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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인간증명 1

63년 현역 출판인 고산 고정일이 겪은 한국 현대사의 裏面

“《大望》으로 흥했고 《백과사전》으로 망했다”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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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세 때 1·4후퇴 도중 어머니와 두 동생 잃으며 전쟁의 참상 알았다
⊙ 12세 때부터 청계천 오간수다리 위에서 헌책 팔기 시작, 16세 때 덕수상고 담벼락에 천막 출판사 열어
⊙ 한겨울 울고 있는데 돌연 나타난 선우휘 선생이 일갈 “젊은 녀석이 뭐 이런 거 가지고 찔찔 짜!”
⊙ “선우휘 선생은 평생의 은인… 송지영·김이석·우경희 선생 등 당대의 명사들 소개시켜 줘”
⊙ 1960년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으로 첫 부도, 자살 시도했으나 여관 여주인 만류로 살아나… 펄 벅의 《살아 있는 갈대》로 재기
⊙ 김동리·황순원·모윤숙·강소천·이원수 선생 등 사숙… 출판사 편집위원으로 모셔
⊙ 박경리 선생의 부탁으로 사형 선고받은 시인 김지하 탄원서 선우 선생이 직접 써줘서 방면
⊙ 선우 선생이 김대중 납치사건 사설로 쓰자 박정희 대통령이 “고맙다”며 감사원장직 제의
⊙ 전두환 대통령은 독립기념관장직 제의… 선우 선생 급서로 무산
⊙ 《대망》 《그레이트 북스》로 전성기 맞았으나 《백과사전》 제작으로 무리… 공영방송사의 무책임한 보도와 포털사이트의 도용으로 부도
⊙ 70세 때 첫 작품 내놓고 잇달아 《삼국지》 《박정희 전기》 등 집필
  내가 인간의 심연(深淵)을 파헤치는 ‘추적형 인터뷰’를 쓴 것은 2010년 7월 17일이 마지막이었다.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이었을 때 지금은 없어진 〈주말판 Why?〉에 당시 신문에서 가장 장문(長文)의 글을 썼다. 보통 200자 원고지 40장 안팎이고 가장 긴 인터뷰가 67장에 이르는 2페이지 인터뷰였다.
 
  신문기자로서의 그 마지막 인터뷰 대상자가 고정일(高正一·79) 동서문화사 사장이었다. 소설 《대망(大望)》으로 일약 팔자(八字)를 바꾼 그는 칠십 대를 앞두고 첫 책 《장진호 전투》를 냈다. 이 책은 2007년 나온 《얼어붙은 장진호》의 개작으로 ‘불과 얼음-장진호 혹한 17일’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장진호(長津湖)는 함경남도에 있는 호수다. 1950년 11월 27일 거기서 3만명의 미 해병 1사단을 중공군 12개 사단 15만명이 포위해 17일간 싸웠다. 영하 20~30도를 밑도는 추위 속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미군은 70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중공군은 전사자 2만5000명을 포함해, 3만8000여 명이 다쳤다.
 
  그때 고 사장을 주목하게 된 이유는 2차 대전 당시 소련·독일이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전사(戰史)에 양대 동계(冬季)전투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를 어떻게 칠순을 눈앞에 둔 노(老) 출판인이 관심을 가지게 됐는가 궁금함 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삼국지연의》 속 황충(黃忠)처럼 칼 대신 붓을 정력적으로 휘두르고 있다.
 
  그는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의 삶을 다룬 《매혹된 혼》(전 3권), 《고산고정일 삼국지》(전 10권), 《불굴혼 박정희》(전 10권)를 잇따라 펴냈다. 7년 만에 인간 내면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하(大河) 인터뷰 ‘인간증명(證明)’을 재개하는 자리에서 고 사장과 재회했다. ‘인연(因緣)’이라는 단어가 새삼 떠올랐다.
 
  현재 우리 출판계에 90수(壽)를 넘김에도 건재한 분들이 여럿이다. 내년에 우리 나이로 팔순이 되는 고 사장을 그들에 견줄 순 없으나 그가 출판사를 처음 시작한 게 1956년, 즉 그가 갓 열여섯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하게 된다. 1956년 그는 옛 덕수상고 담벼락에 기대 천막 출판사를 차렸다. 정문서림(正文書林)이다.
 
  어떻게 전쟁의 상흔(傷痕)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기에 무일푼이던 젊은이가 출판사를 차려 책을 내게 됐는가를 알려면 그가 열 살 때 일어난 6·25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으로 그 출발점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시작된 1·4후퇴였다. 당시 그는 지금의 효제국민학교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 원래 태어난 곳이 거깁니까.
 
  “태어나기는 서울 서대문구 영천동 82번지였습니다. 지금 영천시장 바로 위인데 다섯 살까지 거기서 살았지요.”
 
  — 몇 남 몇 녀입니까.
 
  “3남매 중의 맏이였습니다.”
 
  — 1·4후퇴 때는 효제국민학교 맞은편에 사셨겠네요.
 
  “선친(先親)께서 좋게 말하면 착했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생활력이 없었어요. 안암동 사는 할아버지 댁에서 함께 살았는데 조부께서 선친에게 자립을 권했어요. 그런데 갈 곳이 있어야지. 돈암동 옛 동도극장 건너편에 일본군들이 미군 폭격을 피하려고 만들어놓은 방공호에 들어갔지요.”
 
  — 방공호라면 그냥 굴(窟)이잖아요.
 
  “입구만 천으로 가려놓았는데 한겨울, 바람이 불면 획 하고 눈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정도였죠.”
 
  — 그럼 거지네요.
 
  “꼭 석기시대 원시인처럼 살았습니다.”
 
  — 그런 곳에서 어떻게 먹고살았습니까.
 
  “어느 날 어머니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흰쌀밥에 김치를 바가지에 잔뜩 담아 가져 오셨어요. 아버지와 세 형제가 맛나게 먹었지요.”
 
  — 밥과 김치가 어떻게 생긴 겁니까.
 
  “어머니가 꽤 미인이셨어요. 알고 보니 저희 살던 위쪽이 성북동 부촌(富村)이었는데 거기서 동냥해 온 것이었습니다.”
 
  — 어떤 기분이었나요.
 
  “그 사실을 알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다음 날 새벽 제가 바가지를 들고 성북동으로 갔습니다.”
 
  — 그때가 지금도 기억납니까.
 
  “눈이 펄펄 오던 때였어요. 성북동에 가봤자 오라는 데는 없잖아요. 무조건 큰 집 대문을 주먹으로 두들겼지요.”
 
  — 그랬더니요.
 
  “당시 잘사는 집은 모두 식모(食母)를 두고 있었어요. 식모가 ‘새벽부터 누가 문을 두드리나’ 하는 표정이었는데 저와 눈이 딱 마주친 겁니다. 조그만 아이가 새벽부터 눈 맞고 서 있으니 안쓰러웠나 봅니다. ‘이 어린 것을 내보내다니’ 하고 제 부모님을 향해 나지막이 욕을 하더니 흰쌀밥과 김치를 가득 가져다줬어요. 밥도 갓 지은 것이었고 김치도 새것이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집으로 가 맛있게 먹었지요.”
 
  — 부모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어머니는 막 우시는데 아버지는 ‘사내자식이 고생도 해봐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 고 사장 선친께서 좀 생각이 없는 분이네요.
 
  “어머니나 내가 그런 일을 하게 된 게 아버지 사업 실패 때문이었어요.”
 
  — 무슨 사업을 하셨길래요.
 
  “어디서 리어카에 국화빵 만드는 틀을 가지고 오셨어요. 당시 밀가루 살 돈도 없었습니다. 겨우 밀가루를 구했는데 물을 너무 많이 부으니 국화빵이 아니라 곤죽이 됐어요. 선친께서 ‘에이’ 하고 화를 내시더니 자리에 누워버리셨습니다.”
 
  — 학교는 다녔습니까.
 
  “종암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공책하고 연필을 광목에 넣고 허리춤에 차고 다녔지요. 산을 두 개 넘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매일 아버지가 남이 담배꽁초를 버리면 주워오라고 했어요. 전 그게 그렇게 싫었습니다.”
 
  —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어느 날 학교가 낮 12시쯤 끝났을 때 집 반대쪽 삼선교 넘어서 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앞까지 갔어요. 과거 서울문리대 들어가는 입구였습니다.”
 
  — 거기서 뭘 했는데요.
 
  “돈을 구걸하려는데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남자들은 하나같이 사납게 보이고 여자들은 날카롭게 보여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18세쯤 돼 보이는 처녀가 지나가길래 옷자락을 붙들고 ‘누나’ 하고 말을 붙였지요. 그 처녀에게 사정 얘기를 하니 금세 눈에 눈물이 글썽이더군요.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주셨어요.”
 
  — 성공하셨네요.
 
  “시작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더라고요. 양쪽 호주머니가 꽉 차 윗옷에 넣고 책 보따리에도 넣고 할 정도였어요. 그때는 인심이 지금과 달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거미가 지고 저녁 무렵이 됐습니다.”
 
  — 낮 12시부터 그때까지 구걸을 한 겁니까.
 
  “아무것도 못 먹고 배가 고팠는데 지나가는 누나가 우동을 사주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고….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하자 싶어 스무 살쯤 돼 보이는 누나에게 말을 붙였지요. 그랬더니 저를 이상한 건물로 데리고 가더군요.”
 
  — 돈을 다 빼앗으려는 거였습니까.
 
  “제가 그때는 글을 못 읽었어요. 그곳이 수도여자의과전문대학이었습니다. 훗날 우석대병원이 됐다가 고려대와 합병해 지금의 고대 의대가 된 곳입니다. 이건 훗날 얘기고 그 누나가 절 놔두고 나갔는데 한 시간이 되도록 안 돌아오는 거예요. 방에 16촉 백열등 한 개뿐이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희끄무레한 게 보였어요.”
 
  — 뭡니까, 그게.
 
  “해골이었어요. 모형이 아니라 진짜 해골. 겁이 덜컥 나 나가려는데 그 누나가 돌아왔습니다.”
 
  — 왜 그렇게 오래 걸렸답니까.
 
  “야근 당직하던 분들에게 제 사정을 이야기하며 돈을 걷었나 봐요. 누나가 상당액의 돈을 주면서 말씀하시더군요. ‘넌 절대 거지가 아냐. 집안을 도우려고 장한 일을 한 거야. 열심히 공부하고 또 어려운 일 생기면 날 찾아와’라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가니 밤 9시가 넘었더군요.”
 
  —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돈을 꺼내니 수북이 쌓였는데 지금으로치면 100만원이 넘었을 거예요. 선친께서 처음엔 ‘너 이거 훔쳐온 거냐’며 화를 냈는데 어머니가 옆에서 ‘정일이가 그럴 애예요?’ 하고 화를 내니 ‘내일도 이렇게 돈 좀 얻어와라’라고 하시더군요.”
 
  — 선친이 아들을 아예 거지로 만들려고 했네요.
 
  “제가 화를 벌컥 냈지요. ‘내가 거집니까’ 하고요. 아버지께 ‘이걸로 국화빵 하지 말고 고등어나 꽁치를 떼다가 행상을 하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지금의 종로5가 보령약국 건너편에서 고등어, 꽁치 행상을 했는데 꽤 잘됐어요. 한 궤짝 떼다 다 팔면 또 한 궤짝 사 오는 식이었지만. 방공호 집도 그때 나오게 됐습니다.”
 
  — 그게 지금의 효제국민학교 건너편이었습니까.
 
  “거기 일본인들이 살던 아파트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의 아파트와는 다르고 방만 다닥다닥 붙어 있었어요. 약간의 돈을 주고 1층에 방을 구했습니다.”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일조각 한만년, 을유문화사 정진숙, 고정일, 열화당 이기웅, 문예출판사 전병석, 지식산업사 김경희.
  — 그러다 6·25를 맞았군요.
 
  “1·4후퇴 때 제가 열 살, 둘째가 일곱 살, 막내가 세 살이었어요. 1월 3일 날 경기도 화성군 망월리 외가댁을 향해서 꽁꽁 언 한강을 건넜습니다. 그때 장면이 꼭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어요. 손수레에 몇 가구가 함께 타고 눈이 펄펄 내리는 추운 벌판을 하염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고정일은 1960년 제35회 자유문학 신인상 소설 부문에 〈청계천〉이라는 소설이 당선돼 등단했다. 이 단편에 함경북도 성진에서 월남한 황장선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1인칭 시각인 단편에서 고 사장의 가족과 ‘악연(惡緣)의 줄로 묶인 존재’로 나온다. 황장선은 중부소방서에서 일해 황 소방장이라 불렸다.
 
  소설에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황가에게 매일 이유 없이 얻어맞다가 복수를 결심하고 식칼을 품은 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놈 황가야! 나오너라. 오늘 사생결단을 내자. 내 아들 준이도 왔다. 네놈도 잊지 않았겠지? 피란 때 그 빨강수레. 네놈이 그 빨강수레를 뺏어가는 바람에 우리 가족이 모두 죽었다.…’
 
  고 사장에게 “단편이 어느 정도 실화(實話)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실화”라고 했다. 문제의 ‘빨강수레’는 고 사장 일가가 1951년 1월 3일 ‘1·4후퇴’ 때 타고 가던 것이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남대문시장에서 버려진 놋그릇을 잔뜩 실었다고 한다. 피란 가는 길에서 식량과 바꾸려는 의도였다.
 
  — 그래서 순조롭게 화성까지 갔습니까.
 
  “가기는요. 신갈 부근 새말이라는 마을 빈집에 24명이 들어가서 살았어요. 바로 다음 날 아침 중공군과 인민군이 그 마을로 진입했습니다.”
 
  — 겁이 덜컥 나셨겠네요.
 
  “이상한 게 중공군은 무장을 하지 않았어요. 작대기에 포탄 하나를 철사로 묶은 차림이었던 반면 인민군은 중무장하고 있었어요. 중공군과 인민군은 마을을 점령한 뒤 사람들을 방앗간에 모이게 해 교육을 했습니다.”
 
  — 전쟁 통에 무슨 교육을요.
 
  “위대한 스탈린 동지의 지도를 받고 위대한 모택동 동지의 지원을 받아 위대한 김일성 장군이 남한을 해방시키려 왔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 무리라고 막 욕했고요.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같은 것도 가르쳤어요.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구비구비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그 노래요.”
 
  — 얼마나 같이 중공군, 인민군과 지냈나요.
 
  “거의 한 달을 같이 살았지요. 중공군은 표정이나 얼굴색이 우울하고 웃는 법이 없었습니다. 반면 인민군은 열성적이었고요. 앞산에 중공군과 인민군 지휘부가 있었는데 우리가 매일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든 뒤 광주리에 이고 그쪽으로 날랐지요. 중공군은 민간인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미군 폭격기가 뜨면 서툰 우리말로 ‘벤지 날라 벤지 날라’ 하고 외쳤습니다.”
 
  — 그러다 비극의 그날이 왔지요.
 
  “설을 며칠 앞둔 1951년 1월 25일이었을 겁니다. 가래떡을 해 먹으려고 떡쌀을 담가놓고 자다 깨어보니 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얼굴은 흙투성이고 집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주변에선 신음과 비명만 들렸어요. 어머니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당시 세 살짜리 막내를 품에 꽉 끌어안고 음~음 하는 신음을 내고 계셨습니다.”
 
  — 폭격을 맞았나요.
 
  “당시 미군이 그 마을로 진주하려고 중공군·인민군과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는데 그중 한 발이 명중했나 봐요. 정신을 차려 밖으로 나가보니 둘째는 마당에 나뒹굴고 있었어요. 얼굴은 멀쩡한데 몸 가운데가 반쪽으로 갈라져 창자가 밖으로 다 나와 있었고요.”
 
  —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그때 제2국민병으로 나가셔서 어머니와 저희 세 형제만 피란을 하고 있었습니다.”
 
  — 한순간에 가족이 몰살당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스물일곱이셨어요. 막내를 끝까지 끌어안고 돌아가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막내가 살아봤자 열 살인 제가 감당하지 못할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러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그다음 혼자서 화성까지 갔습니까.
 
  “미군 24사단이 진격했는데 유엔 경찰이 민간인들을 통제했습니다. 거기서 미군을 따라 한 달 동안 발이 묶여 있었어요. 밥을 먹을 길이 없어 새벽 5시면 사람들이 바가지를 들고 미군 부대 앞에 모여요. 한 300명 이상이. 미군들은 아침을 뷔페식으로 했는데 쇠고기, 소시지, 식빵 등을 먹고 아침 6시면 그걸 모두 드럼통에 넣고 부글부글 끓여요. 그게 꿀꿀이죽입니다.”
 
  — 이름부터 식욕이 뚝 떨어지네요.
 
  “그건 문형이 안 먹어봐서 그래요. 고기, 빵, 소시지에 닭고기까지 들어 있어서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지요. 간혹 여송연(시가) 같은 게 섞여 있어서 그렇지. 문제는 아침은 그렇게 해결해도 점심, 저녁이 문제인 거예요.”
 
  — 하루 세끼가 참 사람을 고달프게 합니다.
 
  “미군 참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겨울이라 흙덩이가 얼어 있어요. 그 밑을 파보면 운 좋으면 소시지 깡통 같은 게 나오니 그걸로 점심, 저녁을 해결하는 거지요.”
 
  — 전쟁의 참상(慘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신갈 사거리 큰 빈집에 모여 살 때인데 아주머니들이 나가면 미군을 데려와요. 그러면 남편들은 슬그머니 뒤편으로 자리를 피해줍니다. 몸을 파는 거지요. 그걸 ‘숏타임’이라고 했는데 한 30분 뒤에 나온 미군들은 어린애들에게 돈도 주고 초콜릿도 주곤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미군들이 몇 놈씩 떼를 지어 오는데 방이 다 차면 신경질을 내곤 했어요.”
 
  — 기다리면 되지 왜 신경질을 냅니까.
 
  “한번은 흑인 병사 몇이 왔다가 방이 다 차니까 화를 막 냈어요. 제가 그때 광 옆에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걸 보고 있는데 그 녀석이 저한테 초콜릿 한 케이스를 주더군요. 못하는 영어로 ‘땡큐’ 하고 받으니까 광으로 절 데려가더니 돈을 또 줘요.”
 
  — 왜요.
 
  “그러더니 갑자기 ‘사쿠하치 오케이’하면서 아랫도리를 훌렁 벗더니 그 거대한 물건을 제 얼굴에 들이밀더군요.”
 
  — 사쿠하치가 구강 성교인데 그놈이 일본에서 왔나 보죠? 그런 단어를 아는 걸 보면.
 
  “생각해 보니 그렇네, 일본말을 어떻게 알았지? 하여간 주먹으로 그 녀석 아랫도리를 후려치고 밖으로 도망쳐 나왔지요.”
 
  — 아무리 어려도 주먹으로 세게 맞았으면 무지 아팠겠네요.
 
  “그랬겠죠. 허허. 참 별일을 다 겪었네.”
 
  — 그렇게 고생해서 결국 화성 외가까지 갔습니까.
 
  “가보니 아버지가 먼저 와 계시더라고요. 제2국민병으로 징집당했는데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는 거예요. 밤늦은 시간에 외가에 가니 모두들 놀라서 뛰어나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됐지요. 외할아버지는 제 아버지를 마구 혼내셨고. 다음 날 아침 조그마한 손수레를 한 대 구해서 새말로 다시 갔어요. 어머니와 동생들 유골을 수습하러요.”
 
  — 참 대담하셨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잖아요. 새말에서 군인들이 참호 쌓을 때 쓰는 자루를 하나 구해 어머니가 계신 현장에 갔어요. 뼈들이 다 섞여 있는데 어머니가 입고 계셨던 옷의 뒷부분은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더군요. 그래서 유골을 자루에 넣었지요. 마을 이장을 찾아가서 둘째 동생 유골을 수습하려는데 황당한 일을 겪었어요.”
 
  — 무슨 황당한 일인데요.
 
  “제가 여차여차해서 왔다고 하니 갑자기 ‘잘됐다’ 하면서 ‘이놈들이 우리 빈집에 와서 땅속에 묻어놓은 곡식을 다 먹어치웠으니 이름을 대라’는 거예요. 자기 집에 묵었던 피란민들 이름을.”
 
  — 전쟁 때 그걸 먹을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이름을 대서 뭐합니까.
 
  “갑자기 화가 확 치밀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대들었지요. ‘아저씨 우리 식구 다 죽고 피란민들도 다 죽었는데 쌀 파묻은 거 먹은 게 무슨 문제냐’고. 그러면서 겁도 줬어요. ‘주소 댈까요? 돌아가신 분 아들이 깡패인데 지금 부모님 돌아가셔서 화가 많이 나 있다’고.”
 
  — 그 말이 먹혔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말리더군요. 괜히 서울까지 쌀 찾으러 갔다가 망신당한다고. 그러더니 제 동생 묻은 곳을 가르쳐줬어요. 앞산에 작은 나무 세 그루가 있는 자리에 묻었다고. 그래서 거기 가서 둘째 동생 유골도 수습을 했습니다.”
 
  — 그 후론 서울로 돌아왔나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저를 무척 아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절 놔두고 혼자 올라가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데려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함께 수원까지 올라왔지요. 거기서 반가운 모습을 봤어요.”
 
  — 뭔데요.
 
  “제가 서울 있을 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아침에 배달했는데 《조선일보》 전시판을 나눠주는 거예요. 이거 어디서 나옵니까 하고 물으니 옛 수원경찰서 관사 자리에서 《조선일보》 임시판을 찍고 있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스포츠조선》 사장까지 지내신 신동호씨도 거기 있었다는데 한 달 동안 신문 얻어다 공짜로 나눠주고 팔기도 하고 그러다 영등포까지 왔어요.”
 
  — 왜 영등포까지입니까.
 
  “당시 전선(戰線)이 의정부였는데 미군이 민간인은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습니다. 거리에서 껌과 담배를 팔고 있는데 옆에 있던 누군가 ‘오늘 밤에 배가 뜨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 걸 들었어요. 노량진 쪽에서 밤섬을 지나 마포나루 아래로 몰래 사람들을 운반하던 밀선(密船)이었어요. 전 그날 밤 그곳으로 갔어요.”
 
  — 무사히 통과시켜 주던가요.
 
  “뱃사공이 돈을 내라는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암동에 계시는데 가봐야 한다고 사정하고 가지고 있던 껌과 담배를 다 드렸죠. 미군들이 당시 밤에 한강에서 서치라이트로 밀선을 단속했는데 용케 감시를 벗어나 마포나루에 도착했어요. 그 길로 효제동 집에 갔다가 다음 날 아침 동대문시장에서 민어 2마리를 사서 안암동으로 갔습니다. 얼마 뒤 아버지가 돌아오셨고요”
 
  — 학업은 재개하셨나요.
 
  “제가 종암국민학교를 3학년 1학기까지밖에 안 다녔어요. 어느 날 길에서 강문중고등학교라는 곳에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글을 봤어요. 강문중고등학교가 지금의 용문고인데 나중에 보니 조영남, 백일섭씨도 모두 그곳을 다녔더군요.”
 
  — 국민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중학교에 갈 수 있습니까.
 
  “집안 고모부님께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함께 중동학교를 나오신 분인데,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하라고, 만일 졸업장이 필요하면 나중에 가져오겠다고 하라더군요. 그래서 지원했는데 180명 모집에 400명 이상이 온 거예요. 시험을 봤는데 어떻게 해서 됐어요. 야간이었죠.”
 
  — 생계는요.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청계천 오간수다리에서 과월지(過月誌) 헌책을 팔았습니다. 워낙 읽을 것이 없어 헌책 수요가 많았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해 돈이 생기면 꼭 종로 영창서관이라는 데를 가서 한 권씩 책을 샀어요. 어느 날 장복한 선생님이라고 관리 총책을 맡는 분이 절 부르더라고요. 신문팔이가 매일 와서 책을 열심히 읽고 간혹 사가니 대견해 보였나 봐요. ‘얘야, 여기서 일해 볼 생각 없니?’ 그 말에 뛸 듯이 기뻤지요. 열두 살 때였는데 다음 날 출근하니 장 선생님이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짓는 거예요.”
 
  — 밤새 무슨 일이 생겼나요.
 
  “주인 집안 인척 되는 사람이 대신 일하게 됐다는 겁니다.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그날 눈이 무척 왔습니다. 영창서관이 옆으로 길고 안으로는 좁은 구조인데 안으로 들어가려면 한 걸음 내려서야 하는 구조예요. 한데 눈이 쌓이면 문이 잘 안 열리잖아요. 빗자루로 눈을 다 쓸었지요. 그러곤 종로 탑골공원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웬 여학생이 달려오더니 절 부르는 거예요. 장 선생님이 다시 찾는다고. 일도 못하게 됐는데 눈까지 치우는 모습을 보고 대견해 보였나 봐요. 선생님이 ‘내 월급에서 떼서 주더라도 같이 일해야겠다’고 주인께 말씀드렸다는 거예요.”
 
  — 살다 보면 그런 인연들이 있지요.
 
  “장 선생님께 많은 것을 배웠어요. 얼마 뒤 장 선생님이 영창서관을 그만두셔서 저도 관뒀지만 ‘사람을 알려면 《수호지》를 읽고 뜻을 크게 품으려면 《삼국지》를 읽어라’는 등 여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강문중학교에서도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어요.”
 
  — 어떤 도움인가요.
 
  “교장 선생님께서 신입생 앞에서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있어요. 첫째,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可)하다. 둘째,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셋째, 인연을 소중히 해라. 담임선생님께 따귀 맞은 일도 생각나요. 야간중학교다 보니 오후 5시에 등교해서 밤 10시까지 수업하는데 어느 날 2교시 시작할 때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담임선생님이 불러 앞으로 나갔더니 따귀를 두 대 때리시는 거예요.”
 
  — 졸았다고 따귀를 때립니까.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담임선생님이 부르시더군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니니 얼마나 힘드냐. 정신 차리라고 네 뺨을 때렸지만 내 가슴도 찢어지는 듯 아팠다. 주간(晝間)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저도 울고 선생님 눈시울도 붉어졌지요.”
 
  — 영창서관을 나온 뒤에도 헌책 장사를 계속했나요.
 
  “오간수다리가 나무로 돼 있고 사방에 막힌 데가 없어서 같은 서울 시내보다 2~3도쯤 기온이 낮아요. 다리 밑에는 뱀탕을 파는 장수가 있고. 어느 겨울 너무 추워서 카바이드 등불을 켜고 달달 떨고 있는데 눈물이 막 흘러 뺨에 고드름처럼 그대로 얼어붙었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호통을 치더군요.”
 
왼쪽부터 계몽사 편집인 우진주, 우경희 화백, 고정일, 이우경 화백.
  — 누굽니까, 그분이.
 
  “선우휘(鮮于輝) 선생님이셨어요. 제게서 헌책을 자주 사가시고 필요한 책이 있다고 하시면 제가 구해 드렸는데 ‘사내자식이 뭐 이런 거 가지고 찔찔대느냐’고. 그분이 안타깝지만 절 강하게 키우려고 그러셨던 거 같아요. 선우 선생님이 그 후로도 절 많이 도와주셨어요.”
 
  — 예를 들면.
 
  “송지영 선생님도 소개시켜 주시고 신문 삽화가로 당대 최고였던 우경희 선생님의 원남동 집에도 데려가시고. 김이석 선생님이라고 당시 문단(文壇)에서 김동리, 황순원 선생님과 동급이던 분인데 그분에게도 절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1955년 말까지 오간수다리에서 헌책 장사를 하다 1956년 덕수상고 담벼락에서 천막서점을 열었지요. 정문서림이라고.”
 
  — 그 이름은 누가 지은 겁니까.
 
  “정문은 말 그대로 바른 글이라고 제가 지은 거고 지금의 동서문화사도 동양과 서양의 책을 모두 낸다는 뜻으로 제가 지은 겁니다.”
 
  — 처음 낸 책이 기억납니까.
 
  “나만식 선생님이라고 단골이셨는데 그분이 세네카의 철학서를 번역해 《지혜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펴냈습니다. 그게 첫 작품이었죠.”
 
  — 류근일 선생도 그즈음 알게 되셨다면서요.
 
  “류근일 선생은 그때 서울대 정치학과 1학년이었어요. 제 헌책방에 자주 들렀는데 반공법을 위반해 감옥에 가기 직전에 ‘우리의 구상’이라는 선언문을 인쇄하는 걸 제가 도왔지요. 80년대 젊은이들이 하던 ‘가자 판문점으로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뭐 이런 말들이 다 류근일 선생이 만든 거였습니다.”
 
  — 그분은 지금 보수우익의 지주 같은 분인데.
 
  “원래 류근일 선생 선친이 월북해서 김일성대학 문리대학장을 지냈지요. 류근일 선생은 당시 아시아아프리카 학생연맹 위원장을 지냈고요. 훗날 황장엽 선생을 만나니 ‘류 선생 춘부장한테 잘할 걸 그랬다’고 얘기했다더군요. 류근일 선생을 감옥에서 훈화시킨 분이 《중앙일보》 창업주인 홍진기 선생입니다.”
 
  — 그런데 출판사를 만든 직후 쫄딱 망하셨다면서요.
 
  “겁도 없이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 30권짜리를 출판했어요. 1959년에 시작해 1960년에 나왔는데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4·19로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고 대 격변기였잖아요. 명작 전집이 팔릴 수가 없었습니다.”
 
  — 그래서 어떻게 수습했습니까.
 
  “당시 스무 살이었는데 빚쟁이가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어요. 견디다 못해 약방을 돌며 수면제를 한 알 한 알 모아 40알이 되자 을지로 6가 동대문야구장 담벼락에 붙은 77여관이라는 데 들어갔죠. 그런데 주인아주머니가 젊은 애가 혼자서 그것도 대낮에 왜 여관에 왔느냐고 따지더군요. 며칠째 야근을 해 잠시 눈 좀 붙이러 왔다고 둘러대고 방으로 들어갔지요.”
 
  —사신(死神)의 그림자를 그분이 눈치챈 모양입니다.
 
  “맨 꼭대기 4층 방에 들어가 물 한 컵을 따라놓고 수면제를 들여다보는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왜 전쟁 때 어머니와 두 동생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 고생을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한참 울다 약을 입에 털어 넣으려는데 여관 아주머니가 방으로 뛰어 들어와 제 멱살을 잡더군요.”
 
  — 자살미수네요.
 
  “함경도 말씨를 쓰는 그 아주머니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방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막 욕을 하더군요. 이 종간나 새끼. 누굴 망치려고 하필 우리 여관에 들어와 죽으려는 거냐고. 왜 이 불쌍한 여편네 여관에서 이 지랄이냐고 난리를 쳤어요. 그때 갑자기 밖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리더군요.”
 
  — 무슨 함성이었습니까.
 
  “창문을 열어보니 바로 옆 동대문야구장에서 누군가 홈런을 친 거였어요.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저길 보라우. 저 홈런이 쉽게 나오는 줄 알간? 수천 번 방망이를 휘둘러야 어쩌다 한 번 날리는 게야. 내래 남편이 반동으로 몰려 죽고 맨 몸뚱이로 애들과 38선 넘었어. 왜 77여관인지 알간? 식모살이, 떡장수 안 해본 거 없이 77번 도전해서 세운 게 이 여관이란 말이다. 네 인상을 보니 꾹 참고 이겨내면 틀림없이 홈런 한 번 날릴 때가 꼭 올 기야.’”
 
  함경도 아낙의 ‘예언’처럼 흥진비래(興盡非來)의 다음은 고진감래(苦盡甘來)다. 인생에서 이 법칙은 틀린 적이 없다. 시차는 있을지언정 말이다. 그때 《대지(大地)》의 작가 펄 벅이 한국의 선비를 소재로 쓴 《살아 있는 갈대(The Living reed)》를 출간했다는 소식이 망한 출판인 고정일의 귀에 들려왔다.
 
  그는 영문본을 그대로 프린트해 자전거에 싣고 대학가를 누볐다. 연세대에서 가장 많이 팔았고 한양대에서도 제법 매상을 올렸다. 그때 그의 든든한 후원인이 돼줬던 선우휘, 김이석, 우경희, 강소천, 이원수 작가가 그를 격려했다. “그래 참 잘한다. 젊은 놈이 뭐가 걱정이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 《살아 있는 갈대》를 몇 권이나 팔았는데요.
 
  “한 5만 권 나갔지요. 재기의 발판이 됐습니다.”
 
2005년 ‘조선광문회 복원 발기위’ 발족 모습. 왼쪽부터 강영훈, 정진숙, 홍일식, 최국주, 최학주, 고정일.
  — 그다음이 동서문화사의 상징처럼 된 일본 작가 야마오카의 《대망(大望)》이었지요.
 
  “일본에서 그 책이 출간됐다는 소리를 듣고 야마오카 선생에게 편지를 올렸어요. ‘한국어 번역본’을 내고 싶다고. 무척 좋아하시면서 흔쾌히 승낙을 했지요. 《대망》은 국민 필독서라는 평이 나왔을 만큼 대단한 책이었습니다.”
 
  — 일설에는 의역 혹은 창작품에 가깝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건 아니고요, 예를 들어 일본어로 휘파람새를 ‘춘고조(春告鳥)’라고 하는 걸 휘파람새로 바꾸거나 도요토미의 관직이었던 태합(太閤)을 ‘평민영웅’이라고 바꾸는 게 더 한국 독자들이 읽기 쉽지 않겠습니까? 당시 편집부의 어른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 그런데 또 쓸데없는 일에 개입해 구설에 오르셨지요.
 
  “유신 선포 후 《동아일보》에 광고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광고국장이 나중에 《동아일보》 회장을 지낸 김병관 선생이셨는데 제가 1면에 링컨의 말을 인용한 광고를 게재했어요. 민주주의란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거라는 그 유명한 연설문 중 일부분 있잖아요. 신문이 나온 날 새벽 지프 2대가 제집으로 왔어요.”
 
  — 잡혀간 겁니까.
 
  “남산을 빙빙 돌다 간 곳이 한강변 서빙고 분실이었습니다. ‘아악 아악’ 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더군요. 그게 다 녹음해서 겁을 주려는 거래요. 자그마한 방에 욕조, 나무 침대와 변기만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누가 오질 않아요.”
 
  — 겁에 질리셨겠습니다.
 
  “점심때 누가 식판에다 밥을 가져다주며 이러더군요. ‘너 오늘 죽을 거니까 먹어둬. 내가 깨끗이 죽여줄게.’ 어찌나 오싹하던지.”
 
  — 맞았습니까.
 
  “맞진 않았어요. 밤 12시쯤 되니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단 군인이 들어와 ‘선배님, 열심히 출판 사업이나 하시지 정치에 왜 관계하십니까. 선배님은 광고라지만 다 그게 정치적 행위입니다. 다음부터 주의하십시오’ 이러면서 집까지 절 데려다줬어요. 같이 차를 타고 가던 조사관이 이러더군요. ‘참 선생님은 운이 좋습니다. 여기서 안 맞고 나간 분은 선생님이 세 번째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죠. 그 두 분이 누구냐고.”
 
  — 누구라던가요.
 
  “한 분이 국회의원을 지낸 서민호 선생님, 또 한 분은 《사상계》 주간을 지낸 장준하 선생님이었대요. 반면 DJ와 YS는 서빙고 분실 근처만 와도 벌벌 떨었다더군요.”
 
  — 왜 안 맞고 풀려났을까요.
 
  “알고 보니 《크리스찬사이언스모니터》라는 신문에 제 기사가 난 거예요. 한국의 지식층이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다 죽은 줄 알았더니 기개 있는 젊은 지식인도 있다는. 그런데 그대로 잠잠히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다음 날 또 사달이 생겼어요.”
 
  — 무슨 일이었습니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제 이야기가 박스 기사로 나간 거예요. 지나고 보면 이런 일들이 사람의 일생을 바꾸고 신문의 위상을 바꾸기도 해요. 선우휘 선생 경우가 대표적이죠.”
 
  — 무슨 소립니까, 그게.
 
  “김대중 납치사건 때 선우휘 선생이 밤에 사설(社說)을 갈아 끼운 건 문형도 알잖아요. 선우 선생은 사설을 밤에 경영진과 상의도 않고 바꾼 채 다음 날 영등포 지사장 집에 가 있었는데 당시 윤주영 문공부 장관이 선우 선생을 청와대로 모셔갔어요.”
 
1998년 제38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수여받고 있는 고정일 사장.
  — 박정희 전 대통령이 화를 냈나요.
 
  “그 두 분이 원래 알던 사이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준장 때 선우 선생이 대령이었으니까.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은 선우 선생의 두 손을 꼭 잡고 ‘이번에 애 많이 쓰셨습니다. 이후락이가 벌인 일을 어떻게 수습하나 고민했는데 선우 선생이 도와줘서 고맙다’ 이랬대요. 그 후 두 분은 일주일에 한 번씩 술잔을 기울인다는 말이 나올 만큼 가깝게 지냈습니다.”
 
  — 오호, 처음 듣는 이야깁니다.
 
  “박 대통령은 선우 선생께 ‘오래 안 할 겁니다. 마누라하고 시골 가서 딸 아들 장가 시집 보내고 살아야지, 청와대에는 웬 부엉이가 그리도 많은지 밤만 되면 부엉이 소리밖에 안 들린다’고도 했대요. 그러면서 감사원장 자리를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요하(遼河)》를 쓰신 《동아일보》 김성한(金聲翰) 선생님에게서 제가 직접 들었어요. 선우 선생이 그때 박 대통령께 들려준 하이쿠가 있습니다.”
 
  — 하이쿠라면 일본 단가(短歌)인데요.
 
  “‘들판에 핀 꽃이 어여쁘다고 집안에 옮겨 심어도 과연 예쁠까’라는. 두 분이 일본에 정통하니 이심전심으로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거지요. 박 대통령은 선우 선생의 손을 꽉 잡고 ‘밖에서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했답니다.”
 
  — 유명 언론인을 많이 알다 보니 비화도 많이 알겠지요.
 
  “제가 동인문학상을 10년간 운영했어요. 그 뒤 유가족의 요청에 따라 《조선일보》가 운영하는데 오늘 아침에 ‘이자’가 《조선일보》 앞에 가서 시위를 벌였다더군.(고 사장은 기사를 프린트한 것을 보여줬다.) 이자는 이러면 안 되지. 남민전 사건으로 죽을 뻔한 사람을 선우 선생이 살려줬거든요.”
 
  — 그런 좌파들 많습니다.
 
  “지금 천주교에서 정의의 사도 행세하는 그 사람, 예전에 제가 《조선일보》에 우연히 갔다가 봤어요. 언론기본법 때문에 기자들이 농성하는데 그 친구가 왔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방우영 회장께서 ‘저 새끼가 여길 왜 왔느냐’고 소리치며 달려가니 줄행랑을 놓더군요. 옆에서 선우 선생이 ‘아우 저런 바보. 나 같으면 차라리 몇 대 맞고 가겠다’면서 혀를 차시더라고요. 그분 배포가 그렇게 컸습니다.”
 
  — 선우 선생이 방송 촬영을 하시다 아깝게 돌아가셨습니다.
 
  “박현태 선생이 KBS 사장을 할 때 〈선우휘의 6·25〉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셨습니다. 전적지를 돌다 부산에서 과로로 그만. 제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게 일본의 대문호(大文豪) 시바 료타로 선생이 동부이촌동 선우 선생 댁으로 보낸 전보예요.”
 
  — 대문호들은 어떤 식으로 조전을 칩니까.
 
  “명복을 비니 뭐 이런 구절은 하나도 없고 ‘오늘부터 이 세상에 선우휘 선생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니 너무 쓸쓸하고 황량합니다. 시바 료타로’ 이렇게만 써 있더군요.”
 
  — 전두환 대통령도 선우 선생을 모시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던데요.
 
  “전두환 대통령이 선우 선생을 《경향신문》, MBC 회장에 내정했다는 신문 보도가 나서 전화를 드렸더니 선우 선생이 ‘무슨 소리야.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그런 보도를 해?’ 하고 화를 내시더군요. 전 대통령이 선우 선생을 만나 그 제안을 한 건 사실이었어요. 선우 선생이 ‘내가 장편 3개와 단편 12개를 쓸 구상을 하고 있다’니까 ‘그럼 독립기념관장은 어떠시냐’고 했대요. 선우 선생은 독립기념관장이라면 작품을 쓸 수 있겠다 싶어 반응낙을 했고요.”
 
2016년 제1회 육당학술상·춘원문학상 시상식에서의 고정일 사장(사진 오른쪽 맨 앞).
  — 출판인 생활을 60년 넘게 하셨으니 문인들과 관련된 비화(秘話)도 많겠습니다. 김동리 선생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해방 이후 문단의 좌장이었지요. 당시 김동리, 서정주, 황순원 선생 같은 분들은 등단을 꿈꾸는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 그 말씀을 하시니 무슨 문학상 단골 후보였던 분이 생각나네요.
 
  “구자운이라고 정말 시를 잘 쓰던 분이 있었는데 그 가정을 파괴했죠. 가정 자체가 풍비박산 났는데 구 선생이 저희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셨는데 어느 날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와서 면목동 집에 가보니 그이가 자배기에 술을 가득 담아놓고 노란 플라스틱 주걱으로 마시며 숟가락 장단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더군요.”
 
  — 모윤숙 선생도 고 사장님 출판사에서 낸 책에 이름이 자주 보이던데요.
 
  “걸물이셨어요. 간첩으로 소문난 김수임과 동창이었는데 김수임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김수임을 급히 사형시켰죠. 그분이 제일 흠모했던 분이 춘원 이광수 선생이었습니다. 《렌의 애가》에서 나오는 시몬이 바로 춘원입니다.”
 
  — 고 사장이 생각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작가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내가 직접 뵙지 못한 분 중에는 월북한 이태준 선생이죠. 《달밤》이라는 소설 꼭 읽어보세요. 만나 뵌 분 중에는 서기원 선생. 《이 찬란한 밤에》라는 소설 기가 막혀요. 그분이 최규하 대통령 시절 정부 대변인만 안 지냈으면 더 걸작을 남겼을 겁니다.”
 
  — 박경리 선생과도 돈독하게 지내셨죠.
 
  “박경리 선생을 처음 본 건 선우 선생 댁에 박 선생님이 손자를 업고 왔을 때였습니다. 박 선생은 사위(시인 김지하)와 외동딸(김영주)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는데 이유야 어쨌든 사위가 사형 선고를 받았잖아요. 선우 선생에게 살려달라 부탁하려고 오신 겁니다.”
 
  — 살려주셨나요.
 
  “며칠 후 선우 선생이 김지하 석방 탄원서를 썼다면서 저보고 와서 한번 읽어보래요. 저보고 어떠냐고 묻는데 제가 그분 글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그냥 좋다고 말씀드렸죠. 탄원서 보내고 며칠 후 김지하가 석방됐어요.”
 
  — 김지하씨가 고맙다고 인사는 왔던가요.
 
  “인사는 무슨…. 그 일 있고 한참 뒤 예전에 경향집이라고 신문기자들 자주 가던 술집에서 두 사람이 딱 마주쳤죠. 김지하씨는 나오고 선우 선생은 들어가는데 김지하씨가 이러더군요. ‘어이쿠 선우 선생님 저 김지하입니다. 감사합니다.’ 거기까지 했으면 됐을 것을 ‘그렇지만 저는 제가 가는 길이 있고 선생님은 선생님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걸 잊지 마십시오’ 이러더라니까. 선우 선생이 무척 화를 내셨어요.”
 
동인문학상운영위원회 모습. 왼쪽부터 고정일, 김성한, 선우휘, 백철, 황순원, 김동리.
  — 그 후로 선우 선생 주기(周忌) 때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우 선생 10주기 때 한운사 선생님이 모임을 발의했어요. 제가 한운사 선생께 김지하를 꼭 부르라고 했어요. 방우영 사장님을 비롯해 한 200명이 모였는데 한운사 선생은 방명록에 ‘내가 10년 더 살고 있는데 별거 아닙니다’ 이렇게 썼어요. 선우 선생과 한 선생이 동갑이거든요. 그 자리에 김지하가 왔어요. 정신을 차렸는지 ‘위대한 한국인 선우휘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쓰더군요. 하하.”
 
  — 이병주 선생은 어땠습니까.
 
  “그분은 성격이 무척 급했어요. 옛날 《조선일보》 근처에 아리스다방이라고 문인들과 신문기자들 모이는 곳이 있었는데 자신을 빨치산이라고 불렀던 한 평론가와 이병주 선생이 딱 마주쳤어요. 이 선생이 다짜고짜 그 평론가의 따귀를 때리면서 ‘너 이노무 새끼 내가 빨치산 하는 거 봤어’라고 하더군요. 그걸 송지영 선생이 말리고 난장판이 됐죠.”
 
  — 박경리 선생을 원주까지 자주 찾아뵀죠.
 
  “남편이 6·25 때 돌아가셨는데 박 선생이 정말 미인이었습니다. 집적대는 문인이 하도 많아 원주로 가신 거예요. 한번은 아침 10시쯤 방문했는데 한밤이 되도록 놔주질 않더군요. 그때 한창 《토지》를 집필하실 때였는데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나요.”
 
  — 뭐라고 했습니까.
 
  “글을 쓰는 게 참 고통스럽다고. 새벽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한번 멈추면 다시 쓰질 못한대요. 그러면 시집올 때 가져온 저고리와 치마의 단을 다 뜯고 다시 바느질해 원상복구하는데 한 2시간 반쯤 걸린다더군요. 그러고 나면 정신이 맑아져서 다시 글이 나온다고.”
 
  — 그런 분은 어떻게 수절을 할까요.
 
  “제가 물어보니 박 선생이 그러시더군요. ‘고 사장. 나도 여자예요. 왜 욕정이 없겠어요. 그렇지만 내키는 대로 하면 추잡해지잖아요’라고. 그런 생각이 들면 수시로 대바늘로 허벅지를 콕콕 찌른대요. 피가 방울방울 맺히고 통증이 있으면 그런 생각이 싹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세계대백과사전》(전 31권, 1997) 동서문화사 펴냄.
  — 《대망》 이후 《그레이트 북스》 등으로 승승장구했는데 문제의 《백과사전》 때문에 다 날리셨죠, 부도도 맞고.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은 김상문 선생님이 만든 《동아대백과》였어요. 안타깝게도 그 책은 반쪽이었어요. 북한 부분이 없었으니까. 그분이 전경환씨를 통해 은행 융자를 50억 받아서 그중 일부를 고맙다고 드린 게 탈이 나 결국 동아가 두산에 인수되고 말았어요.”
 
  — 원래 《백과사전》 만드는 회사들이 다 망하는 묘한 전통이 있지요.
 
  “일류 국가들은 일류 《백과사전》이 있어요. 영국의 브리태니커가 결국 시카고대학으로 갔다가 다시 개인사업가에게 넘어갔고 일본 평범사도 《백과사전》을 했다가 망할 뻔했는데 그때는 정부가 도와줘서 살았고 프랑스의 라루스니 독일의 브록하우스 같은 《백과사전》이 유명하지요. 저도 그런 걸 만들어보고 싶어서 전 재산을 들였어요.”
 
  — 얼마나요.
 
  “순수 제작비만 180억에 실제론 300억이 들어갔는데 해가 지나도 완성이 되지 않는 거예요. 《백과사전》은 참 힘든 겁니다. 한 공영방송이 누구한테 사주받았는지 우리 《백과사전》이 엉터리라고 〈9시뉴스〉에 4분50초를 방송해서 난리가 났어요. 지루한 소송 끝에 이기긴 했지만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 방송에서 타협안으로 저희 출판사에서 나온 《톨스토이 인생독본》과 《빨강머리 앤》의 캐나다 현장 취재를 통해 제법 책을 팔긴 했지만 《백과사전》 판매가 워낙 치명상이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포털 사이트가 우리 《백과사전》 내용을 허락도 받지 않고 무료 배포했어요. 완전히 망했죠.”
 
  — 그때가 2008년, 두 번째 부도였죠.
 
  “18억을 메우려 도산공원 바로 앞에 있는 집을 15억에 팔았습니다. 그 집이 240평인데 지금은 1200억원이 넘어요. 한 유명 디자이너가 매입했습니다. 그때 가족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 저 같으면 《백과사전》 대신 땅이라도 좀 사놓았을 텐데.
 
  “글쎄 말입니다. 문형을 진작 만났어야 했는데.”
 
  — 그 후로 이상한 사기사건에 얽혀 노무현 대통령과도 알게 됐죠.
 
  “부산의 서적 도매상이 부도를 낸 거예요. 5억원 정도를 회사에 결제하지 않고 개인 부동산을 매입했습니다.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대전지법판사를 마치고 부산에서 변호사를 할 때였습니다.”
 
  — 어떤 분이었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은 순진했어요. 판결문 쓰는 능력이 좀 부족했다는 얘길 당시 그분 상사로부터 들었습니다. 소송하느라 4년 반을 같이 일했는데 밤 기차를 타고 새벽에 부산에 가면 그분이 기다리는 식이었습니다. 둘이 꼬리곰탕도 숱하게 먹었는데 재판은 1억4000만원을 회수하는 것으로 끝났어요. 그분은 수고비로 3000만원 정도 받으셨고. 그러곤 잊었는데 국회의원이 되었더군요.”
 
  — 국회의원이 된 후 연락이 왔습니까.
 
  “당선됐다고 제 사무실로 인사를 왔지요. 열심히 하시라고 덕담을 했는데 1988년인가 TV로 청문회를 보니 전두환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고 ‘이 악마야’ 하고 퇴장하더군요.”
 
  — 그분이 그 행동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지 않았습니까.
 
  “언론에서야 영웅이 나타났다고 했지만 그게 할 짓입니까? 소리만 지르면 뭐해요? 논리적으로 따져야지. 그때 무척 실망했어요.”
 
  — 나중에 대통령까지 당선됐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출판사에 강남경찰서 형사 2명이 왔었대요. 직원들이 놀라니 형사들이 ‘좋은 일입니다’라고 했대요. 청와대 오찬에 초청했는데 전 출장 갔다는 핑계 대고 안 갔습니다. 그 후로 그분이 퇴임 직전에도 절 불렀는데 그때도 핑계 대고 안 갔습니다.”
 
  — 한번 가시지.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파주 출판단지에 갔어요. 열화당 이기웅 사장이 당시 출판단지 이사장이었고 한길사 김언호 사장 등과 함께 오찬을 하는데 노 대통령이 묻더래요. ‘고정일 사장 아느냐’고. 이 사장이 ‘성균관대 동기로 아주 친하다’고 했더니 노 대통령이 ‘고 사장은 외국 출장을 자주 가시냐’고 물었답니다. 두 번이나 청와대로 불렀는데 안 갔으니 속으로 웬일인가 싶었겠죠. 근데 열화당 이 사장이 이랬대요. ‘고 사장은 외국에 잘 안 가는데?’라고. 아마 노 대통령이 그 말에 짐작을 했을 겁니다.”
 
  — 고 사장 저서 중에 제일 눈에 띄는 게 《고산고정일 삼국지》인데 이건 어떤 책을 베낀 겁니까.
 
  “우리나라 《삼국지연의》는 대개 조선 말에 나온 《현토 삼국지》를 기본으로 한 겁니다. 박종화 선생, 정비석 선생부터 이문열까지 대개 이 책 저 책을 다 참고한 건데 전 김동리, 황순원, 허윤석 선생이 부산 피란 시절 일본작가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책을 번역한 《삼국지》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박영사에서 나왔는데 정말 잘 썼어요.”
 
  고정일 사장의 동서문화사는 서초동을 떠나 약수동으로 온 지 꽤 됐다. 건물 4층과 옥상을 쓰는데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이다. 거기서 고 사장과 나는 이틀 연속 만나 8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다. 내가 가끔 담배를 피우러 나가면 고 사장은 비둘기와 참새를 향해 사무실 한쪽에 놔둔 사료를 뿌려줬다.
 
  16세 때 차린 출판사가 2019년이면 63년째다. 그 세월, 고 사장은 영광과 좌절을 여러 번 맛봤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나가떨어질 법도 한데 팔순을 앞둔 이 작가 겸 출판인은 여전히 의욕이 넘쳤다. 돌고 돌아 덕수상고 담벼락에 차린 천막서점 같은 처지로 돌아갔으나 책을 보는 그가 행복해 보여 나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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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진감래    (2019-03-10) 찬성 : 4   반대 : 4
이같은 풍찬노숙의 체험을 해온 기성세대가 다 사라지고 지금 한국을 장악한 세대는 아무 것도 모르고 국가에 대한 감사도 겸손도 없는 것같아서 걱정입니다.

얕은 쾌락에 치우치고 어줍쟎은 이념에 빠져 기성세대를 쉽게 정죄하지만 이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고 유지되어 왔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귀한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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