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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우익 유튜버’ 김영민

“右翼은 빛과 소금, 左翼은 빚과 세금”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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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편향 연예계에서 대놓고 ‘우익’ 표방… ‘내시십분’ 유튜브 개설 3년 6개월 만에 구독자 35만 명, 조회수 1억 회 이상 달성
⊙ IMF 사태 전후해 집안 망해… 보일러 설비 보조 일 등 하면서 검정고시
⊙ “이재명 보면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에 생긴 외상을 극복하지 않고 그냥 그걸 덧나도록 방치했구나’ 싶어”
⊙ “右성향 발언을 하면 바로 ‘컷’ 당하니까 미리 위축돼… 광우병 선동 가담했던 연예인들은 아직도 큰소리치며 활동”
⊙ “뇌피셜, 사실 반 소문 반, 이런 이미지가 우익 유튜버의 본령으로 굳어지는 걸 전 용납할 수 없어”
⊙ “돈을 힘들게 벌어봐서 연예인이라는 사실이 행복, 유튜브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사진=조선DB
  셰익스피어를 비롯, 고전 희곡(戱曲)에는 광대(廣大)가 자주 등장한다. 광대는 주인공이 체면, 관습, 얽힌 인간관계 때문에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그대로 지른다. 그들은 유머로 포장해 사람들의 속마음을 밖으로 드러내고, 인간 심리의 내면을 관통한다. 웃음이란 관습을 비틀 때 생겨나는 법. 그래서 희극인(喜劇人)은 고도의 재치가 없이는 수행하기 힘든 직업이다.
 
  김영민(金永旼·41)이라는 개그맨이 있다. KBS 개그맨 공채 23기로, 현재 ‘내시십분’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드러내놓고 우익을 표방한다. 좌(左) 성향이 주류인 연예계에선 그 자체로 용기 있는 일이다.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과 생계의 위협, 그리고 외로움을 모두 견뎌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가 쉽지 않은데, 그의 채널은 성과도 막대하다. 개설 3년 6개월 만에 구독자 35만 명, 조회수 1억 회 이상을 달성했다. 작년 8월엔 고민정 의원의 고소에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다. 10월엔 MBC 자막 조작 논란과 관련, 좌익의 논리를 제압하는 영상으로 주가를 올렸다.
 
  방송 실무와 미디어의 생리를 알고, 유머를 섞어 수시로 변화구와 견제구를 던지는 그의 방송에 반대 진영은 부글부글 끓는다. 하지만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다. 논리가 탄탄하고 사실에 근거해 방송하기 때문이다. 좌익(左翼)의 전유물(專有物)로 여겨지던 풍자와 비틀기로 무장한 시사 유튜브는 김영민이 개척한 우익(右翼)의 신항로(新航路)다. 그는 누구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가. 앞으로 가려고 생각하는 방향은 어디인가. 숱한 궁금증을 품고 김영민을 만났다.
 
 
  “대통령이 꿈”
 
초등학교 4학년 때 집 근처 지리산 계곡에서. 친구들의 ‘현안’을 해결하고 유세의 떠들썩함이 좋아 ‘반장 선거’에 자주 출마했다. 사진=김영민
  ― 어렸을 때는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저는 항상 대통령이 꿈이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도 반장 선거 꼭 나가고, 대학 다닐 때도 과 대표 선거 등 출마 경력이 많습니다.”
 
  ― 선거 유세를 적극적으로 했을 듯하네요.
 
  “네. 제 선거 유세는 굉장히 특화돼 있었죠. 제 가족이 전반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던 집안이었거든요. 정치인 후원 활동도 하고, 주변에서 정치하는 삼촌들도 많이 봤습니다. 어렸을 때 어른들 따라 광장유세를 구경 갔었는데, 정치인 한마디에 청중이 반응하는 게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 있는 학교 선거에 출마, 사람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저에게는 소소한 행복이었습니다. 기대되는 이벤트이기도 했고요.”
 
  운동 잘하는 학생은 체육대회 기다리고 노래 잘하는 학생은 합창대회 기다리는 것이 대한민국 초·중·고의 오랜 일상이다. 그런데 선거를 이벤트처럼 기다렸다고?
 
  “초등학교 선거와 중학교 선거는 성격이 다릅니다. 어렸을 때는 인기투표처럼 반장을 뽑죠. 중학교에 가면 어느 정도 선거 분위기가 납니다. 전략적 선거 운동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 무슨 뜻입니까.
 
  “학기 초에 아이들 괴롭히는 친구를 찾아가 다짜고짜 대드는 겁니다. 그 친구가 저를 한 대라도 때리면 바로 몰표가 나오죠.”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고육계(苦肉計) 같습니다.
 
  “그런데 가끔 당황스러운 경우가 생깁니다.”
 
  ― 뭔가요?
 
  “‘제발 애들 좀 괴롭히지 마!’ 그랬는데 저쪽에서 순순히 ‘알았어!’라고 답할 때죠. 계획이 틀어지는 겁니다. 목표가 그게 아닌데 말이죠.”
 
 
  중학생 ‘민원해결사’
 
선생님으로부터 《한겨레신문》만 보라고 교육받았던 중학교 시절.
  멱살이라도 잡히면 몰표가 나왔다. 여론이 중요하고 민심은 무섭다는 걸 그때 느꼈다. 공약(公約)도 걸고, 당선 후엔 적극 행정으로 약속을 지켰다. ‘공동구매를 통한 이익분배’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공동구매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문제집이나 준비물 살 때 제가 돈을 모아서 한 번에 삽니다. 모자라는 돈은 제 돈 먼저 채워 넣고 나중에 받기도 하고…. 대량 구매니까 할인받잖아요? 차액으로 과자와 음료수를 사서 아이들에게 돌리면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기발한 기획력’은 다음 해 선거를 위한 장기 포석으로 이어졌다.
 
  “당시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잖아요? 게임을 복사해서 그냥 깔던 시절이었죠, 서로 디스켓 주고받으면서. 저는 아이들이 보유한 게임 목록을 표로 만들었습니다. 주말에 친구들 집을 찾아다니면서 없는 게임을 깔아줬죠.”
 
  영웅 대접받고, 현안과 민원을 해결해주며 사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갈증을 느낄 정도였다. 갈채와 주목을 동경하는 건 여느 중학생과 다르지 않았지만, 인기를 희구하는 방향이 달랐다.
 
  “말, 글, 노래, 운동 뭐 이런 걸로 인기를 끄는 게 아니라, 생활 현안을 해결해주고 인기를 끄는 거니까요. 그리고 제가 말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약간 콤플렉스를 느낄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다른 부분에서 더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것도 있었던 거죠.”
 
  김영민은 경기대 다중매체영상학부에서 전자디지털음악을 전공했다. 작곡과 기타 연주 전문가다. 음반도 두 장이나 냈고, 경찰청 유튜브 채널에 있는 ‘사람이 보이면 일단 멈춤’, 수행평가 때 쓰는 1회용품 줄이기 노래 ‘이젠 줄여요’ 등 자작곡도 공공기관에 납품했다. 그만큼 공공의식이 충만하고 정치에 재능이 있으며 재미를 느낀다던 타고난 생활밀착형 정치 지망생은 왜 정치 관련 학과로 진학하지 않은 걸까?
 
 
  IMF 사태로 高校 진학 못 해
 
IMF 사태로 고교 진학을 못 하고 헌책으로 독학하던 17세 무렵. 검정고시로 고교 과정을 마쳤다.
  “IMF 전후에 집안이 폭삭 망해서 고등학교 진학이 불가능했습니다. 이화여대 다니던 누님도 바로 휴학하고 백화점 점원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을 만큼 사정이 다급했어요. 저도 일을 하면서 거의 반(半)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치렀습니다.”
 
  김영민은 중학 시절 우등생이었다. 공부에 재능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런데 대입을 준비할 때는 가정 형편상 모든 과목을 다 공부할 수 없었다. 일단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전략적으로 사고(思考)했다. 주어진 조건은 생활비 절약을 위해 무조건 서울 집에서 통학할 것. 수능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몇몇 과목에 집중, 얼추 예체능 상위 3% 안으로 성적을 냈다. 실기 점수를 높게 받는 것이 서울 소재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진학했던 학과는 지금은 실용음악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IMF 직전이라면, 대학 진학률이 무려 84%에 달하던 시절이다. 진학 의사가 분명한데도 돈이 없어 고등학교에 못 갔다는 건 1960~70년대라면 몰라도 21세기엔 보기 드문 사례다. 또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일반 학생들과는 완전히 다른 트랙으로 인생 행로를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정도였을까. 소수파(少數派)는 어느 사회에서건 숙명처럼 불안감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때로는 사회에 대한 반감이나 절망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비유하자면, 아주 어두운 곳에서는 불을 세게 비춰야 하잖아요. 침대 밑을 보려면 라이트를 켜야 보이는 것처럼. 그런데 심해(深海)로 들어가면, 직접 보면 눈이 멀 정도의 센 빛을 쏴야 앞이 보인다고 하죠? 약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강력한 꿈을 꾸었습니다. 취직해야지, 성공해야지 이 정도 꿈을 가지면 세월을 돌파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막막했으니까요. 제 주변에, 저를 빼고 고등학교에 못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거든요.”
 
 
  ‘소년공’ 김영민
 
  그때 정치가(政治家)를 꿈꿨던 유년의 열망이 구체적으로 모양을 잡았다.
 
  “‘이걸 고생이다’라고 하면 감당이 안 되는데, ‘지금 이렇게 지내는 하루하루가 다 스토리다. 내가 나중에 대통령 출마하는 데 쓰일 자산이다’ 이렇게 영웅적인 상상을 하면 견딜 만했습니다.”
 
  ― 검정고시 준비하면서 일도 했다고 했는데, 어떤 일을 했나요.
 
  “처음에 했던 일은 보일러 설비입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봉고차 타고 김포 등 서울 외곽 현장으로 많이 다녔죠.”
 
  ― ‘노동 소년’이었네요.
 
  “네. 그런데 체력 때문에 토목 관련 일은 못 하고, 보일러 설비 보조로 일했어요. 건설 현장에서 열관리사가 알려주는 작업을 수행하는 역할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다’라고 자기 세뇌(洗腦)했습니다. 봉고차로 이동하는 중에 영어 단어 외우고…. 오히려 그걸 안 하면 정신적으로 더 힘들고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거든요. 작업 사이사이에 영어 단어를 외우면 오히려 더 힘이 났습니다.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책임감도 커졌고요. 돌아보면 그때 겪었던 순간순간이 지금은 정말 고마울 뿐입니다.”
 
  김영민은 이 이야기를 처음 털어놓는다고 했다. 그가 방송에서 보여주는 내공(內功)을 보며, 필자는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단순히 책을 읽어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궁금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보냈는데, 같은 소년공(少年工) 생활을 한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지는 않았을까? 투표하지는 않았더라도, 심정적 동질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아뇨. 저는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그 일로 인해 제 마음에 외상(外傷)이 생긴다는 것을 감지했어요. 사람들을 만날 때 약간 방어적으로 대한다거나 아니면 허세를 부린다거나, 약간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을 스스로 감지하면서 뭔가 내가 지금 몹시 힘든 일을 겪는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제 마음에 외상이 생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무척 많이 했어요. 그래서 마음에 상처가 생기면 다양한 방식으로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재명이라는 분을 보면,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에 생긴 외상을 극복하지 않고 그냥 그걸 덧나도록 방치했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이재명, 바람직한 성공 모델 아니다”
 
  ― 마음의 외상을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어떤 겁니까.
 
  “남에 대한 배려(配慮)입니다. 그러니까 제 모남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곧 저를 다듬는 과정인데, 그 과정을 안 거치고 화나면 화내고 껄끄러우면 부딪치고…. 그렇게 살면 결과도 좋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김영민은 자기 주변에 누구 못지않게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 여럿이라고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부산 해운대구을 김미애(金美愛) 의원(국민의힘)이다.
 
  “김미애 의원의 인생도 이재명 의원이랑 비슷하거든요. 그런데 그분은 해맑아요. 세상에는 힘든 사람이 많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좌절을 극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엔 바람직한 성공 모델이 아니니까요.”
 
  김영민은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생긴 마음의 외상을 치유하고,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악(惡)으로 갚지 않기 위해 정신 수양을 해야 하는 건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해 힘을 힘으로 누르고 악을 악으로 갚아온 누군가가 있고 그런 인물이 크게 성공한다면, 그리고 그런 사례가 많아진다면 사회적 파장은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걱정도 했다. 그의 말은 더 이어졌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중학교 때까지 인기남(人氣男)이었죠. 항상 사람들이 절 좋아했어요. 그랬는데, 제가 힘들어지고 삐뚤어지고 난 뒤부턴 제가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왜 주변 사람들한테 예전만큼 사랑받지 못할까?’ 이런 고민을 심각하게 했습니다.”
 
  ― 고민의 답은 찾았습니까.
 
  “네. 어느 순간 제가 입만 열면 네거티브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내 안에 불평불만이 많이 쌓여 있구나, 뭐 이런 걸 스스로 모니터링했습니다.”
 
  인기인으로 살던 사람들은 주변의 갈채와 응원이 없어지면 생각보다 타격을 크게 받는다. 삶의 동력원(動力源)이 꺼진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건 어떻게 극복했을까?
 
 
  오리엔테이션 때 박수 치며 울어
 
베이스 기타 치며 주방 보조 일하던 20대 초반 무렵.
  “저 같은 경우는 상황이 더 안 좋은 것이, 인기의 저변이 될 수 있는 주변 친구들이 타의(他意)에 의해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상황이잖아요. 처음에는 주변의 불우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많이 놀았어요. 그때 신설동 검정고시 보습학원에 가면 학교 잘린 사람들 엄청 많았거든요. 거기서 수업 하나 끊어서 듣고, 끝나면 술 마시고 노는 거죠.”
 
  ― 갑자기 비행 청소년이 된 겁니까.
 
  “이렇게 놀다 보면 조금 위안이 되는데, 다들 너무 노니까 ‘이러다 큰일이 나겠다’, 겁이 났죠. 비행(非行)의 범주가 넓은 친구들도 있었고요. 건달 조직에 있는 친구도 있고, 유흥업소 다니는 누나들도 있고…. 아주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노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이 생활을 끊자고 결심했다. 옆에서 담배를 권하고 패싸움 나고 경찰서 들락거리는 걸 직접 보고 내린 결론이다.
 
  “정신이 확 들더라고요. ‘이 시기는 내 생애에 가장 힘든 시기인가 보다’라고 현실을 받아들였죠. 한 두세 달 정도 그렇게 놀았을까요?”
 
  ― 대학교 진학할 때는 어떤 생각으로 한 겁니까.
 
  “일단은 00학번으로 진학해서 또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첫 번째였습니다. ‘일단 또래들 만나면 그때부터는 다시 제 인생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한 기대가 있었어요. 그때는 제가 주로 보고 사는 사람들이 항상 아저씨, 아줌마들이었거든요. 보일러 설비 일 외에 음식 배달도 했는데, 또래를 만날 일이 아예 없었습니다.”
 
  배달 일을 한 곳은 서초동의 지하상가다. 인근 큰 건물들을 돌며 배달했다. 힘이 들 때마다 ‘엘리베이터 타고 다닐 수 있으니 편한 아르바이트’라고 세뇌했다.
 
  ― 또래들과 다시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오리엔테이션 때 딱 극장 문 열고 들어갔는데 한 300명 정도가 쫙 앉아 있더라고요. 지금 20년이 넘었는데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컥합니다. 막 박수 치면서 울었어요. 울면서 생각했죠. ‘여기가 끝이 아니다. 1차 목표를 이뤘으니 2차 목표를 세우자.’ 그 목표가 방송 출연이었습니다.”
 
 
  방송 데뷔
 
하루 만에 김영민을 멤버로 받아준 ‘화니지니’ 형들. 김영민 합류 후 팀 이름을 ‘화니지니미니’로 바꾸었다.
  첫 단계로 홍대 클럽을 쭉 돌았다. 그곳에서 연주하는 것이 목표였다. 궁극적 목표는 당시 개그 프로그램의 최고봉 〈개그콘서트〉 출연이었다.
 
  ― 방송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폭소클럽〉이라는 프로그램 중에 ‘화니지니(오승환/최현진)’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기타 치고 성대(聲帶) 모사하는 코너였는데, ‘저까지 3인조로 가면 좋겠다’라는 느낌이 딱 왔죠. 그래서 주변 사람 수십 명에게 〈폭소클럽〉 방청권 신청을 해달라고 했는데 딱 한 명이 당첨됐습니다. 근데 그게 또 제가 됐어요, 제 아이디가. 그래서 녹화 당일 제일 먼저 가서 앞자리 1번 좌석 받고 앉아 있다가 중간에 화장실 간다고 하곤 나왔습니다. 그러곤 지하 출연자 대기실로 무단 침입했어요. 방을 다 뒤졌는데 맨 마지막 방에 화니지니 선배님 두 분과 〈폭소클럽〉 메인 작가가 계시더라고요. ‘선배님들 너무 존경해서 찾아왔다, 오디션 한번 보게 해달라’며 매달렸습니다.”
 
  당장에 쫓겨날 법한 상황이었는데 개인기를 보여주니 일단 회의할 때 한번 와보라며 번호를 줬다. 2주 후 열린 회의 때 준비해 간 아이디어가 바로 통과, 그 길로 데뷔했다. 2004년의 일이다. ‘화니지니’는 ‘화니지니미니’로 타이틀을 바꾸고 1년 이상 방송했다. 〈폭소클럽〉은 2005년에 종영했다. 그 뒤로 김영민은 프리랜서 활동을 하다 2008년 〈개그콘서트〉에 합류했고, 2009년 4월 육군에 입대했다.
 
 
  ‘손 털면 대본 나온다’
 
  ― 개그맨들의 꿈의 무대, 〈개그콘서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출연했나요.
 
  “처음에 ‘왕비호’ 대본을 썼어요. 현역 가수들을 다루는 데다 문화 비평적인 요소가 있어 쉽게 쓸 수 있는 대본은 아니었습니다. ‘손 털면 대본 나온다’라며 작가 역량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개그맨들도 ‘잘 짠다’라고 소문을 내줬죠. 박성호 선배가 본인이 하는 코너에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뮤직 갤러리’라는 코너였는데 이게 ‘뮤직 토크 시즌2’ 같은 느낌이었어요. 농반진반으로 저보고 천재라며 띄워줬는데, 진짜 천재였던 김석현 PD가 저를 좋게 봐주셔서 23기 특채로 합류했습니다.”
 
  ― 23기 동기는 누굽니까.
 
  “공채로 뽑힌 사람은 오나미, 김민경, 정태호 등입니다. 동기들이 다들 너무 착해요.”
 
  ― 항간에 알려지기는 개그맨들은 공채 기수별 군기가 세다 이런 얘기가 있는데, 어느 정도입니까.
 
  “저는 데뷔 기준이 아니라 특채 기수를 기준으로 생활했습니다. 제가 적응을 잘하는 편이어서 허경환 선배나 박영진, 박성광 선배 같은 경우는 저랑 동갑인데 저는 존댓말 하고 또 그분들은 반말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잘 지냈어요. 딱히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 개그맨 사이에 그런 서열이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요.
 
  “개그맨들은 상당히 자유분방해요. 팀 프로젝트를 하려면, 아주 파격적으로 강한 규율 없이는 사실상 통제하기가 힘든 면도 있습니다. 인격 모독을 한다든가 폭력을 쓰면 안 되지만, 강력한 규율의 필요성은 있는 조직이죠.”
 
 
  ‘감수성’ 내시 역할로 복귀
 
김영민의 ‘평생 캐릭터’를 만든 〈개그콘서트〉의 ‘감수성’ 코너. 서수민 PD가 병졸이 아니라 내시를 해보라고 권했다.
  ― 군(軍) 복무는 그 뒤에 한 건가요.
 
  “2009년 4월 입대, 2011년 3월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습니다. 군대에서는 참 재밌었어요. 인천 본부에서 근무했는데, 제가 체감하기로는 정말 왕처럼 지냈습니다. TV에 나왔던 개그맨이 입대했다고, 장교단 만찬 사회로 불러주셨어요. 밤에는 장병들 취침 전에 미친 듯이 웃기고 게임도 하고…. 전천후(全天候) 사회자에 1인 밴드, 취침 직전 막사 버스킹(?) 등, 거의 매일 즐겁게 ‘공연’했습니다. 하도 불려 다니니까 위에서 미안(?)하게 생각하셨는지, 나중에는 거의 매달 휴가를 보내주셨어요.”
 
  김영민이 군 생활을 잘했다는 증거는 또 있다. 군 생활을 같이한 1년 후임과 지금도 같이 일하고 있다. 전역하고 그다음 주에 바로 〈개콘〉에 복귀했다. 여러 아이디어를 들고 말년 휴가 때 제안했는데, 아이디어를 검토하는 사이 한 주 비는 시간에 일단 ‘아무거나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탄생한 코너가 ‘감수성’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2년간 짰던 코너는 하나도 채택되지 않았고, 김준호 선배가 짠 아이디어가 뽑힌 겁니다. 내시 캐릭터도 서수민 PD가 제안한 겁니다. 원래는 병졸(兵卒)이었는데, ‘내시 역할을 해보라’고 했죠. 저에겐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이걸로 ‘내시십분’ 유튜브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저에게는 인생 캐릭터죠. 결혼식 사회 자리는 끊겼지만, 더 큰 일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 ‘감수성’의 내시 역할이 강렬하기는 했지만, 주인공은 아니었잖아요? 그런 데서 오는 아쉬움은 없습니까.
 
  “전혀요. 개그맨들의 가장 큰 목표는 자기 캐릭터를 가지고 오래가는 코너를 하는 겁니다. 거기서 더 잘되는 건 플러스 알파죠. 장수 코너를 하나 했고, 사람들이 기억해주고 어디 가서도 저를 소개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는 건 그 자체가 축복이죠. 제가 생각했던 거 이상으로 얻은 겁니다.”
 
 
  ‘가장 유머러스한 우익 유튜브 채널’
 
  ‘내시십분’ 유튜브는 ‘내시가 들려주는 10분 시사 이야기’라는 뜻이다. 2020년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정치 현안 이외에 개그계 뒷이야기도 가끔 업로드한다. 역사, 노래 등 다른 콘텐츠도 있다. 욕설, 고함 없이 온건하고 교양 있는 방송을 하는 것이 목표다. 지상파 출신이니만큼 절대 과격한 주장이나 음모론을 설파하지 않겠다고 언명(言明)했다.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보자’라는 의도다. 그래서 ‘내시십분’을 ‘가장 유머러스한 우익 유튜브 채널’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 우익 유튜브를 시작한 계기는 뭡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주요한 동기는 문화 미디어 우익 필패 구도를 바꾸려고 도전한 겁니다. 예술계는 전반적으로 좌성향이 우세합니다. 우익 신념을 드러내는 순간 많은 견제와 시기를 받는 것이 사실이죠. 누구라도 우성향 발언을 하면 바로 ‘컷’ 당하니까 미리 위축됩니다. 좌익은 다르죠. 과거 광우병 선동에 가담했던 연예인들은 우리 사회에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혔고, 주장했던 바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반성하기는커녕, 아직도 큰소리치며 활동하죠. 반면 우익은 예전에 했던 발언이 한마디라도 논쟁거리가 되면 그냥 잘립니다. 그런 측면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어요. 이대로 가면, 우익은 영원히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계 전체의 좌경화(左傾化)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익 문화인들이 도전하고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아야 풍토가 개선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방송에서 우익 내부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셨죠.
 
  “네. 우익 정치권은 미디어 저변을 보호하지 않고 강성 지지자들의 발언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능욕하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극우적인 발언은 스스로를 고립시키죠.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좌익은 이런 분들을 온라인상의 우파의 이미지로 포장해 프레임을 씌워요. 그런데 오른쪽에서는 그런 구도에 또 자발적으로 말려 들어가거든요. 저는 이런 점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결론은 우익의 문화전선(文化戰線)은 상당 부분 무너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대적 소명 반, 제 정치적 목표 반 해서 콘텐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억울해서 안 되겠다’
 
‘우익’을 표방한 그를 찾아주는 이들이 있어서 최근 전국 순회 콘서트를 했다.
  김영민의 인생 목표는 선한 영향력과 전문성을 길러서 그것을 동력으로 정치권에 진입하는 것이다. 축제와 관광에 평생을 걸었고 방송을 떠난 이후엔 행정기관과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경험도 쌓았다. 대학 재학 중 정당 지역 활동을 하는 등 정치권을 기웃거렸는데, 결론은 ‘이런 식으로 청년들이 정당 활동을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활동을 했을 때 얻는 이점도 없고 경쟁할 수 있는 틀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저변이 없었다. 저변이 없다면 그 진영의 미래도 없는 것 아닌가. 정당 행사는 정책을 만들고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친목 대회의 확장판 같았다.
 
  그래서 세운 전략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장점을 발현할 기회를 만들고, 통찰력을 가진 인플루언서가 된 후 직접 정치권으로 들어가자’라는 것이었다.
 
  ― 그런데 방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문화예술계에는 좌성향 분들이 많잖습니까? 우익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제 주변 분들이 ‘내시십분’은 제가 외로워지는 길이라고 걱정하시는데, 오히려 반대입니다. 외롭지 않기 위해 하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제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왜 아니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억울해서 안 되겠다, 메시지를 던지자!’라고 결심한 겁니다.”
 
  ― 반응이 어땠습니까.
 
  “제가 생각한 대로였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어요.”
 
  ― 그런데 왜 침묵한 걸까요.
 
  “문화적 방어선을 구축하려면 각계각층의 다양한 분들이 메시지를 내야 하는데, 메시지를 내는 것 자체가 주변의 생각이 다른 분들과 불편해진다는 뜻이잖아요. 또 소위 ‘양념질’이라는 걸 당하다 보면 행동이 위축되죠. 이러다 보니까, 문화 선동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방어선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極左-極右 共生’
 
  김영민은 예전에 시청한 몇몇 프로그램을 잊지 못한다.
 
  “고(故) 김동길(金東吉) 교수님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을 이야기하시는데, 제가 학교에서 들었던 것하고는 이야기가 달랐거든요. 무엇이 진실인지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읽어볼수록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리고 저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악마로 알았는데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너 좋아하는 대통령이 누구야?’ ‘나? 박정희. 뭐 그래도 그분 덕에 먹고사는 거 아냐?’ 이런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이건 뭐지?’ 의문이 들어서 열심히 알아봤습니다.”
 
  ― 유튜브 하면서 제일 어려운 점, 억울한 점은 뭡니까.
 
  “극좌극우(極左極右) 양쪽에서 저를 다 싫어합니다. 제가 유튜브를 시작한 계기 중의 하나가 극좌극우 때문입니다. 이들의 공생관계(共生關係)를 깨기 위해서는 외형적으로 멀쩡해 보이고, 강성 발언을 안 하는 스피커가 꼭 나와야 한다고 봤습니다.”
 

  김영민의 냉정한 비분강개(悲憤慷慨)와 차분한 분석이 이어졌다.
 
  “상식과 비상식, 지성과 반지성, 위선과 팩트의 대결로 프레임을 짜야 진실이 승리합니다. 그런데 뇌피셜, 사실 반 소문 반, 이런 이미지가 우익 유튜버의 본령으로 굳어지는 걸 전 용납할 수 없었어요. 언어폭력을 통해 초법적(超法的) 응징을 하는 건 어떻게 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도 맞지 않습니다. 인터넷 좌표 찍어서 조리돌림하는 것도 어마어마한 폭력이죠.”
 
  ― 극좌극우의 행태가 그렇다는 겁니까.
 
  “네. 그래서 저는 극좌극우가 공생하는 구도를 보고, 중간지대에 변종(變種)으로 구독자 100만 채널이 하나 자리 잡으면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내시십분’ 구독자가 현재 35만 정도니까 갈 길이 한참 멉니다만 꼭 목표 달성 하겠습니다.”
 
 
  “무례한 사람과는 대화 않는다”
 
  극좌극우는 실제로 김영민을 많이 괴롭힌다.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고, 관공서 행사에 압력을 넣어 김영민의 출연을 막기도 한다. 심지어는 출연료 20만원짜리 소규모 행사까지 저인망(底引網)으로 훑듯 검색, 김영민의 활동을 막는다. 이념 상업주의자들에겐, 진실과 교양으로 무장한 김영민의 방송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무서운 ‘공적(公敵) 1호’인지도 모른다.
 
  “저는 그분들 언행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분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시십분’은 전망이 참 좋아요. 제 생각에는 100만 구독까지는 무난하게 가리라 예상합니다. ‘강경하게 말하지 않으니 너는 가짜다.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다’라는 분은 소수입니다. 극단적인 요구는 사절입니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을 착근(着根)하기 위해, 김영민은 초창기부터 노력했다.
 
  “‘내시십분’ 구독자가 3만~4만일 때부터 반말 댓글러들을 다 쫓아냈어요. 저는 무례한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강성 담론, 음모론과 선 긋고 ‘예의를 갖춰주세요’라고 했더니 괘씸하다며 3000명이 빠져나가더군요. 그런데 3000명 빠지고 나서 30만 명이 늘었습니다.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은 시청자의 수요는 확실해요. ‘내시십분’ 구독자가 100만까지 가면 ‘사실에 기반한 합리적 의견 교환’이 하나의 정치 유튜브 문화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 멋지네요. ‘내시십분’의 가장 큰 강점 중의 하나는 여러 우익 채널과 달리 문화 엄숙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재미’라는 요소와 유머 코드를 부드럽게 집어넣었다는 거죠.
 
  “문화적인 부분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콘텐츠 노출을 좀 더 광범위하게 하기 위해섭니다. 노래 듣고, 코미디 보며 웃는 와중 자연스럽게 제 메시지가 스며들게 하는 거죠. 간접적으로 정치적인 구도를 만드는 것이 스피커의 역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윤석열은 이래요. 이재명은 이래요’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그냥 둘의 가상 대화를 통해서 한쪽은 논리 없이 우기다가 욕하고 한쪽은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이런 구도를 만들어서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감정적으로 동조하도록 하면 정서적 침투력이 크죠.”
 
 
  ‘내시십분’만의 따뜻함
 
김영민의 유튜브 채널 ‘내시십분’은 신랄한 정치 비평과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성대모사로 인기를 끌고 있다.
  김영민의 재치는 콘텐츠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예컨대 ‘우익(右翼)은 빛과 소금, 좌익(左翼)은 빚과 세금(稅金)’ 같은 경구(驚句)다.
 
  ― 대본은 누가 쓰는 겁니까.
 
  “제가 주로 씁니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데 재미있다는 분들도 있고 조언 주시는 분도 계시죠.”
 
  김영민은 발언 수위를 조절하고 조심스럽게 표현을 고른다.
 
  “최대한 임팩트 있게, 그리고 문학적 비유를 많이 합니다. 제가 호남 출신(남원)이고, 주변이 다 민주당 지지자다 보니까, 그게 자연스럽게 훈련이 된 것 같아요. 왜냐면, 저와 생각이 다른 분들이 다 저를 업어 키우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던 분들이잖아요? 이분들을 설득하려면, 생각을 쥐어짜고 온갖 대답을 다 예상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제 평생이 그랬어요. 그런데 시청자들 가운데는 저와 생각이 비슷하거나 약간만 다른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모래주머니 차고 달리다가 갑자기 모래주머니 푼 느낌입니다.”
 
  김영민의 고백이 이어졌다.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자의 자기성찰(自己省察)이었다.
 
  “기본적으로 제가 반대 진영을 혐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가족을 미워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라는 전제를 깔고 설득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시십분’만의 따뜻함이 있는 거죠.”
 
  문학적 비유? 김영민은 열심히 자기 투자를 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거의 도(道) 닦듯 생활한다는 주변의 증언도 있다.
 
  “일반적인 생활 패턴에서는 남다른 통찰이 나오기 힘드니까요. 전 아예 술자리를 안 하고 8시 이후에는 모르는 전화면 받지 않습니다. 오프라인 비즈니스 안 하고 소모임 안 하고 커뮤니티 활동도 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공직자로서 이런 장점을 가진 사람이 되자는 제 나름의 준비죠. 전문성을 길러서 선출직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그에 걸맞게 노력해야죠.”
 
  ―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뭐가 있습니까.
 
  “《독일인의 사랑》입니다. 좀 뜬금없는데 저는 고전문학을 많이 읽어요. 고전문학 작품에는 요즘 드라마에는 절대 나오지 못할 만한 오글오글한 문장들이 있는데, 그런 고어투(古語套) 문장에서 영감을 많이 받습니다. 신선한 것을 찾고 지적(知的)으로 자극받아야 좋은 콘텐츠가 나오잖아요? 그냥 술술 읽히는 작품보다는, 옛글을 찾아 읽으면서 아이디어를 채굴하는 거죠. 캐릭터 연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가질 때도 있고요.”
 
  ― 캐릭터 연기라면.
 
  “약간 극적인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서 소설을 많이 읽어요. 어렸을 때 읽었던 책들을 다시 보면서, 예전에 내가 이 책을 읽을 때 긴박감을 느꼈던 부분이 어디였나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어떤 문장은 제가 스피치를 하거나 글을 쓸 때 인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예를 들어 《죄와 벌》을 읽으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죽이러 가잖아요.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긴박감을 다시 떠올리면서 주인공의 심정에 몰입하고, 머릿속으로 그 대목을 제가 감독이 된 마음으로 영화처럼 상상하는 겁니다.”
 
  그의 성취는 우연과 행운의 결과가 아니었다. 김영민은 치열했고 진지했으며 미래지향적이었다. 접근 방식이 유쾌했을 뿐이다. 이미 주어진 지면을 넘어섰으니, 그가 해운대 구청에 들어가 기발하고 치밀한 아이디어를 통해 단기간에 놀라운 성과를 낸 사연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자.
 
 
  “연예인이라는 사실이 행복”
 

  ―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제가 지금 하나의 문화를 만들고 문화 선동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100만 구독자 채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시는 많은 분이 ‘내시십분’을 꼭 구독해주시고 앞으로 행보를 같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문화 선동이 왜 위험한 겁니까.
 
  “자기가 정치적인 메시지를 접한다는 생각을 못 하는 사이에 정치적인 메시지를 접하는 것이니까요. ‘노래를 듣는다, 심심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랜다’ ‘흥미진진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라고 생각하잖아요? 최근에 나온 몇몇 남북 관련 영화를 보면, 시청하는 중에 ‘북한 사람들은 싸움을 잘하네’ ‘북한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네’ 이런 왜곡된 고정관념이 생길 수 있어요. 재벌(財閥)은 비열하게 웃으면서 사람들을 하대하는 사람, 검찰은 무고한 생사람을 잡아가고 빨갱이로 모는 사람, 이런 왜곡된 인식들이 생길 수 있다는 거죠. 그렇게 머릿속에 박힌 사실과 다른 이미지는 우리 삶에 굉장히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왼쪽으로 왜곡된 작품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중심을 잡고 균형을 맞춰주는 콘텐츠가 꼭 있어야 합니다. 시도해야죠. 잘해야죠.”
 
  ― 본인의 학창 시절이 기구했는데, 체제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까.
 
  “고교 시절 3년 동안 학교 밖에서 떠돌며 학교 안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돈을 힘들게 벌어봐서 연예인이라는 사실이 행복했고, 유튜브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하루하루만 겨우 생각하다 지금처럼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축복이자 행복입니다.”
 
  이 사내의 미래가 궁금했다. 미래에 이런 정치가가 하나 있어도 재미있고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빚과 세금’이 만연한 곳에 ‘빛과 소금’을 주러 김영민이 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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