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암장, 조선시대 빈민의료기관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던 곳 … 한옥은 대목장 배희한이 궁궐 침전 양식으로 지어
⊙ 마포장(麻浦莊), 안평대군의 담담정, 일제시대 정무총감의 여름별장 자리 …, 지금은 양식당 들어서
⊙ 마포장(麻浦莊), 안평대군의 담담정, 일제시대 정무총감의 여름별장 자리 …, 지금은 양식당 들어서
-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는 이승만 박사의 거처 돈암장. 원래 뒤에 보이는 예닮교회까지가 돈암장 경내였다. 사진=배진영
1945년 10월 16일 오후 맥아더 원수의 전용기 바탄이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이 비행기에는 70세의 노(老) 망명객이 타고 있었다. 이승만(李承晩) 박사(이하 이승만)였다. 1911년 3월 26일 105인 사건의 와중에 망명길에 오른 지 34년 만이었다.
이승만은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식당과 회의실이 딸린 큰 스위트룸이었다. 미(美) 군정의 연락을 받은 윤치영, 허정, 임영신 등 오랜 측근들이 달려왔다. 이어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장덕수, 김도연, 김준연 등 한국민주당계의 지도자들이 이승만을 예방했다. 다음 날 기자회견장에서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33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운 고국에 돌아오니 감개무량하다. 그립던 산천, 정든 부모형제, 나의 가슴은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
전국은 순식간에 ‘이승만 신드롬’에 휩싸였다. 신문들은 연일 그를 ‘건국의 아버지’ ‘우리의 최고지도자’ ‘독립운동의 선구자’ ‘혁명전선의 거인’이라고 호칭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삶에 대해 보도했다.
매일같이 이승만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조선호텔로 몰려들었다. 10월 23일에는 조선호텔에서 한국민주당, 국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 등 50여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정당통합운동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결성됐다.
다음 날 이승만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장진섭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이 거처를 옮긴 것은 미 군정 요인들도 다수 투숙하고 있는 조선호텔에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수 없어서였다. 하루에도 300~600명이 ‘이승만 박사’를 뵙겠다고 몰려들었고, 갓을 쓴 시골노인들은 화장실을 찾지 못해 아무 데나 방뇨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대목장 배희한이 지은 집
이승만에게 집을 내준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 장진섭은 광산업으로 치부(致富)한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김구에게 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을 내준 최창학도 일제시대에 광산업으로 부를 일군 사람이었다. 장진섭이 이승만에게 집을 빌려준 것은 같은 황해도 출신인 장덕수의 부탁 때문이었다. 돈암동 산중턱에 있는 이 집은 한옥과 양옥이 따로 있었다. 정원도 넓었다. 양옥은 이승만이, 한옥은 윤치영 등 비서들이 사용했다. 이 집에 ‘돈암장(敦岩莊)’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때부터였다.
돈암장은 조선시대에는 빈민들을 위한 의료기관인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던 곳이었다. 일제시대에는 평산(平山)목장이라는 목장이 들어서 젖소 등을 길렀다.
1938~1939년에 지은 돈암장은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깊은 건물이다. 돈암장의 한옥 건물을 지은 사람은 당대 최고의 대목장(大木匠)이었던 배희한(裵喜漢·1907~1997)이었다. 창덕궁 대조전을 지은 목수 최원식의 제자로 무형문화재 74호였던 배희한씨는 생전에 “돈암장을 지을 때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짜서 지었으며, 서까래와 내실 기둥 등은 모두 백양목을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전봉학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에 의하면 “돈암장은 가운데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 온돌방의 3면을 마루가 돌아가는 형식으로 보아, 궁궐의 침전(寢殿)을 본뜬 형태다. 조선왕조가 망한 후 궁실(宮室) 건축을 담당하던 목수가 민간으로 나간 근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라고 한다. 당초 이 건물을 지은 주인은 궁궐의 내시였다고 한다.
염량세태
이승만이 입주한 이후 돈암장은 해방정국의 중심지가 됐다. 신탁통치 반대투쟁 등이 이 돈암장에서 결정되었다. 당연히 미소(美蘇)공동위원회를 통해 신탁통치를 관철하려던 미 군정과 충돌이 잦아졌다.
아마 장진섭이 돈암장을 이승만에게 내주었을 때에는 일제하에서 치부했다는 눈총을 피하고, 장차 독립된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될 이승만에게 잘보이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과 미군정 최고책임자 하지 중장이 충돌하게 되자 장진섭은 불안해졌다. 장진섭은 이승만에게 집을 비워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진섭은 이미 1945년 10월에 “이승만이 측근들에 둘러싸여 자신을 비롯해 2000만원을 제공한 경제인들을 멀리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편지를 이승만에게 보냈다고 한다.
장진섭이 눈총을 주기 시작하자, 윤치영, 우제하(이승만 큰누이의 손자) 등이 새 집을 구하러 나섰다. 하지만 마땅한 집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장진섭은 “물건을 둘 공간이 없다”면서 이승만이 거처하는 방에 자기 물건들을 들여놓기까지 했다. 빨리 방을 비워 달라는 압박이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행태였다.
윤치영은 가회동에 있는 윤치호의 집을 주선했다. 하지만 우제하가 “윤치호의 집으로 가면 윤적(尹賊)들에게 업힌 인상을 준다”면서 반대했다. 일제 말기에 친일 행적을 보여준 윤치호의 집으로 들어가면 민심에 나쁜 영향을 줄까 우려한 것이다.
안평대군의 담담정이 있던 곳
결국 윤치영 등이 미 군정청과 교섭, 새 집을 얻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마포(지금의 용산구 청암동) 언덕배기의 집이었다. 1947년 8월 18일 이승만이 들어가면서 마포장(麻浦莊)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 집도 내력이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시대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이 지은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이었다. 문예를 사랑했던 안평대군은 이 정자를 짓고 측근들을 모아 풍광을 즐기며 시(詩)를 짓곤 했다.
동생 안평대군과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세조 5년(1459년) 9월 담담정에 나와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했다. 성종 1년(1470년) 6월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은 한강을 유람하다가 물고기를 잡은 후 이 정자에 올라 잔치를 벌였다.
일제시대에는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정무총감(총독부의 2인자. 국무총리 격)의 여름별장이 있었다.
이승만, 직접 집수리
정무총감의 여름별장이 있던 곳이라니 대단할 것 같지만, 평시의 처소로는 적당치 않은 곳이었다.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급히 수리를 해서인지, 집안 곳곳에 문제가 있었다.
이승만은 문짝이 잘 맞지 않고 공사도 날림인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내가 한 것만도 못하구먼. 저 밖에 있는 나무 궤짝 좀 끄르게.”
그 궤짝 안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부터 사용하던 대패, 톱, 끌, 망치, 칼 등 목공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이승만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난 후, 망치로 대패를 톡톡 치며 맞추었다. 문짝을 떼어 자를 대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한 다음 손잡이를 고쳤다. 비서들은 그 능숙한 솜씨에 입을 딱 벌렸다.
이어 이승만은 정원을 다듬기 시작했다. 정원수를 다듬었고, 고목은 잘라서 도끼로 팼다. 무성히 자란 정원의 풀도 직접 뽑았다. 억센 풀을 힘주어 뽑아낸 후에는 “이놈, 나한테 졌지, 졌어”라며 즐거워했다.
이승만은 처음에 마포장을 ‘평원정(平遠亭)’이라고 불렀다. ‘평원정’이라는 한시도 남겼다.
移家何事住江頭
來訪人人問不休.
須向西南窓外望
五湖烟月滿山秋.
어찌하여 집을 옮겨 강가에 산단 말가
찾아오는 사람마다 묻기를 멈추지 않네.
서남쪽을 향하여 창밖을 바라보소
강 안개 속에 달이 뜨니 온 산이 가을이로다.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조선시대에 담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마포장은 전망이 참 좋았다. 하지만 추웠다. 가을이 되면서 바람이 몹시 불었다. 외투를 입고 있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의 홍보고문이자 동지였던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 박사는 심한 기관지염으로 누워 계시고 저도 좀 그렇습니다. 집은 난방이 되지 않고 전기난로 하나에 매달려 있는데, 그나마도 전류가 약해 난로가 좀처럼 잘 데워지지 않습니다. 몸이 따뜻해질 때라고는 햇볕이 방안으로 들 때에 볕을 쬐는 것뿐입니다.〉
마포장 시절은 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 역정 속에서 가장 힘들던 시절이었다. 미 군정의 견제 속에서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이 지냈다. 지지자들도 많이 떨어져 나갔다. 암살의 위기도 겪었다. 범인들은 현직 경찰관들이었다. 5명의 범인 가운데 네 명은 다름 아닌 마포장 경비순경들이었다. 이들은 남로당에 포섭된 자들이었다.
암살음모 사건을 적발해 낸 마포경찰서장 윤우경은 이승만에게 집을 옮기라고 권했다. 권영일・전용순・신용욱 등 33명의 실업인들이 나섰다. 이들은 100만원 가까운 돈을 모아 서울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있는 김성훈의 집을 매입했다. 이승만 부부는 마포장으로 이사한 지 두 달 만인 1947년 10월 18일 이 집으로 이사했다. 이 집이 이승만의 사저(私邸)로 유명한 이화장(梨花莊)이다.
돈암장은 공사 중
이화장이 비교적 원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돈암장과 마포장은 그 후 본모습을 많이 잃었다.
돈암장의 주인 장진섭은 6·25 때 납북됐다고 한다. 이후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지번이 분할되고 김영대 대성실업 회장과 정혜수 선창실업 회장 집으로 나누어졌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정 회장은 인근 예닮교회에 땅을 헌납, 현재는 교회가 들어서 있다. 돈암장 시절 이승만이 거주했던 양옥 부분은 대부분 교회 부지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등록문화재 91호인 돈암장의 한옥 부분은 지난 6월 14일부터 해체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올해 12월 30일 공사가 끝날 예정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촬영장소로 제공되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에 정치인 박찬종씨가 한동안 이 집에 거주한 적이 있다.
돈암장에 가려면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7번출구로 나와 삼선중학교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삼선중학교 옆 송산아파트 맞은편에 있다.
아쉬운 것은 ‘돈암장’을 알리는 안내판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근 한성대입구역 3번출구 앞 안내판에는 장승업·김광섭·최순우·조지훈·김기창·염상섭 등 저명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윤이상의 집터까지 친절하게 표시해 놓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양식점 들어서
마포장은 지하철 5호선 마포역 4번출구로 나와 불교방송국, 한신오피스텔, 마포타워를 끼고 한강변을 따라 걷다가 SK주유소 옆 골목으로 올라가면 된다. 마포역에서부터 15분 정도 걸린다. 마포장 자리는 벽산빌라, GS청암자이아파트, 그리고 I.O.U라는 양식점이 각각 그 일각을 차지하고 있다. 벽산빌라 앞 표지석에는 이곳이 담담정과 마포장이 있던 곳이라는 사실이 적혀 있다.
I.O.U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종업원들의 휴식시간이었다.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키면서 “이곳이 이승만 대통령이 살던 곳이라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그렇다고 들었다”고 대답했다. 커피를 들고 잔디가 깔린 마당으로 내려갔다. 한강과 63빌딩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득 이승만의 시 ‘평원정’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서남쪽을 향하여 창밖을 바라보소. 강 안개 속에 달이 뜨니 온 산이 가을이로다.’⊙
이승만은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식당과 회의실이 딸린 큰 스위트룸이었다. 미(美) 군정의 연락을 받은 윤치영, 허정, 임영신 등 오랜 측근들이 달려왔다. 이어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장덕수, 김도연, 김준연 등 한국민주당계의 지도자들이 이승만을 예방했다. 다음 날 기자회견장에서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33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운 고국에 돌아오니 감개무량하다. 그립던 산천, 정든 부모형제, 나의 가슴은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
전국은 순식간에 ‘이승만 신드롬’에 휩싸였다. 신문들은 연일 그를 ‘건국의 아버지’ ‘우리의 최고지도자’ ‘독립운동의 선구자’ ‘혁명전선의 거인’이라고 호칭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삶에 대해 보도했다.
매일같이 이승만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조선호텔로 몰려들었다. 10월 23일에는 조선호텔에서 한국민주당, 국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 등 50여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정당통합운동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결성됐다.
다음 날 이승만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장진섭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이 거처를 옮긴 것은 미 군정 요인들도 다수 투숙하고 있는 조선호텔에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수 없어서였다. 하루에도 300~600명이 ‘이승만 박사’를 뵙겠다고 몰려들었고, 갓을 쓴 시골노인들은 화장실을 찾지 못해 아무 데나 방뇨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대목장 배희한이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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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장 내 한옥 건물은 대목장 배희한씨가 궁궐 침전 양식을 본떠 만들었다. 사진=조선일보DB |
돈암장은 조선시대에는 빈민들을 위한 의료기관인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던 곳이었다. 일제시대에는 평산(平山)목장이라는 목장이 들어서 젖소 등을 길렀다.
1938~1939년에 지은 돈암장은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깊은 건물이다. 돈암장의 한옥 건물을 지은 사람은 당대 최고의 대목장(大木匠)이었던 배희한(裵喜漢·1907~1997)이었다. 창덕궁 대조전을 지은 목수 최원식의 제자로 무형문화재 74호였던 배희한씨는 생전에 “돈암장을 지을 때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짜서 지었으며, 서까래와 내실 기둥 등은 모두 백양목을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전봉학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에 의하면 “돈암장은 가운데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 온돌방의 3면을 마루가 돌아가는 형식으로 보아, 궁궐의 침전(寢殿)을 본뜬 형태다. 조선왕조가 망한 후 궁실(宮室) 건축을 담당하던 목수가 민간으로 나간 근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라고 한다. 당초 이 건물을 지은 주인은 궁궐의 내시였다고 한다.
염량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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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하지 장군. 1945년 11월 김구가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의 모습이다. |
아마 장진섭이 돈암장을 이승만에게 내주었을 때에는 일제하에서 치부했다는 눈총을 피하고, 장차 독립된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될 이승만에게 잘보이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과 미군정 최고책임자 하지 중장이 충돌하게 되자 장진섭은 불안해졌다. 장진섭은 이승만에게 집을 비워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진섭은 이미 1945년 10월에 “이승만이 측근들에 둘러싸여 자신을 비롯해 2000만원을 제공한 경제인들을 멀리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편지를 이승만에게 보냈다고 한다.
장진섭이 눈총을 주기 시작하자, 윤치영, 우제하(이승만 큰누이의 손자) 등이 새 집을 구하러 나섰다. 하지만 마땅한 집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장진섭은 “물건을 둘 공간이 없다”면서 이승만이 거처하는 방에 자기 물건들을 들여놓기까지 했다. 빨리 방을 비워 달라는 압박이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행태였다.
윤치영은 가회동에 있는 윤치호의 집을 주선했다. 하지만 우제하가 “윤치호의 집으로 가면 윤적(尹賊)들에게 업힌 인상을 준다”면서 반대했다. 일제 말기에 친일 행적을 보여준 윤치호의 집으로 들어가면 민심에 나쁜 영향을 줄까 우려한 것이다.
안평대군의 담담정이 있던 곳
결국 윤치영 등이 미 군정청과 교섭, 새 집을 얻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마포(지금의 용산구 청암동) 언덕배기의 집이었다. 1947년 8월 18일 이승만이 들어가면서 마포장(麻浦莊)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 집도 내력이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시대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이 지은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이었다. 문예를 사랑했던 안평대군은 이 정자를 짓고 측근들을 모아 풍광을 즐기며 시(詩)를 짓곤 했다.
동생 안평대군과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세조 5년(1459년) 9월 담담정에 나와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했다. 성종 1년(1470년) 6월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은 한강을 유람하다가 물고기를 잡은 후 이 정자에 올라 잔치를 벌였다.
일제시대에는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정무총감(총독부의 2인자. 국무총리 격)의 여름별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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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의 거처였던 마포장 자리에는 양식당이 들어섰다. |
이승만은 문짝이 잘 맞지 않고 공사도 날림인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내가 한 것만도 못하구먼. 저 밖에 있는 나무 궤짝 좀 끄르게.”
그 궤짝 안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부터 사용하던 대패, 톱, 끌, 망치, 칼 등 목공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이승만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난 후, 망치로 대패를 톡톡 치며 맞추었다. 문짝을 떼어 자를 대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한 다음 손잡이를 고쳤다. 비서들은 그 능숙한 솜씨에 입을 딱 벌렸다.
이어 이승만은 정원을 다듬기 시작했다. 정원수를 다듬었고, 고목은 잘라서 도끼로 팼다. 무성히 자란 정원의 풀도 직접 뽑았다. 억센 풀을 힘주어 뽑아낸 후에는 “이놈, 나한테 졌지, 졌어”라며 즐거워했다.
이승만은 처음에 마포장을 ‘평원정(平遠亭)’이라고 불렀다. ‘평원정’이라는 한시도 남겼다.
移家何事住江頭
來訪人人問不休.
須向西南窓外望
五湖烟月滿山秋.
어찌하여 집을 옮겨 강가에 산단 말가
찾아오는 사람마다 묻기를 멈추지 않네.
서남쪽을 향하여 창밖을 바라보소
강 안개 속에 달이 뜨니 온 산이 가을이로다.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조선시대에 담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마포장은 전망이 참 좋았다. 하지만 추웠다. 가을이 되면서 바람이 몹시 불었다. 외투를 입고 있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의 홍보고문이자 동지였던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 박사는 심한 기관지염으로 누워 계시고 저도 좀 그렇습니다. 집은 난방이 되지 않고 전기난로 하나에 매달려 있는데, 그나마도 전류가 약해 난로가 좀처럼 잘 데워지지 않습니다. 몸이 따뜻해질 때라고는 햇볕이 방안으로 들 때에 볕을 쬐는 것뿐입니다.〉
마포장 시절은 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 역정 속에서 가장 힘들던 시절이었다. 미 군정의 견제 속에서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이 지냈다. 지지자들도 많이 떨어져 나갔다. 암살의 위기도 겪었다. 범인들은 현직 경찰관들이었다. 5명의 범인 가운데 네 명은 다름 아닌 마포장 경비순경들이었다. 이들은 남로당에 포섭된 자들이었다.
암살음모 사건을 적발해 낸 마포경찰서장 윤우경은 이승만에게 집을 옮기라고 권했다. 권영일・전용순・신용욱 등 33명의 실업인들이 나섰다. 이들은 100만원 가까운 돈을 모아 서울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있는 김성훈의 집을 매입했다. 이승만 부부는 마포장으로 이사한 지 두 달 만인 1947년 10월 18일 이 집으로 이사했다. 이 집이 이승만의 사저(私邸)로 유명한 이화장(梨花莊)이다.
이화장이 비교적 원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돈암장과 마포장은 그 후 본모습을 많이 잃었다.
돈암장의 주인 장진섭은 6·25 때 납북됐다고 한다. 이후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지번이 분할되고 김영대 대성실업 회장과 정혜수 선창실업 회장 집으로 나누어졌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정 회장은 인근 예닮교회에 땅을 헌납, 현재는 교회가 들어서 있다. 돈암장 시절 이승만이 거주했던 양옥 부분은 대부분 교회 부지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등록문화재 91호인 돈암장의 한옥 부분은 지난 6월 14일부터 해체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올해 12월 30일 공사가 끝날 예정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촬영장소로 제공되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에 정치인 박찬종씨가 한동안 이 집에 거주한 적이 있다.
돈암장에 가려면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7번출구로 나와 삼선중학교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삼선중학교 옆 송산아파트 맞은편에 있다.
아쉬운 것은 ‘돈암장’을 알리는 안내판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근 한성대입구역 3번출구 앞 안내판에는 장승업·김광섭·최순우·조지훈·김기창·염상섭 등 저명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윤이상의 집터까지 친절하게 표시해 놓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양식점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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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포장 자리에는 지금은 벽산빌라(맨 앞), 양식당 I.O.U(가운데), GS청암자이아파트(맨 뒤)가 들어서 있다. |
I.O.U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종업원들의 휴식시간이었다.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키면서 “이곳이 이승만 대통령이 살던 곳이라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그렇다고 들었다”고 대답했다. 커피를 들고 잔디가 깔린 마당으로 내려갔다. 한강과 63빌딩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득 이승만의 시 ‘평원정’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서남쪽을 향하여 창밖을 바라보소. 강 안개 속에 달이 뜨니 온 산이 가을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