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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비결

토크콘서트로 뜬 개그맨 吳宗澈

“프로그램 진행자는 CEO이자 영업사원”

글 : 이근미  월간조선 객원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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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호·지상렬·강성범·심현섭 등이 개그맨 입사 동기, 1000명의 개그맨 중 1명으로 살 땐 불행
⊙ 강연과 공연 접목한 신개념 지식 토크버라이어티쇼 ‘오종철 톡쇼’ 구상
⊙ 토크콘서트 성공 비결은 무대와 관객이 하나 되도록 추임새 넣고 분위기 고조시키는 것

吳宗澈
⊙ 40세. 중앙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 1996년 SBS 5기 공채 개그맨. 에이트스프링스 대표. KT ‘드림스테이지’ 진행,
    잡코리아 ‘나꿈소(나의 꿈을 소리치다)’, CBS <세바시>, <만사형통>,
    SBS <좋은 아침> ‘생방송 연예특급’ 진행.
⊙ 저서: 《입사면접 필살기》 《지구인 이야기》 등.
  요즘 토크콘서트가 유행이다. 정치색이 강한 토크쇼부터 기업홍보용 대형 토크쇼까지 다양하다. 개그맨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오종철(吳宗澈)씨가 토크콘서트 문화를 주도하며 소통테이너로 나섰다. 달라진 소통 방식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토크콘서트, 강연과 공연을 접목한 신개념 쇼를 진행하며 바쁘게 달리고 있는 오종철씨를 만났다.
 
 
  ‘소통테이너’를 아십니까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마흔 살, 고용이 불안한 요즘은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자칭 ‘무명 개그맨’이었던 오종철씨는 마흔에 ‘소통테이너’로 타이틀을 바꾸고 휴대폰 컬러링도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로 장착했다. 그는 실제로 기업체와 관공서의 섭외 1순위 강사, 공연 기획과 행사 진행자로 잠잘 시간조차 부족한 ‘제일 잘나가는’ 인물이 됐다.
 
  2011년 2월, 3년간 진행하던 EBS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갑작스럽게 하차당한 뒤 일거리가 없어 불안해했던 그는 현재 잡코리아 힐링토크콘서트인 ‘나꿈소(나의 꿈을 소리치다)’, CBS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15분)>와 <만사형통>, KT 토크콘서트인 ‘드림스테이지’ 등 여러 프로그램의 기획과 진행을 맡고 있다. 갑작스런 프로그램 하차라는 고개를 넘어 승승장구하는 그에게 요즘 “한 수 배우고 싶다, 프로젝트에 나도 끼고 싶다”는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그는 1996년 SBS 개그맨 공채 5기 출신이다. 함께 합격한 김준호, 지상렬, 강성범, 심현섭씨가 큰 인기를 누린 데 비해 그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000명의 개그맨 중 1명으로 살 땐 불행했다”는 그는 자신이 갑작스럽게 바빠진 이유를 달라진 소통 방식에서 찾았다.
 
  “싸이씨는 방송국의 힘이 아닌 유튜브를 통해 짧은 시간에 세계시장을 석권했습니다. 소통의 방식이 달라진 거죠. 스마트폰이 출현하면서 ‘내 손 안의 미디어’로 언제 어디서나 콘텐츠를 꺼내볼 수 있는 환경이 됐습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하지 않고 직접 관객과 소통하게 된 거죠.”
 
  그 결과 유튜브에 올릴 수 있는 짧으면서도 감성적인 콘텐츠, 언제든지 부담없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강세를 보이게 되었다. 바뀐 환경 아래 오종철씨는 제도권 밖에서 ‘소통테이너’로 스스로의 가치를 창출해 내는 중이다. 소통테이너는 소통과 엔터테이너를 합성해 그가 만든 신조어이다.
 
 
  ‘중계차 타는 개그맨’이 되다
 
  그는 전공부터 남다르다.
 
  “대기업 임원인 형이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이에요. 자랄 때 형과 비교 당하는 게 스트레스였죠. 아버지와 형이 코미디 프로를 시청하며 웃는 걸 보고 ‘나도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형의 말에 중앙대 토목공학과로 진학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회를 도맡아 봤던 그는 취직 대신 SBS 공채 개그맨 시험을 봤고 한번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해부터 SBS 코미디 프로그램이 다 없어지는 바람에 간간이 TV 리포터,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건설현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아 아르바이트할 때는 전공 덕을 많이 봤어요. 청계 고가도로 안전 진단하는 회사에서 일당 5만원을 받고 일할 때 친구는 차 안에서 기계를 조종하고 저는 땡볕 아래서 엄청나게 큰 엑스레이 기계를 밀며 철근의 부식(腐蝕) 상태를 체크했죠. 당시 땅 밑까지 들어가서 다 살펴봤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청계천 철거할 때 제가 특별생방송을 하게 됐어요. 방송하면서 청계 고가도로는 무슨 공법이고, 지하 상황은 어떻고 했더니 제작진이 놀라는 거예요. ‘쟤는 공부하는 애다’ 그런 생각을 하신 거죠.”
 
  그 뒤로 그는 ‘중계차 타는 개그맨’이 되었다. 현장 중계는 변수가 많아 순간 대처능력이 중요하다. 갑자기 화면이 안 나오면 현장에 있는 사람을 인터뷰하는 등 자연스럽게 시간을 끌어야 한다. 남자 리포터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확정 생방송 때는 고향 봉하마을에 가서 가족과 주민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는 SBS TV <좋은 아침>에서 13년째 ‘생방송 연예특급’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리포터로 인정을 받았지만 개그맨으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99년에 SBS <코미디 살리기> 프로가 신설되면서 큰 활약을 펼쳤지만 시청률이 높지 않았다. 2003년에 KBS <폭소클럽>에서 직접 쓴 ‘생활 요가’라는 코너가 인기를 끌었으나 정작 오종철씨는 진행자 역할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아이디어를 내고 대본을 쓰고, 고생을 많이 했지만 반짝 인기를 끌다가 끝나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캐릭터 하나 띄우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고 개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MC 쪽으로 방향을 잡았죠.”
 
  지난 17년간 TV에 얼굴이 많이 나왔고 요즘도 매주 ‘생방송 연예특급’에 출연하지만 강연현장에 가면 “처음 본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고로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방방 뛰면서 내 길을 구축하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긍정에너지를 발산하자’는 각오로 살고 있습니다.”
 
  개그맨 시절 초창기부터 그는 라디오 DJ 꿈을 꾸었다. 롤모델인 이문세씨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운전할 때면 으레 라디오 진행 연습을 했다.
 
  “제가 원래 입 안에서 우물거리는 말투였어요. 운전할 때마다 입에 볼펜을 물고 말하는 연습을 해서 지금처럼 밖으로 탁 터지는 말투가 됐어요.”
 
 
  CEO 마인드로 프로그램 진행
 
  서울 토박이인 오종철씨는 서울말을 아나운서처럼 정확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로 가끔 라디오에 출연했던 그에게 2001년 6월 라디오 진행 제의가 들어왔다.
 
  “아는 PD께서 오디션을 보라고 부르셨어요. 대본도 안 주고 진행해 보라고 하기에 평소 연습한 대로 했더니 새벽 1시부터 2시까지 매일 생방송이고, 아나운서가 진행해야 하는 프로그램이어서 보수가 80만원밖에 안 되는데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더군요. 어떻게 온 기회인데 놓칠 수가 있나요. 무조건 했죠. 9·11테러가 발생했을 때 뉴욕에서 인터넷으로 듣고 있던 청취자가 실시간으로 소식을 알려주었어요. CNN을 틀어놓고 논설위원과 함께 뉴욕 상황을 생중계하다시피 했어요. 그 방송을 라디오 본부장이 들었고 다음 개편 때 저녁 7시대로 옮겨가서 1시간 동안 연예계 리뷰를 맡았어요. 보수는 4배가 올랐죠.”
 
  2003년에 경인방송으로 옮겨 TV와 라디오를 누비며 바쁘게 활동했다. ‘경인방송의 신동엽’이라는 말을 들으며 상한가를 쳤지만 2005년에 경인방송이 문을 닫으면서 다시 시련이 시작되었다.
 
  “고정 프로그램은 다 없어지고 한두 개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가는 정도였어요. 사업을 결심하고 리포터 학원을 차렸는데 처음엔 순조로웠으나 신축건물로 학원을 옮기면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건물 준공허가가 나지 않아 3년 동안 임차료만 물어주게 되었지요. 시설을 잔뜩 해놓은 데다 방송활동도 제대로 못해 결국 적지 않은 빚을 지게 되었지요. 중국에서 리포터 학원을 개원하자는 제안이 있어 여러 차례 중국을 오갔지만 결실은 없고 경비만 나갔어요. 여러모로 힘든 시기였죠.”
 
  2008년 EBS 라디오에서 <직장인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방송시간이 청취율 0.00001%도 나오기 힘든 낮 12~1시 시간대라는 게 문제였다.
 
  “선뜻 맡기가 힘들었어요. 못하면 6개월 후에 없어지는데, 프로그램이 실패했다는 소문이 나면 재기(再起)하기 힘들어지거든요. 무조건 잘해서 성공시키자는 결심으로 시작했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은 ‘제품’이자 ‘서비스’고 진행자는 ‘CEO’이면서 ‘영업사원’, 청취자는 ‘고객’이라고 스스로 정의한 뒤 그 키워드를 가지고 서점에 갔어요. 정확한 질문을 하니 책이 답을 주더군요.”
 
  특히 《마이크로 트렌드》라는 책에서 해법을 찾았다. ‘1% 고객에 집중하라’는 대목을 읽고 한 사람의 청취자에 집중하기로 작전을 짠 것이다.
 
  “예를 들면 ‘오종철 성공데이’를 만들어 꿈과 목표를 선포하게 하고 멘트도 ‘오종철 성공데이인 오늘 <직장인 성공시대> 첫 곡은…’ 이런 식으로 방송했어요. 어떤 책에 보니 한 사람이 평생 2500명과 관계를 맺는다고 하더군요. 그중에 1%와는 직접 만난대요. 한 사람의 성공데이를 진행하면 25명에게 퍼져나가는 거죠. 이어령(李御寧)씨가 《젊음의 탄생》이라는 책에 ‘비행기’ 노래의 철학을 쓰셨기에 청취자들에게 ‘떴다 떴다 오종철’ 이런 식의 노래를 불러줬어요. 3년 동안 성공데이에 초대된 청취자가 345명인데 그분들이 제 팬클럽인 ‘리액터스’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회원들이 제 공연 때마다 와서 응원을 해줍니다.”
 
 
  악성댓글로 자살유혹에 시달려
 
  작은 가게 사장들과 작은 회사도 성공데이의 주인공으로 초대해 큰 인기를 끌었고, 50원의 문자정보이용료를 모아 아프리카에 학교를 지어주는 프로젝트에 3000여만 원을 모금하기도 했다. 프로그램의 인기가 올라가자 방송시간이 1시간에서 2시간으로 늘어났다.
 
  “처음에 유료문자 이벤트 할 때 몇십 통에 불과했는데 나중에는 3000통이 넘었습니다. 가장 인기 높은 공중파 라디오 프로그램과 비슷한 수치였죠. <성공시대>가 라디오 최고청취율이라는 1%를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성공시대>를 진행할 때 위기도 있었다. 모 단체에서 그의 멘트를 트집 잡아 고발하는 바람에 자살유혹에 시달렸다고 한다.
 
  “최진실 누나가 왜 자살했는지 그 심정을 그때 알겠더군요. 작가가 대본을 쓴 거고, 방송사에서 허용된 사항을 내보낸 건데 그 협회는 오직 저를 타깃으로 삼아서 몰아붙였습니다. 미니홈피에 악성댓글을 달아 폐쇄했더니 아내 미니홈피에 ‘남편 관리 잘하라’는 악성댓글을 쓰고 아이들 사진 밑에도 험한 말을 달았어요. 당시 신생이던 그 단체가 이슈를 만들기 위해 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봐요. 경찰에 불려갔더니 오히려 ‘고발이 들어와서 오라고 했지만 저쪽이 심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나날이 저에 대한 공격이 심해져서 맞고소를 하려고 했으나 조용히 있어야 저쪽의 기운이 빠진다는 조언을 듣고 참았습니다. 악성댓글은 살인행위입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저를 공격했던 분이 지금 더 큰 단체의 장이 되었는데 한번 만나고 싶어요. 당신이 사람을 죽일 뻔한 거 아느냐고 물어보려고요.”
 
  그래도 그는 “<성공시대>를 통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했다”며 고마워했다. 전문가들과의 대담을 위해 끊임없이 책을 읽었으며 매주 열린 공개특강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옥같은 책을 쓰신 저자들 중에 말을 잘 못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현장에서 사람들과 호흡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분도 있고, 잘난 척하는 분도 있었어요. 그럴 때 제가 옆에서 긴장을 풀어드리고, 지루할 때 재미있는 멘트를 넣고, 잘난 체할 때 수위를 조절해 주면서 객석과 소통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강연도 진행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소통테이너라는 걸 떠올렸죠.”
 
  그는 2011년 2월에 강연과 공연을 곁들인 신개념 지식 토크버라이어티쇼 ‘오종철 톡쇼’를 구상해 450명 앞에서 론칭쇼를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성공시대> 진행을 그만두라는 통보가 날아왔다.
 
  “3년이나 진행했는데 일주일 전에 하차 통보를 받았습니다. 적어도 한두 달 전에 통보를 해주는 게 상식인데 정말 황당했죠. 방송을 하고 있어야 ‘오종철 톡쇼’도 잘될 텐데 갑자기 하차 통보를 받으니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폐지 직전의 토크콘서트 살려내
 
  마흔 살을 코앞에 두고 고정 프로그램이 사라져 실직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예전에 사업할 때 진 빚이 많이 남아 있어 그야말로 생계가 걱정되었어요. 광화문에 오피스텔을 얻어 에이트스프링스라는 이름으로 기획사 등록을 하고 아내 이름으로 출판사를 내 창업자금을 지원받았어요. 개그맨은 은행에서 대출받기 힘들어 제2금융권에서 2000만원을 빌렸어요. 나이 마흔에 아들 둘, 불안하고 공허했지요.”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3년간 읽은 수백 권의 책과 <성공시대>를 진행하면서 알게 된 사회 명사들이었다.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죽 보는데 3년 전에 대부분 연예인이었던 목록이 강사와 저자, CEO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삶의 무대를 옮긴 것 같은 착각이 들더군요. 힘든 상황이었지만 ‘오종철 톡쇼’를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명 개그맨인 그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은 크지 않았다. 2011년 3월 광화문 KT 건물 앞을 지나다가 1층에 멋진 공연장이 있는 걸 발견했다.
 
  “저 무대에서 쇼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실무자를 만났어요. 2개월이 지나서야 제안서를 갖고 오라고 하더니 한 달 뒤에야 실제 그 무대 담당자를 만났어요. KT에서 매달 ‘드림스테이지’를 열었는데 인기가 없어서 폐지할까 고려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두 번만 무대를 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1회에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작가 김난도 교수를 초청했고, 재즈 가수가 공연을 했는데 대성황을 이루었어요.”
 
  2회 때는 강사 덕분에 잘됐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건축가 임형남·노은주 부부의 강연과 비보이 공연을 했다. 2회 공연도 대성황을 이루자 KT 쪽에서 공연을 계속해 달라고 요청했다. ‘드림스테이지’는 KT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으로 관람료 1000원과 KT가 후원하는 금액으로 청각장애우들에게 디지털 보청기를 보급한다.
 
  오종철씨는 약간의 진행비를 받아 공연팀과 강사를 섭외하는 데 대부분 사용한다. 전적으로 오종철씨의 섭외력과 기획력에 달려 있는 ‘드림스테이지’는 23회를 이어오면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무엇보다도 강연과 공연을 접목한 토크콘서트의 시초로 ‘오종철’이라는 브랜드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드림스테이지’에 매회 200여 분이 관람을 하시는데, 각 기업의 담당자들이 제 공연을 보시곤 저한테 강연이나 공연요청을 해왔어요. 기업은 행사나 강연도 많고, 사회공헌활동을 위한 콘텐츠를 필요로 하죠.”
 
  2011년 3월에는 다이어리가 텅 비어 있었는데, 지금은 2개월 후까지 강연과 공연 약속, 방송 진행과 인터뷰 약속으로 꽉 차 있다. 오종철씨는 개별적으로 강연도 하면서 각 기업에서 토크콘서트와 론칭쇼를 진행하고 있다. 때로는 교육을 토크쇼 형태로 진행하기도 한다.
 
  “론칭쇼 할 때 대표이사 축사, 엔지니어 PT 같은 걸 하면 고객들이 무슨 얘기인지 몰라요. 얼마 전에 전자책 서비스 관련 회사의 론칭쇼를 했는데 미리 고객들에게 질문지를 받아서 제가 개발자에게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부드럽고 재미있게 할 수 있어요. 객석으로 내려가서 고객의 질문을 받고 토론도 유도하죠. 사업설명회와 교육도 토크쇼 형태로 하면서 공연을 곁들이니까 인기가 있습니다.”
 
 
  개그맨의 장점 살려 웃음 유발
 
  최근에 ‘토크콘서트’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고 있다. 방송인 중에서 토크콘서트를 진행하는 인물은 오종철씨와 김제동씨 정도이다. 기업이 주관하는 토크콘서트로는 삼성그룹의 ‘열정락(樂)서’가 있다. ‘열정락서’는 대형 공연장이나 대학 강당을 빌려 많은 사람을 상대로 강연을 하는 형태이다.
 
  오종철씨의 토크콘서트는 소규모 공연장에서 열린다는 특징이 있다. KT ‘드림스테이지’ 무대는 200석, 잡코리아의 ‘나꿈소’ 공연은 150석인 명보아트홀 하람홀에서 열린다. 소통테이너인 만큼 객석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9월 20일에 열린 ‘드림스테이지’에서는 조연심 강사의 강연이 끝난 뒤 30분 이상 객석과 토론이 이어졌고, 9월 24일에 열린 ‘나꿈소’ 3회 때도 준오헤어 강윤선 대표와 영어강사 레이나 외 2명의 출연자가 강연을 마친 뒤 역시 30분 이상 객석과 대화를 했다.
 
  7월부터 선보인 잡코리아의 ‘나꿈소’ 공연은 시작하자마자 화제가 되었다. 다른 업체와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거쳐 잡코리아 공연을 따낸 오종철씨가 강사 섭외부터 모든 것을 주관하여 매달 공연을 한다.
 
  “잡코리아에서 바뀐 로고를 알리기 위해 뮤지컬 한 편을 만들려다가 토크콘서트를 하게 됐어요. ‘나꿈소’는 매회 4명의 출연자가 나와서 20분씩 현재까지의 성공과 앞으로의 꿈을 소개하는 형식이에요. 관객은 출연자가 꿈을 이뤄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의 꿈을 생각하게 되죠. ‘나꿈소’ 공연 이후 잡코리아 사이트의 방문자가 2만5000명이 늘었어요. ‘나꿈소’ 공연을 만들면서 기업 소통 방식이 바뀌었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일방적으로 광고하는 형태에서 휴먼 커뮤니케이션으로 바뀐 거죠. ‘나꿈소’에 열광하던 대중이 어디서 만들었는지 찾아보고, 잡코리아가 주관한다는 사실을 알면 기업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수순이죠.”
 
  ‘나꿈소’ 인기가 높아지자 GTV에서 정규방송으로 편성하여 10월부터 강연을 그대로 방영하고 있다. 오종철씨는 현재 몇몇 회사와 사회공헌 프로그램 논의를 하고 있으며 올해 정규 방송프로그램 하나를 론칭할 예정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분야가 그렇지만 개그맨도 1% 정도만 높은 인기를 누리며 고액 연봉을 벌어들인다. 여러 개그맨이 방송 대신 돌잔치와 칠순잔치, 지역축제 등 다양한 행사에서 사회 보는 일로 수입을 올린다. 기업체에서 강의를 하는 개그맨은 권영찬, 김영철, 오종철씨 정도이고 기획과 진행을 겸하는 개그맨은 오종철씨가 유일하다.
 
  요즘 토크콘서트가 뜨고 기업과 연계하여 많은 행사를 하자 오종철씨에게 문의를 하는 개그맨들이 많다고 한다. 동료들의 문의를 받으면서 오종철씨는 17년간의 개그맨 활동 노하우가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오종철씨는 개인 강사로도 인기가 높아 한 회사에서 낮에는 강의하고 저녁에는 행사 진행을 맡은 적도 있다. 자신의 강의와 토크콘서트에 호응도가 높은 이유 가운데 ‘바람잡이’도 한 몫을 할 거라고 했다.
 
  “개그 프로그램을 녹화할 때 신인 개그맨들이 나와서 바람을 잡습니다. 방송 시작 전에 웃겨서 관객의 마음을 녹이는 거죠. 그렇게 하기 때문에 개그 할 때 웃음소리가 큰 겁니다. 다음 개그 할 때 또 막간에 바람을 잡습니다. 저도 오랜 기간 바람잡이를 했어요. 그래서 강의하러 가면 미리 바람을 잡습니다. 오인만 프로젝트(오종철 인기인 만들기 프로젝트)라는 게 있어요. ‘우리 엄마가 저 인기 없어서 슬퍼하시니 박수를 크게 쳐달라, 미리 연습 좀 하자’ 그러면 다들 박수에다 파도타기까지 엄청난 리액션을 해줍니다. 그렇게 시작하니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죠.”
 
  ‘드림스테이지’나 ‘나꿈소’ 공연을 시작할 때는 신나는 음악과 함께 ‘예스!’를 외치는 ‘예스로빅 춤’을 추면서 행사를 시작한다.
 
 
  토크콘서트 통해 젊은이의 꿈 자극
 
  지난 1년10개월간 소통테이너로 대중과 직접 만나면서 그는 변화가 빨라졌다는 걸 실감했다고 전한다.
 
  “유행이 굉장히 빨라졌어요. 저는 개그맨 중에 유일하게 개인기가 없는 개그맨일 겁니다.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일관되게 왔는데, 세상이 변해 토크콘서트가 뜨면서 저와 잘 맞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대학가에 토익 토플 관련 현수막이 많았지만 요즘은 토크콘서트 현수막이 많습니다.”
 
  그에게 토크콘서트 성공 비법을 묻자 “관객을 눈치 보게 하는 게 아니라 판을 깔아주고, 리액션 잘할 수 있게 하라. 추임새 잘 넣고, 분위기를 고조시키라. 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무대의 주인을 빛나게 하면서 관객과 잘 연결해야 한다”라고 정리했다.
 
  요즘 잘 노는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는 강연 현장에서 젊은이들이 꿈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마음 아팠다고 한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니면 대기업에 들어가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정도로 말합니다. 토크콘서트를 통해 젊은이들이 꿈을 꿀 수 있도록 자극하고 싶은 게 제 꿈이 됐습니다.”
 
  그가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은 것은 기업이 돈을 대고 젊은이들이 무료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꾸준히 방송에 나와도 “요즘 안 보이더라”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은 적이 있다는 오종철씨는 더 이상 ‘공중파의 유명 MC’를 꿈꾸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지와 정체성, 철학을 갖고 1대1로 다가가야 하는 시대에 맞춰 열심히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사가 액션을 취하면 관객이 리액션으로 받아주고, 그 리액션으로 강사가 강력한 액션을 내뿜는 소통의 장을 만들고 싶어요. 따분한 강연장이 아니라 축제의 현장을 만드는 게 제 목표입니다. 무대 몫이 있고 객석의 몫이 따로 있습니다. 무대와 객석을 잘 연결하는 것이 저의 일이죠. 요즘 관객들은 시간만 때우고 가는 강의, 형식적인 강의는 안 듣습니다. 시간을 들인 만큼 얻어갈 게 있어야 호응합니다.”
 
  강의 현장의 열기를 볼 때마다 그는 ‘개그맨이 할 일은 웃기는 게 아니라 웃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종철씨는 “요즘에서야 진짜 개그맨이 된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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