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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경남 김해 ‘흙수저’ 청년 박동진 Good프라임그룹 회장

“노점에서 닭강정 팔던 심정으로 정치할 것”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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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세부터 신문 배달… 5000억원대 회사(공시지가 기준)로 일궈
⊙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고 어려운 사람 돕는 사람 되고 싶었다”
⊙ 진영공익재단·굿프라임공익재단 세워 기부·장학 활동
⊙ “중학생 시절부터 봐왔는데 어려운 형편에도 매우 바르고 긍정적 성품으로 자라”(김해룡 진영공익장학재단 이사장)
⊙ “김해평야·김해 원도심 활용해 2050년까지 김해를 인구 70만 도시로 만들 것”

朴東眞
1974년생. 김해 진영대창초·한얼중·진영제일고 졸업, 인제대 경영통상학과 학사,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석사 / 국민의힘 중앙당 후원회 회계책임자, 김해상공회의소 상임의원, 진영공익장학재단 이사
사진=박동진
  김해 토박이인 Good프라임그룹 박동진(49) 회장. IMF가 끝날 무렵 가진 돈을 그러모으니 고작 50만원이었다. 리어카와 조리 기구를 마련해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노점상을 열고 처음 사업을 시작했다. 박 회장은 “닭강정 노점상으로 출발해 20년이 흐른 지금은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는 기업(규모 5000억원, 공시지가 기준)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1974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는 김해 시내 고깃집을 돌아다니며 불판을 닦았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일을 주지 않자 스스로 남들이 받는 5000원보다 적은 4000원을 제안해 일을 얻었다.
 
 
  흙수저 중의 흙수저
 
  박 회장은 자신을 ‘흙수저 중의 흙수저 출신’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11세부터 세 가지 꿈을 품고 살아왔다. 첫째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과 같은 사업가가 되는 것, 둘째는 2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살게 된 생모 품에 안겨 잠드는 것, 세 번째는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박 회장은 근면성실을 바탕으로 부동산 분야에서 실력을 떨쳐 고향 김해뿐만 아니라 울산, 경기 김포는 물론 해외(미얀마 등)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다. 김포에는 국내 유일 복합 스포츠 센터를 세웠는데 국제대회를 치를 수 있는 규격의 빙상장도 있다.
 
  박 회장은 김해정책연구소 소장도 맡고 있다. 고향 김해 발전을 위해 만들었다. 김해 발전을 위한 실질적 정책을 만들기 위해 40~50명이 모여 토론과 회의를 한다.
 
  그는 어릴 적 아픈 기억 때문에 기부 활동에도 열심이다. 지금까지 기부하고 출연한 금액만 50억원가량 된다고 한다. 《박동진은 일합니다》를 펴내고 출판기념회도 가진 그를 2023년 12월 초 김해에서 만났다.
 

  — 회사 이름이 ‘Good프라임’인 이유가 있습니까. 왜 알파벳과 한글을 합쳐 만들었습니까.
 
  “2003년에 부동산 중개사무실을 열었습니다. 그때 사업장명이 ‘Good’이었습니다. 공부하다가 만 평 이상(3만3000제곱미터) 규모의 사업에는 ‘프라임’이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걸 배웠어요. Good과 프라임을 합치면 전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할 때 많은 이에게 각인이 될 것 같아 ‘Good프라임’이라고 지었습니다.”
 
  — 11세에 품었다는 꿈 세 개를 보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매우 큰 듯합니다.
 
  “2세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죠. 7세까지는 이모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그때는 그저 엄마랑 함께 있다는 사실이 좋았죠. 매일 밤 어머니 품에 안겨 자는 순간이면 정말 행복했죠. 지금도 어머니와 함께했던 시간이 제겐 너무나도 소중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입니다.”
 
  박 회장은 생모의 품을 떠나 7세 때 아버지가 있는 진영읍 여래리로 가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외항선 선원이었다. 새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박 회장과 그의 형은 신문 배달 등 온갖 잡일을 해가며 돈을 벌어야 했다.
 
 
  “김해에서 잘되는 고깃집 불판은 다 닦았다”
 
김해 생림면에서 열린 김장 담그기 행사에서 박동진 회장이 일손을 돕고 있다. 사진=박동진
  — 어떤 일을 했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11세) 때부터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배달하고 한 달에 2만원을 받았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아는 형으로부터 ‘고깃집에서는 5시간을 일하고 5000원을 받는다’고 들었죠. 고깃집에 가서 ‘일을 시켜달라’고 하니 나이가 어리다며 일을 시켜주지 않았어요. ‘4000원만 받겠다’고 하곤 일을 시작했어요. 김해에 있는 고깃집 10여 군데에서 일을 해 한 달에 10만원을 벌었습니다. 김해에서 장사가 잘되는 고깃집의 불판은 다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 고깃집 다음은 어디입니까.
 
  “1991년 고2 때는 카페에서 웨이터로 일했어요. 고깃집 옆에 작은 카페가 있었는데 저를 좋게 보셨는지 일을 주셨죠. 6개월쯤 일할 때였는데 등굣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11t 트럭에 치었는데 정강이뼈 아래쪽을 크게 다쳤죠.”
 
  박 회장은 이 사고로 4년간 병원 신세를 지며 수술만 11차례 했다. 창원대 경영학과에 96학번으로 합격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등록하진 못 했다.
 
  박 회장은 돈을 벌려면 ‘먹는 장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을 모두 털어 기구를 사고는 부산 중구 남포동에서 유명한 닭강정집에서 기술을 배웠다. 지금은 경남 창원시에 통합된 마산회원구 합성동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순살닭강정 노점을 시작했다. 자취방은 보증금 10만원, 월세 5만원짜리였다.
 
  — 노점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텃세가 심했죠. 노점상연합회에서 장사를 못 하게 하려고 전기를 안 주는 겁니다. 그러다가 노점 바로 앞 건물에 전산학원이 있었는데 이곳 사장님이 ‘청년이 열심히 산다’면서 전기를 공짜로 주셨어요.”
 
  — 노점은 혼자서 했습니까.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친구가 와서 도와줬어요. 아내는 4년제 대학을 나와 화학회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평일에는 퇴근한 뒤에, 주말에는 종일 일을 도왔죠.”
 
 
  “닭 튀기는 게 곧 연애”
 
  — 연애는 어떻게 했습니까.
 
  “연애할 시간이 어딨나요. 노점에 서서 같이 닭 튀기며 이야기하는 게 연애였죠.”
 
  —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오늘 얼마나 팔겠노’ ‘밀가루 반죽이 맛있다, 맛없다’ ‘나중에 뭐 해 먹고살까…’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죠.”
 
  — 하루에 얼마나 팔았나요.
 
  “평일은 오후 6시부터 장사를 해 5만원, 일요일엔 종일 장사를 해 20만원을 벌었어요. 제 돈으로 처음 벌인 사업이자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사업이죠.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닭강정 노점 사진이에요.”
 
  — 닭강정 노점도 열심히 했나 봅니다.
 
  “네. 덕분에 전기를 쓰도록 배려해주신 전산학원 원장님 눈에 들었죠.”
 
  — 어떻게 됐습니까.
 
  “그 원장님이 조영명 경남도의원(창원시)입니다. 그때 한창 피시방 열풍이 불었어요. 조 도의원님이 이미 다 차려놓은 피시방을 관리만 하라고 하셨죠. 능력제였어요. 한 달에 100만원을 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제 돈이 됐습니다. 잠을 하루에 3시간만 자며 일했죠.”
 
 
  “한 페이지 해석하는 데 사흘 걸려”
 
가족사진. 왼쪽부터 박동진 회장, 동갑인 아내 고영민씨와 둘째, 첫째, 막내. 사진=박동진
  — 사업은 계속했습니까.
 
  “공부하고 싶었어요. 어릴 때 많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죠. 2000년에 방송통신대학 법학과에 들어갔어요.”
 
  — 공부는 재밌었습니까.
 
  “소법전을 펼쳐보니 온통 한자투성이라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어요. 한 페이지를 해석하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죠.”
 
  박 회장은 2001년 동갑내기 고영민씨와 결혼한다. 처가는 가진 것 없는 고졸 남편에게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대학까지 나온 딸을 시집보내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장인은 딸에게 “결혼은 현실이니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어떻게 살아갈지 그림을 그려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다 장인이 패혈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장모는 이 둘의 결혼을 허락했고 한동안 장모의 아파트에 얹혀살았다. 그러다가 김해에 있는 보증금 1000만원, 월세 2만8000원짜리 주공 임대아파트에 들어갔다. 당시 전 재산은 300만원. 은행에서 700만원을 빌렸다. 살림살이라고는 장모가 준 돈으로 마련한 TV만 있었다. 돈이 생기면 부부가 의논하여 하나씩 필요한 살림살이를 장만해나갔다.
 
  결혼한 뒤 집사람의 이모부에게 부동산을 배웠다. 방통대에서 법학을 배운 덕분에 일이 어렵지 않았다. 수당제로 부동산 중개사무실에서 일했는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엔 중개수수료라는 개념이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기에 계약하기 전에는 ‘돈을 준다’ 하고선 계약을 맺으면 모른 척했기 때문이다.
 
  — 받을 돈도 못 받았는데 일은 어떻게 했습니까.
 
  “1000만~4000만원 정도의 전셋집을 패키지로 만들어 중개했죠. 오전엔 전단을 붙이고 오후에는 손님을 데리고 다니며 패키지에 속한 집을 보여줬어요. 하루 세 팀이 그렇게 한 바퀴를 돌면 집주인 입장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집을 공개하는데도 집이 나가지 않는 상황이 되죠.”
 
  — 집주인은 뭐라고 하던가요.
 
  “‘수수료를 줄 테니 빨리 해결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 적절한 금액의 수수료를 달라고 하고는 세입자를 데려가 계약을 맺었죠. 이런 식으로 당연히 중개수수료를 내게끔 인식을 바꿔나갔습니다. 덕분에 힘들기는 했지만 그만큼 수입도 늘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제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죠.”
 
  박 회장은 2003년 12월 김해시 삼계동에 부동산 중개사무실을 열었다. 장사가 잘돼 김해 인근 지역에 사업장을 5개까지 두었고 2006년에는 중개법인을 세워 복덕방 개념을 넘어 빌딩 분양 대행을 시작했다. 3년 다니다 포기한 공부를 계속하고자 2006년에는 인제대학교 경영학과에 야간 과정으로 입학해 공부를 이어갔다. 2008년에는 시행 사업을 처음 시도했는데 2009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탓에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현장에 최소한 24번 간다”
 
박동진 회장이 김해 구도심인 동상시장에서 사탕수수 주스를 파는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박동진
  박 회장은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서울 유학을 결심한다. 2011년 1학기 건국대 부동산대학원에 지원했지만 결과는 불합격. 박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건국대를 찾아갔다. 덕분에 2학기에는 입학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인 400여 명 중 지방 합격생은 박 회장뿐이었다.
 
  —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생활이 힘들진 않았습니까.
 
  “지방에서 다니는 학생이지만 뒤처지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죠. 월요일 오전에는 업무 보고를 받고 오후 2시 에 올라가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밤에는 찜질방에서 자고 화요일에 수업을 듣고는 밤 12시 버스를 타고 김해로 내려왔죠. 도착하면 오전 5시, 몇 시간 자고 다시 출근했어요. 2년 반 동안 이렇게 지냈습니다.”
 
  — 대학원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부동산이 단순 투자 목적이 아니라 국토개발을 통해 사회의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관점을 갖게 됐습니다. 단순히 김해에 있는 땅에 그치는 게 아니라 경남, 수도권, 대한민국 전체에 대한 국토개발을 보는 안목을 배우게 됐죠.”
 
  박 회장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도시개발 사업도 성공시켰다. 김해, 울산, 수원, 부산, 김포 등지에서 빌딩을 세웠다.
 
  — 사업을 하며 얻은 철칙이 있습니까.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처음 땅을 사고 개발을 기획할 때부터 현장에 최소 24번은 간 뒤에 시작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달고 살죠.”
 
  — 힘들진 않습니까.
 
  “다행히 어릴 때부터 집이 아니라 밖에서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억척스럽게 해오던 게 몸에 밴 덕분에 즐겁습니다. 저는 사업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 하나하나에서 에너지를 뺏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얻는 편이었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사람을 만나는 게 체질인 거죠.”
 
 
  “어려서부터 기업인·정치인 되고 싶었다”
 
  2000년대 중반 박 회장을 가르쳤던 원종하 인제대 교수는 과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박 회장이 당시 자기가 하고 있던 부동산 사업과 관련한 사업계획을 발표했어요. 규모가 상당했죠. 당시만 해도 그의 사업 규모가 지금처럼 성장하기 전이었습니다. 박 회장이 발표한 내용은 ‘종합 건설회사를 만들어 김해를 넘어 전국구 대형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소 허황하기까지 한 미래 비전을 두고 학생들은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일부는 비웃기까지 했지만 기죽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돈을 많이 벌어 다른 사람을 많이 돕겠다’고까지 했죠. 모두가 거창하다며 웃었던 비전을 박 회장은 하나둘 실현해나갔습니다. 사업과 달리 정치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겠다는 도전입니다. 섬김의 자세로 지역사회에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을 실천하는 정치인이 되길 바랍니다.”
 
  — Good프라임그룹의 규모는 어떻게 됩니까.
 
  “공시지가 기준으로 5000억원쯤 됩니다. 이 중 대출과 같은 부채가 2000억원 됩니다. 어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 돈 많은 사람이 정치까지 한다, 돈이 생기니 정치하려고 한다는 비판이 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기업인, 정치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돈을 번 덕분에 갑작스레 생긴 목표가 아닙니다. 또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을 번 것도 아닙니다.”
 
  — 왜 정치를 하려고 합니까.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어렵게 자라지 않았습니까?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고 이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 기업을 발전시켜 사회에 기부하면 되지 않습니까.
 
  “기업인이 할 수 있는 일,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다릅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김해 발전에 힘쓰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서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도의원 출마 접고 장학재단 세워
 
박동진 회장이 설립한 진영공익장학회는 2020년 9월 23일 김해 출신 학생들에게 장학금 6000만원을 후원했다. 사진=진영공익장학회
  — 재산이 많은 사람이 정계에 입문할 때 항상 하는 소리 아닌가요.
 
  “저는 오래전부터 기부·장학 활동을 해왔습니다.”
 
  박 회장은 장학재단 2개를 세웠다. 하나는 진영공익재단, 또 하나는 굿프라임공익재단이다. 진영공익재단은 출연금 11억원, Good프라임공익재단은 2억원을 들였다. 기부 광고 캠페인 활동, 다문화·탈북자 자녀 지원, 노인 봉사, 무료 급식 제공, 김해 지역 학교발전기금 지원 등도 활발히 해왔다.
 
  — 어린 시절 경험 때문에 기부에 적극적입니까.
 
  “2014년에 진영 금병초등학교 방문 때 경험한 일을 계기로 기부에 더 힘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우연히 학생 두 명이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데 돈을 못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저는 도(道)의원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두 학생을 도와주면 자칫 선거법상 기부 행위가 될 수 있어 선뜻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죠. ‘이런 일이 너무나 많을 텐데 내가 놓치고 있구나….’ 이후 도의원 출마를 접고 바로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 도의원으로 출마하지 않고 곧장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업을 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 보고 듣고 배우며 김해 발전을 위해선 중앙 정치 무대인 국회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 정치를 하게 되면 재산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공익재단, 장학재단에 환원할 생각입니다.”
 
  박 회장은 2030년까지 100억원을 들여 1000평 규모의 건물에 원룸 형태로 18세 이상 자립 청년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목표도 갖고 있다. 60세 이후에는 청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김해룡 진영공익장학재단 이사장. 김 이사장은 박 회장이 어린 시절 아르바이트를 했던 고깃집(무진장갈비)의 사장이다. 지금도 고깃집을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김해시지구당 위원장을 지낸 적도 있다.
 
  김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봐왔다. 어린 학생이 참 열심이었다. 보통 사람은 따라갈 수 없는 근면성실이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매우 바르고 긍정적 성품으로 자라 인상적이다. 김해 일대에 박 회장보다 성공한 사람이야 많지만 그만큼 사회에 환원한 사람은 없다. 실천을 한다는 것은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다. 박동진과 같은 마음 따뜻한 사람이 정치를 해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거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애인 복지에도 관심
 
박동진 회장이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닭강정 노점을 할 때 썼던 조리기구. 사진=박동진
  박 회장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보지 못해 아쉬움이 큰데, 이 아쉬움을 아내의 사랑으로 보듬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 평균도 갖추지 못했던 내가 지금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분”이라며 “아내를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라고 말했다. 주변에선 아내가 세 자녀를 성심성의껏 키우며 내조한 덕분에 남편이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픔도 있다. 둘째 딸 미강(16)의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이다. 뇌병변 장애 1급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생활할 수가 없다. 둘째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본 박 회장은 장애인 복지에도 관심이 많다.
 
  박 회장은 “그간 국민의힘에서 김해를 홀대해왔다”며 “선거철만 되면 김해가 출생 지역이라는 것 빼고는 김해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들을 공천했다. 이들은 선거가 끝나면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지역 출신 정치인, 토박이 정치인을 길러내 김해를 맡겨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해평야를 적극 활용해 김해를 부흥시키고 부·울·경의 물류 도시, 동북아 물류 허브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김해평야 일부에 첨단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대기업 공장, 산업 시설을 한데 그러모아 집적 효과를 극대화해야 합니다. 김해는 공항도 가깝고 항구도 가까워 물류센터가 들어서기 좋습니다. 김해 인구는 2019년 56만여 명을 정점으로 계속 내리막 추세입니다. 가야의 유산이 있는 원도심은 공동화(空洞化)와 외국인 노동자 증가로 급격히 슬럼화되고 있습니다. 가야사도 복원하고 싶습니다. 경주에는 관광객이 많지만 김해는 없어요. 김해도 원도심을 제대로 정리하면 많은 관광객이 찾을 겁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개발한다면 교통이 편리한 김해는 2050년 이전에 인구 70만 명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박 회장은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을 꼽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중용(中庸)을 취하며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선된다면 닭강정을 팔았을 때 가졌던 초심으로, 싸우지 않는 정치, 타협하는 정치를 통해 지역 경제를 육성하고 지역민과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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