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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터뷰

‘서거 100주년’ 구스타브 에펠의 5대손 사빈 에펠

“에펠은 휴머니스트… 에펠탑 건설 과정에서 사망자는 단 한 명”

글 : 유민호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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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특별한 매력이 숨어 있다. 단순한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기쁨이 에펠탑에 배어 있다”(구스타브 에펠)
⊙ “에펠탑 건립 당시에는 ‘해골 종탑’ ‘철제 다리로 쌓은 연약한 피라미드’ ‘짓다가 도중에 그만둔 공장 굴뚝’이라는 비판받아”
⊙ “건립 6개월 만에 투자금 전부 갚고 흑자 전환한 성공한 비즈니스”
⊙ 에펠 집안은 원래 독일계… 현실적이고 치밀하고 합리적인 캐릭터
⊙ 자유의 여신상 내부 골조도 구스타브 에펠이 제작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구스타브 에펠의 5대손으로 ‘구스타브 에펠 후손 재단’ 책임자인 사빈 에펠. 사진=ADGE
  “구스타브 에펠 사후(死後)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시작됐다. 에펠탑 안에서 시작됐으니까, 파리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하기 바란다. 함께 차나 나누자.”
 
  연락을 받은 것은 한 달 전 하늘 위에서다. 베트남에서 도쿄로 날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받은 이메일이다. 와이파이 요금 10달러만 추가하면 하늘에서의 인터넷도 가능한 시대다.
 
  필자를 파리로 초대한 인물은 사빈 에펠(Savin Yeatman Eiffel·이하 사빈). 그 유명한 에펠탑을 세운 구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1832~1923년. 이하 구스타브)의 직계(直系) 5대손(孫)인 프랑스 예술가다.
 
  사빈은 팬데믹 종식이 본격화되던 지난해 6월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당시 필자는 어두운 지구를 밝게 만들어줄 글로벌 아이콘을 찾았다. 결론은 파리였다. 그리고 세계인 대부분의 생각이 그러하듯 ‘파리=에펠탑’이었다. 이게 사빈을 만나러 간 이유다.
 
  15개월 만에 다시 만난 사빈은 구스타브 에펠 서거(逝去) 100주년 기념 에펠탑 사진전 기획자로 나타났다. 이런 일은 후손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 피를 이어받았더라도 조상과 관련된 일을 무심하게 여기는 이도 많다. 에펠탑 사진전은 유네스코(UNESCO)와의 공동 기획으로, ‘에펠, 언제나 드높이(Eiffel, always higher!)’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
 
  구스타브는 1832년생으로 1923년에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1848년 2월혁명, 1870년 보불(普佛)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등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인간이 가진 유전자의 최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데, 시련과 긴장은 창조와 사랑으로 연결된다. 구스타브가 사는 동안 프랑스는 전 세계 문명·문화의 중심으로 변신한다. 구스타브는 이 같은 시기, 시대의 최첨단 파이오니어이자 주인공이었다.
 
 
  ‘에펠’ 집안은 독일계
 
구스타브 에펠. 사진=ADGE
  사실 사빈은 필자에게는 다소 과분한 인물이다. 324m의 철제 에펠탑이 세워진 것은 1889년이다. 에펠탑은 자유·평등·박애를 이념으로 한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 상징물로 세워졌다. 멀리 보면 1789년 대혁명, 이어 19세기 유럽을 석권한 아르누보(Art Nouveau) 문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얼굴 에펠탑, 그리고 오늘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250년 근현대사가 구스타브의 5대손 사빈에게 집약돼 있다. 그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의 후손과 만난다는 것 자체가 필자에게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자 기쁨이었다. 줌(Zoom) 비디오를 통한 만남이었지만, 그동안 필자가 인터뷰한 100여 명의 뉴스메이커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껴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프랑스인에 대해 ‘간단한 것은 복잡하게, 복잡한 것은 황당하게 만드는 국민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A에서 B로 통하는 지름길을 버리고, A-C-D로 둘러 가다가 결국은 B가 아닌 Z로 가버리는 식이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철학적이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복잡하며 뭔가 어두운 느낌이 든다.
 
  필자가 접한 사빈은 프랑스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캐릭터와는 달랐다. 시원하게 하늘로 쭉 뻗은 심플 아이콘 에펠탑 이미지라고 할까? 에펠가(家)가 원래 독일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에펠가는 18세기에 프랑스로 이민 오면서 원래 독일의 성(姓) ‘Eifel’을 프랑스식 ‘Eiffel’로 바꿨다고 한다.
 
  파리에 다녀가라는 사빈의 메일을 받은 즉시 필자는 남중국해 하늘에서 답장을 보냈다.
 
  “올해 중에 꼭 파리에 들르겠다. 그러나 그 전에 당신의 5대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줌을 통한 사빈과의 인터뷰는 그가 그리스 바캉스를 끝낸 직후인 9월 초에 이뤄졌다. 관광객이 없는 작은 섬에서 일주일을 보냈다고 한다. 오랜만에 본 사빈의 얼굴은 에게해의 불타는 태양처럼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구스타브 에펠 후손재단’
 
프랑스에서는 ‘에펠 서거 100주년’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사진=ADGE
  ―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다. 파리가 다시 관광객으로 넘친다는 보도가 있던데 어떤가.
 
  “팬데믹 이전 상황으로 돌아갔다는 보도를 들었다. 파리 전체 관광객의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다. 에펠탑 방문객의 경우 팬데믹 이전에는 1년 700만 명에 달했다. 조형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이다. 올해는 구스타브 에펠 사진전과 더불어 찾는 사람이 더 많다. 현재 분위기로 보면, 700만 명은 넘어설 듯하다.”
 
  ― 구스타브 서거 100주년과 관련해 어떤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가.
 
  “프랑스는 물론 유럽과 전 세계 신문·방송이 구스타브 100주년에 관심을 갖고 있다. 프랑스 내 전시는 파리만이 아니라, 보르도·니스·디종을 비롯해 구스타브의 흔적이 새겨진 10개 도시를 돌면서 진행될 것이다.
 
  나의 경우, ‘구스타브 에펠 후손재단(ADGE·Association des Descendants de Gustave Eiffel)’ 책임자로서 인터뷰에도 응해야 하고, 또한 에펠탑에서 진행 중인 크고 작은 사진전 준비로 조금 바쁘다. 에펠탑 사진전은 무료다. 일단 에펠탑 내부로 통하는 보안검사를 통과한 뒤 곧바로 구스타브와 만날 수 있도록 배치했다. 현재 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구스타브와 에펠탑에 관한 토론과 논의도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 구스타브 100주년을 어떤 관점하에서 다루고 있는지.
 
  “연대기적(年代記的) 차원의 전시가 아니다. 현재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은 에펠탑을 너무도 당연시하면서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구스타브 생전의 에펠탑은 기존 예술가나 건축가들의 비난과 조롱거리였다.
 
  고전파 문화 기준에서, 에펠탑은 무시되고 코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1875년 파리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한 ‘팔레 가르니에(Palais Garnier)’는 좋은 본보기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Charles Garnier)’가 만든 19세기 프랑스 고전 건축물의 얼굴로 현재의 파리오페라극장이다. 팔레 가르니에는 구스타브가 에펠탑을 세울 당시 건축미의 최상·최적의 기준이었다.
 
  에펠탑은 정반대다. 대리석에다 고전미를 더한 오페라극장에 맞선, 철골 재료에다 내부 장식 하나 없이 하늘로 치솟은 뻥 뚫린 건물이다. 권위와 품격의 고전 건물에 대한 도전·도발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문화인이나 지식인 머릿속에 ‘팔레 가르니에=미(美)의 기준’이던 시기에 등장한 문제아, 이단(異端)이 바로 에펠탑이다.”
 
 
  ‘해골 종탑’
 
당시로서는 첨단 소재였던 강철을 사용해 철교를 만들었던 에펠의 경험은 에펠탑으로 이어졌다. 사진=ADGE
  너무도 프랑스적인 발상이지만, ‘구스타브가 공학자(Engineer)냐, 건축가(Architect)냐’에 관한 논쟁이 있다. 고강도 철근을 이용해 과학적 기법으로 에펠탑을 세웠다는 점에서 ‘구스타브=공학자’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물 에펠탑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에서 공학을 응용했을 뿐, 근본은 건축학에서 시작했다고 보는 점에서는 ‘구스타브=건축가’라 부를 수 있다.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공학·건축학 논쟁은 프랑스에서 아주 진지한 논쟁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반발이 있었는가.
 
  “당시 파리를 대표하던 신문(Le Temps)에 실린 프랑스 지식인의 집단 기고문은 좋은 본보기다. 건축·음악·미술·과학에 관한 당대의 문화 지식인 10여 명이 〈구스타브 씨에게 보내는 에펠탑 반대 편지〉라는 연명(連名) 의견서를 기고한다. 기고문은 1886년 말부터 1887년 2월 초까지 연재됐다. 파리오페라극장을 만든 샤를 가르니에가 그 핵심이다. 그들은 기고문을 통해 에펠탑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1860년대 인상주의 화풍(畵風)을 비난한 당대 고전주의 화가들의 생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신문에 나온 에펠탑 반대파들의 표현을 보자. ‘너무도 비극적인 거리의 등불’ ‘해골 종탑’ ‘기형적인 모습의 운동선수용 건물’ ‘철제 다리로 쌓은 연약한 피라미드’ ‘짓다가 도중에 그만둔 공장 굴뚝’… 입에 담기도 어려운 비난이 신문지면 전체를 메웠다.”
 
 
  6개월 만에 흑자 달성
 
  ― 구스타브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에펠탑 반대 기고문을 실은 신문은 기존의 문화 지식인들을 대변하는 매체였다. 같은 신문사가 구스타브에게 에펠탑 반대자에 대한 의견이 뭐냐는 식의 인터뷰 요청을 했다. 여차하면 대중적 비난과 함께 공사가 중단될 듯한 분위기였다. 1887년 2월 17일, 구스타브는 집단 기고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밝혔다.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특별한 매력이 숨어 있다. 단순한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기쁨이 에펠탑에 배어 있다.’
 
  구스타브의 생각은 1889년 에펠탑이 문을 연 순간 증명됐다. 1년 만에 200만 명이 에펠탑을 찾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파리지앵은 에펠탑을 파리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수익성도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관광객과 각종 비즈니스를 통해 건립 10년쯤 뒤부터 에펠탑 흑자 경영이 가능할 것이라고 구스타브는 전망했다. 그러나 문을 연 뒤 불과 6개월 만에 투자금을 전부 갚고, 흑자 체제에 들어선다. 구스타브가 돈방석에 앉은 것은 물론이다. 에펠탑은 공학·건축학 차원만이 아니라, 수익성을 6개월 만에 증명해보인 세기적인 비즈니스 모델이다.
 
  지금으로서는 너무도 당연시하지만, 134년 전 에펠탑에 대한 평가·반응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이런 관점하에서, 나는 당시의 분위기와 환경을 이번 100주년 전시회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에펠탑은 원래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졌다. 1889년 건립된 후 20년이 지나면 철거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프랑스와 세계의 뜨거운 반응 덕분에 살아남았다. 철거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문화인 대부분은 건립과 동시에 가까운 시일 내에 탑이 무너질 것이라 믿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지나치게 앞서 나갈 경우 친구는 없고 적만 넘친다. ‘에펠탑=파리=프랑스’로 가기까지의 시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아날로그 시대에 만든 324m의 철제탑
 
  ― 애플 아이폰이 등장한 것이 2007년이다. 손가락 하나로 움직이는 세상이 되면서 사람들의 생각도 급변하고 있다. 세대별 에펠탑에 대한 인식도 다를 듯한데.
 
  “에펠탑 건립 당시의 건설 환경은 이번에 내가 주목한 전시관의 하이라이트 테마 중 하나다. 19세기 말 전기가 막 등장했지만, 당시는 컴퓨터나 첨단 과학 기술이 없던 아날로그 시대였다. 324m 철제탑을 만들기 위한 과학과 수학이 전부 사람 머리와 손으로 이뤄진 셈이다. 세대가 변하고 모바일에 이어 더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인류 전체에 통하는 기본 유전자가 있다. 에펠탑은 변화를 창조하고, 시련을 극복해나가는 인류 유전자에 어울리는 최적의 증거이자 본보기다. 134년 전 척박한 환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세대를 초월한 인류 모두의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앞으로 100년 뒤 세대에도 통할 인류의 영원한 역사와 감동이 에펠탑에 배어 있다.”
 
  필자는 최근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숙소는 프놈펜 한복판에 들어선 49층 호텔이었다. 캄보디아 초유의 초고층 빌딩으로 2년 전 중국 자본에 의해 세워진 현대식 건물이다. 여러 가지로 편리했지만, 레스토랑 내 캄보디아인 스태프의 한마디를 들은 뒤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건물을 지으면서 한 층에 한 명씩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전부 200여 명의 캄보디아 노동자가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했는데 그중 50명이 추락사했다.”
 
  중국 건설업자가 비용을 아끼기 위해 현장 안전을 무시한 결과라고 한다. 호텔에서 만난 이집트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자 “4500년 전 피라미드 건설 당시에도 1000명 단위의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고 했다. 높고 크게 만드는 과정에서 사고는 따를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구스타브는 건설 현장 안전 문제에서도 파이오니어로 평가된다. 그는 누구보다도 건설 노동자의 안전 문제를 고려하면서 설계와 건설에 임했다고 한다. 사빈의 말을 들어보자.
 
 
  “스스로를 건설 노동자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
 
에펠탑 공사 현장. 현장에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고 재료 수송용 시설에서 사고로 한 명이 죽었다. 사진=ADGE
  “에펠탑 건립과 관련한 사망자는 딱 한 명이다. 에펠탑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일어난 사고사다. 건설 현장에서 떨어진 곳에 들어선 재료 수송용 시설이 추락하면서 노동자 한 명이 사망했다. 따라서 엄밀히 얘기하자면 에펠탑 건설 현장에서의 사망자 수는 제로다. 사고는 있었지만, 사망자 한 명은 건설 현장 바깥 재료 시설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에펠탑은 당대의 아이콘인 동시에 건설 현장 안전신화를 창조해낸 인류 건축사의 신기원에 해당된다.
 
  20세기 초 세계 곳곳에서 초대형 건물이 들어서는데, 베일에 가려진 사망자 숫자는 엄청나다. 21세기에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중동에 건설된 초고층 건물의 경우 건설 현장 사망자가 수백 명에 달한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세워졌지만, 에펠탑 건설 현장 사망자는 사실상 제로다. 구스타브는 건축 그 자체만이 아니라, 건설 현장 노동자들의 안전 문제를 중시한 인물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건설 노동자를 중시 여기는 배려심,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세가 가장 중요한 배경이다. 구스타브는 부자 출신 공학가·건축가가 아니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인물로, 본인 스스로도 건설 노동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정(情)이 남달랐다. 설계를 단순하게 해서 건설 과정이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자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핵심은 건설 노동자에 대한 배려다. 결과적으로 안전제일주의로 연결된 것이다. 구스타브가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500m 교량 건설을 할 때, 현장 노동자가 공사 중 물에 빠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구스타브는 직접 물에 뛰어들어 노동자를 구했다. 안전제일주의를 위해, 노동자에게 엄격한 안전수칙을 요구했다. 현장에서 술을 마시거나, 음주 상태에서의 작업을 절대 금했다.”
 
 
  “8만 개의 조립식 철재 동원”
 
자유의 여신상의 내부 골조도 구스타브 에펠이 만들었다. 사진=ADGE
  구스타브는 조립식(Prefabrication) 건축 공법의 선구자로 통한다. 설계를 바탕으로 한 건축 재료를 공장에서 미리 생산한 뒤, 현장에서는 단순히 연결하고 조합하는 식의 공법이다. 대리석이나 나무가 아닌, 철제로 된 조립식 다리 건설을 선보인 뒤 창조한, 최고·최대의 결과물이 바로 에펠탑인 셈이다.
 
  ― 조립식 공법도 건설 현장에서의 안전 확보에 공헌했다고 보는가.
 
  “당연하다. 이미 만들어진 재료를 현장에서 연결하는 공법이란 점에서 건설 현장 사고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물론 프랑스 장인(匠人)정신에 기초한 꼼꼼한 일처리와 정확한 수치로 나타내는 구스타브 공법을 통한 조립식 건설이다. 마치 게임을 하듯, 철제 조립물을 연결하면서 쌓아 올라갔다. 비용 절감은 조립식 철제공법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당시 최첨단 재료였기는 하지만, 기존의 돌이나 목재에 비해 저렴했다. 이동 비용이 적고 공급망도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에펠탑은 전부 8만 개의 조립식 철재가 동원됐다. 편리하고도 안전하며 빠른 공법, 나아가 저렴한 건설비용은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물 응모에 당선된 이유 중 하나다.”
 
  ― 구스타브가 미국 자유의 여신상에도 관계했다고 들었다.
 
  “뉴욕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미국 독립 100주년에 맞춰 헌정(獻呈)된 프랑스의 선물이다. 조각가 프레데리크 바르톨디(Frederic Bartholdi)가 만들었지만, 내부의 철골 구조는 구스타브가 창조해냈다. 밖에서 보면 전혀 안 보이지만, 자유의 여신 내부는 교량을 연결한 듯한 철제구조로 되어 있다. 에펠탑 같은 철제 기반이 자유의 여신상의 내부다. 구스타브 생각과 명성은 에펠탑을 만들기 전에 이미 증명됐다.”
 
 
  “강인한 어머니의 영향받아”
 
에펠의 가족들. 에펠은 독일 출신 이민자의 후예였다. 사진=ADGE
  ― 구스타브 개인의 삶에 대해 알고 싶다.
 
  “구스타브는 부르고뉴 지방 디종 출신이다. 프랑스인 사이에서 디종 사람은 ‘발을 땅에 붙이고 사는 사람’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현실적이고도 매일 하나씩 확인·점검하면서 살아가는 캐릭터다. 그러나 독주가 아니라 협업(協業)을 중시 여긴다.
 
  구스타브는 이 같은 이미지에 걸맞은 인물이다. 건축물과 관련해 보면, 흥미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일이 아니다. 철저한 계산과 주변 상황 나아가 비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에펠탑이 탄생한 것이다. 에펠탑은 기존에 대한 반발이나 슬로건으로서의 창조가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도출된 결과로서, 나아가 수익을 보장할 비즈니스였다고 볼 수 있다. 이노베이션(Innovation)은 이 같은 과정에서 도출됐다. 구스타브는 주변 동료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가령 건설기간 같은 것도 ‘무조건 빨리’가 아니라, 동료들 의견에 따르면서 진행해나갔다. 현실적이며 철저하고, 협업에 충실한 디종 캐릭터가 배경에 있다고 본다.”
 

  ― 구스타브를 특별한 인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어릴 때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특별한 것은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본다. 어머니는 당대에는 극히 드문 비즈니스 우먼이었다. 석탄을 사고파는 일을 하는 여장부(女丈夫)라고 보면 된다. 원래 나폴레옹 기병대에 복무했던 아버지도 어머니의 일을 도우면서 생활했다.
 
  소년 구스타브에 대한 어머니의 교육은 가혹했다고 보면 된다. 체벌(體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강인한 어머니를 보면서 구스타브도 독립적인 사고를 일찍부터 갖게 됐다는 점에 있다. 환상이 아닌, 사물의 실체를 이해하는 판단력도 갖게 됐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만, 현실에 기초한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능률적인 캐릭터로 성장했다.”
 
 
  말년에는 과학자로 활동
 
에펠은 항공기에 대한 공기의 저항을 연구하며 말년을 보냈다. 사진=ADGE
  ― 에펠 후손으로 자랑스럽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로 바쁠 듯하다. ADGE 책임자로, 한국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현재 선보이는 에펠탑 구스타브 100주년 전시관을 프랑스만이 아닌, 해외로 확대할 생각이다. 구스타브와 에펠탑은 프랑스만이 아닌, 전 세계의 관심사라고 믿는다. 여러 나라에 갈 예정인데, 한국에도 갈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100주년 기념을 함께하면서, 에펠탑에 관한 한국인의 기억과 추억도 확장할 수 있을 듯하다.
 
  에펠탑은 100년 전은 물론, 100년 뒤에도 세계를 빛낼 인류의 유산이다. 프랑스와 파리가 사라진다 해도 에펠은 남을 것이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살아남을 영혼불멸 아이콘이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다. 파리에 들를 경우 에펠탑 전시관에 반드시 들르기를 바란다.”
 
  구스타브는 명성과 부(富)를 얻었지만 60세 이후 ‘제2의 인생’에 들어섰다. 과학자로서의 길이었다.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그는 과학에 전념했다. 비행기 공기저항 분야가 과학자 구스타브의 핵심 관심사였다. 이 과정에서 젊은 과학자를 후원하고, 과학단체에도 엄청난 기부를 했다. 필자가 보기에 구브타브는 아이폰의 스티브 잡스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다이너마이트의 노벨을 합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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