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풀이의 최강자, ‘마른 새우 아욱국’
해장국 하면 주당들은 으레 청진동 해장국이나 전주 콩나물해장국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들보다 마른 새우가 들어간 아욱국을 좋아한다. 장에서 먼저 아욱국을 부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해장은 본래 ‘해정(解酲)’, 즉 ‘숙취(酲)를 푸는(解)’이라는 뜻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가 변화가 일어나 ‘해장’이 되었기에 사실 장(腸)과는 관계가 없다.
이 아욱국을 가까이한 지는 대략 30여 년 정도 된다. 당시 쌀쌀한 날씨에 고교 후배와 과음을 하고 집에 들어온 나는 일 때문에 이튿날 다시 그 후배와 점심 약속이 있어 11시에 좀 일찍(?) 일어났다. 마침 전화벨이 울려 받으니 지금의 SC제일은행 정문 앞에서 보잖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다스리며 간신히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배는 배를 어루만지며 걸어오는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괜찮은지 물었고, 난 힘없이 해장국을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후배는 이 근처에 속풀이 국으로 끝내주는 집이 있다며 자신의 단골집으로 데려갔다. SC제일은행 뒤편 수송동 옛 서울예식장 자리(지금은 ‘두산위브 파빌리온’이 들어섰다)에 있는 삐거덕거리는 2층 목조건물의 식당이었다.
후배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할머니, 거시기 두 그릇이요!” 하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러자 주인인 듯한 할머니가 피식 웃으며 주방 커튼을 젖히더니 “아줌마 거시기 두 그릇 내줘요!” 하니 안에서 “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이들만의 암호인가? 거시기? 전라도구먼.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과 밥이 나왔다. 마른 새우가 들어간 아욱국이었다.
“선배님, 이 아욱국 한 번 드셔보세요. 정말 끝내줍니다. 한 그릇 다 들이켜고 나면 당장 술이 당길 정도로 속이 확 풀립니다.”
정말이었다. 이내 속이 편안해지며 살 것만 같았다. 아욱국이 이렇게 시원했던가? 참 희한하네, 이따 저녁에 또 한잔 당겨볼까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해장국의 신천지를 찾은 기분으로 후배에게 거듭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슬쩍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할머니, 너무 맛있게 먹었는데 집에서 한 번 끓여 먹어보게 비법 좀 알려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별것 없고 마른 새우가 들어가야 하고 아욱이 질기니 비벼서 넣어 끓여야 시원하다고 알려주었다. 야호! 오케이! 할머니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을 쑤셔 넣어주고 나온 뒤부터 나는 집에서 속풀이로 마른 새우 아욱국을 해 먹기 시작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동안 해장국으로 장기 군림해온 콩나물국은 아욱국에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이제 나이 들어 칠순을 바라보지만 마른 새우 아욱국을 먹을 때면 가끔씩 고마우신 그 식당 전라도 할머니(살아계시면 100세 정도 되셨을 것이다)가 생각난다.
아욱국 레시피는…
“가을철 아욱국은 사립문 닫고 먹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미인 아욱국은 쌀쌀해질 때 더욱 당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욱국을 속풀이 국으로 감히 최고라고 자부하는 나는 독자들에게도 추운 날 해장국으로 적극 추천하고 싶다. 특히 중국에서는 아욱을 ‘채소의 왕’이라고 한다던데, 이유는 모르겠고 칼슘과 식이섬유가 풍부해 변비에 효과가 있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면 간단히 아욱국 2인분을 한 번 만들어보자. ‘레시피’라고 할 만큼 거창하지도 않다. 아욱 한 단은 대충 4~5인분 정도라 보면 되는데, 줄기를 잡고 한 줌 움켜쥐면 2인분 정도가 된다. 먼저 머그컵 3잔(750cc 정도)의 물을 냄비에 부은 뒤 된장을 듬뿍 한 숟갈 풀고 육수용 큰 멸치 3~4마리를 투하한 다음 펄펄 끓인다. 원래는 아욱 줄기가 거칠어 껍질을 벗겨야 하지만 채소가 질기면 얼마나 질기겠나. 그냥 끓는 육수에 먼저 줄기를 5cm 정도로 잘라 넣고, 2~3분 뒤에 다진 마늘(3톨), 어슷하게 썬 대파나 쪽파 한 줌과 함께 조금 비빈 이파리를 넣는다. 그다음 바로 마른 새우(나는 3cm 정도짜리를 쓴다) 한 줌을 넣고 팔팔 끓이면 거품이 이는데, 불순물이기 때문에 국자로 걷어내는 게 좋다. 그리고 국간장으로 간을 한 뒤 다시 2~3분 끓이면 훌륭한 ‘마른 새우 아욱국’이 완성된다. 그런데 요즘 나는 마법과도 같은 참치액에 홀딱 빠져 있는 터라 국간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참치액 한 숟갈을 드레싱 하는 것으로 간을 마무리한다. 청양고추나 고춧가루는 식성에 따라 각자가 알아서 쳐 먹기 바란다.
깡통조림, C-레이션과 그날의 미역국
‘이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를 것이다!’
독일의 대(大)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말이다. 괴테는 슬픔으로 울면서 밤을 지새운 사람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필자의 세대는 일제 말기에 태어나 조국 광복과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 전쟁과 국가 수차례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비롯한 격동의 사태를 겪으며 살아온 세대다. 특히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던 한국 전쟁 중 우리 가족은 특히 더 했다. 당시 필자는 초등학생이었고, 부친 김석길(金錫吉)은 《조선일보》 주필로 재직 중이셨다.
부친은 신문사 사주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 선생을 가까이서 모시던 중, 방 선생이 강제로 납북(拉北)된 후 공산 치하 3개월 동안 땅굴 속에 숨어 굶으며 사셨다. 아버님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셨기에 우리 가족들은 저들의 마수(魔手)를 피하느라, 무척 고되고 힘든 3개월을 보냈다. 수도 서울 탈환 후 전쟁의 양상이 호전될 줄 알았었는데, 4개월 만에 또다시 적화(赤化)되어 험난한 피란길에 올라야만 했다.
그해 1월은 몹시도 추웠다. 엄동설한이 북풍과 더불어 몰아치던 그 추위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몸서리가 저절로 쳐진다. 언론사에서 마련해준 특별 피란열차에 겨우 올라타고 남하(南下)를 시작했다. 몇 날 몇 밤을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피란 남행열차가 어느 늦은 밤, 이름 모를 큰 도시의 역(驛)에 잠시 머물게 되자, 추위에 떨던 피란민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우르르 역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우리 가족도 그 속에 섞여 함께 나가, 한겨울밤 역전 길거리 좌판에 올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삶은 통오징어를 씹지도 않고 게 눈 감추듯 먹었는데, 그 맛은 여전히 필자의 잊지 못할 눈물 젖은 솔푸드로 남아 있다. 그 역은 대구역이었고, 때는 1951년 1·4 후퇴 때였다.
부대찌개의 원조… 군용 깡통조림
세월이 흘러 까까머리 학창 시절을 맞았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잠시 멈췄지만, 온누리는 온통 전쟁의 폐허 속에 어느 곳 하나 제대로 된 것 없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폭격을 맞은 도심의 건물들은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고, 광화문과 중앙청 석조건물 또한 화염에 휩싸였던 모습 그대로 검게 그을린 채 상처투성이였다.
남대문·청계천시장을 비롯한 삶의 치열한 터전은 피란지에서 돌아온 누추한 모습의 인파(人波)로 뒤덮여 혼잡의 극한을 보는 듯했다. 어수선한 나라 형편상 마땅한 볼거리나 이렇다 할 휴식 공간도 옳게 찾지 못하던 그때, 영화 관람은 당시 시민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이며 문화생활이었다.
어느 날, 산악 영화 〈더 마운틴(The Mountain)〉을 감명 깊게 보았다. 명배우 스펜서 트레이시가 출연했는데, 내용은 고산(高山) 등반 도중, 조난사고를 당해 사경(死境)을 헤매던 아우를, 죽음의 눈사태 속에서 극적으로 구출하며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몸소 일깨워주는 감명 깊은 영화였다. 그는 이 작품으로 영국 여왕에게 작위(爵位)를 받을 만큼 명연기를 선보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등산 활동에 붐이 일어 산악부를 편성해, 암벽 등반에 몰두했다. 백운대와 인수봉, 도봉산 만장봉과 선인봉 그리고 우이암, 주봉(柱峰), 오봉(五峰)을 비롯한 전국 팔도강산의 암벽은 모두 우리 산악인들의 신나는 활동 무대였다. 외줄 로프에 의지해 오르고 내리면서 며칠씩 묵던 야영 생활, 겨울철 내내 눈 덮인 횡계리 민박 스키마을에서 때우던 하루 삼시 세끼 음식은 물론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군용식품을 곁들인 김치찌개였다.
아마도 한참 후, 서울 용산구 미 8군부대 근처나 의정부, 파주 용주골 등 기지촌 주변에서 번성했던 ‘부대찌개’의 원조가 아닐까? 이 또한 필자의 잊지 못할 두 번째 솔푸드다. 이 ‘꿀꿀이 죽’ 같은 솔푸드는 지금도 여전히 필자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
월남에서 먹던 C-레이션
학창 시절이 끝나고, 당시 사회 진출 전 필수로 국방의 의무를 필(畢)해야 했는데, 귀신이나 한놈 잡아볼까 해서 제 발로 악명깨나 높았던 해병대를 찾아갔다.(지금은 바퀴벌레, 빈대도 못 잡지만… ㅋㅋ)
“The Few! The Proud!(자랑스러운 소수)”라는 남성적이고 매력적인 슬로건에 이끌려 단기 장교로 입대해, 주야장천 북한 괴뢰군을 노려보며 철책선을 지켰다. 1년쯤 지났을까?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병역의 의무를 끝내고 사회로 복귀해 보람된 사회생활을 누릴 수 있었는데, 느닷없이 당시 치열했던 베트남전 파월(派越) 명령이 떨어졌다. 한창 젊은 나이에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이 또한 주어진 운명이라면 기꺼이 가겠노라고 큰소리 떵떵 치면서 전쟁터로 향했다. 그러고 기왕이면 최전선 소임을 자임(自任), 용감한 부하들을 이끌고 수색중대 소총소대장으로 최선봉에 섰다. 청룡부대 최장기 소대장으로 1년간 아슬아슬하고 치열한 전투, 지뢰밭을 누비거나 적탄에 철모가 뚫려가면서도 용케 살아남았다.
아침, 눈만 뜨면, 맨땅에 꿇어 엎드린 채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수호신이신 주님!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기오니, 저와 제 부하들을 친히 보살펴주소서. 무사히 하루를 지나게 해주심을 간절히 빌어 올립니다. 그리고 소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저들의 가족 품으로,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이 치열한 전투 기간 동안 하늘이 안 보일 정도의 어두운 정글 속에서, 거머리가 우글대는 늪지대에서, 피투성이가 된 부하들과 함께 하루 세끼 1년 내내 먹던 눈물 젖은 솔푸드는 바로 미군 전투식량 C-레이션이었다. 전투를 치르다 보면 어느새 식수가 바닥나 있었다. 40도를 웃도는 열기에 타 들어가는 갈증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맨몸도 아닌 방탄조끼와 무기류, 탄약, 철모 등은 왜 그리 무겁던지…. 제대로 된 식수를 못 구해 논두렁에서 걸러낸 흙탕물에 콩알만 한 소독약을 타야 했다. 함께 억지로 위장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던 햄, 소시지, 베이컨이 지겨워, 이것들을 볼라치면 딸꾹질이 날 정도였다. 추억과 애환(哀歡)이 담긴 필자의 잊지 못할 이 피 맺힌 솔푸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마주 할 때면, 잠시 눈을 감고 어깨를 나란히 하다 장렬히 산화한 옛 전우(戰友)들의 명복을 빌곤 한다.
노사분규 현장, 전화교환실 여직원이 마련해준 생일상
그리고 또 한 세월이 흘렀다. 가정을 이루고 경상남도 울산공단 자동차 생산 현장에서 젊은 혈기를 온몸으로 발산할 때였다. 억눌렸던 민주화의 봇물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일시에 터져, 전국 공장이 노사분규에 휩쓸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의 폭탄이 점화되던 시기에, 필자는 그 분규의 중심에 있었다. 울산 지역에 밀집했던 현대그룹 전 사업장은 하룻밤 사이에 술에 만취한 거칠기 이를 데 없는 강성 노동자들에 의해 급습을 당한다. ‘코로나19 팬데믹’도 아닌 그때,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온통 가리고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그들은 본관 건물은 물론, 본인들의 현장사무실, 식당, 화장실까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가 집기비품, 유리창 한 장 등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고 때려 부쉈다. 이 엄청난 사태 수습을 위해, 몇 날 몇 밤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낮밤을 새우면서 업무 복구 작업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어느 날, 전화교환실 여직원들에게 이끌려 깨져 나간 유리창 대신 비닐로 임시 바람막이를 한 통신실로 갔다.
그날, 부서진 탁자 위에 놓인 생일 케이크와 따끈한 미역국은 마치 어머님의 정성 어린 미역국과 진배없을 만큼 따뜻하고 감동스러운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솔푸드였다. 그때 이 음식을 정성껏 차려준 총무부의 하금자 부장은 지금도 울산에서 귀여운 손주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 들어 솔푸드라는 말이 부쩍 눈에 뜨인다. ‘영혼을 울리는 음식’ 혹은 ‘추억을 담은 음식’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정확히 풀이하면 미국 남부 흑인들의 전통 요리법이 담긴 음식과 요리법을 뜻하는 단어다. 아울러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가 담긴 음식이기도 하다. 그 유래(由來)는 다음과 같다. 미국 식민지 시절, 남부 지역 농장에서 고된 노예 생활을 하던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이, 그들의 그리운 고향 아프리카 전통음식을 미국식 요리법과 재료를 결합시켜 만들어 먹던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이 음식은 눈물과 애환이 담긴 추억의 음식을 뜻한다. 필자는 1960년대쯤, 미국 흑인 해방운동가인 맬컴 엑스(Malcolm X)의 자서전에서도 이 단어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은 제각기 잊지 못할 추억의 솔푸드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혹은 세월의 흐름 속에 떠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생물들은 먹어야 살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니까. 필자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 그 수많은 추억 어린 음식 중에 가장 ‘영혼을 울리는 소중한 추억음식’을 든다면 역시 젊었던 그 시절, 전우들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함께 나눠 먹던 미 군용 깡통 푸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추억의 음식을 대할 때마다 문득,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양지바른 언덕에 잠들어 있는 필자의 옛 부하와 동료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뒤이어 고(故) 이동룡 장군의 묘비명(墓碑銘)을 되뇌어본다. 이분은 필자가 젊었던 시절, 가까이서 모셨던 해병대 제1사단장을 역임하신 분이다.
“아들아! 조국(祖國)이 위태로워지거든 즉시 깨워다오. 내 분연히 일어나 다시금 총(銃)을 들리라!”
스님의 상추 겉절이
내 나이 여덟 살에 절에 들어왔다. 하루도 안 빼고 엄마를 기다렸다. 저녁이 되면 너를 찾으러 오마, 돌아서며 엄마는 약속했다. 엄마에 대한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뜬눈으로 밤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수면장애로 이어졌다. 어린 나이 때부터 한약과 침을 달고 살았다.
내가 살던 정혜사에는 동자 4명이 있었는데, 오줌을 지리는 동자는 나밖에 없었다. 노스님은 잠을 설치고, 오줌을 지리는 병을 고쳐주려 다방면으로 약을 쓰고 방법을 찾으셨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사춘기가 지난 18세 무렵 오줌을 지리고 잠을 못 자는 병이 엄마를 기다리며 생긴 병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전까지는 그저 이유 없이 오줌을 못 가리는 정신장애 아동이었던 셈이다. 기다림이 너무 깊어지면 병이 된다. 그걸 체험적으로 알게 되니, 그 후론 기다림에도 선을 긋는 버릇이 생겼다.
정혜사는 충남 예산 수덕사의 산내 암자였다. 쌀만 큰절에서 가져다 먹었고 채소류 등 다른 식료품은 자급자족해 해결했다. 한참 수면장애를 앓고 있을 때였다. 정혜사 앞에는 큰 밭이 있었는데 그곳에 상추를 많이 심었다. 상추가 많이 자라 대가 상당히 굵어지면, 대중(大衆)이 울력을 해 상추 밑둥치를 잘라 수확을 했다. 수확한 상추는 부침과 겉절이 등으로 만들어 먹었는데, 깨끗이 닦아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부엌 칼등으로 납작하게 다져 밀가루 반죽을 묻힌 후 솥에 기름을 두르고 지지면 맛난 상추 부침이 된다. 대에서 나오는 쌉쌀한 진액과 상추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채소 맛이 어우러져 그 맛이 일품이다.
당시는 특별하게 먹을 것이 없었던 터라 귀한 음식이었다. 맛도 있었지만, 상추 고유의 냄새가 좋았다. 다른 스님들보다 곱절이나 먹었던 것 같다. 그러고는 낮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깊이 잠을 잤는지 눈을 떠보니 다른 동자들이 이불을 깔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더 깊이 잠이 들었다. 일시적으로 수면장애가 극복된 거였다. 내겐 기적이었다.
‘상추동자’
효과를 한 번이라도 보면 기대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먹는 자리에서는 늘 상추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상추 부침은 준비를 많이 해야 하지만 상추 겉절이는 양념 몇 가지만 넣어 버무리면 되기 때문에 이후 상추 겉절이를 선호하게 되었다.
상추 겉절이 또한 깊은 잠에 들게 했다. 그 시절에는 하우스 재배라는 것이 없어서 제철에나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어쨌든 나는 상추를 찾아다녔고, 상추가 있는 곳에는 내가, 내가 있는 곳에는 상추가 있을 정도여서 별명이 ‘상추동자’였다. 자연스럽게 수면장애를 극복한 나는 상추 마니아가 됐다. 사람들에게 적극 권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직접 선물을 하기도 한다. 상추는 마음을 진정시켜 불안한 증세를 가라앉혀 평안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상추 겉절이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파릇한 상추를 대야처럼 큰 그릇에 차곡히 쌓은 다음, 소량의 집간장과 물을 잘 배합해서 절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짜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상추는 자체적으로 수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의 양도 적당하게 넣어 절여야지, 그러지 않으면 상추 고유의 맛을 잃게 된다. 이렇게 해서 손바닥으로 꾹꾹 몇 번 누르고 5분 정도 절이면 상추의 숨이 죽어 부드러워진다. 이때 고춧가루, 생강 다짐, 식초, 참기름 등을 넣어 손으로 뒤적이면서 서로 얽히도록 뒤집으면 맛있는 상추 겉절이가 완성된다.
상추는 사찰의 식품이라고 할 정도로 스님들이 애호하는 채소다.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성분이 있어 자연스럽게 사찰에서 즐겨 먹는 채소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하우스 재배 덕분에 사철 어느 때나 상추를 구할 수 있다. 내게 상추 겉절이는 긴 기다림에서 온 병을 눅여준 친구 같은 음식이다.
발레 댄서의 오이, 당근, 고기 한 점
음식과 관련된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내 삶의 기억들을 끄집어내게 되었다. 발레를 하는 나에게 음식은, 무용을 하지 않는 내 또래 친구들과의 그것과는 분명 달랐다. 몸을 매개로 하는 예술 작업을 하는 무용가들에게 있어 ‘먹는 것’은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아침에 커피 한 잔, 점심은 오이와 당근, 저녁에는 고기 한 점. 조교들이 내 점심 식사를 보고 크게 놀라워하던 표정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청소년 무용수들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스위스 로잔 국제발레콩쿠르는, 체중에 대한 집착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 거식증(拒食症) 댄서들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너무 마른 체형의 무용수에게는 참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콩쿠르 기간 중에는 발레 무용수들의 식이요법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발레 무용수들을 위한 식단’을 다룬 유튜브 동영상이 인기를 얻는 것이나 500년 만에 역사상 최초로 흑인 여성 수석무용수가 된 미국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미스티 코플랜드가 쓴 《발레리나 바디 프로젝트》란 책이 음식에 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는 이유는 발레 댄서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몸’이기 때문이다.
발레 댄서에게 필요한 체형은 빼빼 마른 몸이 아니라 탄력 있고 균형 잡힌 몸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조건 안 먹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언젠가 발레리나 강수진씨와 함께 식사를 했다는 한 지인이 “강수진씨가 엄청 잘 먹더라”라며 걱정스럽게 묻기에 “강수진씨는 많이 먹고 그 축적된 에너지를 많은 연습을 통해 모두 소진한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무조건 안 먹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나는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나는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어김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야채를 씻고, 과일을 깎고, 계란을 삶고, 커피를 끓이고 빵을 굽는다. 나의 하루는 이렇듯 내가 생각하는 건강식을 직접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난 50년 동안 나는 무용수, 무용교육자, 안무가로 살았고 지금은 예술행정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수십 년간 내 삶은 연습실에서, 무대에서, 강의실에서, 그리고 몸담고 있는 기관의 회의실에서 그렇게 춤과 함께 참으로 치열했다.
나의 건강식 메뉴는 가끔 제주도 여행길에 동행하는 후배와 동료들에게도 서비스된다. 남을 위해 아침 식단을 마련해주는 달라진 일상은 어찌 보면 나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고 기쁨이다. 다시 옛 시절을 생각해보니 요즘처럼 날씨가 추울 때 붕어빵에 군고구마를 어찌 그리 맛있게 먹었던지…. 고등학교 시절 방과 후 공연 연습을 끝내고 예전 문화방송국 앞에서 친구들과 수다 떨면서 먹던 비빔국수의 맛도 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아 간직되고 있었다.
무대를 떠나고 학교를 퇴임하고, 예술행정가로서의 역할이 많아지고부터는 “먹는 게 남는 것”이라고 식사량도 증가했고 먹는 음식의 가짓수도 많아졌다.
이즈음 나는 저녁에 일본의 선술집인 이자카야를 즐겨 찾는다. 편안한 사람들과 맛있는 안주를 벗 삼아 먹는 한 잔 술은 하루의 피곤을 날려버리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한다.
세꼬시, 한식, 옥돔뭇국
무용예술과 함께한 50년 나의 삶의 여정에서 잊히지 않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오래전 작고하신 무용가 최현 선생님은 서울예고 학생 때 처음 만났다. 한국 무용의 대가이자 영화에도 출연한 멋쟁이 선생님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서양춤은 추는 춤이야. 인위적이지. 그렇지만 한국춤은 추어지는 춤이야.”
낭만주의 기질이 다분했던 선생님의 그 자유분방한 예술세계가 좋았던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세꼬시를 드실 때는 신사동의 진동횟집으로, 한식을 드실 때는 인사동의 이모집으로 모였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는 선생님의 유작인 ‘허행초’에서 이름을 딴 허행초 모임을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맛난 음식을 들며 선생님의 예술세계를 추억하고 선생님의 춤을 말한다. 그때 모여 먹는 음식은 그냥 음식이 아니다. ‘허행초’에서 추시던 선생님 춤의 맛깔과 그 향기와 추억이 오롯이 담겨 있으니 그 어떤 음식 맛에 비하랴.
2023년 7월,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제주국제무용제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제주국제무용제가 열렸다. 열악한 제주 무용계의 토양을 바꾸기 위한 크고 작은 공연과 포럼을 5년 동안 꾸준히 열었고 제주국제무용제는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매년 수십 번 제주를 오가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제주도민이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도 좋지만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 함께 맛본 제주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명작 발레 〈백조의 호수〉의 하이라이트는 24마리의 백조가 만들어내는 군무(群舞)다. 그리고 발레 군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댄서들이 빚어내는 앙상블이다. 제주도청 앞 한라식당에서 맛본 옥돔뭇국은 별미였다. 제주에서 잡히는 적당한 크기의 옥돔을 통째로 넣고 신선한 제주 무를 채를 썰어 끓여 내는 옥돔뭇국. 신선한 생선과 시원한 무의 조화는 발레 군무의 앙상블에서 맛보는 그 짜릿한 감동과 비견된다.
맛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정성만큼이나 예술가들도 한 편의 공연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면에서 예술과 음식은 한 식구나 다름없다.
좌판 위의 양재기 국수
우그러진 양재기에 불어 터진 밀가루국수가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국수 위에는 파를 잘게 썰어 넣은 밑간용 간장 고명이 조금 얹어져 있었다. 장꾼들이나 노동자들이 허기를 채우는 싸구려 음식이었다. 내가 아홉 살이던 1960년대 초 강원도 홍천읍의 차부(車部) 앞에는 흙바닥에 좌판을 놓고 국수를 파는 노점상들이 차에서 내린 배고픈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따리 장사꾼이었던 할아버지는 점심 무렵 버스에서 내려 어린 나를 데리고 국수를 파는 좌판 쪽으로 갔다. 나는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길바닥에서 그런 국수를 먹는 게 싫었다. 길 건너 중국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구수한 기름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 집에서 짜장면 사줘.”
할아버지에게 졸랐다.
“아니다. 그냥 여기서 먹자.”
할아버지는 나를 달래면서 좌판 앞 목의자에 앉히려고 했다. 나는 화가 나서 볼이 부은 채 버텼다. 할아버지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앉더니 좌판 위의 수저통에서 나무젓가락을 꺼내 말없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나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새벽 4시에 서울 신설동에서 홍천읍으로 오는 시외버스를 탔다. 낡은 버스는 북한강 옆의 비포장길을 터덜거리며 오전 내내 달렸다. 짙은 안개 속에 숨은 산이 있었고 숨은 강이 있었다. 양수리에서 버스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6·25 전쟁 당시 부서진 다리의 잔해들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지금의 버스터미널을 그때는 차부라고 불렀다. 그 안의 매점에는 찐계란과 어묵이 따뜻한 김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얼음같이 찬 버스 안에서 창자까지 얼어붙은 내게 어묵 한 꼬치조차 사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옆에 앉은 나의 손을 잡고 허리춤 안에 있는 전대(纏帶)를 만지게 하면서 말했다.
“허리에 두른 이게 다 돈다발이란다. 할아버지는 음식점에 들어가 짜장면도 사줄 수 있고 네가 원하는 뭐든지 다 해줄 수 있어. 그렇지만 길바닥에서 싸구려 음식을 먹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 거야.”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돈도 많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우연히 우리 옆을 지나가는 남자 두 명을 보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기 양복을 입고 가는 사람들 주머니 속에는 아마 돈이 없을 거다. 저렇게 겉모습을 꾸미고 사람들은 좋은 음식점에 가서 비싼 요리를 먹고 술도 마신다. 할아버지는 돈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아. 이렇게 길거리에서 싸구려 국수를 사 먹고 잠도 여러 사람이 같이 자는 합숙소에서 자. 사람은 검소해야 하는 거야. 길바닥에서 먹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정말 부끄러운 건 게으르거나 비굴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거야.”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젓가락을 들어 불어 터진 밀가루국수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바쁜 변호사 시절, 길에서 먹던 김밥, 어묵 국물
할아버지는 함경도 보따리 장사꾼이었다. 할아버지가 평생 유지한 모습은 특이했다. 머리를 빡빡 깎고 광목으로 만든 한복에 회색조끼 차림이었다. 옆구리에는 커다란 보자기를 둘둘 만 보따리를 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향 같은 희귀한 한약재를 구하러 깊은 산속 마을을 돌아다녔다. 할아버지는 코가 예민한 내게 사향 냄새를 기억하게 했다. 사향을 사 오면 그게 진짜인지 나보고 감별하라고 했다. 시골사람들 중에는 더러 사향을 물에 슬쩍 담가 무게를 늘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때 미세한 차이지만 톡 쏘는 냄새의 강도가 달랐다. 할아버지와 어린 나는 동업자이자 친구였다. 할아버지한테서 화투의 패를 떼는 것도 배웠다. 즉 길거리 좌판의 밀가루국수는 내 영혼 속에 깊이 새겨진 할아버지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40대에 변호사를 하면서 급하면 길거리에서 김밥을 먹고 어묵 국물을 마셨다. 재래시장 좌판에서 냄비에 담은 국수를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밀가루국수는 함경도 출신 할아버지가 전해준 근검절약의 상징이다. 어떤 나쁜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어떤 곳에서도 잘 수 있는 정신력을 기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유대인의 효모를 넣지 않은 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글 한 줄이 만드는 솔푸드
어린 시절 나는 욕심이 대단했다. 형들 것보다 내 밥그릇의 밥이 적어 보이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어려서 다 먹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가족들은 꾀를 내어 밥공기 속에 작은 사발을 엎어놓고 그 위에 밥을 수북하게 담아 내놓았다.
그렇게 욕심 많던 내가 공부에서 뒤처지려 했겠는가? 경쟁에서 앞서는 확실한 길은 분명한 답이 있는 수학을 잘하는 것이었다. 고학년 산수 문제도 닥치는 대로 풀어보았다. 몇 학년 위 선배들도 못 푸는 문제를 척척 풀 때 아버지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나 스스로를 무척 뿌듯하게 했다. 내겐 쉬웠던 수학 문제를 선생님이 풀다가 막혀서 쩔쩔매면 나 자신이 더욱 대견했다. 어린 시절 내 영혼을 채워주는 것은 경쟁에서 앞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대에 들어가자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도, 외모도, 옷매무새도 내가 가장 뒤처져 있었다. 더구나 서울에서는 집도 가족도 없는 외톨이였다. 고시에 빨리 합격하면 힘겨운 생활에서 벗어날 것 같았지만 검사니 판사니 하는 것만으로는 내 인생이 만족스러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때 내 눈길을 끈 것은 빈익빈 부익부니 불평등이니 독재니 하는 사회문제였다. 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이보다 만족스러운 삶은 없을 것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학생, 정치인도 수없이 많았지만 대부분 입으로만 떠들 뿐 이 문제를 가슴에 담고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걸 내세워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빈부의 격차, 불평등의 정도, 독재의 강도는 오히려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데 내가 아무리 문제 해결을 위해 진정성 있게 투신해도 우리 사회가 그런 위선자들로 둘러싸여 있다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만큼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내 영혼을 채워줄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보였다.
가슴에는 늘 찬바람이 불고 문제 해결 고민에 점점 야위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고시가 당장 의식주도 해결하고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보였다. 하지만 대학 졸업 무렵 뒤늦게 시작한 고시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읽어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알쏭달쏭 말장난 같은 법서를 읽어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 나는 참 멍청하구나.” 친구들은 대학 재학 중 벌써 합격했는데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서도 끙끙거리고 있었다.
경쟁 대열서 벗어나기로 결심 후 달라진 세상
어느 날 머리가 아파 뒤척이다 너덜너덜한 책이 보였다. 거기에 내 눈을 확 끄는 글 한 줄이 있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다. 경쟁 가치와 비경쟁 가치다.”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모든 것이 모두 경쟁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밥그릇 투정도, 수학 우월감도, 고시 합격도 경쟁 가치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빈부격차니 불평등이니 하는 것도 경쟁 가치가 기준인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이나 자리는 내가 가지면 남이 갖지 못하고, 남이 가지면 내가 갖지 못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남은 될 수 없고 내가 저 집을 사버리면 남은 그 집을 살 수 없지 않은가. 재물이나 지위, 명예같이 사람들이 성공의 척도로 보는 모든 것이 경쟁 가치인 것이다.
한데 이 세상에는 내가 가져도 남이 가질 수 있고 남이 가져도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치 또한 있었다. 경쟁하지 않아도 누구나 갖고 싶으면 가질 수 있는 비경쟁 가치! 내가 누구를 돕는다고 다른 사람이 그를 돕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지혜를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그 지혜를 갖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비경쟁 가치가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래, 내 삶을 비경쟁 가치의 세계로 향하게 하자!’ 드디어 내 영혼을 채워줄 ‘솔푸드’를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이 앞서 나가는 데 온 힘을 쏟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경쟁할 때 나는 그 경쟁의 대열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고시 합격도 이런 일을 하는 데 쓰자! 돈을 벌어도 이런 일을 하는 데 쓰자!’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아무것도 없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 같았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출판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좋은 책을 만들고 좋은 글을 쓰는 자리를 선점해도, 이 자리는 남들도 다 올라설 수 있는 자리다. 나는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좋은 미술작품을 보여주려고 아트센터 또한 열었다. 음악과 미술,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비경쟁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다. 글 한 줄에서 발견한 솔푸드를 날마다 먹으며 사람들에게 솔푸드가 될 《월간 독자 Reader》와 《흰물결신문》, ‘흰물결아트센터’를 혼신의 힘을 다해 가꾸어 나가고 있다.
할마이, 아즈마이의 손맛, 가자미식해와 명태순대
‘솔푸드’ 하면 사연도 가지각색일 듯한데, 어릴 적 먹던 고향 음식, 아니면 어머님의 손맛이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어머님의 손맛은 그러니까 태어나서 세 살 이후부터는 모르고 컸다. 또 서울에서 나서 이제껏 사는 처지인데 따로 내세울 만한 고향 음식이라니 서울 음식 중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고향 음식을 꼽자면, 어려서부터 태어난 곳과 고향은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세뇌받아 온 터라, 함경도 음식이 내게는 고향 음식이다. 선친의 고향도, 내 고향도 함경도 북청이다.
가자미식해는 어려서부터 지금껏 즐겨 먹는 음식이다. 선친은 해방 직후, 대학 예과 입학 시험을 치르러 고향 북청에서 상경한 이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선친에게 가자미식해는 고향을 떠올려 보여주는 음식이다. 주로 친척 할마이(할머니), 아즈마이(아주머니)들이 만들어다 주셨다.
가자미를 살만 발라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 생강, 무채, 엿기름, 조밥 등을 넣어 버무려 삭힌 음식이다. 가자미 대신 명태를 삭힌 명태식해도 있다.
어려서는 주로 새콤한 무만 골라서 먹었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삭힌 생선에 더 젓가락이 가게 된다.
이제 가자미식해를 담글 줄 아는 집안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시고, 전수받아 담그는 집안 며느리, 딸들도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속초 아바이마을에서 주문해서 먹거나, 또 드물지만 가자미식해가 메뉴인 식당을 즐겨 찾기도 한다. 주인장이 속초 출신 시인이라는 인사동의 ‘툇마루집된장예술’엔 가자미식해가 당당히 메뉴에 있었다. 갈 때마다 매번, 주문해서 먹고, 별도로 포장해서 가져가곤 한 집이다. 한데 언제부턴가 메뉴에서 사라졌다. 아마 만드시는 분이 돌아가신 듯하다. 아쉬움의 해소는 대한극장 근처 골목 초입 건물 2층의 ‘유정’이라는 가자미식해 맛집을 알게 되면서 이뤄졌다. 집안 형의 고등학교 선배라는 인연으로 알게 된 김광림(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극작가, 연극연출가) 선배가 발굴(?)한 곳이다.
최근 들어 가끔 들르는데, 물론 갈 때마다 꼭 따로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가는 걸 자리에 앉자마자 부탁한다. 10년간 유학 생활을 했던 모스크바에 북한 식당이 몇 개 있었는데, 1990년대만 하더라도 가자미식해가 메뉴에 있었던 기억은 없다. 한데 2000년대 들어서 새로 문을 연 고려식당에 갔더니 있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맛이 달랐다.
물론 가자미식해의 맛이 사람마다 다 같을 순 없지만, 필자의 경우 생선을 씹는 맛과 순간의 새콤하면서 적당히 가벼운 고춧가루의 맛이 어우러지는 걸 즐긴다. 앞서 유정에 같이 가는 사람 또한 우연찮게도 함경도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광림 선배도 부모님 고향이 함경도시다.
또 다른 함경도 음식, 명태순대
한 가지면 섭섭해서 추가하자면 명태순대다. 명태의 내장을 아가리에 손을 집어넣어 다 빼내고, 소를 명태 안에 채워 넣고 아가리를 실로 꿰매 얼렸다가 녹였다 해서 꾸덕꾸덕해진 것을 먹을 때마다 구워서 혹은 쪄서 먹는 겨울 음식이다. 물론 함경도 음식이다.
역시 친척 어르신들이 만들어다 주시곤 했다. 하얀 명태 살에 만두소(두부와 다진 돼지고기, 명태알과 이리)가 어우러지는 식감을 이제는 잊은 지 꽤 되었다. 역시 만드시던 집안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서 그만 잊힌 맛이 된 것이다. 식당에서도 메뉴로 내놓음직한데 찾을 수가 없다. 속초에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내는 식당이 있었다는데 사라진 듯하다. 최근 가본 속초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명태순대 대신에 오징어순대가 대세가 된 듯하다.
사라진 음식들이 북한 인민들 사이에 남아 있을 리도 없고 탈북하신 분들에게 여쭈어봐도 안타까운 얘기로 돌아온다. 마침 생각난 김에 능라밥상의 이애란 박사님에게 전화로 여쭈었더니, 명태순대는 손이 너무 가는 등 식당에서 제공하기에는 적합지 않은 메뉴란다. 아마 북한의 현재 사정으로 미루어 명태순대를 만들어 먹는 집이 과연 얼마나 될지…. 덩달아 전통음식들도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물론 먹는 것도 즐기지만,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어디 가서 처음 보는 음식을 접하면, 만든 이에게 레시피 같은 것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가자미식해나 명태순대는 한 번도 감히 직접 만들어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솔푸드로 추억 속의 음식이 될 듯하다.
세 남매 추억이 담긴 김칫국과 김칫국밥
모두가 가난했었던 시절, 1970년 이쪽저쪽. 당시 우리는 집안 어른이 국민학교 교사였지만 그렇게 여유로운 살림살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박봉의 월급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서는 우리 세 남매 보살핌에 소홀함이 없으셨다. 좋은 날에는 소고깃국과 조기구이 등이 상에 오르고, 축하할 일에는 짜장면과 탕수육으로 우리 세 남매를 격려하셨다.
그래도 집안 살림살이를 전적으로 꾸리셨던 어머니는 조석으로 가족 먹이는 일에 전전긍긍하셨을 터이다. 그러다 보니 비교적 싼값의 제철 식재료 음식과 오래도록 넉넉히 먹을 수 있었던 저장 음식 위주로 밥상을 차리셨다. 지금 생각하면 제철 식재료와 저장 음식으로 차린 식단은 가장 신선하고 유익한 로컬푸드이자 슬로푸드의 밥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교적 가성비 있게 차릴 수 있는 밥상이기도 했다.
그렇게 상에 오른 음식 중 대표적인 것이 김치였다. 겨울이 오기 전 김장을 하고 나면, 겨우내 김치만으로 밥을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생김치로, 묵은김치로, 찌개 끓여 먹고, 밥 볶아 먹고, 생선 넣고 조려 먹고, 씻어서 쌈 싸 먹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즐겨 먹었던 음식이 바로 김칫국이다. 당시 부산 사람 밥상에는 늘 빠지지 않고 오르던 음식이 바로 맑고 시원하게 끓여낸 김칫국이었다. 개운하고 깔끔한 김칫국을 끓여 해장국 대용으로 즐겨 먹었던 것이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집안 어른께서 과음하신 다음 날, 어김없이 밥상에 올라오던 국 또한 김칫국이었다. 가끔 ‘재첩국 아지매’에게서 산 재첩국도 올랐지만, 대부분이 시큼하면서도 벌건 국물의 뜨거운 김칫국이 어른의 해장을 도왔다. 빠듯한 살림을 꾸리던 어머니로서는 남편 해장을 위해 따로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도, 쉽게 조리해 올릴 수 있었던 데다, 해장의 효과마저 좋았으니, ‘일석삼조’의 해장국이었다. 어린 자식들도 저도 모르게 그 김칫국에 입맛이 길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한 재료인데 어떻게 그렇게 깊고 시원한 맛을 낼 수 있었을까? 어머니께서 끓여주셨던 김칫국 한 사발을 들이켜다 보면, 뜨거우면서도 시원하고 진하면서도 개운했었다. 묵직하면서도 활달하고 얼큰하면서도 담박했다. 한 술 한 술 국물 뜰 때마다 입안이 넉넉해지고, 속이 환해졌다.
큰 양푼에 가득 끓인 김칫국밥
이 김칫국에 밥을 말아 끓여내면 또 다른 음식, 김칫국밥이 된다. 칼칼하고 개운한 국물에 밥을 넣고 보글보글 끓였으니, 시원하면서도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새벽녘에 김칫국을 넉넉히 끓여놓으셨다가, 변변한 반찬이 없을 때 한 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편으로 김칫국밥을 끓이셨다. 게다가 우리 세 남매가 참 좋아했던 국수까지 넣고 끓여놓으면 가장 간편하면서도 넉넉히 먹을 수 있는 밤참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 세 남매는 큰 양푼에 가득 끓인 김칫국밥을 옹기종기 둘러앉아 맛있게들 뚝딱뚝딱 퍼 먹었다. 그 시절 어머니의 김칫국밥은 우리에게는 최고의 식사이자 별식이었고 어머니께서 주시는 든든한 사랑이었다.
자식이 심하게 감기에 걸렸을 때도 당신께서는 김칫국밥을 끓여주셨다. 어머니의 김칫국밥을 먹고 나서 아랫목에서 한나절 땀을 흘리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몸이 가벼워지면서 감기가 뚝 떨어졌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김칫국밥은 어머니께서 주시는 민간요법이고, 감기로 고생하는 자식들에게 내미는 자애로운 손길이었다.
이렇듯 김칫국과 김칫국밥은 나에게 있어 어린 시절 식구들의 추억 한 덩이씩을 진득하게 담고 있는 음식이다. 그래서 요즘도 김칫국과 김칫국밥을 마주하게 되면, 항상 마음속 헛헛했던 시절의 그리운 어머니 손맛이 한 술 한 술 고스란히 느껴진다.
티베트에서 내려와 먹은 김치찌개
김태완 기자가 《월간조선》 2월호 제작을 논의하면서 설날 특집으로 〈영혼의 안식, 나만의 ‘솔푸드’〉를 제안했다. ‘솔푸드(soul food)’라는 말을 종종 듣기는 했지만, 솔직히 개념이 얼른 와닿지 않았다.
“솔푸드라는 게 도대체 뭔가요?”
김 기자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설명해야 하는 선생님처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먹는 이의 영혼을 감싸주는 음식, 또는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아늑하고 따뜻한 음식, 뭐 그런 의미입니다.”
사실 음식에 관해서는 호오(好惡)가 없는 편이다. 아주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렸을 때 호박잎쌈이나 토란국을 좋아했던 기억이 나고, 일본 라멘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걸 내 ‘솔푸드’라고까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음식을 먹으면서 ‘내 영혼을 감싸준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은 있다. 23년 전인 2001년 5월 중국 쓰촨성(泗川省) 청두(成都)에서 먹었던 김치찌개다.
그해 5월 23~30일 중국 티베트와 청두를 여행했다. 내 인생 첫 해외여행이었다. 첫날, 여행사에서 나온 강 과장이 고산병(高山病)에 대해 설명하면서, 고산 증세를 피하기 위해서는 수분을 많이 섭취하고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튿날인 5월 24일 아침 9시30분 청두공항을 출발, 2시간가량 비행한 끝에 티베트 라싸의 공가공항에 도착했다. 지방 고속버스 터미널을 연상케 하는 작은 공항이었다.
라싸 시내로 들어가기 전, 잠시 차를 세우고 채색(彩色) 바위 불상(佛像)을 구경했다. 우리보다 먼저 와서 불상을 보고 있던 일본인 관광객 가운데 한 명이 갑자기 구겨지듯 주저앉았다. 말로만 듣던 고산 증세였다. 황급히 버스 안으로 옮겨진 그의 코에 동료들이 산소 스프레이를 대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얼마 후 내 모습이 되리라는 것을….
라싸 시내의 호텔에 도착했다. 첫 해외여행이라는 흥분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호텔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때부터 슬슬 속이 느글거리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전세버스를 타고 라싸 시내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인 세라승원(僧院)을 방문했다. 티베트 승려들 특유의 붉은 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왁자지껄 독경(讀經)과 토론을 하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귀가 왱왱거리고, 눈앞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강 과장에게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한 후 버스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졌다. 일행이 오후 내내 라싸 시내 관광을 하는 동안, 나는 버스 안에서 뻗어 있었다. 오후 늦게 호텔에 도착할 즈음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산병이 오다
호텔 식당에서 억지로 저녁 식사를 하려 했지만 도저히 입맛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멍한 것이 꼭 폭탄주를 텐(ten)-텐으로 십여 잔 이상 마셨을 때와 같았다. 결국 한 술도 뜨지 못하고 룸메이트에게 “나 먼저 올라가서 쉬겠다”고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방 호수가 기억나지 않았다. 고산병의 또 다른 증세인 건망증이 발생한 것이었다. 식당으로 돌아와 룸메이트에게 방 호수를 물어보고 객실로 향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또다시 방 호수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식당으로 돌아와 룸메이트에게 방 호수를 다시 물어보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나도 모르게 구토를 하고 말았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뒤에서 고함이 들렸다. 아마 “어떤 놈이 여기에 토해놨어!”라고 외치는 소리였을 것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김치찌개 한 숟갈의 행복감
그 후 티베트를 떠나기까지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조금만 느낌이 안 좋으면 현지에서 구입한 산소 스프레이를 코에 대고 산소를 마셨다. 티베트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깔깔댔다. 나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일행 중에서도 고산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호텔에서 준비한 도시락들은 우리 일행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기브 미 원 달러”를 외치던 티베트 아이들의 차지가 됐다.
5월 28일 오후 티베트를 떠나 쓰촨성 청두로 돌아왔다. 청두공항에 내리는 순간, 모두들 거짓말처럼 기력이 회복됐다. “고산 증세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은 고(高)지대에서 내려오는 것”이라던 강 과장의 말 그대로였다.
저녁 식사는 한 백화점 구내에 있는 한국 음식점 아리랑에서 했다. 닷새 만에 만나는 한식이었다. 불고기, 김치, 된장찌개, 김치찌개, 그리고 밥…. 반가웠다.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칼칼한 김치찌개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아,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했다.
사실 외국 땅 백화점 구내의 한식당이 한식을 만들어봤자 얼마나 제대로 만들까? 그러나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많았지만,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든 것은 그때뿐이었던 것 같다. ‘솔푸드’라는 게 이런 것 아닐까? 요즘도 김치찌개를 먹을 때면 종종 그때 생각이 난다.
눈물 한 방울의 맛, 참기름
녀석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뜨거워진다. 입맛 다실 게 마땅히 없던 시절, 들숨은 떨려오고 날숨은 가빠졌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 채 어두컴컴한 북향 집 부엌 높다란 찬장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어제도 타고 그제도 타고 오늘도 탔다. 내일은? 어머니 몰래 이 위험천만한 작업을 감행하면서 유년기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피천득의 수필을 읽으니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 무서움을 잘 탔다. 그래서 늘 머리맡에다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주석으로 만든 용감한 병정들을 늘어놓고서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면 나의 근위병들은 다 제자리에서 꼼짝도 아니하고 서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무서움이 많았다. 겨우 코흘리개면서 원인 모를 피부병이 생겨 캄캄한 밤을 벅벅 긁으며 보냈다. 나는 그러나 그 녀석만 생각하면 즐거워졌다. 무섭지 않았다. 병정은 없어도 녀석이 날 부엌에서 기다린다고 느꼈다. 우리 집 강아지 쫑이를 생각해도 즐거웠지만 녀석만 못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의 잔소리에 “술에 한껏 취하지 못하면 인생을 모른다”고 볼멘소리를 하실 때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이해가 되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빙그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속셈을 숨기는 완이이소(莞爾而笑)!
동네 목욕탕 탈의실에서 옷을 벗다 말고 한동안 녀석을 생각한 적도 있다. 비누칠을 두어 번 하다가 또 녀석을 생각하며 동작을 멈췄다가 아버지에게 꿀밤을 맞은 적도 있다.
녀석은 바로 참기름이다. 참기름은 한 손에 잡히는 박카스 병에 담겨 있었다. 가끔 참기름이 밥상에 오르지만 엄마는 눈물 한 방울만큼만 떨구셨다. 그랬다. 그 한 방울이면 족했다. 한 방울이 맛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시절엔 웬 제사가 그리 많았을까. 제사가 끝난 깜깜한 밤, 어머니는 고사리, 도라지, 무채, 콩나물, 시금치를 밥과 함께 간장을 넣고 비비셨다. 그러고 마지막에 이 눈물을 두어 방울 떨구셨다. 고소한 맛은 잠까지 달아나게 했다. 오색나물이 아니라 고소한 참기름이 맛을 돋우었다. 그러니까 참기름은 창(窓)이었다. 창을 통해 세상의 풍경을 보듯 고소한 녀석이 음식의 깊은 맛을 살려주었다.
박카스 병에 담긴 참기름
언젠가부터 한번 맛을 들인 혓바닥이, 입술이, 입구녕이 나를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없는 틈을 노려 부엌으로 숨어들었다. 요즘 같은 입식(立式) 부엌이 아니었다. 부엌으로 가려면 안방에서 마루를 지나 마당을 옆으로 끼고 높은 문턱을 넘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코흘리개 아이로선 장애물 경기나 다름없었다.
부뚜막 위 찬장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고 박카스 병에 담긴 녀석을 움켜쥐고 눈물 한 방울의 맛을 음미했다. 사이다를 마시듯 들이켜지 않았다. 한 방울이면 족했다. 못된 탐욕 속에서도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미를 알았던 것일까. 물론 참기름을 손에 쥐고 한입 들이켰지만 삼키지는 않았다. 입술과 혀끝에서 느껴지는 고소함을 음미하며 다시 병 안으로 돌려보냈다. 이 글을 읽는 누가 거짓말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한 방울이면 충분했다’이다.
나의 참기름 도적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는 박카스 병에 담긴 참기름 양을 체크하고 있었다. 박카스 병은 찬장 맨 위칸으로 자리 또한 옮겨졌다. 저 높은 곳을 향해 기어올랐다. 떨어지면 또 올랐다. 어디가 부서져도 어쩔 수 없었다. 찬장이 앞으로 쏠려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가 미닫이 부엌문을 드르륵 여셨다. 놀라시는 표정, 우멍하게 들어간 두 눈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찰싹 찰싹, 내 엉덩이에 어머니의 매운 손맛이 닿으며 한바탕 빗소리를 터뜨렸다. ‘삼가 생각하건대’로 시작하는 옛글을 읽을 때처럼 그때, 코흘리개 시절의 한 방울 맛이 그립다.
세월이 흘러 디테일한 기억은 증발해버렸으나 가끔 어머니가 나의 ‘찬장 습격 사건’을 떠올리시던 일이 생각난다. 컴컴한 부엌에서 스파이더맨처럼 높다란 찬장을 기어오르던 꼬마의 모습에 기겁했다는 말씀이셨다.
성장기 식생활을 지배했던 소고기
특정 음식이 아닌 소고기가 솔푸드라니, 무성의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진짜다. 요리 실력이 선수급인 친정엄마는 “그렇게 다양하게 열심히 해 먹였는데 결국 소고기냐”라며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대표 메뉴로는 부산식 맑은대구탕, 가자미조림, 꽃게탕, 갈비찜 등이 있다. 경상도식 음식인 김칫국밥과 양미리조림, 생멸치지짐, 명란계란찜 등은 나의 추억의 집밥이다. 고구마순, 미역줄기, 대구알무침, 콩잎절임 등 어릴 적 당연하게 먹었던 반찬도 마찬가지다. 엄마의 된장찌개와 겉절이김치 등 기본 메뉴는 당연히 깊은 맛을 지녀 사위와 손자의 극찬을 받는다. 친정 밥상은 7첩반상이 기본이고, 엄마는 손자를 위해 전복탕, 양곰탕, 오미자차, 단팥죽, 오색나물 등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끊임없이 공수했으며 지금도 식재료를 고를 때 ‘크고 예쁜 것’을 심사숙고해서 고른다. 재료가 좋고 요리 과정에 정성이 들어가니 음식이 맛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나의 성장기 집밥, 즉 솔푸드는 이런 정성 어린 요리와 반찬들보다는 ‘소고기’라는 것이다. 엄마는 삼 남매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거의 삼시 세끼 소고기를 먹였다. 아침은 곰국, 점심은 소고기찌개, 저녁엔 전기프라이팬을 꺼내 등심을 굽는 게 일상이었다. 꽃게탕이나 생선조림 등 메인디시가 있어도 소고기를 구웠다. 친정집 김치찌개는 김치는 안 보이면서 얇고 부드러운 소고기가 듬뿍 들어 있었고, 나는 김치찌개 내용물이 보통 돼지고기나 캔참치라는 것은 대학생이 된 후에야 알았다. 구이용 소고기가 등심 외에 다른 부위가 있다는 사실도 성인이 돼서야 알았다. 어쩌다 급히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 특별한 반찬이 없으면 갈아놓은 소고기 볶음을 참기름과 함께 밥에 비벼먹었다. 우리 집 삼 남매 모두 지금까지 큰 병은 물론 잔병치레도, 노화로 인한 질병도 없이 튼튼하게 살고 있는 것은 어릴 적 차곡차곡 쌓아온 소고기의 힘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우리 집이 특별나게 잘살아서가 아니다. 전쟁 후 어려운 시절을 겪어온 우리 부모 세대는 ‘잘 먹어야 잘산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키웠던 것은 아닐까.
가족 모두 건강한 건 고기 덕인 듯
엄마가 고퀄리티 집밥을 솔푸드로 남겨준 가운데 아버지는 또 다른 외식 솔푸드를 남겨주었다. 역시 주제는 소고기다. 삼 남매가 어릴 때 아버지는 직업 때문에 늘 바빴지만 주말이면 소문난 맛집으로 가족을 데려갔다. 주로 삼원가든, 늘봄공원, 버드나무집, 오륙도, 곰바위, 베니하나 등 고깃집이었고 중식이나 양식으로는 도원, 피자힐 등 유명한 음식점은 모두 부모님과 함께 여러 차례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말 가족 모두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간단한 아점을 먹으러 갈 때면 신사동의 영동설렁탕, 프로간장게장, 강남따로국밥 등 지금도 맛집으로 남아 있는 노포를 방문했다. 생각해보면 두 분 모두 부산·경남 출신이라 생선과 해산물을 좋아했지만 아이들에겐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과 철분이 풍부한 소고기를 늘 먹이려고 했다. 현재 70대 엄마, 80대 아버지, 4050세대 삼 남매 모두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등의 문제가 없는 것은 물론 잔병 없이 쌩쌩해서 부모님의 방식이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남편과 아들의 귀가가 늦어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할 때면 소고기를 굽는다. 등심이든 살치살이든 차돌박이든 치마살이든 안창살이든 냉장고에 있는 대로 아무거나 굽고 채소 조금과 최소한의 탄수화물을 곁들여 혼밥을 한 후 ‘단백질과 철분, 비타민과 섬유질을 보충했고 당(탄수화물)은 최소화한 건강식단’이라고 애써 평가하곤 한다. 물론 마블링 가득한 소고기가 건강식품이냐는 반대의견도 있겠지만 나에겐 평온함과 안식, 어릴 적 추억까지 가져다주는 솔푸드인 만큼 나 혼자만이라도 건강식단이라는 감투 좀 씌워줘도 괜찮을 것 같다.
신혼 어느 날의 ‘무 된장찌개’ 예찬론
우리 집 된장찌개에는 늘 무가 있었다. 엄마의 식탁에도, 할머니 때도 그랬다. 두부가 빠질지언정 무는 꼭 있어야 했다. ‘엄마, 된장 끓여줘’ 하면 ‘어디 보자, 무가 있나?’ 하는 게 메뉴 결정 알고리즘이었다. 결혼을 했다. 신혼 초, 그러니까 약 8년 전 어느 날 저녁. 식탁 위에 뚝배기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자, 남편이 말했다.
“와! 된장찌개다. 근데 무가 들어 있네?”
설마. 무 넣은 된장찌개를 처음 본 건가. 그렇단다. 자기 집에서는 대대로 감자를 넣어왔다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무 된장찌개 예찬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감자와 두부만 넣으면 국물이 텁텁해지는데, 무를 넣으면 이를 중화시켜주고, 한 번 끓이면 살캉하고, 두 번 끓이면 말캉해지는 식감도 요물 같으며, 뜨거우면 물론, 식은 후 밥에 참기름 두르고 비벼먹을 때에도 된장이 잔뜩 밴 무가 감초 역할을 한다고 말이다.
그사이 말없이 숟가락을 든 남편은 “정말 그러네. 진짜 시원하다”고 했다.
돌아보면 우리 집 식탁에는 무가 자주 올라왔다. 생선을 먹을 때도 곱게 간 무를 곁들였다. 특히 겨울에는 빠지지 않고 먹었다. ‘여름에 생강, 겨울에 무를 먹으면 의사 볼 일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겨울 무는 최고로 친다. 수분과 당도도 더 높다고 한다. 할머니의 된장에, 무가 가장 맛있을 때를 놓치지 않는 엄마의 마음이 더해진 된장찌개는 그 자체로 보약이었다. 묵묵히 숟가락을 움직이는 남편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작은 뚝배기에 무려 삼대(三代)의 마음이 담겨 있는 거야. 그리고 무가 진짜 신통방통한 게 뭔 줄 알아? 요리할 때 불은 재료의 맛을 내뿜게 하고, 불을 끄면 그 맛이 재료에 다시 스미는데, 무는 특히 그 반응이 탄력적이야. 끓을 때 알싸한 단맛을 국물에 내어주고, 식어가면서 그 맛을 빠짐없이 거둬들이는 거지. 뿌리 뽑혔지만, 찌개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셈이랄까. 겨울 무가 제일인 것도 정말 흥미로워. 숙살지기(肅殺之氣)라고 하는데, 생명력을 꺾는 한기(寒氣)가 되레 맛과 영양분을 보존해준다는 게 정말 놀랍지 않아? 살면서 우리도 찬바람을 맞을 텐데, 어쩌고 저쩌고….”
나는 ‘이것이야말로 내 영혼을 관통하는 음식이다!’라는 표정으로 일장연설을 늘어놨고, 남편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무 넣은 된장찌개는 저녁 단골 메뉴가 됐다.
“어때?”
“진짜 시원해.”
마치 가톨릭 미사에서 신부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면, 신자들이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화답하듯, 이는 수년간 우리 부부의 자연스러운 밥상머리 대화가 됐다.
그러던 며칠 전 저녁. 여느 때처럼 된장찌개를 끓이려던 참이었다. 오늘은 화채처럼 썰어볼까, 하며 땡땡한 겨울 무를 요리조리 돌리고 있는데 남편이 다가왔다. 비장한 표정, 그러나 그에 상응하지 않게 망설이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 저기, 말이야…. 생각을 좀 해봤는데, 된장찌개에 무를 안 넣으면 안 될까?”
무 된장찌개를 왜 먹지를 못하니…
충격이었다. 신부와 신자처럼 ‘연대(連帶)’의 확인일 줄 알았던 레퍼토리가 실은 ‘분열’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은 둘도 없는 반전(反轉)이었다. 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무가 도마 위에서 팽이처럼 한 바퀴 돌았다. 8년간 의중을 숨겨온 속내가 궁금했다. 침착하게 이유를 물었다.
듣자 하니, 자신에게 된장찌개의 감자가 소중하듯, 내게 무가 그런 존재인 것 같아 긴 세월 존중하려 했지만, 이젠 임계치(臨界値)에 다다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부터 어머니에게 주방에서 집도(執刀)한 자에게 토를 다는 것은 무릇 불경스러운 것이라 배웠기에 잠자코 먹으려 했지만, 숱한 인내의 날들에 힘입어 이제 이 정도 의견은 피력해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압권은 마지막 말이었다.
“사실 된장찌개에 무는 나한테 미역국에 오이가 들어간 느낌과 비슷해….”
참고로 남편은 ‘오싫모(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이다. 내겐 ‘무의 시원한 맛’이 남편에겐 ‘무(無) 맛’이었던 거다.
그 뒤로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결혼 후 끓여 왔던 수많은 ‘무 된장찌개들’이 스틸컷처럼 스쳐갔다. 그중엔 고등어조림에 넣듯 무를 커다랗게 썰어 넣은 ‘아방가르드 스타일 무 된장찌개’도 있었다. 간담이 다 서늘했다. 그날 남편은 흠칫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푹 익은 거대한 무를 셔벗처럼 슬쩍 떠먹더니 ‘시원하다!’며 감탄사를 뱉었었다. (참고 먹어준) 고마움과 (참고 먹게 한) 미안함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끝에 최종적으로 남은 감정은 비탄(悲嘆)이었다. 가령, 언젠가 남편이 몸져누웠을 때, 된장찌개에 무를 잔뜩 넣어 끓이고선, ‘무 된장찌개를 끓여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이라고 울먹이는 나를 상상해보니 무척 슬펐다. 한 이불 덮고 사는 사이인데, 이것보다 큰 비극이 어디 있을까!
얼마 전, 신년모임에서 만난 동창들에게 이 사건을 얘기해줬다. 한 친구가 물었다. 된장찌개에 무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고.
“시원하잖아. 안 그래도 두부가 왕창 들어가는데, 거기다 감자까지 넣으면 그 텁텁함은 누가 감당해?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고.”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시원할 거면 왜 된장찌개를 먹어? 텁텁하고 뻑뻑한 게 된장의 정체성이야. 왜 그걸 해치면서까지 시원함을 추구하는 건데. 그럴 거면 그냥 콩나물국 끓여 먹어.”
오, 상당히 명료하고 시원한 답이었다. 마치 무 된장찌개처럼…. 그때 또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
“그런데 남편은 왜 하필 만 7년이 지나 그 말을 한 거야? 행정상 신혼부부 기간이 만 7년이잖아. 난 그게 왜 7년일까 했거든. 너희 부부를 보니 그게 참 과학적인 거였다, 싶네? 호호.”
아, 이 말은 살짝 알싸했다. 역시 무 된장찌개처럼.
폴란드인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피에로기
삶은 감자에 코타지치즈, 때로는 양배추절임을 섞어 소를 만든다.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피에 소를 얹고 빚어내면 폴란드의 전통음식 ‘피에로기’가 완성된다. 우리나라의 만두와 똑같은 폴란드 국민음식이다. 안에 고기나 버섯, 심지어는 과일을 넣기도 하는 등 집집마다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20여 년 전 내가 잠시 속했던 가족도 꽤나 독특한 가족이었다.
대학생 시절, 무작정 떠난 호주에서 우연히 폴란드 출신 이민자 가정에 세를 들어 살게 됐다. 가정이라고 해봤자 50대였던 알리나 아주머니와 어린 딸 사만다 단둘이었다. 알리나 아주머니는 나를 만나자마자 위아래로 훑어봤다. 젊었을 때는 꽤나 미인이었을 게 분명해 보이는 아주머니는 늘 약간은 신경질적인 태도였다. 무엇이든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고, 기쁠 땐 춤을 추고 화가 나면 폴란드어로 욕을 했다. 우리는 어쩐 일인지 만나자마자 친해졌다.
아주머니는 1980년대 초 폴란드에서 호주로 망명했다. 당시 폴란드는 ‘폴란드인민공화국’ 시기였다. 소련이 세운 공산 정권이었다. 전체주의를 피해 수만 명의 폴란드인이 호주로 망명했다. 이들을 난민으로 대우하며 받아주는 나라가 당시엔 호주뿐이었던 이유다. 아주머니는 연금 수입과 방세로 생활했다. 단층집 1층 작은 방엔 내가, 지하실엔 반백수 제이슨이 세 들어 살았다.
아주머니는 집 안에서는 곧잘 폴란드어를 썼다. 특히 사만다를 혼낼 때는 폴란드어 욕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나중엔 나도 폴란드어 욕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지경이었다. 집에는 폴란드인 망명자 지인들이 자주 찾아왔다. 때론 러시아인들도 찾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부엌 한쪽에 가만히 앉아 이들이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로 대화를 하는 광경을 구경하곤 했다.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어를 상당히 알아듣지만, 러시아인들은 폴란드어를 그다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폴란드인 망명자들이 러시아인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도 말이다. 아주머니의 은근한 박대에도 러시아인들이 아주머니를 찾는 이유는 카드 점 때문이었다. 카드 점은 아주머니의 부업 중 하나였다.
나에겐 그 시절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아주머니는 ‘밥 먹을 때 노래하지 마라’며 말했다.
“그러면 멍청한 남편을 만나게 돼. 나처럼.”
아주머니는 원래 남편과 함께 망명했다. 한데 오갈 데 없는 젊은 폴란드인 여성을 집에 들여 재워줬는데, 글쎄 남편이 이 여성과 정분이 나서 나가버렸다. 결국 아주머니는 식당 웨이트리스부터 별별 일을 다하며 딸 둘을 키워냈다. 그러다 연하의 남자친구 로저를 만났고, 마흔 살이 넘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사만다였다. 전남편과 낳은 딸 둘은 진작 결혼해 각자 가정을 꾸렸다. 로저는 뉴질랜드인이었는데, 한 달에 한두 번 아주머니와 딸을 보러 들렀다. 로저는 내가 만나본 뉴질랜드인 중 가장 악센트가 심한 사람이었다. 그가 무척 선량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지만, 아쉽게도 그의 말을 거의 한마디도 알아듣진 못했다.
“너는 결국 길을 찾아낼 거다”
아주머니는 카드 점 외에 부업이 하나 더 있었다. 카지노였다. 언젠가부터 아주머니는 나를 어느 곳에든 데리고 다녔는데, 카지노도 마찬가지였다. 아주머니의 슬롯머신 승률은 그저 그랬다. 슬롯머신 버튼을 누르는 아주머니의 손을 지루하게 지켜보던 어느 날, 나 또한 호기심에 카지노 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룰렛 테이블에 앉아 돈을 걸었다. 몇 번을 거듭해서 돈을 따니, 판돈이 제법 큰돈으로 불어났다. 5만원쯤으로 시작했던 것이 몇백만원이 됐다. 자신감이 붙어 그 돈을 모두 베팅했다. 그러곤 단 한 판에 모두 잃었다. 그날 이후 난 도박을 하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가끔 폴란드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때 자주 함께 만든 것이 피에로기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곁에 두고 기댈 수 있는 셋째 딸 같은 존재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나도 그녀에게서 내 삶에 부재(不在)했던 강한 어머니상을 보았다.
“네가 시작한 일은 네가 끝내야 한다.”
“너는 결국 길을 찾아낼 거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해준 이야기들이 요즘도 내 머릿속에서 맴돌곤 한다. 이제 다시는 아주머니의 피에로기를 먹을 수 없다. 만약 사후(死後)의 삶이 있다면 나는 나의 폴란드인 아주머니를 만나 밀린 얘기를 나눌 것 같다. 함께 피에로기를 만들며 말이다.
패잔병을 일으킨 닭 칼국수
대학 시절 튀르키예(터키)에서 1년 반을 보냈다. 첫 1년은 교환학생으로, 나머지 반년은 인턴사원으로 이스탄불 내 한국 공공기관에서 일했다. 꼬박꼬박 월급을 탔던 인턴 시절과 달리, 학생 때는 늘 생활비에 쪼들렸다. 집에서 받는 용돈과 교환학생으로 떠나기 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이 있었지만, 넉넉한 생활을 기대하긴 어려운 수준이었다. 종종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해야 했고, 가까운 유럽이나 튀르키예 내 다른 도시로 틈틈이 여행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줄일 수 있는 건 식비밖에 없었다.
당시 내 식습관을 돌이켜보면 이랬다. 아침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길거리 가판을 들러 시미트(베이글과 비슷하게 고리 모양으로 구운 빵) 하나를 산다. 우리 돈 약 500원 정도로 기억한다. 여기에 누텔라 잼을 바르면 300원 정도가 추가된다. 집에서 미리 떠온 물과 같이 먹으면 아침과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4시쯤 저녁 밥상을 차린다. 튀르키예 마트에선 닭고기가 유독 저렴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조각 손질된 닭고기를 사다가 요리해 먹었다. 이런 식으로 하루 식비를 5000~6000원 안팎으로 아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겨울 그리고 감기
뜨거운 여름이 일 년 내내 지속할 것 같았던 10월, 이스탄불에 순식간에 겨울이 찾아왔다. 워낙 갑작스레 계절이 바뀐 탓에 새벽녘이 유난히 추웠다. 집주인에게 물어보니 벽면의 작은 라디에이터는 11월 중순은 돼야 작동할 것이라고 했다. 그때까진 꼼짝없이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자는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썼던 일기에는 ‘추운 새벽이 오는 게 두렵다’ ‘오랜만에 몸무게를 쟀더니 2kg이 빠져 있었다’ ‘외로운 방 안을 하얀 입김이 채웠다’ 같은, 일제강점기 시인들이나 썼을 법한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거울 속 비친 몰골은 마치 레판토 해전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튀르크 패잔병과 다름없었다.
비 내리는 토요일 아침, 밤새 이어진 기침 탓에 일찍 눈을 떴다. 머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린 것이다. 보통 때라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이나 푹 잤을 텐데, 그날만큼은 따끈한 국물이 당겼다. 유튜브를 켜고 ‘먹방’ 영상과 ‘쿡방’ 영상을 한참이나 본 뒤에 결심했다. ‘그래, 닭 칼국수를 만들어보자.’
마트에 가 닭고기를 샀다. 당근·애호박·양파·감자 등 야채도 푸짐하게 집었다. 면을 만들 밀가루까지 사서 주방에 펼쳐 놓았다. 그런데 무엇인가 아쉬웠다. ‘깊은 국물을 내려면 이걸로는 부족할 텐데….’ 고민하다 홍합을 우려 국물을 내보기로 했다.
문제는 홍합 파는 곳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 이스탄불은 바다 도시였지만 일반 가정에서 해산물을 먹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 때문에 해산물을 취급하는 마트도 많지 않다. 발품을 팔아 재래시장을 돌아야만 했다. 생각만 해도 번거롭기 그지없었지만, 기꺼이 아픈 몸을 이끌고 그 과정을 감내하기로 했다. 카드쿄이(Kadıköy) 항구 뒤쪽의 재래시장을 누볐다. 생선 가게 여기저기를 들렀는데도 홍합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 미디예 돌마(홍합 안에 각종 양념과 쌀을 넣고 찐 튀르키예 음식)를 파는 식당에서 조리 전 생홍합 한 봉지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끓는 물에 닭고기를 넣었다. 떠오르는 닭 불순물을 제거하면서 한참을 끓였다. 그 뒤 깨끗이 씻은 홍합을 야채와 함께 넣었다. 국물이 충분히 우러났을 즈음, 미리 반죽해둔 밀가루를 면 형태로 잘라 넣었다. 면이 익는 짧은 시간이 영겁(永劫)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닭 칼국수를 그릇 가득 퍼담아 식탁으로 옮겼다. 한 입 맛본 순간, 나는 시인 이상(李箱)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병실 침대에 누워 “센비키야(千疋屋)의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멜론을 먹지 못했지만, 닭 칼국수를 양껏 먹은 나는 그날 이후 감기를 떨쳐낼 수 있었다.
〈영혼의 안식, 나만의 ‘솔푸드’〉 기획이 결정된 뒤 오랜만에 닭 칼국수를 끓여봤다. 동네 마트만 가도 홍합은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그때처럼 수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같은 재료를 넣었는데도 패잔병을 일으켜 세웠던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추억의 맛’이라는 게 정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먹었던 닭 칼국수는 지금도 여전히 기억 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으니.⊙
⊙ 삐거덕거리는 2층 목조건물의 식당에서 먹던 영혼의 그 맛! ⊙ “가을철 아욱국은 사립문 닫고 먹는다” 김대웅 번역가·前 두레출판사 편집주간 |

이 아욱국을 가까이한 지는 대략 30여 년 정도 된다. 당시 쌀쌀한 날씨에 고교 후배와 과음을 하고 집에 들어온 나는 일 때문에 이튿날 다시 그 후배와 점심 약속이 있어 11시에 좀 일찍(?) 일어났다. 마침 전화벨이 울려 받으니 지금의 SC제일은행 정문 앞에서 보잖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다스리며 간신히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배는 배를 어루만지며 걸어오는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괜찮은지 물었고, 난 힘없이 해장국을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후배는 이 근처에 속풀이 국으로 끝내주는 집이 있다며 자신의 단골집으로 데려갔다. SC제일은행 뒤편 수송동 옛 서울예식장 자리(지금은 ‘두산위브 파빌리온’이 들어섰다)에 있는 삐거덕거리는 2층 목조건물의 식당이었다.
후배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할머니, 거시기 두 그릇이요!” 하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러자 주인인 듯한 할머니가 피식 웃으며 주방 커튼을 젖히더니 “아줌마 거시기 두 그릇 내줘요!” 하니 안에서 “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이들만의 암호인가? 거시기? 전라도구먼.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과 밥이 나왔다. 마른 새우가 들어간 아욱국이었다.
“선배님, 이 아욱국 한 번 드셔보세요. 정말 끝내줍니다. 한 그릇 다 들이켜고 나면 당장 술이 당길 정도로 속이 확 풀립니다.”
정말이었다. 이내 속이 편안해지며 살 것만 같았다. 아욱국이 이렇게 시원했던가? 참 희한하네, 이따 저녁에 또 한잔 당겨볼까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해장국의 신천지를 찾은 기분으로 후배에게 거듭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슬쩍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할머니, 너무 맛있게 먹었는데 집에서 한 번 끓여 먹어보게 비법 좀 알려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별것 없고 마른 새우가 들어가야 하고 아욱이 질기니 비벼서 넣어 끓여야 시원하다고 알려주었다. 야호! 오케이! 할머니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을 쑤셔 넣어주고 나온 뒤부터 나는 집에서 속풀이로 마른 새우 아욱국을 해 먹기 시작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동안 해장국으로 장기 군림해온 콩나물국은 아욱국에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이제 나이 들어 칠순을 바라보지만 마른 새우 아욱국을 먹을 때면 가끔씩 고마우신 그 식당 전라도 할머니(살아계시면 100세 정도 되셨을 것이다)가 생각난다.
아욱국 레시피는…
“가을철 아욱국은 사립문 닫고 먹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미인 아욱국은 쌀쌀해질 때 더욱 당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욱국을 속풀이 국으로 감히 최고라고 자부하는 나는 독자들에게도 추운 날 해장국으로 적극 추천하고 싶다. 특히 중국에서는 아욱을 ‘채소의 왕’이라고 한다던데, 이유는 모르겠고 칼슘과 식이섬유가 풍부해 변비에 효과가 있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면 간단히 아욱국 2인분을 한 번 만들어보자. ‘레시피’라고 할 만큼 거창하지도 않다. 아욱 한 단은 대충 4~5인분 정도라 보면 되는데, 줄기를 잡고 한 줌 움켜쥐면 2인분 정도가 된다. 먼저 머그컵 3잔(750cc 정도)의 물을 냄비에 부은 뒤 된장을 듬뿍 한 숟갈 풀고 육수용 큰 멸치 3~4마리를 투하한 다음 펄펄 끓인다. 원래는 아욱 줄기가 거칠어 껍질을 벗겨야 하지만 채소가 질기면 얼마나 질기겠나. 그냥 끓는 육수에 먼저 줄기를 5cm 정도로 잘라 넣고, 2~3분 뒤에 다진 마늘(3톨), 어슷하게 썬 대파나 쪽파 한 줌과 함께 조금 비빈 이파리를 넣는다. 그다음 바로 마른 새우(나는 3cm 정도짜리를 쓴다) 한 줌을 넣고 팔팔 끓이면 거품이 이는데, 불순물이기 때문에 국자로 걷어내는 게 좋다. 그리고 국간장으로 간을 한 뒤 다시 2~3분 끓이면 훌륭한 ‘마른 새우 아욱국’이 완성된다. 그런데 요즘 나는 마법과도 같은 참치액에 홀딱 빠져 있는 터라 국간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참치액 한 숟갈을 드레싱 하는 것으로 간을 마무리한다. 청양고추나 고춧가루는 식성에 따라 각자가 알아서 쳐 먹기 바란다.
깡통조림, C-레이션과 그날의 미역국
⊙ 좌판에 올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오징어 ⊙ 횡계리에서 민박하며 삼시 세끼 軍用 깡통조림으로 해결 ⊙ 부서진 탁자 위에 놓인 생일 케이크와 따끈한 미역국 김무일 前 현대·기아車그룹 부사장·현대제철(주) 부회장 역임 |

독일의 대(大)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말이다. 괴테는 슬픔으로 울면서 밤을 지새운 사람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필자의 세대는 일제 말기에 태어나 조국 광복과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 전쟁과 국가 수차례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비롯한 격동의 사태를 겪으며 살아온 세대다. 특히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던 한국 전쟁 중 우리 가족은 특히 더 했다. 당시 필자는 초등학생이었고, 부친 김석길(金錫吉)은 《조선일보》 주필로 재직 중이셨다.
부친은 신문사 사주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 선생을 가까이서 모시던 중, 방 선생이 강제로 납북(拉北)된 후 공산 치하 3개월 동안 땅굴 속에 숨어 굶으며 사셨다. 아버님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셨기에 우리 가족들은 저들의 마수(魔手)를 피하느라, 무척 고되고 힘든 3개월을 보냈다. 수도 서울 탈환 후 전쟁의 양상이 호전될 줄 알았었는데, 4개월 만에 또다시 적화(赤化)되어 험난한 피란길에 올라야만 했다.
그해 1월은 몹시도 추웠다. 엄동설한이 북풍과 더불어 몰아치던 그 추위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몸서리가 저절로 쳐진다. 언론사에서 마련해준 특별 피란열차에 겨우 올라타고 남하(南下)를 시작했다. 몇 날 몇 밤을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피란 남행열차가 어느 늦은 밤, 이름 모를 큰 도시의 역(驛)에 잠시 머물게 되자, 추위에 떨던 피란민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우르르 역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우리 가족도 그 속에 섞여 함께 나가, 한겨울밤 역전 길거리 좌판에 올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삶은 통오징어를 씹지도 않고 게 눈 감추듯 먹었는데, 그 맛은 여전히 필자의 잊지 못할 눈물 젖은 솔푸드로 남아 있다. 그 역은 대구역이었고, 때는 1951년 1·4 후퇴 때였다.
부대찌개의 원조… 군용 깡통조림
세월이 흘러 까까머리 학창 시절을 맞았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잠시 멈췄지만, 온누리는 온통 전쟁의 폐허 속에 어느 곳 하나 제대로 된 것 없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폭격을 맞은 도심의 건물들은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고, 광화문과 중앙청 석조건물 또한 화염에 휩싸였던 모습 그대로 검게 그을린 채 상처투성이였다.
남대문·청계천시장을 비롯한 삶의 치열한 터전은 피란지에서 돌아온 누추한 모습의 인파(人波)로 뒤덮여 혼잡의 극한을 보는 듯했다. 어수선한 나라 형편상 마땅한 볼거리나 이렇다 할 휴식 공간도 옳게 찾지 못하던 그때, 영화 관람은 당시 시민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이며 문화생활이었다.
어느 날, 산악 영화 〈더 마운틴(The Mountain)〉을 감명 깊게 보았다. 명배우 스펜서 트레이시가 출연했는데, 내용은 고산(高山) 등반 도중, 조난사고를 당해 사경(死境)을 헤매던 아우를, 죽음의 눈사태 속에서 극적으로 구출하며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몸소 일깨워주는 감명 깊은 영화였다. 그는 이 작품으로 영국 여왕에게 작위(爵位)를 받을 만큼 명연기를 선보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등산 활동에 붐이 일어 산악부를 편성해, 암벽 등반에 몰두했다. 백운대와 인수봉, 도봉산 만장봉과 선인봉 그리고 우이암, 주봉(柱峰), 오봉(五峰)을 비롯한 전국 팔도강산의 암벽은 모두 우리 산악인들의 신나는 활동 무대였다. 외줄 로프에 의지해 오르고 내리면서 며칠씩 묵던 야영 생활, 겨울철 내내 눈 덮인 횡계리 민박 스키마을에서 때우던 하루 삼시 세끼 음식은 물론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군용식품을 곁들인 김치찌개였다.
아마도 한참 후, 서울 용산구 미 8군부대 근처나 의정부, 파주 용주골 등 기지촌 주변에서 번성했던 ‘부대찌개’의 원조가 아닐까? 이 또한 필자의 잊지 못할 두 번째 솔푸드다. 이 ‘꿀꿀이 죽’ 같은 솔푸드는 지금도 여전히 필자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
월남에서 먹던 C-레이션
학창 시절이 끝나고, 당시 사회 진출 전 필수로 국방의 의무를 필(畢)해야 했는데, 귀신이나 한놈 잡아볼까 해서 제 발로 악명깨나 높았던 해병대를 찾아갔다.(지금은 바퀴벌레, 빈대도 못 잡지만… ㅋㅋ)
“The Few! The Proud!(자랑스러운 소수)”라는 남성적이고 매력적인 슬로건에 이끌려 단기 장교로 입대해, 주야장천 북한 괴뢰군을 노려보며 철책선을 지켰다. 1년쯤 지났을까?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병역의 의무를 끝내고 사회로 복귀해 보람된 사회생활을 누릴 수 있었는데, 느닷없이 당시 치열했던 베트남전 파월(派越) 명령이 떨어졌다. 한창 젊은 나이에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이 또한 주어진 운명이라면 기꺼이 가겠노라고 큰소리 떵떵 치면서 전쟁터로 향했다. 그러고 기왕이면 최전선 소임을 자임(自任), 용감한 부하들을 이끌고 수색중대 소총소대장으로 최선봉에 섰다. 청룡부대 최장기 소대장으로 1년간 아슬아슬하고 치열한 전투, 지뢰밭을 누비거나 적탄에 철모가 뚫려가면서도 용케 살아남았다.
아침, 눈만 뜨면, 맨땅에 꿇어 엎드린 채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수호신이신 주님!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기오니, 저와 제 부하들을 친히 보살펴주소서. 무사히 하루를 지나게 해주심을 간절히 빌어 올립니다. 그리고 소대원들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저들의 가족 품으로,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이 치열한 전투 기간 동안 하늘이 안 보일 정도의 어두운 정글 속에서, 거머리가 우글대는 늪지대에서, 피투성이가 된 부하들과 함께 하루 세끼 1년 내내 먹던 눈물 젖은 솔푸드는 바로 미군 전투식량 C-레이션이었다. 전투를 치르다 보면 어느새 식수가 바닥나 있었다. 40도를 웃도는 열기에 타 들어가는 갈증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맨몸도 아닌 방탄조끼와 무기류, 탄약, 철모 등은 왜 그리 무겁던지…. 제대로 된 식수를 못 구해 논두렁에서 걸러낸 흙탕물에 콩알만 한 소독약을 타야 했다. 함께 억지로 위장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던 햄, 소시지, 베이컨이 지겨워, 이것들을 볼라치면 딸꾹질이 날 정도였다. 추억과 애환(哀歡)이 담긴 필자의 잊지 못할 이 피 맺힌 솔푸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마주 할 때면, 잠시 눈을 감고 어깨를 나란히 하다 장렬히 산화한 옛 전우(戰友)들의 명복을 빌곤 한다.
노사분규 현장, 전화교환실 여직원이 마련해준 생일상
그리고 또 한 세월이 흘렀다. 가정을 이루고 경상남도 울산공단 자동차 생산 현장에서 젊은 혈기를 온몸으로 발산할 때였다. 억눌렸던 민주화의 봇물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일시에 터져, 전국 공장이 노사분규에 휩쓸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의 폭탄이 점화되던 시기에, 필자는 그 분규의 중심에 있었다. 울산 지역에 밀집했던 현대그룹 전 사업장은 하룻밤 사이에 술에 만취한 거칠기 이를 데 없는 강성 노동자들에 의해 급습을 당한다. ‘코로나19 팬데믹’도 아닌 그때,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온통 가리고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그들은 본관 건물은 물론, 본인들의 현장사무실, 식당, 화장실까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가 집기비품, 유리창 한 장 등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고 때려 부쉈다. 이 엄청난 사태 수습을 위해, 몇 날 몇 밤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낮밤을 새우면서 업무 복구 작업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어느 날, 전화교환실 여직원들에게 이끌려 깨져 나간 유리창 대신 비닐로 임시 바람막이를 한 통신실로 갔다.
그날, 부서진 탁자 위에 놓인 생일 케이크와 따끈한 미역국은 마치 어머님의 정성 어린 미역국과 진배없을 만큼 따뜻하고 감동스러운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솔푸드였다. 그때 이 음식을 정성껏 차려준 총무부의 하금자 부장은 지금도 울산에서 귀여운 손주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 들어 솔푸드라는 말이 부쩍 눈에 뜨인다. ‘영혼을 울리는 음식’ 혹은 ‘추억을 담은 음식’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정확히 풀이하면 미국 남부 흑인들의 전통 요리법이 담긴 음식과 요리법을 뜻하는 단어다. 아울러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가 담긴 음식이기도 하다. 그 유래(由來)는 다음과 같다. 미국 식민지 시절, 남부 지역 농장에서 고된 노예 생활을 하던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이, 그들의 그리운 고향 아프리카 전통음식을 미국식 요리법과 재료를 결합시켜 만들어 먹던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이 음식은 눈물과 애환이 담긴 추억의 음식을 뜻한다. 필자는 1960년대쯤, 미국 흑인 해방운동가인 맬컴 엑스(Malcolm X)의 자서전에서도 이 단어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은 제각기 잊지 못할 추억의 솔푸드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혹은 세월의 흐름 속에 떠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생물들은 먹어야 살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니까. 필자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 그 수많은 추억 어린 음식 중에 가장 ‘영혼을 울리는 소중한 추억음식’을 든다면 역시 젊었던 그 시절, 전우들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함께 나눠 먹던 미 군용 깡통 푸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추억의 음식을 대할 때마다 문득,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양지바른 언덕에 잠들어 있는 필자의 옛 부하와 동료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뒤이어 고(故) 이동룡 장군의 묘비명(墓碑銘)을 되뇌어본다. 이분은 필자가 젊었던 시절, 가까이서 모셨던 해병대 제1사단장을 역임하신 분이다.
“아들아! 조국(祖國)이 위태로워지거든 즉시 깨워다오. 내 분연히 일어나 다시금 총(銃)을 들리라!”
스님의 상추 겉절이
⊙ 절에 두고 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잠 못 든 어린 시절 ⊙ 기다림에서 온 불면증을 치료해준 상추 부침과 상추 겉절이 도신스님 수덕사 주지 |

내가 살던 정혜사에는 동자 4명이 있었는데, 오줌을 지리는 동자는 나밖에 없었다. 노스님은 잠을 설치고, 오줌을 지리는 병을 고쳐주려 다방면으로 약을 쓰고 방법을 찾으셨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사춘기가 지난 18세 무렵 오줌을 지리고 잠을 못 자는 병이 엄마를 기다리며 생긴 병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전까지는 그저 이유 없이 오줌을 못 가리는 정신장애 아동이었던 셈이다. 기다림이 너무 깊어지면 병이 된다. 그걸 체험적으로 알게 되니, 그 후론 기다림에도 선을 긋는 버릇이 생겼다.
정혜사는 충남 예산 수덕사의 산내 암자였다. 쌀만 큰절에서 가져다 먹었고 채소류 등 다른 식료품은 자급자족해 해결했다. 한참 수면장애를 앓고 있을 때였다. 정혜사 앞에는 큰 밭이 있었는데 그곳에 상추를 많이 심었다. 상추가 많이 자라 대가 상당히 굵어지면, 대중(大衆)이 울력을 해 상추 밑둥치를 잘라 수확을 했다. 수확한 상추는 부침과 겉절이 등으로 만들어 먹었는데, 깨끗이 닦아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부엌 칼등으로 납작하게 다져 밀가루 반죽을 묻힌 후 솥에 기름을 두르고 지지면 맛난 상추 부침이 된다. 대에서 나오는 쌉쌀한 진액과 상추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채소 맛이 어우러져 그 맛이 일품이다.
당시는 특별하게 먹을 것이 없었던 터라 귀한 음식이었다. 맛도 있었지만, 상추 고유의 냄새가 좋았다. 다른 스님들보다 곱절이나 먹었던 것 같다. 그러고는 낮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깊이 잠을 잤는지 눈을 떠보니 다른 동자들이 이불을 깔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더 깊이 잠이 들었다. 일시적으로 수면장애가 극복된 거였다. 내겐 기적이었다.
‘상추동자’
효과를 한 번이라도 보면 기대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먹는 자리에서는 늘 상추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상추 부침은 준비를 많이 해야 하지만 상추 겉절이는 양념 몇 가지만 넣어 버무리면 되기 때문에 이후 상추 겉절이를 선호하게 되었다.
상추 겉절이 또한 깊은 잠에 들게 했다. 그 시절에는 하우스 재배라는 것이 없어서 제철에나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어쨌든 나는 상추를 찾아다녔고, 상추가 있는 곳에는 내가, 내가 있는 곳에는 상추가 있을 정도여서 별명이 ‘상추동자’였다. 자연스럽게 수면장애를 극복한 나는 상추 마니아가 됐다. 사람들에게 적극 권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직접 선물을 하기도 한다. 상추는 마음을 진정시켜 불안한 증세를 가라앉혀 평안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상추 겉절이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파릇한 상추를 대야처럼 큰 그릇에 차곡히 쌓은 다음, 소량의 집간장과 물을 잘 배합해서 절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짜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상추는 자체적으로 수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의 양도 적당하게 넣어 절여야지, 그러지 않으면 상추 고유의 맛을 잃게 된다. 이렇게 해서 손바닥으로 꾹꾹 몇 번 누르고 5분 정도 절이면 상추의 숨이 죽어 부드러워진다. 이때 고춧가루, 생강 다짐, 식초, 참기름 등을 넣어 손으로 뒤적이면서 서로 얽히도록 뒤집으면 맛있는 상추 겉절이가 완성된다.
상추는 사찰의 식품이라고 할 정도로 스님들이 애호하는 채소다.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성분이 있어 자연스럽게 사찰에서 즐겨 먹는 채소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하우스 재배 덕분에 사철 어느 때나 상추를 구할 수 있다. 내게 상추 겉절이는 긴 기다림에서 온 병을 눅여준 친구 같은 음식이다.
발레 댄서의 오이, 당근, 고기 한 점
⊙ 무용가들에게 있어 ‘먹는 것’은 스트레스 그 자체 ⊙ 제주국제무용제 준비하며 먹은 옥돔뭇국… 생선과 무의 앙상블은 群舞에 비견 박인자 대한민국발레축제 예술감독·제주국제무용제 조직위원회 이사장 |

아침에 커피 한 잔, 점심은 오이와 당근, 저녁에는 고기 한 점. 조교들이 내 점심 식사를 보고 크게 놀라워하던 표정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청소년 무용수들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스위스 로잔 국제발레콩쿠르는, 체중에 대한 집착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 거식증(拒食症) 댄서들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너무 마른 체형의 무용수에게는 참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콩쿠르 기간 중에는 발레 무용수들의 식이요법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발레 무용수들을 위한 식단’을 다룬 유튜브 동영상이 인기를 얻는 것이나 500년 만에 역사상 최초로 흑인 여성 수석무용수가 된 미국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미스티 코플랜드가 쓴 《발레리나 바디 프로젝트》란 책이 음식에 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는 이유는 발레 댄서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몸’이기 때문이다.
발레 댄서에게 필요한 체형은 빼빼 마른 몸이 아니라 탄력 있고 균형 잡힌 몸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조건 안 먹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언젠가 발레리나 강수진씨와 함께 식사를 했다는 한 지인이 “강수진씨가 엄청 잘 먹더라”라며 걱정스럽게 묻기에 “강수진씨는 많이 먹고 그 축적된 에너지를 많은 연습을 통해 모두 소진한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무조건 안 먹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나는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나는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어김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야채를 씻고, 과일을 깎고, 계란을 삶고, 커피를 끓이고 빵을 굽는다. 나의 하루는 이렇듯 내가 생각하는 건강식을 직접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난 50년 동안 나는 무용수, 무용교육자, 안무가로 살았고 지금은 예술행정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수십 년간 내 삶은 연습실에서, 무대에서, 강의실에서, 그리고 몸담고 있는 기관의 회의실에서 그렇게 춤과 함께 참으로 치열했다.
나의 건강식 메뉴는 가끔 제주도 여행길에 동행하는 후배와 동료들에게도 서비스된다. 남을 위해 아침 식단을 마련해주는 달라진 일상은 어찌 보면 나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고 기쁨이다. 다시 옛 시절을 생각해보니 요즘처럼 날씨가 추울 때 붕어빵에 군고구마를 어찌 그리 맛있게 먹었던지…. 고등학교 시절 방과 후 공연 연습을 끝내고 예전 문화방송국 앞에서 친구들과 수다 떨면서 먹던 비빔국수의 맛도 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아 간직되고 있었다.
무대를 떠나고 학교를 퇴임하고, 예술행정가로서의 역할이 많아지고부터는 “먹는 게 남는 것”이라고 식사량도 증가했고 먹는 음식의 가짓수도 많아졌다.
이즈음 나는 저녁에 일본의 선술집인 이자카야를 즐겨 찾는다. 편안한 사람들과 맛있는 안주를 벗 삼아 먹는 한 잔 술은 하루의 피곤을 날려버리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한다.
세꼬시, 한식, 옥돔뭇국
무용예술과 함께한 50년 나의 삶의 여정에서 잊히지 않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오래전 작고하신 무용가 최현 선생님은 서울예고 학생 때 처음 만났다. 한국 무용의 대가이자 영화에도 출연한 멋쟁이 선생님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서양춤은 추는 춤이야. 인위적이지. 그렇지만 한국춤은 추어지는 춤이야.”
낭만주의 기질이 다분했던 선생님의 그 자유분방한 예술세계가 좋았던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세꼬시를 드실 때는 신사동의 진동횟집으로, 한식을 드실 때는 인사동의 이모집으로 모였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는 선생님의 유작인 ‘허행초’에서 이름을 딴 허행초 모임을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맛난 음식을 들며 선생님의 예술세계를 추억하고 선생님의 춤을 말한다. 그때 모여 먹는 음식은 그냥 음식이 아니다. ‘허행초’에서 추시던 선생님 춤의 맛깔과 그 향기와 추억이 오롯이 담겨 있으니 그 어떤 음식 맛에 비하랴.
2023년 7월,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제주국제무용제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제주국제무용제가 열렸다. 열악한 제주 무용계의 토양을 바꾸기 위한 크고 작은 공연과 포럼을 5년 동안 꾸준히 열었고 제주국제무용제는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매년 수십 번 제주를 오가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제주도민이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도 좋지만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 함께 맛본 제주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명작 발레 〈백조의 호수〉의 하이라이트는 24마리의 백조가 만들어내는 군무(群舞)다. 그리고 발레 군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댄서들이 빚어내는 앙상블이다. 제주도청 앞 한라식당에서 맛본 옥돔뭇국은 별미였다. 제주에서 잡히는 적당한 크기의 옥돔을 통째로 넣고 신선한 제주 무를 채를 썰어 끓여 내는 옥돔뭇국. 신선한 생선과 시원한 무의 조화는 발레 군무의 앙상블에서 맛보는 그 짜릿한 감동과 비견된다.
맛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정성만큼이나 예술가들도 한 편의 공연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면에서 예술과 음식은 한 식구나 다름없다.
좌판 위의 양재기 국수
⊙ 길거리 좌판의 밀가루국수는 내 영혼 속에 깊이 새겨진 할아버지의 정신 ⊙ “길바닥에서 먹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정말 부끄러운 건 비굴하거나 허세 부리는 거야” 엄상익 변호사 |

보따리 장사꾼이었던 할아버지는 점심 무렵 버스에서 내려 어린 나를 데리고 국수를 파는 좌판 쪽으로 갔다. 나는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길바닥에서 그런 국수를 먹는 게 싫었다. 길 건너 중국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구수한 기름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 집에서 짜장면 사줘.”
할아버지에게 졸랐다.
“아니다. 그냥 여기서 먹자.”
할아버지는 나를 달래면서 좌판 앞 목의자에 앉히려고 했다. 나는 화가 나서 볼이 부은 채 버텼다. 할아버지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앉더니 좌판 위의 수저통에서 나무젓가락을 꺼내 말없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나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새벽 4시에 서울 신설동에서 홍천읍으로 오는 시외버스를 탔다. 낡은 버스는 북한강 옆의 비포장길을 터덜거리며 오전 내내 달렸다. 짙은 안개 속에 숨은 산이 있었고 숨은 강이 있었다. 양수리에서 버스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6·25 전쟁 당시 부서진 다리의 잔해들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지금의 버스터미널을 그때는 차부라고 불렀다. 그 안의 매점에는 찐계란과 어묵이 따뜻한 김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얼음같이 찬 버스 안에서 창자까지 얼어붙은 내게 어묵 한 꼬치조차 사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옆에 앉은 나의 손을 잡고 허리춤 안에 있는 전대(纏帶)를 만지게 하면서 말했다.
“허리에 두른 이게 다 돈다발이란다. 할아버지는 음식점에 들어가 짜장면도 사줄 수 있고 네가 원하는 뭐든지 다 해줄 수 있어. 그렇지만 길바닥에서 싸구려 음식을 먹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 거야.”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돈도 많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우연히 우리 옆을 지나가는 남자 두 명을 보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기 양복을 입고 가는 사람들 주머니 속에는 아마 돈이 없을 거다. 저렇게 겉모습을 꾸미고 사람들은 좋은 음식점에 가서 비싼 요리를 먹고 술도 마신다. 할아버지는 돈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아. 이렇게 길거리에서 싸구려 국수를 사 먹고 잠도 여러 사람이 같이 자는 합숙소에서 자. 사람은 검소해야 하는 거야. 길바닥에서 먹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정말 부끄러운 건 게으르거나 비굴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거야.”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젓가락을 들어 불어 터진 밀가루국수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바쁜 변호사 시절, 길에서 먹던 김밥, 어묵 국물
할아버지는 함경도 보따리 장사꾼이었다. 할아버지가 평생 유지한 모습은 특이했다. 머리를 빡빡 깎고 광목으로 만든 한복에 회색조끼 차림이었다. 옆구리에는 커다란 보자기를 둘둘 만 보따리를 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향 같은 희귀한 한약재를 구하러 깊은 산속 마을을 돌아다녔다. 할아버지는 코가 예민한 내게 사향 냄새를 기억하게 했다. 사향을 사 오면 그게 진짜인지 나보고 감별하라고 했다. 시골사람들 중에는 더러 사향을 물에 슬쩍 담가 무게를 늘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때 미세한 차이지만 톡 쏘는 냄새의 강도가 달랐다. 할아버지와 어린 나는 동업자이자 친구였다. 할아버지한테서 화투의 패를 떼는 것도 배웠다. 즉 길거리 좌판의 밀가루국수는 내 영혼 속에 깊이 새겨진 할아버지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40대에 변호사를 하면서 급하면 길거리에서 김밥을 먹고 어묵 국물을 마셨다. 재래시장 좌판에서 냄비에 담은 국수를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밀가루국수는 함경도 출신 할아버지가 전해준 근검절약의 상징이다. 어떤 나쁜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어떤 곳에서도 잘 수 있는 정신력을 기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유대인의 효모를 넣지 않은 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글 한 줄이 만드는 솔푸드
⊙ “세상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다. 경쟁 가치와 비경쟁 가치다” ⊙ 사람들에게 솔푸드가 될 좋은 책과 신문, 잡지, 아트센터 만들어 윤학 변호사·《흰물결신문》 발행인 |

그렇게 욕심 많던 내가 공부에서 뒤처지려 했겠는가? 경쟁에서 앞서는 확실한 길은 분명한 답이 있는 수학을 잘하는 것이었다. 고학년 산수 문제도 닥치는 대로 풀어보았다. 몇 학년 위 선배들도 못 푸는 문제를 척척 풀 때 아버지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나 스스로를 무척 뿌듯하게 했다. 내겐 쉬웠던 수학 문제를 선생님이 풀다가 막혀서 쩔쩔매면 나 자신이 더욱 대견했다. 어린 시절 내 영혼을 채워주는 것은 경쟁에서 앞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대에 들어가자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도, 외모도, 옷매무새도 내가 가장 뒤처져 있었다. 더구나 서울에서는 집도 가족도 없는 외톨이였다. 고시에 빨리 합격하면 힘겨운 생활에서 벗어날 것 같았지만 검사니 판사니 하는 것만으로는 내 인생이 만족스러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때 내 눈길을 끈 것은 빈익빈 부익부니 불평등이니 독재니 하는 사회문제였다. 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이보다 만족스러운 삶은 없을 것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학생, 정치인도 수없이 많았지만 대부분 입으로만 떠들 뿐 이 문제를 가슴에 담고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걸 내세워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빈부의 격차, 불평등의 정도, 독재의 강도는 오히려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데 내가 아무리 문제 해결을 위해 진정성 있게 투신해도 우리 사회가 그런 위선자들로 둘러싸여 있다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만큼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내 영혼을 채워줄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보였다.
가슴에는 늘 찬바람이 불고 문제 해결 고민에 점점 야위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고시가 당장 의식주도 해결하고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보였다. 하지만 대학 졸업 무렵 뒤늦게 시작한 고시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읽어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알쏭달쏭 말장난 같은 법서를 읽어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 나는 참 멍청하구나.” 친구들은 대학 재학 중 벌써 합격했는데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서도 끙끙거리고 있었다.
경쟁 대열서 벗어나기로 결심 후 달라진 세상
어느 날 머리가 아파 뒤척이다 너덜너덜한 책이 보였다. 거기에 내 눈을 확 끄는 글 한 줄이 있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다. 경쟁 가치와 비경쟁 가치다.”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모든 것이 모두 경쟁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밥그릇 투정도, 수학 우월감도, 고시 합격도 경쟁 가치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빈부격차니 불평등이니 하는 것도 경쟁 가치가 기준인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이나 자리는 내가 가지면 남이 갖지 못하고, 남이 가지면 내가 갖지 못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남은 될 수 없고 내가 저 집을 사버리면 남은 그 집을 살 수 없지 않은가. 재물이나 지위, 명예같이 사람들이 성공의 척도로 보는 모든 것이 경쟁 가치인 것이다.
한데 이 세상에는 내가 가져도 남이 가질 수 있고 남이 가져도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치 또한 있었다. 경쟁하지 않아도 누구나 갖고 싶으면 가질 수 있는 비경쟁 가치! 내가 누구를 돕는다고 다른 사람이 그를 돕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지혜를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그 지혜를 갖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비경쟁 가치가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래, 내 삶을 비경쟁 가치의 세계로 향하게 하자!’ 드디어 내 영혼을 채워줄 ‘솔푸드’를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이 앞서 나가는 데 온 힘을 쏟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경쟁할 때 나는 그 경쟁의 대열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고시 합격도 이런 일을 하는 데 쓰자! 돈을 벌어도 이런 일을 하는 데 쓰자!’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아무것도 없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 같았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출판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좋은 책을 만들고 좋은 글을 쓰는 자리를 선점해도, 이 자리는 남들도 다 올라설 수 있는 자리다. 나는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좋은 미술작품을 보여주려고 아트센터 또한 열었다. 음악과 미술,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비경쟁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다. 글 한 줄에서 발견한 솔푸드를 날마다 먹으며 사람들에게 솔푸드가 될 《월간 독자 Reader》와 《흰물결신문》, ‘흰물결아트센터’를 혼신의 힘을 다해 가꾸어 나가고 있다.
할마이, 아즈마이의 손맛, 가자미식해와 명태순대
⊙ 선친 고향, 내 고향도 함경도 북청… 가자미 살만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 생강, 엿기름 등으로 버무려 삭힌 음식 ⊙ 집안 어르신 돌아가신 후 속초 아바이마을, 인사동의 ‘툇마루집된장예술’에서 먹어… 지금은 사라져 이지수 명지대 교수(정치학) |

가자미식해는 어려서부터 지금껏 즐겨 먹는 음식이다. 선친은 해방 직후, 대학 예과 입학 시험을 치르러 고향 북청에서 상경한 이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선친에게 가자미식해는 고향을 떠올려 보여주는 음식이다. 주로 친척 할마이(할머니), 아즈마이(아주머니)들이 만들어다 주셨다.
가자미를 살만 발라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 생강, 무채, 엿기름, 조밥 등을 넣어 버무려 삭힌 음식이다. 가자미 대신 명태를 삭힌 명태식해도 있다.
어려서는 주로 새콤한 무만 골라서 먹었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삭힌 생선에 더 젓가락이 가게 된다.
이제 가자미식해를 담글 줄 아는 집안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시고, 전수받아 담그는 집안 며느리, 딸들도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속초 아바이마을에서 주문해서 먹거나, 또 드물지만 가자미식해가 메뉴인 식당을 즐겨 찾기도 한다. 주인장이 속초 출신 시인이라는 인사동의 ‘툇마루집된장예술’엔 가자미식해가 당당히 메뉴에 있었다. 갈 때마다 매번, 주문해서 먹고, 별도로 포장해서 가져가곤 한 집이다. 한데 언제부턴가 메뉴에서 사라졌다. 아마 만드시는 분이 돌아가신 듯하다. 아쉬움의 해소는 대한극장 근처 골목 초입 건물 2층의 ‘유정’이라는 가자미식해 맛집을 알게 되면서 이뤄졌다. 집안 형의 고등학교 선배라는 인연으로 알게 된 김광림(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극작가, 연극연출가) 선배가 발굴(?)한 곳이다.
최근 들어 가끔 들르는데, 물론 갈 때마다 꼭 따로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가는 걸 자리에 앉자마자 부탁한다. 10년간 유학 생활을 했던 모스크바에 북한 식당이 몇 개 있었는데, 1990년대만 하더라도 가자미식해가 메뉴에 있었던 기억은 없다. 한데 2000년대 들어서 새로 문을 연 고려식당에 갔더니 있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맛이 달랐다.
물론 가자미식해의 맛이 사람마다 다 같을 순 없지만, 필자의 경우 생선을 씹는 맛과 순간의 새콤하면서 적당히 가벼운 고춧가루의 맛이 어우러지는 걸 즐긴다. 앞서 유정에 같이 가는 사람 또한 우연찮게도 함경도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광림 선배도 부모님 고향이 함경도시다.
또 다른 함경도 음식, 명태순대
한 가지면 섭섭해서 추가하자면 명태순대다. 명태의 내장을 아가리에 손을 집어넣어 다 빼내고, 소를 명태 안에 채워 넣고 아가리를 실로 꿰매 얼렸다가 녹였다 해서 꾸덕꾸덕해진 것을 먹을 때마다 구워서 혹은 쪄서 먹는 겨울 음식이다. 물론 함경도 음식이다.
역시 친척 어르신들이 만들어다 주시곤 했다. 하얀 명태 살에 만두소(두부와 다진 돼지고기, 명태알과 이리)가 어우러지는 식감을 이제는 잊은 지 꽤 되었다. 역시 만드시던 집안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서 그만 잊힌 맛이 된 것이다. 식당에서도 메뉴로 내놓음직한데 찾을 수가 없다. 속초에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내는 식당이 있었다는데 사라진 듯하다. 최근 가본 속초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명태순대 대신에 오징어순대가 대세가 된 듯하다.
사라진 음식들이 북한 인민들 사이에 남아 있을 리도 없고 탈북하신 분들에게 여쭈어봐도 안타까운 얘기로 돌아온다. 마침 생각난 김에 능라밥상의 이애란 박사님에게 전화로 여쭈었더니, 명태순대는 손이 너무 가는 등 식당에서 제공하기에는 적합지 않은 메뉴란다. 아마 북한의 현재 사정으로 미루어 명태순대를 만들어 먹는 집이 과연 얼마나 될지…. 덩달아 전통음식들도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물론 먹는 것도 즐기지만,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어디 가서 처음 보는 음식을 접하면, 만든 이에게 레시피 같은 것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가자미식해나 명태순대는 한 번도 감히 직접 만들어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솔푸드로 추억 속의 음식이 될 듯하다.
세 남매 추억이 담긴 김칫국과 김칫국밥
⊙ 생김치로, 묵은김치로, 찌개 끓여 먹고, 생선 넣고 조려 먹고, 씻어서 쌈 싸 먹고… ⊙ 어머니께서 끓여주셨던, 칼칼하고 개운한 김칫국 한 사발 최원준 시인·음식문화칼럼니스트 |

그래도 집안 살림살이를 전적으로 꾸리셨던 어머니는 조석으로 가족 먹이는 일에 전전긍긍하셨을 터이다. 그러다 보니 비교적 싼값의 제철 식재료 음식과 오래도록 넉넉히 먹을 수 있었던 저장 음식 위주로 밥상을 차리셨다. 지금 생각하면 제철 식재료와 저장 음식으로 차린 식단은 가장 신선하고 유익한 로컬푸드이자 슬로푸드의 밥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교적 가성비 있게 차릴 수 있는 밥상이기도 했다.
그렇게 상에 오른 음식 중 대표적인 것이 김치였다. 겨울이 오기 전 김장을 하고 나면, 겨우내 김치만으로 밥을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생김치로, 묵은김치로, 찌개 끓여 먹고, 밥 볶아 먹고, 생선 넣고 조려 먹고, 씻어서 쌈 싸 먹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즐겨 먹었던 음식이 바로 김칫국이다. 당시 부산 사람 밥상에는 늘 빠지지 않고 오르던 음식이 바로 맑고 시원하게 끓여낸 김칫국이었다. 개운하고 깔끔한 김칫국을 끓여 해장국 대용으로 즐겨 먹었던 것이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집안 어른께서 과음하신 다음 날, 어김없이 밥상에 올라오던 국 또한 김칫국이었다. 가끔 ‘재첩국 아지매’에게서 산 재첩국도 올랐지만, 대부분이 시큼하면서도 벌건 국물의 뜨거운 김칫국이 어른의 해장을 도왔다. 빠듯한 살림을 꾸리던 어머니로서는 남편 해장을 위해 따로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도, 쉽게 조리해 올릴 수 있었던 데다, 해장의 효과마저 좋았으니, ‘일석삼조’의 해장국이었다. 어린 자식들도 저도 모르게 그 김칫국에 입맛이 길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한 재료인데 어떻게 그렇게 깊고 시원한 맛을 낼 수 있었을까? 어머니께서 끓여주셨던 김칫국 한 사발을 들이켜다 보면, 뜨거우면서도 시원하고 진하면서도 개운했었다. 묵직하면서도 활달하고 얼큰하면서도 담박했다. 한 술 한 술 국물 뜰 때마다 입안이 넉넉해지고, 속이 환해졌다.
큰 양푼에 가득 끓인 김칫국밥
이 김칫국에 밥을 말아 끓여내면 또 다른 음식, 김칫국밥이 된다. 칼칼하고 개운한 국물에 밥을 넣고 보글보글 끓였으니, 시원하면서도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새벽녘에 김칫국을 넉넉히 끓여놓으셨다가, 변변한 반찬이 없을 때 한 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편으로 김칫국밥을 끓이셨다. 게다가 우리 세 남매가 참 좋아했던 국수까지 넣고 끓여놓으면 가장 간편하면서도 넉넉히 먹을 수 있는 밤참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 세 남매는 큰 양푼에 가득 끓인 김칫국밥을 옹기종기 둘러앉아 맛있게들 뚝딱뚝딱 퍼 먹었다. 그 시절 어머니의 김칫국밥은 우리에게는 최고의 식사이자 별식이었고 어머니께서 주시는 든든한 사랑이었다.
자식이 심하게 감기에 걸렸을 때도 당신께서는 김칫국밥을 끓여주셨다. 어머니의 김칫국밥을 먹고 나서 아랫목에서 한나절 땀을 흘리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몸이 가벼워지면서 감기가 뚝 떨어졌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김칫국밥은 어머니께서 주시는 민간요법이고, 감기로 고생하는 자식들에게 내미는 자애로운 손길이었다.
이렇듯 김칫국과 김칫국밥은 나에게 있어 어린 시절 식구들의 추억 한 덩이씩을 진득하게 담고 있는 음식이다. 그래서 요즘도 김칫국과 김칫국밥을 마주하게 되면, 항상 마음속 헛헛했던 시절의 그리운 어머니 손맛이 한 술 한 술 고스란히 느껴진다.
티베트에서 내려와 먹은 김치찌개
⊙ 4박 5일간 티베트 여행하면서 고산병으로 밥 한 술 제대로 못 떠 ⊙ 청두의 한식당에서 김치찌개 한 숟갈을 넘기며 “내가 살아 있구나” “행복하다” 느껴 배진영 《월간조선》 편집장 |
“솔푸드라는 게 도대체 뭔가요?”
김 기자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설명해야 하는 선생님처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먹는 이의 영혼을 감싸주는 음식, 또는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아늑하고 따뜻한 음식, 뭐 그런 의미입니다.”
사실 음식에 관해서는 호오(好惡)가 없는 편이다. 아주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렸을 때 호박잎쌈이나 토란국을 좋아했던 기억이 나고, 일본 라멘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걸 내 ‘솔푸드’라고까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음식을 먹으면서 ‘내 영혼을 감싸준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은 있다. 23년 전인 2001년 5월 중국 쓰촨성(泗川省) 청두(成都)에서 먹었던 김치찌개다.
그해 5월 23~30일 중국 티베트와 청두를 여행했다. 내 인생 첫 해외여행이었다. 첫날, 여행사에서 나온 강 과장이 고산병(高山病)에 대해 설명하면서, 고산 증세를 피하기 위해서는 수분을 많이 섭취하고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튿날인 5월 24일 아침 9시30분 청두공항을 출발, 2시간가량 비행한 끝에 티베트 라싸의 공가공항에 도착했다. 지방 고속버스 터미널을 연상케 하는 작은 공항이었다.
라싸 시내로 들어가기 전, 잠시 차를 세우고 채색(彩色) 바위 불상(佛像)을 구경했다. 우리보다 먼저 와서 불상을 보고 있던 일본인 관광객 가운데 한 명이 갑자기 구겨지듯 주저앉았다. 말로만 듣던 고산 증세였다. 황급히 버스 안으로 옮겨진 그의 코에 동료들이 산소 스프레이를 대주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얼마 후 내 모습이 되리라는 것을….
라싸 시내의 호텔에 도착했다. 첫 해외여행이라는 흥분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호텔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때부터 슬슬 속이 느글거리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전세버스를 타고 라싸 시내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인 세라승원(僧院)을 방문했다. 티베트 승려들 특유의 붉은 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왁자지껄 독경(讀經)과 토론을 하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귀가 왱왱거리고, 눈앞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강 과장에게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한 후 버스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졌다. 일행이 오후 내내 라싸 시내 관광을 하는 동안, 나는 버스 안에서 뻗어 있었다. 오후 늦게 호텔에 도착할 즈음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산병이 오다
호텔 식당에서 억지로 저녁 식사를 하려 했지만 도저히 입맛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멍한 것이 꼭 폭탄주를 텐(ten)-텐으로 십여 잔 이상 마셨을 때와 같았다. 결국 한 술도 뜨지 못하고 룸메이트에게 “나 먼저 올라가서 쉬겠다”고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방 호수가 기억나지 않았다. 고산병의 또 다른 증세인 건망증이 발생한 것이었다. 식당으로 돌아와 룸메이트에게 방 호수를 물어보고 객실로 향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또다시 방 호수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식당으로 돌아와 룸메이트에게 방 호수를 다시 물어보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나도 모르게 구토를 하고 말았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뒤에서 고함이 들렸다. 아마 “어떤 놈이 여기에 토해놨어!”라고 외치는 소리였을 것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김치찌개 한 숟갈의 행복감
그 후 티베트를 떠나기까지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조금만 느낌이 안 좋으면 현지에서 구입한 산소 스프레이를 코에 대고 산소를 마셨다. 티베트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깔깔댔다. 나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일행 중에서도 고산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호텔에서 준비한 도시락들은 우리 일행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기브 미 원 달러”를 외치던 티베트 아이들의 차지가 됐다.
5월 28일 오후 티베트를 떠나 쓰촨성 청두로 돌아왔다. 청두공항에 내리는 순간, 모두들 거짓말처럼 기력이 회복됐다. “고산 증세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은 고(高)지대에서 내려오는 것”이라던 강 과장의 말 그대로였다.
저녁 식사는 한 백화점 구내에 있는 한국 음식점 아리랑에서 했다. 닷새 만에 만나는 한식이었다. 불고기, 김치, 된장찌개, 김치찌개, 그리고 밥…. 반가웠다.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칼칼한 김치찌개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아,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했다.
사실 외국 땅 백화점 구내의 한식당이 한식을 만들어봤자 얼마나 제대로 만들까? 그러나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많았지만,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든 것은 그때뿐이었던 것 같다. ‘솔푸드’라는 게 이런 것 아닐까? 요즘도 김치찌개를 먹을 때면 종종 그때 생각이 난다.
눈물 한 방울의 맛, 참기름
⊙ 유년기 입맛 다실 게 없던 시절, 나의 ‘찬장 습격 사건’ ⊙ 참기름이 밥상에 오르지만 엄마는 눈물 한 방울만큼만 떨구셨다. 한 방울이면 족해 김태완 기자 |
피천득의 수필을 읽으니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 무서움을 잘 탔다. 그래서 늘 머리맡에다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주석으로 만든 용감한 병정들을 늘어놓고서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면 나의 근위병들은 다 제자리에서 꼼짝도 아니하고 서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무서움이 많았다. 겨우 코흘리개면서 원인 모를 피부병이 생겨 캄캄한 밤을 벅벅 긁으며 보냈다. 나는 그러나 그 녀석만 생각하면 즐거워졌다. 무섭지 않았다. 병정은 없어도 녀석이 날 부엌에서 기다린다고 느꼈다. 우리 집 강아지 쫑이를 생각해도 즐거웠지만 녀석만 못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의 잔소리에 “술에 한껏 취하지 못하면 인생을 모른다”고 볼멘소리를 하실 때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이해가 되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빙그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속셈을 숨기는 완이이소(莞爾而笑)!
동네 목욕탕 탈의실에서 옷을 벗다 말고 한동안 녀석을 생각한 적도 있다. 비누칠을 두어 번 하다가 또 녀석을 생각하며 동작을 멈췄다가 아버지에게 꿀밤을 맞은 적도 있다.
녀석은 바로 참기름이다. 참기름은 한 손에 잡히는 박카스 병에 담겨 있었다. 가끔 참기름이 밥상에 오르지만 엄마는 눈물 한 방울만큼만 떨구셨다. 그랬다. 그 한 방울이면 족했다. 한 방울이 맛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시절엔 웬 제사가 그리 많았을까. 제사가 끝난 깜깜한 밤, 어머니는 고사리, 도라지, 무채, 콩나물, 시금치를 밥과 함께 간장을 넣고 비비셨다. 그러고 마지막에 이 눈물을 두어 방울 떨구셨다. 고소한 맛은 잠까지 달아나게 했다. 오색나물이 아니라 고소한 참기름이 맛을 돋우었다. 그러니까 참기름은 창(窓)이었다. 창을 통해 세상의 풍경을 보듯 고소한 녀석이 음식의 깊은 맛을 살려주었다.
박카스 병에 담긴 참기름
언젠가부터 한번 맛을 들인 혓바닥이, 입술이, 입구녕이 나를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없는 틈을 노려 부엌으로 숨어들었다. 요즘 같은 입식(立式) 부엌이 아니었다. 부엌으로 가려면 안방에서 마루를 지나 마당을 옆으로 끼고 높은 문턱을 넘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코흘리개 아이로선 장애물 경기나 다름없었다.
부뚜막 위 찬장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고 박카스 병에 담긴 녀석을 움켜쥐고 눈물 한 방울의 맛을 음미했다. 사이다를 마시듯 들이켜지 않았다. 한 방울이면 족했다. 못된 탐욕 속에서도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미를 알았던 것일까. 물론 참기름을 손에 쥐고 한입 들이켰지만 삼키지는 않았다. 입술과 혀끝에서 느껴지는 고소함을 음미하며 다시 병 안으로 돌려보냈다. 이 글을 읽는 누가 거짓말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한 방울이면 충분했다’이다.
나의 참기름 도적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는 박카스 병에 담긴 참기름 양을 체크하고 있었다. 박카스 병은 찬장 맨 위칸으로 자리 또한 옮겨졌다. 저 높은 곳을 향해 기어올랐다. 떨어지면 또 올랐다. 어디가 부서져도 어쩔 수 없었다. 찬장이 앞으로 쏠려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가 미닫이 부엌문을 드르륵 여셨다. 놀라시는 표정, 우멍하게 들어간 두 눈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찰싹 찰싹, 내 엉덩이에 어머니의 매운 손맛이 닿으며 한바탕 빗소리를 터뜨렸다. ‘삼가 생각하건대’로 시작하는 옛글을 읽을 때처럼 그때, 코흘리개 시절의 한 방울 맛이 그립다.
세월이 흘러 디테일한 기억은 증발해버렸으나 가끔 어머니가 나의 ‘찬장 습격 사건’을 떠올리시던 일이 생각난다. 컴컴한 부엌에서 스파이더맨처럼 높다란 찬장을 기어오르던 꼬마의 모습에 기겁했다는 말씀이셨다.
성장기 식생활을 지배했던 소고기
⊙ 삼 남매에게 삼시 세끼 소고기 먹였던 엄마 ⊙ 서울 시내 유명한 소고기 맛집들 데려갔던 아버지 권세진 기자 |
그런데 신기한 점은 나의 성장기 집밥, 즉 솔푸드는 이런 정성 어린 요리와 반찬들보다는 ‘소고기’라는 것이다. 엄마는 삼 남매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거의 삼시 세끼 소고기를 먹였다. 아침은 곰국, 점심은 소고기찌개, 저녁엔 전기프라이팬을 꺼내 등심을 굽는 게 일상이었다. 꽃게탕이나 생선조림 등 메인디시가 있어도 소고기를 구웠다. 친정집 김치찌개는 김치는 안 보이면서 얇고 부드러운 소고기가 듬뿍 들어 있었고, 나는 김치찌개 내용물이 보통 돼지고기나 캔참치라는 것은 대학생이 된 후에야 알았다. 구이용 소고기가 등심 외에 다른 부위가 있다는 사실도 성인이 돼서야 알았다. 어쩌다 급히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 특별한 반찬이 없으면 갈아놓은 소고기 볶음을 참기름과 함께 밥에 비벼먹었다. 우리 집 삼 남매 모두 지금까지 큰 병은 물론 잔병치레도, 노화로 인한 질병도 없이 튼튼하게 살고 있는 것은 어릴 적 차곡차곡 쌓아온 소고기의 힘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우리 집이 특별나게 잘살아서가 아니다. 전쟁 후 어려운 시절을 겪어온 우리 부모 세대는 ‘잘 먹어야 잘산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키웠던 것은 아닐까.
가족 모두 건강한 건 고기 덕인 듯
엄마가 고퀄리티 집밥을 솔푸드로 남겨준 가운데 아버지는 또 다른 외식 솔푸드를 남겨주었다. 역시 주제는 소고기다. 삼 남매가 어릴 때 아버지는 직업 때문에 늘 바빴지만 주말이면 소문난 맛집으로 가족을 데려갔다. 주로 삼원가든, 늘봄공원, 버드나무집, 오륙도, 곰바위, 베니하나 등 고깃집이었고 중식이나 양식으로는 도원, 피자힐 등 유명한 음식점은 모두 부모님과 함께 여러 차례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말 가족 모두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간단한 아점을 먹으러 갈 때면 신사동의 영동설렁탕, 프로간장게장, 강남따로국밥 등 지금도 맛집으로 남아 있는 노포를 방문했다. 생각해보면 두 분 모두 부산·경남 출신이라 생선과 해산물을 좋아했지만 아이들에겐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과 철분이 풍부한 소고기를 늘 먹이려고 했다. 현재 70대 엄마, 80대 아버지, 4050세대 삼 남매 모두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등의 문제가 없는 것은 물론 잔병 없이 쌩쌩해서 부모님의 방식이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남편과 아들의 귀가가 늦어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할 때면 소고기를 굽는다. 등심이든 살치살이든 차돌박이든 치마살이든 안창살이든 냉장고에 있는 대로 아무거나 굽고 채소 조금과 최소한의 탄수화물을 곁들여 혼밥을 한 후 ‘단백질과 철분, 비타민과 섬유질을 보충했고 당(탄수화물)은 최소화한 건강식단’이라고 애써 평가하곤 한다. 물론 마블링 가득한 소고기가 건강식품이냐는 반대의견도 있겠지만 나에겐 평온함과 안식, 어릴 적 추억까지 가져다주는 솔푸드인 만큼 나 혼자만이라도 건강식단이라는 감투 좀 씌워줘도 괜찮을 것 같다.
신혼 어느 날의 ‘무 된장찌개’ 예찬론
⊙ 할머니의 된장, 엄마의 레시피… 작은 뚝배기에 담긴 三代의 마음 ⊙ 무 된장찌개 vs 감자 된장찌개… 7년간의 同牀異夢 박지현 기자 |
“와! 된장찌개다. 근데 무가 들어 있네?”
설마. 무 넣은 된장찌개를 처음 본 건가. 그렇단다. 자기 집에서는 대대로 감자를 넣어왔다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무 된장찌개 예찬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감자와 두부만 넣으면 국물이 텁텁해지는데, 무를 넣으면 이를 중화시켜주고, 한 번 끓이면 살캉하고, 두 번 끓이면 말캉해지는 식감도 요물 같으며, 뜨거우면 물론, 식은 후 밥에 참기름 두르고 비벼먹을 때에도 된장이 잔뜩 밴 무가 감초 역할을 한다고 말이다.
그사이 말없이 숟가락을 든 남편은 “정말 그러네. 진짜 시원하다”고 했다.
돌아보면 우리 집 식탁에는 무가 자주 올라왔다. 생선을 먹을 때도 곱게 간 무를 곁들였다. 특히 겨울에는 빠지지 않고 먹었다. ‘여름에 생강, 겨울에 무를 먹으면 의사 볼 일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겨울 무는 최고로 친다. 수분과 당도도 더 높다고 한다. 할머니의 된장에, 무가 가장 맛있을 때를 놓치지 않는 엄마의 마음이 더해진 된장찌개는 그 자체로 보약이었다. 묵묵히 숟가락을 움직이는 남편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작은 뚝배기에 무려 삼대(三代)의 마음이 담겨 있는 거야. 그리고 무가 진짜 신통방통한 게 뭔 줄 알아? 요리할 때 불은 재료의 맛을 내뿜게 하고, 불을 끄면 그 맛이 재료에 다시 스미는데, 무는 특히 그 반응이 탄력적이야. 끓을 때 알싸한 단맛을 국물에 내어주고, 식어가면서 그 맛을 빠짐없이 거둬들이는 거지. 뿌리 뽑혔지만, 찌개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셈이랄까. 겨울 무가 제일인 것도 정말 흥미로워. 숙살지기(肅殺之氣)라고 하는데, 생명력을 꺾는 한기(寒氣)가 되레 맛과 영양분을 보존해준다는 게 정말 놀랍지 않아? 살면서 우리도 찬바람을 맞을 텐데, 어쩌고 저쩌고….”
나는 ‘이것이야말로 내 영혼을 관통하는 음식이다!’라는 표정으로 일장연설을 늘어놨고, 남편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무 넣은 된장찌개는 저녁 단골 메뉴가 됐다.
“어때?”
“진짜 시원해.”
마치 가톨릭 미사에서 신부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면, 신자들이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화답하듯, 이는 수년간 우리 부부의 자연스러운 밥상머리 대화가 됐다.
그러던 며칠 전 저녁. 여느 때처럼 된장찌개를 끓이려던 참이었다. 오늘은 화채처럼 썰어볼까, 하며 땡땡한 겨울 무를 요리조리 돌리고 있는데 남편이 다가왔다. 비장한 표정, 그러나 그에 상응하지 않게 망설이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 저기, 말이야…. 생각을 좀 해봤는데, 된장찌개에 무를 안 넣으면 안 될까?”
무 된장찌개를 왜 먹지를 못하니…
충격이었다. 신부와 신자처럼 ‘연대(連帶)’의 확인일 줄 알았던 레퍼토리가 실은 ‘분열’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은 둘도 없는 반전(反轉)이었다. 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무가 도마 위에서 팽이처럼 한 바퀴 돌았다. 8년간 의중을 숨겨온 속내가 궁금했다. 침착하게 이유를 물었다.
듣자 하니, 자신에게 된장찌개의 감자가 소중하듯, 내게 무가 그런 존재인 것 같아 긴 세월 존중하려 했지만, 이젠 임계치(臨界値)에 다다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부터 어머니에게 주방에서 집도(執刀)한 자에게 토를 다는 것은 무릇 불경스러운 것이라 배웠기에 잠자코 먹으려 했지만, 숱한 인내의 날들에 힘입어 이제 이 정도 의견은 피력해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압권은 마지막 말이었다.
“사실 된장찌개에 무는 나한테 미역국에 오이가 들어간 느낌과 비슷해….”
참고로 남편은 ‘오싫모(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이다. 내겐 ‘무의 시원한 맛’이 남편에겐 ‘무(無) 맛’이었던 거다.
그 뒤로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결혼 후 끓여 왔던 수많은 ‘무 된장찌개들’이 스틸컷처럼 스쳐갔다. 그중엔 고등어조림에 넣듯 무를 커다랗게 썰어 넣은 ‘아방가르드 스타일 무 된장찌개’도 있었다. 간담이 다 서늘했다. 그날 남편은 흠칫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푹 익은 거대한 무를 셔벗처럼 슬쩍 떠먹더니 ‘시원하다!’며 감탄사를 뱉었었다. (참고 먹어준) 고마움과 (참고 먹게 한) 미안함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끝에 최종적으로 남은 감정은 비탄(悲嘆)이었다. 가령, 언젠가 남편이 몸져누웠을 때, 된장찌개에 무를 잔뜩 넣어 끓이고선, ‘무 된장찌개를 끓여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이라고 울먹이는 나를 상상해보니 무척 슬펐다. 한 이불 덮고 사는 사이인데, 이것보다 큰 비극이 어디 있을까!
얼마 전, 신년모임에서 만난 동창들에게 이 사건을 얘기해줬다. 한 친구가 물었다. 된장찌개에 무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고.
“시원하잖아. 안 그래도 두부가 왕창 들어가는데, 거기다 감자까지 넣으면 그 텁텁함은 누가 감당해?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고.”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시원할 거면 왜 된장찌개를 먹어? 텁텁하고 뻑뻑한 게 된장의 정체성이야. 왜 그걸 해치면서까지 시원함을 추구하는 건데. 그럴 거면 그냥 콩나물국 끓여 먹어.”
오, 상당히 명료하고 시원한 답이었다. 마치 무 된장찌개처럼…. 그때 또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
“그런데 남편은 왜 하필 만 7년이 지나 그 말을 한 거야? 행정상 신혼부부 기간이 만 7년이잖아. 난 그게 왜 7년일까 했거든. 너희 부부를 보니 그게 참 과학적인 거였다, 싶네? 호호.”
아, 이 말은 살짝 알싸했다. 역시 무 된장찌개처럼.
폴란드인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피에로기
⊙ 감자와 치즈 등을 넣고 만드는 폴란드식 만두, ‘피에로기’ ⊙ 폴란드 망명자 아주머니가 알려준 피에로기 요리법과 인생의 교훈 하주희 기자 |
대학생 시절, 무작정 떠난 호주에서 우연히 폴란드 출신 이민자 가정에 세를 들어 살게 됐다. 가정이라고 해봤자 50대였던 알리나 아주머니와 어린 딸 사만다 단둘이었다. 알리나 아주머니는 나를 만나자마자 위아래로 훑어봤다. 젊었을 때는 꽤나 미인이었을 게 분명해 보이는 아주머니는 늘 약간은 신경질적인 태도였다. 무엇이든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고, 기쁠 땐 춤을 추고 화가 나면 폴란드어로 욕을 했다. 우리는 어쩐 일인지 만나자마자 친해졌다.
아주머니는 1980년대 초 폴란드에서 호주로 망명했다. 당시 폴란드는 ‘폴란드인민공화국’ 시기였다. 소련이 세운 공산 정권이었다. 전체주의를 피해 수만 명의 폴란드인이 호주로 망명했다. 이들을 난민으로 대우하며 받아주는 나라가 당시엔 호주뿐이었던 이유다. 아주머니는 연금 수입과 방세로 생활했다. 단층집 1층 작은 방엔 내가, 지하실엔 반백수 제이슨이 세 들어 살았다.
아주머니는 집 안에서는 곧잘 폴란드어를 썼다. 특히 사만다를 혼낼 때는 폴란드어 욕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나중엔 나도 폴란드어 욕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지경이었다. 집에는 폴란드인 망명자 지인들이 자주 찾아왔다. 때론 러시아인들도 찾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부엌 한쪽에 가만히 앉아 이들이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로 대화를 하는 광경을 구경하곤 했다.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어를 상당히 알아듣지만, 러시아인들은 폴란드어를 그다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폴란드인 망명자들이 러시아인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도 말이다. 아주머니의 은근한 박대에도 러시아인들이 아주머니를 찾는 이유는 카드 점 때문이었다. 카드 점은 아주머니의 부업 중 하나였다.
나에겐 그 시절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아주머니는 ‘밥 먹을 때 노래하지 마라’며 말했다.
“그러면 멍청한 남편을 만나게 돼. 나처럼.”
아주머니는 원래 남편과 함께 망명했다. 한데 오갈 데 없는 젊은 폴란드인 여성을 집에 들여 재워줬는데, 글쎄 남편이 이 여성과 정분이 나서 나가버렸다. 결국 아주머니는 식당 웨이트리스부터 별별 일을 다하며 딸 둘을 키워냈다. 그러다 연하의 남자친구 로저를 만났고, 마흔 살이 넘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사만다였다. 전남편과 낳은 딸 둘은 진작 결혼해 각자 가정을 꾸렸다. 로저는 뉴질랜드인이었는데, 한 달에 한두 번 아주머니와 딸을 보러 들렀다. 로저는 내가 만나본 뉴질랜드인 중 가장 악센트가 심한 사람이었다. 그가 무척 선량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지만, 아쉽게도 그의 말을 거의 한마디도 알아듣진 못했다.
“너는 결국 길을 찾아낼 거다”
아주머니는 카드 점 외에 부업이 하나 더 있었다. 카지노였다. 언젠가부터 아주머니는 나를 어느 곳에든 데리고 다녔는데, 카지노도 마찬가지였다. 아주머니의 슬롯머신 승률은 그저 그랬다. 슬롯머신 버튼을 누르는 아주머니의 손을 지루하게 지켜보던 어느 날, 나 또한 호기심에 카지노 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룰렛 테이블에 앉아 돈을 걸었다. 몇 번을 거듭해서 돈을 따니, 판돈이 제법 큰돈으로 불어났다. 5만원쯤으로 시작했던 것이 몇백만원이 됐다. 자신감이 붙어 그 돈을 모두 베팅했다. 그러곤 단 한 판에 모두 잃었다. 그날 이후 난 도박을 하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가끔 폴란드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때 자주 함께 만든 것이 피에로기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곁에 두고 기댈 수 있는 셋째 딸 같은 존재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나도 그녀에게서 내 삶에 부재(不在)했던 강한 어머니상을 보았다.
“네가 시작한 일은 네가 끝내야 한다.”
“너는 결국 길을 찾아낼 거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해준 이야기들이 요즘도 내 머릿속에서 맴돌곤 한다. 이제 다시는 아주머니의 피에로기를 먹을 수 없다. 만약 사후(死後)의 삶이 있다면 나는 나의 폴란드인 아주머니를 만나 밀린 얘기를 나눌 것 같다. 함께 피에로기를 만들며 말이다.
패잔병을 일으킨 닭 칼국수
⊙ 타지 생활 감기 낫게 한 따끈한 국물 ⊙ 고국서 다시 먹으니 그때 그 맛 나지 않아 김세윤 기자 |
당시 내 식습관을 돌이켜보면 이랬다. 아침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길거리 가판을 들러 시미트(베이글과 비슷하게 고리 모양으로 구운 빵) 하나를 산다. 우리 돈 약 500원 정도로 기억한다. 여기에 누텔라 잼을 바르면 300원 정도가 추가된다. 집에서 미리 떠온 물과 같이 먹으면 아침과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4시쯤 저녁 밥상을 차린다. 튀르키예 마트에선 닭고기가 유독 저렴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조각 손질된 닭고기를 사다가 요리해 먹었다. 이런 식으로 하루 식비를 5000~6000원 안팎으로 아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겨울 그리고 감기
뜨거운 여름이 일 년 내내 지속할 것 같았던 10월, 이스탄불에 순식간에 겨울이 찾아왔다. 워낙 갑작스레 계절이 바뀐 탓에 새벽녘이 유난히 추웠다. 집주인에게 물어보니 벽면의 작은 라디에이터는 11월 중순은 돼야 작동할 것이라고 했다. 그때까진 꼼짝없이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자는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썼던 일기에는 ‘추운 새벽이 오는 게 두렵다’ ‘오랜만에 몸무게를 쟀더니 2kg이 빠져 있었다’ ‘외로운 방 안을 하얀 입김이 채웠다’ 같은, 일제강점기 시인들이나 썼을 법한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거울 속 비친 몰골은 마치 레판토 해전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튀르크 패잔병과 다름없었다.
비 내리는 토요일 아침, 밤새 이어진 기침 탓에 일찍 눈을 떴다. 머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린 것이다. 보통 때라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이나 푹 잤을 텐데, 그날만큼은 따끈한 국물이 당겼다. 유튜브를 켜고 ‘먹방’ 영상과 ‘쿡방’ 영상을 한참이나 본 뒤에 결심했다. ‘그래, 닭 칼국수를 만들어보자.’
마트에 가 닭고기를 샀다. 당근·애호박·양파·감자 등 야채도 푸짐하게 집었다. 면을 만들 밀가루까지 사서 주방에 펼쳐 놓았다. 그런데 무엇인가 아쉬웠다. ‘깊은 국물을 내려면 이걸로는 부족할 텐데….’ 고민하다 홍합을 우려 국물을 내보기로 했다.
문제는 홍합 파는 곳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 이스탄불은 바다 도시였지만 일반 가정에서 해산물을 먹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 때문에 해산물을 취급하는 마트도 많지 않다. 발품을 팔아 재래시장을 돌아야만 했다. 생각만 해도 번거롭기 그지없었지만, 기꺼이 아픈 몸을 이끌고 그 과정을 감내하기로 했다. 카드쿄이(Kadıköy) 항구 뒤쪽의 재래시장을 누볐다. 생선 가게 여기저기를 들렀는데도 홍합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 미디예 돌마(홍합 안에 각종 양념과 쌀을 넣고 찐 튀르키예 음식)를 파는 식당에서 조리 전 생홍합 한 봉지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끓는 물에 닭고기를 넣었다. 떠오르는 닭 불순물을 제거하면서 한참을 끓였다. 그 뒤 깨끗이 씻은 홍합을 야채와 함께 넣었다. 국물이 충분히 우러났을 즈음, 미리 반죽해둔 밀가루를 면 형태로 잘라 넣었다. 면이 익는 짧은 시간이 영겁(永劫)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닭 칼국수를 그릇 가득 퍼담아 식탁으로 옮겼다. 한 입 맛본 순간, 나는 시인 이상(李箱)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병실 침대에 누워 “센비키야(千疋屋)의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멜론을 먹지 못했지만, 닭 칼국수를 양껏 먹은 나는 그날 이후 감기를 떨쳐낼 수 있었다.
〈영혼의 안식, 나만의 ‘솔푸드’〉 기획이 결정된 뒤 오랜만에 닭 칼국수를 끓여봤다. 동네 마트만 가도 홍합은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그때처럼 수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같은 재료를 넣었는데도 패잔병을 일으켜 세웠던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추억의 맛’이라는 게 정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먹었던 닭 칼국수는 지금도 여전히 기억 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