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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列傳

연극계의 영원한 파수꾼 李豪宰

“진하게 어울리기엔 연극이 최고”

글 : 장원재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자  

사진 :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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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지금도 연극을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이러다가 연극은 언제 하지?’ 생각에 드라마 그만둬
⊙ “연극인은 가난할 수밖에 없어, 꼭 연극 하려면 결혼하지 마라”

李豪宰
⊙ 73세. 서울예대 졸업.
⊙ 출연작: 연극 <생쥐와 인간> <오셀로> <마의태자> <생일파티> <잉여부부> <쇠뚝이놀이>
    <태> <초분> <맨발로 공원을> <고도를 기다리며> <약장사> <페르귄트>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 <불가불가> <수족관> <천 년의 수인> <용호상박> <영영사랑> <세일즈맨의 죽음>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 <쿠크박사의 정원> <뱃사람> <보이체크> <아마데우스>
    <밤으로의 긴 여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채권자들> <스카이라잇> 등.
    영화 <화엄경> <태백산맥> <리베라 메>.
    TV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궁> <대한민국 변호사>.
⊙ 수상: 한국일보 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1972), 한국연극 대상, 한국일보 연극영화예술상
    주연남우상(1977), 서울시 문화상(공연부문·2002), 보관문화훈장(2011).

張源宰
⊙ 47세.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런던대 연극학 박사.
⊙ 前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現 SNS 바른소리사람들 대표.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
⊙ 저서: 《증언연극사》 《오태석 연극-실험과 도전의 40년》 《논어를 축구로 풀다》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연극 팬들은 전무송 하면 곧바로 이호재(李豪宰)를 떠올린다. 최주봉, 윤문식과 박인환이 같은 묶음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전무송과 이호재의 이미지에는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견뎌온 아버지들의 모습이 있다. 전무송에게 현실에 적응하려 애쓰지만 고뇌의 크기가 작지 않기 때문에 항상 구조적으로 갈등하고 부딪힐 수밖에 없는 ‘고뇌하는 지식인’의 이미지가 있다면, 이호재에게는 ‘적응하며 살아가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있다. 순응이 아니다. 적응이다. 농경사회로부터 디지털사회까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대한민국의 숨가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중심을 잃지 않는 것.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무리 없이 주어진 역할을 다하면서도 본인의 개성이나 주의 주장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 것. 그래서 이호재는 물 같은 배우다. ‘최고의 선(上善)은 물 같은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호적조사를 좀 하겠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어디인지요?
 
  “서울 토박이죠. 종묘(宗廟) 건너편, 종로3가에 계속 살았습니다. 저는 3남3녀 6남매의 맏이죠. 아버지는 염료, 안료 상회를 크게 하셨지요. 저희 집 1층 전부를 동사무소로 세를 줄 만큼 건물이 넓었습니다. 동사무소가 신축 건물을 짓고 이사를 간 뒤에는 여관 운영을 하기도 했을 정도니까. 지금은 큰 길가에 면해 있는데 제가 어렸을 때는 도로에서 한 줄 뒤편이었습니다. 6·25 때 이런저런 사연이 있어서 사업이 망했습니다.”
 
 
  6·25의 기억
 
  —외가도 서울인가요?
 
  “아니, 외가는 충북 음성입니다. 일제(日帝) 때 조부(祖父)께서 일본인을 폭행하고 피신을 했던 곳이 바로 거기죠. 덕분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실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도 선산이 음성에 있습니다.”
 
  6·25는 소년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넉넉하던 살림이 단박에 기울어지고, 고객이며 손님이며 일하던 사람들이며 집 안팎을 오가던 사람들의 통행량이 부쩍 줄었다.
 
  “6·25 때 ‘서울-청주-대전-서울-대구-부산’이 제 피란 경로입니다. 연출가 오태석은 경무대(景武臺)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법무비서관을 하던 아버님이 전쟁 발발 사흘 만에 납북(拉北)돼 그 사건과 6·25 3년의 기억이 자신의 평생을 지배한다고 했는데, 동년배지만 저는 좀 달라요. 피란살이가 재미있었어요. 소풍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비행기 폭격이 있는 날에는 엄청난 공포를 느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식구 중에는 끌려가거나 상한 분이 안 계시거든.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지 않아도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있었단 얘기죠. 그래서 기억의 깊이가 강렬하지 않아요.
 
  다만 청주 인근에서 벌어진 일은 또렷하게 회상합니다. 국군이 이겼다고 마을 사람들이 승전(勝戰)잔치를 했는데 바로 그날 밤에 인민군이 들이닥쳤어요. 마을 사람들이 그런 잔치를 열었다고 누가 밀고를 했겠지. 잔치 주도했던 사람은…. 다음날은 국군이 진군해서 또 사달이 나고….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종로국민학교에 다녔다. 입학했던 교동국민학교는 영국군이 주둔지로 사용 중이었다. 현재 현대그룹 빌딩이 자리한 계동의 휘문중, 휘문고는 걸어서 통학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다 연극 입문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에서 전무송(오른쪽)과 함께. 전무송은 서울예대 시절부터의 평생 친구다.
  —보통 배우를 평생 직업으로 삼은 분들을 보면 연극·예술과 운명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소싯적 기억은 없습니다. 전 나이 들어서 연극과 만났어요. 그것도 이걸 꼭 해야겠다, 정말 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는 처음부터 없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청년시절에 오태석·전무송을 만났을 때, 그때 작용했던 어떤 힘이 아직도 나로 하여금 연극을 하게 하는 어떤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외의 대답이다. 15회를 연재하는 동안, 배우들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기에’ 연극에 생애를 걸었다고 했다. 예외가 없었다. 그런데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 배우가 ‘그다지 연극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라니?
 
  “두 사람을 만난 건 연극학교(현 서울예술대) 시절입니다. 그런데 전 연극학교를 열심히 다니지 않았어요. 흥미가 없었거든. 졸업 성적이 23명 중에 22등이었나? 62년도에 입학을 했는데 학교는 잘 안 나갔고 명동에서 친구들이랑 거의 매일 만나서 술 마시고 놀았습니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어요.”
 
  —기록에 보면 1963년에 존 스타인벡 원작 〈생쥐와 인간〉으로 데뷔했는데….
 
  “그 공연이 연극학교와는 관계가 없는 겁니다. 학교 안 다니고 술 마시러 다녔다고 그랬잖아요? 음향(音響) 하던 김벌래가 관여하던 극단이 있었는데 그 팀하고 어울리다가 친해지고, 한 번 해보자고 권유를 하기에 그러자고 했어요. 연극이 목적이 아니라, 연극을 해야만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술 마시고 놀 수 있으니까.
 
  제 역할은 팔푼이 거한(巨漢) 레니였습니다. 지금은 말랐지만 그때는 제 체구가 듬직했거든요. 그러니까 ‘네가 그 역할을 꼭 해야 된다’고 자꾸 얘기하는 겁니다. 이주 노동자인데 나중에 음탕한 주인집 여자랑 관계하다가 황홀경에서 그 여자를 목 졸라 죽이는 역할. 그 당시만 해도 몸집이 큰 배우가 거의 없었어요. 공연을 하고 나니까 연기 잘했다고, 평이 좋았어요. 술 마시면서 연극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있고, 연극 자체도 재미있고. 그래서 그 극단과 작업을 몇 차례 더 했습니다.”
 
 
  전무송·오태석과의 만남
 
연극 <그대를 속일지라도>. 전무송 등과 함께 고교 학생을 연기했다.
  연극학교는 가까스로 졸업했다.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 시험을 봐도 결과는 뻔했다. 그래서 늘 추가시험을 봤다.
 
  “제 날짜에 시험을 본 적이 없죠. 유치진 선생님의 동생인 유치담 선생님이 당시에 교무과장이었거든. 시험 때마다 소주 한 병 사들고 따로 찾아갑니다. ‘너 시험 왜 안 봤노?’ 그러시고 도서관에 가서 나 혼자 시험 보도록 배려해 주셨죠. 내가 답안지 메꾸는 동안 당신은 술 한잔하시고. ‘선생님 이거 무슨 말이죠?’라고 물으면 모르는 척하면서 답 알려주시고…. 그렇게 내가 간신히 졸업한 사람이라니까. 23명이 졸업했나? 그중에 22등이 저예요.”
 
  23등 졸업자는 현재 상업에 종사한다. 연극학교 1기 동기로는 신구, 전무송, 민지환, 반효정(졸업은 하지 않았다), 극작가 윤대성 등이 있다. 배우들은 연기과였고, 연세대를 졸업하고 은행에 다니던 윤대성은 연구과였다. 연구과는 대학 졸업자들이 다니던, 일종의 대학원이다.
 
  —그럼 평생의 인연이 된 오태석, 전무송 선생님과 만나게 된 계기는 어떤 건지요?
 
  “전무송은 나하고 동기고 오태석과는 1971년부터 함께 작업했습니다. 연극학교장이던 유치진 선생님께서 ‘재주 있는 작가가 있는데 같이하자’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난 오태석을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 1968년에 국립극장 장막극 공모 당선작 〈환절기〉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어요. 능력이 있는 작가라는 건 난 이미 알고 있었거든. 뭔가가 있더라고. 오태석은 명동에서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 오태석을 남산으로 불러들인다니까 저는 좋았죠.
 
  문제는 당시 연극계 풍토가 극작가들에게 불리했다는 겁니다. 그때는 번역극이 대세이자 주류였으니까. 창작공연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한 해에 한 작품 발표하고 공연하면 다작(多作)이라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유치진 선생이 오태석에게 극단 기획 일도 맡기고 연출도 시켰습니다. 오태석, 전무송, 이호재가 공동생활을 시작한 거죠.”
 
  —세 분이 어떤 면에서 의기투합을 한 겁니까? 동년배라서? 성격이 맞아서?
 
  “내가 일할 수 있는 기본을 만들어 줬으니까요. 배우라는 건 작품 정해지고 자기가 할 역할이 있을 때 힘을 받습니다. 이호재가 들어갈 자리를 이 두 사람이 만들어준 거죠. 성격만 보면 우리 셋은 다 제각각입니다. 제각각이지만 누군가 한 가지 의견을 내놓으면 한데 뭉치지요. 뭉친 듯 보이지만 의견 차이로 갈라지는 집단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잖아요? 우리는 각자 주장을 하다가도 한곳으로 아이디어를 모아가는 식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의견을 합해가는 과정이 좋은 연극을 만들어가는 토대일지도 모릅니다.”
 
 
 
유덕형

 
  오태석, 전무송, 이호재 세 친구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잉여부부〉(1971), 〈쇠뚝이놀이〉 〈로미오와 줄리엣〉(1972), 〈초분〉(1973), 〈태〉(1974) 등을 함께했다.
 
  “세 사람이 그렇게 만나 운명이 시작되었지만 그 운명이 탄력을 받고 힘을 얻은 건 제4의 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치진 선생님의 아들인 유덕형 선생님이죠. 그분이 우리를 뒤에서 또 강력하게 밀어줬어요. 연출가 유덕형이 미국에서 공부 마치고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작업한 연극이 몇 편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애착을 가지고 연출한 작품이 내 생각으로는 헤럴드 핀터 작 〈생일파티〉가 아닐까 합니다. 그 작품의 기획이 오태석이고 전무송과 저는 출연을 했죠. 그 작업 이후로 유덕형은 우리 셋의 스폰서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지원도 했고, 어떤 작업을 하든 우리가 예술가로서의 소신을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도록 튼튼한 울타리 역할도 해줬고. 그 당시엔 어떤 작품을 해도 신이 났어요.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작업할 수 있고 체력도 받쳐줄 때고. 머리뿐 아니라 육체도 함께 뛸 수 있으니 활력이 있었지요.”
 
  —오태석, 전무송, 이호재 세 사람이 부부동반으로 개막 전날 함께 고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LUV〉라는 작품을 할 때죠?
 
  “여자 셋이서 함께 기도했지. 지금도 친해요. 가족끼리도 왕래하고.”
 
  —유덕형 선생은 나중에 서울예술대학 총장도 했지만, 대학 행정가로 일하면서 연출가로서의 경력이 끊어졌습니다.
 
  “계속 연출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학교 때문에…. 요즘도 가끔 만나면 연출 좀 해보라고 내가 권하기는 하는데 본인은 ‘이젠 어렵지 않겠느냐, 연출하는 사람 도와주는 건 모르겠지만…’이라고 답해요.
 
  유덕형의 전공은 조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빛과 광선’을 본격적으로 인식한 건 유덕형 이후입니다. 초기 연출 작품의 수준은 당대 아시아의 수준을 뛰어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유덕형은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의문 제기”
 
  서울예술대학에서 오랫동안 창작론을 강의했던 최인훈의 회상록 장편소설 《화두(話頭)》에도 최인훈과 유덕형 사이에 위와 비슷한 대화가 오간 대목이 있다.
 
  “어느 작품에 어떤 인물이 나온다고 합시다. 우리는 작품 안에서 그 인물을 해석하고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유덕형은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 〈생일파티〉를 연출한다, 제 배역이 골드버그고 제 후배가 맥켄 역이었거든요. 유덕형은 골드버그와 맥켄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 뒤의 상징을 보라고 합니다. 골드 메커니즘, 즉 돈이 작동하는 원리가 두 사람의 행동의 근간일 수도 있다는 식이죠. 해석을 달리하니까 작품이 달라지는 겁니다. 오태석 작 〈초분〉도 유덕형 연출이었죠. 이 작품의 시초는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들려준 풍장(風葬) 이야기입니다. ‘섬에 땅이 얼마 없으니까 시신을 뭍에 모시지 못하고 볏짚을 쌓아 함께 태워 바람에 날려 보낸다.’ 그런데 유덕형은 오태석의 원작에 시각적 이미지를 더해서 그물 가져다가 무대 전체를 덮어버렸어요. 스토리뿐 아니라 무대장치, 소도구, 조명 등이 다 자기 역할을 하도록 만든 거죠. 연출가가 배우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큰 것을 보면 작품이 아주 풍요로워집니다.”
 
  따지고 보면 놓치고 가는 요소가 얼마나 많은가? 〈춘향전〉만 해도 등장인물의 이름을 곱씹어 새겨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변학도(卞學徒)의 ‘학도’는 글자 그대로 ‘글을 배우는 무리’라는 뜻이다. 어쩌면, 이러한 작명에는 ‘글공부하는 것들은 모두 나쁜 놈’이라는 당대 백성들의 정서가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몽룡(李夢龍)은? ‘용은 용이되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용’쯤 되겠다.
 
  —연극사에서 조금 잊힌 작품처럼 되어 버렸는데 1976년에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이호재, 전무송, 조상건, 이윤선, 김형중이 공연했던 〈고도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하는 올드팬이 많습니다.
 
  “오태석 연출의 출발점이 ‘등장인물들을 서구의 들판에서 방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 한국이라는 시공간에 어울리는 이야기로 풀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의 할머니가 평생 6·25 때 납북된 아들을 기다렸다는 겁니다. 문밖에 나가 기다리고 정화수 떠다 놓고 기다리고, 혼잣말하시고, 밥 한 공기 아랫목에 퍼 놓고 기다리고…. 평생을 기약없이 기다린 거죠.
 
  이처럼 ‘기다림’은 우리 민족의 한(恨)과 통하는 정서라고 오태석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금방 납득을 했고요. 그렇다면 청계천 다리 밑에서 오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는 비렁뱅이들의 이야기와 그 이미지를 무대로 옮겨보자고 합의를 한 겁니다. 2막은 그래서 거의 누워서 했어요. 누워 있다는 건 기운이 쇠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무력감(無力感)의 표상이기도 하고, 누워 있다가 일어나면 그 자체가 뭔가 ‘희망’을 느꼈다는 상징도 되고….
 
  지금 ‘잊힌 고도’라고 했는데 고인(故人)이 된 이원경 선생님(당시 삼일로창고극장장)은 가장 고도다운 고도라고 극찬을 하셨어요. 국내외에 잘 알려진 임영웅 선생의 〈고도를 기다리며〉하고는 또 다른 〈고도를 기다리며〉죠. 꼭 한 번 다시 하고 싶은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1인극 〈약장사〉

 
1978년 공간사랑에서 공연했던 연극 <약장사>의 포스터.
  아무리 길어야 한 작품의 공연기간이 2주를 넘지 않던 시절, 이호재는 오태석과 한 달 열흘을 공연을 한 적이 있다. 1978년 1월 공간사랑에서 공연한 1인극 〈약장사〉다.
 
  “초연은 76년 5월이었죠. 78년 공연은 사연이 있어요. 그때만 해도 극장 냉난방이 안 되던 시절입니다. 명동예술극장에선 톱밥으로 피우는 난로를 객석에 설치하기도 했어요.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워서 공연을 못 했습니다. 그러니까 봄가을 시즌에 몰아서 공연을 하고, 단체는 많은데 극장은 몇 군데 안 되니 어느 작품이건 공연기간을 늘릴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1월 새해가 시작되는데 연극 하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못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공간사랑은 극장이 작으니 좀 견딜 만하지 않겠느냐, 언제까지 우리가 시즌제로 공연을 해야 하느냐, 이걸 개선해 보자 라고 달려들었지요.”
 
  —1인극은 정말 그렇게 외로운가요? 다른 연기자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만 무대를 끌고 간다는 건 어떤 느낌입니까?
 
  “초연 장소는 이병복 선생님이 운영하던 카페 떼아뜨르였죠. 매일 레퍼토리를 달리했는데 〈약장사〉는 목요스페셜이었습니다. 고수(鼓手)는 오태석이었어요. 공간사랑으로 가면서는 안영순씨를 고수로 초빙했지요. 1인극은, 숨을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단역이라도 〈오셀로〉의 병사 5 부모는 자기 아들만 보잖아요. 관객이 ‘볼 곳’을 선택하며 관극하죠. 하지만 1인극은 모든 관객의 시선을 그대로 다 받아야 합니다. 반면에, 혼자서 연극의 흐름을 자유롭게 조절하면서 항해할 수 있지요. 1인극을 끌고 가려면, 중압감을 의식하지 않아야 합니다.”
 
  〈약장사〉를 전후해서 오태석이 자체 극단을 꾸리고, 이호재와의 인연은 자연스레 엷어진다.
 
 
  ‘연극적 숨바꼭질’
 
김구 암살범 안두희가 등장하는 연극 <천 년의 수인> (1998).
  전무송, 이호재, 오태석이 다시 만난 건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가 등장하는 〈천 년의 수인(囚人)〉(1998)이라는 작품에서다. 호환(虎患)을 없애는 굿을 연극으로 만든 〈용호상박〉(2005), 안평대군의 이야기 〈영영사랑〉(2008)에서도 옛정을 불살랐다. 그에게 오태석은 어떤 연출가일까?
 
  “전 자기 주관이 뚜렷했던 젊은 시절의 오태석이 그립습니다. 요즘은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는 것 아닌가요? 자기 주관을 드러내면 소수의 마니아에게 평생의 중독성을 남기는 것이고 친절하게 다가가면 농도는 살짝 흐려지지만 더 많은 사람과 만날 수 있고.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요즘 오태석 작품의 공연 길이가 한 시간 십오 분 내외잖아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딱 정리해서 가는 거지. 어지간한 자신감 없이는 그렇게 못 합니다. 연출가가 불안하면 자꾸 설명을 하게 되고 설명이 길어지면 지루하고, 그렇다고 설명 없이 가자니 관객이 흐름을 이어가지 못하고…. 오태석은 이 단계를 다 뛰어넘었어요. 득도(得道)를 한 겁니다. 다만 내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민족혼이랄지 피랄지, 오태석의 뚜렷한 주관이 조금 더 보였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런 요소를 드러내는 게 연극의 기능이라고 보는 겁니까?
 
  “아니 아니죠. 가르치려 달려드는 연극을 요새 누가 봅니까? 오태석은 드러내지 않아요. 그것이 매력입니다. 보여주지 않는데 보이는 것. 전 오태석과 연극적 숨바꼭질을 더 하고 싶습니다. 오태석의 변화가 다음 단계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도 궁금합니다. 사람이 변해야지 어떻게 똑같겠어요? 내가 젊은 시절의 오태석이 그립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20대의 오태석과 70대의 오태석이 보여주는 변화의 과정이 우리 연극의 거대한 성취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오태석은 서른아홉 무렵 일 년간 방황하다 ‘연극은 내 길이다’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했다. 전무송의 경우도 영화 〈만다라〉 이후 연기 이외의 다른 일에 곁을 내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호재는 어땠을까?
 
  —〈약장사〉를 공연할 무렵부터는 연극이 천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까?
 
  “난 지금도 연극을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으로는 이 일이 내 길이다 생각을 하지요. 하지만 직업이라는 것은 그 일을 행함으로써 어느 정도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연극은 생활이 안 돼요. 그래서 지금도 연극을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천직(天職)이라고 하기엔…. 내가 벌받을 겁니다.”
 
  최인훈의 소설에도 역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가로서 내가 벌어들인 수입이란, 수입이라는 말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수입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는 구절이다.
 
 
  “경제적 문제 해결 못 했다”
 
평론가들이 이호재의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 중 하나인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1988).
  —그래도 방송이나 영화를 통해서 생계는 해결하신 것 아닙니까? 10여 년 전에 〈사랑과 전쟁〉에서 존재감을 보이기도 했고….
 
  “방송에서는 저를 잘 안 씁니다. 〈사랑과 전쟁〉도 김흥기씨가 병석에 눕는 바람에 대역으로 출연했던 것이고. 제가 연극 때문에 바빠요. 방송국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빠져나갈 사람인 거죠. 20여 년 전에 드라마를 찍는데, 수입이 엄청났어요. 그때는 출연료를 바우처로 줬는데, 매일 바우처를 현금으로 바꿔도 주머니엔 돈과 바우처가 그득한 겁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니 이러다가 연극은 언제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드라마 출연을 단칼에 잘랐어요. 나이 먹은 사람 가운데 누군가는 무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난 체질상 연극쟁이들의 수공업적인 제작 방식이 체질에 맞거든요. 사람들이랑 진하게 어울리기에는 아무래도 연극이 최고니까요.”
 
  —그것이 바로 연극과 연기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애정이지요. 그 뒤로는 방송에서 연락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스케줄을 펑크 낼지도 모르는 배우니까요.
 
  직장생활을 한 적도 있어요. 1975년부터 국립극단에 전무송이랑 입단해서 5년을 생활했죠. 생활이 안정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한편으로는 내가 먹고살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자문(自問)하게 되더군요. ‘한순간에 월급쟁이가 되고 만 것은 아니냐’ 스스로에게 자꾸 물었습니다. 연출하시던 분들이 ‘너희 둘이 입단해서 국립극단의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다’고 칭찬을 해주셨는데, 그 위안에 그래도 5년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자유인의 기질이 있는 거네요.
 
  “우린 또 그거 없으면 꽝이지요.”
 
  평론가들은 의도적으로 정신이상자 행세를 하며 경관들을 농락하는 다리오 포 원작의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1988)나 1980년대 대한민국의 사회상을 정치적 강요 없이 묘사한 정복근의 〈수족관〉을 이호재의 대표작으로 꼽기도 한다.
 
  이호재라는 배우는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존재감을 과시해 왔다. 그런데 생애의 대부분을 무대에서 보내고, 그 공로로 훈장도 받고, 후배들에게 ‘정확한 발성’이 부러운 배우 1호로 꼽히는, 그리고 아무런 대사 없이 그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공연의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평가를 받는 이 대배우가 연극은 천직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경제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간단해요. 못 했죠. 보다 정확하게는, 못 하고 있습니다. 생활이 엉망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내키지 않아도 호구지책으로 틈틈이 방송도 하고 영화도 했죠.
 
  이건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연극 하는 사람들은 다 어려워요. 연극인 복지가 가장 발달한 나라가 네덜란드라는데, 네덜란드 연극인들도 연극만 해서는 못 먹고살아요. 그런데 한국에서?”
 
 
  “자식 고생시켜 미안”
 
이호재 자신이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은 <페르귄트>.
  —그래도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듯합니다.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지요. 생활을 위해서는 경제력이라는 게 꼭 필요합니다. 산업화시대에 연극은 기계화와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숙명을 가집니다. 다른 분야는 뛰어가고 날아가는데 연극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가시밭길을 헤쳐가야 하는 거죠. 이런 상태로 10년이 지난다면, 연극인과 사회와의 간격은 더 벌어질 겁니다. 연극인들은 사회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빈곤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정말 연극을 하고 싶다면, 결혼하지 마라, 혼자 고생해라 이런 말을 해주고 싶네요. 자식들이라도 고생하지 않도록 해야지, 내가 결혼을 괜히 해서 공연히 마누라랑 자식들 고생시키는 것이 너무 미안할 따름입니다. 내가 아들이 둘인데 둘 다 직장에 다닙니다. 내가 먹여 살리지 못하니까.”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무엇입니까?
 
  “극중인물의 10대부터 80대까지를 넘나들며 연기했던 국립극단의 〈페르귄트〉가 좋았지만, 2009년에 지금 나를 챙겨주는 회사인 컬티즌에서 제작한 〈뱃사람〉이라는 연극이 있어요. 공연 내내 무대에서 계속 술 먹고 앉아 있던 작품입니다. 물론 진짜로 음주를 한 것은 아니고, 나한텐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기억에 남습니다.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내가. 정동환, 이대형, 이남희, 이명호 등 출연진과도 호흡이 잘 맞고 그러니까 재미도 있고.”
 
 
  적응력이 뛰어난 배우
 
두 아들과 함께한 이호재. 평생 연극을 해온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인터뷰 내내 느끼는 바지만, 선생님은 연극 자체보다는 연습 과정에서 연극인들과 만들어가는 분위기나 인간관계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있어야 제대로 된 연극이 만들어지니까요.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배우라도 각자 따로 놀면 그 연극은 망합니다. 각자의 능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전체가 부드럽게 어우러져서 앙상블을 이루는 연극이 좋은 연극이죠. 대규모 캐스팅을 하고, 이전까지는 별다른 인간관계가 없던 사람들끼리 만들어가는 작품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극은 형태가 다양할수록 좋다는 것이 제 소신이니까요. 이건 제 개인적인 취향이다, 그런 얘기지요. 연극이 좋은 건, 연습기간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그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같이할 수 있으니까 서로 친해질 수 있는 것이고, 친해진다는 건 무대 올라갔을 때 서로 의지가 되고 서로 위로가 되고 서로 도와줄 수 있으니까 좋은 것이고. 왜 재즈 하는 분들이 즉흥연주를 할 때 동료 음악인들이 즉석에서 자기의 연주를 따라오면 그렇게 짜릿하다고 그러잖아요? 연극도 마찬가지입니다. 경험 안 해본 분들은 그 느낌 모르실 겁니다.”
 
  —이호재는 적응력이 뛰어난 배우다 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건 날 너무 잘 본 거죠. 제가 생각하기엔, 사실 개성이라는 것은 자기 혼자 있을 때 개성인 겁니다. 팀을 이루는 순간 그걸 순화시켜야죠. 일반 사회생활도 그런데 연극은 더하죠. 각자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이 모인 분야니까. 그 개성들이 정리되지 않고 마구 드러나면 그게 뭐가 되겠어요?”
 
 
  “연극은 연극일 뿐”
 
  —좋은 배우란, 좋은 연기란 어떤 겁니까?
 
  “가장 자기를 잘 나타내면서 자기가 아닌 걸 표현하는 사람이 좋은 배우입니다.”
 
  —선생님 인생에 있어 연극이란 무엇입니까?
 
  “연극이란…. 연극일 뿐이지요. ‘연극 하지 마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이는…. 무엇을 꾸미거나 드러내는 것을 연기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가장 진실하고 가장 본질에 가까워야 그게 연극인 거죠. 그래서 연극은 그냥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극은 그냥 연극이지 뭐. 어떤 단어로써 형상화할 수도 없는 거고 연극이라는 글자만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고.”
 
  이호재는 2013년에는 네 작품, 금년에는 한 작품을 공연했다. 꾸준하다. 여전히 현역인 셈이다.
 
  “술자리 좋아하고,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가 이어지고, 모나게 살지 않으니까 계속 제의가 들어오는 것 아닐까요? 젊은 친구들에게는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연극을 시작하지 말라고 방금 말했잖아요? 나도 빨리 연극을 그만두고 싶어요.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그 말은 삶이 다할 때까지 연극을 하신다는 말인가요?
 
  “연극 말고는 할 일이 또 없으니까. 죽어서 대사를 못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대사할 수 있을 때까지는 무대에 서야죠. 젊어서는 힘 있고 혈기 있는 역할을 주로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그런 역할이 버겁습니다. 능력이 안 돼요. 우리 후배들이 공연하는 연극에서 뒷바라지나 해주고, 나이 든 사람이 하면 어울릴 법한 작은 역할을 맡아 젊은 친구들이 하는 연극을 도왔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无涯道人
 
  그는 오태석을 ‘득도한 연출가’라고 평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무애도인(无涯道人)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용호상박〉에서 이호재가 맡았던 역할이 산신령이었다. 사회적 책임을 평생 의식하며 삶을 경영하고, 노년에도 일을 놓지 못한 채 자식뻘 손주뻘 젊은이들을 뒷바라지하며, 그래도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배우. 이호재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응축한 ‘우리의 아버지’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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