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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회고록 낸 ‘文 정권 적폐 1호’ 남재준 전 국정원장

“문재인에게 대한민국은 없었다”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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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장 맡은 이유는 남북통일 이뤄 혼란과 비극 끝내고 싶었기 때문”
⊙ “무능한 장교는 敵보다 무서운 존재”
⊙ “문재인 실체 알리고자 大選 출마… 文 정권 출범하면 보복하리라 100% 예상”
⊙ 청와대가 ‘장병 정신교육 폐지’ 요구하자 정훈장교 소집해 대적관‧공산주의 비판 교육 실시
⊙ 육군참모총장 임기는 敵이 아닌 정권과 싸운 2년
⊙ 베트남전에서 죽을 고비 6번 넘겨
⊙ 부모 세대처럼 여생은 후손이 살아갈 대한민국 위해 기여할 것
사진=조준우
  남재준(南在俊·79, 육사 25기) 예비역 육군 대장은 노무현 정부 초대 육군참모총장(2003~2005년), 박근혜 정부 초대 국가정보원 원장(2013~2014년)을 지냈다. 군복 입고 40년, 정보 세계에서 1년여를 살았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적폐’로 낙인찍혀 4년 6개월 동안 수의(囚衣)를 입고 독방에 갇혀 있었다.
 
  지난 10월 남 전 원장은 자신의 군 생활을 792페이지에 걸쳐 담아낸 회고록 《옥중에서 쓴 군인 남재준이 걸어온 길》을 펴냈다.
 
  회고록은 수감(2017년 11월 구속, 2022년 5월 가석방) 중 형이 확정된 2021년 3월부터 가석방될 때까지 약 60주간 남 전 원장이 누이와 형에게 쓴 편지를 바탕으로 구성됐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거의 하루에 한 번씩 먼 길 구치소로 면회 오는 누이를 위로하고 안심시키고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누이는 동생이 걱정돼 4년 6개월 동안 약 1100회를 면회했다.
 
  — 서신은 얼마나 주고받았나요.
 
  “누님은 약 30통, 형님은 240통을 제게 써주셨습니다. 형님은 매주 3~5통, 한 통에 6~8매씩이니 모두 더하면 형님 편지만 1700매가량 될 겁니다. 저는 두 분께 일주일에 한 번씩 각각 60통을 보냈습니다.”
 
 
  8남매 중 장난꾸러기 셋째
 
지난 10월 펴낸 회고록 《옥중에서 쓴 군인 남재준이 걸어온 길》.
  —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4남 4녀 중 셋째, 차남입니다. 제 위로 큰 누님과 형님이 계시죠. 누님은 제게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형님과는 두 살 터울이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형님을 어른으로 생각하고 컸습니다. 동생들은 모두 모범생입니다. 우리 집에서 저만 개구쟁이, 장난꾸러기였습니다.”
 
  가훈은 ‘수분지족(守分知足)’이었다. 남 전 원장은 “부친(남교목, 2011년 작고)은 근엄하지만 자상한, 선비 같은 분”이라고 했다. 백선엽 장군은 남 전 원장을 볼 때마다 “부친이 청백리였는데 당대에 청백리 아들이 나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어머니(이순재, 2020년 작고)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한국 어머니의 전형이었다. 이역만리 베트남으로 파병을 간 아들의 꿈속에까지 나와 아들을 지켜줬다. 어머니는 남 전 원장이 수감 중이던 2020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남 전 원장에게 항상 “인순(仁順)하라”고 격려했다.
 
  — 교도소에 가리라 상상해보신 적 있습니까.
 
  “상상도 못 했죠. 교도소에 갈 만한 인생을 살진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담담한 심정이었죠.”
 
 
  독방 생활, 공부하느라 정신없어
 
  — 독방 생활이 심심하진 않았습니까.
 
  “공부하느라 정신없었어요. 책을 하도 많이 넣어줬거든요. 거기다 형님은 저보고 영어 공부를 하라며 편지를 영어로 써주셨죠. 매주 《TIME》 한 권 분량이었어요.”
 
  남 전 원장의 옥바라지를 도운 장호석 실장은 “수감 동안 1500권 이상 읽으셨다”고 했다. 남 전 원장은 “예전에는 역사·전쟁사·병법서·국제관계와 관련된 책을 주로 읽었는데 수감되고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참 재미있었다”고 했다.
 
  — 어머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땐 어떠셨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 상을 치르고 들어가실 때 어땠습니까.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느꼈을 감정과 같았습니다.”
 

  장 실장은 “표현하진 않았으셨지만 굉장히 힘들어하셨다. 이를 여러 번 꽉 무시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면 보복당하리라 예상하셨습니까.
 
  “100%. 육군참모총장 때부터 겪은 ‘문재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총장이었을 때는 정치권의 군 인사 청탁을 거부하고 노무현 정권이 내세우는 이른바 군 사법개혁도 반대했기 때문이죠. 말이 사법개혁이지 군형법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군을 와해하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다 저는 ‘이라크전에도 파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며 당시 청와대와 사사건건 부딪혔습니다. 국정원장 시절에는 내란선동 혐의로 이석기를 구속하고 통합진보당도 해산시키지 않았습니까. ‘NLL 대화록’도 공개했죠. 또 2017년 대선 당시 전국을 돌며 ‘문재인 공약대로 되면 대한민국은 망한다’고 외쳤고요.”
 
 
  참여정부에 남재준은 걸림돌
 
  군을 장악하려는 노무현 정부의 운동권 출신 핵심 인사들은 남재준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걸림돌로 봤다. 청와대 모 수석은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을 만나 “군 정신교육을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북한에 대한 대적관 교육을 없애 우리 군을 사실상 정신을 무장 해제하라는 지시였다. 그러자 남 전 원장은 창군 이래 처음으로 육군 정훈장교를 모두 소집해 정훈장교 워크숍을 열고 정훈장교를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실시했다. 남 전 원장은 “전투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상 무장”이라며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지켜야 할 이유 ▲공산주의자들의 본질 ▲대적관 확립의 중요성 인식 ▲정훈장교의 임무 등을 강의했다. 좌파 운동권 출신들에겐 남 전 원장이 눈엣가시였다.
 
  언론에는 남 전 원장이 쿠데타를 암시(이른바 정중부의 난)했다고 흘렸다. 또 군 장군 진급 인사 비리의 몸통인 양 몰아갔다. 정권 차원에서 털어봤지만 남 전 원장은 깨끗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도 ‘이런 사람은 못 봤다’며 남 전 원장에 대한 압박을 그만두라고 지시했지만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은 남 전 원장을 몰아붙였다.
 
  여기에 국정원장이 되자 문재인 전 대통령의 치부가 담긴 이른바 ‘NLL 대화록’을 공개했다(2013년 6월). 노무현 정권은, 노무현-김정일 회담(2007년 10월, 평양)을 통해 남북 군사 충돌이 벌어지는 NLL 일대를 ‘평화수역(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 사실상의 ‘NLL 무력화’를 시도했다. 당시 회담의 실무를 문재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총지휘했다. 이 대화록이 공개되자 문재인 당시 민주당 의원은 ‘NLL 포기가 사실이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주장했으나 이를 번복하고 2017년 대통령이 됐다.
 
  남 전 원장은 “해상경계선인 NLL을 포기하고 평화수역으로 설정하면 이곳으로 우리 해군 함정이 들어갈 수 없다. 서해 5도가 위험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좌파들은 ‘NLL을 포기한 적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떳떳하면 대화록을 공개하고 전 국민에게 배포하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왜 대통령기록물로 지정해 비공개시켰느냐”고 말했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고 당시 여당을 중심으로 ‘국정원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남 전 원장의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미국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남 전 원장은 동고동락한 부하들이 있는 구치소가 자신의 위치라며 거절했다.
 
  남 전 원장의 이야기다.
 
  “솔직히 돈도 없었고 어차피 정치적 재판이기에 실형이 기정사실로 예상돼 변론이 별 의미가 없어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았어요. 변호사인 사위가 울먹이며 저를 설득해 재판을 받았죠. 사법방해로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어요. 재판 내내 관련 서류나 판결문도 일절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읽어 내려간 선고문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어요. ‘원장이 위증이나 위증 교사 등을 직접 지시하거나 간여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국정원은 군대와 같이 상명하복이 엄정한 기관이므로 원장이 모를 수 없다. 이에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함’입니다. 이것이 증거주의를 채택한 대한민국 사법부의 선고문이었습니다.”
 
  이른바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지원’, 남 전 원장에게 선고된 국고손실죄(1년 6개월 형)도 위와 같은 식이었다. 국정원은 역대 모든 정부의 관행대로 특활비를 써왔다. 재판 당시 법조계에서도 ‘국정원장은 국고손실죄를 적용받는 회계공무원이 아니기에 국정원장에게 국고손실죄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지금껏 중앙부처장(長)을 회계 관리 공무원으로 판단한 판례가 단 한 건도 없었기 때문이다.
 
 
  육참총장 제안, 처음엔 거절
 
  — 좌파 정권과 코드가 맞아 육군참모총장을 하게 된 것 아닙니까.
 
  “전혀. 애초에 참모총장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 그런데 왜 했습니까.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그러자 후배들 몇 명이 ‘군과 정부가 충돌할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한데, 군을 지켜줘야 할 선배님 같은 고위 장교가 비겁하게 혼자 살자고 도망을 가느냐, 이게 여태껏 우리한테 올바른 군인인 척하고 보여줬던 선배님의 본모습입니까’ 하는 협박성 전화를 받았죠. 한 이틀 밤새워 고민하고서야 수락한 겁니다.”
 
  — 왜 선뜻 수락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2002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했을 때 ‘효순이·미선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이 땅의 운동권들은 그 어린 소녀들의 죽음을 정치화했죠. 이때 한미동맹에 상당한 위험, 위협을 초래하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이를 경험하며 좌파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꼈죠. 제 성격상 정부와 충돌하는 게 불을 보듯이 뻔한데, 저도 권력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남 전 원장은 “군인으로서 국가 안보를 위해서 적과 싸운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부와 피나게 싸운 2년”이라고 했다.
 
  — 전역사에서 노 대통령에게 ‘충심으로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건 진심이에요. ‘총장에 임명해줘서, 잘 봐줘서 감사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총장이 돼 국가를 위해 내 몸 던져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다는 의미죠. 권력 실세들과 싸워가며 좌파 운동권의 실체도 알게 해줬으니까요. 또 사사건건 청와대 이너서클과 부딪혔지만 노 대통령은 제가 의견을 밝히면 국익의 관점에서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대선 출마 이유
 
누님(왼쪽)과 남재준 전 국정원장(가운데).
  — 대선에는 왜 출마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국정원장을 하더니 어떻게 잘못된 생각을 해 대선에 출마한 거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지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육사에 삼수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렇게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죠. 그러니까 당선될 수 없다는 거 뻔히 알고 나갔습니다.”
 
  — 그 배경을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40년간 주로 군사 작전 분야에서 근무했습니다. 남과 북의 군사적 역량, 장단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죠. 좌파 정권이 들어섰을 때 한미동맹이 어떻게 될지도 잘 알았고요. 40년 동안 국가의 녹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렸으니 이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문재인 공약대로 하면 이 나라는 망한다’고 외치고 다녔죠. 대선 후보가 아닌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공직선거법 위반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람한테 얘기했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진 못했지만 내가 40년 동안 알고 느끼고 봤던 우리나라의 현실, 동북아 정세를 국민한테 알려야 할 의무를 느낀다’고. 그래서 아내가 고생하며 한 푼 두 푼 아껴 눈물겹게 장만한 아파트를 저당 잡히고 그 반을 공탁금으로 내 출마했던 겁니다.”
 
  — 언제부터 군인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까.
 
  “저도 몰라요. 그 질문을 수없이 받았는데 답을 못 해요. 미군정 시절 군인들과 가깝게 지낸 것 때문인지, 6·25전쟁의 영향인지, 내 천성이 그런 건지…. 아무튼 기억이라는 걸 갖는 시점부터 꿈은 군인이었습니다. 어릴 때도 틈만 나면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전쟁놀이를 했으니까요.”
 
  통상 만 6~7세가 되면 기억이 형성된다. 1944년생인 남 전 원장은 7세 때 6·25전쟁을 체험했다.
 
  남 전 원장은 대전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서울 배재고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4·19혁명, 2학년 때 5·16이 터졌다. 고1 때는 학도호국단 중대장이었다. 재수할 때에는 돈을 벌고자 친구와 함께 서울역 앞에 있는 어묵공장에 취직했다. 워낙 중노동이라 연일 코피를 쏟아냈다. 이를 본 아버지가 ‘도와주겠다’며 서울역에 일자리를 주선해줬다.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일할 장소로 갔는데 서울역 대합실 공중화장실 청소부 자리였다.
 
  몇 달 뒤 외국인에 대한 통역이 역장 귀에 들어가 자리를 옮겼다. 업무는 서울역에 도착한 열차의 창문 밑 행선지 표지판을 교체하는 고된 일이었다. 당시 서울역에서 하루 출발하는 열차는 52대, 열차당 10량 이상이니 모두 갈면 하루에 1000장을 넘게 갈아 끼워야 했다. 얼마 뒤에는 서울역 광장 안내원, 열차수로 일을 이어갔다. 열차수가 하는 일은 열차 청소다. 서울-목포, 서울-부산행 완행열차에 교대로 탑승해 하루는 목포행, 하루는 서울행, 또 하루는 부산행, 그다음 날은 서울행 열차에서 잠을 자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재수 시절에는 책 한 장 못 보고 시험장에 가는 바람에 대입에서 낙방했다.
 
  삼수 때는 광화문 전화국에서 일했다. 자전거를 타고 서울 시내를 누비며 공중전화 부스를 청소했다. 일과 동시에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해 다행히 1965년 2월 1일 육군사관학교(가입교, 입학식은 3월 2일)에 들어갔다.
 
 
  장래 목표 ‘대한민국 장교’
 
6사단 GP장 시절의 남재준 소위.
  — 일과 학업을 병행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버님은 요즘으로 치면 ‘고위공무원단’에 속하는 분이셨어요. 부자는 아니었지만 학원에 못 다닐 처지도 아니었죠. 아버님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철학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버님에게 지고 싶지 않아 시작한 청소부 생활인데, 내게 주어진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늘 아버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어요.”
 
  — 삼수를 하며 배운 점이 있습니까.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 엄격한 사람만이 남에게 어짊과 관용을 베풀 수 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정신적 용기를 가진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평생의 실천 강령을 얻었습니다. 서울역에서 우리나라의 상류층부터 하류층에 속한 이들과 매일 부딪히며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어린 나이에 배웠죠. 당시 시대 상황은 원칙보다는 융통성, 정도(正道)보다는 변칙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각종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었지만 사관생도가 되겠다는 꿈으로 저 자신을 붙잡았습니다.”
 
  남 전 원장은 육사 재학 시절 생도를 대표하는 ‘연대장 생도’ 후보에 올랐으나 결국 못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인성검사에서 장래 목표를 ‘대한민국 장교’라고 소박하게 적어 내 진취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육사생도는 ‘희망 계급: 대장’ ‘희망 보직: 육군참모총장’과 같은 답을 적어 낸다고 한다.
 
  1969년 육군 소위로 임관해 8사단 21연대 2대대 5중대 1소대장으로 갔다. 곧이어 6사단 배속 GP장을 맡았는데 이때 북한군과 교전해 부하를 처음으로 잃었다. GP에 투입되는 부대는 GOP 철책선 밖 비무장지대를 수색·정찰하는 활동을 하는데 당시에는 휴전 상태였음에도 남북 간 군사 충돌이 자주 발생했다.
 
 
  “실제 교전에선 아무 생각도 안 나”
 
육군사관학교 4학년 시절 남재준 생도.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남 전 원장은 육사 교수 요원 후보였다. 하지만 야전 군인이 되고 싶어 월남전 참전을 지원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부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얼굴을 두 번 본 사이였다. 파병에 앞서 “내가 살아서 돌아오고,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와 결혼해달라”고 했다. 여자친구 얼굴을 세 번째로 본 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그렇게 맹호사단 1연대 3중대 소대장이 됐다.
 
  — 베트남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까.
 
  “교전 중 두 번, 매복 중 한 번, 헬기 추락과 비상착륙으로 두 번, 차량 이동 중 한 번…. 여섯 번 정도 되는 것 같네요.”
 
  — 영화에서 묘사되는 전장의 급박함과 실제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한국 영화는 감정 표출이 너무 심해요. 실제 교전에서는 임무 완수와 소대원들 안전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나요. 본인이 다쳤어도 다른 이가 알려주기 전까진 인식을 못 하는 경우도 있죠. 이에 반해 미국 영화는 전장 심리를 비교적 세밀히 반영하고 있죠.”
 
  남 전 원장은 소대장에 이어 항공장교를 맡아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단일 작전으로 1회에 27시간 동안 쉬지 않고 탑승 임무를 수행한 적도 있다. 하루는 남 전 원장의 어머니가 꿈속에 등장해 슬피 울었는데 덕분에 사고를 피하기도 했다.
 
  — 전쟁, 전장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생과 사가 엇갈리는 전쟁터에서 인간은 생존 본능을 발휘합니다. 어린이는 순식간에 청소년으로, 청소년은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군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사(戰士)가 돼갑니다. 전쟁터에서는 병사들의 계급보다는 참전 경험이 많은지가 더 중요하죠.”
 
  남 전 원장은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이유는 ‘상관에 대한 믿음’ ‘전우에 대한 믿음’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며 “이를 위해 실전과 같은 훈련을 부단히 해야 한다. 또 지휘관에게는 병사들을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려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남 전 원장은 부대원을 혹독하게 교육했다.
 
 
  하나회와의 갈등
 
  베트남전 파병을 마치고 돌아온 남 전 원장에게는 하나회와의 갈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회 소속 선배(육사 21~24기)들이 귀국 환영식을 열어줬다. 이 자리에서 다음 보직이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 현 수도방위사령부)라는 말이 나왔다.
 
  남 전 원장은 생도 시절 이미 하나회 모임에 속했다. 다만 그 모임이 ‘사조직’ 하나회인지는 몰랐다. 명망 있는 육사 4학년 생도가 3학년 생도를 추천하는 식으로 운영됐는데, 목적은 월(月) 1~2회 모여 ‘군인 정신 함양 방법’ ‘바람직한 생도 생활 자세’ 등을 토의하는 모임이었다. 남 전 원장도 4학년이 돼 졸업 직전 3학년 후배 한 명을 추천해 모임에 참가시켰다.
 
  한데 생도 때와는 달라진 모임의 분위기가 느껴져 이를 김용휴 장군에게 말했다. 그러자 호된 질책이 떨어졌다. 국방차관과 총무처(현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낸 김 장군은 남 전 원장의 군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다. 김 장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뭐든 따르겠다고 말했다. 남 전 원장은 예비군 교육을 주임무로 하다가 부대 규모를 확대하고 있던 ‘33전준사(현 17사단)’로 발령이 났다. 분명 요직은 아니었다.
 
  하나회는 남 전 원장을 ‘조직을 이탈한 배신자’로 규정했다. 남 전 원장의 ‘이탈’로 인해 기존의 하나회 구성원 중 그와 동기인 육사 25기와 한 기수 후배인 26기는 모두 교체됐다.
 
  — 하나회에 가입했다면 어떻게 됐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군은 군기, 사기, 단결을 바탕으로 국가를 지켜야 해요. ‘파당’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회, 장교단의 혼 병들게 해”
 
  — 하나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한민국 육군 장교단의 혼(魂)을 병들게 하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군의 중추신경인 지휘 체계를 극도로 와해시켰죠. 전투력 향상과 자기 노력보다는 막강한 실력자를 추종하도록 만드는 기막힌 현상을 불렀습니다. 위계질서를 문란하게 만들고 불공정한 인재 선발로 장교단의 질적 저하와 상호 불신을 초래했죠. 오늘날 반군(反軍) 풍토에도 일부 책임이 있습니다.”
 
  12·12와 5·18을 거치며 하나회 소속 육사 동기들은 남 전 원장이 장군으로 진급하기 전까지 기무사(현 방첩사)를 통해 감시하고 사사건건 진급과 보직을 방해했다. 하지만 남 전 원장은 고위직이 되고도 ‘하나회 출신’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1978년 8월 남 전 원장은 육군 장교 교육기관인 육군대학(육대)에 25기로 입교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이는 곧장 육대 교관 보직을 맡는다.
 
  12·12 당시 남 전 원장의 육사 동기이자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중령 추서)이 신군부 측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하고 만다. 김 소령의 시신은 쓰러진 자리에 사흘 동안 방치돼 있었다. 그는 군인의 정치 개입에 대해 비판했고 김오랑 소령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 하나회 눈 밖에 나는 행동을 또 한 것이다. 남 전 원장은 “김오랑 소령이 보인 모습이 바로 육사가 생도들에게 가르쳐온 ‘육사 혼’이었다”며 “이 때문에 김오랑 소령을 마음속 깊이 존경해 그의 묘비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5·18 당위성 알리는 순회 발표 거부
 
1972년 8월 신혼여행 당시 모습. 남 전 원장은 신혼여행 내내 잠만 자 미안한 마음에 인형을 아내에게 선물했다. 그는 이 인형이 자신의 두 딸로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1980년 육대 교관 시절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난데없이 교관 회의를 소집하더니 남 전 원장을 지목해 ‘광주 폭도들의 폭력 사태에 대한 무력 진압의 당위성’에 대해 순회 발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러자 남 전 원장은 “시위대 진압은 정당하고 합법적이어야 하며 공수부대 투입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독일 롬멜 장군을 존경하는 이유는 히틀러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순회 발표를 거부한다”고 했다.
 
  그다음 날 교관 직위 해임과 함께 제101보충대로 대기 명령이 났다. 보충대는 전역 대기 장소이다. 순회 발표 때 자신을 지목한 배경에는 ‘하나회를 배반한 남재준에 대한 징벌적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그는 추정한다.
 
  남 전 원장은 보충대 발령 소식을 듣고 군복을 벗고 무엇을 할지 한참 고민하며 힘들어했다. 아내는 그를 위로하며 “장교답게 살아야 한다, 내일은 또 내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신념으로 삼아 남은 25년 군 생활을 이어갔다.
 
  무보직 상태인 남 전 원장을 김용휴 장군이 박준병 보안사령관을 설득해 구제했다. 11사단장 리병구 장군도 힘을 보탰다. 전역 대기 상태에서 11사단 작전보좌관을 하던 남재준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한다. 진급 소식도 뒤늦게 접해 ‘자기가 진급된 것도 모르고 다니는 이상한 장교’라는 소리가 돌았다. 진급 자체보다는 장교 생활을 더 하고, 처자식을 조금 더 오래 먹여 살릴 수 있어 그리 기쁠 수가 없었다. 당시 육군 전체가 어수선한 시기여서 계급이 낮은 소령→중령 진급 대상자까지는 (신군부가 만든) 부적격 명단이 아직 정리되지 않아 다행히 진급하지 않았나 추정할 뿐이다.
 
  중령으로 진급해 동해안에서 대대장을 마쳤다. 이어 지금은 사라진 제1야전군사령부에서 인사 업무, 36사단 작전참모를 거쳐 국방부 동원계획장교가 됐다.
 
  남 전 원장은 아내 김은숙씨와 1972년 8월에 결혼해 두 딸을 두었다. 결혼식을 올리는 아침까지 밤을 새워 일했는데, 피곤한 나머지 신혼여행을 가서도 잠만 잤다. 너무나 미안해 아내에게 인형을 선물해줬다.
 
  중령 시절인 1986년 가을에는 동료들과 함께 네 가족이 서울 어린이대공원으로 가족 동반 야유회를 갔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족이 함께한 나들이였다.
 
  당시 남 전 원장은 대령 진급이 안 돼 전역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퇴근길에 인사하던 포장마차 주인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주인이 ‘먹고살 만큼은 번다’고 했다. 그도 군을 떠나면 포장마차를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퇴직금을 받으면 리어카를 하나 사 포장마차 정도는 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국방부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는 이 포장마차에 들러 주인을 거들며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령으로 진급했다는 발표가 났다.
 
  — 어떻게 된 겁니까.
 
  “육사 25기가 대령으로 진급을 하는 해가 1년씩 늦춰진 덕분이었습니다.”
 
  베트남전 때문에 육사 24기까지는 대령 진급이 기존보다 1년 빨랐다. 전후 고위급 장교단에 인사 적체가 생기면서 육사 25기부터는 대령 진급 시점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덕분에 남 전 원장은 대령 4차 진급이 아닌 3차로 진급했고 후일 임기제 장군이 아닌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 대장까지 진급할 수 있었다.
 
 
  “장군 된 것, 나자신도 이해 안 돼”
 
2005년 4월 7일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이 전역하자 부하들이 배웅하고 있다.
  남 전 원장은 “6·29선언으로 노태우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가시화될 무렵 하나회의 중심축이 변동되면서 그 와중에 제가 진급했다는 말도 나중에 들었지만 이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대령으로 진급해 11사단 참모장, 7사단 3연대장, 1군사령부 작전처에서 일했다. 한국군 현대화에 기틀을 마련한 818사업단에서도 활약했다. 1994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했다. 장군이 되자 남 전 원장의 아버지가 참으로 기뻐했는데 이런 모습은 남 전 원장이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고 회고한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군내 하나회 인맥에 대한 정리가 시작됐다. 1995년 소장, 1998년 중장, 2002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소장에서 중장까지는 2년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삼수를 해가며 육사에 입학하고, 하나회를 거부하는 바람에 고생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육군 총수가 됐다. 육사 23~24기 중 유능한 이들은 하나회의 눈 밖에 나 중령~대령에서 군복을 벗어야 했다. 남 전 원장은 하나회를 이끈 ‘군인 전두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지도자 전두환’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다.
 
  — 총장이 되리라 상상은 해보셨습니까.
 
  “저처럼 산 사람이 장군이 된다는 것 자체가 저 자신부터 이해가 안 됩니다. 앞서 말했듯 총장은 제 관심사가 아니었어요. 제 꿈은 ‘대한민국 장교’였습니다. 주어진 임무와 주어진 계급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죠. 물론 삼수를 하지 않았으면 그 이후의 시운(時運)을 타지 못했을 겁니다. 운명적인 길을 걸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은 군대에 취직한 게 아니다”
 
  — 군 생활 중 가장 기쁠 때와 가장 슬플 때는 언제입니까.
 
  “부하가 전사하거나 순직, 다쳤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가장 기쁠 때는 부하들이 스스로 고난을 극복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청와대와 싸운 육군참모총장 때문에 그를 보좌했던 일부 장교들은 불이익을 당했다. 유능한 장교들이 한직으로 내쫓겼고 일부는 구속되기까지 했다. 남 전 원장은 “유능한 사람들인데 시기, 시대를 그렇게 만나 피해를 많이 봤다. 상당히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 육군 총장 시절 공과 사를 지나치게 구분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장교, 군인은 군대에 취직한 게 아닙니다. 복무하는 겁니다. 복무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취직한 사람은 사익이 먼저고요. 장교는 공과 사를 구분해 개인보다는 국익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남 전 원장의 아내는 관용차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 장교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군인은 조국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능한 장교는 적보다 무서운 존재입니다.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는 장교는 하루라도 빨리 군복을 벗는 게 국가에 마지막으로 충성하는 길입니다.”
 
  — 군인은 승부근성도 강해야 하지 않습니까.
 
  “군인은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목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싸우는 겁니다. 군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승리욕이 아니라 오직 ‘임무 완수에 대한 헌신’입니다.
 
  승리욕이 강했던 대표적인 장수가 바로 원균입니다. 승부근성이 강한 이들은 공명심 또한 많습니다. 공명심은 곧 부하들의 희생도 불사합니다. 자기 전공(戰功)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전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죠. 문제는 승리욕, 공명심이 강한 이들은 적과 싸우는 게 아니라 동료들과 더 즐겨 싸운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월남에서 온몸으로 경험한 내용입니다.”
 
  남 전 원장은 “소위의 꿈은 세계 최고의 소대장 되는 것이어야 하고, 대령은 세계 최고의 대령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장군이 목표가 돼선 안 된다”고 했다.
 
 
  전방 관사 난방비 폭탄 사건
 
국정원장 시절 모습.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국정원 직원들은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최고의 전사들”이라고 말했다. 사진=뉴시스
  전방은 대체로 겨울철 기온이 낮기 에 난방비 부담이 크다. 이 때문에 육군은 부대 내 관사 난방비를 지원해 왔다. 그런데 남 전 원장이 총장이 된 후 ‘난방비 지원’이 갑자기 끊겼다. 감사원의 지적 때문이었다. 이후 겨울철 난방비가 100만 원 이상 나오는 군인 가족이 속출했다. 이를 두고 “총장 때문에 ‘난방비 폭탄’을 맞았다”는 말이 나왔다.
 
  — 육군 총장 시절 ‘전방 관사 난방비 폭탄 사건’을 압니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어요. 당시 감사원이 부대 내 관사 난방비 지원을 문제 삼았어요. 이에 국방부는 난방비 지원 중단 지침을 내렸고요. 요지는 ‘관사에는 군인 본인만이 아니라 군인이 아닌 사람(가족)이 더 많이 사는데, 왜 난방비를 지원하느냐’였어요. 말이 됩니까? 가스를 누가 얼마나 썼는지 일일이 계산합니까?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이 국방부가 내린 이 공문을 전결로 처리한 거였죠. 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난방비 폭탄’이 떨어졌죠. 이를 알고 오히려 국방부 지시를 철회시킨 게 접니다.”
 
  남재준 전 원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당내 대선 후보 경선을 할 때부터 도왔다. 박근혜 후보가 경선에서 탈락하자 이명박 당시 후보 측에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거절했다.
 
  — 어떻게 해서 박근혜 후보를 돕게 된 겁니까.
 
  “박 후보 측에서 몇 차례 요청이 왔어요. 처음엔 제가 관심이 없었죠. 저는 정치, 특히 한국의 현실 정치에는 흥미도 소질도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장군들끼리 주 1회씩 모여 주제를 정해놓고 공부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에 박 후보를 한 달에 한 번씩 초청했습니다.”
 
  이 모임은 5년 5개월간 지속됐다.
 
  — 국정원장직은 어떻게 맡게 됐습니까.
 
  “어떠한 직책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2월 28일 저녁 느닷없이 박 대통령이 전화해 받아보니 국정원장으로 내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전에 제 의향을 묻지도 않았어요.”
 
  — 왜 수락했습니까.
 
  “자유민주체제로 남북통일을 해 이 혼란과 비극을 끝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죠.”
 

  — 군과 국정원은 어떻게 다릅니까.
 
  “국가는 생존과 번영을 지속해야 해요. 군이 국가 생존을 맡는다면, 국정원은 생존과 번영 모두를 책임지고 있죠. 앞으로 국정원의 역할과 중요성은 더 커질 겁니다. 이러한 국정원을 정권 안보에 써먹으면 나라가 망하는 겁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사심 없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도록만 해준다면 이들은 온몸을 던져 조국에 헌신할 우수한 정보 전사들입니다.”
 
  —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은 어떻게 세상에 공개됐습니까.
 
  “국정원장 부임 직후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과 관련해 내사 진행 상황을 보고 받았습니다. 전임 원장 시절, 관련 사건을 인지하고 내사해 상당한 수준의 범죄 증거를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다만 당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며 원장이 교체된 시기였고 불과 2개월 전인 2013년 1월 국정원 대공수사요원이 국가보안법 사범을 두고 미행하다가 되려 공중전화 부스에 갇혀 경찰에 연행된 사건이 있었어요. 관련 혐의자 미행 감시가 노출된 상황이 언론에 보도돼 담당 수사관들이 다소 사기가 떨어져 있는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을 수사하던 관할 지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적극적인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 제2, 제3의 이석기가 있다고 보십니까.
 
  “물어볼 것도 없어요. 지금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잖아요. 우리나라는 반국가 활동가·간첩들에게는 지상낙원입니다.”
 
  — 이석기 사건만큼 중대하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제일 좋은 방법은 초기에 핵을 제거하는 겁니다. 꼭 커진 다음에야 제거하려니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거죠. 암세포를 초기에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몸으로 전이돼 결국 나중에는 죽습니다. 공산주의는 암이에요.”
 
  — 국정원장 시절 겪은 일은 남북통일 이후에 밝히겠다고 했는데 그때가 되면 너무 늦는 것 아닙니까. 비망록으로도 남길 생각 없으십니까.
 
  “기자분은 늦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늦다고 생각 안 해요. 그러니까 지금 기자의 질문은 ‘당신 생전에 통일이 안 될 것 같은데 자료가 없어지기 전에 미리 뭔가 남겨놔야 하는 거 아니냐’ 이거 아닙니까.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는 이적행위”
 

  — 2024년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됩니다.
 
  “간첩 색출 금지 조치입니다. 현대에는 간첩들이 과거와 달리 해외를 통해 우회 침투 방식을 활용합니다. 대공수사는 기본적으로 국정원이 해외에서 첩보를 수집하고 이를 원내 국내수사국으로 이첩해 수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2024년부터는 해외 첩보 수집은 국정원이 하고 국내 수사는 경찰이 한다고 합니다. 제대로 되겠습니까?
 
  2001년 미국 9·11테러 당시에도 CIA는 테러 첩보를 입수했으나 국내 수사를 담당한 FBI와 협조가 안 돼 수많은 희생자가 났습니다. 북한의 대남전략을 고려할 때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는 이적행위에 준하는 범죄로 기록될 겁니다.”
 
  —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국정원장직을 맡으실 겁니까.
 
  “저는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어요. 하느님이 제게 어떤 직책을 다시 해볼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대대장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럼에도 운명이 다시 국정원으로 이끈다면 기꺼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그리운 국정원 원우들과 함께하겠습니다.”
 
  남 전 원장은 2014년 5월 21일 국정원장 고별사에서 “(국정원 직원들은) 밝고 희망찬 내일을 위해 영하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조국의 새벽을 열어가는 호국의 전사들”이라며 “마음은 여러분의 곁에 남겨두고 몸만 떠난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역대 원장 중 애국심이 가장 강하셨던 원장님, 우리 원과 부하를 진정으로 사랑하셨던 원장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원장님”이라고 화답했다.
 
  — 국방장관, 국정원장 중 꼭 하나를 해야 한다면 무얼 하겠습니까.
 
  “당연히 국방부 장관이죠. 총장 시절 정권과 싸우느라 못 해본 일을 꼭 해보고 싶으니까요.”
 
  — 군인 남재준, 국정원장 남재준은 100점 만점에 몇 점입니까.
 
  “그건 질문이 안 돼요. 그럼 기자분은 기자로서 자신에게 몇 점을 줄 생각입니까?”
 
  — 40점 주고 싶습니다.
 
  “상당히 겸손하시네. 저는 주어진 임무와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점수는 제 관심사가 아니에요.”
 
  남 전 원장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당했기에 결국 실패한 지도자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는 이에 대해 답하지 않았다. 대신 “박 대통령이 부정한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은 것만은 자신이 확실히 보장한다. 박 대통령에게 뇌물죄를 적용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은 없었다”
 
  —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한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좌파 대통령인데 국익을 위해서라면 신념을 포기할 줄도 알았어요. 제주해군기지, 이라크전 파병, 한미 FTA 등. 그 점을 높게 평가해요. 그런데 문재인이 노무현의 후계자다? 절대 동의할 수 없어요. 문 전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은 없었어요. 문재인 정권하에서는 가석방 심사도 제가 거부했습니다.”
 
  — 최근 육사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을 놓고 시끄럽습니다.
 
  “육사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지, 한민족 사관학교가 아니에요. 흉상은 독립기념관으로 모시면 됩니다.”
 
 
  北 무인기 침범으로 이미 9‧19군사합의는 파기
 
  — 9‧19남북군사합의를 두고 ‘유지해야 한다’ ‘효력 정지해야 한다’는 논쟁이 있습니다.
 
  “지난해 북한 무인기가 수도권을 침범한 것만 보더라도 9‧19군사합의는 이미 파기된 것입니다. 9‧19군사합의는 반역에 준하는 행위입니다. 9‧19군사합의를 두고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 왜 그렇습니까.
 
  “한미연합전력의 절대 우세인 대북(對北) 감시정찰 자산을 운용하는 데 제한을 가져왔습니다. 이 때문에 북한의 기습 포격이나 도발에 대비할 수 있는 사전 준비 태세가 무력화됐습니다.
 
  또 북한이 우리보다 GP가 더 많음에도 ‘비율’에 따른 철수가 아닌 ‘동수(同數) 철수’라는 미명하에 우리 GP를 더 많이 철수시켜 북한의 전력 우위를 가져다줬습니다. 여기에 핵‧화생방 능력 등 북한이 우세한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남재준 전 원장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유혈을 회피하고자 하는 측은 유혈을 불사하는 측에 반드시 정복된다고 주장했다”며 “북한은 이미 우리에게 핵을 사용하겠다고 한 상황에서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식의 친북적 주장을 펴는 이들은 북한만을 이롭게 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 우리 군이 북핵‧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3축 체계를 도입한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일 것 같습니다.
 
  “모든 것에 완벽하게 대응하는 수단을 갖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한 여건에 맞게 피해를 최소화하며 대응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킬체인이나 대량응징보복(KMPR) 등을 보완‧발전해 나가야죠.”
 
  ― 민간 차원에서는 어떻게 대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북한이 핵을 쏘면 우리는 다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히로시마 가봤나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사람들 잘살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공격을 한다면 인명피해가 물론 많겠습니다만 국민적 민방위 태세를 갖춰 피해를 최소화하면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지금 서울과 같은 곳은 지하시설을 잘 활용하면 북한의 핵공격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핵폭발이 일어나도 일주일만 버티면 방사능 오염이 대부분 사라집니다. 겁만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대비 태세를 갖추는 게 중요합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남재준 전 원장이 가석방된다는 소식에 교도관들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의 혹독한 자기 절제력과 충무공 이순신을 연상케 하는 모습을 더는 가까이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어머니는 남 전 원장에게 “사람을 대할 때는 야박하게 굴지 말고 허리를 곧게 펴고 자세를 바로 하며 시선을 멀리 두라”고 말씀하셨다. 남 전 원장은 “어머님은 내 가슴 속에 함께 살아 숨 쉬고 계신다”고 말한다.
 
  — 아내에게 언제 제일 고맙고 미안하십니까.
 
  “전 ‘군인은 조국에, 군인의 아내는 남편에게 복무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온 자격 미달의 불량품 남편입니다. 나를 버리지 않고 변함없는 애정으로 가정과 내 곁을 지켜줘 항상 미안하고 감사하죠.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은 내 아내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 남편, 아들, 아빠, 할아버지로서 점수를 매긴다면요.
 
  “남편으로서는 0점이 아니고 마이너스. 아들로서는 빵점, 아비로서도 빵점…. 손자들한테는 점수를 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 전 원장에게 ‘회고록이 탄생하는 데 기여한 일등 공신이 누구냐’고 묻자 “문재인”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회고록에는 그가 겪은 아픔도 담겨있다.
 
  36사단 작전참모(중령)로 근무할 때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은 유당불내증이 있었다. 특수분유가 필요했다. 백방으로 뛰었지만 구할 수 없었다. 미군 PX에서 혹시 구할 수 있을까 싶어 몇 번을 망설이다 한미연합사에 근무하고 있던 하나회 동기생에게 부탁해 한 통을 구했다. 하지만 아들은 분유를 1/3통도 채 먹지 못하고 곁을 떠났다.
 
  남 전 원장은 아들이 먹다 남은 분유를 육군참모총장으로 전역할 때까지 20년 동안 갖고 있다. 군복을 벗으면서 분유는 마음에 담고 통은 버렸다고 했다.
 
  남재준 전 원장의 목표는 후세를 위해 남은 삶을 사는 것이다. 지난 10월 13일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3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 세대에 빚을 진 세대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도 자신이 잘사는 것보다는 여러분 후손이 살아갈 미래의 조국이 보다 더 독자적인 역사를 영위해가면서 찬란한 문명을, 그리고 인권과 자유를 세워나갈 수 있는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의 부모님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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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도 문죄앙    (2023-12-03) 찬성 : 15   반대 : 0
이 기사는 윤석열 대통령도 반드시 읽게 만들어 문재인이가 얼마나 악랄하고 나쁜놈인지를 알게 만들어야합니다. 대한민국 공산화를 꿈꾸던 문재인은 반드시 구속시켜야합니다.
  Tfl82359xoxo    (2023-11-28) 찬성 : 37   반대 : 0
우리 모두 나라같지 않은 삶은 소대가리 시절을 잘 버텨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자손들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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