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색지대

세계의 외인부대

“일당백 壯士 앞에 어찌 敵 있으랴!”

글 : 신승민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길고 굽은 단검 한 자루, 1만5000명 英國軍 ‘불귀의 객’으로 만들다(네팔 구르카 용병)
⊙ 500년 교황 지킨 ‘瀕死의 사자들’… 미늘창·철갑옷에 忠義 새긴 강골(바티칸 스위스 용병)
⊙ ‘보병·기갑·공병·공수’ 부대로 佛 육군 떠받친 138개국 9000명 傭兵(프랑스 외인부대)
⊙ 패션스타 혹은 亂臣賊子… ‘무뢰한 군대’ 다잡았던 사령관의 비법은?(독일 란츠크네히트)
⊙ 인종차별 백인 정권의 走狗, 흑인 독재자의 手足… 짐바브웨의 눈물(로디지아 국제 용병군)
세계의 외인부대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네팔 구르카 용병, 프랑스 외인부대, 독일 란츠크네히트, 바티칸 스위스 용병. 사진=조선DB
  대륙의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중국의 병법서에는 승전의 비법이 어떻게 적혀 있을까?
 
  《육도삼략》에 따르면 국가는 용사를 중용해야 승전할 수 있다. 용사란 “다리 힘이 강해서 높은 데로 뛰어오를 수 있고,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도 먼 거리를 단숨에 뛰어갈 수 있으며, 발이 날래서 재빨리 달리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다. 《손자병법》에 따르면 장수는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 유리한 기세를 만들어야 승전할 수 있다. “그 기세를 타게 되면 가파른 계곡에서 나무나 바위를 굴리듯, 병사들을 거침없이 휘몰아 적을 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용병은 고도의 전략이다. 강인한 용사와 유능한 인재가 꼭 자국의 부대에서만 나오라는 법은 없다. 국경 너머에도 천하의 재사들과 비범한 장수들이 있기 마련이다. 승전은 때로 외인부대의 공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는 중무장한 보병 위주였던 군대를 보강하고자 날쌘 외국 궁병(弓兵)들을 외인부대로 편성했다. 촉왕(蜀王) 유비도 한때 조조·도겸·공손찬 같은 군웅들의 진영에서 객장(客將) 신분으로 참전했다. 17세기 초반 스코틀랜드에서는 전체 남성의 15%인 약 4만명이 유럽 각국에서 용병으로 참전했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 따르면 왜란 당시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에도 서양 용병이 있었다고 한다. 백인·흑인도 명나라 돈을 받고 참전해 왜군과 싸웠다는 것이다.
 
  네팔 구르카 용병이 지난 6월 12일 미북정상회담 경호를 맡기도 했다. 싱가포르 경찰에 소속된 1800명의 구르카 용병은 같은 달 1일부터 3일까지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에서도 경호를 맡았다. 이들은 회담장 주변과 도로, 호텔 등의 경비를 담당했다.
 
  귀공자 장교들도 한발 물러서게 만드는 세계의 강골들이 여기 있다. 그들은 당장의 금전을 위해, 극기를 통한 자아실현을 위해, 때론 공명심과 호승심에 도취해 포연과 피비린내가 자욱한 이국(異國)의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적진을 요동치게 만들고, 적장과 적병을 아연실색케 했던 ‘지상 최강’ 외인부대들을 만나 보자.
 
 
  1. ‘白兵戰의 강자’
  네팔 구르카 용병
 
구르카 전사들은 19세기 신식 중화기로 무장한 영국군을 단검 하나로 신출귀몰하게 무찔렀다. 영국 육군 1만5000명이 불귀의 객이 됐다. 사진=조선DB
  “칼을 한 번 뽑으면 피를 볼 때까지 칼집에 절대 넣지 않는다.”
 
  영국은 1816년 네팔을 침공하던 중 구르카 마을 전사들에게 습격당한다. 구르카 전사들은 신식 중화기로 무장한 영국군을 한 자루 단검으로 신출귀몰하게 무찔렀다. 영국 육군 1만5000명이 불귀의 객이 됐다. 영국 정부는 비록 적군이지만 그들의 위용에 감탄했다. 네팔과 평화협정을 맺고 동인도 회사를 통해 구르카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구르카 용병은 영국군 소속으로 1·2차 세계대전과 걸프전, 6·25 한국전쟁 등에 참전한다.
 
  구르카 용병의 신조는 사생결단이다. ‘눈(雪)사나이’라는 별명처럼 강인한 체력을 가졌다. 히말라야의 험산준령을 오르내리며 심폐기능을 단련시켰다. 끝이 구부러진 ‘쿠크리’ 단검으로 적장의 목을 단번에 베어내는 무용담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등산·도축용으로 고안된 쿠크리 단검은 칼날 쪽으로 갈수록 무게가 더 많이 나간다. 들이는 힘에 비해 살상력이 강하다. 구르카 용병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진지를 수시로 야습, 쿠크리 단검으로 장병들의 귀와 목을 베어 오기도 했다. 영국군 장교가 이들의 전공(戰功)을 의심하자 한 바구니 분량의 독일군 귀를 보여줬다고 한다.
 
  구르카 용병은 산악전과 밀림전에 강했다. 고산지대에서 자랐고 훈련도 혹독했기 때문이다. 구르카 용병이 되려면 돌무더기 25kg을 짊어진 채, 5km 산길을 1시간 안에 주파해야 한다. 영어·수학 같은 필기시험까지 통과해야 한다. 2008년 경쟁률은 500대1 정도였다. 네팔에 구르카 용병 ‘입대학원’도 생겼다. 드높은 명예는 물론, 네팔 직장인 평균 임금의 50배에 달하는 연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탈레반도 혼비백산
 
  구르카 용병의 명성을 떠받치는 것은 ‘불굴의 투지’다. 그들에게는 한 번 칼을 뽑으면 자신의 손가락이라도 베어 피를 봐야만 칼집에 넣는다는 무사의 소신이 남아 있다. 영국군과 싸울 때부터 빗발치는 총알에도 아랑곳없이 단검을 휘두르며 진격했다. 포격에 머리가 날아간 상황에서도 신체 감각은 남아 영국군에게 칼을 꽂았다는 믿기 힘든 전설도 내려온다. 포클랜드 전쟁 때 아르헨티나 수비대가 ‘구르카 용병이 진격해 온다’는 말만 듣고 투항했다는 소문도 있다. 1차 세계대전 때는 20만명이 넘는 구르카 용병이 참전해 위명(威名)을 떨쳤다. 4만명이 전사했을 만큼 피해도 컸지만, 이들은 모두 최전선에서 돌격해 연합군의 사기를 일으켰다. 아프간 전쟁 당시 30대 초반의 한 구르카군 장교는 폭탄을 설치하던 탈레반 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탈레반들은 휴대용 로켓 발사기와 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구르카 장교는 지붕으로 올라가 응전했지만 적의 막강한 무기에 고전했다. 그는 근처에 널브러진 카메라 삼각대를 무기 삼아 주워 들었다. 지붕에서 뛰어내려 적들과 정면대결을 펼쳤다. 승자는 누구였을까. 탈레반의 무자비한 사격에 끝내 전사했을지 모르지만, 죽은 구르카 장교는 원귀(冤鬼)가 돼서라도 적군의 막사를 악몽처럼 쫓아왔을 것이다.
 
  구르카 용병은 현재 3500명 수준으로 인도·이라크·브루나이·싱가포르·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특수임무를 맡고 있다. 미북회담 경호를 맡은 싱가포르 경찰 소속 구르카 용병들은 쿠크리 단검과 함께 벨기에제 공격용 소총 ‘FN스카’를 소지한다. 18~19세 때 선발돼 싱가포르에서 45세까지 근무한 후 본국 네팔로 송환된다. 싱가포르 현지 여성과는 결혼할 수 없다. 오후 10시30분 취침, 12시 통행금지 같은 규율을 지키며 생활한다.
 
 
  2. ‘聖殿의 수호자’
  바티칸 스위스 용병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교황청에 난입했을 때, 타국의 용병들은 모두 도주했으나 스위스 용병만은 대성당을 둘러싸고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교황을 호위했다. 사진=조선DB
  교황 율리우스 2세는 1505년 베드로 성당을 개축(改築)하면서 스위스에 용병 파견을 요청했다. 20여 년 후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교황청에 난입했을 때, 타국의 용병들은 모두 도주했으나 스위스 용병만은 제자리를 지켰다. 대성당을 둘러싸고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교황을 호위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공격할 때도 바티칸 성전만큼은 결사항전으로 지켜냈다. 수백 년 동안 교황청 수비를 맡고 있는 스위스 근위대의 역사다.
 
  지금도 이탈리아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에 가면 교황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대를 볼 수 있다. 스위스 용병은 충성스러운 외인부대로 유명하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때는 대포와 화승총으로 무장한 폭도들에 맞서 루이 16세를 호위하다 786명이 전사했다. 얼마 후 나폴레옹 대군이 로마를 침략했을 때도 교황 피우스 6세를 끝까지 지키다 전멸했다. 이를 추모하기 위해 스위스 루체른에 ‘빈사의 사자상’이 세워질 정도였다. 이들은 중세 스위스의 각 주정청(州政廳)에서 조직한 이후 현재까지 프랑스 외인부대와 함께 용병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스위스는 13세기부터 용병업으로 국가 경제를 이끌어 왔다. 내륙의 나라인 데다 그마저도 산지가 대부분이라 무역업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중세 스위스는 중앙집권형 국군 제도가 아닌 일종의 분봉(分封)처럼 각 주마다 군대를 따로 보유하고 있었다. 조정과 왕실의 치하에서 벗어나, 각 영주들이 군사를 자유롭게 부리고 빌려줄 수 있었다. 이웃나라 독일과 프랑스는 전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용병의 도움이 절실했다.
 
  보통 용병이라 하면, 돈에 눈이 멀어 난폭하고 비열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정부군에 소속돼 있으면서도 전황을 저울질하다 반군과 결탁한 용병도 있었다. 용병대장이 직접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고용한 나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스위스 용병은 보수만큼 신뢰와 계약을 중시했다. 국격과 명예를 귀히 여긴 이들은 구차한 항복보다는 장렬한 죽음을 택했다.
 
 
  降將도 척결
 
  스위스 용병은 철갑옷과 미늘창으로 무장한 중보병(重步兵)으로 기억된다. 장총 같은 화기가 개발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중무장한 그들을 대적할 군대는 많지 않았다. 장병기(長兵器)와 육중한 방패를 들고 일렬종대로 발맞춰 진격해 오는 모습은 적군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다. 스위스 용병은 항장(降將)을 포로로 생포하기보다는 섬멸했다. 초토화전을 추구해 잔인하게 보였다. 이들이 사익이나 목숨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의 원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스위스 용병의 탄생 배경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끝없는 침략이었다. 타국에 의한 핍박을 다반사로 겪던 스위스 청년들은 강인한 장정으로 거듭났다. 구르카 용병처럼 산악지대에서 극한의 훈련을 이겨 내며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전투에 익숙했기 때문에 일생을 전장에서 버틸 수 있었다.
 
  스위스는 1848년 헌법에 의거 현재 용병제도를 금지하고 있다. 교황 근위대 신분만 인정한다. 스위스 국적에 전과가 없는 미혼 남성만 지원할 수 있다. 나이는 19~30세 사이, 키는 최소 174cm 이상이어야 한다. 종교는 당연히 가톨릭을 믿어야 한다. 타조 깃털을 꽂은 르네상스풍의 알록달록한 제복만 입는다고 해서 현대식 군사 장비를 다루지 않는 건 아니다. 근위병 1인당 도창검극(刀槍劍戟)뿐 아니라, 스위스제 소총부터 권총·기관총도 갖고 있다. 확전 시 발포할 대전차 미사일, 보병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도 보유하고 있다. 현재 근위대의 보수는 비교적 박봉이지만 지원자들은 매년 밀물처럼 쏟아진다. 손목시계 초침이 자주 틀리던 시절에는 근위대 교대식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세월도 그들의 강직함을 녹슬게 할 순 없었다.
 
 
  3. ‘第1線 특공대’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외인부대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투력이 향상됐다. 베트남 공산혁명 세력과 아프리카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반군을 진압하는 등 프랑스의 대표적인 전략 기동군(機動軍)으로 활약했다. 사진=조선DB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 1세는 1831년 식민지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5개 대대 규모의 용병대를 창설, 정규군으로 편입시킨다. 용병대는 알제리에 본부를 두고 프랑스 식민지가 된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반도 전역을 통제했다. 국왕은 망명자·부랑자를 용병으로 모집해 전쟁터로 내보냈다. 프랑스인 범죄자·실업자들도 입대를 지원했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각종 분쟁지역에서 활동했다. 최근까지 약 3만5000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용병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특수부대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정신은 ‘우리의 고향’ ‘명예와 충성’이다. 프랑스를 향한 맹목적 충성보다 부대의 단합과 승전을 목표로 한다. 명예를 중시해 ‘용기를 버리기보다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신조로 전투에 임한다. 현재 보병·기갑·공병·공수 병과로 전 세계 138개국 출신 8500~900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인도 수십여 명에 달한다고 알려졌다. IMF 외환위기 때 경제난에 시달린 한국 청년들이 보수가 좋은 프랑스 외인부대에 많이 입대했다고 한다.
 
  프랑스 육군 소속의 외인부대는 창설 이래 프랑스가 참전한 거의 모든 전쟁에 투입됐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투력이 향상됐다. 베트남 공산혁명 세력과 아프리카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반군을 진압하는 등 프랑스의 대표적인 전략 기동군(機動軍)으로 활약했다. 1978년 자이르 반란 때 진가가 드러났다. 벨기에 식민지였던 자이르에서는 3000여명 규모의 무장 반군들이 탄광촌 ‘콜웨지’ 마을을 습격했다. 민간인을 살상하고 유럽인 기술자와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벨기에는 국가 형편이 열악해 독자적인 군사 작전을 할 수 없었다. 자국민이 억류된 관계로 프랑스가 대신 반란 진압에 나섰다. 프랑스 정부의 작전 지시 25시간 만에 약 650명 규모의 제2외인공수연대가 콜웨지에 파견됐다. 반란은 3일 만에 종식됐다. 수적 열세에도 사살 247명, 포로 163명 등 전공을 거뒀다. 외인부대는 이후 1991년 걸프전, 1993년 발칸 분쟁, 1994년 예맨 사태, 2011년 이라크 전쟁, 2014년 말리 사태 등 최근까지 프랑스가 개입한 크고 작은 전쟁에서 선봉대로 활약했다.
 
 
  지원자 90% 탈락
 
  현대 프랑스 외인부대의 모병 문구는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한 번 바라보자’이다. 혈기왕성한 청년들의 용기와 모험심을 자극할 만하다. 합격자는 17~40세 사이의 남성으로 인종·나이·국적·신분에 상관없이 동일한 대원으로 취급된다. 정규군보다 더 강한 훈련을 받는다. 지원자 90%가 탈락할 정도다. 신병들은 첫 한 달 동안 프랑스 외곽에 위치한 ‘팜’이라 불리는 훈련소에서 따로 훈련을 받는다. 장교들은 훈련소에서 신병들을 정신적·육체적으로 단련시킨다. 이때가 가장 버티기 힘들다고 한다. 도망가거나 포기하는 병사들도 간혹 있다.
 
  강도 높은 체력 테스트, 4개월간의 기초 군사훈련, 프랑스어 교육 등을 통과해야 한다. 외인부대의 상징인 ‘캐피블랑’(프랑스 군모)과 첨단 무기를 쓸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다. 기본 복무연한은 5년, 신병 기본급은 월 200만원 수준이다. 여기에 각종 전투·파병 수당이 더해진다. 5년 복무를 마치면 프랑스 시민권과 연금 수령 자격, 프랑스 공공요금 70% 할인 혜택 등을 받는다.
 
  배우 이진선은 작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0대 후반 정신적 방황을 이겨 내고자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내 스스로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외부의 힘을 빌려 나를 변화시키자. 프랑스 외인부대로 가자”고 마음먹었다며 “죽을 수도 있는 곳이지만 전 정말 절박했었다”고 말했다. 이진선은 5년 동안 복무하면서 군인정신과 함께 스키·승마·수영·운전·불어를 배웠다. 프랑스 군가를 오래 부른 덕분에 ‘목소리 달인’이 됐다. 현재 ‘보이스 코치’라는 직업도 갖게 됐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역사는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서양 격언 ‘No Pain, No Gain’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4. ‘진격 長槍부대’
  독일 란츠크네히트
 
란츠크네히트는 장창을 휘둘러 아래서 위로 올려 찍는 살상 기술과 각종 기만 전술로 적들을 떨게 만들었다. 사진=조선DB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는 15~16세기 후반까지 독일과 유럽 각지에서 활동했던 용병이다. 당시 유명했던 ‘스위스 용병’을 벤치마킹한 보병대(步兵隊)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가 1487년 스위스 용병에 대항하기 위해 창설한 것이 시작이다. 그 후 독일 귀족과 영주들도 자체적으로 외인 사병들을 모집해 란츠크네히트로 조련했다.
 
  주무기는 ‘파이크’로 길이 5~6m에 달하는 장창(長槍)이다. 갑옷은 슬래시복(속옷이 보이게 길게 터놓은 의복)이다. 화려한 장식으로 당시 유럽 남성복 트렌드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자유와 개성을 중시한 나머지, 남근(男根) 가죽 가리개부터 거대한 깃털장식 모자까지 갖춰 입고 다녔다. 이 같은 복장은 실전에서 이동하기가 불편할 정도였으나 란츠크네히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란츠크네히트의 어원은 ‘자국(Lands)에서 모병돼 황제에게 봉사(Knecht)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다. 창설 초기 이들의 용맹은 남달랐으나 급조된 외인부대라 절도 등 정의감이 부족했다. 같은 부대 내에서도 서로 이해관계로 부딪치면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돈에 눈이 멀어 자신들을 처음 창설시켜 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반대편에 고용돼 반역을 주도하기도 했다. 정신 상태와 출신 이력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도 없었다. 강한 체력과 괴력의 소유자들만 불러들여 난폭한 군사조직을 만든 셈이었다. 덕분에 개전(開戰)만 되면, 장창을 아래서 위로 올려 찍는 살상 기술과 각종 기만 전술로 적들을 떨게 만들었다. 란츠크네히트의 악명은 1525년 파비아 전투(프랑스 대 신성로마제국), 17세기 30년전쟁(신교 대 구교 간 종교전쟁)에서 널리 퍼졌다.
 
 
  “스위스 용병 따위 거뜬히 제압”
 
  란츠크네히트의 이익 중심 구조는 역설적으로 현재의 노동조합과 유사한 ‘집단 항명 제도’를 탄생시켰다. 병사들이 수시로 집회를 열어 급료·수당 미지급, 전리품 공동 분배 문제 등에 대해 반발했다. 국가의 중재가 없으면 폭동을 일으켰다. 란츠크네히트는 자치 기구를 설립, 지속적인 궐기를 통해 군 당국에서 ‘공동 결정권’을 쟁취했다.
 
  란츠크네히트의 규모는 4000~1만명 수준이었다. 일반 사졸(士卒)들로부터 본부 소속의 부관(副官), 각 부대를 이끄는 일선 지휘관, 역사(力士)들을 부리는 담당관과 사법관도 존재했다. 실전 사령관인 용병대장은 입신양명을 노리는 귀족 출신이거나 몰락한 기사단의 후예인 경우가 많았다. 대장은 사나운 병사들을 거느리기 위해 작지만 특별한 자기 헌신을 한다. 행군 중에는 말에 오르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말에서 내려 보병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다. 선두에서 먼저 달려 나가는 대장을 뒤따라 보병대가 돌격한다. 일반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면 지체 높은 장수들은 군영을 지킨다. 전진기지에서 전황을 살피며 작전 지시만 내린다. 란츠크네히트는 달랐다. 독특한 구조의 용병부대답게, 총대장도 일개 용병들과 함께 몸을 바쳐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다. 군대를 이끄는 장수로서 자신의 출신 성분을 앞세우지 않았다. 군사들과 동고동락하며 목숨을 내놓는 모습은 휘하 용병들의 전의를 들끓게 했다.
 
  출발은 스위스 용병의 아류였으나 기세와 용맹은 갈수록 드높아졌다. 서양의 한 사료에 따르면, 전성기 때의 란츠크네히트는 모병 공고에서 ‘누구나 우리 부대에 들어오면 스위스 병사 2명은 완벽히 제압하게 된다’고 선전했다. 이는 당시 란츠크네히트가 스위스 용병들과 맞먹을 정도로 강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5. ‘잔혹한 討伐隊’
  로디지아 국제 용병군
 
로디지아 용병대에 지원한 이들은 그린베레(미 육군 특수부대), 프랑스 외인부대, 와일드 기스(아일랜드 용병) 등 노련한 군인들이었다. 사진=조선DB
  1965년 11월 11일, 영국령 식민지 남로디지아가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국명은 ‘로디지아 공화국(The Republic of Rhodesia)’. 1980년 4월 ‘짐바브웨’로 완전 독립되기 전까지 사용됐다. 당시 총리 이언 스미스를 필두로 한 극우파(極右派) 영국계 백인 정권은 로디지아 국회의 모든 의석을 장악했다. 이들은 ‘흑인들에 의한 다수 통치’를 용납하지 않겠다며 독립 국가를 빙자, 아프리카 땅에 백인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 영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로디지아의 국가원수로 선포하는 등 황당한 일까지 벌였다. 영국은 명분상 민주주의 없는 로디지아의 일방적 독립을 인정할 수 없었다. 독립 선언을 반란 행위로 간주해 외교적·경제적 제재를 가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제재에 동참했다.
 
  정작 군사적 진압은 없었다. 모잠비크를 식민지로 둔 포르투갈이 로디지아 지지에 나섰다. 민주주의·민족주의보다 후진국 식민지를 발 아래 둔 ‘열강(列强)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더 강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국제사회의 정의감이 아무리 미약했을지언정, 세계가 인종 차별을 국시(國是)로 내세운 로디지아를 두고만 볼 리 없었다. 아프리카 흑인사회의 반발도 심했다. 로디지아 백인 정권은 난국을 타개하려면 군사력이 필요함을 느꼈지만 역부족이었다. 징집령을 내려도 인구가 모자랐다. 총 인구의 96%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3~4%에 불과한 백인들이 정규군으로 맞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엔의 경제 제재로 무기 수입도 난항을 겪는 상황이었다.
 
  흑인 반란군은 중국·소련 등 공산진영의 비호를 받으며 전차부대까지 편성할 정도로 군사력이 막강했다. 1961년 소련 지원으로 결성된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동맹(ZAPU)’, 1963년 중국 지원으로 창설된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동맹(ZANU)’이 그들이었다. 백인 정권은 남아공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국제 용병대를 창설한다. 로디지아 용병대는 1979년 분쟁이 종식되기 전까지 흑인세력을 탄압하는 ‘토벌대(討伐隊)’ 역할을 한다.
 
 
  외인부대 총집합
 
  당시 로디지아 용병대에 지원한 이들은 그린베레(미 육군 특수부대), 프랑스 외인부대, 와일드 기스(아일랜드 용병) 등 노련한 부대였다. 전성기 때 총 병력은 2만5000명 규모였다. 병과마다 권총·소총·기관총·산탄총·대전차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수십만 적병에 비하면 수적 열세였지만 경쟁력이 있었다. 정규군의 인력 손실 비율이 8분의 1인 것에 비해, 용병대는 50분의 1이었다. 용병대가 마오이즘(毛澤東主義)을 신봉한 중국계 반군 수천 명을 물리칠 때 부상병은 4명에 불과했다. 보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부대의 사기는 충천했다. 극우파 백인 정권이 고용한 용병대였음에도, 부대 내에선 백인과 흑인의 관계가 순탄해 전우애도 깊었다고 한다. 로디지아 백인 정권이 국제사회의 압력, 공산주의 반군들과 맞서 십수 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저력이었다. 로디지아 용병대가 연구·개발한 게릴라 전술은 아직도 아프리카 군대에서 참고 대상이 되고 있다. 가장 많은 반군을 진압한 부대의 사격술(射擊術)은 현대 실전에서도 사용된다고 한다.
 
  최강의 로디지아 용병대를 앞세운 백인 정권도 끝내 흑인세력의 저항에 밀려 1980년 종식된다. 이후 게릴라전을 이끈 반군의 수장 로버트 무가베가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 40년 가까이 장기 집권한다. 국명을 짐바브웨로 다시 바꾸며 흑인 민족들에게 새 세상을 열어 줄 것만 같았던 독립운동가는 ‘공산주의 독재자’로 본색을 드러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존경한 무가베는 1981년 북한이 보낸 군대를 용병으로 삼아 대통령 친위부대를 구축한다. 무가베의 북한 용병은 백인을 비롯한 민간인 탄압에 앞장서는 등 독재정권의 사냥개 노릇을 한다. ‘복수혈전’으로 점철된 용병의 역사는 비극의 서사시였다.⊙
조회 : 19170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808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