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효진의 인간탐험] 金大中 주필 直筆과 直情의 大論客

오효진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골프를 안 치고, 지금도 펜대로 글을 쓴다. 인용이 거의 없는 글. 山行과 값싸고 맛있는 음식점을 좋아하고 거의 싸움판 같은 토론을 유도한다. 일단 「아니오」하고 시작하는 그의 반골기질을 다 받아 준 朝鮮日報와 그러지 못한 金大中 정권 사이에서 그는 記者的 論客의 길을 37년째 직선으로 걷고 있다
「인간탐험」의 발상자를 탐험하다
  내가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조선일보 빌딩 6층에 있는 주필실에 들어섰을 때, 조선일보 金大中(62) 주필은 응접용 1인 의자에 앉아서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데스크를 보고 있었다. 그는 책상용 작은 검은 의자를 앞에 놓고 있었는데, 그 의자의 앉는 부분 위에 다른 논설위원이 쓴 사설 원고가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그 옹색한 의자가 책상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大韓民國이 쩌렁쩌렁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조선일보의 大論客답지 않아 보였다.
 
  ―아니, 왜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그가 황급히 말했다.
 
  『다리가 아파서 올려 놓을려고 갖다 놓은 거요. 발목을 다쳐서. 이렇게…』
 
  그는 시범을 보였다. 등산하다가 발목을 다쳤다고 했다.
 
  그가 앉아 있는 오른쪽 탁자 위엔, 孫周恒(손주항)씨가 直筆不朽(직필불후;직필은 썩지 않는다)라고 쓴 부채가 놓여 있었는데, 그 글귀가 金주필과 잘 어울려 보였다.
 
  金주필과 인터뷰는 참 어렵게 이뤄졌다. 첫 번째는 「사장(方相勳)이 감옥에 들어가 계신데 나 혼자 당당하다고 하는 게 옳지 않다」고 사양했고, 두 번째는 「사장이 감옥살이하는 걸 보니 너무 훌륭한데, 사장을 먼저 인간탐험을 하면 그 다음에 응하겠다」고 또 사양했다.
 
  우리는 그때마다 한 달씩 생각하는 시간을 두었었다. 그러니까 이 인터뷰가 석달 만에 이뤄진 것이다.
 
  또 하나 어려운 점이 있다. 金주필은 내가 조선일보에 근무했던 시절 두 번씩이나 나의 상사였다. 첫번째 내가 月刊朝鮮에 근무했을 때 그는 출판국장이었고, 조선일보 사회부에서 일했을 때는 편집국장이었다. 또 그는, 지금도 내가 쓰고 있는 이 연재물을 기획, 「인간탐험」이란 멋진 이름을 달아 준 인물이다. 그가 만들어 준 그릇에 바로 그를 담자니, 어깨가 무거워진다. 어쨌든 直筆不朽의 정신으로 인간탐험의 아버지를 탐험할 수밖에 없다. 참 이건 운명적 사건이다.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을 아는 거요』
 
 
  내가 그의 6∼7평쯤 되는 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그는 JP가 YS와 바로 전날(10월7일) 만난 뒤 기자들과 나눈 대화록을 막 PC에서 꺼내 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내가 물었다.
 
  ―앞으로 YS와 JP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JP가 또 내각제 들고 나와서, 내가 2년 반만 하겠다고 하고 대통령 나온다니까요』
 
  ―月刊朝鮮에서 곧 나올 「金大中 칼럼집」을 보니까 앞으로 일어날 사태나 사건을 많이 예견했는데 그게 대부분 맞았더군요. 앞으로 DJ, YS, JP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제가 써놓고 한 번 지켜 보겠습니다.
 
  『나는, 처음 DJ가 DJP 공조를 할 때부터, 「지금 민주당에는 대통령 할 만한 인물이 없다, 그래서 李會昌을 꺾을 사람이 누구냐를 생각했다」고 봤지요. DJ에게는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보다, 李會昌이 되면 안 된다는 게 중요한 거요. 왜? 李會昌이 대통령이 되면 포스트 DJ가 아예 망가진다구요. 정치보복도 두렵고. 결국은 JP가 YS를 업고 오면 DJ와 호남도 결국은 JP를 밀어 주게 될 걸로 봐요.
 
  지금 JP가 화가 나 있지만 YS와 손을 잡으면 딜링할 수 있는 가치가 커집니다. YS가 있는 경상남도, 朴槿惠가 있는 경상북도, 본바닥 충청도, 마지못한 호남이 힘을 합하면 가능성이 있지요』
 
  ―정치발전의 면에서 볼 때, 三金 政治 청산과 지역감정 청산이란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가 클 것 같은데요.
 
  『나는 정치발전의 측면에서 보는 게 아니라, 정치 현실을 말하는 겁니다. 어떤 사태발전이든 合目的的으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이건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그는 내가 질문을 할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장을 읽는 것처럼 정리된 언어로, 막힘 없이 답변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이 차곡차곡 그의 머리 속에 정리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 그와 말할 때는, 그는 다소 서두르기도 하고 쉽게 흥분하기도 해서, 나는 이번 인터뷰가 참 어렵겠구나 하고 각오를 했는데, 金주필의 차분한 모습을 보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金주필에게도 이런 면이 있구나 생각하니 탐험의 재미가 쏠쏠했다.
 
  나는 그가 앞으로 벌어질 엄청난 상황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돼서 이렇게 물어봤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판단을 할 때, 판단의 자료는 뭘 이용하세요?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하냐는 말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었다.
 
  『젤 중요한 건 그 사람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아는 DJ, 내가 아는 YS, 내가 아는 JP, 그런 것들이 바탕이 돼서 판단이 나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누군가를 모르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지요.
 
  내가 JP를 알거든요. 아, 「JP가 어디까지 나올 것이다」 라는 걸 알아요. DJ는 지금 거론되는 대권주자들을 내세워서 자기를 보호할 사람이 아닙니다. JP는 본인이 인기가 없기 때문에 안 나올 것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인기는 믿을 게 못 됩니다. 전에 朴燦鍾씨가 인기가 늘 1등이었는데, 그때 무슨 표가 나왔어요.
 
  JP의 가장 큰 인센티브는 「내가 하면 2년 반만 하겠다」는 겁니다. 그 담엔 내각책임제로 가자고 할 거요』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가 온다』
 
 
  ―지금 李會昌 대세론이 만연돼 있는데. 金주필이 판단한 또는 알고 있는 李會昌씨는 어떤 사람입니까.
 
  『한참 왕성한 정신세계를 향유해야 할 시점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매일 자기 방에 가서 까먹으며 사는 생활을 오랜 기간 했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 한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DJ가 저렇게 실패를 하고 있는데도 李會昌씨가 반사적 이익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거기서 오는 거라고 봅니다.
 
  黨內에서도, 現 제도 안에서 李會昌씨가 그대로 올라 앉으면 DJ 못지않게 독선적일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이런 틈새를 보고 JP가 反李會昌 대열을 모으는 챔피언으로 나설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李會昌 총재에 대한 주필의 코멘트를 들으면, 그분이 젊은 시절에 규격화된 사고밖에 못했다는 걸로 들리는데.
 
  『그러니까, 그게 방어적이고, 폐쇄적이고, 수동적이고, 자기들 머리만 믿는 쪽으로 발전한 겁니다.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고 한계지요』
 
  ―주필의 생각대로 정치의 흐름이 간다고 할 경우,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에 유용합니까?
 
  『난 모르겠어요. 오래 전부터 이거 三金이 다 해먹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은 했었어요. 내각제로 간다면 중대한 기도임에는 틀림없어요. 발전인지 후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아무런 제도적 장치의 변화 없이 李會昌 또는 어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서 똑같은 정치를 하면서, 오로지 지도자의 아량과 덕망에 기대서 좋은 정치를 해주기 바라는, 이런 상황보다는 한번 도전해 봄직하지 않겠는가 봅니다. 지금 이 제도와 상황에 대해서 국민들이 식상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굉장히 무섭습니다. 기존 정당들이 막 깨지고 다른 정당이 생겨나야 하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변화가 옵니다. 연말이나 내년 초에 지각변동이 옵니다』
 
  ―金鍾泌 총재는 어떤 사람입니까?
 
  『JP는 항상 자기가 정치적 피해자라고 스스로 채색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JP만큼 오랫동안 정치적 가해자의 입장에서 또는 정치적으로 특혜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서 있어온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自愧的(자괴적)인 측면이 너무 없다고 봐야겠지요. JP는 나이가 많아서 세상을 가르칠 수 있다고 착각할 때가 가끔 있는 것 같아요.
 
  JP가 하는 일을 좀 신랄하게 비판하고 싶어도 한번 만났다 하면 그걸 못하게 돼요. 어쩌다 술자리서 만나면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金주필, 요즘 힘들지요」 하는데 순식간에 흉허물이 다 없어져요. 그게 그 양반의 장점입니다』
 
 
  신문에 못 나간 「김대중 칼럼」
 
 
  여기서 얘기의 방향을 돌렸다.
 
  ―검찰의 출두요구가 있었을 때 참 괴로웠지요?
 
  『출두하라고 그래서, 출두의 前 단계로서 검찰에 서면으로 물어 줬으면 좋겠다고 팩스로 요청했지요. 출두요구가 잘못된 것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도 없어서요. 그랬더니 만약에 내가 출두하지 않으면, 그 동안 걸지 않았던 신문사 내의 다른 사람을 걸 수밖에 없다고 해요.
 
  나는 이미 출두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는데, 나를 놓고서 이런 조건을 건 겁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구인당하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려면 내가 신문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 대목이 쪼끔 이상합니다. 왜 신문사에 있으면서 구인당하면 안 됩니까. 그게 더 떳떳할 텐데요.
 
  『내가 회사에 있으면서, 내 위엣 분들이 구속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회사의 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내가 회사에 주필로 뻗대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가 내 입장을 밝히는 칼럼을 써서 시내판 신문에 집어넣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걸 邊龍植 편집국장이 알게 돼서 뜻대로 안 됐지요.
 
  나는 그때 사표는 이미 냈었지요. 그래서 회사는 그만 둔 거라서 이튿날부터 안나갔고, 내 뜻을 밝히는 칼럼은 안 나갔으니 전후 사정을 모르는 어떤 측에선 잠적했다고 한 거지요』
 
  여기서 지난 8월8일자 신문에 못 나갔던 「김대중 칼럼」을 全載한다. 첫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고, 둘째는 이것이 어쩌면 후에 역사적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검찰이 나를 소환하는 표면상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일보사 계열사의 주식에 관해 이름을 빌려 줬는지의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회사에서 빌린 「가불」이 혹시 社主들의 비자금 루트나 탈세의 방법이 아닌지를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1993년부터 조선일보 주식의 0.5%를 갖고 있다.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고, 또 社主나 누구의 명의를 대신해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알기로는 역대로 신문사 임원들이 회사에 「참여」한다는 취지로 재임 동안 그들끼리 물려 주고 물려받는 것이다. 일종의 임원사주조합 같은 것이다. 그것이 차명인지 명의신탁인지는 법이 판가름해 줄 것이다.
 
  「가불」에 대해서는 나는 개인 사정으로 회사에서 돈을 빌렸고 지금도 월급의 4분의 1이 매월 공제되고 있다. 회사가 소득세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돈을 빌린 사람이 알 바가 아니고 간여할 일도 아니다.
 
  이 정도의 사정과 내용은 기왕에 소환돼서 조사받은 조선일보 경리책임자들에 의해 검찰에 충분히 설명돼 있다. 그럼에도 검찰이 굳이 나의 출석을 요구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믿는다. 나를 불러서 사진 찍히게 하고 일부 언론들이 마치 나를 무슨 범죄자인 양 (이미 친여적 매체에서는 「공범」 운운하고 있다) 다루게 해서 언론사 세무조사가 「언론」의 문제가 아니라 「탈세」의 문제인 것으로 덮어씌우려는, 그리고 金아무개도 결국 남을 비판할 인물이 못 되는 인간으로 치부하려는 저의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는 나로서는 검찰의 그런 저의에 장단을 맞춰 줄 수가 없다. 내가 이번 사건의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당연히 국민의 한 사람으로 공권력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그런데 검찰로서도 「확인」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상황에서 명색이 조선일보의 논조를 책임지고 있고 또 칼럼을 쓰는 현직을 소환하는 데는 전체 기자의 자긍심으로라도 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글을 「反개혁적」으로 써온 잘못이 있고 이 정권의 구미에 맞지 않는 논설들을 써온 죄가 있다. 이 마당에서 두 가지를 밝혀두고 싶다. 국세청 세무조사가 한창이던 지난 4월쯤 조선일보의 경영진은 「金大中 주필과 柳根一 주간을 인사조치하면 일이 잘 해결될 수 있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 제의를 거절했다. 내가 지난 칼럼에서 조선일보가 「고통」받고 있는 것은 조선일보의 논조와 필진 때문이라는 것을 토로한 근거가 거기에 있다. 또 하나, 내가 검찰출두에 응하지 않고 서면조사를 요구한 뒤 조선일보 쪽에 「협박」이 왔다. 金아무개가 끝내 출석하지 않으면 고발되지 않은 조선일보의 다른 사람들을 옭아넣겠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내가 조선일보를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언론사태의 본질을 다른 것으로 호도하려는 간교함에 대한 나의 저항이다. 나의 下車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으면 안 쓰는 것이 옳다는 신념 때문이다. 나는 이 정권이 정해놓은 언론탄압의 시나리오대로 이끌려 갈 수 없으며 저들이 위장으로 깔아놓은 「탈세의 멍석」 위에서 춤출 수 없다. 이것은 오로지 나만의 결정이다.
 
  오늘부터 나는 기자도 아니고 조선일보 주필은 더더욱 아니다. 이제 검찰은 나를 얼마든지 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의 참고인 자격 출석요구에는 결코 응하지 않겠다. 나에게 또 이상한 「죄」를 씌워 그동안 검찰이 흘리고 일부 언론이 맞장구쳤던 「피의자 신분」으로 만들어 불려간다면 그것은 도리가 없다.
 
  다만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옭아넣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일부 親與 쪽에서는 내가 남모르는 「여죄」가 있어 미리 이러는 것이라고 모함할 것이다. 이미 항간에는 나와 관련한 온갖 지저분한 루머가 퍼져 있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누가 왜 그러는지 안다.
 
  36년 기자의 마지막 칼럼을 개인 신변에 관한 글로 마감하는 것이 아쉽지만 이것이 결코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독자가 받아 줬으면 한다. 이 정권은 마침내 성공했다. 비판신문의 대주주도 구속하게끔 됐고 그 신문사 주필의 펜도 꺾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조선일보에는 「펜」이 수백 개가 있다는 것을.>
 
 
  『항복하면 안 된다』며 일제히 반대
 
 
  ―그런데 어떻게 회사에 다시 나오게 됐습니까?
 
  『그후에 회장(方又榮)과 사장께서 사람을 보내서 만류도 하고, 그런 와중에서 사장이 구속되면서, 「내가 없는 동안에 신문을 계속 만들어 줘야 할 게 아니냐」고 해서 나오게 된 겁니다』
 
  이 무렵의 얘기를 安秉勳 부사장으로부터 들어보면 조선일보 內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내가 金주필한테 그랬어요.
 
  「당신이 저쪽하고 짰느냐. 저쪽의 목표가 당신하고 柳根一하고 趙甲濟인데, 그만 둔다면 그 목표에 적중하도록 해주는 거 아니냐」
 
  며칠 후 金주필을 나오게 해서 논설위원들하고 저녁을 했는데 내가 충격을 받았어요. 논설위원들이 「지금 주필이 뭐하고 있는 거냐」고 일제히 달려들어 공격을 하는 데 참 놀랬어요. 2차를 갔는데, 정치부 기자들이 쫓아와 가지고 「주필은 주필대로 투쟁한다고 하는데, 이건 조선일보가 손들었다고 한 선언문 아니냐」고 일제히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金주필이 나와서 저렇게 근무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물론 「일제히 공격」한 것은 金주필과 조선일보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공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회사 내의 戰意가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구호였을 것이다.
 
  다시 金주필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난 번에 사장을 먼저 인간탐험을 하라고 하셨는데.
 
  『한국의 언론사 社主들이 대체로 언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서 언론사 책임자가 된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1964년에 方一榮 고문, 方又榮 회장, 이분들은 언론윤리위법 파동 때 신문인협회에서 부표를 던지게 함으로써 진정한 언론인의 반열에 서게 되셨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때 그분들은 언론과 권력의 관계에서 분명히 입신할 수 있었지요.
 
  方相勳 사장에게는 지금이 진정한 언론인으로 입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데, 그런 면에서 올바르게 처신하고 있어서 잘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어떤 점에서 잘하고 계십니까?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감옥 갈 각오를 하고, 감옥에 가서도 아주 늠름하게 버티고 있으니까요. 만약 아무개를 자르라고 했을 때 잘랐다면 지금 어떻게 됐겠어요. 우리가 볼 때 언론자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저렇게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게다가 저쪽에서 횡령혐의를 걸었는데 그걸 인정해 버리면 풀려나올 수도 있을 텐데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거든요』
 
  ―他社의 사장들도 감옥살이를 잘 하고 계시잖아요.
 
  『우리 사장은 회사의 간부들한테 일절 면회를 못 오게 하고 있어요. 특히 安부사장, 나, 邊龍植 편집국장은 절대로 오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리고 있어요. 우리가 면회를 가면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무슨 지시를 한 것으로 오해받을까봐 그러는 거지요. 회장(方又榮)께서 한 번 면회를 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나왔는데, 사장은 작은 아버지(회장)가 오시면 稱病(칭병)하고 안 나오겠다고 한대요』
 
  ―金주필 소환문제가 나왔을 때, 어디서 퍼뜨렸는지 모르지만 현대와 대우에서 돈을 받은 게 드러났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내 전화 다 도청당하지, 내 방에도 도청장치가 있을지 모르지. 그런데 내가 남한테 구린 일이 있었다면 온전하겠어요. 나는 現代의 鄭氏들하고는 鄭夢準씨 이외에는 인사도 없어요. 大宇의 金宇中씨야 알지만 외국 나간 지가 언제요. 없어요. 그런 일 절대로 없어요.
 
  또 내가 대한생명의 崔某씨한테 뭘 받았다고 한다는데 난 그 사람하고는 一面識이 없어요. 내가 뭐 거기 헬스 클럽 멤버십을 가지고 있다나. 나는 헬스 클럽이고 골프장이고 멤버십 한 개도 없어요』
 
  ―참 골프는 왜 안 배우셨어요. 미국 가서도 배울 기회가 많았는데.
 
  『신문기자로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 운동이고. 아니할 말로, 지금은 안 그렇지만, 초기에는 기자들이 제 돈 내고 골프치는 거 본 일이 없어요. 난 그런 꼴 못 봅니다』
 
  그는 골프 대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산에 오른다. 조선일보 山友會 회장을 맡고 있다. 山岳會란 이름을, 岳은 무슨 岳이냐면서 友로 바꿔 山友會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다운 생각이다.
 
  ―사표 내실 때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신문기자 그만두고도 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글쓰는 자리를 벗어나면 이런 유의 글은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가령 에세이를 쓰거나, 또는 전기를 쓰거나, 또는 소설 같은 걸 써본다든가』
 
  ―주필의 글을 보면 문학적인 센스가 대단하거든요. 정말 써 볼 생각입니까?
 
  『소설은 써 볼 생각을 했었지요. 자전적인 소설을 써 볼 생각이었지요. 김훈씨가 쓴 「칼의 노래」를 보니까 그 사람은 어휘가 참 풍부했어요. 저널리스트에서 작가가 된 사람은 그리 많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창작적 소설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서울高 영자 신문 편집인
 
 
  ―학교 다닐 때 문예서클에서 활동하셨던가요?
 
  『서울고등학교 다닐 때, 다른 학교 학생들과 만든 문예서클에서 활동했지요. 경기, 경복, 이화, 경기여고, 이런 학생들과…. 그때 타블로이드판 네 장짜리 회보를 등사로 밀어서 만들었지요. 거기에 작품도 써서 발표하고. 그때 난 산문을 썼어요. 서울高에서 난 그때 영자신문 편집인으로도 일했지요』
 
  그는 서울高를 1958년에 졸업했다.
 
  ―대학을 5년 간(1958∼1963) 다니셨네요?
 
  『대학교 2학년 때 1년간 묵고, 1년 아래 애들하고 3학년을 올라갔지요. 그때 폐병을 앓았어요. 또 가정환경도 별로 안 좋았구요. 아버지도 돌아가시구. 아르바이트도 했고』
 
  ―문학적인 기질, 취향, 이런 건 누구한테 영향을 받았습니까?
 
  『우리 형(金世中·64)한테 영향을 받았지요. 형이 성균관大 불문학과를 다녔는데, 중고등학교 때도 문학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나도 형의 책을 밤에 몰래 빼다봤는데, 월북 문인 金起林의 작품, 또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이런 걸 심취해서 읽었지요. 형이 그런 걸 못 보게 해서, 형이 잠든 사이에 밤을 새워 읽고 그 자리에 꽂아 놓곤 했지요. 그 형이 참 못 됐어요. 그런 걸 안 빌려 줬어요』
 
  ―서울사대부속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셨나요?
 
  『사대부속을 같이 다니다가 6·25가 터져서 나는 김천으로 피난 가서 開寧초등학교를 나왔어요(1952). 그때 戰時연합고사를 봤는데 그 점수를 가지고 서울중학에 가서 합격했지요』
 
  ―그 시골에서 대단한 일을 하셨네요.
 
  『그때 내가 거기서 1등으로 졸업해서 금릉군수상을 받았는데…』
 
  그는 아버지 金容玉(1959년 작고)씨와 어머니 李乙順(85)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光山.
 
  ―아버님은 무얼 하시던 분입니까?
 
  『일제시대에 와세다 대학을 다니셨는데, 일본에서 무슨 노조운동을 하시다가 중퇴해가지고, 귀국해서도 요시찰 인물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제과업도 하시고, 동대문에서 상회를 하면서 상인연합회 회장도 하셨는데, 광산에 손을 대고서 크게 실패하셨어요』
 
  ―초등학교 때 서울에 경기중학이 있다는 건 아셨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때 김원규 교장의 교육방침을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그때 우리는 서울엔 서울중학 말고는 학교가 없는 줄 알았어요. 그 바람에 그냥 서울중학을 간 거지요』
 
  ―법대는 왜?
 
  『우리 아버지가 訟事(송사)에 많이 시달리셔서 나한테는 꼭 법대에 가서 판·검사가 되라고 하셔서 법대(서울대 법대 행정학과)로 진학하게 된 겁니다(1958). 사실 나는 미술대학에 가려고 그랬어요』
 
  ―미대에?
 
  『고등학교 때 난 미술반에서 활동했거든요』
 
  ―그래 뭘 그려봤어요?
 
  『아, 그럼, 난 그림 많이 그렸어요. 미술 선생님이 나한테 그쪽으로 나가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기도 했어요. 하여튼 법과대학은 가기 싫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가 우리 집안에서 고시 패스할 놈은 너밖에 없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우리 집안의 대표주자로 간 거지요』
 
  ―고시 봤다가 떨어졌습니까?
 
  『난 시험은 한 번도 안 봤습니다』
 
  ―아버님이 얼마나 섭섭하셨겠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셨거든요.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고시를 보라구 그러셔서, 할 수 없이 보따리를 들구 광릉에 있는 절에 갔는데, 가서도 법률서적은 한 권도 안 읽었어요. 그때 내가 성경을 다 읽었습니다. 그러다 돌아왔지요』
 
 
  『우리 서로 위선적으로 하지 맙시다』
 
 
  내가 金주필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옆 방에 있는 柳根一(63) 이사 논설주간이 불쑥 들어왔다. 그러자 金주필이 얼마 전에 있었던 얘기를 柳주간에게 했다.
 
  정부요직으로 새로 임명받은 사람이 조선일보에 취임인사를 왔을 때의 얘기였다. 언론사태와 관련이 있는 고위 관리였다.
 
  『부사장하고 편집국장하고 나하고 저기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인사하러 왔어. 그래서 나는 일어나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어요. 그랬더니 명함을 내밀길래 일어나서 그걸 받았지. 그러곤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길래 딱 뿌리치고 그냥 앉아 버렸어요. 그랬더니 그쪽에서 「앞으로 한 번 뵙겠습니다」 해서 내가 「우리 서로 위선적으로는 하지 맙시다」 해버렸어. 내가 뭐 이 나이에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살아. 또 누가(다른 관리) 인사왔을 때 내가 문 닫아 걸었다고 뭐라고 한다며?』
 
  柳주간이 대꾸했다.
 
  『나는 그 사람이 왔길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했더니 눈을 찡긋하대. 또 누가(다른 관리) 왔길래 주필 방에 데려다 준다고 와서 문을 열어 봤더니 잠겨 있더라구』
 
  여기서 비슷한 톤의 칼럼을 번갈아가며 쓰는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모르는 척하고 이렇게 물어봤다.
 
  ―金주필의 장점은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글을 잘 쓴다는 것인데, 혹시 본인의 단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나는 이 질문을 하고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거침없이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못됐지. 잘난 척하고. 지랄같지!』
 
 
  윗사람한테 대드는 성격
 
 
  하여튼 金주필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독특한 성격」에 대해 異口同聲으로 입을 모으며 즐거워한다. 그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여러 차례 그의 直擊彈(직격탄)을 맞은 경험을 갖고 있는데 경험자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아픈 감각으로보다는 참 웃긴다는 기억의 공감대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 그의 「못된 성격」을 얘기하면서 이건 경험자만이 알고 있는 것이라는 웃음을 내비쳤다.
 
  사실 나는 金주필과 인터뷰하기 며칠 전 柳根一 조선일보 논설위원실 이사주간을 비밀리에 만나 경험자가 말하는 즐거운 경험을 즐겁게 들었다.
 
  柳주간은 1980년대 중반부터 논설위원실에서 金주필과 함께 일했으니 서로 속속들이 아는 사이가 됐다.
 
  『金주필이 윗사람한테 대드는 증세가 있더군요. 金주필이 정치부장으로 있을 땐데 누가 의원세비를 인상하면 안 된다는 사설을 썼어요. 그런데 金주필이 당시 논설위원실 책임자한테 올라와 따지더군요. 「가뜩이나 군사정권에 의회가 눌려 있어서 의원 신분이 위축되고 있는 판에 의원들을 고무해 줘야지 이런 식으로 때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지는 거요.
 
  그때까지 편집국 부장이 논설위원실에 올라와 따지는 경우는 감히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보다 윗사람한테 고분고분하지 않은 점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후에 논설위원실에서 같이 일하면서 보니까 표현방법이 공격적이어서, 따다다닥 하고 붙어서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토론을 위한 의도적인 설정
 
 
  ―그런 걸 보실 때 참 당황하셨겠어요.
 
  『상당히 어려웠지요. 처리불능이야, 관리불능! 같은 방에 있으면 서로 관계설정(Modus Vivendi)이 돼야 하는데, 金주필하고는 대책이 안 서더라구요』
 
  ―어떤 점에서요?
 
  『논설위원실에 왔는데, 회의시간에 자꾸 충돌이 되더라구요. 회의에 내가 이런 의견을 내놓잖아요. 그러면 본인도 뻔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은 어깃장을 놓는다구요. 인간 金大中의 대화의 방식은 일단 노(No)로 시작해요. 하여튼 회의 시간에 천장이 떠나갈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일이 흔했죠』
 
  ―그래 어떻게 풀었습니까?
 
  『뭐, 슬금슬금 저절로 풀렸지』
 
  ―저도 조선일보 출판국에서 근무할 때 金주필을 국장으로 모시고 일했었죠. 그때 주필이 조선일보에 기명 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자기가 쓰고 싶은 테마를 가지고 와서 우리한테 던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의견을 내면 그걸 정면으로 박살을 냅니다. 그럼 우리랑 언쟁이 붙어서 난리가 푸석 나죠. 그때 어떤 부장은 성질이 나서 씩씩거리며 세상에 벼슬이 낮다고 이럴 수 있느냐고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잦았어요.
 
  저는 그때 저 양반이 저렇게 억지 주장을 하는데, 저 내용을 그대로 칼럼에 썼다간 내일 아침에 무슨 일이 나겠다고 걱정을 하곤 했는데, 아침에 신문에 난 걸 보면 아주 매끄럽게 잘 쓴 겁니다. 그걸 보고 우린 또 속았다고 하고 말았죠.
 
  『글쎄, 그렇다니까! 그게 희한하고 재미있는 거라. 뭔지 모르겠어요. 이게 토론을 위한 의도적인 설정인지! 아마 그것보다 성격일 거요.
 
  金주필의 성격 가운데 특징적인 것이 한 치라도 지는 걸 싫어하는 거요. 그리고 샘이 아주 많아요. 옆에 스타가 있으면 참지를 못해요. 현장에서는 항상 주인공이 돼야 하지요』
 
  ―사장이나 부사장한테 그런 식으로 『노!』 하고 나오면 받아 주나요?
 
  『그럼요. 조선일보가 대단한 회사지! 엄청난 회사지! 그런데 우리나라가, 金大中 정부가 그걸 못 받아 주는 거야! 그래서 조선일보가 정말 대단한 회사라는 걸 거듭거듭 느껴요. 바른 말 콩콩 하며 대들고, 뻔한 얘기를 아니라고 부정하고, 권위에 저항하고, 그러면 목 치고 싶은 생각이 있을 거 아녜요. 그런데 그걸 다 받아 주고 있거든요』
 
  安秉勳(63)부사장은 金주필과 조선일보 견습기자 동기(8기)로, 조선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이며, 金주필과 역할분담을 해가며 회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또 둘은 라이벌 관계에 있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金주필이 위만 보면 치받는다는데요.
 
  『뭐, 위 아래 다, 하하…』
 
  ―부사장께도 金주필이 「노」 하고 나옵니까?
 
  『나한테도 마찬가지지만, 저 양반이 나는 힘이 없는 걸 아니까 협조적이지요. 내가 글을 안 쓰니까. 글을 같이 썼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훌륭한 점은?
 
  『신문기자도 사람인데, 남을 비판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요. 그런데 金주필은 항상 신문을 택해요. 金泳三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金주필과 식사를 했대요. 앞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겠다면서 賢哲씨를 청와대에 데려가 살겠다고 했는데, 金주필은 그걸 듣고 돌아와서 당장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이튿날 신문에 호통을 치며 반대했어요. 그래서 YS가 뜻대로 못했던 겁니다. 이렇게 하기가 우리로선 참 힘든 일인데 주필은 갈림길에선 그걸 무릅쓰고 항상 신문을 택해요. 신문기자로선 잘하는 거지만 인간적으로는 마이너스로 볼 수도 있는 거거든요』
 
  ―사장실에서 회의할 때도….
 
  『주필은 말을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지요. 일단은 반대하고 보는 거지요. 버릇이 딱 치고 들어가지요. 비판도 하고 칭찬도 해야 하는데, 주필은 칭찬에는 인색하지요』
 
  金주필에 대한 이런 말을 들으며, 나는 金주필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의 「못된 점」을 얘기하면서도 그점까지도 사랑하는 듯한 표정과 어투로 말했던 것이다.
 
 
  『다른 조직 같으면 모가지 날아갔을 것』
 
 
  그래서 나도 金주필에게 한 마디 했다.
 
  ―金주필께서 회의석상에서 사장의 의견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는 경우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내가 신문기자를 선택한 이후, 이런 점에 있어선 이 직업을 잘 택했다고 생각한 게 세 가지요. 하나는 「빽」이니 「와이로」니 하는 걸 쓰지 않고도 자기가 열심히 하면 자기 몫을 찾을 수 있다는 것 하고, 둘째는 자기가 社內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조직에서 누가 나처럼 얘기한다면 벌써 모가지가 날아갔을 거요.
 
  세 번째는 돈하고 큰 연관을 짓지 않고도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만족하는 까닭입니다』
 
  ―조선일보 주필 안 하시면 어디서 불러가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는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세상에, 부인(金文子·62)이 金주필의 이런 명성(?)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회사 분들하고 함께 하는 모임에 참석했는데 어떤 분이 저한테 와서 「저렇게 까다로운 분하고 어떻게 사느냐」고 참 안 됐다는 듯이 말씀을 하세요. 저는 그때 깜짝 놀랬어요. 집안에선 전혀 까다롭지 않거든요. 저는 그런 거 모르고 살았어요. 집에 오면 얘기도 잘 안 해요. 또 집에 있는 시간도 별로 없으니까 까다롭게 할 시간도 별로 없구요』
 
  하긴 그래야 살겠지 싶었다.
 
  ―金주필께선 대학교 2학년 때 병 걸리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러면서 좌절감 느끼지 않으셨던가요?
 
  『그 전에 내가 월드비젼이라는 데서 근무하는 미국 여자한테 한국말을 가르쳤는데, 그러면서 내가 병이 나니까, 그 부인이 나를 많이 도와 줬어요.
 
  지방에 가서 방 얻어가지고 살면서 약도 먹고 책도 읽고 했지요. 그 후에 완치돼서 복학해가지고, ROTC 교육을 받고 장교로 가게 됐습니다. 군대 가서도 2군단 사령부 비서실에서 통역장교로 일했습니다』
 
  서울대 법대에 복학해서 그는 횡재를 했다. 그는, 동급생이던 金光雄(61·중앙인사위원장)이 한 학년 높아지는 바람에 1년 먼저 배운 노트를 빌리러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있던 친구의 집에 자주 들르게 됐다. 거기서 경기여고를 나와 梨大영문과에 다니고 있던 그 친구의 누님(金文子, 본관 羅州)을 만났던 것이다. 金文子-金光雄 남매는 연년생으로 동급생이었다. 그들 동갑나기 연인들은 무려 8년 간이나 열애한 끝에 1968년에 결혼했다. 그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할 때였다.
 
 
  「양창선 매몰사건」으로 이름 날려
 
 
  그는 1965년 조선일보 견습기자 8기로 입사했다.
 
  『나는 기자가 자유직업이라는 게 좋았어요. 아침에 8시 출근하고 저녁 6시 퇴근하는 그런 직업이 아니라, 밤에도 일할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또 외신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게 도움이 많이 됐던 거 같아요. 밤에 혼자 차분히 앉아서 공부도 많이 했고. 견습을 포함해서 1년쯤 거기서 있었지요』
 
  그가 외신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 그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는 거기서 세계를 보았고, 국내신문과는 다른 기사를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스타일의 기사를 쓰려고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사회부 병아리 기자로 일할 때 충남 청양 구봉광산에서 양창선씨 매몰사건이 일어났는데(1967년 8월), 그때 그는 발군의 기사를 써서 일약 유명한 기자가 됐다.
 
  ―기사를 어떻게 썼길래요?
 
  『양창선의 입장에서 기사를 썼지요. 나는 지금 배가 고프다, 뭘 먹었다, 이런 식으로』
 
  ―보지도 않고요?
 
  『그때 전화를 통해 조금씩 통화가 됐거든요. 그 대화를 줄거리로 해서 바꿔 쓴 거지요』
 
  金大中 사회부 기자는 양창선씨가 구출되기까지 15일 간을 그곳에 머물며 기사를 보냈는데, 당시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발군의 기사를 계속 보내서 조선일보의 성가를 드높였다고 기억한다.
 
  그 일을 계기로 金大中 기자의 文名도 높아졌고, 社內 위치도 달라졌다고 한다. 본인은 부정하지만 그 일로 정치부에 스카우트돼서 가게 됐다고도 하고, 후에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탁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됐다고도 한다.
 
 
  金大中과 金大中의 만남
 
 
  그는 정치부로 가서 야당 정치인 金大中 의원을 만나게 됐다. 金大中과 金大中의 만남이었다.
 
  ―金大中이란 이름은 누가 원조입니까?
 
  『우리가 처음 만난 건 1968년이었어요. 내가 당시 안국동 네거리에 있던 新民黨을 출입하고 나서 한 달쯤 지나서였어요. 어느 날 기자들이 「야! 金大中 기자 이리 와 봐」 그래요. 가서 보니 당사에 젊은 정치인 金大中 의원이 와 있더라구. 기자들이 「이름도 같은데 잘 해보라구」 그래요.
 
  그래서 내가 「내가 金大中이란 이름을 30년간 가지고 있고, 金의원은 이름을 바꾼 지(金大仲에서 金大中으로) 10년도 안 됐으니, 이름으로 따지면 오리지낼리티는 저한테 있는 겁니다」 그랬지요.
 
  그런데 DJ의 순발력이 대단했어요. 이러는 거요. 「그건 金기자가 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원래 내 호적상의 이름이 金大中입니다. 그후 인변(人)을 붙였다가 다시 원래로 돌아간 겁니다. 그러니 내가 金大中이란 이름을 먼저 가지고 있었고, 또 더 오래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호적을 조사할 수는 없잖아요. 이게 DJ와의 첫 대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야당을 출입할 때인 1970년 金大中 기자는 金大中 대통령 후보와 캠페인 차를 같이 타고 동행하게 된다.
 
  ―그때 金大中 기자가 金大中 후보 연구를 철저히 했겠네요.
 
  『그렇지요. 그때 우리 젊은 기자들은 金大中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었지요. 40代 기수론을 만들고 그걸 막 밀어붙인 게 당시 젊은 기자들이었지요』
 
  그 후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1972년에 그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령받아 미국으로 갔다.
 
  『내가 워싱턴에 갔더니, 金大中씨가 거기 와 있잖아요. 하루는 그가 뉴욕 타임스에다 글을 썼는데, 「이 부도덕한 한국의 독재 정권을 지지해 주면 안 된다. 미군을 철수시키고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건 좋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나라가 북한한테 망하지 않느냐」 그러다가 「東京 갔다와서 다시 만나서 얘기합시다」 했던 건데, DJ가 東京에 와서 납치당한 겁니다』
 
 
  金大中 정부 입각설의 眞相
 
 
  ―金大中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입각해 달라고 요청을 했었다던데, 그때 입각했더라면 金大中 대통령에 金大中 장관에, 참 국민들이 헷갈릴 뻔했습니다.
 
  『선거 막바지에, 12월 초인가에, 메트로폴리탄 클럽에서 밥을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자리를 만든 사람이 중간에 나갔어요. 그래서 金후보랑 둘이 밥을 먹는데, 「나도 한번 할 때가 안 됐는가, 金동지가 한 번 도와달라」 이러면서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 하더니 안 하더라구요.
 
  그 일이 있은 후에, 주선했던 사람이 물어요. 「DJ가 아무 말 안 하던가요?」 「조선일보가 밀어달란 얘기 하던데」 「사실은 DJ가 그날 金주필한테 입각을 제안한다고 해서 만난 겁니다. 처음엔 공보처 장관 얘기도 나왔는데, DJ가, 에이 그 사람은 그거 가지고는 안 돼. 통일원 장관은 줘야 할 걸. 이런 얘기를 하셨는데요」 이러는 겁니다』
 
  실은 그 사람이 그날 식사가 끝나고 DJ를 모시고 가면서 車 안에서 물었다고 한다.
 
  『입각 얘기 하셨습니까?』
 
  DJ가 대답했다고 한다.
 
  『아니 얘기 꺼내려다가 안 꺼냈어. 꺼내봐야 소용없다는 걸 내가 알았어. 꺼내봤자 내 속만 보일 것 같았어』
 
  金주필은 그때를 회상한다.
 
  『아마 그때 내가 정치에 관여하는 언론인들을 좋지 않게 말하면서, 「나는 그런 일은 안 합니다」고 했나보지요』
 
  ―당선된 다음엔?
 
  『청와대 가서 두 번 만났는데, 그런 얘기는 없었고, 관저에 가서 단 둘이 밥을 먹을 때 햇볕정책 얘기가 나와서, 왜 조선일보가 햇볕정책에 대해 반대하는가를 설명했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대통령과 햇볕정책에 대해서 장단점을 논의할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조선일보가 그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대통령의 對北정책에 큰 차질이 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조선일보는 떠들어라. 나는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이렇게 하겠다 하면, 조선일보가 뭣 땜에 끝까지 방해를 하겠습니까? 조선일보는 햇볕정책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다는 걸 안고 끌고 가십시오. 대통령께선 全언론이 똑같이 지지하는 방향으로만 몰고가려고 하십니까. 반대하는 신문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대통령이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대통령께서 언론문제를 놓고 그렇게 강공으로 나갈 까닭은 어디 있는 겁니까?
 
  『글쎄 내가 아는 DJ는 절대 이렇게 안 한다는 겁니다. 자 보세요. 임기를 1년 반쯤 남겨놓고 할 일도 많은데, 왜 언론과 승부를 가리려고 하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뭐가 있는 게 아닌가. 대통령의 총명이 흐려진 건가. 노벨 평화상 받을 때 우리가 기자를 안 보내서 틀어졌나. 金正日 방문시 분위기 조성에 문제가 있어서 그랬나』
 
  ―조선일보를 비롯한 메이저 신문사들이 탈세를 많이 했다고 했는데, 좀 그런 일이 있는 겁니까?
 
  『크게 보고 말하자면 과거의 정권들이 자기들의 정당성이 부족한 나머지 언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회유하고, 협조를 얻기 위한 과정에서, 언론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게 있어요. 예를 들면 보급소에 오토바이를 사주는 거, 또 임원들에게 주식을 영점 몇 프로씩 나눠 줘서 거기서 나오는 배당 이득으로 식당운영에 좀 보태는 거, 사장 집의 기사나 경비원 봉급을 회사 돈으로 주는 거, 이런 게 다 계좌가 달라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지요. 또 내가 가불을 해간 것도, 은행에서 빌려 줘야지 회사 돈으로 주면 계좌가 틀려서 위법이라는 거지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과거에 털리지를 않아서 그 위에서 잔 거지요. 이번에 그게 다 지적된 거지요. 그게 몇 십억 된다는 건데 곱하기 5년 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또 스포츠조선과 조광인쇄주식회사를 증자하면서, 안에 있는 돈으로 했다는 게 지금 거론되고 있는 횡령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장은 돈을 만진 적도 없고, 갖다 쓴 적도 없고, 그냥 거기 있는 건데, 그게 어디 횡령이냐고 주장하고 있는 거지요. 그게 지금 법률적인 쟁송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겁니다. 이제 앞으로는 우리 언론이 이런 쟁송의 대상이 아예 없도록 고쳐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또 한 번 跳躍
 
 
  ―당시 워싱턴 특파원은 고참기자가 가서 즐기는 자리처럼 생각됐는데, 젊은 기자가 어떻게 발탁되셨나요?
 
  『그건 회장님(方又榮, 당시 사장)한테 가서 여쭤봐야 돼요. 내가 생각해보면, 첫째 내가 영어를 좀 했다는 게 뽑힌 이유가 될 수 있지요. 그때는 회화를 하는 기자들이 많지 않았어요. 회사에 가끔 외국 사람이 오면 내가 사장실에 불려 올라가 통역을 했거든요.
 
  둘째는 그때까지는 워싱턴에 기사를 많이 쓰지 않는 기자를 보냈는데, 이제는 그런 것에서 탈피해야겠다고 회사의 인식이 바뀌어서 내가 견습 출신으로 워싱턴에 처음 간 것으로 압니다』
 
  그때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던 각 社의 고참 기자들이, 金大中 조선일보 특파원의 맹활약에 진땀을 많이 흘려서, 지금도 그때 시달리던 얘기가 종종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웬 낯선 젊은이가 평화로운 無風地帶에 뛰어들어 날뛰는 바람에 平地風波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金주필은 지금도 당시의 선배 특파원들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
 
  『그분들 때문에 내가 일을 많이 하게 됐지요. 그분들은 권위가 있어서 당시 駐美대사(金東祚)도 마음대로 만날 수 있었지만, 우리 젊은 기자들은 슬슬 따돌리고 그랬거든. 그래서 악이 받쳐서 달려들어 파고들었지』
 
  ―어떤 사람은 金주필이 워싱턴 특파원을 너무 오래 했다고 하던데요.
 
  『예, 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가자마자 닉슨 독트린,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었지. 그것으로 새 대통령이 들어섰지, 카터가 들어와서 주한미군 철군 계획이 있었지. 코리아게이트(박동선 사건) 사건이 또 터졌지, 이렇게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런 사건이 다 끝나고 1979년에 6년 6개월 만에 돌아왔습니다』
 
  ―웬 기사를 그렇게 많이 보내셨습니까?
 
  『그때 지면이 제한돼 있었는데도 내가 기사를 많이 보냈고 또 많이 실린 게 사실이지요. 그렇게 된 데는 당시 편집부장이던 裵宇城씨하고 호흡이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양반은 항상 시내판 톱을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나하고 무슨 대화를 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영락없이 새벽 한 시쯤이면 워싱턴에서 전화가 오더라는 거요. 裵부장은 내 기사만 오면 톱으로 올렸다고 해요. 신문을 새롭게 만들어 보자는 편집자들 덕을 내가 많이 본 거지』
 
  ―그 당시엔 기사 보내기도 어려웠지요?
 
  『그렇지요. 200자 원고지로 30장씩의 기사를 매일 썼는데, 이걸 로마자로 일일이 다 바꿨어요. 예를 들면 「나는」 하면 「NANEUN」으로 고쳐서 그걸 펀칭해서 보냈지요. 그럼 서울서 이걸 받아서 다시 우리 말로 풀어 썼지요』
 
  金大中의 이름이 매일같이 조선일보 지면에 등장하니까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金大中이 정치 안한다고 하더니 워싱턴에 가서 기자가 됐나보다 하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해요』
 
  金주필은 워싱턴 특파원을 끝내고 돌아와서 있었던 후일담을 기억해냈다.
 
  『DJ와 기자들이 함께 있는 자리였는데, 기자들이 물었어요.
 
  「그동안 당신이 덕을 봤습니까, 金大中 기자가 덕을 봤습니까?」
 
  역시 DJ는 순발력이 있어요. 「내가 묶여서 정치를 못할 때는 金大中 기자의 덕을 봤고, 내가 풀려서 활동할 때는 金기자가 내 덕을 좀 봤겠죠」 그러더라구』
 
 
  記事에 생명 불어넣은 社會部長
 
 
  金大中 기자가 워싱턴에서 돌아와서 (1979년 3월) 외신부장으로 1년 있다가 사회부장이 돼서(1980년 3월)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
 
  1980년 5월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5월24일 서울의 신문 방송 사회부장단은 光州로 함께 내려가서 외곽지대인 화정동에서 소요사태에 휩싸인 光州를 멀리 바라보다가, 당시 光州에서 취재중이던 徐淸源, 李榮培, 朴來明, 曺光欽 네 기자를 잠시 만나고 서울로 돌아왔다.
 
  다른 社의 사회부장들은 돌아와서 아무도 기사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金大中 부장은 이튿날 사회면 머리 기사로 『「無政府 상태 光州」 1週』라는 제하의 기사를 써서 그가 본 현장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에게 이 기사를 보여 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문제가 된 기사지요. 그때 光州에서 돌아와 기사를 썼는데, 계엄당국에선 이른바 시민군을 「폭도」라고 쓰라는 겁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버티다가 그래도 기사가 안 나가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딱 한 번만 「난동자」라는 말을 쓰고, 나머지는 다른 말로 바꾸거나 아예 주어를 생략해서 기사를 내보내기로 한 겁니다. 그 당시에 그 정도의 기사가 나간 게 아주 대단한 일이었는데, 그 후에 「왜 난동자라고 했느냐」고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됐지요. 그러니까 안 써도 그만인 기사를 그래도 나는 상황을 전달해야 된다면서 썼다가 당한 셈이지요』
 
  당시 정치부장이었던 安秉勳 부사장도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光州 사정을 몰랐던 서울의 분위기는 어쩔 수 없이 계엄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도 金大中 사회부장은 「폭도」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우겨댔어요. 편집국 內에선 솔직히 金부장이 현장에 갔다 와서 감정에 치우쳐가지고 판단을 잘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분위기도 있었어요. 사실 그때 金부장이 우기고 주장해서 그만큼 기사를 낸 건 당시로선 엄청난 일이었어요』
 
  그는 또 아주 특이한 사회부장이었다. 삭막한 六何원칙만 있는 사건 기사에 감정을 불어 넣어 생명이 있는 따스한 기사로 만들어 냈다.
 
  그 한 예가 1980년 10월7일에 있었던 「중랑천 두 어린이 실족사」 사건이었다. 사회부장의 책상에 놓인 기사는 학교 수업을 마친 두 어린이가 폐유가 엉긴 웅덩이에 빠져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 말미에 어린이 두 명이 물에 빠진 잠자리를 살리려다 변을 당했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
 
  金부장은 그걸 보자 눈이 번쩍 뜨여 기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10월9일자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머리 기사가 실렸다.
 
  <7일 오후 4시 학교 수업을 마친 면목국민학교 3년생 세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장안교에서 남쪽으로 100여m 떨어진 중랑천 옆 공터에서 잠시 놀다 가기 위해 구태여 잡초가 뒤엉킨 하천 옆길을 택했다. 朴俊錫군(10, 면목동 648의 3)이 어쩌다가 물에 떨어져 젖은 날개를 퍼덕이는 잠자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살며시 집어내 주었지만 그 젖은 날개로는 날 수가 없어 보였다. 가엾은 생각이 들어 가지고 놀기보다는 집에 보내 주고 싶었지만 그냥 집어 던질 수도 없었다.
 
  어린 마음에 종이배를 만들어 그 위에 실어 물에 띄우면 어디엔가로 가리라고 생각했다. 張文成군(10, 면목동 648의 11)은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종이배를 만든 다음 잠자리를 얹어 물에 띄웠으나 제대로 흐르는 물이 아니어서 종이배는 저만큼서 맴돌기만 했다.
 
  준석이는 풀섶에서 주운 30cm 가량의 쇠꼬창이로 종이배를 밀어 주려고 했다. 한 발이 물가에 빠지는 듯하더니 쭉 미끄러졌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물가에 폐유가 50cm 너비로 괴어 형성된 기름펄이었다. 준석이가 기름펄에 미끄러지면서 깊이 2m의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자 문성이와 신호원(10)은 준석이를 꺼내려고 팔을 내밀었다.
 
  결국 문성이도 준석이에게 미끄러져 빠져 들어가자 당황한 호원이는 살려 달라는 고함과 함께 사람들이 있을 만한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사람들이 달려 왔을 때, 두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폐유가 앗아간 두 소년의 하교길이었다.(하략)>
 
  이 기사를 보고 당시 曺秉喆 편집국 부국장이 극찬을 했다고 한다.
 
 
  『곰 발 같은 손에서 어떻게 저런 글이』
 
 
  1981년 2월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潤相군 유괴 사건이 터지자 그는 사회부장 金大中의 이름으로 3월1일자 신문에 범인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기자수첩의 형식을 빌어 사회면 주요기사로 실어, 독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눈길을 끌었다.
 
  그는 범인에게 타이르고, 감정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으름장을 놓으며, 윤상이를 보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아마 이런 유의 기사도 이전에 있어 본 적이 없는 기사였을 것이다.
 
  당시 金大中 사회부장을 보좌하던 曺然興 조선일보 이사는 이 부분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 양반이 생긴 것두 그렇게 둥글둥글하게 생기고, 손을 보면 곰 앞발처럼 두툼한데, 그 두툼한 손으로 쓰는 글이 어떤 때는 그냥 심금을 울려요. 그런 감성적인 글이 그런 손에서 나온다구요.
 
  그 양반이 사회부장 때는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한번 뒤집어 봤어요. 보통 사람하고 다른 재주가 있어요. 우리가 보통 못 느끼는 섬세한 걸 찾아서 느끼고, 그걸 아주 정확하게 자기 감정으로 표현하는 재주, 우리가 볼 때 참 부러운 재주지요』
 
  ―그 분 마음에 드는 기사 쓰기가 힘들었지요?
 
  이 질문엔 당시 서울시경 출입기자였던 林伯 조선일보 제작국장이 대답했다.
 
  『마음에 잘 안 들지요. 기사가 거기 가면 아주 다른 기사가 돼 나왔으니까. 그때까지의 사회면 기사와는 완전히 다른 기사였지요』
 
  曺이사는 이런 일화를 들려 줬다.
 
  『그 당시 벌써 그 양반이 자가용을 가지고 다녔어요. 그래서 새벽에 일이 끝나면, 모래내, 망원동, 이렇게 기자들을 다 데려다 주고 자기 집으로 갔어요. 그때 음주운전도 참 많이 했지요. 술을 먹으면 운전이 더 잘 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술 안 먹고 야근할 수는 없잖아요. 지금 사장실장하는 宋熙永씨가 그 차 가지고 나갔다가, 사직터널 쪽에서 박아서 망가뜨리기도 하고』
 
  여기서 金주필의 또 하나의 명성이 터져 나왔다.
 
  曺 『그때 돈이 없어서 그랬는지 좀 짰지』
 
  林 『계속 그 얘기를 들어왔지요. 밥을 사도 싼 걸 주로 사줬지요. 마포 철길 밑에 가서 최대포, 고바우집 이런 데 가서 돼지고기 많이 먹고』
 
  曺 『드럼통에 연탄 피워 놓고 구워서 먹는 건데, 그 철판을 우리 팀만 차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섞여서 같이 먹었지요. 어떤 때는 한 철판에 세 팀이 앉아서 먹기도 하고.
 
  이건 장점인데 그 양반이 외부 손님들하고 다니는 집이 전부 싼 집이지요. 누가 점심 먹자고 하면 어디 좋은 데가 있다고 데리고 가는 데 가서 보면 싼 집이야.
 
  신문에 보면 맛있는 집이 나오잖아요. 그 중에서 고급집은 일단 제쳐 놓고, 토속적인 데를 많이 가죠. 우리 회사에서 주필만큼 그런 데를 많이 아는 사람이 없어요. 저 고려대 앞에 청국장 집이 있는데, 반찬도 많이 나오는데 4000원 짜리더라구요. 아마 책을 쓸 정도로 그런 곳을 많이 알고 본인도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맛기행을 쓰는 기자」라는 얘기를 하세요』
 
  林 『또 대식가지요. 먹는 양도 많아요. 또 미식가구』
 
  曺 『아니, 쪼끔 먹는 척하는데, 실은 양도 많아요』
 
 
  暗黑 같던 政治部長 시절
 
 
  그는 정치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3년 가까이(1981년 12월∼1984년 8월) 그 자리에서 일했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정치부장으로 있었던 때가 가장 힘들었던 때지요. 全斗煥 대통령 시절이었지요. 나로선 암흑시대였어요』
 
  ―그 당시 全斗煥 대통령의 미움을 많이 받았지요
 
  『全斗煥 대통령이 金大中이 목 떼라고 했지요. 그때는 나도 몰랐는데, 당시 내 상사가 나한테 문화부장을 맡으라고 하더라구요. 난 사실 문화부장을 하고 싶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알고 난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더니 얼마 있다가 출판국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부국장도 안 거치고 한 단계 건너 뛰어서 국장이 되셨으니 轉禍爲福(전화위복)이 됐습니다. 全斗煥 대통령한테 고맙다고 해야겠군요.
 
  『출판국장으로 있으면서 東西南北이란 칼럼을 또 계속 썼어요. 그런데 어느 대목을 全대통령이 읽은 모양이야. 그걸 보고 「이거 왜 이렇게 써?」 이랬대요.
 
  그래서 당시 공보부 장관이 우리 회장(方又榮)한테 프라자 호텔에서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얘 좀 딴 데로 치우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일보 현대사연구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발령이 났는데(1986년 3월) 글은 못 쓰게 됐다.
 
  여기에도 뒷얘기가 있다.
 
  『社內발령은 「논설위원 겸 현대사연구소장」 이었고 社外발령은 「현대사연구소장 겸 논설위원」이었어요. 왜냐하면 글 못쓰게 하는 곳으로 보내라고 했으니까, 논설위원을 뒤에 갖다 붙인 거지. 이런 걸로 봐도 우리 회장이 나를 참 많이 배려해 준 거야. 「金大中이 논설위원 붙여줘」 그러셨대요. 그런데 글 못 쓰는 논설위원이 책상 앞에 앉아 있어봐야 뭘해』
 
  검투사한테서 검을 빼앗은 꼴이었다. 그래서 그는 英國 옥스포드大 연방연구위원회 특별위원의 자격으로 유학을 떠난다.
 
  ―英國 가서 뭘 배워 가지고 오셨습니까?
 
  『담배 끊어 가지고 돌아왔지요. 혼자 살면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하고 지낸 날이 많았어요. 이 많은 시간을 어떻게 다 쓰나 하면서 살았지요』
 
  말이 유학이지 그때 그는 유배당했던 거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무료했던지 그때 그는 많은 편지를 썼던 것 같다. 나도 그때 몇 통의 편지를 받았으니까.
 
  그가 돌아온 것은 1987년 6월29일, 당시 盧泰愚 민정당대표의 6·29선언이 있었던 이틀 뒤인 7월1일이었다. 정치적 상황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 그는 이사대우 논설주간으로 돌아와 柳根一 논설위원과 함께 東西南北을 격주로 집필했다.
 
  그후 이사 편집국장으로 갔다가(1989년 5월) 이듬해 봄 이사 주필이 되었고, 1998년 전무대우 주필로 승진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全斗煥―차라리 겸손했다
 
 
  ―全斗煥 前 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혹독한 비판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全斗煥씨는 통치자로서의 경험이나 배경, 학문적인 기초가 없이 어떻게 하다가 호박이 넝쿨째 떨어져서 대통령직을 맡게 됐지요. 그래서 그는 항상 부담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나는 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기한테 모자란 부분을 자기보다 경험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 사람 근처에는 외국에서 유명한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갈 수가 없었어요. 미얀마 아웅산 테러에서 숨진 장관들 여섯 명을 보면 세계 최고 명문大에서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그에게는 그런 콤플렉스가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기들만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투사적 경력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보다는, 그는 자기를 더 낮추면서 겸손하게 배우려고 노력한 사람이었지요.
 
  그 사람이 한 통치는 且置(차치)하고라도, 뚜렷한 국가관이나 철학은 없었어도 자기가 대통령을 맡으면서 나라가 혼란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항상 걱정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세무조사하고 계좌추적하고 가족들까지 조사하고 그런 일은 안 했어요』
 
  ―그분한테 곤욕을 당하고 유배를 다녀오셨는데, 매우 긍적적인 평가를 하시네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그렇다 그거죠』
 
  ―인상에 남는 기사는?
 
  『내가 「거리의 편집자」란 칼럼을 쓴 적이 있어요(1984년 11월30일). 내가 그걸 쓰고 나서 외국에서 보내온 편지를 여러 통 받았어요. 자기가 볼 때 기자들이 지금 기사를 제대로 못 쓰고 있고, 무엇인가에 짓눌려 있다는 사실을 가장 실감나게 썼다는 거요. 그래서 그게 기억에 남아요.
 
  낮 12시에 광화문 지하도에 가보면 신문 파는 사람들이 신문사에서 매겨논 기사의 크기와 관계없이 빨간 줄을 쳐가지고 소리치며 판다는 얘기에서 시작되는 기삽니다』
 
  全斗煥 대통령 시절 신문사의 편집자들이 정치적인 압박 때문에 큰 기사도 작은 기사로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신문 파는 사람들이 먼저 알고 다시 키워 놓는다는 얘기였다.
 
 
  DJ―아직도 늦지 않았는데
 
 
  ―金泳三 前 대통령은 어떤 인물인가요?
 
  『YS야말로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정치인이었고, 또 실망했던 대통령이지요.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분명히 내가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金총재께서는 20代부터 정치하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전쟁과 또 전쟁 이후의 혼란을 겪으면서 우리처럼 책상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셨을 겁니다.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만큼 대통령이 되시면, 정치인들이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는 場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이 말은 지금까지 感과 배짱 가지고 정치를 했는데, 대통령이 되면 브레인을 잘 쓰란 말이었지요.
 
  그랬더니, YS가 「아, 그건 金주필이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잘 하겠다」고 그래요. 그 다음에 내가 人事와 외교를 하는 걸 보고 대통령 비서실장한테 「왜 그렇게 졸속으로 하느냐」고 했더니 「金형, 대통령이 얼마나 엄청난 자린 줄 아시오. 모든 정보가 제일 먼저 대통령한테로 갑니다. 장관들이 소관 정보를 알기 전에 대통령한테 먼저 보고됩니다. 그 장관들 만나서, 대통령이, 그거 어떻게 됐어, 하면 그 장관은 절절 매게 돼 있고, 그런 걸 보면서 대통령은 자기가 제일 똑똑한 것으로 착각하게 돼 있습니다」 이래요. 이렇게 되면 그 지도자는 돌아오기 어려운 길로 가게 돼 있어요. 결국은 독단적이고 專橫的인 대통령이 되지 않았습니까』
 
  ―盧泰愚 前 대통령은 무능했다고 하는데요.
 
  『한국의 정치사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그 손이 無色無臭(무색무취)한 사람을 軍部에서 民間으로 넘기는 중간에 완충적 인물로 5년간 두었다는 것은, 대단히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盧泰愚 前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면서 정권을 군인한테 안 넘기고, 물론 자기를 保存하는 방책도 됐지만, 민간출신 중에서도 정치적 기반이 넓다고 판단되는 경상도의 민주투사인 金泳三씨를 불러서, 三黨통합을 해서 그 사람한테 바톤을 넘겨 준 것은, 盧泰愚씨로서는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자기 기능을 하고 갔다고 보는 것이죠』
 
  ―지금 이 순간에 다음 정권과 관련해서 金大中 대통령이 우리 헌정사를 위해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은 뭐라고 봅니까?
 
  『지금 포스트 DJ(DJ 이후)를 생각하지 말고 黨은 黨대로 넘겨 주고, 대권주자들도 다 자기들이 뽑아서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하는 거겠지요. 야당도 더 탄압하지 말아야지요.
 
  또 오로지 국정에 전념하되, 북한문제는 지금 시한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경제와 사회문제에 시작해놓은 걸 마무리해야겠지요.
 
  아직도 늦지 않았는데, 참모들을 불러서 의견만 잘 들으면, 이것만 하면 DJ는 살아요! 그런데 이걸 못 할 거 같아요』
 
 
  『기자는 批判만 해서 먹고 산다』
 
 
  ―조선일보 사설 주제를 고르는 기준은 뭡니까?
 
  『제일 중요한 건 그날의 뉴스. 다음에 그날의 화젯거리, 즉 점심시간에 논란이 되는 것, 예를 들면 대통령의 6·25 발언 같은 것. 그러니까, 뉴스와 이슈. 세 번째는 권력에 대한 비판』
 
  여기서 金주필의 비판론이 나온다.
 
  『우리 신문기자는 정부가 잘하는 걸 쓰지 않습니다. 남 못한 거 쓰는 게 우리 직업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정치인들이 그래요. 代案을 제시해야 할 것 아니냐구. 代案을 제시하려면 내가 정치하지요. 代案은 많은 참모를 거느린 정치인이나 관리가 해야지요. 우리는 옳지 않다는 지적까지만 할 수 있는 겁니다.
 
  나라 세금을 받아서 수백명씩 참모 거느리고 있는 정치인들이 代案을 찾아야지, 우리 보고 그걸 하라면 차라리 우리가 정치하지요. 우리가 무슨 천재요? 우리한테 무슨 자료가 있어요? 우리는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비판하면서 먹고 사는 거요. 판단력 하나로 우리가 먹고 사는 거요』
 
  여기서 柳根一 주간으로부터 조선일보 논설위원실 사정과 「체험적 金大中 연구」에 대해 듣기로 한다.
 
  ―金주필이 주필이 되고 논설위원실 분위기가 달라진 게 있습니까?
 
  『과거 선배들의 말석에 내가 앉아 있을 때는 토론과 대화가 너무 없었고, 일종의 老人문화였지요. 영감님들이 하루종일 말씀들을 안 하시니까 내가 말을 하고 싶어서 죽을 뻔했어요. 절간 같았어요. 하루종일 사운드라는 걸 못 들었어요. 禪房(선방)이었지. 괴괴잠잠하고, 누구 하나 옆의 사람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러다가 安鍾益씨가 논설위원으로 오면서 말문이 열려서 마주 앉아서 하루종일 떠들었지요. 그때 비로소 인간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고 , 언어라는 게 표출됐어요. 그후 李道珩(이도형)씨, 金大中씨가 오면서 시끄러워졌어요.
 
  金주필이 들어오고 나선 토론이 너무 활발해서 언성 높여 싸우고 막 그러죠. 지금은 감정이 상하기 직전까지 가요. 그렇지만 결국엔 컨센서스로 가지요. 매일 오후 두 시부터 한 40분 간 토론합니다』
 
  ―두 분이 번갈아가며 칼럼을 쓰시지요.
 
  『2주일에 한 번씩 쓰지요. 둘이서 호흡을 맞춰가면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쓰니까 독자들한테 시너지(상승) 효과를 일으키는 것 같아요.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면 金주필은 발로 차는 사람이고 나는 손으로 때리는 사람이고, 발과 손의 차이지요.
 
  지금 우린 글을 쓰면 서로 데스크를 봐 줘요. 다른 데선 있을 수 없다고 그래요. 金주필이, 내가 자기 꺼 데스크 안 봐주면 자기도 내 꺼 안 봐 준다고 으름장을 놔요. 데스크 봐주면서 서로 족집게처럼 집어내요.
 
  金주필은 명사에 약하고 나는 형용사에 약해요. 金주필은 개념에 있어서 잘못 짚는 수가 있어요. 나는 형용사에 있어서 튀는 수가 있고. 터미놀로지(述語)는 내가 능하고, 전체적 틀을 잡는 데 있어선 저쪽이 능하고. 저쪽은 기자로만 살아서 感이 뛰어나고, 나는 그러면서 대학 쪽에 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개념 잡는 데 익숙하고. 서로 지적하면서 도움을 받지요』
 
 
  한국을 움직이는 言論人 1위
 
 
  ―金주필이 뛰어난 점은 어떤 걸까요?
 
  『순발력과 感이 빠르고 배짱과 심장이 강하지요. 覇氣(패기), 戰意(전의)가 넘쳐서 싸움꾼으로서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요』
 
  언론인에 관한 여론조사를 한 걸 보면, 金주필은 언제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뽑히고 있다. 1995년엔 3위로 뽑혔고, 1996년과 1997년엔 1위로 랭크됐다(시사저널 조사).
 
  ―여론조사를 보면 金주필이 언제나 한국을 움직이는 언론인 가운데 선두에 서있습니다. 그걸로 보면 국민들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또 영향을 받고 있는 게 분명한데, 지금 정부는 왜 그렇게 미워할까요?
 
  『영향력 때문이지요. 230만 부나 나가는 신문의 독자들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주는 글을 써대니 영향력이 얼마나 크겠어요. 조선일보의 영향력 플러스 金大中의 문체가 내뿜는 영향력에 대한 당혹감이지요』
 
  ―金주필의 문체는?
 
  『直情的이지요. 마음을 때리지요. 또 전투적이고. 그래서 독자의 마음을 앙양시키지요. 또 일체의 인용이 없지요』
 
  ―또 제때에 제 말을 탁탁 하구요.
 
  『그렇지요. 그런 게 다 맞아떨어지는 거지요』
 
  柳주간은 투사의 다른 면모도 말해 줬다.
 
  『싸움꾼 金大中이가 외손자·외손녀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때 그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를 봤어요. 이뻐 죽으려고 그래』
 
  ―싸움꾼으로서 갖춰야 할 냉엄하고 무뚝뚝한 요건은 못 갖췄군요.
 
  『맞아요! 마음이 여려. 싸움꾼 하면 웬만한 일엔 신경 안 쓴다는 전제가 대강 붙죠. 그런데 저 사람은 좁쌀알만한 데도 신경을 쓰는 타입이야. 굉장히 과민하다 싶을 정도로 잔 신경을 많이 써요. 그런 여리고 약한 측면이 있다는 거지요.
 
  또 느낌이 강한 사람이지요. 문학적 소질이 있어요. 엄밀한 사회과학도가 아니고 감정 우위의 인문주의자예요. 머리도 좋지만 본인을 지배하는 우선적 요인은 감성입니다』
 
 
  조선일보의 토양
 
 
  ―지금 金주필이나 柳주간, 또는 조선일보가 보수의 화신인 것처럼 비쳐지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국 사회에서 보수다 진보다 하는 설정이 한국적 특수성에서 오는 것이지 汎세계적인 보편성에는 맞지 않아요. 1980년대에 극좌까지 다 나왔거든요. 톡 까놓고 말하면 주사파가 나오고 계급혁명을 부르짖는 레닌주의까지 다 나왔지요. 그럼 다 나온 거지요. 그 위엔 아나키즘이나 트로츠키주의밖에 없지요. 그런 기준에서 보면 그게 아닌 것은 다 반동이고, 다 보수고, 다 극우가 되는 거지요.
 
  극우는 파시스트, 나치를 말하는 거지요. 우리의 경우는 군사독재, 계엄령 통치를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金大中이란 사람은 절대 극우가 아니지요. 자유주의자지. 나는 그것보다 좀더 자유주의 쪽이구요』
 
  ―밖에서는 이른바 언론탄압으로 조선일보, 그 중에서도 金주필과 柳주간님 또 논설위원이 위축이 돼 있다고 보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어떻습니까?
 
  『위축감을 느낀 적이 없어요. 상례로 봐서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고 생각할진 모르겠으나 세무조사가 시작된 금년 2월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칼럼과 모든 사설을 훑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社主나 경영자 측으로부터 논조의 방향을 튼다든가 강도를 쿨다운시켜 달라든가 하는 요청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까?
 
  『조선일보가 참 대단한 신문입니다. 사전 지시나 요청이 일절 없어요. 우리가 설정한 마당에서 잘 놀아봐라, 이겁니다. 늬들 프로니까 한 번 잘 해봐라, 이거지요. 그런데 가끔 사후에 코멘트가 오는 경우가 있지요. 아마 다른 어떤 회사도 이런 경우는 없을 겁니다. 없어요! 없어요! 정말 완전히 맡기는 거예요! 鮮于煇 시대엔 鮮于煇씨한테 완전히 맡겼고, 신동호 시대엔 신동호씨한테 완전히 맡겼고, 金大中시대엔 金씨한테 완전히 맡기는 거예요!
 
  우리라고 실수하지 말란 법 없잖습니까? 실수했을 때 코멘트가 오는 건 당연하죠. 우리 입장은 「내버려 두시오. 우리가 맘대로 하게. 맘에 안 들면 인사 때 모가지를 치시오」 이거지요. 또 社主의 입장은 「프로한테 맡긴다. 글은 글 프로한테, 돈은 돈 프로한테」 이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安秉勳 부사장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밖에서는 사장이 지분을 다 갖고 있으니까 편집권을 침해한다고 보는 모양인데 실제로는 안 그래요. 매일 제 방에서 오후 세 시에 나하고 주필, 그리고 편집국장, 이렇게 셋이서 그날 그날 신문의 방향을 정합니다. 사장은 일체 관여하지 않아요』
 
  ―그럼 사장의 역할은 뭡니까?
 
  『사장은 화요일에 편집국 부장들하고 커피 타임을 가져요. 사장은 그 자리에서 늘 신문 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지요. 사장은 재정적으로 사원들이 신문 잘 만들도록 뒷받침 잘하는 것이 자기 역할이라고 늘 얘기하죠. 촌지 절대로 못 받게 하고. 그렇게 하자면 돈도 잘 대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신문 만드는 게 정히 마음에 안 들면 저를 통해서 사후에 얘기를 하죠. 그게 일년 통해서 몇 건이 없어요』
 
  金大中 주필은 1965년부터 거의 37년간 조선일보 기자로만 한눈 팔지 않고 일해왔다. 그는 외길을 걸어왔다는 데 대한 자존심도 대단하지만,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도 드높다.
 
  그는 기자이면서 투사였고 압박을 받으면서도 늘 승리했다. 그래서 그는 언론계에 不動의 위치를 확립했고 살아 있는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조선일보라는 토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다. 그런 토양이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쫓겨났거나 정치적인 희생물이 됐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또 그가 오늘날처럼 성공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무기는 영어, 문학적 소양, 그리고 싸움꾼의 기질일 것 같다. 그런 기질까지도 사랑하고 북돋아 준 회사와 선후배 그리고 동료들에게 그는 커다란 빚을 졌다고 할 것이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直擊彈
 
 
  金大中 주필은 언론계에 기여한 공로로 제2회 韋菴(張志淵)언론상(1991), 제6회 중앙언론문화상(신문부문,1994), 제2회 雲耕(이재형)賞(1996), 제2회 효령상(언론부문,1999)을 받았다.
 
  그는 「워싱턴의 사계」, 「부자유 시대」, 「언론, 조심하라구」 같은 칼럼집을 낸 데 이어 곧 月刊朝鮮에서 네 번째 칼럼집을 낼 예정이다. 이 책엔 1998년부터 지금까지 쓴 그의 칼럼이 모아져 있는데, 왕성한 싸움꾼의 비판과, 앞을 꿰뚫어 보는 천리안, 그리고 숨소리도 들릴 것 같은 감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또 그 중의 절반 이상이 정치권력 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직격탄이어서, 그가 왜 탄압의 표적이 되었나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金주필께선 돈이 좀 있으십니까?
 
  『빚만 있어요. 지금 회사에서 퇴직금을 받을 게 없어요. 집사람이 사업을 한다고 하다가 돈을 다 털렸는데, 털린 것도 좋은데 그 돈을 막는다고 나 몰래 사채를 썼어요. 그게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이렇게 됐죠. 집도 다 잡히고. 어떤 사람들이 나를 걸을려구 다 뒤졌는데, 돈은 없고 빚만 있거든. 그래서 못 건 거요』
 
  金주필은 강남구 방배동 저당잡힌 집에서 살고 있다. 위로 둔 딸(영아·31)은 이화대학을 졸업한 후 결혼한 뒤에도 향학열이 식지 않아서 같은 대학 대학원 석사과정(미술학)에 다니고 있다. 이 딸이 낳은 외손자(병권·5)와 외손녀(유하·2)가 金주필 내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金주필은 딸이 대학에 다닐 때 前 근대적 독재를 휘둘렀다고 한다. 통금 시간이 9시 반이었고 10시 이후엔 전화도 못 쓰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딸이 우리 집은 꼭 조선시대 같다고 불평을 했다고 한다.
 
  金주필 댁엔 최근에 경사가 있었다. 아들(善宇·28)이 당당하게 동아일보 견습기자 시험에 합격해서 지난 10월10일부터 출근하고 있다. 그는 캐나다에 유학해 U.B.C.(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요즘 다소 불만이 있는 것 같다.
 
  『결혼 전에 연애할 땐 잘 웃겨서 재미있었는데 요즘엔 자상한 게 다 없어졌어요. 미국서 살 때는 결혼 선물도 챙겨 줬지요. 이젠 다 잊어버렸나 봐요』
 
  그에겐 또 멋쟁이 기질이 있다. 구두가 스무 켤레쯤 되는데 옷색깔에 맞춰 돌려가며 신는다. 등산화도 여덟 켤레나 된다.
 
  다시 金주필과의 대화로 돌아간다.
 
  ―아직까지 기사를 손으로 쓰시는데, 컴퓨터를 못 배웠습니까?
 
  『미국에선 타이프를 썼잖아요. 원고지에 쓰는 마지막 세대로 자임하고 바꿀 생각은 없어요』
 
  ―우리나라는 잘 될 거 같아요?
 
  『지금까지는 운좋게 잘 왔는데 또 다른 행운이 올지 잘 모르겠어요』
 
  ―오늘날 언론사태와 관련해서….
 
  『정말 근자에 와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언론이 언론을 공격하고, 언론을 매도하는 것이죠. 金大中 정권은 언론에 관한 것 하나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폐해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