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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근대무용을 개척한 춤꾼 조택원 후손들

“춤은 ‘생각하는 춤’이어야… 무용(舞踊) 대신 무상(舞想)으로 써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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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이 고향, 관리·무장(武將) 집안의 3대 독자, 장인은 초대 변호사협회장
⊙ “연습생 시절, 최승희가 그이(조택원)에게 밥 퍼줄 때 ‘눌은밥’만 줬대요”
⊙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화로 14년간 귀국 못 해 미국·일본·유럽 떠돌아
⊙ 1960년 4·19혁명이 나자 귀국… 예술인 중 1호로 금관문화훈장 받아
⊙ 창작무용 〈만종〉 〈가사호접〉 〈신노심불로〉 〈학〉 등 현재 전승 중
조택원의 아내 김문숙(오른쪽)과 차녀 조병현.
  월북 무용가 최승희(崔承喜·1911~1969)와 함께 조택원(趙澤元·1907~1976)은 한국의 근대무용을 개척한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일본의 근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1886~1962)의 제자로 당대 신무용(모던발레, 전위무용)의 흐름을 식민지 한국에 접목시켰다. 학춤이나 승무 같은 전통춤을 재구(再構)한 이도 조택원이다.
 
  그러나 단순한 재구나 전승이 아닌 ‘창작’이라는 점에서 한국무용사에 그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무용이 그저 기생·광대의 전유물이 아님을 일반인에 각인시킨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주요 작품으로 〈만종〉 〈가사호접〉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 〈학〉 〈부여회상곡〉 〈춘향전〉 등이 있다. 모두 그의 몸과 머리에서 나온 창작물이다.
 
  이 중에서 〈가사호접(袈娑胡蝶)〉(1933년 초연)은 김준영(金駿泳·1907~1961·‘홍도야 우지 마라’를 만든 대중음악 작곡가) 작곡의 오리지널 음악 위에 춤을 창작한 국내 최초의 무용 작품으로 꼽힌다. 원래 제목은 〈승무의 인상〉이었으나 시인 정지용이 〈가사호접〉이란 이름으로 고쳐 주었다. 호접은 《장자》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나비의 꿈)’에서 유래한 말로 승려가 입는 법의(가사)를 나비에 비유했다.
 
  조택원의 무용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 때는 창씨개명을 거부해 공격을 받았고 광복 후에는 친일 행적이 도마에 올랐다. 이승만 정권과 불목해 14년간(1947~1960년) 고국을 밟지 못한 채 해외로 떠돌아야 했다. 5·16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야 오랜 유랑생활을 접을 수 있었다.
 
  귀국 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고 예술인 중에서 1호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1976년 69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조택원은 우리나라 초대 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최진(崔鎭·1876~?)의 차녀인 최옥진(崔玉振)과 결혼해 2녀를 낳았다. 장녀 조병안(趙炳安·85)과 차녀 조병현(趙炳玄·83)은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조병안은 마산의료원장을 지낸 오중근(吳重根)과 결혼해 쌍둥이 2녀를 낳았다. 첼로(오요환)와 바이올린(오조환)을 전공했다. 조병현은 영화 조명감독으로 대종상 수상자인 박진수(朴振洙)와 결혼, 2남 1녀(朴元·朴仁·朴淑)를 낳았다.
 
  그의 장인인 최진은 근대적 의미의 법조인 1세대다. 중추원부찬의(1906년), 한성재판소 판사(1907년)를 역임했고 1935년 최초로 결성된 조선인변화사직원(협회) 회장에 선출됐다.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를 변호한 일이 있으며 1927년 조선공산당 사건 때도 변호를 맡았다. 6·25 당시 납북됐으며 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 조택원이 어느 여성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나 정혼(定婚)관계는 아니라고 한다. 이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들 조병문(趙炳文·1929~?)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광복 직후 언론사 기자로 재직했으나 6·25 때 행방불명됐다. 조씨 집안에 따르면 북한에서 결혼, 해외 주재 북한대사로 근무했다고 전한다.
 
  조택원은 최옥진과 헤어지고 당대 여배우인 김소영(金素英·1914~1989)과 결혼했다. 무성 영화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전 남편은 좌익 계열 문학이론가였던 추민(秋民)이었다. 조택원·김소영 사이엔 자식이 없다.
 
  14년간의 해외유랑 끝에 돌아온 조택원은 21세 연하인 무용가 김문숙(金文淑·91)과 1962년 결혼했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무용 부문)인 김문숙은 집안의 반대와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조택원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두 사람 사이에 조철호(趙蜇昊·55)가 있다. 조철호는 이순임(李順任)과 결혼해 2남(趙暎守·趙榮吾)을 낳았다.
 
  기자는 지난 2월 말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에서 고인의 부인 김문숙 여사와 차녀 조병현씨를 만났다.
 
 
  무패(無敗) 테니스 선수에서 춤꾼으로
 
1952년 무렵 조택원이 소고춤을 추고 있다.
  조택원이 태어난 곳은 함흥. 아버지 조종완(趙鐘琓·육군무관학교 1기생)과 어머니 김금오(金琴梧)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조병교(趙秉敎)는 함흥군수, 함경도 부지사(한일병탄 이후)를 지냈다. 아버지는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중국으로 망명했다. 조택원의 어린 시절 일화가 전해진다.
 
  조부(조병교)가 함경도 부지사 격인 ‘칙임 참여관’으로 재직할 때 서너 살밖에 안 되는 손자 조택원을 데리고 어느 군수의 잔칫집에 갔다. 김문숙 여사의 말이다.
 
  “그이(조택원)가 군수의 손을 잡고 넓은 대청마루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는데 다른 춤꾼들이 모두 눈이 둥그레지면서 물러섰다는 겁니다. 잔칫집 손님들의 박수갈채도 멎을 줄 몰랐고. 함흥 지역은 당시 문물교류가 왕성하고 문화예술에 개방적인 분들이 많았어요. 근대화 과정에서 나온 많은 예술인이 함흥 출신입니다. 그이의 자유로운 예술혼에도 영향을 주었을 거야.”
 
  그날의 기억이 조택원에게 무대 생활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조부가 명필이래. 고을 현판을 그의 손으로 쓰셨대. 함흥~원산 간 기차가 당시 개통되면서 생긴 역(驛)인 함흥역 현판도 조부가 썼어. 집안 핏줄이 명필이야. 그이도 영문이나 한문, 일본 글씨를 기가 막히게 써요.”(김문숙)
 
  “아버지는 당신 명함을 직접 새겼어요. 학교 다닐 때 ‘가정환경 조사서’를 써 가면 선생님 10분 중 10분이 (저를) 따로 불러요. ‘이 글, 누가 썼느냐’고. 아버지가 쓰셨다고 하면 ‘기가 맥히다’ 그러셨어.”(조병현)
 
  조택원은 1925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4월에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다. 테니스 선수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리는 대회에 나가 무패(無敗)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차녀 조병현의 말이다.
 
  “진짜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못하는 게 없으셨어요. 테니스 선수로 휘문을 대표해 일본대회까지 갔잖아요. 억지로 한 적이 없고 요령껏 머리로 했대요. 좀 특별해요.”
 
  이듬해 1926년 상업은행에서 테니스 선수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정식 실업선수가 된 것이다. 조택원은 이후 18개월 동안 은행 실업단 리그전에서 4번이나 우승했다고 한다.
 
  1927년 10월 일생을 결정짓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신무용을 대표하는 이시이 바쿠가 한성(서울)에서 공연을 한 것이다. 김문숙의 말이다.
 
  “이시이의 두 번째 한국 공연이었는데 그이는 그 공연을 보고 빠져버린 거지.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27년부터 32년까지 그의 문하생이 됐어. 일본에 가니 1년 먼저 최승희가 와 있었다고 해요.”
 
  ― 조택원 선생은 선배 최승희의 춤을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이시이 바쿠의 많은 제자 중 5명이 뛰어났는데 그중 최승희·조택원이 들었다고 해요. (최승희는) 춤에선 보기 드문 천재라고 평가했어요. 일본인 중에도 여자 무용수가 많았지만 최승희를 못 따라갔다고 하고요. 테크닉에서 1등이고, 체격도 좋았어. 일본 여자들은 체구가 왜소하거든. 이시이바쿠무용연구소에서 함께 합숙할 때 최승희가 남자 무용수의 밥을 해줬는데 그이에게 눌은밥(누룽지)만 줬다고 해요. 한창 먹을 나이인데 섭섭했던 모양이야.”
 
  딸 조병현은 “그렇다고 라이벌 의식은 없었고 서로가 무용 발표회를 하면 초대권을 보내줬는데, 아버지의 초대권을 들고 (최승희 자택이 있던) 가회동에 전하러 가면 (최승희가) 나를 얼마나 반가워하고 예뻐했는데…”라고 기억했다.
 
 
  최승희와 조택원의 춤
 
중년의 조택원. 그는 “생각하는 무용을 해야 한다, 춤에도 사상(思想)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승희 춤과 조택원 춤의 차이점에 대해 김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두 분 모두 같은 스승에게 배워 한국 춤을 응용했는데 최승희는 부채춤이나 초립동이 같은 것을 응용했어요. 반면 조택원은 민속적인 것을 차용했다기보다 작품으로 창조했어요. 한성준(韓成俊·1875~1941·구한말 왕실과 민간·권번에서 행해지던 전통 춤을 체계화시킨 주인공)에게 학춤이나 승무를 배워 이를 모티브로 무대화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최승희는 예쁘게 추는 현대무용의 테크닉에다 한국적인 것을 넣고, 음악으로 (춤을) 받쳤지만 조택원은 달랐어요. 조곡(組曲) 〈춘향전〉만 하더라도 4가지 문학적 테마로 스토리를 각색해서 창조적으로 만들었지요. 제목만 고전적인 느낌이지 춤의 80% 이상은 현대적인 무용을 썼어요. 그게 다른 점입니다.
 
  최승희는 체격이 좋아서 여성미를 드러내며 에로틱하게 춤을 췄지만 조택원은 전혀 오락적인 춤은 안 췄어요. 예술적인 것만 했지.”
 
  또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택원은 민족의식이 강해 ‘무용’이란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무용(舞踊)의 용은 ‘뛸 용’ 자인데 발로 뛰는 것이거든. 그이는 그런 표현을 싫어했어요. 대신 ‘생각 상’ 자를 써서 무상(舞想)이라 불러야 된다는 거야. 왜냐? 생각하는 춤이어야 하거든. 그이는 모든 춤이 생각하는 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늘 그런 주장을 해왔어요.”
 
  딸 조병현이 말을 보탰다.
 
  “아버지는 ‘생각하는 무용을 해야 한다’ ‘재주 부리는 테크닉은 서커스가 더 잘한다’고 하셨어요. 춤에도 사상(思想)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무상, 무상….”
 
작품 〈부여회상곡〉에 출연한 조택원(가운데).
  조택원은 이시이의 신무용을 열심히 배워 1932년 귀국한다. 그리고 그해 6월 최옥진과 결혼한다. 장인(최진 변호사)이 부유해서인지 처가 소유의 2층집을 개조해 ‘조택원무용연구소’를 냈다. 연구소는 건평 50평 규모로 지금의 명동성당 부근(중구 저동)에 있었다. 조병현의 말이다.
 
  “어머니(최옥진)는 아버지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야. 대담하거나 지혜로운 여자가 아니면 그 남자를 거느릴 수 없어. 그래도 어머니는 그 시절, 일본에서 연극을 한 1세대 연극인이에요.
 
  어머니의 생모는 일본인인데 귀족 출신이에요. 영친왕과 혼사 이야기가 오갔는데 체형이 다산(多産)형이어서 안 된다고 했어. 그래서 (불임 판정을 받은) 이방자 여사가 뽑혔다고 해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처가 도움으로 예술 활동을 지원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외할아버지 생각은 달랐습니다. 보성전문학교에 다시 진학하길 바라셨죠. ‘무용 그만두고 법 공부나 하라’고 재촉했지요.
 
  한번은 아버지의 무용 관련 기사를 어머니가 보시고 외할아버지께 얘기하니 ‘도둑놈, 강도도 신문에 난다’며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고 해요.”
 
  ― 그래도 무용하는 사위가 좋아서 딸을 시집보낸 것 아닌가요.
 
  “물론 외할아버지가 첫눈에 반한 사위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용을 그만둘 줄 아셨던 거죠.”
 
  김문숙 여사도 “그이 말이 ‘장인께서 불란서로 유학을 보내준다’고 약속했는데 막상 결혼하니 ‘양행(洋行)’을 안 보내줬다고 했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한국의 전통춤을 생각하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베르사유의 궁전 앞 카페에서 사진을 찍었다. 1953년 7월 차녀 조병현에게 보낸 편지에 이 사진을 담았다.
  1936년 봄이 되자 조택원은 프랑스 유학을 결심한다. 《동아일보》를 찾아가 송진우 사장에게 도움을 청하니 흔쾌히 ‘도불(渡佛) 전국 공연’을 주최해 3000원 정도의 여비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첫 서울 공연을 끝내고 개성으로 가던 날, 신문이 정간되고 말았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 때문이었다. 복간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공연을 강행했다. 현해탄 건너 도쿄 공연도 가졌다. 김문숙의 말이다.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프랑스행 배편 삯이 400원쯤 하는데 200원이 모자랐다고 해. 출국날짜는 임박해 오고… 하루는 《동아일보》 도쿄지사장에게 연락이 왔는데 당시 경성방직 사장이던 김연수씨가 저녁을 산다는 거야. 그분이 나중 전경련 전신인 경제협의회 회장도 하시고 삼양사 명예회장을 지내신 분이에요. 저녁을 먹고 헤어질 때 (김연수가) 건강하게 다녀오라고 악수를 청하는데 손바닥 감촉이 이상한 걸 느꼈다고 해요. 200원, 지폐 두 장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1937년 11월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됐어요.”
 
  조택원의 프랑스행은 일본 무용계에서도 화제였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무용 유학을 떠난 이는 이시이 바쿠밖에 없었다.
 
  “1년 가까이 프랑스에 머물렀는데 많은 명사를 만나고 공연도 했어요. 그이의 회고에 따르면, 서양예술은 야성적이고 잔인해 보였다는 거야. 작품이 거의가 죽음으로 끝나는데 〈백조의 죽음〉 〈빈사의 백조〉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래.
 
  그때, 문득 조선의 가을 하늘 같은 맑게 트인 예술, 우리의 전통춤이 핏속에서 꿈틀거렸다고 해요. 그런 생각이 2년 후 도쿄에서 〈학(鶴)〉이라는 역사적인 공연으로 승화됐다는 겁니다.”
 
  그는 뜻밖에도 프랑스에서 그것도 서양 춤이 아닌 우리의 전통춤을 생각한 것이다.
 
  1938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조택원이 일본 교토로 ‘귀국 공연’을 갔다 왔더니 아내 최옥진이 집에 없었다. 두 딸을 스승인 이시이 바쿠에게 맡겨놓고 집을 나간 것이다. 그때가 딸 조병현이 네 살 되던 해였다. 그녀의 말이다.
 
  “아버지를 떠난 어머니는 일본에서 재혼을 하셨다고 해요. 저도 이후 만나지 못했어요. 언니(조병안)와 나는 이후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됐어요.
 
  서울 돈암동 집에 큰 홀이 있었는데 고려심포니 같은 음악 하는 분들이 다 와서 연습을 하곤 했어요. 낮에는 무용단이 오고, 저녁에는 연극 하는 분들이 와서 연습을 했어요. 나중 이북으로 간 문예봉 같은 배우들도 왔었고요.
 
  저도 어린 시절 무용을 했어요. 발레를 배웠는데 중2 때 늑막염에 걸려서 음악으로 방향을 돌렸지요. 원래는 이화여고에 입학하기로 했는데 아버지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시면서 계성학교(현 계성고등학교)로 보내셨어요. 신부·수녀가 계시니까 미더우셨던 모양이야. 그러고 우리를 맡기고 미국으로 가셨잖아요. 14년 동안….”
 
 
 
이승만과의 불화

 
조택원·김문숙 부부와 삼양사 김상홍 명예회장.
  ― 조택원 선생은 왜 14년간 해외에 있어야 했나요.
 
  아내 김문숙의 말이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미국으로 떠난 사연부터 알아야 해요.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대표였던 번즈 박사 댁(안국동에 있는 옛 식산은행장 댁)에서 위원들을 위한 파티가 열렸는데 춤을 춰달라는 요청을 받았대. 미국 측이 소련 측을 초대한 파티로 양쪽에서 7~8명씩 장성급이 모인 자리였는데 그이가 〈가사호접〉 〈춘향전〉을 공연했어요. 번즈 박사는 ‘미국에서 공연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고 이후 미국 공연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여권이 안 나오는 거야.”
 
  여권 발급이 안 된 이유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즈음 “조택원이 공산주의자로 분류됐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꼭 1년이 지난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의 활동이 다시 중단되자 미국의 하지 장군이 시티코프 이하 소련 측 위원들을 초대한 송별연이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조병현의 말이다.
 
  “아버지는 이날도 초대를 받아 춤을 췄는데 시티코프가 그 곰 같은 털투성이 뺨을 아버지의 얼굴에 비벼대며 ‘라바리시치 조(조 동무), 평양으로 갑시다. 아니면 나하고 같이 소련으로 가면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라고 했대요.
 
  그 광경을 하지 장군이 보고 있었대. 파티가 끝날 무렵, 하지 장군이 아버지에게 ‘내일 오전 10시에 사무실로 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년간을 끌던 여권이 나온 것이에요.”
 
  이후 조택원은 미국 각지를 돌며 순회공연을 가졌고 많은 재미교포를 만났다.
 
  다음은 1947년 10월 11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조택원의 도미(渡美) 기사다.
 
  〈…지난여름에 본사 주체로 ‘도미 고별 무용공연’을 한 무용가 조택원씨는 준비관계로 그동안 도미계획을 천연 중에 있던바, 마침내 11일에 인천을 출발하여 항로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조씨가 미국으로 가는 것은 무용을 통한 조선과 미국의 문화를 교류하려는 것으로 먼저 할리우드로 가서 공연계획을 하는 대로 뒤를 이어서 심상건, 김옥진, 임경희, 김선영, 박성옥, 심효진, 김소영 등 7씨가 이순복씨 인솔로 도미할 예정이며 이번에는 서정익씨가 매니저로 조씨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조택원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1949년 3·1절을 기념해 워싱턴 우드먼파크 호텔에서 리셉션이 열렸다. 버클리 부통령을 비롯해 하지 중장, 아널드 장군, 브라운 장군(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 대표) 등의 모습이 보였고 우리 측에서는 장면·조병옥·김활란 등이 참석했다고 한다. 당시는 초대 주미대사로 내정된 장면 박사가 아그레망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 자리에서 조택원과 버클리 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김문숙의 말이다.
 
  “버클리 부통령이 그이에게 ‘이승만 박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이렇게 답했다는 거예요. ‘(밥 대신) 빵 먹고 한국말 다 잊어버린 사람이 한국에 와서 얼마나 정치를 잘하겠느냐’고. 그 얘기를 들은 장면 박사가 ‘이제 한국엔 다 갔다. 이 이야기가 반드시 (이승만) 대통령 귀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대요.”
 
  딸 조병현도 거들었다.
 
  “‘독립지사 대부분이 옥살이를 몇 번이나 했는데 외국으로 피란 간 사람이 어떻게 국부가 되느냐’고도 하셨대요. 그 말을 어느 외교관이 대통령에게 일렀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아버지를 빨갱이로 몰았어요.”
 
  ― 이승만을 싫어한 직접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조병현의 계속된 말이다.
 
  “아마 미국에서 교포들 얘기를 들었나 봐. 당시 교포사회는 안창호 선생과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회’니 ‘동지회’니, ‘독립신문파’니 하며 갈라져 있었다고 해요. 그때 이 대통령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나 봐요. 또 아버지가 여운형, 김구와 가까웠거든. 그렇다고 두 사람 간 갈등이 있었던 적은 없어.”
 
  어쨌든 그 일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지 조택원은 귀국할 수 없게 됐다. 그것도 14년간.
 
 
  김문숙과의 우연한 재회 그리고 결혼
 
조택원은 문화예술인 중에서 1호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75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문화훈장 수상 축하공연에서 아내 김문숙과 함께.
  이후 조택원은 미국과 유럽, 일본 등지를 돌며 공연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60년 4·19가 터졌다. 조택원에겐 8·15와 더불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김문숙의 말이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주일이 안 돼 주일 대표부에서 졸업장만 한 종이를 보내왔어요. ‘임시여권’인 귀국허가증이었어요. 14년 만에 지긋지긋한 금족령이 풀린 것이지. 그해 5월 6일 조국의 흙냄새를 다시 맡게 됐어요.”
 
  ― 조택원 선생이랑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첫 만남은 1947년 무렵이야. 스승인 함귀봉(咸貴奉·월북) 선생의 연구소에서 그이를 처음 보았어요. 당시 아주 달변이고 판소리 같은 창(唱)도 잘하고 ‘오솔레미오’ 같은 이태리 가곡도 불렀어요.”
 
  그때 조택원이 김문숙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예술이란 무릇 창작을 해야 한다. 무용이라고 해서 몸의 동작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미술이나 음악은 물론이요 하다못해 조각품 하나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
 
  그 말이 무용에 갓 입문한 김문숙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960년 1월. 1959년 미국 NBC 초청으로 미국 공연을 다녀오는 귀국길이었다. 일본에 잠깐 들러 도시마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기로 일정이 잡혔다. 우연히 긴자(銀座)의 한 식당에서 조택원과 맞닥뜨리게 됐다. 김문숙은 가슴이 떨려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망설임 끝에 식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택원에게 “예전 함귀봉 선생의 연구소에서 뵈었다. 오늘 공연을 하는데 부디 오셔서 성장한 모습을 봐 달라”고 청한 것이다.
 
  그날 저녁 공연이 끝나고 그가 분장실로 찾아와 “자랑스럽다”고 칭찬했다. 이후 두 사람은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자연스런 만남을 가졌다.
 
  “언제부턴가 음악계에 나와 그이가 결혼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스스로 낸 소문이었어. 어느 날 예고없이 단출한 가방 하나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어요. 집안의 반대가 심했지만 스물한 살 나이 차를 극복하고 1962년 4월 결혼식을 올렸어요.”
 
  ― 살아보시니 조택원 선생은 어떤 분이시던가요.
 
  “감수성이 풍부하셔요. 눈물도 많고. 춘향이 옥에 갇히는 장면을 우리는 무덤덤하게 보잖아요. 그이는 울어요. 불쌍하다고. 또 웃는 얼굴이 천하의 일품이야. 사람을 녹여. 선천적으로 무대인이야. 무대에서 방긋 웃으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와요.”
 
  딸 조병현이 덧붙였다.
 
  “무대에서 손짓 하나만 해도 멋있었어요.”
 
  조택원은 경제적 능력은 없었으나 주위에 후원자가 많았다고 한다. 정재계에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가까웠던 이들로 한화그룹의 창업자인 김종희 회장, 정일권 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던 언론인 장기영,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삼양사 김연수 회장 등과 가깝게 교유했다. 김문숙 여사의 말이다.
 
  “이 사람은 지갑이 없어. 있으면 쓰고 없어도 태평이야. 돈을 세는 경우도 없어. 공연료를 받을 때도 신권이 아니면 받지 않아요. 돈을 그렇게 모르는 사람, 처음 봤어요.”
 
  조병현이 다시 보탰다.
 
  “어릴 때 심부름을 다녀와서 잔돈을 드리면 헌돈은 다 나한테 와요. 동전도 싫어했어요.”
 
 
 
영원한 춤꾼이자 로맨티스트

 
  조택원은 평소 술·담배를 하지 않았다. 테니스 선수 출신의 다부진 몸에다 어깨가 넓고 하체도 단단했다. 몸무게 70kg, 키 180cm 약간 못 미치는, 당시로는 건장한 체구였다. 연회에서도 칵테일 한잔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했으나 말년에 대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했다. 김문숙 여사의 말이다.
 
  “돌아가실 때 체중이 25kg으로 떨어졌어요. 위와 내장을 모두 잘라내셨으니까요. 메디컬센터(지금의 국립의료원)에 입원한 그이를 일본 친구들이 일본으로 데려가 암 수술을 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일흔 생일을 며칠 앞두고 떠나셨어요. 돌아가시던 날, 가곡 ‘오솔레미오’를 아침부터 불렀는데….”
 
  ― 선생의 작품 중에 어떤 작품을 좋아하세요.
 
  “〈만종〉도 좋아하지만 존경하는 작품은 〈가사호접〉이지요. 작품 내용이 속세를 동경한 스님이 심산유곡을 버리고 사바세계로 내려와. 그리고 가사(법의)를 내동댕이쳐요. 놀다 놀다 지쳐 쓰러지는데, 마지막 장면은 벗어던진 가사를 다시 끌어안고 끝나. 다시 불교에 귀의하려는지, 영원한 ‘굿바이’인지 (관객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뜻이야.”
 
  ― 조택원 선생의 속뜻은 무엇이었다고 보세요.
 
  “다시 귀의하는 것 같아요. 아니면(귀의하지 않으면) 왜 (벗어던진) 가사를 그리워해? 버리면 그만이지.”
 
  영원한 춤꾼이자 로맨티스트였던 조택원은 1976년 6월 8일 69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마치 벗어놓은 가사를 다시 입고 심산유곡으로 찾아가듯 세상을 떠났다.
 
  ― 선생의 작품들은 전승되고 있나요.
 
  “그럼요. 저의 미수(米壽) 기념공연 때 다 전수자를 정해줬어요. 〈만종〉 〈가사호접〉 〈신노심불로〉도 다 전승되고 있어요. 돈 받고 (전승자에게) 전통을 판 것이 아니라, 제가 시켜보고 잘 하면 거저 작품을 줬어요. 아마 그이도 좋아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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