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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논란이 된 6·25 당시 한강대교 폭파

현대사에 가장 길었던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30분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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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를 지날 때 蔡秉德 참모총장이 ‘나 아니면, 공병감이 명령하기 전에 다리를 끊지 마라’고 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이 불리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남산 쪽으로 탱크로 추정되는 밝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어요. 저는 적이 침입했다고 직감했지요.”

⊙ 28일 0시 서울 미아리 방어선이 붕괴되자 피란 행렬 속에 한강교 폭파
⊙ 최창식 공병감이 폭파 책임을 지고 사형… 14년 만인 1964년 무죄 판결
⊙ 2013년 5월 납북 제헌 의원 자녀 손배소에서 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
⊙ “28일 폭파로 국군과 미군이 전열을 정비해 7월 1일 미 지상군 참전이 가능했다”
끊어진 한강 인도교. 1953년 1월 1일 모습. 존 리치 촬영.
  1950년 6월 28일 새벽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서울의 남과 북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한강대교(당시 한강인도교)로 살림을 이고 진 피란민과 후퇴하던 국군이 몰려들고 있었다. 모두들 등화관제(燈火管制)의 어둠 속을 말없이 재촉하며 한강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성난 파도와 같았다”(吳炅煥 전사연구가)고 한다.
 
  한강교 폭파지휘소는 다리 폭파에 앞서 차량 통제를 위해 신호탄을 무수히 쏘았으나 쏟아지는 인파와 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뒤섞여 어찌할 수 없었다.
 
  새벽 2시30분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다리가 부서졌다. 교각으로 연결된 상수도관이 터져 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비규환이었다. 일순 한강교가 ‘저승 다리’로 변했다.
 
  이 폭파로 많게는 800명, 적게는 200여 명이 사망했을 것이란 추정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폭파로 다리에서 떨어졌던 이의 증언이 아직 戰史에 없다).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서울 방어에 참가했던 아군(당시 3개 사단이 참여했다)의 퇴로가 끊겼고 피란민(당시 서울시민은 140만명이었다) 역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오경환 전사연구가는 “유재흥 준장 지휘하의 제7사단은 겨우 1500여 명과 기관총 4정밖에 한강 이남으로 넘겨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중서부지구 전투부대 대부분이 중화기를 한강교 폭파로 한수(漢水) 이북에 던져두고 남으로 떠나야만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자 수와 피해 규모에 대한 학술조사와 연구는 전쟁이 끝나고 지금까지도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6·25 전쟁 내내, 그리고 이후에도 ‘조기(早期)폭파’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은 부모와 형제, 제 터전을 잃은 피란민의 절규였다. 피란 못 간 많은 이들 중 다수가 죽거나 납북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지난 2011년 구중회·김상덕·김영동·김중기 의원 등 납북(拉北)된 제헌 국회의원 12명의 자녀와 손자·손녀 22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그 자손들은 서울과 경기 고양·남양주·부천, 부산, 대구, 경북 고령·구미, 광주,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제헌의원 자손’이란 자부심 대신 ‘납북자 가족’이란 상처(傷處)를 안고 살아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 소송은 2년에 걸쳐 논란을 벌이다 지난 5월 9일 판결이 났다.
 
 
  한강교 폭파, 다양한 역사평가가 가능하다 해도…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순간. 1950년 7월 3일 미 공군기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격하고 있다. 오른쪽의 이미 폭파된 다리는 한강인도교이다. 미군은 종전 때까지 우세한 공군력으로 북한군에 타격을 입혔다.
  제헌의원 가족들은 “제헌의원들이 전쟁 발발 후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1950년 6월 28일부터 8월 21일 사이에 서울에서 납북되었다”며 “국군이 6월 28일 새벽 2시30분경 한강교를 폭파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전날인 27일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상황에서 라디오를 통해 ‘아군이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을 방송했다”며 아무런 피란 조치를 취하지 않은 국가에 납북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소송을 맡은 김승교(金承敎)·황정화(黃貞化) 변호사의 주장이다.
 
  “국가는 6·25 이전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사정을 알 수 있었음에도 전쟁 준비를 게을리했고, 국군 통수권자인 이 대통령은 전쟁의 정황을 거짓으로 발표했습니다. 국군은 6월 28일 한강교를 아무런 예고 없이 조기에 폭파했고, 북한의 납북이 충분히 예상되는 제헌의원들에 대해 아무런 피란 조치를 취하지 않아 납북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헌의원 후손들은 ‘납북자의 후손’이 되어 국가로부터 지속적인 감시와 사찰을 받아야 했고 공무원 취업, 해외유학, 해외여행 등에서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2년여의 이 재판을 담당했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0부 고영구(高榮九) 부장판사는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며 패소 판결을 했다. 다음은 판결문 일부다.
 
  <… 6월 27일 정부, 국군 및 의회 사이에서 서울을 사수할 것인지에 관하여 논의를 하였으나 통일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군 전차가 미아리 방어선을 뚫고 서울 시내로 진입하자, (중략) 피고가 6월 27일 서울시민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해 전세를 거짓으로 알린 것이나, 28일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한강인도교를 폭파한 것에 대하여 현재의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원고들이 주장하는 사정들만으로 피고의 행위가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보기 어렵고, 이 사건과 제헌의원들의 납북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하기도 어려우므로, 피고가 이 사건 제헌의원들의 납북에 대하여 민법상의 불법행위 책임을 부담한다고 보기 어렵다. …>
 
  사실, 한강교가 폭파된 지 6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조기폭파 논란은 명백히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8월 28일, 그러니까 한강교가 폭파된 지 2개월 만에 한강교 폭파를 직접 책임졌던 최창식(崔昌植) 공병감을 전격 구속하고, 9월 16일 오후 2시 최 공병감을 총살했다. 죄목은 적전비행(敵前非行).
 
 
  조기폭파 책임을 지고 최창식 대령 사형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당시 군법회의는 단심제(單審制)였기에 법적인 항고(抗告)가 불가능했다. 기자는 1950년 9월 15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유죄 판결문을 입수했다. 다음은 요지.
 
  <… 6월 28일 오전 2시경 아군이 전군선(全軍線)에서 후퇴하게 되자 용산 육군본부에서 참모총장으로부터 교량 폭파에 대한 전화 명령을 수(受)함을 계기로 하여 적정(敵情)도 확실히 확보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도교(渡橋)하는 육군부대에 관한 고려를 전연 도외시하고…>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무죄 판결문 요지.
 
  <… 피고인은 절대적 구속력이 있는 상관의 작전명령에 의해 한강교를 폭파한 것이고 피고인은 이에 복종할 뿐 달리 폭파시간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인정되므로 조급한 폭파로서 초래한 한강 북방의 아군 인원과 장비의 손실은 피고인의 책임이라 할 수 없고…>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한강교 폭파가 조기(早期)냐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또 폭파 명령자가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폭파에 관여한 명령 계통 군 수뇌부가 모두 사망했기 때문이다. 폭파 명령은 채병덕 총참모장과 작전참모부장 김백일(金白一) 대령, 공병감 최창식 대령, 그리고 폭파에 직접 참여한 공병(工兵) 장교만이 알았을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쓴 《한국전쟁사》에는 채병덕 참모총장이 6월 28일 새벽 1시45분에 “적의 전차가 시내로 침입했다”는 요지의 보고를 받고 즉시 최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이제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실시하라.”>
 
강영훈 전 국무총리.
  국방부 전사(戰史)에 채 참모총장이 최 공병감에게 폭파를 명령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채 참모총장을 수행했던 당시 육군본부 강영훈(姜英勳) 인사국장(훗날 국무총리가 됐다)은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강 전 총리가 2008년 5월 펴낸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용산대로를 완전히 매운 피란 인파와 민간 차량 속에 묻혀 나는 채 참모총장을 모시고 시흥으로 향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망하는구나. 한강을 건너 남하한다고 해도 어디까지 갈 것이냐. 적의 공격을 피하다 잡혀 죽는 것보다 차라리 서울시민과 같이 싸우다 죽는 것이 군인으로서 명예스러운 일이 아닌가’라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중략) 차가 한강교 남단에 도달했을 때 공병들이 폭파 장치를 하고 대기 상태에 있었다. 노량진을 지나 영등포 로터리를 도는 순간 뒤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렸다. …>
 
  강 전 총리는 또 “군단 사령부가 경북 군위에 머무는 동안 신문을 통해 한강다리 폭파 책임 문제로 당시 최창식 대령이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받고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이렇게 회상했다.
 
  “최 공병감은 채 참모총장이 자신이 한강다리를 건너가면 폭파하라고 해서 명령에 복종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채 참모총장이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수행한 나로서는 그와 같은 대화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최 공병감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변론 기술상 그런 점을 강조한 것으로 추측되나, 이 세상에 기록된 문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는 또 “재판 도중 만일 그런 중요한 쟁점을 규명할 의사가 있었더라면 최소한 그 당시 참모총장 차에 동승한 사람들의 증언을 받았어야 할 일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강 전 총리는 “정부 자체가 100만명의 서울시민에게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 버린 상황에서 최창식 공병감에게만 책임을 추궁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나”며 “나는 최 공병감에 대한 총살형이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역사 속 한강인도교
 
나룻배로 건너던 서울시민의 충격

 
1925년 한강인도교 아래서 열린 조선체육회 주최 제1회 조선빙상대회 모습.(《조선일보》 1925년 1월 6일자)
  1900년 7월 한강에 건설된 첫 번째 다리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교량은 한강철교다. 반면 우마차와 사람이 건너가던 한강인도교는 1917년 세워졌다.
 
  나룻배와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던 서울 시민에게 거대한 한강 다리는 충격이었다. 미국인 J 모리스가 경인철도를 부설하며 한강철교에 보행로까지 설치토록 대한제국과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설권을 가로챈 일본은 1900년 7월 한강철교를 가설하면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가 식민지화한 뒤인 1917년에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도록 인도교를 만들었다. 개통 초기에 제1한강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다리는 한강철교의 낡은 자재를 이용해 가설해서인지 폭이 좁고 중앙차로 4m, 좌우측 보도는 각 1m에 불과했다.
 
  한강인도교는 6·25 때 끊어졌다가 1957년 1월에 복구공사에 착수, 이듬해 5월 15일에 준공돼 서울의 명물 ‘한강대교’로 변신했다.
 
 
“최 대령은 죄가 없다”

 
6·25 전쟁-1951년 한강인도교 상공에서 바라본 여의도 모래사장.(지갑종씨 제공)
  최창식 공병감으로부터 폭파 준비 명령을 받고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에 폭탄을 설치한 공병장교들은 공병학교장 엄홍섭(嚴鴻燮) 중령과 김재식(金在植) 대위, 황원회(黃元會) 중위, 이창복(李昌馥) 중위, 임흥순(任興淳) 중위 등이다.
 
  이들 가운데 엄홍섭 중령(훗날 공병감이 되었다)과 황원회·임흥순 중위는 사망했고 김재식 대위는 연락이 끊겼다. 육사 8기 출신의 이창복 중위는 1973년 준장으로 예편한 뒤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한 상태다. 그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이 장군은 “한강교 폭파는 황원회 중위, 한강철교는 저와 김재식 대위, 제1공병단 임흥순 중위가 맡았다”고 회고했다.
 
  “한강교와 한강철교 3곳을 포함해 4개 교량에 폭약을 설치했는데 폭약량 계산을 제가 했었어요. 6월 26일 저녁에 공병감실에 불려 가 폭약 정찰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현장에 가 보니, 한강에 다리가 4개더군요. 한강교 남쪽 파출소에 방공호가 있어 그것을 이용했어요. 다시 공병감실로 돌아가 폭약량을 계산하고 폭약 신청을 한 뒤 김포 공병학교로 돌아갔다가 남산에 야전텐트를 치고 잠을 잤습니다.
 
  이튿날 오전 10시 폭약을 수령하고 한강교에 400파운드 정도의 폭약을 설치했으나 불발에 대비, 넉넉하게 900파운드를 썼어요. 하지만 27일 당시 전세가 호전돼 장착한 폭약을 거둬들이라는 명령을 받지는 못했어요. 전방 상황이 좋으면 차량이 미아리 쪽으로 향했고 상황이 나빠지면 한강 이남으로 향했어요.
 
  (28일 새벽 2시경) 칠흑 같은 밤이었고 비가 내렸어요. 폭파 당시 교량 양측에 1개 분대 정도의 공병대를 배치, 인마(人馬)와 차량의 통행을 저지시키려 했으나 당시 동원한 병력이 부족해 공포까지 쏘았으나 저지하기 어려웠어요.”
 
  그는 “한강(인도)교는 도폭색(導爆索)을 쓰지 않고 전기식으로 장약(裝藥), 성공했으나 철교는 도폭색이 오래돼 연소가 안 됐다”며 “철교 하나는 실패했고 하나는 반파(半破)됐다”고 했다. 도폭색은 와이어에 폭약을 주렁주렁 매단 폭탄을 말한다.
 
  “한강교 시설 중에 상수도관과 통신선로가 있었는데 다리가 전파되고 상수도관이 터져 물이 콸콸 쏟아졌고, 통신선로에 불이 붙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없고, 그날 새벽 다리 밑에 시체가 둥둥 떠 있거나 하는 광경도 없었어요.”
 
  이 장군은 1964년 야전군 공병부 차장으로 복무할 당시 최창식 공병감 재심 판결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던 기억도 떠올렸다.
 
  “전쟁 중에 대구로 정부가 내려가 국회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봅니다. 저는 증인으로 재판정에 서서 ‘최 대령은 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강교 폭파 명령을 누가 내렸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강교를 지날 때 채병덕 참모총장이 ‘나 아니면, 공병감이 명령하기 전에 다리를 끊지 마라’고 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폭파 당시 한강철교 쪽에 있어서 (인도교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나 상황이 불리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남산 쪽으로 탱크로 추정되는 밝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어요. 저는 적이 침입했다고 직감했지요.”
 
 
  “아쉬움 없지 않으나 방법이 없었을 것”
 
박기석 전 건설부 장관.
  그는 조기 폭파 논란에 대해 “아쉬움이 있으나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며 “(한강교 폭파 이후) 최 공병감은 고민이 많았다. 제게 ‘전쟁이 끝나면 백성에게 사죄하고 옷을 벗겠다’고 말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기자는 전역한 공병 부대원의 친목모임인 ‘공병전우회’의 도움을 받아 당시 한강교 폭파 준비를 했던 공병 부대원을 수소문했으나 대개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확인했다.
 
  다만 당시 폭파 교관이었던 황원회 중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황 중위는 ‘한강교 폭파 이후 최창식 대령 사형과 관련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숨어 살았고 경기도 포천에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황 중위는 폭약 장전과 관련해 총 책임자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창복 장군은 “그가 왜 죄책감에 숨어 살았는지 의아하다”고 했다.
 
  한강교가 폭파된 이후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전쟁 당시 제3사단 공병 참모 겸 공병 대대장이었던 박기석(朴基錫) 소령(훗날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은 “우리 공병대대는 28일 아침 해가 밝아 오는 6시경 용산 삼각지 부근에 도착했는데 한강교를 향해 가던 차량이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한 채 서 있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3사단 공병대대는 겨우 10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많은 부대원이 차 뒤를 따라 도보로 동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시청 앞으로 후퇴를 했어요. 피란 가던 시민도 우왕좌왕하며 몰려 큰 혼잡을 이루고 있었고 도로를 꽉 메운 차량 행렬로 길이 막혀 꼼짝도 못하자 인도에까지 차가 올라가 있을 정도였어요. 저는 왜 그렇게 길이 막히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인도교가 폭파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저는 정보장교를 시켜 한강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가서 상황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1시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어서 발을 굴렀는데 이윽고 장교가 와서 말하길 ‘한강대교가 끊어져 남하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우리 측에서 폭파한 것 같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민간인의 피란 행렬이 줄을 잇고 있는 데다 후퇴하는 군 병력도 상당수 강북(江北)에 남아 있었기에 우리 쪽에서 다리를 폭파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아군도 미처 철수하지 못했는데 다리부터 끊어 놓았으니 큰일이었어요.”
 
  박 전 장관은 어떻게든 강을 건너야겠다고 생각하고 강폭이 좁은 서빙고에서 반포로 도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서빙고에 도착해 제방 둑 아래로 내려가 보니, 강가에는 이미 먼저 도착해 있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피란민과 부대를 이탈한 장병, 주한 외교관과 그 가족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공병대원을 시켜 인근 버려진 초가집을 뜯고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게 했습니다. 부대원을 먼저 건네고 외교 사절단과 피란민을 차례로 실어 날랐어요. 그렇게 뗏목으로 강을 건넌 사람들은 우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마워했어요. 그런데 오전 10시경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이응준 장군.
  한강교 폭파 후 긴박했던 상황에 대해 당시 제5사단장 이응준(李應俊·전 체신부 장관) 장군도 1982년 펴낸 《回顧 90년》을 통해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 육본을 나와 후퇴 차량으로 꽉 찬 한강로를 뚫고 한강대교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한강교 북쪽 입구로 들어가 1~2분 걷고 있을 때 바로 앞에서 일대 폭음이 일어났다. 28일 새벽 2시 반쯤 된 시각에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소리였다. 실로 위기일발(危機一髮)로 죽음을 모면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앞질러 갔더라면 우리는 모두 날아가고 말았을 터였다. 당시 나는 적이 우리 후방으로 침투하여 한강대교를 폭파한 것으로 직감했다. 일반 상황으로서는 유일한 이 한강교를 이 시기에 도저히 폭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강을 건너기 위하여 서빙고와 뚝섬 강변을 오가다 다시 뚝섬 쪽으로 돌아갔더니 군중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고, 박창록(朴昌祿) 헌병대장의 진력으로 배 한척을 얻어 사령부 일동이 겨우 강을 건널 수 있었다. 28일 아침 7시 반경이었다. …>
 
 
 
“폭파 시기, 조금 늦췄으면…”

 
  박기석 전 장관은 한강교 폭파의 시기에 대해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지나간 다음 생각해 보면 좀 빨랐다는… 조금 늦췄으면 희생자가 적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그는 또 “한강 다리가 끊어져 희생된 사람은 200명 정도 될 것”이라며 “그 이후 북한군이 한강까지 포탄을 쏘기 시작했으니, 포탄에 맞아 돌아가시는 분, 후퇴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분도 꽤 있겠지만, 한강교 폭파로 현장에서 숨진 이는 200명 내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사망자도 민간인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 공병감의 판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공병감은 참모총장의 참모입니다. 총장이 지시하면 그대로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일찍 폭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명령을 수행한 데 책임지는 것은 아쉽게 생각합니다. 제가 6·25가 터지기 전에 최 대령을 몇 번 만났습니다. 그분은 공병감이시고 저는 공병대대장이기에 훈련할 때 2~3번 와서 교육과 훈련 상황을 살피곤 했어요. 존경받을 만한 상관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돌아가시니 (공병 부대원들이) 참 아쉽게 생각했습니다.”
 
  전쟁 초기의 작전지도 중에서 큰 물의를 빚었던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강교 폭파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폭파 책임자와 폭파 시기였다. 그런데 최창식 대령이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다른 관련 인물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이 문제는 오리무중이 되어 버렸다.
 
  다만 한강교 폭파 문제와 채병덕 참모총장의 관련성에 대해 추론은 가능하다. 즉 한강교 폭파는 이미 채 총장의 결심에 의해 시작됐음이 확실하다. 창동(倉洞) 방어선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재경(在京) 부대장 및 육본 참모 연석회의에서 공개적으로 그 작업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 지시에 따라 공병감-공병학교장-폭파 담당자(공병학교 폭파교관)들이 폭파를 준비하고 폭약을 장착하는 일련의 작업을 지시 및 실행했을 것이다.
 
  최창식 공병감은 재판과정에서 채 총장으로부터 폭파 명령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다음은 1950년 9월 10일 법정에서 최 공병감에 대한 심문 내용이다.
 
  <… 재판장 : 28일 02시 현재 시내에 침입한 적은 탱크 2대뿐이었다. 몇 시간 기다렸다가 폭파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최대령 : 채 총장의 명령은 적 전차가 시내에 침입하면 즉시 폭파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아무런 재량권도 없다. 만일 그때 폭파를 주저했더라면 어떠한 사태가 발생했을지 모를 일이 아닌가.
 
  재판장 : 폭파 당시 한강 북안에 있는 아군의 후퇴 상황을 파악하지 않은데 대해 귀관의 책임이 없단 말인가?
 
  최대령 :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비가 쏟아지고 암야(暗夜)인 데다가 등화관제가 되어 한강 북안의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할 것은 없었다. …>
 
  하지만 6월 27일 자정을 전후해 채병덕-최창식 두 사람 사이에 있었을 명령은 당사자 외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채 총장이 생존해 재판정에서 증언했다면 모를까, 그는 그해 7월 하동(河東)전투에서 남해안을 돌아 공격해 오는 적을 저지하다 전사했다.
 
  한강교 폭파 논란의 이면에는 폭파에 따른 긍·부정 측면이 상존한다. 조기 폭파로 희생자가 생기고 국군의 주력 장비와 무기, 정부의 재산이 한수 이남으로 넘어가지 못했다는 점이 부정적인 면이다. 그러나 한강교 폭파로 인민군의 진격을 늦춰,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미군(美軍) 참전이 가능해졌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양쪽 견해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전쟁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영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 박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南廷屋) 박사는 “전쟁 초기 국군이 적의 보병과 그런대로 전투를 했지만, 적 전차만 나타나면 진지가 뚫렸다”며 “7월 3일 북한군이 한강교를 복구해 전차를 도하시켜 공격하자, 국군 방어 진지는 적 전차의 공격 앞에 불과 2시간 만에 무너져 철수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만약 한강철교를 폭파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한강교 폭파는 폭파 당시 인명 및 장비 피해가 있었지만, 미군이 참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개전(開戰) 초기 국군은 전차 때문에 전투를 할 수 없었고 미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어요.”
 
  북한군 전차가 28일 오전 8시경에 서울시내 삼각지로 들어왔다고 한다. 한강교 폭파 시점은 새벽 2시 반쯤. 북한군 주력이 이날 오전 11시30분에 들어왔기 때문에 최소 5시30분, 최대 9시간이나 빨리 폭파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남 박사는 “전쟁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북한군 전차가 서울 시내로 들어온 2시간 뒤에 폭파한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늦을지도 모른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북한군 전차는 85밀리 주포와 시속 55km의 성능을 갖춘 현대식 전차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적 전차가 서울 외곽에 진출했다고 하더라도 한강교까지는 30분이나 1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거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최초 적 전차의 서울 진입 2시간 후에 폭파한다는 것도 매우 위험한 조치라고 봅니다.
 
  또 국군 철수 후에 한강교를 폭파해야 한다는 논리도 당시 전선 상황과 비교해 맞지 않아요. 당시 국군 주력이 미아리 지역에서 적과 대치 중이었어요. 그러니 그대로 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철수를 위해서는 공군이나 강력한 포병 화력으로 적이 추격하지 못하도록 차단 사격을 해 주어야 하는데 당시 국군에게는 이런 전력이 없었어요.”
 
  남 박사의 주장은 조기 폭파 논란에 새로운 관점을 던져 준다. 만약 한강교가 당시 끊어지지 않았다면 미군과 유엔(UN)의 참전이 불가능했을까. 남 박사의 계속된 주장이다.
 
  “한강 방어선의 최대 공로자는 폭파에 따른 한강교 절단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강교 폭파는 한강 방어선을 6일간이나 지탱하게 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6월 29일 맥아더의 한강 전선 시찰이 이뤄졌으며 뒤이어 7월 1일 미 지상군 참전이 가능했던 것이죠. 미군 참전으로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이어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해 결국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됐습니다.”
 
  고(故) 최창식 공병감은 부인 옥정애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1964년 10월 23일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옥씨도 67년 9월 20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6·25 사변 1년 전에 태어난 최 공병감의 아들은 현재 한양대 공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이런 답이 돌아왔다.
 
  “집안 어른과 상의하였고 여러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가정사에 관련한 일은 함구하기로 했습니다. 저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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