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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Who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장 김원봉

영화의 단골 소재 의열단장 김원봉은 누구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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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테러리스트
⊙ 정당을 만들며 몰락의 길 걸어
⊙ 친일 경찰에 고문당한 뒤 월북
⊙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뒤 의문의 죽음
김원봉이 아내 박차정의 관 옆에 서 있다.
  최근 들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단장을 지냈던 김원봉(金元鳳·1898~1958)이다. 영화감독들이 그를 주목한 것은 베일에 싸인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원봉은 2015년 개봉된 영화 〈암살〉에 등장했으며 9월에 개봉된 영화 〈밀정(密偵)〉에도 나온다.
 
  김원봉 역을 맡은 배우들은 당대의 최고 스타들이다. 〈암살〉에서는 조승우, 〈밀정〉에서는 이병헌이 그로 변신했다. 김원봉의 생애를 살피기에 앞서 〈밀정〉이 무슨 내용을 다뤘는지를 살펴보자. 〈밀정〉은 역사상 실재했던 ‘황옥 경부 폭탄 사건(黃鈺 警部爆彈事件)’을 다뤘다. 사건은 1923년 벌어졌다.
 
 
  영화 〈밀정〉은 실제 있었던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이 소재
 
사진 왼쪽은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분한 김원봉, 오른쪽은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분한 김원봉이다.
  황옥은 일제시대 경기도 경찰부 경부로 재직, 의열단(義烈團)이 중국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제조한 폭탄을 국내에 들여오려고 할 때 협력했던 인물이다. 1923년 3월 7일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 등 3명은 일제에 협력한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권총 5자루와 폭탄 18개를 반입하려 했다.
 
  원래 이 계획은 1922년 가을 세워졌다고 한다. 의열단은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하나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과 김한이 계획을 짰고, 다른 하나는 고려공산당 장건상과 김시현이 주도하는 것이었는데, 두 가지 플랜 가운데 임시정부의 김한이 주도했던 계획이 먼저 실행에 옮겨지게 됐다.
 
  김상옥·안홍한이 국내로 잠입했고 폭탄 등 무기도 무사히 한만(韓滿) 국경 인근에 도착했다. 그런데 김한이 일제의 밀정이라는 정보가 의열단 본부에 전달되면서 계획이 중단됐다. 훗날 이 정보는 허위로 밝혀졌다. 이에 국내에 먼저 들어왔던 김상옥이 단독으로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을 벌이게 됐다.
 
  김상옥은 종로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일경(日警)과 세 시간에 걸친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됐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 호외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동대문경찰서 율전 경부보가 육혈포를 쏘며 선두로 들어가다가 김상옥의 육혈포에 맞아 넘어지매 김상옥은 여러 형사가 주저하는 틈에 다락 속에 있는 널빤지를 뚫고 나가서 세 집으로 쫓겨 다니며 세 시간 이상을 격렬히 싸웠으나 필경 수십 명 경관의 일제 사격으로 빗발 같은 탄환 속에 맞아 죽게 되니 김상옥은 이 중에 총을 쏘다가 옆집에 들어가 “나에게 이불을 좀 주시오, 이불을 주시면 그것을 쓰고 탄환을 좀 피하여 몇 명 더 쏘아 죽이고 죽을 터이니” 했으나, 주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대로 싸우다 죽는데, 총을 맞아 숨진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는 쏘는 시늉을 했다더라.’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하자 의열단은 곧바로 두 번째 계획을 실행했는데 그 책임자가 김시현이었다. 영화 〈밀정〉에서는 공유가 이 역을 맡았다. 김시현은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계기로 친해진 황옥을 끌어들였다. 황옥이 일제 경찰이지만 신뢰할 만하다고 여긴 이유가 있었다.
 
  1922년 김시현이 고려공산당에 입당하도록 도와주고 극동인민대표자대회 참석을 알선해 준 인물이 황옥이었기 때문이다. 김시현은 김원봉과 장건상에게 황옥의 합류를 건의했다. 김원봉은 직접 황옥을 만났고, 그가 경찰이기 때문에 거사(擧事)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고 한다.
 
  1923년 3월에 김시현과 황옥은 경성(京城)으로 잠입하고 폭탄도 무사히 반입됐다. 그런데 3월 15일 황옥을 비롯한 관련자 18인이 일경에 모두 체포됐고 도주했던 김시현도 대구에서 붙잡히고 만다. 의열단 내부의 밀정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경천동지할 일은 8월 7일 법정에서 벌어졌다.
 
  황옥이 “내가 의열단의 폭탄 반입을 도운 것은 의열단원들을 검거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한 것이다. 영화 〈밀정〉은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룬 것이다.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징역 10년 형을 받았지만 2년 뒤 석방됐고 1950년 6·25 때 북으로 납북되면서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열 가지 항목으로 정리해 본 김원봉의 삶
 
  다시 김원봉으로 돌아간다. 김원봉의 삶은 이렇게 열 가지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우리의 해외독립투사 가운데 가장 강력한 테러리즘을 구사했다.
 
  둘째, 그의 삶의 전성기는 20대로, 의열단과 함께한 시기였다.
 
  셋째, 그의 인생은 정당(政黨)을 구성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넷째, 그는 분명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물들어 있는 인사였다.
 
  다섯째, 그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조국 독립의 방편이었지 진정한 ‘빨갱이’는 아니었다는 반론의 여지는 있다.
 
  여섯째, 그를 몰락시킨 것은 중국공산당과 북한 김일성과 해방 후에도 여전히 위세를 떨친 일본 경찰 출신과 미군정이었다.
 
  일곱째, 그의 6·25 때 행적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조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김일성 일파의 구성원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덟째, 그의 사인(死因)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처형설-은퇴설-자살설이 있지만 처형설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아홉째, 김구 선생과 그는 라이벌 관계였지만 백범은 항상 그를 포용했다.
 
  열째, 그의 두 번에 걸친 사랑은 또 다른 소설 한 편이 될 만큼 극적이었다.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테러리스트답게 변신의 명수였다. 그 증거가 그가 사용했던 이름이다. 그는 김약산(金若山)·최림(崔林)·진국빈(陳國斌)·이충(李沖)·김세량(金世樑)·왕세덕(王世德)·암일(岩一)·왕석(王石)·운봉(雲峰)·김국빈(金國斌)·진충(陣沖)·김약삼(金若三) 같은 이름들을 번갈아 사용했다.
 
 
  13세 때 나라 빼앗기자 일제에 복수 다짐
 
  김원봉은 김해 김씨 참판공파 42세손으로 1898년 8월 13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김원봉의 할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이고 아버지는 30여 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중농(中農)이었다. 13세 때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김원봉은 친구 윤세주(尹世胄)와 함께 울면서 복수를 맹세했다고 한다.
 
  김원봉은 서당을 다니다 11세 때 밀양공립보통학교로 편입했는데 1911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때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박아버린 뒤 윤세주와 함께 학교를 자퇴했다. 이후 밀양 읍내 동화(同和)중학 2학년에 편입했다.
 
  보통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허용되지 않던 편입이 예외적으로 허락된 것은 그의 애국행동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밀양 동화중학에는 전홍표(全鴻杓)라는 유명한 교장이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늘 “우리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일본과의 투쟁을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 말에 힘입어 김원봉과 윤세주는 ‘연무단’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체력단련에 힘썼다. 뒷산을 오르내리고 한겨울에도 냉수욕을 하는가 하면 공을 가지고 모래밭을 뛰어다녔는데 이것은 머지않아 그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체력의 밑거름이 됐다.
 
  김원봉이 다니던 동화중학은 전홍표 교장의 발언과 연무단의 존재가 일제 경찰 정보망에 포착되면서 폐쇄됐다. 김원봉은 밀양의 표충사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사명대사의 충혼이 살아 있는 곳이며 고려시대 때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고모부 황상규에 감화받아 의열단 창설
 
김원봉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김원봉은 15세 때 서울 중앙학교 2학년에 편입했는데 곧 웅변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서울행은 고모부 황상규(黃尙奎)의 조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상규는 대한제국 시기 집성학교를 졸업한 후 창신학교와 밀양 고명학교를 설립했고 대한광복회를 창설해 의군부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1931년 사망했다. 김원봉이 훗날 의열단을 만든 것은 황상규에게서 받은 영향이 컸다고 한다.
 
  중앙학교에서 김원봉은 약산(若山)이란 호를 얻는데 이것은 ‘산처럼 우뚝하게 살라’는 뜻이다. 훗날 중국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한 친구 김두전은 물처럼 넓게 살라는 뜻에서 약수(若水), 이명건은 별처럼 되라고 여성(如星)이란 호를 얻는다.
 
  1916년 10월 김원봉은 중앙학교를 그만두고 중국 천진(天津)의 독일계 학교 덕화(德華)학당에 입학했다. 김원봉이 덕화학당에 입학한 이유는 군사학을 배워야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김원봉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진 독일을 흠모해 중국에 간 뒤 1917년에는 단동에서 ‘청산리 대첩’의 명장 김좌진 장군 등을 만나기도 했다. 덕화학당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폐쇄되고 말아 김원봉의 뜻은 좌절됐다.
 
  김원봉은 1918년 9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친구 김약수·이여성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 남경(南京) 금릉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려는 즈음,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저 유명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종전(終戰) 14개조 평화원칙, 우리가 흔히 민족자결주의로 알고 있는 윌슨 독트린이 선포됐다.
 
 
  파리 강화회의에 외교관 대신 자객 보내기도
 
  당시 중국에 있던 조선독립운동가들은 파리 강화회의에 외교 인재를 보내려 했는데 김원봉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국가의 존망과 민족의 사활이 걸린 큰 문제를 외국인에게 호소해 그들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할 일이 아니다’고 생각했다.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사람을 보내는데, 이는 조선의 현실을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 대표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그 역할을 김원봉은 4년 전 국내에서 무전여행을 할 때 부산에서 만난 김철성이란 인물에게 맡겼다. 김철성은 중국으로 건너와 오송동제대학에 다니며 김일(金一)이란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권총과 여권을 구해 파리로 간 김철성은 동료의 배신으로 거사에 실패했다.
 
  김원봉은 1920년 중국 길림의 신흥무관학교를 방문했다. 이 학교는 이시영(초대 건국부통령) 형제가 만주 유하현에 세운 학교로 그해 8월까지 2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곳이다. 거기서 김원봉은 무장투쟁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면서 ‘폭렬(爆烈)투쟁론’이라는 독립운동 노선을 마음속에 굳히고 만다.
 
  인근 봉천(奉天)에서 고모부 황상규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김원봉은 이종암·이성우·서상락·강세우·김옥·한봉인·한봉근·신철휴 등 여덟 동지를 규합해 의열단을 만들었다.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에 석 달간 다니는데 이것은 폭탄 제조법·총기류 취급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일본 외무대신 “김원봉 체포하면 경비 대겠다”
 
김원봉의 의열단과 함께 무장독립투쟁을 벌인 단체가 김구의 한인애국단이다.
이봉창 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는 장면을 연출한 동상이 효창공원에 서 있다.
  의열단은 머지않아 일제에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데 이런 일화가 있다. 일본 외무대신이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하고 소요 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하겠다고 공언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공산당은 1926년 소련(蘇聯)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에 제출한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중국에서 행하는) 민족혁명전선에서 직접 투쟁하는 단체는 의열단·신민부·통의부밖에 없다.”
 
  의열단이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좀도둑들이 의열단을 자처하는가 하면 경찰이 범인을 취조하다 “나는 의열단”이란 말에 놀라 도망쳤다는 신문 보도도 있다.
 
  의열단이 출범한 것은 1919년 11월 10일 중국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집에서였다. 그들은 구축왜노(驅逐倭奴·일본놈을 몰아내자), 광복조국, 타파계급, 평균지권(地權)을 내세우며, 정의의 의(義), 맹렬의 열(烈)을 따 의열단이라 이름을 지었다. 창단식에는 총 13명이 참가했는데 김원봉은 지도자로 지목됐다. 특이한 것은 지도자의 명칭이 맏형이라는 뜻인 의백(義伯)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의열단이 반(半) 혈연적인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국공산당의 발자취를 취재한 에드거 스노의 아내로 《아리랑》이란 책을 쓴 님 웨일스(본명 헬렌 포스터 스노)는 의열단원을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라 부르며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의열단원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다.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아주 깨끗하게 차려입었다.”
 
  일제 경찰이 의열단에 대해 남긴 보고서도 인상적이다. “그들은 우유부단한 것 같으나 성질이 극히 사납고도 치밀하여 오안부적(傲岸不敵·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음)의 기백을 가졌고 행동도 극히 경묘(輕妙)하여 신출귀몰한 특기를 가졌다.”
 
 
  조선총독부 폭파-밀양경찰서장 암살도 의열단이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가운데 줄 위에서 두 번째가 김원봉.
  김원봉은 중국 상해 영창리 190호에 살면서 단원들에게조차 현주소를 말하지 않았다.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영창리 외에 5개소를 전전하며 잠을 잤는데 항상 일요일 오후면 상해 교외에 있는 사격장에서 권총 사격연습을 했다. 의열단은 먼저 조선총독부 폭파를 시도했다.
 
  곽재기·이성유·신철휴·김수득·한봉근·윤세주 등 여섯 단원이 1920년 6월 16일 인사동의 한 중국집에 모였는데 이 사실이 밀고돼 경찰에 체포됐다. 《동아일보》에 ‘조선총독부를 파괴하려는 폭발탄대(爆發彈隊)의 대(大)검거’ ‘암살파괴의 대음모사건’이란 기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김원봉은 같은 해 9월 박재혁을 밀양으로 보냈다. 그는 폭탄 13개와 미제 육혈포(권총) 2정과 탄환 900발을 무사히 반입했다.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가 고서(古書) 수집에 남달리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아냈다.
 
  그는 9월 14일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변장한 뒤 서장 면회 요청을 했다. 서장이 솔깃해 허락하자 그 앞에 고서적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정신없이 고서적을 구경하는 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재혁은 그에게 의열단의 전단을 보이며 말했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는 것이다.” 박재혁은 그의 면전(面前)에 폭탄을 던졌다. 하시모토는 병원으로 옮기는 중 사망했다.
 
  의열단의 다음 목표는 조선총독부였다. 김원봉은 그 실행요원으로 김익상을 택했다. 김익상은 권총 두 자루를 들고 국내에 잠입하는 열차 안에서 곁에 앉은 일본 여자와 이야기도 나누고 아기를 안아주는 등 부부처럼 행세해 경관의 눈을 피했다.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한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등장했다. 청사에 들어서자마자 폭탄을 던진 뒤 김익상은 소란한 틈을 타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간 뒤 일본인으로 위장해 북경으로 탈출했다. 그가 돌아온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5일 만인 9월 17일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듬해 김익상이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될 때까지 대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이 누군지 몰랐다고 한다. 체포돼 20년 형을 받은 김익상은 이감 뒤 일본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그런데 출옥 며칠 뒤 한 일본 형사가 물어볼 것이 있다며 데리고 나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김원봉은 훗날 “20년이나 옥고를 치르고 나왔건만 왜놈들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던가 보오. 김익상 동지는 저 악독한 놈들 손에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 것만 같구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의열단 활동자금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대
 
  의열단의 활동자금은 어디서 마련한 것일까? 그 돈줄을 좇다 보면 김원봉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연관이 나타난다.
 
  1923년 4월 7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일본 외무성 차관에게 보고한 기밀 자료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의열단이 소련공산당에서 자금을 받아 투쟁자금으로 충당했으며 고려공산당 계열과 연계돼 있다. 김원봉은 광동 국민당 통보소에 머물며 소련 대표와 접촉을 시도했다.”
 
  소련공산당이란 세계적 공산주의 확산을 노리고 만든 ‘코민테른’을 말한다. 반면 김원봉은 임시정부와는 거리를 뒀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일정기간 조선을 열강의 위임통치로 두자는 안을 미국에 제안해 임정 요인들을 격분케 만든 일 때문이다. 당시 임정에선 이승만을 성토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는데 김원봉도 여기 서명했다.
 
  임정과의 관계에서 유명한 것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빚은 갈등인데 이것에서 양측의 입장 차이를 알 수 있다. 도산은 1920년 5월 김원봉에게 “폭탄을 기율 없이 단독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임정에 속해 실력을 키운 뒤 상당한 때에 크게 일어나는 것(大擧)이 어떠냐”고 권했다. 부분적인 모험행동을 피하고 적응 시기를 둔 뒤 대대적으로 행동하는 게 낫다는 충고였는데 김원봉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렇다고 김원봉과 도산이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일본 영사관은 김원봉이 북경에 있다는 걸 알고 추적했는데 상해로 도망갈 자금이 없어 곤궁에 처한 김원봉에게 안창호는 손수 돈을 들고 와 탈출을 도왔다.
 
  김원봉과 연관이 있는 고려공산당은 이동휘가 지도하는 단체였다. 이동휘는 1920년 5월 레닌에게서 200만 루블을 지원받기로 하고 1차로 40만 루블을 받는다. 이동휘는 이 돈을 임정이 아닌 고려공산당 운영자금으로 쓰다 물의를 빚어 1921년 1월 임정 국무총리를 사임한다.
 
  김원봉과 임정의 갈등은 이후 1922년 3월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해에 왔을 때도 빚어졌다. 의열단원 김익상·오성륜·이종암에게 처단 지시를 했지만 실패했는데 임정이 “우리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힐 뿐 아니라 “조선 독립은 과격주의로는 달성하기 어렵다”는 해명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의열단의 거사는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이 도쿄 황궁(皇宮) 앞 이중교(二重橋·니주바시)에서 세 발의 폭탄을 터트렸지만 모두 불발한 사건을 끝으로 소강상태에 빠진다. 김원봉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를 찾아 장개석의 입교(入校) 허락을 받고 그해 3월 8일 제4기생으로 입교한다.
 
 
  황포군관학교 입교해 인맥 쌓아
 
김원봉이 다녔던 황포군관학교 정문.
  김원봉은 1926년 10월 5일 졸업한 뒤 본교 교관으로 임명됐다. 계급은 국민혁명군 소위였다.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의 덕을 김원봉은 톡톡히 본다. 조선인으로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사람은 200명이나 된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다니면서 1926년 겨울 의열단을 혁명정당으로 전환하려 했다. 의열단의 거사가 충격효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는 반성 때문이었다. 김원봉은 대신 노동·농민단체의 반합법대중운동의 흥기(興起)를 보며 정당을 꿈꿨다.
 
  이래서 만든 것이 ‘조선민족혁명당’인데 김원봉은 ‘최고지도자’로 추대되고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 출신 11명이 중앙위원으로 선임됐다. 이때부터 김원봉의 삶은 중국 대륙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 간다. 즉 장개석의 북벌(北伐)→국공합작→국공합작 결렬→국민당 vs. 공산당 내전, 공산당 vs. 일본군 전투라는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원봉은 국민당에 협력하고 때론 공산당을 지원하지만 ‘어느 쪽과도 손을 잡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1930년 4월 북경에서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열어 제1기(1930년 4월부터 9월), 2기(1930년 10월부터 31년 2월)생을 배출하고 한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김원봉의 마지막 전성기는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설이었다. 장개석의 지원으로 설립된 이 군사조직은 의용군으로 출범하려 했지만 아무리 동맹이라도 자국에서 외국 군대가 창설되는 것을 꺼린 중국 때문에 의용대로 격하됐다. 그럼에도 중국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 조직 가운데 가장 최강의 군사조직이 만들어지자 긴장한 임시정부도 광복군 창군을 서두르게 된다.
 
 
  중국공산당이 병력 빼앗아가자 임시정부 합류
 
김원봉과 아내 박차정.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공산당이 조선의용대의 주력을 화북(華北) 지역으로 차출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만주(120만명)-화북(20만명)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하려면 조선의용대가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많은 조선의용대원도 국공내전보다 일본군과 싸우길 원했다.
 
  중국공산당은 김원봉의 합류는 거부했다. 결국 병력 없는 지휘관이 된 김원봉은 고심 끝에 1942년 4월 20일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를 결정했다. 임정은 그간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배척했지만 군사력이 필요했고, 반면 김원봉은 임정 말고는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김원봉은 임정에서 군무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이 됐지만 허울뿐인 것이었으며 실권은 없었다. 이후 광복이 돼 김원봉은 2진으로 1945년 12월 2일 귀국했다. 안타깝게도 광복 후 김원봉이 설 자리는 없었다. 김원봉은 여운형 등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군사부장으로 추대되지만 미군은 이 조직을 부인한다.
 
  김원봉은 이후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이 돼 반탁(反託)에서 찬탁(贊託)으로 입장을 바꾼다. 그 과정에서 전평이라는 노동조직이 일으킨 총파업을 배후에서 지도했다는 혐의로 1947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됐는데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 일제 때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라는 형사에게 사흘간 갖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것이다.
 
  김원봉은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며 사흘을 내리 울었다고 한다. 김원봉은 결국 남한을 떠나 1948년 4월 9일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그는 북행(北行)을 염려하는 이들에게 “북한이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매우 나쁘고 나를 위협해 살 수가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 국가검열상이 됐다. 군사행정을 전문적으로 관할하는 직책이었다. 6·25 이후인 1952년 5월 국가검열상에서 해임됐다가 두 달 후인 7월에 노동상이 되고 1958년 9월 9일 조소앙 선생 장례식 조문자 명단에 오른 것을 끝으로 이름이 사라진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국제간첩(장개석의 스파이)으로 몰려 숙청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김원봉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아내 박차정은 혁명동지로 1939년 일본군과 싸우다 중상을 입고 1944년 사망했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김원봉은 박차정의 피묻은 속적삼을 간직하다 밀양에 묻었다. 두 번째 아내는 자신의 비서로 있던 최동선으로 스무 살 차이가 났다. 여기서 중근·철근 두 아들이 태어나지만 이들 역시 북한으로 간 후 생사를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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