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戰後 미국 원조는 안익태·이승만의 음악외교 결실
⊙ 안익태, 안창호 아들과 록 허드슨 출연하는 음악영화 ‘한국 환상곡’ 제작 꿈
⊙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문화참사관’ 요구 의혹… ‘counsellor’는 ‘자문관’ 의미
⊙ 이승만에게 ‘한국 환상곡’ 제작비 지원 요청은 미디어사업 꿈꾼 장기영의 구상
⊙ 이승만,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한 안익태를 내심 존경
金亨錫
1955년생. 건국대 사학과, 경희대 대학원 박사 / 총신대 교수,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주관 제1회 국제혁신박람회에 아시아 대표, 한민족복지재단 회장, 《조선일보》 통일과나눔재단 운영위원장 역임
⊙ 안익태, 안창호 아들과 록 허드슨 출연하는 음악영화 ‘한국 환상곡’ 제작 꿈
⊙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문화참사관’ 요구 의혹… ‘counsellor’는 ‘자문관’ 의미
⊙ 이승만에게 ‘한국 환상곡’ 제작비 지원 요청은 미디어사업 꿈꾼 장기영의 구상
⊙ 이승만,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한 안익태를 내심 존경
金亨錫
1955년생. 건국대 사학과, 경희대 대학원 박사 / 총신대 교수,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주관 제1회 국제혁신박람회에 아시아 대표, 한민족복지재단 회장, 《조선일보》 통일과나눔재단 운영위원장 역임
- 1955년 4월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안익태. 이하 모든 사진은 안익태기념재단과 필자가 제공했다.
2002년 청와대가 공개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통치 사료’에는 안익태(安益泰·1906~1965)와 관련된 편지가 많았다. 당시 한 월간지는 ‘안익태·프란체스카·박근혜의 청와대 파일’이란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로 인해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는 ‘정치성이 강한 음악가’로 오해를 받아왔다. 그러던 차에 올해 초 출간된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에서는 안익태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승만에게 워싱턴대사관의 문화참사관 자리를 청탁하고, 카네기홀 공연과 ‘한국 환상곡’의 뮤지컬 영화 제작을 위해 도움을 요청한 파렴치범으로 기술(記述)하였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가 1996년 펴낸 《이승만 관계 서한 자료집》을 찾았다. 그 속에 이승만이 안익태에게 보낸 영문 편지(1953년 10월 27일자)가 있었다.
〈안익태씨에게. 당신의 교향곡 ‘한국’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지휘하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당신이 지휘하는 연주회에 우리 측 사람도 참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에게는 매우 독특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워싱턴대사관 ‘문화외교관(cultural counsellor)’으로 임명해달라는 당신의 요청과 관련해 내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외무장관과도 얘기해보니 그의 해외 임명 계획에 그런 자리는 제공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1953. 10. 27. 당신의 이승만〉
이 편지에 의하면 안익태가 주미(駐美) 한국대사관의 문화외교관으로 임명해주기를 부탁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안익태가 앞서 보낸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이승만의 답신에서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살펴보니 안익태가 교향곡 ‘한국’을 지휘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필자는 1953년 무렵 안익태가 미국에서 ‘한국 환상곡’을 공연한 기록을 따라가보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31일 신시내티교향악단 송년음악회 때 ‘한국 환상곡’을 지휘한 기록을 확인했다. 바로 안익태가 미국에서 지휘자로 공식 데뷔한 무대였다.
필자는 또 이승만이 언급한 “그 연주회에 우리 측 사람도 참석하기를 기대한다”는 대목을 추적해보았다. 그런데 신시내티음악회에는 ‘우리 측 사람’(한국 정부 인사)이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없고, 안익태의 다음 공연인 1954년 1월 26일 인디애나폴리스음악회에 양유찬(梁裕燦) 대사를 비롯한 한인(韓人)이 다수 참석한 기사가 현지 신문에 등장한다. 따라서 이 내용은 이승만이 안익태의 신시내티공연을 축하하면서, 다음 달에 열리는 인디애나폴리스 공연을 상의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이 사람을 명예롭게 해준 익태씨’
그러면 스페인에 거주하던 안익태는 언제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서신으로 교제를 하는 사이가 되었을까? 탈라베라가 쓴 《나의 남편 안익태》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나타난다.
1953년 6월 안익태는 이승만에게서 서신 한 통을 받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익태씨. 나 이승만은 익태씨의 편지와 심포니 교향곡 ‘한국’을 반갑게 받은 것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나라 음악의 보물을 찾아내어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주는 익태씨의 그 훌륭한 공로에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삼천만 민족 모두가 애국가의 작곡자인 익태씨를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있고, 혹시 고국에 돌아오지 않을까 무척 궁금히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이 사람을 명예롭게 해준 익태씨에게 다시 고마운 뜻을 전하며, 익태씨의 음악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1953년 6월 1일 이승만〉
이로 미루어 1953년 6월 이전에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한국 환상곡’ 악보를 동봉한 문안 편지를 보낸 데 대해, 이승만이 6월1일자로 답신을 보내온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안익태가 두 번째 편지에서 카네기홀에서의 자선공연과 워싱턴대사관 문화외교관 얘기를 거론하자, 이승만은 10월27일자 답신에서 문화외교관은 변영태 외무장관의 의견을 빌려 완곡한 거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면 안익태가 요청한 문화외교관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해영은 ‘문화참사관’이라고 주장한다. 외무직 공무원인 참사관(參事官)은 공사(公使)의 아래이며, 1등 서기관의 위에 있는 직급이다. 이 주장은 한마디로 잘못된 것이다. 참사관은 영어로 ‘councilor’지 ‘counsellor’가 아니다. 이승만의 편지에서 ‘cultural counsellor’는 외무부 직제에 없는 자리라고 말한 것도 참사관이 아님을 입증한다.
문화참사관 vs 자문관

필자가 판단하기에 ‘counsellor’는 ‘자문관’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참사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면 ‘청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자문관’이라고 정의하면 다른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cultural counsellor’는 비상근 직원으로 문화 업무를 기획하고 대사에게 자문하는 역할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외무부 직제에도 없고, 예산상의 여유도 없기 때문에 이승만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양유찬 대사에게 보낸 비망록에는 안익태의 미국 자선공연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토록 지시했다.
이에 주미대사관은 미국 공보부와 접촉한 결과 국제공보부서가 추진 중이던 ‘경의를 표함 시리즈(Salute series)’와 연결되었고, 첫 번째 행사로 ‘서울·인디애나폴리스 교환연주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음악회에 양유찬 대사가 참석하여 인사말을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서울·인디애나폴리스 교환연주회는 민간 차원의 교류지만 실제는 양국 정부가 마련한 친선행사였다. 당시 미국에 매카시즘이 성행하면서 매카시(Joseph R. McCarthy) 상원의원으로부터 “공산주의자에게 약하다”고 공격받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과,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주장에 공포를 느끼고 있던 덜레스(John F. Dulles) 국무장관으로서는 한국전쟁의 성과를 홍보함으로써 정치적 곤경에서 탈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반면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완전히 폐허가 되고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던 한국 정부로서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참상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국전쟁이 종료되고 6개월밖에 안 된 시점인 만큼 정치적 요소도 순서에 고려되었다.
예컨대 음악회를 보도한 《인디애나폴리스 스타》의 기사 제목이 ‘서울에 경의를 표함(Salute to Seoul Gives): 음악회는 빨갱이들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였다. 서울시와 인디애나폴리스가 음악회를 직접 기획한 것처럼 포장하고 음악회에는 한국전 참전용사와 한국대사, 한국인 유학생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마지막 순서에는 미군 행진곡인 ‘공화국 전투찬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를 청중과 함께 노래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연주회는 국무성과 공보부의 기대처럼 성공적이었고, 미국의 많은 언론이 연주회 소식을 보도했다. 안익태에게는 ‘한국 환상곡’을 통해 당시 미국인들에게 ‘미지의 세계’로 인식되던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양국 간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무대였다. 안익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민간 외교사절의 역할을 성공리에 감당하였다.
성공적인 민간외교
음악외교관 안익태의 활동은 1956년에 재개된다. 그해 9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양한 국가와 문화 간에 교류를 통해 상호 이해와 우호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사람 대 사람(People to People, ‘PtoP’)’ 프로그램을 창설했다.
이 내용은 한국종합예술학교 허영한 교수가 쓴 논문 〈안익태의 미국 활동〉(1950~1958)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덧붙인다. 1957년 4월 ‘PtoP음악위원회’가 ‘뮤지컬 설루트(musical salute)’를 기획하면서 미국 내 음악대학과 아시아학과에 안익태를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어, 그의 강의나 지휘를 원하는 대학을 신청받았다.
그 결과, 11월 12일 PtoP 본부가 있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찰스턴교향악단과의 공연을 시작으로 앨라배마 버밍햄, 워싱턴DC, 오클라호마시티, 콜로라도 덴버, 캘리포니아 버뱅크, 하와이 호놀룰루 등을 순회하면서 그 지역 오케스트라와 ‘한국 환상곡’을 지휘하는 5개월간의 힘든 일정을 수행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가는 곳마다 현지 언론들이 대서특필했다. 이렇게 안익태는 미국을 횡단하는 순회연주를 통해 민간 차원에서 상당한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음악외교
1953년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55달러였다. 그해 세계은행의 조사 대상 110개국 가운데 109위의 참담한 실정이었다. 정부 차원의 경제 원조도 중요했지만 당장 식량과 의약품을 해결하는 데는 민간 차원의 구호가 더 시급한 실정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호단체 대부분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결성되었다. 월드비전(World Vision)과 컴패션(Compassion)은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고아를 돕기 위해 설립되었고,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1948년 미국 기독교아동복리재단(Christian Children’s Fund) 한국지부로 출범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섰다.
이렇게 미국의 민간·종교단체들이 ‘월(月) 5달러로 한국의 전쟁고아를 살리자’는 캠페인을 통해 마련된 구호품은 전시 응급구호사업과 전후 복구사업에 절대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미국 정부의 대외원조 예산과 모금으로 마련한 후원물품, 잉여농산물을 자원으로 삼던 원조단체들은 1950년대 후반에는 보건사회부보다 더 많은 재원을 보유해서 ‘제2의 보사부’로 불렸다. 기독교세계봉사회(CWS)는 1955년까지 1억 달러의 현금을 지원했는데, 이 돈으로 국내 복지시설 대부분이 운영되었다. 이처럼 1961년까지 미국이 한국에 원조한 물자는 총 31억 달러였는데, 이것은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원조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이상에서 역사의 이면에 숨겨졌던 안익태의 음악외교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한국전쟁 직후에 이뤄진 미국의 원조가 안익태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참상과 미국의 참전에 대한 고마움을 알리면서 ‘미지의 국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켜 많은 미국인이 구호의 손길에 참여하고, 한국인 고아를 입양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승만과 안익태 두 선각자의 혜안이 빚어낸 음악외교의 결실이었다.
음악영화 ‘한국 환상곡’ 제안
안익태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59년부터 3년 동안 9차례 중남미 순회공연에 집중하였다. 냉전시대를 맞아 북한과 외교전이 치열하던 때에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만큼 유능한 외교관은 없었다. 그가 순회공연을 마친 후에는 중남미 6개국과 연쇄적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는 어디서든 자신을 애국가의 작곡가로 소개하고 ‘한국 환상곡’을 지휘했다. 비록 조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런 조국을 널리 알리는 것이 사명이었다. 그와 같은 ‘역사적 인물’을 친일파·나치로 매도하고, 워싱턴대사관의 2급직인 문화참사관 자리나 청탁한 파렴치범으로 내모는 것은 역사를 날조·왜곡하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과 안익태 사이에 왕래한 서신은 《이승만 관계 서한 자료집》에 실린 10통을 포함해 18통인데, 직접 서신이 8통이고 간접 서신이 10통이다. 그중에서 ‘한국 환상곡’ 뮤지컬 영화 제작에 관한 것이 8통이다.
〈대통령 각하. 제 작품 ‘한국 환상곡’을 음악영화로 만드는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는 한국의 역사와 수려한 산하, 한국의 춤, 압제와 비극,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와 독립’의 승리를 묘사할 것입니다. 스크린에서 한국의 장구한 역사가 펼쳐지는 동안 1000명의 합창단과 200명으로 구성된 교향악단이 저의 작품 ‘한국 환상곡’을 연주할 것입니다. -1958년 2월 27일 안익태〉
편지의 결론은 한국 정부가 이 작품의 영화화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도움 요청 때문에 안익태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 ‘염치없는 파렴치범’이란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왜 이런 편지를 쓰고, 무슨 일을 어떻게 추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과연 그는 사익 추구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이용하려 한 파렴치범일까?
장기영과 안익태
《이승만 관계 서한 자료집》에는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기 10일 전인 2월 18일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張基榮·1916~1977)이 영화감독 이병일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낼 것을 미리 알려주는 대목이 기술되었다. 수신자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내용의 편지다.
이 편지에 의하면 장기영이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한 것은 1월 23일이었다. 이때 안익태는 미국 공보처의 ‘PtoP 프로그램’ 일정에 따라 1월 14일 콜로라도 덴버에서 있은 공연을 마치고, 2월 2일로 예정된 버뱅크교향악단과의 공연을 위해 인근 LA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체류한 한 달 동안 총영사관을 방문하여 고국 사정과 한인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으며, 할리우드의 영화사를 견학하여 영화에 대한 견문도 익혔다. 더욱이 버뱅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월트디즈니사(Walt Disney Co.)가 있었는데, 안익태는 그곳을 방문하여 창업자인 월트 디즈니를 만난 후 교제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곳에 장기영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LA를 방문한 목적은 미디어사업과 관련한 비즈니스 출장으로 짐작된다. 1950년 34세 때 이미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낸 금융계의 실력자 장기영은 1952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인으로 변신한 데 이어, 1954년 《코리아타임스》와 《태양신문》을 인수하여 《한국일보》를 창설하였다. 1957년 5월에는 미국 RCA와 합작으로 ㈜대한방송을 설립하여 텔레비전 방송인 HLKZ TV의 송출을 시작하였다. 방영시간이라고는 하루 2시간밖에 되지 않았고, TV 수상기 보급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장기영은 그때 이미 국내 최초의 종합미디어그룹을 꿈꾸었던 것이다.
장기영은 텔레비전방송국 운영에 필요한 영상물 확보에 심혈을 기울여 USIS(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문화담당 슈버커에게서 필름 1600권을 지원받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상을 제작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미국의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돌아보고 사업을 구상하기 위해 LA를 찾은 것이다.
“영화 제작 목적은 세계시장에서 돈 버는 것”
두 사람은 처음 만났지만 이내 의기투합했다. 안익태에게는 ‘한국 환상곡’을 음악영화로 만들어 전 세계에 알리려는 평생의 꿈이 있었고, 장기영은 영상사업을 통해서 세계시장에 진출하려는 야심찬 꿈이 있었다. 이것은 장기영이 이병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는 없는 “영화를 제작하는 목적은 세계시장에서 돈을 버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데서도 알 수가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제작비를 지원해달라는 편지를 쓴 것은 장기영의 구상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높다.
1956년 7월 한국영화문화협회 이사장에 취임한 장기영은 안익태를 만난 후 그의 명성과 한국 정부의 지원을 활용하여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구상을 한 것이다. 이병일 감독을 선택한 것은 그가 미국 남가주대학(U.S.C)에서 정규과정으로 영화를 공부한 유학파이자 동아영화사를 설립한 제작자로서 국제적인 안목과 경영 마인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사정이 제작비를 지원할 형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의 검토 지시를 받은 공보처장 오재경은 안익태에게 편지를 보내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을 접촉하는 방안을 조언했다.
못 이룬 꿈
이에 안익태는 이병일에게 보낸 3월22일자 편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워너브라더스와 20세기폭스에 제안서를 보낸 사실을 전하고, 자기가 귀국하여 이 문제를 추진할 수 있도록 오재경 처장과 상의해달라’고 당부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안익태는 필생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0년 5월18일자 《동아일보》에는 ‘한국 환상곡’이 영화 〈전송가(戰頌歌)〉의 주인공인 ‘한국전쟁의 영웅’ 헤스(D.E. Hess) 대령에 의해 영화화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고, 또다시 2년이 지난 후에는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진전된 기사가 보도되었다.
〈안익태씨의 ‘코리안 판타지’(한국교향환상곡)가 영화화된다. 이 작품의 영화화 권리를 획득한 동성영화사 발표에 의하면, 제목은 ‘코리아’. 내용은 민족 수난사를 배경으로, 한국의 정신사를 테마로 한 ‘코리안 판타지’에 드라마를 안배, 세미뮤지컬로 꾸미게 될 것이다. 연출은 전창근 유현목 공동감독이 메가폰을 들게 될 것인데 초가을에 크랑크인할 예정이며, 영화음악의 작곡 편곡 지휘는 안익태 자신이 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미국인 배우 록 허드슨(Rock Hudson)과 할리우드의 한인 배우 필립 안(Philip Ahn)도 출연하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62년 4월4일자〉
도산 안창호의 아들로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필립 안과 미국 배우 록 허드슨까지 영화에 출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지만 ‘한국 환상곡’의 영화화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정부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 영화사가 할리우드 영화사와 합작영화를 만들기에는 너무나 영세했고, 장기영이 야심차게 운영하던 HLKZ TV는 1959년 초 화재로 전소된 후 파산하고 말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제작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승만을 존경한 안익태
이 밖에도 안익태는 이승만에게 한미문화협회를 창립하자는 제안과 미국 내 연주활동에 도움이 되는 추천서를 요청하였는데, 그때마다 이승만은 나무라지 않고 재미 공관을 통해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깊은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30년의 나이 차에다가 출신 지역도 달랐으며 이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미국 유학을 통해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공통점에 따른 존경과 신뢰가 자리했다. 1938년 2월 15일 안익태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한국 환상곡’의 초연을 앞두고 《아이리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조국 독립을 열망하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많은 조선인들은 지난 시절 아일랜드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독립을 쟁취한 점에 감명을 받았다. 조선도 금세기 초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해 강력한 민족주의가 존재하는데, 2000년 동안 나라를 통치해 온 황제의 직계손인 ‘프린스 리’(이승만)가 그 지도자다.〉
이처럼 안익태는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이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을 ‘왕실의 후손’(전주 이씨)이자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승만 역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한 안익태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 1955년 4월 19일 안익태는 정부 초청으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경축음악회’를 지휘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국을 떠난 지 25년 만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정부는 애국가 작곡자에 대한 예우로 ‘제1호 문화포장’을 했고, 국민은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이상에서 ‘한국 환상곡’을 음악영화로 제작하려던 일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려던 안익태와 60년 전에 한류의 가능성을 꿈꾼 장기영의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비사(祕史)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안익태가 다양한 꿈을 꾸며 조국을 위해 활동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의 재능을 아끼고 보호하려 한 이승만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가 1996년 펴낸 《이승만 관계 서한 자료집》을 찾았다. 그 속에 이승만이 안익태에게 보낸 영문 편지(1953년 10월 27일자)가 있었다.
〈안익태씨에게. 당신의 교향곡 ‘한국’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지휘하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당신이 지휘하는 연주회에 우리 측 사람도 참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에게는 매우 독특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워싱턴대사관 ‘문화외교관(cultural counsellor)’으로 임명해달라는 당신의 요청과 관련해 내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외무장관과도 얘기해보니 그의 해외 임명 계획에 그런 자리는 제공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1953. 10. 27. 당신의 이승만〉
이 편지에 의하면 안익태가 주미(駐美) 한국대사관의 문화외교관으로 임명해주기를 부탁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안익태가 앞서 보낸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이승만의 답신에서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살펴보니 안익태가 교향곡 ‘한국’을 지휘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필자는 1953년 무렵 안익태가 미국에서 ‘한국 환상곡’을 공연한 기록을 따라가보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31일 신시내티교향악단 송년음악회 때 ‘한국 환상곡’을 지휘한 기록을 확인했다. 바로 안익태가 미국에서 지휘자로 공식 데뷔한 무대였다.
필자는 또 이승만이 언급한 “그 연주회에 우리 측 사람도 참석하기를 기대한다”는 대목을 추적해보았다. 그런데 신시내티음악회에는 ‘우리 측 사람’(한국 정부 인사)이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없고, 안익태의 다음 공연인 1954년 1월 26일 인디애나폴리스음악회에 양유찬(梁裕燦) 대사를 비롯한 한인(韓人)이 다수 참석한 기사가 현지 신문에 등장한다. 따라서 이 내용은 이승만이 안익태의 신시내티공연을 축하하면서, 다음 달에 열리는 인디애나폴리스 공연을 상의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이 사람을 명예롭게 해준 익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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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26일 장충체육관 야외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 탄신 85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지휘하는 안익태. |
1953년 6월 안익태는 이승만에게서 서신 한 통을 받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익태씨. 나 이승만은 익태씨의 편지와 심포니 교향곡 ‘한국’을 반갑게 받은 것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나라 음악의 보물을 찾아내어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주는 익태씨의 그 훌륭한 공로에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삼천만 민족 모두가 애국가의 작곡자인 익태씨를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있고, 혹시 고국에 돌아오지 않을까 무척 궁금히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이 사람을 명예롭게 해준 익태씨에게 다시 고마운 뜻을 전하며, 익태씨의 음악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1953년 6월 1일 이승만〉
이로 미루어 1953년 6월 이전에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한국 환상곡’ 악보를 동봉한 문안 편지를 보낸 데 대해, 이승만이 6월1일자로 답신을 보내온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안익태가 두 번째 편지에서 카네기홀에서의 자선공연과 워싱턴대사관 문화외교관 얘기를 거론하자, 이승만은 10월27일자 답신에서 문화외교관은 변영태 외무장관의 의견을 빌려 완곡한 거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면 안익태가 요청한 문화외교관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해영은 ‘문화참사관’이라고 주장한다. 외무직 공무원인 참사관(參事官)은 공사(公使)의 아래이며, 1등 서기관의 위에 있는 직급이다. 이 주장은 한마디로 잘못된 것이다. 참사관은 영어로 ‘councilor’지 ‘counsellor’가 아니다. 이승만의 편지에서 ‘cultural counsellor’는 외무부 직제에 없는 자리라고 말한 것도 참사관이 아님을 입증한다.
문화참사관 vs 자문관

필자가 판단하기에 ‘counsellor’는 ‘자문관’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참사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면 ‘청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자문관’이라고 정의하면 다른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cultural counsellor’는 비상근 직원으로 문화 업무를 기획하고 대사에게 자문하는 역할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외무부 직제에도 없고, 예산상의 여유도 없기 때문에 이승만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양유찬 대사에게 보낸 비망록에는 안익태의 미국 자선공연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토록 지시했다.
이에 주미대사관은 미국 공보부와 접촉한 결과 국제공보부서가 추진 중이던 ‘경의를 표함 시리즈(Salute series)’와 연결되었고, 첫 번째 행사로 ‘서울·인디애나폴리스 교환연주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음악회에 양유찬 대사가 참석하여 인사말을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서울·인디애나폴리스 교환연주회는 민간 차원의 교류지만 실제는 양국 정부가 마련한 친선행사였다. 당시 미국에 매카시즘이 성행하면서 매카시(Joseph R. McCarthy) 상원의원으로부터 “공산주의자에게 약하다”고 공격받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과,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주장에 공포를 느끼고 있던 덜레스(John F. Dulles) 국무장관으로서는 한국전쟁의 성과를 홍보함으로써 정치적 곤경에서 탈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반면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완전히 폐허가 되고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던 한국 정부로서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참상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국전쟁이 종료되고 6개월밖에 안 된 시점인 만큼 정치적 요소도 순서에 고려되었다.
예컨대 음악회를 보도한 《인디애나폴리스 스타》의 기사 제목이 ‘서울에 경의를 표함(Salute to Seoul Gives): 음악회는 빨갱이들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였다. 서울시와 인디애나폴리스가 음악회를 직접 기획한 것처럼 포장하고 음악회에는 한국전 참전용사와 한국대사, 한국인 유학생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마지막 순서에는 미군 행진곡인 ‘공화국 전투찬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를 청중과 함께 노래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연주회는 국무성과 공보부의 기대처럼 성공적이었고, 미국의 많은 언론이 연주회 소식을 보도했다. 안익태에게는 ‘한국 환상곡’을 통해 당시 미국인들에게 ‘미지의 세계’로 인식되던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양국 간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무대였다. 안익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민간 외교사절의 역할을 성공리에 감당하였다.
성공적인 민간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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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음악여행을 위해 떠난 대서양 선상에서. 1936년 6월 무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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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고 있는 안익태. 1943년 2월 무렵이다. |
그 결과, 11월 12일 PtoP 본부가 있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찰스턴교향악단과의 공연을 시작으로 앨라배마 버밍햄, 워싱턴DC, 오클라호마시티, 콜로라도 덴버, 캘리포니아 버뱅크, 하와이 호놀룰루 등을 순회하면서 그 지역 오케스트라와 ‘한국 환상곡’을 지휘하는 5개월간의 힘든 일정을 수행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가는 곳마다 현지 언론들이 대서특필했다. 이렇게 안익태는 미국을 횡단하는 순회연주를 통해 민간 차원에서 상당한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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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르요카의 안익태 거리 명명식 모습. 안익태는 부인 로리타 탈라베라 사이에 안나, 엘레나, 레오노르 세 딸을 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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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무렵 불국사를 관광하는 안익태. |
이상에서 역사의 이면에 숨겨졌던 안익태의 음악외교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한국전쟁 직후에 이뤄진 미국의 원조가 안익태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참상과 미국의 참전에 대한 고마움을 알리면서 ‘미지의 국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켜 많은 미국인이 구호의 손길에 참여하고, 한국인 고아를 입양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승만과 안익태 두 선각자의 혜안이 빚어낸 음악외교의 결실이었다.
음악영화 ‘한국 환상곡’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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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서 로마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1940년 5월 무렵이다. |
한편 이승만과 안익태 사이에 왕래한 서신은 《이승만 관계 서한 자료집》에 실린 10통을 포함해 18통인데, 직접 서신이 8통이고 간접 서신이 10통이다. 그중에서 ‘한국 환상곡’ 뮤지컬 영화 제작에 관한 것이 8통이다.
〈대통령 각하. 제 작품 ‘한국 환상곡’을 음악영화로 만드는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는 한국의 역사와 수려한 산하, 한국의 춤, 압제와 비극,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와 독립’의 승리를 묘사할 것입니다. 스크린에서 한국의 장구한 역사가 펼쳐지는 동안 1000명의 합창단과 200명으로 구성된 교향악단이 저의 작품 ‘한국 환상곡’을 연주할 것입니다. -1958년 2월 27일 안익태〉
편지의 결론은 한국 정부가 이 작품의 영화화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도움 요청 때문에 안익태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 ‘염치없는 파렴치범’이란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왜 이런 편지를 쓰고, 무슨 일을 어떻게 추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과연 그는 사익 추구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이용하려 한 파렴치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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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의 1930년 3월 국립동경고등음악학원 졸업 사진이다. |
이 편지에 의하면 장기영이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한 것은 1월 23일이었다. 이때 안익태는 미국 공보처의 ‘PtoP 프로그램’ 일정에 따라 1월 14일 콜로라도 덴버에서 있은 공연을 마치고, 2월 2일로 예정된 버뱅크교향악단과의 공연을 위해 인근 LA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체류한 한 달 동안 총영사관을 방문하여 고국 사정과 한인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으며, 할리우드의 영화사를 견학하여 영화에 대한 견문도 익혔다. 더욱이 버뱅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월트디즈니사(Walt Disney Co.)가 있었는데, 안익태는 그곳을 방문하여 창업자인 월트 디즈니를 만난 후 교제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곳에 장기영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LA를 방문한 목적은 미디어사업과 관련한 비즈니스 출장으로 짐작된다. 1950년 34세 때 이미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낸 금융계의 실력자 장기영은 1952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인으로 변신한 데 이어, 1954년 《코리아타임스》와 《태양신문》을 인수하여 《한국일보》를 창설하였다. 1957년 5월에는 미국 RCA와 합작으로 ㈜대한방송을 설립하여 텔레비전 방송인 HLKZ TV의 송출을 시작하였다. 방영시간이라고는 하루 2시간밖에 되지 않았고, TV 수상기 보급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장기영은 그때 이미 국내 최초의 종합미디어그룹을 꿈꾸었던 것이다.
장기영은 텔레비전방송국 운영에 필요한 영상물 확보에 심혈을 기울여 USIS(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문화담당 슈버커에게서 필름 1600권을 지원받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상을 제작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미국의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돌아보고 사업을 구상하기 위해 LA를 찾은 것이다.
“영화 제작 목적은 세계시장에서 돈 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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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안익태의 마지막 공연인 런던 뉴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리허설 모습이다. |
바로 이런 점에서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제작비를 지원해달라는 편지를 쓴 것은 장기영의 구상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높다.
1956년 7월 한국영화문화협회 이사장에 취임한 장기영은 안익태를 만난 후 그의 명성과 한국 정부의 지원을 활용하여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구상을 한 것이다. 이병일 감독을 선택한 것은 그가 미국 남가주대학(U.S.C)에서 정규과정으로 영화를 공부한 유학파이자 동아영화사를 설립한 제작자로서 국제적인 안목과 경영 마인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사정이 제작비를 지원할 형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의 검토 지시를 받은 공보처장 오재경은 안익태에게 편지를 보내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을 접촉하는 방안을 조언했다.
못 이룬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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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25년 만에 금의환향한 안익태를 마중 나온 인사들. 왼쪽부터 작곡가 이홍렬, 김세형, 한인환(피아니스트 한동일)의 아버지. |
그러나 안익태는 필생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0년 5월18일자 《동아일보》에는 ‘한국 환상곡’이 영화 〈전송가(戰頌歌)〉의 주인공인 ‘한국전쟁의 영웅’ 헤스(D.E. Hess) 대령에 의해 영화화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고, 또다시 2년이 지난 후에는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진전된 기사가 보도되었다.
〈안익태씨의 ‘코리안 판타지’(한국교향환상곡)가 영화화된다. 이 작품의 영화화 권리를 획득한 동성영화사 발표에 의하면, 제목은 ‘코리아’. 내용은 민족 수난사를 배경으로, 한국의 정신사를 테마로 한 ‘코리안 판타지’에 드라마를 안배, 세미뮤지컬로 꾸미게 될 것이다. 연출은 전창근 유현목 공동감독이 메가폰을 들게 될 것인데 초가을에 크랑크인할 예정이며, 영화음악의 작곡 편곡 지휘는 안익태 자신이 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미국인 배우 록 허드슨(Rock Hudson)과 할리우드의 한인 배우 필립 안(Philip Ahn)도 출연하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62년 4월4일자〉
도산 안창호의 아들로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필립 안과 미국 배우 록 허드슨까지 영화에 출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지만 ‘한국 환상곡’의 영화화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정부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 영화사가 할리우드 영화사와 합작영화를 만들기에는 너무나 영세했고, 장기영이 야심차게 운영하던 HLKZ TV는 1959년 초 화재로 전소된 후 파산하고 말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제작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승만을 존경한 안익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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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3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밀 자우어와 함께한 안익태. |
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깊은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30년의 나이 차에다가 출신 지역도 달랐으며 이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미국 유학을 통해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공통점에 따른 존경과 신뢰가 자리했다. 1938년 2월 15일 안익태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한국 환상곡’의 초연을 앞두고 《아이리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조국 독립을 열망하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많은 조선인들은 지난 시절 아일랜드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독립을 쟁취한 점에 감명을 받았다. 조선도 금세기 초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해 강력한 민족주의가 존재하는데, 2000년 동안 나라를 통치해 온 황제의 직계손인 ‘프린스 리’(이승만)가 그 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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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의 마지막 가족사진. 1965년 2월이다. |
이승만 역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한 안익태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 1955년 4월 19일 안익태는 정부 초청으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경축음악회’를 지휘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국을 떠난 지 25년 만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정부는 애국가 작곡자에 대한 예우로 ‘제1호 문화포장’을 했고, 국민은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이상에서 ‘한국 환상곡’을 음악영화로 제작하려던 일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려던 안익태와 60년 전에 한류의 가능성을 꿈꾼 장기영의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비사(祕史)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안익태가 다양한 꿈을 꾸며 조국을 위해 활동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의 재능을 아끼고 보호하려 한 이승만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