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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國체험 100년 특별연재] 현해탄을 넘어 세계로 미래로〈3〉 3·1의 만세, 루스벨트에 닿다

3·1만세의 국제파장 (上)

허문도    asadalm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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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후 미국에서 독립외교를 펼쳤던 이승만 등은 ‘인류사에 작용하는 도의(道義)의 필연’을 믿었다. 퓨리턴(청교도)의 신앙공동체의 연합으로 출발한 아메리카의 메시아니즘(救世) 정치가 ‘양심의 법정’인 것을 믿었고, 이 법정이 언젠가는 잔학하고도 무도(無道)한 일제(日帝)를 징벌할 것임을 믿었다. 이 믿음은 24년 후 카이로선언으로 현실화됐다.

許文道
⊙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駐日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정무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3·1운동 당시 만세를 부르는 조선 민중.
  영국의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명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제국’이라는 것의 이상시대를 꼽아 놓고 있다. 그것은 황제 넬바의 즉위(AD96)에서부터 <명상록>을 남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제(帝)의 죽음(AD180)까지의 이른바 오현제(五賢帝) 시대 84년간이다.
 
  기번은 ‘세계사에서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의 ‘제국’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평술(評述)하고 있다.
 
  “광대한 로마제국의 전 영토가 덕과 지혜로 이끌어지는 절대권력 밑에서 통치되고 있었다. 군대는 죄다 4대에 걸친 황제의 강고하지만 평화적 수법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들 황제의 인물과 권위에 대해 국민들도 모두 자발적인 경앙의 마음을 바쳤다. … 이들 황제로서도 자유의 세상에 기쁨을 느끼고, 스스로 책임 있는 법의 집행자인 것에 자족하고 있었다.”
 
  조선이 ‘대일본제국’에 편입 당하고서 10년 있다가 3·1운동은 일어났다. 운동이 딛고 섰던 민족자결의 원칙은 무엇보다도 ‘제국’이라는 것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개념이었다.
 
  앞에서 든 기번의 인용은 인류사에 있었던 ‘제국’의 하나의 전형이다. 조선을 10년간 깔고 앉아 온 시점에서, 일본사람들이 ‘제국’이라도 제대로 했던지, 할 것을 했던지 비교하고 가늠해 보라고 인용했다.
 
  ‘제국’ 10년간의 굵은 것 몇 가지, 조선병탄(倂呑)을 총괄 지휘했던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그 공으로, 천황의 최측근이자 대리역 같은 내대신(內大臣) 겸 천황 시종장 자리에 가서 앉았다. 조선문제가 발단이었던 다이쇼 정변 속에서 다시 수상이 되었지만, 헌정(憲政)옹호를 외치는 군중의 폭동상황을 만나 2개월을 못 버티고 물러났다.
 
  이성과는 거리가 먼 군중이 일본 정치의 판세를 좌우하는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결정적으로는 3·1운동 전해 여름에는, 쌀값 등귀로 인해 쌀가게를 습격, 약탈, 방화하는 미곡(米穀)폭동이 전국으로 번졌다. 이 폭동 끝에 조선에 통감으로 와서 병탄을 현장지휘하고 초대(初代) 총독을 하다가 이때에 수상이던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정권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고서 반년쯤 있다가 ‘제국’은 3·1운동을 만났던 것이다. 100년의 고지에서 보면 ‘일제’는 제국 같은 것 할 게 아니었다. 조선의 3·1운동은 일본사람들한테 ‘제국’은 무리라는 것을 온 세계에 알리는 계기이기도 했다.
 
 
  ■ 3·1운동으로 태어난 ‘민족’
 
  망국체험에서 100년이 지난 시공에서 3·1만세의 의미를 새겨 보고자 한다.
 
  조선사람들이 세계사적 사조인 민족자결의 원칙에 눈떴을 때 독립만세는 터져 나왔다. 고을마다의 장터에서, 반상(班常)의 차가 없었고, 빈부의 차가 없었고, 남녀노소의 차가 없었고, 신교(信敎)의 차가 없었다. 조선사람들이 역사 있고서 처음으로 하나 되는 마당이 독립만세 속에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회한을 함께하는 ‘회한의 공동체’ 속에서 조선사람은 하나 되었고, 나라를 찾으려는 소망 속에서 하나 되는 ‘소망의 공동체’가 조선사람 위에 있었다. 조선사람이 ‘네이션(nation·국민-민족)’이 된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3·1만세 속에서 근대가 말하는 네이션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라가 없는데 네이션(국민)이라 한다 할 것인가. 역사로부터 나라를 빚진 국민, 조선사람은 3·1운동 속에서 마이너스 국민(네이션)으로 태어났다. 나라 찾기의 소명을 받고 태어난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3·1운동의 의미를 깨닫는데 프랑스의 에르네스트 르낭(1823~1892)만 한 사상가는 없을 것 같다. 르낭은 ‘민족’의 출산을 두고서, 공유(共有)된 고통의 과거를 강조한다. 사람이란 ‘고통에 비례해서 더욱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공통의 고통은 환희 이상으로 사람들을 뭉치게 한다. 국민적 추억이나 애통은 승리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르낭의 네이션(민족)은 혈통이 같거나 언어 종교가 같은 것을 넘어서고 있다. 네이션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해를 초월한 정서 그것이고, 혼(魂)이면서 정신적 원리’이다. 그래서 민족(네이션)이란 ‘사람들이 과거에 있어서 치렀고, 금후(今後)에도 치를 용의가 있는 희생의 정서로 구성된 위대한 연대심’인 것이다(<국민이란 무엇인가?>).
 
 
  추억의 風化는 국가가 저지해야
 
  비폭력 무저항의 3·1독립만세에 가해진 무차별 총격의 학살, 시위하는 다중에 휘두른 총검의 난도질,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골육을 으깨는 지옥에도 없을 고문, 일본 순사 헌병들은 조선사람들 두 눈을 번연히 띄워 놓고, 그 보금자리를 불태워 초토로 돌변케 했으니….
 
  이 잔학한 소문이 퍼져도 조선사람 독립만세는 의연히 고난과 십자가 속으로 나아갔다. 이 만세가 온 나라를 한 바퀴 돌았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낭은 그 장년(壯年)시절에, 보불전쟁(普佛戰爭·1870~1871)에서 조국이 패배하고, 비스마르크·몰트케의 프러시아가 승리하여 베르사유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 통일을 선언하는 거들먹거림을 직접 보아서일까, 영광보다는 수난과 회한의 과거에서 민족의 바이탈리티(vitality)는 터져나오는 것임을 열정으로 알려주고 있다.
 
  3·1운동으로 다시 태어난 ‘민족’은, 당연히 ‘과거를 두고는 공유해야 할 영광과 회오(悔悟)의 유산’으로 힘을 받는 것이고, ‘미래를 향해서는 실현해야 할 공동의 프로그램’ 앞에 함께 서는 것이다.
 
  나라를 빚진 ‘마이너스 국민’의 프로그램에는 관리체가 있어야 했고, 그것은 임시정부였다. 조선에 생겨난 ‘네이션’의 나라 찾기 프로그램의 관리자요 지휘탑이 상해 임시정부였던 것이다. 3·1운동으로 네이션(민족)이 태어났기에 그 집중적 표현기관으로 임시정부의 존재는 드러나게 된 것임을 우선 확인해 두겠다.
 
  르낭의 ‘민족’ 형성의 계기는, 온 민족이 함께 당한 고통과 그 고통의 추억 공유 속에 있다. 그러므로 3·1운동의 회상이 조선사람을 ‘민족’이게 하는 것이다. 일제의 가학(加虐) 공간에서 그랬고, 광복공간에서도 그렇고, 극일(克日)의 고지를 넘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우리 ‘민족’이 세계평화의 지주(支柱)가 되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국가는 역사의 관리자이기도 하다. 국가가 3·1운동 앞에 바로 섰는가는 되풀이해서 물어져야 할 사안이다. 추억의 풍화(風化)는 국가가 저지해야 할 것이다.
 
  온 민족이 외치고 일어난 3·1운동의 눈에 보이는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조선, 조선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던, 캐나다인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이 있을 것을 미리 알았던 단 한 사람의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거사 전날 2월 28일 밤, 가깝게 지내던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미국에 보내줄 것을 부탁했는데, 그는 쾌히 받아들이면서 “이 같은 독립운동을 해도 성공할 가망성은 없다. 오히려 조선사람에게 해가 미친다. 계획을 중지하라”고 학생에게 권했다는 것이다(‘3·1에 있었던 일’, ).
 
 
  3·1운동이 가져온 변화
 
  3월 1일부터 운동이 한고비 넘기는 5월 30일까지의 피해를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 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본다. 집회시위 연(延)인원 202만3098명, 사망 7509명, 부상 1만5961명, 체포자 4만9811명, 불태운 건물 민가 715호, 교회당 47동(棟), 학교 2동 등이다.
 
  일제는 조선사람의 만세궐기를 예상하지 못했고, 심히 놀랐던 것이 그들이 남긴 기록에서 드러난다.
 
  마침 일본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한복판에 유신벌족(維新閥族)이나 군부(軍部)와 무관한 ‘평민재상’ 소리를 듣는 하라(原敬) 수상이 있었고, 제1차세계대전의 전후(戰後)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 기간에 모여 있는 국제여론을 의식하는지라, 식민지 통치방식을 바꾸는 데 재빨랐다.
 
  조선에 대해 유난히도 모질었던 육군 조슈(長州-야마구치현)벌 출신 총독을 출신지도 다른 해군제독으로 바꾸었다.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학교 교사까지도 칼 채워 세우던 것을 없앴다.
 
  무단통치를 바꾼다면서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을 내세워 ‘문화통치’를 선전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어 신문의 발간도 허락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개혁’의 방향이 식민지의 자치나 독립은 아니었고, 지배와 동화(同化)에 보다 간교한 수단을 동원하는 것일 뿐이었다. 100년의 고지에서 보면 일제는 친일파 양산체제를 갖춘 것이다.
 
  온 민족이 들고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친 결과가 2만3000여 명의 사상자와 불타버린 보금자리와 교회당, 그리고 새롭게 정비된 친일파(親日派) 양산(量産)체제만 남겼단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3·1운동에서 26년이 지나 한국은 일제(日帝)로부터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을 가져온 가장 결정적인 조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1943년 11월 27일 미국·중국·영국 세 나라 수뇌가 합의한 카이로선언이었다. “3대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되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표현이 선언에 들어 있다. 뒷날 논란이 되는 ‘적당한 시기에’라는 구절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다가오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의 광복독립이 확실해졌다는 것, 그리고 침략자 일제에 징벌을 가하며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이 연합국과 합의한 결정이라는 것, 그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 같은 일방적인 것은 국제정치에 있을 수 없다. 국제질서의 관리자들로 하여금 그 같은 결정을 불가피하게 하는 작용이 있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한민족 최대 최고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어떻게 재난만 안겨주고 말았겠는가. 독립만세 소리가 어떻게 카이로선언에 가서 닿고, 선언을 불러냈는지 그 맥락을 보았으면 한다.
 
 
 
■ 3·1의 만세, 루스벨트에 닿다

 
  이를 카이로선언과 관련해서 예를 하나 보겠다. 선언 초안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분신과도 같았던 보좌관 홉킨스가 작성한 것이었다.
 
  ‘한국인민의 노예상태’라는 표현은 ‘배신적 노예화’(treacherous enslavement)였던 것을 영국 쪽에서 연화시켰다고 한다(五百旗頭眞,<美國의 日本占領政策>).
 
  일본을 향해 징벌적 의지를 강하게 머금고 있는 ‘배신적 노예화’란 표현은 루스벨트가 의회연설 같은 데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루스벨트가 한국이 일본에 배신적으로 당했고, 그 식민지배는 노예적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강렬한 가치지향적 인식이 주재자 루스벨트에게 있었기에 선언에서 한국을 유독 거론하는 액션이 가능했을 것이다.
 
  3·1운동과 겹친 파리강화회의에 갔던 김규식(金奎植)이 미국대표단을 붙들고, 수없이 읊어댄 ‘청원’에 ‘사기와 폭력’이란 말이 있었고, 이승만(李承晩)·서재필(徐載弼)·정한경 등이 3·1운동 후 워싱턴회의 전후에 미국에서 펼친 설득논리는 일본이 조약상의 한국독립 약속을 저버리고 강제로 병합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3·1운동의 적공(積功)이 아메리칸 메시아니즘의 사도(使徒) 루스벨트에게 끝내는 가 닿은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회담. 왼쪽부터 장제스 중국 총통, 루스벨트 미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道義의 필연’을 믿어
 
  앞에서 임시정부를 3·1운동으로 형성된 네이션(민족)의 프로그램 관리자라 했다. 한 통사(通史)는 보통 독립운동을 조직적·총괄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체로서 성립된 임정(臨政)에 대해,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는 못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임정이 출발부터 외교를 통한 독립의 성취에 중점을 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외교는 파리강화회의나 워싱턴회의(1921년 11월 미국이 주도한 태평양극동질서 안정을 위한 국제회의) 등에서 독립을 보장받고,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데 1차 목표를 두었으나, 모두 좌절되었다’고 하고 있다. 독립운동 지원을 받기 위한 선전외교는 허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주권 없는 외교에 통상적인 가시효과를 묻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것이다.
 
  임정의 권위 위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각자들, 이승만(워싱턴 구미위원부), 서재필(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 김규식(파리위원부) 등의 독립전략은 통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흔히 국제정치 일반이 딛고 선 파워폴리틱스(권력정치)적인 전략이 아니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인류사에 작용하는 도의(道義)의 필연’을 믿었다. 그리고 퓨리턴(청교도)의 신앙공동체의 연합으로 출발한 아메리카의 메시아니즘(救世)정치를 믿었다. 그리고 메시아니즘 정치가 양심의 법정인 것을 믿었고, 이 법정이 언젠가는 잔학하고도 무도(無道)한 일제를 징벌할 것임을 믿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운동 전략은 인류의 양심의 법정에 일제를 고발 제소하는 것이었다.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아직 한국 사람들 복판에 있을 때, 이 같은 전략을 드러낸 말이 있다. 조선청년들이 상해에서 중국인 학교교장들을 초대하여 차를 마시며 연대하는 자리였다. 춘원은 “… 오인(吾人)은 촌철(寸鐵)이 손에 없고, 병정 한 명 갖추지 못했으되, 기필코 세계의 대도(大道)에 의해 한국의 독립을 기할 수 있을 것인데, 4억의 인민을 거느린 중국공화국의 제군들이 오인을 엄호함이 있다면 최후의 목적을 달하는 것은 유유할 것임을 믿어…”라고 했다.
 
 
 
■ 일본의 인권 흉내, 3·1운동의 파장에 막혀

 
  3·1운동의 功業
 
  깊이깊이 묻혀 있던 <쇼와천황독백록(獨白錄)>이란 것이 1990년대 초에 공개되어 일본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그 첫머리에서 쇼와 천황은 ‘(제1차대전의 강화조약 내용에서) 일본이 주장한 인종평등안은 열국의 용인을 받지 못하고, 황백(黃白)의 차별감은 의연히 잔존하여, 캘리포니아주(州) 이민 거부 같은 것은 일본국민을 분개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하고 있다. 천황이 이 얘기를 태평양 전쟁의 원인(遠因)으로 들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이 보편주의적 가치개념인 인종평등안을 국제연맹 규약안에 넣자고 방침을 정한 것은, 참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선에서 마지막 통감에서 초대 총독까지 눌러앉아 무단통치로 조선사람 살상에 거리낌이 없던 데라우치가 수상할 때(1917년 6월)였다.
 
  막상 강화회의에서 일본 측이 인종평등안을 끄집어내어 거론했을 때 다리를 붙든 것은, 놀랍게도 바로 전달에 한국에서 터져나와 온 나라로 번져나가고 있던 3·1만세소리였다.
 
  미(美) 국회도서관에 남아 있는 그때 정보기관의 보고는 ‘일본이 통치하고 있는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종평등” 문제를 들고 나온 데 대해 강화회의의 미국대표단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長田彰文, <日本의 朝鮮統治와 國際關係>). 당시 미국 국내 신문에는 ‘일제, 빠르게 가면을 벗고 있다’는 제하에 ‘3·1운동을 탄압하고 있는 일본이 자유스런 이민의 권리를 위해 인종평등안 등을 내놓는 것은 문제도 안된다’(New York American지, 1919년4월1일)고 깔아뭉개는 논조가 보인다.
 
  일본인들이 보편주의적 가치개념을 소화하는 데 서툴다는 지적은 흔히 듣고 있다. 일본의 이 같은 태도를 그때 중국 대표단의 고문으로 왔던 저널리스트 밀라드는 냉엄히 비판하고 있다. 그는 중국인의 일본이민은 엄하게 제한되고 있다는 것, 조선이나 대만에서는 지역민보다는 일본인이 우대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일본인이 주장하는 ‘인종평등’이란 일본인의 우대를 요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등을 지적하고 있다.
 
 
  ‘異민족의 善政보다는 自民族의 惡政을’
 
  웬만한 통사(通史)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임정을 대표하여 김규식이 파견되었지만, ‘독립청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쓰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100년의 고지에 서서, 그것만이 유효했던 ‘양심법정 제소’ 전략으로 보면 김규식의 활약에는 눈여겨볼 만한 것들이 있다. 임정이 구성되기 전에 떠났던지라, 바로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의 신임장이 보내졌다. 그래도 강대국 대표단은 김규식의 면담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대표단의 통역이나 보좌진 중에는 서울 근무 경험도 있는 지면(知面)이 있었다. 이들을 통해 몇 번씩이나 윌슨 대통령, 랜싱 국무장관 등에게 청원서와 편지를 보냈으나 답은 없었다. 그러나 김규식의 보좌진과의 잦고 깊은 대화가 미국 대표단 전체의 3·1운동관 형성에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대표단에 국무성 극동부장을 5년이나 역임한 에드워드 윌리엄스가 있었는데, 그를 상대로 일본의 주미대사인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郞)가 3·1운동 변명론을 늘어놓았다.
 
  “소요는 일부 학생들이 하는 것이다. … 우리 일본인은 조선에서의 치정(治政)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조선사람들은 그전보다 더 잘 다스려지고 있다. … 사회불안은 조선에만 있는 게 아니고 민족자결 바라는 데는 널리 퍼져 있다” 등.
 
  여기에 대해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말을 받았다.
 
  “조선이 그전보다 더 잘 통치되고 있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나, 하나 중요한 진실은, 아무리 좋은 정부라 해도, 이민족에 의해 강제된 정부보다는, 아무리 나빠도 스스로의 정부 쪽을 사람들은 택한다는 사실을 이시이(石井) 자작은 모르고 있소.”
 
  미 국무성 간부 윌리엄스가 일본 이시이 대사의 3·1운동 변명을 받아넘기는 말씨가 흥미를 끈다. ‘이민족의 선정보다는 자민족의 악정을 택하겠다’, 이는 민족자결주의의 사도 김규식의 심사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그가 조선독립을 위해 제소하려는 양심의 법정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게 아님을 김규식은 시간이 가면서 더욱 느낀 것 같다.
 
 
  金奎植의 청원서
 
  파리로 올 때 가져왔던 보다 단순한 청원서를 두고서, 김규식은 20개조에 걸쳐 장문(長文)의 것을 새로 만들었다. 청원서의 제목은 <조선국민 및 국가의 주장: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조선의 독립국으로서의 재건을 위하여>이다. 일본이 사기와 폭력으로 한국의 국권(國權)을 강탈했다는 것, 일본은 조선에서 기독교의 포교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 3·1운동을 일본은 잔학한 방법으로 진압하고 있다는 것 등이 특히 강조되어 있고, 마지막 결론은 1910년 한국병합조약의 무효 선언이다.
 
  이색적인 것은 독일의 전신(前身)인 프러시아가 보불전쟁 등 통일전쟁에서 손에 넣은 신영토에 대해 실시했던 차별정책을 일본이 조선에서 그대로 본받고 있다고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제1차대전 말기 미국에 불었던 독일 혐오바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구미인들에게 먹혀들 고도의 선전술이다.
 
  김규식은 다시 이 청원서를 회담대표들에게 보내면서, 편지 문구에 “조선인이 미증유의 억압에 노출되어 있고, 일본의 철구둣발에 짓밟히고 있다. 인도와 정의를 위해 공평한 판단을 내려 달라”를 넣었다. 전달과정에서 랜싱 국무장관의 비서 커크 등은 감동하여 본회담에서 어찌 못한다 할지라도 당장 성명이라도 하나 내자 했으나 중간 간부들이 말렸다.
 
  김규식이 중요시했던, 미국대표단의 무관(武官)대표 하우스 대령과는, 김규식을 이해했던 통역 본살을 중간에 두고 상당한 교감역(域)에 도달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우스 대령은 본살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번 강화회의에서 조선 문제가 취급될 전망은 없지만, 유럽에 정의가 확립되면, 그것이 다른 분야 지역에도 파급될지 모른다. 아마도, 국제연맹이 서둘러 처리해야 할 문제가 그렇게 없을 때에, 일본을 억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상황과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지만, 무관대표 하우스 대령의 마음속에 억제해야 할 일본상은 이미 싹이 튼 것 아닌가. 양심의 법정, 아메리카의 메시아니즘이 교활한 ‘침략자’의 가면을 벗기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3·1운동 단계나 1931년의 만주사변 단계에서도 ‘양심의 법정’이 입건할 조건은 충분했다. 가면을 그때에 벗겼다면, 진주만, 태평양전쟁, 원폭은 비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 3·1운동과 쇼와천황, 태평양전쟁
 
  청도문제와 3·1운동
 
  앞에서 들었던 <쇼와천황독백록>의 인종평등안 인용부분에 연이어 천황은 “또한 청도(靑島)환부를 강제당하게 된 것 역시 그러하다. 이 같은 국민적 분개를 배경으로 하여 한번 군이 일어섰을 때는, 이것을 누르는 것은 용이한 업(業)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이것으로 ‘대동아전쟁’의 원인과 관계시켜 놓은 첫 단원은 끝이다.
 
  위 인용에서 ‘역시 그러하다’는 ‘국민을 분개시키기에 충분하다’를 말한다.
 
  중국 산동반도의 독일조차지였던 청도는 파리강화회의에서는 일본 차지로 결정되었다가, 워싱턴회의에서는 중국에 반환되고 만 것을 천황은 언급하고 있다.
 
  청도 귀속문제가 2전3전하는 과정은 지금부터 보겠지만, 그 귀추를 두고 생각지도 않게 3·1만세의 입김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천황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독백록’을 통해, 태평양전쟁의 원인으로 들고 있는 두 가지 문제, 인종평등안 문제와 청도귀속 문제가 모두 3·1운동의 파장 속에서 일본이 바라는 대로 안되고 만 것이다.
 
  쇼와천황은 이 두 문제에 작용한 3·1운동의 파장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두 문제로 생겨난 일본 국민들의 반미(反美)감정이 제2차 세계대전에 가 닿았으니까, 결국 조선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불태워진 3·1 만세의 함성은 일본이 패망하는 태평양 전쟁에까지 가 닿은 것이다. 역사의 암합(暗合)인가, 역사 위에 작용하는 알 수 없는 섭리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파리강화회의를 리드하면서 국제연맹을 창설해 가고 있던 윌슨 대통령은, 국내에서 공화당의 반대로 연맹가입안의 국회통과가 불투명해지자 일시 귀국하여 의회 설득에 나섰다.
 
  먼로주의 사고가 강한 미 의회는, 국제연맹이 미국의 주권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는 윌슨의 설명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미국이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 간의 항쟁에 이용되기 십상이라면서 연맹과 함께 가려는 윌슨 대통령을 강력히 비판했다.
 
  의회의 윌슨 대통령 비판에, 너무나 놀랍게도 3·1운동이 청도문제와의 연관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대목은 일본학자의 서술을 그대로 빌리겠다.
 
  “의회는 이렇게 말한다. 윌슨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독일이 받아들이도록 필사적이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이란 중국을 희생시키면서 산동반도(청도)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부당한 조약인 것이다. 일본은 산동을 식민지와 똑같이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에 의해 명백해진 것과 같이 비상히 가혹(苛酷)한 것이다. 이처럼 가혹한 식민지 지배를 중국 본토에 미치게 하려는 일본에 대해, 일본을 베르사유 조약 조인국으로 하기 위해, 윌슨은 일본과 타협한 것이다.…”(加勝陽子, <それでも日本人は戰爭を選んだ>)
 
 
  윌슨 대통령의 다리를 건 3·1운동
 
  이때에 미국 상원의원들은 원내외에서 계기만 있으면 국제연맹에 대한 반대연설에 곁들여서 일본의 조선통치의 문제점, 3·1운동 진압에서의 일본의 잔학행위 중에서도 제암리 교회의 학살방화를 얘기하고, 특별히 기독교도들에 대한 잔학행위가 유별난 것을 강조했다.
 
  상원의원 마일즈 포인덱스타는 7월 4일 로체스터의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국제연맹 반대연설을 하고서는, 조선문제를 거론하여 “조선인은 윌슨 대통령이 자기들을 구해 줄 줄 믿고, 가망 없는 소요를 일으켜 다수의 죽은 자를 낸 한편, 국제연맹은 조선사람을 구해 주는 게 아니라 3000만(산동성 인구)의 중국인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도록 협정을 맺는 데 급급하고 있다”고 했다. 이 경우도 산동문제와 3·1운동을 함께 거론하고 있다.
 
  상원의원들은 조선문제를, 역사를 거슬러 거론하기도 했다. 조셉 프란스 의원은 10월 9일 베르사유 조약 반대라고 해 놓고, 그 이유의 하나로서 ‘조선에 대한 부당성’을 들고 있다. 그 내용은 “미 조선조약 제1조의 주선조항에 근거하여 고종은 일본의 부당한 취급을 미국에 호소했으나, 미국은 그 호소를 외면하고, 보호국화와 병합을 방관한 경위가 있는 만큼, 3·1운동 진압의 참상과 함께 조선인의 요청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長田彰文, <日本의 朝鮮통치와 국제관계>)(註 주선(周旋)조항)는 것이었다.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안은 1920년 3월 미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부결되었다.
 
  미 의회의 진행상황을 당연히 일본 측에서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조선의 3·1운동으로 인한 일본 비판으로 미국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고, 국제연맹의 주도국이어야 할 미국이 가입도 못하게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본 측의 충격은 대단히 컸다. 일본 측은 3·1운동의 쇼크를 그들이 학살자였던 조선땅에서보다는 미국땅에서 받았던 것 같다.
 
 
  ■ 3·1에 민감했던 신앙공동체 아메리카
 
  3·1운동과 워싱턴회의
 
1921년 11월 개최된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 앞줄 왼쪽이 단장 이승만, 뒷줄 왼쪽이 부단장 서재필이다.

  3·1운동을 진압하면서 일본 측이 드러낸 잔학성에 대해 미국사회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조선에서 특히 기독교도들이 3·1운동 속에서 일본의 헌병경찰에 의해 가혹하게 당하고 있는 실황이 그때그때 알려진 것이다. 주로 선교사들의 현장증언으로, 더러는 특파원 보도로 미국에 알려졌다.
 
  퓨리탄의 신앙공동체로 시작됐던 나라 아메리카의 반응은 빨랐다. 온 미국사회를 향해 절대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기독교 교회연합협의회는 3월 중순에 벌써 극동지역 요원을 조선으로 돌려 종합정보수집조사에 착수하고, 4월 하순엔 요원을 뉴욕에 도착하게 하여, 7월 중순까지 10수회에 걸쳐 조선문제 협의를 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잔학상의 사례 34건을 취합한 이라는 제명(題名)의 소책자 발간이 있었다. 이 속에는 ‘제암리’도 있다. 사건 다음날 현장을 찾았던 세 사람의 미국 사람, 서울영사 커티스, 선교사 언더우드, AP특파원 A W 테일러. 이 중에서 언더우드의 보고서와 테일러가 4월 20일자로 송고하여 도쿄에서 발행되던 미국계 영자지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실린 답사기사도 들어 있다.
 
  이 발간되었을 때가 파리강화회의를 받아 미국의회가 국제연맹 가입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소책자는 상원의원들에 의해 즉각 활용되기 시작했다. 의회기록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나 허스트계 신문 등 주류언론의 보도도 잦았다.
 
  앞에서 그 일부를 보았지만, 다수 상원의원들은 3·1운동에서 일제가 드러낸 문제점을 윌슨의 국제연맹 가입안 반대 논리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3·1운동은 윌슨 대통령이 내놓은 민족자결원칙에 촉발되었지만, 윌슨이 열망했던 국제연맹 가입은 3·1운동의 파장 속에 좌절되었던 것이다.
 
  윌슨은 파리에서는 김규식을 만나 주지 않아 몰랐겠지만, 미국의회를 통해서는 조선의 3·1운동의 파장에 심히 놀랐을 것이다. 연맹가입 문제는 그해 봄에 결론났지만, 1920년은 미국대통령을 선거하는 해다. 윌슨은 이미 두 번 임기를 거쳤으니 쉬는 일만 남았는데, 후임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에 적극 나섰다. 전국을 누비면서 ‘국제연맹’을 국민들에게 설득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러다가 넘어졌다. 직무 불능 상태에 빠졌다.
 
  평화주의자이면서 이상주의자였던 윌슨은 일본의 원죄(原罪)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형제(原敬 수상의 조선인관)로서 지내온 이웃을 근대가 되어 힘 좀 생겼다고 깔고 앉은 것이 일본의 원죄다. 원죄를 안고 사는 자와 평화체제는 불가하다는 것을 모른 채 윌슨은 갔을 것이다.
 
 
  워싱턴회의
 
  1921년 3월에 출범한 공화당의 하딩 정권은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 등 8개국을 미국에 오게 하여 회의를 열었다. 이른바 역사의 워싱턴회의이다. 해군군축과 중국을 중심한 극동태평양 지역문제를 토의하는 자리였다. 워싱턴회의라 하면 보통 제1차대전 후 세계 해군3강으로 떠오른 미·영·일의 군함톤수를 5:5:3으로 확정한 것만 운위되는데, 지금 와서 보면 미국이 일본의 침략적 국가 스탠스를 대폭 조정하는 회의였던 것 같다.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는 그렇게도 버텨 윌슨을 궁지로 몰면서 얻어냈던 구 독일의 산동권익을 이번에는 선선히 내놓았다. 볼셰비키 혁명에 간섭코자 미국과 함께 출병하였다가 미국은 진작 빠져나왔는데도, 7만5000명이나 계속 동(東)시베리아의 요지에 주저앉아 있던 병력을 이 회의에서 철수키로 했다. 또한 일본은 러일전쟁 이래 그들의 ‘빽’이었던 영일(英日)동맹을 폐기했다. 영국과 무언의 동맹인 미국은 영일동맹으로 인해 일본의 침략적 행태에 끌려들까 우려했던 것이다.
 
 
  미국, ‘조선’카드로 일본을 마사지
 
  그러면 일본은 왜 이렇게, 평소 같으면 전쟁을 몇 번이나 해야 할 양보를 서슴없이 했는가. 미국이 드러나게 무슨 압력을 행사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동안 별로 다룬 적이 없는 질문일 것이다.
 
  일본은 이 회의참석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1921년 7월 11일 미국의 타진이 있고 나서 일본이 답한 것은 8월 23일이었다.
 
  일본대표단에는 출발에 앞서 회의에 임하는 기본방침이 하달되었다. 여태까지 일본의 무슨 국제회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중에 조선문제를 두고 엄한 지침이 시달되어 있다.
 
  “독립을 바라는 조선인의 시도에 의해 조선문제가 회의에 상의(上議)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만약의 경우에라도 부의(附議·논의에 부쳐짐)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즉각 거척(拒斥·거부하고 배척함)되어야 할 것”이다.
 
  회의의 막전막후에서 조선문제 거론의 가능성을 높이 예상하고 이를 봉쇄하려는 노력이 집주되고 있음을 역력히 느끼게 하는 지침이다.
 
  이 무렵 미국 속 독립운동의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미국인들로 조직된 ‘조선의 벗’ 사업보고는 1919년 3월부터 1920년 9월까지, 미국 신문에는 3·1운동과 조선에 대해 9000건이나 기사가 실렸고, 이 중에서 일본 쪽에 이해를 표시하는 기사는 50건에 불과했다 한다.
 
  여론이 정치의 향배를 결정하는 나라 미국에서 여론은 압도적으로 한국 독립운동 편이었다. 정계는 물론 공화당이 주도하여 국제연맹을 거부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이겼다.
 
  한국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 희망을 가질 만한 분위기였다. 이 무렵엔 팀워크도 좋았다. 임정의 미국 내 조직인 구미위원부는 위원장 이승만, 부위원장 서재필, 서기 정한경에 미국인 전문가 돌프, 토머스 등 고문 두 사람까지 잘 짜여 있었다.
 
  이승만이 1921년 6월 상해로부터 미국에 도착하기 전, 1월달에 서재필은 하딩 대통령 당선자를 오하이오주 메리온의 사저(私邸)에서 회견하였다. 한미조약 제1조의 주선조항에 의한 미국의 조약상의 책임이행을 두고서, 3·1운동 여론을 배경으로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때의 미국 분위기를 짐작하게 하는 해프닝이 하나 있다. 워싱턴회의가 개최되기 이틀 전인 11월 4일 일본의 회의참석을 결단했던 하라 다카시 수상은 동경역에서 18세짜리 철도 전철수 나카가와(中岡良一)에 의해 척살(刺殺)되었다.
 
  그런데 미국 신문에, 그것도 <뉴욕타임스>(1921년 11월 5일)에 ‘Korean Fanatics(조선사람 광신자)가 일본 수상을 찔렀다’고 크게 제목이 붙었다. 이게 무슨 얘긴가. 미국여론의 심층심리에, 조선사람에 의해 일본이 응징되어야 한다는 무의식의 원망이라도 있어 기자가 감염되었다는 말인가. 단순한 오보(誤報)일 수도 없고, 뭔가 생각을 붙드는 해프닝이다. 이 현상 역시 3·1운동의 파장 속에 있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본, 미국에 엎드려 3·1운동 충격 흡수
 
  워싱턴회의에서 하나의 축(軸)인 해군 군축이라 해 봤자, 재정이 취약한 일본은 몰라도 미국은 겁나지 않았을 것이다. 의회가 3·1운동으로 산동문제를 물고 늘어져 국제연맹을 파투 놓은 쇼크가, 미국으로 하여금 워싱턴회의를 소집하게 했을 것이다.
 
  러일전쟁 때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선심 쓰듯 일본에 건네 버린 ‘조선’카드가, 일본을 향해서는 기막히게 위력적인 것을 3·1 쇼크 속에서 알았을 것이다.
 
  제1차대전을 거치면서, 산동문제나, 21개조 요구 등으로 드러난 일본의 침략성을 마사지해 보려 든 것이 워싱턴회의였다. 이때에 미국은 ‘조선’카드를 썼다. 흔들 필요도 없었다. 대통령당선자 하딩이 유권자 서재필을 만난 것으로 족했다. 워싱턴회의를 향해 3·1의 강풍을 업은 것은 미국이었다 하겠다. 워싱턴 회의에 조선독립 문제는 상정되지 않았고, 일본은 미국이 원하는 모든 양보를 군말 없이 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서, 세계제일의 강국이 되었으나, 전쟁할 형편은 아니었다. 워싱턴회의에 참석했던 나라들로 9개국조약 등을 맺어 중국의 주권, 영토보전, 기회균등원칙 등을 약속케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조선의 희생을 방치한 채, 일본의 원죄에 눈뜨지 못하고 극동질서를 미봉한 것이다.
 
  일본이 조선에서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꾼 것이, 국내차원에서 3·1운동의 충격을 흡수한 조치라면, 일본이 미국에 엎드리듯이 워싱턴체제 편입을 감수한 것은 국제 차원에서 3·1운동 충격을 흡수한 것이라 할 것이다.
 
  조선독립운동 앞에 양심의 법정은 아직 멀었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워싱턴 체제를 깨고 나올 때까지다.
 
 
  마셜의 기고문
 
  워싱턴회의는 조선독립운동 앞에 문을 열지 않았지만, 인류 양심법정의 문은 열려 가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소리가 있어, 기약없는 인고(忍苦)의 길을 가고 있는 독립의 지사들을 소망 위에 붙들어 주었다.
 
  윌슨 정권 때의 부통령이었던 마셜은 워싱턴회의를 지켜보고서 그 직후인 1922년 2월 11일자 <시카고 데일리 뉴스>에 조선문제에 관해 기고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이 러시아로부터 침략의 위화에서 벗어난 이상(필자 주: 이 부분은 일본사람들의 습관적 변명의 답습), 일본은 조선인이 바라는 정부가 부활할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평등정의의 사상을 부단히 문명국민 앞에 피력한다면, 세계인류의 여론에 의해 일본인이 그 지설(持說)을 변개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을 믿는 바이다. …조선사람들에 의한 워싱턴회의에의 조선문제의 제출 진정은 민족자결주의자가 믿는 것처럼, 인권의 최후의 결정은 검(劍)에 의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류 최고의 이성(理性)에 의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세계 일반에 적용할 필요성을 한층 높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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