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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人열전

십팔기(十八技) 하는 출판인 신성대(辛成大) 동문선 대표

“무(武)의 전통이 제대로 이어졌다면, 우리 역사가 이렇게 구차하지는 않았을 것”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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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거정의 《동문선》도 모르고 출판사 이름 ‘동문선’으로 지어, ‘문예신서’ ‘현대신서’ 등
    인문 양서(良書) 700여 종 펴내
⊙ 해범 김광석 선생으로부터 십팔기 배워
⊙ 중국, 명(明) 척계광의 척법6기(技)가 포함된 십팔기에 관심
⊙ “정치인들이 뱉은 말 안 지키고, 말장난으로 넘어가는 것도 ‘무(武)의 문화’가 없기 때문”

신성대
1954년생. 한국해양대 전문학교 과정 졸업 /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사)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회장,
글로벌리더십아카데미 공동대표, 인사문화포럼 공동대표, 북중군묘지평화포럼 상임운영위원 /
저서: 《무덕(武德)-武의 문화, 武의 정신》 《품격경영-상위 1%를 위한 글로벌교섭문화백서》
(상·하) 출간
  본래 선비는 문무(文武)를 겸전한 엘리트를 뜻했다. 주(周)나라 때 선비들은 마땅히 육예(六藝)를 익혀야 했다. 육예란 예(禮)·악(樂·음악)·사(射·궁술)·어(御·마술)·서(書·서도)·수(數·수학) 등 여섯 가지를 말한다. 이 중에서 사(궁술)와 어(마술)는 무(武)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문(文)을 하는 사람만을 선비라고 칭하게 되었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의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여기 문과 무의 가치를 한 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도서출판 동문선(東文選)의 신성대(辛成大·62)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다. 700여 종이 넘는 양서를 내온 신 대표는 십팔기(十八技)를 하는 무예인이기도 하다. 글로벌리더십아카데미를 만들어 올바른 글로벌 매너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다.
 
 
  뱃사람, 출판사를 차리다
 
한국해양대 시절의 신성대 대표. 출판사를 차리기 전 7년간 배를 탔다.
  ― 문의 전통이 있는 집안이었나?
 
  “그런 거 없다. 아버지는 6·25상이군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거지가 부러울 정도였다. 거지는 빌어먹을 수라도 있지…. 중학교 시절부터는 굶지 않았다. 학생이지만 신문배달, 서울 신림동 목장에서 소치기 등을 했다.”
 
  ― 젊었을 때 배를 탔다고 들었다. 배는 어떻게 타게 됐나?
 
  “김석원 장군이 세운 성남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사(陸士)로 진학하려 했다. 키가 0.5cm 모자라 떨어졌다. 그래서 돈이 안 드는 한국해양대 전문학교 과정(2년제)에 진학했다.
 
  1977년 졸업과 함께 기관사가 됐다. 첫 봉급이 24만원이었다. 삼성 대졸 초임이 10만원, 한국IBM 초임이 11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24만원이면 대기업 부장급 월급이었다.”
 
  ― 어떤 배를 탔나?
 
  “상선, 화물선, 유조선, 벌크선, LPG운반선 등 안 타 본 배가 없었다. 장관이나 국회의원 아들도 해외에 나가는 게 쉽지 않던 시절에 지구를 네댓 바퀴 돌았다.”
 
  ― 출판업은 어떻게 하게 됐나?
 
  “7년쯤 배를 타고 나니 육지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이 출판사를 하면 돈이 된다고 했다. 이외수 등 유명한 작가들을 잘 안다고 했다. 어차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인생이라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뛰어들었다.”
 
  ― 책을 좋아했나?
 
  “중학교 시절 학교 도서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군협지》 《비호》 《흑룡전》 같은 무협지들을 많이 읽었다.”
 
  출판사 차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는 출판사 등록제였다. 권위주의 정권은 신규 출판사 등록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기존 출판사의 등록증을 사야 했다.
 
  “신문에 광고를 내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님이 하던 ‘서낭당’ 출판사의 등록증을 사들였다. 출판이나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심 선생님을 자주 귀찮게 했다. 심 선생님은 ‘재주가 승하면 혼(魂)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분이 나의 출판 멘토다.”
 
 
  원고 파지(破紙)에서 건져 올린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 ‘동문선’이라는 출판사 이름이 참 좋다. 출판사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운명적인 이름이다. 원래 ‘좋은 글을 가려 뽑는다’는 의미에서 ‘문선(文選)’이라고 할 생각이었다. 어디선가 중국에 《문선》이라는 책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거기에다가 ‘우리나라’를 의미하는 ‘동’자를 하나 덧붙였다.”
 
  ― 《동문선》은 조선시대 때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책의 이름이다.
 
  “출판사 이름을 지을 때는 그걸 전혀 몰랐다.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라고 인사를 하면, 사람들은 ‘많이 들어본 출판사’라며 반겼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신생 출판사 이름을 기억하는 게 이상했다. 몇 달 후에야 조선시대 때 《동문선》이라는 책이 편찬된 사실을 알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결심했다.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책을 내는 출판사로 만들겠다고….”
 
  예나 지금이나 출판사 하는 게 쉽지 않다. 신성대 대표도 “7년 동안 배를 타 번 돈으로 지은 서울 봉천동 양옥집을 반년도 안 되어서 날려버렸다”고 말한다. 다시 배를 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란-이라크전쟁으로 위험한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면 돈을 쉽게 벌 수 있었다. 그때 그를 살려준 책이 50만 부가 나간 이외수씨의 에세이집 《말더듬이의 겨울수첩》이었다.
 
  ― 신생 출판사가 이외수씨를 용케 잡았다.
 
  “이외수씨 후배라는 사람을 편집장으로 앉혔다. 이외수씨에게 계약금으로 50만원을 줬다. 이외수를 만나러 간다며 출장비, 술값으로 돈을 엄청 썼다. 출판 밑천이 떨어지자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그가 도망가 버렸다. 이외수씨에게 계약금을 주었으니 내게 책을 내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줄 알았다. 계약금을 포기하면 책은 안 내도 된다는 걸 몰랐다. 난생처음 보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 찾아와 원고를 달라고 하니, 이외수씨도 기가 막혀 하더라. 그때 이외수씨는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반년을 쫓아다녔는데 한 글자도 쓰질 못했다.”
 
  ― 그럼 책은 어떻게 나왔나?
 
  “보다 못한 이외수씨 부인이 나를 원고 파지(破紙)를 쌓아두는 광으로 데려갔다. 둘이서 파지를 뒤졌다. 그중 말이 되는 것들을 찾아 에스프리를 뽑았다. 그래도 충분한 페이지가 나오지 않았다. 이외수씨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서 겨우 200페이지로 만들었다. 당시까지의 관습인 누런 종이 대신 백상지를 썼다. 선원 시절 일본에서 백상지로 된 책을 본 기억이 나서였다. 서점에서는 ‘이게 무슨 책이야? 낙서장도 아니고…’라면서 심드렁하게 책을 받았다. 어쨌든 계약을 지켰으니 홀가분하게 다시 배 타러 나갈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그만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어버렸다.”
 
  그 여세를 몰아서 이외수씨 이름을 내세워 세계명작 에세이에서 에스프리를 뽑은 《오늘 다 못다 한 말은》을 펴냈다. 30만 부 이상 나갔다.
 
  “백상지에 본문 2도 인쇄를 했다. 한국에서 본문에 색을 넣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이후로도 컬러 화보를 넣는 등 비슷한 성격의 책들을 많이 냈다. 파격적이었다. 우리가 성공하니 다른 출판사에서도 비슷한 책을 쏟아 내놓았다. 너무 똑같이 만들다 보니 다른 출판사 책인데도 우리 회사로 반품이 들어올 정도였다.”
 
 
  ‘동문선은 돈 안 되는 책들만 낸다’
 
신성대 대표는 1990년 서울 인사동에 중국에서 나온 책들을 판매하는 ‘동문선중국원서점’을 냈다.
  그렇게 3년을 하니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한숨 돌린 신성대 대표는 1985년부터 《민속문화와 민족의식》(심우성)을 시작으로 ‘문예신서’ 시리즈를 내기 시작했다. ‘동문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출판사를 만들겠다던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동문선을 대표하는 책들이다.
 
  ‘문예신서’ 목록을 한 번 훑어보았다. 책 제목도, 필자도 생소하다. 책을 무척 좋아하는 기자가 보기에도 ‘도대체 누가 이런 책들을 사 갈까’ 싶은 책들이다.
 
  ― ‘문예신서’ 책들이 장사가 되나?
 
  “물론 잘 안 나간다. ‘동문선은 돈 안 되는 책들만 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누가 원고를 가져오면 ‘이 책이 우리나라에 꼭 있어야 할 책이냐’만 묻는다. ‘팔리든 안 팔리든, 이런 책이 한국에 1000부, 2000부는 있어야겠다’ 싶으면 두말없이 낸다. 도서관 같은 곳에 기증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필자 중에서는 나를 돈 많은 재벌집 2세로 아는 사람도 있었다.”
 
  ‘문예신서’를 보면 《중국예술정신》(서복관), 《중국문화개론》(이종규), 《중국무협사》(진산), 《갑골학통론》(왕우신), 《여신들의 인도》(다치가와 무사시), 《역과 점의 과학》(나가다 히사시) 등 동양 관련 책들이 많다.
 
  “배를 탈 때, 미국·유럽에 가서는 우리와 다른 걸 별로 못 느꼈는데, 대만·일본·동남아 같은 데 가면 놀라곤 했다. 우리가 동양인이면서도 동양문화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예신서’를 하면서 동양문화 관련 책들을 내기 시작했다.”
 
  ― ‘문예신서’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연극, 무용, 경제사, 중국문화, 프랑스영화, 한국 민속 등 굉장히 다양하다.
 
  “한 분야의 책만 내면 만들고 파는 데는 편하다. 하지만 그러면 무슨 재미가 있나? ‘책을 만들면서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전에 안 내본 분야의 책에 도전하곤 한다.”
 
 
 
“이외수는 대단한 노력가”

 
작가 이외수씨와 함께. 오른쪽 끝은 이외수씨의 부인 전영자씨. 이외수씨가 동문선에서 낸 책들은 여러 차례 베스트셀러가 됐다.
  ― 좋은 책을 내는 출판사들은 캐시 카우(Cash cow)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동문선에도 그런 책이 있나?
 
  “과거에는 소설가 이외수씨, 시인 조병화 선생의 책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 우리 출판사가 보유한 작가는 그 두 사람뿐이었다.”
 
  ― 이외수씨는 어떤 작가인가?
 
  “그에 대해서는 오해나 과장이 많지만, 자기 작품에 대한 자부심, 예술에 대한 신념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다. 그를 게으르다고 하는데, 사실은 대단한 노력가다. 부지런하다. 그동안 번 돈을 주위에 많이 베풀었다. 탁월한 천재라기보다는 스스로 갈고 닦아 그 자리까지 간 사람이다. 전에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겠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쏠리더라.”
 
  ― 조병화 선생은?
 
  “《너와 나의 시간에》 등을 그분과 함께 냈다. 처음에 그분의 시(詩)를 무단으로 사용했다가 불려가서 야단을 맞았다. 하지만 그걸로 그만이었다. 이후에는 ‘어려운 책 많이 낸다’고 칭찬하면서 내가 부탁드리는 건 다 들어주셨다. 나도 선생님의 부탁은 무조건 다 들어드렸고….”
 
  신성대 대표는 “문단에서는 동문선과 조병화·이외수 두 분과의 관계를 무척 부러워했다. 의리를 중시하는 분들이어서 서로 잘 통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조병화 시인은 2003년 세상을 떠났다. 《황금비늘》 《벽오금학도》 등으로 대박을 안겨주었던 이외수씨의 책도 더 이상 동문선에서는 내지 않는다.
 
  “마케팅에도 신경을 써주고 해야 하는데, 인문학 책들을 내는 데 주력하다 보니 그러질 못했다. 그럴 바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떠나보냈다.”
 
  신성대 대표가 동문선의 ‘대박’으로 기억하는 책으로는 이외수씨의 책들 외에 2000년에 나온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도 있다. 30만 부가 팔린 이 책은 ‘슬로 라이프(Slow life)’ 열풍을 불러왔다.
 
  ― 대박도 곧잘 냈는데, 돈은 얼마나 벌었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로 번 돈은 ‘문예신서’와 문고판 ‘현대신서’ 시리즈에서 프랑스 학술서적들을 내는 데 다 써 버렸다. 1997년 도매상 부도와 IMF 사태로 빚이 많이 있을 때였는데, 빚 갚을 생각은 안 하고…. ‘책으로 번 돈은 책 내는 데 써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쿵후인 줄 알고 배운 십팔기
 
경복궁에서 열린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의 십팔기 시연. 중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신성대 대표는 “책 만드는 일이 너무 즐겁다”고 말한다. “시간이 아까워 아직 노래방에 가본 적이 없고 출판인 모임 같은 데도 안 나간다. 지금도 알고 지내는 출판인이나 기자들이 한 명도 없다”는 그가 출판일 못지않게 매달리는 일이 있다. 전통무예 십팔기의 전승과 보급이다. 그는 현재 (사)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다.
 
  ― 십팔기는 어떻게 배우게 됐나?
 
  “어렸을 때, 덩치가 작고 가난해서 남에게 무시당하기 싫어 무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학교 때 무협영화 등의 영향으로 세계적으로 쿵후가 유행했다. 서울역 근처 건물에 ‘쿵후·십팔기’라는 간판이 붙어 있기에 쿵후인 줄 알고 배우기 시작했다.”
 
  그에게 십팔기를 전수해 준 인물은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이었다. 그는 6·25 부산 피란 시절에 먼 친척인 구한말 무관 오공(晤空) 윤명덕(尹明德) 선생으로부터 십팔기를 배워 1969년에 십팔기 도장을 열었다.
 
  ― 해범 선생이라는 분은 혹시 《무예도보통지》 같은 책을 보고 무술을 익힌 후에 조선말의 무관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하는 건 아닌가?
 
  “그분은 한학(漢學)에 밝지 않아 그런 고서를 해독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책으로 전해진다고 해도, 무예는 실기가 함께 전해지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신 대표는 “전 세계에 전해 내려오는 모든 무술은 다 민간에서 전해온 것인데, 군대에서 사용하던 국가공인무예가 전해져 오는 것은 십팔기밖에 없다”고 말한다.
 
십팔기

 
  십팔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군사력 강화 차원에서 조선·중국·일본의 무예 18가지를 집대성한 조선의 국기(國技)이다. 장창, 죽장창(竹長槍·긴 대나무 끝에 창날을 단 창), 기창(旗槍·끝에 깃발이 달린 짧은 창), 당파(鏜鈀·삼지창), 낭선(狼筅·독을 묻힌 창날을 여러 개 단 죽창), 쌍수도(雙手刀·두 손으로 무거운 검을 사용하는 검법), 예도(銳刀·‘조선세법’이라고 하던 조선 전래의 검법), 왜검(倭劍), 교전(交戰·왜검이나 요도를 사용하는 대련법), 제독검(提督劍·명나라에서 전래된 검법), 본국검(本國劍·신라 화랑 황창랑에게서 유래한 전래의 검법), 쌍검(雙劍·두 자루 칼을 사용하는 법), 월도(月刀·긴 자루에 달린 칼·언월도), 협도(挾刀·월도보다 작은 자루 달린 칼), 등패(籐牌·등나무 방패와 칼·표창을 사용하는 법), 권법(拳法), 곤봉(棍棒), 편곤(鞭棍·도리깨) 등 18가지 보병무예를 말한다. 여기에 기창(騎槍), 마상쌍검, 마상월도, 마상편곤 등 네 가지 마상무예를 더해 실제로는 22가지다.
 
  영조 때인 1759년 사도세자가 《무예신보(武藝新譜)》로 십팔기를 정리했고, 정조 때인 1790년 박제가·이덕무·백동수 등이 이를 바탕으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펴냈다.
 
  ‘무예’라는 말의 의미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왼쪽)은 신성대 대표의 출판 멘토이기도 하다.
  십팔기는 해범 김광석 선생과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만나면서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신성대 대표의 역할이 있었다.
 
  “제 출판 멘토이자 민속학자인 심우성 선생님은 늘 ‘어느 나라든지 춤은 그 나라 무예와 관련이 있다. 무예를 모르면 춤동작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한번은 심 선생님이 ‘《무예도보통지》 영인본을 낸 후, 시골에 내려가면 혹시 십팔기를 하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는데,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제가 십팔기를 하는데요’라고 했더니, 심 선생님은 ‘네가 무슨 십팔기를 하느냐’며 믿지 않았다. 그래서 두 분을 만나게 해드렸다. 두 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십팔기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였다.”
 
  신성대 대표는 “우리나라에 무예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은 심우성 선생님과 내가 책에서 그 말을 사용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중국에서는 무술, 일본에서는 무도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십팔기를 뭐라고 표현할까 하다가 《무예도보통지》등에서 사용하는 무예라는 말을 쓰기로 했다. 고대에는, ‘예(藝)’라는 말은 민간이 사용할 수 없는 글자로 국가 공인의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 역사에선 무술이나 무도란 말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무예라고만 했다.”
 
  현재 신성대 대표는 십팔기를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받으려 하고 있다. 십팔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작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근래 십팔기는 중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십팔기에 명나라 말기의 명장 척계광(戚繼光)이 만든 척법육기(戚法六技. 장창·곤봉·당파·낭선·등패·권법)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절강병(折江兵)들에 의해 조선에 전해진 것이다.
 
  “작년에 《인민일보》 기자가 우연히 우리 사무실에 놀러 왔다가 척법육기가 십팔기 속에 포함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남한산성에서 공연하는 것을 비롯해 5박 6일 동안 취재해서 〈인민망(人民網)〉 〈중화무술〉에 기사를 올렸다. 기사가 나간 후, ‘당신이 중국에 오면 십팔기로 중국에서 자가용제트기 타고 다닐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왜 그렇게 관심인가?
 
  “명나라 말기에 왜구를 물리친 척계광은 근대 이래 일본에 당하기만 했던 중국인들에게는 민족영웅이다. 척계광이 주로 활동했던 저장성(折江省)에서 당서기를 지낸 시진핑 주석도 척계광을 좋아한다. 근래에는 〈태주대첩〉 〈척계광〉 등 드라마도 제작됐다. 문제는 무술천하인 중국에서도 아직 그 척법을 재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척법육기가 들어 있는 십팔기를 갖고 중국에 가면 대박 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신성대 대표는 “지금 중국에는 각 성(省)마다 무술학교가 있고, 소림사 앞에 늘어선 무술학교에만 15만명이 다니는 등 무술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 중국인들이 왜 그렇게 무술에 관심이 많은가?
 
  “배우가 되고 싶어 배우는 사람이 많다. 배우가 못 되더라도, 무술을 배워두면 인기직업인 공안(경찰)이나 군인이 되는 데 유리하다고 한다.”
 
 
  파주적군묘지 참배
 
  신성대 대표는 2010년부터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경기도 파주 적군(敵軍)표지를 참배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적군묘지는 원래 1·21사태 때 사살된 무장공비들의 가묘(假墓)가 있었던 곳이다. 국방부 유해발굴단이 발굴한 북한군·중공군 유해들도 근처에 매장하게 했다. 한때 중공군, 북한군 합쳐서 1300여 기가 묻혀 있었다. 지금은 중공군 유해 400여 기가 중국으로 송환되어 북한군 묘만 남아 있다.
 
  ― 왜 적군묘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2007~2009년 국방부 전통의장대 무예교관을 하다가 우연히 국방부 유해발굴단 포스터를 보게 됐다. 북한군·중공군 유해는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칼럼을 쓴 인연으로 적군묘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찾아가 보니 잡초가 무성하고 나무 말뚝이 다 썩어 있었다. 말 그대로 무명의 버림받은 무덤들이었다. ‘이들이 무슨 죄인가? 죽은 적은 적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신성대 대표는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친구들과 ‘북·중군묘지평화포럼’을 만들어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권철현(權哲賢) 전 주일대사를 회장으로 모셨다. “제네바협약에는 적군 시신도 아군 시신과 동등하게 매장하도록 되어 있다”면서 국방부를 설득해 비석을 세우고 묘역을 정비하도록 했다.
 
  ― 보수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리 탐탁한 일은 아니다.
 
  “안 그래도 6·25참전군인들이 찾아와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분들도 도와주었다. 적군묘지에 가서 술을 따르면서 ‘친구야, 나도 머지 않아 간다’고 말하며 유골 수습작업을 함께한 분들도 있었다.”
 
  신성대 대표는 “특히 중국 사람들에게 적군묘지 참배 이야기를 해주면, 모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나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도의적 우위에 서는 데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6・25 때 중공군으로 참전했던 옌볜 조선족 윤영학씨는 일본에서 적군묘지 참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찾아와 함께 묘지를 둘러봤다. 그에 의하면, 당시 옆에 있던 일본 친구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며 ‘우리 일본 사람은 그에 비하면 너무 작습니다’라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선비란 원래 무사, 기사를 의미”
 
동문선에서 펴낸 《무예도보통지》를 들어 보이는 신성대 대표. 책장에 동문선에서 펴낸 ‘문예신서’ 책들과 함께 복제한 조선칼이 놓여 있다.
  ― 조선에 무(武)의 전통이 있나?
 
  “없었다. 어느 나라든지 천하통일을 하면 민간의 무장을 해제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까지는 있었다. 사병(私兵)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조선 건국 후 사병혁파를 하면서 민간의 무기 소지를 금한 후 그런 전통이 맥이 끊겼다. 그건 한(漢)나라 이후 중국도 비슷했다. 중국에서는 권법이나 봉술 같은 호신술이라도 민간에 전해져 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마저도 없었다.
 
  그나마 《무예도보통지》가 나왔던 정조 때에는 민간에서 무예가 약간 번성하기는 했다. 당시 박제가는 ‘밀양의 기생 운심이 쌍검무를 잘 추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쌍검은 십팔기 중 하나다. 그 외에는 별 기록이 없다.”
 
  신성대 대표는 “무의 전통이 제대로 이어졌다면, 우리 역사가 이렇게 구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선비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 ‘선비 사(士)’자는 고대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뜻했다. 그러다가 ‘남자’ ‘사내’에서 기사・무사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글은 서기나 아전이 하는 일이었다. 서양에선 집사(執事)들이 했다.
 
  이성계는 지혜를 가진 자는 무력을 못 가지게 했고, 무력을 가진 자는 지혜를 못 가지게 했다. 사대부를 전부 내시로 만들어 놨다. 그러다 보니 선비가 선비답지 못하고 무사가 무사답지 못했다. 오랑캐이면서 중화(中華) 흉내나 내다가 나라가 망했다.”
 
  ― 요즘 정치를 보면 그런 전통이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다.
 
  “맞다. 한국 정치인들이 뱉은 말 안 지키고 말장난으로 넘어가려 드는 것도 ‘무의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무의 문화’가 살아 있는 나라 같으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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