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고 1학년 때 《소년한국일보》 조풍연 주간이 알바 만화가로 픽업… 1975년 만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서독 유학
⊙ 《소년한국일보》 김수남 사장 ‘먼나라 이웃나라’ 작명… 1800만 부 판매고 올려
⊙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던 학생들이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나 ‘세계시민’이 됐다”
⊙ “‘광복절을 독립기념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자 ‘뉴라이트 총장’ 반발”
⊙ “만화가 안 했으면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보수해주는 인테리어 가게나 하면서 늙어갔겠지”
⊙ 《소년한국일보》 김수남 사장 ‘먼나라 이웃나라’ 작명… 1800만 부 판매고 올려
⊙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던 학생들이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나 ‘세계시민’이 됐다”
⊙ “‘광복절을 독립기념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자 ‘뉴라이트 총장’ 반발”
⊙ “만화가 안 했으면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보수해주는 인테리어 가게나 하면서 늙어갔겠지”
- 사진=조준우
“너 공부는 안 하고 만화책만 보니?”
“아, 《먼나라 이웃나라》 보는구나!”
부모님이 아이에게 권하는 만화책이 있다. 교양만화의 최고봉인 《먼나라 이웃나라》다. 이 만화는 책장을 장식했 던 중후장대한 백과사전들을 몰아냈고, ‘위키피디아’ ‘네이버 백과사전’ 등 온라인 백과사전이 주름잡는 시대에도 당당하게 살아남아 1800만 부라는 교양만화 사상 최고의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1981년 《소년한국일보》에 처음 연재가 시작됐고, 1987년 첫 단행본으로 나왔다. 2021년은 《먼나라 이웃나라》가 세상에 나온 지 40년이 되는 해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처음 신문에서 본 세대는 벌써 50대 중년이 됐다.
만화평론가 박인하 서울웹툰아카데미 이사장은 ‘이원복표’ 만화 그림 스타일에 대해, “국내 토종 명랑만화의 맥을 잇지 않고 벨기에 만화가 페요(Peyo)나 프랑스 만화가 알베르 우데르조(Albert Uderzo) 같은 구미권 작가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먼나라 이웃나라》의 인기 비결은 한국 만화계에서 보기 드물게 명료한 선의 작화(作畫)가 매우 안정적이고 친근하며,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고 수용될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먼나라 이웃나라》 작가 이원복(李元馥·74) 덕성여대 석좌교수를 2020년 11월 27일 서울 선릉역 근처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동안(童顔)의 이원복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해 ‘방콕’ 생활을 해야 하지만, EBS TV 프로그램 〈EBS 클래스e 특강〉 진행 때문에 바쁘게 지낸다”며 “평소엔 집이 잠실이고 작업실이 선릉이니까 매일 사무실과 집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동독의 ‘누더기길’에 공감
2020년 3월, 기자는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아 동서독 접경지역 1393km를 자동차로 달리며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수첩을 보니 이런 대목이 적혀 있었다.
〈독일 최북단 동서독 접경 열차역 헤른부르크 기차역(Bahnhof Herrnburg)을 빠져나와 쉬락스도르프로 가는 길은 과거 동독 지역들이다. 도로가 베를린과 달리 누더기 옷 같았다. 1975년 무렵 당시 뮌스터대학 대학원에 유학하던 이원복 전 덕성여대 총장이 아동잡지 《새소년》에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란 만화 코너에서, ‘동독의 도로가 울퉁불퉁하고 누더기였다’라고 묘사했던 기억이 났다.〉
— 옛 동독 지역을 차로 달리는데 ‘누더기길’이 나타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1975년) 때 본,교수님이 그린 만화가 생각났어요. 차를 멈춰 세우고 도로 바닥을 만져보았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45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오~ 그걸 보셨군요! 유학 시절에 동독 지역을 달리다 보면 누더기길의 연속이었고, 몹시 덜컹거렸어요. 그것을 만화에 표현한 거죠. 통일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도로 전체를 다시 포장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동독의 대표적인 ‘누더기길’이 보수를 거쳐 덜컹거리지 않고, 오히려 정겨운 느낌을 줄 겁니다.”
— 아우토반을 달리다 경찰이 쫓아오자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에서 병호가 “폴리차이(Polizei)?”라며 놀라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건 실화였어요. 넷째 형과 함께 지인(知人)의 이삿짐을 날라주러 서베를린으로 가다 단속에 걸렸지요. 프랑크푸르트 표지판만 보고 오는데, 이상하게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동독 쪽 아우토반에서 불법 유턴을 했지요. 서독 프랑크푸르트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동독 헤센주에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이란 도시가 있었던 거죠. 초록색 정복에 검은 가죽장화를 신은 동독 경찰에게 ‘사우스코리아’ 여권을 꺼내 보이면서 북한으로 끌려가지나 않을까 무지하게 쫄았습니다(웃음).”
— 통독 전에도 동서독이 서로 왕래한 걸 보면, 남북한의 현실과는 천양지차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서독 주민들은 원래 서로 왕래를 했어요. 성직자들은 교단의 명령에 따라 자유롭게 통행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서독 함부르크 출신으로,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갓난아기 때 동베를린 인근 템플린이란 작은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메르켈은 직업이 번듯해 함부르크의 외사촌 결혼식도 당국의 허가를 얻어 다녀올 정도였다고 해요. 그녀는 독일사회통일당(SED)이나 슈타지의 협력도 거절해 통독 후 정치적으로 깨끗했습니다. 헬무트 콜 총리의 눈에 들어 1991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하죠.”
조풍연 주간이 만화 그리게 해
— 1960년대는 만화에 대한 인식이 낮을 때인데, 만화에 관심을 가졌네요.
“옛날엔 만화라면 일종의 하류문화(subculture), 문화란 말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재밌잖아요. 그리고 한번 빠지면 못 빠져나오는 게 만화거든요.”
— 영국 소설가 월터 스콧(Walter Scott)의 원작을 만화로 만든 《아이반호(Ivanhoe)》로 습작을 하셨다지요.
“《아이반호》는 내가 최초로 그린 40페이지짜리 만화입니다. 1962년 고1 때 《소년한국일보》의 조풍연(趙豊衍· 1914~1991) 주간이 그림을 눈여겨보시더니 일감을 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아이반호》라는 만화를 주면서, 그걸 트레싱지(紙)에 대고 베껴오라고 했어요. 그렇게 그린 만화가 처음엔 내 이름을 달지 못하고 나갔습니다. 첫 원고료로 3000원을 받았는데, 넷째 형(이정춘 중앙대 명예교수)에게 1000원을 주고, 나머지로 영어사전 한 권 사고, 찰턴 헤스턴 주연의 영화 〈벤허〉를 보았습니다.”
— 언제 첫 창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나요.
“대학도 들어가고, 4~5년 동안 미국이나 일본 만화를 베끼다 보니 자존심이 상했어요. 신문사에 ‘베끼는 것 그만하고 창작하겠다’고 했더니 ‘원고료만 더 달라고 안 하면 된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그때는 순정만화를 그렸어요. 하도 많이 그려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 이원복이란 본명 말고 ‘성천경’ ‘이상권’이란 이름도 쓰셨더군요.
“1968년이나 1969년쯤 됐을 겁니다. 그때부터는 창작이니까 이름을 넣어야죠. 어린이 신문엔 1면부터 4면까지 만화가 들어가요. 길창덕(꺼벙이)과 신문수(로봇찌바), 박수동(고인돌)의 작품이 들어갔는데, 매일 3개 면을 그렸죠. 신문사 담당자가 마감날짜 따박따박 지키고 쓸 만하니까 3개 면을 맡겼어요. 작품마다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어서 1면은 이상권, 2면은 이원복, 3면은 성천경이라고 했지요. 서울대 건축과 동기동창 이름이에요. 원고료를 받으면 ‘대명료(貸名料)’로 그 당시 대학생들은 구경도 못 하는 생맥주를 샀습니다(웃음).”
— 1970년대 초 일본 지바 테쓰야(千葉徹彌·81)의 작화법을 차용했는데, 어떤 점이 배울 만하던가요.
“고백하니까 트집 잡는 사람들이 없어요(웃음). 일본 만화에서 지바 테쓰야의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지바는 만화를 극화(劇畫) 스타일로 만들었죠. 당시 우리 만화는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처럼 갈매기 날아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옷고름을 입에 물고 흑흑 하는 소위 ‘최루탄’이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이때, 지바 테쓰야의 작품 《유키의 태양》을 보면 칸을 구분해 줌인과 줌아웃 기법을 도입했어요. 원경(遠景)부터 시작해서 근경(近景)으로 들어가니 동영상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고무신 공장 집안의 몰락
이원복은 충남 대전에서 고무신 공장과 큰 여관을 경영하던 집안에서 5남 2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이원복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큰 한옥여관은 당시 유명했던 ‘이해랑 극단’이 지방공연을 할 때 장기간 머물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배우 조미령(趙美鈴·91) 선생이 이원복을 업어주기도 했다. 택시 소유주로 택시조합 임원이었고, 고무신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는 자가용대신 말을 타고 다녔다.
형제자매들 모두 걱정 없이 자랐다. 그런데 이원복이 네 살 때 6·25전쟁이 터졌다. 1·4후퇴 때 미군들이 청야전술(淸野戰術·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곤경에 빠뜨리는 전술)로 아버지 고무신 공장을 불태워버렸다. 졸지에 알거지가 됐다. 이 와중에 이원복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각각 10세와 20세 때 여의는 비극을 겪는다.
이러한 상황에 타개를 위해 1966년 큰형 이정복이 서독으로 철학공부를 떠난 뒤 손아랫 형들도 줄줄이 서독으로 유학을 갔다. 5남 중 첫째는 한양대 철학과 이정복(李貞馥·작고) 명예교수, 둘째 이승복(李承馥·작고)은 공부 대신 사업을 선택했고, 셋째는 이창복 교수, 넷째는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이정춘(李正春) 명예교수, 다섯째이자 막내가 이원복 교수다. 다섯 아들 중 넷이 대학교수가 됐다.
경기고 同期 중 복지부 장관만 4명
—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업은 뒷전이고 만화 그리는 일에만 몰두하는 동생을 형님들은 제지 안 했습니까.
“형제자매가 7남매인데 내가 1946년생이잖아요. 집안이 망해 1955년 상경해 서울 공덕초등학교와 동대문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사글셋방을 전전할 땐 고생 많이 했습니다. 다 자기들 먹고살기 바빠서 아무도 막냇동생한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어요. 오히려 내가 알바해서 용돈을 벌어 쓰니까 기특하게 생각했어요. 그런 상황이 어떠한 제지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화 창작 활동을 할 수 있게 했죠. 독일 유학을 갔다 하면 금수저로 아시는 분들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
이원복은 고교 시절 학업보다 만화 그리는 아르바이트에 빠진 탓인지 대학 진학에는 실패했다. 1년을 재수한 끝에 1966년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에 들어간다. 그 후 6년간 학교를 다녔지만, 어린이신문 만화 작업을 계속하느라 전공은 소홀히 해 졸업하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새소년》 등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 경기고와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나왔으니 ‘KS’시군요.
“우리 때만 해도 입시준비는 고3 2학기 때 했어요. 문학 동아리끼리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덕수궁 인근을 산책하며 시를 읊었죠. 그래서인지 동기생들이 인문학적 소양이 높아요. 화구(畫具) 살 돈이 없어 미술반을 그만두었지요. 동기생 480명 가운데 첫해에 360명이 서울대에 진학했어요. 고교 시절 알바하느라 서울대 떨어져서 재수를 했지요.”
— 경기고(61회 졸업) 동기생들은 누가 있습니까.
“김근태(金槿泰)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조영래(趙英來) 변호사,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서상목(徐相穆) 전 신한국당 의원, 김태동(金泰東)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있습니다. 한 기수에서 손학규·김근태·서상목·김성이(金聖二) 네 사람의 보건복지부 장관이 나왔어요. 동기생들끼리 우리 기수가 얼마나 ‘끗발’이 없으면 복지부 장관만 네 명이 나오냐며 배꼽을 잡습니다(웃음).”
‘이원복표’ 그림체 찾아 서독行
이원복은 1975년 만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서독 뮌스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81년까지 6년 동안 자신만의 그림체를 찾았다. 1981년 뮌스터대학 졸업 이후 유럽에 체류하며 《먼나라 이웃나라》를 그리다가 형들의 권유로 1984년 귀국해 덕성여대 산업미술학과(현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로 부임해 교양만화 창작에 몰두했다.
— 독일 유학은 본격적으로 만화를 공부하러 가신 건가요.
“1975년 독일로 떠나면서 파리 서점에 들렀는데, 우데르조(1927~2020)의 《아스테릭스(Asterix)》가 서점 중앙에 진열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죠. ‘아, 만화가 유럽에선 제대로 예술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한국에서도 블루오션이 될 것이고, 평생의 길로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서독에서 ‘서양 콤플렉스’로 가득 찬 일본 만화 스타일을 벗어던지고 콘텐츠 중심의 유럽 만화를 배웠습니다. 내가 토종 명랑만화의 맥을 잇지 않고 페요의 《스머프》나 우데르조의 《아스테릭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르네 고시니(René Goscinny·1926~1977)가 쓴 《아스테릭스》 대본은 독일 대학에서 교재로 쓸 만큼 대사가 훌륭합니다.”
이원복은 전혀 접하지 못했던 많은 정보를 체코·유고슬라비아·브라질에서 온 친구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뮌스터대학 디자인 전공 과제를 집에서 해결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고물차를 끌고 유럽 여행을 했다고 한다.
“내가 깜짝 놀란 게 나는 외국에 처음 나왔는데, 내가 처음 들어간 기숙사에는 국적이 35개였어요. 그 아이들하고 맥줏집에 가서 맥주 한 잔 놓고 밤새도록 떠든 거, 거기서 너무나 많은 걸 배웠죠.”
— 《먼나라 이웃나라》 시작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그때는 내가 독일 유학을 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 독일에 처음 간 것이 1975년입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이 1000달러, 2000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었고, 개발도상국가로서 한창 어려웠던 때 아닙니까? 외국에 나가니까 선진국 형편이 너무 놀라운 거예요. ‘아,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다 이렇게 잘살고, 우리는 이렇게 참 어렵고 힘들게 사는 걸까’ ‘이 사람들이 잘사는 이유를 알고 싶다’ 해서 시작한 것이 《먼나라 이웃나라》죠.”
즉석에서 지은 책 제목
—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아요. 누구 아이디어였나요.
“내가 신문 연재했던 《소년한국일보》에 김수남(1937~1997) 사장이 계셨어요. 이분은 시인이면서 당대 대한민국에서 시를 가장 많이 암송(暗誦)하는 분이었어요. 1982년 독일에서 일시 귀국해 그분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나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너 요새 외국 나가기 힘든 시대에 외국 나가서 유학 생활하면 문화 충격도 받을 거 아니냐, 그거 만화로 좀 해봐’ 하며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그거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럼 제목을 뭐라고 할까요’ 하니까 1초도 안 기다리고 ‘먼나라 이웃나라’로 해보라고 하세요. 역시 시인이라 달라요. 그래서 ‘먼나라 이웃나라’… 거기서 1초 만에 나왔어요. 어감이 좋았어요.”
— 《먼나라 이웃나라》에 나오는 모자를 쓴 캐릭터가 교수님인가요.
“아니에요. 저는 원래 모자를 안 쓰니까. 당시 만화가들은 그런 베레모를 썼어요. 그게 뭐냐면 일종의 우리 사람들의 선입견이 화가는 베레모를 쓰고… 그래서 이제 캐릭터로 등장시킨 것뿐이죠.”
— 《먼나라 이웃나라》에 보면 역사 얘기가 방대합니다. 그것을 압축해 만화에 담아내는 작업이 어렵지 않은가요.
“《먼나라 이웃나라》 1부에 속하는 유럽의 여섯 나라는 내가 독일 있을 때 쓴 겁니다. 유럽하고 아시아는 다릅니다. 아시아는 각 나라 전부가 특징이 달라요. 그런데 유럽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전부 기독교로 통일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교(正敎)냐, 가톨릭이냐, 개신교냐, 루터교냐 그런 정도의 차이지, 기독교로 유럽이 완전히 통일됐다는 얘기는 기본적인 멘탈리티 의식 구조가 같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기본만 해석하면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해결 코드가 다 나온단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기본적인 코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역으로 ‘아, 이것 때문에 아시아에선 유럽연합(EU)이 탄생하기 어렵겠구나’라는 생각도 했지요.”
미국 10대 대통령까지 줄줄 외우는 초등학생
— 《먼나라 이웃나라》는 교양만화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많이 팔렸죠.
“출판사(김영사)가 1800만 부 팔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30여 년간 누적 판매된 부수예요. 물론 《WHY 시리즈》 《마법 천자문》처럼 수천만 부 나간 학습만화 시리즈도 있지요. 교양만화 부문에서 1800만 부라는 기록이 개인적으로 자랑스럽습니다.”
— 인세(印稅)도 상당했겠는데요.
“인세가 한꺼번에 들어왔다면 떼부자가 됐겠죠. 인세가 꾸준히 들어와 아들 교육하고 살았지요(웃음).”
— 처음 만화 그리면서 이렇게 많이 팔릴 것은 예상은 하셨나요.
“전혀 상상도 못 했죠. 자랑스러운 것은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던 학생들이 청장년이 되면서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나 만화 속에서 본 세계와 실제 세계를 비교하면서 ‘세계시민’이 됐다는 점입니다.”
— 《먼나라 이웃나라》에 관한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우리나라 영국 주재 외교관인데, 아이를 데리고 모임엘 간 거예요. 초등학교 2학년생 아들이 헨리 8세 여섯 명의 부인 얘기를 줄줄이 하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뒤집어진 거예요. 우리도 잘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그게 《먼나라 이웃나라》에 나오거든요. 미국 초등학교 과정에 미국 대통령 순서 외우기가 나와요. 대부분 워싱턴(1대), 애덤스(2대), 제퍼슨(3대) 정도까지 하면 막히는데, 한국 초등학생이 1~10대까지 좔좔좔 외우니까 놀라는 거죠. 교양만화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외국인을 상대할 때 그 나라 역사로 접근하면 그들과 급속도로 친밀해집니다.”
와인을 ‘머리’로 마시는 한국인
— 《먼나라 이웃나라》를 시대 변화에 따라 리뉴얼하지는 않나요.
“계속 개정 작업을 합니다. 《먼나라 이웃나라》가 유럽 6개국과 일본·중국·미국·한국까지 10개 나라를 다뤘고, 스페인까지 15권을 냈어요. 나라만 다뤄선 세계 역사 퍼즐이 안 맞는다고 해서 《가로세로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중동, 발칸, 동남아, 호주·뉴질랜드, 캐나다, 오스만제국, 러시아 편 등 7권이 나왔고, 현재까지 22권이 나왔습니다. 출판사 측에서 《가로세로 세계사》를 판매 전략상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Ⅱ(총 7권)라고 이름을 붙이더군요.”
이원복 교수는 요즘 《먼나라 이웃나라》 ‘인도’ 편을 작업하고 있다. 이 교수 책상 주위로 인도 관련 책들이 그득했다. 《이야기 인도사》 《인도 백년을 돌아보다》 《인도를 읽는다》 《파키스탄 가는 길》….
— 《먼나라 이웃나라》 인도 편이 기대됩니다.
“인도는 중국만큼 방대해요. 중국은 한족, 한자문화권이라는 인종적·문화적 동질성이 있지만, 인도는 영국이 식민지 하려고 들어가니 티무르 왕조의 잔존 세력이 세운 무굴제국이 형체만 있었지 800여 개국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영국은 용병 포함 5만명으로 ‘분열정책’을 통해 인도를 통치했어요.”
— 2007년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을 펴내셨는데요. 와인을 좋아해서 그리신 건가요.
“와인 만화를 그리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신의 물방울(神の)》이란 일본 만화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만화를 읽어보면 작가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서구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로 절어 있는 책이에요. 그 와인을 마시면 푸른 벌판에 흰옷을 입은 소녀가 나비들을 따라 팔랑팔랑 걸어와야 해요.
우리가 왜 내 돈을 내고 와인 사 마시면서 그 와인 주인 조카 이름까지 알아야 되죠? 내 돈 내고 마시면서 내가 와인을 지배해야지, 왜 경배하면서 마십니까? 와인 마시면서 맛있으면 되는 거지, 이 와인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왜 분석하고 있어요? 왜 와인을 입으로 마시지 않고 머리로 마시냐고요.”
이원복 교수는 ‘그때 와인 주권(主權)을 되찾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책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워낙 와인에 대한 문화가 없는 독특한 나라예요. 2000년대 들어 우리가 좀 살게 되니까 그때 와인 문화가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고, 와인 지식이 너무 없다 보니까 그런 만화에 의존했어요. 그 만화가 서구에 대한 열등감에 완전히 절어 있었기 때문에 ‘이거 그냥 뒀다가는 서구 문화 식민지가 되는 거 아니냐’ ‘와인을 주인의식을 갖고 마시자’는 생각으로 그린 만화입니다.”
독일과 일본
— 202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3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일에서 유학한 경험으로 미뤄볼 때 남북 통일에 대한 전망을 한다면.
“당시 서독의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외교력은 지금 우리나라의 국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외교력 하나만 놓고 보면, 전범국(戰犯國) 독일은 미·소 양대 강국 이외에 영국과 프랑스, 폴란드·체코 등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을 설득하지 않으면 통일이 불가능했습니다. 서독은 현명하게도 통일을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했어요. 우리는 힘이 없어 분단됐고, 독일은 너무 강해 분단됐습니다. 독일의 경우,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평화적 신뢰감만 주면 주변국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죠. 그런데 우리는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으면 통일은 요원하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이원복 교수는 “통독에 서독의 외교력도 큰 몫을 했다”며 “특히 600만명(300만명이 유대인)이 희생당한 폴란드가 독일의 통일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했다.
“1970년 12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게토 추모비에 무릎 꿇고 사과하며 참회의 시간을 가졌고, 바르샤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로 편입된 영토를 인정했습니다. 폴란드로 편입된 영토는 사실 동독 관할인데,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조약을 체결한다는 건 난센스였죠. 빌리 브란트의 그러한 ‘외교적 쇼맨십’이 독일 통일의 초석(礎石)이 된 겁니다.”
— 1980년대까지만 해도 책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을 보면, 교수님이 공산주의의 장점을 자세하게 설명한다거나 남미에서 유행한 ‘종속이론’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혹시 서독 유학 당시 ‘68세대’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요.
“사실 그때 풍조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혼이 유행하고 교수가 강단에 청바지를 입고 올라오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치 부역자를 찾아내 딸아이 또래의 여성이 따귀를 때리고, 권위주의 무너뜨리는 것을 무던히 치부하던 시기였습니다. 같은 ‘전범국’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독일 젊은이들은 ‘우리 할아버지가 일으킨 전쟁에 내 책임은 없지만, 내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니 독일 교과서는 왜곡(歪曲)이라는 게 없습니다. 사무라이(侍)는 잘못을 저지르면 할복해야 하고, 서양인들은 잘못을 저지르면 고해성사하면 끝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왜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 인정하지 않나?”
— 《주간조선》에 ‘현대문명진단’ 코너를 13년간 연재했는데, 연재물로는 국내 최장수 기록일 겁니다. 1995년 ‘현대문명진단’에서 ‘광복은 50년에서 끝내자’, 2007년 《세계사 산책》에서 광복절을 건국기념일로 고치자고도 주장하셨죠.
“일본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건설적인 국가로 나아가려면 ‘독립기념일’로 바꿔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칼럼을 보고 ‘민주 덕성에 뉴라이트 총장 웬말이냐’며 맹렬하게 반발했습니다. 왜 북한 정부 수립의 정통성은 인정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는지, 그들의 속내를 뻔히 알지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 초기엔 이슬람교에 부정적이었으나 2002년 《신의 나라, 인간 나라》를 기점으로 서구 편향적 역사관에서 탈피했다고 평론가들이 이야기합니다만.
“책을 쓰기 전까지 이슬람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기독교 문화에서 보면 이슬람은 괜시리 주는 것 없이 미운 존재였으니까요. 책을 쓰느라 연구해보니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하나님을 공통신(共通神)으로 모신 평화로운 종교더군요. ‘한 손에는 쿠란, 한 손에는 칼’이란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 원정이 최후의 패배를 앞두고 있을 때, 이슬람에 대한 공포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어낸 말이라고 하더군요.”
“내 아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만화를 그린다”
— 요즘 주로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는 후배 만화가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웹툰도 많이 하고 있고. 지금은 만화의 대변혁기입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입니다. 나는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입니다. 그러나 아날로그 만화나 디지털 만화나 근본적으로 그리는 건 같아요. 콘텐츠도 마찬가지고요. 단지 손으로 그리는 만화(아날로그)는 편집자가 필터링해 출판하는 것이고, 디지털 만화는 직접 웹사이트에 띄우기 때문에 중간에 걸러주는 사람이 없죠.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 훨씬 더 거칠어질 수 있고, 더 직접적일 수 있습니다. 포털 같은 데서 많이 필터링하니까 염려는 줄어듭니다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독자와 작가가 직접 만나는 것이 디지털이고, 독자와 편집자와 작가가 간접으로 만나는 것이 아날로그라고 보면 됩니다.”
— 만화 작업을 하면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시나요.
“페이스북이나 골프는 하지 않아요. 주색잡기(酒色雜技)에서 주(酒)만 해요. 골프는 성격상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내 시간 들여가며 기분 나빠지는 행위를 해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나에 대한 비판이 들어오면 창작에서 행동의 자유가 제한을 받습니다. 자신이 한 말은 다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있잖아요.”
— 여러 가지 작품을 쭉 만들어왔는데 만화가로서 나의 인생이 어떻게 세상에 기억되기 바라십니까.
“저는 그렇게 큰 욕심은 안 냅니다. 지금까지 그려온 만화의 원칙은 ‘내 아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만화를 그린다’예요. 나중에 아들이 ‘아빠 이거 뭐야?’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잖아요. 내게 ‘만화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평생 즐겁게 지내온 놀이터’였다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즐거워서 하는 거니까, 만화를 즐겁게 그리니까 이건 놀이죠.”
기자가 2005년 일본 시즈오카 연수 때 가져간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편(7~8권) 두 권을 내놓자, 이 교수는 “일본인들도 신기했는지 이 책을 일본어판으로 내자고 했다”며 책에 ‘저자 사인’을 해주었다. 기자가 “만화를 그리지 않고 건축가의 길을 갔으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라고 물었다. 이원복 교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 다루는 재주가 없어 중동 지역 현장감독으론 못 갔을 것이고,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를 보수해주는 인테리어 가게나 하면서 늙어갔겠지!”⊙
“아, 《먼나라 이웃나라》 보는구나!”
부모님이 아이에게 권하는 만화책이 있다. 교양만화의 최고봉인 《먼나라 이웃나라》다. 이 만화는 책장을 장식했 던 중후장대한 백과사전들을 몰아냈고, ‘위키피디아’ ‘네이버 백과사전’ 등 온라인 백과사전이 주름잡는 시대에도 당당하게 살아남아 1800만 부라는 교양만화 사상 최고의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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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만 부가 팔린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
만화평론가 박인하 서울웹툰아카데미 이사장은 ‘이원복표’ 만화 그림 스타일에 대해, “국내 토종 명랑만화의 맥을 잇지 않고 벨기에 만화가 페요(Peyo)나 프랑스 만화가 알베르 우데르조(Albert Uderzo) 같은 구미권 작가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먼나라 이웃나라》의 인기 비결은 한국 만화계에서 보기 드물게 명료한 선의 작화(作畫)가 매우 안정적이고 친근하며,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고 수용될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먼나라 이웃나라》 작가 이원복(李元馥·74) 덕성여대 석좌교수를 2020년 11월 27일 서울 선릉역 근처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동안(童顔)의 이원복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해 ‘방콕’ 생활을 해야 하지만, EBS TV 프로그램 〈EBS 클래스e 특강〉 진행 때문에 바쁘게 지낸다”며 “평소엔 집이 잠실이고 작업실이 선릉이니까 매일 사무실과 집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동독의 ‘누더기길’에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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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독 지역인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인근 쉬락스도르프의 누더기길. 45년 전 이원복 교수가 만화에서 묘사한 그 길이다. |
〈독일 최북단 동서독 접경 열차역 헤른부르크 기차역(Bahnhof Herrnburg)을 빠져나와 쉬락스도르프로 가는 길은 과거 동독 지역들이다. 도로가 베를린과 달리 누더기 옷 같았다. 1975년 무렵 당시 뮌스터대학 대학원에 유학하던 이원복 전 덕성여대 총장이 아동잡지 《새소년》에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란 만화 코너에서, ‘동독의 도로가 울퉁불퉁하고 누더기였다’라고 묘사했던 기억이 났다.〉
— 옛 동독 지역을 차로 달리는데 ‘누더기길’이 나타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1975년) 때 본,교수님이 그린 만화가 생각났어요. 차를 멈춰 세우고 도로 바닥을 만져보았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45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오~ 그걸 보셨군요! 유학 시절에 동독 지역을 달리다 보면 누더기길의 연속이었고, 몹시 덜컹거렸어요. 그것을 만화에 표현한 거죠. 통일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도로 전체를 다시 포장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동독의 대표적인 ‘누더기길’이 보수를 거쳐 덜컹거리지 않고, 오히려 정겨운 느낌을 줄 겁니다.”
— 아우토반을 달리다 경찰이 쫓아오자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에서 병호가 “폴리차이(Polizei)?”라며 놀라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건 실화였어요. 넷째 형과 함께 지인(知人)의 이삿짐을 날라주러 서베를린으로 가다 단속에 걸렸지요. 프랑크푸르트 표지판만 보고 오는데, 이상하게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동독 쪽 아우토반에서 불법 유턴을 했지요. 서독 프랑크푸르트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동독 헤센주에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이란 도시가 있었던 거죠. 초록색 정복에 검은 가죽장화를 신은 동독 경찰에게 ‘사우스코리아’ 여권을 꺼내 보이면서 북한으로 끌려가지나 않을까 무지하게 쫄았습니다(웃음).”
— 통독 전에도 동서독이 서로 왕래한 걸 보면, 남북한의 현실과는 천양지차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서독 주민들은 원래 서로 왕래를 했어요. 성직자들은 교단의 명령에 따라 자유롭게 통행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서독 함부르크 출신으로,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갓난아기 때 동베를린 인근 템플린이란 작은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메르켈은 직업이 번듯해 함부르크의 외사촌 결혼식도 당국의 허가를 얻어 다녀올 정도였다고 해요. 그녀는 독일사회통일당(SED)이나 슈타지의 협력도 거절해 통독 후 정치적으로 깨끗했습니다. 헬무트 콜 총리의 눈에 들어 1991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하죠.”
조풍연 주간이 만화 그리게 해
— 1960년대는 만화에 대한 인식이 낮을 때인데, 만화에 관심을 가졌네요.
“옛날엔 만화라면 일종의 하류문화(subculture), 문화란 말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재밌잖아요. 그리고 한번 빠지면 못 빠져나오는 게 만화거든요.”
— 영국 소설가 월터 스콧(Walter Scott)의 원작을 만화로 만든 《아이반호(Ivanhoe)》로 습작을 하셨다지요.
“《아이반호》는 내가 최초로 그린 40페이지짜리 만화입니다. 1962년 고1 때 《소년한국일보》의 조풍연(趙豊衍· 1914~1991) 주간이 그림을 눈여겨보시더니 일감을 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아이반호》라는 만화를 주면서, 그걸 트레싱지(紙)에 대고 베껴오라고 했어요. 그렇게 그린 만화가 처음엔 내 이름을 달지 못하고 나갔습니다. 첫 원고료로 3000원을 받았는데, 넷째 형(이정춘 중앙대 명예교수)에게 1000원을 주고, 나머지로 영어사전 한 권 사고, 찰턴 헤스턴 주연의 영화 〈벤허〉를 보았습니다.”
— 언제 첫 창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나요.
“대학도 들어가고, 4~5년 동안 미국이나 일본 만화를 베끼다 보니 자존심이 상했어요. 신문사에 ‘베끼는 것 그만하고 창작하겠다’고 했더니 ‘원고료만 더 달라고 안 하면 된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그때는 순정만화를 그렸어요. 하도 많이 그려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 이원복이란 본명 말고 ‘성천경’ ‘이상권’이란 이름도 쓰셨더군요.
“1968년이나 1969년쯤 됐을 겁니다. 그때부터는 창작이니까 이름을 넣어야죠. 어린이 신문엔 1면부터 4면까지 만화가 들어가요. 길창덕(꺼벙이)과 신문수(로봇찌바), 박수동(고인돌)의 작품이 들어갔는데, 매일 3개 면을 그렸죠. 신문사 담당자가 마감날짜 따박따박 지키고 쓸 만하니까 3개 면을 맡겼어요. 작품마다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어서 1면은 이상권, 2면은 이원복, 3면은 성천경이라고 했지요. 서울대 건축과 동기동창 이름이에요. 원고료를 받으면 ‘대명료(貸名料)’로 그 당시 대학생들은 구경도 못 하는 생맥주를 샀습니다(웃음).”
— 1970년대 초 일본 지바 테쓰야(千葉徹彌·81)의 작화법을 차용했는데, 어떤 점이 배울 만하던가요.
“고백하니까 트집 잡는 사람들이 없어요(웃음). 일본 만화에서 지바 테쓰야의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지바는 만화를 극화(劇畫) 스타일로 만들었죠. 당시 우리 만화는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처럼 갈매기 날아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옷고름을 입에 물고 흑흑 하는 소위 ‘최루탄’이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이때, 지바 테쓰야의 작품 《유키의 태양》을 보면 칸을 구분해 줌인과 줌아웃 기법을 도입했어요. 원경(遠景)부터 시작해서 근경(近景)으로 들어가니 동영상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고무신 공장 집안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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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창복 교수가 《삶을 위한 죽음의 미학》을 펴냈을 때 동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이 이정춘 교수, 오른쪽이 이원복 교수. |
형제자매들 모두 걱정 없이 자랐다. 그런데 이원복이 네 살 때 6·25전쟁이 터졌다. 1·4후퇴 때 미군들이 청야전술(淸野戰術·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곤경에 빠뜨리는 전술)로 아버지 고무신 공장을 불태워버렸다. 졸지에 알거지가 됐다. 이 와중에 이원복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각각 10세와 20세 때 여의는 비극을 겪는다.
이러한 상황에 타개를 위해 1966년 큰형 이정복이 서독으로 철학공부를 떠난 뒤 손아랫 형들도 줄줄이 서독으로 유학을 갔다. 5남 중 첫째는 한양대 철학과 이정복(李貞馥·작고) 명예교수, 둘째 이승복(李承馥·작고)은 공부 대신 사업을 선택했고, 셋째는 이창복 교수, 넷째는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이정춘(李正春) 명예교수, 다섯째이자 막내가 이원복 교수다. 다섯 아들 중 넷이 대학교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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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가 젊은 시절 만화를 연재했던 잡지 《새소년》. |
“형제자매가 7남매인데 내가 1946년생이잖아요. 집안이 망해 1955년 상경해 서울 공덕초등학교와 동대문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사글셋방을 전전할 땐 고생 많이 했습니다. 다 자기들 먹고살기 바빠서 아무도 막냇동생한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어요. 오히려 내가 알바해서 용돈을 벌어 쓰니까 기특하게 생각했어요. 그런 상황이 어떠한 제지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화 창작 활동을 할 수 있게 했죠. 독일 유학을 갔다 하면 금수저로 아시는 분들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
이원복은 고교 시절 학업보다 만화 그리는 아르바이트에 빠진 탓인지 대학 진학에는 실패했다. 1년을 재수한 끝에 1966년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에 들어간다. 그 후 6년간 학교를 다녔지만, 어린이신문 만화 작업을 계속하느라 전공은 소홀히 해 졸업하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새소년》 등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 경기고와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나왔으니 ‘KS’시군요.
“우리 때만 해도 입시준비는 고3 2학기 때 했어요. 문학 동아리끼리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덕수궁 인근을 산책하며 시를 읊었죠. 그래서인지 동기생들이 인문학적 소양이 높아요. 화구(畫具) 살 돈이 없어 미술반을 그만두었지요. 동기생 480명 가운데 첫해에 360명이 서울대에 진학했어요. 고교 시절 알바하느라 서울대 떨어져서 재수를 했지요.”
— 경기고(61회 졸업) 동기생들은 누가 있습니까.
“김근태(金槿泰)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조영래(趙英來) 변호사,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서상목(徐相穆) 전 신한국당 의원, 김태동(金泰東)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있습니다. 한 기수에서 손학규·김근태·서상목·김성이(金聖二) 네 사람의 보건복지부 장관이 나왔어요. 동기생들끼리 우리 기수가 얼마나 ‘끗발’이 없으면 복지부 장관만 네 명이 나오냐며 배꼽을 잡습니다(웃음).”
‘이원복표’ 그림체 찾아 서독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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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는 독일 유학 중 〈먼나라 이웃나라〉를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
— 독일 유학은 본격적으로 만화를 공부하러 가신 건가요.
“1975년 독일로 떠나면서 파리 서점에 들렀는데, 우데르조(1927~2020)의 《아스테릭스(Asterix)》가 서점 중앙에 진열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죠. ‘아, 만화가 유럽에선 제대로 예술 대접을 받고 있구나!’ 한국에서도 블루오션이 될 것이고, 평생의 길로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서독에서 ‘서양 콤플렉스’로 가득 찬 일본 만화 스타일을 벗어던지고 콘텐츠 중심의 유럽 만화를 배웠습니다. 내가 토종 명랑만화의 맥을 잇지 않고 페요의 《스머프》나 우데르조의 《아스테릭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르네 고시니(René Goscinny·1926~1977)가 쓴 《아스테릭스》 대본은 독일 대학에서 교재로 쓸 만큼 대사가 훌륭합니다.”
이원복은 전혀 접하지 못했던 많은 정보를 체코·유고슬라비아·브라질에서 온 친구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뮌스터대학 디자인 전공 과제를 집에서 해결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고물차를 끌고 유럽 여행을 했다고 한다.
“내가 깜짝 놀란 게 나는 외국에 처음 나왔는데, 내가 처음 들어간 기숙사에는 국적이 35개였어요. 그 아이들하고 맥줏집에 가서 맥주 한 잔 놓고 밤새도록 떠든 거, 거기서 너무나 많은 걸 배웠죠.”
— 《먼나라 이웃나라》 시작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그때는 내가 독일 유학을 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 독일에 처음 간 것이 1975년입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이 1000달러, 2000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었고, 개발도상국가로서 한창 어려웠던 때 아닙니까? 외국에 나가니까 선진국 형편이 너무 놀라운 거예요. ‘아,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다 이렇게 잘살고, 우리는 이렇게 참 어렵고 힘들게 사는 걸까’ ‘이 사람들이 잘사는 이유를 알고 싶다’ 해서 시작한 것이 《먼나라 이웃나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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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쓴 캐릭터는 이원복 만화의 상징이 됐다. |
“내가 신문 연재했던 《소년한국일보》에 김수남(1937~1997) 사장이 계셨어요. 이분은 시인이면서 당대 대한민국에서 시를 가장 많이 암송(暗誦)하는 분이었어요. 1982년 독일에서 일시 귀국해 그분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나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너 요새 외국 나가기 힘든 시대에 외국 나가서 유학 생활하면 문화 충격도 받을 거 아니냐, 그거 만화로 좀 해봐’ 하며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그거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럼 제목을 뭐라고 할까요’ 하니까 1초도 안 기다리고 ‘먼나라 이웃나라’로 해보라고 하세요. 역시 시인이라 달라요. 그래서 ‘먼나라 이웃나라’… 거기서 1초 만에 나왔어요. 어감이 좋았어요.”
— 《먼나라 이웃나라》에 나오는 모자를 쓴 캐릭터가 교수님인가요.
“아니에요. 저는 원래 모자를 안 쓰니까. 당시 만화가들은 그런 베레모를 썼어요. 그게 뭐냐면 일종의 우리 사람들의 선입견이 화가는 베레모를 쓰고… 그래서 이제 캐릭터로 등장시킨 것뿐이죠.”
— 《먼나라 이웃나라》에 보면 역사 얘기가 방대합니다. 그것을 압축해 만화에 담아내는 작업이 어렵지 않은가요.
“《먼나라 이웃나라》 1부에 속하는 유럽의 여섯 나라는 내가 독일 있을 때 쓴 겁니다. 유럽하고 아시아는 다릅니다. 아시아는 각 나라 전부가 특징이 달라요. 그런데 유럽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전부 기독교로 통일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교(正敎)냐, 가톨릭이냐, 개신교냐, 루터교냐 그런 정도의 차이지, 기독교로 유럽이 완전히 통일됐다는 얘기는 기본적인 멘탈리티 의식 구조가 같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기본만 해석하면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해결 코드가 다 나온단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기본적인 코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역으로 ‘아, 이것 때문에 아시아에선 유럽연합(EU)이 탄생하기 어렵겠구나’라는 생각도 했지요.”
미국 10대 대통령까지 줄줄 외우는 초등학생
— 《먼나라 이웃나라》는 교양만화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많이 팔렸죠.
“출판사(김영사)가 1800만 부 팔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30여 년간 누적 판매된 부수예요. 물론 《WHY 시리즈》 《마법 천자문》처럼 수천만 부 나간 학습만화 시리즈도 있지요. 교양만화 부문에서 1800만 부라는 기록이 개인적으로 자랑스럽습니다.”
— 인세(印稅)도 상당했겠는데요.
“인세가 한꺼번에 들어왔다면 떼부자가 됐겠죠. 인세가 꾸준히 들어와 아들 교육하고 살았지요(웃음).”
— 처음 만화 그리면서 이렇게 많이 팔릴 것은 예상은 하셨나요.
“전혀 상상도 못 했죠. 자랑스러운 것은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던 학생들이 청장년이 되면서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나 만화 속에서 본 세계와 실제 세계를 비교하면서 ‘세계시민’이 됐다는 점입니다.”
— 《먼나라 이웃나라》에 관한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우리나라 영국 주재 외교관인데, 아이를 데리고 모임엘 간 거예요. 초등학교 2학년생 아들이 헨리 8세 여섯 명의 부인 얘기를 줄줄이 하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뒤집어진 거예요. 우리도 잘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그게 《먼나라 이웃나라》에 나오거든요. 미국 초등학교 과정에 미국 대통령 순서 외우기가 나와요. 대부분 워싱턴(1대), 애덤스(2대), 제퍼슨(3대) 정도까지 하면 막히는데, 한국 초등학생이 1~10대까지 좔좔좔 외우니까 놀라는 거죠. 교양만화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외국인을 상대할 때 그 나라 역사로 접근하면 그들과 급속도로 친밀해집니다.”
와인을 ‘머리’로 마시는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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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가 자신의 와인셀러에서 와인을 꺼내며 “오감으로 즐기는 술은 와인밖에 없다”며 ‘와인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
“계속 개정 작업을 합니다. 《먼나라 이웃나라》가 유럽 6개국과 일본·중국·미국·한국까지 10개 나라를 다뤘고, 스페인까지 15권을 냈어요. 나라만 다뤄선 세계 역사 퍼즐이 안 맞는다고 해서 《가로세로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중동, 발칸, 동남아, 호주·뉴질랜드, 캐나다, 오스만제국, 러시아 편 등 7권이 나왔고, 현재까지 22권이 나왔습니다. 출판사 측에서 《가로세로 세계사》를 판매 전략상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Ⅱ(총 7권)라고 이름을 붙이더군요.”
이원복 교수는 요즘 《먼나라 이웃나라》 ‘인도’ 편을 작업하고 있다. 이 교수 책상 주위로 인도 관련 책들이 그득했다. 《이야기 인도사》 《인도 백년을 돌아보다》 《인도를 읽는다》 《파키스탄 가는 길》….
— 《먼나라 이웃나라》 인도 편이 기대됩니다.
“인도는 중국만큼 방대해요. 중국은 한족, 한자문화권이라는 인종적·문화적 동질성이 있지만, 인도는 영국이 식민지 하려고 들어가니 티무르 왕조의 잔존 세력이 세운 무굴제국이 형체만 있었지 800여 개국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영국은 용병 포함 5만명으로 ‘분열정책’을 통해 인도를 통치했어요.”
— 2007년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을 펴내셨는데요. 와인을 좋아해서 그리신 건가요.
“와인 만화를 그리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신의 물방울(神の)》이란 일본 만화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만화를 읽어보면 작가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서구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로 절어 있는 책이에요. 그 와인을 마시면 푸른 벌판에 흰옷을 입은 소녀가 나비들을 따라 팔랑팔랑 걸어와야 해요.
우리가 왜 내 돈을 내고 와인 사 마시면서 그 와인 주인 조카 이름까지 알아야 되죠? 내 돈 내고 마시면서 내가 와인을 지배해야지, 왜 경배하면서 마십니까? 와인 마시면서 맛있으면 되는 거지, 이 와인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왜 분석하고 있어요? 왜 와인을 입으로 마시지 않고 머리로 마시냐고요.”
이원복 교수는 ‘그때 와인 주권(主權)을 되찾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책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워낙 와인에 대한 문화가 없는 독특한 나라예요. 2000년대 들어 우리가 좀 살게 되니까 그때 와인 문화가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고, 와인 지식이 너무 없다 보니까 그런 만화에 의존했어요. 그 만화가 서구에 대한 열등감에 완전히 절어 있었기 때문에 ‘이거 그냥 뒀다가는 서구 문화 식민지가 되는 거 아니냐’ ‘와인을 주인의식을 갖고 마시자’는 생각으로 그린 만화입니다.”
독일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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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 시절, 이원복 교수는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몰고 유럽 곳곳을 기웃거렸다. 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
“당시 서독의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외교력은 지금 우리나라의 국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외교력 하나만 놓고 보면, 전범국(戰犯國) 독일은 미·소 양대 강국 이외에 영국과 프랑스, 폴란드·체코 등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을 설득하지 않으면 통일이 불가능했습니다. 서독은 현명하게도 통일을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했어요. 우리는 힘이 없어 분단됐고, 독일은 너무 강해 분단됐습니다. 독일의 경우,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평화적 신뢰감만 주면 주변국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죠. 그런데 우리는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으면 통일은 요원하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이원복 교수는 “통독에 서독의 외교력도 큰 몫을 했다”며 “특히 600만명(300만명이 유대인)이 희생당한 폴란드가 독일의 통일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했다.
“1970년 12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게토 추모비에 무릎 꿇고 사과하며 참회의 시간을 가졌고, 바르샤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로 편입된 영토를 인정했습니다. 폴란드로 편입된 영토는 사실 동독 관할인데,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조약을 체결한다는 건 난센스였죠. 빌리 브란트의 그러한 ‘외교적 쇼맨십’이 독일 통일의 초석(礎石)이 된 겁니다.”
— 1980년대까지만 해도 책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을 보면, 교수님이 공산주의의 장점을 자세하게 설명한다거나 남미에서 유행한 ‘종속이론’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혹시 서독 유학 당시 ‘68세대’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요.
“사실 그때 풍조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혼이 유행하고 교수가 강단에 청바지를 입고 올라오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치 부역자를 찾아내 딸아이 또래의 여성이 따귀를 때리고, 권위주의 무너뜨리는 것을 무던히 치부하던 시기였습니다. 같은 ‘전범국’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독일 젊은이들은 ‘우리 할아버지가 일으킨 전쟁에 내 책임은 없지만, 내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니 독일 교과서는 왜곡(歪曲)이라는 게 없습니다. 사무라이(侍)는 잘못을 저지르면 할복해야 하고, 서양인들은 잘못을 저지르면 고해성사하면 끝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왜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 인정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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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는 8월 15일 광복절을 독립기념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뉴라이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
“일본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건설적인 국가로 나아가려면 ‘독립기념일’로 바꿔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칼럼을 보고 ‘민주 덕성에 뉴라이트 총장 웬말이냐’며 맹렬하게 반발했습니다. 왜 북한 정부 수립의 정통성은 인정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는지, 그들의 속내를 뻔히 알지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 초기엔 이슬람교에 부정적이었으나 2002년 《신의 나라, 인간 나라》를 기점으로 서구 편향적 역사관에서 탈피했다고 평론가들이 이야기합니다만.
“책을 쓰기 전까지 이슬람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기독교 문화에서 보면 이슬람은 괜시리 주는 것 없이 미운 존재였으니까요. 책을 쓰느라 연구해보니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하나님을 공통신(共通神)으로 모신 평화로운 종교더군요. ‘한 손에는 쿠란, 한 손에는 칼’이란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 원정이 최후의 패배를 앞두고 있을 때, 이슬람에 대한 공포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어낸 말이라고 하더군요.”
“내 아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만화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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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이원복 교수는 스스로를 ‘마지막 아날로그 만화가’라고 말한다. |
“웹툰도 많이 하고 있고. 지금은 만화의 대변혁기입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입니다. 나는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입니다. 그러나 아날로그 만화나 디지털 만화나 근본적으로 그리는 건 같아요. 콘텐츠도 마찬가지고요. 단지 손으로 그리는 만화(아날로그)는 편집자가 필터링해 출판하는 것이고, 디지털 만화는 직접 웹사이트에 띄우기 때문에 중간에 걸러주는 사람이 없죠.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 훨씬 더 거칠어질 수 있고, 더 직접적일 수 있습니다. 포털 같은 데서 많이 필터링하니까 염려는 줄어듭니다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독자와 작가가 직접 만나는 것이 디지털이고, 독자와 편집자와 작가가 간접으로 만나는 것이 아날로그라고 보면 됩니다.”
— 만화 작업을 하면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시나요.
“페이스북이나 골프는 하지 않아요. 주색잡기(酒色雜技)에서 주(酒)만 해요. 골프는 성격상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내 시간 들여가며 기분 나빠지는 행위를 해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나에 대한 비판이 들어오면 창작에서 행동의 자유가 제한을 받습니다. 자신이 한 말은 다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있잖아요.”
— 여러 가지 작품을 쭉 만들어왔는데 만화가로서 나의 인생이 어떻게 세상에 기억되기 바라십니까.
“저는 그렇게 큰 욕심은 안 냅니다. 지금까지 그려온 만화의 원칙은 ‘내 아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만화를 그린다’예요. 나중에 아들이 ‘아빠 이거 뭐야?’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잖아요. 내게 ‘만화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평생 즐겁게 지내온 놀이터’였다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즐거워서 하는 거니까, 만화를 즐겁게 그리니까 이건 놀이죠.”
기자가 2005년 일본 시즈오카 연수 때 가져간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편(7~8권) 두 권을 내놓자, 이 교수는 “일본인들도 신기했는지 이 책을 일본어판으로 내자고 했다”며 책에 ‘저자 사인’을 해주었다. 기자가 “만화를 그리지 않고 건축가의 길을 갔으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라고 물었다. 이원복 교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 다루는 재주가 없어 중동 지역 현장감독으론 못 갔을 것이고,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를 보수해주는 인테리어 가게나 하면서 늙어갔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