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國군대를 강박적으로 침략에 나서게 한 야마가타의 주권선·이익선 독트린이나, 日帝의 망조를 불러온 ‘마법의 지팡이’를 군부가 휘두르게 한 조선 의병. 두 가지 모두가 ‘大일본제국’이 조선을 삼키는 바람에 발동이 걸리고, 불이 붙은 것이다. 대일본제국은 조선을 삼켜서 패망한 것이다.
許文道
⊙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駐日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정무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許文道
⊙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도쿄특파원, 駐日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정무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들어가면서]
조선이 ‘日帝(일제)’의 식민지가 됐던 1910년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이 시점, 東亞(동아)의 大局(대국)에 세계사적 의미의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일제로부터 굴욕과 난도질을 당하던 중국이 G2의 자리를 일본으로부터 넘겨받게 된 것이다.
일제는 지난날 서양의 앞잡이였고 西勢(서세) 이상의 침략세력이었으므로, 중국의 G2 부상은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東風(동풍)이 西風(서풍)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본의 대응이 만만치 않다. 55년 만에 자민당을 주저앉히고, 300석이 넘는 의석으로 민주당에 정권을 맡겼다. 黨(당) 실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는 2009년 말 150여 명의 국회의원을 포함, 700여 명의 대형 방문단을 거느리고 중국을 찾아갔다.
공영방송 NHK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불쏘시개인 러일전쟁을 주제로 한 스페셜드라마 <언덕위의 구름>(원작 시바 료타로)을 2009년 11월 말부터 방영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3년간 방영될 이 드라마에 NHK는 200억 엔(약 2600억원)의 거액을 들였다고 한다.
일제가 ‘영광의 頂點(정점)’으로 치는 러일전쟁이 실은 조선을 먹기 위한 침략전쟁이었음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는 것일까. 망국체험 100년에 ‘친일파’가 뭔가. 아직도 일제의 呪縛(주박: 주술의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함)에 붙들려 있자는 얘긴가. 동아의 대국 한복판에 한 번은 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러일전쟁에 이겨 일본 사람들이 한창 기세등등해 하던 시절, “일본은 망한다”는 소리가 일본 안에 있었다.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대표작 <三四郞(산시로)> 속에 나오는 얘기다.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러 상경하는 주인공을 향해, 차 속에서 만난 인텔리 풍의 사나이는 선진국으로부터 빚을 내어 전쟁에 이겨 놓고, 일등국이 됐다고 들떠 있는 세상을 야유하고 있었다. 소설이 나왔을 때가 전쟁이 끝난 지 2년 조금 지난 1908년이었다.
이 무렵 조선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군대가 해체되었고, 이로 인해 의병운동이 전국으로 번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의병 한 사람이 잠만 자고 갔다 해도,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양민을 도륙하고 있을 때다.
‘천재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는 일제가 조선을 倂呑(병탄)한 다음달인 1910년 9월 이렇게 썼다.
“지도 위 朝鮮國(조선국)에 검게 검게 먹칠을 하며 秋風(추풍)을 듣다.”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도 그렇지만 1급의 문학가들에게는 선지자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小(소)일본주의’를 내걸고 식민지 포기를 주장했던 혜안의 士(사)들도 더러 있었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1910~1920년대 초반 다이쇼 천황의 재위 기간 중 참정권 확대, 의회정치 활성화, 대중의 정치적 개안 등이 진행된 것을 일컫는 말)의 한복판에서 활약한 名(명) 평론가 가야하라 가잔(茅原華山)은 1914년 <인간생활사>에서 “조선을 取(취)한 것은 일본에 백년의 화근을 남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국 일본은 이 말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 글은 대일본제국이 조선을 삼킨 것이 어떻게 화근이 되어 패망했는가를 삼킨 지 100년 되는 해를 맞아, 풀어 보고자 한다. 일제의 ‘역사청소’를 조선사람의 손으로 한번 해 보는 것이다. 의식 속에 ‘과거’를 영원히 쓸어내고, ‘내일’로 나아가는 예비 동작이기도 하다.
日本을 패망으로 끌고 간 軍部 엘리트들
역사의 遠近法(원근법)을 동원하면, 일본 메이지(明治) 근대화의 도달점은 국가 패망이다. 메이지維新(유신)과 함께 등장했던 대일본제국이 敗沒(패몰)하기까지 77년(1868~1945)이 걸렸다. 레닌혁명으로 나타났던 공산제국 소련은 74년(1917~1991) 만에 사라졌다. 게르만인들이 힘으로 다른 민족 위에 군림하는 제국방식을 졸업하는 데도 74년 걸렸다. 宰相(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러시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이겨 독일을 통일한 것이 1871년이었고, 히틀러의 제3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것이 1945년이었다.
여러 가지 근대적인 장치를 한다 해도, 어떤 기만적인 겉모양을 취해도, 힘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의 한계는 70여 년쯤인 것 같다.
일본은 그동안 19세기 후반의 메이지 근대화를 온 세계에 자랑해 왔다. 非(비)서양 세계에서 유일한 근대화라고 자랑하고, 그 템포의 빠름과 성취의 현저함을 자랑하고, 같은 東(동)아시아 문화권인 이웃 한국과 중국을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제쳐 버렸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이 근대화의 총화적 결과물은 70년 남짓해서 국가 패망에 가 닿아 있는 것이다.
메이지 헌법은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까지 가서 전문학자에게 물어서 만들었다. 이 헌법은 독일식의 강대한 군주권을 보장하는 입헌군주제 헌법이다. 다이쇼와 쇼와(昭和)로 代(대)가 갈렸지만, 근대화의 결과물인 메이지 헌법체제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유지됐다.
국면을 요리하는 인재들은 하나같이 超(초)엘리트들이었다. 그 스스로가 근대화의 결과물인 이 엘리트들이, 똑똑한 의사결정을 집적해 들어간 종착점이 패망이었다.
태평양전쟁 무렵에는 도쿄제국대학 출신과 육군대학 출신의 정예분자들이 총력전 체제의 요충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육군대학 출신은 간단치 않았다. 13세부터 관비로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임관 2년 이상 된 30세 전의 장교 중 소속 연대장의 추천을 받은 자만이 육군대학 응시가 가능했다. 전국에서 정원이 50명이었다.
3년간의 교육 끝에 육군대학을 졸업하면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요직에 배치됐다. 독일 등 선진국 유학도 거치게 되어 있었다. 도쿄제국대학과 육군대학은 수발성에서 어느 쪽이 더 위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일본 근대화의 꽃이라 할 이들이 전쟁이라 하면 머뭇거림이 없었고,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있는데도 태평양 전쟁을 택했다. 이들이 근대화의 결과물과 함께 온 나라를 원폭이 기다리는 패전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갔던 것이다.
메이지 일본을 통틀어 양대 권력자를 든다면, 한 사람은 文官(문관) 대표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이고, 다른 한 사람은 武官(무관) 대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다.
일본의 역사가 가운데는 제2차 대전 전의 일본을 ‘狼的國家(낭적국가)’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조선의 지배권 확립을 위한 청일전쟁(1894~1895)에서부터 본격화하여, 처음에는 10년 단위로 침략전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그 주기가 더 빨라진다. 러일전쟁(1904~1905), 제1차 세계대전 중의 중국 칭다오(靑島·독일조차지) 침공(1914년), 러시아혁명 간섭전쟁인 시베리아 출병(1918~1922),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1945), 태평양전쟁(1941~1945) 등이 그 같은 전쟁이다.
대일본제국은 팽창주의적 침략을 국가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근대 일본은 전쟁하는 나라였다. 늘 전쟁을 했고, 전쟁을 하지 않을 때는 전쟁을 찾고 있거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늑대(狼) 이미지를 빌려 ‘狼的(낭적)국가’라 했을 것이다.
이 낭적국가를 하나의 인격 속에 응축시켜 본다면, 그가 바로 앞에서 든 야마가타 아리토모라 하겠다. 근대화 과정에서 軍制(군제)확립, 징병령 제정, 정신지표인 軍人勅諭(군인칙유) 제정 등 軍國(군국) 일본의 조형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流動(유동)하는 국제정세를 늘 한 발짝 앞질러서 군비수준과 전략노선을 指南(지남)하는 의견서를 지도층 앞에 장기간에 걸쳐 제시, 국론을 통합하고 대일본제국의 국가전략을 주도했다.
야마가타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조슈(長州·야마구치 현) 출신이다. 그는 유신이 성사되기까지 지방과 중앙의 모든 전쟁터에서 20대부터 뛰었고, 살아남았다. 창술 전문의 최말단 從卒(종졸)로 출발해서인지, 상급 사무라이들을 향해서는 늘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신중하고, 필요한 만큼 겁낼 줄 알았고, 집요하고, 음흉했다. 1880년대 초반, 40줄에 접어든 야마가타는 메이지 元勳(원훈)들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 선배들이 죽거나 모두 퇴장하면서 권력을 이토 히로부미와 양분하는 형국을 맞았다. 그는 군인 신분을 유지한 채 권력 포스트와 제국의 최고위직인 총리, 추밀원(천황 자문기관) 의장 등을 수차례 역임했다.
야마가타의 주권선·이익선 개념
야마가타는 이토와는 달리 자기 주위에 官僚閥(관료벌)과 軍閥(군벌)을 형성했다. 축재벽도 있었다. 와세다대학에서 가까운 도쿄 한복판에 있는 9만9174㎡(3만 평)에 달하는 대정원 椿山莊(춘산장)은 야마가타의 私邸(사저)였다. 지금도 누군가 영업하고 있다.
작고한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야마가타의 딱딱하고 음흉한 이미지와 권력집단 내부에 자기 패거리를 만들어 막후 조종으로 국가를 좌지우지했던 작태를 싫어해 그를 중심에 둔 소설을 쓰지 않았다 한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의 外的(외적)조건인 英日(영·일)동맹에 대해 이토는 소극적이었으나, 야마가타가 이를 밀어붙였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박빙의 승리에서 멈추게 한 당시의 참모총장 야마가타의 결단을 일본인들은 평가한다.
‘대일본제국’의 침략적 팽창전략의 관리자, 그건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이토가 하얼빈서 암살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세 살 밑인 이토의 출세를 늘 뒤따라갔던 야마가타는 측근에게 “그자에게 또 한 번 앞질림을 당했다”고 말했다 한다. 安重根(안중근) 의사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야마가타는 반드시 처형 대상에 올랐을 것이다.
전해에 발포된 이토의 메이지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제1의회의 衆議院(중의원)에서 1890년 12월 6일,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첫 시정방침 연설을 한다. 軍略家(군략가) 야마가타가 국민 앞에 처음으로 제국 운영의 노선과 방략을 드러내는 연설이었다. 방대한 군사비를 포함한 예산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짧은 연설이었지만, 이 속에 이후 제국 흥망의 향배를 결정할 전략발상의 원형이 들어 있었다. 그 대목을 들어 본다.
“생각건대, 국가독립 자위의 방도에 두 길이 있는데, 첫째로 主權線(주권선)을 수호하는 것, 둘째로 利益線(이익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 주권선이란 나라의 疆域(강역)을 말하고, 이익선이란 그 주권선의 안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을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나라로서 주권선 및 이익선을 갖지 않는 나라는 없지만, 현하 列國(열국) 간에 들어서서 一國(일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는, 단지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이익선도 반드시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안다.”
獨立自衛(독립자위)를 위해서는 自國(자국)의 주권선뿐만 아니라 안보상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익선까지 방어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익선은 추상적인 개념이어서 야마가타의 연설만으로는 어딘지 알 수 없다.
일본 이익선의 핵심은 ‘조선’
야마가타는 이 주권선·이익선 발상을 제국의 지배집단 모두가 공유하는 전략방침으로 만들었다. 이해 3월 총리 야마가타는 ‘외교정략론’이란 것을 각료들에게 돌렸다. 야마가타는 이 속에서 이익선은 바로 조선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 철도는 이미 중앙아시아로 나가 있고, 수년이 안되어 준공을 보게 됐으니, 러시아의 수도를 떠나 십수 일이면 말에게 흑룡강 물을 마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베리아 철도 완성의 날은, 바로 조선이 多事多難(다사다난)한 때가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조선이 多事(다사)해질 때는, 동양에 일대 변동이 生(생)할 機(기)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인데, 조선의 독립을 유지할 무슨 보장이 있는가. 이 어찌 우리 이익선을 향하고 있는 급하고도 극적인 자극과 충격을 느끼지 않고 배길 것인가.”
야마가타가 고비마다 내놓은 의견서를 보면, 주변 정세가 내포하는 위기를 과장하여 군비확장을 재촉하면서 주도하는 입장에 섰음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행해진 야마가타의 발언을 여기 굳이 인용하는 것은, 이 이익선과 주권선 발상을, 근대화 일본을 패망으로 끌고 간 제국의 국가전략으로 보기 때문이다.
야마가타는 이토 히로부미 밑에서 내무대신으로 있던 1889년 郡·町·村(군·정·촌) 등 지방제도를 짜기 위해 유럽으로 조사여행을 떠났다. 이때 그는 독일 國家學(국가학)의 권위자인 빈대학 교수 로렌츠 폰 슈타인을 만나 안보문제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헌법을 제정할 때 독일식 입헌군주제 헌법에 대해 조언을 해 준 사람이었다.
야마가타는 슈타인 교수를 만나 먼저 시베리아 철도가 일본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슈타인 교수는 “황막한 광야에 單線(단선)철도가 있을 뿐인데 3만명만 이동한다고 해도 600량의 차량이 필요하다. 선로의 유지는 차치하고라도, 병력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들 쉬 얼어붙는 항구에서 그 많은 수송선을 어떻게 확보하겠느냐”면서 일본열도에 대한 위협 가능성을 부정했다.
슈타인 교수는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극동으로 진출한 러시아가 조선반도에서 항구를 얻을 것으로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중립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일본 안보를 위해서는 조선의 중립을 깨는 자를, 일본은 힘으로라도 저지해야 한다”고 일렀다.
슈타인 교수가 일본의 안보를 위해 야마가타에게 강조한 것은 조선의 중립화 유지였다. 주권선·이익선 개념은 슈타인 교수의 설명 속에 있었다. 야마가타와 슈타인 교수의 이야기를 발굴한 사람은 도쿄대학의 소장 교수 가토 요코(加藤陽子)다. 그는 100년 이상 대학 문서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을 찾아냈다.
조선병탄으로 이익선 만주까지 확장
야마가타가 시정연설에서 주권선·이익선론을 개진한 지 만 4년이 되기 전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대장 야마가타는 야전군사령관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벌을 누볐다.
청일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의 중립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일본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쟁, 일본의 주권선을 조선이라는 일본의 이익선 위로 확장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제국은 청일전쟁 10년 만에 러일전쟁을 벌여, 이익선이었던 조선을 주권선으로 확보했다. 이제 일본의 이익선은 만주로 開張(개장)됐다.
확장된 새 주권선은 그에 따라 개장된 새 이익선의 설정을 요구하게 됐다. 새 주권선의 안보를 위해 개장된 새 이익선에서 他(타)세력을 배제하다 보면, 어느새 그 너머로 새 이익선을 필요로 하게 됐다.
근대화의 문을 연 일본이 이 세상에서 제일 뽐내고 싶은 상대가 누구였을까. 아마도 첫째로 조선이고, 다음으로 중국이었을 것이다. 그 ‘역사심리적’ 일본적 표현이 침략이었다.
메이지유신 후 불과 6년 만에 이른바 征韓論(정한론) 소동이 벌어졌다. 유신의 최고 공훈자들이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밀고 당기고 하다가 결국 뒤로 미루고 말았지만, 이는 일본인들이 조선침략을 온 국민의 소망으로 공유하게 되는 세레모니가 아니었나 싶다.
주권선·이익선론은 근대 일본의 국가 정서 같았던 조선침략 기조와 만나면서 침략의 에스컬레이터로 변신했고, 그 위에 일본을 올려놓았다.
조선침략 이후 국가패망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걸은 길을 더듬어 보면, 슈타인의 주권선·이익선론은 야마가타에 의해 침략적 팽창주의의 전략 독트린으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 야마가타의 주권선 이론을 일본제국의 붕괴와 연관짓는 시각은 미국에도 있다.
“제국 정부가 제국 주변부의 전략적 안전보장에 너무 집착해, 최종적으로는 제국 자체의 붕괴를 가져온 것을 기록해 두고 싶다.”(마크 피티)
‘제국 주변의 전략적 안전보장’이라는 것이 바로 야마가타의 ‘이익선’ 안보를 두고 하는 얘기다. 마크 피티는 에스컬레이터 얘기는 하지 않지만, 일본이 야망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뛰어내리지 못해 제국에는 종말이 왔다고 적고 있다.
“제국의 팽창을 떠받친 근본적인 전략적 이유에 의해, 일본은 제대로 된 식민제국이 되고 나서도, 그 야망에 명확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같은 야망은 일련의 치명적 충돌을 불러 왔는데, 처음에는 중국과, 다음에 서양 여러 나라와의 사이에 일으키게 됐다.”
일본인들, 침략전쟁에 열광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에 갖고 있던, 旅順·大連(여순·대련) 조차지와 하얼빈에서 대련까지의 東淸鐵道(동청철도) 남만주지선과 그 부속 이권을 차지했다. 일본은 경비 명목으로 1만명 규모의 1개 사단과 독립수비대로 관동군을 두었다.
1910~1920년대 일본제국의 행태를 보면, 앞에서 든 만주의 권익을 유지·확장하는 것이 국가목표의 중심 같았다.
일본은 1915년 중국에 대해 21개조의 침략적 이권 요구를 했다. 일본이 만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권익을 유지·확장하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일본은 서양 열강이 제1차 세계대전에 여념이 없는 사이에 약체 위안스카이(袁世凱) 정권에 ‘21개조의 요구’를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러시아혁명 진압을 명분으로 이루어진 1910년대 말의 시베리아 출병도 만주 위쪽으로 완충지대를 만들어, 장차 일본 것으로 하고 싶은 만주를 러시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1927년부터 3차에 걸친 산동(山東)출병도, 군벌 등을 없애고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北上(북상)하는 장제스(蔣介石) 군대를 저지해 만주 권익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막아 보자는 것이었다.
1930년대가 가까워지면서, 스탠드 플레이에 능한 정치가들은 국회에서 “만주는 우리나라의 생명선”이라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언론도 스스럼 없이 이를 받았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31년 7월 도쿄대 학생들을 상대로 의식조사를 한 것이 있다. “滿蒙(만몽·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 대한 무력행사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88%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것은 1931년 9월이었다. 만주사변은 현지 부대 관동군의 독단 전횡의 산물이었다. ‘일본 육군이 생긴 이래 최고의 수재’라는 소리를 듣는 영관급 참모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가 주도자였다. 1만명 남짓한 관동군은 19만명의 장쉐량(張學良)군을 제압하고 석 달 만에 全(전) 만주를 석권했다. 일본 육군 중앙과 정부는 이 결과를 추인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만주사변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신문 발행부수에 날개가 달렸다. 일본의 大(대) 신문의 기틀이 이때 잡혔다고 한다. 식자건 서민이건, 일본인들은 침략전쟁에 열광했다.
이 만주사변 뒤에 조선군이 있었다. 후일 총리가 되는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조선군사령관은 관동군 참모들과 미리 모의하고 조선군 1개 사단을 압록강에 대기시키고 있다가 軍(군) 중앙의 지시도 받지 않고 越境(월경) 명령을 내렸다.
끝없는 이익선의 확장
이보다 3년 전에 있었던 장쉐량(張學良)의 아버지 장쭤린(張作霖) 폭살사건은 만주사변의 전주곡이었다. 이 사건은 후일 한 관동군 참모의 모략으로 드러났다. 장쭤린이 탔던 京奉線(경봉선·북경~봉천) 철도 전망차를 폭파시킨 화약 600㎏은 서울 용산의 조선군사령부 공병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사건 현장에는 용산 공병대의 장교가 있었다.
여기서 보듯 일본제국의 일부가 된 조선은 만주 침략의 기지였고 병기창이었다. 야마가타 전략 독트린에 따르면, 조선은 제국의 주권선이고, 이젠 만주가 제국의 이익선이 된 것이다. 메이지의 원훈, 公爵(공작) 야마가타 원수가 만든 주권선·이익선 에스컬레이터는 속성상 멈출 수 없었다.
괴뢰국을 세워 만주를 제국의 주권선에 집어넣은 결과 일본은 결정적으로 중국 내셔널리즘에 불을 붙였다. 일본은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만주 침략은 미국에 일본이 침략국가라는 확신을 주었다. 세계 여론은 중국 쪽으로 돌았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뛰쳐나갔다.
만주를 제국의 주권선 안에 넣고 난 후 일본의 이익선은 또다시 전진한다. 만주국 비슷한 괴뢰정권을 만들어 가면서 일본은 華北(화북)으로, 華中(화중)으로, 華南(화남)으로, 다시 양쯔강 깊숙이 쳐들어 갔다. 그러면서 침략의 에스컬레이터는 수렁에 빠져들고 만다.
여기서 헤어나기 위해 일본은 援蔣(원장)루트(미·영이 장제스군을 지원하는 루트)를 차단하려 들었다. 일본은 북부베트남으로, 다시 남부베트남으로 나아갔다. 일본은 거기서 드디어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혔다. 1941년 7월이었다.
미국은 미국 내 일본자산 동결조치를 취하고, 對日(대일)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미·일 간의 교섭을 마감하는 헐(당시 美 국무장관) 노트가 일본 측에 건네진 것은 1941년 11월 26일, 진주만 기습을 12일 앞둔 시점이었다. 미국 측은 이 헐 노트가 전쟁통지서가 될 것임을 미리 짐작했다고 한다. 헐 노트의 요점은 3가지였다.
● 중국(만주 포함)으로부터의 전면철수
● 일본의 괴뢰정부인 중국 왕자오밍(汪兆銘) 정부의 부인
● 독일·이탈리아와 맺은 3국 동맹에서 이탈
이는 일본제국이 國運(국운)을 걸고 손에 넣은 지난 10여 년의 성취를 되돌리라는 것이고, ‘이익선’ 개장의 결과물을 도로 토해 내라는 얘기였다.
제국 육군의 정치 독점
태평양전쟁을 먼저 택한 것은 ‘대일본제국’이었다. 1941년 12월 1일 어전회의에서 육군대신과 내무대신을 겸하고 있던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정세 보고 속에서 미국이 제시한 헐 노트에만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제국 패망으로 끝장난 전쟁의 開戰(개전)이 결정됐다.
돌이켜보면 이익선 개장의 시발점에 조선이 있었다. 제국이 이익선인 조선을 삼킴으로써, 지정학의 설명개념에 불과했던 주권선·이익선 이론은 제국을 패망으로 몰고가는 침략주의 전략독트린으로 작동한 것이다. ‘대일본제국’은 조선을 삼켰기 때문에 패망의 길로 나아간 셈이다.
경영채산을 들어 식민지를 털고 소일본주의를 취하자고 주장하는 인사가 있었다. 한 역사가가 좌담에서 말을 받았는데, 일본인들에게 상식화된 평균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반도를 일본의 판도에 넣기 위해 일·청, 일·러(전쟁) 싸우고 피를 흘렸는데, 그걸 경비문제쯤으로….”
야마가타 독트린은 이와 같이 시동이 걸렸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다음해 1월부터 극동국제군사재판(일명 도쿄재판)이 열렸다. A급 戰犯(전범) 28명 중, 제국 육군은 15명이었다. 사형판결이 난 7명 중 문관 총리 출신 한 사람을 빼고는 도조 히데키 등 모두 육군이었다. 종신금고형을 받은 9명 중에는 조선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郞)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도 모두 육군 출신이었다. 말하자면 도쿄재판은 제국 육군을 심판하기 위한 재판이었던 것이다.
왜 제국 육군이 국제심판의 대상이 되었나. 그들이 전쟁 위에 있는 정치를 했고, 폭력과 공포를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든 헐 노트가 문제 삼는 중국 침공만 해도, 일본은 1937년 베이징 부근 양군 접경지역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소충돌을 기다렸다는 듯이 擴戰(확전)의 계기로 삼았다.
전쟁을 마구잡이로 확대해 간 것은 육군의 강경파 중견 막료들이었다. 외교당국 등 정부는 물론 군 상층부의 불확대 방침도 아랑곳하지 않은 것이 당시의 제국 육군이었다.
헐 노트에서 문제 삼은 3국동맹을 밀어붙인 것도 제국 육군이었다. 해군은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다. 외교는 이미 나설 틈이 없었다.
이것이 1940년 9월인데, 독일이 電擊戰(전격전)으로 프랑스를 휩쓸고 난 다음이었다. 일본 언론과 국민 사이에는 히틀러 선풍이 불고 있었다.
“開戰 반대하면 천황이라도 암살했을 것”
태평양에서 전쟁을 해야 하는 해군은 독일 육군이 강하다고 해서 독일과 동맹할 생각은 없었다. 독일과의 동맹은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군은 결국 육군에 동조하고 말았다. 당시의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正·후일 총리 역임)는 뒷날 “왜 그때 3국동맹에 반대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만일 반대했으면 육군의 테러에 죽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개전으로 가는 막바지에서 천황과 가장 가까운 귀족 출신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는 프랭크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직접 담판으로 전쟁회피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이때 제국 육군은 고노에 암살부대를 가동시킨 것으로 후일 알려졌다.
전쟁이 끝난 후 한 외국 기자가 쇼와 천황에게 “終戰(종전)의 결단을 할 수 있었는데, 왜 개전 저지는 못했는가”라고 물었다. 천황은 “만약 그랬다면 나는 살해됐거나 유폐됐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천황은 군벌이 두려워 할 말도 못했는데, 그의 병졸들은 전장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 갔다. 입만 열면 ‘천황의 군대(皇軍)’라는 조직이 이보다 더 모순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군대는 천황이 내린 군인정신의 지표인 ‘군인칙유’ 260자를 모두 외우게 했다. ‘칙유’는 제국 군인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전쟁은 군인이 하는 것이지만, 전쟁을 하느냐 안 하느냐 결정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보통 군대는 그렇다. 중일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제국 육군은 정당인을 거의 침묵시켜 놓았고, 파쇼적 공기 속에서 정부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천황의 측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국 육군은 공포전술로 정치를 독점했다.
국가를 패망으로 끌고간 군부 정치화의 시발점에 다이쇼 정변이 있었다. 다이쇼 정변은 식민지 조선에 육군 2개 사단을 증설하려다 터져 나온 정변이다. 1912년부터 1914년 사이에 4개 정권이 이 사건에 관련됐다.
陸相(육상·육군대신), 海相(해상·해군대신) 등 군부대신은 현역으로만 임명토록 되어 있었고, 이들에게는 천황에게 내각을 통하지 않고 직접 上奏(상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 제도는 전쟁 등 비상시를 상정한 것이었다. 평시에 각료 중의 하나인 군부대신이 총리를 제쳐 놓고, 천황에게 바로 상주할 일은 찾기 어려웠다.
다이쇼 정변의 원인
다이쇼 정변에서는 이 일이 벌어졌다. 개성 강한 한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上原勇作)가 군부의 뜻을 모아 새로 식민지가 된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할 것을 각의에 요청했다.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재정사정을 들어 무리라고 거절했다. 육상은 조선 쪽 사정의 절박성에 쫓겼는지 승부수를 던졌다. 여기에 동원한 수단이 앞에서 본 직접 상주권이다. 그는 천황을 찾아가 사표를 제출해 버렸다.
현역 무관제이기 때문에 후임 육상을 임명하려면 군부의 추천이 필수적이었다. 사이온지 총리는 육군대신이나 참모총장은 아니지만 육군을 쥐고 있는 야마가타에게 후임자 추천을 의뢰했다. 야마가타의 답은 “육군과 타협해 보라”는 것이었다. 귀족 출신인 사이온지는 야마가타의 막후 권력에 굴복하기 싫었다. 그는 총리직을 던져 버렸다.
군부로서는 자신들이 차지하는 대신 자리를 가지고 내각을 통제하는 수단 하나를 실습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후임 총리는 야마가타의 동향 직계인 가쓰라 다로(桂太郞)였다. 러일전쟁 때 총리였고, 조선 병탄을 결정한 최고 책임자가 그였다. 야마가타는 군벌의 정상이요 자신의 후계자인 가쓰라를 내세워 일거에 조선사단 증설을 해치울 심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심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재정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조선사단 증설을 요구해 사이온지 내각을 몰아낸 장본인으로, 야마가타가 그 보스인 조슈벌(長州閥)과 육군을 지목했다.
“족벌타파, 헌정옹호”를 내걸고 군중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의사당 문전을 메운 난동군중이 신문사에 불을 지르고, 도쿄에서만 파출소 86군데를 때려 부수고 電車(전차) 26대를 불태웠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지 3년 남짓한 2월 10일 하루에 도쿄에서 벌어진 일이다. 소동은 지방으로 번져 갔다.
조선增師(증사) 요구는 조선을 삼킨 일제에 가열하게 항거하는 조선민중에 대한 일제의 대응책이었다. 그 결과 일본을 뒤흔든 정변이 일어난 것을 보면 역사에 섭리가 있다는 감을 금할 수 없다.
소요 다음날인 2월 11일 가쓰라 내각은 총사퇴했다. 취임 53일 만이었다. 가쓰라는 이해를 못 넘기고 10월에 病死(병사)했다.
조선군 사단 증설문제가 발단이 된 다이쇼 정변은 군부정치화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가쓰라는 갔지만, 군부의 발언권은 강화시켜 놓았다.
조선 총독과 군부의 정치화
군부가 점점 정치화하면서 발언권을 강화하는 또 다른 계기도 식민지 조선과 관계가 있었다. 바로 조선총독의 존재다.
조선총독은 모두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육·해군 대장이었다. 총독은 입법권을 가졌다. 이를 ‘制令(제령)’이라 했는데, 작성과 실행에는 천황의 裁可(재가)만을 필요로 했다.
총독은 조선군 통수권도 가졌다. 총독은 본국 총리로부터는 어떠한 감독도 받을 의무가 없었다. 대일본제국 안에 조선총독만한 권력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8명의 역대 조선총독 중에서 4명, 즉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총리 자리에 있었거나, 조선총독을 마친 후 총리가 됐다.
육군대신 출신이 세 사람, 즉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미나미 지로, 해군대신 출신이 한 사람(사이토 마코토), 조선군사령관 출신이 두 사람-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권력의 정상에 이르는 사다리를 오르고 있는 자들이었다. 조선총독이란 자리는 제국 군부 수뇌진의 정치훈련장이었다.
현역 군인인 조선총독에게 정치맛을 알게 한 사람은 조선통감으로 3년 반 동안 재직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儒林(유림)들을 앞에 놓고 스스로를 중국 戰國(전국)시대의 名(명)재상인 鄭(정)나라 子産(자산)에 비유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했다.
메이지 초기, 이토는 신생정부의 서양견문 교습사절단의 일원으로 독일에 다녀왔다. 이때가 독일통일 직후인 1871년이었다. 비스마르크를 만나고 돌아온 이토는 시가를 입에 무는 등 비스마르크를 흉내 냈다.
조선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이토가 모델로 삼은 사람은 영국의 크로머 백작이었다고 한다. 1882년 이집트가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될 당시 총영사였던 그는 20년 동안 이집트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副王(부왕)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영국문명을 성공적으로 이집트에 전수했다는 평을 받았다.
문관인 이토는 조선에 부임하는 조건으로 조선주둔 일본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했다. 군부는 반발했지만, 야마가타가 이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토는 조선주둔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했던 것은 ‘조선주둔군이 방자하고 난폭하다’는 얘기를 듣고 선심행정 차원에서 이를 바로잡아 보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조선의병 토벌작전
조선인은 이토의 통치에 분노와 저항으로 답했다. 1907년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의병투쟁은 보다 조직화·전국화됐다. 이토는 본국의 육군대신에게 군대 증파를 요청하는 한편, 조선군사령관에게 헌병과 경찰을 집중시켜 주고 철저한 토벌을 요구했다.
일본군은 三南(삼남)지방에서 악명높은 攪伴(교반) 작전이란 것을 자행했다. 일정지역을 의병의 중점활동 지역으로 지목한 후 완전포위하고, 화력과 총검으로 줄을 세워 전후좌우로 무논에 써리질하듯 휘젓는 것이 교반이었다. 무고한 조선의 양민들이 개 돼지만도 못하게 처참하게 도륙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토는 조선에서 ‘善政(선정)’을 베풀어 보겠다던 초심이 환멸로 변했다. 통감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야마가타가 추밀원 의장 자리를 비워 주었다.
한일합방 후 총독이 독립적으로 군통수권을 행사하는 체제는 통감 시절 이토가 남긴 유산이다. 군사점령의 연장처럼 식민통치는 시작되었고, 그것은 철저한 武斷(무단)통치였다. 이토의 실험통치는 대규모 군대주둔 없이는 조선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군국의 후배들에게 보여줬다.
1910년 한국을 병탄할 무렵, 일본정부는 재정위기에 처해 있었다. 1910년도 일반회계에서 費目別(비목별) 경비 비율을 보면, 군사비가 32.5%, 공채비가 30.2%, 식민지 경영비가 2.3%, 행정비가 27.1%, 사회정책비가 4.9%, 산업조장비가 3%로 되어 있다.
군사비와 공채비가 62.7%로 압도적이다. 이는 러일전쟁 戰費(전비)의 많은 부분을 영국·미국에서 발행한 공채로 메웠기 때문이었다. 일본정부는 이 공채에 대한 원리금 갚기에 매달려야 했다.
군사비가 높은 것은 러시아의 복수전을 예상해 전비수준을 평시로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이온지 정부는 행정재정 정리를 정책의 전면에 내걸고 이를 담당할 기구를 만들어 경비절감을 독려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11년 중국에서는 辛亥(신해)혁명이 일어나 淸朝(청조)가 무너졌다. 이어 중화민국이 수립됐지만, 여기저기서 군벌이 할거하는 혼란이 닥쳐 왔다.
육군은 이를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할 호기로 여겼다. 주권선·이익선 전략에 따르면 제국의 주권선이 조선으로 확장됐기 때문에 이익선도 만주로 확장돼야 했다. 야마가타는 남만주에 1개 사단을 증파할 것을 제안했다. 사이온지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육군은 사이온지 정부에 대해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론의 지지를 업고 있는 정부도 군부의 군비확장 정책에 맞서 긴축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통수권 독립’의 남용
러일전쟁 승리 후 군부는 군사행정이나 전략 차원을 넘어 정략에 입을 대는 정치세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군부의 이런 행보는 야마가타의 득세와 동시에 진행됐다.
정치적 독자성이 강화되면서 군부독주는 ‘통수권의 독립’을 메이지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3權(권) 위로 밀어올리는 꼴이 되었다. 그것이 쇼와 군국주의였다.
작가 시바 료타로는 일본제국이 패망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을 ‘요술방망이’라고 일컬어졌던 군부의 ‘통수권 독립’의 무제한 통용에서 찾고 있다. 통수권의 요술방망이를 휘두른 자들은 육군성이나 참모본부의 상급 장성들이 아니라, 초급 장성이나 영관급 막료들이었다. 그들의 시야는 좁았고, 정보는 부족했으며, 판단에는 냉철함이 없었다. 게다가 상하, 육·해군, 파벌로 분열되어 있어 통일된 전략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
일본 군사엘리트들의 성적표를 하나만 보겠다. 어떤 좌담회에서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태평양전쟁에서는 250만명의 일본군이 사망했는데, 그중 7할쯤이 廣義(광의)의 餓死(아사)다. 이런 전쟁은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전쟁에 나가 굶어 죽은 전사자가 170만명을 넘는다니, 대일본제국은 동서고금에 없는 전쟁을 치른 것이다. 그 원인은 엘리트들의 비합리적 전쟁계획에 全軍(전군)이 올라탄 데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美(미) 전략폭격조사단은 일본의 패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근본적 패인은 일본의 전쟁계획의 실패다. 일본은 단기전에 승부를 걸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 빈약한 경제를 가지고 10배 이상으로 우세한 경제력을 가진 강대한 국가 미국과 장기에 걸친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된 데 있다.”
이 보고서 역시 일본의 군사엘리트들을 문제 삼고 있는 셈이다. ‘실패한 전쟁계획’을 세운 것이 그들이니까.
이 무렵 일본의 각종 통사를 보면 조선병탄은 극히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인 청일전쟁·러일전쟁과는 서술비중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기만과 협박과 학살, 약탈, 야수적 만행과 反(반)문명적 폭거 위에 쌓아 올린 피라미드가 일제의 조선병탄이었다. 아마 일본 역사가들도 자세히 들여다보기에 역겨웠을 것이다.
조선병탄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가목표의 완수
합방의 그날, 일본 각지에서는 ‘병합’ 축하회와 깃발행렬이 벌어졌다. 메이지 천황의 ‘병합조서’가 나온 8월 29일 밤, 도쿄에서는 신문사 주최로 떠들썩한 축하행사가 벌어졌다. 히비야 공원을 기점으로, 등불행렬이 긴자에서 교바시(京橋) 방면으로 이어지고, 악대가 거리를 누볐다. “대일본제국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았다. 시민들은 징을 두드려댔다(東京朝日新聞 1910년 8월 30일자).
메이지 천황이 조선병탄을 제국 최고의 성사이자, 일생일대의 업적으로 인식했음을 알려주는 얘기가 도널드 킨의 <메이지 천황>에 나온다.
조선병탄 후 이를 알리는 奉告祭(봉고제)가 황실의 몇 신전에서 행해졌다. 천황은 일본 최고의 신궁인 이세진구(伊勢神宮)와 先代(선대)인 고메이(孝明) 천황릉에 의전관을 보내 조선병탄 사실을 고했다. 이를 두고 도널드 킨은 이렇게 말했다.
“낭보라고 알린 성역의 수로 보아 메이지 천황은 조선병탄을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의 승리보다 중요시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병탄은 청일·러일전쟁 목적의 완결이었고, 메이지유신 이래 국가목표의 완수였던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다이쇼 정변은 제국육군이 식민지 조선에 2개 상설사단을 증설할 것을 요구한 데서 비롯됐다. 육군은 천황제 권력의 대리자 같은 元老(원로) 야마가타를 등에 업었지만, 재정의 고삐를 쥐고 있는 정부, 이미 정치적으로 성장한 정당 세력, 그리고 대중사회에 눈뜬 여론을 상대로 정면돌파를 하려 했다. 제국육군이 무리한 정치모험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증사 정책을 추진한 주동자는 육군성 군무국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927년 총리)였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야마가타의 의중을 살핀 군무국장 다나카가 1912년 6월 조선으로 가서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회담한 자리에서 조선 2개 사단 증설안이 결정됐다고 한다.
당시 일본 육군 군벌의 인맥은 야마가타를 최정점으로 가쓰라(전 총리)-데라우치 조선총독-다나카 기이치 육군성 군무국장-우가키 가즈시게 육군성 군사과장(후일 육군대신, 조선총독 역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 조슈벌이다.
데라우치 조선총독은 당시 현역으로 있는 조슈벌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당시 육군대신을 겸임하고 있었다. 대일본제국이 육군대신으로 하여금 조선통감을 겸임토록 한 것은 조선병탄을 일종의 군사점령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병탄 후 데라우치는 총독으로 조선에 앉아 있으면서 제국육군의 주요 정책에 간여하고 있었다. 그의 손발이 된 사람이 다나카 군무국장이었다.
조슈벌이 조선增師를 추진한 이유
데라우치 총독과 육군이 2개 사단 증설안을 강하게 밀어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증사 문제의 핵심 실무자였던 우가키 군사과장이 남긴 ‘2개 사단 증설 주장의 의견서’에 의하면,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유이 마사오미·由井正臣).
첫째, 전통적으로 러시아를 假想(가상)적국으로 보는 시각에서, 이 무렵 완성된 시베리아 철도의 複線化(복선화)와 신해혁명으로 인한 러시아의 중국진출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다.
둘째, 신해혁명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는 중국대륙을 향한 제국의 안녕발전을 위해 주동성 확보를 위한 대비책 마련이다. 이는 앞에서 보았던 야마가타의 주권선·이익선 전략에 따르는 새 이익선 개장 대책 바로 그것이다.
우가키는 ‘의견서’에서 “금일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常置(상치)하는 것은 對(대)중국정책의 主脚地(주각지)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은 이제 제국육군의 중국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라야 한다는 얘기였다.
1912년 7월, 환갑연을 몇 달 남겨 놓고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나고 다이쇼 천황이 즉위했다. 이 무렵 조선의 군사상황을 우가키 군사과장은 이렇게 정리했다.
“지금 조선에 교대 주둔하고 있는 1개 사단 반의 병력은 제국군대의 건재와 맞지 않아 교육에 지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통치의 관계상 110여 개소에 분산 주둔하고 있어, 유사시를 당해 그 동원을 완결하는 데만 70여 일이 걸린다.”
‘조선통치의 관계상 110여 개소에 분산 주둔’이라니, 이게 무슨 얘긴가. 통감·총독 통치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주둔 일본군을 각지에 분산 배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제는 1907년 8월 조선군대가 해산된 후부터 조선증사 논란이 벌어진 1912년까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조선의병의 수를 1만7676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가 펴낸 <조선폭도 토벌지>에 의하면 당시 대대급 이상의 사령부 소재지는, 鏡城(경성)·회령·북청(이상 함북), 함흥·원산(함남), 평양(평남), 안주(평북), 황주·해주(황해), 京城(경성·서울)·개성·적성·수원·이천(경기), 금화·춘천(강원), 충주(충북), 대전(충남), 상주·안동·대구·경주(경북), 진주(경남), 전주·군산·고창(전북), 광주·영암·법성포(전남) 등이었다(당시 행정구역에 의함).
전국의 읍·면·동·리에는 중대 이하 소대·분대 단위의 부대들이 그물망처럼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유사시 이를 동원하는 데만 70여 일이 걸려야 했고, 주무여야 할 이익선 관리와 진공에는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 상치하는 2개 사단을 증설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결국 일제에 끈질기게 항거한 조선의병 때문에 조선증사 문제가 나왔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이쇼 정변이 일어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부는 ‘통수권 독립’이라는 ‘마법의 지팡이’의 효능에 맛들인 것이다. 후일 일본제국을 패망으로 몰고간 ‘통수권 독립’이라는 ‘마법의 지팡이’를 일본 군부가 손에 쥐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바로 조선의병이었다.
제국군대를 강박적으로 침략에 나서게 한 야마가타의 주권선·이익선 독트린이나, 일제의 망조를 불러온 ‘마법의 지팡이’를 군부가 휘두르게 한 조선의병은, 두 가지 모두가 대일본제국이 조선을 삼키는 바람에 발동이 걸리고, 불이 붙었다. 대일본제국은 조선을 삼켜서 패망한 것이다.
후스의 대전략
일제가 조선을 삼켜 패망에 이르는 과정을, 누군가 예지력이 있어서 전략발상으로 가다듬어 보았다면, 어떤 모양일까.
일제의 15년 침략전쟁을 견뎌낸 중국인들의 전략사상에 참고할 것이 있다. 베이징대 교수 출신으로 장제스 총통에 의해 주미대사로 발탁된 후스(胡適)는 1935년 ‘日本切腹 中國介錯(일본절복 중국개착)’ 전략이란 것을 내놓았다. 이때는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지만, 이미 만주사변·상해사변·熱河(열하)작전 등을 거치면서 일본의 중국침략 기조는 확연해지고 있었다.
‘절복’은 칼로 배를 가르고 죽는 일본 무사들의 자살방식을, ‘개착’은 무사가 법도대로 배를 가를 때 뒤에서 다른 무사가 일본도로 목을 쳐 주는 것을 말한다.
후스는 일본의 세를 꺾기 위해서는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가진 미국과 육군대국 소련이 나서 주는 길밖에 없다고 보았다. 미국과 소련은 그때로서는 아직 준비가 모자라 일본의 침략성을 알면서도 간섭에 나서기를 꺼리고 있었다. 후스는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정면으로 받아서 2~3년간 계속 져야 미국과 소련을 끌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다 큰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2~3년간의 패배를 감수한다는 것은 민족의 운명에 대한 부동의 신뢰와 역사에 대한 투철한 통찰력이 있어야 가능한 발상이다. 후스의 말을 들어 보자.
“이상과 같은 상황에 이르러서 드디어 태평양에서의 세계전쟁의 실현을 촉진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3~4년 동안은 다른 나라의 참전 없이 단독의 苦戰(고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무사는 자살할 때 절복을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介錯人(개착인)이 필요하다. 금일, 일본은 전 민족 절복의 길을 걷고 있다. 위에 든 전략은 ‘일본 절복, 중국 개착’이란 8글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됐다. 중국은 패전과 퇴각을 거듭했지만 항복하지는 않았다. 일제는 수렁에 빠졌다는 감을 떨칠 수 없었다. 원장 루트를 통해 중국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지원이 있었다. 일본이 터뜨린 태평양전쟁을 미국이 받았다. 후스가 염두에 두고 있던 ‘일본의 자살판’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중국은 절복을 해서 괴로워하는 침략자 일본의 목을 개착했다.
‘親日’ 편가르기는 누굴 위한 것인가?
일제가 침략했을 때, 우리나라에는 이에 대응하는 전략을 기획하거나 관리할 사람이 없었다. 그간의 경과를 보건대 하늘은 아마도 우리 민족에게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라”면서 “고래는 죽는다. 정신 잃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을 것이다. 하늘은 우리한테 ‘고래사냥 전략’을 주지 않았을까.
우리 민족 모두는 고래 뱃속을 통과했다. 요즘 들어 ‘親日(친일)이다, 아니다’ 논쟁을 하는데, 고래 뱃속에서 위벽에 가까워 단물 맛이라도 봤으면 ‘친일’이고, 그러지 않았다면 친일이 아닌가. 고래 뱃속에서 민족 구성원 가운데 누군들 主動性(주동성)이 있었는가.
세월이 흘러 주동을 회복한 사람들이 주동성을 빼앗겼던 사람들을 저울에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조선사람들이 ‘친일이다, 아니다’로 편가름하기를 누가 제일 바랐던가. 선심정책으로 ‘친일’의 혼을 사들인 이토 히로부미와 알량한 낚싯밥으로 조선사람을 낚아서 헌병 보조원으로 만들어 의병 토벌에 앞세웠던 조선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그리고 소생한 ‘제국의식’을 가지고 오늘도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참배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친일이다, 아니다’라고 논란을 하고 있는 한 우리의 의식은 ‘일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의 克日(극일)을 훼방놓을 생각이 없다면 ‘친일’ 편가르기는 그만두어야 한다.<계속>⊙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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由井正臣 ‘二箇師團增設問題と軍部’ <驅澤史學17號>(驅澤大學史學會)
由井正臣 ‘日本帝國主義の特質’ <歷史學硏究352號>
藤原ようこ ‘義兵運動’ <歷史學硏究187號>
조선이 ‘日帝(일제)’의 식민지가 됐던 1910년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이 시점, 東亞(동아)의 大局(대국)에 세계사적 의미의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일제로부터 굴욕과 난도질을 당하던 중국이 G2의 자리를 일본으로부터 넘겨받게 된 것이다.
일제는 지난날 서양의 앞잡이였고 西勢(서세) 이상의 침략세력이었으므로, 중국의 G2 부상은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東風(동풍)이 西風(서풍)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본의 대응이 만만치 않다. 55년 만에 자민당을 주저앉히고, 300석이 넘는 의석으로 민주당에 정권을 맡겼다. 黨(당) 실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는 2009년 말 150여 명의 국회의원을 포함, 700여 명의 대형 방문단을 거느리고 중국을 찾아갔다.
공영방송 NHK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불쏘시개인 러일전쟁을 주제로 한 스페셜드라마 <언덕위의 구름>(원작 시바 료타로)을 2009년 11월 말부터 방영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3년간 방영될 이 드라마에 NHK는 200억 엔(약 2600억원)의 거액을 들였다고 한다.
일제가 ‘영광의 頂點(정점)’으로 치는 러일전쟁이 실은 조선을 먹기 위한 침략전쟁이었음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는 것일까. 망국체험 100년에 ‘친일파’가 뭔가. 아직도 일제의 呪縛(주박: 주술의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함)에 붙들려 있자는 얘긴가. 동아의 대국 한복판에 한 번은 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러일전쟁에 이겨 일본 사람들이 한창 기세등등해 하던 시절, “일본은 망한다”는 소리가 일본 안에 있었다.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대표작 <三四郞(산시로)> 속에 나오는 얘기다.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러 상경하는 주인공을 향해, 차 속에서 만난 인텔리 풍의 사나이는 선진국으로부터 빚을 내어 전쟁에 이겨 놓고, 일등국이 됐다고 들떠 있는 세상을 야유하고 있었다. 소설이 나왔을 때가 전쟁이 끝난 지 2년 조금 지난 1908년이었다.
이 무렵 조선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군대가 해체되었고, 이로 인해 의병운동이 전국으로 번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의병 한 사람이 잠만 자고 갔다 해도,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양민을 도륙하고 있을 때다.
‘천재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는 일제가 조선을 倂呑(병탄)한 다음달인 1910년 9월 이렇게 썼다.
“지도 위 朝鮮國(조선국)에 검게 검게 먹칠을 하며 秋風(추풍)을 듣다.”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도 그렇지만 1급의 문학가들에게는 선지자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小(소)일본주의’를 내걸고 식민지 포기를 주장했던 혜안의 士(사)들도 더러 있었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1910~1920년대 초반 다이쇼 천황의 재위 기간 중 참정권 확대, 의회정치 활성화, 대중의 정치적 개안 등이 진행된 것을 일컫는 말)의 한복판에서 활약한 名(명) 평론가 가야하라 가잔(茅原華山)은 1914년 <인간생활사>에서 “조선을 取(취)한 것은 일본에 백년의 화근을 남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국 일본은 이 말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 글은 대일본제국이 조선을 삼킨 것이 어떻게 화근이 되어 패망했는가를 삼킨 지 100년 되는 해를 맞아, 풀어 보고자 한다. 일제의 ‘역사청소’를 조선사람의 손으로 한번 해 보는 것이다. 의식 속에 ‘과거’를 영원히 쓸어내고, ‘내일’로 나아가는 예비 동작이기도 하다.
日本을 패망으로 끌고 간 軍部 엘리트들
역사의 遠近法(원근법)을 동원하면, 일본 메이지(明治) 근대화의 도달점은 국가 패망이다. 메이지維新(유신)과 함께 등장했던 대일본제국이 敗沒(패몰)하기까지 77년(1868~1945)이 걸렸다. 레닌혁명으로 나타났던 공산제국 소련은 74년(1917~1991) 만에 사라졌다. 게르만인들이 힘으로 다른 민족 위에 군림하는 제국방식을 졸업하는 데도 74년 걸렸다. 宰相(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러시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이겨 독일을 통일한 것이 1871년이었고, 히틀러의 제3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것이 1945년이었다.
여러 가지 근대적인 장치를 한다 해도, 어떤 기만적인 겉모양을 취해도, 힘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의 한계는 70여 년쯤인 것 같다.
일본은 그동안 19세기 후반의 메이지 근대화를 온 세계에 자랑해 왔다. 非(비)서양 세계에서 유일한 근대화라고 자랑하고, 그 템포의 빠름과 성취의 현저함을 자랑하고, 같은 東(동)아시아 문화권인 이웃 한국과 중국을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제쳐 버렸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이 근대화의 총화적 결과물은 70년 남짓해서 국가 패망에 가 닿아 있는 것이다.
메이지 헌법은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까지 가서 전문학자에게 물어서 만들었다. 이 헌법은 독일식의 강대한 군주권을 보장하는 입헌군주제 헌법이다. 다이쇼와 쇼와(昭和)로 代(대)가 갈렸지만, 근대화의 결과물인 메이지 헌법체제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유지됐다.
국면을 요리하는 인재들은 하나같이 超(초)엘리트들이었다. 그 스스로가 근대화의 결과물인 이 엘리트들이, 똑똑한 의사결정을 집적해 들어간 종착점이 패망이었다.
태평양전쟁 무렵에는 도쿄제국대학 출신과 육군대학 출신의 정예분자들이 총력전 체제의 요충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육군대학 출신은 간단치 않았다. 13세부터 관비로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임관 2년 이상 된 30세 전의 장교 중 소속 연대장의 추천을 받은 자만이 육군대학 응시가 가능했다. 전국에서 정원이 50명이었다.
3년간의 교육 끝에 육군대학을 졸업하면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요직에 배치됐다. 독일 등 선진국 유학도 거치게 되어 있었다. 도쿄제국대학과 육군대학은 수발성에서 어느 쪽이 더 위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일본 조슈군벌의 우두머리 야마가타 아리토모(왼쪽)와 메이지 시대 문관의 우두머리였던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
메이지 일본을 통틀어 양대 권력자를 든다면, 한 사람은 文官(문관) 대표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이고, 다른 한 사람은 武官(무관) 대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다.
일본의 역사가 가운데는 제2차 대전 전의 일본을 ‘狼的國家(낭적국가)’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조선의 지배권 확립을 위한 청일전쟁(1894~1895)에서부터 본격화하여, 처음에는 10년 단위로 침략전쟁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그 주기가 더 빨라진다. 러일전쟁(1904~1905), 제1차 세계대전 중의 중국 칭다오(靑島·독일조차지) 침공(1914년), 러시아혁명 간섭전쟁인 시베리아 출병(1918~1922),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1945), 태평양전쟁(1941~1945) 등이 그 같은 전쟁이다.
대일본제국은 팽창주의적 침략을 국가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근대 일본은 전쟁하는 나라였다. 늘 전쟁을 했고, 전쟁을 하지 않을 때는 전쟁을 찾고 있거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늑대(狼) 이미지를 빌려 ‘狼的(낭적)국가’라 했을 것이다.
이 낭적국가를 하나의 인격 속에 응축시켜 본다면, 그가 바로 앞에서 든 야마가타 아리토모라 하겠다. 근대화 과정에서 軍制(군제)확립, 징병령 제정, 정신지표인 軍人勅諭(군인칙유) 제정 등 軍國(군국) 일본의 조형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流動(유동)하는 국제정세를 늘 한 발짝 앞질러서 군비수준과 전략노선을 指南(지남)하는 의견서를 지도층 앞에 장기간에 걸쳐 제시, 국론을 통합하고 대일본제국의 국가전략을 주도했다.
야마가타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조슈(長州·야마구치 현) 출신이다. 그는 유신이 성사되기까지 지방과 중앙의 모든 전쟁터에서 20대부터 뛰었고, 살아남았다. 창술 전문의 최말단 從卒(종졸)로 출발해서인지, 상급 사무라이들을 향해서는 늘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신중하고, 필요한 만큼 겁낼 줄 알았고, 집요하고, 음흉했다. 1880년대 초반, 40줄에 접어든 야마가타는 메이지 元勳(원훈)들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 선배들이 죽거나 모두 퇴장하면서 권력을 이토 히로부미와 양분하는 형국을 맞았다. 그는 군인 신분을 유지한 채 권력 포스트와 제국의 최고위직인 총리, 추밀원(천황 자문기관) 의장 등을 수차례 역임했다.
야마가타는 이토와는 달리 자기 주위에 官僚閥(관료벌)과 軍閥(군벌)을 형성했다. 축재벽도 있었다. 와세다대학에서 가까운 도쿄 한복판에 있는 9만9174㎡(3만 평)에 달하는 대정원 椿山莊(춘산장)은 야마가타의 私邸(사저)였다. 지금도 누군가 영업하고 있다.
작고한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야마가타의 딱딱하고 음흉한 이미지와 권력집단 내부에 자기 패거리를 만들어 막후 조종으로 국가를 좌지우지했던 작태를 싫어해 그를 중심에 둔 소설을 쓰지 않았다 한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의 外的(외적)조건인 英日(영·일)동맹에 대해 이토는 소극적이었으나, 야마가타가 이를 밀어붙였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박빙의 승리에서 멈추게 한 당시의 참모총장 야마가타의 결단을 일본인들은 평가한다.
‘대일본제국’의 침략적 팽창전략의 관리자, 그건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이토가 하얼빈서 암살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세 살 밑인 이토의 출세를 늘 뒤따라갔던 야마가타는 측근에게 “그자에게 또 한 번 앞질림을 당했다”고 말했다 한다. 安重根(안중근) 의사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야마가타는 반드시 처형 대상에 올랐을 것이다.
전해에 발포된 이토의 메이지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제1의회의 衆議院(중의원)에서 1890년 12월 6일,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첫 시정방침 연설을 한다. 軍略家(군략가) 야마가타가 국민 앞에 처음으로 제국 운영의 노선과 방략을 드러내는 연설이었다. 방대한 군사비를 포함한 예산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짧은 연설이었지만, 이 속에 이후 제국 흥망의 향배를 결정할 전략발상의 원형이 들어 있었다. 그 대목을 들어 본다.
“생각건대, 국가독립 자위의 방도에 두 길이 있는데, 첫째로 主權線(주권선)을 수호하는 것, 둘째로 利益線(이익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 주권선이란 나라의 疆域(강역)을 말하고, 이익선이란 그 주권선의 안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을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나라로서 주권선 및 이익선을 갖지 않는 나라는 없지만, 현하 列國(열국) 간에 들어서서 一國(일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는, 단지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이익선도 반드시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안다.”
獨立自衛(독립자위)를 위해서는 自國(자국)의 주권선뿐만 아니라 안보상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익선까지 방어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익선은 추상적인 개념이어서 야마가타의 연설만으로는 어딘지 알 수 없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東淸철도 남만주지선의 이권을 차지했다. |
일본 이익선의 핵심은 ‘조선’
야마가타는 이 주권선·이익선 발상을 제국의 지배집단 모두가 공유하는 전략방침으로 만들었다. 이해 3월 총리 야마가타는 ‘외교정략론’이란 것을 각료들에게 돌렸다. 야마가타는 이 속에서 이익선은 바로 조선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 철도는 이미 중앙아시아로 나가 있고, 수년이 안되어 준공을 보게 됐으니, 러시아의 수도를 떠나 십수 일이면 말에게 흑룡강 물을 마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베리아 철도 완성의 날은, 바로 조선이 多事多難(다사다난)한 때가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조선이 多事(다사)해질 때는, 동양에 일대 변동이 生(생)할 機(기)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인데, 조선의 독립을 유지할 무슨 보장이 있는가. 이 어찌 우리 이익선을 향하고 있는 급하고도 극적인 자극과 충격을 느끼지 않고 배길 것인가.”
야마가타가 고비마다 내놓은 의견서를 보면, 주변 정세가 내포하는 위기를 과장하여 군비확장을 재촉하면서 주도하는 입장에 섰음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행해진 야마가타의 발언을 여기 굳이 인용하는 것은, 이 이익선과 주권선 발상을, 근대화 일본을 패망으로 끌고 간 제국의 국가전략으로 보기 때문이다.
야마가타에게 조선의 중립화를 강조했던 로렌츠 폰 슈타인 교수. |
야마가타는 슈타인 교수를 만나 먼저 시베리아 철도가 일본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슈타인 교수는 “황막한 광야에 單線(단선)철도가 있을 뿐인데 3만명만 이동한다고 해도 600량의 차량이 필요하다. 선로의 유지는 차치하고라도, 병력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들 쉬 얼어붙는 항구에서 그 많은 수송선을 어떻게 확보하겠느냐”면서 일본열도에 대한 위협 가능성을 부정했다.
슈타인 교수는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극동으로 진출한 러시아가 조선반도에서 항구를 얻을 것으로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중립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일본 안보를 위해서는 조선의 중립을 깨는 자를, 일본은 힘으로라도 저지해야 한다”고 일렀다.
슈타인 교수가 일본의 안보를 위해 야마가타에게 강조한 것은 조선의 중립화 유지였다. 주권선·이익선 개념은 슈타인 교수의 설명 속에 있었다. 야마가타와 슈타인 교수의 이야기를 발굴한 사람은 도쿄대학의 소장 교수 가토 요코(加藤陽子)다. 그는 100년 이상 대학 문서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을 찾아냈다.
야마가타가 시정연설에서 주권선·이익선론을 개진한 지 만 4년이 되기 전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대장 야마가타는 야전군사령관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벌을 누볐다.
청일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의 중립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일본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쟁, 일본의 주권선을 조선이라는 일본의 이익선 위로 확장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제국은 청일전쟁 10년 만에 러일전쟁을 벌여, 이익선이었던 조선을 주권선으로 확보했다. 이제 일본의 이익선은 만주로 開張(개장)됐다.
확장된 새 주권선은 그에 따라 개장된 새 이익선의 설정을 요구하게 됐다. 새 주권선의 안보를 위해 개장된 새 이익선에서 他(타)세력을 배제하다 보면, 어느새 그 너머로 새 이익선을 필요로 하게 됐다.
근대화의 문을 연 일본이 이 세상에서 제일 뽐내고 싶은 상대가 누구였을까. 아마도 첫째로 조선이고, 다음으로 중국이었을 것이다. 그 ‘역사심리적’ 일본적 표현이 침략이었다.
메이지유신 후 불과 6년 만에 이른바 征韓論(정한론) 소동이 벌어졌다. 유신의 최고 공훈자들이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밀고 당기고 하다가 결국 뒤로 미루고 말았지만, 이는 일본인들이 조선침략을 온 국민의 소망으로 공유하게 되는 세레모니가 아니었나 싶다.
주권선·이익선론은 근대 일본의 국가 정서 같았던 조선침략 기조와 만나면서 침략의 에스컬레이터로 변신했고, 그 위에 일본을 올려놓았다.
조선침략 이후 국가패망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걸은 길을 더듬어 보면, 슈타인의 주권선·이익선론은 야마가타에 의해 침략적 팽창주의의 전략 독트린으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 야마가타의 주권선 이론을 일본제국의 붕괴와 연관짓는 시각은 미국에도 있다.
“제국 정부가 제국 주변부의 전략적 안전보장에 너무 집착해, 최종적으로는 제국 자체의 붕괴를 가져온 것을 기록해 두고 싶다.”(마크 피티)
‘제국 주변의 전략적 안전보장’이라는 것이 바로 야마가타의 ‘이익선’ 안보를 두고 하는 얘기다. 마크 피티는 에스컬레이터 얘기는 하지 않지만, 일본이 야망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뛰어내리지 못해 제국에는 종말이 왔다고 적고 있다.
“제국의 팽창을 떠받친 근본적인 전략적 이유에 의해, 일본은 제대로 된 식민제국이 되고 나서도, 그 야망에 명확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같은 야망은 일련의 치명적 충돌을 불러 왔는데, 처음에는 중국과, 다음에 서양 여러 나라와의 사이에 일으키게 됐다.”
일본인들, 침략전쟁에 열광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에 갖고 있던, 旅順·大連(여순·대련) 조차지와 하얼빈에서 대련까지의 東淸鐵道(동청철도) 남만주지선과 그 부속 이권을 차지했다. 일본은 경비 명목으로 1만명 규모의 1개 사단과 독립수비대로 관동군을 두었다.
1910~1920년대 일본제국의 행태를 보면, 앞에서 든 만주의 권익을 유지·확장하는 것이 국가목표의 중심 같았다.
일본은 1915년 중국에 대해 21개조의 침략적 이권 요구를 했다. 일본이 만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권익을 유지·확장하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일본은 서양 열강이 제1차 세계대전에 여념이 없는 사이에 약체 위안스카이(袁世凱) 정권에 ‘21개조의 요구’를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러시아혁명 진압을 명분으로 이루어진 1910년대 말의 시베리아 출병도 만주 위쪽으로 완충지대를 만들어, 장차 일본 것으로 하고 싶은 만주를 러시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1927년부터 3차에 걸친 산동(山東)출병도, 군벌 등을 없애고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北上(북상)하는 장제스(蔣介石) 군대를 저지해 만주 권익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막아 보자는 것이었다.
1930년대가 가까워지면서, 스탠드 플레이에 능한 정치가들은 국회에서 “만주는 우리나라의 생명선”이라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언론도 스스럼 없이 이를 받았다.
만주사변의 기획자인 이시하라 간지. |
만주사변이 일어난 것은 1931년 9월이었다. 만주사변은 현지 부대 관동군의 독단 전횡의 산물이었다. ‘일본 육군이 생긴 이래 최고의 수재’라는 소리를 듣는 영관급 참모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가 주도자였다. 1만명 남짓한 관동군은 19만명의 장쉐량(張學良)군을 제압하고 석 달 만에 全(전) 만주를 석권했다. 일본 육군 중앙과 정부는 이 결과를 추인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만주사변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신문 발행부수에 날개가 달렸다. 일본의 大(대) 신문의 기틀이 이때 잡혔다고 한다. 식자건 서민이건, 일본인들은 침략전쟁에 열광했다.
이 만주사변 뒤에 조선군이 있었다. 후일 총리가 되는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조선군사령관은 관동군 참모들과 미리 모의하고 조선군 1개 사단을 압록강에 대기시키고 있다가 軍(군) 중앙의 지시도 받지 않고 越境(월경) 명령을 내렸다.
끝없는 이익선의 확장
러일전쟁 발발 직후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이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
여기서 보듯 일본제국의 일부가 된 조선은 만주 침략의 기지였고 병기창이었다. 야마가타 전략 독트린에 따르면, 조선은 제국의 주권선이고, 이젠 만주가 제국의 이익선이 된 것이다. 메이지의 원훈, 公爵(공작) 야마가타 원수가 만든 주권선·이익선 에스컬레이터는 속성상 멈출 수 없었다.
괴뢰국을 세워 만주를 제국의 주권선에 집어넣은 결과 일본은 결정적으로 중국 내셔널리즘에 불을 붙였다. 일본은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만주 침략은 미국에 일본이 침략국가라는 확신을 주었다. 세계 여론은 중국 쪽으로 돌았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뛰쳐나갔다.
만주를 제국의 주권선 안에 넣고 난 후 일본의 이익선은 또다시 전진한다. 만주국 비슷한 괴뢰정권을 만들어 가면서 일본은 華北(화북)으로, 華中(화중)으로, 華南(화남)으로, 다시 양쯔강 깊숙이 쳐들어 갔다. 그러면서 침략의 에스컬레이터는 수렁에 빠져들고 만다.
여기서 헤어나기 위해 일본은 援蔣(원장)루트(미·영이 장제스군을 지원하는 루트)를 차단하려 들었다. 일본은 북부베트남으로, 다시 남부베트남으로 나아갔다. 일본은 거기서 드디어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혔다. 1941년 7월이었다.
미국은 미국 내 일본자산 동결조치를 취하고, 對日(대일)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미·일 간의 교섭을 마감하는 헐(당시 美 국무장관) 노트가 일본 측에 건네진 것은 1941년 11월 26일, 진주만 기습을 12일 앞둔 시점이었다. 미국 측은 이 헐 노트가 전쟁통지서가 될 것임을 미리 짐작했다고 한다. 헐 노트의 요점은 3가지였다.
● 중국(만주 포함)으로부터의 전면철수
● 일본의 괴뢰정부인 중국 왕자오밍(汪兆銘) 정부의 부인
● 독일·이탈리아와 맺은 3국 동맹에서 이탈
이는 일본제국이 國運(국운)을 걸고 손에 넣은 지난 10여 년의 성취를 되돌리라는 것이고, ‘이익선’ 개장의 결과물을 도로 토해 내라는 얘기였다.
제국 육군의 정치 독점
태평양전쟁을 먼저 택한 것은 ‘대일본제국’이었다. 1941년 12월 1일 어전회의에서 육군대신과 내무대신을 겸하고 있던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정세 보고 속에서 미국이 제시한 헐 노트에만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제국 패망으로 끝장난 전쟁의 開戰(개전)이 결정됐다.
돌이켜보면 이익선 개장의 시발점에 조선이 있었다. 제국이 이익선인 조선을 삼킴으로써, 지정학의 설명개념에 불과했던 주권선·이익선 이론은 제국을 패망으로 몰고가는 침략주의 전략독트린으로 작동한 것이다. ‘대일본제국’은 조선을 삼켰기 때문에 패망의 길로 나아간 셈이다.
경영채산을 들어 식민지를 털고 소일본주의를 취하자고 주장하는 인사가 있었다. 한 역사가가 좌담에서 말을 받았는데, 일본인들에게 상식화된 평균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반도를 일본의 판도에 넣기 위해 일·청, 일·러(전쟁) 싸우고 피를 흘렸는데, 그걸 경비문제쯤으로….”
야마가타 독트린은 이와 같이 시동이 걸렸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다음해 1월부터 극동국제군사재판(일명 도쿄재판)이 열렸다. A급 戰犯(전범) 28명 중, 제국 육군은 15명이었다. 사형판결이 난 7명 중 문관 총리 출신 한 사람을 빼고는 도조 히데키 등 모두 육군이었다. 종신금고형을 받은 9명 중에는 조선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郞)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도 모두 육군 출신이었다. 말하자면 도쿄재판은 제국 육군을 심판하기 위한 재판이었던 것이다.
왜 제국 육군이 국제심판의 대상이 되었나. 그들이 전쟁 위에 있는 정치를 했고, 폭력과 공포를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든 헐 노트가 문제 삼는 중국 침공만 해도, 일본은 1937년 베이징 부근 양군 접경지역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소충돌을 기다렸다는 듯이 擴戰(확전)의 계기로 삼았다.
전쟁을 마구잡이로 확대해 간 것은 육군의 강경파 중견 막료들이었다. 외교당국 등 정부는 물론 군 상층부의 불확대 방침도 아랑곳하지 않은 것이 당시의 제국 육군이었다.
헐 노트에서 문제 삼은 3국동맹을 밀어붙인 것도 제국 육군이었다. 해군은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다. 외교는 이미 나설 틈이 없었다.
이것이 1940년 9월인데, 독일이 電擊戰(전격전)으로 프랑스를 휩쓸고 난 다음이었다. 일본 언론과 국민 사이에는 히틀러 선풍이 불고 있었다.
“開戰 반대하면 천황이라도 암살했을 것”
태평양에서 전쟁을 해야 하는 해군은 독일 육군이 강하다고 해서 독일과 동맹할 생각은 없었다. 독일과의 동맹은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군은 결국 육군에 동조하고 말았다. 당시의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正·후일 총리 역임)는 뒷날 “왜 그때 3국동맹에 반대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만일 반대했으면 육군의 테러에 죽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개전으로 가는 막바지에서 천황과 가장 가까운 귀족 출신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는 프랭크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직접 담판으로 전쟁회피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이때 제국 육군은 고노에 암살부대를 가동시킨 것으로 후일 알려졌다.
전쟁이 끝난 후 한 외국 기자가 쇼와 천황에게 “終戰(종전)의 결단을 할 수 있었는데, 왜 개전 저지는 못했는가”라고 물었다. 천황은 “만약 그랬다면 나는 살해됐거나 유폐됐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천황은 군벌이 두려워 할 말도 못했는데, 그의 병졸들은 전장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 갔다. 입만 열면 ‘천황의 군대(皇軍)’라는 조직이 이보다 더 모순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군대는 천황이 내린 군인정신의 지표인 ‘군인칙유’ 260자를 모두 외우게 했다. ‘칙유’는 제국 군인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전쟁은 군인이 하는 것이지만, 전쟁을 하느냐 안 하느냐 결정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보통 군대는 그렇다. 중일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제국 육군은 정당인을 거의 침묵시켜 놓았고, 파쇼적 공기 속에서 정부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천황의 측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국 육군은 공포전술로 정치를 독점했다.
국가를 패망으로 끌고간 군부 정치화의 시발점에 다이쇼 정변이 있었다. 다이쇼 정변은 식민지 조선에 육군 2개 사단을 증설하려다 터져 나온 정변이다. 1912년부터 1914년 사이에 4개 정권이 이 사건에 관련됐다.
陸相(육상·육군대신), 海相(해상·해군대신) 등 군부대신은 현역으로만 임명토록 되어 있었고, 이들에게는 천황에게 내각을 통하지 않고 직접 上奏(상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 제도는 전쟁 등 비상시를 상정한 것이었다. 평시에 각료 중의 하나인 군부대신이 총리를 제쳐 놓고, 천황에게 바로 상주할 일은 찾기 어려웠다.
다이쇼 정변의 원인
긴축정책을 추진하다가 군부와 충돌한 사이온지 긴모치. |
현역 무관제이기 때문에 후임 육상을 임명하려면 군부의 추천이 필수적이었다. 사이온지 총리는 육군대신이나 참모총장은 아니지만 육군을 쥐고 있는 야마가타에게 후임자 추천을 의뢰했다. 야마가타의 답은 “육군과 타협해 보라”는 것이었다. 귀족 출신인 사이온지는 야마가타의 막후 권력에 굴복하기 싫었다. 그는 총리직을 던져 버렸다.
군부로서는 자신들이 차지하는 대신 자리를 가지고 내각을 통제하는 수단 하나를 실습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야마가타의 뜻을 받들어 조선증사를 추진하다가 다이쇼정변을 촉발한 가쓰라 다로. |
하지만 민심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재정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조선사단 증설을 요구해 사이온지 내각을 몰아낸 장본인으로, 야마가타가 그 보스인 조슈벌(長州閥)과 육군을 지목했다.
“족벌타파, 헌정옹호”를 내걸고 군중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의사당 문전을 메운 난동군중이 신문사에 불을 지르고, 도쿄에서만 파출소 86군데를 때려 부수고 電車(전차) 26대를 불태웠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지 3년 남짓한 2월 10일 하루에 도쿄에서 벌어진 일이다. 소동은 지방으로 번져 갔다.
조선增師(증사) 요구는 조선을 삼킨 일제에 가열하게 항거하는 조선민중에 대한 일제의 대응책이었다. 그 결과 일본을 뒤흔든 정변이 일어난 것을 보면 역사에 섭리가 있다는 감을 금할 수 없다.
소요 다음날인 2월 11일 가쓰라 내각은 총사퇴했다. 취임 53일 만이었다. 가쓰라는 이해를 못 넘기고 10월에 病死(병사)했다.
조선군 사단 증설문제가 발단이 된 다이쇼 정변은 군부정치화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가쓰라는 갔지만, 군부의 발언권은 강화시켜 놓았다.
조선 총독과 군부의 정치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
조선총독은 모두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육·해군 대장이었다. 총독은 입법권을 가졌다. 이를 ‘制令(제령)’이라 했는데, 작성과 실행에는 천황의 裁可(재가)만을 필요로 했다.
총독은 조선군 통수권도 가졌다. 총독은 본국 총리로부터는 어떠한 감독도 받을 의무가 없었다. 대일본제국 안에 조선총독만한 권력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8명의 역대 조선총독 중에서 4명, 즉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총리 자리에 있었거나, 조선총독을 마친 후 총리가 됐다.
육군대신 출신이 세 사람, 즉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미나미 지로, 해군대신 출신이 한 사람(사이토 마코토), 조선군사령관 출신이 두 사람-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권력의 정상에 이르는 사다리를 오르고 있는 자들이었다. 조선총독이란 자리는 제국 군부 수뇌진의 정치훈련장이었다.
현역 군인인 조선총독에게 정치맛을 알게 한 사람은 조선통감으로 3년 반 동안 재직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儒林(유림)들을 앞에 놓고 스스로를 중국 戰國(전국)시대의 名(명)재상인 鄭(정)나라 子産(자산)에 비유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했다.
메이지 초기, 이토는 신생정부의 서양견문 교습사절단의 일원으로 독일에 다녀왔다. 이때가 독일통일 직후인 1871년이었다. 비스마르크를 만나고 돌아온 이토는 시가를 입에 무는 등 비스마르크를 흉내 냈다.
조선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이토가 모델로 삼은 사람은 영국의 크로머 백작이었다고 한다. 1882년 이집트가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될 당시 총영사였던 그는 20년 동안 이집트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副王(부왕)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영국문명을 성공적으로 이집트에 전수했다는 평을 받았다.
문관인 이토는 조선에 부임하는 조건으로 조선주둔 일본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했다. 군부는 반발했지만, 야마가타가 이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토는 조선주둔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했던 것은 ‘조선주둔군이 방자하고 난폭하다’는 얘기를 듣고 선심행정 차원에서 이를 바로잡아 보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조선의병 토벌작전
조선인은 이토의 통치에 분노와 저항으로 답했다. 1907년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의병투쟁은 보다 조직화·전국화됐다. 이토는 본국의 육군대신에게 군대 증파를 요청하는 한편, 조선군사령관에게 헌병과 경찰을 집중시켜 주고 철저한 토벌을 요구했다.
일본군은 三南(삼남)지방에서 악명높은 攪伴(교반) 작전이란 것을 자행했다. 일정지역을 의병의 중점활동 지역으로 지목한 후 완전포위하고, 화력과 총검으로 줄을 세워 전후좌우로 무논에 써리질하듯 휘젓는 것이 교반이었다. 무고한 조선의 양민들이 개 돼지만도 못하게 처참하게 도륙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토는 조선에서 ‘善政(선정)’을 베풀어 보겠다던 초심이 환멸로 변했다. 통감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야마가타가 추밀원 의장 자리를 비워 주었다.
한일합방 후 총독이 독립적으로 군통수권을 행사하는 체제는 통감 시절 이토가 남긴 유산이다. 군사점령의 연장처럼 식민통치는 시작되었고, 그것은 철저한 武斷(무단)통치였다. 이토의 실험통치는 대규모 군대주둔 없이는 조선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군국의 후배들에게 보여줬다.
1910년 한국을 병탄할 무렵, 일본정부는 재정위기에 처해 있었다. 1910년도 일반회계에서 費目別(비목별) 경비 비율을 보면, 군사비가 32.5%, 공채비가 30.2%, 식민지 경영비가 2.3%, 행정비가 27.1%, 사회정책비가 4.9%, 산업조장비가 3%로 되어 있다.
군사비와 공채비가 62.7%로 압도적이다. 이는 러일전쟁 戰費(전비)의 많은 부분을 영국·미국에서 발행한 공채로 메웠기 때문이었다. 일본정부는 이 공채에 대한 원리금 갚기에 매달려야 했다.
군사비가 높은 것은 러시아의 복수전을 예상해 전비수준을 평시로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이온지 정부는 행정재정 정리를 정책의 전면에 내걸고 이를 담당할 기구를 만들어 경비절감을 독려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11년 중국에서는 辛亥(신해)혁명이 일어나 淸朝(청조)가 무너졌다. 이어 중화민국이 수립됐지만, 여기저기서 군벌이 할거하는 혼란이 닥쳐 왔다.
육군은 이를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할 호기로 여겼다. 주권선·이익선 전략에 따르면 제국의 주권선이 조선으로 확장됐기 때문에 이익선도 만주로 확장돼야 했다. 야마가타는 남만주에 1개 사단을 증파할 것을 제안했다. 사이온지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육군은 사이온지 정부에 대해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론의 지지를 업고 있는 정부도 군부의 군비확장 정책에 맞서 긴축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의 항일투쟁은 조선증사 논쟁과 다이쇼정변의 원인이 됐다. |
‘통수권 독립’의 남용
러일전쟁 승리 후 군부는 군사행정이나 전략 차원을 넘어 정략에 입을 대는 정치세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군부의 이런 행보는 야마가타의 득세와 동시에 진행됐다.
정치적 독자성이 강화되면서 군부독주는 ‘통수권의 독립’을 메이지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3權(권) 위로 밀어올리는 꼴이 되었다. 그것이 쇼와 군국주의였다.
작가 시바 료타로는 일본제국이 패망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을 ‘요술방망이’라고 일컬어졌던 군부의 ‘통수권 독립’의 무제한 통용에서 찾고 있다. 통수권의 요술방망이를 휘두른 자들은 육군성이나 참모본부의 상급 장성들이 아니라, 초급 장성이나 영관급 막료들이었다. 그들의 시야는 좁았고, 정보는 부족했으며, 판단에는 냉철함이 없었다. 게다가 상하, 육·해군, 파벌로 분열되어 있어 통일된 전략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
일본 군사엘리트들의 성적표를 하나만 보겠다. 어떤 좌담회에서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태평양전쟁에서는 250만명의 일본군이 사망했는데, 그중 7할쯤이 廣義(광의)의 餓死(아사)다. 이런 전쟁은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전쟁에 나가 굶어 죽은 전사자가 170만명을 넘는다니, 대일본제국은 동서고금에 없는 전쟁을 치른 것이다. 그 원인은 엘리트들의 비합리적 전쟁계획에 全軍(전군)이 올라탄 데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美(미) 전략폭격조사단은 일본의 패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근본적 패인은 일본의 전쟁계획의 실패다. 일본은 단기전에 승부를 걸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 빈약한 경제를 가지고 10배 이상으로 우세한 경제력을 가진 강대한 국가 미국과 장기에 걸친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된 데 있다.”
이 보고서 역시 일본의 군사엘리트들을 문제 삼고 있는 셈이다. ‘실패한 전쟁계획’을 세운 것이 그들이니까.
이 무렵 일본의 각종 통사를 보면 조선병탄은 극히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인 청일전쟁·러일전쟁과는 서술비중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기만과 협박과 학살, 약탈, 야수적 만행과 反(반)문명적 폭거 위에 쌓아 올린 피라미드가 일제의 조선병탄이었다. 아마 일본 역사가들도 자세히 들여다보기에 역겨웠을 것이다.
조선병탄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가목표의 완수
조선증사를 추진한 다나카 기이치 육군성 군무국장. |
메이지 천황이 조선병탄을 제국 최고의 성사이자, 일생일대의 업적으로 인식했음을 알려주는 얘기가 도널드 킨의 <메이지 천황>에 나온다.
조선병탄 후 이를 알리는 奉告祭(봉고제)가 황실의 몇 신전에서 행해졌다. 천황은 일본 최고의 신궁인 이세진구(伊勢神宮)와 先代(선대)인 고메이(孝明) 천황릉에 의전관을 보내 조선병탄 사실을 고했다. 이를 두고 도널드 킨은 이렇게 말했다.
“낭보라고 알린 성역의 수로 보아 메이지 천황은 조선병탄을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의 승리보다 중요시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병탄은 청일·러일전쟁 목적의 완결이었고, 메이지유신 이래 국가목표의 완수였던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다이쇼 정변은 제국육군이 식민지 조선에 2개 상설사단을 증설할 것을 요구한 데서 비롯됐다. 육군은 천황제 권력의 대리자 같은 元老(원로) 야마가타를 등에 업었지만, 재정의 고삐를 쥐고 있는 정부, 이미 정치적으로 성장한 정당 세력, 그리고 대중사회에 눈뜬 여론을 상대로 정면돌파를 하려 했다. 제국육군이 무리한 정치모험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증사 정책을 추진한 주동자는 육군성 군무국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927년 총리)였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야마가타의 의중을 살핀 군무국장 다나카가 1912년 6월 조선으로 가서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회담한 자리에서 조선 2개 사단 증설안이 결정됐다고 한다.
당시 일본 육군 군벌의 인맥은 야마가타를 최정점으로 가쓰라(전 총리)-데라우치 조선총독-다나카 기이치 육군성 군무국장-우가키 가즈시게 육군성 군사과장(후일 육군대신, 조선총독 역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 조슈벌이다.
데라우치 조선총독은 당시 현역으로 있는 조슈벌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당시 육군대신을 겸임하고 있었다. 대일본제국이 육군대신으로 하여금 조선통감을 겸임토록 한 것은 조선병탄을 일종의 군사점령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병탄 후 데라우치는 총독으로 조선에 앉아 있으면서 제국육군의 주요 정책에 간여하고 있었다. 그의 손발이 된 사람이 다나카 군무국장이었다.
조슈벌이 조선增師를 추진한 이유
조선증사의 실무담당자였던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성 군사과장. |
첫째, 전통적으로 러시아를 假想(가상)적국으로 보는 시각에서, 이 무렵 완성된 시베리아 철도의 複線化(복선화)와 신해혁명으로 인한 러시아의 중국진출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다.
둘째, 신해혁명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는 중국대륙을 향한 제국의 안녕발전을 위해 주동성 확보를 위한 대비책 마련이다. 이는 앞에서 보았던 야마가타의 주권선·이익선 전략에 따르는 새 이익선 개장 대책 바로 그것이다.
우가키는 ‘의견서’에서 “금일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常置(상치)하는 것은 對(대)중국정책의 主脚地(주각지)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은 이제 제국육군의 중국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라야 한다는 얘기였다.
1912년 7월, 환갑연을 몇 달 남겨 놓고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나고 다이쇼 천황이 즉위했다. 이 무렵 조선의 군사상황을 우가키 군사과장은 이렇게 정리했다.
“지금 조선에 교대 주둔하고 있는 1개 사단 반의 병력은 제국군대의 건재와 맞지 않아 교육에 지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통치의 관계상 110여 개소에 분산 주둔하고 있어, 유사시를 당해 그 동원을 완결하는 데만 70여 일이 걸린다.”
‘조선통치의 관계상 110여 개소에 분산 주둔’이라니, 이게 무슨 얘긴가. 통감·총독 통치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주둔 일본군을 각지에 분산 배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제는 1907년 8월 조선군대가 해산된 후부터 조선증사 논란이 벌어진 1912년까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조선의병의 수를 1만7676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가 펴낸 <조선폭도 토벌지>에 의하면 당시 대대급 이상의 사령부 소재지는, 鏡城(경성)·회령·북청(이상 함북), 함흥·원산(함남), 평양(평남), 안주(평북), 황주·해주(황해), 京城(경성·서울)·개성·적성·수원·이천(경기), 금화·춘천(강원), 충주(충북), 대전(충남), 상주·안동·대구·경주(경북), 진주(경남), 전주·군산·고창(전북), 광주·영암·법성포(전남) 등이었다(당시 행정구역에 의함).
전국의 읍·면·동·리에는 중대 이하 소대·분대 단위의 부대들이 그물망처럼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유사시 이를 동원하는 데만 70여 일이 걸려야 했고, 주무여야 할 이익선 관리와 진공에는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 상치하는 2개 사단을 증설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결국 일제에 끈질기게 항거한 조선의병 때문에 조선증사 문제가 나왔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이쇼 정변이 일어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부는 ‘통수권 독립’이라는 ‘마법의 지팡이’의 효능에 맛들인 것이다. 후일 일본제국을 패망으로 몰고간 ‘통수권 독립’이라는 ‘마법의 지팡이’를 일본 군부가 손에 쥐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바로 조선의병이었다.
제국군대를 강박적으로 침략에 나서게 한 야마가타의 주권선·이익선 독트린이나, 일제의 망조를 불러온 ‘마법의 지팡이’를 군부가 휘두르게 한 조선의병은, 두 가지 모두가 대일본제국이 조선을 삼키는 바람에 발동이 걸리고, 불이 붙었다. 대일본제국은 조선을 삼켜서 패망한 것이다.
후스의 대전략
일제가 조선을 삼켜 패망에 이르는 과정을, 누군가 예지력이 있어서 전략발상으로 가다듬어 보았다면, 어떤 모양일까.
일제의 15년 침략전쟁을 견뎌낸 중국인들의 전략사상에 참고할 것이 있다. 베이징대 교수 출신으로 장제스 총통에 의해 주미대사로 발탁된 후스(胡適)는 1935년 ‘日本切腹 中國介錯(일본절복 중국개착)’ 전략이란 것을 내놓았다. 이때는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지만, 이미 만주사변·상해사변·熱河(열하)작전 등을 거치면서 일본의 중국침략 기조는 확연해지고 있었다.
‘절복’은 칼로 배를 가르고 죽는 일본 무사들의 자살방식을, ‘개착’은 무사가 법도대로 배를 가를 때 뒤에서 다른 무사가 일본도로 목을 쳐 주는 것을 말한다.
후스는 일본의 세를 꺾기 위해서는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가진 미국과 육군대국 소련이 나서 주는 길밖에 없다고 보았다. 미국과 소련은 그때로서는 아직 준비가 모자라 일본의 침략성을 알면서도 간섭에 나서기를 꺼리고 있었다. 후스는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정면으로 받아서 2~3년간 계속 져야 미국과 소련을 끌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다 큰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2~3년간의 패배를 감수한다는 것은 민족의 운명에 대한 부동의 신뢰와 역사에 대한 투철한 통찰력이 있어야 가능한 발상이다. 후스의 말을 들어 보자.
“이상과 같은 상황에 이르러서 드디어 태평양에서의 세계전쟁의 실현을 촉진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3~4년 동안은 다른 나라의 참전 없이 단독의 苦戰(고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무사는 자살할 때 절복을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介錯人(개착인)이 필요하다. 금일, 일본은 전 민족 절복의 길을 걷고 있다. 위에 든 전략은 ‘일본 절복, 중국 개착’이란 8글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됐다. 중국은 패전과 퇴각을 거듭했지만 항복하지는 않았다. 일제는 수렁에 빠졌다는 감을 떨칠 수 없었다. 원장 루트를 통해 중국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지원이 있었다. 일본이 터뜨린 태평양전쟁을 미국이 받았다. 후스가 염두에 두고 있던 ‘일본의 자살판’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중국은 절복을 해서 괴로워하는 침략자 일본의 목을 개착했다.
‘親日’ 편가르기는 누굴 위한 것인가?
일제가 침략했을 때, 우리나라에는 이에 대응하는 전략을 기획하거나 관리할 사람이 없었다. 그간의 경과를 보건대 하늘은 아마도 우리 민족에게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라”면서 “고래는 죽는다. 정신 잃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을 것이다. 하늘은 우리한테 ‘고래사냥 전략’을 주지 않았을까.
우리 민족 모두는 고래 뱃속을 통과했다. 요즘 들어 ‘親日(친일)이다, 아니다’ 논쟁을 하는데, 고래 뱃속에서 위벽에 가까워 단물 맛이라도 봤으면 ‘친일’이고, 그러지 않았다면 친일이 아닌가. 고래 뱃속에서 민족 구성원 가운데 누군들 主動性(주동성)이 있었는가.
세월이 흘러 주동을 회복한 사람들이 주동성을 빼앗겼던 사람들을 저울에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조선사람들이 ‘친일이다, 아니다’로 편가름하기를 누가 제일 바랐던가. 선심정책으로 ‘친일’의 혼을 사들인 이토 히로부미와 알량한 낚싯밥으로 조선사람을 낚아서 헌병 보조원으로 만들어 의병 토벌에 앞세웠던 조선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그리고 소생한 ‘제국의식’을 가지고 오늘도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참배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친일이다, 아니다’라고 논란을 하고 있는 한 우리의 의식은 ‘일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의 克日(극일)을 훼방놓을 생각이 없다면 ‘친일’ 편가르기는 그만두어야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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