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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원로 방송인 李長椿이 말하는 방송인물 열전

1963년 KBS 입사 후 기자, PD에서 광고영업까지 35년간 방송 현장 지켜봐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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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전 국장 이장춘, 개인 블로그 〈춘하추동 방송〉에 방송인 이야기 13년간 연재
⊙ “박종세 아나운서입니까. 나 박정희라고 하오”… 5·16과 10·26 모두 KBS와 인연
⊙ 女아나운서 전설은 이옥경·호기수·강영숙, 男은 임택근·전영우·이광재·박종세
  원로 방송인 이장춘(李長椿·78)은 한국 방송사의 면면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다. 1963년 KBS에 입사해 기자, PD, 전산정보실장, 업무국장, 관재국장, 제주방송총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3년 KBS 공사 창립 기초작업을 맡아 방송이 라디오를 거쳐 TV로 꽃을 피울 무렵 현장을 누볐다. 1998년 퇴직 후에는 KBS 사우회 부회장, 감사를 지냈다. 2006년부터 원로방송인 모임인 사단법인 방우회(한국방송인 동우회) 이사로 재직 중이다.
 
  이장춘 방송인은 개인 블로그인 ‘춘하추동 방송(blog.daum.net/jc21th)’에 방송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13년간 밤낮으로 공을 들였더니 블로그 이용자가 누적 400만명을 돌파했다. 지난 7월 2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그의 자택 앞에서 그를 만났다.
 
  “KBS에 가장 오래 재직했고 모든 부서를 다 경험해 봤습니다. 기자, PD에서 광고영업까지 35년간 안 한 게 없어요. 저는 입사하던 첫날부터 방송을 했어요. 방송인력이 부족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일반적으로 KBS(Korean Broadcasting System)는 일제 강점기인 1927년 2월에 개국한 경성방송국에 근원한다. 경성방송국(JODK)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방송국이었다. 광복 후에는 ‘중앙방송국’으로 재출범했고 1973년 국영방송에서 공영방송이 됐으며 ‘한국방송공사’로 지금에 이른다.
 
  “당시 KBS 사옥의 위치를 근거로 ‘정동(貞洞) 시대’, 1957년 남산 기슭에 새로운 사옥을 세우며 시작된 ‘남산 시대’, 1973년 공사 창립 이후의 ‘여의도 시대’로 나눕니다. 제가 입사하던 시기는 ‘남산 시대’가 출범하던 때죠.
 
  지금 상암동에 사옥을 옮긴 MBC (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도 비슷한데 ‘인사동 시대’, ‘정동 시대’, ‘여의도 시대’라 부릅니다. ‘인사동 시대’가 라디오 방송을 개국하고 방송출력을 50kW로 증강, 전국 방송의 기반을 다진 시기라면 ‘정동 시대’는 TV 방송시대를 열면서 TV 3국 시대로 불리는 극심한 경쟁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1982년부터 시작된 ‘여의도 시대’는 전두환 정권의 방송 통폐합으로 MBC 공영방송 시대를 열면서 컬러 방송으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죠.”
 
  — 한국 방송의 시작을 언제로 봅니까. 일제 강점기 시절의 방송 역사를 지우려는 경향이 있나요.
 
  “한국인이 한국인의 손으로 방송역사를 만든 기점이 어디냐가 논란이 됐지만 지금은 일제 때 방송도 우리 방송으로 학계에서 인정하고 있어요.
 
  일제 강점기 경성방송국은 국영방송이 아니라 사단법인의 형태였어요. 청취료로 운영되다 보니 청취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당시 조선 사람이 방송을 안 들으면 청취료를 받을 수 없으니 우리말 방송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비율도 점점 높아졌어요. 처음엔 일본어 대 우리말 비율이 75대25였다가 34대66으로 바뀌었어요. 그래도 일본어 방송을 안 들으니까 일본어 방송 섞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죠.
 
  우리 땅에 한국인 방송인들이 우리말로 방송하면서 우리 청취자들이 들었는데 한국 방송이 아니라고 할 순 없잖아요. 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서 이뤄진 모든 걸 일본 역사에 넘겨줘야 합니까?”
 
 
  아나운서가 방송국 간판이던 시절, 윤길구와 문제안
 
1940~60년대 라디오 방송 전성시대의 ‘방송의 별’이었던 윤길구. 1945년 무렵의 모습이다. 사진제공=이장춘
  이장춘 방송인은 먼저 아나운서 윤길구를 라디오 방송 전성시대의 ‘방송의 별’로 꼽았다. 1916년 해주 출생의 윤길구(尹吉九·1916~1966)는 1940년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방송의 중추적 인물이자 아나운서의 대명사로 꼽힌다. “아나운서가 방송국의 간판이던 시절, 뉴스·논평·스포츠·중계방송 등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이 방송인의 말이다.
 
  “윤길구는 1943년 방송국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해방이 되어 일시에 모든 방송이 우리 손으로 넘어오자, 이때부터 그는 방송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당시 방송국의 상황을 글로 남기기도 했어요.”
 
  다음은 윤길구가 남긴 경성방송국 최후의 모습이다.
 
  〈… 일본인 아나운서 등정(藤井)은 낡아빠진 긴 칼에 기름을 바르며 “이제 쓸 때가 올 것 같다”고 혼잣말. 그는 소위 대본영 발표의 거짓 전황이 오기만 하면 “이기고 말해, 이기고 말이야.”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당시 일본어 방송과장 대사(大飼)는 “너도 일본인이냐” 하고 꾸짖었는데 그것은 상사로서의 말이기보다 감정의 화살이었다.
 
  그러나 등정은 “일본인이든, 아니든 간에 일본이 손을 들게 된 게 아니냐”고 대들곤 했다.
 
  마침내 8·15가 되고 나는 당시 직업 탓인지 일본 천황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당시 한국어 방송과장이던 이혜구(李惠求)씨는 “일본인은 우리의 손님이 됐으니 한민족의 금도와 관용을 보이자”는 말을 강조했다. 이 말을 할 때 그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힘찼었다.
 
  그래서 등정의 칼은 쓸모가 없게 됐다. 그는 해방 후 난동에 대비코자 칼을 매만졌던 것이다. 그는 해방 전 일본인에게만 주는 특배품인 담배를 나에게 곧잘 대주곤 했는데 해방이 되자 “이제 담배는 네가 대라”기에 내가 대 주었다.
 
  일본인들은 9월까지 머물다 갔으나 아나운서 나카무라만은 군정청 요청에 의해 그해 12월 초까지 머물렀다. 그가 하는 일본어 방송은 뉴스에 한했는데 나는 그 번역을 구술로 해 주곤 했다. 내가 “일본 천황 히로히또는…” 하면 그는 “하이” 하고 원고에 적고는 방송을 할 때는 “천황폐하께옵서는…” 하는 것이었다. …〉
 
1950년대 후반 이승만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있는 문제안 기자. ‘방송기자 1호’로 알려져 있다.
  이 방송인은 윤길구의 방송국 입사 동기인 ‘방송기자 1호’ 문제안(文濟安·1920~2012)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 박사가 처음 고국 땅을 밟았고 이튿날 KBS 전파를 통해 환국소식이 전해졌지요.
 
  그해 10월 17일 오전 11시30분 방송국 제3스튜디오. 3평도 못 되는 작은 방송실에서 윤용로 아나운서가 ‘본 방송국 문제안 기자가 지금 방송실에 뛰어 들어와 중대 기사를 쓰고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하면서 신나는 행진곡을 틀었습니다. 그 옆에 문제안은 이날 오전 10시에 중앙청 회의실에서 국내 기자단과 첫 회견을 한 이승만 박사 환국 기자회견 기사를 쓰고 있었던 거죠.
 
  첫 장을 다 쓰고 윤용로 아나운서는 더 참을 수 없어 첫 장을 낚아채다시피 해서 방송을 하고는 다음을 기다릴 수 없어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되풀이해서 읽었죠.
 
  그 사이 문제안은 둘째 장을 쓰고, 윤용로 아나운서가 다시 첫 장과 둘째 장을 처음부터 반복해서 읽는 사이 셋째 장을 쓰는, 그야말로 숨가쁜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훗날 문제안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었죠. ‘이 사건이야말로 내 일생 최고의 시간이었다’고요.”
 
 
  박정희 집권 18년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KBS
 
육영수 여사와 박종세 아나운서.
  박정희 대통령 시작은 1961년 5·16 쿠데타, 마지막은 1979년 10·26이지만 그 시작과 끝이 모두 KBS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 이장춘 방송인의 주장이다.
 
  “KBS 박종세(朴鍾世·1935~) 아나운서의 회고를 통해 5·16의 시작이 처음 알려졌어요. 전날 야구 중계방송을 마치고 숙직 중이었던 박종세는 이튿날 새벽 일련의 군인들을 만났고 그중에 ‘박종세 아나운서입니까. 나 박정희라고 하오’라고 악수를 청하는 박정희 장군과 조우하게 됩니다. 박 장군은 ‘오전 5시 정각에 이것을 방송해 줘야겠어’라면서 전단 한 장을 내밀었는데 전단에는 ‘친해하는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로 시작되는 혁명공약이 적혀 있었다고 해요.
 
  박종세 아나운서 말로는 ‘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설득하던 박정희 모습이 진지했고 말에는 조리가 있었다’는 겁니다.
 
  결국 새벽 5시, 5·16은 7호 스튜디오로 불리는 작은 방송실에서 박정희 장군이 꼿꼿이 서서 방송 장면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10·26이 일어나던 1979년 그날의 마지막 행사가 KBS 당진 송신소 준공식이라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KBS 당진 송신소는 대북방송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가 1급 보안성 시설이었다. 이장춘 방송인의 말이다.
 
  “그해 10월 26일 오전 11시에 있었던 삽교천 행사는 널리 알려진 행사이고 그날 12시에 있었던 KBS 당진 송신소 행사는 잘 모르는 얘기입니다.
 
  지금도 당진 송신소에는 박정희 최후의 일터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 기념비는 그가 세상을 뜨신 지 6개월이 되던 날 맏딸 박근혜와 최세경 KBS 사장을 비롯한 몇 분의 임직원이 참여한 가운데 제막식이 있었어요.”
 
  현 외교부 강경화 장관의 아버지가 KBS 아나운서 강찬선(康贊宣·?~1998)이다. 강찬선은 1947년 아나운서가 되어 1980년대까지 방송에서, 그리고 영화관(대한뉴스)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북한의 평양방송에서 아나운서 생활 시작해 1·4후퇴 때 부산에서 피란살이 도중 아나운서 공개모집에 합격했다. 1951년 KBS 아나운서가 되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장춘의 얘기다.
 
  “강찬선 아나운서는 장기범·강익수 아나운서에 이어 3번째로 1964년 미국의소리방송(VOA) 아나운서로 공식 파견됐는데 딸 강경화(장관)가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갔어요. 그때가 1964년 10월입니다. 강찬선은 한국 아나운서 클럽을 창설, 제1대 회장을 지냈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강찬선 아나운서의 ‘논설’ 방송을 늘 들었다는 얘기가 있지요. 한번은 박통이 직접 지명해 강찬선에게 표창을 한다고 청와대로 초청한 일이 있었는데 프로그램 집필자나 담당자들은 도외시하고 낭독자에게만 관심을 갖는다고 불만 섞인 소리가 들렸어요.”
 
 
  최불암·김민자, 김소원, 강홍식·전옥, 최무룡·강효실, 조부성
 
1956년 12월 이 땅에 최초로 방송된 멜로드라마 〈청실홍실〉의 방송 녹화 모습.
  배우 최불암(崔佛岩·1940~)은 1940년 6월 15일 인천에서 태어나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했다. 1965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활동 중 이듬해 오지명과 함께 KBS에 특채됐다. “국립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7국에서 최불암을 찾아와 TV출연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 방송인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텔레비전의 〈실화극장〉, 라디오의 대북방송 등 몇 개의 프로그램을 제작비를 직접 투입해 KBS와 공동으로 제작, 방송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불암은 이 프로 출연을 계기로 오지명과 함께 특채된 것이다. 그의 말이다.
 
  “최불암은 〈실화극장〉 〈수양대군〉 〈행복이란〉 등 KBS가 어렵게 제작·방송한 초기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연기력을 발휘했어요. 1969년 MBC가 개국하면서 MBC 〈새 엄마〉 등의 프로에 출연했고 1971년부터 〈수사반장〉의 ‘박 반장’ 역을 맡아 배우로서 꽃을 피웠죠.
 
  최불암은 KBS 탤런트 6기와 비슷하게 입사했는데 탤런트 선배인 3기 김민자와 만나 결혼했어요. 김민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우 김소원(김연임)의 친동생입니다.”
 
  방송사가 KBS 하나밖에 없던 시절, 1기 성우로 선발(1954년)되어 1956년 12월 이 땅에 최초로 방송된 멜로드라마 〈청실홍실〉의 주인공을 맡았던 이가 성우 김소원(金素媛·1935~)이다.
 
  “김소원은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라디오 방송의 꽃으로, 또 영화배우의 더빙 목소리로 어린이부터 노인 목소리까지 들려주며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던 연기인이었어요. KBS 아나운서 출신이자 대한민국 조형미술의 선구자 최만린(崔滿麟)과 부부 사이입니다.
 
  주간 주말 연속극인 〈청실홍실〉이 방송되기 전까지 멜로드라마나 연속극은 없었어요. 어린이극, 사극, 계몽극, 외국 번역극이 대부분이었고 그것도 대개 단막극 위주였죠.”
 
  남녀 사랑 이야기, 삼각관계에 얽힌 애증을 다룬 멜로드라마는 〈청실홍실〉이 근원이다. 당시 한 주일을 기다리는 게 지루하다는 전화가 빗발쳤고 송민도가 부른 주제가로 청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중 영화로도 제작됐다.
 
  “〈청실홍실〉이 7개월간 30회를 이어 가면서 성공을 거둔 작가 조남사((趙南史·1923~1996)는 1957년 10월 1일부터 일일연속극으로 편성된 첫 프로그램인 〈산너머 바다건너〉를 집필하기도 했어요.”
 
  이 〈산너머 바다건너〉의 담당 프로듀서는 그해 새로 입사한 조부성이었다. 1958년 3월 15일까지 78회가 방송됐는데 당시 스타로 발돋움하던 최무룡이 출연했다.
 
  “최무룡을 언급하기 앞서 1920년대부터 널리 알려진 가수이자 연극, 영화배우였던 강홍식과 전옥을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강홍식·전옥 부부는 강효실, 강효선, 강효제를 낳았습니다.
 
  전옥은 이후 영화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방송국 성우이자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로 커 나가던 최무룡과 함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어요.”
 
  이 방송인에 따르면 최무룡은 전옥이 제작한 영화에 전옥의 상대 주역으로 출연하는 등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됐고 마침내 전옥의 사위가 됐다고 한다. 최무룡·강효실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배우 최민수다.
 
  한편, 최무룡을 스타로 발돋움하게 만든 〈산너머 바다건너〉의 프로듀서는 PD 조부성(趙富盛)이다. 그는 라디오 방송시대에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모든 프로그램을, 또 모든 업무를 담당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업무가 없었다. 1950~60년대 어린이 공개방송 〈무엇일까요〉 〈누가누가 잘하나〉의 연출을 맡았고 스튜디오 제작, 공개방송 등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는 PD로 정평이 났었다고 한다. 이장춘씨의 말이다.
 
  “1930년생으로 부산 피란 시절,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를 지냈고 신문사 기자를 했어요. 서울로 돌아와 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영어, 음악을 가르쳤는데 영어에 능통했고 뛰어난 음악 실력을 지녔어요.
 
  이후 MBC, 동아방송으로 이직했다가 1980년 방송 통폐합으로 KBS로 돌아왔어요. 동아방송의 개국 프로이자 대표 프로그램으로 정착한 〈유쾌한 응접실〉은 1980년 막을 내릴 때까지 전영우 아나운서 실장 사회로 계속됐지요.”
 
 
  한국 방송의 개척기, 아나운서의 전설들…
 
한국 여성 아나운서의 전설로 꼽히는 이옥경(왼쪽)과 강영숙 아나운서.
  한국 방송사에 노창성·이옥경 가족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본명 노명자)는 두 사람의 딸이다.
 
  “1924년 한국인 최초의 방송인인 노창성(盧昌成·?~1955)은 경성방송국이 설립될 때는 방송기술자였지만 우리말 전담방송을 하던 1932년에는 방송경영의 최고 책임자(사업부장)가 됐고 1938년 함흥방송국이 문을 열 때는 한국인 최초의 방송국장이 됐던 인물입니다.”
 
  노창성은 ‘항일(抗日)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뒤 해방된 조국에서 서울 중앙방송국장이 됐다.
 
  KBS 아나운서실에 걸려 있는 아나운서 족보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옥경(李玉慶) 아나운서가 노창성의 아내다. 이 방송인은 “이옥경은 1926년 7월부터 시험방송 시절 아나운서가 되어 방송전파에 목소리를 실었고 이듬해 2월 16일 경성방송국 개국식 사회를 보아 우리 방송사에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했다.
 
  이옥경과 함께 여성 아나운서로 호기수(扈琪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한국 방송역사에서 여성 아나운서 호기수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 방송국의 홍일점 아나운서도 호기수였다”고 했다.
 
  “머리를 삼단처럼 하고 선녀처럼 목소리가 아름다웠던 호기수는 방송을 그렇게나 잘했다고 합니다. 1950~70년대에 명성을 날리던 대표적인 여자 아나운서가 강영숙(姜映淑)이었는데 그에게 ‘선배 여자 아나운서 중에서 머리에 금방 떠오르는 분이 누굽니까’ 하고 묻자 바로 이옥경, 호기수를 떠올렸어요.
 
  흔히 사람들은 이옥경·호기수·강영숙 등 3인을 한국 여성 아나운서의 대표 3인방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1932년 서울생인 강영숙은 KBS가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고 자리가 잡히면서 모집한 1954년 아나운서에 응시하면서 데뷔했다.
 
  “강영숙은 어린이 공개방송에선 간지러울 정도의 따스하고 달콤함을, 대북방송이나 뉴스해설에서는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의 차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려주었죠.”
 
임택근 아나운서.
  1950~70년대에 방송을 아는 이들은 임택근·전영우·이광재·박종세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뇌리에 생생할 것이다. 4명 모두 KBS에서 방송을 시작했으나 1960년대 이후 민영방송사가 출현하면서 각 방송사의 대표 아나운서로 자리 잡았다. 이들이 아나운서 전성시대를 이끈 인물이다.
 
  이장춘 방송인은 “가수 임재범과 배우 손지창의 부친인 KBS 임택근(任宅根) 아나운서를 아나운서 역사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고 했다.
 
  “1961년 12월 31일 TV 개국 방송의 아나운서가 임택근이었습니다. 그는 뉴스, 스포츠, 오락, MC 등 만능이었어요. 말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했냐면 차를 타고 최대한의 속도로 달리면서도 간판을 다 읽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1963년 입사했을 때 임택근은 아나운서 실장이었어요.”
 
  이 방송인은 “임택근이 1964년 4월 MBC로 이직했는데 당시 MBC는 설립자 김지태가 구속되고 주인이 바뀌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임택근을 데려갔고 그 덕에 어렵던 MBC가 살았다”고 했다.
 
  “임택근이 떠난 KBS는 이광재(李光宰)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 시절 MBC 임택근과 KBS 이광재의 불꽃 튀는 경쟁이 있었죠. 이광재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알아주었어요. 이광재가 스포츠 중계할 때면 라디오점이나 다방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전국 노래자랑〉과 송해
 
원로 방송인 송해는 KBS 〈전국 노래자랑〉으로 전국 시청자와 하나가 되어 큰 사랑을 받았다.
  매주 일요일, 한 손을 높이 들어 “전국 노래자랑!” 하고 외치면서 흥겨운 가운데 전국의 시청자와 하나 되는 장을 이끌어 간다.
 
  처음엔 라디오 방송으로 진행되다가 TV 방송과 동시 방송으로 하다 잠시 중단된 뒤 1980년 11월 11일부터 KBS TV에서 그 맥을 이어 온 〈전국 노래자랑〉의 사회자가 송해(宋海·1927~·본명 宋福熙)다.
 
  송해는 1927년 황해도 재령 태생이다. 1950년 황해도 해주예술학교 성악과를 나와 북한에서 국립극단 단원이 되어 북한 전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1·4 후퇴 때 월남해 3년 8개월 동안 군대생활을 하면서 군 예대에서 활동했다.
 
  “1960년 KBS 라디오 〈샘터〉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방송과 인연을 맺은 송해는 동아방송 교통프로인 〈나는 모범운전사〉를 오랫동안 진행했고 67년 국군방송 〈위문열차〉 사회를 맡기도 했죠.
 
  1976년에는 MBC 라디오 〈코미디쇼〉 DJ를 맡는 등 여러 방송국의 코미디나 공개방송 사회를 맡았었죠. 제가 송해를 처음 만난 것은 1966년 KBS 춘천방송국 프로듀서로 있을 때로 그때 만난 송해는 갓 40세였어요. 체구도 작고 머리도 스포츠형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체구도 커지고 머리도 기르시고 목소리도 더 다정다감해졌어요.”
 
  이 방송인은 자신의 블로그 〈춘하추동 방송〉에 송해가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글을 올렸다.
 
  〈… 솔직히 그때 이념이나 분단 등을 잘 몰랐다. 예술이 좋았고 평생 그 일을 하고 싶었다. 전쟁이 터졌고 동네는 아수라장이 됐다. 낮에는 쌕쌕이가 폭격, 국군과 유엔군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간 이후에도 밤에는 구월산에 은신해 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꽹과리를 치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았다. 12월 7일쯤이었나. 쌕쌕이가 기승을 부리던 날 우리는 또 집을 나섰다. “엄마 나 며칠 다녀올게.”
 
  누이동생이 마루 끝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 서서 “조심해라”고만 하셨다. 예닐곱 번 그 짓(피란)을 했으니 어머니도 금방 돌아올 거라 믿었을 게다. 짧은 당부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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