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총재가 될 뻔했던 화이트와 얄타회담에 배석하였던 히스는 왜 소련 간첩이 되어 조국을 배신하였던가? 미국에도 좌익과 간첩을 많이 배출한 ‘386세대’가 있었다.
- 미국의 최상층부에 침투했던 소련간첩들을 다룬 책들. 왼쪽부터 《브레튼우즈의 전투》(벤 스틸 著), 《증언》(휘태커 챔버스 著), 《위증》(알렌 와인스타인 著).
국제해킹그룹 어나니머스가 북한의 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해킹, 회원 1만5000여 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일베(www.ilbe.com)’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이 ‘신상털기’를 한 바에 의하면, 이 명단에는 방송국 국장, 교사, 통합진보당 당원, 심지어 현역 군인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 사이트의 회원들이 모두 종북(從北)세력인지 여부는 수사기관에서 밝혀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어나니머스가 공개한 ‘우리민족끼리’ 회원 리스트는 종북문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미국에서도 조국에 반역하는 풍조가 지식인 사회에 만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올해 초 미국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가 《브레턴우즈의 전투: 존 메이너드 케인스, 해리 덱스터 화이트, 그리고 새 세계 질서 만들기》란 책을 펴냈다. 필자는 권위 있는 외교정책 잡지 《포린 어페어스》를 발행하는 미국의 외교협회 국제경제 담당 국장 벤 스틸(Benn Steil). 한국인과 친숙한 국제통화기금(IMF) 창립의 설계자가 소련 간첩이었다는 폭로가 흥미롭다. 고관(高官)과 지식인들의 간첩질과 반역질이 횡행하는 한국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다.
1944년 7월, 제2차 세계대전이 노르망디 부근에서, 독·소(獨蘇)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44개국 대표가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턴우즈에서 만나 전후(戰後) 국제경제 질서를 관리할 기구의 설치를 논의하였다. IMF와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한 브레턴우즈 시스템의 두 설계자는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미국 재무부의 엘리트 관료 해리 덱스터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일벌레였다. 그는 디테일에 강했고, 정책을 논리적 구조로 정리하는 데 뛰어났다. 화이트는 케인스와 자주 다투었다. 그는 영국인 앞에서 영국여왕을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화이트는 자신의 후견인인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개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영국제국의 쇠퇴기를 이용하여, 달러 중심의 전후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는 영국에 적대적(敵對的)이었지만 소련엔 우호적이었다.
소련에 지폐 인쇄 銅版 넘겨 65억 달러 손해 끼쳐
1944년 초 영국과 미국은 독일을 점령한 뒤 통용시킬 연합국 화폐(마르크)를 미국이 인쇄한다는 데 합의한다. 소련은 “우리도 인쇄할 권리가 있다”면서 미국의 인쇄 동판을 건네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면 소련은 원하는 만큼 돈을 찍을 수 있게 된다. 미국 재부무 조폐(造幣)국장 알빈 홀은 반대하였으나 화이트는 이상한 논리를 들고 나왔다.
“우리는 소련을 충분히 돕지 못하였다. 이 거래로 소련이 이익을 본다면 우리는 소련의 전쟁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련을 다른 동맹국과 똑같이 믿어야 한다.”
모겐소 재무장관은 화이트의 손을 들어 주었다. 예상한 대로 소련은 점령한 독일지역에서 미제(美製) 동판(銅版)으로 마르크를 많이 찍었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가 100억5000만 마르크를 찍은 데 비해 소련은 780억 마르크를 찍었다. 화이트는 소련 발행 마르크를 미국이 (소련에 유리한 고정 환율로) 매입하도록 하였다. 지금 돈으로 소련은 약 65억 달러의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전후 국제통화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브레턴우즈 회의에서도 화이트는 다른 나라 대표들을 화나게 만들면서까지 소련에 유리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회의에서 소련이 브레턴우즈 조약을 비준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미국이 소련에 100억 달러의 저리(低利) 재건 차관을 제공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소련은 이를 트집 잡아 IMF와 세계은행 창립 참여를 거부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화이트를 IMF 총재로 추천하려 하였다. 그 전 단계 조치로 1946년 1월 23일, 화이트를 미국을 대표하는 이사로 임명하였다. 2주(週) 뒤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대통령에게 “화이트는 소련 지하 첩보 조직의 조력자(助力者)”라는 보고를 올렸다. 후버는 화이트가 “미국 정부 안에 소련 첩보 조직을 심었다”고 주장하였다. 미 상원은 이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어 화이트의 임명에 동의하였다. 트루먼은 잘못하면 정치적 스캔들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 화이트를 총재로 추천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미국인을 총재로 추천하는 것도 포기하였다.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의 총재 자리 모두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다른 이유를 대면서 IMF 총재 자리는 양보하였다.
간첩 폭로
루스벨트-트루먼 정부는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망에 대한 보고를 해도 묵살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반공(反共)노선을 확실히 하였지만 그가 루스벨트의 급사(急死) 후 인수한 민주당 정부 안엔 뉴딜 정책에 찬동하여 참여한 공산주의자와 친소(親蘇)분자들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화이트에 대한 FBI의 내사(內査)만 있었을 뿐 공개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 사이 화이트는 재무부와 IMF를 사직하고, 1948년 대선(大選)에 출마한 진보당 대통령 후보 헨리 월레스를 도왔다.
친소적(親蘇的)인 월레스는 상무장관으로 트루먼 행정부에서 일했으나 대소(對蘇) 강경 정책에 반대, 그만둔 뒤 출마한 것이다. 월레스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적 이정표(里程標)라고 평가한 사람이다. 그는 이념 지형상 ‘미국판 김대중’의 역할을 했는데 단지 다른 점은 낙선했다는 사실이다. 월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화이트는 재무장관, 다른 소련 간첩 엘저 히스는 국무장관이 되었을 것이다.
1948년 여름, 소련 간첩질을 하다가 전향한 두 사람(벤틀리와 챔버스)이 미 하원의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에서 화이트, 히스 등 소련 간첩들의 명단을 폭로하였다. 화이트는 8월 13일 이 위원회에 호출되어 증언하였다.
모두(冒頭) 발언에서 그는 “나의 신조는 미국의 신조이다”면서 “나는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신봉하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방청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화이트는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고 폭로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35세의 신참 하원의원인 리처드 닉슨은 화이트를 위증죄(僞證罪)로 걸기 위하여 간첩 챔버스를 만난 적이 없다는 거짓말을 이끌어내려 했다. 화이트는 “만난 기억이 안 난다”는 말로 피해 나갔다. 이날 증언에서 화이트는 밀리지 않았으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음이 곧 밝혀졌다.
다음 날 그는 뉴햄프셔 주에 있는 별장으로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이튿날 사망하였다. 미 하원 조사위원회는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0년 1월 26일 닉슨은 조사위원회에서 결정적인 폭로를 했다. 화이트가 소련에 포섭된 간첩이던 휘태커 챔버스에게 넘긴 8페이지 문서의 사본(寫本)을 제시한 것이다. 챔버스는 화이트와 히스가 소련 정보기관에 넘겨주라고 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화이트가 소련에 제공한 문서들은 손으로 쓴 것인데, 고급 비밀이 많았다. 군사 및 외교 분야의 문서들이 주(主)였다. 미 국무부와 재무부에서 생산한 정보와 이에 대한 화이트의 논평들이었다. 미국의 대일(對日)정책, 예컨대 일본에 대한 경제봉쇄와 자산동결 조치, 일본의 석유저장소와 방어 상황,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와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의 비밀 대화록 등등. ‘대통령의 요구에 의하여 작성된 대일 경제전쟁 계획은 재무부 이외엔 비밀에 부쳐져 있다’는 화이트의 메모도 있었다.
《브레턴우즈의 전투》의 저자(著者) 벤 스틸은 “화이트는 엘저 히스보다도 소련에 더 중요한 간첩이었다”고 평했다. 화이트는 1930년대 중반부터 자발적으로 ‘소련 첩보기관의 두더지(mole)’ 역할을 하였다. 그는 미국 정책에 관련한 최고급 정보와 조언을 소련에 전달, 미국 정부와 협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는 미국 정부 내에서 정책 협의를 할 때는 소련 편을 들었다. 단순한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완벽한 정책 협력자였다. 화이트는 일찍 죽는 바람에 기소를 면하였으나 그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 없이 확정되었다.
암호 해독으로 간첩임을 확정짓다
미국의 첩보기관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국을 오고가는 외국기관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 계획(Venona Project)을 실천에 옮긴다. 이 계획의 전모(全貌)는 냉전(冷戰)이 끝난 뒤 공개되었다. 미국이 소련의 암호 해독에 성공한 것은 1946년이었다. 이에 따라 보존된 과거의 통신자료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화이트의 이름(암호명)이 등장하는 자료는 18건이고, 1944년 3월 16일부터 1946년 1월 8일까지이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헌장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화이트는 미국 대표단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그는 기자로 위장한 소련 정보기관(KGB) 간부 블라디미르 프라브딘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프라브딘이 모스크바 본부로 보고한 전문(電文)을 해독해 보니, 화이트는 “트루먼과 국무부 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번 회의가 성공하기를 원한다. 미국은 유엔에서 소련에 거부권을 주는 데 동의할 것이다”고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화이트가 소련에 “지금 추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미국 차관을 얻을 수 있다”는 정보를 준 사실, 화이트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소련 동조자를 미국 정부 내 관리로 임명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보고문도 해독(解讀)되었다.
화이트를 변호하는 이들은 “프라브딘이 소련 첩보원인 줄 모르고, 즉 기자인 줄 알고 그런 정보를 주었을 것이다”고 주장하였으나 냉전이 끝난 후 KGB 자료를 본 서방 학자들은 미국 정부 내의 다른 ‘소련 두더지’가 소련 첩보 기관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는 문서를 발견하였다.
<화이트는 그가 제공한 정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잘 안다. 그것이 그가 (그런 식으로) 정보를 건네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베노나 계획이 해독한 소련의 암호 전문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우리와 협력하는 문제에 대하여 (화이트는) 그의 아내가 어떤 희생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에 대하여는 개의치 않으나 비밀이 알려질 경우 정치적 스캔들로 이어질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화이트가 건네주는 문서를 소련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다가 전향(轉向)하였던 챔버스는 1953년에 평하기를, “화이트는 미국의 대소(對蘇) 정책을 소련에 유리하도록 수립할 수 있는 완벽한 관료였다”고 했다.
소련에 대한 誤判
《브레턴우즈의 전투》 저자 벤 스틸은 왜 이런 엘리트가 ‘소련의 두더지’가 되었는가를 해명하려 한다. 그는 “화이트 사건은 증인(證人)과 흉기(凶器)는 있는데, 범행의 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살인사건과 비슷하다”면서 동기를 추적하다가 프린스턴 대학교에 소장된 화이트 관련 자료뭉치에서 ‘노란 종이 위에 쓴 메모’를 찾아냈다. 정부 안에서 그의 영향력이 가장 강할 때인 1944년에 쓴 것이다. 제목은 ‘미래의 정치-경제’였다. 저자는 이 자료가 지적(知的)으로 야망에 불타던 시절, 이 사람의 사고방식과 열망을 엿보게 하는 창문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메모를 보면 화이트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낙관,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관에 차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상황을 심각하게 오판(誤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북좌파 분자들의 북한정권에 대한 오판을 연상시킨다. 몇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미래에는) 사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강화되고, 경쟁과 자유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는 늘어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러시아는 종교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소련의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현재 소련이 추구하는 정책은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서구(西歐)가 소련을 악마(惡魔)로 그리는 것은 위선(僞善)이라면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재침(再侵)을 막기 위하여 소련과 군사동맹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피력하였다. 이런 구상에 대한 걸림돌이 미국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애국심으로 위장한 제국주의’ ‘매우 강력한 가톨릭 위계질서’,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와 동맹하면 자본주의가 약화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그룹’이다.
화이트는 이런 반소적(反蘇的) 생각의 핵심은 경제이념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러시아를 사회주의 이념의 원천이라고 경계한다’는 것이다. 저자 벤 스틸은 “미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 전략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면서 화이트 메모의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였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경제가 작동하는 첫 번째 경우인데, 잘 돌아간다!>
저자는 화이트의 정체(正體)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전후(戰後) 세계 자본주의 금융 질서의 설계자는 소련의 행태를 빨간 안경을 쓰고 보았다. 이는 단순히 소련이 미국의 중요한 우군(友軍)이라고 믿어서라기보다는 소련의 대담한 사회주의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확신한 탓이다.>
미국판 386세대
저자는 화이트가 돌연변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격동의 1920, 30년대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미국의 ‘친러파(Russophile)’ 세대의 작가나 관리들이 대체로 그런 성향이었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격변, 대공황, 국제 무역 및 통화 질서의 붕괴를 목격한 이 세대는 혁명적인 정치 경제 질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소련이 1917년 혁명 뒤에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매진하는 것을 보고, 또 파시즘과 맞서는 것을 보고, 나중엔 소련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본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이 친소(親蘇)로 기울었다. 이들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하고 정부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친소 분자들의 숙주(宿主) 역할을 하였다. 그는 전후 세계 질서가 미영(美英)이 아니라 미소(美蘇) 중심으로 짜여야 한다는 생각도 하였다.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에 대한 보고를 올려도 묵살하였다. 루스벨트도 화이트처럼 소련과 스탈린을 악(惡), 적(敵), 위협으로 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화이트는 1924년 대통령 선거에 나온 진보당 후보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친소-좌경화되었다. 그는 소련의 계획경제에 매혹되어 로렌스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된 직후 소련에 가서 연구를 하려고 한 적도 있다.
재무부가 금융 개혁 부문에서 일할 것을 권유, 워싱턴으로 직장을 옮긴 1934년부터 그는 다른 친소분자들과 함께 소련의 지하 공작망에 자발적으로 빠져들었다. 엘리트 관료와 간첩이란 이중(二重)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화이트는 ‘미국판 386세대’인 셈이다. 광주(光州)사태와 민주화의 격동기에 친북좌경화한 세대가 오늘날 한국의 중추를 장악, 국가의 진로(進路)를 왼쪽으로 틀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 세대도 북한정권을 악, 적, 위협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화이트를 ‘그와 같은 개명(開明)된 관료집단이 미래의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은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라고 평했다. 이런 이들은 정부에서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능력 이하라고 불평하는 경향이 있다.
소련의 노련한 공작원은 이런 심리를 간파, 화이트 같은 이들의 역할을 미화(美化)하여 그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수법도 썼다. 화이트는 소련 기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일하는 간첩은 아니었다. 자신의 판단하에 자발적으로 봉사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유용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정리하여 주간, 격주간으로 전달책인 챔버스에게 건네주곤 하였다.
화이트 같은 자발적 간첩들은 정보를 소련에 제공하는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전향한 소련 간첩(미국인) 엘리자베스 벤틀리는 이들의 심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들은 오도(誤導)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옳다고 믿는 것을 한 사람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동맹이다, 러시아는 전쟁의 가장 큰 부담을 지고 있다, 러시아는 더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그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국에 주는 것을 러시아엔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들을 러시아에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유엔 창립 준비 사무총장도 간첩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세계 질서를 관리하기 위하여 만든 두 기구가 IMF와 유엔이다. IMF뿐 아니라 유엔도 소련에 포섭된 미국인 간첩이 창립을 실무적으로 지휘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 관료 및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친소화(親蘇化)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소련 정보기관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동맹 관계가 된 상황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엘저 히스의 정체를 폭로한 사람은 주간지 《타임》의 외신부장이던 휘태커 챔버스였다. 그는 1924년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 공산당에 들어가 당의 문학잡지 편집자로 일하던 중 당(黨)의 지시를 받고 1934년부터 지하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활동이란 게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의 일원으로 비밀문서나 정보를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미국 정부 내의 간첩들이 건네주는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고 원본을 돌려주는 식이었다. 1930년대 후반 그는 불안해졌다. 스탈린의 대숙청에 경악했고 소련으로 불려가 말살될까 겁이 났다. 1938년 4월, 그는 잠적했다가 《타임》에 취직하였다. 기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외신부장이 되었는데, 반공적인 글을 많이 썼다.
챔버스는 소련 측이 자신과 가족에게 보복을 해 오지 않을까를 걱정했다. 1939년 8월, 원수지간이던 히틀러와 스탈린이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자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미국도 위기를 맞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소련 간첩망의 활동상을 직접 설명하려고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국무부 차관보 아돌프 벨레가 대신 나왔다. 챔버스는 벨레의 자택에서 그가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벨레는 기록은 했으나 FBI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소련 간첩에 관련된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FBI가 챔버스를 처음 인터뷰한 것은 1942년이었다. 그 뒤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에 포섭되었던 미국인 간첩 엘리자베스 벤틀리가 전향, 의회에서 미국에서 활동 중인 소련 간첩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급사(急死)한 전임자 루스벨트와는 달리 소련과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미소(美蘇) 관계도 악화되던 시기였다. FBI는 다시 챔버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미국 의회도 조사를 개시하였다.
히스가 소련에 넘겨준 文書
1948년 8월 3일, 전향한 간첩 휘태커 챔버스는 미 하원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에 출석, 여러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폭로하면서 엘저 히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8월 17일 캘리포니아 출신 초선 하원의원 닉슨은 히스와 챔버스 두 사람을 조사위원회로 불러 대질 신문하였다. 히스는 챔버스를 약간 아는 사이라고 했으나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을 부인하였다.
당시 44세이던 히스는 카네기재단의 대표로 있었지만 그 전엔 국무부의 엘리트 관료로 명성을 날리던 이였다. 하버드 법대 졸업생인 히스는 대법원 판사의 서기로 일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워싱턴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국무부에 정착, 요직을 거쳤다. 1945년 초 얄타회담 때 루스벨트 대통령을 수행한 국무부 팀의 일원이었다. 그 직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창립을 위한 준비회의 사무총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FBI는 챔버스와 벤틀리가 제공한 정보를 기초로 하여 히스를 내사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국무부는 그를 사임시켰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카네기재단의 대표로 일하게 되었다.
히스는 챔버스에게 면책특권이 보장된 의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지 말고 바깥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해 보라”고 도전하였다. 챔버스가 그렇게 하자 명예훼손 혐의로 제소(提訴)하였다.
‘호박문서’
1948년 11월 4일 챔버스는 재판 증언에서 “히스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소련 간첩이었다”고 폭탄발언을 하였다. 열흘 뒤 챔버스는 물증(物證)을 제시하였다. 그는 미국 공산당을 떠나기 전에 히스, 화이트 등 미국인 고급간첩들이 자신을 통하여 소련 공작원에게 건네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스가 국무부의 비밀문서들을 육필(肉筆)로 요약한 메모, 타이프라이터로 옮겨 적은 문서 등이었다.
그는 이 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호박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숨겨 두었다가 다시 꺼냈다. 언론에 의하여 ‘호박 문서’로 불리게 된다. 챔버스는, 이것은 히스가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 사이에 소련 측에 넘겨준 문서 중 샘플이라면서 타이프를 친 이는 히스의 부인이라고 폭로하였다. 전문가들은 히스의 필적이 맞다고 감정하였다.
미 하원은 이런 물증 등을 근거로 하여 별도로 히스를 위증죄로 고소하였다. 간첩죄의 시효(時效)는 이미 끝난 뒤였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1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챔버스는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처음엔 히스가 공산주의자이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했다가 이를 번복한 점이 신뢰를 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증언 태도도 불량하게 보였다.
히스의 변호인은 날씬하고, 핸섬하며, 논리적인 피고인을 ‘모범적인 미국시민’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변호인은 히스가 비밀문서를 작성하는 데 썼다고 챔버스가 주장하였던 타이프라이터를 증거물로 제출하였다. ‘히스는 이것을 1937년 12월에, 즉 챔버스가 문서를 받았다고 주장한 날짜 이전에 가정부에게 주었다’고 알리바이를 주장하였다. 이 가정부와 아들은 법정에서 히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였으나 말에 조리가 없었다. 7월 8일, 배심원단은 기소 찬성 8, 기소 반대 4로 평결하였다. 만장일치라야 기소가 가능하다.
有罪 선고, 44개월 복역
미국 정부는 재판을 다시 하기로 하였다. 11월 17일에 시작한 재판에서 검사는 히드 매싱이란 증인을 내세웠다. 매싱은 소련 간첩이던 시절에 히스가 자신의 조직원이던 노엘 필드라는 또 다른 국무부 간첩을 그의 조직으로 빼내 가려 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두 번째 재판에서 히스는 유죄 선고를 받고 44개월간 복역한 뒤 1954년에 석방되었다. 히스 사건은 이게 1막이었다.
미국의 이른바 진보진영(좌파·공산주의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은 히스가 우파에 의한 마녀사냥의 희생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히스를 미국판 드레퓌스로 만들려 했다. 히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우파뿐 아니라 온건 좌파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 수많은 음모론이 난무하고 취재 및 저술활동이 전개되었다.
챔버스는 1952년에 《증인》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내용이 흥미진진하였다. 공산주의자를 거쳐 간첩이 되었다가 반공주의자로 표변, 폭로자로 낙착된 자신의 방황과 고뇌와 번민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었다.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히스도 1957년에 《여론의 법정에서》라는 회고록을 썼다. 미 의회 조사위원회와 법정 자료를 너무 많이 인용하여 재미가 없다.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국무부 생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억울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감정이 없는, 건조한 이야기만 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히스의 결백을 주장하는 책이 세 권 더 나왔으나 설득력 있는 반증(反證)은 없었다. 한편 하원의원 시절 히스를 법정에 세운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히스는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닉슨이 같은 수법으로 자신을 옭아매었다고 주장하였다. 세론(世論)도 히스에 유리하게 돌았다. 히스는 자신을 냉전의 순교자로 그렸고, 대학교에서 인기 초빙 강연자가 되었다. 1975년 매사추세츠 주 변호사회는 히스를 다시 가입시켰다. 그의 무고함을 뒷받침하는 듯하였다.
한 역사연구가의 추적
이 무렵 알렌 와인스타인이란 역사 연구가가 등장한다. 그는 히스가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시작하였다. 챔버스와 히스를 잘 아는 80명을 인터뷰하였다. 동구(東歐)와 이스라엘에 가서 전직 소련 정보기관원들도 만났다. 히스에게 불리한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히스의 변론자료를 얻어 읽어보니 검사에 의한 증거 조작설을 부정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1976년에 《위증》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히스를 틀림없는 소련간첩이라고 못 박았다.
이 책을 둘러싼 좌우(左右) 진영의 논쟁도 뜨거웠다. 와인스타인이 워낙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면밀한 구성의 책을 낸 덕분에 시간이 지나자 좌파의 반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이 책 이후엔 히스 편을 드는 출판이 끊어졌다.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 사망한 챔버스의 반공(反共) 활동을 기려 그에게 ‘자유의 메달’을 주고, 챔버스가 자료를 숨겼던 농장은 국가역사지구로 지정하였다.
1990년을 전후하여 소련과 동구 공산체제가 붕괴되자 히스 논쟁이 재연(再燃)하였다. 히스가 선수를 쳤다. 1992년 5월, 러시아 군사자료실의 책임자이고 평판이 높은 역사학자인 디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에게 편지를 써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달라고 했다. 장군은 히스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런 자료는 없으며 히스에 대한 비방은 근거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히스는 좋아했으나 와인스타인과 다른 역사연구가들이 볼코고노프가 과연 제대로 자료를 검색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볼코고노프는 곧 새로운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자신이 KGB 자료만 뒤졌다고 했다. 히스는 KGB가 아니라 소련군의 정보기관(GRU)을 위하여 간첩질을 하였으므로 엉뚱한 검색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冷戰 종식 뒤 결정적 자료들 나와
히스에게 불리한 자료들이 잇따라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1992년 한 헝가리 역사연구가는 노엘 필드(미국에서 동구로 도망친 국무부 간첩)에 대한 헝가리 비밀경찰의 신문 조서에서 히스가 필드를 자신의 조직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고 진술한 부분을 찾았다. 1996년 10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안보국(NSA)은 1930, 40년대의 소련 암호 해독 자료를 공개하였다. 이게 결정타였다.
1945년 3월 30일자의 소련 암호 전문은 이런 요지를 담고 있었다.
<알레스(Ales·암호명)는 1935년 이후 소련 군사정보 기관을 위하여 일하는 미국 간첩인데, 얄타회담에 참석하였다가 모스크바를 방문, 당시 소련 외무장관 비신스키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비신스키는 알레스의 활동에 감사하였다.>
얄타회담 이후 모스크바로 간 미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를 수행한 이가 엘저 히스였다. 히스의 정체는 냉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확정되었다.
1996년 11월 24일 클린턴 대통령이 CIA 국장 후보로 지명한 앤서니 레이크(전 대통령 안보 보좌관)는 방송 인터뷰에서 “당신은 히스가 간첩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레이크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나는 두서너 개의 책을 읽었는데 그가 스파이였을 것이라는 심증(心證)을 주는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확정적인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파가 레이크의 애매한 태도를 집중적으로 공격, 결국 그를 낙마시켰다.
히스가 간첩이란 사실이 확정되면서 미국 공산당의 정체에 대한 논쟁도 정리되었다. 미국의 자칭 진보파는 미국 공산당을 일종의 자발적 민권(民權)운동 단체인 것처럼 변명하고, 보수파는 이 당이 자진하여 소련 간첩망의 하수기관으로 전락하였다고 공격하였다. 히스의 무고함을 40년 이상 주장해 오던 진보파의 패배로 미국 공산당의 순수성도 부정당하였다.
李承晩이 소련 비판하자 화를 낸 히스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독립투쟁을 하던 이승만(李承晩)은 이 히스와 악연(惡緣)이 있었다.
1941년 12월 22일에 워싱턴을 방문한 영국 수상 처칠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만나 전쟁협력을 위한 회담을 했다. 이에 따라 1942년 1월 1일에 연합국 선언이 나왔는데 망명정부를 포함한 26개국이 서명하였다. 이승만은 헐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 임시정부도 이 선언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려 하였다. 국무부에 갔으나 헐을 만날 수는 없었고, 극동국장 스탠리 혼벡과 그의 보좌관 히스를 면담했다.
손세일(孫世一) 선생이 《월간조선》에 연재 중인 ‘이승만과 김구’에 따르면, 히스는 이(李) 박사의 제안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승인이 왜 중요한가를 다시 설명했다. 그는 소련이 시베리아 교역의 거점이 될 부동항(不凍港)을 한국에 확보하기 위하여 지난 반세기 넘게 호시탐탐해 왔다고 말하고, 미국이 미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과 같은 조치를 해 놓지 않으면 일본이 패망한 뒤에 틀림없이 소련은 한국에 진입하여 점령하고 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히스는 이승만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미국의 중요한 전시(戰時)동맹국을 공격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히스는 한국에 관한 문제는 일본이 패망한 뒤에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히스는 소련을 조국으로 여기면서 정보를 열심히 건네주고 있었으니, 이 박사의 소련 비판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얄타회담의 최고 비밀 자료를 간첩이 관리
히스는 1996년에 죽었다. 그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소련 간첩임이 확정된 뒤에도 히스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이들이 활동 중이다. 2007년 4월엔 뉴욕 대학에서 ‘엘저 히스와 역사’란 제목의 회의를 열었다. 끈질기게 히스를 비호해 온 좌익 잡지 《더 네이션》의 편집장 빅터 나바스키가 기조연설을 하고, 히스의 양자(養子) 티모시 홉슨도 참석하였다.
작년엔 미국 국방부 정보국의 소련 분석관 출신 크리스티나 셀턴이 쓴 《엘저 히스: 왜 그는 반역을 선택하였나》라는 책이 나왔다. 히스가 얄타회담에서 한 역할이 언급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 질서를 결정한 이 역사적 회담에서 히스는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의 보좌관으로 참여, ‘블랙 북’을 관리하였다. ‘블랙 북’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탈린, 처칠과 논의할 주제에 대한 미국의 전략을 정리한 최고 기밀의 자료집이었다. 소련 간첩이 20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회담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관리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국무부의 모든 회담 준비 자료는 히스에게 전해졌다. 당시 국무부는 소련에 일본 영토 쿠릴과 사할린을 넘기는 데 반대한다는 메모를 작성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용 브리핑 자료집에선 빠져 있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국무부의 입장을 잘 알지 못하고 회담에 임해 두 지역을 종전(終戰) 뒤 소련에 양도하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히스 등 미국 내 소련 간첩망으로부터 얻은 정보로 미국 측의 얄타회담 전략을 미리 알고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문서 보관소에서 쿠릴의 양도에 반대하는 미 국무부 문서가 발견되었다. 저자는 이 문서가 히스에 의하여 제공되었을 것이라고 썼다. 히스는 극비 문서를 루스벨트에겐 보고하지 않고, 소련에 건네주었다는 뜻이다.
양식 있는 교양인 행세를 한 히스는 왜 그토록 오래 거짓말을 하였을까? 이 의문에 대하여 미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 편집국장 출신 루이스 부덴즈는 히스가 당(黨)을 위하여 소신 있게 거짓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골수 공산주의자였던 히스의 양심은 ‘당의 이익을 위한 무한한 봉사’에 있으므로 그런 사람에게 진실은 사실이 아니라 당의 명령이란 것이다.
한국의 종북인사들이 보여주는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진실된 고백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히스를 부렸던 소련군 정보기관 GRU의 문서는 공개된 적이 없다. 히스의 비밀은 몸통이 아직 밀봉(密封) 상태이다.
오웰의 블랙리스트
화이트와 히스의 정체가 폭로되던 시기에 영국에서도 한 전향자(轉向者)가 문학활동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위선과 악마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1949년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1984》를 출판한 뒤 병원에서 폐결핵 치료를 받고 있었다. 《백주(白晝)의 암흑》이란 소설로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을 폭로하였던 아서 케스틀러의 처제(妻弟)인 셀리아 커완이 찾아왔다. 커완은 영국 노동당 정부가 설립한 정보조사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부서는 대(對)공산권 선전을 맡았는데 커완은 국장의 보좌관이었다.
오웰은 비밀 공산주의자이거나 동조자로 의심되는 38명의 이름을 적어 커완에게 건네주었다. 대(對)공산권 선전을 할 때 이 사람들을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 명단은 ‘오웰 리스트’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 정부가 명단을 공개한 것은 오웰이 죽고 53년 뒤인 2003년이었다. 사회주의자로서 스페인 내전(內戰) 때 좌파 편에서 참전하였던 오웰은 좌익 인맥에 밝았다. 신문사의 서평(書評) 담당 기자로 일한 적도 있어 지식인 사회의 동향(動向)에 정보가 많았다. 그는 1940년대 중반부터 ‘비밀 공산당원’ ‘동조자’ 등으로 분류된 명단을 공책에 정리해 두고 있었다. 135명에 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38명을 추려서 커완에게 준 것이다. 주요 인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간첩이 된 기자
스페인 내전을 통하여 스탈린주의자들의 행태를 속속들이 알게 된 오웰은 공산전체주의를 파시즘과 같은 인류의 적이라고 보았다. 그가 작성한 명단에 오른 지식인들은 거의가 친소적 인사들이다. 이 명단은 수사용(搜査用)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원고를 청탁한다든지 방송에 출연시켜선 안 된다는 정도의 정보였다. 이 명단이 작성된 이후 드러난 이들의 행태를 분석하면 오웰이 사람을 잘 보았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피터 스몰렛 기자는 소련 KGB에 포섭된 간첩으로 밝혀졌다. 그를 포섭한 사람은 영국 정보기관의 요직에서 근무 중이던 킴 필비였다. 필비는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 때부터 KGB에 포섭된 간첩이었다. 스몰렛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엔 영국 전시정부의 정보부에서 소련과(課) 과장으로 일했다.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특파원 월터 듀런티는 1930년대의 소련에 대하여 보도하면서 스탈린의 숙청을 비호하고, 대기근(大飢饉)은 축소 왜곡하였다. 그는 1932년 소련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동료 기자들은 소련 선전물을 받아 기사를 쓰는 그를 경멸하였다.
2003년 《뉴욕타임스》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 마크 폰 하겐에게 의뢰하여 듀런티의 퓰리처상 기사를 검증하도록 하였다. 하겐 교수는, 듀런티 기자가 편파적이고 비판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스탈린의 선전물에 너무 의존하였다면서 《뉴욕타임스》의 명예를 위하여 스스로 이 상을 반납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뉴욕타임스》는 하겐 교수의 보고서를 퓰리처상 위원회에 보냈으나 위원회는 상 회수까지 가진 않았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동시에 옹호한 E. H. 카
스탈린과 소련의 전체주의를 가장 오랫동안, 가장 심하게 왜곡한 사람은 역사학자 E. H. 카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스탈린과 히틀러를 동시에 옹호하였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긴 것이라면서 체임벌린 영국 정부의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도 지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연 독소(獨蘇)불가침조약까지도 옹호하였다. 그는 14권짜리 소련 역사를 썼는데, 왜곡의 결정판이다. 지금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카는 마르크시즘이 가장 성공적인 전체주의라면서 소련의 사회복지 정책은 유럽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격찬하였다. 그는 소련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눈먼 사람, 치유가 불가능한 사람’이란 악담도 쏟아 부었다. 1970년대 말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 노선을 버리고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자 ‘퇴보적’이라고 비방하였다.
노먼 에인절은 카를 ‘도덕적 허무주의’라고 혹평하였다. 미국의 리처드 파이프스는 카의 소련 옹호는 유대인 학살 옹호와 같다고 경멸했다. ‘영국의 송두율’ 같은 E. H. 카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많은 것은 지적(知的) 천박성의 한 증거일 것이다.
조지 오웰의 리스트에 오른 친소(親蘇)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동성연애자와 변태성욕자들이었다. 변태장면이 KGB에 약점으로 잡혀 소련을 위한 봉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조국에 반역하는 풍조가 지식인 사회에 만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올해 초 미국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가 《브레턴우즈의 전투: 존 메이너드 케인스, 해리 덱스터 화이트, 그리고 새 세계 질서 만들기》란 책을 펴냈다. 필자는 권위 있는 외교정책 잡지 《포린 어페어스》를 발행하는 미국의 외교협회 국제경제 담당 국장 벤 스틸(Benn Steil). 한국인과 친숙한 국제통화기금(IMF) 창립의 설계자가 소련 간첩이었다는 폭로가 흥미롭다. 고관(高官)과 지식인들의 간첩질과 반역질이 횡행하는 한국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다.
1944년 7월, 제2차 세계대전이 노르망디 부근에서, 독·소(獨蘇)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44개국 대표가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턴우즈에서 만나 전후(戰後) 국제경제 질서를 관리할 기구의 설치를 논의하였다. IMF와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한 브레턴우즈 시스템의 두 설계자는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미국 재무부의 엘리트 관료 해리 덱스터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일벌레였다. 그는 디테일에 강했고, 정책을 논리적 구조로 정리하는 데 뛰어났다. 화이트는 케인스와 자주 다투었다. 그는 영국인 앞에서 영국여왕을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화이트는 자신의 후견인인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개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영국제국의 쇠퇴기를 이용하여, 달러 중심의 전후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는 영국에 적대적(敵對的)이었지만 소련엔 우호적이었다.
소련에 지폐 인쇄 銅版 넘겨 65억 달러 손해 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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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턴우즈 회의에서의 화이트(왼쪽)와 케인스. 미 재무부 고위 관료였던 화이트는 소련의 간첩이었다. |
“우리는 소련을 충분히 돕지 못하였다. 이 거래로 소련이 이익을 본다면 우리는 소련의 전쟁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련을 다른 동맹국과 똑같이 믿어야 한다.”
모겐소 재무장관은 화이트의 손을 들어 주었다. 예상한 대로 소련은 점령한 독일지역에서 미제(美製) 동판(銅版)으로 마르크를 많이 찍었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가 100억5000만 마르크를 찍은 데 비해 소련은 780억 마르크를 찍었다. 화이트는 소련 발행 마르크를 미국이 (소련에 유리한 고정 환율로) 매입하도록 하였다. 지금 돈으로 소련은 약 65억 달러의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전후 국제통화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브레턴우즈 회의에서도 화이트는 다른 나라 대표들을 화나게 만들면서까지 소련에 유리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회의에서 소련이 브레턴우즈 조약을 비준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미국이 소련에 100억 달러의 저리(低利) 재건 차관을 제공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소련은 이를 트집 잡아 IMF와 세계은행 창립 참여를 거부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화이트를 IMF 총재로 추천하려 하였다. 그 전 단계 조치로 1946년 1월 23일, 화이트를 미국을 대표하는 이사로 임명하였다. 2주(週) 뒤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대통령에게 “화이트는 소련 지하 첩보 조직의 조력자(助力者)”라는 보고를 올렸다. 후버는 화이트가 “미국 정부 안에 소련 첩보 조직을 심었다”고 주장하였다. 미 상원은 이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어 화이트의 임명에 동의하였다. 트루먼은 잘못하면 정치적 스캔들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 화이트를 총재로 추천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미국인을 총재로 추천하는 것도 포기하였다.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의 총재 자리 모두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다른 이유를 대면서 IMF 총재 자리는 양보하였다.
간첩 폭로
루스벨트-트루먼 정부는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망에 대한 보고를 해도 묵살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반공(反共)노선을 확실히 하였지만 그가 루스벨트의 급사(急死) 후 인수한 민주당 정부 안엔 뉴딜 정책에 찬동하여 참여한 공산주의자와 친소(親蘇)분자들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화이트에 대한 FBI의 내사(內査)만 있었을 뿐 공개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 사이 화이트는 재무부와 IMF를 사직하고, 1948년 대선(大選)에 출마한 진보당 대통령 후보 헨리 월레스를 도왔다.
친소적(親蘇的)인 월레스는 상무장관으로 트루먼 행정부에서 일했으나 대소(對蘇) 강경 정책에 반대, 그만둔 뒤 출마한 것이다. 월레스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적 이정표(里程標)라고 평가한 사람이다. 그는 이념 지형상 ‘미국판 김대중’의 역할을 했는데 단지 다른 점은 낙선했다는 사실이다. 월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화이트는 재무장관, 다른 소련 간첩 엘저 히스는 국무장관이 되었을 것이다.
1948년 여름, 소련 간첩질을 하다가 전향한 두 사람(벤틀리와 챔버스)이 미 하원의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에서 화이트, 히스 등 소련 간첩들의 명단을 폭로하였다. 화이트는 8월 13일 이 위원회에 호출되어 증언하였다.
모두(冒頭) 발언에서 그는 “나의 신조는 미국의 신조이다”면서 “나는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신봉하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방청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화이트는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고 폭로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35세의 신참 하원의원인 리처드 닉슨은 화이트를 위증죄(僞證罪)로 걸기 위하여 간첩 챔버스를 만난 적이 없다는 거짓말을 이끌어내려 했다. 화이트는 “만난 기억이 안 난다”는 말로 피해 나갔다. 이날 증언에서 화이트는 밀리지 않았으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음이 곧 밝혀졌다.
다음 날 그는 뉴햄프셔 주에 있는 별장으로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이튿날 사망하였다. 미 하원 조사위원회는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0년 1월 26일 닉슨은 조사위원회에서 결정적인 폭로를 했다. 화이트가 소련에 포섭된 간첩이던 휘태커 챔버스에게 넘긴 8페이지 문서의 사본(寫本)을 제시한 것이다. 챔버스는 화이트와 히스가 소련 정보기관에 넘겨주라고 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화이트가 소련에 제공한 문서들은 손으로 쓴 것인데, 고급 비밀이 많았다. 군사 및 외교 분야의 문서들이 주(主)였다. 미 국무부와 재무부에서 생산한 정보와 이에 대한 화이트의 논평들이었다. 미국의 대일(對日)정책, 예컨대 일본에 대한 경제봉쇄와 자산동결 조치, 일본의 석유저장소와 방어 상황,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와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의 비밀 대화록 등등. ‘대통령의 요구에 의하여 작성된 대일 경제전쟁 계획은 재무부 이외엔 비밀에 부쳐져 있다’는 화이트의 메모도 있었다.
《브레턴우즈의 전투》의 저자(著者) 벤 스틸은 “화이트는 엘저 히스보다도 소련에 더 중요한 간첩이었다”고 평했다. 화이트는 1930년대 중반부터 자발적으로 ‘소련 첩보기관의 두더지(mole)’ 역할을 하였다. 그는 미국 정책에 관련한 최고급 정보와 조언을 소련에 전달, 미국 정부와 협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는 미국 정부 내에서 정책 협의를 할 때는 소련 편을 들었다. 단순한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완벽한 정책 협력자였다. 화이트는 일찍 죽는 바람에 기소를 면하였으나 그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 없이 확정되었다.
암호 해독으로 간첩임을 확정짓다
미국의 첩보기관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국을 오고가는 외국기관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 계획(Venona Project)을 실천에 옮긴다. 이 계획의 전모(全貌)는 냉전(冷戰)이 끝난 뒤 공개되었다. 미국이 소련의 암호 해독에 성공한 것은 1946년이었다. 이에 따라 보존된 과거의 통신자료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화이트의 이름(암호명)이 등장하는 자료는 18건이고, 1944년 3월 16일부터 1946년 1월 8일까지이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헌장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화이트는 미국 대표단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그는 기자로 위장한 소련 정보기관(KGB) 간부 블라디미르 프라브딘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프라브딘이 모스크바 본부로 보고한 전문(電文)을 해독해 보니, 화이트는 “트루먼과 국무부 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번 회의가 성공하기를 원한다. 미국은 유엔에서 소련에 거부권을 주는 데 동의할 것이다”고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화이트가 소련에 “지금 추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미국 차관을 얻을 수 있다”는 정보를 준 사실, 화이트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소련 동조자를 미국 정부 내 관리로 임명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보고문도 해독(解讀)되었다.
화이트를 변호하는 이들은 “프라브딘이 소련 첩보원인 줄 모르고, 즉 기자인 줄 알고 그런 정보를 주었을 것이다”고 주장하였으나 냉전이 끝난 후 KGB 자료를 본 서방 학자들은 미국 정부 내의 다른 ‘소련 두더지’가 소련 첩보 기관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는 문서를 발견하였다.
<화이트는 그가 제공한 정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잘 안다. 그것이 그가 (그런 식으로) 정보를 건네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베노나 계획이 해독한 소련의 암호 전문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우리와 협력하는 문제에 대하여 (화이트는) 그의 아내가 어떤 희생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에 대하여는 개의치 않으나 비밀이 알려질 경우 정치적 스캔들로 이어질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화이트가 건네주는 문서를 소련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다가 전향(轉向)하였던 챔버스는 1953년에 평하기를, “화이트는 미국의 대소(對蘇) 정책을 소련에 유리하도록 수립할 수 있는 완벽한 관료였다”고 했다.
《브레턴우즈의 전투》 저자 벤 스틸은 왜 이런 엘리트가 ‘소련의 두더지’가 되었는가를 해명하려 한다. 그는 “화이트 사건은 증인(證人)과 흉기(凶器)는 있는데, 범행의 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살인사건과 비슷하다”면서 동기를 추적하다가 프린스턴 대학교에 소장된 화이트 관련 자료뭉치에서 ‘노란 종이 위에 쓴 메모’를 찾아냈다. 정부 안에서 그의 영향력이 가장 강할 때인 1944년에 쓴 것이다. 제목은 ‘미래의 정치-경제’였다. 저자는 이 자료가 지적(知的)으로 야망에 불타던 시절, 이 사람의 사고방식과 열망을 엿보게 하는 창문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메모를 보면 화이트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낙관,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관에 차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상황을 심각하게 오판(誤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북좌파 분자들의 북한정권에 대한 오판을 연상시킨다. 몇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미래에는) 사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강화되고, 경쟁과 자유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는 늘어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러시아는 종교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소련의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현재 소련이 추구하는 정책은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서구(西歐)가 소련을 악마(惡魔)로 그리는 것은 위선(僞善)이라면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재침(再侵)을 막기 위하여 소련과 군사동맹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피력하였다. 이런 구상에 대한 걸림돌이 미국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애국심으로 위장한 제국주의’ ‘매우 강력한 가톨릭 위계질서’,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와 동맹하면 자본주의가 약화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그룹’이다.
화이트는 이런 반소적(反蘇的) 생각의 핵심은 경제이념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러시아를 사회주의 이념의 원천이라고 경계한다’는 것이다. 저자 벤 스틸은 “미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 전략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면서 화이트 메모의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였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경제가 작동하는 첫 번째 경우인데, 잘 돌아간다!>
저자는 화이트의 정체(正體)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전후(戰後) 세계 자본주의 금융 질서의 설계자는 소련의 행태를 빨간 안경을 쓰고 보았다. 이는 단순히 소련이 미국의 중요한 우군(友軍)이라고 믿어서라기보다는 소련의 대담한 사회주의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확신한 탓이다.>
미국판 386세대
저자는 화이트가 돌연변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격동의 1920, 30년대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미국의 ‘친러파(Russophile)’ 세대의 작가나 관리들이 대체로 그런 성향이었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격변, 대공황, 국제 무역 및 통화 질서의 붕괴를 목격한 이 세대는 혁명적인 정치 경제 질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소련이 1917년 혁명 뒤에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매진하는 것을 보고, 또 파시즘과 맞서는 것을 보고, 나중엔 소련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본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이 친소(親蘇)로 기울었다. 이들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하고 정부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친소 분자들의 숙주(宿主) 역할을 하였다. 그는 전후 세계 질서가 미영(美英)이 아니라 미소(美蘇) 중심으로 짜여야 한다는 생각도 하였다.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에 대한 보고를 올려도 묵살하였다. 루스벨트도 화이트처럼 소련과 스탈린을 악(惡), 적(敵), 위협으로 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화이트는 1924년 대통령 선거에 나온 진보당 후보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친소-좌경화되었다. 그는 소련의 계획경제에 매혹되어 로렌스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된 직후 소련에 가서 연구를 하려고 한 적도 있다.
재무부가 금융 개혁 부문에서 일할 것을 권유, 워싱턴으로 직장을 옮긴 1934년부터 그는 다른 친소분자들과 함께 소련의 지하 공작망에 자발적으로 빠져들었다. 엘리트 관료와 간첩이란 이중(二重)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화이트는 ‘미국판 386세대’인 셈이다. 광주(光州)사태와 민주화의 격동기에 친북좌경화한 세대가 오늘날 한국의 중추를 장악, 국가의 진로(進路)를 왼쪽으로 틀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 세대도 북한정권을 악, 적, 위협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화이트를 ‘그와 같은 개명(開明)된 관료집단이 미래의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은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라고 평했다. 이런 이들은 정부에서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능력 이하라고 불평하는 경향이 있다.
소련의 노련한 공작원은 이런 심리를 간파, 화이트 같은 이들의 역할을 미화(美化)하여 그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수법도 썼다. 화이트는 소련 기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일하는 간첩은 아니었다. 자신의 판단하에 자발적으로 봉사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유용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정리하여 주간, 격주간으로 전달책인 챔버스에게 건네주곤 하였다.
화이트 같은 자발적 간첩들은 정보를 소련에 제공하는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전향한 소련 간첩(미국인) 엘리자베스 벤틀리는 이들의 심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들은 오도(誤導)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옳다고 믿는 것을 한 사람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동맹이다, 러시아는 전쟁의 가장 큰 부담을 지고 있다, 러시아는 더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그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국에 주는 것을 러시아엔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들을 러시아에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세계 질서를 관리하기 위하여 만든 두 기구가 IMF와 유엔이다. IMF뿐 아니라 유엔도 소련에 포섭된 미국인 간첩이 창립을 실무적으로 지휘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 관료 및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친소화(親蘇化)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소련 정보기관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동맹 관계가 된 상황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엘저 히스의 정체를 폭로한 사람은 주간지 《타임》의 외신부장이던 휘태커 챔버스였다. 그는 1924년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 공산당에 들어가 당의 문학잡지 편집자로 일하던 중 당(黨)의 지시를 받고 1934년부터 지하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활동이란 게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의 일원으로 비밀문서나 정보를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미국 정부 내의 간첩들이 건네주는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고 원본을 돌려주는 식이었다. 1930년대 후반 그는 불안해졌다. 스탈린의 대숙청에 경악했고 소련으로 불려가 말살될까 겁이 났다. 1938년 4월, 그는 잠적했다가 《타임》에 취직하였다. 기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외신부장이 되었는데, 반공적인 글을 많이 썼다.
챔버스는 소련 측이 자신과 가족에게 보복을 해 오지 않을까를 걱정했다. 1939년 8월, 원수지간이던 히틀러와 스탈린이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자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미국도 위기를 맞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소련 간첩망의 활동상을 직접 설명하려고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국무부 차관보 아돌프 벨레가 대신 나왔다. 챔버스는 벨레의 자택에서 그가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벨레는 기록은 했으나 FBI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소련 간첩에 관련된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FBI가 챔버스를 처음 인터뷰한 것은 1942년이었다. 그 뒤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에 포섭되었던 미국인 간첩 엘리자베스 벤틀리가 전향, 의회에서 미국에서 활동 중인 소련 간첩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급사(急死)한 전임자 루스벨트와는 달리 소련과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미소(美蘇) 관계도 악화되던 시기였다. FBI는 다시 챔버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미국 의회도 조사를 개시하였다.
히스가 소련에 넘겨준 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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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소련 간첩망을 고발한 휘태커 챔버스. |
당시 44세이던 히스는 카네기재단의 대표로 있었지만 그 전엔 국무부의 엘리트 관료로 명성을 날리던 이였다. 하버드 법대 졸업생인 히스는 대법원 판사의 서기로 일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워싱턴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국무부에 정착, 요직을 거쳤다. 1945년 초 얄타회담 때 루스벨트 대통령을 수행한 국무부 팀의 일원이었다. 그 직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창립을 위한 준비회의 사무총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FBI는 챔버스와 벤틀리가 제공한 정보를 기초로 하여 히스를 내사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국무부는 그를 사임시켰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카네기재단의 대표로 일하게 되었다.
히스는 챔버스에게 면책특권이 보장된 의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지 말고 바깥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해 보라”고 도전하였다. 챔버스가 그렇게 하자 명예훼손 혐의로 제소(提訴)하였다.
‘호박문서’
1948년 11월 4일 챔버스는 재판 증언에서 “히스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소련 간첩이었다”고 폭탄발언을 하였다. 열흘 뒤 챔버스는 물증(物證)을 제시하였다. 그는 미국 공산당을 떠나기 전에 히스, 화이트 등 미국인 고급간첩들이 자신을 통하여 소련 공작원에게 건네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스가 국무부의 비밀문서들을 육필(肉筆)로 요약한 메모, 타이프라이터로 옮겨 적은 문서 등이었다.
그는 이 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호박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숨겨 두었다가 다시 꺼냈다. 언론에 의하여 ‘호박 문서’로 불리게 된다. 챔버스는, 이것은 히스가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 사이에 소련 측에 넘겨준 문서 중 샘플이라면서 타이프를 친 이는 히스의 부인이라고 폭로하였다. 전문가들은 히스의 필적이 맞다고 감정하였다.
미 하원은 이런 물증 등을 근거로 하여 별도로 히스를 위증죄로 고소하였다. 간첩죄의 시효(時效)는 이미 끝난 뒤였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1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챔버스는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처음엔 히스가 공산주의자이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했다가 이를 번복한 점이 신뢰를 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증언 태도도 불량하게 보였다.
히스의 변호인은 날씬하고, 핸섬하며, 논리적인 피고인을 ‘모범적인 미국시민’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변호인은 히스가 비밀문서를 작성하는 데 썼다고 챔버스가 주장하였던 타이프라이터를 증거물로 제출하였다. ‘히스는 이것을 1937년 12월에, 즉 챔버스가 문서를 받았다고 주장한 날짜 이전에 가정부에게 주었다’고 알리바이를 주장하였다. 이 가정부와 아들은 법정에서 히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였으나 말에 조리가 없었다. 7월 8일, 배심원단은 기소 찬성 8, 기소 반대 4로 평결하였다. 만장일치라야 기소가 가능하다.
有罪 선고, 44개월 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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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엘저 히스. 그는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평생 무죄를 주장했다. |
미국의 이른바 진보진영(좌파·공산주의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은 히스가 우파에 의한 마녀사냥의 희생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히스를 미국판 드레퓌스로 만들려 했다. 히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우파뿐 아니라 온건 좌파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 수많은 음모론이 난무하고 취재 및 저술활동이 전개되었다.
챔버스는 1952년에 《증인》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내용이 흥미진진하였다. 공산주의자를 거쳐 간첩이 되었다가 반공주의자로 표변, 폭로자로 낙착된 자신의 방황과 고뇌와 번민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었다.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히스도 1957년에 《여론의 법정에서》라는 회고록을 썼다. 미 의회 조사위원회와 법정 자료를 너무 많이 인용하여 재미가 없다.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국무부 생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억울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감정이 없는, 건조한 이야기만 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히스의 결백을 주장하는 책이 세 권 더 나왔으나 설득력 있는 반증(反證)은 없었다. 한편 하원의원 시절 히스를 법정에 세운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히스는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닉슨이 같은 수법으로 자신을 옭아매었다고 주장하였다. 세론(世論)도 히스에 유리하게 돌았다. 히스는 자신을 냉전의 순교자로 그렸고, 대학교에서 인기 초빙 강연자가 되었다. 1975년 매사추세츠 주 변호사회는 히스를 다시 가입시켰다. 그의 무고함을 뒷받침하는 듯하였다.
한 역사연구가의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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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저 히스가 소련 간첩이었음을 밝혀낸 알렌 와인스타인. |
이 책을 둘러싼 좌우(左右) 진영의 논쟁도 뜨거웠다. 와인스타인이 워낙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면밀한 구성의 책을 낸 덕분에 시간이 지나자 좌파의 반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이 책 이후엔 히스 편을 드는 출판이 끊어졌다.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 사망한 챔버스의 반공(反共) 활동을 기려 그에게 ‘자유의 메달’을 주고, 챔버스가 자료를 숨겼던 농장은 국가역사지구로 지정하였다.
1990년을 전후하여 소련과 동구 공산체제가 붕괴되자 히스 논쟁이 재연(再燃)하였다. 히스가 선수를 쳤다. 1992년 5월, 러시아 군사자료실의 책임자이고 평판이 높은 역사학자인 디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에게 편지를 써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달라고 했다. 장군은 히스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런 자료는 없으며 히스에 대한 비방은 근거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히스는 좋아했으나 와인스타인과 다른 역사연구가들이 볼코고노프가 과연 제대로 자료를 검색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볼코고노프는 곧 새로운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자신이 KGB 자료만 뒤졌다고 했다. 히스는 KGB가 아니라 소련군의 정보기관(GRU)을 위하여 간첩질을 하였으므로 엉뚱한 검색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冷戰 종식 뒤 결정적 자료들 나와
히스에게 불리한 자료들이 잇따라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1992년 한 헝가리 역사연구가는 노엘 필드(미국에서 동구로 도망친 국무부 간첩)에 대한 헝가리 비밀경찰의 신문 조서에서 히스가 필드를 자신의 조직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고 진술한 부분을 찾았다. 1996년 10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안보국(NSA)은 1930, 40년대의 소련 암호 해독 자료를 공개하였다. 이게 결정타였다.
1945년 3월 30일자의 소련 암호 전문은 이런 요지를 담고 있었다.
<알레스(Ales·암호명)는 1935년 이후 소련 군사정보 기관을 위하여 일하는 미국 간첩인데, 얄타회담에 참석하였다가 모스크바를 방문, 당시 소련 외무장관 비신스키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비신스키는 알레스의 활동에 감사하였다.>
얄타회담 이후 모스크바로 간 미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를 수행한 이가 엘저 히스였다. 히스의 정체는 냉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확정되었다.
1996년 11월 24일 클린턴 대통령이 CIA 국장 후보로 지명한 앤서니 레이크(전 대통령 안보 보좌관)는 방송 인터뷰에서 “당신은 히스가 간첩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레이크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나는 두서너 개의 책을 읽었는데 그가 스파이였을 것이라는 심증(心證)을 주는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확정적인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파가 레이크의 애매한 태도를 집중적으로 공격, 결국 그를 낙마시켰다.
히스가 간첩이란 사실이 확정되면서 미국 공산당의 정체에 대한 논쟁도 정리되었다. 미국의 자칭 진보파는 미국 공산당을 일종의 자발적 민권(民權)운동 단체인 것처럼 변명하고, 보수파는 이 당이 자진하여 소련 간첩망의 하수기관으로 전락하였다고 공격하였다. 히스의 무고함을 40년 이상 주장해 오던 진보파의 패배로 미국 공산당의 순수성도 부정당하였다.
李承晩이 소련 비판하자 화를 낸 히스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독립투쟁을 하던 이승만(李承晩)은 이 히스와 악연(惡緣)이 있었다.
1941년 12월 22일에 워싱턴을 방문한 영국 수상 처칠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만나 전쟁협력을 위한 회담을 했다. 이에 따라 1942년 1월 1일에 연합국 선언이 나왔는데 망명정부를 포함한 26개국이 서명하였다. 이승만은 헐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 임시정부도 이 선언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려 하였다. 국무부에 갔으나 헐을 만날 수는 없었고, 극동국장 스탠리 혼벡과 그의 보좌관 히스를 면담했다.
손세일(孫世一) 선생이 《월간조선》에 연재 중인 ‘이승만과 김구’에 따르면, 히스는 이(李) 박사의 제안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승인이 왜 중요한가를 다시 설명했다. 그는 소련이 시베리아 교역의 거점이 될 부동항(不凍港)을 한국에 확보하기 위하여 지난 반세기 넘게 호시탐탐해 왔다고 말하고, 미국이 미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과 같은 조치를 해 놓지 않으면 일본이 패망한 뒤에 틀림없이 소련은 한국에 진입하여 점령하고 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히스는 이승만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미국의 중요한 전시(戰時)동맹국을 공격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히스는 한국에 관한 문제는 일본이 패망한 뒤에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히스는 소련을 조국으로 여기면서 정보를 열심히 건네주고 있었으니, 이 박사의 소련 비판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얄타회담의 최고 비밀 자료를 간첩이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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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의 유엔 창립 준비 회의에서 연설하는 트루먼 대통령. 왼쪽부터 트루먼, 미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사무총장 엘저 히스(원안). 히스는 당시 소련 간첩이었다. (사진출처: Harry S. Truman Library and Museum) |
작년엔 미국 국방부 정보국의 소련 분석관 출신 크리스티나 셀턴이 쓴 《엘저 히스: 왜 그는 반역을 선택하였나》라는 책이 나왔다. 히스가 얄타회담에서 한 역할이 언급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 질서를 결정한 이 역사적 회담에서 히스는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의 보좌관으로 참여, ‘블랙 북’을 관리하였다. ‘블랙 북’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탈린, 처칠과 논의할 주제에 대한 미국의 전략을 정리한 최고 기밀의 자료집이었다. 소련 간첩이 20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회담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관리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국무부의 모든 회담 준비 자료는 히스에게 전해졌다. 당시 국무부는 소련에 일본 영토 쿠릴과 사할린을 넘기는 데 반대한다는 메모를 작성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용 브리핑 자료집에선 빠져 있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국무부의 입장을 잘 알지 못하고 회담에 임해 두 지역을 종전(終戰) 뒤 소련에 양도하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히스 등 미국 내 소련 간첩망으로부터 얻은 정보로 미국 측의 얄타회담 전략을 미리 알고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문서 보관소에서 쿠릴의 양도에 반대하는 미 국무부 문서가 발견되었다. 저자는 이 문서가 히스에 의하여 제공되었을 것이라고 썼다. 히스는 극비 문서를 루스벨트에겐 보고하지 않고, 소련에 건네주었다는 뜻이다.
양식 있는 교양인 행세를 한 히스는 왜 그토록 오래 거짓말을 하였을까? 이 의문에 대하여 미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 편집국장 출신 루이스 부덴즈는 히스가 당(黨)을 위하여 소신 있게 거짓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골수 공산주의자였던 히스의 양심은 ‘당의 이익을 위한 무한한 봉사’에 있으므로 그런 사람에게 진실은 사실이 아니라 당의 명령이란 것이다.
한국의 종북인사들이 보여주는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진실된 고백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히스를 부렸던 소련군 정보기관 GRU의 문서는 공개된 적이 없다. 히스의 비밀은 몸통이 아직 밀봉(密封) 상태이다.
오웰의 블랙리스트
화이트와 히스의 정체가 폭로되던 시기에 영국에서도 한 전향자(轉向者)가 문학활동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위선과 악마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1949년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1984》를 출판한 뒤 병원에서 폐결핵 치료를 받고 있었다. 《백주(白晝)의 암흑》이란 소설로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을 폭로하였던 아서 케스틀러의 처제(妻弟)인 셀리아 커완이 찾아왔다. 커완은 영국 노동당 정부가 설립한 정보조사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부서는 대(對)공산권 선전을 맡았는데 커완은 국장의 보좌관이었다.
오웰은 비밀 공산주의자이거나 동조자로 의심되는 38명의 이름을 적어 커완에게 건네주었다. 대(對)공산권 선전을 할 때 이 사람들을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 명단은 ‘오웰 리스트’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 정부가 명단을 공개한 것은 오웰이 죽고 53년 뒤인 2003년이었다. 사회주의자로서 스페인 내전(內戰) 때 좌파 편에서 참전하였던 오웰은 좌익 인맥에 밝았다. 신문사의 서평(書評) 담당 기자로 일한 적도 있어 지식인 사회의 동향(動向)에 정보가 많았다. 그는 1940년대 중반부터 ‘비밀 공산당원’ ‘동조자’ 등으로 분류된 명단을 공책에 정리해 두고 있었다. 135명에 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38명을 추려서 커완에게 준 것이다. 주요 인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간첩이 된 기자
스페인 내전을 통하여 스탈린주의자들의 행태를 속속들이 알게 된 오웰은 공산전체주의를 파시즘과 같은 인류의 적이라고 보았다. 그가 작성한 명단에 오른 지식인들은 거의가 친소적 인사들이다. 이 명단은 수사용(搜査用)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원고를 청탁한다든지 방송에 출연시켜선 안 된다는 정도의 정보였다. 이 명단이 작성된 이후 드러난 이들의 행태를 분석하면 오웰이 사람을 잘 보았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피터 스몰렛 기자는 소련 KGB에 포섭된 간첩으로 밝혀졌다. 그를 포섭한 사람은 영국 정보기관의 요직에서 근무 중이던 킴 필비였다. 필비는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 때부터 KGB에 포섭된 간첩이었다. 스몰렛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엔 영국 전시정부의 정보부에서 소련과(課) 과장으로 일했다.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특파원 월터 듀런티는 1930년대의 소련에 대하여 보도하면서 스탈린의 숙청을 비호하고, 대기근(大飢饉)은 축소 왜곡하였다. 그는 1932년 소련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동료 기자들은 소련 선전물을 받아 기사를 쓰는 그를 경멸하였다.
2003년 《뉴욕타임스》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 마크 폰 하겐에게 의뢰하여 듀런티의 퓰리처상 기사를 검증하도록 하였다. 하겐 교수는, 듀런티 기자가 편파적이고 비판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스탈린의 선전물에 너무 의존하였다면서 《뉴욕타임스》의 명예를 위하여 스스로 이 상을 반납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뉴욕타임스》는 하겐 교수의 보고서를 퓰리처상 위원회에 보냈으나 위원회는 상 회수까지 가진 않았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동시에 옹호한 E. H.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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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카는 마르크시즘이 가장 성공적인 전체주의라면서 소련의 사회복지 정책은 유럽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격찬하였다. 그는 소련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눈먼 사람, 치유가 불가능한 사람’이란 악담도 쏟아 부었다. 1970년대 말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 노선을 버리고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자 ‘퇴보적’이라고 비방하였다.
노먼 에인절은 카를 ‘도덕적 허무주의’라고 혹평하였다. 미국의 리처드 파이프스는 카의 소련 옹호는 유대인 학살 옹호와 같다고 경멸했다. ‘영국의 송두율’ 같은 E. H. 카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많은 것은 지적(知的) 천박성의 한 증거일 것이다.
조지 오웰의 리스트에 오른 친소(親蘇)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동성연애자와 변태성욕자들이었다. 변태장면이 KGB에 약점으로 잡혀 소련을 위한 봉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