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명환 공군 상사, 1970년 1월 2일 실종… 국방부는 탈영, 전사자 처리
⊙ 실종 1년 후 시신 발견됐다고 연락… 머리 없고 골반 크기도 다른 짝짝이 시신
⊙ 1968년 1월 ‘김신조 사건’ 이후 실미도 부대 조직… “1970년 초 서해지구에서 (북파) 공작하다 사고” 증언 나와
⊙ “조 상사가 함박도 경유해 북한에 갔을 것”(정영훈 예비역 공군 대위)
⊙ “내가 술 좋아하는 바람에 당신 고생만 시킨다”던 남편… 남편의 진실과 명예회복만 원해
⊙ 실종 1년 후 시신 발견됐다고 연락… 머리 없고 골반 크기도 다른 짝짝이 시신
⊙ 1968년 1월 ‘김신조 사건’ 이후 실미도 부대 조직… “1970년 초 서해지구에서 (북파) 공작하다 사고” 증언 나와
⊙ “조 상사가 함박도 경유해 북한에 갔을 것”(정영훈 예비역 공군 대위)
⊙ “내가 술 좋아하는 바람에 당신 고생만 시킨다”던 남편… 남편의 진실과 명예회복만 원해
- ‘특수임무 수행자 유족 동지회’에 마련된 빈소에서 허인행씨가 남편 조명환 공군 상사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월간조선》 10월호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경계의 우리 섬 함박도(咸朴島)를 잘 아는 1950~60년도 당시 공군 첩보부대원들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기사가 나가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80대 할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함박도를 거쳐 북파공작에 참여했던 공군 예비역 대위 출신의 정영훈(鄭英壎·90)씨를 통해 만나자는 전갈도 보내왔다. 지난 10월 10일 서울 구로구 온수역 인근에서 만났다.
1952년 공군 병과(兵科) 19기생으로 입대하여 ‘공군 73기상전대’에서 18년간 근무하다 실종된 조명환(曺明煥・1934~?) 상사의 아내 허인행(許仁行·81)씨였다. 조 상사(생존해 있다면 올해로 84세다)는 1970년 1월 2일 실종됐으니 내년이면 꼭 ‘실종 50년’이 된다.
1970년 당시 서른한 살이던 허씨는 지금의 80대가 될 때까지 오직 남편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군사정부 시절 인권변호사들과 야당 국회의원, 정의구현사제단, 신문·잡지사, 의문사가족협의회 등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달려가 “남편을 살려달라는 말은 안 하겠다. 생사를 확인해달라”고 호소했다.
군(軍) 당국은 지금까지 조 상사의 실종에 침묵하고 있다. ‘탈영’ 사실과 ‘전사자 통지서’만 보내왔을 뿐이다. 허씨는 탈영도, 전사도 믿지 않았다. 어쩌면 남편이 ‘북한’에서 살고 있을 것이란 믿음 하나로 50년을 버틴 것인지 모른다.
“실종 사흘 전부터 안절부절”
기자는 조명환 상사의 죽음과 서해 NLL 함박도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들어보았다. 허씨 사연은 절절했다. 남편 조 상사가 사라졌을 때 초등학교 1학년이던 장남 규완이는 57세, 6세던 차남 규남이는 54세, 강보에 싸였던 생후 6개월의 미란이는 51세 중년이 되었다. 기가 막히게 세월이 흘러갔다.
“50년이 흐른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1970년 1월 2일. 남편 조명환 상사는 시종 불안한 모습이었어요. 그러니까 사흘 전부터 밥도 못 먹고 안절부절했다고 할까요? (1월 1일에) 서울 신림동 친정집에 가자고 하더니 친정아버지를 뒤에서 꼭 껴안는 거예요. 그러곤 (친정엄마가) 국수를 다 삶았는데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어요.
이튿날 아침, 그러니까 1월 2일 신정 연휴라 부대에 갈 일도 없는데 아침도 먹지 않고 부대에 갈 일이 있다고 하며 나섰어요.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 (공군)부대엔 무슨 일로 갔나요.
“글쎄, 서울 대방동 공군부대 창고에 권총을 안 잠그고(안전장치를 풀고) 왔다는 겁니다. 걱정이 되어 (부대에) 가야겠다고 했어요.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남편을 찾으러 몇 번이고 부대를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곧 돌아온다는 말만 하더군요. 느낌이 이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스물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이전에 조 상사님을 공군본부에서 모시고 있었다”고 밝힌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한쪽 눈에 시퍼런 큰 점이 있어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었다.
“당신 남편은 북파된 것이 확실하다”
“남편이 종종 부대 사람들을 집에 데리고 왔었기에 부대원이라면 제가 얼굴을 모를 리 없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아줌마는 모르실 거예요’ 하면서 말꼬리를 돌렸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생계를 궁금해했다. 당시 조 상사 가정은 생계가 막막해 부대에서 야영 훈련을 나갈 때 주는 쌀, 보리쌀, 건빵 같은 부식들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이렇게 달랬다고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살아 계실 거예요. 저희가 열흘쯤 후에 도와드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공군 헌병 수사대 근무자들이었다. 맞벌이로 뜨개질 일을 하고 있던 허씨는 그 일도 그만두고 남편의 소식을 듣기 위해 부대를 하루가 멀다시피 찾아갔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옆집 택시기사 아저씨의 친구의 친구라는 분이 저를 찾아왔는데 중앙정보부 사람이었습니다. 제 모습이 하도 딱해서 이웃에서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우리 친정과 시댁 집안을 한 달간 낱낱이 조사한 후였습니다. 뜻밖에도 이런 말을 제게 했어요. ‘당신 남편은 북파(北派)된 것이 확실하다’고요.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북파 훈련에는 많은 투자를 해야 하므로 한 번의 파견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여러 번을 한다’고, ‘그러다 보면 북에서도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이중간첩 노릇을 하다가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죠.
그때 공군 헌병 수사대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당장 사라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사람이 신분증을 보여주니 그들은 아무런 말도 못 했어요.”
라면박스에 담겨 온 짝짝이 시신
허인행씨는 남편의 행방과 생사를 알기 위해 수도 없이 공군 수사대를 찾아갔다. 돌아온 답변은 “조금만 기다려라.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실종 1년이 지난 1971년 4월쯤 대방동 공군본부를 찾아갔는데 ‘열흘만 기다리면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속으로 좋아했죠. ‘이제 오시나 보다’고 말이죠. 하지만 한 달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어 애를 태우는데 친정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공군에서 뭘 찾았다’면서요.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인천 소래 포구에서 남편 시신이 발견됐다’는 겁니다. 소래에 찾아가니 남편 유해(遺骸)를 조그마한 라면박스에 담았더군요.”
이후 남편이 근무하던 공군부대에 조 상사의 빈소가 차려졌다고 한다.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떼를 썼는데 안 보여줬어요. 공군 병원으로 시신을 옮겼다고 해서 찾아가니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같은 곳에서 가져갔다는 겁니다. 기가 막혔죠.
나중에 친정아버지가 시신을 염했는데 갈비뼈 일부만 있었고 골반뼈도 크기가 짝짝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골반뼈 큰 것은 20대 중반, 작은 것은 10대 것으로 보였고, 다리도 팔도 한쪽밖에 없고, 머리도 없었습니다. 대충 봐도 키가 완전히 작아 보였다는 겁니다. 분명 남편이 아니었어요.”
국가유공자 대우 요구했지만…
얼마 후 공군 수사대에서 그녀를 찾아왔다.
“이렇게 제가 말했어요. ‘당신네가 이북으로 보냈지 않나.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고요. 수사대원들이 ‘이북이 뭐예요?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얘기했죠.
‘나도 그런 줄 알았다. 대한민국은 보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그런 일이 닥치고 보니 보냈더라. 나라를 위해 희생했으면 합당한 예우를 하라’고 요구했죠.
말없이 한참 앉았더니 ‘아줌마가 원하는 게 뭡니까’ 그래요. ‘3남매가 공부할 수 있게 남편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해달라’고 했죠. ‘알겠다’면서 ‘그런데 금방은 안 된다. 장례부터 치러라’ 해요. 그렇게 시신을 화장했는데 완전히 속은 거지요. 국가유공자는커녕….”
이후 군이 그녀에게 준 것은 남편의 군복무 18년간의 퇴직금 63만원이 전부였다.
북파 사실 자랑하던 남편 후배
— 조명환 상사가 북파되었다고 확신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남편이 서울 오류동 공군부대(첩보부대)에 근무하고 있을 때 후배 최○○ 하사가 매주 우리집을 찾아왔어요. 저를 ‘형수님’이라고 불렀죠. 제가 막내를 낳을 때쯤 영등포시장에서 최 하사를 우연히 만났는데 며칠 뒤에 우리집엘 찾아왔어요.
남편에게 ‘형님, 왜 이렇게 사느냐’고 했어요. 남편은 월급 타면 못사는 사람 꿔줘 빈손으로 올 때가 많을 만큼 착한 사람이었어요. 술을 좋아하고 친구도 좋아하는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끼니를 거르곤 했죠. 최 하사는 자랑스레 ‘북한에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집이 두 채’라고 자랑하더군요. ‘갔다 오면 생명 수당이 많이 나온다’면서…. ‘북한 처녀를 남한으로 데려왔다’는 말도 했어요.
그날 이후 제가 최 하사를 본 적이 없는데, 하루는 남편이 늦게 퇴근하기에 물어보니 ‘최 하사를 만났다’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6개월 후에 사라진 것이죠.”
— 남편 실종 후 최 하사를 만난 적이 있나요.
“천신만고 끝에 최 하사에게 연락이 닿아 만난 적이 있어요. 1993년쯤으로 기억해요. 그런데 화만 내고 남편에 대해 아무런 말도 못 꺼내게 했어요. 주위를 자꾸 둘러보더니 ‘(정부)기관에서 나를 감시한다’면서요.”
최 하사는 그로부터 1년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허씨는 이후에도 계속 공군부대를 찾아갔다. 남편의 생사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3남매 데리고 살려면 일을 해야 되잖아요. 파출부부터 관악산에서 박카스 파는 일, 기사식당 세차일 등등 아이들 키우고 공부시키기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한 달에 한 번도 가고, 몇 달에 한 번도 가고, 그리고 민원을 계속 넣었어요. 정권이 바뀌어도….
그랬더니 2000년쯤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민원을 너무 많이 넣어서 대답할 게 없다. 이제 민원 넣지 마라’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남편의 ‘전사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사실, 저는 덤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북파공작원, 대개 함박도 경유해 파견”
허씨의 긴 이야기를 다 들은 정영훈 예비역 대위는 조 상사가 함박도를 경유해 북한에 갔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6·25 당시 피란민들이 함박도를 통해 말도로 나왔어요. 함박도를 거쳐 피란을 나왔고, 북파공작원도 대개 함박도를 경유해 파견됐어요. 그때는 누가 뭐래도 우리 땅이었고, 정전(停戰) 이후 공군 제20특무전대(戰隊) 정보장교, 공군본부 정보국원이어서 당시 사정을 잘 압니다. 서해 주변 섬 14곳을 그땐 우리 군이 다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1965년 10월 함박도에서 조개잡이 하던 어민 109명이 납치되자 사실상 공군 첩보부대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1968년 김신조(金新朝)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상황이 달라졌죠.”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124군 소속 게릴라 31명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공군 2325부대 209파견대, 즉 실미도 부대가 창설되었다. 이들은 일명 ‘김일성 목 따는 부대’였다고 한다.
— 김신조 사건의 대응으로 왜 공군이 선택되었나요.
정영훈씨의 말이다.
“아무래도 육군은 산악을 타고 육로로 침투해야 합니다. 해군은 당시 잠수함을 한 척도 갖고 있지 않았어요. 고공(高空)에서 낙하산을 타고 침투하는 것이 목표물에 근접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방법이죠. 그래서 공군에 작전 임무가 부여된 것입니다.”
실미도 부대의 공작원 선발과 작전에 드는 예산 등은 중정(中情)에서 맡고, 침투 훈련은 공군 특수부대가 맡기로 했다.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 부대원이 31명이었기 때문에 우리 측에서도 31명을 보내기로 했다. (참고 《월간조선》 2004년 2월호 ‘영화와 다른 실미도 반란의 진실, 생존자들의 증언 실록’)
공군은 6·25 이전부터 백령도·대청도·교동도·우도·말도 등 서해의 여러 섬에 대북 정보수집과 대남 침투에 대비한 파견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각 파견대는 서울 오류동에 위치한 ‘20특무전대’, 일명 2325부대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이 부대는 공군의 대북 정보수집 사령부이자 대북 침투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였다.
20특무전대는 훈련 장소로 실미도를 택했다. 실미도는 인천에서 뱃길로 16km나 떨어져 있는 외진 장소이고,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무인도였기 때문이었다. 또 함박도와도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공군 첩보부대에 근무했던 조명환 상사가 실종된 시점은 ‘김신조 사건’이 일어나고 2년이 지난 1970년 1월 2일이었다.
함북 회령 출신
예비역 공군 대위인 정영훈씨가 조 상사가 북파공작에 가담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군 동기생 중에 공군 첩보대장 감이었던 박세형 중령이 있어요. 제가 북파공작에 나설 때도 관여를 했었죠. 이 친구가 1970년 3월 갑자기 예편하고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어요. 그 무렵 제게 한 말이 ‘공군 타(他) 부대 대원들을 데리고 서해지구에서 (북파)공작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 그래서 책임지고 옷을 벗었다’고 했어요.
역시 군 동기로 훗날 공군 첩보대장(1975. 1~1977. 12)을 지낸 노안규 대령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서해지구 첩보부대에서 1970년 초에 사고가 났다’고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망한 상태여서 ‘서해지구 공작’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죠.”
— 조명환 상사의 고향은 어딘가요? 보통 이북 출신이 주로 북파공작원으로 발탁되잖아요.
이번에는 허씨가 말을 받았다.
“남편은 어린 시절 함경도에서 살았습니다. 1934년생으로 광복 후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해요.”
— 혹시 함경도 어디인가요.
“회령.”
— 최 하사는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십니까.
정영훈씨의 말이다.
“아마 북파공작원 모집책이거나 대원 물색조였을 거예요. 사람들을 포섭해 북한으로 보내는 역할이랄 수 있어요.”
“내가 술 좋아해 당신 고생만 시켜”
— 추정컨대 군 당국이 1970년 1월 북파공작을 감행한 이유는 뭘까요.
“매년 대북 공작금이 나왔으니 어떻게든 그 돈을 써야 했어요. 많은 첩보부대 간부들이 공작금과 관련한 비위로 옷을 벗거나 강등되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 돈으로 대원을 모집하지 않았을까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어요. 그리고 ‘김신조 사건’이 일어나고 우리 군에서 어떤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을까요?”
이번에는 허씨에게 물었다.
— 남편이 북파공작에 참여할 만큼 당시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나요.
“남편은 워낙 술을 좋아해서 살림이 늘 넉넉지 못했어요. 둘이 발을 뻗으면 꽉 차는 작은 방에 다섯 식구가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부업으로 손뜨개 일을 하곤 했지요.
그 무렵, 남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술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는 바람에 당신 데려다 고생만 시키잖아’.
갑작스런 그 말에 저는 그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하며 영 잠들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주무시라고 하니까 벽을 보고 누워서 뒤척거리는 모양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남편에게 말했어요. ‘괜찮아요. 저도 조금씩 보태고 하면 6~7년 후쯤 내 집 장만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라고 말이죠. 하지만 제 위로의 말이 남편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됐던 모양입니다.”
“이젠 진실과 명예회복만 원해”
허씨는 “아직도 우리 가까이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북파공작원들이 많이 있다”며 군 당국의 공식 사과와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어둡고 무지했던 1960, 70년대 우리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의 작은 호소가 그들의 억눌려 답답한 가슴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에 저는 이제 두려움 따위는 없습니다.
남편이 떠나신 이후 가끔 보기 시작한 점괘에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할 때마다 저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내려놓았어요. 그저 남편의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오직 남편의 명예회복만 바랍니다. 보상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아요. 진실이 밝혀진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기사가 나가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80대 할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함박도를 거쳐 북파공작에 참여했던 공군 예비역 대위 출신의 정영훈(鄭英壎·90)씨를 통해 만나자는 전갈도 보내왔다. 지난 10월 10일 서울 구로구 온수역 인근에서 만났다.
1952년 공군 병과(兵科) 19기생으로 입대하여 ‘공군 73기상전대’에서 18년간 근무하다 실종된 조명환(曺明煥・1934~?) 상사의 아내 허인행(許仁行·81)씨였다. 조 상사(생존해 있다면 올해로 84세다)는 1970년 1월 2일 실종됐으니 내년이면 꼭 ‘실종 50년’이 된다.
1970년 당시 서른한 살이던 허씨는 지금의 80대가 될 때까지 오직 남편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군사정부 시절 인권변호사들과 야당 국회의원, 정의구현사제단, 신문·잡지사, 의문사가족협의회 등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달려가 “남편을 살려달라는 말은 안 하겠다. 생사를 확인해달라”고 호소했다.
군(軍) 당국은 지금까지 조 상사의 실종에 침묵하고 있다. ‘탈영’ 사실과 ‘전사자 통지서’만 보내왔을 뿐이다. 허씨는 탈영도, 전사도 믿지 않았다. 어쩌면 남편이 ‘북한’에서 살고 있을 것이란 믿음 하나로 50년을 버틴 것인지 모른다.
“실종 사흘 전부터 안절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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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월 2일 공군부대에 간다고 집을 나간 후 실종된 조명환 상사. |
“50년이 흐른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1970년 1월 2일. 남편 조명환 상사는 시종 불안한 모습이었어요. 그러니까 사흘 전부터 밥도 못 먹고 안절부절했다고 할까요? (1월 1일에) 서울 신림동 친정집에 가자고 하더니 친정아버지를 뒤에서 꼭 껴안는 거예요. 그러곤 (친정엄마가) 국수를 다 삶았는데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어요.
이튿날 아침, 그러니까 1월 2일 신정 연휴라 부대에 갈 일도 없는데 아침도 먹지 않고 부대에 갈 일이 있다고 하며 나섰어요.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 (공군)부대엔 무슨 일로 갔나요.
“글쎄, 서울 대방동 공군부대 창고에 권총을 안 잠그고(안전장치를 풀고) 왔다는 겁니다. 걱정이 되어 (부대에) 가야겠다고 했어요.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남편을 찾으러 몇 번이고 부대를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곧 돌아온다는 말만 하더군요. 느낌이 이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스물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이전에 조 상사님을 공군본부에서 모시고 있었다”고 밝힌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한쪽 눈에 시퍼런 큰 점이 있어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었다.
“당신 남편은 북파된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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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 공군 상사의 실종 소식을 처음 전한 《신아일보》 1970년 2월8일자 기사다. 실종 보도 후 기자는 당국의 압력으로 신문사를 떠났다고 전한다. |
그들은 그녀의 생계를 궁금해했다. 당시 조 상사 가정은 생계가 막막해 부대에서 야영 훈련을 나갈 때 주는 쌀, 보리쌀, 건빵 같은 부식들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이렇게 달랬다고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살아 계실 거예요. 저희가 열흘쯤 후에 도와드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공군 헌병 수사대 근무자들이었다. 맞벌이로 뜨개질 일을 하고 있던 허씨는 그 일도 그만두고 남편의 소식을 듣기 위해 부대를 하루가 멀다시피 찾아갔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옆집 택시기사 아저씨의 친구의 친구라는 분이 저를 찾아왔는데 중앙정보부 사람이었습니다. 제 모습이 하도 딱해서 이웃에서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우리 친정과 시댁 집안을 한 달간 낱낱이 조사한 후였습니다. 뜻밖에도 이런 말을 제게 했어요. ‘당신 남편은 북파(北派)된 것이 확실하다’고요.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북파 훈련에는 많은 투자를 해야 하므로 한 번의 파견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여러 번을 한다’고, ‘그러다 보면 북에서도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이중간첩 노릇을 하다가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죠.
그때 공군 헌병 수사대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당장 사라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사람이 신분증을 보여주니 그들은 아무런 말도 못 했어요.”
라면박스에 담겨 온 짝짝이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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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이태원로의 ‘특수임무 수행자 유족 동지회’에 마련된 북파공작원 영정과 위패들. |
“실종 1년이 지난 1971년 4월쯤 대방동 공군본부를 찾아갔는데 ‘열흘만 기다리면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속으로 좋아했죠. ‘이제 오시나 보다’고 말이죠. 하지만 한 달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어 애를 태우는데 친정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공군에서 뭘 찾았다’면서요.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인천 소래 포구에서 남편 시신이 발견됐다’는 겁니다. 소래에 찾아가니 남편 유해(遺骸)를 조그마한 라면박스에 담았더군요.”
이후 남편이 근무하던 공군부대에 조 상사의 빈소가 차려졌다고 한다.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떼를 썼는데 안 보여줬어요. 공군 병원으로 시신을 옮겼다고 해서 찾아가니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같은 곳에서 가져갔다는 겁니다. 기가 막혔죠.
나중에 친정아버지가 시신을 염했는데 갈비뼈 일부만 있었고 골반뼈도 크기가 짝짝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골반뼈 큰 것은 20대 중반, 작은 것은 10대 것으로 보였고, 다리도 팔도 한쪽밖에 없고, 머리도 없었습니다. 대충 봐도 키가 완전히 작아 보였다는 겁니다. 분명 남편이 아니었어요.”
얼마 후 공군 수사대에서 그녀를 찾아왔다.
“이렇게 제가 말했어요. ‘당신네가 이북으로 보냈지 않나.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고요. 수사대원들이 ‘이북이 뭐예요?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얘기했죠.
‘나도 그런 줄 알았다. 대한민국은 보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그런 일이 닥치고 보니 보냈더라. 나라를 위해 희생했으면 합당한 예우를 하라’고 요구했죠.
말없이 한참 앉았더니 ‘아줌마가 원하는 게 뭡니까’ 그래요. ‘3남매가 공부할 수 있게 남편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해달라’고 했죠. ‘알겠다’면서 ‘그런데 금방은 안 된다. 장례부터 치러라’ 해요. 그렇게 시신을 화장했는데 완전히 속은 거지요. 국가유공자는커녕….”
이후 군이 그녀에게 준 것은 남편의 군복무 18년간의 퇴직금 63만원이 전부였다.
북파 사실 자랑하던 남편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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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 상사는 모범 군인이었다. 1966~68년 세 차례에 걸쳐 표창을 받은 사실이 병적기록표에 나온다. |
“남편이 서울 오류동 공군부대(첩보부대)에 근무하고 있을 때 후배 최○○ 하사가 매주 우리집을 찾아왔어요. 저를 ‘형수님’이라고 불렀죠. 제가 막내를 낳을 때쯤 영등포시장에서 최 하사를 우연히 만났는데 며칠 뒤에 우리집엘 찾아왔어요.
남편에게 ‘형님, 왜 이렇게 사느냐’고 했어요. 남편은 월급 타면 못사는 사람 꿔줘 빈손으로 올 때가 많을 만큼 착한 사람이었어요. 술을 좋아하고 친구도 좋아하는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끼니를 거르곤 했죠. 최 하사는 자랑스레 ‘북한에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집이 두 채’라고 자랑하더군요. ‘갔다 오면 생명 수당이 많이 나온다’면서…. ‘북한 처녀를 남한으로 데려왔다’는 말도 했어요.
그날 이후 제가 최 하사를 본 적이 없는데, 하루는 남편이 늦게 퇴근하기에 물어보니 ‘최 하사를 만났다’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6개월 후에 사라진 것이죠.”
— 남편 실종 후 최 하사를 만난 적이 있나요.
“천신만고 끝에 최 하사에게 연락이 닿아 만난 적이 있어요. 1993년쯤으로 기억해요. 그런데 화만 내고 남편에 대해 아무런 말도 못 꺼내게 했어요. 주위를 자꾸 둘러보더니 ‘(정부)기관에서 나를 감시한다’면서요.”
최 하사는 그로부터 1년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허씨는 이후에도 계속 공군부대를 찾아갔다. 남편의 생사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3남매 데리고 살려면 일을 해야 되잖아요. 파출부부터 관악산에서 박카스 파는 일, 기사식당 세차일 등등 아이들 키우고 공부시키기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한 달에 한 번도 가고, 몇 달에 한 번도 가고, 그리고 민원을 계속 넣었어요. 정권이 바뀌어도….
그랬더니 2000년쯤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민원을 너무 많이 넣어서 대답할 게 없다. 이제 민원 넣지 마라’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남편의 ‘전사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사실, 저는 덤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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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남편 조명환 공군 상사의 생사를 찾고 있는 아내 허인행씨와 예비역 공군 대위인 정영훈씨. |
“6·25 당시 피란민들이 함박도를 통해 말도로 나왔어요. 함박도를 거쳐 피란을 나왔고, 북파공작원도 대개 함박도를 경유해 파견됐어요. 그때는 누가 뭐래도 우리 땅이었고, 정전(停戰) 이후 공군 제20특무전대(戰隊) 정보장교, 공군본부 정보국원이어서 당시 사정을 잘 압니다. 서해 주변 섬 14곳을 그땐 우리 군이 다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1965년 10월 함박도에서 조개잡이 하던 어민 109명이 납치되자 사실상 공군 첩보부대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1968년 김신조(金新朝)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상황이 달라졌죠.”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124군 소속 게릴라 31명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공군 2325부대 209파견대, 즉 실미도 부대가 창설되었다. 이들은 일명 ‘김일성 목 따는 부대’였다고 한다.
— 김신조 사건의 대응으로 왜 공군이 선택되었나요.
정영훈씨의 말이다.
“아무래도 육군은 산악을 타고 육로로 침투해야 합니다. 해군은 당시 잠수함을 한 척도 갖고 있지 않았어요. 고공(高空)에서 낙하산을 타고 침투하는 것이 목표물에 근접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방법이죠. 그래서 공군에 작전 임무가 부여된 것입니다.”
실미도 부대의 공작원 선발과 작전에 드는 예산 등은 중정(中情)에서 맡고, 침투 훈련은 공군 특수부대가 맡기로 했다.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 부대원이 31명이었기 때문에 우리 측에서도 31명을 보내기로 했다. (참고 《월간조선》 2004년 2월호 ‘영화와 다른 실미도 반란의 진실, 생존자들의 증언 실록’)
공군은 6·25 이전부터 백령도·대청도·교동도·우도·말도 등 서해의 여러 섬에 대북 정보수집과 대남 침투에 대비한 파견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각 파견대는 서울 오류동에 위치한 ‘20특무전대’, 일명 2325부대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이 부대는 공군의 대북 정보수집 사령부이자 대북 침투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였다.
20특무전대는 훈련 장소로 실미도를 택했다. 실미도는 인천에서 뱃길로 16km나 떨어져 있는 외진 장소이고,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무인도였기 때문이었다. 또 함박도와도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공군 첩보부대에 근무했던 조명환 상사가 실종된 시점은 ‘김신조 사건’이 일어나고 2년이 지난 1970년 1월 2일이었다.
함북 회령 출신
예비역 공군 대위인 정영훈씨가 조 상사가 북파공작에 가담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군 동기생 중에 공군 첩보대장 감이었던 박세형 중령이 있어요. 제가 북파공작에 나설 때도 관여를 했었죠. 이 친구가 1970년 3월 갑자기 예편하고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어요. 그 무렵 제게 한 말이 ‘공군 타(他) 부대 대원들을 데리고 서해지구에서 (북파)공작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 그래서 책임지고 옷을 벗었다’고 했어요.
역시 군 동기로 훗날 공군 첩보대장(1975. 1~1977. 12)을 지낸 노안규 대령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서해지구 첩보부대에서 1970년 초에 사고가 났다’고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망한 상태여서 ‘서해지구 공작’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죠.”
— 조명환 상사의 고향은 어딘가요? 보통 이북 출신이 주로 북파공작원으로 발탁되잖아요.
이번에는 허씨가 말을 받았다.
“남편은 어린 시절 함경도에서 살았습니다. 1934년생으로 광복 후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해요.”
— 혹시 함경도 어디인가요.
“회령.”
— 최 하사는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십니까.
정영훈씨의 말이다.
“아마 북파공작원 모집책이거나 대원 물색조였을 거예요. 사람들을 포섭해 북한으로 보내는 역할이랄 수 있어요.”
“내가 술 좋아해 당신 고생만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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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인행씨는 남편 사진 앞에서 매일 부처님께 기도를 드린다. |
“매년 대북 공작금이 나왔으니 어떻게든 그 돈을 써야 했어요. 많은 첩보부대 간부들이 공작금과 관련한 비위로 옷을 벗거나 강등되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 돈으로 대원을 모집하지 않았을까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어요. 그리고 ‘김신조 사건’이 일어나고 우리 군에서 어떤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을까요?”
이번에는 허씨에게 물었다.
— 남편이 북파공작에 참여할 만큼 당시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나요.
“남편은 워낙 술을 좋아해서 살림이 늘 넉넉지 못했어요. 둘이 발을 뻗으면 꽉 차는 작은 방에 다섯 식구가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부업으로 손뜨개 일을 하곤 했지요.
그 무렵, 남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술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는 바람에 당신 데려다 고생만 시키잖아’.
갑작스런 그 말에 저는 그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하며 영 잠들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주무시라고 하니까 벽을 보고 누워서 뒤척거리는 모양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남편에게 말했어요. ‘괜찮아요. 저도 조금씩 보태고 하면 6~7년 후쯤 내 집 장만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라고 말이죠. 하지만 제 위로의 말이 남편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됐던 모양입니다.”
“이젠 진실과 명예회복만 원해”
허씨는 “아직도 우리 가까이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북파공작원들이 많이 있다”며 군 당국의 공식 사과와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어둡고 무지했던 1960, 70년대 우리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의 작은 호소가 그들의 억눌려 답답한 가슴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에 저는 이제 두려움 따위는 없습니다.
남편이 떠나신 이후 가끔 보기 시작한 점괘에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할 때마다 저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내려놓았어요. 그저 남편의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오직 남편의 명예회복만 바랍니다. 보상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아요. 진실이 밝혀진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