을 통해 한국 측이 제기하는 불상의 약탈 가능성을 반박하며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들 극우 언론은 학자들의 객관적인 학술적 입장이 아니라, 다나카 전 주지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발언에 기대 다나카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식으로 일본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부석사 불상이 대마에 건너간 원인을 제공한 것은 조선의 불교탄압이다.
둘째, 부석사 불상은 한일 간 교량이었던 대마도와의 교류 또는 무역의 결과로 대마도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 것이며 약탈의 증거는 없다.
셋째, 불상이 어떠한 경위로 이전되었든 간에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한국은 일본에 여하한 것도 청구할 수 없다.
넷째, 부석사 불상을 일본에 반환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국제법 및 국내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일본 측 주장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역사적 기록과 학자들의 연구문헌에 근거하여 우선 다음의 사항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조선 초 불교탄압의 실상과 그로 인한 사찰과 불상의 파괴 정도
▲고려 말과 조선 초 대마도와 행한 교류 및 교역의 상황
▲고려 말과 조선 초 왜구의 침입과 서산 지역의 약탈 정황
▲왜구에 의한 부석사 불상의 약탈 가능성과 ‘약탈 증거’
여기서 시기를 고려 말과 조선 초로 한정한 것은 부석사 불상이 일본에 건너간 시기가 1330년에서 1527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기 때문이다. 1330년은 불상이 부석사에 봉안된 해이며, 1527년은 이 불상이 대마도 관음사에 존재한다고 처음 기록된 해이다. 즉, 관음사의 벽에 걸린 ‘당사(當寺)의 유래’라는 벽보에는 이 절이 대영6년(大永6년, 1526)에 창건되면서 이 관음상을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마도에 이 불상이 유래하게 된 사연을 말하는 최초의, 또한 유일한 기록이다.(정은우, <서일본지역의 고려불상과 부석사 동조관음보살좌상> 83쪽)
일본 언론은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로 유출된 배경으로 조선의 억불정책을 지목하며, 그 결과 수많은 불상이 파괴되고 유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의 抑佛정책은 메이지유신기의 廢佛毁釋과 동일?
2013년 3월 25일 자 《뉴스위크》 일본판은 조선의 억불정책을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하는 방편으로 메이지유신 초기에 일본에서 일어났던 폐불훼석(廢佛毁釋) 운동을 예로 들고 있다. 폐불훼석이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고를 단행한 일본이 국가종교로서 신도(神道)에 기반을 둔 강력한 천황제 확립을 위해 신도와 불교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대대적인 불교탄압과 불상파괴 운동이었다.
메이지 정부와 국학자, 신관들이 사주한 면도 있었던 폐불훼석의 광기(狂氣)가 불교문화재에 그치지 않고 전통문화재로까지 마구잡이로 번지게 되자 당황한 메이지 정부는 신불분리를 중지하고 강력한 전통문화재 보호조치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10여 년 계속되었던 폐불훼석 운동은 진정되었지만 많은 고사찰들이 회복하기 어려운 파손을 입었다.
이무렵 메이지 정부에 고용되어 있던 미국인 어니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와 그의 제자였던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등 저명한 미술사학자들은 폐불훼석의 와중에서 파괴위험에 처한 일본의 전통문화재 보호에 크게 진력했다. 이들은 또한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헐값에 구입하여 미국에 반출하기도 했다. 오늘날 보스턴 미술관의 일본 컬렉션이 이루어진 배경이다. 또한 이 시기 이들에 의해 일본 내 한국문화재도 다수 미국에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페놀로사의 활동을 소개하며 《뉴스위크》 일본판은 일본 정부나 불교계 그 누구도 보스턴 미술관에 대해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선각자들의 문화재 보호와 일본문화의 해외보급을 평가하고 있다는 논평을 게재했다.
조선의 抑佛崇儒는 종교투쟁이 아닌 사회경제정책
대마 관음사와 보스턴 미술관을 비교하며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비난하는 이러한 논조는 인터넷을 타고 일본인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일본의 입장으로 고착되고 있다. 대내적·대외적 홍보용으로 교묘한 논리임에 틀림없다. 과연 조선의 억불정책과 일본의 폐불훼석을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있는가?
고려의 호국불교는 고려가 멸망하며 그 사명을 다하였다.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자들은 불교 자체를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불교비판을 전개했다. 1398년 집필한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이 건국 초 대표적인 불교비판론이다.
이러한 척불론에 의하면 불교는 출가를 장려하기 때문에 충효라는 기본 인륜에 반할 뿐 아니라 윤회설이나 화복설과 같은 허탄한 교리는 혹세무민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찰의 비대한 규모와 사치스러운 행사, 승려의 무위도식은 국가의 재정을 파탄시킨 주범이므로 불교는 백성과 나라에 백해무익하다는 척불론에 입각하여 유학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불교정리 작업에 나섰다.
고려시대 대략 11종파와 3000개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태종 때 종파를 7종으로 축소하여 그 아래 242개의 사찰만을 남겨 두고 전국적으로 사찰이 혁파되었다. 세종 때는 다시 선교 양종하에 각 종파 18개, 도합 36개 사찰에 3770명의 승려만을 공인하고 그 외는 모두 혁파했다.
그렇지만 유학자들의 불교정리 작업은 통치영역에서 불교의 역할을 폐기한 것이지 신앙으로서 불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적 통치이념하에서도 일반 백성들의 불교신앙은 제한이 없었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많은 유학자들이 불교를 신봉했다.
더구나 태조나 세종, 세조와 같은 강력한 호불 임금들이 유학자들과 맞서 불교를 보호했는가 하면 왕실 여성들의 불사관행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물론 부녀자들의 사찰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지만 이는 풍속을 단속하려는 차원이었지 신앙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는 또한 사회제도로서의 불교의 역할을 일정 한도 인정했다. 조선 초 억불숭유정책은 국가경영을 위한 정치경제적 정책이었지 종교적·사상적·이념적 투쟁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찰·기물 파괴 엄격히 금지
혁파된 사찰이나 폐사가 그대로 방치된 것은 아니었다. 국가는 혁파사찰과 폐사의 건물과 자재, 기물을 철저하게 재활용하였고, 사찰 건물이나 재산의 임의적 파괴나 절도는 엄하게 처벌했다.
폐사의 재산 또한 국가에서 관리했다. 조선 초 명나라에 바치는 다량의 금, 은 조공물이나 화포 제작과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동철이 폐사에서 징발되었다. 폐사의 금, 은 기물이나, 당간지주(幢竿支柱), 때로는 동종 등이 징발대상이었는데, 동종의 경우 중요한 종은 보존되었고, 때로는 일본에 하사품으로도 필요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징발되어 파괴되었다.
사찰의 불상은 징발대상이 아니었고 철저히 보호를 받았다. 태종6년 242개 사찰을 남겨 두고 전국의 사찰이 혁파되었을 때, 혁파된 시골 사찰의 불상들이 일시 관아에 옮겨졌지만 태종의 명으로 도로 사찰에 옮겨졌다. 이 경우는 폐사가 아니라, 중들이 살고 있는 혁파사찰에서 불상을 빼앗아 온 경우이다. 승려들이 거주하지 않는 폐사의 불상은 인근 사찰에 옮겨서 보관하는 것이 관례가 된 듯하다.
실록의 기록을 본다면, 세종15년 창덕궁 문소전 내의 불당을 철거했을 때 불상을 정동의 흥천사로 보냈고, 단종1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화재가 났을 때 불상을 인근 사찰로 보내자는 논의가 있었다. 연산군 때에도 세검정의 장의사(莊義寺), 경복궁 내불당, 향림사 등의 불상을 인근 지역의 사찰로 옮기게 한 기록이 있는데, 무도하게 사찰을 폐쇄했던 연산군 때도 불상만큼은 보호를 받았다.
불상은 철저한 보호대상이었다
화기 제조의 필요상 동철의 비축을 위해, 폐사와 이례적으로 혁파사찰에서 금속제 기물과 동종이 징발된 데 이어 동불을 징발하자는 상소가 수차 있었지만 한 차례도 허가된 일이 없다. 지방관이 폐사에서 구해 바친 금·은·동불은 녹이지 않고 모두 예조에 보내 보관시켰다.
태종15년 지방관이 폐사의 동불을 바쳤을 때 태종은 “너무 심하다. 이제부터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승려로 하여금 고발케 하여 논죄하겠다”라고 하며 불상을 징발하는 데 심한 거부감을 보였다. 실제로 태종15년 동불을 파괴하여 군기감에 보내려 한 밀양부사와 이를 허락한 경상감사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모두 파직되었다.
간혹 실록에는 혁파된 사찰의 불상이나 종, 불구 등 기물을 폐기하자는 과격한 척불상소가 보이는데, 이것은 성리학자들의 원리주의적 관점에서 주장된 것이었지 실제로 이행된 것은 거의 없었다.
폐사가 늘어 가며 사찰에 남아 있던 동불을 도둑질하는 경우도 속출했는데, 이것은 불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동불을 녹여서 동철로 팔기 위한 것이다. 물론 절도죄로 엄히 다스렸고 때로는 관물절도죄로 처벌되기도 했다.
억불정책이 강화되고 있던 성종21년에는 폐사에 들어와 살던 승려가 불상을 훼손한 군수를 감사에게 고발한 사건이 있었고, 연산군6년에는 절에 난입하여 불상을 파괴한 유생 6명이 장형 100대의 중형을 받았고, 주모자는 3년 도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중종 때는 젊은 유생들이 작당하여 도성의 흥천사에서 보물을 도둑질하다 들키자 척불을 내세우며 사리각을 불태운 것이 번져서 사찰의 화재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물론 사건의 주동자는 고문까지 받으며 엄벌에 처해졌다.
조선시대 억불정책하에서 불교는 크게 박해를 받았으며 그 결과 사찰이 폐사에 이르고 사찰의 기물이 징발되거나 절취되어 다수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나라의 보호를 받았고, 특히 척불 군주라도 불상만큼은 보호했다.
일본의 언론이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에 오게 된 경위를 조선의 억불정책에서 구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무지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어쨌든 또 하나의 역사 왜곡임은 분명하다.
부석사 불상이 기증될 수 있었을까?
일본 언론이 조선의 억불정책하에서 폐기된 부석사 불상을 대마인들이 교류나 무역을 통해 가져갔을 것이라고 강변하는 반면, 1972년 대마도 문화재를 조사했던 일본 학자들은 대마도에 존재하는 수많은 불상들의 반입 경위에 대해 그 누구도 조선의 불교탄압을 거론하지 않았다. 오늘날 일본 언론과는 다른 학자적인 태도이다.
그 대신 이들은 일본의 대조선 창구였던 대마도의 해외교류와 무역활동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논조에 일부 한국인 학자들도 동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영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는 “안타깝게도 이 불상들을 일본이 약탈하거나 강탈해 갔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교류나 기증, 선물 등 불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건너갔을 개연성도 있는 것이다”라고 기증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는데(2013.5.10. 《동아일보》, 동아쟁론), 과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대마인들이 교류를 통해 부석사 불상을 기증받았을 가능성이 있는지, 당시 양국간 교류의 상황을 살펴보자.
부산에서 50km 떨어진 대마도를 통해 한국과 일본이 고대로부터 밀접한 인적·물적 교류를 가져왔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어느 시기에도 일본에 대해 국경이 개방된 적은 없었으며 민간 차원에서 교류와 무역이 자유롭게 행해진 적은 없었다. 오직 정부의 감시하에서 이루어지는 사절의 교환과 조공 형식을 빌린 공무역의 형식 내에서 제한된 교류가 가능했을 뿐이다.
고려와 일본의 외교
고려와 일본은 약 200년 동안 우호적 교류를 이어갔으나, 고려가 원에 복속되고 1274년과 1280년 두 차례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으로 양국의 교류는 단절되었다.
고려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고 70년이 흐른 1350년부터 대규모 군사화한 왜구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1392년 고려의 멸망까지 40여 년에 걸쳐 600회 이상 고려에 침공한 왜구는 고려 해안지역을 초토화한 데 이어 전국 곳곳을 유린했고, 수도 개경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1366년(공민왕15년) 막부에 금왜 (禁倭)사절을 파견하여 근 100여 년 만에 일본과 교류가 재개되었다.
왜구의 금압과 규슈의 반란군 진압이라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고려 정부와 일본의 막부 및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막부의 규슈 정부)는 고려가 멸망하는 1392년까지 40년간 빈번하게 사절을 교환했다. 이 시기 고려는 10여 명의 고위 문관을 교토와 규슈, 대마도에 파견하였고, 일본 또한 20여 명의 승려를 고려에 파견했다.
1392년 조선의 건국과 일본의 남북조 통일에 따라 1404년(태종4년) 조선 국왕과 일본 국왕(막부의 장군)이 각각 명나라의 책봉을 받으면서 양국은 대등한 교린관계에서 정식 교류를 시작했다. 조선은 고려 말 이래 왜구에 잡혀 간 한국인 포로송환과 계속되는 왜구의 금압이 절실하였는데, 조선 초, 일본 남북조 내란이 종식되었어도 규슈의 잔여 반란세력인 쇼니씨의 조종으로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에서 교역에 중점을 두었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은 통신사를 19회 파견했고, 일본은 ‘일본국왕사’라는 명칭으로 70회 사절을 파견했다. 조선의 통신사는 막부장군의 취임과 일본 황실의 경조사에 파견된 관리들이 주축이었는 데 반해 일본으로부터는 승려들과 함께 사절로 위장한 장사꾼들도 다수 내왕했다.
이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교류된 양국 사신들은 수개월에서 1~2년간 상대국에 체류하며 제한된 범위이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를 선도했다.
양국은 또한 사절 파견 시 다량의 선물을 교환했는데, 포로의 송환과 왜구의 금압이 절실했던 고려와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금, 은 그릇이나 인삼, 호피 등의 값비싼 선물을 주었으며, 별도로 대마도에는 쌀을 하사했다.
일본 역시 창・검・말 등 귀한 토산물을 전하며, 범종이나 대장경을 요청했다. 기록을 보면, 조선 전기에 일본 사절을 통해 5개의 범종이 전달되었고, 대장경은 무려 68회나 요청이 쇄도한 가운데 35질이 하사되었다. 막부 장군에게 20질, 규슈 호족인 오우치가에게 12질, 대마도주 종씨에게도 3질이 하사된 것이다.
이 무렵 일본은 남북조 내란으로 황폐해진 사찰을 재건하고 호국불교를 내세워 막부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대장경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은 1502년(연산군8년)을 끝으로 더 이상 대장경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 직후부터 전국시대의 내란에 휩싸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에서 약탈해 간 활자를 사용하여 직접 간행하였기 때문이다.
불상 기증 가능성 없어
일본을 회유하기 위해 가급적 일본의 요청에 응했던 고려와 조선의 입장을 이용해, 일본 사절들은 개인적으로도 불경이나 불화, 범종을 구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절들이 한반도를 왔다 가려면 대마도를 거쳐야만 했기에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150년간 대마도를 통해 상당한 문물교류가 있었던 상황에서 양국 간에 불상 하나가 건너간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교류에 의한 기증을 주장하는 논거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막연한 추측이다. 당시는 무로마치 막부의 선불교를 배경으로 일본 독자의 목조 불교조각이 한창 꽃을 피우던 시대로서 고려불은 수용될 여지가 없었다. 수십 회에 달하는 사절의 교류에도 불구하고 불상을 요청했거나 하사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설령 일본 측이 불상을 요구했다 하더라도 조선의 정부가 서산 부석사에서 불상을 징발하여 일본의 사절에게 주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인가?
국가로부터 하사되지 않았다면 대마에서 온 사신이 개인적으로 기증을 받았다는 가정도 당시 서산의 상황을 도외시하는 무책임한 주장이다. 무엇보다도 불상을 기증한다는 것은 대단한 우호의 증표이다. 기록이 없을 수 없으며, 기록이 유실되었다면 구전으로라도 남았을 것이다.
더구나 기증을 했다면 불에 탄 불상을 기증했다는 것인지, 기증 받은 후에 불에 탔는지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1352년부터 서해안을 침구한 왜구에 의해 1370년대에는 서산을 비롯하여 서해안 일대가 초토화되어 주민들이 살육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유랑을 거듭하다 태종16년에 이르러 겨우 복구가 되었던 서산이다. 왜구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당한 서산 주민들이 1330년 그들이 일치단결하여 영원히 모시려고 봉안했던 부석사 불상을 왜구의 당사자인 대마인에게 기증했을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서산 주민에 대한 실례가 아닌가? 상식을 무시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私的 매매 어려웠던 조선통신사
1972년 대마도 문화재를 조사했던 일본인 학자들은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로 건너온 경위가 기증보다는 교역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들도 기증이라고 볼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최근의 일본 언론도 교역을 강조하고 있다. 교역, 즉 매매에 의한 취득이라면 기록이 있을 필요가 없고, 암거래를 통했거나 헐값에 사취했거나 문제가 되지 않으며 거의 모든 경우, 구입자의 소유권이 두텁게 보호되기 때문에 소유권 분쟁에 휘말릴 염려가 없는 것이다.
1392년 일본의 남북조 내란이 수습되고 막부로부터 대마의 지배적 지위인 대마 슈고(守護)에 임명된 대마도주 소씨(宗氏)는 막부체제 안으로 편입되었지만 휘하 도민들은 여전히 조선 연해에서 해적질을 일삼고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궁핍을 면하기 위한 자구책일 뿐 아니라 대대로 전해 오는 가업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건국 이래 꾸준히 병력을 증강해 온 조선은 1419년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문제를 일거에 종결시켰다. 동시에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특권적인 교역권을 인정하여 왜구의 재발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했다. 도주에게 매년 쌀 2000석과 50척의 무역선을 허용했고 막부나 규슈 등 유력 호족이 보낸 선박 외에는 일본에서 오는 다른 모든 무역선에 대한 도항증명서를 발급케 하여 엄청난 경제적 이권을 주었다. 대마도를 교역의 중추로 삼아 다른 도항자들을 통제함으로써 대마도를 왜구에서 교역 중개자로 탈바꿈 시키려 한 것이다.
이어서 조선은 대마도 상인들의 무역 업무를 위해 삼포(三浦), 즉 제포(薺浦, 진해), 부산포(釜山浦), 염포(鹽浦, 울산)를 열고 매달 3회 개장을 허용했다. 교역은 삼포 외에 서울의 동평관(東平館・일본 사절의 숙소, 인사동에 위치)에서도 허용되었으며, 삼포에서 동평관에 이르는 3개의 상경로가 지정되었다. 즉, 1) 부산포→상주→이천→서울, 2)제포(진해)→청주→용인→서울, 3)염포(울산)→충주→양평→서울
삼포에는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도항자들은 20일간 체류할 수 있었지만 많은 수의 도항자들이 불법체류를 하면서 밀무역에 종사했다. 1440년(세종22년)에는 일본인 내항자 수가 6000명을 넘었고 삼포의 거주자는 3000여 명에 달해 삼포 주변은 공무역과 밀무역으로 북적거렸다. 왜관에는 십여 개의 사찰이 있어 수십 명의 승려가 거주했다 하니 상당한 일본 타운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역은 사절들이 가져온 진상품에 대한 하사품이라는 조공무역의 형식이지만, 실제로는 일인들이 가져와 삼포 교역장에 내놓은 물품을 조선 정부가 사 주는 것으로서, 조선 관원들의 엄격한 감시하에 매매가 이루어졌으며, 결제는 면포로 했다. 진상품이 많은 경우나 국가의 면포가 부족한 경우, 민간인의 매입을 허용하여 사무역이 가능했는데, 금, 은, 동전, 표피 등 금제품 거래를 감시하기 위해 관원이 별도로 배치되었다.
일본 사절들은 대부분 많은 진상품 외에도 사적 물품을 대거 가져와 왜관의 주변에는 사무역과 밀무역이 무성했다. 이에 반해 일본에 파견되는 조선의 통신사들은 사적인 무역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었고 사적 휴대품은 일정량의 포목에 한정되었다. 수호를 목적으로 파견되는 사절이 교역의 이윤을 탐하는 것은 군명(君命)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사헌부의 강력한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상 교역도 가능성 낮아
당시는 명나라의 해금정책과 조공무역 체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밀무역을 엄격히 금지하고 처단했다. 밀무역이 적발되는 경우 태형 100대에 물품과 수레, 배를 몰수하는 중벌에 처했다. 당시 조선은 필요한 물품은 명나라에서 수입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과의 조공무역은 왜구의 금지에 중점을 둔 것이고 교역 자체에는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수출품목은 곡물, 면포, 인삼, 약재, 서적 등 생필품이었기 때문에 과도한 수출을 막기 위해 사적 교역을 엄중히 단속했다. 반면에 일본은 주로 동남아와 유구에서 수입해 온 동, 은, 유황, 후추, 소목(蘇木・붉은염료의 원료 식물)을 팔아 큰 이익을 남겼기 때문에 교역활동에 공세적으로 나섰다.
이같이 수천 명의 일인 장사꾼이 북적대며, 사무역과 밀무역이 횡행하는 왜관에서 불상 하나쯤 거래되었다 하여 놀랄 일은 전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 역시 실상을 도외시한 안이한 추측일 뿐이다. 교역을 통해 부석사 불상이 대마로 건너갔다면, 조선인 누군가가 몰래 교역장 안으로 불상을 지고 가서 일본인과 거래했을 것이다.
당시 불상은 금제품에 들지는 않았으나 이는 원래 사찰에 속한 것이고 공인된 사찰이건 폐사이건, 사찰의 소유는 관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불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관물절도에 해당된다.
부피가 상당한 불상이 엄중한 감시가 따르는 왜관의 교역장에서 거래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 상인 누군가가 서산까지 찾아와서 불상을 사 갔든지, 아니면 조선인과 일본상인이 제3의 장소에서 만나 불상을 거래했다는 이야기인데,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고래로부터 척박한 땅에서 식량부족에 시달렸던 대마인들이다. 식량부족이야말로 그들을 해적질로 내몬 가장 큰 이유이며, 조선과의 무역에 목을 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대마인들이 조선과의 교역에서 생필품 대신 더 이상 인기가 없고 돈이 되지 않을 고려불상을 구입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가정이다.
결론은 약탈
헐값에 거저 얻었다 해도 비좁은 세견선에 싣고 대마로 수송하는 비용은 지불해야 할 것이다. 대마인들이 불상의 수요자가 아니고 단지 중개무역을 했을지 모른다는 가정도 모순이다. 고려 후기 불상은 대마에만 존재하는데 팔리지 않을 불상을 계속 수입했던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현재 대마도에 존재하는 백수십 개의 고려 및 조선 불상을 모두 교역으로 가져왔다면 왜관에서 불상의 거래가 대규모로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어느 기록에도 조선 초 양국 교역에서 불상이 교역품목이었고 불상이 거래되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교류나 교역을 통해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로 이전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마지막으로 왜구의 약탈 가능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대마도 관음사 주지로 30년간 재직하다가 장남에게 주지직을 물려준 관음사의 전 주지 다나카 세쓰코(田中節孝) 씨가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2013년 2월 26일 대전지법 민사부가 서산 부석사의 불상 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수용해 관음사에서 불상을 정당하게 취득했다는 것이 재판에서 확정될 때까지 불상의 반환을 금지한다는 판결을 내린 뒤 이틀 후에 보도된 기사다.
다나카 전 주지의 분노의 발언은 다분히 국내용으로 보인다. 무인사찰의 허술한 관리하에서 나가사키현 지정의 문화재인 관음사 불상이 도난당한 것도 큰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큰 문제를 야기시킨 데 대한 필사의 해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외교 무대에 오른 ‘약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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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세스코 前대마도 관음사 주지. |
일제 강점기나 임진왜란보다 2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14세기 고려 말부터 일본이 조직적으로 한국 문화재를 약탈해 온 ‘약탈의 역사’가 양국 외교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나카 전 주지는 전력을 다해 왜구의 약탈 혐의를 벗겨내고자 맹렬히 한국 측을 공격하고 있다. 한마디로 ‘적반하장’이라는 말이다. 다나카 전 주지는 다분히 일본 내 혐한기류에 기대는 인상마저도 주고 있다.
대마시의 교육위원회 문화재과 역시 ‘(불상이) 조선의 불교탄압 과정에서 반입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언론을 통해 밝혔다. 《뉴스위크》 일본판에 실린 관음상 관련 기사는, ‘다나카 전 주지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면서, ‘일본인들이 부석사 불상을 구제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종교적 차원의 대단한 뜻이기보다는, 헐값에 좋은 불상을 구했던 경우가 아니었을까?’라는 설명을 붙였다. 다나카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는 듯하다.(2013.3.25.자 《뉴스위크》 일본판, “대마의 슬픈 불상은 어떻게 구제될 것인가?”)
부석사 불상 논쟁에 무심한 일본 학계
이 사건 초기부터 일본의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고 않고 있다. 한국 측에서는 문명대 전 동국대 교수, 정영호 전 단국대 교수 등 원로학자들을 위시한 다수 전문가들이 불상의 약탈 여부와 처리방향을 둘러싸고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하고 있는 점과는 크게 대조를 보인다.
유구무언인가? 일본 학자들은 1972년 대마도 소재 문화재의 조사 보고서인 <대마미술>에서 한일 경계지역에 위치한 대마도에 한국 문화재가 산재하는 현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대부분 불에 타 파손된 대마도의 조선불상들이 “평상이 아닌 상황에서 유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완곡하게나마 약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다.
특히 기쿠다케 준이치(菊竹淳一) 교수는 부석사 불상이 관음사로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왜구에 의한 일방적 청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미 오래 전에 일본 학자들은 왜구의 한반도 문화재 약탈 가능성을 일정 부분 인정했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약탈논쟁에 뛰어들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본인 학자들이 침묵하는 보다 큰 이유는 부석사 불상을 포함하여 고려 후기의 불상이 그들의 관심 밖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기의 불상이 일본 불교예술에 다대한 영향을 끼친 데 비해, 고려불상은 일본 불교예술에 전혀 수용되지 못했다. 고려불화나 범종, 대장경이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경우이다.
고려불상, 특히 후기 고려불상이 환영받지 못했던 이유는 고려시대와 동시대인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에 일본 특유의 미의식이 생겼기 때문인 듯하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노송나무 목제불상이 상징하는 일본적 심미감을 토대로 한 독자적인 불교 조각예술이 발전했다. 이와 함께 고려후기 불상에서 엿보이는 원나라풍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고려후기의 불상은 한국과 일본에 확인된 것만 100여 구가 남아 있다. 이 중 30여 구가 일본에 존재하는데, 대마도, 규슈 등 서일본 지역에 몰려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고려후기의 불상은 일본불교의 입장에서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미술사적으로, 문화사적으로 일본 학계에 매력있는 주제 또한 아니었다.
極右 언론이 주도하는 일본 여론
학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부석사 불상의 약탈논의에는 일절 끼어들지 않고 있다. 오로지 도난품으로서 불상의 반환을 요구할 뿐이다. 일본의 언론 역시 한국 절도단들에 의한 불상의 도난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부 언론, 특히 일부 극우 언론은 이에 더해 다양한 논평을 통해 한국 측이 제기하는 불상의 약탈 가능성을 반박하며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들 극우 언론은 학자들의 객관적인 학술적 입장이 아니라, 다나카 전 주지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발언에 기대 다나카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식으로 일본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부석사 불상이 대마에 건너간 원인을 제공한 것은 조선의 불교탄압이다.
둘째, 부석사 불상은 한일 간 교량이었던 대마도와의 교류 또는 무역의 결과로 대마도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 것이며 약탈의 증거는 없다.
셋째, 불상이 어떠한 경위로 이전되었든 간에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한국은 일본에 여하한 것도 청구할 수 없다.
넷째, 부석사 불상을 일본에 반환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국제법 및 국내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일본 측 주장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역사적 기록과 학자들의 연구문헌에 근거하여 우선 다음의 사항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조선 초 불교탄압의 실상과 그로 인한 사찰과 불상의 파괴 정도
▲고려 말과 조선 초 대마도와 행한 교류 및 교역의 상황
▲고려 말과 조선 초 왜구의 침입과 서산 지역의 약탈 정황
▲왜구에 의한 부석사 불상의 약탈 가능성과 ‘약탈 증거’
여기서 시기를 고려 말과 조선 초로 한정한 것은 부석사 불상이 일본에 건너간 시기가 1330년에서 1527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기 때문이다. 1330년은 불상이 부석사에 봉안된 해이며, 1527년은 이 불상이 대마도 관음사에 존재한다고 처음 기록된 해이다. 즉, 관음사의 벽에 걸린 ‘당사(當寺)의 유래’라는 벽보에는 이 절이 대영6년(大永6년, 1526)에 창건되면서 이 관음상을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마도에 이 불상이 유래하게 된 사연을 말하는 최초의, 또한 유일한 기록이다.(정은우, <서일본지역의 고려불상과 부석사 동조관음보살좌상> 83쪽)
일본 언론은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로 유출된 배경으로 조선의 억불정책을 지목하며, 그 결과 수많은 불상이 파괴되고 유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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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쿠라 덴신이 보스턴 미술관에 기증한 목조미륵보살 입상(142.2 x 62.2 x 53.3cm). 1189년 가이케이(快慶·12세기 후반 일본승려) 작. 원래는 나라현 고후쿠지(興福寺) 소장. 불상의 복장물로 가이케이가 필사한 경전 2권이 있음. |
메이지 정부와 국학자, 신관들이 사주한 면도 있었던 폐불훼석의 광기(狂氣)가 불교문화재에 그치지 않고 전통문화재로까지 마구잡이로 번지게 되자 당황한 메이지 정부는 신불분리를 중지하고 강력한 전통문화재 보호조치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10여 년 계속되었던 폐불훼석 운동은 진정되었지만 많은 고사찰들이 회복하기 어려운 파손을 입었다.
이무렵 메이지 정부에 고용되어 있던 미국인 어니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와 그의 제자였던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등 저명한 미술사학자들은 폐불훼석의 와중에서 파괴위험에 처한 일본의 전통문화재 보호에 크게 진력했다. 이들은 또한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헐값에 구입하여 미국에 반출하기도 했다. 오늘날 보스턴 미술관의 일본 컬렉션이 이루어진 배경이다. 또한 이 시기 이들에 의해 일본 내 한국문화재도 다수 미국에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페놀로사의 활동을 소개하며 《뉴스위크》 일본판은 일본 정부나 불교계 그 누구도 보스턴 미술관에 대해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선각자들의 문화재 보호와 일본문화의 해외보급을 평가하고 있다는 논평을 게재했다.
조선의 抑佛崇儒는 종교투쟁이 아닌 사회경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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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놀로사로부터 구입한 C. Weld가 보스턴 박물관에 매각한 14세기 고려불화 <치성광여래왕림도(熾星光如來往臨圖)>. 비단에 채색(124.4 x 54.8 cm). |
고려의 호국불교는 고려가 멸망하며 그 사명을 다하였다.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자들은 불교 자체를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불교비판을 전개했다. 1398년 집필한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이 건국 초 대표적인 불교비판론이다.
이러한 척불론에 의하면 불교는 출가를 장려하기 때문에 충효라는 기본 인륜에 반할 뿐 아니라 윤회설이나 화복설과 같은 허탄한 교리는 혹세무민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찰의 비대한 규모와 사치스러운 행사, 승려의 무위도식은 국가의 재정을 파탄시킨 주범이므로 불교는 백성과 나라에 백해무익하다는 척불론에 입각하여 유학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불교정리 작업에 나섰다.
고려시대 대략 11종파와 3000개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태종 때 종파를 7종으로 축소하여 그 아래 242개의 사찰만을 남겨 두고 전국적으로 사찰이 혁파되었다. 세종 때는 다시 선교 양종하에 각 종파 18개, 도합 36개 사찰에 3770명의 승려만을 공인하고 그 외는 모두 혁파했다.
그렇지만 유학자들의 불교정리 작업은 통치영역에서 불교의 역할을 폐기한 것이지 신앙으로서 불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적 통치이념하에서도 일반 백성들의 불교신앙은 제한이 없었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많은 유학자들이 불교를 신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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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불씨잡변》 목판본 1책(34.2 x 21.8 cm). 1456년 간행, 미국 버클리 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리치먼드 문고) 소장. 국내에는 원본이 없음. |
혁파된 사찰이나 폐사가 그대로 방치된 것은 아니었다. 국가는 혁파사찰과 폐사의 건물과 자재, 기물을 철저하게 재활용하였고, 사찰 건물이나 재산의 임의적 파괴나 절도는 엄하게 처벌했다.
폐사의 재산 또한 국가에서 관리했다. 조선 초 명나라에 바치는 다량의 금, 은 조공물이나 화포 제작과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동철이 폐사에서 징발되었다. 폐사의 금, 은 기물이나, 당간지주(幢竿支柱), 때로는 동종 등이 징발대상이었는데, 동종의 경우 중요한 종은 보존되었고, 때로는 일본에 하사품으로도 필요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징발되어 파괴되었다.
사찰의 불상은 징발대상이 아니었고 철저히 보호를 받았다. 태종6년 242개 사찰을 남겨 두고 전국의 사찰이 혁파되었을 때, 혁파된 시골 사찰의 불상들이 일시 관아에 옮겨졌지만 태종의 명으로 도로 사찰에 옮겨졌다. 이 경우는 폐사가 아니라, 중들이 살고 있는 혁파사찰에서 불상을 빼앗아 온 경우이다. 승려들이 거주하지 않는 폐사의 불상은 인근 사찰에 옮겨서 보관하는 것이 관례가 된 듯하다.
실록의 기록을 본다면, 세종15년 창덕궁 문소전 내의 불당을 철거했을 때 불상을 정동의 흥천사로 보냈고, 단종1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화재가 났을 때 불상을 인근 사찰로 보내자는 논의가 있었다. 연산군 때에도 세검정의 장의사(莊義寺), 경복궁 내불당, 향림사 등의 불상을 인근 지역의 사찰로 옮기게 한 기록이 있는데, 무도하게 사찰을 폐쇄했던 연산군 때도 불상만큼은 보호를 받았다.
불상은 철저한 보호대상이었다
화기 제조의 필요상 동철의 비축을 위해, 폐사와 이례적으로 혁파사찰에서 금속제 기물과 동종이 징발된 데 이어 동불을 징발하자는 상소가 수차 있었지만 한 차례도 허가된 일이 없다. 지방관이 폐사에서 구해 바친 금·은·동불은 녹이지 않고 모두 예조에 보내 보관시켰다.
태종15년 지방관이 폐사의 동불을 바쳤을 때 태종은 “너무 심하다. 이제부터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승려로 하여금 고발케 하여 논죄하겠다”라고 하며 불상을 징발하는 데 심한 거부감을 보였다. 실제로 태종15년 동불을 파괴하여 군기감에 보내려 한 밀양부사와 이를 허락한 경상감사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모두 파직되었다.
간혹 실록에는 혁파된 사찰의 불상이나 종, 불구 등 기물을 폐기하자는 과격한 척불상소가 보이는데, 이것은 성리학자들의 원리주의적 관점에서 주장된 것이었지 실제로 이행된 것은 거의 없었다.
폐사가 늘어 가며 사찰에 남아 있던 동불을 도둑질하는 경우도 속출했는데, 이것은 불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동불을 녹여서 동철로 팔기 위한 것이다. 물론 절도죄로 엄히 다스렸고 때로는 관물절도죄로 처벌되기도 했다.
억불정책이 강화되고 있던 성종21년에는 폐사에 들어와 살던 승려가 불상을 훼손한 군수를 감사에게 고발한 사건이 있었고, 연산군6년에는 절에 난입하여 불상을 파괴한 유생 6명이 장형 100대의 중형을 받았고, 주모자는 3년 도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중종 때는 젊은 유생들이 작당하여 도성의 흥천사에서 보물을 도둑질하다 들키자 척불을 내세우며 사리각을 불태운 것이 번져서 사찰의 화재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물론 사건의 주동자는 고문까지 받으며 엄벌에 처해졌다.
조선시대 억불정책하에서 불교는 크게 박해를 받았으며 그 결과 사찰이 폐사에 이르고 사찰의 기물이 징발되거나 절취되어 다수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나라의 보호를 받았고, 특히 척불 군주라도 불상만큼은 보호했다.
일본의 언론이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에 오게 된 경위를 조선의 억불정책에서 구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무지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어쨌든 또 하나의 역사 왜곡임은 분명하다.
부석사 불상이 기증될 수 있었을까?
일본 언론이 조선의 억불정책하에서 폐기된 부석사 불상을 대마인들이 교류나 무역을 통해 가져갔을 것이라고 강변하는 반면, 1972년 대마도 문화재를 조사했던 일본 학자들은 대마도에 존재하는 수많은 불상들의 반입 경위에 대해 그 누구도 조선의 불교탄압을 거론하지 않았다. 오늘날 일본 언론과는 다른 학자적인 태도이다.
그 대신 이들은 일본의 대조선 창구였던 대마도의 해외교류와 무역활동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논조에 일부 한국인 학자들도 동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영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는 “안타깝게도 이 불상들을 일본이 약탈하거나 강탈해 갔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교류나 기증, 선물 등 불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건너갔을 개연성도 있는 것이다”라고 기증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는데(2013.5.10. 《동아일보》, 동아쟁론), 과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대마인들이 교류를 통해 부석사 불상을 기증받았을 가능성이 있는지, 당시 양국간 교류의 상황을 살펴보자.
부산에서 50km 떨어진 대마도를 통해 한국과 일본이 고대로부터 밀접한 인적·물적 교류를 가져왔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어느 시기에도 일본에 대해 국경이 개방된 적은 없었으며 민간 차원에서 교류와 무역이 자유롭게 행해진 적은 없었다. 오직 정부의 감시하에서 이루어지는 사절의 교환과 조공 형식을 빌린 공무역의 형식 내에서 제한된 교류가 가능했을 뿐이다.
고려와 일본의 외교
고려와 일본은 약 200년 동안 우호적 교류를 이어갔으나, 고려가 원에 복속되고 1274년과 1280년 두 차례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으로 양국의 교류는 단절되었다.
고려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고 70년이 흐른 1350년부터 대규모 군사화한 왜구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1392년 고려의 멸망까지 40여 년에 걸쳐 600회 이상 고려에 침공한 왜구는 고려 해안지역을 초토화한 데 이어 전국 곳곳을 유린했고, 수도 개경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1366년(공민왕15년) 막부에 금왜 (禁倭)사절을 파견하여 근 100여 년 만에 일본과 교류가 재개되었다.
왜구의 금압과 규슈의 반란군 진압이라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고려 정부와 일본의 막부 및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막부의 규슈 정부)는 고려가 멸망하는 1392년까지 40년간 빈번하게 사절을 교환했다. 이 시기 고려는 10여 명의 고위 문관을 교토와 규슈, 대마도에 파견하였고, 일본 또한 20여 명의 승려를 고려에 파견했다.
1392년 조선의 건국과 일본의 남북조 통일에 따라 1404년(태종4년) 조선 국왕과 일본 국왕(막부의 장군)이 각각 명나라의 책봉을 받으면서 양국은 대등한 교린관계에서 정식 교류를 시작했다. 조선은 고려 말 이래 왜구에 잡혀 간 한국인 포로송환과 계속되는 왜구의 금압이 절실하였는데, 조선 초, 일본 남북조 내란이 종식되었어도 규슈의 잔여 반란세력인 쇼니씨의 조종으로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에서 교역에 중점을 두었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은 통신사를 19회 파견했고, 일본은 ‘일본국왕사’라는 명칭으로 70회 사절을 파견했다. 조선의 통신사는 막부장군의 취임과 일본 황실의 경조사에 파견된 관리들이 주축이었는 데 반해 일본으로부터는 승려들과 함께 사절로 위장한 장사꾼들도 다수 내왕했다.
이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교류된 양국 사신들은 수개월에서 1~2년간 상대국에 체류하며 제한된 범위이지만 양국의 문화교류를 선도했다.
양국은 또한 사절 파견 시 다량의 선물을 교환했는데, 포로의 송환과 왜구의 금압이 절실했던 고려와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금, 은 그릇이나 인삼, 호피 등의 값비싼 선물을 주었으며, 별도로 대마도에는 쌀을 하사했다.
일본 역시 창・검・말 등 귀한 토산물을 전하며, 범종이나 대장경을 요청했다. 기록을 보면, 조선 전기에 일본 사절을 통해 5개의 범종이 전달되었고, 대장경은 무려 68회나 요청이 쇄도한 가운데 35질이 하사되었다. 막부 장군에게 20질, 규슈 호족인 오우치가에게 12질, 대마도주 종씨에게도 3질이 하사된 것이다.
이 무렵 일본은 남북조 내란으로 황폐해진 사찰을 재건하고 호국불교를 내세워 막부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대장경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은 1502년(연산군8년)을 끝으로 더 이상 대장경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 직후부터 전국시대의 내란에 휩싸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에서 약탈해 간 활자를 사용하여 직접 간행하였기 때문이다.
불상 기증 가능성 없어
일본을 회유하기 위해 가급적 일본의 요청에 응했던 고려와 조선의 입장을 이용해, 일본 사절들은 개인적으로도 불경이나 불화, 범종을 구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절들이 한반도를 왔다 가려면 대마도를 거쳐야만 했기에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150년간 대마도를 통해 상당한 문물교류가 있었던 상황에서 양국 간에 불상 하나가 건너간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교류에 의한 기증을 주장하는 논거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막연한 추측이다. 당시는 무로마치 막부의 선불교를 배경으로 일본 독자의 목조 불교조각이 한창 꽃을 피우던 시대로서 고려불은 수용될 여지가 없었다. 수십 회에 달하는 사절의 교류에도 불구하고 불상을 요청했거나 하사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설령 일본 측이 불상을 요구했다 하더라도 조선의 정부가 서산 부석사에서 불상을 징발하여 일본의 사절에게 주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인가?
국가로부터 하사되지 않았다면 대마에서 온 사신이 개인적으로 기증을 받았다는 가정도 당시 서산의 상황을 도외시하는 무책임한 주장이다. 무엇보다도 불상을 기증한다는 것은 대단한 우호의 증표이다. 기록이 없을 수 없으며, 기록이 유실되었다면 구전으로라도 남았을 것이다.
더구나 기증을 했다면 불에 탄 불상을 기증했다는 것인지, 기증 받은 후에 불에 탔는지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1352년부터 서해안을 침구한 왜구에 의해 1370년대에는 서산을 비롯하여 서해안 일대가 초토화되어 주민들이 살육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유랑을 거듭하다 태종16년에 이르러 겨우 복구가 되었던 서산이다. 왜구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당한 서산 주민들이 1330년 그들이 일치단결하여 영원히 모시려고 봉안했던 부석사 불상을 왜구의 당사자인 대마인에게 기증했을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서산 주민에 대한 실례가 아닌가? 상식을 무시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私的 매매 어려웠던 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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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도> (58.5x133cm, 종이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소장, 1783년 작. 부산포 초량왜관. 왜관 북쪽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연향대청이 있고, 그 뒤에 왜관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다. 제10회 통신사(1764, 정사는 조엄)에 수행했던 변박(卞璞)의 작품. |
1392년 일본의 남북조 내란이 수습되고 막부로부터 대마의 지배적 지위인 대마 슈고(守護)에 임명된 대마도주 소씨(宗氏)는 막부체제 안으로 편입되었지만 휘하 도민들은 여전히 조선 연해에서 해적질을 일삼고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궁핍을 면하기 위한 자구책일 뿐 아니라 대대로 전해 오는 가업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건국 이래 꾸준히 병력을 증강해 온 조선은 1419년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문제를 일거에 종결시켰다. 동시에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특권적인 교역권을 인정하여 왜구의 재발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했다. 도주에게 매년 쌀 2000석과 50척의 무역선을 허용했고 막부나 규슈 등 유력 호족이 보낸 선박 외에는 일본에서 오는 다른 모든 무역선에 대한 도항증명서를 발급케 하여 엄청난 경제적 이권을 주었다. 대마도를 교역의 중추로 삼아 다른 도항자들을 통제함으로써 대마도를 왜구에서 교역 중개자로 탈바꿈 시키려 한 것이다.
이어서 조선은 대마도 상인들의 무역 업무를 위해 삼포(三浦), 즉 제포(薺浦, 진해), 부산포(釜山浦), 염포(鹽浦, 울산)를 열고 매달 3회 개장을 허용했다. 교역은 삼포 외에 서울의 동평관(東平館・일본 사절의 숙소, 인사동에 위치)에서도 허용되었으며, 삼포에서 동평관에 이르는 3개의 상경로가 지정되었다. 즉, 1) 부산포→상주→이천→서울, 2)제포(진해)→청주→용인→서울, 3)염포(울산)→충주→양평→서울
삼포에는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도항자들은 20일간 체류할 수 있었지만 많은 수의 도항자들이 불법체류를 하면서 밀무역에 종사했다. 1440년(세종22년)에는 일본인 내항자 수가 6000명을 넘었고 삼포의 거주자는 3000여 명에 달해 삼포 주변은 공무역과 밀무역으로 북적거렸다. 왜관에는 십여 개의 사찰이 있어 수십 명의 승려가 거주했다 하니 상당한 일본 타운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역은 사절들이 가져온 진상품에 대한 하사품이라는 조공무역의 형식이지만, 실제로는 일인들이 가져와 삼포 교역장에 내놓은 물품을 조선 정부가 사 주는 것으로서, 조선 관원들의 엄격한 감시하에 매매가 이루어졌으며, 결제는 면포로 했다. 진상품이 많은 경우나 국가의 면포가 부족한 경우, 민간인의 매입을 허용하여 사무역이 가능했는데, 금, 은, 동전, 표피 등 금제품 거래를 감시하기 위해 관원이 별도로 배치되었다.
일본 사절들은 대부분 많은 진상품 외에도 사적 물품을 대거 가져와 왜관의 주변에는 사무역과 밀무역이 무성했다. 이에 반해 일본에 파견되는 조선의 통신사들은 사적인 무역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었고 사적 휴대품은 일정량의 포목에 한정되었다. 수호를 목적으로 파견되는 사절이 교역의 이윤을 탐하는 것은 군명(君命)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사헌부의 강력한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상 교역도 가능성 낮아
당시는 명나라의 해금정책과 조공무역 체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밀무역을 엄격히 금지하고 처단했다. 밀무역이 적발되는 경우 태형 100대에 물품과 수레, 배를 몰수하는 중벌에 처했다. 당시 조선은 필요한 물품은 명나라에서 수입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과의 조공무역은 왜구의 금지에 중점을 둔 것이고 교역 자체에는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수출품목은 곡물, 면포, 인삼, 약재, 서적 등 생필품이었기 때문에 과도한 수출을 막기 위해 사적 교역을 엄중히 단속했다. 반면에 일본은 주로 동남아와 유구에서 수입해 온 동, 은, 유황, 후추, 소목(蘇木・붉은염료의 원료 식물)을 팔아 큰 이익을 남겼기 때문에 교역활동에 공세적으로 나섰다.
이같이 수천 명의 일인 장사꾼이 북적대며, 사무역과 밀무역이 횡행하는 왜관에서 불상 하나쯤 거래되었다 하여 놀랄 일은 전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 역시 실상을 도외시한 안이한 추측일 뿐이다. 교역을 통해 부석사 불상이 대마로 건너갔다면, 조선인 누군가가 몰래 교역장 안으로 불상을 지고 가서 일본인과 거래했을 것이다.
당시 불상은 금제품에 들지는 않았으나 이는 원래 사찰에 속한 것이고 공인된 사찰이건 폐사이건, 사찰의 소유는 관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불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관물절도에 해당된다.
부피가 상당한 불상이 엄중한 감시가 따르는 왜관의 교역장에서 거래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 상인 누군가가 서산까지 찾아와서 불상을 사 갔든지, 아니면 조선인과 일본상인이 제3의 장소에서 만나 불상을 거래했다는 이야기인데,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고래로부터 척박한 땅에서 식량부족에 시달렸던 대마인들이다. 식량부족이야말로 그들을 해적질로 내몬 가장 큰 이유이며, 조선과의 무역에 목을 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대마인들이 조선과의 교역에서 생필품 대신 더 이상 인기가 없고 돈이 되지 않을 고려불상을 구입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가정이다.
결론은 약탈
헐값에 거저 얻었다 해도 비좁은 세견선에 싣고 대마로 수송하는 비용은 지불해야 할 것이다. 대마인들이 불상의 수요자가 아니고 단지 중개무역을 했을지 모른다는 가정도 모순이다. 고려 후기 불상은 대마에만 존재하는데 팔리지 않을 불상을 계속 수입했던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현재 대마도에 존재하는 백수십 개의 고려 및 조선 불상을 모두 교역으로 가져왔다면 왜관에서 불상의 거래가 대규모로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어느 기록에도 조선 초 양국 교역에서 불상이 교역품목이었고 불상이 거래되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교류나 교역을 통해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로 이전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마지막으로 왜구의 약탈 가능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