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시대에는 명함도 못 내밀던 인물
⊙ 조용원, 눈치 없는 김정은 측근에게 김정은 대신 지적
⊙ 김정은과 각별한 원로에게 김정은 특명 전달하기도
⊙ 머리 좋은 흙수저 이과생… 북한 최고 아첨꾼이란 비아냥도
⊙ 김정은의 人事?… “샛별 장군 때 하던 장군놀이 보는 듯”
⊙ 김정은 마음 바뀌면 언제든 ‘낙동강 오리 알’ 신세 될 수도
⊙ 조용원, 눈치 없는 김정은 측근에게 김정은 대신 지적
⊙ 김정은과 각별한 원로에게 김정은 특명 전달하기도
⊙ 머리 좋은 흙수저 이과생… 북한 최고 아첨꾼이란 비아냥도
⊙ 김정은의 人事?… “샛별 장군 때 하던 장군놀이 보는 듯”
⊙ 김정은 마음 바뀌면 언제든 ‘낙동강 오리 알’ 신세 될 수도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이 절대권력을 세습했다. 당시 27세에 불과했던 김정은은 젊은 엘리트 그룹을 중용했다. 조직지도부 부부장단인, 북한으로 치면 젊은 축인 50대 조용원도 그중 한 명이었다.
조용원이 몸담은 조직지도부는 외형상 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비서국을 구성하는 20개 안팎의 부서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규모와 기능, 역할과 권한은 실로 막강하며 여타 부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북한은 당 중심 국가다. 국가 권력이 당에 집중돼 있다는 뜻이다. ‘조선노동당’(이하 노동당)은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정당이다. 노동당의 총비서는 당연히 김정은이다.
노동당의 의사결정은 ‘당 대회’에서 한다. 당 대회는 노동당의 공식적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당 대회가 열리지 않으면 ‘당 중앙위원회’가 최고 지도기관 역할을 한다. 모든 당 사업을 주관한다는 얘기다.
김정일 때는 명함도 못 내밀어
중앙위원회 밑에 18개 전문부서가 있는데, 이 중 힘이 가장 센 곳이 조용원이 몸담은 조직지도부다. 조직지도부는 노동당의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다. 당 인사권, 정책권, 검열권을 가진 것이다. ‘당 속의 당’으로 불리는 이유다. 조직지도부는 조직비서 겸 조직부장을 정점으로 4명의 제1부부장과 10여 명의 부부장을 비롯해 300명 정도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김정은은 집권 직후인 2012년 4월 조용원에게 김일성훈장을 수여했다. 북한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는 것은 조용원에 대한 김정은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북한 핵심 원로에게 조용원은 그냥 그런 인물이었다. “김정일 장군님 때는 명함도 못 내밀던 인물”이란 평이 많았다. 실제도 그랬다. “김정일 시대에는 조직지도부에서 일하는 말단이었다”는 주요 탈북자의 증언이 다수였다.
그러나 김정은 시대에 와서는 달랐다. 다만 김정은은 당장 조용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조용원이 김정은을 처음 공개 수행한 시점이 2014년이다. 이 시기는 김정은이 자신의 권력의 걸림돌을 모두 제거한 시기와 겹친다. 김정은은 2012년 7월 아버지 김정일이 자신을 위해 군(軍)에서 직접 발탁한 리영호 전 총참모장을 전격 숙청했다. 2013년 12월에는 김정은 정권의 최대 후견인으로 불리던 고모부 장성택을 죽였다.
2015년 조용원을 향한 김정은의 신뢰는 어마어마했다. 일례로 김정은이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한 북한 원로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원로가 나가 보니 조용원이었다. “어쩐 일이냐”고 묻자, 조용원이 답했다.
“장군님 특명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조용원은 이 원로에게 김정은의 ‘특명’을 전달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김정은의 측근이 그의 앞에서 실수했는데, 정작 본인은 잘 모르고 있었다. 이 측근을 찾아가서 김정은 대신 꾸짖은 게 조용원이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이후 북한 권력층 내부에서는 “조용원이 많이 컸구나”란 이야기가 돌았다고 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김정은과 대화
실제 조용원은 2015년부터 김정은을 수행하는 횟수가 늘었다. 2016년에는 황병서(40회)를 제치고 수행 횟수 1위(47회)를 기록했다. 같은 해 5월 7차 당 대회 때는 집행부(권력 서열) 명단에선 이름이 빠졌지만, 김정은이 앉은 주석단 두 번째 줄에 앉아 영향력을 과시했다. 조용원은 2017년 34회, 2018년 51회, 2019년 34회, 2020년 12회 등 총 131회 수행했다. 김정은이 지난해 8월 태풍 피해 지역을 시찰할 당시 조용원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김정은과 대화하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정보 당국자는 “조용원은 조직지도부 또는 서기실에서 김정은의 지시와 보고를 출납하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조용원은 1957년생으로 알려졌다. 고향은 자강도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흙수저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조용원의 부모는 항일 빨치산 출신이 아니다”라고 했다. 출신 성분은 평범했지만, 조용원은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김일성대학을 다녔는데, 전공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물리학부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핵심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조용원은 북한 핵물리학계의 대부로 꼽히는 김일성대 도상록 교수와 서상국 교수의 제자”라며 “김일성대 물리학부 졸업 후 당 조직지도부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했다.
“조용원이 대학을 졸업할 시기(1980년)에 머리 좋고 치밀한 사고와 논리를 갖춘 이공계 출신을 조직지도부에 배치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있었다. 출신 성분이 평범한 흙수저 조용원이 조직지도부에서 일할 수 있었던 이유다.”
대학 졸업 후 조용원은 보조지도원, 지도원, 부과장, 과장, 부부장 등 조직지도부 말단부터 상급 간부까지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성장했다.
“조용원은 두뇌회전이 빠른데다 기획력이 좋아 부부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특히 당 조직 관리와 검열 등에서는 뛰어난 성과를 냈다.”
조용원이 머리가 좋고, 일만 잘해서 승승장구하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시대 최고 아첨꾼이란 평가도 나오기 때문이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스타일이다. 아랫사람들에게는 원칙적이면서 무섭지만, 윗사람에겐 ‘예스맨’이다. 특히 김정은이 말할 때 항상 웃으며 맞는다고 이야기하는 게 조용원이다. 그는 김정은을 잘 파악했다. 김정은은 부하가 나대는 것을 특히 싫어한다.”
어떻게 태자당을 제쳤나
북한은 신분제 사회다. 맨 위에 백두 혈통이 있고 이어 항일 빨치산 그룹, 일반 간부 순이다. 봉건적(封建的) 신분제보다 훨씬 더 강고한 출신 성분 검열, 이른바 ‘토대’가 미래를 결정한다. 월남자(越南者)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이나 친척이 외국에 있는 사람은 출세를 꿈꿀 수 없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대학 진학이나 입당(入黨)이 불가능하다. 농장원의 자녀는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대로 농장원을 해야 한다. 광부의 아들과 딸은 어지간해서는 광산을 벗어날 수 없다. 농노(農奴)나 광산노예(鑛山奴隷)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최근 마무리된 노동당 8차 대회를 보면 ‘인재풀’로 불리는 당 중앙위원회 구성원(250명)의 약 70%가 물갈이됐지만, ‘북한판 금수저’들은 대부분 건재했다. 항일 빨치산 2세대 등 김일성·김정일 시절 공신의 자제들이 여전히 북한 당(黨)·정(政)·군(軍)의 요직을 틀어쥔 것이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대를 이어 충성하는 ‘북한판 태자당(太子黨)’이야말로 김정은이 가장 신뢰하는 엘리트 집단”이라고 했다. 태자당은 중국에서 공산혁명 원로의 자제들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흙수저 조용원이 어떻게 김정은의 심복이 됐느냐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김정은이 태자당이 아닌 조용원을 어떤 이유로 이만큼이나 신뢰하느냐다.
혁명 1세대에게 부채 의식 전혀 없는 김정은
다수의 고위 탈북자를 취재한 결과,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가장 큰 이유는 김정은은 소위 항일 빨치산으로 불리는 혁명 1세대에게 부채 의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김정일은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치열한 후계 다툼을 벌였다. 김평일은 1954년 김일성과 두 번째 부인인 김성애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성애는 자신의 아들 김평일을 김일성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에 다수의 북한 엘리트들은 김일성의 총애를 듬뿍 받는 김평일에게 희망을 걸었다. 외모가 젊은 시절의 김일성을 빼다 박고 성품도 대중적인 김평일에게 열광했다. 그러나 후계자는 김정일이었다.
후계자 다툼 과정에서 김정일은 혁명 1세대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특히 김일성의 동지인 최현에게 “작은아버지가 저를 좀 도와달라”며 읍소했다. 최현은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아버지다. 최현은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한 대표적 혁명 1세대로, 김일성은 자신보다 다섯 살 많은 최현을 친구처럼 아꼈다. 최현은 김일성과 공식석상에서만 경어를 사용하고 사석에서는 편하게 ‘김일성’이라고 호칭하면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눈 유일한 인물이었다. 최현은 김정일이 수령 후계자가 되도록 한 일등 공신이었다. 김일성을 찾아가 김정일을 왜 후계자로 결정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당시 최현은 권총을 차고 다니며 김평일 지지자를 협박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일성은 훗날 최현이 김일·림춘추와 함께 ‘김정일 동무를 우리 당과 국가의 수위에 추대하는 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정일은 은혜를 톡톡히 갚았다.
김정일은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그에게 영사기를 선물해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최현도 최선을 다했다. 김정일이 21세 대학생 때인 1963년 8월, 백두산을 찾았다. 당시 아들뻘인 김정일을 수행하던 56세 최현이 김정일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황급히 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피했다. 최현은 “장군님(김정일)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제 나름의 철칙”이라고 했다. 최현의 아들 최룡해가 승승장구한 이유였다.
김정일은 최현 외에도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 데 도움을 준 인물과 그의 자제들을 중용했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후계 다툼을 하지 않았다. 경쟁자들이 조기에 낙마, 무난하게 권력을 승계했다.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정일의 후계자로 거론됐다. 하지만 김정일은 김정철에 대해 ‘여자아이 같다’ ‘성격이 유약하다’ 등의 평가를 내렸다. 김정철은 남자다운 몸매를 만들기 위해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했는데, 여성호르몬 과다 분비 증세로 가슴이 나오는 등 부작용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복형 김정남은 한때 김정일 후계자로 유력시됐지만 2001년 위조 여권을 갖고 일본에 입국하려다 적발된 사건 이후 권력에서 밀려났다.
‘장군놀이’ 중인 김정은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이 자신을 위해 군(軍)에서 직접 발탁한 리영호 전 총참모장을 2012년 7월 전격 숙청한 데 이어 고모부 장성택 당 행정부장을 2013년 12월 처형한 것도 소위 부채가 없기에 가능했다.
고위 탈북자의 이야기다.
“김정은은 2016년 김원홍 전 보위상과 태자당 일원이던 그의 아들 김철을 함께 죽였다. 김정일 때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는데, 김정은 정권에서는 비일비재하다. 김정은은 금수저·흙수저 구분이 없다. 자기한테 아부 잘 떨고 무조건 ‘네’ 하면 중용한다. 현송월이 가까이 두는 거 봐라. 걔가 무슨 뿌리가 있는 인물인가.”
또 다른 탈북자의 증언이다.
“김정은은 태어나자마자 ‘샛별 장군님’으로 불리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습니다. 어릴 때 장군놀이를 주로 했는데, 지금 (인사 등 북한을 통치) 하는 걸 보면 어릴 때 장군놀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조용원의 처세술이다. 조용원의 가장 큰 장점은 이른바 ‘오버하지 않는’ 언행이다. 다른 간부들이 밀착해 뭔가 보고하고 말을 섞으려 애쓸 때 조용원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지켜본다. 《로동신문》에 등장하는 김정은의 현지지도 사진을 보면 조용원은 김정은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고위 탈북자는 “조용원의 침착한 성격과 몸에 밴 겸손함도 출세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김영철 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이 본인은 장군님과 술자리를 함께하는 사이라고 큰 소리로 자랑하고 다녔다. 알고 보니, 말석에 앉아서 시중을 드는 역할이었는데 자신이 김정은의 최측근인 양 말했다. 이게 들통나서 김정은에게 크게 혼났다. 김영철이 해임과 복권을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정은은 나서는 사람을 싫어한다. 조용원은 김영철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이번 8차 노동당 대회에서 김정은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긴밀하게 보고하는 모습이 포착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조용원이 10년 가까운 김정은 집권 기간에 단 한 번의 부침 없이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에서 자리를 유지한 비결은 김정은에게만 충성하는 간부란 이미지 덕분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런 조용원의 모습 때문에 북한 최고 아첨꾼이란 비판도 나온다.
세 번째는 평양 아파트 붕괴사고 당시 대응이다.
2014년 5월 평양에서 23층 신축 아파트가 붕괴했다. 수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김일성·김정일 시대라면 참사 소식이 평양 외부로 퍼지는 것부터 막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정은의 선전 기관들은 “유가족에게 위로의 뜻을 표하고 수도 시민들에게 사과한다”고 했다. 절대 권위를 갖는 노동당 간부들이 직접 사과했다는 내용도 전했다. 당시 아파트 공사를 담당했던 북한 인민군 간부와 기술자 등 최소 5명이 해임되거나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도쿄신문》(2014년 5월25일자)은 “무너진 평양 평천 지역의 고층 아파트 공사를 담당한 인민군 간부와 기술자 등 최소 5명이 부실공사에 대한 문책으로 해임되거나 총살되는 등 숙청됐다. 사망자 수가 500명에 이른다는 정보가 평양에 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례적으로 유족에게 사과하고, 아파트 건설 공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이들을 신속 처벌한 것은 조용원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 아파트 붕괴 검열책임자가 조용원이었습니다. 그는 아파트를 시공했던 인민보안부를 대상으로 철저한 검열에 나섰고, 그 실상을 낱낱이 김정은에게 보고했습니다. 김정은이 조용원을 더 신뢰하게 된 계기가 됐지요.”
명실상부한 북한 2인자로
지난 1월 17일 북한은 우리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조용원 당 조직비서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용원은 최근 노동당 8차 대회에서 서열이 급부상한 가운데 국무위 부위원장까지 꿰찼다.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제치고 북한 권력의 2인자가 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 고위급 탈북민은 “조용원이 이번에 국무위 부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당·정·군을 대표하는 모든 직책에 이름을 올렸다”며 “최룡해가 국무위 서열은 높지만, 당의 지배를 받는 북한에서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바로 밑인 조직비서를 맡은 조용원이 권력 2인자”라고 했다.
1월 14일 노동당 8차 대회 기념 열병식에 조용원은 검은색 가죽 롱코트를 입고 참석했다. 가죽 롱코트를 입은 사람은 조용원 외에 김정은, 현송월, 김여정이었다. 조용원의 위상을 바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용원의 2인자 부상은 ‘김창선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시사한다. 김창선은 서기실 실장이다. 서기실은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보좌하는 조직으로 북한 내에서도 실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의 저서 《태영호의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3층 서기실은 김정은의 집무실이 있는 노동당 중앙 청사를 의미한다”고 했다.
태 의원에 따르면 북한의 서기실은 김씨 일가의 생활을 챙기는 일과 함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를 취합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역할은 ‘완벽한 수령, 김정은’을 만드는 일이다. 태 의원은 책에서 “김정일이 어느 음악단에 가서 ‘이 가곡은 화성이 이렇고 악기 구성은 저러니 이러저러한 식으로 고쳐보라’고 현지지도를 했다. 김정일이 3층 서기실로부터 사전에 예습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단원들은 ‘어떻게 저런 것까지 아실까’ 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고 썼다.
김창선 시대의 마무리
김창선은 공식적으로 국무위원회 부장으로 되어 있는데, 김정일-김정은 2대에 걸쳐 서기실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전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최측근 인사다. 김창선은 김일성 집권 후반부터 호위총국, 서기실 등에 줄곧 근무하였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김정일의 서기실장을 맡았다. 김정은 통치시대에도 대를 이어 서기실장을 맡고 있다.
김창선은 김일성 일가와 특별한 관계에 있다. 김창선은 빨치산 일원인 류경수 105탱크여단장(6·25전쟁 시 서울 최초 입성 부대장)의 사위다. 그의 장모는 100세 나이임에도 조선혁명박물관장(1990~현재)을 맡는 황순희(1919년생)이다. 황순희는 김일성의 처이자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과 아주 친했으며, 김정숙 사망 후 어린 김정일과 김경희를 돌봐주었다. 이런 관계로 황순희의 딸 류춘옥과 김경희는 절친이다. 김창선이 류춘옥과 결혼하자 이러한 인연으로 김창선은 김일성-김정일의 집사 역할을 맡게 되었다.
김창선의 존재와 위상은 남북회담, 북중회담, 미북회담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판문점회담 시 김정은을 뒤따라가는 김영철을 손으로 잡아당겨 방향을 틀 정도로 힘 있는 인물이다. 또 ‘냉면’ 발언으로 유명한 리선권을 손짓 하나로 불러들이고 김여정도 손으로 잡아당기는 인물이다. 이런 그가 갖고 있던 힘이 조용원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국내외 언론에서 조용원을 실세라고 평가함에 따라 김정은의 마음이 바뀌면 (조용원은) 언제든 이른바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조용원이 몸담은 조직지도부는 외형상 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비서국을 구성하는 20개 안팎의 부서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규모와 기능, 역할과 권한은 실로 막강하며 여타 부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북한은 당 중심 국가다. 국가 권력이 당에 집중돼 있다는 뜻이다. ‘조선노동당’(이하 노동당)은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정당이다. 노동당의 총비서는 당연히 김정은이다.
노동당의 의사결정은 ‘당 대회’에서 한다. 당 대회는 노동당의 공식적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당 대회가 열리지 않으면 ‘당 중앙위원회’가 최고 지도기관 역할을 한다. 모든 당 사업을 주관한다는 얘기다.
김정일 때는 명함도 못 내밀어
중앙위원회 밑에 18개 전문부서가 있는데, 이 중 힘이 가장 센 곳이 조용원이 몸담은 조직지도부다. 조직지도부는 노동당의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다. 당 인사권, 정책권, 검열권을 가진 것이다. ‘당 속의 당’으로 불리는 이유다. 조직지도부는 조직비서 겸 조직부장을 정점으로 4명의 제1부부장과 10여 명의 부부장을 비롯해 300명 정도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김정은은 집권 직후인 2012년 4월 조용원에게 김일성훈장을 수여했다. 북한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는 것은 조용원에 대한 김정은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북한 핵심 원로에게 조용원은 그냥 그런 인물이었다. “김정일 장군님 때는 명함도 못 내밀던 인물”이란 평이 많았다. 실제도 그랬다. “김정일 시대에는 조직지도부에서 일하는 말단이었다”는 주요 탈북자의 증언이 다수였다.
그러나 김정은 시대에 와서는 달랐다. 다만 김정은은 당장 조용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조용원이 김정은을 처음 공개 수행한 시점이 2014년이다. 이 시기는 김정은이 자신의 권력의 걸림돌을 모두 제거한 시기와 겹친다. 김정은은 2012년 7월 아버지 김정일이 자신을 위해 군(軍)에서 직접 발탁한 리영호 전 총참모장을 전격 숙청했다. 2013년 12월에는 김정은 정권의 최대 후견인으로 불리던 고모부 장성택을 죽였다.
2015년 조용원을 향한 김정은의 신뢰는 어마어마했다. 일례로 김정은이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한 북한 원로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원로가 나가 보니 조용원이었다. “어쩐 일이냐”고 묻자, 조용원이 답했다.
“장군님 특명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조용원은 이 원로에게 김정은의 ‘특명’을 전달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김정은의 측근이 그의 앞에서 실수했는데, 정작 본인은 잘 모르고 있었다. 이 측근을 찾아가서 김정은 대신 꾸짖은 게 조용원이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이후 북한 권력층 내부에서는 “조용원이 많이 컸구나”란 이야기가 돌았다고 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김정은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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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31일 김정은이 개장을 앞둔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관광지구 건설장을 현지 지도하는 모습. 조용원은 오른쪽 첫 번째에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
조용원은 1957년생으로 알려졌다. 고향은 자강도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흙수저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조용원의 부모는 항일 빨치산 출신이 아니다”라고 했다. 출신 성분은 평범했지만, 조용원은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김일성대학을 다녔는데, 전공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물리학부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핵심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조용원은 북한 핵물리학계의 대부로 꼽히는 김일성대 도상록 교수와 서상국 교수의 제자”라며 “김일성대 물리학부 졸업 후 당 조직지도부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했다.
“조용원이 대학을 졸업할 시기(1980년)에 머리 좋고 치밀한 사고와 논리를 갖춘 이공계 출신을 조직지도부에 배치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있었다. 출신 성분이 평범한 흙수저 조용원이 조직지도부에서 일할 수 있었던 이유다.”
대학 졸업 후 조용원은 보조지도원, 지도원, 부과장, 과장, 부부장 등 조직지도부 말단부터 상급 간부까지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성장했다.
“조용원은 두뇌회전이 빠른데다 기획력이 좋아 부부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특히 당 조직 관리와 검열 등에서는 뛰어난 성과를 냈다.”
조용원이 머리가 좋고, 일만 잘해서 승승장구하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시대 최고 아첨꾼이란 평가도 나오기 때문이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스타일이다. 아랫사람들에게는 원칙적이면서 무섭지만, 윗사람에겐 ‘예스맨’이다. 특히 김정은이 말할 때 항상 웃으며 맞는다고 이야기하는 게 조용원이다. 그는 김정은을 잘 파악했다. 김정은은 부하가 나대는 것을 특히 싫어한다.”
어떻게 태자당을 제쳤나
북한은 신분제 사회다. 맨 위에 백두 혈통이 있고 이어 항일 빨치산 그룹, 일반 간부 순이다. 봉건적(封建的) 신분제보다 훨씬 더 강고한 출신 성분 검열, 이른바 ‘토대’가 미래를 결정한다. 월남자(越南者)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이나 친척이 외국에 있는 사람은 출세를 꿈꿀 수 없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대학 진학이나 입당(入黨)이 불가능하다. 농장원의 자녀는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대로 농장원을 해야 한다. 광부의 아들과 딸은 어지간해서는 광산을 벗어날 수 없다. 농노(農奴)나 광산노예(鑛山奴隷)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최근 마무리된 노동당 8차 대회를 보면 ‘인재풀’로 불리는 당 중앙위원회 구성원(250명)의 약 70%가 물갈이됐지만, ‘북한판 금수저’들은 대부분 건재했다. 항일 빨치산 2세대 등 김일성·김정일 시절 공신의 자제들이 여전히 북한 당(黨)·정(政)·군(軍)의 요직을 틀어쥔 것이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대를 이어 충성하는 ‘북한판 태자당(太子黨)’이야말로 김정은이 가장 신뢰하는 엘리트 집단”이라고 했다. 태자당은 중국에서 공산혁명 원로의 자제들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흙수저 조용원이 어떻게 김정은의 심복이 됐느냐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김정은이 태자당이 아닌 조용원을 어떤 이유로 이만큼이나 신뢰하느냐다.
혁명 1세대에게 부채 의식 전혀 없는 김정은
다수의 고위 탈북자를 취재한 결과,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가장 큰 이유는 김정은은 소위 항일 빨치산으로 불리는 혁명 1세대에게 부채 의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김정일은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치열한 후계 다툼을 벌였다. 김평일은 1954년 김일성과 두 번째 부인인 김성애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성애는 자신의 아들 김평일을 김일성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에 다수의 북한 엘리트들은 김일성의 총애를 듬뿍 받는 김평일에게 희망을 걸었다. 외모가 젊은 시절의 김일성을 빼다 박고 성품도 대중적인 김평일에게 열광했다. 그러나 후계자는 김정일이었다.
후계자 다툼 과정에서 김정일은 혁명 1세대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특히 김일성의 동지인 최현에게 “작은아버지가 저를 좀 도와달라”며 읍소했다. 최현은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아버지다. 최현은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한 대표적 혁명 1세대로, 김일성은 자신보다 다섯 살 많은 최현을 친구처럼 아꼈다. 최현은 김일성과 공식석상에서만 경어를 사용하고 사석에서는 편하게 ‘김일성’이라고 호칭하면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눈 유일한 인물이었다. 최현은 김정일이 수령 후계자가 되도록 한 일등 공신이었다. 김일성을 찾아가 김정일을 왜 후계자로 결정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당시 최현은 권총을 차고 다니며 김평일 지지자를 협박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일성은 훗날 최현이 김일·림춘추와 함께 ‘김정일 동무를 우리 당과 국가의 수위에 추대하는 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정일은 은혜를 톡톡히 갚았다.
김정일은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그에게 영사기를 선물해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최현도 최선을 다했다. 김정일이 21세 대학생 때인 1963년 8월, 백두산을 찾았다. 당시 아들뻘인 김정일을 수행하던 56세 최현이 김정일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황급히 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피했다. 최현은 “장군님(김정일)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제 나름의 철칙”이라고 했다. 최현의 아들 최룡해가 승승장구한 이유였다.
김정일은 최현 외에도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 데 도움을 준 인물과 그의 자제들을 중용했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후계 다툼을 하지 않았다. 경쟁자들이 조기에 낙마, 무난하게 권력을 승계했다.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정일의 후계자로 거론됐다. 하지만 김정일은 김정철에 대해 ‘여자아이 같다’ ‘성격이 유약하다’ 등의 평가를 내렸다. 김정철은 남자다운 몸매를 만들기 위해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했는데, 여성호르몬 과다 분비 증세로 가슴이 나오는 등 부작용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복형 김정남은 한때 김정일 후계자로 유력시됐지만 2001년 위조 여권을 갖고 일본에 입국하려다 적발된 사건 이후 권력에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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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에게 무릎을 꿇고 이야기하는 조용원. 그에게는 북한 최고 아첨꾼이란 비판도 따른다. 사진=유튜브 캡처 |
고위 탈북자의 이야기다.
“김정은은 2016년 김원홍 전 보위상과 태자당 일원이던 그의 아들 김철을 함께 죽였다. 김정일 때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는데, 김정은 정권에서는 비일비재하다. 김정은은 금수저·흙수저 구분이 없다. 자기한테 아부 잘 떨고 무조건 ‘네’ 하면 중용한다. 현송월이 가까이 두는 거 봐라. 걔가 무슨 뿌리가 있는 인물인가.”
또 다른 탈북자의 증언이다.
“김정은은 태어나자마자 ‘샛별 장군님’으로 불리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습니다. 어릴 때 장군놀이를 주로 했는데, 지금 (인사 등 북한을 통치) 하는 걸 보면 어릴 때 장군놀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조용원의 처세술이다. 조용원의 가장 큰 장점은 이른바 ‘오버하지 않는’ 언행이다. 다른 간부들이 밀착해 뭔가 보고하고 말을 섞으려 애쓸 때 조용원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지켜본다. 《로동신문》에 등장하는 김정은의 현지지도 사진을 보면 조용원은 김정은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고위 탈북자는 “조용원의 침착한 성격과 몸에 밴 겸손함도 출세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김영철 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이 본인은 장군님과 술자리를 함께하는 사이라고 큰 소리로 자랑하고 다녔다. 알고 보니, 말석에 앉아서 시중을 드는 역할이었는데 자신이 김정은의 최측근인 양 말했다. 이게 들통나서 김정은에게 크게 혼났다. 김영철이 해임과 복권을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정은은 나서는 사람을 싫어한다. 조용원은 김영철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이번 8차 노동당 대회에서 김정은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긴밀하게 보고하는 모습이 포착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조용원이 10년 가까운 김정은 집권 기간에 단 한 번의 부침 없이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에서 자리를 유지한 비결은 김정은에게만 충성하는 간부란 이미지 덕분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런 조용원의 모습 때문에 북한 최고 아첨꾼이란 비판도 나온다.
세 번째는 평양 아파트 붕괴사고 당시 대응이다.
2014년 5월 평양에서 23층 신축 아파트가 붕괴했다. 수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김일성·김정일 시대라면 참사 소식이 평양 외부로 퍼지는 것부터 막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정은의 선전 기관들은 “유가족에게 위로의 뜻을 표하고 수도 시민들에게 사과한다”고 했다. 절대 권위를 갖는 노동당 간부들이 직접 사과했다는 내용도 전했다. 당시 아파트 공사를 담당했던 북한 인민군 간부와 기술자 등 최소 5명이 해임되거나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도쿄신문》(2014년 5월25일자)은 “무너진 평양 평천 지역의 고층 아파트 공사를 담당한 인민군 간부와 기술자 등 최소 5명이 부실공사에 대한 문책으로 해임되거나 총살되는 등 숙청됐다. 사망자 수가 500명에 이른다는 정보가 평양에 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례적으로 유족에게 사과하고, 아파트 건설 공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이들을 신속 처벌한 것은 조용원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 아파트 붕괴 검열책임자가 조용원이었습니다. 그는 아파트를 시공했던 인민보안부를 대상으로 철저한 검열에 나섰고, 그 실상을 낱낱이 김정은에게 보고했습니다. 김정은이 조용원을 더 신뢰하게 된 계기가 됐지요.”
명실상부한 북한 2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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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이 2019년 1월 1일 김여정, 조용원(왼쪽), 김창선(오른쪽)과 함께 노동당 청사에 마련된 신년사 발표장으로 향하고 있다. 조용원의 2인자 부상은 김창선 시대의 끝을 의미한다. 사진=뉴시스 |
한 고위급 탈북민은 “조용원이 이번에 국무위 부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당·정·군을 대표하는 모든 직책에 이름을 올렸다”며 “최룡해가 국무위 서열은 높지만, 당의 지배를 받는 북한에서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바로 밑인 조직비서를 맡은 조용원이 권력 2인자”라고 했다.
1월 14일 노동당 8차 대회 기념 열병식에 조용원은 검은색 가죽 롱코트를 입고 참석했다. 가죽 롱코트를 입은 사람은 조용원 외에 김정은, 현송월, 김여정이었다. 조용원의 위상을 바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용원의 2인자 부상은 ‘김창선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시사한다. 김창선은 서기실 실장이다. 서기실은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보좌하는 조직으로 북한 내에서도 실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의 저서 《태영호의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3층 서기실은 김정은의 집무실이 있는 노동당 중앙 청사를 의미한다”고 했다.
태 의원에 따르면 북한의 서기실은 김씨 일가의 생활을 챙기는 일과 함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를 취합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역할은 ‘완벽한 수령, 김정은’을 만드는 일이다. 태 의원은 책에서 “김정일이 어느 음악단에 가서 ‘이 가곡은 화성이 이렇고 악기 구성은 저러니 이러저러한 식으로 고쳐보라’고 현지지도를 했다. 김정일이 3층 서기실로부터 사전에 예습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단원들은 ‘어떻게 저런 것까지 아실까’ 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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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8차 대회 기념 열병식에서 가죽코트를 입고 등장한 김정은(왼쪽)과 조용원. 사진=뉴시스 |
김창선은 김일성 일가와 특별한 관계에 있다. 김창선은 빨치산 일원인 류경수 105탱크여단장(6·25전쟁 시 서울 최초 입성 부대장)의 사위다. 그의 장모는 100세 나이임에도 조선혁명박물관장(1990~현재)을 맡는 황순희(1919년생)이다. 황순희는 김일성의 처이자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과 아주 친했으며, 김정숙 사망 후 어린 김정일과 김경희를 돌봐주었다. 이런 관계로 황순희의 딸 류춘옥과 김경희는 절친이다. 김창선이 류춘옥과 결혼하자 이러한 인연으로 김창선은 김일성-김정일의 집사 역할을 맡게 되었다.
김창선의 존재와 위상은 남북회담, 북중회담, 미북회담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판문점회담 시 김정은을 뒤따라가는 김영철을 손으로 잡아당겨 방향을 틀 정도로 힘 있는 인물이다. 또 ‘냉면’ 발언으로 유명한 리선권을 손짓 하나로 불러들이고 김여정도 손으로 잡아당기는 인물이다. 이런 그가 갖고 있던 힘이 조용원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국내외 언론에서 조용원을 실세라고 평가함에 따라 김정은의 마음이 바뀌면 (조용원은) 언제든 이른바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