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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사법부 | 현직 판사가 말하는 ‘법관의 양심’

법관이 良心 핑계로 정치적 이념 구현하려 들면 法治의 종막

글 : 김태규  부산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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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상시로 ‘법관이 국민정서를 무시한다’ ‘법도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 ‘국민이 헌법이다’라는 등의 말을 하고, ‘국민정서법’과 같은 표현이 난무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 법관 앞에 가는 모든 사건의 결과가 예측이 가능하다면, 그는 이미 판단자의 지위를 잃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법원 전체로 疫病처럼 퍼져나간다면, 국민들은 법원에 대한 신뢰를 접을 것이다.


⊙ 독일 기본법(헌법), 나치 시대에 ‘건전한 국민감정’이라는 법 개념을 통해 법치 파괴됐던 경험 살려 ‘법에만 따른다’고 규정
⊙ ‘법관으로서의 양심’과 법관의 개인적 양심의 자유가 충돌할 경우, ‘법관으로서의 양심’이 앞서야
⊙ ‘개인적 양심’을 그대로 실현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 ‘법관의 양심’을 발동시킬 필요 대두
⊙ 법관이 양심이라는 쪽문을 통해 자신의 오염된 온갖 가치관을 등장시킴으로써 재판의 공정을 침해해서는 안 돼

金泰圭
1967년생. 연세대 법과대학 법학과, 同 대학원, 미국 인디애나대학 로스쿨 졸업, 한국해양대 법학 박사 / 前 헌법연구관, 부산·창원 지방법원 판사, 부산고등법원 판사, 울산·대구 지방법원 부장판사. 現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2019년 8월 29일 대법원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연루된 소위 ‘국정농단’사건 상고심이 열렸다. 사진=조선DB
  ‘법’이라는 것은 객관적이고 일의적(一義的)이며,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그 본성으로 한다. 그래서 ‘양심(良心)’과 같이 주관적이고 다의적(多義的)이며, 심리적이고 잘 보이지 않는 실체는 법과 잘 부응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처럼 법에 어색한 ‘양심’이라는 단어가 대한민국 헌법에서 세 차례 등장한다. 헌법 제19조에서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헌법 제46조 제2항에서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 헌법 제103조에서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헌법 제19조의 모든 국민이 가지는 ‘양심의 자유’는 기본권으로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국회의원이나 법관에게 주어진 ‘양심’은 그들이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려하여야 할 요소로서 차이가 있다.
 
  국회의원의 양심은 국가이익을 앞세우기 위한 하나의 도구 개념으로,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이나 이익단체의 압력과 유혹으로부터 의연하게 대처하여, 직업적 양심을 가지고 국익을 앞세워 일하라는 주문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대중은 국회의원의 양심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국회의원이 국익을 앞세워야 할 책무를 부담하는 것은 당연하나,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이 가지는 그 정치적・정파적 성격 때문에 양심의 작용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면에 법관의 양심을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은 자못 심각하다. 아마 엄격한 공정성이 법관의 존재가치를 결정하는 요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에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러한 입법 형식이 제헌(制憲)헌법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제헌헌법에서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62년 12월 26일 개헌(改憲・제5차 개헌)을 통하여 ‘그 양심에 따라’라는 표현이 추가되었다. 이 표현이 개헌으로 들어갈 당시에 어떠한 이유로 삽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재판관으로서의 객관적인 양심’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이렇게 법관이 심판을 함에 있어서 헌법과 법률, 그리고 그 양심에 따르면 충분한 것으로 규정하여 법관의 직무상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법관은 그 밖에 어떠한 외부의 간섭도 개의치 말고 공정하게 재판하라는 것이다.
 
  현행 〈법관윤리강령〉도 헌법의 표현을 가져와 “법관은…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법권을 법과 양심에 따라 엄정하게 행사하여 민주적 기본질서와 법치주의(法治主義)를 확립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사법부의 독립이 잘 보장되어 있는 사법부 우위의 국가이지만, 정작 헌법을 통하여 법관에게 직무상의 독립과 판결의 자유를 보장하는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다. 다만 미국 연방헌법 제3조 제1항에서 “연방대법원 및 하급법원의 판사는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한 그 직(職)을 보유하고, 그 직무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으며, 그 보수는 재임 중에는 감액(減額)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여, 최소한의 법관의 신분보장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법관이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하여야 한다는 것은 법관이라는 직업 자체에 내재적(內在的)으로 장착되어야 하므로 굳이 입법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일본이 우리와 가장 비슷한 입법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일본국 헌법 제76조 제3항은 “모든 재판관은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그 직권을 행사하고, 이 헌법과 법률에만 구속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조항에 규정된 양심의 의미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는데, 통상 받아들이는 입장은 ‘재판관의 개인적인 입장’이 아니라 ‘재판관으로서의 객관적인 양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우리나라의 법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입장이다.
 
  독일은 “법관은 독립이며 법에만 따른다”(독일 기본법 제97조 제1항)라고 규정하고 있다. 독일에서도 기본법 초안(草案)에서 법 이외에 ‘양심에 구속된다’는 표현을 포함할 것인지 여부가 논의되었다. 하지만 나치 시대에 ‘건전한 국민감정’이라는 법 개념을 통해 법의 파괴가 이루어진 경험을 고려하여 ‘양심에 따른다’는 것이 법치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양심’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법에만 구속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헌법학자들이 말하는 ‘법관의 양심’
 
원로 헌법학자 허영 전 연세대 교수(왼쪽)와 김철수 전 서울대 교수.
  법관의 양심이라는 내재적이고 심리적인 것을 헌법학자들은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헌법학자들이 말하는 ‘법관의 양심’에 대한 개념 정의를 소개한다.
 
  〈양심은 옳고 바른 것을 추구하는 윤리적·도덕적 마음가짐인데 법관의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최후적인 작용 요인이다. 모든 인간은 양심의 주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으로서 양심을 갖는데, 법관도 법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양심을 갖는다. 그러나 법관이 재판을 함에 있어서 기속되는 양심은 누구나가 갖는 인간적인 양심이라기보다는 법관이라는 직업이 요구하는 직업 수행상의 양심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특별히 공정성과 합리성이 요구되는 법관으로서의 양심이라고 할 것이다.〉(허영, 《한국헌법론》)
 
  〈헌법 제103조의 양심은 법관으로서의 양심을 의미한다. 법관으로서의 양심이라 함은 공정성과 합리성에 바탕한 법해석을 직무로 하는 자의 법조적 양심인 법리적 확신을 말한다. 인간으로서의 도덕적·윤리적 확신과 법관으로서의 법리적 확신이 일치하지 아니할 경우 법관은 법리적 확신을 우선시켜야 한다.(권영성, 《헌법학 원론》)
 
  〈헌법 제103조의 양심이라고 함은 개인적·주관적인 종교상·윤리상 또는 정치상의 의견이나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법관으로서의 양심, 즉 법조적·객관적·논리적인 양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관은 법관으로서의 직업적 양심에 따라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법관으로서의 양심’과 법관의 ‘인간으로서의 양심의 자유’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법관은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양심의 자유’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김철수, 《헌법학 개론》)
 
 
  자신의 양심의 요구 따를 때에는 법적 책임 감수해야
 
  헌법학자 3인이 정리하는 ‘법관의 양심’을 보아도 이들 사이에 ‘법관의 양심’이란 용어의 개념을 구성하는 요소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공정성과 합리성을 요구하는 양심이라고 표현되기도 하고, 법조적・객관적・논리적・직업적 양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양심으로만 표현되기도 하고, 나아가 법리적 확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소개되는 학자의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법관의 양심’을 묘사하는 표현도 더 많아지고 그 복잡성이 더해질지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 정의되는 다양한 모습 중에서 나름 공통부분이 없지는 않아 이것을 추출(抽出)해보면 대강 이런 정도의 공감대가 아닐까 생각된다. 법관의 양심은 객관적・법조적인 직업 수행상의 양심이며, 공정성과 합리성이 요구되는 법관으로서의 양심이다. 일반인이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양심, 도덕적으로 가슴을 조이고 아픔을 느끼게 되는 그러한 양심과는 차이가 있다.
 
  법관의 양심을 보는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에 대한 반론(反論)도 있을 것이다. 즉 헌법 제103조에 규정된 법관의 양심도 헌법 제19조에 규정된 모든 국민이 가지는 주관적 양심과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법관은 이러한 자신의 주관적인 양심에 따라 무엇이 법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거의 주장되지 않는 견해라 논문 등에 충실히 소개된 것은 아니나, 법관이 자신의 도덕적 양심에 충실할 필요를 인정하고, 그러한 양심에 따라 법률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판단하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자신의 양심이 법률과 배치될 때에는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에 놓이게 되고, 그중 자신의 양심의 요구를 따를 때에는 법적인 책임을 감수해야 하고, 법률의 요구를 선택할 때에는 도덕적으로 쏟아질 비난을 감내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양심이라는 개념의 주관적・심리적 성격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 좀 더 자연스러운 해석으로 볼 여지도 있다. 또 법관으로 하여금 ‘법률이 부당할 때는 도덕적 양심의 소리를 따르라’는 저항적 메시지를 허락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저항적 메시지는 굳이 헌법 제103조에 담지 않더라도, 법관이 헌법 제19조에서 국민으로서 가지는 ‘양심의 자유’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으므로 (법관이 법관의 양심보다 인간의 양심을 앞에 내세우는 것이 정당한가는 별론으로 하고), 헌법 제103조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헌법 제19조의 양심은 기본권으로서의 양심을 의미하고, 헌법 제103조의 양심은 법관의 독립과 관련된 양심이므로 그 법체계 및 내용상 달리 파악되어야 한다.
 
 
  ‘법관의 양심’은 ‘개인적 양심’ 제약
 
  ‘양심’의 문언상 의미는 ‘사물의 가치를 변별(辨別)하고 자기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이다. 그리고 법관도 인간이니 도덕적・인간적인 양심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든 ‘법관의 양심’이 어떠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해보라고 하면 참 막막해진다. 개념 자체가 추상적이고 막연해서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한발 더 나아가 ‘인간적 양심’으로부터 ‘법관의 양심’을 구별해내라고 하면 혼동은 한없이 깊어지는 느낌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양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접어두고, 그냥 이 안에는 도덕적 양심뿐만 아니라 개인적 소신, 가치관, 철학관, 이념, 정치적 성향까지 모두 포함된 것으로 보자. 그러고 나면 모든 판사는 당연히 이러한 다분히 개인적인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저 법조문만 찾고 있을 듯한 천하에 고지식한 판사라도 자신의 소신이나 가치관 나아가 정치적 성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판사도 사람이라 재판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관을 투영하여 판단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양심이라는 것이 인간 내심(內心)의 작용이고,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숨기기가 쉬워 그러고 싶은 충동은 더 강해진다.
 
  물론 아무리 내심의 작용이라고 해도 그 결과가 외부에 현출(現出)될 것이므로 그 정황들을 잘 살피면 법관이 개인적인 양심을 앞세워 판결했는지 여부를 알아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런 정황을 통한 추론은 확정적이지 않아 단지 의혹에 그치는 경우들이 많고, 또 판사들이 자신의 의도를 숨길 정도의 문장력을 갖춘 경우가 많다는 사정을 고려하면 그 실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또 알아낸다고 해도 제약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이렇게 보면 ‘법관의 양심’이라는 것은 법관이 자신의 ‘개인적인 양심’을 제약하고 눌러서 판결의 공정성과 합리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도구 개념 내지 대항 개념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법관의 양심을 논하는 것은 애초 법관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정작 법관의 양심이라는 화두(話頭)를 던지는 순간 그것은 ‘실체의 파악’이 아니라 법관의 양심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當爲)의 선언’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이유에서 법관의 양심이 헌법에 표현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판사로서 구체적인 사건을 접하고 재판 과정을 거친 후에 판결을 작성하는 단계에 이르면, 참 마음에 들지 않는 법률들이 많다. 개인의 자유, 사적자치(私的自治)의 원칙, 사유재산권의 보장을 최대한 보장해야 된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신이라 때로는 법의 해석을 좀 비틀어 내 의중대로 판결하고 싶은 충동도 들고, 다소 무리로 보이지만 위헌(違憲)법률심판제청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개인적인 감정이 불현듯 치솟을 때도 있다. 판사가 자신의 인생사에서 남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거나 사기를 당하는 등 어떤 불이익을 받은 경험이 있을 때 그와 유사한 형태의 사건이 자신의 판단 앞에 놓이게 되면 심정적으로 몹시 불쾌해지면서 그 불쾌함을 판결의 결과에 듬뿍 담고 싶은 욕구가 들 수 있다.
 
  판사가 선고한 판결이 상급심에서 뒤집히면 “아, 내가 잘못 판단했구나, 상급심이 옳구나” 하고 바로 수긍하게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의 경우에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결론을 뒤집은 것인지 납득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대법원 판결이라고 해서 무작정 수긍되는 것도 아니다. 대법원 판결이 채택한 법리나 정책적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판단을 함에 있어서 나의 소신과 감정과 인식이 다른 법제도나 기준들과 충돌하고 부딪히는 것이다. 법률의 위헌 심판에 있어서 합헌성(合憲性) 추정의 원칙과 충돌하고, 양형의 공정성을 침해하며, 심급(審級)구속의 원칙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법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독립’해야
 
  재판 과정에서 판사는 많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법제도나 법원칙과 맞부딪히게 된다. 그렇게 느껴지는 불편함을 내 개인적인 양심이라고 대강 간주를 하면 그러한 것들을 그대로 실현하고 싶은 유혹이 든다. 이럴 때 법관의 양심을 발동시킬 필요가 대두하는 것이다. 법관은 내 개인적인 양심이 재판의 공정을 침해하는지 되돌아보고, 그러한 흔적이 보이면 법관의 양심을 이유로 스스로 이를 제약해야 한다. 재판의 공정을 위해 자기부정을 하고, 그것을 위해 법관의 양심이라는 개념적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대개 법관의 양심의 자유는 헌법 교재에서 ‘사법권의 독립’, 그중에서도 ‘법관의 독립’ 부분에서 기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관의 자기부정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법관이 마지막으로 독립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독립이기 때문이다.
 
  앞서 법관의 양심에 대한 허영 전 연세대 교수의 정의를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양심은 법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최후의 작용 요인’이다. 공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법관에게 법과 양심에 따라서만 재판하면 된다고 면죄부(免罪符)를 주었는데, 정작 법관 스스로 최후의 관문에서 양심이라는 쪽문을 통해 자신의 오염된 온갖 가치관을 등장시킴으로써 재판의 공정을 침해한다면 법관의 직무상 독립을 보호하고자 했던 다른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법관의 자기부정은 법관의 직업적 양심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고, 또 습관이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내가 증거는 제대로 보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는 법리에 오류는 없는지, 그래서 내가 오판(誤判)을 피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 자신의 개인적 가치관이나 정치적・이념적 소신에 판단이 매몰되어 있지 않은지 고민하는 것이다.
 
 
  ‘판사의 성향’을 살피는 세상
 
2018년 11월 19일 각급 법원의 대표 판사들로 구성된 이른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법연수원에서 열려 ‘사법적폐’로 지목된 판사들에 대한 징계 등을 논의했다. 사진=조선DB
  요즘 언론이나 항간에서 구전(口傳)으로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재판에 앞서 판사의 성향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재판을 앞둔 지인(知人)들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는 경우들이 있는데, 참 난감하다. 과거에는 전혀 듣기 힘들던 말이 요즘은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두고, 단지 법관들도 이제 개성이 강해져서 그렇겠지 하고 치부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판사가 출세에 크게 관심 없고, 온 세상이 뭐라 하든 말든 그냥 증거로 나오는 사실관계에만 기초해서, 정해진 법률과 법리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그래서 답답하기 그지없이 ‘딸깍발이 판사’를 보면 숨이 막힌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적어도 공정성을 잃은 판단을 할 거라는 생각은 않게 된다. 이런 ‘딸깍발이 판사’는 주위의 청탁에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고, 판결로 정치를 하지도 않을 것이라서 세상이 요구한다고 해서 그대로 판결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히 대중으로부터 상당한 욕을 얻어먹을 공산이 크다.
 
  이런 딸깍발이들을 두고, ‘법해석에만 얽매이는 법실증주의자(法實證主義者)’라거나 ‘법관이 아닌 법 기술자’일 뿐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개념의 분석과 해석만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재단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요즘같이 판사들의 성향이 문제되고, 판사가 보기에도 일부 판사들이 너무 정치적으로 판단한다는 의문이 들 정도이고 보면, 유치한 저항심리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과거 딸깍발이 선배들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딸깍발이의 답답한 이미지를 위해 변명을 더하면, 그런 판사라고 해서 그저 법만 알고 세상의 물정과 이치는 몰라서 어리석다고 볼 필요가 없다. 그런 판사라 해도 아마 내심은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개인적 소신과 판사로서 하는 법적 판단은 전혀 다른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적 판단에서 자신의 개인적 소신과 가치관에 기초하는 양심은 한없이 양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법관으로서 판단의 공정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판사가 가져야 할 양심의 심리적 저지선인 것이다.
 
  다분히 자조적인 해석이지만, 법조 시장의 환경이 어려워지면서 당당하게 직을 걸고 소신을 펼쳤던 선배들과 달리 판사직을 관두는 그 순간 거친 황야로 던져져야 하는 현실 때문에 몇몇 판사가 사명감・정의감은 잠시 덮어두고 법원 안에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법관이 압력에 굴복할 때
 
  법관 스스로가 공정성의 적(敵)이 되는 것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법관이 개인적 양심을 앞세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나 소신을 담아 판결하는 것인데, 이와 등가(等價)에서 경계되어야 할 것이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다. 법관이 자신의 양심을 주위의 겁박이나 압력으로 꺾어버린다면 그 역시도 재판의 공정성을 왜곡한다.
 
  대통령의 탄핵과 세칭 국정농단사건, 최악의 사법파동 등을 겪으면서 ‘법관이 여론이 무서워서, SNS상으로 협박을 받아서 그 밖에 이런저런 압력에 굴복해서 판단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긴 탄식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판사 생활을 하였거나 하고 있는 법조인이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다르게 판결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땅이 푹 꺼져버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판사가 여론이나 대중의 압력과 협박에 굴복하는 것이 용인되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무책임하고 선동된 여론, 진실을 말하지 않는 언론, 저급한 비방과 협박으로 도배된 SNS 등, 이러한 민주주의의 적들이 없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그러나 바른 여론, 진실된 언론, 성숙한 SNS 문화를 항상 기대하기는 현실의 세계에서 어렵다. 어느 정도 수의 민주주의의 적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소수(少數)의 민주주의의 적들을 과장하고 그들의 작은 협박에도 겁을 먹고 자지러지면 그러한 민주주의의 적들은 더 기세를 올릴 수밖에 없다.
 
  작은 겁박에도 판사가 겁을 먹고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을 내주는데, 그런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을 쓰지 말라고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민주주의의 적들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그러면서 그들의 잘못된 물리적 요구에는 끌려가는 그런 판사들이 오히려 비난을 받아야 한다.
 
  판사가 자신의 옳은 심지(心志)를 지키고 직업적 양심으로 당당하게 판단하면 대중도 알게 된다. 서툰 협박이나 응석 부림, 행패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의 적이 준동해보아야 불이익만 커진다는 것을 민주주의의 적들이 자각해갈 수 있도록 해야 그들의 수가 줄어들 것이다.
 
 
  ‘양심’이라는 잣대 남용해 法 왜곡
 
  법관의 양심과 관련하여 우려하는 것 중에 또 하나는 법관 중 일부가 양심을 헌법과 법률 다음으로 오는 법원(法源・법관이 재판 기준으로 적용하는 법규범) 내지 법적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법원에는 조리(條理)라는 것이 있어 법규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공백이 발생하는 틈새를 이것으로 메울 수 있다. 그런데 법관들이 이 부분을 조리 이상의 의미로 양심으로 채우고, 때로는 헌법과 법률조차 이 양심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런 오해를 가져오는 데는 헌법 조항의 규정 방식에도 일정 부분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다. 법관의 양심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는 헌법으로는 앞서 보았듯이 일본 헌법이 있는데, 이것이 우리 입법 양식과 가장 비슷하다.
 
  그런데 일본 헌법도 우리와 차이가 나는 것이 “모든 재판관은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그 직권을 행사하라”고 하여 기본적으로 법관이 직권을 행사하는 태도를 먼저 정하고, 이어서 “이 헌법과 법률에만 구속된다” 하여 판단의 근거는 헌법과 법률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고 규정하여 마치 헌법과 법률이 없으면 그다음으로 양심에 따라 판단하라는 헌법적 명령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다. 물론 양심 앞에 ‘그’라는 표현이 더해져 있어서 정확히 해석하면 그리 볼 수 없는 것인데, 그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헌법과 법률 다음으로 병렬하여 양심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법관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판단하고, 그 판단에 있어서 직업적 양심에 대한 각성의 정도를 높이라는 의미인데, 헌법과 법률이라는 엄격한 고형(固形)의 잣대 위에 양심이라는 신축성 물질을 잔뜩 붙여 편의대로 늘리고 줄여가면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양심이라는 잣대를 남용하면서 결국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원래의 규범력을 무력화(無力化)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양심을 하나의 법규범으로 이해해서, 이것을 내세우면서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거나, 양심을 듬뿍 담은 법해석으로 헌법과 법률을 왜곡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양심을 만족시키면서, 그로 인해 마음속에 일어날 수 있는 불편한 심리 상태를 법관의 양심이라는 겉 포장을 씌워 평온을 얻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민정서법’
 
나치 독일의 악명 높은 민족재판소 판사 롤란트 프라이슬러. 나치에 의한 법치의 왜곡에 대한 반성으로 戰後 독일 기본법은 ‘법관은 양심에 구속된다’는 표현을 배제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독일은 기본법에서 ‘법관은 양심에 따른다’는 표현을 넣지 않고, 단지 법에만 구속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법관들의 양심을 자기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을 예방하고자 한 것이다. 독일은 헌법과 법률을 ‘건전한 국민감정’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대치하면서 법치를 파괴하였던 나치를 경험한 나라다. 법관들은 ‘건전한 국민감정’이라는 대의명분으로 헌법과 법률을 해석하고, 이를 통해 사실은 독재정권 앞에 헌법과 법률이 무기력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국민감정을 빼내고 대신 양심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단어를 집어넣음으로써 재연될 과오를 경계한 것이다.
 
  사람들이 상시로 ‘법관이 국민정서를 무시한다’ ‘법도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 ‘국민이 헌법이다’라는 등의 말을 하고, ‘국민정서법’ 같은 표현이 난무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모호한 개념으로 법치를 침해할 사회적 분위기가 충만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말을 하면 ‘너는 국민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것이냐’고 힐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비방하는 사람은 대개 국민주권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또 대개 그 비난의 저변에는 자신이 요구하는 정치적 편향성을 따르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 깔려 있는 경우가 더 많다. 법관들 중에서도 ‘국민정서’나 ‘집단지성’ 같은 단어를 자주 언급하며, 법보다 이러한 것들을 앞에 두려는 사람들이 있다.
 
  사견(私見)으로는 우리 헌법 제103조에서 ‘양심’을 빼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법관이 헌법과 법률보다는 양심에 자주 호소하고 그것을 핑계로 헌법과 법률의 양보를 자꾸 요구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법의 원형질 속에 사람의 양심이 없을 수 없지만, 법이 나서야 할 곳에 사람과 양심을 너무 내세우며 법을 숨기려 들면 대개 다른 뜻이 있다.
 
 
  法治의 종막, 국가의 종막
 
2018년 9월 13일 법원의날 70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사법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조선DB
  ‘양심’이라는 개념이 분명하지 않고 혼란스러우니까, 간혹 법관조차 그 단어 속에 온갖 이물질(異物質)들을 섞어 넣는다. 법관 개인의 정의감, 인생관, 자의적(恣意的)인 연민뿐만 아니라 이념과 정치적 성향 등 다양한 무형물(無形物)을 마구잡이로 섞어 그것을 양심이라는 이름 아래 종종 자신의 사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법관이 양심을 과하게 내세우거나, 이를 핑계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나 이념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또 아니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법치의 종막이다. 법관의 양심은 헌법과 법률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함에 있어 따라야 할 마음가짐이지, 그것이 헌법과 법률을 대체하거나 그것의 지도 원리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법관이 양심을 핑계 삼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투영하여,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고,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가혹하게 판단한다면 이것은 법관이라는 지위를 자신의 정치적 이상(理想)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서는 그 소송의 이해당사자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가 없다. 법원의 전반적인 태도가 그렇게 흘러가면 전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지킬 수 없다. 법관이 자신 앞에 놓인 사건을 예외 없이 정치적 편향성을 가지고 판단하면, 그래서 그 법관 앞에 가는 모든 사건의 결과가 예측이 가능하다면, 그는 이미 판단자의 지위를 잃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법원 전체로 역병(疫病)처럼 퍼져나간다면, 국민은 법원에 대한 신뢰를 접을 것이다. 국가의 모든 작용 중에서 마지막으로 공정성을 확보해줄 기회의 장(場)인 법원에서 그러한 분위기가 만연한다면 그것은 법원의 종막이 아니라 국가의 종막으로 이어질 것이다. 국민의 저항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편들기식 재판은 안 된다
 
  법관도 결국 사람인데 아무리 법관의 객관적이고 직업적인 양심을 강조해도 자신의 주관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한 가능성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결국에는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직업적 양심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폭 내지 심리적 저지선이 무엇인지는 법관이라면 알고 있다. 또 알아야 한다. 그러한 최소한의 심리적 저지선조차도 허물고 편들기식의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법관의 양심이 법관의 정치적인 판단을 위한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그것에 대하여 너무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유이다.
 
  혹자에 따라서는 헌법 제103조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법관은 법해석을 통하여 결국 법 형성 기능을 수행하므로 그 과정에서 양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위 헌법 조항에 표현된 양심이라는 문구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조문의 문구가 반드시 적극적인 의미를 띠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표현은 수식이나 보충의 의미로, 또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의미로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비틀린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법관의 양심은 재판의 공정성·합리성에 목적
 
2018년 12월 12일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한변) 변호사들이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사진=조선DB
  여기까지 글을 좇아온 이는 이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법관의 양심이라는 실체를 규명할 줄 알았더니 결국 법관의 마음가짐이나 자세 등 지극히 당연한 말을 강조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법관윤리강령〉이나 한번 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법관의 양심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다양한 언어로 정의해보아도 그것은 결국 복잡한 단어가 가지는 개념을 파악하는 데 그치고, 머릿속의 혼잡만 더할 것이다. 심리적으로 파악하여 정확히 가려낸다고 해도 그것이 법적으로 어떠한 큰 의미를 가질지도 의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 양심이다. 헌법에 규정된 양심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 양심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법관의 양심은 재판의 공정성과 합리성에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을 위해 가져야 할 법관의 마음가짐, 즉 그 당위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그리 폄하할 일은 아닌 듯하다.
 
  국가의 기능이 커지고 정부의 규모가 커지면서 국민들의 정치와 이념에 대한 관심도도 현저하게 높아진 면이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이념적 갈등이 심화되고, 그러한 갈등이 모두 마지막에는 법원으로 모이면서 법원이 참 일하기 힘들어지고 입장이 난처해진 것이 사실이다. 물론 법관의 양심을 정치적・이념적 영역에 한정해서 볼 일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큰 반향(反響)을 일으키고 법원에 대한 불신과 불평이 커지는 원인들이 대부분 정치적 영역에서 발생하다 보니 그에 대하여 더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다.
 
 
  풍랑 속의 판사들
 
  판사가 누구냐가 언론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판사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환호와 비난이 교차하면서 거세게 닥쳐온다. 그래서 법관들 역시 이러한 정치적 풍랑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자신의 내공을 키울 필요가 있는데, 아직 그러한 필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때로는 판사 스스로가 그러한 풍랑 속에서 동조하면서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헌법 속에 ‘법관의 양심’이라는 단어가 이미 표현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법관의 공정성을 위해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재판의 공정성을 마지막으로 지킬 수 있는 것도 법관이고, 이것을 해칠 수 있는 것도 법관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관 자신으로부터의 독립은 중요하다. 그러한 의미로 이 조항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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