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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4〉

일본 근대화를 견인한 ‘신(神)의 한 수’, 참근교대(參勤交代)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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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가와 막부가 지방 영주들을 견제하려 1년 단위로 에도와 번을 오가며 생활하도록 강제
⊙‌편도 이동에만 평균 3억~4억 엔 소요… 1720년 사쓰마 번주는 이동경비·에도 체재비 등으로
    21억 엔 소모
⊙‌도로·해운망 확충, 주택건설, 화폐경제 발달, 상인계급 대두 등 효과 낳아 메이지 근대화로
    이어져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 에도에는 상경한 다이묘들의 저택을 비롯해 수많은 건물이 들어섰다.
  도쿄(東京)에서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을 가기 위해 “강코쿠다이시칸 오네가이시마스(한국대사관 부탁합니다)”라고 행선지를 말하면 간혹 모르는 택시기사가 있다. 그럴 때는 “센다이자카(仙台坂)로 가주세요”라고 하면 된다. 센다이자카는 대사관 정문 앞을 지나는 호젓한 왕복 2차선 도로의 이름이다.
 
  대사관에 처음 부임했을 때 왜 도쿄에 센다이라는 지명이 있는지 궁금했다. 알아보니, 도로 남단에 과거 에도(江戶)시대에 센다이번(藩)의 영주인 다테(伊達) 가문의 저택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도쿄에는 에도시대 다이묘(大名) 저택 소재지에서 유래한 지명이 꽤 남아 있다. 일례로 고급 패션 거리로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아오야마(靑山)는 전국(戰國)시대 전략 요충인 기후현 구조(郡上)시 소재 ‘구조하치만조(郡上八幡城)’의 마지막 성주(城主)인 아오야마 가문의 거처가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에도시대 모든 다이묘는 에도에 거처가 있었다. 참근교대(參勤交代)제에 의해 에도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참근교대란 1년을 단위로 각 번(藩)의 번주를 정기적으로 에도에 출사(出仕)시켜 머물게 하는 일종의 인질제도이다. ‘참근’이란 에도에 상경(上京)하여 머무는 것, ‘교대’는 영지(領地)로 하향(下鄕)하는 것을 의미한다.
 
  1년을 에도에서 지내고 이듬해에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인데 말이 쉽지 당시의 교통 사정을 생각할 때 1년마다 수백 리에서 수천 리를 이동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유사한 제도는 예전부터 존재했으나, 1635년 에도막부의 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로 법제화하여 시행했다.
 
  고려에도 기인(其人)제도라는 유사한 제도가 있어 일견 특별해 보일 것도 없는 정권 안정화 정책이지만, 일본에서는 참근교대제를 일본 근대화 성공의 원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에도시대 일본
 
  19세기 말 한국과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한 반면, 일본은 성공한 이유는 어디 있을까? 일본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은 일본이 이미 근대화 이전부터 서구와 맞먹는 수준의 자체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에도시대의 일본은 봉건사회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도시화와 화폐경제가 진전된 사회였으나 상업과 일부 수공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전(前)근대적 경제구조의 한계가 명확했다.
 
  체제의 지배이념으로서도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고착화하는 유학(儒學)이 중심이었고 난학(蘭學) 등 서구에 대한 탐구욕도 기성 질서와 양립하는 범위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용인됐다. 상인의 덕목 등 직업적 소양이 일부 강조되기는 했으나 서구적 자본주의와 산업화 속의 직능주의(職能主義) 이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즉 서구와의 조우가 없었다면 일본이 근대화(근세 유럽을 중심으로 사유재산의 보장과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 증대를 기반으로 발생한 경제사회 체제의 전환)를 이룩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선포하고 유신주도 세력이 국가 체제의 일신을 위해 ‘부국강병(富國强兵)’ ‘식산흥업(殖産興業)’의 정책을 추진하였을 때, 일본은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소화하고 약진했다. 반면 갑오경장(甲午更張)과 양무(洋務)운동으로 대변되는 조선과 청나라의 근대화 시도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서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근세’라는 역사적 시공(時空)을 설정하고 18세기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일본에 전근대와 근대를 잇는 경제사회적 ‘풍경(landscape)’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석한다.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용이하게 한 경제, 사회, 문화 제반 측면에서의 근대화 순응력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찾은 일종의 비(非)제도권, B급 해답이 참근교대제이다. 일본의 근대화 우등생 비결은 참근교대제로 근대화를 예습한 데 있다는 것이다.
 
 
  에도의 막번 체제
 
  참근교대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에도시대의 통치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에도막부의 통치는 쇼군과 다이묘 간의 주종(主從)관계를 기초로 한다. 다이묘는 쇼군으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아 그 토지와 부속된 인민에 대한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망라하는 통치권을 행사한다. 쇼군은 이러한 다이묘들로부터 충성과 군역(軍役), 그리고 막부가 시행하는 공공사업의 분담 의무(이를 ‘천하보청(天下普請)’이라 한다)를 부과하고 필요시 다이묘의 지위를 박탈할 수 있는 권위를 확보함으로써 일본 전역을 통치한다. 이러한 지방분권적 요소와 중앙집권적 요소가 혼재하는 이중구조의 통치 체제를 막번(幕藩) 체제라 한다.
 
  막번 체제의 특징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중앙의 막부가 기본적으로 각 번에 대해 조세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번주는 관할 지역에서 징수한 세금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것이 각 다이묘들이 누리는 자치권의 핵심이었다. 중앙의 권위가 밑바닥으로 추락한 전국시대에 형성된 기득권의 형태로 인정되기는 하였으나, 감시의 눈에 한계가 있는 원격지에서 독립된 재정권을 행사하며 부(富)를 축적하는 다이묘는 쇼군에게는 잠재적 위협이었다.
 
  이러한 다이묘들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에도의 쇼군이 내민 회심의 카드가 참근교대이다. 참근교대로 인해 전국의 모든 다이묘는 원칙적으로 처자를 에도에 남겨둔 채 1년을 단위로 에도와 번을 오가며 생활해야 했다. 참근교대에 저항하면 바로 다이묘의 지위가 박탈(이를 ‘お家取り潰し-오이에토리쓰부시’라 한다)된다.
 
  본래 정치적 성질의 다이묘 견제책이었고, 따라서 에도막부의 250년 안정적 통치에 기여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참근교대가 어떻게 일본 근대화의 전초 단계로서 사회경제적 ‘풍경’을 바꿔놓았다는 것일까?
 
 
  폭포수와 같은 낙수효과를 낳은 공공정책
 
참근교대 행렬을 그린 에도시대의 그림. 다이묘의 편도 여행 경비로만 오늘날 화폐 가치로 3억~4억 엔의 비용이 들었다.
  먼저 경제적 파급효과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 정도의 대규모 인원이 수백 리에서 수천 리를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한다. 현대 화폐로 환산할 경우 수행원 1인당 하루 경비가 대략 6000엔 정도로 추산되며 각 다이묘당 평균 3억~4억 엔 정도의 경비가 편도 이동에 소요되었다. 이러한 다이묘가 전국에 270여 가문이 산재해 있었으니 지금 돈으로 매년 수조 원이 길거리에 뿌려진 셈이다. 여기에 다이묘와 가족, 수행원들의 에도 체재비가 더해지면 참근교대에 소요되는 비용은 다이묘 세수의 절반을 넘어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1720년의 기록을 보면, 3대 번 중의 하나인 사쓰마번(薩摩藩)은 총 588인의 참근단이 1644km를 73일에 걸쳐 이동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6억8000만 엔, 에도 체재비 등을 포함하면 총 21억 엔의 비용이 당해연도의 참근교대에 소요됐다. 이 외에도 쇼군에게 바치는 헌상금, 막부의 고위관료인 로주(老中) 등에 대한 선물비용 등으로 수억 엔이 추가로 지출됐다.
 
  경제적으로 볼 때, 다이묘의 지출은 누군가의 수입을 의미한다.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교통, 숙박의 요지와 엄청난 소비시장이 형성된 에도, 오사카 등의 대도시의 상인과 노동자였다.
 
  에도로 출입하는 교통의 요지에는 다이묘 일행의 숙박을 위한 여관 등의 시설을 갖춘 슈쿠바마치(宿場町)가 조성되고, 물자 수송을 위한 물류업자 등 각종 주변 산업이 태동했다. 참근교대에 수반하여 에도막부가 시행하는 공공역무(公共役務)로서 고카이도(五街道)로 불리는 간선도로가 대대적으로 정비됐다.
 
  에도성(城)을 비롯한 각종 기간시설의 건설에 동원되는 자재의 운송을 위하여 해로와 수로를 활용한 기간해운망이 조성됐다. 18세기 초엽에 미곡을 비롯한 각종 물자의 집산지인 오사카로부터 에도를 연결하는 복수의 민영 정기항로가 개설됐다. 18세기 말엽에는 에도-홋카이도(北海道), 에도-오사카, 오사카-규슈(九州)/시코쿠(四國)를 연결하는 전국적 정기 상업해운망이 구축됐다. 해운망의 발달은 미곡, 술, 간장, 각종 저장식품을 비롯한 지역 특산물이 오사카와 에도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데 기여했고 이러한 유통망의 발달은 다시 지역경제를 자극하고 활성화시키는 선(善)순환의 경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다이묘라는 재향(在鄕) 지배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 증가가 상인 및 도시노동자 계층의 소득으로 흡수되는 현상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대의 낙수효과가 부유층의 조세 부담을 경감시켜 소비·지출 증가를 유도하는 논리인 것에 반해 참근교대는 부유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 확대를 통해 부의 환류 및 경제 활성화를 촉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돈이 돌고 도시가 발달하다

 
참근교대는 교량·도로 등 인프라 확충으로 이어졌다. 도쿄 니혼바시 인근을 그린 그림.
  장거리 이동과 원거리 유통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극을 받은 것이 화폐경제이다. 지역경제에서는 역내 물물교환 원리에 의해 거래가 이루어지므로 화폐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원거리 이동 시 기존에 화폐 역할을 한 미곡은 지불수단으로서 한계가 있었다. 다이묘들은 참근교대에 수반하여 언제고 필요할 때 지출을 할 수 있도록 미곡을 팔아 화폐를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화폐 수요의 증대로 화폐경제가 발전하자 전국적인 거래의 편의성이 크게 제고되어 각종 상업경제 활동이 더욱 활성화됐다. 나아가 화폐를 이용한 비즈니스, 즉 금융업이 원시적인 형태이기는 하나, 일본 자생적으로 태동하고 발전한다. 영주들이 가을 수확을 기다리지 못하고 미곡을 담보로 하여 미곡업자에게 현금을 대출받는 대부업을 시작으로, 원격지 간 금융 거래를 위한 일종의 신용 예금 인출 서비스 등 다양한 금융 서비스가 차례차례 등장하고 확산됐다.
 
  참근교대가 가져온 가장 큰 부산물은 에도의 눈부신 발전이다. 각 다이묘와 최고 엘리트 집단이 에도라는 한 도시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수만 명의 다이묘와 수행원이 ‘순수한 소비자’로 유입됨에 따라 에도에는 거대한 소비시장이 형성된다.
 
  이들의 저택과 숙소 및 공공 인프라 마련을 위한 토목·건설 등 건축업, 다이묘 일행의 공사(公私)에 걸친 교제생활을 위한 외식업, 공예업, 운수업,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이키(粹)’ 복식문화에 따른 섬유업과 의상업, 다중(多衆)의 문화생활을 위한 각종 출판업, 공연업과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활발한 상업 활동이 전개된다.
 
  참근교대로 형성된 에도 권역의 대중 소비시장은 도시 기능에 필요한 엄청난 인구의 에도 유입을 유발했고 전국적으로 조달된 각종 물산이 유통되고 대중 소비용 서비스가 제공, 에도는 이미 18세기 중반에 인구 100만이 거주하는 왕성한 상업 활동과 도시기반 시설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다.
 
 
  신분제도의 붕괴
 
  참근교대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경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먼저 지목할 수 있는 것은 신분제도에의 영향이다. 기존의 지배층인 무사 계급의 지위가 흔들리고 초닌(町人)이라 불리는 상인 계급이 사회의 실세로 등장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금액이 소요되어 다이묘 재정에 큰 압박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지출은 곧 상인 계급의 부의 축적으로 이어져 신분제도를 흔드는 요인이 된다. 많은 다이묘가 참근교대 비용 마련을 위해 오사카 등지의 상인들에게 쌀을 담보로 부채를 지며 화폐를 융통할 수밖에 없었는데 워낙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다 보니 부채가 변제 불가능 수준으로 늘어났고 사정이 어려운 다이묘들은 영지의 이권을 상인들에게 제공하고 정경유착을 통해 근근이 통치권을 유지하는 형편에 처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근교대에 소요되는 의무적 경비는 각 다이묘 재정의 경직화와 만성적 적자 체질을 초래하였고, 다이묘가 재정압박에 힘들어하는 만큼 에도에서의 소비는 확대되었고 화폐는 상인층에 흡수되었다.
 
  대상인들은 축적한 부를 가일층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에 투자하여 정부를 뛰어넘는 자체적인 인력과 조직을 갖춘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권위와 전통에 의지해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던 막부의 지배층과 달리 이들은 명분에 구애받지 않는 실용적인 사고방식과 실행력을 갖춘 변혁의 전위대로서, 훗날 근대화의 파도가 밀려왔을 때 일본이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의 토대가 된다.
 
 
 
‘일본’이라는 의식이 형성되다

 
  마지막으로, 참근교대는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일본(全日本) 네트워크의 구축을 가능케 하였다. 에도가 일종의 네트워크 허브로 기능하면서 전국 단위의 지식, 정보 환류(還流) 시스템이 구축된 것인데, 이는 현대 인터넷의 등장에 버금가는, 하드웨어보다 더 중요한 소프트웨어의 변화에 해당하는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에도에 집중된 인원, 물자, 정보가 혼합, 재가공되어 지방으로 환류되고 지방의 독자성과 결합한 고유의 정보로 진화하여 다시 에도로 유입되는 피드백이 활발해지면서 에도시대 일본은 이미 전근대를 벗어나는 수준의 자본과 시장 원리의 작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국을 묶어내는 네트워크의 구축으로 아울러 자극받은 것은 국가통합 의식의 형성이다. 기존에는 번에 기반한 지역국가 의식이 강했으나 참근교대를 통해 ‘지역성’에서 탈피하여 ‘전국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회화문화가 일본 전역에 퍼져 유행하였는데, 이는 에도에서 유행한 우키요에가 에도에 모인 지방 엘리트들에 의해 빠르고 광범위하게 지방으로 이식되고 전파됨으로써 가능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본적’인 것을 동질성으로 공유하는 중앙-지방 연대의식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동질감은 근대 국민국가의 기초가 되는 민족의식과 통합의식의 맹아가 되었고, 이는 메이지유신 직후 폐번치현(廢藩置縣) 등의 국가개조 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 사회심리적 토대가 되었다.
 
  참근교대가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애초에 그러한 효과를 전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부 정부는 애당초 더 많은 조세를 징수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막부가 눈앞의 세금을 위해 시장에 방임적 태도를 취한 것이 일본으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참근교대로 인한 지출·소비는 필연적으로 자본과 시장의 확대를 지향하는데, 만약 막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였다면 일본의 모습은 오늘날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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