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張在植 前 산업자원부 장관

케임브리지大 최초 형제 교수 키워낸 비결은… “運七技三”

글 :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1세대는 독립운동, 2세대는 6·25 참전, 3세대는 세계적 석학… 100년을 이어온 명문家
⊙ 金大中 공천으로 ‘전국구 4번’ 받아 정계 입문 “DJ를 아버지같이 존경했지만…”
⊙ 盧武鉉 정권에서 여성부 장관 돼 조언 구하러 온 조카에게 “정치에 공짜란 없다”

張在植 前 산업자원부 장관
⊙ 1935년생.
⊙ 서울대 법대 졸업, 美 하버드대 대학원 ITP과정 수료, 중앙대 대학원 경제학 석·박사.
⊙ 서울지방국세청 청장, 국세청 차장, 주택은행 은행장, 14·15·16대 국회의원,
    산업자원부 장관 등 역임.
  “인터뷰? 난 그거 못해. 우리 집사람이 매일 아침마다 어디 가서 아들 자랑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장재식(張在植) 전(前) 산업자원부 장관은 인터뷰 시작 직전 “아들 자랑은 못하겠다”며 선을 그었다. 그의 아들은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대에서 최초로 한국인 형제 교수가 된 장하준(張夏準), 장하석(張夏碩)씨다. ‘수재(秀才) 집안’의 인물을 인터뷰하면서 자녀와 가족과 관련한 내용을 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성공한 자식 이야기 마다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결국 인터뷰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현대정치사, 케임브리지대 등의 주제를 오가며 5시간 동안 진행됐다.
 
 
  ‘빨갱이’와 싸우는 게 일이던 중학교 시절
 
  장 전 장관은 1935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전남 신안군 장산도에서 만석꾼으로 불리던 부자였다. 장 전 장관의 기억엔 실제로 할아버지 3형제가 7000석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장병상(張柄祥)은 메이지(明治)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수차례 일본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이력이 있다. 아들 4형제를 낳은 이후엔 자식 교육을 위해 순천지방철도청장을 맡아 공무원 생활을 해 왔다.
 
  장 전 장관의 백부(장병준·張柄俊)는 1919년 3월 전남 무안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과 함께 활동했다. 숙부(장홍염·張洪琰)는 중국 베이징(北京)대학을 다니다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함께 독립군 전선에 뛰어들었고, 독립 후엔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어린 재식은 외국에 나가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의 형제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한 번씩 독립군 자금을 구하러 들어왔다가도 이내 일본인에게 잡혀 몇 년씩 옥고를 치렀기 때문이다. 장 전 장관의 설명이다.
 
  “우리 형제가 아직 어려서 직접 김구 선생이나 김좌진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어요. 다만 기억에 남는 건 잠깐씩 얼굴을 뵈었다가도 이내 일본인에게 잡혀가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던 모습입니다.”
 
  광주 서석국민학교에서 재식의 별명은 ‘변호사’였다.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해서였다. 공부를 잘해서 ‘영감’이라 부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에서 태극기를 직접 그려 주며 아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모른다”며 폭넓게 사람을 사귀는 친화력을 키웠다.
 
  “어릴 적 어머니의 교훈은 정치를 하면서 더욱 가슴 깊이 새겼어요. 정치인은 무슨 일이든 양쪽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싫어도 반드시 듣고, 또 이해하려 노력해야 해요. 요즘으로 치면 친이(親李)든 친박(親朴)이든 일단 양쪽 말 다 들어 봐라, 그겁니다.”
 
  장병상은 슬하에 막내 재식을 비롯, 4남2녀를 두었다. 네 아들은 모두 광주에서 소문난 수재였다. 대부분 학교에서 수석을 했고, 독립 후 학생 반탁(反託)운동을 주도했다.
 
  “이철승(李哲承)씨가 반탁전국학생연맹 위원장 할 때 제 큰형님(故 장정식·張正植 前 전남대 의대교수)이 전남도 위원장을 했고, 둘째 형님(장충식·張忠植 前 한국후지필름 대표)이 광주시 위원장을 했습니다. 만날 ‘빨갱이들’하고 싸우는 게 일이었죠. 창문으로 돌멩이가 날아들어 여름에도 문을 닫고 자야 했을 정도였어요. 중학생이었던 셋째 형님(장영식·張榮植 前 한국전력 사장)과 나도 학교까지 빠져 가며 형님들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고함지르고 그랬습니다.”
 
 
  8개월 동안 4회독 해 고시 수석
 
장재식 전 장관의 아들인 장하준(오른쪽)·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형제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모두 전장에 나섰다. ‘애국’을 항상 강조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전남의대를 졸업한 첫째 정식은 군의관을 지원했고, 서울대 공대에 다니던 둘째 충식은 미군 2사단에 소속돼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셋째 영식과 넷째 재식은 학도병에 지원, 미군 24사단에 소속돼 평양까지 진격했다.
 
  둘째 형이 압록강 전투에서 기관포에 맞고, 셋째 형이 집앞에서 인민군 게릴라에게 총을 맞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막내 재식은 1·4후퇴 이후 복학해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전쟁 초반엔 4형제 중 3명이 총 맞을 정도로 죽을 고비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해가 넘어가면서 점차 안정이 됐고,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셋째 형은 다시 공부를 시작했죠.”
 
  국민학교 6학년 시절부터 아령을 들고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던 재식은 고교시절 태권도를 시작했다. ‘다방에 가면 하도 깡패들이 쳐들어와서’ 호신용으로 배웠는데 결국 6단까지 땄고,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엔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서울 중앙고에 진학했던 재식은 입학 1주일 만에 전쟁이 나 학교를 광주고로 옮겼다. 그 시절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그에게 2살 차 형(영식)은 “굳이 1년을 썩힐 필요가 있느냐”며 월반 편입을 권했다. 조대부고에 편입한 재식은 결국 1년 앞서 서울대 법대에 6등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 생활도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3학년이던 1954년 5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결정한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 있었고, 재식은 광주에서 개헌 반대 시위를 하다 형무소 신세를 졌다.
 
  “광주 금남로에서 저녁에 막걸리를 한잔하고선 형님(영식)과 함께 총 8명이 거리로 나가 ‘역적 이승만, 쳐들어가자’고 시위를 했어요. 결국 모두 잡혀갔지만, 일이 잘 해결돼 얼마 후 풀려났죠. 당시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갈 정도였는데, 서울에서 ‘역적 이승만’이라고 고함질렀다면 죽었을지도 모르죠.”
 
  법학도로 돌아온 그는 형 영식의 권유로 절에 들어가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관련 서적을 최소한 8번 이상 읽어야 합격할 수 있다는 고등고시를 그는 8개월 동안 4번 읽고 행정과 1부(일반행정) 수석으로 합격했다.
 
  “이 이야기 때문에 인터뷰를 안 하려고 해요. 4회독 하고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미친놈, 거짓말도 정도껏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인데 어떡합니까.”
 
  1956년 2월 합격증을 받은 그는 같은 해 7월부터 재무부 근무를 시작했다. 제1지망 부서로 내무부를 골랐지만, 제2지망인 재무부로 밀려났다.
 
 
  제대로 일하면 세금이 아닌 뇌물액수가 올라가던 세상
 
  “이승만 정권은 나를 4년6개월 동안 사무관을 안 시켰어요. 보통 1년 정도 근무하면 사무관으로 가는데. 결국 민주당 정권 들어선 후 바로 사무관이 돼 서대문세무서장으로 갔어요.”
 
  ―왜 그랬습니까.
 
  “집안이 모두 야당이고, 형무소에 다녀온 전과도 있고, 여러 사정이 있었겠죠. 그나마 고시 합격시켜 준 것에 만족해야 했어요. 박정희(朴正熙) 정권 때였다면 합격도 못했을 겁니다.”
 
  ‘떠밀려 간’ 재무부였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학생 시절 유난히 경제학을 좋아했던 그는 업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결국 미국 하버드대 유학 기회까지 얻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1965년까지 그는 서대문, 광화문, 남대문 세무서를 거쳐 갔다. 20대 중반의 젊은 서장이 40~50대 직원들을 휘하에 두고 일을 했다.
 
  “광화문세무서장 할 땐 대한민국 언론사의 90%가 관할지에 있었어요. 한번은 아카데미극장에 아내와 함께 제니퍼 존스 주연의 <황혼>을 보러 갔습니다. 표를 사려고 줄을 서 있으니까, 한 언론사의 사주가 저를 보고 알은척을 하더라고요. ‘장 서장님, 여기 왜 서 있느냐’고 하기에 ‘표 사려고 서 있다’고 했죠. 그러니 ‘왜 이러십니까’라며 손을 붙들고 극장 제일 좋은 자리에 앉혀줘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세무서에 있으면 비리 현장도 많이 봤겠습니다.
 
  “국세청이란 곳이 정말 일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윗사람이 일을 제대로 해 보겠다고 하면 밑에서 이상한 반응이 나와요. 한번은 결재서류가 올라왔는데 뭔가 부족해서 ‘제대로 다시 쓰라’고 돌려보내면 2~3일 뒤에 같은 서류에 돈 봉투를 끼워 다시 제출합니다. 서류 내용은 그대로고요. 답답한 노릇이었죠.”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극복은 무슨…. 당시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제대로 공부한 세무공무원이 없었어요. 생산수율(生産收率·원재료 투입에 대한 제품생산 비율)을 공부해 정확한 세금을 계산했죠. 예를 들어 박스 회사에 사찰을 나가면, 박스 수량은 어차피 눈가림으로 속이니까 박스 끈 수량을 계산해 세무조사를 했어요. 그렇게 치밀하게 하면 사업자는 두 손을 들죠. 그러면 뭐 합니까. 세금이 더 걷히는 게 아니라 뇌물 액수가 올라가는데. 정확하게 일 처리를 하려고 하니 서울 시내에 ‘장 서장 돈 좋아한다’고 소문을 내 버립니다. 어설프게 변화시키려다 먼저 당하는 시절이었죠.”
 
  박정희 정권에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김대중(金大中)과 가깝다’는 첩보가 나와 2년간 전매청으로 밀려나거나 몇 차례 내사까지 받았지만, 승진을 거듭해 30대 나이에 국세청 차장까지 올랐고, 40대엔 주택은행 행장이 됐다. 이유에 대해 그는 “공무원으로서 처신을 잘했고, 선산(先山)을 잘 쓴 덕”이라고 했다.
 

 
 
金大中과의 인연

 
  “사실 은행장으로 갔을 때 남들은 부러워했지만, 공무원 생활의 마지막 수난이었습니다. 정통 공무원의 세계에서 보기 좋게 쫓겨난 셈이었죠. 더구나 부임하던 해 10·26이 났고,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과 가깝다’는 설이 있는 나를 그냥두지 않았습니다. 끝내 은행장직에서도 쫓겨났어요.”
 
  ―박정희 정권 시절엔 크게 피해를 보지 않았는데요.
 
  “지금도 박정희 전 대통령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남의 야당 출신 집안인데도 자르진 않았죠. 내가 지금만 같았어도 그때 박 대통령에게 아부를 했을 겁니다.”
 
  ―무슨 아부를 합니까.
 
  “간단해요. 호남향우회 같은 곳에 가서 ‘김대중이 빨갱이다’라고 하면 바로 멱살 잡힙니다. 그럼 그 자리에서 목격자가 나오고, 그게 중앙정보부 통해 청와대로 들어가는 겁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요직을 꿰찼던 호남사람 중 상당수가 그런 식으로 전국 돌아다니면서 김대중 욕하고 다녔어요. 그랬던 사람들이 지금은 민주당 원로라고 하면서 시치미 떼고 있으니… 허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1970년대부터 대충 알긴 알았는데, 친한 수준까진 아니었어요. 제 어머니의 고향이 신안군 하의도였고, 셋째 형이 4·19 직후 장면(張勉) 총리의 경제비서관을 했는데 그때 김대중씨가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인연은 있었습니다. 형님은 좀 친했지만, 저는 당시만 해도 정치에 뜻이 없어 크게 잘 알진 않았죠. 제대로 알게 된 건 1988년 전국구 국회의원 제의가 왔을 때부터입니다. 측근을 보내 후보직을 제안했고, 저는 거절했었죠.”
 
  ―측근 누구를 보냈습니까.
 
  “좀 유명한 사람이 오긴 왔는데, 쓰진 마세요. 기자들한테 이런 얘기 하면 나중에 이상하게 써 버린다니까.”
 
  1992년에 다시 민주당 전국구 4번 후보 공천 제의를 받은 그는 정식으로 정계에 입문,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1~3번 후보는 김대중 총재, 이기택(李基澤) 의원, 강창성(姜昌成) 전 보안사령관이었다.
 
  ‘DJ의 실세’로 알려졌던 그는 정계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초선임에도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1998년 경제위기 시절엔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과 김대중 총재 경제담당 특별보좌역으로 발탁됐다. 3선 의원인 16대 국회에선 예결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됐고, 국무총리 하마평에도 수차례 올랐다. ‘DJP 공조’ 막차를 타 당적을 이동한 지 2개월 후인 2001년 3월 산업자원부 장관에 취임했다.
 
  “실세라고 떠드는 건 모르는 사람들 얘기고…,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말 아버지같이 존경했지만, 그만큼 서로 섭섭한 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장관도 결국 8개월 하고 물러났잖아요. 차마 이 자리에선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정치에 공짜란 없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평가합니까.
 
  “제가 평가할 입장은 안되죠. 개인적으로 공과(功過)를 본다면 햇볕정책은 잘했다고 보고, 후배 정치인을 제대로 안 키운 것은 좀 잘못했다고 봅니다.”
 
  ―햇볕정책은 대북송금 사건과 최근 북한의 천안함 도발 및 핵무장 등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는데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결점은 있어요. 나쁜 목적으로 비공식적으로 돈을 줬다면 그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굶주리는 북한을 도와주는 것은 분명히 찬성해요. 핵무기 만드는 사람이 그 돈 없다고 안 만들었겠습니까.”
 
  장 전 장관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배운 ‘친화력’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조카인 장하진(張夏眞) 장관이 임명된 직후 찾아와 “한나라당 사람들도 작은아버지에 대해 나쁜 말을 안 한다”며 비결을 물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람을 그냥 좋아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조카한테 이렇게 얘기했어요. ‘나는 누구 후원회 하면 꼭 찾아가 2시간씩 앉아 있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정겹게 껴안으면서 인사하고 하면서 관리했다. 정치에 공짜란 없다’라고요. 예결위원장 할 땐 소속 의원들 방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총 1억5000만원치 돈과 선물을 줬습니다. 다 공개된 공식 후원금으로 했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봐요.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만큼 사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도 문제가 없었습니까.
 
  “장관 시절에 내 개인 돈은 여러 곳에 전했지만, 판공비는 단 10원도 안 썼습니다. 산자부는 이권개입이 많은 곳이라 계약 같은 건 전부 위원회에 맡기고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장관이 물어보면 ‘돈 생각 있어 물어본다’고 오해할까 봐 아예 맡겨 버렸죠. 나 같은 사람 찾기 어려워요.”
 
  2004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을 끝으로 사실상 정계를 은퇴한 그는 최근 자녀와 조카들의 출세로 더 큰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그의 장남 장하준(張夏準)씨는 1986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으로 유학,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7세였던 1990년 한국인 최초로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된 그는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란 책으로 2003년 신(新)고전학파 경제학에 대안(代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상(賞)을 받았다. 2007년 영문으로 출간돼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은 국문서적이 10만 권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名門家

 
  차남 장하석(張夏碩)씨는 미국 캘리포니아공대(Caltech)를 졸업,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친 후 1995년 28세 나이로 런던대 교수에 임용된 그는 지난 4월 케임브리지대 한스 라우싱 석좌교수로 임명돼 큰 화제를 모았다. 케임브리지대학 최초로 한국인 형제 교수가 탄생한 것이다.
 
  딸 장연희씨의 남편인 임수빈(任秀彬) 변호사는 2008년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시절 MBC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보도를 수사하던 중 체포영장 청구를 놓고 검찰 수뇌부와 갈등을 빚다 사표를 제출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인공이다.
 
  조카들의 이력도 화려하다. 둘째 형(장충식)의 장녀 장하진씨는 이화여대 졸업(석·박사) 후 여성운동가 겸 여성학자로 활동했고, 노무현 정권 당시 여성부 장관으로 취임해 한 집안에서 숙질(叔姪·삼촌과 조카)이 장관이 되는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했다.
 
  장하진 전 장관의 동생 장하성(張夏成)씨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석사,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참여연대와 아름다운재단 등에서 활동한 그는 2005년 고려대 경영대 학장으로 부임해 진보적 경제학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장 학장의 동생 장하경(張夏慶)씨는 광주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장하원(張夏元)씨는 열린우리당 정책의장과 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장하준 교수의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는 그가 어린 시절 집에서 봤던 흑백TV와 냉장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 장재식 전 장관이 하버드 대학 유학 시절 장학금을 모아 사들인 TV와 냉장고를 두고 이웃과 사촌들이 신기해할 정도로 가난했던 나라가 40년 후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도 ‘엘리트 공무원’의 신분이었는데 장남 장하준 교수는 부엌이 좁아 냉장고를 마루에 내놓아야 했다고 회고합니다.
 
  “1980년 은행장에서 쫓겨난 후 집으로 오니 가진 게 20평짜리 ICA 후생주택이 전부였습니다. 국세청 차장 6년, 서울청장 1년, 은행장 1년 한 사람이 20평 집에 산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전라도 사람들이 자개를 좋아해 대부분 집에 자개농을 들여놓고 사는데, 우리는 자개농은커녕 아이들 책상이 없어 밥상에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 정도로 소박하게 살았어요.”
 
 
  “자녀교육은 운칠기삼”
 
1990년대 케임브리지대학에 선 장하준 교수. 현재 발전경제학 분야의 세계적인 학자가 됐다.
  ―아이들 교육에는 투자를 많이 했나 봅니다.
 
  “과외를 잠깐 시키긴 했는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금지조치가 내려져 그것도 그만했고, 크게 신경 쓴 것은 없습니다. 저들이 똑똑해서 공부를 잘한 거죠. 큰놈(하준)은 국민학교 3학년 때 과학서적을 시간당 250페이지 읽었고, 작은놈(하석)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물리학자 칼 세이건(Sagan)의 <코스모스>를 원서로 12번 읽고 저자에게 편지 보내 답장까지 받았으니, 할 말 다한 거죠.”
 
  ―그래도 차별화된 교육 방식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동창회 모임에 나가면 친구들이 항상 ‘너희 아들 오늘 아침 신문에 나온 것 봤다’며 추켜올려요. 어떻게 키웠기에 그러느냐고 물으면 저는 ‘화투 칠 때 비법이 뭐냐. 운칠기삼 아니냐.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다’라고 대답을 하죠. 타고난 재능이 7이고, 부모의 관심이 3 정도인 겁니다.”
 
  ―그러면 3은 어떻게 했습니까.
 
  “간단한 예로, 당시 홍익국민학교에 세 놈이 함께 다녔는데, 1년에 한 번 운동회를 하면 아침 8시에 나가서 저녁 7시까지 앉아 있었어요. 아버지가 할 일이 없어 온종일 거기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관심을 주면 아이들은 아버지가 와서 너무 좋다고 합니다. 그런 관심이 3이겠죠.”
 
  장 전 장관은 장남 장하준 교수가 어릴 적부터 특출했다고 전했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데다 걱정이 많아 항상 꼼꼼하게 미리 준비를 하는 성격이었다. 학창시절 항상 걱정하는 형을 두고 동생 하석은 “형은 걱정할 사건이 없으면 그걸 걱정한다”고 투덜댔을 정도다. 또 그는 어려운 책을 직접 사 와 줄줄 읽었고, 남다른 상식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큰놈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시험을 봤는데 ‘다음 중 편지를 부치는 곳은?’이란 문제가 나왔어요. 1번이 우체국, 2번이 면사무소, 3번이 영화관, 이런 식으로 보기가 나왔는데, 항상 우체국 가서 편지를 부치던 놈이 정답을 2번이라고 쓰고 온 겁니다. 선생님이 ‘왜 면사무소라고 썼느냐’고 물으니까 그놈 대답이 ‘면사무소 소재지에 우체국이 어디 있느냐’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어린 시절 하준은 레코드판을 직접 사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클래식에서 팝송에 이르기까지 1만5000곡 가까이 되는 판을 사모아 매일 들었다고 한다. 고교시절 장학퀴즈에 출전해 주(週)장원까지 입상한 그는 당시 음악 맞히기 문제로 출제된 스메타나(Smetana)의 곡을 한 번에 맞혀 주변의 놀라움을 샀다.
 
 
  수석졸업생 연설에 참석자 모두 눈물
 
  공부로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차남 하석도 마찬가지였다. 영어독해는 꽤 했지만, 말은 한마디를 제대로 못했던 그가 미국 유학 2년반 만에 10대 명문 고교 중 하나인 노스필드 마운트 허먼(NMH)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06년 학교사(史) 첫 동양인 수석이었다. 장 전 장관의 말이다.
 
  “졸업식 날이 지금도 기억에 선합니다. 졸업생과 가족 수천 명이 강당에 모여 수석졸업생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나라의 학생이 와서 꿈과 도전에 대해 연설하는데 집사람도 울더라고요. ‘창피하게 왜 그러냐’고 하던 제 눈에도 눈물이 났습니다. 연설이 끝나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선생님도 울고, 학부모들도 전부 웁니다.”
 
  ―자녀분들이 지금도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듣고 따릅니까.
 
  “당연히 잘 듣죠. 내가 공부도 더 잘했고, 사회적으로도 더 출세했는데.”
 
  ―집안에서 1등 안 한 사람은 사람 대우도 못 받겠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고, 학교 좀 좋은데 나왔다고 큰소리는 못 칠 정도죠.”
 
  장 전 장관은 현재 둘째 형의 사업을 도우면서 지낸다. 그 사업도 얼마 전 거의 부도가 나 바둑을 두며 가끔 옛 추억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는 현재 바둑 아마 7단에 장기는 4단이다. 최근 그의 큰 즐거움은 자녀와 손자들의 성공 소식이다. 영국에 있는 손녀와 손자는 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다고 한다. 외손자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그의 직속 후배가 됐다. 1세대였던 장 전 장관의 아버지 형제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2세대는 6·25전쟁 참전과 산업화에 전념했다. 3세대는 세계적 석학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고, 4세대도 벌써 될성부르다.
 
  장 전 장관은 법대 졸업 후 행정관료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고, 경제학 박사 과정을 마친 후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법, 정치, 경제, 행정, 운동 등 전반에 나만큼 정통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며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인터뷰를 안 하려고 하는 겁니다. 집사람은 자서전이나 쓰라고 하는데, 그거 써 봐야 밤낮 자기변명만 할 거 아니오. 또 고시 수석을 했느니, 아들이 어쩌니 정확한 이야기를 해도 다 거짓말이라고 욕할 거고. 그냥 이렇게 살렵니다.”⊙
 

  ▣ 장하석 교수의 美 노스필드 마운트 허먼 고등학교 수석졸업 연설문
 
  [편집자 注] 장재식 전 장관의 차남 장하석 교수는 16세에 미국에 건너가 2년반 만에 미국 10대 명문고 중 하나인 노스필드 마운트 허먼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식 당시 참석자들에게 감명을 줬다는 그의 대표 연설 중 일부를 발췌, 번역했다.
 
차남 장하석씨가 1985년 4월 미국 명문 노스필드 마운트 허먼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면서 한 학보사 인터뷰. 영어 한마디 못했던 그는 유학 2년반 만에 개교 이래 최초의 동양인 수석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저는 아직도 2년반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당시를 기억합니다. 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여러 뉴잉글랜드 프리스쿨 면접을 봤습니다. 첫 면접관을 만났을 때, 그전에는 영어로 대화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긴장하고 당황해서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면접을 진행할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면접관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건넸습니다. 그 순간 저는 너무 당황해서 “Excuse me?” 라고 말하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꼬박 1분을 면접관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아내는 데 집중해야만 했습니다. 질문은 “한국에도 눈이 오는가”였습니다. 면접 내내 이런 일이 반복됐습니다. 면접을 마친 후, 면접관은 아버지와 삼촌에게 아주 좋게 이야기했지만, 그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아이를 집에 데려가세요. 이 아이는 영어를 못해요.”
 
  필립스 앤도버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저는 완전히 낙심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오늘 이곳에 서서 이 연설을 하게 될 것이라곤 감히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NMH(노스필드 마운트 허먼)는 달랐습니다. 제게 이곳은 진정한 기회의 학교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감사를 전 세계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오직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으로 제가 이곳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께 고마움을 느끼며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책임감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 행운아입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혹은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적어도 이렇게 훌륭하고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얼마 전, 제 이틀 치의 수업료가 전 세계의 절반의 국가들보다는 부유하게 사는 한국의 평균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단순한 깨달음으로 이곳 학교에 다니는 책임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사람들이 좀 쉬어 가며 하라, 즐기면서 하라는 말과 심지어 저 자신이 매일의 일상에 지칠 때라도 제가 해야 할 일들을 간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 NMH에 있으면서 많은 불평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적절한 장소에서 부적절한 것들에 대해 불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슬펐습니다. 그것은 주로 이 세계가 아닌 이 훌륭한 학교 안에서만 잘못된 것을 찾아내는 근시안적인 우리에게 가장 지적이고 민감한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계층구조의 비인간적인 효과에 대해 비판하지만, 계층이 있든 없든 높은 수준의 교육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우리보다 열정적인 수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급식을 “Shit(배설물)”라고 부르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지만, 구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을 먹어 치우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교 규율의 약간의 제약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지만, 권위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문당하고 살해되는 결백한 수백만의 사람들도 우리와 공존하고 있습니다. 누리는 부와 자유가 우리의 눈을 다 가릴 정도로 커서 우리가 가진 특권에 대해 감사하고 책임감을 가지는 대신 불행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꿈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곳 학생들에게 “장래에 뭘 할 거니?”라고 물으면, 가장 전형적인 답변은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보수가 많은) 직업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입니까?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최고의 학교의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서 열망하는 것이 이것이 다입니까? 꿈 없이 삶에서 얼마나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까? 꿈을 성취하는 진짜 즐거움 없이는 인생은 공허하며 지겨운 것입니다. 서구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현상 중 하나는 이 공허함을 관능적 즐거움의 형편없는 품질과 엄청난 물량 공세로 채우려고 하는 무모한 시도입니다. 즐거움의 추상적 표현이 더 많은 TV, 섹스, 포테이토칩, 술, 로큰롤, 마리화나, 돈이니 말입니다.
 
  <중략>
 
  책임감과 꿈 사이에는 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특권을 가진 우리는 세상을 바꿔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불행이 특권계층의 탐욕스러운 행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책임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치 있는 꿈이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웃 국가의 아버지와 아들을 죽이러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아들과 남동생의 시체 위로 어머니와 누나의 눈물이 흐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말입니다. 어떠한 위협이나, 투옥, 고문, 살해 없이 모든 사람이 크게 소리칠 수 있는 세상, 기관총과 핵무기 대신 굶는 어린이의 식사를 위해 매해 5000억 달러를 쓸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이 엄청난 노동과 무력한 공허함 둘 모두로부터 벗어나 살 수 있는 세상, 인종과 국가를 초월해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지구를 행진하는 세상, 그리고 무책임과 포기를 멈추고 다시 꿈꾸는 세상을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존 레넌도 그의 노래 에 비슷한 비전을 표현했습니다. 이 노래의 끝 부분에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를 몽상가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 나는 혼자가 아니야. / 언젠가 너도 함께하길 바라, /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될 거야.
 
  <중략>
 
  사실, 우리의 책임을 인정하고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삶의 즉각적인 위협에 처해 있지 않음에도 이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지식적 연구를 통해 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수업시간 안팎으로 노력했습니다. 때때로 외롭고 피곤했지만 동시에 제가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보상과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느끼는 편안함을 얼마 정도 포기해야만 했지만, 홀로 걷는 길에 새롭게 발견한 것들은 제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 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노스필드 마운트 허먼 스쿨은 사람들이 적게 다닌 길로 저를 인도해 주었고 이것은 제가 이 학교를 절대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께 제게 주신 지지와 도움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으로 나아가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노스필드 마운트 허먼이 이 모든 변화를 만들어 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