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정보부, A-3 통신 통해 북한과 비밀지령 주고받으며 무장공작선 제주도로 유인
⊙ 逆공작에 걸려 통혁당 간부 구출 시도한 北 무장공작선, 軍·警·情 합동작전에 섬멸
⊙ 작전 참가 요원 “한명숙 前 총리의 남편 박성준 교수는 통혁당 중간 간부인 소조책”
⊙ 韓 前 총리의 北 시누이, 2006년 총리 임명 직후 이산가족 상봉 신청
⊙ 逆공작에 걸려 통혁당 간부 구출 시도한 北 무장공작선, 軍·警·情 합동작전에 섬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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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11월 16일 열린 통혁당 사건 군(軍) 관련 피고인 4명에 대한 구형공판 장면. 이날 공판에서 군 검찰은 당시 신영복 피고인(사진 맨 왼쪽)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죄 등을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했고 나머지 3명에게는 징역 7~10년을 구형했다.
통일혁명당(통혁당) 핵심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북한이 1968년 8월 20일 제주도 서귀포 해안으로 보냈다가 우리 군·경·정(軍警情) 합동작전에 의해 나포됐던 무장공작선은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의 역(逆)공작에 의해 밀파됐었다는 사실이 42년 만에 밝혀졌다.
이날 군·경·정 합동작전에서는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리 군경은 작전 중 2명이 중상을 입었고 2명이 경상을 입었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독 안의 쥐 작전(훗날 Z 작전으로 불림)’으로 불렸던 이 작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작전참모부와 합동참모본부, 치안국이 동시에 참여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 사건의 전모를 제주도 무장공작선 격침 4일 후인 8월 24일 공식 발표했다.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당시 통혁당 간부들은 ▲민중봉기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揚陸)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越北)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8월 20일 제주도 서귀포로 침투했다 섬멸된 북한의 무장공작선 탑승 생존 공비들에 대한 기자회견도 같은 날 열렸다. 인민군 소속 이승탁(李承卓)과 김일룡(金一龍)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접선(接線)’이라고만 답했다. 이날 언론에 공개된 이승탁과 김일룡이란 이름은 가명으로 이들의 실명(實名)은 훗날 이관학과 김승환인 것으로 밝혀졌다. 두 사람 모두 인민군 현역 장교들이었다.
이후 판결문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무장공작선은 북한 753부대 소속 공작선으로 김종태 등 통혁당 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남파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Z작전에 대해 현재까지 관련 사료들은 통혁당 간부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보당국이 간첩선을 섬멸한 것으로 설명해 왔다.
하지만 <월간조선>의 취재 결과 무장간첩선은 애초 남한 중앙정보부 요원이 보낸 A-3 지령(간첩 지령용 방송)을 통혁당 간부들이 보낸 것으로 판단한 북한이 통혁당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밀파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한의 유인공작(역공작)에 북한이 걸려든 보기 드문 사례다.
1983년 12월에 있었던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도 1960년대에 귀순했던 간첩을 이용한 역공작 사건이었지만 규모면에서 제주도 서귀포 무장간첩선 사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은 다대포에 남파간첩을 내려놓고 귀환하려던 간첩선을 격침한 사건으로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의 역공작에 의한 무장공작선 검거작전에 참가했던 군·경·정 관계자들은 대다수 작고(作故)하거나 노환(老患)으로 증언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극소수의 전직 요원이 작전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밝힌 ‘통혁당 구출시도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작전’(Z작전)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전직 요원의 증언과 관련 자료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A-3 간첩 지령 이용해 북한軍 유인
통혁당 총책격인 김종태가 검거된 시기는 사건 발생 두 달여 전인 1968년 6월이었다.
통혁당 전체를 주도한 핵심 인물은 김종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북한에선 통혁당 내 엘리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서울대 문리대 출신 이문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친북반미(親北反美) 성향의 월간지 <청맥사> 편집장이었던 이문규는 공군 정훈장교 출신이며, 통혁당 내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조직한 인물이다. 1967년 5월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종태가 체포된 후 이문규는 경남 지역을 다니며 도피하다 대구에서 검거됐으며,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문건이 발견된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도피 상태에 있던 이문규를 북한이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작전을 펼칠 것이라 판단, 이문규를 체포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암호문건을 토대로 대북(對北) 통신공작에 착수한 정보당국은 1968년 8월 4일 새벽 북한에서 보내온 A-3 지령문 해독에 성공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체 문건이나 물질적 근거가 될 것을 집에 두지 말 것이며 안전대책을 잘 강구할 것. 만일 우리와 접선이 필요하면 이달 7일이나 11일 오전에 보고할 것. 오는 8월 14일, 15일에 재지시를 받을 것. 건투를 바라겠음.”
북한은 그때까지도 이문규가 체포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한 정보당국은 지령문과 이문규에 대한 북한의 당적(조국해방전선 책임비서) 비중 등을 종합,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북한이 이문규에 대해 필사적인 구출 시도를 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 이문규에 대한 입북공작 기회를 활용, 공작선을 유인하는 역공작이 가능할 것으로 결론지었다. 만약 북한이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간첩선을 보낸다면, 통혁당과 북한과의 연계를 가장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보당국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계획(Z작전)에 들어간다.
1968년 8월 7일 오전 10시 한 중앙정보부 요원이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제주시의 한 여관에 있는 ‘조기준’ 앞으로 긴급 비상연락 공중전보를 타전한다. 북한이 비상연락 공중전보를 가로채 보면서 공작원들과의 교신 수단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정보기관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보내용은 “17일 불광동 110-20 본인 앞 40,800 송금 요망”이란 암호문인데, 해독하면 “피신 중이며 입북하겠으니 긴급시 지시바람, 문규”다.
우리 정보기관의 예상대로 북한 공작기관의 반응이 왔다. 8월 9일 새벽 00시30분, 정보당국은 A-3 통신을 이용한 북한의 답변과 추가 지시 지령문을 입수한다. 이 지령문을 해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고 잘 받았음. 우리의 접선은 19일 밤 12시 제4지점(서귀포)에서 할 것임. 이날 못하면 같은 달 20일이나 21일 같은 시간에 하겠음. 만일 약속일에 못 가면 저녁 7시5분에서 20분 사이에 약속한 노래를 내보내겠음. 접선신호는 동지의 약속대로 하겠음. … 제4지점에서 접선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11일 오전에 보고하기 바람. 친척집 접근을 삼갈 것이며 14, 15일에 추가 지시를 더 내리겠음.”
6·25 이후 最大 對 간첩작전
남한 정보당국이 보낸 암호문에 북한군이 지령으로 반응한 순간이었다. 이를 완전 해독해 작전 성공에 한발 다가선 남한 당국은 다음과 같은 북한의 이문규 접선·탈출 계획을 확보한다.
▲접선일시: 1968년 8월 19일 24시
▲접선장소: 제주도 서귀포 서남방 수어동 해안절벽
▲연기신호: 약속한 노래 방송(조선팔경가, 유격대 행진곡)
▲접선신호: 돌을 ‘딱딱딱’ 세 번 두드린다
8월 12일 서울 모처에서 정부 내 대(對)간첩 관련기관 합동회의가 열렸다. 정보기관, 합참 및 각 국 정보참모부장, 경찰 관계자 등 핵심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공작을 통해 적을 유인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 방안이 논의됐다. 당국은 이어 다음 날인 13일 각 군 작전 실무자회의를 거쳐 공식 작전계획, 일명 ‘Z작전’을 최종 수립했다.
8월 14일 새벽 00시 “접선시간을 익일 오후 10시로 변경한다”는 북한의 긴급 지령문이 재도착했다. 이 지령문을 통해 관계 당국은 재남(在南) 고정간첩 이문규의 입북을 위한 북한의 무장간첩선 남파공작 계획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육·해·공군, 해병대, 경찰 특수부대 등으로 구성된 통합부대 작전요원들은 서귀포 새섬 일대에 선원, 주민, 피서객 등으로 위장 매복했다. 이문규로 위장한 요원이 신호를 보내 그를 데려갈 안내원이 완전 상륙하면 일제히 공격할 계획이었다. 작전 병력 대부분은 당시 우리 군이 도입한 지 얼마 안된 M-16소총으로 무장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트남전 참전병사들도 요원으로 선발해 작전에 참여시켰다.
Z작전 당일 육군은 57·75·81mm 포로 무장한 최정예 기동타격대를 보냈다. 해군은 구축함 2척과 경비정 10척을 동원했고, 공군은 전투기(F5A) 3개 편대와 C-46 수송기 2대를 동원했다. 해병대 특수전 타격대와 경찰 대테러 특공대까지 총 500여 명의 최고 정예요원이 작전에 투입됐다. 6·25전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 간첩작전 계획이었다.
8월 20일 밤 10시30분, 밤은 깊고 고요했다.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은 숨을 죽인 채 제주도 서귀포 해상 700m 부근의 고요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장공작선이 침투할 길목이었다. 어둠 속 저 멀리 검은 물체의 움직임이 보였다. 북한이 밀파한 무장공작선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공작선은 북한 753부대 소속으로 81mm 곡사포와 기관단총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최고속도 35노트의 공작선(75t·16인승)은 서귀포 앞바다 토끼섬과 범섬 사이를 은밀하지만 대담하게 침투해 오고 있었다.
작전 개시는 서울 종로경찰서 소속 한 경찰요원의 몫이었다. 배포가 큰 그는 이문규로 위장해 절벽 밑 바위에 숨어 있었다. 공작선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지령문을 통해 사전에 약속한 대로 돌을 세 번 두드렸다.
“딱, 딱, 딱.”
돌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멀리 날아갔다. 작전에 참가한 요원들의 눈이 일제히 그 소리를 좇았다. 순간 멀리 공작선에서 검은 고무보트 1척이 내려졌다. 그 고무보트로 두 명의 공작원이 승선했다. 어둠 속에서 2명의 무장공비는 은밀히 노를 저어 접선장소인 서귀포 서남방에 있는 속칭 ‘황우리절벽’으로 침투했다. 조금의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두 무장공비는 높이 20m의 절벽을 기어올랐다. 나중에 밝혀진 두 무장공비의 이름은 이동환(당시 26세)과 정창룡(당시 28세). 그들은 이문규 밀입북 작전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14명 중 12명 사살, 2명 생포
“탕!”
무장공작선 발견 15분여가 지난 10시45분, 한 발의 조명탄이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아군이 쏜 조명탄에 어둡던 서귀포 해변이 낮처럼 환해졌다. 무장한 두 공비는 우리 측 요원들을 향해 총을 쏘며 도주했다. 아군은 투항 권유를 한 후 일제히 두 무장공비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도주 중 총격을 당한 이동환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정창룡은 인근 토굴로 도주했다.
같은 시각 해변 멀리서 육지 쪽 동정을 살피던 북한의 무장공작선은 조명탄이 터지자마자 35노트 최고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해상에 이미 포진해 있던 우리 군함과 경비정은 곧바로 공작선 추격에 나섰다. 요란한 총성과 포성(砲聲)이 서귀포 앞바다를 갈랐다. 장시간 도주한 공작선은 서귀포 남동쪽 30마일 해상까지 진출했지만, 결국 아군의 공격을 받고 기관실이 격파돼 나포됐다.
고무보트를 이용해 해안가로 상륙한 두 명을 제외하고 무장공작선에 승선 중이던 12명 중 10명은 우리 측과 교전 중 선내(船內)에서 사망했다. 바다로 뛰어든 2명(이관학, 김승환)은 아군 함정에 생포됐다. 이들은 모두 개인별로 기관총 및 권총 각 1정과 수류탄 3발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한편 해안 절벽 중턱의 토굴로 숨어들었던 정창룡은 계속 아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서귀포경찰서 소속 정종배(丁鍾培·당시 26세) 순경이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정창룡은 수류탄까지 투척하며 저항했지만, 우리 측 요원들의 집중사격을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창룡 역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때아닌 총소리와 포소리에 놀란 서귀포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불안해하는 그들을 경찰은 ‘대간첩 훈련 중’이라며 안심시켰고, 대부분의 주민은 이를 믿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적을 섬멸하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한 Z작전은 완벽한 성과를 거뒀다. 이 작전을 통해 당국은 적 공작선 나포 외에도 기관단총 14정, 81mm 곡사포 1문, 12.7mm 고사총 12정, 레이더 1대, 고무보트 1척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對共) 요원으로 작전에 참가했던 L씨는 “42년 전인 1968년에 통혁당 사건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못했다면 국가안위에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면서,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진다는 순수한 혈기로 참가했던 작전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역사적인 사건 한가운데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그때 그 해안가 절벽’을 찾아가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다고 한다. “우리는 영원한 그림자”라면서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던 그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부인과 함께 운동을 하고,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등 신체·정신적으로 건강한 조건을 유지하고 있었다. 42년 전 사건에 대한 그의 기억은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정확했으며, <월간조선>이 최근 입수한 관련 자료 내용과도 대부분 일치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성공한 工作은 밝혀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 사실이 공개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래 ‘성공한 공작은 밝혀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귀포 간첩선 유인공작은 극도의 비밀을 요하는 특수작전이었습니다. 공작 진행 상황은 물론 종료 후에도 차후를 위해 보호할 필요가 있어 작전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고, 간첩통신 방식도 완전히 바뀌어서 공개해도 작전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무장공작선 침투 전 단계에서 체포한 통혁당 간첩은 정확하게 누구였습니까.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 대부분의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이미 무장공작선 침투 전에 체포, 구속된 상태였습니다. 이들의 압수물품과 개별 수사를 통해 간첩선 유인공작이 가능했는데, 특히 이문규의 집에서 발견된 난수표 등 통신문건이 암호 해독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최초 누구를 통해 통혁당 전체 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습니까.
“통혁당 사건은 1968년 7월에 적발된 임자도 간첩단(통일혁명당 전남위원회)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간첩 정태묵이 핵심 주범으로, 방북 후 공작 교육과 함께 막대한 공작금을 받고 남파됐죠. 그때 정태묵에게 임자도 거소를 제공하는 등 각종 편의를 봐주던 동생 정태상이 공작금 분배 문제로 형과 다투게 됐고, 이 과정에서 화가 난 정태상의 처(妻)가 수사기관에 신고하면서 통혁당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됐습니다.”
2000년에 출간된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지음, 김영사 발행)에도 북한 김정일(金正日)이 통혁당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정태묵, 정태상 두 형제의 이름을 거론한 대목이 있다. 다음은 그 부분을 간추린 내용이다.
<1975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북한에서는 대남공작을 담당한 모든 부서의 구성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총화회의가 10일 동안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는 해방 후 30여 년간 누적된 대남공작의 모든 문제점과 착오 등이 폭로됐다. 11월 3일 총화회의가 종결되는 날에는 김정일이 참석해 회의의 결론을 내렸다.
김정일은 구체적인 사례를 짚어가며 대남공작의 오류들을 지적했다. 그는 대남공작 사상 가장 큰 손실이 1958년에 발생한 ‘진보당사건’이었다고 지적했다. 김정일은 대남공작의 두 번째 큰 손실로 1968년의 통혁당 사건을 거론했다. 그는 김종태, 최영도, 정태묵 등이 관련된 ‘통일혁명당사건’이 한 사람을 잘못 처리함으로써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정태묵의 동생 정태상이 입북해 있을 당시 정태상의 부인은 정태묵에게 남편을 찾아내라고 난리를 쳤다. 정태묵은 큰일이 날 것 같다고 북으로 무전으로 보고했고, 북측은 정태상을 내려보냈다. 내려온 정태상은 형과 공작금을 가지고 싸움이 붙었고, 결국 부인의 친척 검사에게 밀고해 버렸다. 이 부분에 대해 김정일은 “정태상을 내려보낼 게 아니라 정 다급했으면 그의 부인을 데려왔으면 되지 않았느냐? 왜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내려보내 모든 조직을 망쳐버렸는가”라고 질책했다.>
L씨의 말대로 남으로 내려온 정태상은 공작금 문제로 형인 정태묵과 다투게 됐고, 정태묵에게 화가 나 있던 정태상의 부인이 정태묵을 밀고함으로써 임자도 간첩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됐던 것이다.
<곁에서 본 김정일>은 저자가 전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낸 신경완과의 대담을 적은 책이다. 출생비밀과 성장과정, 사생활, 지도력 등 김정일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신경완은 1980년대 초 제3국으로 망명했다가 한국으로 입국한 후 1998년 세상을 떠났다. 사망할 때까지 ‘비공개 귀순자’였던 신씨는 1945년 북조선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조선노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대남사업부서의 부부장을 지냈다고 한다. 제3국 망명 때까지 30년 넘게 노동당 중앙당에서 근무한 북한 현대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L씨와의 대화다.
―통혁당 사건 주요 관련자들은 이후 어떤 조치에 취해졌습니까.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와 체포된 북한군 장교 2명(이관학, 김승환)은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됐습니다. 신영복(申榮福·現 성공회대 석좌교수)은 1969년 1월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으나, 1970년 3월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20년 수감 후 1988년 8월 15일 가석방 출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L씨에 따르면, 통혁당 하부선이었던 이진영과 오병헌은 19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다가 남한에서 통혁당 사건이 노출되면서 귀환하지 않았다. 임자도 사건과도 관련된 최영도는 1969년 1월 2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수감 도중 병사(病死)했고, 정태묵과 윤상수는 모두 사형이 집행됐다.
左翼의 통혁당 再建 시도
―사형 선고 후 전향해 <주암산>이란 제목의 옥중수기까지 작성한 김질락이 사형 집행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87년 KAL기 폭파사건처럼 범인을 ‘살아 있는 증거’로 남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시대적 배경이 다릅니다. 1968년 당시는 반공(反共)이 국시(國是)였고, 1년에 수차례 북한의 무장공비가 침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남한 내에서도 통혁당 재건위(委)와 같은 사건이 줄줄이 일어났죠. 북한의 적화통일이라는 대남노선에 따라 지하당 구축이 계속 시도되는 등 불안정한 시대적 상황에서 간첩에 대한 사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8년 통혁당 관련자들이 일망타진된 이후에도 좌익(左翼)단체들의 통혁당 재건공작은 계속 시도됐다. 1969년 9월 남파간첩 임종영(가명) 등 12명이 적발된 ‘경남지구 지하당 사건’, 1969년 10월 8일 북한노동당 소속 간첩망 전북조직책 진락현 등 10명이 체포된 ‘전북지구 지하당 사건’ 등 1979년까지 당국에 적발된 사례만 최소 9건이다. 그만큼 남한 통혁당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컸다는 증거다. 다음은 그 사례 중 일부다.
▲1969년 10월 16일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 북한 무장간첩 한영식 등 19명이 서울대, 고려대 학생간부를 포섭해 개헌반대 학생혁명 토대 마련 및 통혁당 재건 공작.
▲1971년 5월 14일 호남통혁당 재건간첩사건: 남파간첩 류락진 등 11명이 북한의 지령으로 당 호남지부 구성 및 도·시 단위 지하당 조직해 혁신계 정당 침투로 적화통일 혁명이론 유도.
▲1971년 9월 17일 통혁당 사회혼란사건: 북한 간첩 전병모(全炳謀) 등 17명이 7개 조직망을 구성, 북한 대남사업총책 김중린(金仲麟)의 직접 지령 아래 학원, 노동자, 혁신계 사회인사를 통해 합법적 정당 창설을 기도.
▲1971년 10월 12일 통혁당 재건 3개망 간첩단 사건: 유종인(柳種寅) 등 10명이 3개 조직망을 구성해 연세대 내부 지하당을 구축하고 요인암살을 시도하는 등 통혁당 재건 시도.
▲1972년 4월 11일 지하통혁당 조직 거물 간첩사건: 유위하(柳渭厦) 등 32명이 포섭자를 대동해 월북하고 지하조직을 확대하는 등 통혁당 재건 획책.
▲1974년 2월 울릉도 거점 지하당 공작사건: 1982년부터 13년 동안 전용관, 김용득 등이 북한 간첩에 포섭돼 공작금 3400만원을 수령, 지하당 재건을 기도하다가 검거. 사건이 폭로되자 북한은 이들 간첩을 ‘남한 내 통혁당원’이라고 모략함.
▲1975년 11월 22일 학원간첩침투사건: 북한노동당원인 위장 유학생 김옥자(金玉子·부산대) 등 21명이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학원침투, 통혁당 지도부를 학원에 구성하고 지하망을 조직해 민주화·자유화란 구실 아래 소요를 일으켜 사회불안을 유발.
▲1979년 8월 삼척고첩단 사건: 6·25전쟁 당시 월북한 간첩 진현식 등 9명이 삼척에서 강원도 통혁당 지도위를 결성하다가 검거.
한명숙·박성준 부부와 통혁당
1968년 통혁당 사건 후 관련 인사들은 북한에서 영웅이 됐다. 1969년 1월 25일 김종태와 이문규의 사형이 확정된 후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두 사람을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릴 정도였다. 특히 김종태는 사형 집행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하사’받았다. 1969년 7월 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까지 채택했고, 다음 날인 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추도기간을 가졌다.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은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은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명됐다. 평양 시내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생겼다. 이문규도 사형 후 북한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고 전향한 김질락은 북한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간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영복씨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성공회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명숙(韓明淑) 전(前) 총리의 남편 박성준(朴聖焌)씨는 1967년 6월 신영복에게 포섭돼 당 소조책(小組責)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처 한명숙과 박경호(朴璟鎬), 김국주(金國柱) 등을 당 소조로 포섭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소조란 북한의 지하당에서 가장 최소 조직 ‘세포(당원 3명)’ 3개가 모여 결성된 조직을 뜻한다. 소조책은 소조와 세포를 관리하는 간부급 당원이다.
당시 공안당국은 서클 회원들을 통혁당 당원으로 포섭한 박성준씨를 당 간부인 소조책으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한 전 총리와 남편 박 교수 모두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2006년 3월 부인이 총리에 지명된 후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통혁당 사건의 일부는 사실이나,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 본 게 전부”라고 주장했다. 2007년 8월 한 전 총리와 박 교수가 함께 출판한 저서 <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의 해명은 이전의 주장과 달랐음이 <월간조선> 2006년 5월호 취재 결과 밝혀졌다. 당시 인용된 계간(季刊) <새길이야기(3호·2001년 발행)>는 박성준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마르크스 경제학 책을 직접 번역해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유포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성준 교수의 엇갈리는 증언
박성준 교수의 당시 혐의에 대해 대공요원 출신 L씨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통혁당의 핵심 인물인 신영복의 법원 선고결과(1심 사형, 2심 무기징역)만 봐도 그가 얼마나 충실한 핵심 인물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포섭돼 ‘기독교 경제복지회’를 이끈 박성준이 ‘책 몇 권 빌려 봤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는 조직의 허리 역할인 당 소조책으로 활동하며 말단 조직원들을 이끌었습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법원에서 15년형이란 중형을 선고하지 않았겠죠.”
박 교수는 2006년 3월 자신의 이력에 논란이 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국무총리가 된다면 임기 이후에 개인 자격으로 통혁당 사건의 재심(再審)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 전 총리가 임기를 마친 지 3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박 교수가 재심을 청구했다는 언론보도는 없었다.
노무현(盧武鉉) 정권 당시 좌파 인사들이 활동했던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등 과거사위에서도 “주모자들에 대한 혐의가 분명한 사건”이란 이유로 통혁당 사건을 조사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엇갈리게 증언했다. 통혁당 사건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중 대한통운 사원으로 재직하다 폭격으로 아내, 장남과 함께 동시 사망한 것으로 진술돼 있다. 박 교수가 부모와 형을 전쟁 중 폭격으로 사별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박 교수의 조부(祖父)가 1951년 11월 삼천포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버지가 호주 상속을 했다. 그리고 박 교수의 사촌동생 중 한 명은 박 교수의 아버지에 대해 “6·25전쟁 당시 인민위원으로 친북좌익 활동을 하다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월북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이후 가족과의 사별 경위를 다르게 설명한다. 2003년 한 강연에서 박 교수가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일제강점기 당시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됐고, 6·25전쟁 중 월북, 이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박 교수 가족의 정확한 생존여부는 뜻밖의 경로를 통해 밝혀졌다. 2006년 5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생사확인 과정에서 북한에 살던 박 교수의 누나가 남한 가족과의 상봉을 신청한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한 한명숙 부부의 在北 가족
<월간조선>이 최근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를 통해 입수한 북한 측 생사확인신청서에 따르면, 박 교수 누나의 이름은 박려아다. 2006년 이산가족 상봉 신청 당시 나이는 71세로 자신의 출생지를 경남 사천군 삼천포읍 선구리로 기재했다. 가족과 헤어진 시기는 1950년 8월이며, 아버지 박상묵은 1950년 사망, 어머니 구무선은 1982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가 찾는 대상은 박성준 교수 등 가족과 친척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상봉은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공개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 참가자 명단에 박 교수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가족은 월북, 자신은 간첩 전력이 있는 박 교수가 자신의 부인이 막 총리로 임명된 상황에서 상봉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 측은 “북한의 가족이 생사확인 요청을 하더라도 남한의 가족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상봉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만약 박 교수가 상봉 행사에 참석했더라면, 총리 시(媤)가족의 좌익·월북전력 논란이 야기돼 파문이 확산됐을 것이다. 경찰에 몸담았던 전직 대공요원은 2006년 한명숙 총리 임명 직후 북한의 가족이 이산가족 생사확인 신청을 한 것에 대해 “대남공작 전술 차원에서 북한이 박려아에게 상봉신청을 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관계자의 전언이다.
“북한은 통혁당 당원이었던 박성준 교수에 대한 재북(在北)가족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박 교수의 활용 가능성을 알아보고 나아가 그의 부인인 총리를 친북화시켜 정부 차원에서 대북 지원 등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 했을 것이다. 만약 상봉이 성사돼 가족이 만나는 자리에 한 총리까지 나타난다면, 언론보도 후 남한 보수층이 한 총리의 친북 사상을 비판하는 등 남남갈등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북한이 의도하는 사회혼란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도 북한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것이 없었을 것이다.”
통혁당 사건은 국내 용공(容共)세력의 조직적 간첩 활동을 보여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역사적 증거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 10월, 과거사기본법 제정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좌파단체는 통혁당 사건을 조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북괴로부터 남파돼 숨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 공산주의 사상이나 사회주의 사상에 야릇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일부 지식인들, 아직도 북괴를 병적으로 동경하고 있는 전 남로당원들, 그리고 북괴라면 무조건 두려운 존재로만 여기고 유언비어에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사사로운 이욕 때문에 눈이 멀어 대한민국을 함부로 비방,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 보잘것없는 글이 그들로 하여금 국가이성과 국가이익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나는 붓을 들었다.”
통혁당의 핵심 간부였다가 사형당한 김질락이 전향 후 옥중수기에 쓴 머리말 중 일부다. 40여 년 전 사형수가 쓴 고백록을 지금도 귀담아들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날 군·경·정 합동작전에서는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리 군경은 작전 중 2명이 중상을 입었고 2명이 경상을 입었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독 안의 쥐 작전(훗날 Z 작전으로 불림)’으로 불렸던 이 작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작전참모부와 합동참모본부, 치안국이 동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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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4월 20일 당시 치안본부가 발표한 통혁당 재건 사건의 증거물들. 당시 북한의 지령에 따라 통혁당 재건을 기도해 오던 북한간첩 임동규 등 일당 10명이 검거됐다. 1968년 통혁당이 일망타진된 후에도 북한은 지속적으로 통혁당 재건을 시도했다. |
이후 판결문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무장공작선은 북한 753부대 소속 공작선으로 김종태 등 통혁당 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남파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Z작전에 대해 현재까지 관련 사료들은 통혁당 간부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보당국이 간첩선을 섬멸한 것으로 설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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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 22일 서울형사지방법원 통혁당 결심공판에 나온 피고인들. |
1983년 12월에 있었던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도 1960년대에 귀순했던 간첩을 이용한 역공작 사건이었지만 규모면에서 제주도 서귀포 무장간첩선 사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은 다대포에 남파간첩을 내려놓고 귀환하려던 간첩선을 격침한 사건으로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의 역공작에 의한 무장공작선 검거작전에 참가했던 군·경·정 관계자들은 대다수 작고(作故)하거나 노환(老患)으로 증언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극소수의 전직 요원이 작전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밝힌 ‘통혁당 구출시도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작전’(Z작전)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전직 요원의 증언과 관련 자료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A-3 간첩 지령 이용해 북한軍 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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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공작선에 승선, 통혁당의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남파됐다가 생포된 이관학(오른쪽)과 김승환. 두 사람 모두 인민군 장교였다. |
통혁당 전체를 주도한 핵심 인물은 김종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북한에선 통혁당 내 엘리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서울대 문리대 출신 이문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친북반미(親北反美) 성향의 월간지 <청맥사> 편집장이었던 이문규는 공군 정훈장교 출신이며, 통혁당 내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조직한 인물이다. 1967년 5월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종태가 체포된 후 이문규는 경남 지역을 다니며 도피하다 대구에서 검거됐으며,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문건이 발견된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도피 상태에 있던 이문규를 북한이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작전을 펼칠 것이라 판단, 이문규를 체포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암호문건을 토대로 대북(對北) 통신공작에 착수한 정보당국은 1968년 8월 4일 새벽 북한에서 보내온 A-3 지령문 해독에 성공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체 문건이나 물질적 근거가 될 것을 집에 두지 말 것이며 안전대책을 잘 강구할 것. 만일 우리와 접선이 필요하면 이달 7일이나 11일 오전에 보고할 것. 오는 8월 14일, 15일에 재지시를 받을 것. 건투를 바라겠음.”
북한은 그때까지도 이문규가 체포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한 정보당국은 지령문과 이문규에 대한 북한의 당적(조국해방전선 책임비서) 비중 등을 종합,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북한이 이문규에 대해 필사적인 구출 시도를 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 이문규에 대한 입북공작 기회를 활용, 공작선을 유인하는 역공작이 가능할 것으로 결론지었다. 만약 북한이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간첩선을 보낸다면, 통혁당과 북한과의 연계를 가장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보당국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계획(Z작전)에 들어간다.
1968년 8월 7일 오전 10시 한 중앙정보부 요원이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제주시의 한 여관에 있는 ‘조기준’ 앞으로 긴급 비상연락 공중전보를 타전한다. 북한이 비상연락 공중전보를 가로채 보면서 공작원들과의 교신 수단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정보기관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보내용은 “17일 불광동 110-20 본인 앞 40,800 송금 요망”이란 암호문인데, 해독하면 “피신 중이며 입북하겠으니 긴급시 지시바람, 문규”다.
우리 정보기관의 예상대로 북한 공작기관의 반응이 왔다. 8월 9일 새벽 00시30분, 정보당국은 A-3 통신을 이용한 북한의 답변과 추가 지시 지령문을 입수한다. 이 지령문을 해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고 잘 받았음. 우리의 접선은 19일 밤 12시 제4지점(서귀포)에서 할 것임. 이날 못하면 같은 달 20일이나 21일 같은 시간에 하겠음. 만일 약속일에 못 가면 저녁 7시5분에서 20분 사이에 약속한 노래를 내보내겠음. 접선신호는 동지의 약속대로 하겠음. … 제4지점에서 접선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11일 오전에 보고하기 바람. 친척집 접근을 삼갈 것이며 14, 15일에 추가 지시를 더 내리겠음.”
6·25 이후 最大 對 간첩작전
남한 정보당국이 보낸 암호문에 북한군이 지령으로 반응한 순간이었다. 이를 완전 해독해 작전 성공에 한발 다가선 남한 당국은 다음과 같은 북한의 이문규 접선·탈출 계획을 확보한다.
▲접선일시: 1968년 8월 19일 24시
▲접선장소: 제주도 서귀포 서남방 수어동 해안절벽
▲연기신호: 약속한 노래 방송(조선팔경가, 유격대 행진곡)
▲접선신호: 돌을 ‘딱딱딱’ 세 번 두드린다
8월 12일 서울 모처에서 정부 내 대(對)간첩 관련기관 합동회의가 열렸다. 정보기관, 합참 및 각 국 정보참모부장, 경찰 관계자 등 핵심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공작을 통해 적을 유인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 방안이 논의됐다. 당국은 이어 다음 날인 13일 각 군 작전 실무자회의를 거쳐 공식 작전계획, 일명 ‘Z작전’을 최종 수립했다.
8월 14일 새벽 00시 “접선시간을 익일 오후 10시로 변경한다”는 북한의 긴급 지령문이 재도착했다. 이 지령문을 통해 관계 당국은 재남(在南) 고정간첩 이문규의 입북을 위한 북한의 무장간첩선 남파공작 계획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육·해·공군, 해병대, 경찰 특수부대 등으로 구성된 통합부대 작전요원들은 서귀포 새섬 일대에 선원, 주민, 피서객 등으로 위장 매복했다. 이문규로 위장한 요원이 신호를 보내 그를 데려갈 안내원이 완전 상륙하면 일제히 공격할 계획이었다. 작전 병력 대부분은 당시 우리 군이 도입한 지 얼마 안된 M-16소총으로 무장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트남전 참전병사들도 요원으로 선발해 작전에 참여시켰다.
Z작전 당일 육군은 57·75·81mm 포로 무장한 최정예 기동타격대를 보냈다. 해군은 구축함 2척과 경비정 10척을 동원했고, 공군은 전투기(F5A) 3개 편대와 C-46 수송기 2대를 동원했다. 해병대 특수전 타격대와 경찰 대테러 특공대까지 총 500여 명의 최고 정예요원이 작전에 투입됐다. 6·25전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 간첩작전 계획이었다.
8월 20일 밤 10시30분, 밤은 깊고 고요했다.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은 숨을 죽인 채 제주도 서귀포 해상 700m 부근의 고요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장공작선이 침투할 길목이었다. 어둠 속 저 멀리 검은 물체의 움직임이 보였다. 북한이 밀파한 무장공작선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공작선은 북한 753부대 소속으로 81mm 곡사포와 기관단총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최고속도 35노트의 공작선(75t·16인승)은 서귀포 앞바다 토끼섬과 범섬 사이를 은밀하지만 대담하게 침투해 오고 있었다.
작전 개시는 서울 종로경찰서 소속 한 경찰요원의 몫이었다. 배포가 큰 그는 이문규로 위장해 절벽 밑 바위에 숨어 있었다. 공작선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지령문을 통해 사전에 약속한 대로 돌을 세 번 두드렸다.
“딱, 딱, 딱.”
돌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멀리 날아갔다. 작전에 참가한 요원들의 눈이 일제히 그 소리를 좇았다. 순간 멀리 공작선에서 검은 고무보트 1척이 내려졌다. 그 고무보트로 두 명의 공작원이 승선했다. 어둠 속에서 2명의 무장공비는 은밀히 노를 저어 접선장소인 서귀포 서남방에 있는 속칭 ‘황우리절벽’으로 침투했다. 조금의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두 무장공비는 높이 20m의 절벽을 기어올랐다. 나중에 밝혀진 두 무장공비의 이름은 이동환(당시 26세)과 정창룡(당시 28세). 그들은 이문규 밀입북 작전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14명 중 12명 사살, 2명 생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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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사건 공판에서 다른 피고인의 진술을 고개 숙인 채 귀담아듣고 있는 통혁당 사건 주범 김종태(맨 오른쪽). |
무장공작선 발견 15분여가 지난 10시45분, 한 발의 조명탄이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아군이 쏜 조명탄에 어둡던 서귀포 해변이 낮처럼 환해졌다. 무장한 두 공비는 우리 측 요원들을 향해 총을 쏘며 도주했다. 아군은 투항 권유를 한 후 일제히 두 무장공비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도주 중 총격을 당한 이동환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정창룡은 인근 토굴로 도주했다.
같은 시각 해변 멀리서 육지 쪽 동정을 살피던 북한의 무장공작선은 조명탄이 터지자마자 35노트 최고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해상에 이미 포진해 있던 우리 군함과 경비정은 곧바로 공작선 추격에 나섰다. 요란한 총성과 포성(砲聲)이 서귀포 앞바다를 갈랐다. 장시간 도주한 공작선은 서귀포 남동쪽 30마일 해상까지 진출했지만, 결국 아군의 공격을 받고 기관실이 격파돼 나포됐다.
고무보트를 이용해 해안가로 상륙한 두 명을 제외하고 무장공작선에 승선 중이던 12명 중 10명은 우리 측과 교전 중 선내(船內)에서 사망했다. 바다로 뛰어든 2명(이관학, 김승환)은 아군 함정에 생포됐다. 이들은 모두 개인별로 기관총 및 권총 각 1정과 수류탄 3발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한편 해안 절벽 중턱의 토굴로 숨어들었던 정창룡은 계속 아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서귀포경찰서 소속 정종배(丁鍾培·당시 26세) 순경이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정창룡은 수류탄까지 투척하며 저항했지만, 우리 측 요원들의 집중사격을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창룡 역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때아닌 총소리와 포소리에 놀란 서귀포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불안해하는 그들을 경찰은 ‘대간첩 훈련 중’이라며 안심시켰고, 대부분의 주민은 이를 믿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적을 섬멸하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한 Z작전은 완벽한 성과를 거뒀다. 이 작전을 통해 당국은 적 공작선 나포 외에도 기관단총 14정, 81mm 곡사포 1문, 12.7mm 고사총 12정, 레이더 1대, 고무보트 1척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對共) 요원으로 작전에 참가했던 L씨는 “42년 전인 1968년에 통혁당 사건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못했다면 국가안위에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면서,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진다는 순수한 혈기로 참가했던 작전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역사적인 사건 한가운데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그때 그 해안가 절벽’을 찾아가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다고 한다. “우리는 영원한 그림자”라면서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던 그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부인과 함께 운동을 하고,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등 신체·정신적으로 건강한 조건을 유지하고 있었다. 42년 전 사건에 대한 그의 기억은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정확했으며, <월간조선>이 최근 입수한 관련 자료 내용과도 대부분 일치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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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사건 3회 공판에서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하며 사회주의혁명을 이룩하려 했다고 진술하는 김질락. |
“원래 ‘성공한 공작은 밝혀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귀포 간첩선 유인공작은 극도의 비밀을 요하는 특수작전이었습니다. 공작 진행 상황은 물론 종료 후에도 차후를 위해 보호할 필요가 있어 작전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고, 간첩통신 방식도 완전히 바뀌어서 공개해도 작전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무장공작선 침투 전 단계에서 체포한 통혁당 간첩은 정확하게 누구였습니까.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 대부분의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이미 무장공작선 침투 전에 체포, 구속된 상태였습니다. 이들의 압수물품과 개별 수사를 통해 간첩선 유인공작이 가능했는데, 특히 이문규의 집에서 발견된 난수표 등 통신문건이 암호 해독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최초 누구를 통해 통혁당 전체 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습니까.
“통혁당 사건은 1968년 7월에 적발된 임자도 간첩단(통일혁명당 전남위원회)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간첩 정태묵이 핵심 주범으로, 방북 후 공작 교육과 함께 막대한 공작금을 받고 남파됐죠. 그때 정태묵에게 임자도 거소를 제공하는 등 각종 편의를 봐주던 동생 정태상이 공작금 분배 문제로 형과 다투게 됐고, 이 과정에서 화가 난 정태상의 처(妻)가 수사기관에 신고하면서 통혁당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됐습니다.”
2000년에 출간된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지음, 김영사 발행)에도 북한 김정일(金正日)이 통혁당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정태묵, 정태상 두 형제의 이름을 거론한 대목이 있다. 다음은 그 부분을 간추린 내용이다.
<1975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북한에서는 대남공작을 담당한 모든 부서의 구성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총화회의가 10일 동안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는 해방 후 30여 년간 누적된 대남공작의 모든 문제점과 착오 등이 폭로됐다. 11월 3일 총화회의가 종결되는 날에는 김정일이 참석해 회의의 결론을 내렸다.
김정일은 구체적인 사례를 짚어가며 대남공작의 오류들을 지적했다. 그는 대남공작 사상 가장 큰 손실이 1958년에 발생한 ‘진보당사건’이었다고 지적했다. 김정일은 대남공작의 두 번째 큰 손실로 1968년의 통혁당 사건을 거론했다. 그는 김종태, 최영도, 정태묵 등이 관련된 ‘통일혁명당사건’이 한 사람을 잘못 처리함으로써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정태묵의 동생 정태상이 입북해 있을 당시 정태상의 부인은 정태묵에게 남편을 찾아내라고 난리를 쳤다. 정태묵은 큰일이 날 것 같다고 북으로 무전으로 보고했고, 북측은 정태상을 내려보냈다. 내려온 정태상은 형과 공작금을 가지고 싸움이 붙었고, 결국 부인의 친척 검사에게 밀고해 버렸다. 이 부분에 대해 김정일은 “정태상을 내려보낼 게 아니라 정 다급했으면 그의 부인을 데려왔으면 되지 않았느냐? 왜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내려보내 모든 조직을 망쳐버렸는가”라고 질책했다.>
L씨의 말대로 남으로 내려온 정태상은 공작금 문제로 형인 정태묵과 다투게 됐고, 정태묵에게 화가 나 있던 정태상의 부인이 정태묵을 밀고함으로써 임자도 간첩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됐던 것이다.
<곁에서 본 김정일>은 저자가 전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낸 신경완과의 대담을 적은 책이다. 출생비밀과 성장과정, 사생활, 지도력 등 김정일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신경완은 1980년대 초 제3국으로 망명했다가 한국으로 입국한 후 1998년 세상을 떠났다. 사망할 때까지 ‘비공개 귀순자’였던 신씨는 1945년 북조선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조선노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대남사업부서의 부부장을 지냈다고 한다. 제3국 망명 때까지 30년 넘게 노동당 중앙당에서 근무한 북한 현대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L씨와의 대화다.
―통혁당 사건 주요 관련자들은 이후 어떤 조치에 취해졌습니까.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와 체포된 북한군 장교 2명(이관학, 김승환)은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됐습니다. 신영복(申榮福·現 성공회대 석좌교수)은 1969년 1월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으나, 1970년 3월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20년 수감 후 1988년 8월 15일 가석방 출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L씨에 따르면, 통혁당 하부선이었던 이진영과 오병헌은 19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다가 남한에서 통혁당 사건이 노출되면서 귀환하지 않았다. 임자도 사건과도 관련된 최영도는 1969년 1월 2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수감 도중 병사(病死)했고, 정태묵과 윤상수는 모두 사형이 집행됐다.
左翼의 통혁당 再建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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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사건 주범 중 하나인 이문규. |
“시대적 배경이 다릅니다. 1968년 당시는 반공(反共)이 국시(國是)였고, 1년에 수차례 북한의 무장공비가 침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남한 내에서도 통혁당 재건위(委)와 같은 사건이 줄줄이 일어났죠. 북한의 적화통일이라는 대남노선에 따라 지하당 구축이 계속 시도되는 등 불안정한 시대적 상황에서 간첩에 대한 사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8년 통혁당 관련자들이 일망타진된 이후에도 좌익(左翼)단체들의 통혁당 재건공작은 계속 시도됐다. 1969년 9월 남파간첩 임종영(가명) 등 12명이 적발된 ‘경남지구 지하당 사건’, 1969년 10월 8일 북한노동당 소속 간첩망 전북조직책 진락현 등 10명이 체포된 ‘전북지구 지하당 사건’ 등 1979년까지 당국에 적발된 사례만 최소 9건이다. 그만큼 남한 통혁당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컸다는 증거다. 다음은 그 사례 중 일부다.
▲1969년 10월 16일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 북한 무장간첩 한영식 등 19명이 서울대, 고려대 학생간부를 포섭해 개헌반대 학생혁명 토대 마련 및 통혁당 재건 공작.
▲1971년 5월 14일 호남통혁당 재건간첩사건: 남파간첩 류락진 등 11명이 북한의 지령으로 당 호남지부 구성 및 도·시 단위 지하당 조직해 혁신계 정당 침투로 적화통일 혁명이론 유도.
▲1971년 9월 17일 통혁당 사회혼란사건: 북한 간첩 전병모(全炳謀) 등 17명이 7개 조직망을 구성, 북한 대남사업총책 김중린(金仲麟)의 직접 지령 아래 학원, 노동자, 혁신계 사회인사를 통해 합법적 정당 창설을 기도.
▲1971년 10월 12일 통혁당 재건 3개망 간첩단 사건: 유종인(柳種寅) 등 10명이 3개 조직망을 구성해 연세대 내부 지하당을 구축하고 요인암살을 시도하는 등 통혁당 재건 시도.
▲1972년 4월 11일 지하통혁당 조직 거물 간첩사건: 유위하(柳渭厦) 등 32명이 포섭자를 대동해 월북하고 지하조직을 확대하는 등 통혁당 재건 획책.
▲1974년 2월 울릉도 거점 지하당 공작사건: 1982년부터 13년 동안 전용관, 김용득 등이 북한 간첩에 포섭돼 공작금 3400만원을 수령, 지하당 재건을 기도하다가 검거. 사건이 폭로되자 북한은 이들 간첩을 ‘남한 내 통혁당원’이라고 모략함.
▲1975년 11월 22일 학원간첩침투사건: 북한노동당원인 위장 유학생 김옥자(金玉子·부산대) 등 21명이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학원침투, 통혁당 지도부를 학원에 구성하고 지하망을 조직해 민주화·자유화란 구실 아래 소요를 일으켜 사회불안을 유발.
▲1979년 8월 삼척고첩단 사건: 6·25전쟁 당시 월북한 간첩 진현식 등 9명이 삼척에서 강원도 통혁당 지도위를 결성하다가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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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31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한명숙 당시 총리가 남편 박성준 교수와 함께 서울 삼청동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있다. |
사형 선고를 받은 간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영복씨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성공회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명숙(韓明淑) 전(前) 총리의 남편 박성준(朴聖焌)씨는 1967년 6월 신영복에게 포섭돼 당 소조책(小組責)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처 한명숙과 박경호(朴璟鎬), 김국주(金國柱) 등을 당 소조로 포섭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소조란 북한의 지하당에서 가장 최소 조직 ‘세포(당원 3명)’ 3개가 모여 결성된 조직을 뜻한다. 소조책은 소조와 세포를 관리하는 간부급 당원이다.
당시 공안당국은 서클 회원들을 통혁당 당원으로 포섭한 박성준씨를 당 간부인 소조책으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한 전 총리와 남편 박 교수 모두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2006년 3월 부인이 총리에 지명된 후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통혁당 사건의 일부는 사실이나,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 본 게 전부”라고 주장했다. 2007년 8월 한 전 총리와 박 교수가 함께 출판한 저서 <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의 해명은 이전의 주장과 달랐음이 <월간조선> 2006년 5월호 취재 결과 밝혀졌다. 당시 인용된 계간(季刊) <새길이야기(3호·2001년 발행)>는 박성준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마르크스 경제학 책을 직접 번역해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유포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성준 교수의 엇갈리는 증언
박성준 교수의 당시 혐의에 대해 대공요원 출신 L씨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통혁당의 핵심 인물인 신영복의 법원 선고결과(1심 사형, 2심 무기징역)만 봐도 그가 얼마나 충실한 핵심 인물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포섭돼 ‘기독교 경제복지회’를 이끈 박성준이 ‘책 몇 권 빌려 봤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는 조직의 허리 역할인 당 소조책으로 활동하며 말단 조직원들을 이끌었습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법원에서 15년형이란 중형을 선고하지 않았겠죠.”
박 교수는 2006년 3월 자신의 이력에 논란이 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국무총리가 된다면 임기 이후에 개인 자격으로 통혁당 사건의 재심(再審)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 전 총리가 임기를 마친 지 3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박 교수가 재심을 청구했다는 언론보도는 없었다.
노무현(盧武鉉) 정권 당시 좌파 인사들이 활동했던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등 과거사위에서도 “주모자들에 대한 혐의가 분명한 사건”이란 이유로 통혁당 사건을 조사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엇갈리게 증언했다. 통혁당 사건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중 대한통운 사원으로 재직하다 폭격으로 아내, 장남과 함께 동시 사망한 것으로 진술돼 있다. 박 교수가 부모와 형을 전쟁 중 폭격으로 사별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박 교수의 조부(祖父)가 1951년 11월 삼천포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버지가 호주 상속을 했다. 그리고 박 교수의 사촌동생 중 한 명은 박 교수의 아버지에 대해 “6·25전쟁 당시 인민위원으로 친북좌익 활동을 하다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월북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이후 가족과의 사별 경위를 다르게 설명한다. 2003년 한 강연에서 박 교수가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일제강점기 당시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됐고, 6·25전쟁 중 월북, 이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박 교수 가족의 정확한 생존여부는 뜻밖의 경로를 통해 밝혀졌다. 2006년 5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생사확인 과정에서 북한에 살던 박 교수의 누나가 남한 가족과의 상봉을 신청한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한 한명숙 부부의 在北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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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북한의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명단에 기록된 박성준 교수 누나의 생사확인신청서. 아버지 박상묵은 1950년 사망, 어머니 구무선은 1982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다. |
하지만 그들의 상봉은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공개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 참가자 명단에 박 교수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가족은 월북, 자신은 간첩 전력이 있는 박 교수가 자신의 부인이 막 총리로 임명된 상황에서 상봉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 측은 “북한의 가족이 생사확인 요청을 하더라도 남한의 가족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상봉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만약 박 교수가 상봉 행사에 참석했더라면, 총리 시(媤)가족의 좌익·월북전력 논란이 야기돼 파문이 확산됐을 것이다. 경찰에 몸담았던 전직 대공요원은 2006년 한명숙 총리 임명 직후 북한의 가족이 이산가족 생사확인 신청을 한 것에 대해 “대남공작 전술 차원에서 북한이 박려아에게 상봉신청을 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관계자의 전언이다.
“북한은 통혁당 당원이었던 박성준 교수에 대한 재북(在北)가족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박 교수의 활용 가능성을 알아보고 나아가 그의 부인인 총리를 친북화시켜 정부 차원에서 대북 지원 등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 했을 것이다. 만약 상봉이 성사돼 가족이 만나는 자리에 한 총리까지 나타난다면, 언론보도 후 남한 보수층이 한 총리의 친북 사상을 비판하는 등 남남갈등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북한이 의도하는 사회혼란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도 북한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것이 없었을 것이다.”
통혁당 사건은 국내 용공(容共)세력의 조직적 간첩 활동을 보여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역사적 증거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 10월, 과거사기본법 제정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좌파단체는 통혁당 사건을 조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북괴로부터 남파돼 숨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 공산주의 사상이나 사회주의 사상에 야릇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일부 지식인들, 아직도 북괴를 병적으로 동경하고 있는 전 남로당원들, 그리고 북괴라면 무조건 두려운 존재로만 여기고 유언비어에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사사로운 이욕 때문에 눈이 멀어 대한민국을 함부로 비방,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 보잘것없는 글이 그들로 하여금 국가이성과 국가이익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나는 붓을 들었다.”
통혁당의 핵심 간부였다가 사형당한 김질락이 전향 후 옥중수기에 쓴 머리말 중 일부다. 40여 년 전 사형수가 쓴 고백록을 지금도 귀담아들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통혁당 사건이란? 1960년대 최대 간첩단 사건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남파간첩에게 포섭된 김종태(金鍾泰)가 네 차례 북한을 왕래하며 미화 7만 달러, 한화 3000만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아 국내에 잠입, 통혁당을 만들어 학원, 노동, 종교 등 서클 형태의 소(小)조직과 서울시내에 여러 개의 학사주점을 운영하면서 선전·선동 활동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에 적발된 사건으로 1960년대 최대 간첩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서울시당 책임자 김종태,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 김질락, 전남도당 창당준비위원장 최영도, 〈청맥사〉 편집장 이문규(李文奎) 등 총 158명이 검거됐고 73명이 송치돼 50명이 구속됐다. 김종태가 이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자 북한은 군중대회 등 대대적인 추도식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은 1994년에도 간첩을 보내 김종태의 처 등 유족의 소재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북한에서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지난 1976년 9월 귀순한 김용규(金用珪)씨의 통혁당 관련 증언이다. 그는 북한 노동당의 지시로 통혁당 재건계획에 직접 관여했던 인물이다. <통일혁명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임자도에서 면장을 지냈던 지방유지 최영도가 생질(甥姪)인 남파 공작원 김수영에게 포섭되면서 시작됐다. 최영도는 세 차례에 걸쳐 평양을 다녀오면서 노동당에도 입당했다. 전남도당 책임자가 된 최영도는 지하당 조직망을 확산하는 한편 과거 남로당에서 전남도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수사기관에 체포돼 10년형을 살고 나온 정태묵(임자도 간첩단 사건으로 1968년 7월에 검거됨)을 다시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은 최영도의 조직을 전라남도 지도부의 정(正)조직으로, 정태묵의 조직은 후보조직으로 이원화시켜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해 나갔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생질인 김수상을 내세워 김종태를 포섭하기로 했다. 반(反)정부 감정을 갖고 있던 김종태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포섭은 쉽게 이루어졌다. 평양으로 밀입북(密入北)한 김종태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김일성과 만나기도 했다. 간첩교육을 받은 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김종태는 김질락, 이문규, 이진영, 임진영 등 친척, 친우 등 측근들을 손쉽게 규합해 통혁당 서울시 지도부를 구성했다. 한편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등의 단체 등을 조직, 운영하면서 반정부 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선전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68년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직이 적발됨으로써 통혁당을 적화통일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던 북한의 계획은 일단 좌절됐다. 나는 1973년 7월 남파됐을 때 직접 통혁당 재건 공작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포섭대상은 과거 김종태와 연계되었던 인물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