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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이어령, 故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에 답하다 (4) 마지막

“神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가 바로 絶對”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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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을 제외하고 ‘절대’라는 말을 못 써… ‘절대라는 말은 절대로 없다’고 할 때만 가능
⊙ 영혼까지 저울로 재려는 서양의 反영혼주의
⊙ 양자적 진공이 영혼의 세계… 有면서 無, 無면서 有, 입자이면서 파장인 세계
⊙ “어찌 하늘이 이로움과 해로움을 가려서 조치를 취할 수 있겠는가”(이규보 〈問造物〉 중에서)

李御寧
1933년생.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문화부 장관 역임
  빈자(貧者)의 제단을 작은 촛불로 밝히며 시작된 이어령(李御寧·이화여대 명예교수) 선생과의 네 번째 항해를 떠났다. 이 항해가 《월간조선》과의 마지막 항해일지 모르나 떠남은 새로운 만남과 출발을 의미한다.
 
  선생은 평생 도그마와 싸워왔다. 친(親)체제나 반(反)체제 어느 진영에도 갇히지 않으려는 비(非)체제의 외로운 길을 걸어왔다. 신앙을 갖고 나서도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을 헤매던 지난날을 새로운 안목으로 제시하려 애썼다. 그 안목에는 문인의 직관력과 기호론자의 학문적 분석력이 공존한다. 언어의 의미·상징 체계를 분석해 그 속에 담긴 신(神)과 영혼, 죽음, 인류 문명의 의미망을 추적하는 일이리라. 얼음 속의 불이다.
 
  선생이 현재 암 투병 중이란 점을 감안하면, 고(故) 이병철 회장의 절박했던 24가지 질문처럼, 답변 하나하나는 수도자의 고해(告解)처럼 다가왔다. 선생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독자들은 자신의 내면에 세워놓은 장벽들이 조금씩 사라졌을지 모른다.
 
  기자는 선생의 말을 정리하는 과정을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인내와 신중함이 필요했지만 마찬가지로 선생 역시 내적인 부름, 용기, 갈망에 답해야만 하는 시간이었으리라.
 
  선생과의 네 번째 대담은 지난 10월 28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이뤄졌다.
 
  “신학적으로는 이미 몬시뇰(鄭義采)이라고 하는 가톨릭 장상(長上)께서 답변을 하셨기에 무언가 토를 달 입장도 용훼(容喙)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는 성경 말씀이 언어를 따지는 기호론과 관련된 것이기에 글 쓰는 문인, 그리고 기호학자의 한정된 입장에서 제 의견을 말해온 것이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 투병 중인 사람으로 종교적 문제와 직면해 있다는 상황에서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 입을 열게 된 것이라고 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의미·상징의 세계, 즉 피시스(physis)와 노모스(nomos), 세미오시스(semiosis)라는 3가지로 구성돼 있어요. 이 세계 속에 종교적 담론 역시 ‘삼각 측량’으로 관찰하면 또 다른 해답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선생이 말하는 피시스, 노모스, 세미오시스에 처음부터 숨이 막혀온다. 독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식은땀이 솟는다. 선생에 따르면 물질계는 피시스, 기호·상징계는 세미오시스, 법칙계는 노모스를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인의 방향감각에서 볼 때 북쪽은 신화의 큰곰자리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선원이 항해를 할 때는 작은곰자리를 향해 갔다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더블 스탠더드를 갖고 살았던 것이죠.
 
  그리스인이 작은곰자리를 북쪽으로 보는 것과 같은 세계를 자연계·피시스라 부르고, 큰곰자리가 북쪽을 상징하는 신화와 같은 세계를 기호계·세미오시스라고 해요. 그리고 법률이나 제도 또는 폴리스 성벽에 둘러싸인 세계를 법칙계·노모스라고 합니다.
 
  저는 이 세 가지 관점 가운데서 그리스 신화와 같은 세미오시스 영역을 통해 죽음과 같은 종교문제를 접근해왔던 겁니다.”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신약성경 《고린도 전서 첫째 서간》의 모습이다.
  열 번째 질문 ‘영혼이란 무엇인가?’를 막 물을 참이었다. 질문을 던지자마자 선생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일까.
 
  “기독교에서 영혼의 답을 찾으려면 영혼이란 말부터 알아야 하지요. 신약 성경의 《고린도 전서 첫째 서간》 14장에 보면 직접 언어와 관련하여 언급한 대목이 나옵니다.
 
  ‘피리나 수금처럼 생명 없는 것들이 소리를 낼 때에도 그 음정이 분명하지 않으면 무엇을 연주하는지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지요. 또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 준비를 하겠냐’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이 말할 때 혀로 알아듣기 쉽게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방언(放言)’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말이지만 땅에서 사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는 ‘예언’이 더 값지다는 겁니다. 그리고 곧이어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하는 기도하는 방법까지 (성경) 말씀으로 남기고 있지요. 영과 마음 그리고 기도와 찬송이 서로 대비되어 있어서 영혼이 무엇인지 알고 노래의 차이까지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영혼, 신령, 혼령, 영성… ‘영(靈)’자가 붙은 말이면 금세 안개에 싸여버려 길을 헤매고 마는데, 영혼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니 가슴이 가벼워진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다. 선생의 입에서 “그런데…”라는 말이 나오자 기자는 다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런데 영문(英文) 성경의 본문을 보면 영(靈)은 spirit으로, ‘마음(mind)’이 아니라 지성(intellectual)으로 되어 있어요. 마음과 지성이라는 말 사이는 천리(千里)가 아닙니까.”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쓰신 분이니 그의 말에 납득이 갔다.
 
  “‘영’이라는 한자말과 ‘넋’이라는 우리말에도 차이가 깊고, 무엇보다 기독교 문화권의 영어와 라틴어계의 불어, 이태리어 또한 차이가 크지요.”
 
  그렇다면 원래 그리스어나 아랍어에서는 ‘영혼’을 뭐라고 불렀는지, 어떤 뜻이었는지 산 넘어 산이 아닌가. 누가 이병철 회장이 던진 그 거창한 ‘영혼이란 무엇인가?’는 물음에 과연 입안의 혀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 절망의 순간, 선생은 구세주처럼 한마디 희망의 말을 던졌다.
 
  “그래서 추상적인 용어보다는 스토리 텔링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양자적 진공, 영혼의 세계, 이항대립의 終焉
 
이어령 선생의 얼굴 그림. 이 그림은 《문학사상》 지령 200호(1989년 6월호) 표지에 실렸다. 영인문학관에 전시돼 있다.
  선생은 인터넷 검색하다 얻은 미국 이야기라면서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를 들려주었다.
 
  “교장 선생이 문제아들만 모아 특수학급을 만들어 베테랑 여교사에게 맡겼어요. ‘특수한 아이들이니 잘 가르쳐달라’는 부탁과 함께 넘겨준 학생 명단 옆에는 110, 127, 135와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고 해요. 여교사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고 열심히 가르쳐서 그 클래스의 아이들 모두 성적이 부쩍 올랐다고 합니다. 교장 선생이 치하하자 여교사는 ‘명단 옆의 지능지수를 참고하여 아이들을 가르친 결과’라고 겸손하게 말했대요.
 
  그러자 교장 선생이 깜짝 놀라 ‘선생님, 그것은 IQ가 아니라 그 아이들 사물함 번호를 적은 숫자였는데요?’라고 했다는 겁니다.”
 
  선생은 늘 하찮은 이야기에서 보물을 찾아낸다. 사물함 숫자코드를 지능지수(Intelligence Quotient) 코드로 해독한 결과로 현실이 뒤바뀌었다. 문제아 특수집단이 천재 특수집단으로 인식된 셈이다. 선생도 구박만 받던 아이들도, 모든 행위와 인지의 상황이 다르게 해석된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면 특수한 문제아들이 특수한 재능을 가진 아이로 둔갑한다. 그게 바로 과학만으로는 합리화할 수 없는 영성의 힘이며 종교적 믿음의 세계가 아닐까.
 
  “IQ란 말은 알잖아요. EQ는요?”
 
  초등학교 학생도 아는 것이니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계속된 선생의 말이다.
 
  “자, 그러면 SQ는요?”
 
  이렇게 해서 첩첩산중의 터널이 뚫렸다. 웹 검색을 해보면 단번에 〈IQ, EQ 너머 지금은 SQ 시대〉라는 표제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능지수와 감성지수(Emotional Quotient)의 대립과 모순을 융합하여 새로운 단계로 올라간 것이 SQ, 즉 영성지수(Spiritual Quotient)다. 만약 이병철 회장이 물은 ‘영혼’을 신학적으로 아니면 철학적으로 풀이했다면 ‘옴 주교’ 같은 의사(擬似)종교단체나 미신, 신비주의자, 광신자 등의 거미줄에 걸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리학자이자 철학자, 종교학자인 다나 조하르(Danah Zohar).
  지성의 날개는 나비처럼 너무나 연약해서 일단 이러한 거미줄에 얽히면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선생은 영혼의 정체를 현대인의 종교가 되어버린 SQ의 과학적 숫자로 업어치기 한판을 따낸다. 그것도 과학과 종교를 다 같이 포용한 다나 조하르(Danah Zohar)의 이론으로 말이다.
 
  “여기서 자세히 옮길 수는 없지만, 케네디 형제가 암살당한 미국 사회에 염증과 실망을 한 조하르는 세계 각지를 다니며 여러 종교적 체험을 합니다. 동시에 그의 전공인 양자역학 등 최첨단의 과학이론을 함께 탐구했지요.
 
  그 체험과 연구결과를 담은 책(《Rewirering the Corporate Brain》)을 1997년에 썼는데 핵심이론이 ‘양자적 진공’입니다. 양자적 진공은 물질계처럼 입자와 파장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죠. 유(有)면서 무(無)인, 무면서 유인, 입자이면서 파장인 이항대립의 종언(終焉)인 것이죠. 영혼의 세계가 바로 그렇습니다.”
 
  선생의 말인즉, 지성과 감성이 통합된 영성의 세계가 열린다는 뜻이다. 요약해보자. 선생은 ‘영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종전처럼 심리학·철학·종교학이 아니라 인간의 지능과 감성의 대립·모순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 즉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이원론의 세계를 하나로 융합하여 신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힘을 영혼이라 본 것이다.
 
  IQ+EQ=SQ, 그리고 다시 학생들의 사물함 번호의 숫자를 지능계수의 숫자로 패러다임을 바꿨을 때처럼 사회지능지수(Social Quotient)의 SQ를 영성 지능지수인 SQ로 코드를 전환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였다.
 
 
  서양의 물질주의가 사실은 反영혼주의
 
영화 〈21그램〉의 포스터. 최근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임종 시 환자의 체중 변화를 쟀더니 21.26214g이었다고 한다. 영혼 무게가 21g이란 말은 서양의 물질주의를 상징한다.
  계속된 선생의 이야기다.
 
  “분명히 오늘의 문명은 지성에서 감성으로, 다시 지성과 감성의 통합인 영성의 세계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으키고 있지 않나요? 실제로 1988년의 시점에서 정신과 의사를 가르치는 교육에 ‘종교’를 도입한 곳은 불과 15%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1994년 이후부터는 환자의 영적인 믿음을 중시하는 경향이 급격히 증대됐다고 합니다.”
 
  여기서 끝날 선생이 아니었다. 또다시 “그런데 말이야”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말이야, 숫자로 영성을 표시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영성의 참뜻을 모르지. 그동안 많은 과학자가 영혼의 무게를 재려고 노력했어요. 멕시코의 감독이 만든 〈21그램〉이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실제로 미국 매사추세츠 병원에서는 임종 직전의 말기 결핵 환자를 대상으로 3시간40분 동안 체중의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숨을 거두는 순간 그 환자의 몸무게가 1.25온스(35.4g) 줄어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최근에도 스웨덴의 룬데 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그 실험의 진위를 검증해보았더니 임종 시 환자의 체중 변동은 21.26214g이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영혼까지 저울로 재려고 한 서양의 물질주의가 사실은 반(反)영혼주의에 갇혀 있는 거죠. 괴테의 《파우스트》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나요? 영혼을 상품으로 거래할 수 있다는 시장주의의 프레임이지요.
 
  보세요. 인간의 육체를 형성하는 모든 원소를 다 더하면 인간이 되나요? 안 되잖아요. 생명이 안 됩니다. (생명이 안 되는) 그 부분이 영혼에 해당하는데, 과거 서양에선 영혼을 ‘아이테르’ ‘에테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든 물질화하려 했잖아요. 그래서 서구인들은 죽음을 나타낼 때 꼭 해골로 나타내고 있어요. 무언가 죽음조차도 남아 있는 물질로 보여주려고 하거든요. 사실은 영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불멸성, 그것이 죽음의 종교적 본질인데도 말이죠.”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히틀러를 악한 자로 만들었나요? 물론 유대인 입장에선 그렇게 볼 수 있지요. 히틀러는 유대인을 악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 인종을 말살하려고 한 것이지요. 미국의 남북전쟁처럼 상대방을 악인이라 설정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했지요. 모두가 인간의 입장에서 악과 선을 가르고 진영을 만들어 가치판단을 합니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그런 기준 자체가 우스운 것이지요. 모두가 같은 원죄를 지은 존재들이니까요. 다른 서양의 고전을 찾지 않아도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산문 〈문조물(問造物)〉에 보면 답이 나와요. 풀이하자면 ‘조물주에게 묻는다’는 뜻이죠.
 
  이규보가 조물주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하늘이 사람을 먼저 내고 온갖 곡식을 냈으므로 사람이 그것을 먹습니다. 그다음에 뽕나무와 삼나무를 냈으므로 사람이 그것으로 옷을 입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늘이 사람을 사랑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이규보가 이렇게 따집니다.
 
  ‘그런데 왜 독(毒)을 가진 것들 또한 내셨습니까. 곰, 호랑이, 늑대, 승냥이서부터 모기, 등에, 벼룩, 이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 몹시 해로운 일을 합니다. 하늘이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이 뭡니까.’
 
  조물주는 사람에게 이로운 것만 만들지 해로운 것은 왜 만드느냐고 따진 거지요. 그러자 조물주가 이렇게 답해요.
 
  ‘사람과 사물이 생겨 남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라 하늘도 알지 못하고 조물주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스스로 태어나지 하늘이 내지 않는다. 곡식과 뽕나무·삼나무도 자기 스스로 생겨났다. 어찌 하늘이 이로움과 해로움을 가려서 조치를 취할 수 있겠는가.’
 
  신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을 만들 때는 각자 이유가 있겠지요. 특정한 대상에게만 이롭게 혹은 해롭게 하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이(利)냐 해(害)냐는 인간의 입장에서 그런 것뿐이지요. 이규보의 〈문조물〉에 나오는 문답이 참, 괴변 같지만 이처럼 좋은 답변도 없어요.”
 
 
  善惡과 잡초論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선생은 화제를 ‘잡초론’으로 바꾸었다.
 
  “세상에 잡초라는 게 어디 있나요. 인간이 필요하면 이름 붙이고 필요 없으면 잡초라고 부릅니다. 나한테 중요한 새는 새 이름을 붙이고, 아닌 새는 잡새라고 하죠. 잡(雜)이라는 게 인간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지요.
 
  시인 랠프 에머슨은 잡초를 ‘가치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식물들’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잡초란 존재하지 않아. 아직 발견되지 않은 버추(virtue), 즉 미덕이라는 겁니다. 뭔가 발견되지 않은 풀일 뿐이지 모든 만물은 제각기 생겨나서 언젠가는 인간에 의해 덕성이 밝혀지면 약초가 된다는 얘기지요.
 
  내가 캔서를 하니까(암을 앓으니까), 사람들이 약을 가지고 와, 즉효 약이라고. 쌍떡잎식물인 하와이산 노니(noni)를 누가 가져왔는데 하와이 사람들은 먹지만 한국인은 본 적도 없는 잡초 중의 잡초인 거지. 독초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분은 개똥풀이라고 가져와요. 엊그제만 해도 소도 안 뜯어 먹던 풀이야. 그런 것을 새로운 암치료제라고 해서 뜯어다가 먹이는 거죠.(웃음) 인제 잡초가 약초가 된 거지, 뒤집어보면 또 언제 약초가 독초가 될지 몰라요. 인간의 입장에서 선이고, 악인 것이지 어디 선악이 따로 있냐는 거예요.”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은 신밖에 없어. 그게 절대라는 것이지”
 
  “하나님은 천사와 악마를 모두 창조하셨죠. 그런데 우리가 천사와 악마를 분리한 것 자체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어 선악을 알기 시작한 이후의 세계죠. 사실 이 세상은 이항의 대립으로 이뤄져 있어요. 밤과 낮, 선과 악, 남과 여… 전부 그 프레임에서 못 벗어나고 있어요.”
 
  이 대목에서 선생은 갑자기 두꺼운 검은색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내가 요즘 글을 못 쓰니까 이렇게 낙서를 해요. 누가 스케치북을 줘서 여기다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거든. (스케치북 어느 쪽에 적힌 〈인간의 상대성 원리〉라는 글을 풀이하여 읽기 시작했다. 자필로 쓴 그 글은 독백체 문장으로 쓰여 있었다.)
 
  이 세상에 ‘절대(絶對)’라는 말은 없어. 있을 수 없지. 전부 ‘관계’ 속에 있으니까. 절대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경우가 딱 한 번 있어. ‘절대라는 말은 절대로 없다’고 할 때 그 절대밖에 없어.
 
  신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가 바로 절대야. 상대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에고 에이미(ego eimi·나는 나다)가 절대야. 상대성이 있으면 나는 나일 수가 없지. 나는 누구와의 관계에서 나를 해명하는데,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은 신밖에 없어. 그게 절대라는 것이지.
 
  그래서 신은 유일한 존재이기에 모든 신은 유일신이 될 수밖에 없어. 신에게 상대성이 있다면 신이 아닌 것이지. 그래서 잡신, 범신은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 신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새뮤얼 베킷이 한 말인데, 영어의 alone(혼자)은 all one이란 뜻이야. ‘나 혼자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지.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늘 ‘사이좋게 놀아라’고 말씀하셔. 싸우지 말고 노는 것이 사이가 좋은 것이야. ‘사이’는 나와 너 사이의 한가운데, 빈칸이지. 내가 너에게 가지 말고, 네가 나에게 오지 말고, 이 빈칸에서 만나는 것, 그게 사이야. ‘나’와 ‘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관계니까, 만날 때마다 ‘내’가 탄생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나요?
 
  엑스터시(ecstasy・황홀감)라는 말이 있잖아요. 엑스는 ‘밖으로’라는 뜻이고 터시는 ‘나’란 뜻이거든. 내가 밖으로 나오니까 황홀한 거야. 내가 무아(無我)가 되고 자아가 상실했을 때거든. 그러니까 내 존재가 신이 되고, 접신(接神)이 되려면 내가 밖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지.
 
  우리가 신학을 얘기하든 임사체험을 말하든 초월을 이야기하든 어머니 자궁 밖의, 무덤 밖의 이야기야. 인간이란 한계 내에서 초월이지, 초월 밖을 어떻게 알아요?
 
  사실 기호론자 입장에서 ‘말(言語)’은 상징계입니다. 말을 벗어난 세계, 그것이 기도하는 시간이라든지 계시의 시간이라든지, 그런 것은 다 언어(의 범주)에서 떠나는 것이지.
 
  언어도단(言語道斷)은 나쁜 뜻으로 쓰이지만, 불교에선 좋은 뜻으로 쓰이거든. 언어는 잘라야 언어 망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인간의 의식 안에서 자유롭게, 로고스(logos)와 이성으로 증명되는 의미체계를 붙여버리는 세계로 가야 역설적으로 알 수 있어요. 종교에서 말하는 엑스터시의 세계, 계시의 세계이고 나도 모르는 세계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란 언어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찬송가를 중요시해요. 기도를 10번 드리는 것보다 찬송가 1번 부르는 게 낫다고 하잖아요. 그게 초월적이라는 거야.”
 
 
  “악인이다, 선인이다 할 것 없이 조건이 똑같다는 거야. 예외 없어”
 
새뮤얼 베킷의 영화 〈필름〉 포스터.
  선생의 이야기는 다시 자아(自我)와 탈(脫)자아, 타자(他者)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맥(脈)은 남이 짚는데, 가끔 자신이 진맥할 때가 있어요. 그때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 손목을 잡아요. 같은 몸의 손인데 오른손이 바깥으로 나가서 왼손을 잡는 거야. 잡는 손과 잡히는 손이 있다는 것은 내가 나를 벗어나는, 탈자(脫自)가 된다는 거지. 효자손으로 내 등을 긁을 때도 그렇고.
 
  그런데 베킷의 영화 〈필름〉에는 자신의 왼손으로 오른손을 진맥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나와요. 왜 베킷은 거꾸로 진맥을 했을까. 일종의 거울에 비친 나인 것이죠. …완전한 탈자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해요.”
 
  새뮤얼 베킷의 영화로 알려진 1965년 작 〈필름〉은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영화 저서를 통해 최고의 아일랜드 영화라고 칭한 작품이기도 하다. 선생은 〈필름〉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영화에서 한 여인이 자식을 낳는데 난산을 하며 울부짖는 거야. 그 아이를 받으려는 사람은 큰 구덩이 아래에 있어. 그 구덩이는 무덤입니다. 아이를 받는 의사는 곧 무덤 파는 묘지기이기도 한 것이지. 의사가 아이를 자궁에서 끄집어낼 때 쓰는 ‘겸자’로 구덩이를 파고 있어요.
 
  그게 바로 베킷이 만들어낸 ‘움툼’(womb·자궁, tomb·무덤)인 거지. 우리 일생을 필름처럼 빨리 돌리면 어떻게 될까. 태어나자마자 사람은 죽고, 의사는 묘지기가 되며, 겸자는 땅 파는 곡괭이가 되는 거지.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특정인을 악인, 선인이라 규정할 수 없어. 모든 인간의 조건이 똑같다는 거지. 예외가 없어. 이 같은 선악과의 결과에서 생겨난 이항대립의 의식, 그것이 곧 원죄이고 ‘실락원(失樂園·Paradise Lost)’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환경이라고 생각하면 기독교에 대한 모든 질문이 거의 풀린다고 봐요. 그런데 동양인, 우리 아시아인들에게 원죄라는 개념이 없으니 기독교를 이해하기 힘들지요.
 
  상당한 지식인도 원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요. ‘나는 죄지은 것 없으니 예수교를 안 믿는다’고 말하지요. 원죄는 불교도 그렇지만 인간의 삶 자체가 부조리로 되어 있는 상황과 조건에 예외가 있을 수 없어요. 생사(生死)는 반대의 단어인데도 실은 같은 의미지요. 새뮤얼 베킷 식(式)으로 이야기하자면, 태어날 때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니까.”
 
이어령 선생이 사랑하는 우리말 ‘살다’.
  ―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잖아요.
 
  “그렇죠. 나는 남이 안 보면 존재하지 않아요. 여자의 곱게 한 화장을 누가 안 봐주면 그게 화장한 거야? 남이 나를 봐줬을 때만 내가 존재하고,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줬을 때만 내가 존재하는 거야.
 
  아무리 달이 휘영청 밝아도 모든 사람이 달을 안 보면 어떻게 돼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지. 선인과 악인의 개념에서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만드신 거야. 만약 인간을 안 만드셨다면 이 만물을 봐주는 존재가 없을지 몰라. 이 만물을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야. 짐승들이, 저 개가 달 보고 짖는 게 아름답다고 짖는 거야? 우리처럼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고 하겠어요?
 
  하나님은 당신 형상과 닮은, 그리고 영혼을 집어넣은 분신을 만드셨는데, 이게 잘 되면 좋은데 어느 날 신이 되려는 거야. ‘아바타’인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
 
  물론 완전하면 모를까 불완전 존재잖아요. 게다가 완전한 척을 하면 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하니까 ‘다른 피조물하고 똑같아져라’ 하시며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신 겁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데 생각은 신이야. 느낌도 신이야. 그런데 그게 비극인 것이죠.”
 
 
  인간은 원죄를 타고난 부조리한 존재… 예수님이 오신 이유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 그는 비록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다.
  “인간은 원죄를 타고난 부조리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우리를 대신해 속죄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론 이런 부조리를 극복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부조리를 극복하게 하셨어요. 거듭 말하지만, 인간 힘으론 모순과 차별을 없애지 못하죠.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꿈꾸는지 몰라요, 신의 나라를….
 
  김 기자,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바리새인’(유대 3대 계파 중의 한 파로서 표면적으로는 완전하리만치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뜻한다)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셨던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 두시고 구제하셨어요. 로마 앞잡이였던 세리(稅吏)와 어울리고 창녀들과 함께 지내셨죠. 원죄를 짊어진 인간이기에 누구나 다 취약하고, 누구나 다 악인이 될 수 있어요.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될 때 인간은 겸허함을 알게 되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적절한 예일지 몰라요. 성경에는 강도를 만난 사람,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나단이라는 남자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에 강도들을 만나죠. 그는 강도들에게 가진 것을 다 뺏기고 매까지 맞아 정신을 잃었습니다. 때마침 길을 가던 사제가 그를 발견했지만, 슬금슬금 뒷걸음치고 말았어요. 레위인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어요. 사마리아인만이 달려가 상처를 치료해주었어요.
 
  착한 사마리아인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죽어가던 가엾은 사람을 돌보았어요. 그 사람만이 예수님의 뜻을, 기독교 정신을 아는 것이지. 이교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우리와 같은 이웃이고 누구나 하나님 품에 안긴다는 사실이죠.”
 
  선생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병철 회장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과 그 기준에서 악과 선, 부귀와 귀천을 판단하고 있지요.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에서 사물을 보고 판단합니다. 신까지도 심판하려 해요. 그런 질문에 답하려면 자신을 밖으로, 인간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게 안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뒤를 따라가면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도 그 육신을 넘어서는 저편 너머 초월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이 불교와 비슷하면서도 기독교와 차이가 있어요.
 
  외부에서 자극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안에서 변화와 생성을 할 수 있는 오토포에시스(auto-poiesis·자기조직화) 이론이 불교와 유사합니다. 수행을 통해 보살이 되고 부처(신)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기독교는 반드시 밖에서 오는 힘에 의해서만, 다시 말해 타력(他力)에 의해서만 초월할 수 있어요. 물론 휴머니즘적 기독교도 존재하지만 정도의 차이입니다.”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
  17.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 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일본 기독교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라는 이가 있어요. 명치(明治) 개화기 때 일본의 첫 신자로서 미국을 동경했어요. 신학을 공부하려고 미국에 가보니 도둑에다 강도… 기독교를 모르는 일본인보다 더 많은 악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만 실망하고 말았죠.
 
  신학 공부를 단념하고 귀국한 뒤 일본에서 무교회주의 운동을 시작했어요. 일본이 기독교를 믿으면 미국보다 더 믿음이 강한 기독교 나라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그는 잘못 생각했어요. 일본은 미국보다 범죄율이 낮을지 모르나, 대동아전쟁 때 남경에서 수백만명을 살해하지 않았나요? 식민지 조선에 와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이 범죄율에서 앞선다고 해도 생명을 살상하는 전쟁에 반대하고 인권과 자유, 평화를 이야기하는 국가죠.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믿는 국가들은 선을 따르고 불의를 멀리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메시지는 개개인에게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큰 방향성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화살표라는 것이지요. 기독교도 십자군으로 사람을 살해하고 남미(南美)에서 인디언을 멸족시키는 학살을 자행했죠. 그러나 죄를 깨닫고 변화하는 쪽으로 나갔어요. 하지만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백만씩 죽이고도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이탈리아가 사회 혼란에 빠져 있다고 해도 거꾸로 보면 많은 고대 유적과 고전, 오페라, 디자인 등이 인간의 영혼을 즐겁게 만들었죠. 오히려 기독교를 믿었기에 예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고 생명의 존귀함을 예술로 승화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비교의 축이 뭔가요? 만약 기독교를 믿지 않았더라면 더 혼란스러운 나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있을 수 있지요.
 
  인간의 잣대로만 보지 말고, 물질적 번영만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지엽적인 사례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 밑에 흐르는 큰 방향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봐야 합니다. 문명의 강은 너무나 넓고 광대해서 그 흐름이나 흐르는 물소리가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요.
 
  백주에 학교 교실에 들어가 기관총을 난사해 무차별 살해를 하는 ‘묻지 마 범죄’가 일어나는 나라, 인종차별로 혼탁한 사회, 그런데도 왜 많은 이가 그 위험하고 몹쓸 ‘미국’으로 자녀를 공부시키러 보낼까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처럼 종교와 문명·문화를 직결시켜 설명하려는 방법은 낡은 생각이지요. ‘복잡계’처럼 무수한 원인의 결과가 오늘의 사회현상을 낳았다고 봐야 해요.”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영인문학관에 전시된 이어령 선생의 책상.
  “공산당원이고 기독교인이고 미치는 것은 공통적인 거요.(웃음). 푸코가 《광기의 역사》 《감옥의 역사》를 썼잖아요. 역사적으로 르네상스 시기의 광기란, 귀신 들린 사람의 이미지에서 느껴지듯 신비롭고 이성으로 얻지 못하는 그 무엇을 주는 존재로 여겨졌어요.
 
  플라톤에게 ‘미쳤다’는 것은 나쁜 점과 함께 좋은 점도 있다고 봤어요. 좋은 점 반, 나쁜 점 반이랄까. 미친 사람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죠.
 
  17~18세기에 들어 광기는 범죄로 여겨졌는데, 광인은 글쎄 거지나 게으름뱅이, 도둑과 함께 감금당해야만 했어요. 산업화가 본격화된 18세기를 지나며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거지나 범죄자는 돌려보내고 광인만 남겨뒀어요. 광기는 비로소 치료받아야 할 질병으로 여겨졌던 거죠.
 
  그런데 ‘미쳤다’의 표준이 뭐냐는 겁니다. 구(舊)소련에서는 정부를 욕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했어요. ‘이렇게 살기 좋고, 이렇고 완벽한 사회에서,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어요. 자신들이 만든 가치에 어긋나는 아웃사이더들을 환자로서 격리해버렸어요.
 
  사상적으로 보면 그 시대의 윤리와 도덕에 반대되는 사람을 가뒀어요. 그들을 가둔 감옥을 보면, 그 사회가 뭘 믿고 뭘 지향하려는 것인지 다 나와요. 그러니 미쳤다고 손가락질받으며 감옥에 간 사람들은 환자도, 병자도 아니라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이지. 그들을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 구별하려 했던 겁니다.
 
  미국은 종교탄압을 피해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 이민자들이 세운 국가잖아요. 강한 극기심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 등을 비롯한 많은 전쟁을 거쳐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어요.
 
  그 결과 그들이 믿는 자유, 즉 미국적인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던 거죠. 어떻게 생각하면 유럽의 아웃사이더들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나라를 만든 셈이죠.
 
  유럽에서 쫓겨난 범죄자, 실업자, 마이너리티가 모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만든 동력이 된 것이에요.
 
  그러나 종말론이라는 역사의식에서는 마르크스와 공통점도 있어요. 그래서 ‘니 마르크스 니 지저스’(마르크스도 예수도 아닌 국가), 소위 알고리즘의 혁명이 지배하는 실리콘밸리를 세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어쩌면 완벽을 꿈꾸는 인간의 기독교적 광신과 마르크스적 광신 같은 성(聖)과 속(俗)이 합작한 마지막 인류의 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선생은 “구소련의 공산체제를 알기 위해서는 동방교회의 오서독스(orthodox)한 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방교회는 하늘나라와 땅을 이원적인 성과 속으로 분리시켜 교황도 있었고 왕도 두었어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잘 드러나 있어요. 그런데 러시아 정교회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보려 했어요. 왕이 교황이고, 교황이 왕인 일원적 시스템이지요. 일당주의고 획일주의입니다. 천상과 지상의 교회가 서로 일치된 체제를 만들려고 한 것이지요.
 
  구소련이 지향하려 한 가치는 러시아 정교회와 본질적 가치는 달라도 그 구조 면에서는 유사점도 많아요. 역사종말론이 그렇거든. 물질적 생산력이 일정한 발전 단계에 따라 계속 정반합을 거듭하면서 진보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이데올로기의 최종 단계가 공산주의 사회로 보았잖아요. 지상에 천국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다만 성이 속을 지배한 것이 중세의 체제이고 속이 성을 지배하는 것이 현대의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韓流와 한국 기독교의 매력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교회 부흥회 모습이다. 선생은 “한국 기독교만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소련 붕괴 이후의 공산권 국가들을 어떻게 보시나요.
 
  “지금 러시아를 보세요. 마르크스가 지배했던, 무신론이 지배했던 정치적 가치가 무너졌잖아요. 군대조직이나 집단농장 같은 생산양식은 그대로 지니지만 정신적 가치가 없으니 강대국이나 세계를 아우르는 국가가 될 수 없는 것이죠.
 
  중국도 마찬가지야. 미국과 맞설 만한 경제력, 군사력을 갖췄지만 세계에 내놓을 가치가 없어요.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철지난 마르크스주의에 의존할 수만도 없잖아. 그리고 한국식 BTS(방탄소년단) 같은 엔터테인먼트의 한류(韓流) 같은 것도, 지구적 보편성을 갖춘 매력 있는 새로운 발명품도 없어요. 세계가 정말 중국에 매력을 느끼는 그 ‘무엇’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군사력, 경제력과 함께하는 문화력이라는 것이 결여돼 있다는 겁니다.
 
  미국을 비난하고 그들의 자본주의를 욕하지만, 정치체제로서 자유와 민주사상은 비록 너절한 ‘팝컬처(pop culture)’의 소비문화라고 해도 아직은 젊은이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고 또 여전히 창의력과 모험의 아메리칸 드림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비자를 받으려고 종일 미국대사관 앞에서 줄을 섭니다. 그러나 지금 그 해양세력(sea power)이 기울어지고 대신 대륙세력(land power)이 일어나고 있지요. 새로운 지정학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은 생명의 본능을 타고난 존재들입니다. 어디로 가면 살 수 있을지 알게 되면 목숨을 걸고 향합니다. ‘보트 피플’이 왜 생겼나요.
 
  본능적으로 못 살겠다, 해서 떠난 겁니다. 그런 나라는 절대로 오래 못 가죠. 왜? 매력이 없기 때문이야. 경제력, 군사력보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없는 나라는 죽음의 나라입니다. 부국강병의 패러다임에서 공감과 상생을 할 수 있는 문화의 소프트 파워, 스마트 파워가 미래의 한 생명자본으로 다가오고 있지요. 옛날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려고 한글을 배웠는데 이제는 드라마 〈겨울연가〉에 나오는 대사나 방탄소년단의 노랫말을 배우려고 한국어를 배우지요. 그래도 ‘한강의 기적’ 다음에 한류라는 문화적 매력이 있기에 외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겁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어요. 한국의 기독교도 그 매력 중의 하나가 돼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자주 욕을 얻어먹지만 그래도 전 세계에 교인이, 교회(성당)가 불어가는 곳은 한국뿐이라고 하죠. 아무런 기독교적 전통이 없는 곳에서, 선교사가 오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믿은 백성이었죠.
 
  그런 면에서 한국은 영적인 나라입니다. 기독교인 하면 왠지 매력이 흐르고, 기독교인에겐 시집·장가를 보내고 싶고, 기독교인 하면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을 시키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매력을 풍기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쇠퇴하게 돼요.
 
  예수님은 온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섰지 않았습니까.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정신이 없다면 이병철 회장의 답변이 공허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廣野)에 계십니다. 교회 밖에 계십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길 잃은 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매력, 그 사람 곁에 있으니 마음이 녹는다고 말할 수 있을 기독교인이 돼야 합니다.
 
  미래는 인공지능 로봇을 누가 잘 만드는가로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인공지능의 휴머노이드와 잘 어울리며 사는가에 경쟁의 트로피가 넘어갈 것입니다. 신에게 기도하는 로봇은 만들지 못하니까요. 필요도 없고요. 포식에서 기생으로, 기생에서 상생으로 문명은 크게 변하고 있어요. 상생의 원리는 종교에서 나옵니다. 사랑, 인(仁) 그리고 관용 같은 덕목으로 말이죠.”
 
 
  神, 좌표 X
 
  계속된 선생의 말이다.
 
  “벽돌이 깨지고 부서지면 다른 벽돌로 대체할 수 있지만,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그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과 대체할 수 없어. 그만큼 비게 되는 거야. 그만큼 지구는 가벼워지는 거야. 그게 하나님과 연관 지어 생각해봐요.
 
  내 옆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있어요. 악인이든 선인이든 성한 사람이든 안 성한 사람이든, 그 사람이 죽으면 창조의 입김이, 창조의 지문이 사라지는 거야.
 
  그러니 어떻게 내 이웃이 남이야? 나의 일부지.
 
  그게 사랑인 거여. 사랑이라고 끌어안고 먹을 것 주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나 외에 타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아니면 나도 없어. 역으로도 똑같아. 그 사람이 저렇게 존재하듯이 나는 이렇게 존재하는 것…, 그런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이 수천, 수만 년 동안 부대끼며 살아온 것이죠.
 
  사람은 ‘늙다’라고 하지만, 물건은 ‘낡다’라고 하잖아요. 낡다와 늙다는 같은 말입니다. 모음 하나 차이지요. 오래된 물건을 낡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은 물건이 아니라는 증거지. 이 한 마디만으로 난 물건이 아니야, 난 궤짝이 아니야, 난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럼 뭐냐?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거야.
 
  상자(箱子)는 죽지도 못해요. 부서지지. 그래서 생명이 소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말씀하시며 요한복음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시자, 과학자처럼 의심 많은 도마가 이렇게 말해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요. 예수님이 딱한 눈으로 그를 보시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어요.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이야기인 것이에요. 눈물 나는 얘기잖아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어디 문패 보고 오냐? 길로 가고 진리로 가고 생명이 있는 곳에 내가 있어’라고 하신 겁니다. 이 말씀은 결국에 크리스천이니 기독교니 그런 범주와 언어를 벗겨내더라도, 지금껏 말한 하나님이란 존재를 그냥 ‘좌표 X’라고, 혹은 생명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신의 세계는 우리가 모르는 초월한 세계에 있으니까요. 인간 영역을 넘어서는,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될 수 없는 그런 영역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죠. 똑같은 현상을 거울에 비춰보면 정반대의 모습이 있듯이, 비대칭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보면 볼수록 ‘저쪽에 이와 다른 세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아요.”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
  21. 로마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제도로서의 종교, 믿음으로서의 종교는 다르지 않을까요? 학교는 교육인가요? 아니죠. 교육의 수단이 학교잖아요. 군대나 감옥에 점호의 방식이, 나름의 제도가 있거든요. 자료를 보니 가톨릭 성직자가 결혼하지 않는 관례는 약 4세기부터 형성된 것이라더군요. 그리고 성직자의 독신주의가 교회법으로 규정된 것은 1123년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 때라고 해요.
 
  불교도 마찬가지예요. 스님 중에서도 결혼을 허용하는 교파도 있다고 해요. 교리의 도그마와 종교의 본질을 똑같이 생각하지 마세요. 세속적인 제도이지 하나님이 만든 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수단이 목적이 될 수 없어요.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죠.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기 시작했어요. 바리새인이 그 모습을 보고 ‘당신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따졌어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만 지키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독신을 지키면서 종교를 믿으면 수도(修道)가 잘 되고, 신을 영접하는 데 좋다는 것이지만 그(독신) 제도도 인간이 만든 제도지 하나님이 일일이 강령을 만들어주시지는 않으셨죠.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세요. 지상의 것들을 그렇게 세세하게 지시하려면 뭐 하려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았겠어요. 계속 데리고 있지.(웃음)
 
  서양에서 ‘종교’를 뜻하는 릴리전(religion)의 어원에는 여러 뜻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religare(다시 묶다)’입니다. ‘신과 인간을 다시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요. 종교는 신과 인간을 다시 이어주자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교황도 실수할 수도, 잘못할 수밖에 없어. 왜? 하나님과 떨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식당 가서 식중독 걸렸다고 앞으로 식당에 안 가요? 저 교회에 나쁜 사람 있다고 교회 안 가? 영화관에 갔는데 영화가 재미없어. 앞으로 영화 안 봐? 영화관에 재미있는 영화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고, 식당에 맛난 음식도 있지만 맛없는 음식도 있는 법이잖아요.
 
  인간은 실락원으로 하나님과 떨어졌기에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닌가요? 예수님이 오셔서 다 해주셨는데 그래도 안 되니까 예수의 대리자인 목사, 신부가 생긴 겁니다. 저도 대리인들, 직원들을 몇 명 데리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나한테 따지면 나는 억울하지. 물론 내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수단과 목적, 본질과 현상을 분할(分割)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 지구의 종말이 올까요.
 
  “반드시 오죠. 제러미 리프킨이 말한 ‘엔트로피 법칙’만 봐도 언젠가는 지구의 열(熱)이 식어서 정적에 들어갑니다.”
 
  원래 ‘엔트로피’라는 단어는 인류가 태곳적부터 관심을 가져온 ‘열’이라는 개념을 19세기 유럽의 과학자들이 역학적 이론으로 접근하는 과정 중에서 나온 용어다. 에너지가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과정에서 지구상에 한정된 에너지를 계속 소비하면 혼란과 환경오염 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학설이다. 계속된 선생의 말이다.
 
  “물을 끓여봐요. 계속 놔두면 부글부글 끓다가 언젠가부터 평정해지잖아요. 막 에너지가 폭발할 듯 움직이지만 언젠가는 없어지고 평정해지는데, 엔트로피값이 제로가 되는 것이죠.
 
  이처럼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면, 지구도 종말하게 되리라 봅니다. 성경의 묵시록을 들지 않아도 물리학자들 역시 언젠가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종말은 기독교적 종말론자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닌 것이죠.
 
  기계적으로도 영구(永久)운동하는 장치를 아직 발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주 법칙으로는 절대 영구운동이 안 돼요. 에너지는 반드시 소멸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지구는 종말이 온다, 입니다.
 
  그런데 지구의 종말을 얘기할 때 ‘사과나무’ 이야기가 반드시 등장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스피노자가 한 말로 알려졌어요. 이번 기회에 좀 밝혀줘요.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가 한 말이에요. 그의 묘비명에 그렇게 쓰여 있어. 전 세계에서 스피노자라고 하는 사람은 한국인밖에 없어요. 가짜뉴스가 한국에서만 통용돼요. 하하하.”
 
  ― 내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무얼 하시겠습니까.
 
  “종말을 구경할 겁니다. 마지막 와칭(watching)이랄까. 세상이 어떻게 끝나나… 죽음이 어떻게 닥치고 어떻게 끝나나를 마지막까지 지켜볼 겁니다. 그러고 나서 한마디 키워드로 말하렵니다.
 
  ‘황홀’이라든지 ‘무’라든지, 언어를 다룬 사람이니 지구에 종말이 닥쳐도 최후의 증인이 되어 ‘지구는 이렇게 끝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아무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기록된 후에 이미 종말로 사라진다고 해도 말이죠.
 
  암 환자가 암에 대해 마지막 희망을 갖고 글을 쓰면, 암보다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마찬가지로 종말에 대해 쓰면, 그 기록은 종말 뒤에 오는 것이니까 종말보다 0.1초 더 사는 거지. 의미론적으로 말이죠.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한마디 말로 남길 겁니다. 사과나무가 아니라 언어의 씨앗을 우주에 뿌리는 것입니다.”
 
  ― 이렇게 모든 질문이 끝이 났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 뒤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24가지 질문 중 상당수는 시대가 바뀌어서 이미 물어볼 필요가 없는 질문이 많았어요. 또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정답이 있는 질문들이죠.
 
  몬시뇰처럼 교리에 바탕 두기보다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 위에서 헤매는 사람… 저처럼 그 문지방을 넘어 영성의 빛을 향해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사람을 위해 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학교수였고, 글 쓰는 사람이고 기호학을 전공한 사람이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로고스를 언어와 이성의 차원에서 풀어간 것이죠.
 
  사막의 척박한 곳에서의 굶주림과 갈증이 정신적으로 승화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성경은 가장 굶주린 단계인 배고픔부터 가르쳐주고, 거기서 나아가 또 다른 배고픔과 갈증을 가르쳐주고, 마지막에는 영성에 도달하는 갈증을 가르쳐줍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며 발견한 것은 갈증과 굶주림이 영성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암과 싸우고 있어요. 죽음을 앞둔 이병철 회장처럼 절박한 입장입니다. 가난한 제단 위의 촛불을 켜는 심정으로, 질문하는 사람과 같은 갈증과 굶주림으로 이야기한 것이죠. 그저 24개 질문에 작은 씨를 뿌린 것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퍼즐의 한 조각이 이렇게 해서 맞춰졌다. 용의 눈이 그려졌다. 선생은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도끼 이야기’를 마치 덤처럼 들려주었다.
 
  “나무꾼이 숨을 거두면서 도끼 한 자루를 아들들에게 남겼지요. 아들들은 오랜 세월 아버지의 유품인 그 도끼를 소중히 써왔는데 도끼자루가 다 닳아서 새 나무로 그 자루를 바꿨어요. 그러다가 도끼날도 닳아 새것으로 바꾸었죠. 아버지의 도끼는 그 자루도, 도끼날도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아들들은 그것을 ‘아버지의 도끼’라고 불렀습니다. 나무가 없어지고 쇠가 사라져도 ‘아버지 도끼’는 그래도 남아 있어요. 그게 불멸이지요.”
 
  머리에서 번개가 쳤다. 선생은 인터뷰 앞부분에 언급했던 3가지 세상(피시스·세미오시스·노모스) 이야기로 다시 돌아갔다.
 
  “도끼자루와 도끼날은 피시스(물질·자연계)죠. 그리고 ‘아버지의 도끼’라고 불렀던 그 이름은 세미오시스(기호·상징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 그리고 그 신과 소통하는 미디어인 성경의 말씀, 기도, 찬송가의 노랫소리는 불멸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목자와 교회의 모든 제도는 노모스(법·제도)죠.
 
  제도가 바뀌고 자연의 물질은 도끼자루나 도끼날처럼 시간 속으로 마멸되어 사라져도 ‘아버지의 도끼’라는 그 말, 그 의미와 상징은 쥬라기공원 공룡의 ‘DNA 패턴’처럼 부활하리라 생각해요. 그리고 과학(피시스), 신학(노모스) 그리고 시학(詩學)이 더해져 영성의 세계로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입니다.”
 
  선생이 켜 든 제단의 촛불은 ‘아버지의 도끼’처럼 나무꾼 아들들에 의해 영원히 이어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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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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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영수    (2019-12-12) 찬성 : 0   반대 : 0
생각의 심연으로 인도하는 그야말로 인간 탐험의 글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한가지 이해 불충분 부분, 남이 나를 봐줬을 때만 내가 존재하고,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줬을 때만 내가 존재하는 거야라는 대목.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없으니, 다시 말해서 (내가 죽고 나면) 봐 줄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니 볼 수가 없고, 불러야 할 이름의 대상이 없어졌으니 부르지 못하는 것과는 그 뜻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또한 봐 줄 사람이나 불러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나란 존재는 과연 없는 것일까?
  김세환    (2019-12-11) 찬성 : 1   반대 : 0
우리 모두는 신神을 잘 아는 것 같이 말하지만 신은 귀신이다. 우리가 귀신이라 말하면 나쁘게만 인식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무엇이던 잘하는 사람을 귀신 같다라고 말한다. 그저 그런 의미의 말일 뿐이다. 그런 의미로 도道를 말하면 도는 길이다. 도를 딱는다는 말의 의미는 어렵지만 길을 딱는다는 말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분명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로 신이라 하면 세계 모든 언어가 동원되어 더욱 어렵게 된다. 간단하게 생각하라. 도道가 길인 것 같이 신神은 귀신 같다는 말의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귀신 같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면 신의 의미를 터득한다.

2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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