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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 진태옥

“옷과 작품에 정직해야 한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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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자·김옥숙 여사의 의상 담당… 서울올림픽 공식 유니폼 디자인
⊙ 이순자, 외국에서 가방 사 오면 “진 선생, 그거 한국 걸로 바꿔줘요”
⊙ 1993년 한국인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진출… “나는 한국에서 온 백자”
⊙ 美 맨해튼 최고급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 쇼윈도 중앙 차지하자 미국에서 디자인 공부하던 한국 학생들 눈물 흘려
⊙ “윤석열 대통령, 그대로의 모습이 좋아”
⊙ “김건희 여사가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의 옷을 입으면 좋겠다”

陳泰玉
1934년생. 국제복장학원, 이종천패션연구소 졸업 / 1965년 ‘프랑소와즈’ 설립, 1988년 서울올림픽 유니폼,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의상, 아시아나항공 유니폼 디자인 / 1993년 파리컬렉션 프레타포르테 진출 / 現 (주)진태옥 대표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진태옥. 사진가 김용호가 촬영했다.
  진태옥이 누군지 모르는 이도 진태옥의 옷을 보며 시대를 건너왔다. 때론 국경을 건너기도 했을 터다. 193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른 살이 다 된 나이에 패션 공부를 시작했다. 첫아이의 돌이 지난 후인 28세 무렵이었다. 그러곤 1965년 서울 명동에 ‘프랑소와즈’ 매장을 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통령 영부인이며 재계, 연예계 사람들까지 멋이 필요한 이들이 그를 찾고 있다.
 
 
  서울올림픽 유니폼 디자인
 
진태옥 디자이너는 아시아나항공의 승무원 유니폼을 디자인했다. 사진=아시아나항공
  그는 서양 복식에 한국 고유의 미감(美感)을 입혀 그만의 디자인 세계를 그려왔다. 한국 현대사의 빛났던 순간엔 그의 옷이 있었다. 1988년에 서울올림픽 공식 유니폼을 만들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공연에도 그의 의상이 등장했다. 한 나라에서 30년을 사이에 두고 치러진 두 번의 올림픽을 위해 의상을 디자인한 대기록이다.
 
  한복 고유의 색인 장색(醬色)에 색동 문양이 인상적인 아시아나항공 유니폼도 그의 작품이다. 아시아나항공은 1988년 출범할 때부터 지금까지 35년째 그의 옷을 고집하고 있다. 패션업계의 수장 역할도 했다. 1989년엔 서울패션협회(SFA) 창단을 이끌었고 1993년까지 초대 회장을 지냈다.
 
  사실 진태옥 디자이너가 문득 궁금해진 건 ‘표정’ 때문이었다. 지난해 10월 동대문 DDP에서 열린 서울패션위크 현장에서 그를 발견했다. 상기된 표정과 반짝거리는 눈빛이 꼭 소녀 같았다. 권위의식과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화석이 아닌 호기심 많은 전성기 디자이너의 표정이었다. 그 모든 세월을 뒤로하고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 그만의 비밀이 궁금했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로 가는 길. 단아하고 정제된 3층 건물 꼭대기에 그의 작업실이 있다. 공간이 사람을 닮는 건지 사람이 공간을 닮는 건지, 따스히 밝은 공간에 오후의 햇살이 드리워져 있다.
 
 
  “한 번도 나이 느껴본 적 없어”
 
  “제가 올해 한국 나이로 90이에요. 한 번도 나이를 느껴본 적이 없어요. 요즘에 사람들이 많이 처져 있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제 나이를 말하고 다녀요. 당신들은 나보다 더 젊게 살 수 있다면서요.”
 
  독특한 말투다. 목소리로 수필(隨筆)을 쓰듯 어조(語調)의 변화가 자연스럽다. 말 맺음은 분명하고 경쾌하다. 듣는 이를 편하게 해주면서도 끊임없이 주목하게 만드는 갖기 힘든 말투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뭘 하고 시간을 보낼까’ 그런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저는 그런 분들이 부러워요. 어떻게 하면 저렇게 시간이 많을 수 있을까. 저는 밤낮 숙제에 쫓기고 있어요. 목요일 저녁이 되는 게 너무 싫어요.”
 

  ― 왜요.
 
  “숙제는 아직도 밀려 있는데 금요일 하루밖에 일할 날이 안 남은 거잖아요.”
 
  90여 년을 살아온 이에게서 들으리라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작은 체구로 파리와 뉴욕 패션계를 헤집고 다닐 수 있었던 비결은 열정이었을까.
 
 
  1970년대에 유럽行
 
  ― 그 시절에 어떻게 파리에 진출할 생각을 했나요.
 
  “패션 디자이너는 파리를 동경해요. 어떻게든 가서 활동하고 싶은 곳이지요. 1960년대, 70년대 신세계백화점 본점 옆에 있는 우체국 옆 골목에서 외국 서적을 팔았어요. 거기서 외국 잡지를 사서 봐야 패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지금 유행하는 길이는 어떻고, 품은 이렇고, 어깨선은 어떻고. 정보를 얻을 곳이 따로 없었으니까요.”
 
  1960, 70년대라면 전화기도 귀한 시절이었다. 한국에서 컬러TV 방송이 시작된 게 1980년이다.
 
  “1971년에 제가 여권을 갖게 됐어요. 그때는 고속도로도 없었어요. 여자는 여권을 잘 발급해주지도 않았고요. 제가 받은 여권도 유효기간 3개월의 단수 여권이었어요. 그러니 외국에 나가면 거짓말을 해요. 서울 식구들과 미리 약속을 해요. 여권 만료를 보름쯤 남겨두고 전보를 치라고요. ‘어머니가 위독하니 빨리 들어오라.’”
 
  ―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전보를 들고 대사관에 가요. ‘이렇게 됐으니 빨리 들어가야겠다’ 그렇게 귀국하면 여권을 3개월을 더 연장할 수 있었어요. 머리를 굴린 거죠. 한 번 나가면 3개월을 꽉 채워서 유럽을 돌아다녔어요.”
 
  ― 길을 어떻게 찾았나요.
 
  “일본 잡지를 오려서 들고 다녔어요. 일본은 1964년에 이미 올림픽을 열었어요. 경제 붐이 일어나서 단체 여행객들이 깃발 들고 세계를 누비기 시작했지요. 잡지마다 가이드 지도가 실려 있었어요.”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했을 때 기분”
 
  ― 그 시절 파리는 지금과 많이 달랐겠네요.
 
  “드골 공항도, 라데팡스(La De′fense ·파리의 부도심)도 없었어요. 파리 시내에 도착했는데 영어가 하나도 안 통해요. 지도를 들고 돌아다니다 크리스찬 디올 매장을 찾아냈어요. ‘어머, 잡지에서 본 디올 매장을 내가 발견했어’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했을 때 그런 기분이었을까요?”
 
  ― 용기가 있었네요.
 
  “뉴욕에 가면 하루종일 시내를 누벼요. 32가에 있는 싼 호텔에 방을 잡고, 아침에 일어나 무장을 해요. 79번가까지 걸어서 올라가요. 한 가지도 안 놓치려 애를 쓰죠. 오후엔 애비뉴(Avenue)를 따라 가로 방향으로 질러 가요.”
 
  ― 뭘 보기 위해선가요.
 
  “디자인이라면 뭐든지요. 고급 매장의 인테리어부터, 무엇보다 옷의 디자인을 보죠. 거기가 교과서니까요. 직원 앞에선 자세히 볼 수 없으니 화장실에 들어가서 스티치(stitch·바늘땀) 넓이까지 들여다봐요. 그러니 3개월이 아니라 6개월도 모자라요. 그렇게 익힌 겁니다.”
 
  ― 바느질 한 땀 길이까지 들여다본 거군요.
 
  “그렇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지금 제 밑에 있는 사람들은 더 힘들죠. 1인치에 스티치가 12개냐 13개냐 따지니까요. 요즘은 패턴이 정확하지 않아도 되나 봐요. 쇼를 보면 저는 패턴부터 눈에 먼저 들어와요. 어떤 스타일리스트가 저에게 그래요. ‘선생님 요즘엔 패턴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요즘은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 말도 못 하죠.”
 
  그가 90세까지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비밀 첫 번째는 호기심이다. 인터뷰 이후에도 만나 대화를 나누며 느낀 점이다. 단순히 무언가 아는 걸로 끝내지 않는다. 어디가 멋있고 좋다는 얘기가 들리면 꼭 가보는 식이다. 예를 들면 그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다니는 뉴욕의 최고급 미용실을 외국 잡지에서 보고 상호를 기억해뒀다가 가봤다고 한다. 그렇게 미용실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를 경험해본다. 안목은 좋은 걸 자꾸 봐야 올라간다. 진태옥 디자이너를 보며 환경 탓을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빈국(最貧國) 국민으로 태어나 이국(異國)을 돌아다니며 미적 감성을 쌓아왔으니 말이다.
 
  ― 비행기값도 비쌌겠네요.
 
  “비쌌죠. 그래도 나가야죠. 그때는 외환을 300달러 정도밖에 못 바꿨어요. 고생이 많았지요. 저는 지금도 100달러에 트라우마(Trauma)가 있어요.”
 
  ― 왜요.
 
  “그때 100달러면 어마어마했어요. 감히 쓸 수 없는 돈이었어요. 그 강박관념이 지금도 남아 있는 거예요. 요즘엔 어떤 물건이 10만원이라고 하면 쓸 수도 있는 돈이잖아요. 그런데 미국에 가서 어떤 물건에 100달러라고 쓰여 있으면 지금도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는 거예요.”
 
 
  美 최고급 백화점 패션 바이어 방 쳐들어가
 
영화 〈위대한 개츠비〉(1974) 중 개츠비가 바닥에 셔츠를 뿌려놓은 장면이다.
  그가 지금의 진태옥이 될 수 있었던 두 번째 비밀은 ‘용기’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영화가 있어요.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1974년 영화예요. 개츠비가 바닥에 핑크, 새먼(Salmon·연어)색, 오렌지색 등 갖가지 색깔의 셔츠를 바닥에 던져놓은 장면이 나와요. 그게 딱 떠올라서 한복에 쓰는 뉴똥 원단으로 블라우스를 색깔별로 만들었어요. 그걸 이민 가방에 가득 싸가지고 떠났어요. 그게 1986년쯤이었어요.”
 
  ― 어디로 가셨나요.
 
  “무작정 뉴욕으로 갔어요. 버그도프 굿맨으로 갔어요.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어요. 패션 바이어 방에 무작정 들어갔어요. 그 사람이 ‘여기 어떻게 왔냐’고 말을 하기도 전에 가방을 확 풀었어요. 개츠비가 그랬듯 블라우스를 바닥에 쫙 풀었어요.”
 
  버그도프 굿맨(Bergdorf Goodman)은 맨해튼 5번가에 있는 최고급 백화점이다. 한국으로 치면,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이다.
 
  ― 대단한 배짱이네요.
 
  “바닥에 풀어놓으니 색이 정말 예쁘잖아요. 얼마냐고 묻더군요. 한 벌에 150달러라고 답했던 것 같아요. 그랬더니 저보고 잠깐만 있으래요. 원피스를 한 벌 들고 와요. ‘Made in Korea(메이드 인 코리아)’라 적혀 있어요. 겉감, 안감 모두 실크인데 29달러90센트예요. 그 사람이 그래요. ‘메이드 인 코리아가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150달러를 받나.’”
 
  ― 그래서 뭐라고 답했나요.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디자이너다. 내 옷엔 디자인이 있고 영혼이 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안타까웠나 봐요. ‘메이드 인 코리아가 그렇게 되려면 좀 오래 걸린다. 그때까지 좀 기다려라’ 그래서 보따리를 들고 나왔어요. ‘내가 꼭 여길 점령해야겠다’ 마음먹고.”
 
 
  “나는 한국의 白磁”
 
진태옥은 한국인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했다.
  1993년 진태옥은 파리로 간다. 한국인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진출했다. 파리 컬렉션은 고급 기성복인 프레타포르테(pret-a-porter)와 맞춤 의상인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로 이뤄져 있다. 어느 쪽이든 패션 디자이너에겐 꿈의 무대다.
 
  “쇼를 하고 내려오니 기자가 물어요. ‘진태옥, 당신은 누굽니까?’ 질문을 받고 깜짝 놀랐어요. 뭐라 답하지? ‘나는 한국에서 뭘 했고, 뭘 공부했고’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하면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표현하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기자들이 그걸 몰라서 질문한 게 아니잖아요.”
 
  ― 뭐라 답했나요.
 
  “뇌파가 요동치는 것 같았어요. 그때 제가 운이 좋았는지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갔어요. 답했지요. ‘나는 한국의 백자(白磁)다. 달항아리다.’ 그 인터뷰 후로 ‘진태옥은 백자’로 이미지화됐어요.”
 
  ― 그게 브랜드에 어떤 이미지를 드리웠겠네요.
 
  “효과를 좀 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그의 작업실 한쪽에 하얀 달항아리가 무심히 놓여 있다.
 
  당시 파리 패션계에서는 일본인 디자이너들이 활발히 활동 중이었다. 이들은 파리에 혼자 오지 않았다. 1980년대 파리컬렉션에는 여러 명의 일본인 디자이너가 상륙했다. 준지 야마모토, 겐조 다카다, 레이 가와쿠보(‘꼼데가르송’ 설립자), 이세이 미야케 등 일군의 일본인 디자이너들 뒤에는 일본의 대기업과 정부가 있었다. 상사들은 양질의 원단을 개발, 공급했고, 일본 정부는 디자이너들의 해외 진출을 적극 지원했다. 후술(後述)하겠지만, 디자이너의 부도를 세금으로 막아주기까지 했다.
 
 
  “옷이 아니라 디자인을 팔아야”
 
  한국은 어땠을까. 그의 말이 이어졌다.
 
  “산업자원부 회의에 들어가서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옷을 파는 게 아니라 디자인을 팔면 10달러짜리를 150달러에 팔아도 기분 좋게 산다. 그 시대로 우리도 가야 한다. 그러면 다른 분야도 함께 상승한다.’”
 
  ― 어떤 반응이 돌아왔나요.
 
  “‘다음번 산자부 회의 때 또 말했어요. ‘이제는 디자인 파는 시대가 지나갔다. 이미지를 팔아야 한다.’ ‘디자이너가 미싱 몇 대 갖고 어떻게 수출을 하냐’ 해요. 제작 과정을 설명해도 못 알아들어요.” 당시는 한국에서 생산한 와이셔츠 12벌 묶음을 외국에 10달러 내다 파는 시대였다. 10달러자리 옷 한 벌을 150달러에 팔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못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쇼윈도의 제일 중앙 자리’ 차지
 
  ‘한국에서 온 달항아리’에 패션계는 관심을 보였다. 파리에서 첫 번째 쇼를 마치자 주문이 들어왔다.
 
  “쇼를 마치자 당시 함께 일한 커머셜 디렉터(Commercial Director·판매 책임자)가 그래요. ‘당신이 전에 얘기했던 버그도프 굿맨에서 내일 회장과 바이어가 온다.’ 그 디렉터가 유대인이었는데 상당히 능력 있는 이였어요.”
 
  ― 버그도프 굿맨이라니 긴장됐겠군요.
 
  “다음 날 아침 쇼룸으로 갔어요. 해가 비쳐 들어오는 창문 앞에 옷걸이를 두고 옷을 쫙 걸었어요. 디스플레이를 마치니 디렉터가 제게 뒷방에 가 있으래요. 뒷방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데 그 비싼 옷을 다 산다는 거예요. 예전에 내가 만났던 바이어인가 싶어서 살짝 봤더니, 글쎄 그때 그 사람인 거예요. ‘아, 내가 이제 깃발을 꽂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더라고요.”
 
  ―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하네요.
 
  “제가 커머셜 디렉터에게 그랬어요. ‘버그도프 굿맨이 산다고 하면 독점 판매권을 줘라, 그 대신 최소 구입분량을 정해주자.’ 그런데 최소 수량 이상으로 사 갔어요.”
 
  ― 행복하셨겠네요.
 
  “행복이 아니라 감동, 감격이었어요. 그때는 내가 뭔가 정복한 것 같았어요. 제가 버그도프 굿맨에 제시한 조건이 한 가지 더 있었어요. ‘쇼윈도의 제일 중앙 자리에 내 옷을 디스플레이해라. 그래야 독점 판매권을 주겠다.’”
 
  버그도프 굿맨의 쇼윈도는 뉴욕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예술 작품 취급을 받는다. 쇼윈도 사진을 모아놓은 아트북이 나올 정도다.
 
  ― 조건을 받아들이던가요.
 
  “그러겠대요. 중앙에 걸린 내 옷을 보려고 파리에서 뉴욕까지 갔어요. 그 후로 메이시스, 블루밍데일스, 삭스피프스애비뉴 같은 다른 백화점에서도 사겠다고 오는 거예요. 버그도프 굿맨과 계약을 유지하려고 다 포기했지요. 그것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가 올라가기도 했어요.”
 
  ― 옷이 잘 팔렸나요.
 
  “한번은 뉴욕에 갔을 때 백화점에 가봤어요. 꼼데가르송, 이세이미야케, 요지 야마모토, 장폴 고티에 같은 쟁쟁한 브랜드 옆에 진태옥 매장이 있는 거예요.”
 
  ― 요즘 말로 ‘명품 브랜드’ 대접을 받았군요.
 
  “한국 디자이너들은 그걸 보고 놀랐대요. 디자인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은 그 앞에서 울었고요. 매장에 들어가 보니 다 팔리고 니트 한두 장이랑 흰 셔츠가 걸려 있어요. 그때 교민회장과 함께였어요. 그분이 셔츠에 붙은 가격표를 보더니 놀라면서 이래요. ‘이것 좀 봐요. 이 셔츠가 700달러예요.’”
 
  ― 셔츠 한 장에 700달러(약 90만원)였던 겁니까.
 
  “저는 그 가격에 파는 줄 몰랐어요. 백화점에서 가격을 붙이는 규칙이 있어요. 저한테 사 간 가격의 3.5배, 4배 가격을 붙여요. 700달러에도 팔리겠다 싶으면 5배 가격도 붙이는 거예요. 교민회장이 이래요. ‘아니, 이게 원단이 한 마(碼)에 얼만데 700달러를 받아요?’ 그러면서 저보고 도둑이래요. 제가 그랬어요. ‘이건 원단 가격으로 따지는 게 아니에요.’”
 
  ― 하긴 지금도 그런 인식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포장이라는 게 참 중요하구나 그때 알았어요. 홍보가 정말 중요해요. 전쟁에 임하듯 작전을 잘 짜야 해요. 그냥 해서는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때 버그도프 굿맨에서 저보고 잡지에 광고를 내래요. 광고 단가가 1페이지에 7000달러래요. ‘너희가 장사하는데 왜 나한테 홍보하라고 하나,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그때 제가 너무 무식했어요.”
 
 
  IMF 시기 파리에서 철수
 
  1997년 ‘IMF’ ‘국가부도위기’ ‘구제금융’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를 휘감았다. 환율은 1962원까지 치솟고 기업들이 쓰러졌다. 패션업계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때 그의 운명을 그는 ‘퇴장’이라 표현했다.
 
  “우리는 IMF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어요. IMF라는데 왜 손님이 없지, 왜 환율이 올라가지? 파리 사무실은 크지, 직원은 많지, 빚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거예요. 도저히 감당이 안 됐어요. 직원이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됐나 의심도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 어떻게 대처했나요.
 
  “그때까지 1년에 네 번 파리에서 쇼를 했어요. 여성복 두 번, 남성복 두 번. 빚이 점점 늘어요. 저는 빚지고는 못 살아요. 결국 테헤란로에 있던 건물을 팔았어요. 그때는 건물 가격도 헐값이었어요. 내가 계산에 밝았으면 조금만 더 참으면서 건물은 안 팔았을 텐데 빚이 늘어가는 고통을 견딜 수 없었어요.”
 
  ― 건물까지 팔았군요.
 
  “누가 산다기에 얼른 팔았어요. 그리고 파리에서 퇴장했어요. ‘백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는 좋았는데 버틸 힘이 없었어요. 제 브랜드 언론 홍보를 해주던 담당자에게 얘기를 했어요. ‘철수해야겠다’ 그랬더니 그이가 그래요. ‘당신이 지금 한국 디자이너로서 제일 인정받고 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높이 올라설 텐데 왜 그러느냐.’”
 
  ― 철수를 말렸군요.
 
  “제가 그랬어요. ‘당신은 존 갈리아노,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디자이너는 유명하게 해주고 왜 나는 유명하게 안 해주냐.’ 나라가 IMF 위기라 돈이 없다는 얘기는 못 하니까 농담식으로 둘러댄 거죠. 그랬더니 그이가 그래요. ‘그 디자이너들은 파리에 나온 지 8년 만에 떴다, 당신은 파리에 나온 지 몇 년이나 됐나.’”
 
  ― 일리 있는 말이네요.
 
  “뭐라 할 말이 없었어요. 너무너무 아쉬웠어요. 정말 많이 흐느꼈어요. 길을 다니면서도 울었으니까.”
 
 
  디자이너 채무 갚아준 일본
 
  ― 어떻게 진출한 파리인데, 속상했겠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죠. 가슴에 쌓여 있는 게 병이 될 것 같았어요. 대상이 확실하게 있는 건 아닌데 분하고 원망스러웠어요. 길을 걷다가도 숨을 막 몰아쉬었어요. 샤워기를 틀어놓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가슴속 응어리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10여 년 후 파리에서 함께 활동하던 일본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의 근황이 그에게 들려왔다. 2009년 10월의 일이다.
 
  “신문 기자를 만났는데 이런 얘기를 들려줘요. ‘요지 야마모토가 부도를 맞았어요. 금요일에 부도났는데 그다음 월요일에 일본 정부가 보증을 서서 해결됐어요.’ 이 얘기를 듣는데 기가 막혔어요.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요지 야마모토가 안 망하게 하려고 일본 정부가 나선 거예요.”
 
  요지 야마모토는 레이 가와쿠보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다. 1981년 파리 컬렉션을 통해 이름을 알린 후 전 세계로 활동 무대를 넓혀 활발히 활동하던 중, 2009년 10월 6700만 달러 규모의 부채 때문에 파산 위기를 맞았다. 일본 정부는 ‘협력사회복귀법’을 적용해 즉각 지원에 나섰다. 이후 일본 기업의 지원을 받아 안정을 되찾았다.
 
  ― 일본 정부는 요지 야마모토라는 존재를 그만큼 소중하다고 판단한 거군요.
 
  “요지가 파리에 가 있는 것 자체로 일본의 국위 선양이 되죠. 쇼룸을 정말 잘 꾸며놓고 있었으니까요. 파리에서 그렇게 하려면 돈이 엄청 들어가요. 부도 위기를 극복하고 루브르박물관 옆에 쇼룸을 다시 냈는데 나중에 가보니 먼저보다 더 멋지게 해놨더라고요.”
 
 
  “당신들이 스타 디자이너야”
 
  ― 요지 야마모토가 부러웠겠네요.
 
  “일본은 스타 디자이너를 만들기 위해 사회 여러 주체가 나서서 도왔어요. 저는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었고, 뭐든 혼자 해야 했으니까요. 그 얘기를 들으니 속상하고 부러웠어요. 그 기자에게 그랬어요. ‘왜 나한테 그 얘기를 하냐, 차라리 몰랐다면…’”
 
  ― 파리에서 퇴장한 지 벌써 26년이 됐네요.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앞서 글로벌 감각을 습득할 수 있었고, 지식이나 감각도 쌓을 수 있었어요. 요즘엔 일본 문화의 기세가 좀 꺾인 느낌이지요? 한국은 케이팝이니, 영화니 스타를 배출하고 있고요. 젊은이들이 잘 하고 있는데, 패션 분야는 아직 아쉬워요. 스타 디자이너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의도적으로 자주 말해요. ‘당신들이 스타 디자이너야.’”
 
  그는 세계 최정상급 디자이너의 꿈을 접은 게 아니라 후배들에게 물려준 게 아닐까. 그의 세 번째 비밀은 바로 ‘긍정적인 의지’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론 ‘꺾이지 않는 마음’.
 
  화제가 서울패션위크로 넘어갔다. 서울패션위크는 서울시가 주최하는 글로벌 패션 행사다. SS(봄여름)와 FW(가을겨울) 시즌으로 나뉘어 연 2회 열린다. 각각 3월과 10월이다.
 

  지난 10월 서울패션위크는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전면 대면(對面)으로 치러졌다. 박원순 시장 시기와 비교해 큰 변화가 있었다. 행사를 총괄하는 총감독 자리를 없앴다. 이전엔 정구호 디자이너, 전미경 전(前) 《바자》 편집장이 차례로 총감독을 맡았다.
 
  “프리즈(Frieze)나 비엔날레 같은 행사엔 다 총감독이 있어요. 패션 행사에도 절대적으로 총감독이 필요해요. 감각적으로 행사를 운영해야 하거든요. 천막만 쳐놓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어떤 감도(感導)라고 할까요. 지난번 서울패션위크를 보니 그런 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가요.
 
  “예를 들면 제가 파리에서 쇼를 할 때는 쇼가 거의 끝날 무렵 기가 막힌 파티가 열려요. VIP, 바이어들, 기자, 디자이너, 모델 모든 사람이 파티에 모여요. 모델들은 각 쇼에서 어필했던 옷을 입고 등장해요.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요. 서울패션위크 기간 동안 그런 파티가 열렸던가요?”
 
  ― 프리즈 서울이 열릴 때는 갤러리들이 자유롭게 파티를 열었는데 서울패션위크는 그런 면에서 좀 약했던 것 같아요.
 
  “정구호 디자이너가 총감독 역할을 참 잘했어요. 아모레 퍼시픽에서 후원도 따왔지요. 결국 고급스럽게 행사를 치르려면 돈이 필요해요. 이번 패션위크는 10년 전으로 퇴화한 느낌이었어요.”
 
 
  “패션·사진은 예술원에 못 들어가 있어”
 
  ― 오세훈 시장으로 바뀐 후 시 측에서 자문 요청이 없었나요.
 
  “사실은 서울시 측 담당자와 만났어요. 이렇게 말했어요. ‘방탄소년단을 보며 외국에서 한국을 케이팝 성지로 생각하고 외국인들이 케이팝 오디션에 참가한다. 한국 패션계에도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가 있어야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뒷받침해서 스타를 만들자.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투자도 하자.’”
 
  ― 반응이 어떻던가요.
 
  “맞대요. 자주 만나서 얘기를 나누자고 하더라고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뭔가 되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어요. 일주일 후에 가려고 했는데 담당자가 다른 이로 바뀌었어요. 저는 이제 공무원들과 얘기하는 데 지쳤어요. 서울시는 예산이 정직하게 쓰이는지만 보고 나머지는 전문 인력에게 맡기는 게 답이 아닌가 생각해요.”
 
  ― 패션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아직 모호한 수준 같습니다. 예술에도, 산업에도 제대로 끼지 못하는 듯하고요.
 
  “패션과 사진은 아직도 대한민국 예술원에 못 들어가 있잖아요. 연극·영화·무용은 들어가 있는데요. 고위 공무원들도 패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요. 제가 파리에서 쇼를 할 때 꽃을 사들고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에 찾아갔어요. ‘대사님이 쇼에 참석해주셔야 한국 패션의 위상이 올라갑니다’ 간곡히 부탁했는데 결국 안 오더군요. 바쁘대요. 그런 행사에 참석하느라 바빠야 되는 거 아닌가요? 영화배우 윤정희씨는 꼭 참석했어요. 지금도 참 고마워요.”
 
 
  슈뢰더 총리 부부
 
  ― 외국도 비슷할까요.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부부를 만났어요. 슈뢰더 총리와 아내 김소연씨가 결혼할 때 제 드레스를 입었거든요. 제가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어요. 슈뢰더 총리에게 그랬어요. ‘독일어를 기억 못 해서 미안하다. 한 가지는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독일어 정관사 변화를 읊었어요. 그랬더니 놀래요. ‘어떻게 지금까지 그걸 기억하냐.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그러더군요.”
 
  ― 두 분 다 위트가 있네요.
 
  “슈뢰더 총리 부부가 제 작업실에 와서 달항아리를 봤어요. 나뭇가지를 꽂아놓은 걸 보더니 본인이 따라 해도 되겠냐고 물어요. 따라 할 게 뭐 있냐고 되물었더니 이래요. ‘저게 한국의 얼이다.’ 얼마 전에 부부가 사진을 보내왔어요. 큰 항아리에 꽃을 한 송이 꽂아놨어요. ‘마담 진(Madam Jin)이 생각나서 꽂아봤다. 코로나19 시기 잘 지내고 있나.’”
 
  ― 멋진 인사말이네요.
 
  “디자이너를 존중하는 태도가 참 근사하잖아요. 이런 게 문화 선진국 아닐까요. 한국은 아직인 것 같아요.”
 
  ― 윤석열 대통령의 패션은 어떻게 보세요. 대선 때부터 옷을 못 입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바지통도 화제가 됐고요.
 
  “그대로의 모습이 좋아요. 윤석열 대통령은 옷을 못 입으면 좋겠어요. 검찰총장 때도 양복을 헐렁하게 입었잖아요? 그런 털털한 모습 때문에 대통령이 됐다고 생각해요.”
 
  ― 내면과 옷차림이 어울려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지요. 양복을 색깔 맞춰서 다림질을 쫙쫙 해서 입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대신 영부인은 옷을 신경 써서 입되, 한국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입으면 좋겠어요. 역대 영부인들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어요. 이순자 여사는 제가 구두와 가방을 담당했어요.”
 
  ― 명품 가방을 들었나요.
 
  “제가 외국에 나가면 구두와 가방을 사 왔어요. 그걸 청와대에 가져가면 이순자 여사가 이래요. ‘진 선생, 그거 한국 걸로 바꿔줘요.’ 김옥숙 여사 때는 제가 의상을 담당한 적이 있어요. 전부 한국 원단으로 우리가 디자인한 옷을 입으셨지요. 김윤옥 여사는 제가 디자인한 기성복을 입곤 했어요. 성품이 아주 좋아요.”
 
  ― 박근혜 대통령은 옷을 별도로 맞춰서 입었다고 하니 선생님에겐 안 왔겠군요.
 
  “그렇지요. 김정숙 여사는 제 옷뿐 아니라 백화점, 일반 쇼핑몰, 다양한 곳에서 산 옷을 섞어서 입었어요.”
 
 
  김건희 여사, 한국 디자이너 옷 입길
 
  영부인의 옷은 ‘패션 외교’라 불릴 정도로 세간의 관심이 된다. 오바마 미(美)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는 랄프 로렌, 제이크루 같은 미국 브랜드 옷을 즐겨 입었다. 특히 중요한 자리엔 꼭 미국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미셸 오바마는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약 1년간 공식 석상에 총 189회 등장했는데 약 3조원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 기간 동안 미셸 오바마가 유럽 순방에서 입었던 삭스, 제이크루 등의 브랜드는 매출이 상승했고, 주가가 일주일 만에 약 16% 올랐다. 급기야 ‘미셸 오바마 효과(Michelle Obama effect)’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현 미국 대통령인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 여사 역시 미국 브랜드를 즐겨 입는다. 대통령 취임 당일 착용한 자수원피스는 우루과이 이민자 출신의 미국 디자이너 가브리엘라 허스트의 제품이었다. 역시 미국 브랜드인 스튜어트 와이즈만의 부츠도 잘 소화해 화제가 됐다.
 
  ― 역대 영부인들도 한국 디자이너의 옷을 입기 위해 노력했군요.
 
  “김건희 여사는 체격 조건이 좋아서 옷태가 나잖아요. 특히 외국에 나갈 때는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의 옷을 입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젊은 디자이너들이 ‘내 옷을 대통령 영부인이 입었다’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잖아요. 외국에 나가서도 당당히 얘기할 수 있고요.”
 
 
  “옷과 작품에 정직해야 한다”
 
코오롱의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가 지난해 10월 연 ‘래;콜렉티브: 25개의 방’ 전시회에 진태옥 디자이너의 작품이 걸려 있다. 사진=하주희
  ― 디자이너의 인격이 옷에서 드러나기도 하나요.
 
  “물론이죠. 인격이 바탕이 되는 겁니다.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얘기해요. ‘옷과 작품에 정직해야 한다.’ 이게 참 중요해요.”
 
  ― 그러면 디자이너가 나이가 들면 디자인도 변하나요.
 
  “젊었을 때는 자꾸 붙였어요. 붙여야 디자인한 거 같아서요.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야.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어. 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야’ 이러면서 자꾸 뜯어내게 돼요. 뜯어내는 것이 어떤 때는 불안하고, 때로는 아파요. 그러면서 제 옷은 더욱 단순해졌어요.”
 
  60년 가까이 옷을 향했던 그의 눈길은 몇 년 전부터 자연으로 향하고 있다.
 
  “어느 날 다큐멘터리에서 버려진 옷들이 산과 강을 메우고 있는 장면을 봤어요. 옷더미에서 나온 썩은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가더군요. 아이들이 그 물속에서 놀고 있고요.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우리가 생산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옷을 만들면서도, 이게 다 뭘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고 보니 지난해 10월에 열린 한 전시에서 진태옥 디자이너의 작품을 만났다. 코오롱 FnC의 업사이클링 패션 브랜드 래코드(RE;CODE)가 연 ‘래;콜렉티브: 25개의 방(Re;collective : 25 guest rooms)’이라는 전시였다. 이전에 디자인한 옷들을 활용해 새로운 옷을 만들었는데, 사서 입고 싶을 정도로 근사했다. 패션의 유행과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쓰레기 배출을 줄이는 것)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그의 옷들을 보며 고민했다.
 
 
  “당신은 옷으로 詩를 썼군요”
 
2015년 서울을 찾은 패션 저널리스트 수지 멘키스는 진태옥 디자이너에게 말했다. “당신은 옷으로 시를 쓰고 있었군요.” 사진=조선DB
  그의 작업실 한쪽은 통유리창이다. 유리창 너머엔 발코니가 있는데 아담한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겨울의 정원에 한때는 꽃대를 올렸을 마른 줄기들이 나풀거린다.
 
  “어디서 날아온 씨앗인지 몰라요. 보라색 꽃을 피워내더라고요. 가을이 되니 점점 시들어갔어요. 관리해주시는 분이 ‘베어버릴까요’ 해서 그러지 말자고 했어요. 자연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한 번 보고 싶어서요. 마른 줄기의 모습이 꼭 자연에 순응해 고개를 숙인 것 같지 않나요?”
 
  영국 출신의 수지 멘키스(Menkes)라는 패션 저널리스트가 있다. 80세의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전 세계 패션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언론인이다. 멘키스와 진태옥은 1993년 파리에서 만났다. 진태옥의 프레타포르테 쇼가 끝난 후 멘키스가 진태옥에게 ‘당신과 악수를 하고 싶어 5분을 기다렸다’며 다가왔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2015년 다시 만났다. 멘키스는 그동안 진태옥이 디자인한 옷을 찬찬히 살펴본 후 이렇게 말했다. “마담 진, 당신은 그동안 옷으로 시(詩)를 썼군요.”
 
  디자이너에서 시인으로. 디자이너 진태옥은 여전히 패션쇼 현장을 지키며 후배들이 파리의 쇼룸, 뉴욕의 백화점 한가운데에서 빛나길 소망하고, 시인 진태옥은 발코니의 정원을 바라보며 옷감과 패턴, 런웨이 너머의 세상으로 건너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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