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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列傳

50년간 한 해도 공연 거르지 않은 朴正子

“臺詞는 祈禱다”

글 : 장원재  전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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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자는 입 안에 惡靈이 살아 있는 듯이 대사를 표현한다”(이충걸 《월간 GQ》 편집장)
⊙ “古典을 텍스트 삼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관객에게 다가선다는 자세로 發聲연습을
    해야 한다”
⊙ “신별로 나누어 찍는 영화의 제작방식이 좀 어색할 뿐이다. 나는 쭉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타는 것이 좋다”

張源宰
⊙ 47세.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런던대 연극학과 박사.
⊙ 前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現 SNS 바른소리사람들 대표.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
⊙ 저서: 《증언연극사》 《Irish Influence on Korean Theatre》 《오태석 연극-실험과 도전의 40년》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대한민국 현대사는 격동의 역사다. 이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건 불확실(不確實)과 불안(不安)이었다. 모두가 당장 내일의 끼니와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그래서 갈망했다. 누군가가 중심(中心)을 잡아주었으면,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역경을 만나도 묵묵히 자기 역할을 수행해 내는 그런 존재가 있었으면….
 
  그래서 박정자(朴正子·71)다. 관객들은 그녀의 연기가 보여주는 견고함에 감탄하고 그녀의 경력이 증거하는 꾸준함에 탄복한다. 50년이 넘도록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공연을 계속하는 집요한 일관성(一貫性), 중성적(中性的)인 음색(音色)에 지나치리만큼 정확한 발음으로 낮게 깔리며 공연장 저 먼 구석까지 흘러가는 목소리, 절제와 자유로운 동작을 오가는 신체연기. 그렇다. 박정자는 ‘이 정도면 우리는 저 배우를 믿고 의지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묵중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무대 위에서 연기처럼 내뿜는 배우다.
 
  연극배우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연’이 있고 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적극적 선택’이라는 인생의 변곡점(變曲點)을 만나게 된다. 박정자의 ‘우연’, 그러니까 연극을 처음 접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오빠는 영화감독 겸 영화배우
 
박정자의 오빠 박상호는 영화감독이었다. 2001년 4월 국립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원로감독 회고전’에서. 왼쪽부터 박정자, 배우 안성기, 박상호 감독, 김기덕 감독.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연극을 봤어요. 1950년 6·25가 나던 그해 4월, 지금은 부민관이라는 극장에서. 유치진(柳致眞·1905~1974) 작/연출의 <원술랑(元述郞)>에 우리 오라버니가 단역으로 출연하셨거든. 황홀했지. 지금도 그때 장면이 다 생각이 나요. 주연 원술랑에 김동훈(金東勳), 원술랑을 따르는 처녀 진달래가 김선영(金仙英), 원술랑의 약혼녀인 공주가 백성희(白星姬). 김선영은 6·25 동란 중 월북한 배우인데 자그마한 키에 목소리가 낭랑하고 키도 몹시 인상적인 배우였어요.”
 
  부민관(府民館). 여기서 부(府)는 경성부(京城府)의 ‘부’다. 1935년 12월에 준공된 한반도 최대의 공연장. 객석 규모 1500석으로, 두 번째로 큰 극장이던 동양극장의 좌석 수가 700석이었다. 부민관을 요즘 말로 옮기면 ‘시민회관’쯤 되지 않을까. 이 건물의 내력을 이토록 길게 이야기하는 까닭이 있다. 이 건물이 겪은 파란만장한 용도 변화 때문이다. 건국 당시에는 국립극장이었다가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며 4·19를 겪었고 그 뒤로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이었으며, 지금은 서울시 의회 의사당으로 쓰이는 건물. <원술랑>은 대한민국 국립극단의 창단작품이다. 김유신(金庾信)의 아들 원술의 이야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 일부가 실려 있던 바로 그 작품.
 
  박정자의 오빠 박상호(1931~2006)는 영화감독이다. 도금봉이 주연한 1963년 작 <또순이>가 대표작이다. 그런데 연극배우?
 
  “오빠는 연세대에 입학한 인텔리였죠. 일본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나팔, 아코디언, 피아노를 치면서 중학교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꾸던, 당시로서는 좀 특이한 청년이었지. 영화를 하려면 연기의 기본인 연극을 할 필요가 있다고 극단 신협(新協)에 연구생으로 입단을 했어요. 나는 오 남매 중 막내예요. 맨 위 오빠와 언니 셋. 나중에 내가 연극을 한다고 나섰을 때 집안에서 아무도 반대하지 않은 건 오라버니 덕분이지.”
 
  아홉 살 소녀의 연극몽(演劇夢)이 현실이 되는 데는 12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그 시간 속에 6·25가 놓여 있다. 박정자는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때는 다 그랬지, 뭐”
 
  “6·25가 발발했을 때는 강화도 외가로, 1·4후퇴 때는 제주도로 피란을 갔어요. 1·4후퇴 때 얼어붙은 한강을 건넜지. 얼음이 깨지면 거기가 바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다 한 편의 연극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주도로 내려간 건 어떤 연유였나요.
 
  “인천으로 피란을 가보니, 하늘에 비행기가 막 날아다니는 거예요. 그게 B29 폭격기였어요. 어느 순간 총알이 쏟아지면 길에 엎드리고 밭에 숨고… 뭐 그런다고 안전하지는 않지만 일단 피할 수 있는 데까지는 피해 보는 거지. 그때 함포사격도 대단했어요. 바다에 떠 있는 군함이 육지 쪽으로 포를 쏘니 바다 쪽 월미도로 향하는 피란민 대열이 자연스레 생기더라고. 거기서 미군이 배를 태워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배가 LSD였어요. 내가 그 배에서 보름을 지냈어. 그래서 난 보트피플의 심정을 이해해. 처음엔 부산에 입항했는데 못 내리고 다음 날 새벽에 ‘무조건 하선하라’는 방송이 나왔어요. 거기가 제주도 성산포였지. 구좌읍 종달리. 지금도 눈앞에 아스라이 떠오르는, 내 유년의 1년6개월을 보낸 제2의 고향.”
 
  박정자는 부친을 네 살 때 여의었다. 부친은 천일상회라는 제법 규모가 있는 잡화상을 하셨다 한다. 어려서 유치원을 다녔을 만큼 상대적으로 넉넉한 유산을 남겼으나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제주도 생활은 어땠습니까.
 
  “과부에 딸 넷. 하지만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어요. 오빠가 극단 신협을 따라 대구로 피란 갔다가 현지입대해서 군예대(軍藝隊) 요원으로 위문공연을 다녔어요. 군복 입은 사진, 참호 파는 사진도 보내주고…. 군인가족이라고 소소한 혜택이 많았어요. 그래서 버틴 거지. 어머니는 아들이 보고 싶어 목포로, 대구로 다니면서 장사를 하시고. 나도 바구니 이고 사과 장사, 배 장사를 나갔어요. 그때는 다 그랬지, 뭐.”
 
 
  제주도 천막교회
 
  박정자는 “전쟁은 참혹하다, 다 죽는다,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 비극이다”를 반복했다. 실제로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강 도강(渡江)이, 기약 없는 해상유랑이,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라고 했다. ‘비극’과 ‘추억’의 공존? 전쟁에 대한 이러한 ‘이율배반적 기억’은, 어쩌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벌이는 필사적인 사투의 흔적이 아닐까. 남아 있으면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극도의 무력감(無力感)과 허무(虛無)를 걷어내기 위한. 그렇다면 기억은 편집이다.
 
  박정자는 제주도 천막교회(天幕敎會)를 잊을 수 없다. 관객들 앞에서 춤과 노래를 한 첫 무대. 휴전 후 인천으로 돌아와선 주일학교 성극(聖劇)에 출연했다. 이 재미있는 걸 왜 일 년에 한 번 성탄절에만 하나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녔다. 악극단이든 여성국극이든 가리지 않았다. 공연이 있으면 자석처럼 끌려갔다. 인천 최고의 극장 애관(愛館) 무대를 수놓았던 <햄릿>, <오셀로>, <춘향전>, <윌헤름 텔>, <마의태자>, 김동원과 유인자가 나왔던 <처용의 노래>, 영화도 단골이었다. 그 시절의 영화 가운데는 게리 쿠퍼가 주연한 <우정있는 설복(Friendly Persuasion)>(1956)을 잊을 수 없다.
 
  인천 박문국민학교를 다니다 6학년 1학기 마치고 서울 미동국민학교로 전학,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읽었다. 관객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장점을 담임선생님이 알아주신 덕이다. 진명여중고 시절도 박정자가 기억하는 ‘황금의 소녀시대’다. 웅변, 합창, 한국무용에 전념했다. 학교에서 하는 행사엔 늘 그녀가 있었다. 자신을 남 앞에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강한 존재. 박정자 몸 안의 배우기질이 6년 내내 숙명처럼 그녀를 이끌었다. 불빛과 조명과 박수를 먹고사는 사람.
 
 
 
<페드라>로 데뷔

 
  박정자는 이화여대 신문학과 61학번이다. 1년 선배가 대한민국 역사상 주요 일간지 사장을 역임한 첫 여성 언론인 장명수(張明秀) 전 《한국일보》 사장이다. 대학은 3년도 못 다녔는데 그 사이에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대학 1학년 때, 연극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아마추어 연극보다는 본격적인 작업을 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2학년에 올라가자 연극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래서 오디션을 보고 출연한 작품이 프랑스 극작가 라신의 <페드라>다. 목표는 ‘페드라’ 역이었으나 돌아온 건 대사 열여섯 마디의 시녀 ‘퍼노프’ 역. 공연장은 명동 국립극장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갓 돌아온 양동군(1929~2012)이 연출.
 
  “제대로 된 무대에서 한 공연이라 난 이 작품을 데뷔작이라고 말하곤 하죠. 마지막 장면, 독약을 먹고 쓰러지는 페드라를 무릎을 꿇으며 손으로 받쳐줘야 했는데, 타이밍을 못 맞춰서 연출 선생님한테 많이 혼났지. 그때 제대로 콧대가 깨져서 다시는 연습을 소홀히 하지 않아요.”
 
  박정자의 목표는 1999년에 현실이 된다. 극단 자유의 <페드라> 공연이 있었고, 박정자는 왕비를 연기했다.
 
  박정자는 대학 때 세 편의 연극을 했다. 드라마센터나 명동예술극장을 대관해 쟁쟁한 프로 연출가를 초빙해서 올리는 작품이었다. 3학년 때 허규(許珪·1934~ 2000)가 연출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 80대 노파 역을 맡아 극찬을 받았다. ‘대학 극이 기성 연극을 위협한다’는 평이 나올 정도였다. 1990년 김정옥 연출로 국립극단이 이 작품을 공연할 때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그해 가을, 동아방송이 개국했다. 성우(聲優)를 뽑는다기에 덜컥 응시를 했다. 드라마라면 라디오 연속극이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시절이다.
 
 
  사미자·전원주 등과 동기생
 
동아방송 전속 성우 1기생들. 맨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남정임, 김희준, 성재희, 고은아, 강부자, 사미자, 박정자(원안).
  “경쟁률이 150대 1 정도였어요. 사미자, 전원주, 김무생, 박웅 등이 동아방송 성우 1기 동기입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재학생은 뽑을 수 없다는 거예요. 대학에선 취직은 물론, 결혼도 학칙 위반이던 시절이었으니…. 미련 없이 성우의 길을 택했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이화여대는 박정자에게 명예졸업장을 줬다. 개교 이래 최초로 명예졸업장을 받은 네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박정자다. 사실은 성우를 하면서도 학교를 다녔다. 김갑순(1914~2005) 학장의 부탁을 받고 퇴근 후 재학생들과 연극 연습을 하고 무대에 섰다. 1964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막을 올린 가르시아 로르카 작 <피의 결혼>. 그때 만난 연출가가 평생의 연극 동지 김정옥(金正鈺·81) 선생이다. 박정자는 이 작품도 되새김질했다.
 
  1985년 작가의 고향인 스페인 말라가 국제연극페스티벌 야외극장 공연 때, 자막이 없었어도 관객은 열광했고 현지 신문은 ‘로르카는 배반당하지 않았다’라고 제목을 뽑았다.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는 세계적인 배우다’라는 평가에 통역이 흥분하자 김정옥이 말했다, 나지막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박정자는 이미 세계적인 배우다. 다만, 스페인까지 그 명성이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서 잠깐 엉뚱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고대(高大)에 건물을 하나 지어주기로 하자 현대그룹 내 연대(延大) 출신들이 조심스레 건의했다. 사학(私學) 양대 명문이니 연대에도 건물을 하나 기증해 주라고. 그러자 “난 고대를 다녔다. 그래서 건물을 지어준 거다”(회장님께서 국민학교만 나왔다는 건 세상이 다 압니다. 그런데 고대?). “고대 도서관 공사를 할 때 내가 건설노무자로 매일 학교에 다녔다”(일동침묵). 그렇다면, 박정자가 이대에 다닌 건 정주영 회장의 케이스에 비해 ‘보다 대학 본연의 기능’에 가까운 방식이었을 터이다.
 
  —직장생활과 대학생활(?)을 병행하자면 힘들지 않았나요.
 
  “전혀. 방송국 생활은 재미있지만 괴로운 나날이었어요. 발음부터 시작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드라마는 별로 하지 못했어요. 목소리가 너무 튄다는 것이 이유였죠.”
 
 
 
박정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

 
  내레이션 아니면 할머니, 어머니 역할이 그녀에게 돌아오는 배역이었다. 연극은 갈증을 해소하는 청량제였다. 목소리? 《월간 GQ》의 이충걸 편집장은 “박정자는 입 안에 악령(惡靈)이 살아 있는 듯이 대사를 표현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악령이 어디 있는가? 이 말은, 어떤 경우든 너무나 정확하게 발음되어 오히려 두려운, 상상력의 극한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박정자의 목소리에 대한 역설적 극찬이다.
 
  “나도 알지. 내 목소리가 무섭다는 얘기가 있다는 걸…. 합창단에서 내 파트는 소프라노였어요. 부드러울 땐 부드럽다는 뜻이죠. 지금 내 목소리가 무서운가?”
 
  —아니, 전혀. 그런데 왜 그렇게 정확한 발음에 집착하나요.
 
  “대사(臺詞)는 기도(祈禱)니까. 기도든 주문(呪文)이든 정확해야 하늘에 닿을 것 아닌가, 대사를 쉽게 생각하면 안돼요. 고전(古典)을 텍스트 삼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관객에게 다가선다는 자세로 발성(發聲)연습을 해야 해요.”
 
  필자는 박정자 목소리 연기의 하이라이트를 기억한다. 1990년에 공연한 마샤 노만 작 <굿나잇, 마더>. 딸의 자살을 만류하는 어머니가 박정자였다. 딸이 자살을 예고하고 나누는 모녀 사이의 생애 마지막 대화. 농담인지 진담인지 설마설마 하며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딸은 권총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이렇게 안 하면 경찰이 엄마를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잠긴 문 앞에서 박정자는 딸을 달래다, 애원하다, 고함치다, 분노를 폭발시키다, 총성이 울리자 절망하고 쓰러진 채 아들에게 전화를 걸고 상황을 설명한다. 불과 1분 남짓한 시간에, 성격이 판이한 수많은 감정의 극한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섬뜩한 독백. 그건, 오로지 전 세계에서 박정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다.
 
  “과찬이에요. 그런데 <굿나잇, 마더>는 재공연할 생각이 없어요. 그때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거든. 그런 경우가 몇 작품 더 있지.”
 
 
  온달의 어머니
 
  50년을 무대에 서다 보니 작품에 대한 평가와 박정자의 개인사(個人史)가 종횡으로 얽히는 작품들도 있다. 최인훈이 쓰고 김정옥이 연출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1970년 명동 국립극장 초연 때도 1974년과 1986년 재연 때도 박정자의 배역은 ‘온달의 어머니’였다. 내내 한마디도 안 하다가 아들인 온달이 전사(戰死)하고 며느리인 평강공주도 반대편 정치세력에게 목숨을 잃은 뒤 혼자 쓸쓸히 무대에 남아 흘리는 독백. “눈이 오려나…. 얘가 왜 이리 늦누.”
 
  1974년 공연 때는 만삭의 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연극 초반에 공주를 만났을 때 바닥에 엎드려야 하는데, ‘이러다 아이가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될 만큼 태아(胎兒)가 움직이던 공연, 분장실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다 가까스로 무대에 올라 하루하루를 버티던 공연이었다.
 
  박정자는 1972년 11월 24일에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서른한 살의 결혼. 신랑은 네 살 연하였다. 군부대 위문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추워서 떨고 있는 박정자에게 털모자 방한모를 씌워준 것이 연애의 시작이었다. 창경원과 비원 사이의 돌담길이 두 사람이 즐겨 찾던 데이트 코스. 이지송 소위는 장모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인테리어 사업을 접고 광고 회사에 취직했다. 박정자의 고백에 의하면 이 소위와 박정자는 사실은 알던 사이다. 《여성동아》 기자를 하던 친구 이지선 기자의 남동생. 위문공연도 그 친구의 권유로 나섰던 길이다. ‘친구’가 ‘시누이’가 된 건 오로지 ‘친구’ 탓이다.
 
 
  <위기의 여자>
 
1986년 연극 <위기의 여자>는 6개월 동안 250회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86년 시몬 드 보부아르 원작 정복근 각색의 <위기의 여자> 공연은 우리 연극계의 두 거장 김정옥과 임영웅의 사이가 삐끗한(?) 공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두 분 모두 박정자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캐스팅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여러 사람을 추천하다 아예 직접 나서기로 했다. 연출자 임영웅은 박정자의 ‘강한 이미지’가 이 작품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다 ‘그 이미지를 한번 역이용해 보자’며 작업을 시작한다. 3월 30일 VIP 대상 첫 공연부터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극단 자유의 이병복 대표가 연출가 임영웅에게 ‘박정자를 여자로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고 다음 날부터 주부관객들이 산울림 소극장에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남편 역 조명남의 대사에 객석은 실시간으로 분개했고, 박정자가 넋두리를 하면 주부들이 흐느꼈다. “<위기의 여자>에 ‘위기의 여자’들이 몰려온다”는 기사가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을 장식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해 가을에 극단 자유의 창단 20주년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 여름이 다 가도록 <위기의 여자>는 연일 만원사례였다. 공전의 히트작이 오랜만에 나왔는데, 주연배우는 하차(下車)를 고민하며 두 극단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박정자는 다시 한 번 온달의 어머니가 되었다. <위기의 여자>는 배역을 교체해서 공연을 이어갔다. 박정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던 김정옥은 첫 공연을 마치고 “역시, 당신은 무대 위에서 빛난다”는 말로 갈등을 봉합했다.
 
 
  임영웅과 김정옥
 
1971년 <슬픈 카페의 노래>를 공연할 때 이병복(왼쪽), 김정옥(가운데)과 함께한 박정자(오른쪽).
  필자는 이 공연을 세 번 관람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자의 대사는 공연 말미의 몇 마디가 전부다. 그때의 감상을 적어놓은 메모가 있다. “보이지 않는 투명 보자기가 객석에 펼쳐져 있다. 박정자라는 보자기다. 공연 내내 대사가 없던 노파가 허공에 대고 말을 던진다. 그때 갑자기 압도적인 존재감이 발생한다. 투명 보자기가 객석 전체를 한 보퉁이로 꽁꽁 묶고, 관객들이 미처 적응을 못한 사이에 조명이 꺼지고 배우들이 퇴장한다.”
 
  —김정옥의 한마디에 그토록 감격한 이유는요.
 
  “그분은 내 예술적 등대(燈臺)니까요. 극단 자유는 우리나라 최초로 집단창작(集團創作·total theatre)을 추구했던 극단이죠. 줄거리만 있는 텍스트를 놓고 연출가와 배우들이 연습을 하며 살을 붙여 나가는 겁니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김정옥 선생은 배우들이 스스로 작품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했어요. 디테일한 요구는 일부러 하지 않았죠. 배우들 각자가 자유로운 상태에서 스스로 생각해서 만들어가는 동선, 그걸 관망하면서 커다란 방향만 잡아주셨으니까 ‘등대’인 거지. 극단 명칭 자유(自由)도 절묘한 작명이라고 생각해요.”
 
  —임영웅 선생은 그 반대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미세동작, 시선, 발걸음 하나하나를 체크할 정도로 치밀한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는 점이 하나 있어요.”
 
  —뭔데요.
 
  “사람관리. 임영웅 선생은 배우의 평소생활을 꼼꼼하게 관찰해요. 그걸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니까 배우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데도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오는 겁니다.”
 
  극단 자유는 박정자의 고향이다. 본인 스스로도 ‘박정자의 연극은 오로지 극단 자유에서 시작해서 극단 자유로 끝난다’고 생각한다. 1966년에 창단, 대표 이병복, 연출 김정옥, 최불암, 김혜자, 김용림, 최지숙, 김무생, 윤소정 등이 자유의 동인(同人)이다. 극단 자유의 대표이자 공연의상을 모두 만들었고 카페 떼아뜨르라는 소극장 운영자이기도 했던 이병복(李秉福·87)은 그래서 박정자의 항로를 인도하는 또 다른 ‘등대’다.
 
 
  추송웅
 
1969년경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할 당시의 박정자(오른쪽). 왼쪽은 추송웅, 가운데는 배우 겸 디자이너 박항치.
  “이 선생님은 나에겐 어렵고 먼 분이죠. 거의 40년을 함께 지냈는데도 그분을 뵈면 늘 ‘넘어설 수 없는 무언가’를 느껴요. 연극배우 박정자는 이분이 만들어낸, 원형성(原形性)의 탐구랄까 인간 본연의 심연(深淵)을 보여주는 듯한 이미지, 과감한 생략과 색채감의 포로예요. 예리하고 정확해서 승복할 수밖에 없는….”
 
  —이병복 선생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1948년 여인소극장 창단멤버였습니다. 1957년 부군인 서양화가 고(故) 권옥연 화백과 파리 유학을 떠나 조각을 공부하고 의상으로 학위도 받았죠. 귀국 후에는 유학 시절에 알게 된 김정옥 선생과 극단 자유를 창단했고. 그런데 항간에는 두 분을 부부로 오인하는 분들이 더러 있더라고요.
 
  “워낙 함께 작업을 많이 하셨으니까. 그런데 그 얘기만 나오면 두 분 다 손사래를 쳐요. 나한테는 추송웅(秋松雄·1941~1985)이 그런 사람입니다. 공연도 같이 많이 했고, 부부로 나온 적도 많아서 실제 부부냐고 오해를 하는 분들이 계셨지.”
 
  —1968년 작 <우정(友情)>도 사연이 많은 공연이라고 들었어요.
 
  “충무로 1가 24번지 카페 떼아뜨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극장이에요. 개관기념 공연은 <대머리 여가수>였고, 추송웅과 내가 스시 부부로, 김무생과 최지숙이 마시 부부로, 함현진(咸賢鎭·1941~1977)이 소방대장으로 출연했죠. 두 번째 공연이 <우정>이었어요. <햇빛 밝은 아침>은 함현진과 내가 나오는 2인극이고, <우정>은 추송웅까지 셋이서 공연했죠. 절친한 친구 두 사람이 한 여인을 동시에 사랑하지만 우정을 지키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비밀을 지킨다는 내용이지. 강원도 3사단 최전방 부대 사병식당의 ‘매트리스와 백열전구’로 꾸민 가설무대에서 장병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어요. 내 결혼의 계기가 되어준 고마운 작품이지.”
 
 
  ‘튀어야 사는 배우’
 
  —항간에는 이 작품 이야기만 나오면 박정자가 눈물을 흘린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지금은 울지 않아요. 나이를 먹으면 다 추억이 되는 거니까. 추송웅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등질 줄 누가 알았나요. 그 젊은 나이에 패혈증으로 쓰러져 갑자기 가버리다니…. 추, 함, 나 세 사람은 밤낮으로 명동 거리를 누비며 밥 먹고 연습하고 신나게 공연했어요. 각자가 환갑이 되면 다시 모여 잔치 대신 <우정>을 공연해 주기로 약속을 했지. 우는 대신, 생각이 나면 ‘난 누구랑 <우정>을 하란 말이냐, 이 나쁜 남자들아!’라고 되뇌며 속으로 웃죠. 함현진은 테헤란에서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했어요.”
 
  —두 사람은 어떤 배우였나요.
 
  “추송웅은 경남 고성 출생, 함현진은 서울고를 나왔어요. 둘 다 중대(中大) 연극영화과 1기죠. 추송웅은 튀어야 사는 배우야. 어떻게든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지. 추송웅만큼 열정을 뿜어내던 배우는 없어. 함현진은 너무 일찍 태어난 사람이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기품이랄까 품위랄까, 귀족적인 느낌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배우였죠.”
 
  박정자의 영화와 TV드라마 출연횟수는 상대적으로 적다. 오빠가 영화감독이었으니 그쪽에서 제의가 이어졌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오빠의 작품에 출연한 적은 없어요. 영화를 일부러 안 한 건 아니에요. 신별로 나누어 찍는 영화의 제작방식이 좀 어색할 뿐이지. 나는 쭉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타는 것이 좋거든. 그래도 영화를 열 편 넘게 찍었어요. 연극만 하고 있을 때, 김기영(金綺泳·1919~1998) 감독께서 픽업해 주셨어요.”
 
  박정자는 영화에서도 존재감을 보여줬다. 1975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 1985년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으로 다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지난 호에 나간 <만다라>에서 속세로 안성기가 찾아가는 어머니가 박정자다.
 
 
  <19&80>
 
박정자는 <19&80>을 다섯 차례 공연했다. 2004년 김영민과 함께 공연한 <19&80>.
  —꼭 한 번 다시 하고 싶은 공연이 있다면요.
 
  “있어요. <19&80>.”
 
  이 연극의 원래 제목은 <해롤드 앤 모드(Harold and Maude)>, 원작자는 콜린 하긴스다. 80세의 나이임에도 우주 비행사가 되는 꿈을 여전히 버리지 않은 엉뚱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인 모드가 19세 청년 해롤드를 만나,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지혜와 사랑을 남겨주고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다. 1987년 김혜자와 김주승이 국내 초연했고, 박정자는 상대배우를 바꿔가며 2003, 2004, 2006, 2008, 2012년 다섯 차례 공연을 했다. 뮤지컬로도 만들었고, 다섯 번 모두 프로듀서가 되어 직접 제작을 맡았다.
 
  —이 작품에 그렇게 애착이 많습니까.
 
  “80 노파의 삶이 바로 내 얘기 같으니까. 모드는 내 롤모델이에요. 사랑스럽고 지혜로운 할머니. 무소유를 실천하는 환경운동가. 시청 앞에서 스모그와 매연에 시달리는 나무를 뽑아다 공기 맑고 햇볕 좋은 데 심어주고, 동물원의 물이 더럽다고 바다표범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목욕시키고 바다에 풀어주는 사람. 주인공의 극중 나이도 마음에 꼭 들어요. 80이라는 나이는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충만한 시간이죠. 한 배우가 늙어가면서, 나이 먹어가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 80이라는 나이가 있어야 가능한 작품…. 남자배우를 바꾸는 건 익숙해지기 싫어서지. 익숙해지면 아무래도 긴장감이 떨어지니까. 늘 새롭게 공연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상대역을 바꾸는 거야. 그리고… 내 연극생애의 오점(汚點)을 바로잡아야 하니까.”
 
 
  汚點
 
  —오점이라뇨.
 
  “2012년 12월 중순부터 2월 초까지 공연하기로 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이 겹치면서 12월 말로 막을 내려야 했어요. 박정자 연극인생 50주년 기념공연이 사납게 마무리된 거지. 여러 말 할 것 없이 내가 오만했던 거예요. 그 벌을 받은 것이라 생각해.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다시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 기회가 닿는다면 매년이라도, 아니면 두 해 걸러 한 번이라도 <19&80>을 공연하고 싶었어요. 내가 모드의 극중 나이인 여든이 되는 날까지. 공연과 더불어 관객도 배우도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세월을 삭히고 마음을 무르익히는 조용한 ‘연극축제’를 하고 싶었어요. 기업이든 개인이든, 지금이라도 누군가 동참을 해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어요. ‘한 배우를 응원해 달라’는 말씀을 감히 드려도 될까요? 문화는 축적이에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벽돌을 쌓아가듯 한 해 한 해 다른 색깔로 이어붙이는, 오래된 장맛 같은 <19&80>을 공연하고 싶다는 것이 내 오랜 소망이죠.”
 
 
  박정자에게 연극이란 무엇인가
 
  “박정자에게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엔 “종교이자 조국”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대에서 오롯이 50년을 견딘 배우에게 “좋은 배우란 어떤 존재입니까?”라고 묻자 “모르겠다. 그건 관객이 판단하는 거다”라고 했다. 여전히 중성적인 저음으로, 정확하고 낮게 깔리는 분명한 메시지였다.
 
  박정자는 그렇게 ‘목소리’를 남기고, 국립극단의 최신작 <단테의 신곡>(연출 한명숙, 11월 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연습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중심’이 잡힌, 당당하고 우아하며 단호한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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