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침략전쟁’이라는 커다란 전쟁의 제1막이 청일전쟁이었고, 제2막이 러일전쟁이었다. 침략전쟁인 청일전쟁을 하고 나니까 그 미완의 목표를 완수하자니까 러일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許文道
⊙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駐日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정무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許文道
⊙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駐日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정무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 러일전쟁 발발 직후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수상이 지난해 10월 서울에 와서는 “과거를 직시할 용기가 있다” 하여 한국 사람들은 뭔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이해해 달라”는 말뿐이었다.
용기가 있어 직시를 했어도, 직시한 ‘과거’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있지 않는 한, 상응한 조치나 말은 하기 어렵다는 얘기만 남기고 하토야마 수상은 돌아갔다.
‘국민의 지지가 있지 않는 한’이라 말했을 때, 그의 염두에는 당시 NHK가 방영준비 중에 있던 거작(巨作)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이 있었을 것이다. 제작 중 이미 온 일본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언덕 위의 구름>이 러일전쟁 스토리이고, 러일전쟁은 ‘야마토’ 민족의 영광의 정점이라는 것, 그리고 러일전쟁 스토리는 일본에 내셔널리즘 열풍을 몰고 오고,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하게 됐다는 것을 하토야마 수상이 모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진짜는 그 시점, 서울에서 ‘용기’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 안에 내셔널리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수상이 서울에서 ‘과거’ 근처의 얘기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외면하기 어려운 사실이 있다. 일본이 ‘일한병합’이라 하는 일을 저지른 지 올해 백 년이 되는 해다. ‘병합’이라는 사기적 언사 밑에서 일본이 한 짓을 하토야마 수상은 한번 직시해 볼 것인가. 그것은 일본인이 한국인의 국가를 박탈하고, ‘국민’을 파괴하고, 한국인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멸살하는 것이었다.
백 년 전 이때를 기점으로, 조선혼을 못 버릴수록 조선사람들은 일본인에게 능멸당하고, 착취당하고, 수탈당하고, 투옥당하고, 고문당하고, 불태워지고, 학살당하고, 고토(故土)에서 쫓겨나 얼어 빠진 만주벌로 헐벗겨 내몰리는 운명 앞에 서야 했다. 일본사람들의 전쟁에 끌려가 머나먼 태평양의 고도에서 굶어 죽은 조선의 젊은이들은 일본 국가에 의해 존재의 의미마저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백 년이 가도 못 잊는 사안은 백 년이 되면 한 번 곱씹어 보는 것이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지극히 보통의 일이다. 이 백 년을 당해, ‘과거는 안되고, 미래지향이라야 한다’고, 교양과 경륜을 코에 거는 사람들이 있다. 덜떨어진 노예의식의 잔존물이라 할 것이다.
민족수난사를 直視해야
알아야 할 것은 상승하는 민족만이 수난사의 직시를 통해 민족적 다이내믹의 기폭력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수난의 과거를 직시하는 자만이 미래의 영주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극일(克日)의 동력원은 민족수난의 직시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보상받을 유일한 길이다. 선린(善隣)으로 가는 역사의 평형운동도 출발점은 수난의 직시라야 맞다.
망국체험 백 년을 앞둔 작년 일본에 등장한 새 정권이 동아시아 공동체 얘기를 끄집어 내었다. 지금도 한번 맞물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울에도 있어 보인다.
앞에서 든 러일전쟁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은 지난 연말에 1시간 반짜리를 5회에 걸쳐 방영했는데, 금년 가을과 내년 가을에 각각 4회씩 더 방영할 것이라 한다.
언급이 있었지만 조선을 삼키고자 벌였던 전쟁판 그림을 하필 그 조선이 망한 백 년에 맞춰 이웃 코앞에서 틀어 대면, 당한 이웃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인공위성까지 띄워 놓고 도국(島國)주의는 안 버리겠다는 것인가.
동아시아 공동체 얘기가 나와 있는 마당에, 그 상대 거덜내고 치욕을 안긴 전쟁 스토리를 자기들 입맛으로 틀어 대면, 한국사람들하고 같이 만들 미래가 있다는 얘기인가, 없다는 얘기인가.
오늘 일본사람들의 이 같은 행태를 비유할 사례가 백 년 주변에 있다. 19세기 후반, 일본이 한 발 한 발 조선을 짓밟고 들어올 때, 강조한 것은 늘 조선의 ‘자주독립’이었다.
청일전쟁을 선포하면서 일본 천황이 낸 조서는 조선의 ‘독립국의 권의(權義)’를 존중하고 ‘자주독립을 부조(扶助)’함을 전쟁 명분으로 했다. 전쟁을 끝내는 강화조약에서는 일본은 청국(淸國)과 함께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의 나라’임을 선언하였다.
이 같은 선언이 있고서 여섯 달밖에 지나지 않은 1895년 10월, 일본 측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여기서는 길게 얘기하지 않겠지만, 서울 외교 공관에 와 있던 일본정부 대표가 야밤에 무리를 이끌고 황후의 침소에 쳐들어가 저지른 일이다.
정권도 바꿔 놓았다. 일본사람들은 입으로는 조선독립이라 해 놓고 행동으로는 전혀 반대되는 딴 짓을 한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성사되려고 한다면, 요청되는 것은 일본도 모르지 않을 ‘인(仁)의 정서’의 공유일 것이다. 촌스럽다 할 것이 아니다. 최소한 지향은 되어야 할 것이다. 상대의 형편은 헤아림 없이, 나 좋으면 그만이다 하는 도국주의 갖고 공동체는 어려울 것이다.
전체로서의 일본인들의 명분과 실제 행동이 분리되는 현상은, 백 주년 오늘의 <언덕 위의 구름> 속에도 있다 할 수밖에 없다.
전쟁소설 <언덕 위의 구름>
일본 천황이 조선 망국에 즈음하여 발한 조서에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유지하고, 제국의 안고(安固)를 확보하고자… 병합이 필요’(〈小村外交史)하다 했으나, 그때 이후 동양 평화는 날이면 날마다 파괴되어 갔고, 일본은 패망하고 말았다. 지난 호에서 보았다.
일제(日帝)가 조선을 삼키게 되는 것은 러일전쟁에 이기고 나서다.
일제는 대만도 있지만 조선을 식민지로 하여, 본격적인 제국주의를 하게 되었다. 조선을 깔고 앉아 그렇게도 인정받고 싶던 서양 열강 축에 끼이게 됐다고 자만하게 됐다.
일본은 백 년이 더 지났어도 저들 역사의 영광의 정점에 러일전쟁을 두고 있어 보인다. 그동안에도 러일전쟁 스토리에는 내셔널리즘 바람이 따라다녔다.
일본이 2차대전에 패전하며, 아직 잿더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사람들 앞에 <메이지(明治)천황과 러일대전쟁>이라는 영화가 등장했고, 관객동원 2천만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제작사는 재벌권에 일거에 진입했다. 러일전쟁의 영화 한 편이 일본인들로 하여금 미군 폭격의 폐허에서 일어나, 복구의 망치를 들게 하고, 총칼로 어찌 못한 미국에 트랜지스터라도 들고 쳐들어갈 채비를 하게 했다.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러일전쟁을 주제로 한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1968년부터 한 신문에 연재하여 1972년에 끝냈다. 한 비평가는 소설 속에 그려진 러일전쟁을 ‘민족의 서사시’라면서, “민족의 서사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언젠가는 망한다. <언덕위의 구름>이 계속 읽히고 있는 한 ‘일본인’은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1968년 그때가 일본이 한창 고도성장할 때였다. 1971년에 일본은 서독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된다. 메이지 일본을 음울하게 그리는 그 시절에 흔했던 좌파 사관(史觀)과는 달리, 근대 일본의 청춘기를 명랑하고 진취적인 리얼리즘으로 그리려 든 것이 고도성장 무드와 맞아떨어져 소설은 공전절후(空前絶後)의 히트를 쳤다.
문고판 8권짜리 이 소설의 3권까지는 청춘소설이다. 러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의 청년시절을 그리고 있다. 국가의 운명과 향방에 젊은날의 인생목표를 걸어 아무런 동요와 의문이 없는 그런 시대와 삶의 자세가 그려져 있다.
作家 시바 료타로의 ‘조국방위전쟁’
문제는 이 젊은이들이 인생의 목표로 걸었던 국가의 대의(大義)가 뭐냐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한 TV 방담을 통해 집필동기를 밝히면서, 일부에서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러일전쟁을 ‘조국방위전쟁’이라 해야 제대로 그려질 것으로 여겼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에 걸렸던지 한마디 보탠다.
“러일전쟁이 끝나면, 일본은 이른바 제국주의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러일전쟁의 평가는,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 수상쩍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는 데가 있습니다.”
이어 시바 료타로는 주인공들의 행적을 염두에 두고 주관적 신념을 등장시켜, ‘주관적 조국방위전쟁’이라고 인식상의 혼란을 마무리하고 넘어간다.
시바 료타로는 1994년 죽기 2년 전에 <문예춘추(文藝春秋)> 1000호 기념으로 <일본인의 20세기>라는 논문을 써서 일본인들의 러일전쟁 경험을 논한다. 이 논문은 <문예춘추>가 NHK의 <언덕 위의 구름> 방영에 맞춰 2009년 12월호에 재록했다. 이 논문에서 시바는 딴소리 안 하고 확실하게 ‘조국방위전쟁’이라 해 놓았다.
시바는 죽고 나서, 인기는 더 올라가고 책도 더 팔리는 것 같다. 십 년이 더 지났는데도, 책방에는 시바 코너가 있고, 대표적인 종합잡지가 일 년에 두 번, 세 번 시바 특집을 꾸리고 있다.
지식계에서는 ‘시바 사관’에 감동한 버젓한 대학교수, 평론가들이 ‘자유주의 사관’이라 하여, 태평양 전쟁을 ‘자위전쟁’, ‘아시아 해방전쟁’이라면서 무리를 지어 교과서 문제나, 군국주의적 과거, 아시아 침략의 정당화 작업에 나서고 있다.
공영방송 NHK가 방대한 제작비를 들여 지난 연말 방영을 시작한 <언덕 위의 구름>의 영상화는 시바 사후 열기의 압권이라 할 것이다.
시바 사관은 이제 일본사람들의 평균적인 교양이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 시바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
지난 연말로 중국은 세계 제일의 수출국이 되고, 국민총생산(GDP)은 일본의 4조6000억 달러를 넘어서 4조8000억 달러로 세계의 두 번째가 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일본은 이 현상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기 어려울 것이다.
뭔가 안 풀리면 전쟁 벌여
시바는 서양 제국주의를 ‘강도’라고 표현하는데, 그 원천에는 아편전쟁이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 150여 년쯤 거슬러 올라가면 재정을 파탄 내고, 국민건강을 심각히 침식하는 아편밀수를 단속하다가, 영국에 해적질당하듯이 노략당하는 중국이 있다. 군사침략당하고, 불평등조약 맺고, 배상금 물고, 땅 떼어 주고. 그것이 중국의 근대 서양과의 만남이었다.
이때에도 영국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있었다. 의회에서 아편전쟁의 전비(戰費)지출 결의는 271표 대 262표, 9표 차로 가결됐다. 뒷날 수상이 되는 글래드스턴은 반대 토론을 했다.
“…그 원인이 이렇게도 부정한 전쟁, 이렇게도 불명예가 되는 전쟁을 나는 여태까지 알지 못하고, 읽어 보지도 못했다. 지금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신사는, 광동(廣東)에서 영광에 가득 차 펄럭이는 영국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 깃발이야말로 악명 높은 금지품의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펄럭인 것이다. 현재 중국 연안에 게양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는 펄럭일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공포를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후 아시아를 뛰쳐나간 일본까지 가세한 서세(西勢)로부터 당한 굴욕과 침탈이, 허리를 펴게 된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중국사람들 뇌리에 떠오르지 않을 것인가.
작가 시바 료타로가 생전에 밀리터리즘의 오해를 살까 봐 영상화를 거부했던 전쟁스토리를 지금 TV 드라마에 올리는 것이 현하 일본을 엄습하고 있는 세계적 경기침체와 중국의 대두에 대한 대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일본은 뭔가 잘 안 풀리는 게 있으면 곧잘 전쟁에 기대었다.
돌이켜보면, 1930년대가 되면서 많은 일본사람이 ‘생존권’이다 ‘생명선’이다 하면서 만주로 대륙으로 침략하고 진출하는 열기에 들뜨게 된 직접적 원인은 1920년대 말, 일본에 덮친 세계공황으로 인한 경제의 폐색감(閉塞感)이었던 것은 모두 아는 얘기다. 경제위기를 전쟁으로 출구를 열려고 든 대표적인 경우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일본 외상 중 가장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 밑에서 의회 대책을 겸하고 있던 때, 국회해산이라도 해야 국면을 타개할 상황에 대해 조선의 동학봉기 정보를 접하고는 전쟁을 촉발할 조선출병을 순간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내정위기를 타고 넘었다. 정치위기 돌파를 위해 전쟁도발 조치로 ‘인심외전(人心外轉)’의 계기를 잡았던 것이다.
1980년대, 일본이 서양을 따라잡았다고 자부하고 나서도 이제 30년이 넘었다. 그러나 온 국민이 공유할 새 이념이나 목표가 나타난 것 같지는 않다. 이념이나 목표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 풍요의 바다에서 흐느적거리는 젊은이들을 안고 있는 ‘무목표 사회’의 처방전을 <언덕 위의 구름>에 기대하는 축도 있는 것 같다. 드라마 제작을 발안, 기획한 사람들이, ‘일본인 아이덴티티가 붕괴하고 있고, 양질의 전통을 부정하려는 풍조가 있는 배경에서, 그 부활에 시바의 작품이 큰 자극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국민을 고무하는 전쟁스토리가 ‘침략전쟁’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중국의 대두를 함께 보면서, 보다 내용 있는 교린(交隣)을 필요로 하는 시대의 입구에서, 그 이웃을 침략했던 침략전쟁 스토리의 그림을 사방 뿌려대는 것은 역시 문제가 있다.
러일전쟁은 무엇보다도 조선침략전쟁이었다. 이하에서 풀어 보겠다.
시바의 조선관
“우리는 아직도 조선반도의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있으면, 늘 열등감을 느껴요. 이건 당당한 수천 년의 문화를 가진, 게다가 수천 년이나 독립해 온 나라를 말이오, 태연하게 병합해 버렸어. 병합이란 모양으로 상대의 국가를 빼앗아 버렸거든. 이처럼 우열한 짓이 일러전쟁 다음에 일어난 것입니다.”
일본 작가들이 아무나 말만 나오면, 한국에 대해 수천 년의 문화독립 국가를 빼앗게 되어 ‘잘못됐다’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바는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에서 자랐다. 교포 우인(友人)들도 있고, 시바가 청년기에 처음 사회에 접했을 때, 재일동포들이 꾸리는 역사문화 관계의 잡지와 짧게나마 인연을 맺기도 했던 모양이다.
시바가 위에서 ‘조선반도의 사람들’이라 했을 때는 생각 속에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열등감(引け目·히케메)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국가 레벨의 죄책감을 두고서는 그 표현에 인색할 수 있는 대목을 구체적인 대인관계의 레토릭 ‘히케메’로 수습하고 있다.
‘우열한 바보스런 일이 러일전쟁 다음에 일어난 것’에서는 ‘러일전쟁 다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이라 함으로써, 나라를 뺏은 일이 러일전쟁의 성격에 내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러일전쟁 자체는 ‘조국방위전쟁’으로 정당하고 의미 있는 것이지만, 전쟁을 구경하고 박수치고 외교하는 사람들이 전쟁 끝나고서 전승에 들떠 남의 나라를 뺏는 이상한 짓을 했다는 식의 얘기로 되는 것이다. 뭔가 비약이 있다.
시바는 스스로가 조국방위전쟁으로 알고 서술한 러일전쟁이 끝나고서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되고 만 사실(史實)을 그의 문화감각, 역사감각으로는 한 줄에 세울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물론 조선반도를 손에 넣음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방위적 의미는 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 이긴 이상, 이젠 러시아는 일단 들어가 버렸으니까, 그 이상의 방어는 과잉의식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후에 몇천 년 계속해도 이 일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시바는 일본의 조선 국가 강탈행위를 러시아의 남하를 들어 설명해 보려다가, 씨가 먹혀들지 않는다고 여겼던지 포기한 채, 조선의 한을 남겨 놓고 지나간다.
위에서 든 시바의 얘기는 1980년대 후반 NHK의 연속 방담 프로그램 <잡담 ‘쇼와(昭和)’에의 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방담은 2차대전 패전까지의 쇼와시대 20여 년간을 대상으로 한 사론(史論)이지만, 체계적인 것은 아니고 다분히 인상비평적이고, 때론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이 속에서 하나 더 시바의 조선과 관계 있는 제국주의관을 들어 본다.
“일본의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는 러일전쟁 다음에 일어납니다. 극단으로 얘기하자면, 히비야공원에서 군중이 국민궐기대회 같은 것을 하여,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에 대해 ‘그렇게 얄팍한 것은 반대다. 좀 더 듬뿍 러시아로부터 낚아채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나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만, 야적, 강도의 부류였습니다.”
시바가 일러전쟁=조국방위전쟁에 집착해서인지, 설명이 너무 듬성듬성이고, 제국주의의 주체가 폭동 군중인 것처럼 들린다.
러일전쟁이 마무리되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조인된 것은 1905년 9월 5일이다. 이 조약을 통해, 한국의 자유처분, 그리고 요동반도 조차권 및 여순-하얼빈 철도를 일본이 차지하게 됐다. 폭동까지 간 히비야의 군중대회는 배상금과 영토할양을 러시아 측에 더 요구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전쟁을 계속할 형편이 아닌 것을 정부는 국민한테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군중은 전쟁 전부터 일본정부가 개전(開戰) 여론몰이에 동원하고, 후방지원에 동원하고, 위문주머니 보내기에 동원했던 사람들 아닌가. 히비야 공원에 다른 군중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일본이 입문했던 제국주의는 러일전쟁의 출산물이다. 전쟁을 기획하고 추동했던 군부의 보스들, 그 군부를 오히려 끌고 갔던 제국주의 외교의 영악한 챔피언들, 무쓰 무네미쓰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를 두고 시바는 어딜 보고 있나.
시바의 이토 히로부미 인식
시바가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을 소설에서 침략전쟁으로 보지 않아야 할 형편에 대해서는 모를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를 평화주의자로 아는 것 같은 인식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서술이 보인다. 청일전쟁을 침략주의적으로 보는 “통렬한 후세의 비평을 당시의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가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토한테는 그 같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후에 뜯어 보기로 하고, 소설 속에 조선 관련 언급을 몇 개만 더 주워 본다.
“이 전쟁은 청국이나 조선을 영유하려고 하여 일으킨 것이 아니고, 다분히 수동적인 것이었다.”
이런 얘기도 있다. 전쟁의 “원인은 조선에 있다” “한국이나 한국인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다고 한다면, 조선반도라고 하는 지리적 존재에 있다”는 얘기도 보인다.
역사 시간에 지리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시바의 40대의 사회과학으로 알고, 이토 히로부미 얘기를 해 보겠다. 표면의 공식기록에는 이토 히로부미는 청일전쟁의 첫 파병에도 소극적이었고, 영일(英日)동맹도 원하지 않았고, 러일전쟁 개전도 반대였고, 한일병합도 반대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결정은 이토가 끝내 반대하면 성사될 수 없는 자리에 이토는 있었다. 이토가 ‘노(No)’라고 하면 천황의 재가는 있을 수 없었다. 이토가 어떤 자리에 있었든지 간에.
정국 돌파용으로, 기지에 의해 조선침략의 문을 연 간악한 마키아벨리스트 무쓰 무네미쓰는 이토 총리 밑 외상이었다.
동학 봉기로 조선 정부가 청군을 부르자 이에 덩달아 대규모 혼성여단 8천여 명을 서울에 보내 놓고 있을 때다. 동학과 화의가 성립되자, 조선 정부는 청일(淸日) 군대 모두 물러가기를 요청했다. 청보다는 일본이 응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1894년 6월 30일 주(駐)도쿄 공사를 통해 협박성 간섭을 하고 나왔다. 청일 공동 철병(撤兵)에 응하지 않으면 “일본 정부는 스스로 중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임을 충고한다.” 무시하기 어려웠다.
일본을 ‘늑대국가’로 몰고 간 이토
이 서면을 들고 무쓰 외상은 생각에 잠겼다가 이토 총리의 저택을 찾아갔다. 청일전쟁의 프로모터였던 무쓰는 그 변명록인 <건건록(蹇蹇錄)>에서 이때 이토의 결단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同) 총리는 일독(一讀)하고서 한참을 심사에 빠졌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오인(吾人)은 지금에 이르러 어떻게 노국(러시아)의 지교(指敎)에 응해 우리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확언했다.”
러시아 공사가 간섭을 했을 때는, 조선에 온 일본군대가 꼬투리를 잡지 못해 우왕좌왕할 때였다. 이토는 정색한 한마디로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
청일전쟁이 러일전쟁 도입부의 전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토의 이때 결단이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양차 전쟁은 물론이고, 일본으로 하여금 패망할 때까지 50년간 전쟁을 하는 오오카미(늑대) 국가의 길을 가게 한 것이다.
메이지 일본의 최대의 정치가라 일컬어진 이토의 치자로서의 경륜과 덕이 허물어지는 장이, 청일전쟁이 끝나고서 시모노세키 강화회담에서 있었다.
이토의 상대 역시 그와 겨루고도 남을 청나라 거두 리훙장(李鴻章)이었다. 최대의 논쟁점은 조약에 요동반도 할양을 넣느냐의 문제였다. 리훙장은 ‘가혹’을 연발하면서, 이처럼 가혹한 조건으로는 성사가 되어도 양국의 우의를 손상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동양평화의 대국을 그르칠 뿐이라고 장문의 포지션 페이퍼를 이토에게 내놓았다.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에 영원히 집목(輯睦·부드럽게 화목함)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구적시(仇敵視)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두고서는, 일본의 국계(國計), 민생에 관계되는 바 심대할 터이다. … 그러하므로 동양 이대(二大) 국민이 영원히 친목하여 피차 안도하고, 복택을 면장(綿長·영원히 이어짐)하는 것이 실로 이 일거에 달려 있는바, 귀(貴) 대신의 숙려하고 주획(籌·계획공부)함을 바라도다.”
리훙장은 일본 같은 작은 나라가 전쟁을 겁내지 않으니, 국민이 중세에 허덕이고 있을 것을 꿰뚫고 있던 것 같다.
이토는 자기가 천거했던 무쓰 외상의 간특한 공명심을 제어치 못해, 리훙장의 동양평화의 대의에 대국도 못해 보고, 결국은 3국간섭을 만나, 요동반도를 토해 놓고 말았다. 이토의 오브라트(당의정·糖衣錠)로 싼 침략주의만 역사에 남았다.
작가 시바의 이토 인식의 착오가 그의 러일전쟁관도 빗나가게 한 것은 아닐까.
강도 이야기
그러나 시바가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일러, ‘야적떼’, ‘강도’로 표현한 것은 작가 시바의 격을 느끼게 한다.
일본에는 지난 시절의 전쟁이나 패망을 돌이켜보는 연구나 저술이 많지만, 거의가 합리주의의 구현에 어떻게 모자람이 있었는지를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행동은 보다 원천에서, 내면에서, 알든 모르든, 어김없이 영향을 주는 윤리감각에 대해서는, 반추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일본 우파 지식인들의 큰 특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바는 일제가 마지막에는 중국,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 세상 거의 모든 나라를 상대로 전쟁하게 됐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 같은 종말적 선택은 윤리감각 결손의 장기 누적으로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사태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합리적 동기에 의한 선택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시바가 NHK <잡담>에서 하고 있는 얘기의 전후를 보면, 그가 제국주의를 강도짓이라고 하는 것은 영국이 처음 동양으로 와서 아편전쟁에서 중국한테 하는 짓을 보고 느낀 표현일 것이다. 시바의 표현에서 도덕적 용기가 느껴진다.
시바의 ‘강도’ 표현을 빌려 보겠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강도’들이 동아시아로 쳐들어왔을 때에, 동네 어귀에 있던 일본은 강도떼들이 두렵긴 했으나, 그들이 가진 장비, 총포가 놀라워서, 그들을 따라가서라도 한번 비슷한 걸 가져 보자고 했던 반면, 골목 안에 있던 한국은 총포보다는 그 ‘강도’떼의 행동거지에 먼저 눈이 가서 상종 못할 부류로 알고 문을 닫아 걸려 했다.
우리는 ‘강도’떼에서 예(禮)의 유무를 찾았고, 일본은 ‘강도’떼가 가진 총칼의 날카로움에 반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서양 ‘강도’의 장비를 습득하고, 제조법을 익히는 데 기민했다. ‘강도’짓인들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습이 시작됐다. 1854년의 미국 페리 함대 함포 공갈 시늉을 만만한 이웃 한국 상대라면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영국식으로 단물 빨아댈, ‘강도’짓의 발판을 만든 것은 1876년, 강화도로 쳐들어가고 나서다. 영국을 본받아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일본의 ‘강도’술 습득은 빨랐다.
서방覇道의 앞잡이냐, 동방王道의 干城이냐
근대 일본의 심법(心法)은 ‘동네 어귀에서 강도떼를 먼저 맞이한 입장에서 이웃들과 연락, 합력하여 강도떼를 막아내는 데 위험하게 달려들 것이 아니라, 강도떼에 오히려 붙어 심부름이나 해 주고, 길 안내라도 하다 보면, 강도들이 쓰는 칼자루라도 챙길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가 한패가 되기만 하면, 순해 빠진 어리어리한 이웃들을 단칼에 밥으로 해서 나쁠 것 없다. 나만 살면 됐지’일 것이다.
같은 동아시아인으로, 일본의 이 같은 심법에 대해 함축적인 경고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이 59세로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일본 고베(神戶)에 들렀다. 중국 남쪽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이었다. 상공회의소 등의 사회단체가 고베 고등여학교에서 2천명이 넘는 청중을 모아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 연설의 끝부분이 널리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당신들 일본 민족은 서방 패도(覇道)의 앞잡이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동방 왕도(王道)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가, 그것은 일본 국민이 신중히 선택하면 좋을 것입니다.”
일본에 망명한 적도 있는 쑨원은 앞에서 든 근대 일본의 심법에 대한 감이 있었기에 위와 같은 연설을 했을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 얘기가 나와 있는 지금, 그것은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 지도층에 쑨원이 얘기하는 패도 아닌 왕도적 지향이 있어야만 비로소 현실성이 있을 것이다.
‘강도’ 얘기의 계속이다. ‘강도’술 터득이 빠른 일본에 대해 서양 ‘강도’의 두목 격인 영국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서양 ‘강도’ 동네의 룰을 거의 익히고, 서양 장비를 손에 넣자, 잠에서 못 깨어 나고 있는 이웃 조선을 덮쳐 ‘강도’짓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1894년 7월쯤이다. ‘강도’짓의 방해꾼 청나라와의 한판이 임박한 시점이다.
일본이 그렇게 매달려도, 때가 이르다면서 거부하던 불평등조약 개정을 영국이 해 주겠다고 나왔다. 치외법권을 없애는 등 대등평등 조약을 맺었는데, 두목 영국은 드디어 일본을 서양 ‘강도’단의 일원으로 자격을 인정해 준 셈이다.
북청사변과 일본군
1900년의 의화단 사건은 서양의 ‘강도’짓에 당하기만 하는 정부가 딱해 부청멸양(扶淸滅洋·청을 떠받치고 서양을 배격)의 구호로 일어난 중국의 민중봉기였다. 천진(天津)으로부터 북경으로 번져 서양열강의 외교공관 지역을 봉쇄했다.
청나라 정부는 어느새 의화단에 합세하여 서양열강에다 선전포고를 해 버렸다. 이때 열강은 2만여의 군대를 동원하는데, 그 절반이 일본군이었다. 일본의 성장을 눈여겨보던 두목 영국이 취한 조처였다. 일본은 드디어 서양 ‘강도’들에게 인정받고 축에 끼여 이웃 무지렁이들을 깔아뭉개는 데 앞장서는 오랜 탈아(脫亞)의 소망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을 포함한 8개국 연합군은 8월 북경에 입성했다. 이때에 연합군은 병사들에게 3일간의 약탈을 허가했다. 서양 제국주의가 ‘강도’떼임을 인류사 위에 영세불망의 기록을 남기는 현장이 거기 있었다. 북경은 폭행, 약탈, 강간… 아수라의 무법천지로 화했다.
청은 굴복하여 열강과 북경의정서라는 것을 조인하고, 북청사변은 마무리됐다. 청이 당한 굵은 것 몇 가지만 들면 열국에 사죄사 파견, 북경, 천진 등 요지에 군대주둔권, 배상금 4억5천만 냥(兩) 등. 청일전쟁의 배상금이 2억 냥인 걸 감안하면, 중국은 혹독하게 제국주의 ‘강도’떼에게 당한 것이다. 그 ‘강도’떼의 중심에 어느새 근대화한 일본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도 영국사람 중에 깨어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청나라에 와 있던 총 세무사 바트 하트, 그는 의화단을 애국자라 하면서, 이 사건은 ‘한 세기에 걸친 변동의 서곡으로, 극동 장래의 역사 기조가 될 것이다. 기원 2000년의 중국은 1900년의 중국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포트 나이트리 리뷰>誌). 일본이 서양 ‘강도’떼 앞잡이 노릇 하는 것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다.
이런 것 저런 것 글줄이나 쓰는 일본 사람들은 북청사변 때 일본군이 그 민첩함과 규율로 서양 열강으로부터 칭찬받았다고 자랑하고 있다.
20세기 초두가 되어 미국이 대두하고 남아프리카의 보어 전쟁으로 영국은 고달프기도 했지만, 이때의 일본군이 인상에 남아, 어디에서 다른 누구와도 하지 않던 동맹을 극동에서 일본과 맺어 준다(1902년 1월). 이 영일동맹을 기반으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해 볼 엄두를 내게 된다.
러일전쟁은 일본의 조선침략전쟁
러일전쟁이 일본의 조선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일본과 러시아, 모두 침략적인 두 제국주의의 충돌이 러일전쟁이었으므로 전쟁 프로파간다에 휩쓸리기 쉬운 구조 속에 있고, 일방이 스스로의 입장을 조국방위전쟁이라고 하기 십상이다.
네 가지 점에서 러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었다.
①개전 교섭에서 드러난,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탐욕은 반도 전부였다. 개전 시점에서 러시아는 조선땅 욕심은 없었고, 일본의 반도에서의 행위에 대한 주문뿐이었다.
②전쟁이 나자 일본은 조선영토를 군사점령부터 했다는 것.
③일본정부가 강화를 통해 실현시킨 최대의 요구사항은 ‘조선의 자유처분’이었다.
④청일전쟁의 목적인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 확립이 미완으로 끝나자, 그 완결을 위해 러일전쟁은 추진됐다는 것.
첫째로,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각오하는 최대의 이유는 조선문제였다. 최고 결정기관인 어전회의는 개전 8개월 전인 6월, ‘조선은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그 일부라도 러시아에 양여하지 않는 방침’을 확정했다. 일본의 러시아와의 전쟁은 이때에 이미 각오된 것이다.
강경파이자 대(對)러시아 조기 개전론자인 외상 고무라 주타로가 러시아와 개전 교섭을 벌이는 것은 7월부터다. 개전 교섭이란 말이 우습지만, 서로의 요구사항을 들이대 전쟁 꼬투리를 잡는 게임이라 하면 맞다.
러시아와 전쟁을 않고 조선을 차지해 보려는 러일협상 노선이 좌절되고 영일동맹(1902년 1월) 노선이 부각되면서, 왕 총리 같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가 만든 여당 정우회 총재 자리를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넘겨주고, 추밀원 의장 자리에 가서 앉았다. 1903년 7월, 러일전쟁 추진파를 전면에 내세우는 의미가 있었다. 키는 작아도 매섭고 영악했던 하버드 출신의 강경파 외상 고무라가 끌고 가는 판이 됐다.
일본은 만주와 조선의 권리를 러시아와 서로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러시아는 만주에 대해 일본의 입질을 거부하면서, 조선에서의 권리는 인정하되 조선땅의 군사적 이용은 안된다고 주문을 달았다. 이 같은 요구는 당시의 조선이나 청나라 정부의 허락이나 양해를 받은 것은 아니고, 강도의 판돈 놀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일본과 러시아의 차이
조선만 두고서, 두 ‘강도’의 탐욕 정도를 보면, 일본은 조선을 통째로 차지하겠다는 것이었고, 러시아는 조선땅에는 욕심이 없지만, 일본의 군사적 이용만은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탐욕은 절대적이었다.
조선땅에 중립지대를 설정하는 문제로도 응수가 있었다. 일본은 한만(韓滿) 국경선에 양쪽으로 50km씩 하자 했고, 러시아는 북위 39도선, 즉 원산-평양선 이북의 조선땅을 전부 중립지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중립지대 문제에서도 조선땅에 대한 일본의 탐욕은 그대로 드러났다.
일본은 영일동맹의 존재로 러시아의 양보가 있을 줄 알았으나 빗나가자, 이내 수준을 높인 최종안으로 시한을 정하고서는, 1904년 2월 단교 선언을 통해 개전조치를 취해 버린다. 선전포고는 2월 10일이었다.
둘째로, 일본은 전쟁이 시작되자, 조선 영토를 점령부터 했다.
선전포고가 있기 이틀 전인 2월 8일, 인천에 상륙했던 임시 파견대 2개 대대(1100명)가 수도 서울에 진입, 정부와 서울 민심의 제압을 노렸다. 이 파견대가 속하는 일본군 제12사단이 2월 8일 받은 명령은 먼저 수도 이남지역을 군사점령하는 것이었다.
12사단의 상륙지는 처음 남해안의 마산이었으나, 도중에 인천으로 변경되어 2월 중순부터 10일간, 상륙을 완료하고 “서울 이남의 점령을 확실히 했다”(橫手愼二, <日露戰爭史>)
해군은 2월 8일에서 9일 사이, 인천항에 있던 러시아의 태평양함대 2척을 기습 격침하고, 나머지는 요동반도의 여순항에 가둬 버렸다. 황해의 제해권을 손에 넣은 것이다.
‘대본영’은 이를 바탕으로 2월 29일 제1군을 진남포에 상륙시키고, 평양을 거쳐 북한을 쓸고는 압록강 도하를 하여 만주로 가게 했다. 국경지역에 러시아의 소수병력이 있었으나, 저항은 별로였다. 군대의 행동을 보건대 러시아는 조선에 쳐들어올 생각은 없었다.
타국의 군대가 한 나라 정부의 요청이나 허락도 없이 그 나라에 진입하면 그것이 침략이지 다른 것인가.
시바는 일러전쟁을 조국방위전쟁이라 하면서 여러가지로 조사하고 알아보았다고 했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에 시바의 눈이 가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일본의 참모본부는 12사단의 일부 병력을 떼어 일본 공사관 등에 남아 있던 병력과 합쳐, 참모본부 직속으로 조선주차(駐箚)군을 편성했다. 조선을 군사지배하에 두고 전쟁지원 체제로 얽는 군정체제를 편 것이다. 사형도 하는 ‘군율(軍律)’을 폈다. ‘조선반도는 완전히 군영화되고 말았다’라는 소리가 일본에 있었다. 1904년 9월 27일 뒷날 조선총독도 하게 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이때에 이미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역사를 다시 써야
셋째로, 결과를 보면 어떤 사안의 본질은 바로 알게 된다는 얘기다.
시바가 타계하고 십 년 가까이 지나서 나온 러일전쟁 관계에 관한 한 소장학자의 연구 결론을 그대로 인용하여 설명으로 삼겠다.
“어떤 사상의 본질은 결과에 의해 분명히 밝혀지는 것이라면, 이 열강과의 거래를 통해 조선의 보호권을 획득하고, 그러고는 남만주에서의 권익의 이양이란 결과야말로 러일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명백히 드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山室信一, <일러 戰爭의 세기>)
여기서 열강과 주고받은 것이란, 조선보호권을 승인, 보장받으려고 일본이 영(英)·미(美)와 거래한 것을 얘기한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너무도 엄청난 노획물을 확실하게 챙긴 침략전쟁이었다.
넷째로, 청일전쟁의 미완의 목표를 완결하기 위한 전쟁이 러일전쟁이었다. 종주국 행세를 하던 청을 입 다물게 해 놓고, 조선을 배타적으로 지배해 보겠다는 것이 일본의 청일전쟁 원래 목적이었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드러난 얘기인데, 일본 정부는 천황의 선전(宣戰)조서 작성에서 조선을 ‘적국’으로 하는 초안으로 이전삼전하다가, 조선의 ‘독립유지’라는 기만적 명분을 유지하느라, 마지막에 뺐다고 한다. 정부 마음속에서는 처음부터 조선침략전쟁이었던 것이다.
강화조약으로 할양받게 되어 있던 요동반도를 일본은 러시아 주동의 3국간섭으로 토해 놓게 됐다. 무력배경이 있었다. 정부와 온 국민이 더할 수 없는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조선의 배타적 지배를 위해, 타도해야 할 대상은 이제는 러시아가 됐다. 언론이 앞장섰다. 와신상담 무드가 온 나라에 번져 갔다. 다수당이었던 야당까지 군비확장을 지지하고, 중세를 견뎌야겠다는 무드를 전국적으로 부채질했다.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사이에 일본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국민’이 형성됐다고들 한다. 그래서 시바도 ‘조국방위전쟁’에서 못 떠나는지 모른다. 조선침략전쟁이라는 커다란 전쟁의 제1막이 청일전쟁이었고, 제2막이 러일전쟁이었다. 침략전쟁인 청일전쟁을 하고 나니까, 그 미완의 목표를 완수하자니까 러일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보다 본격적인 침략전쟁이 러일전쟁이었다. 청춘을 바쳤던지, 제국의 존망을 걸었다고, 침략전쟁이 방위전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쪽에서라도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용기가 있어 직시를 했어도, 직시한 ‘과거’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있지 않는 한, 상응한 조치나 말은 하기 어렵다는 얘기만 남기고 하토야마 수상은 돌아갔다.
‘국민의 지지가 있지 않는 한’이라 말했을 때, 그의 염두에는 당시 NHK가 방영준비 중에 있던 거작(巨作)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이 있었을 것이다. 제작 중 이미 온 일본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언덕 위의 구름>이 러일전쟁 스토리이고, 러일전쟁은 ‘야마토’ 민족의 영광의 정점이라는 것, 그리고 러일전쟁 스토리는 일본에 내셔널리즘 열풍을 몰고 오고,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하게 됐다는 것을 하토야마 수상이 모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진짜는 그 시점, 서울에서 ‘용기’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 안에 내셔널리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수상이 서울에서 ‘과거’ 근처의 얘기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외면하기 어려운 사실이 있다. 일본이 ‘일한병합’이라 하는 일을 저지른 지 올해 백 년이 되는 해다. ‘병합’이라는 사기적 언사 밑에서 일본이 한 짓을 하토야마 수상은 한번 직시해 볼 것인가. 그것은 일본인이 한국인의 국가를 박탈하고, ‘국민’을 파괴하고, 한국인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멸살하는 것이었다.
백 년 전 이때를 기점으로, 조선혼을 못 버릴수록 조선사람들은 일본인에게 능멸당하고, 착취당하고, 수탈당하고, 투옥당하고, 고문당하고, 불태워지고, 학살당하고, 고토(故土)에서 쫓겨나 얼어 빠진 만주벌로 헐벗겨 내몰리는 운명 앞에 서야 했다. 일본사람들의 전쟁에 끌려가 머나먼 태평양의 고도에서 굶어 죽은 조선의 젊은이들은 일본 국가에 의해 존재의 의미마저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백 년이 가도 못 잊는 사안은 백 년이 되면 한 번 곱씹어 보는 것이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지극히 보통의 일이다. 이 백 년을 당해, ‘과거는 안되고, 미래지향이라야 한다’고, 교양과 경륜을 코에 거는 사람들이 있다. 덜떨어진 노예의식의 잔존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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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3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참모총장,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만주군 총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조선주둔군 헌병사령관. |
민족수난사를 直視해야
알아야 할 것은 상승하는 민족만이 수난사의 직시를 통해 민족적 다이내믹의 기폭력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수난의 과거를 직시하는 자만이 미래의 영주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극일(克日)의 동력원은 민족수난의 직시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보상받을 유일한 길이다. 선린(善隣)으로 가는 역사의 평형운동도 출발점은 수난의 직시라야 맞다.
망국체험 백 년을 앞둔 작년 일본에 등장한 새 정권이 동아시아 공동체 얘기를 끄집어 내었다. 지금도 한번 맞물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울에도 있어 보인다.
앞에서 든 러일전쟁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은 지난 연말에 1시간 반짜리를 5회에 걸쳐 방영했는데, 금년 가을과 내년 가을에 각각 4회씩 더 방영할 것이라 한다.
언급이 있었지만 조선을 삼키고자 벌였던 전쟁판 그림을 하필 그 조선이 망한 백 년에 맞춰 이웃 코앞에서 틀어 대면, 당한 이웃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인공위성까지 띄워 놓고 도국(島國)주의는 안 버리겠다는 것인가.
동아시아 공동체 얘기가 나와 있는 마당에, 그 상대 거덜내고 치욕을 안긴 전쟁 스토리를 자기들 입맛으로 틀어 대면, 한국사람들하고 같이 만들 미래가 있다는 얘기인가, 없다는 얘기인가.
오늘 일본사람들의 이 같은 행태를 비유할 사례가 백 년 주변에 있다. 19세기 후반, 일본이 한 발 한 발 조선을 짓밟고 들어올 때, 강조한 것은 늘 조선의 ‘자주독립’이었다.
청일전쟁을 선포하면서 일본 천황이 낸 조서는 조선의 ‘독립국의 권의(權義)’를 존중하고 ‘자주독립을 부조(扶助)’함을 전쟁 명분으로 했다. 전쟁을 끝내는 강화조약에서는 일본은 청국(淸國)과 함께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의 나라’임을 선언하였다.
이 같은 선언이 있고서 여섯 달밖에 지나지 않은 1895년 10월, 일본 측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여기서는 길게 얘기하지 않겠지만, 서울 외교 공관에 와 있던 일본정부 대표가 야밤에 무리를 이끌고 황후의 침소에 쳐들어가 저지른 일이다.
정권도 바꿔 놓았다. 일본사람들은 입으로는 조선독립이라 해 놓고 행동으로는 전혀 반대되는 딴 짓을 한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성사되려고 한다면, 요청되는 것은 일본도 모르지 않을 ‘인(仁)의 정서’의 공유일 것이다. 촌스럽다 할 것이 아니다. 최소한 지향은 되어야 할 것이다. 상대의 형편은 헤아림 없이, 나 좋으면 그만이다 하는 도국주의 갖고 공동체는 어려울 것이다.
전체로서의 일본인들의 명분과 실제 행동이 분리되는 현상은, 백 주년 오늘의 <언덕 위의 구름> 속에도 있다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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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 쓰쿠미치(西鄕從道) 해군대신(청일전쟁 당시),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해군대신(러일전쟁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연합함대 사령관. |
전쟁소설 <언덕 위의 구름>
일본 천황이 조선 망국에 즈음하여 발한 조서에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유지하고, 제국의 안고(安固)를 확보하고자… 병합이 필요’(〈小村外交史)하다 했으나, 그때 이후 동양 평화는 날이면 날마다 파괴되어 갔고, 일본은 패망하고 말았다. 지난 호에서 보았다.
일제(日帝)가 조선을 삼키게 되는 것은 러일전쟁에 이기고 나서다.
일제는 대만도 있지만 조선을 식민지로 하여, 본격적인 제국주의를 하게 되었다. 조선을 깔고 앉아 그렇게도 인정받고 싶던 서양 열강 축에 끼이게 됐다고 자만하게 됐다.
일본은 백 년이 더 지났어도 저들 역사의 영광의 정점에 러일전쟁을 두고 있어 보인다. 그동안에도 러일전쟁 스토리에는 내셔널리즘 바람이 따라다녔다.
일본이 2차대전에 패전하며, 아직 잿더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사람들 앞에 <메이지(明治)천황과 러일대전쟁>이라는 영화가 등장했고, 관객동원 2천만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제작사는 재벌권에 일거에 진입했다. 러일전쟁의 영화 한 편이 일본인들로 하여금 미군 폭격의 폐허에서 일어나, 복구의 망치를 들게 하고, 총칼로 어찌 못한 미국에 트랜지스터라도 들고 쳐들어갈 채비를 하게 했다.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러일전쟁을 주제로 한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1968년부터 한 신문에 연재하여 1972년에 끝냈다. 한 비평가는 소설 속에 그려진 러일전쟁을 ‘민족의 서사시’라면서, “민족의 서사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언젠가는 망한다. <언덕위의 구름>이 계속 읽히고 있는 한 ‘일본인’은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1968년 그때가 일본이 한창 고도성장할 때였다. 1971년에 일본은 서독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된다. 메이지 일본을 음울하게 그리는 그 시절에 흔했던 좌파 사관(史觀)과는 달리, 근대 일본의 청춘기를 명랑하고 진취적인 리얼리즘으로 그리려 든 것이 고도성장 무드와 맞아떨어져 소설은 공전절후(空前絶後)의 히트를 쳤다.
문고판 8권짜리 이 소설의 3권까지는 청춘소설이다. 러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의 청년시절을 그리고 있다. 국가의 운명과 향방에 젊은날의 인생목표를 걸어 아무런 동요와 의문이 없는 그런 시대와 삶의 자세가 그려져 있다.
作家 시바 료타로의 ‘조국방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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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구름>의 작가 시바 료타로. |
문제는 이 젊은이들이 인생의 목표로 걸었던 국가의 대의(大義)가 뭐냐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한 TV 방담을 통해 집필동기를 밝히면서, 일부에서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러일전쟁을 ‘조국방위전쟁’이라 해야 제대로 그려질 것으로 여겼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에 걸렸던지 한마디 보탠다.
“러일전쟁이 끝나면, 일본은 이른바 제국주의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러일전쟁의 평가는,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 수상쩍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는 데가 있습니다.”
이어 시바 료타로는 주인공들의 행적을 염두에 두고 주관적 신념을 등장시켜, ‘주관적 조국방위전쟁’이라고 인식상의 혼란을 마무리하고 넘어간다.
시바 료타로는 1994년 죽기 2년 전에 <문예춘추(文藝春秋)> 1000호 기념으로 <일본인의 20세기>라는 논문을 써서 일본인들의 러일전쟁 경험을 논한다. 이 논문은 <문예춘추>가 NHK의 <언덕 위의 구름> 방영에 맞춰 2009년 12월호에 재록했다. 이 논문에서 시바는 딴소리 안 하고 확실하게 ‘조국방위전쟁’이라 해 놓았다.
시바는 죽고 나서, 인기는 더 올라가고 책도 더 팔리는 것 같다. 십 년이 더 지났는데도, 책방에는 시바 코너가 있고, 대표적인 종합잡지가 일 년에 두 번, 세 번 시바 특집을 꾸리고 있다.
지식계에서는 ‘시바 사관’에 감동한 버젓한 대학교수, 평론가들이 ‘자유주의 사관’이라 하여, 태평양 전쟁을 ‘자위전쟁’, ‘아시아 해방전쟁’이라면서 무리를 지어 교과서 문제나, 군국주의적 과거, 아시아 침략의 정당화 작업에 나서고 있다.
공영방송 NHK가 방대한 제작비를 들여 지난 연말 방영을 시작한 <언덕 위의 구름>의 영상화는 시바 사후 열기의 압권이라 할 것이다.
시바 사관은 이제 일본사람들의 평균적인 교양이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 시바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
지난 연말로 중국은 세계 제일의 수출국이 되고, 국민총생산(GDP)은 일본의 4조6000억 달러를 넘어서 4조8000억 달러로 세계의 두 번째가 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일본은 이 현상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기 어려울 것이다.
시바는 서양 제국주의를 ‘강도’라고 표현하는데, 그 원천에는 아편전쟁이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 150여 년쯤 거슬러 올라가면 재정을 파탄 내고, 국민건강을 심각히 침식하는 아편밀수를 단속하다가, 영국에 해적질당하듯이 노략당하는 중국이 있다. 군사침략당하고, 불평등조약 맺고, 배상금 물고, 땅 떼어 주고. 그것이 중국의 근대 서양과의 만남이었다.
이때에도 영국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있었다. 의회에서 아편전쟁의 전비(戰費)지출 결의는 271표 대 262표, 9표 차로 가결됐다. 뒷날 수상이 되는 글래드스턴은 반대 토론을 했다.
“…그 원인이 이렇게도 부정한 전쟁, 이렇게도 불명예가 되는 전쟁을 나는 여태까지 알지 못하고, 읽어 보지도 못했다. 지금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신사는, 광동(廣東)에서 영광에 가득 차 펄럭이는 영국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 깃발이야말로 악명 높은 금지품의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펄럭인 것이다. 현재 중국 연안에 게양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는 펄럭일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공포를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후 아시아를 뛰쳐나간 일본까지 가세한 서세(西勢)로부터 당한 굴욕과 침탈이, 허리를 펴게 된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중국사람들 뇌리에 떠오르지 않을 것인가.
작가 시바 료타로가 생전에 밀리터리즘의 오해를 살까 봐 영상화를 거부했던 전쟁스토리를 지금 TV 드라마에 올리는 것이 현하 일본을 엄습하고 있는 세계적 경기침체와 중국의 대두에 대한 대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일본은 뭔가 잘 안 풀리는 게 있으면 곧잘 전쟁에 기대었다.
돌이켜보면, 1930년대가 되면서 많은 일본사람이 ‘생존권’이다 ‘생명선’이다 하면서 만주로 대륙으로 침략하고 진출하는 열기에 들뜨게 된 직접적 원인은 1920년대 말, 일본에 덮친 세계공황으로 인한 경제의 폐색감(閉塞感)이었던 것은 모두 아는 얘기다. 경제위기를 전쟁으로 출구를 열려고 든 대표적인 경우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일본 외상 중 가장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 밑에서 의회 대책을 겸하고 있던 때, 국회해산이라도 해야 국면을 타개할 상황에 대해 조선의 동학봉기 정보를 접하고는 전쟁을 촉발할 조선출병을 순간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내정위기를 타고 넘었다. 정치위기 돌파를 위해 전쟁도발 조치로 ‘인심외전(人心外轉)’의 계기를 잡았던 것이다.
1980년대, 일본이 서양을 따라잡았다고 자부하고 나서도 이제 30년이 넘었다. 그러나 온 국민이 공유할 새 이념이나 목표가 나타난 것 같지는 않다. 이념이나 목표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 풍요의 바다에서 흐느적거리는 젊은이들을 안고 있는 ‘무목표 사회’의 처방전을 <언덕 위의 구름>에 기대하는 축도 있는 것 같다. 드라마 제작을 발안, 기획한 사람들이, ‘일본인 아이덴티티가 붕괴하고 있고, 양질의 전통을 부정하려는 풍조가 있는 배경에서, 그 부활에 시바의 작품이 큰 자극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국민을 고무하는 전쟁스토리가 ‘침략전쟁’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중국의 대두를 함께 보면서, 보다 내용 있는 교린(交隣)을 필요로 하는 시대의 입구에서, 그 이웃을 침략했던 침략전쟁 스토리의 그림을 사방 뿌려대는 것은 역시 문제가 있다.
러일전쟁은 무엇보다도 조선침략전쟁이었다. 이하에서 풀어 보겠다.
시바의 조선관
“우리는 아직도 조선반도의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있으면, 늘 열등감을 느껴요. 이건 당당한 수천 년의 문화를 가진, 게다가 수천 년이나 독립해 온 나라를 말이오, 태연하게 병합해 버렸어. 병합이란 모양으로 상대의 국가를 빼앗아 버렸거든. 이처럼 우열한 짓이 일러전쟁 다음에 일어난 것입니다.”
일본 작가들이 아무나 말만 나오면, 한국에 대해 수천 년의 문화독립 국가를 빼앗게 되어 ‘잘못됐다’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바는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에서 자랐다. 교포 우인(友人)들도 있고, 시바가 청년기에 처음 사회에 접했을 때, 재일동포들이 꾸리는 역사문화 관계의 잡지와 짧게나마 인연을 맺기도 했던 모양이다.
시바가 위에서 ‘조선반도의 사람들’이라 했을 때는 생각 속에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열등감(引け目·히케메)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국가 레벨의 죄책감을 두고서는 그 표현에 인색할 수 있는 대목을 구체적인 대인관계의 레토릭 ‘히케메’로 수습하고 있다.
‘우열한 바보스런 일이 러일전쟁 다음에 일어난 것’에서는 ‘러일전쟁 다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이라 함으로써, 나라를 뺏은 일이 러일전쟁의 성격에 내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 자체는 ‘조국방위전쟁’으로 정당하고 의미 있는 것이지만, 전쟁을 구경하고 박수치고 외교하는 사람들이 전쟁 끝나고서 전승에 들떠 남의 나라를 뺏는 이상한 짓을 했다는 식의 얘기로 되는 것이다. 뭔가 비약이 있다.
시바는 스스로가 조국방위전쟁으로 알고 서술한 러일전쟁이 끝나고서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되고 만 사실(史實)을 그의 문화감각, 역사감각으로는 한 줄에 세울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물론 조선반도를 손에 넣음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방위적 의미는 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 이긴 이상, 이젠 러시아는 일단 들어가 버렸으니까, 그 이상의 방어는 과잉의식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후에 몇천 년 계속해도 이 일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시바는 일본의 조선 국가 강탈행위를 러시아의 남하를 들어 설명해 보려다가, 씨가 먹혀들지 않는다고 여겼던지 포기한 채, 조선의 한을 남겨 놓고 지나간다.
위에서 든 시바의 얘기는 1980년대 후반 NHK의 연속 방담 프로그램 <잡담 ‘쇼와(昭和)’에의 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방담은 2차대전 패전까지의 쇼와시대 20여 년간을 대상으로 한 사론(史論)이지만, 체계적인 것은 아니고 다분히 인상비평적이고, 때론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이 속에서 하나 더 시바의 조선과 관계 있는 제국주의관을 들어 본다.
“일본의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는 러일전쟁 다음에 일어납니다. 극단으로 얘기하자면, 히비야공원에서 군중이 국민궐기대회 같은 것을 하여,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에 대해 ‘그렇게 얄팍한 것은 반대다. 좀 더 듬뿍 러시아로부터 낚아채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나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만, 야적, 강도의 부류였습니다.”
시바가 일러전쟁=조국방위전쟁에 집착해서인지, 설명이 너무 듬성듬성이고, 제국주의의 주체가 폭동 군중인 것처럼 들린다.
러일전쟁이 마무리되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조인된 것은 1905년 9월 5일이다. 이 조약을 통해, 한국의 자유처분, 그리고 요동반도 조차권 및 여순-하얼빈 철도를 일본이 차지하게 됐다. 폭동까지 간 히비야의 군중대회는 배상금과 영토할양을 러시아 측에 더 요구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전쟁을 계속할 형편이 아닌 것을 정부는 국민한테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군중은 전쟁 전부터 일본정부가 개전(開戰) 여론몰이에 동원하고, 후방지원에 동원하고, 위문주머니 보내기에 동원했던 사람들 아닌가. 히비야 공원에 다른 군중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일본이 입문했던 제국주의는 러일전쟁의 출산물이다. 전쟁을 기획하고 추동했던 군부의 보스들, 그 군부를 오히려 끌고 갔던 제국주의 외교의 영악한 챔피언들, 무쓰 무네미쓰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를 두고 시바는 어딜 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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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머스 강화조약 당시 고무라 주타로 일본 외상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테 러시아 전권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시바의 이토 히로부미 인식
시바가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을 소설에서 침략전쟁으로 보지 않아야 할 형편에 대해서는 모를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를 평화주의자로 아는 것 같은 인식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서술이 보인다. 청일전쟁을 침략주의적으로 보는 “통렬한 후세의 비평을 당시의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가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토한테는 그 같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후에 뜯어 보기로 하고, 소설 속에 조선 관련 언급을 몇 개만 더 주워 본다.
“이 전쟁은 청국이나 조선을 영유하려고 하여 일으킨 것이 아니고, 다분히 수동적인 것이었다.”
이런 얘기도 있다. 전쟁의 “원인은 조선에 있다” “한국이나 한국인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다고 한다면, 조선반도라고 하는 지리적 존재에 있다”는 얘기도 보인다.
역사 시간에 지리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시바의 40대의 사회과학으로 알고, 이토 히로부미 얘기를 해 보겠다. 표면의 공식기록에는 이토 히로부미는 청일전쟁의 첫 파병에도 소극적이었고, 영일(英日)동맹도 원하지 않았고, 러일전쟁 개전도 반대였고, 한일병합도 반대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결정은 이토가 끝내 반대하면 성사될 수 없는 자리에 이토는 있었다. 이토가 ‘노(No)’라고 하면 천황의 재가는 있을 수 없었다. 이토가 어떤 자리에 있었든지 간에.
정국 돌파용으로, 기지에 의해 조선침략의 문을 연 간악한 마키아벨리스트 무쓰 무네미쓰는 이토 총리 밑 외상이었다.
동학 봉기로 조선 정부가 청군을 부르자 이에 덩달아 대규모 혼성여단 8천여 명을 서울에 보내 놓고 있을 때다. 동학과 화의가 성립되자, 조선 정부는 청일(淸日) 군대 모두 물러가기를 요청했다. 청보다는 일본이 응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1894년 6월 30일 주(駐)도쿄 공사를 통해 협박성 간섭을 하고 나왔다. 청일 공동 철병(撤兵)에 응하지 않으면 “일본 정부는 스스로 중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임을 충고한다.” 무시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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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경과도. |
일본을 ‘늑대국가’로 몰고 간 이토
이 서면을 들고 무쓰 외상은 생각에 잠겼다가 이토 총리의 저택을 찾아갔다. 청일전쟁의 프로모터였던 무쓰는 그 변명록인 <건건록(蹇蹇錄)>에서 이때 이토의 결단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同) 총리는 일독(一讀)하고서 한참을 심사에 빠졌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오인(吾人)은 지금에 이르러 어떻게 노국(러시아)의 지교(指敎)에 응해 우리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확언했다.”
러시아 공사가 간섭을 했을 때는, 조선에 온 일본군대가 꼬투리를 잡지 못해 우왕좌왕할 때였다. 이토는 정색한 한마디로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
청일전쟁이 러일전쟁 도입부의 전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토의 이때 결단이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양차 전쟁은 물론이고, 일본으로 하여금 패망할 때까지 50년간 전쟁을 하는 오오카미(늑대) 국가의 길을 가게 한 것이다.
메이지 일본의 최대의 정치가라 일컬어진 이토의 치자로서의 경륜과 덕이 허물어지는 장이, 청일전쟁이 끝나고서 시모노세키 강화회담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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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북양대신 리훙장. |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에 영원히 집목(輯睦·부드럽게 화목함)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구적시(仇敵視)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두고서는, 일본의 국계(國計), 민생에 관계되는 바 심대할 터이다. … 그러하므로 동양 이대(二大) 국민이 영원히 친목하여 피차 안도하고, 복택을 면장(綿長·영원히 이어짐)하는 것이 실로 이 일거에 달려 있는바, 귀(貴) 대신의 숙려하고 주획(籌·계획공부)함을 바라도다.”
리훙장은 일본 같은 작은 나라가 전쟁을 겁내지 않으니, 국민이 중세에 허덕이고 있을 것을 꿰뚫고 있던 것 같다.
이토는 자기가 천거했던 무쓰 외상의 간특한 공명심을 제어치 못해, 리훙장의 동양평화의 대의에 대국도 못해 보고, 결국은 3국간섭을 만나, 요동반도를 토해 놓고 말았다. 이토의 오브라트(당의정·糖衣錠)로 싼 침략주의만 역사에 남았다.
작가 시바의 이토 인식의 착오가 그의 러일전쟁관도 빗나가게 한 것은 아닐까.
강도 이야기
그러나 시바가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일러, ‘야적떼’, ‘강도’로 표현한 것은 작가 시바의 격을 느끼게 한다.
일본에는 지난 시절의 전쟁이나 패망을 돌이켜보는 연구나 저술이 많지만, 거의가 합리주의의 구현에 어떻게 모자람이 있었는지를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행동은 보다 원천에서, 내면에서, 알든 모르든, 어김없이 영향을 주는 윤리감각에 대해서는, 반추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일본 우파 지식인들의 큰 특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바는 일제가 마지막에는 중국,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 세상 거의 모든 나라를 상대로 전쟁하게 됐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 같은 종말적 선택은 윤리감각 결손의 장기 누적으로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사태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합리적 동기에 의한 선택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시바가 NHK <잡담>에서 하고 있는 얘기의 전후를 보면, 그가 제국주의를 강도짓이라고 하는 것은 영국이 처음 동양으로 와서 아편전쟁에서 중국한테 하는 짓을 보고 느낀 표현일 것이다. 시바의 표현에서 도덕적 용기가 느껴진다.
시바의 ‘강도’ 표현을 빌려 보겠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강도’들이 동아시아로 쳐들어왔을 때에, 동네 어귀에 있던 일본은 강도떼들이 두렵긴 했으나, 그들이 가진 장비, 총포가 놀라워서, 그들을 따라가서라도 한번 비슷한 걸 가져 보자고 했던 반면, 골목 안에 있던 한국은 총포보다는 그 ‘강도’떼의 행동거지에 먼저 눈이 가서 상종 못할 부류로 알고 문을 닫아 걸려 했다.
우리는 ‘강도’떼에서 예(禮)의 유무를 찾았고, 일본은 ‘강도’떼가 가진 총칼의 날카로움에 반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서양 ‘강도’의 장비를 습득하고, 제조법을 익히는 데 기민했다. ‘강도’짓인들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습이 시작됐다. 1854년의 미국 페리 함대 함포 공갈 시늉을 만만한 이웃 한국 상대라면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영국식으로 단물 빨아댈, ‘강도’짓의 발판을 만든 것은 1876년, 강화도로 쳐들어가고 나서다. 영국을 본받아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일본의 ‘강도’술 습득은 빨랐다.
서방覇道의 앞잡이냐, 동방王道의 干城이냐
근대 일본의 심법(心法)은 ‘동네 어귀에서 강도떼를 먼저 맞이한 입장에서 이웃들과 연락, 합력하여 강도떼를 막아내는 데 위험하게 달려들 것이 아니라, 강도떼에 오히려 붙어 심부름이나 해 주고, 길 안내라도 하다 보면, 강도들이 쓰는 칼자루라도 챙길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가 한패가 되기만 하면, 순해 빠진 어리어리한 이웃들을 단칼에 밥으로 해서 나쁠 것 없다. 나만 살면 됐지’일 것이다.
같은 동아시아인으로, 일본의 이 같은 심법에 대해 함축적인 경고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이 59세로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일본 고베(神戶)에 들렀다. 중국 남쪽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이었다. 상공회의소 등의 사회단체가 고베 고등여학교에서 2천명이 넘는 청중을 모아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 연설의 끝부분이 널리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당신들 일본 민족은 서방 패도(覇道)의 앞잡이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동방 왕도(王道)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가, 그것은 일본 국민이 신중히 선택하면 좋을 것입니다.”
일본에 망명한 적도 있는 쑨원은 앞에서 든 근대 일본의 심법에 대한 감이 있었기에 위와 같은 연설을 했을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 얘기가 나와 있는 지금, 그것은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 지도층에 쑨원이 얘기하는 패도 아닌 왕도적 지향이 있어야만 비로소 현실성이 있을 것이다.
‘강도’ 얘기의 계속이다. ‘강도’술 터득이 빠른 일본에 대해 서양 ‘강도’의 두목 격인 영국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서양 ‘강도’ 동네의 룰을 거의 익히고, 서양 장비를 손에 넣자, 잠에서 못 깨어 나고 있는 이웃 조선을 덮쳐 ‘강도’짓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1894년 7월쯤이다. ‘강도’짓의 방해꾼 청나라와의 한판이 임박한 시점이다.
일본이 그렇게 매달려도, 때가 이르다면서 거부하던 불평등조약 개정을 영국이 해 주겠다고 나왔다. 치외법권을 없애는 등 대등평등 조약을 맺었는데, 두목 영국은 드디어 일본을 서양 ‘강도’단의 일원으로 자격을 인정해 준 셈이다.
북청사변과 일본군
1900년의 의화단 사건은 서양의 ‘강도’짓에 당하기만 하는 정부가 딱해 부청멸양(扶淸滅洋·청을 떠받치고 서양을 배격)의 구호로 일어난 중국의 민중봉기였다. 천진(天津)으로부터 북경으로 번져 서양열강의 외교공관 지역을 봉쇄했다.
청나라 정부는 어느새 의화단에 합세하여 서양열강에다 선전포고를 해 버렸다. 이때 열강은 2만여의 군대를 동원하는데, 그 절반이 일본군이었다. 일본의 성장을 눈여겨보던 두목 영국이 취한 조처였다. 일본은 드디어 서양 ‘강도’들에게 인정받고 축에 끼여 이웃 무지렁이들을 깔아뭉개는 데 앞장서는 오랜 탈아(脫亞)의 소망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을 포함한 8개국 연합군은 8월 북경에 입성했다. 이때에 연합군은 병사들에게 3일간의 약탈을 허가했다. 서양 제국주의가 ‘강도’떼임을 인류사 위에 영세불망의 기록을 남기는 현장이 거기 있었다. 북경은 폭행, 약탈, 강간… 아수라의 무법천지로 화했다.
청은 굴복하여 열강과 북경의정서라는 것을 조인하고, 북청사변은 마무리됐다. 청이 당한 굵은 것 몇 가지만 들면 열국에 사죄사 파견, 북경, 천진 등 요지에 군대주둔권, 배상금 4억5천만 냥(兩) 등. 청일전쟁의 배상금이 2억 냥인 걸 감안하면, 중국은 혹독하게 제국주의 ‘강도’떼에게 당한 것이다. 그 ‘강도’떼의 중심에 어느새 근대화한 일본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도 영국사람 중에 깨어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청나라에 와 있던 총 세무사 바트 하트, 그는 의화단을 애국자라 하면서, 이 사건은 ‘한 세기에 걸친 변동의 서곡으로, 극동 장래의 역사 기조가 될 것이다. 기원 2000년의 중국은 1900년의 중국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포트 나이트리 리뷰>誌). 일본이 서양 ‘강도’떼 앞잡이 노릇 하는 것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다.
이런 것 저런 것 글줄이나 쓰는 일본 사람들은 북청사변 때 일본군이 그 민첩함과 규율로 서양 열강으로부터 칭찬받았다고 자랑하고 있다.
20세기 초두가 되어 미국이 대두하고 남아프리카의 보어 전쟁으로 영국은 고달프기도 했지만, 이때의 일본군이 인상에 남아, 어디에서 다른 누구와도 하지 않던 동맹을 극동에서 일본과 맺어 준다(1902년 1월). 이 영일동맹을 기반으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해 볼 엄두를 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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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경과도. |
러일전쟁은 일본의 조선침략전쟁
러일전쟁이 일본의 조선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일본과 러시아, 모두 침략적인 두 제국주의의 충돌이 러일전쟁이었으므로 전쟁 프로파간다에 휩쓸리기 쉬운 구조 속에 있고, 일방이 스스로의 입장을 조국방위전쟁이라고 하기 십상이다.
네 가지 점에서 러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었다.
①개전 교섭에서 드러난,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탐욕은 반도 전부였다. 개전 시점에서 러시아는 조선땅 욕심은 없었고, 일본의 반도에서의 행위에 대한 주문뿐이었다.
②전쟁이 나자 일본은 조선영토를 군사점령부터 했다는 것.
③일본정부가 강화를 통해 실현시킨 최대의 요구사항은 ‘조선의 자유처분’이었다.
④청일전쟁의 목적인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 확립이 미완으로 끝나자, 그 완결을 위해 러일전쟁은 추진됐다는 것.
첫째로,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각오하는 최대의 이유는 조선문제였다. 최고 결정기관인 어전회의는 개전 8개월 전인 6월, ‘조선은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그 일부라도 러시아에 양여하지 않는 방침’을 확정했다. 일본의 러시아와의 전쟁은 이때에 이미 각오된 것이다.
강경파이자 대(對)러시아 조기 개전론자인 외상 고무라 주타로가 러시아와 개전 교섭을 벌이는 것은 7월부터다. 개전 교섭이란 말이 우습지만, 서로의 요구사항을 들이대 전쟁 꼬투리를 잡는 게임이라 하면 맞다.
러시아와 전쟁을 않고 조선을 차지해 보려는 러일협상 노선이 좌절되고 영일동맹(1902년 1월) 노선이 부각되면서, 왕 총리 같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가 만든 여당 정우회 총재 자리를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넘겨주고, 추밀원 의장 자리에 가서 앉았다. 1903년 7월, 러일전쟁 추진파를 전면에 내세우는 의미가 있었다. 키는 작아도 매섭고 영악했던 하버드 출신의 강경파 외상 고무라가 끌고 가는 판이 됐다.
일본은 만주와 조선의 권리를 러시아와 서로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러시아는 만주에 대해 일본의 입질을 거부하면서, 조선에서의 권리는 인정하되 조선땅의 군사적 이용은 안된다고 주문을 달았다. 이 같은 요구는 당시의 조선이나 청나라 정부의 허락이나 양해를 받은 것은 아니고, 강도의 판돈 놀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일본과 러시아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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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달려드는 일본(비고가 그린 그림엽서). 뒤에서 미는 것은 영국이고 그 뒤에서 지켜보는 것은 미국. 러일전쟁의 국제구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
조선땅에 중립지대를 설정하는 문제로도 응수가 있었다. 일본은 한만(韓滿) 국경선에 양쪽으로 50km씩 하자 했고, 러시아는 북위 39도선, 즉 원산-평양선 이북의 조선땅을 전부 중립지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중립지대 문제에서도 조선땅에 대한 일본의 탐욕은 그대로 드러났다.
일본은 영일동맹의 존재로 러시아의 양보가 있을 줄 알았으나 빗나가자, 이내 수준을 높인 최종안으로 시한을 정하고서는, 1904년 2월 단교 선언을 통해 개전조치를 취해 버린다. 선전포고는 2월 10일이었다.
둘째로, 일본은 전쟁이 시작되자, 조선 영토를 점령부터 했다.
선전포고가 있기 이틀 전인 2월 8일, 인천에 상륙했던 임시 파견대 2개 대대(1100명)가 수도 서울에 진입, 정부와 서울 민심의 제압을 노렸다. 이 파견대가 속하는 일본군 제12사단이 2월 8일 받은 명령은 먼저 수도 이남지역을 군사점령하는 것이었다.
12사단의 상륙지는 처음 남해안의 마산이었으나, 도중에 인천으로 변경되어 2월 중순부터 10일간, 상륙을 완료하고 “서울 이남의 점령을 확실히 했다”(橫手愼二, <日露戰爭史>)
해군은 2월 8일에서 9일 사이, 인천항에 있던 러시아의 태평양함대 2척을 기습 격침하고, 나머지는 요동반도의 여순항에 가둬 버렸다. 황해의 제해권을 손에 넣은 것이다.
‘대본영’은 이를 바탕으로 2월 29일 제1군을 진남포에 상륙시키고, 평양을 거쳐 북한을 쓸고는 압록강 도하를 하여 만주로 가게 했다. 국경지역에 러시아의 소수병력이 있었으나, 저항은 별로였다. 군대의 행동을 보건대 러시아는 조선에 쳐들어올 생각은 없었다.
타국의 군대가 한 나라 정부의 요청이나 허락도 없이 그 나라에 진입하면 그것이 침략이지 다른 것인가.
시바는 일러전쟁을 조국방위전쟁이라 하면서 여러가지로 조사하고 알아보았다고 했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에 시바의 눈이 가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일본의 참모본부는 12사단의 일부 병력을 떼어 일본 공사관 등에 남아 있던 병력과 합쳐, 참모본부 직속으로 조선주차(駐箚)군을 편성했다. 조선을 군사지배하에 두고 전쟁지원 체제로 얽는 군정체제를 편 것이다. 사형도 하는 ‘군율(軍律)’을 폈다. ‘조선반도는 완전히 군영화되고 말았다’라는 소리가 일본에 있었다. 1904년 9월 27일 뒷날 조선총독도 하게 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이때에 이미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역사를 다시 써야
셋째로, 결과를 보면 어떤 사안의 본질은 바로 알게 된다는 얘기다.
시바가 타계하고 십 년 가까이 지나서 나온 러일전쟁 관계에 관한 한 소장학자의 연구 결론을 그대로 인용하여 설명으로 삼겠다.
“어떤 사상의 본질은 결과에 의해 분명히 밝혀지는 것이라면, 이 열강과의 거래를 통해 조선의 보호권을 획득하고, 그러고는 남만주에서의 권익의 이양이란 결과야말로 러일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명백히 드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山室信一, <일러 戰爭의 세기>)
여기서 열강과 주고받은 것이란, 조선보호권을 승인, 보장받으려고 일본이 영(英)·미(美)와 거래한 것을 얘기한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너무도 엄청난 노획물을 확실하게 챙긴 침략전쟁이었다.
넷째로, 청일전쟁의 미완의 목표를 완결하기 위한 전쟁이 러일전쟁이었다. 종주국 행세를 하던 청을 입 다물게 해 놓고, 조선을 배타적으로 지배해 보겠다는 것이 일본의 청일전쟁 원래 목적이었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드러난 얘기인데, 일본 정부는 천황의 선전(宣戰)조서 작성에서 조선을 ‘적국’으로 하는 초안으로 이전삼전하다가, 조선의 ‘독립유지’라는 기만적 명분을 유지하느라, 마지막에 뺐다고 한다. 정부 마음속에서는 처음부터 조선침략전쟁이었던 것이다.
강화조약으로 할양받게 되어 있던 요동반도를 일본은 러시아 주동의 3국간섭으로 토해 놓게 됐다. 무력배경이 있었다. 정부와 온 국민이 더할 수 없는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조선의 배타적 지배를 위해, 타도해야 할 대상은 이제는 러시아가 됐다. 언론이 앞장섰다. 와신상담 무드가 온 나라에 번져 갔다. 다수당이었던 야당까지 군비확장을 지지하고, 중세를 견뎌야겠다는 무드를 전국적으로 부채질했다.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사이에 일본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국민’이 형성됐다고들 한다. 그래서 시바도 ‘조국방위전쟁’에서 못 떠나는지 모른다. 조선침략전쟁이라는 커다란 전쟁의 제1막이 청일전쟁이었고, 제2막이 러일전쟁이었다. 침략전쟁인 청일전쟁을 하고 나니까, 그 미완의 목표를 완수하자니까 러일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보다 본격적인 침략전쟁이 러일전쟁이었다. 청춘을 바쳤던지, 제국의 존망을 걸었다고, 침략전쟁이 방위전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쪽에서라도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