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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취재

일본 최대 노점상 야쿠자 極東會 지휘하는 在日교포 曺圭化 회장

日本의 武士道와 朝鮮의 선비정신으로 일본을 平定하다

글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eaglebs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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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主君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强者에게 강하고, 弱者에게 약했다.
富貴보다 名譽를 소중히 어겼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敗者에게 연민의 정을 베풀었다


⊙ 極東會, 일본 경시청이 지정한 전국 규모 22개 야쿠자 조직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
⊙ 도쿄에서 홋카이도까지 전국 30여 개 支部ㆍ수천 명 조직원 규모
⊙ 84세의 高齡에도 現役 ‘오야붕’으로 활약… 전국 노점상연합회 운영
⊙ 도쿄 등 關東 지역 거주 재일동포의 英雄으로 浮上
⊙ 싸움에서 패배한 적 없는 武鬪派
⊙ “마쓰야마(조규화)처럼 외길을 걷는 正統 야쿠자는 이제 일본에 없다”
⊙ “弱者를 돕는다. 義理와 人情을 중시한다. 배신하지 않는다”
⊙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면 한 국가의 大統領이 됐을 것… 세상에서 부모님 가장 존경해”

曺圭化
⊙ 84세. 경북 의성 출생. 한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渡日.
⊙ 18세 때 三浦연합회 입문, 1976년 三浦연합회 총수, 極東 진성회 회장 歷任.
⊙ 現在 교쿠토카이 회장ㆍ東京街商協同組合 최고고문ㆍ松山商事 회장ㆍ도쿄도시마日韓친선협회 고문
    ㆍ경북의성향우회장ㆍ도쿄경북도민회 고문ㆍ民團도쿄도시마지부 고문.
  누구에게나 평생 안고 갈 ‘고통(苦痛)’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격동기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고통의 깊이는 더할 것이다. 남의 땅 일본에서 평생을 살아온 재일(在日)교포에게 고통이란 한(恨)의 덩어리다. 그들은 인(忍)을 곱씹는 삶을 살아왔다. 생존을 위해 그들은 각자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했다.
 
  올해 84세의 조규화(曺圭化), 일본 이름 마쓰야마 신이치(松山眞一). 그 또한 재일교포로서 특별한 삶을 살아왔다. 1927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가 택한 삶은 야쿠자다. 165㎝의 단신(短身)이지만 어릴 때부터 남과 싸워 져본 적이 없다. ‘조센징’이라는 ‘2등 국민’이 ‘1등 국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이겨야 했다. 그렇게 살아온 그가 지금은 일본 최대 노점상(露店商) 조직의 총수(總帥)로 일하고 있다. 1993년에 최고 자리에 올랐으니 벌써 18년째다.
 
 
  야나가와 지로, 마치이 히사유키 그리고 조규화
 
  그가 회장으로 있는 교쿠토카이(極東會)는 도쿄에서 홋카이도까지 전국에 30여 개 지부(支部)를 두고 있다. 조직원 규모는 수천 명. 수많은 일본인이 조 회장을 ‘오야붕(親分)’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교쿠토카이’는 알 만한 사람에게는 다 알려져 있다. 기자가 현직 일본 언론인에게 “교쿠토카이 마쓰야마 신이치 회장을 아느냐”고 했더니 “당신이 그를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을 정도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일본 야쿠자 조직에서 이름을 날린 이들이 없지는 않다.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야나가와 지로(柳川次郞ㆍ한국명 양원석) 회장과 동성회(東聲會)의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ㆍ정건영) 회장이 그들이다. 정건영 회장의 경우, 막후 한일(韓日)관계에 상당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모두 고인(故人)이 됐다.
 
  이들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역(現役) 오야붕을 든다면 단연 조규화 회장이다. 그는 현재 동경가상협동조합(東京街商協同組合) 최고고문, 마쓰야마상사(松山商事) 회장, 도쿄도시마 일한(日韓)친선협회 고문을 겸하고 있다.
 
  조 회장은 일본 야쿠자 사회에서 원로급이다. 해마다 신년(新年) 때면 수십 명의 다른 야쿠자 오야붕이 그를 찾아와 문안인사를 올린다.
 
  교쿠토카이는 전국 주요 도시의 노점상들로 구성돼 있다. 주요 수입원은 노점 운영 수익, 국가축제 때 사용하는 각종 물품 조달 수익, 전국 사찰에 들어가는 물품 수익 등이다. 교쿠토카이처럼 상업에 종사하는 야쿠자 조직을 ‘데키야(的屋)’라고 부른다. 이와 별개로 도박업에 종사하는 야쿠자를 ‘바쿠토(博徒)’라고 하는데, 대체로 불법행위는 바쿠토 조직에서 벌어진다.
 
  현재 일본에는 대략 3000여 개의 야쿠자 조직(전체 10만여 명 추정)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경시청은 전국 규모의 야쿠자 조직 22개를 ‘지정 폭력단’으로 규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정 폭력단은 야마구치구미, 이나카와카이(稻川會), 스미요시카이(住吉會)처럼 도박업에 종사하는 ‘바쿠토’ 조직이 대부분이다. 지정 폭력단에 포함된 ‘데키야’는 교쿠토카이가 유일하다. 일본 정부는 교쿠토카이가 22개 폭력단 조직 중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교쿠토카이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업 형식으로 움직이는 교쿠토카이는 현재 데키야로서 순탄한 길을 가고 있다. 물론 성장 과정에서 다른 조직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조규화 회장의 인생 역정(歷程) 또한 마찬가지다.
 
 
  “그분께서 죽으라면 명예롭게 죽는 것”
 
조규화 회장은 한 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진은 가족과 헤어지기 전 초등학교 시절에 찍었다고 한다(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조규화 회장).
  지난 8월 25일 조규화 회장을 만나기 전 기자는 도쿄 시내 두 곳의 교쿠토카이 사무실을 들렀다. 교쿠토카이 사무실은 일본 최대 번화가인 신주쿠(新宿)와 이케부쿠로(池袋)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주쿠 중심가에 있는 3층짜리 ‘마쓰야마(松山) 빌딩’은 조규화 회장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건물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교쿠토카이 2인자 오자와 히사시(小澤尙史)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조규화 회장과 53년을 같이 해온 인물이다. 오자와 이사장은 “이곳에 기자가 들어온 건 처음이다”며 “그냥 단순한 건물로 보이지만 의식을 행할 때는 전통 야쿠자 방식으로 사무실을 꾸민다”고 했다. ‘의식’이란 사제(舍弟·집안의 형 동생) 또는 의형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오자와 이사장에게 “조규화 회장은 어떤 인물이냐”고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에 귀가 번쩍 트였다.
 
  “회장님은 하느님 같은 분입니다. 그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존재합니다.”
 
  조 회장과 연배가 비슷한 그가 오야붕의 이름을 거론하기 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모습에 기자는 또 한 번 놀랐다.
 
  내친김에 조금 더 세게 물었다.
 
  ―회장이 죽으라면 죽을 수 있습니까.
 
  그 순간 오자와 이사장 옆자리에 일렬로 앉아 있던 교쿠토카이 참모들이 킥킥대며 웃었다. 교쿠토카이의 분위기를 너무 모른다는 눈치였다. 잠시 후 오자와 이사장은 정중히 대답했다.
 
  “그분께서 죽으라면 명예롭게 죽는 것입니다.”
 
  대화를 끝낸 후 오자와 이사장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떴다. 건물 앞까지 배웅 나온 오자와 이사장과 간부들은 기자가 탄 차량이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배웅인사를 하며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곧이어 이케부쿠로에 위치한 교쿠토카이 총본부를 찾았다. 사토 마사오(佐藤正夫) 사무국장이 기자를 맞았다. 사토 사무국장에게 교쿠토카이가 지정 폭력단이 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행상(行商)을 하는 데키야입니다. 다른 야쿠자 조직과 근본이 달라요. 폭력단으로 지정된 것은 오래전의 일입니다. 당시 경시청은 조직원의 구속자 수를 기준으로 우리를 폭력단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한 번 지정되면 잘 안 바뀝니다. 우리는 이제 폭력단이 아닙니다. 우리 조직인(組織人ㆍ그들은 서로를 이렇게 부름)들은 장사하는 사업가입니다. 불법으로 활동하는 낮은 수준의 야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쿠토카이 소속이라는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토 사무국장의 설명에 따르면, 교쿠토카이는 회장 아래 이사장ㆍ최고고문ㆍ특별고문ㆍ상임상담역ㆍ본부장ㆍ간사장ㆍ운영위원장ㆍ회장 보좌역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전국에 30여 개 지부가 있으나 구체적인 규모는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일본 야쿠자는 세금을 낸다. 아마도 이 때문에 정확한 규모를 말하지 않는 듯했다. 일본 자료에 따르면, 1970년대 당시 교쿠토카이의 조직원은 2만여 명에 달했다.
 
 
  白髮의 老軀에서 나오는 카리스마
 
  교쿠토카이 총본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규화 회장의 개인 사무실이 있었다. 4평짜리 방 두 개와 작은 거실 하나로 이뤄진 작은 오피스텔이었다. 일본 최대 노점상 조직의 회장 사무실치고는 검소했다.
 
  잠시 후 조 회장이 나타났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 기자는 그에 대해 약간 겁을 먹고 있었다. 무술과 검도(劍道)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백발(白髮)이 성성한 노구(老軀)의 조규화 회장.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만주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누비던 조선의 백호(白虎) 같다고나 할까. 그의 목소리에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교쿠토카이 초대 회장의 초상화를 비롯해 교쿠토카이 운영방침, 개인 신조(信條)가 적힌 액자, 일본ㆍ한국의 거물 정치인과 함께 찍은 사진, 감사장 등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한쪽에는 일제시대 당시 부모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도 있었다.
 
  교쿠토카이 직참(直參ㆍ직계참모)들은 조 회장에게 아침저녁으로 큰절을 한다고 했다. 그들이 조 회장에게 큰절을 하자 기자도 엉겁결에 따라 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기자입니다.
 
  그는 서툰 한국말로 “조규화이무니다”며 기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력(握力)이 대단했다. 키에 비해 손이 매우 컸다.
 
  조규화 회장은 “나는 한국 언론에 소개된 적이 없는데 기사에는 한국이름을 써달라”고 했다. 그는 ‘마쓰야마 신이치’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지만 일본으로 귀화하지는 않았다. 편의상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은 이유는 뭡니까.
 
  “국적을 바꾼다고 내 몸속에 흐르는 피까지 바꿀 수 있습니까. 하지만 나는 반(半)은 일본인이고 반은 한국인입니다. 일본도 생각해야 하고 한국도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사이 좋게 지내기를 항상 기도해 왔습니다.”
 
  ―1993년에 교쿠토카이 5대 회장이 됐는데 어떻게 조직의 총수가 된 것입니까.
 
  조규화 회장은 잠시 목을 가다듬은 후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말했다.
 
  “오야붕은 그냥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꺾이지 않는 의지와 피나는 노력을 해야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한길을 위해 끝없이 전진(前進)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교쿠토카이 참모의 말에 따르면, 교쿠토카이 4대 회장인 다나카 하루오(田中春雄) 씨가 1993년 세상을 떠나자 조직의 책임자급 간부들이 모여 그를 회장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조규화 회장은 조직원들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신뢰와 카리스마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통수권자가 되겠다는 꿈
 
일본 각계 인사들로부터 받은 감사장.
  ―한국에서 ‘야쿠자’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비굴한 삶은 살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현재 나는 도쿄 노점상협동조합 최고고문으로서 노점상을 기반으로 사업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제대로 된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됐을 겁니다. 나는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항상 최고(最高)를 꿈꿔 왔습니다. 국가의 통수권자가 돼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준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교쿠토카이 회장이라는 자리도 보통 자리는 아니지요.
 
  “남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조직을 운영한다고 거만하게 행동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자만(自慢)하는 순간 발전은 멈춥니다. 이 세상에는 더 큰 것들이 아주 많아요.”
 
  ―살아온 얘기 좀 해주시죠.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얘기할 수는 없겠지요. 요즘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내가 살아온 대로 사는 것이 100% 정답은 아닙니다. 내 입장에서 이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식민지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扶持)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조규화 회장은 한 살(1928년) 때 가족과 함께 도일(渡日)했다. 아버지가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 회장은 5남 1녀 중 넷째다. 형제 중 일부는 지금도 한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형제와 가까운 친척 중에는 교수ㆍ의사ㆍ법관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도 있었다.
 
  “그 시대 일본에 온 한국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대부분 비슷했듯이 우리 가족도 어렵게 살았어요. 나는 먹고살기 위해 싸움을 했습니다. 그런데 싸우는 기술이 타고났나 봐요. 어릴 때부터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어요. 소학교 다닐 때부터 나를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도쿄 이케부쿠로나 아사쿠사 지역에서 누가 싸움을 잘한다고 하면 그와 일대 일로 대결해 승부를 가렸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에게도 결투를 신청해 이겼어요.”
 
 
  “저 하늘에 떠 있는 저 태양만이 내 편”
 
조규화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가 현직 재임 당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나기도 했다.
  어린 조규화는 한때 조선소(造船所)에서 일한 적이 있다.
 
  “요코하마 조선소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 노동력이 부족했지요. 전시(戰時) 상황이라 조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총검술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소 일을 그만둔 뒤에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도쿄 시내를 활보하며 다녔지요. 가족과는 생이별 상태였어요. 열세 살 때 부모님과 헤어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전쟁이 끝났어요.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지요. 홀로 일본 땅에 남아 목숨을 연명해야 했어요.”
 
  ―죽고 싶을 때도 많았겠군요.
 
  “춥고 배고프고 외로울 때였죠. 무엇보다 나를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때의 내 신세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개보다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고된 나날이 끊이지 않았어요. 힘들 때면 산에 올라가 하늘을 쳐다봤지요. 햇볕은 변치 않고 언제나 나를 따듯하게 감싸줬어요. ‘저 하늘에 떠 있는 저 태양만이 내 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따듯한 태양을 바라보며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싸움질이 반복됐어요. 나를 지켜야 했거든요. 그 무렵 도쿄 신주쿠와 이케부쿠로에서 내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의 싸움꾼’ 생활을 하던 조규화는 어느 날 미우라(三浦)연합회를 이끈 미우라 슈이치(三浦問一)를 만나게 된다. 미우라 슈이치는 종전(終戰) 후 무법지대가 된 도쿄 시내 하급 조직 세계를 젊은 조규화가 장악해 가는 것을 눈여겨봤다. 조규화는 만 18세 때 족보 없는 싸움꾼 생활을 접고 미우라 슈이치를 따라 정식 야쿠자가 됐다.
 
  젊은 조규화가 야쿠자에 입문(入門)할 무렵 일본 야쿠자 세계는 이른바 ‘전국시대’를 맞고 있었다. 바쿠토와 데키야의 경계선이 애매했고 신흥폭력단이 등장하면서 세력다툼이 치열했다. 오직 힘만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시대였다. 이케부쿠로와 신주쿠는 ‘야쿠자 군웅할거지’로 위세를 떨치며 ‘피로 피를 씻는’ 다툼이 빈번했다.
 
  조규화가 미우라 슈이치를 통해 만난 세키구치 아이지는 1927년 ‘교쿠토세키구치카이(極東関口會ㆍ1990년 교쿠토카이로 명칭 변경)’를 창설, 초대 회장을 지낸 전설적인 야쿠자 오야붕이었다.
 
  조규화의 상관인 미우라 슈이치는 세키구치 아이지의 핵심 부하였다. 조규화는 세키구치 아이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세키구치 아이지는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목적으로 하는 야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내게 ‘약한 자를 돕기 위해 일한다’고 했어요. 그분은 언행(言行)이 일치했습니다. 나는 ‘약한 자를 돕는다’는 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약자(弱者)였기 때문이죠. 그때부터 약자를 돕는다는 것이 내 인생의 철칙(鐵則)이 됐어요. 나는 의리와 인정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강직함과 부드러움 동시에 품어
 
교쿠토카이의 주요 수입원은 노점상 운영 수익, 국가축제 때와 전국 주요 사찰에 들어가는 물품 조달 수익 등이다.
  조규화는 세키구치 아이지와 미우라 슈이치를 옆에서 지켜보며 어릴 때부터 좋아해 온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ㆍ1849~1912) 장군의 면모를 발견했다고 한다.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일본 육군대장을 지낸 인물로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제3군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 당일 자신의 집에서 부인, 자녀와 함께 순사(殉死)해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조규화 회장은 유년기 시절에 본 노기 장군의 인생을 다룬 영화 한 장면을 들려줬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어요. 하루는 노기 장군이 인력거를 타고 길을 가면서 낫토(納豆)를 파는 어린 소년을 봅니다. 노기 장군이 마음이 아파 인력거 인부에게 ‘왜 저렇게 어린 소년이 낫토를 팔러 다니느냐’고 묻습니다. 인부는 ‘저 아이의 아버지가 지금 전쟁터에 나가 있는데, 이게 모두 러일전쟁 때문인데 전쟁을 주도한 노기 장군이 아주 나쁜 놈’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에 노기 장군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나중에 어린 소년의 집에 몰래 찾아가 도움을 줍니다.”
 
  조 회장은 노기 장군의 강직함과 인간적인 부드러움을 가슴에 품고 성장해 갔다.
 
  조규화 회장의 개인 사무실에는 교쿠토카이 초대 회장인 세키구치 아이지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세키구치 아이지는 야쿠자로서 정도(正道)를 걸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재물과 권력에 욕심이 없었던 세키구치 아이지는 죽을 때(1967년)까지 일본 노점상 연합회를 맡으며 순수한 야쿠자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조규화 회장이 돈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교쿠토카이 관계자의 말이다.
 
  “오래전 이케부쿠로에 선샤인 빌딩을 완공했을 때의 일입니다. 마쓰야마(조규화) 회장은 건물주로부터 경비 업무를 의뢰받았어요. 한마디로 선샤인 빌딩을 잘 돌봐달라는 얘기였지요. 그런데 마쓰야마 회장은 영역 밖의 일이라며 거절했습니다. 만약 받아들였다면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겁니다.”
 
  교쿠토카이는 세키구치 아이지 사망 이후 야마구치 초지(山口城司) 2대 회장의 지도를 받았다. 불행히도 그는 3년 뒤인 1970년 건강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3대 회장이 된 고바야시 소하치(川林莊八)는 성품이 온후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1980년 군 출신의 다나카 하루오(田中春雄)가 4대 회장이 된다.
 
 
  가죽점퍼 입은 젊은 늑대
 
  한편, 조규화는 교쿠토카이 산하 미우라연합회 소속으로 있으면서 세력 확장에 앞장섰다. 당시 단단한 몸매에 가죽점퍼를 즐겨 입었던 조규화는 행동이 재빨라 ‘가죽점퍼 입은 젊은 늑대’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당대 최고 무인(武人) ‘가노 미쓰오’와 결투를 벌인 적도 있다고 한다. 조규화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일본도(日本刀)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다른 조직에서 수시로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도전을 받으면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1976년 가을, 조규화는 미우라연합회의 오야붕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미우라 슈이치가 사망하자 조직원의 만장일치로 미우라연합회장이 됐다. 총수 승계 피로연에는 일본 관동(關東) 지역 업계를 대표하는 오야붕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조규화 회장은 오야붕이 된 후 조직원 장악과 야쿠자로서의 생업에 충실했다. 그는 도쿄를 비롯해 지방으로도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얼마 뒤 조직의 이름을 교쿠토 진성회로 바꿨다. 진성회의 ‘진(眞)’자는 조 회장의 일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규화 회장은 야쿠자 조직으로는 처음으로 《끝없는 전진》이라는 기관지(機關誌)를 창간했다. 1ㆍ2호는 타블로이드 판형이었지만 3호부터는 잡지 형태로 발행했다. 이 잡지는 일본 경찰, 검찰, 후생성(厚生省) 등 정부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교쿠토카이의 역사는 항쟁(抗爭)의 역사였다. 일본 사회는 야쿠자들의 세력다툼을 ‘항쟁’으로 표현한다. 1983년 발생한 ‘이케부쿠로 전쟁’은 일본 사회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83년 10월 6일, 이케부쿠로 교쿠토카이 사무실이 있는 가쓰마타 아파트 앞에 무장(武裝)경찰관 네 명이 나타났다. “스미요시카이와 교쿠토카이가 격돌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충돌 방지를 위해 현장에 출동한 것이다. 경계를 강화하던 경찰이 낯선 남자 두 명에게 다가가 신분증을 요구하자 그중 한 명이 순식간에 총을 발사했다. 총알 한 발은 경찰관의 신장을 관통했고, 또 다른 한 발은 근처를 지나던 학생의 얼굴을 스쳤다. 범인은 스미요시카이 조직원이었다.
 
  범인을 검거하자마자 이번에는 스미요시카이 사무실에 총알이 쏟아졌다. 교쿠토카이 조직원들이 즉각 복수에 나선 것이다. 양측의 보복전(報復戰)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양측 대표자들이 만나 타협하고 항쟁을 끝냈다.
 
  조규화 회장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일로 많은 사람에게 걱정을 끼쳤습니다. 나는 사건 해결을 위해 양측 오야붕 회담을 추진했어요. 상대편 스미요시카이 산하 가네코카이의 책임자를 통해 회담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얼마 후 스미요시카이 호리 마사오 씨와 담판을 벌였어요.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며 잘 지내자고 했습니다.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후 양측 간부 수십 명이 모여 화합의 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교쿠토카이는 이후에도 몇 차례의 항쟁을 겪는다. ‘아오모리 항쟁’과 ‘이치노쿠 항쟁’이 대표적이다.
 
 
  共存共榮의 평화노선 추구
 
  조 회장은 야쿠자 조직 간 다툼이 발생하면 양측 모두 피해를 입는 현실을 직시한 후 화합의 ‘정치’를 펴갔다. 1984년 조규화 회장은 이나카와카이(稻川會ㆍ도박업으로 유명한 야쿠자 조직)와의 합동식사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박, 노점 등 생활 범위가 다양해지면서 조직 간 분쟁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서로 좋은 전례를 남겨 젊은이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만약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일가(一家)끼리 항쟁으로 번지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하면 자아(自我)가 강해져 다툼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평화공존을 바란다면 큰 조직일수록 참고 자제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조 회장은 싸움에서 패한 적이 없는 무투파(武鬪派)로 유명했지만 자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의 평화노선을 중시했다.
 
  1990년 마침내 조규화 회장은 조직의 사실상 총괄책임자가 됐다. 그는 조직개편을 통해 교쿠토카이 현대화에 착수했다.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는 조직이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기존의 노점상 조직을 혁신하고, 활동적인 정예간부를 집행부에 다수 기용했다.
 
  조규화 회장은 1993년 교쿠토카이 제4대 회장 다나카 하루오가 사망하자 만장일치로 제5대목(代目ㆍ회장)에 추대됐다. 그는 교쿠토카이 최초로 직참 제도를 도입해 세력 확대와 조직 활성화에 힘썼다. 당시 조 회장은 이런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과거 역사를 보면 세력이 있는 일가가 약소 일가에 압력을 넣어 하부 조직으로 들어오게 했고, 또 본가(本家)가 어느 순간 아래 조직이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교쿠토카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내가 앞장서서 반성하고 사과하겠습니다. 업계를 위해, 남자로서, 또 먼 훗날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서로 마음으로 단결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1993년 이후 조규화 회장의 행보(行步)는 교쿠토카이의 역사로 고스란히 기록되고 있다.
 
  오래전 일본의 한 저널리스트는 조 회장의 저력을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나는 어느 야쿠자 식사회에서 이나카와카이의 회장을 인터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 야쿠자 대표들이 이나카와 회장에게 다가와 인사했습니다. 이나카와 회장은 자리에 앉은 상태에서 답례를 했고요. 그런데 마쓰야마 신이치(조규화) 회장이 나타나자 이나카와 회장이 직접 일어나 인사를 했습니다. 정말 놀랐어요. 일본 야쿠자의 최고 보스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닌 이나카와 회장이 마쓰야마 회장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나카와 회장은 내게 이런 말도 했습니다. ‘마쓰야마 신이치처럼 외길 인생을 걷는 정통 야쿠자는 이제 없다. 그는 멋진 남자다’라고 말입니다.”
 
조규화 회장은 일본의 전·현직 주요 정·관계 인사들과 친분을 맺고 있다.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 전 법무장관, 다케시다 다카오(竹下孝雄) 전 도쿄도의회 의원,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 고바야시 고우기(小林興起) 중의원,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총리, 아베 신타로(安部普太郞) 전 외무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얼굴 없는 후원자
 
  조규화 회장은 일본 사회에서 상대적 약자인 재일교포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재일교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그는 일본 가라테 선수로 유명한 최배달(일본명 大山倍達)과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 야구선수 장훈(張勳)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이정숙(李貞淑) 재일(在日)민단 도쿄도시마(豊島)지부 사무부장의 말이다.
 
  “조 회장님은 1960년대부터 민단활동을 해왔어요. 민단지부 경제고문을 맡으면서 크고 작은 일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본 민단의 얼굴 없는 후원자입니다. 그분은 겉으로 드러내는 가식(假飾)을 아주 싫어해요. 아무튼 그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재일교포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식당, 장사 등 자영업 하는 분들에게는 더욱 그래요. 식당에 그분의 사진만 걸어놔도 덕을 봐요. 재일교포라고 함부로 해코지하거나 차별하지 못해요. 재일교포 중에는 조 회장님을 ‘우리의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어요.”
 
  이정숙 사무부장은 조 회장의 인간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情)이 많은 분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절대 주지 않아요. 부하 조직원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 자신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입니다. 너무 솔직해서 가끔 사기를 당하기도 해요. 그런데 회장님은 알면서도 일부러 속아줍니다. 약자를 돕는 한 방편으로 생각하거든요.”
 
  조규화 회장은 현재 자신의 동향(同鄕) 모임인 경북의성향우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민단의 도움으로 1970년대 초 30년 만에 고향을 방문해 부모와 형제가족을 만났다. 조 회장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님, 동생을 만나 밤새도록 울었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추진할 때 민단(民團) 도쿄도시마지부와 함께 고향에 도로와 노인회관을 지어주고 소까지 보냈다. 그 후 체육관 건립도 지원했다.
 
  일한(日韓)친선협회 고문으로 있는 조 회장은 지난 3월 일본 대지진 때 개인적으로 거금(巨金)을 내놓았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잘 지내야 재일교포가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의 말이다.
 
  “싸움은 못난 자가 하는 것입니다. 결투할 상황이 생기더라도 먼저 힘을 앞세우면 안 돼요. 한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싸우면 두 나라 다 피해를 봐요. 평화공존을 위해 서로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평화롭고 사이 좋게 발전하는 것이 나의 작은 희망입니다.”
 
  조규화 회장은 시대적 환경으로 인해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조금 안다고 했다.
 
  “나는 지금 ‘인생의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않았지만 삶의 지혜는 학교에서만 배우는 게 아닙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사람은 계속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나는 요즘 조직원들에게 진심, 희망, 꿈, 노력, 건강, 의리, 정, 단결, 사랑을 자주 얘기합니다. 특히 부모가 살아 있는 이들에게는 효(孝)를 강조합니다.”
 
▣ 내가 본 曺圭化 회장
 
  “일본 땅 뒤흔든 朝鮮호랑이”
 
   최세오(崔世五ㆍ74) 전(前) 미주(美洲)대한체육회 초대회장은 조규화 회장과 사제(舍弟)지간이다. 그는 서울 용산고를 졸업하고 한양 공대(工大)를 다니다 1964년 도미(渡美),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다. 합기도 8단, 태권도 5단의 유단자인 그는 미주지역 대한체육회 설립을 주도하며 한인(韓人)사회에 봉사했다. LA코리아타운 번영회장도 지냈다. 최 전 회장은 재일교포 출신의 고(故) 정건영 회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소니TV 조립공장을 운영했다.
 
  그는 현재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조규화 회장의 특별상담역(役)을 맡고 있다. 그는 “정건영 회장과 조규화 회장은 서로 다른 조직에서 활동하면서도 서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며 “정 회장이 한일관계나 북송문제 등 정치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면 조 회장은 정치를 멀리하는 정통 협객의 길을 걸어왔다”고 했다.
 
  최 전 회장은 조규화 회장에 대해 “한마디로 일본 땅을 뒤흔든 조선의 호랑이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조 회장은 평생을 얼굴 없는 협객으로 지내왔습니다. 조선인 출신의 야쿠자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이겨낸 분입니다. 일본 사회에서 교쿠토카이라는 큰 조직을 이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 회장은 전국 상인들을 규합하고 관리하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사무라이입니다.”
 
  “부모님이 있었기에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
 
  ―효를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장 존경합니다. 부모님이 있었기에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겁니다. 두 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나의 가슴은 지금도 부모님의 따뜻한 정으로 활활 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힘들 때 의지했던 하늘의 태양을 요즘도 바라봅니까.
 
  “7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태양은 여전히 따듯하고 포근합니다. 태양이 나를 버리지 않고 내 편으로 남아 있어 너무 고맙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죠.
 
  “무엇보다 자신에게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은 용기를 가져옵니다. 스스로에게 솔직하면 못 할 일이 없어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지금보다 훨씬 힘든 시대를 이겨낸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언젠가 웃으며 하늘의 태양을 바라볼 일이 있을 겁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쳐다봤다. 태양이 떠 있었다. ‘저 태양은 과연 내 편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규화 회장은 태양계의 중심(中心) ‘태양’을 자기편으로 받아들이고 평생을 살아왔다. 사고(思考)의 광활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 회장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머리와 가슴에는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과 조선의 선비정신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주군(主君)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강자(强者)에게 강하고, 약자(弱者)에게 약했다. 부귀(富貴)보다 명예(名譽)를 소중히 어겼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패자(敗者)에게는 연민의 정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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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지나가라.    (2012-02-07)     수정   삭제 찬성 : 200   반대 : 182
아래 지나가다. 님ㅇㅏ . 일본의 극동회 회장이면 그사람이 재일한국인이란 이유만으로 찬탄할 만하다. 그냥 지나가라.
  나그네    (2011-10-25)     수정   삭제 찬성 : 140   반대 : 72
그러면 야망의 김두한씨,시라소니 등에 대해서는 우리가 대개 찬탄해야 할 대상으로 영화화 드라마화 했으면서, 일본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수천명 규모의 최대급 야쿠자조직의 오야붕 위치에 올라선 한국 분에 대해선 왜 아랫글과 같은 반응부터 먼저 나와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 입니다.기사 내용에 대통령과 일본 총리까지 접견했던 것 보면 두나라에 나쁜 일 한 것 같지는 않은 듯 보여지는 데... 그리고 소문으로만 듣던 한국인 일본 최대 야쿠자조직 오야붕 존재에 대해 우리나라에 이제까지 공개되지 않은 이유가 그 무엇이였는지도 드러나리라 보여지네요,,뿌듯합니다. 좋은 기사 잘 읽고 갑니다. 기자님께 바램은..이분이 두나라에 어떤 좋은 일을 하였는지 더 조사해서 기사화했으면 합니다
  지나가다    (2011-09-26)     수정   삭제 찬성 : 261   반대 : 186
일본 야쿠자는 무사도 정신의 무슨 고귀한 집단인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한다고하니... 불법적 행위와 폭력을 일삼는 한국 조폭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것부터 설명해라... 그리고 그 야쿠자 집단의 수장 중 하나가 재일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찬탄해야할 대상이 되는 것인가 월간조선다운 한심한 기사이다., 정치인과 결탁해서 겉으로는 사업가로 위장해있는 수많은 한국의 조폭 커넥션이나 명백히 밝히는, 나라에 보탬이 되는 기사나 써라. 이딴짓 하지말고.

2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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