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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國체험 100년 특별연재] 九天을 울린 영적 파워 - 大陸을 깨운 半島의 함성

3·1운동의 국제파장 (下)

허문도    asadalm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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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文道
⊙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駐日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정무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는 항일민족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일본사람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범선과는 다른 검은 증기선 네 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도쿄만에 나타난 미국 해군제독 페리, 그가 일본사(史)의 근대를 열어젖혔다.
 
  이때로부터 딱 15년 후인 1868년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있었다.
 
  함대가 미우라(三浦)반도의 남단을 돌아 도쿄만 입구의 우라가(浦賀) 수도에 닻을 내린 것은 1853년 6월 3일(양력 7월 8일). 이날 저녁 하늘에 이변이 있었다. 초사흘이었으니까 달은 일찍 졌다. <페리 제독 일본원정기>(土屋喬雄, 玉城 肇역, 岩波文庫)에는 이날 밤 당직장교의 천문 관측이 기록되어 있다. 심야로부터 새벽 4시경까지 너무도 뚜렷한 유성(流星)현상이 있었다. ‘그것은 서남방에 나타나서 천공 일면을 비췄다. 함대의 둥근 원주나 돛, 선체가 마치 각 함정에서 일제히 청색 불빛을 태워 비추듯이 환하게 빛이 났다. 그 섬광은 서남방으로부터, 수평선 위, 약 15도 각도로 떠서 동북쪽을 향해 긴 간격을 일직선으로 달려, 그러고는 점점 해면으로 내려와 마지막엔 사라졌다. 그 형체는 붉은 쐐기 같은 꼬리를 가진 커다란 푸른색 공이었다. 그 꼬리는 확실히 눈에 들어왔는데, 폭발과 동시에 확 흩어지는 불꽃놀이 불가루처럼 작렬하는 미립물체였다.’
 
 
  태평양의 落星으로 하늘이 예고한 것은
 
도쿄만.
  이 현상에 대한 페리 제독의 소감이 <원정기>에 보인다.
 
  “고대인(古代人)이라면 이 천공(天空)의 이변을, 계획하고 있는 사업에 대한 길조(吉兆)라고 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특이하면서도 고립되어 있는 인민을 문명국민과 친하게 하려는 우리 기도가 유혈(流血)의 참사 없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늘에 빌었기 때문으로 풀이해도 될 것이다.”
 
  페리 제독의 소감 속에는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 있다. ‘… (일본)인민을 문명국민과 친하게 하려는 우리 기도가 유혈의 참사 없이 성공할 수 있도록’이라는 대목이다. 천문해석 끝에 딸린 얘기니까, 저의가 끼어들 틈이 없는 얘기로 들린다. 미국인들이 일본을 개명시키려 했던 그 초심(初心)이 아편전쟁의 영국 등과는 달리, 퓨리턴 컬처의 자선행 같은 것이었음을 알게 한다.
 
  미국인들의 이 초심은 그대로 실행에 옮겨졌고, 그 결과는 지난호에서 보았던 예일대학의 일본인 교수 아사카와(朝河貫一)의 1900년대 초, 메이지말기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여기 다시 들먹이는 것은, 스승 미국의 일본개국을 일본은 함포외교라 하면서, 이것을 그대로 흉내 내려고 든 것이 1875년 강화도 앞바다의 일본군함 운요호 사건이었고 그 끝에 조선 개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함포외교라 해도 미국은 자선행이었고, 일본은 침략행이었다.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에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읊어댔지만, 주지하는바 그것은 국권박탈까지 가는 조선 침략의 시발점이었다.
 
  점성술을 알지 못하고, 또 그런 시대가 아니라 해도, 페리함대의 일본 첫날밤, 함대를 비추면서 태평양으로 사라진 낙성의 찬란한 광망을 그냥 스쳐 지나갈 수는 없다. 붉은 꼬리를 가진 휘황한 푸른 별의 낙하,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늘은 때로 역사 속으로 신호를 넣기도 한다는 말인가.
 
  150여 년이나 지난 지금은, 고풍스럽게 그날 밤의 낙성이 태평양전쟁의 예고였다고 하든가, 페리함대의 시포(時砲)와 함께 일본에 하늘의 불(原爆)이 내리는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계시였다고 하든가, 당송(唐宋)의 원천강(袁天綱)이나 소강절(邵康節)이라도 옆에 있으면 물어보고 싶은 대목이다.
 
  페리 제독의 포부에서 보듯이 미국·일본의 관계는 미국 쪽의 일방적 자선행으로 시작되었다. 사람 좋은 미국사람들로서는 서양문물을 잘도 흡수하고, 싹싹하고 바지런한 일본사람들이 기특하고 대견했을 것이다. 웬만한 비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사랑스런 제자를 대하는 스승의 자세가 미국사람들이었다. 일본을 두고, 침략성이라든지, 잔학성이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다.
 
 
  미국이 만주에 발 못 붙이게 한 小村 외상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제독.
  이런 일도 있었다. 러일전쟁이 한고비 넘기고 강화회담을 하던 1905년 중반, 미국의 철도왕 해리먼이 일본으로 와서는, 러일전 후에 러시아로부터 일본으로 넘어올 만주철도를 공동 경영하자고 했다. 자본이 취약했던 일본은 가쓰라(桂) 수상이 선뜻 가(假)약정을 맺었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고무라(小村壽太郞) 외상이 펄쩍 뛰었다. 피땀 흘려 손에 넣은 만철(滿鐵)에 왜 미국발을 들여놓게 하느냐고, 수상을 닦아세웠다. 태평양도 다 건너지 않은 해리먼 뒤꼭지에다 대고 일본은 약정을 파기해 버렸다. 그때에 미국의 만주 진출을 받았으면, 중국침략의 길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요새 와서야 고무라를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이런 일이 있어도 미국은 일본을 계속 밀어, 조선을 식민지로 깔고 앉게 하고, 제1차 대전을 호기로 알아, 21개조 요구다, 청도 점령이다로 중국 침략의 발톱을 내밀어도, 일본의 작태를 문제 삼지 않았다.
 
  미국의 일본을 보는 시각전환의 계기는 1919년의 3·1운동이었던 것을 지난 3월호에서 보았다. 미국은 더 이상 일본을 기특한 생도로 보지 않고, 침략성과 잔학성을 가진 문제아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이 문제아 일본을 선도(善導)코자 한 회의가 1921년 말부터 1922년 초까지의 워싱턴회의였던 것 같다.
 
  이때에도 미국은 일본을 많이 배려했다. 일본의 요구대로, 한국 문제 거론을 일절 배제하고, 침략성 소거에는 압력의 모양을 취하지 않았다. 일본은 내놓으라는 것 다 내놓고 중국침략은 아예 않기로 다짐했지만(9개국 조약), 일본이 자원하는 모양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워싱턴회의를 통해 미국의 일본견제를 고대하던 사람들이 실망하고 낙망하는 장이 벌어졌다. 독립운동의 많은 지사들도 이때에 미국, 상해 양쪽에서 모두 전열에서 떠나갔다.
 
  미국은 다시 한 번 일본을 믿어 보려 했다. 3·1운동으로 생긴 대일 의구심을 워싱턴회의를 통해 미국은 덮었고 일본은 엎드렸다. 아주 예외적으로 일본이 중국대륙을 건드리지 않는 수년간의 소강이 있었다.
 
  제국일본은 소화공황(昭和恐慌), 세계공황의 바람이 불자 침략의 본성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만주사변으로 워싱턴 체제를 미련없이 깨고 나온 것이다. 일본에 대해 미국이 3·1운동을 통해 가졌다가 일단 덮었던 문제아 인식은 이제 침략자, 문명질서의 파괴자로 확고해졌다. 침략자에 대한 응징준비가 안 된 미국은, 침략의 결과를 인정치 않겠다(스팀슨 독트린)는 얘기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독트린은 시간이 갈수록 일본의 운명을 가두는 철의 울타리가 되었다. 그동안의 워싱턴 체제에의 일본의 순응이 기만책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미국의 배신감은 동시에 깊어갔다.
 
  그리하여 세계 평화 앞에 책임지려는 입장에 있는 미국사람들은 일찌감치 일본에 대한 응징전쟁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초반에 이미 그랬다. 이는 3·1운동의 영적(靈的) 파워가 대일(對日) 자선행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착해 빠진 미국인의 잠을 깨우지 않았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3·1의 의미를 오늘에 묻고 있는 독도
 
일본인이 그린 페리의 함선. 일본인들은 서양 함선을 흑선(黑船)이라고 불렀다.
  3·1운동의 중국대륙에의 영향은 보다 직접적이고, 크고 깊었던 것 같다.
 
  그전에, 오늘도 우리 앞에 있는 3·1운동의 이미지를 한번 그려 본다.
 
  지난 3월 말에 일본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땅으로 하여 가르치게 되었다고, 정부는 일본대사를 불러 유감을 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등 분노를 터뜨렸다. 우리는 독도 문제로 분노하는 민족이다. 조선사람이 혈연과 지연을 넘어 근대적 의미의 민족(네이션)이 되는 것은 3·1운동을 통해서라고 앞에서 보았다.
 
  오늘의 일본이 독도를 건드리는 한, 일본은 조선 침략전쟁인 러일전쟁(독도는 이때 작전용으로 강점) 수준으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바른 길을 가게 해야 할 책무를 우리 민족이 내려놓을 수 없는 한, 3·1의 의미는 금일적이다. 오늘도 우리 앞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만세시위는 향락과 편의가 상식인 오늘, 정보화사회의 한복판에서, 내 하나가 그 속에 숨 쉬고 있는 현실로서는 마음속에 그리기조차 어렵다. 그날, 젊은 남녀, 여고생, 바지·저고리 입은 우리 부조들이, 학살의 불을 뿜는 총구를 향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겁없이 나아갔던 것이다. 3·1운동은 제국주의 일본이 총검과 화공을 조선사람들한테 무차별로 휘두른 난동판이었다. 조선사람들이 피하지 않고 받아, 이 난동판을 하늘에 올리는 제사로 하였다. 하늘은 드디어 조선의 영을 깨운 것이다.
 
  3·1운동을 한 장의 그림에 그려 본다면,
 
  맹세의 피 입술에 바르고,
  혈제(血祭)였고,
  번제(燔祭·번제 짐승을 통째로 태워 제물로 바치는 제사) 였다.
  그 함성 구천(九天)에 뻗친
  2천만의 통성기도 독립만세.
 
 
 
중국의 눈: ‘全 아시아 민족의 公敵 日帝’

 
  중국의 식자들은 병합 전후, 일제를 ‘구미제국주의의 파수견 노릇을 하여, 조선뿐만 아니고, 전 아시아 민족의 공적이 되었다’고 단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특히 ‘일본의 조선 지배의 혹박함, 그중에서도 의병의 저항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들어 일본의 군국주의를 세계 앞에 고발했다.’(山島晉治, 近代日中關係史斷章, 岩波現代文庫)
 
  근대 중국의 국부(國父)로 일컬어지는 손문(孫文)은 일본에 망명한 적도 있어 근대화혁명으로서의 메이지유신을 평가하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병합을 두고는 일본이 ‘원대한 뜻도, 심원한 계획도 없이, 단지 구주의 침략수단을 흉내 내어, 끝내는 조선병합을 저질러, 아시아 전역의 인심을 잃고 말았다’고 했다.(伊東昭雄 등, <中國人の日本觀百年史>, 自由國民社)
 
  이 같은 중국사람들인지라, 3·1운동에 대한 반응은 빠르고 예민했다. 각종 사서(史書)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당시 북경대학 교수였던 진독수(陳獨秀)의 논문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이다. 3월 23일에 벌써 북경의 잡지에 실렸다.
 
  “이번의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 성실, 비장, 그리고 정확한 관념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민의를 쓰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을 열었다. 우리는 이 운동에 대해 찬미, 애상, 흥분, 희망, 참괴(慙愧·부끄럼) 등 갖가지 감상을 갖는다. …조선민족의 광영을 생각하는 한편에서, 우리 중국민족의 위미부진(萎靡不振·시들고 느른해져 떨쳐 일어나지 못함)에 대해 굴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조선인에 비교컨대 참으로 참괴의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곧 일어나게 되는 5·4운동의 학생리더의 한 사람 부사년(傅斯年)은 한 잡지에 4월 1일자로 ‘조선 독립 운동 중의 신교훈’을 실어, 중국학생들이 3·1운동으로부터 받은 자극의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번의 조선의 독립운동은 미래의 일체의 혁명운동에 대해 3개의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제일로 그것은 비무장의 공수의 혁명인 점, 둘째로는 불가능인 줄 알면서도 하는 혁명인 점, 셋째로는 순수한 학생혁명으로서 … 관료, 정객, 군인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일반 서생의 자각심만에 의거한 참으로 순결하고, 빛나는 행동인 점 등이다.”
 
  이 글 역시 조선인에 대한 부끄러움을 덧보태고 있다.
 
  “조선인의 강고한 의지력을 보게 되면서,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르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학생에 열오른 중국 학생들
 
3·1운동을 극찬한 陳獨秀.
  당시 진독수는 청조(淸朝)를 넘어뜨린 신해혁명 뒤판의 계몽사상가로서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호적(胡適), 이대조(李大), 노신(魯迅) 등과 함께 신문화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진독수나 학생대표 부사년이 조선의 3·1운동을 찬양하고 평가하는 일방에, 좀 과장기가 있지만 중국인의 참괴와 굴욕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3·1운동을 보면서 중국의 지식대중, 청년학생의 액션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일찍부터 이웃을 침략의 대상으로 엿보던 메이지의 일본인들은 중국에 대한 여행 관찰기를 숱하게 남겼다. 이들의 일치된 중국인관은 이렇다.
 
  ‘일반 중국인들 마음속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다르게는 중국인의 국가의식의 결여, 혹은 국가관념이 중국인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 나아가서는 공공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등이다.’
 
  그래서인지 러일전쟁이 끝나고 러시아가 조차했던 요동반도의 여순, 대련을 일본이 물려받아 식민지배를 했을 때, 그 무렵의 조선에서와는 달리 전혀 중국인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이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생활 속의 중국인들은 세금 걷는 사람이 바뀐 정도로만 여겼던 모양이다.
 
  신문화운동 속의 중국의 지식인들은 일본이 1차대전을 계기로 21개조 요구나, 산동의 청도점령 등으로 침략의 행보를 노골화해도, 그래서 선구적 지식인들이 문제제기를 해도 중국의 대중이 무반응인 것이 심히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3, 4월의 진독수 등의 3·1운동 관련 문제제기에 답이라도 하듯이, 5월이 되자 4일날 그 유명한 5·4운동이 터져 나왔다.
 
  아침 일찍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 학생 3000명이 모였다. 흰 천에 먹이나 피로 휘갈긴 구호가 광장을 덮었다. 거기에 ‘밖으로 국권을 찾고, 안으로 국적(國賊)을 처단하라’, ‘중국은 중국인의 중국이다’, ‘맹세코 산동의 이권을 회수하라’, ‘파리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라’ 등이 보였다. 데모대는 친일로 소문난 관료의 사저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북경학생들의 호응은 상해(上海), 남경(南京), 무한(武漢), 광주(廣州)로 번져 갔다.
 
 
 
‘이 大地, 山河는 우리 것이다’

 
  5·4운동은 시작부터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당하고 있는 고통과 3·1운동을 진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는 발단이 되었던 첫날의 ‘북경학생계 선언’ 속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산동(山東)을 잃는 것은, 중국이 망하는 것이다. 우리 동포는 이 대지(大地)에 살고 이 산하(山河)는 우리 것이다. 더욱 이 같은 강포함이 우리를 모멸하고, 압박하고, 노예로 하고, 우마(牛馬)로 만드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만 번 죽어 한 번 살기를 바라는 외침을 지르지 않고 배길 수 있는 것인가. … 조선은 독립을 구해 ‘독립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이라 했다. 만일에 국가의 존망, 국토의 할양 등의 문제가 급박해져서, 그래도 국민이 일대결심으로 최후의 분기를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20세기의 열등민족으로 사람 족속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때 북경대학 학생리더의 한 사람인 나가륜(羅家倫)은 일 년 후에 이 운동을 되돌아보고서, 그들이 3·1운동에서의 조선학생들의 투쟁으로부터 큰 자극과 격려를 받았음을 명백히 해 놓고 있다.
 
  “5·4운동 이전의 중국학생은 입끝으로는 큰소리를 치지만, 실행을 할 판이면 꼬리를 빼는 것이, 러시아의 학생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학생과 비교한다면, 아주 부끄러워해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이 5·4운동 속에서 처음으로 중국의 청년 학생은 공권(空拳)을 휘둘러, 맨손으로 암흑세력과 싸웠으니….”
 
  결국 5·4운동으로 국가관념이 희박하던 중국사람들 가슴에 항일 내셔널리즘의 불씨는 전해지고 말았다. 중국 내셔널리즘은 일화(日貨) 배척운동을 수단으로 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중국무역고에 변화가 일어날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러면 역으로 일본 군부는 침략적 팽창을 강화했다. 악순환인데, 종래는 강대한 제국 일본도 중국 항일 내셔널리즘의 바다에 침몰하고 만 것이다.
 
  5·4운동이 근대 중국사에서 갖는, 유념하고 넘어가야 할 큰 의미가 또 하나 있다. 오늘의 중국공산당이 신문화운동의 실천판인 5·4운동 속에서 태동되었다는 사실이다. 1921년 창당되었을 때 초대 서기장은 앞에서 나온 진독수였다.
 
  모택동 등이 민족주의 색채가 아직도 강했을 때인 1919년 7월 고향 호남성에서 내었던 ‘상강평론(湘江評論)’은 3·1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3월 1일 이후 서울, 개성, 평양, 중화, 황주, 수원, 의주 및 조선반도의 모든 지역에 독립의 외침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주먹을 쳐들고 국기를 흔들어, 무정한 암흑의 천공에다 독립을 외쳤다. 일본의 군인, 경찰의 간섭도, 체포도, 총검도, 그들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쓰고서, 조선의 앞날을 다음과 같이 예단했다.
 
  “(3·1운동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의 잔혹한 탄압에 의해 표면상은 잠시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선인의 정신이 있는 한, 그 독립실현의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여기에 단언할 수 있다.”(山島普治, ‘3·1運動と5·4運動’, <朝鮮史硏究會論文集17>)
 
  우리는 여기서 젊은 날의 모택동 등이 3·1운동에서 ‘조선인의 정신’, 더욱 정확하게는 조선사람들의 영적파워를 감지했던 게 아닌가 치부해 두고자 한다.
 
  앞에서 5·4운동으로 근대 중국사의 흐름에 큰 전기가 온 것을 얘기했다.
 
  아편전쟁(1841~1842)에서 2차대전이 끝나기까지 중국사는 굴욕의 백 년이라 하고 있다. 19세기 내내, 20세기가 되고서도 한참, 세계는 중국을 ‘잠자는 사자’라 했다. 오늘, 우리 눈앞의 G2를 보면서 ‘잠자는 사자’의 잠을 깨운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면, 그게 무엇인지 꼽아 볼 수 있을 것인가.
 
 
  ‘잠자는 사자’의 잠, 누가 깨웠나
 
손문 등 중국혁명가들과 교류했던 申圭植.
  흐름의 전기(轉機)는 언제 왔던가. 아편전쟁도 아니고, 태평천국의 난, 아로호 사건, 청일전쟁, 북청전쟁, 신해혁명도 아니고, 제1차 세계대전도 아니고, 볼셰비키 혁명도 아니고, 중국인들이 외세를 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것은 5·4운동부터인 것 같다.
 
  5·4운동을 통과한 사람들이 3·1운동의 직접적 영향을 증언하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사자’의 잠을 깨운 것은 조선의 3·1운동 아닐 것인가.
 
  3·1운동에 무엇이 있어서 ‘잠자는 사자의 잠’까지 깨게 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인가.
 
  그전에 잠시, 3·1운동의 문제인 조선의 독립문제가 틀이 잡히는 것은 미·중·영 3거두의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이었고, 그중에서도 조선문제의 거론은 둘째 날인 11월 23일 저녁,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국의 장개석 총통 부처를 초대한 만찬 자리에서였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빠졌다.
 
  이 만찬 자리에 장개석 총통을 통해, 3·1운동의 독립문제와 연결되도록 한 사람들은 그때는 이 세상에 없었지만 손문 주변의 민족주의자들, 즉 임시정부 국무총리 신규식(申圭植, 거론할 것이 많은 지사인데 여기에는 겨를이 없다)과 막역했던 송교인(宋敎仁), 주집신(朱執信), 호한민(胡漢民), 대계도(戴季陶) 등이었다. 이들의 3·1운동관을 짧게라도 보아 두어야겠다. 상해에서 간행되는 손문파의 신문, <민국일보(民國日報)> 3월 23일자에 있다.
 
  “한인(韓人)이 궐기한 것은 실로 일본인의 무도(無道) 때문이다. 일본은 십수년에 걸쳐 한인의 국사사상을 소멸시키고, 그 독립의 희망을 뚜드려 엎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조선의 민중은 그래도 여전히 일어나 반항했던 것이다. … 한번 일어난 한인의 자유사상은 결단코 억눌러 막을 수는 없다. 그들은 반드시 일본의 철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이다.”
 
  손문 주변이나 모택동 등의 성장하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3·1운동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본 것이 있다. 그것은 제국일본의 총칼이 불을 뿜고 육신을 저며도 꺾을 수 없었던 조선인의 정신이었다. 이들의 표현에서 느껴지는 그 정신은, 육(肉)에 갇혀 있는 정신이 아니라, 고양되고 질적으로 고도화되어, 무한의 운동량을 응축한 포텐셜리티를 내포하는 정신, 중국사람들은 그 같은 정신을 감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영적파워 아닌가. 중국의 지도자들은 3·1운동에서 조선인들의 영적파워의 일단을 감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유관순의 고독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영적파워라 함은, 가령 메달리스트 김수녕과 김연아의 경기를 타국 선수들과 비교한다면, 기량을 넘어서는 뭔가를 느끼게 된다. 그것이 영적파워이다. 유관순의 출중했던 영적파워는 고(苦)를 통해 무한대로 단조(鍛造: 달구어서 다루어 냄)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이름, 두려운 마음으로 한번 불러 본다. 전신으로 느껴지는 그 영적파워의 크기를 그릴 길 없어 망연함에 빠질 뿐이다. 유관순의 죽음은 고독했다. 그의 죽음은 어떤 누구의 지켜봄이나 관심 속에 있던 흔적이 없다. 전해 오는 말도 없고, 마지막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은 그의 오빠 유우석이 호주로 되어 있는 호적에 ‘대정(大正)9년(1920) 9월 28일 오전 8시20분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 감옥에서 사망’이 있을 뿐이다(이정은, <유관순>). 9월 28일 감옥에서 사망을 확인했을 때, 일제당국은 시신을 인수해야 할 연고자를 찾지 못하여, 가매장을 했다가, 보름이나 지난 10월 12일에야 그가 다니던 이화학당에다 통보하여 인수케 하였다.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의 장례식은 쓸쓸했다. 교사 한두 명, 김활란, 서명학 등의 이름이 보이지만, 일제는 참석을 엄격히 제한하여, 같은 반 학생대표 몇 명, 뒤늦게 연락이 된 배재학당 재학의 오빠 유우석이 운구를 위해 데려온 친구 몇 사람이 전부였다.
 
  수레에 실려 정동에서 이태원 공동묘지까지 갔다. 돌 하나, 표지판 하나 없이 유관순은 그렇게 묻혔다. 그러고 나서, 해마다 3월이 오고, 눈감은 9월이 왔어도 누가 그의 무덤을 찾았다는 얘기는 없다. 잘난 사람들일수록 일제 앞에 뼈가 무더기로 녹아나는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제가 조선군 용산기지를 확장하려 들어, 유관순이 묻혀 있는 이태원 공동묘지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게 되었다. 일제가 ‘이익선’ 만주로 침략의 발길을 뻗던 30년대쯤이 아닐까. 신문에 이장공고가 났을 테지만, 3·1운동을 잊어야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유관순을 기억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가까운 피붙이들은 먹고살기에 고달파 신문 구경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유관순의 육신의 흔적은 모든 조선사람의 안전(眼前)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유관순은 광복이 되어 민족 앞에 다시 나타난 유관순이다. 유관순이 다시 살아 나온 경로를 더듬어 본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 지음, <유관순>은 고증이 철저하다. 이에 따르면 광복 후의 우리 사회에 유관순의 행적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인덕대학교 창설자 박인덕 여사와 이화여자고등학교 신봉조 교장에 의해서였다.
 
  박인덕은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기하 교사였다. 3·1운동 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미결감에서는 유관순과 함께 있기도 했다.
 
  박인덕 여사의 회상 속에 있는 유관순은 미국에서 1954년에 발간된 그의 자서전 속에 있다.
 
 
  ‘나의 뉘우침 속에 돌아온 유관순’
 
  “한번은 재판정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전에 학생이었던 유관순을 만났다. 유관순은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그 아이는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난 뒤 학교를 나와 남한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아이는 고향 마을 사람들과 주변 지역 사람들을 분기시키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장날 시위운동을 조직했다. 그 아이는 독립운동을 하자는 전갈을 하기 위해, 몇십 리 길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 오빠도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인의 총탄에 맞았다. 결국 그 아이는 체포되었다. 그는 많은 고문을 당하고, 7년형을 받아 투옥되었다. 그 아이는 상급심에 항고하였기 때문에, 서대문감옥에 이감되었다. 나는 내 마음에서 큰 감동을 받아 이 어린아이를 위해 무엇인가 해 주고 싶었으나,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아이가 처했던 곤경을 생각하면 마음 깊이 어떤 가책을 느낀다.”
 
  어렸던 유관순의 추상 같은 독립투쟁 행적에 한없는 감동을 느끼지만, 유관순 하면 어떤 뉘우침이 따른다는 박인덕의 이 진실하고 솔직한 진술을 치부해 둘 것이다.
 
  광복이 되고 만 2년이 지나서야, 1947년 11월 27일 중앙의 명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처음 유관순기념사업회 이름으로 고향 병천에서 추모 기념식이 있었다. 김구, 이시영 등 정상급 인사들의 제문, 추도문이 더할 수 없는 찬사를 바쳤다. 그중에서 마음에 남는 것은 충청남도경찰청장 명의의 위령사 속에 있다. 그 대목을 옮긴다.
 
  “유 열사의 성혼(聖魂)이여…
 
  이제 이 땅은 새로워지고, 이 겨레 자유를 얻었으니 부디 고요히 눈을 감으소서…. 지금 이 산천은 백설에 묻히고 초목이 뜻이 있어 그 눈을 녹이도다.
 
  유 열사의 영혼 앞에 산천초목도 눈물짓고, 더러운 몸 아직 살아 있어, 민족을 위하여 일한 바 없는 이 백성도 참회의 눈물 흘리며, 백의동포의 영원한 자유 회복할 때까지….”(독립기념관 자료)
 
  박인덕의 회상에서도 그렇고, 이들 인용에서 알게 되는 것은, 광복공간을 사는 진실하려는 사람들의 회상 속에, 어떤 뉘우침과 참회와 함께 유관순은 부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관순의 영적파워
 
  참회(懺悔)의 원효(元曉)적 의미는 육근(六根·眼(안), 耳(이), 鼻(비), 舌(설), 身(신), 意(의)―육적·현세적 욕구의 6가지 근원)의 방일(放逸)을 뉘우치는 것이다. 하루하루 숨 쉬고 산다는 것은 육근을 방일하고 산다는 것이고, 일제하에 조선땅에 산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내 속에 하루하루 친일을 쌓아 가는 삶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황국신민 서사(일제가 조선 학생이나 일반인에게 빠짐없이 천황의 신민임을 맹세케 한 구호로, 조례·집회에서 암송, 제창하게 했다)라도 읊어대고 동방요배(조선사람들에게 일본천황이 있는 동쪽을 보고 절하도록 한 것)라도 해야 하루를 넘길 수 있었던 것, 누구는 아니었던가. 일제에 세금 안 내고 산 사람이 누가 있었던가.
 
  유관순은 3천만의 ‘내 속의 친일’의 정화력으로 하늘이 예비했을 것 같기도 하다. 민족의 광복공간에 부활한 유관순이 할 일은 많았다.
 
  1947년 9월에 구성된 ‘순국처녀 유관순 기념사업회’에는 당시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건국운동 속에 있던 민족의 모든 지도자의 이름이 보인다. 명예회장에 유관순과 같은 동네, 병천 지령리 출신의 조병옥, 회장에 군정 문교부장 오천석, 고문에 서재필, 이승만, 김구, 오세창, 이시영, 김규식, 각종 임원에 정인보, 신익희, 이범석, 장택상, 최현배, 백낙준, 김병노, 이인, 김활란, 임영신 … 이만 하겠다.
 
  27년 전에 18세 처녀로 죽은 유관순의 기념사업에, 왜 이렇게 전 민족의 지도자들이 서로 이름을 넣으려고 든 것인가. 민족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지도자들이 3·1운동에서 감지했던 조선인의 영적파워를, 일신에 모아 가진 존재가 유관순임을 알아본 것 같다. 유관순의 영적파워의 정화력으로 3000만 모두의 ‘내 속의 친일’을 씻어내고, 새 나라의 네이션 빌딩의 전열에 내세워 그 에너지를 점지받게 한 것이 아닌가.
 
  음력 3월 1일(4월 1일), 3천명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의 주동자로 하나의 공판정에 남은 세 사람 조인원(56·유석 조병옥의 부), 유중무(45·유관순의 숙부), 유관순(17). 판결문에서는 이 중에서 유관순이 제1항으로 판시되었다.
 
 
  창천에 빗긴 ‘동지섯달 나르는 매서운 새’
 
  간략히 하면, 공주서의 5년형(이정은 고증, 그동안 7년으로 알려져 옴)이 서울의 공판에서는 세 사람 모두 3년형으로 줄었다. 조인원, 유중무는 고등법원으로 상고했고, 유관순은 빠졌다. 숙부를 위시하여 우러러보던 동네 어른들의 강력한 권유를 물리쳤다. 유관순의 상고 거부의 변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면 감옥이 아니겠습니까”였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이나 감형이나 구명으로 통하는 어떠한 수단에의 접근도 이미 거부하기로 작심했던 것 같다. 감옥에서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순간, 의식과 운신이 가능한 모든 시간을 독립만세를 외치는 데 바치고자 하였다. 폭력의 터널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의지로써 열었다. 감옥 안의 유관순의 모든 독립만세는 간수들의 구타와 린치의 소나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관순은 끝이 없는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아우내 시위 날 총칼에 찔린 옆구리에서 계속 고름이 났고, 옥내 만세투쟁으로 가격당해 방광이 부서졌는지, 냄새가 나고, 피멍이 든 전신이 짓물러 고통이 그치지 않았다. 일제(日帝)의 의료는 눈을 감았다. 육(肉)의 초탈은 어려웠다. 그러나 유관순의 정신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 정신은 ‘동지섯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되어 창천을 차고 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유관순은 그의 삶이 죽음에 밀려나기를 거부했다. 유관순의 삶이 역으로 죽음을 거머잡아 그 위에 꺼지지 않는 민족독립의 등대불을 켜고자 했다. Die and become의 세계가 있다 한 에릭 에릭슨의 말은 맞다. 유관순은 죽어서 살아났다. 민족의 영적 카리스마로 부활했다. 유관순은 민족을 향한 영적파워의 구원의 발신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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