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말라야 바룬체 빙하에 비교될 만큼 넓은 雪原인 트리앙 플라토(Plateau du Trient)
⊙ 오니계곡을 가로지른 다음 이어지는 능선 사면길은 길 전체가 알프스 조망대
⊙ 美峰 마터호른, 1865년 初登 이후 매년 인명사고 발생하는 걸로 악명 높아
⊙ 오니계곡을 가로지른 다음 이어지는 능선 사면길은 길 전체가 알프스 조망대
⊙ 美峰 마터호른, 1865년 初登 이후 매년 인명사고 발생하는 걸로 악명 높아
- 김창호가 비네트 산장 뒤편 암봉에 올라 까마귀들과 함께 알프스 산봉을 응시하고 있다. 산에 대한 열망은 또다른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파김치 상태로 샤모니로 돌아온 이튿날 만난 허긍열은 오트루트 가이드북을 훑어보더니 빙긋 웃는다. ‘오트(haute)’는 ‘하이 레벨(high level)’을 뜻하는 프랑스 말인데 허릿길이 무슨 오트루트냐는 것. 잠시 당황. 또 한 권의 가이드북을 내놓자 “그 정도면 오트루트라고 해도 된다”고 한다.
첫 번째 가이드북에 나온 루트의 평균 해발 고도는 2500m 안팎이지만, 두 번째 가이드북의 루트는 산장 위치만 해도 대부분 해발 3000m를 넘고, 매일매일 빙하 따라 3000~3600m대 고개를 넘는 고난도(高難度) 루트였다. 크레바스 빙하를 가로질러야 하기에 위험부담도 크다. 그런데도 일행 모두 ‘진짜 오트루트 산행’에 의지를 모았다. 짐은 최소화했다. 피켈, 아이젠, 로프 30m 1롤, 등산용폴 그리고 덧옷 정도만 넣고, 점심은 하루에 라면 2봉과 알파미 1봉, 간식이 모두였다.
“맞아, 이게 바로 트레킹이야”
샤모니에서 하루 쉬고 출발하는데도 다리가 뻐근하다. 투르(le Tour· 1479m)에서 케이블카와 곤돌라를 타고 콜데발머(Col de Balme·2191m) 아래 종점에 내렸다. 몽블랑 오를 때와 분위기가 다르다. 모두 “이게 진짜 트레킹”이라며 즐거워한다. 에귀베르트(Aiguille Verte·4122m)에서 몽블랑으로 웅장한 산릉이 뻗어나가고, 그 맞은편으로 에귀로제 능선(Massif Des Aguilles Rouges)이 솟구쳐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몽블랑 일원이 하얀 산의 상징이라면 콜데발머 일원은 초록빛 파라다이스다. 그 뒤로는 돌로미테 풍의 바위산들이 든든하게 받쳐주어 더욱 인상적이다.
하얀 雪原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트레커들은 대개 콜데발머를 넘어 몽블랑 둘레길(TMB)을 따라 목적지인 샹페(Champex·1466m)로 내려선다. 우리는 ‘진정한 오트루트’인 트루패스(Col du Tour·3351m)를 넘기 위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앞서가는 이나 뒤따라오는 이나 걸음이 가볍다. 평화스런 표정이다. 에귀베르트와 에귀디미디를 비롯한 침봉들은 창 든 수문장인양 몽블랑을 에워싸고, 샤모니계곡의 마을들도 아름답게 바라보인다.
정오경 도착한 알베르트 산장(Refuge Albert·2702m)은 트레커들의 천국이다. 바게트나 샌드위치 먹으며 풍광 즐기는 이들, 위통 벗은 채 일광욕 즐기는 중년 남자와 근육질 청년 등 여유로움 자체이고, 웅장한 대자연과 잘 어우러지고 있다. 갈 길 바쁜 우리에게는 그러한 여유를 즐길 만한 겨를이 없다. 배낭에 꽂아두었던 바게트를 뜯어먹곤 곧바로 트루패스로 향한다.
돌밭 능선길 따라 20분쯤 오르자 트루빙하(Gl. du Tour)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쪽은 하얗게 반짝이는 설원(雪原)이지만 중단부 아래쪽은 잿빛으로 죽어 있다. 상단 빙하로 접어드는데 벌써 지친다. 설원 중단부 너럭바위에서 쉴 때는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하얀 설원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하늘은 너무도 파랗다. 그 하늘에 설봉(雪峰)은 설봉대로, 암봉(巖峰)은 암봉대로 찌를 듯한 기세로 날카롭게 솟구쳐 있다.
“와~, 바룬체 설원을 보는 것 같다”
패스 위에 올라선 시각은 오후 3시30분. 능선 너머에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히말라야 바룬체 빙하에 비교될 만큼 넓은 설원인 트리앙 플라토(Plateau du Trient)가 펼쳐지고, 꽃같이 피어오른 침봉(針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설원을 가로지른 발자국은 설원 끝에 튀어나온 오니봉(Pointe d'Orny·3270m) 기슭 트리앙산장(Cabane du Trient·3170m)으로 이어진다. 하얀 유선지에 흰 선을 그어놓은 듯 순백의 조화다.
패스를 내려서면 스위스 땅이다. 급경사에 눈사태 위험까지 있어 아이젠을 다시 차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트리앙 플라토 횡단은 예상과 달리 오래 걸려 트리앙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5시를 넘어섰다. 이 산장은 트레커들에게 인기를 누리는 곳이다. 능선에 작은 암봉들이 많아 클라이머들에게 등반 기점 같은 곳이기도 하다. 산장 분위기도 몽블랑 산행 때 거친 산장과 다르다. 등반을 앞둔 긴장감은 전혀 없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곁들이면서 담소를 나누는 이들의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밤이 깊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그림 같은 샹페 마을을 지나
오늘은 샹페로 하산해 버스를 타고 오시에르(Orsieres)를 거쳐 부르 생피에르(Bourg-St-Pierre·1690m)까지 이동한 다음, 발소레이(Valsorey)계곡을 타고 발소레이산장(Cab. de Valsorey·3030m)까지 올라야 하기에 서둘러야 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얼어붙은 오니빙하(GL. d'Orny)를 내려서다 오니산장(Cabane d'Orny·2811m)이 위치한 둔덕에 올라서자 수많은 산봉과 산릉이 겹을 이루며 꿈틀거린다. 서부 알프스 명봉들이다. 능선이 일렁이는 강도와 비례해 우리 가슴도 설렌다. 오니계곡을 가로지른 다음 이어지는 능선 사면길은 길 전체가 알프스 조망대였다. 우리가 오늘 다가설 그랑콩벵(Grand Combin) 산군 최고봉도 거대한 장벽처럼 바라보인다. 고도를 낮출수록 색깔은 흰색에서 잿빛을 거쳐 푸른빛으로 바뀌어간다. 산 아래 마을은 푸른 숲 안에 들어서 있고, 맞은편 산등성이는 대관령 일원을 바라보는 듯 넉넉하고 부드럽다.
9시경 케이블카 상부 종점인 브레야(La Breya·2198m)에 도착하자 샹페 호수와 마을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빤히 바라보이는데도 케이블카로 10분 이상 거리였다(표고차 700m). 샹페는 사진에서 보아왔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푸른 호수, 푸른 숲, 그 대자연을 배경삼아 들어선 가옥, 상점 모두 그림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 마을을 그냥 지나쳐야 한다는 게 아쉽다.
로컬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부그 생피에르에 도착한 것은 낮 12시30분. 함께 내린 스위스 중년 여성 산악인도 마침 발소레이산장이 목표다. 가이드와 함께 산행에 나선 그녀는 산꾼 냄새를 물씬 풍긴다. 그들이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는 사이 산행을 시작했지만, 길을 잘못 찾고 헤매는 사이 추월당하고 만다.
발소레이계곡 초입은 나무가 우거져 있고, 계곡 끄트머리에는 거대한 장벽이 버티고 서 있다. 작은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웅장한 풍경이다. 감탄해하는 우리 모습이 신기한지 너구리처럼 생긴 마멋들이 굴 밖에 나와 물끄러미 바라본다. 민가가 한 채 있는 코르도네(Cordonne·1834m)를 지나 턱을 하나 올려치자 초원 테라스. 더 많은 마멋들이 굴에서 고개를 내밀고 낯선 이방인을 지켜본다.
골짜기 오른쪽 지능선에 집 한 채가 앉아 있다. 프티벨런(Petit Velan·3201.5m) 북릉(北稜)상의 위태로운 바위 턱에 자리잡은 벨런산장(2642m)이다. 이 일대 산봉들을 조망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위치다. 우리가 올라야 할 발소레이산장은 벨런산장보다 400m나 더 높이 있다. 어떤 곳에 있나 궁금해진다.
폐허의 아몬트산장(Chalet d'A-mount·2197m)에서 오르막이 시작된다. 숨을 몰아쉬며 40분쯤 올랐을까, 무너져 내릴 듯 가파른 능선 위에 고성처럼 올라앉은 발소레이산장이 바라보인다. 에귀디발소레이(Ag. du Valsorey) 대장벽이 뿌리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산 너머로 몽블랑에서 그랑드조라스와 에귀베르트를 거쳐 에귀디트루(Ag. du Tour·3540m)로 이어지는 몽블랑 산군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때문이다. 이렇게 웅장한 산군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 가벼운 허릿길 대신 이 갈리는 고행길인 오트루트를 택한 것이다.
불현듯 고성에 갇힌 듯한 불안감 엄습
석상명이 쭉 뺀다. 표고차 600m의 산장까지 한달음에 올라갈 참이다. 서서히 높이를 올리는 사이 어제 우리가 넘었던 투르패스와 아르장티에르, 골든스파이어 등이 도도히 솟구쳐 있다. 오늘 아침 트리앙플라토 설원에서 예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지면서도 발소레이산장 뒤쪽 능선을 넘어서면 몽블랑 산군(山群)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섭섭해진다.
오후 6시경 도착한 산장은 마법사의 집, 고성(古城)이었다. 1901년 신축 이후 1924년, 1926년 두 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 산장이 지어진 것이다. 발소레이에서 벨런(M. Belan·3727m)으로 이어지는 대장벽은 서서히 땅거미가 밀려들고, 그 뒤로 몽블랑 산군은 석양빛에 고향 산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산장에는 우리를 앞지른 두 사람 외에 일본 여성 산악인과 가이드, 그리고 두 명의 현지 산악인이 있을 뿐이다. 배정받은 30인용 방에 짐을 놔두고 내려서자 산장 입구에 붙여놓은 사진과 개념도가 보인다. 우리가 넘어야 할 플라토뒤쿨와르(Plateau du Couloir·3664m)~콜디소나돈(C. du Sonadon·3520m)~몽뒤두란빙하(Gl. du Mont Durand)~샹리온산장 루트였다.
산장지기는 우리 등반 계획을 듣곤 행색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갸우뚱대는 듯하더니 “괜찮다, 넘어갈 만하다”며 안심시켜 준다. 그에게 루트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자 좀이 쑤신다. 해가 넘어갈 시각이었으나 산장 뒤편으로 부지런히 올랐다. 내일 올려쳐야 할 설사면(雪斜面)과 플라토뒤쿨와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늘은 빛을 완전히 감추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구름안개가 밀려오더니 발소레이산 북사면을 뒤덮어 버렸고, 발아래 산봉들은 노을에 벌겋게 물들고 있다. 고성에 갇힌 듯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美峰 마터호른
산장을 나선 시각은 4시45분, 헤드랜턴 불빛은 벌써 사면을 오르고 있다. 앞 사람들이 발자국을 만들어놓아 진도가 잘 나간다. 그래도 어둠 속 가파른 설사면은 사람을 긴장케 한다. 시커먼 골짜기 바닥은 우리를 빨아들일 듯 깊고 깊게 느껴진다.
해발 3400m, 등 뒤가 벌겋게 달아오른다. 몽블랑에서 그랑드조라스를 거쳐 에귀디트루로 이어지는 능선은 아침 햇살에 꿈틀거린다. 에귀디발소레이에서 벨런으로 이어지는 암릉 역시 서서히 달아오른다. 흰눈을 머리에 인 벨런은 그랑콩벵 산군을 대표할 만큼 기품 넘친다.
널따란 설원이 펼쳐진다. 콜뒤플라토(Col du Plateau·3664m)다. 능선 너머 쪽은 아침 햇살에 침봉들이 솟구치고 있다. 발소레이를 오르는 이들이 간간이 돌멩이와 얼음덩이를 떨어뜨려 긴장케 한다.
“와~, 마터호른이다! 몬테로자다!”
함지박형 설사면으로 내려섰다 능선으로 올라서자 콜뒤소나돈(C. du Sonadon·3520m). 알프스 최고 미봉(美峰) 마터호른(Matterhorn·4478m)과 알프스 2위 고봉(高峰) 몬테로자(Monte Rosa·4634m)가 솟구친다. 몽블랑이 알프스 최고봉답게 웅장하고도 위압적이라면 마터호른은 알프스 최고 미봉(美峰)답게 아름다웠다. 몽블랑과 그랑드조라스가 속살을 드러낸 채 유혹하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더욱 매혹적인 마터호른을 향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게 뭐야, 맥 빠지게…. 도로로 끊어진 백두대간과 별 차이가 없잖아!”
계곡으로 내려서자 산림도로와 함께 승용차 한 대가 보인다. 계곡 아래쪽 모부아셍호수(Lac de Mauvoisin)는 하단부가 댐으로 막혀 있고, 기다란 호수 서쪽 길이 우리가 묵을 샹리옹산장(Cab. de Chanrion·2462m)과 계곡 위쪽 소수력(小水力)댐으로 이어져 있었다. 알프스 일원은 커다란 골 막바지마다 댐을 막아 빙하에서 녹아내린 물을 담고, 그 물을 전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다.
오후 2시경 도착한 샹리옹산장은 적막감이 감돈다. 고혹적인 몸매의 젊은 아가씨가 산장 앞마당에 누워 일광욕하는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썰렁하기 짝이 없는 산장이다. 습기 먹은 옷가지와 간식거리를 햇볕에 말리고 며칠간 땀에 찌든 몸을 닦은 다음 각자 마음에 드는 곳에서 낮잠에 빠져든다. 그 사이 한팀 한팀 산장을 찾아들더니 식당이 꽉 찰 정도로 트레커가 몰려들었다. 모부아셍 마을에서 도보로 3시간 거리이고, 길이 좋은 데다 산장 주변에 아름다운 호수들이 있어 인기 있을 수밖에 없는 산장이다.
새벽 분위기도 달랐다. 여느 산장의 경우 새벽 5시면 투숙객들 모두 이미 산행에 나서 텅 비기 마련인데 대부분 아직 잠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고 우리 세 사람만이 식당을 차지하고 아침 식사를 한다.
“어휴~ 뭐 이래. 산세(山勢)가 완전히 다르잖아!”
샹리옹 산장지기 말마따나 초입부는 작은 댐을 넘고 퇴석지대에 이어 폭이 널찍한 얼음빙하가 2시간 이상 이어지며 지루하게 한다. 그러다 마법사의 성처럼 생긴 프티몽콜론(Petit M. Collon·3555.5m)이 한동안 눈을 즐겁게 하더니 얼음빙하는 거대한 설원으로 바뀐다. 빙하 마루(Col de Chermotane·3053m)에 올라서는 사이 봉우리 하나가 솟구쳐 오른다. 당블랑쉬(Dent Blanche·4357m)다. 날카로운 창끝처럼 치솟은 에귀데라차(Agu. de la Tsa·3664m)~당드베르톨(Dents de Bertol·3547m) 암릉 너머로 고개를 치켜든 당블랑시는 마터호른 못지않게 거대한 독립봉이다. 서벽은 온갖 세월의 시련을 겪은 노인의 주름진 얼굴 모습 같으면서 하늘을 밀어올릴 듯 기운차게 암봉을 곧추 세워놓고 있다. 갈비뼈 같은 바위능선 사이사이 형성된 설계(雪溪)는 흰 수염처럼 위엄 넘친다.
아슬아슬한 설사면을 가로질러 암봉에 올라앉은 비네츠(Vignettes·3160m)는 고성의 첨탑을 연상케 하는 돌집이다. 내일 묵을 베르톨산장(3111m)이 아롤라(d'Arolla) 골짜기 건너로 보인다. 2.2km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계곡 구간은 거대한 얼음 절벽을 이루어 프티몽콜론과 몽콜론 사이 몽콜론빙하(Gl. du M. Collon)를 거슬러 오르다 콜디에브크(Col du Eveque·3386m)를 넘어선 다음 상(上) 아롤라 빙하(Haut Glacier d'Arolla)를 따라 내려서고 이어 베르톨 평원(Plateau de Bertol)을 거쳐야 베르톨 산장에 다가설 수 있다.
독수리둥지 같은 비네트산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사이 스위스 클라이머들이 들어선다. 내일 넘어설 콜디에브크 부근의 암봉을 등반하고 온 이들이다. 오늘 새벽 산장을 출발했다가 돌아왔다는데도 모두 힘이 넘친다. 가볍게 점심 먹고 하산하는 이들을 보면서 등반 대상지의 풍요로움에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70대 노부부 트레커들
낮잠 잔 다음 일어나 보니 김창호가 산장 뒤편 암봉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주변 산봉과 맞춰 보고 있다. 몽블랑을 오른 다음 이렇게 나흘 동안 눈밭을 걸었으니 더 이상 욕심을 낼 게 없을 법도 한데 새로운 봉이 나타나면 오르고 싶고, 새로운 빙하가 펼쳐지면 따르고 싶은 것은 또 무슨 욕심인가. 암봉에 새카맣게 내려앉은 까마귀들이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먼 산, 먼 봉을 응시하고 있다. 새로운 봉에 둥지를 틀고 싶은 것인가.
오전 6시, 비네트 산장을 나선다. 햇살에 눈이 주저앉기 전에 패스에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서두른다. 해가 떠오르면서 밤의 적막은 벗겨지고 산봉이 서서히 솟구친다. 엊저녁 뭉게구름에 모습을 감추었던 당블랑쉬가 오늘은 버섯구름을 왕관처럼 쓰고 우리를 마중 나와 있다.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호흡도 덩달아 가빠진다. 패스에 올라서는 순간 급경사 설원 밑으로 상아로라 빙하가 바라보이고, 당블랑쉬가 우뚝 솟아 있다. 등뒤로는 발소레이가 솟구쳐 있다. 이제 새로운 만남을 위해 발소레이와도 헤어져야 할 때다. 눈빙하를 내려서자 돌멩이 뒤섞인 얼음빙하가 나타난다. 중간중간 빙하의 변화를 측정하는 계기가 설치돼 있다. 빙하 위의 대기 온도와 습도를 재는 측정기다.
2500m대 골짜기 바닥까지 내려선 다음 베르톨 평원으로 올라서다 적당한 곳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라면 두 봉과 알파미 한 봉. 닷새 동안 먹은 점심 메뉴의 전부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점심때면 즐거웠다. 오늘은 젓가락이 잘 가지 않는다. 석상명은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갔으면 좋겠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슬슬 지겨워질 때가 되었나 보다.
정오경 베르톨 평원에 올라선다. 푸른 초원에는 돌집도 한 채 지어져 있다. 아롤라 계곡 건너편으로 거대한 얼음 절벽과 그 오른쪽 암봉 위의 비네트 산장이 바라보인다. 얼음 절벽은 표고차 600m에 이르는 거대한 세락이다. 외국 트레커들이 아롤라 마을을 향해 내려서는 게 보인다. 가이드 2명을 대동한 70대 노부부 일행이다. 고령에도 빙하 트레킹을 나서는 열정이 부럽게 느껴진다. 트레커들도 간간이 보인다. 교통이 편리한 아롤라 마을까지 2시간 거리이기에 찾는 이들이 많은 듯싶다.
돌집에서 베르톨 산장은 빤히 바라보이지만 만만치 않은 고도다. 장딴지가 뻐근할 정도로 급경사 오르막이다. 그래도 중간중간 맑고 차가운 계류가 흘러내려 갈증을 없애주고 숨을 고를 자리를 마련해준다. 1시간쯤 오르자 부드러운 흙길 대신 거친 너덜길이 나타난다. 밟은 돌이 흔들릴 때마다 발목이 욱신거린다. 체력이 바닥나나 보다. 두툼하게 챙겨두었던 뱃살도 야들야들해졌다.
해를 향해 뛰어오르다
오후 2시, 정말 날을 받아왔나 보다. 파란 하늘 아래 반짝이는 설원 뒤로 당블랑쉬가 커다란 몸집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테트블랑쉬(Tete Blanche·3710m) 설봉 뒤로 마터호른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내일 테트블랑쉬 북쪽 설릉을 넘어선 다음 스톡지글레처(Stockjigletscher) 빙하를 내려서다 스톡지 능선을 넘고 즈무트(Zmutt)를 거쳐 체르마트(Zermatt)로 내려서면 6일간의 오트루트 트레킹을 마치게 된다. 테트블랑쉬 이후 내리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10시간은 족히 걸릴 긴 산행이 될 것이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보일 만큼 솟구친 침봉 위에 올라앉은 베르톨산장은 인공위성 발사대 같은 형태다. 원래 목조건물이었으나 지금은 4층 건물에 나선형 계단으로 각 층을 연결시켜 놓았다. 침실은 여태껏 지냈던 산장과 너무도 다르다. 매트리스 커버까지 제공(물론 5스위스프랑을 더 받는다)하고, 창밖 조망은 일품이다. 트레킹 시즌(7~8월)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사용이 어렵다는 것은 바로 이런 면 때문인 듯하다.
새벽 4시30분, 엊저녁 호의를 베풀어준 트레커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짐을 챙겨 산장을 내려선다. 매일매일 새벽별 보기 운동이라도 하는 것 같다. 테트블랑쉬 북릉 설사면에 접어드는 순간 붉은 햇살이 하얀 설릉을 박차고 올라온다. 호흡이 가빠진다. 그래, 바로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엿새 동안 동쪽을 향해 걸어온 것이 아닌가.
설릉을, 아니 해를 향해 뛰어올랐다. 갑자기 시공이 멈췄다. 마터호른이 해를 등진 채 솟구치고, 그 왼쪽에 몬테로자가 벌건 기운과 함께 떠오른다. 온 산이 붉게 물들었다. 급히 테트블랑쉬로 올랐다. 맞아떨어졌다. 십자가 세워진 설봉 정상에 올라서자 사방이 터졌다. 동으로 마터호른은 더욱 날카롭게 능선 날을 세운 채 알프스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마터호른은 단지 아름다움만 갖춘 봉우리가 아니었다. 위엄 넘쳤다. 서쪽으로 그랑콩벵의 고봉들뿐 아니라 그 뒤로 몽블랑 산군이 거대한 품을 펼치고 있다.
스톡지 빙하
테트블랑쉬 십자가 옆에서 기쁨의 환호를 외친 뒤 마지막 행군에 나선다. 크레바스 투성이다. 그러고 보니 2004년 대한산악연맹 오트루트 스키팀 대원 한 명이 활강도중 크레바스에 빠졌던 스톡지 빙하다. 크레바스 사이 눈밭이나 스노브리지를 밟으며 우회하려니 긴장되지 않을 수 없다. 빙하를 내려선 다음 스톡지 능선에 올라서자 산길이 능선 너머로 이어진다. 이제 아이젠도 스패츠도 필요 없다는 생각에 마음 놓는 순간 계곡 건너 당헤렌즈(Dent d'Herens·3918m) 북사면에서 큰 눈사태가 일어난다.
“와~ 저놈들 좀 봐, 눈사태에 놀라지도 않네….”
얼음 빙하와 퇴석 빙하 사이에 뻗은 스톡지 산록은 야생 짐승들에게 터전 같은 곳이다. 산양과 노루가 떼를 이루며 풀을 뜯어먹고 있다가 낯선 이방인의 출현에 뭔가 불안한지 몸을 잰다. 이제 완만한 허릿길 따라 체르마트로 내려서는 일만 남았다. 모레인 사면을 치고 언덕으로 올라선다. 푸른 숲과 즈무트 산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돌 틈으로 마멋들이 고개를 내밀다가 쏙 들어간다. 인간 모습이 반갑기도 하면서 불안한가 보다.
마터호른은 각이 달라지면서 점점 더욱 웅장해지고 더욱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늘 아침 남서릉과 서벽만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 북서릉(즈무트 능선)에 가려 있던 북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덮칠 듯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마터호른은 1865년 초등 당시 하산길에 자일이 끊어지면서 4명이 추락사한 이후 최근까지도 거의 매년 클라이머들이 사고를 당하는 악명 높은 봉이다. 그런데도 클라이머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모레인 언덕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새벽 4시30분경 빵 몇 조각 먹은 게 고작이니 배속이 화를 낼 만도 하다. 라면과 알파미마저 떨어져 먹을 것이라곤 과자 부스러기 몇 조각이 전부다. 아흔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하는 점방 앞 의자에 앉아 맥주를 잔에 부은 다음 부딪친다. 몽블랑 산행 2박 3일에 이어 5박 6일간의 오트루트 트레킹의 성공을 자축하는 순간이다.
실컷 눈밭을 밟았는데도 무언가 미진한 기분이다. 계획했던 마터호른 회른리 능선 등반을 포기한 탓일 게다. 헬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회른리 능선 상단에 떠 있다. 무슨 일일까? 잠시 후 회른리 능선상의 솔베이 무인대피소(Solvay Hut·4003m) 위쪽 암릉에서 세 사람이 구조되어 내려온다. 미봉이자 험산으로 악명 높은 마터호른을 향한 산악인들의 도전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첫 번째 가이드북에 나온 루트의 평균 해발 고도는 2500m 안팎이지만, 두 번째 가이드북의 루트는 산장 위치만 해도 대부분 해발 3000m를 넘고, 매일매일 빙하 따라 3000~3600m대 고개를 넘는 고난도(高難度) 루트였다. 크레바스 빙하를 가로질러야 하기에 위험부담도 크다. 그런데도 일행 모두 ‘진짜 오트루트 산행’에 의지를 모았다. 짐은 최소화했다. 피켈, 아이젠, 로프 30m 1롤, 등산용폴 그리고 덧옷 정도만 넣고, 점심은 하루에 라면 2봉과 알파미 1봉, 간식이 모두였다.
“맞아, 이게 바로 트레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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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 덮인 트리앙 플라토를 가로지르고 있다. 에귀디투르와 트루패스(왼쪽 눈덮인 고갯마루)가 바라보인다. |
하얀 雪原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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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석 능선에 자리한 알베르 산장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는 트레커들. 크레바스와 빙탑이 가득한 트루 빙하가 바라보인다. |
정오경 도착한 알베르트 산장(Refuge Albert·2702m)은 트레커들의 천국이다. 바게트나 샌드위치 먹으며 풍광 즐기는 이들, 위통 벗은 채 일광욕 즐기는 중년 남자와 근육질 청년 등 여유로움 자체이고, 웅장한 대자연과 잘 어우러지고 있다. 갈 길 바쁜 우리에게는 그러한 여유를 즐길 만한 겨를이 없다. 배낭에 꽂아두었던 바게트를 뜯어먹곤 곧바로 트루패스로 향한다.
돌밭 능선길 따라 20분쯤 오르자 트루빙하(Gl. du Tour)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쪽은 하얗게 반짝이는 설원(雪原)이지만 중단부 아래쪽은 잿빛으로 죽어 있다. 상단 빙하로 접어드는데 벌써 지친다. 설원 중단부 너럭바위에서 쉴 때는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하얀 설원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하늘은 너무도 파랗다. 그 하늘에 설봉(雪峰)은 설봉대로, 암봉(巖峰)은 암봉대로 찌를 듯한 기세로 날카롭게 솟구쳐 있다.
“와~, 바룬체 설원을 보는 것 같다”
패스 위에 올라선 시각은 오후 3시30분. 능선 너머에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히말라야 바룬체 빙하에 비교될 만큼 넓은 설원인 트리앙 플라토(Plateau du Trient)가 펼쳐지고, 꽃같이 피어오른 침봉(針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설원을 가로지른 발자국은 설원 끝에 튀어나온 오니봉(Pointe d'Orny·3270m) 기슭 트리앙산장(Cabane du Trient·3170m)으로 이어진다. 하얀 유선지에 흰 선을 그어놓은 듯 순백의 조화다.
패스를 내려서면 스위스 땅이다. 급경사에 눈사태 위험까지 있어 아이젠을 다시 차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트리앙 플라토 횡단은 예상과 달리 오래 걸려 트리앙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5시를 넘어섰다. 이 산장은 트레커들에게 인기를 누리는 곳이다. 능선에 작은 암봉들이 많아 클라이머들에게 등반 기점 같은 곳이기도 하다. 산장 분위기도 몽블랑 산행 때 거친 산장과 다르다. 등반을 앞둔 긴장감은 전혀 없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곁들이면서 담소를 나누는 이들의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밤이 깊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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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에서 바라본 샹페 호수. 샹페는 스위스 알프스를 대표하는 휴양지다. |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얼어붙은 오니빙하(GL. d'Orny)를 내려서다 오니산장(Cabane d'Orny·2811m)이 위치한 둔덕에 올라서자 수많은 산봉과 산릉이 겹을 이루며 꿈틀거린다. 서부 알프스 명봉들이다. 능선이 일렁이는 강도와 비례해 우리 가슴도 설렌다. 오니계곡을 가로지른 다음 이어지는 능선 사면길은 길 전체가 알프스 조망대였다. 우리가 오늘 다가설 그랑콩벵(Grand Combin) 산군 최고봉도 거대한 장벽처럼 바라보인다. 고도를 낮출수록 색깔은 흰색에서 잿빛을 거쳐 푸른빛으로 바뀌어간다. 산 아래 마을은 푸른 숲 안에 들어서 있고, 맞은편 산등성이는 대관령 일원을 바라보는 듯 넉넉하고 부드럽다.
9시경 케이블카 상부 종점인 브레야(La Breya·2198m)에 도착하자 샹페 호수와 마을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빤히 바라보이는데도 케이블카로 10분 이상 거리였다(표고차 700m). 샹페는 사진에서 보아왔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푸른 호수, 푸른 숲, 그 대자연을 배경삼아 들어선 가옥, 상점 모두 그림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 마을을 그냥 지나쳐야 한다는 게 아쉽다.
로컬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부그 생피에르에 도착한 것은 낮 12시30분. 함께 내린 스위스 중년 여성 산악인도 마침 발소레이산장이 목표다. 가이드와 함께 산행에 나선 그녀는 산꾼 냄새를 물씬 풍긴다. 그들이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는 사이 산행을 시작했지만, 길을 잘못 찾고 헤매는 사이 추월당하고 만다.
발소레이계곡 초입은 나무가 우거져 있고, 계곡 끄트머리에는 거대한 장벽이 버티고 서 있다. 작은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웅장한 풍경이다. 감탄해하는 우리 모습이 신기한지 너구리처럼 생긴 마멋들이 굴 밖에 나와 물끄러미 바라본다. 민가가 한 채 있는 코르도네(Cordonne·1834m)를 지나 턱을 하나 올려치자 초원 테라스. 더 많은 마멋들이 굴에서 고개를 내밀고 낯선 이방인을 지켜본다.
골짜기 오른쪽 지능선에 집 한 채가 앉아 있다. 프티벨런(Petit Velan·3201.5m) 북릉(北稜)상의 위태로운 바위 턱에 자리잡은 벨런산장(2642m)이다. 이 일대 산봉들을 조망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위치다. 우리가 올라야 할 발소레이산장은 벨런산장보다 400m나 더 높이 있다. 어떤 곳에 있나 궁금해진다.
폐허의 아몬트산장(Chalet d'A-mount·2197m)에서 오르막이 시작된다. 숨을 몰아쉬며 40분쯤 올랐을까, 무너져 내릴 듯 가파른 능선 위에 고성처럼 올라앉은 발소레이산장이 바라보인다. 에귀디발소레이(Ag. du Valsorey) 대장벽이 뿌리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산 너머로 몽블랑에서 그랑드조라스와 에귀베르트를 거쳐 에귀디트루(Ag. du Tour·3540m)로 이어지는 몽블랑 산군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때문이다. 이렇게 웅장한 산군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 가벼운 허릿길 대신 이 갈리는 고행길인 오트루트를 택한 것이다.
불현듯 고성에 갇힌 듯한 불안감 엄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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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마트로 내려서던 중 구름 휘날리는 마터호른을 바라보며 쉬고 있다. 클라이머들은 저 살벌한 풍광에 등반 열정이 솟구친다. |
오후 6시경 도착한 산장은 마법사의 집, 고성(古城)이었다. 1901년 신축 이후 1924년, 1926년 두 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 산장이 지어진 것이다. 발소레이에서 벨런(M. Belan·3727m)으로 이어지는 대장벽은 서서히 땅거미가 밀려들고, 그 뒤로 몽블랑 산군은 석양빛에 고향 산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산장에는 우리를 앞지른 두 사람 외에 일본 여성 산악인과 가이드, 그리고 두 명의 현지 산악인이 있을 뿐이다. 배정받은 30인용 방에 짐을 놔두고 내려서자 산장 입구에 붙여놓은 사진과 개념도가 보인다. 우리가 넘어야 할 플라토뒤쿨와르(Plateau du Couloir·3664m)~콜디소나돈(C. du Sonadon·3520m)~몽뒤두란빙하(Gl. du Mont Durand)~샹리온산장 루트였다.
산장지기는 우리 등반 계획을 듣곤 행색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갸우뚱대는 듯하더니 “괜찮다, 넘어갈 만하다”며 안심시켜 준다. 그에게 루트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자 좀이 쑤신다. 해가 넘어갈 시각이었으나 산장 뒤편으로 부지런히 올랐다. 내일 올려쳐야 할 설사면(雪斜面)과 플라토뒤쿨와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늘은 빛을 완전히 감추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구름안개가 밀려오더니 발소레이산 북사면을 뒤덮어 버렸고, 발아래 산봉들은 노을에 벌겋게 물들고 있다. 고성에 갇힌 듯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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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뒤소나돈 설릉에서 아침 해를 맞고 있다. 몽블랑 산군과 마터호른 산군을 두루두루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다. |
해발 3400m, 등 뒤가 벌겋게 달아오른다. 몽블랑에서 그랑드조라스를 거쳐 에귀디트루로 이어지는 능선은 아침 햇살에 꿈틀거린다. 에귀디발소레이에서 벨런으로 이어지는 암릉 역시 서서히 달아오른다. 흰눈을 머리에 인 벨런은 그랑콩벵 산군을 대표할 만큼 기품 넘친다.
널따란 설원이 펼쳐진다. 콜뒤플라토(Col du Plateau·3664m)다. 능선 너머 쪽은 아침 햇살에 침봉들이 솟구치고 있다. 발소레이를 오르는 이들이 간간이 돌멩이와 얼음덩이를 떨어뜨려 긴장케 한다.
“와~, 마터호른이다! 몬테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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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암봉에 올라앉은 비네트 산장. 오른쪽 높은 봉우리가 당블랑쉬이며, 그 아래 암봉에 베르톨 산장이 있다. |
“이게 뭐야, 맥 빠지게…. 도로로 끊어진 백두대간과 별 차이가 없잖아!”
계곡으로 내려서자 산림도로와 함께 승용차 한 대가 보인다. 계곡 아래쪽 모부아셍호수(Lac de Mauvoisin)는 하단부가 댐으로 막혀 있고, 기다란 호수 서쪽 길이 우리가 묵을 샹리옹산장(Cab. de Chanrion·2462m)과 계곡 위쪽 소수력(小水力)댐으로 이어져 있었다. 알프스 일원은 커다란 골 막바지마다 댐을 막아 빙하에서 녹아내린 물을 담고, 그 물을 전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다.
오후 2시경 도착한 샹리옹산장은 적막감이 감돈다. 고혹적인 몸매의 젊은 아가씨가 산장 앞마당에 누워 일광욕하는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썰렁하기 짝이 없는 산장이다. 습기 먹은 옷가지와 간식거리를 햇볕에 말리고 며칠간 땀에 찌든 몸을 닦은 다음 각자 마음에 드는 곳에서 낮잠에 빠져든다. 그 사이 한팀 한팀 산장을 찾아들더니 식당이 꽉 찰 정도로 트레커가 몰려들었다. 모부아셍 마을에서 도보로 3시간 거리이고, 길이 좋은 데다 산장 주변에 아름다운 호수들이 있어 인기 있을 수밖에 없는 산장이다.
새벽 분위기도 달랐다. 여느 산장의 경우 새벽 5시면 투숙객들 모두 이미 산행에 나서 텅 비기 마련인데 대부분 아직 잠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고 우리 세 사람만이 식당을 차지하고 아침 식사를 한다.
“어휴~ 뭐 이래. 산세(山勢)가 완전히 다르잖아!”
샹리옹 산장지기 말마따나 초입부는 작은 댐을 넘고 퇴석지대에 이어 폭이 널찍한 얼음빙하가 2시간 이상 이어지며 지루하게 한다. 그러다 마법사의 성처럼 생긴 프티몽콜론(Petit M. Collon·3555.5m)이 한동안 눈을 즐겁게 하더니 얼음빙하는 거대한 설원으로 바뀐다. 빙하 마루(Col de Chermotane·3053m)에 올라서는 사이 봉우리 하나가 솟구쳐 오른다. 당블랑쉬(Dent Blanche·4357m)다. 날카로운 창끝처럼 치솟은 에귀데라차(Agu. de la Tsa·3664m)~당드베르톨(Dents de Bertol·3547m) 암릉 너머로 고개를 치켜든 당블랑시는 마터호른 못지않게 거대한 독립봉이다. 서벽은 온갖 세월의 시련을 겪은 노인의 주름진 얼굴 모습 같으면서 하늘을 밀어올릴 듯 기운차게 암봉을 곧추 세워놓고 있다. 갈비뼈 같은 바위능선 사이사이 형성된 설계(雪溪)는 흰 수염처럼 위엄 넘친다.
아슬아슬한 설사면을 가로질러 암봉에 올라앉은 비네츠(Vignettes·3160m)는 고성의 첨탑을 연상케 하는 돌집이다. 내일 묵을 베르톨산장(3111m)이 아롤라(d'Arolla) 골짜기 건너로 보인다. 2.2km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계곡 구간은 거대한 얼음 절벽을 이루어 프티몽콜론과 몽콜론 사이 몽콜론빙하(Gl. du M. Collon)를 거슬러 오르다 콜디에브크(Col du Eveque·3386m)를 넘어선 다음 상(上) 아롤라 빙하(Haut Glacier d'Arolla)를 따라 내려서고 이어 베르톨 평원(Plateau de Bertol)을 거쳐야 베르톨 산장에 다가설 수 있다.
독수리둥지 같은 비네트산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사이 스위스 클라이머들이 들어선다. 내일 넘어설 콜디에브크 부근의 암봉을 등반하고 온 이들이다. 오늘 새벽 산장을 출발했다가 돌아왔다는데도 모두 힘이 넘친다. 가볍게 점심 먹고 하산하는 이들을 보면서 등반 대상지의 풍요로움에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70대 노부부 트레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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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무트 가는 길. 부부 트레커가 마터호른을 배경으로 쉬고 있다. 해발 4478m 높이의 마터호른은 알프스를 대표하는 미봉이자 도전의 상징이다. |
오전 6시, 비네트 산장을 나선다. 햇살에 눈이 주저앉기 전에 패스에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서두른다. 해가 떠오르면서 밤의 적막은 벗겨지고 산봉이 서서히 솟구친다. 엊저녁 뭉게구름에 모습을 감추었던 당블랑쉬가 오늘은 버섯구름을 왕관처럼 쓰고 우리를 마중 나와 있다.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호흡도 덩달아 가빠진다. 패스에 올라서는 순간 급경사 설원 밑으로 상아로라 빙하가 바라보이고, 당블랑쉬가 우뚝 솟아 있다. 등뒤로는 발소레이가 솟구쳐 있다. 이제 새로운 만남을 위해 발소레이와도 헤어져야 할 때다. 눈빙하를 내려서자 돌멩이 뒤섞인 얼음빙하가 나타난다. 중간중간 빙하의 변화를 측정하는 계기가 설치돼 있다. 빙하 위의 대기 온도와 습도를 재는 측정기다.
2500m대 골짜기 바닥까지 내려선 다음 베르톨 평원으로 올라서다 적당한 곳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라면 두 봉과 알파미 한 봉. 닷새 동안 먹은 점심 메뉴의 전부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점심때면 즐거웠다. 오늘은 젓가락이 잘 가지 않는다. 석상명은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갔으면 좋겠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슬슬 지겨워질 때가 되었나 보다.
정오경 베르톨 평원에 올라선다. 푸른 초원에는 돌집도 한 채 지어져 있다. 아롤라 계곡 건너편으로 거대한 얼음 절벽과 그 오른쪽 암봉 위의 비네트 산장이 바라보인다. 얼음 절벽은 표고차 600m에 이르는 거대한 세락이다. 외국 트레커들이 아롤라 마을을 향해 내려서는 게 보인다. 가이드 2명을 대동한 70대 노부부 일행이다. 고령에도 빙하 트레킹을 나서는 열정이 부럽게 느껴진다. 트레커들도 간간이 보인다. 교통이 편리한 아롤라 마을까지 2시간 거리이기에 찾는 이들이 많은 듯싶다.
돌집에서 베르톨 산장은 빤히 바라보이지만 만만치 않은 고도다. 장딴지가 뻐근할 정도로 급경사 오르막이다. 그래도 중간중간 맑고 차가운 계류가 흘러내려 갈증을 없애주고 숨을 고를 자리를 마련해준다. 1시간쯤 오르자 부드러운 흙길 대신 거친 너덜길이 나타난다. 밟은 돌이 흔들릴 때마다 발목이 욱신거린다. 체력이 바닥나나 보다. 두툼하게 챙겨두었던 뱃살도 야들야들해졌다.
해를 향해 뛰어오르다
오후 2시, 정말 날을 받아왔나 보다. 파란 하늘 아래 반짝이는 설원 뒤로 당블랑쉬가 커다란 몸집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테트블랑쉬(Tete Blanche·3710m) 설봉 뒤로 마터호른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내일 테트블랑쉬 북쪽 설릉을 넘어선 다음 스톡지글레처(Stockjigletscher) 빙하를 내려서다 스톡지 능선을 넘고 즈무트(Zmutt)를 거쳐 체르마트(Zermatt)로 내려서면 6일간의 오트루트 트레킹을 마치게 된다. 테트블랑쉬 이후 내리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10시간은 족히 걸릴 긴 산행이 될 것이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보일 만큼 솟구친 침봉 위에 올라앉은 베르톨산장은 인공위성 발사대 같은 형태다. 원래 목조건물이었으나 지금은 4층 건물에 나선형 계단으로 각 층을 연결시켜 놓았다. 침실은 여태껏 지냈던 산장과 너무도 다르다. 매트리스 커버까지 제공(물론 5스위스프랑을 더 받는다)하고, 창밖 조망은 일품이다. 트레킹 시즌(7~8월)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사용이 어렵다는 것은 바로 이런 면 때문인 듯하다.
새벽 4시30분, 엊저녁 호의를 베풀어준 트레커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짐을 챙겨 산장을 내려선다. 매일매일 새벽별 보기 운동이라도 하는 것 같다. 테트블랑쉬 북릉 설사면에 접어드는 순간 붉은 햇살이 하얀 설릉을 박차고 올라온다. 호흡이 가빠진다. 그래, 바로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엿새 동안 동쪽을 향해 걸어온 것이 아닌가.
설릉을, 아니 해를 향해 뛰어올랐다. 갑자기 시공이 멈췄다. 마터호른이 해를 등진 채 솟구치고, 그 왼쪽에 몬테로자가 벌건 기운과 함께 떠오른다. 온 산이 붉게 물들었다. 급히 테트블랑쉬로 올랐다. 맞아떨어졌다. 십자가 세워진 설봉 정상에 올라서자 사방이 터졌다. 동으로 마터호른은 더욱 날카롭게 능선 날을 세운 채 알프스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마터호른은 단지 아름다움만 갖춘 봉우리가 아니었다. 위엄 넘쳤다. 서쪽으로 그랑콩벵의 고봉들뿐 아니라 그 뒤로 몽블랑 산군이 거대한 품을 펼치고 있다.
스톡지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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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트블랑쉬(3710m) 정상을 향해 오르는 일행. 등 뒤로 당뒤블랑쉬(왼쪽 봉)를 비롯해 수많은 4000m대 고봉들이 솟아 있다. |
“와~ 저놈들 좀 봐, 눈사태에 놀라지도 않네….”
얼음 빙하와 퇴석 빙하 사이에 뻗은 스톡지 산록은 야생 짐승들에게 터전 같은 곳이다. 산양과 노루가 떼를 이루며 풀을 뜯어먹고 있다가 낯선 이방인의 출현에 뭔가 불안한지 몸을 잰다. 이제 완만한 허릿길 따라 체르마트로 내려서는 일만 남았다. 모레인 사면을 치고 언덕으로 올라선다. 푸른 숲과 즈무트 산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돌 틈으로 마멋들이 고개를 내밀다가 쏙 들어간다. 인간 모습이 반갑기도 하면서 불안한가 보다.
마터호른은 각이 달라지면서 점점 더욱 웅장해지고 더욱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늘 아침 남서릉과 서벽만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 북서릉(즈무트 능선)에 가려 있던 북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덮칠 듯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마터호른은 1865년 초등 당시 하산길에 자일이 끊어지면서 4명이 추락사한 이후 최근까지도 거의 매년 클라이머들이 사고를 당하는 악명 높은 봉이다. 그런데도 클라이머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모레인 언덕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새벽 4시30분경 빵 몇 조각 먹은 게 고작이니 배속이 화를 낼 만도 하다. 라면과 알파미마저 떨어져 먹을 것이라곤 과자 부스러기 몇 조각이 전부다. 아흔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하는 점방 앞 의자에 앉아 맥주를 잔에 부은 다음 부딪친다. 몽블랑 산행 2박 3일에 이어 5박 6일간의 오트루트 트레킹의 성공을 자축하는 순간이다.
실컷 눈밭을 밟았는데도 무언가 미진한 기분이다. 계획했던 마터호른 회른리 능선 등반을 포기한 탓일 게다. 헬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회른리 능선 상단에 떠 있다. 무슨 일일까? 잠시 후 회른리 능선상의 솔베이 무인대피소(Solvay Hut·4003m) 위쪽 암릉에서 세 사람이 구조되어 내려온다. 미봉이자 험산으로 악명 높은 마터호른을 향한 산악인들의 도전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