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사이버대·《조선일보》 공동 주최, ‘평생학습 새 삶을 두드리다’ 공모전
⊙ 총 321건 접수, 대상 없는 금상·은상 4作, 동상 10作 선정
⊙ 총 321건 접수, 대상 없는 금상·은상 4作, 동상 10作 선정
- 한양사이버대 졸업식 모습.
국내 사이버대학교의 선두주자인 한양사이버대학교(총장 김우승)와 《조선일보》가 제1회 평생학습 수기 공모전 ‘평생학습 새 삶을 두드리다’를 개최했다. 저마다 땀과 희망, 감동의 사연을 담은 총 321건의 우수한 평생학습 사례가 접수돼 금상과 은상 수상자 각 2명, 동상 수상자 10명을 선정해 총상금 2800만원을 수여했다. 대상작은 올해 선정하지 못했다.
이번 평생학습 공모전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평생 학습자를 발굴, 배움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좋은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됐다. 개개인이 주체적 학습자로서 평생에 걸친 학습 생활을 스스로 주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다양한 연령대와 우수한 평생학습 사례가 접수되어 심도 있는 심사가 진행되었다. 심사위원장은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과)가 맡았다.
《월간조선》은 지난 10월 4일 한양사이버대 김성제(金誠濟) 부총장을 만나 평생학습과 공모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성제 부총장은 “노안(老眼)이 왔다”라는 말부터 기자에게 건넸다.
― 저는 일찌감치 노안이 온걸요.
그는 “(다초점 렌즈를) 쓰라고 쓰라고 해도 안 쓰다가 이제는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김 부총장의 첫인상은 깐깐해 보였다. 또 자기만의 시각이 단단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김 부총장은 영문과 교수 출신으로 현대 영미 희곡, 문화담론 기호학 등이 주(主)전공이다.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부학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등을 두루 거친 영문학자이자 대학 행정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공부 열망이 엄청나게 강한 국민이 한국인이죠. 그러나 뭔가 큰 의미에서의 평생학습 혹은 재교육이나 노동시장에서의 교육 복귀(return to education) 개념이 아직은 개념화가 덜 된 것 같아요. 실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분들도 (본받을 만한) 모델링이 없어 안타까웠다고 할까요.
재단 이사장님께서 ‘배움에 목말라하고 다양한 교육과 직업 목표를 가진 학생들에게 모델링을 제시하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셔서 수기공모전을 하게 된 것이죠.”
‘평생학습 새 삶을 두드리다’ 공모전은 올해 처음 시작되었다. 향후 2년마다 개최해 공부를 향한 땀과 노력, 열정의 흔적들을 뜨끈뜨끈한 논픽션으로 전달할 계획이다.
“‘일하면서 배우는’, 혹은 배움의 기회를 놓친 분들이 리스킬링(reskilling·새로운 기술을 습득한다는 의미), 업스킬링(upskilling·숙련도를 향상한다는 의미)하며 자기 주도, 혹은 협력 학습을 통해 성공한 모범사례를 널리 알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수상한 분들의 영상도 만들려고 해요. 다큐처럼 말이죠. ‘아, 이렇게 시작하면 되겠네’ ‘그래, 나도 할 수 있겠어’라고 느낀다면 좋겠어요. 시작이 반인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말이죠.”
‘빅 퀘스천’과 기술구현
― 사실 온라인 교육에 그간 ‘빅 퀘스천(big question)’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그렇죠. 학생들에게 ‘정말 실력이 늘까?’ 하는 의심의 눈길이 있었죠. ‘에이, 교수님. 학위만 따러 왔으니 세게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했거든요. 그게 오히려 전체 사이버대 위기를 가져왔다고 진단합니다. 이제는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자는 겁니다. 기술적으로도 ‘빅 퀘스천’을 거의 해결했어요.”
학습자의 공부 의욕을 자극하고 시험이나 과제의 부정을 차단하는 엄격한 학사관리가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온라인상에서 학생의 집중도를 어떻게 점검하느냐, 시험 혹은 평가의 공정성과 엄정성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는 두 가지 의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플랫폼 교육 혹은 온라인 교육이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한양사이버대가 제일 앞서 있어요.
(학생들이) 콘텐츠를 접할 때 집중도를 점검하는 솔루션이 등장했고, 시험 볼 때도 화상으로 직접 구술시험을 보거나 어떤 환경에서 어떤 자세로 시험을 치는지 다 알 수 있거든요.”
― 사실 한국처럼 온라인 교육에 익숙한 나라는 없지요.
“학생 누구나 ‘인터넷 강의’를 듣잖아요. 세계 최대의 인강 강국인데 오히려 발목이 잡힌 측면이 있었어요. 모든 학생이 인강으로 대입 수능을 준비하지만, 인강이 정말 효과적인지 의문이거든요. 자기 주도적인 학습자에겐 긍정적이나, 학습관리가 안 되면 교육 효과가 현격히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온라인 교육의 한계를 해결하니까 학생도 만족하고 학부모도 만족합니다.”
― 게다가 ICT 기술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5G 통신이 구축되면 VR(Virtual Reality), 즉 가상현실 체험 콘텐츠가 보편화될 겁니다. 까다로운 공학교육도 온라인으로 구현돼 과거 매뉴얼만으로 도저히 따라 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웠던, 실험·실습으로 얻을 수 있던 정보를 시뮬레이션으로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이죠.”
― 아까 공학교육 말씀하셨는데, 전통적으로 한양대는 공대가 강하잖아요.
“현재 4개 학부 8개 전공으로 이뤄진 한양사이버대 공학 계열의 문을 두드리는 입학 적령기 학생이 많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짐작건대 실업계 고교를 나와 현장에서 일하는 학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다른 사이버대도 조심스럽게 공학 계열 정원을 늘려나가는 것 같아요.”
과거 사이버대 재학생의 연령대는 30~40대가 가장 많았다. 재취업과 전업, 자기 계발, 혹은 학위를 따기 위해 온라인 고등교육의 문을 두드리는 이가 다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20대 비율이 가장 높다.
한양사이버대의 경우 2015년 1학기 지원자 중에서 20대 비율이 44.7%로 가장 많았고 30대 26.5%, 40대 19.2% 순이었다. 2019년 1학기도 마찬가지였다. 20대가 44.2%로 압도적이었고 30대(20.4%)와 40대(19.5%)가 엇비슷했으며 50대가 10.1%로 뒤를 이었다.
4–ever와 ‘小確成’
― 20대 지원자가 많다는 의미를 해석하신다면….
“‘일하면서 배우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대개 세계적인 교육 추세가 업스킬링, 리스킬링인데 자신의 직무(職務)를 고도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정보나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배움의 문을 두드리죠. ‘일하면서 배우는’ 이들은 이 두 가지 개념을 다 겸비하고 있어요.
덧붙여 대학원 수요가 온라인 교육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죠. 상대적으로 오프라인 대학의 대학원 진학은 줄어드는데 말이죠.”
― 한양사이버대의 재학생 중 ‘일하면서 배우는’ 학생의 비율은 어느 정도입니까.
“직업이 있는 재학생 비율이 70%대로 파악돼요. 대학원의 경우는 90% 이상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직업 현장에서 리스킬링, 업스킬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잖아요. ‘일하면서 배우는’ 학생에게 ‘언제든지 얼마든지 대학으로 돌아와라!’ ‘편입학이 무거우면 미국 대학처럼 나노 디그리(nano degree) 과정을 만들어줄게!’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노 디그리는 일종의 단기 교육과정 인증 제도를 말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핵심 지식이나 기술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이수할 경우 대학이 인증서를 부여하는 제도다. 최소 4과목(12학점) 이상 최대 6과목(18학점)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예컨대 기계제어공학과의 나노 디그리는 ‘연소 시스템 제어’ 과정이다. 기계공학개론, 유체역학, 기계요소설계, 자동제어, 연소공학, 내연기관 등 6과목을 이수하면 학위 수여 및 별도의 인증서를 준다. 자동차IT융합공학과의 ‘자동차구조학’ 나노디그리 과정은 자동차공학개론, 자동차P/T공학, 자동차엔진공학, 자동차전장시스템공학, 자동차메커니즘 등 5과목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같은 나노 디그리 프로그램이 31개에 이른다.
“나노 디그리 과정을 이수할 경우 나노 디그리 전공을 주 전공과 함께 표기해 학위를 수여하거나 별도의 인정서를 수여할 계획입니다. 실제로 공학계열 과정에 전공 학부생이 아닌, 시간제(학점은행제) 학생이 많이 찾아와요. 그런 학생들이 업스킬링, 리스킬링 수요거든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현상이죠.”
이 대목에서 김성제 부총장은 ‘소확성’이라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강조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성공’의 줄임말이다.
“직장인이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이 바로 사이버대입니다. 그래서 저는 4-ever라는 말을 써요. 영원하다(forever)는 의미에다 누구든지(whoever) 언제(whenever) 어디서나(wherever) 무엇이든(whatever) 공부할 수 있는 제일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으니까요.
‘소확행’이란 말이 있듯이 ‘소확성’이란 말을 강조합니다. ‘학습 성공’이 ‘졸업 성공’으로 이어져 ‘직업 성공’을 이루자는 발산적 개념이죠. 미국 대학에 가보면 ‘학생 성공(student success)’이란 개념을 많이 강조해요. 우리도 학생들에게 ‘잘 배웠니? 공부 잘하니? 실력이 향상됐니?’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 과목의 성공이 한 학기의 성공, 졸업 성공, 취업 성공, 나중에는 공헌과 기부로까지 연결되면 좋겠어요.”
《월간조선》은 이 시대를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불 밝히는 평생학습 달인(達人)들의 이야기를 지상(紙上) 공개한다. 지면 사정상 부분 요약해 전달한다.⊙
금상
이상용씨
한양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상담심리학과 졸업
晩學, 내 인생 제2의 꿈을 실현… 현재 在家 복지센터 운영
나는 1962년 초등학교 1학년을 서울 신촌에 있는 창천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속초의 속초국민학교로 전학하였다. 지금은 동해와 설악산을 낀 유명 관광지로 변하였지만 62년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미니버스로 진부령을 넘어 12시간을 달려 도착한 조그만 포구는 바다에 의지하고 하루하루 힘들고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가난한 어촌이었다. 시내에 있는 학교에 가려면 신흥사 절이 있는 동네에서 목우재 고개를 넘어 속초 시내까지 3시간을 걸어야 했다. 학교에 가기 위해 동도 트기 전 깜깜한 새벽에 2살 위인 누나의 손을 잡고 수목 울창한 재를 넘으며 너무 무서워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등하교 6시간의 고통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그 시절 나의 꿈은 열심히 공부하여 선생님이 되어 배고픔을 벗어나는 길이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쫓겨나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 되어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시름에 차 있을 때 진학을 못 한다는 소식을 들으신 내가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이 찾아오셨다. 신부님은 내 이야기를 한참 들으시고는 서류를 주시며 부모님 동의만 받아오면 가톨릭계 고등학교, 대학교를 무상으로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주신다고 하셨다. 단, 신부가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아버지의 일언지하 반대에 펼쳐보지도 못한 채 접고 말았다. 그나마 신부님 배려로 서울의 기숙형 전자기술학원 1년 과정 학원비를 지원받고, 아버지가 여비로 주신 1000원을 들고 1971년 서울로 올라왔다.
기술학원에 다니면서도 상급학교 진학의 꿈을 버리지 못해 학원장을 설득하여 학원비를 면제받는 조건으로 학원 청소와 야간 경비를 하며 고등학교 졸업 학력 인정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다행히도 시험에 합격해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취득하였다.
1971년 1000원을 들고 상경하다
이제 대학 진학이라는 꿈이 하나씩 실현되는 꿈에 부풀어 학원 책상 위에서 잠을 자며 매일 끼니를 라면으로 해결하면서도 동료들에게 부끄럽거나 부러울 것이 전혀 없었다. 열심히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하며 하루 4시간을 자며 공부하여 드디어 한양대 전자공학과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기 암 치료를 위해 3년여 마련한 학비를 수술비로 모두 내어 드렸다. 인천공단의 대우전자에 취업, 결혼하고 20여 년을 가족과 부모님 부양에 정신없이 살아오면서도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에 항시 미련이 남아 있었다.
20여 년 근무한 대우전자에서도 중졸이라는 학력이 진급에 상당히 영향을 미쳐 1991년 퇴사하고 전자제품 제조에 뛰어들었다. 5년여 만에 상당한 위치에 올랐으나 IMF 파도를 넘지 못하고 파산하고 말았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위기는 곧 기회임을 되새겼다. 늦었지만 공부를 통해 내실을 다지기로 마음먹었다.
꿈속에 그리던 한양대학교 교정을 동경하여 경영대학원 최고지도자 과정을 이수하였다. 또 한양대학교 평생교육원에도 등록하여 5년간 기초와 교양을 다듬었으나 배움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내 인생 제2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복지사의 길을 장고 끝에 선택하였다. 그에 따른 전문 소양과 기술을 익히고 자격을 취득하여 사회복지시설을 경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양사이버대학에 입학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번민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복지학부 사회복지시설 경영 전공을 선택하고 입학식 날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늦은 나이지만 열심히 공부하기로 다짐하며 대학생이 되었다.
학생 신분임을 잊지 않으려 쑥스러움도 감내하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학부 MT, 축제, 오프라인 공부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학내 분위기를 익히고 적응하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늦은 나이에 대학공부를 한다는 자부심에 아들 또래의 선배들에게도 깍듯이 존대하며 교내외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다. 그러나 평생 기술계 용어에만 익숙한 나는 낯선 사회복지 용어와 온라인 학습방법에 참 많이 힘들었다. 물론 젊은 동급생을 따라가려 최선을 다해 공부하였다.
멘토가 되어 봉사상을 받다
2학년이 되어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무렵, 우연히 편입생으로 들어온 학부 학생 중 새터민 출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원을 나온 지 두 달. 아직은 남한의 표준어에 익숙하지 못한 학생이 어찌 공부할 수 있을까 걱정되어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멘토로 도움을 주었다. 또 5명의 만학도가 우리 조에 편성되었다. 나는 입학 때의 어려웠던 경험을 토대로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3학년에 편입한 새터민 출신의 김○○ 학생에게 마음이 갔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PC, USB 같은 영어단어는 물론 간단한 컴퓨터의 기초지식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대로는 온라인 수강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우리 회사 사무실로 불러 종일 온라인 수강을 하며 그때그때 질의응답에 응하고 출퇴근을 같이했다. 그런 생활을 2년간 한 뒤 졸업을 하여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학교 추천으로 5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장애인 시설에 생활지도 사회복지사로 취업하여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며 3년 차 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다. 대견하고 나 또한 자랑스럽다. 멘토링 프로그램에 멘토로서 3회 참석하여 지금도 10여 명을 정기적으로 만나 교분을 나눈다. 그 덕에 졸업 시 총장님의 봉사상도 받는 영광도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닌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60을 전후해 은퇴하여 사장되는 은퇴자들의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지식공유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 기관이나 시설도 실버 인력의 참여가 가능한 모델이다. 그러나 문턱이 높다. 새로운 정보를 찾아 관심 있는 강의에 열중하던 중 외부 강사를 초청한 협동조합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래 내가 생각하던 바로 이거다!’였다.
그리고 드디어 3학년 2학기에 ‘드림 플라이 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100세 시대’에 50을 전후해 은퇴 등 일자리를 상실하고 소일하는 전문인력에 그간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경력을 활용할 수 있는 평생 일자리 개발을 목표로 협동조합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니어들의 사회참여 욕구와 경제적인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직종과 근로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협동조합 설립과 재가 복지센터
직원이 함께 조합을 소유하고 관리하며, 안정적인 평생 일자리를 늘려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재가 복지센터를 개소하였다. 현재 15명의 요양보호사와 2명의 사회복지사의 일자리를 창출하며 운영하고 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재미에 흠뻑 취해 욕심을 부려 평소에 하고 싶었던 상담심리학을 복수 전공해 2급 사회복지사 자격증과 2개의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 요양보호사 1급, 건강가정사, 중증장애인 활동 보조인 자격을 취득하고도 2017년 8월 20일 한 학기를 앞당겨 조기 졸업하였다.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좀 더 심화 학습하고 싶었으나 조금 뒤로 미루고 비영리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려 동분서주하고 있다.
금상
이영미씨
한양사이버대 영어학과·일본어학과 재학
‘배우는 즐거움’이라는 치료법
내가 한양사이버대 편입생으로서 다시 학사 학위 과정에 입학하여 평생학습의 도정에 오르게 된 이유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피폐해져 갔던 육체 속에 자리한 내 정신의 무기력감을 극복하고 예전의 청명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던 열망 때문이었다.
지금 나는 그 열망이 나의 존재론적인 가치의 회복을 돕는 데 대단히 긍정적이었다고, 그리고 나의 인생에서 가장 바람직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양사이버대에 편입학하기 전해에 암 판정을 받았다. 당시 의사의 진단을 듣는 순간은 어찌나 놀랐던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귓속, 머릿속 전체가 윙 하면서 멍해지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진짜인가요? 사실인가요?’ 하면서 물어봐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입술은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접착제라도 붙인 양 꽉 엉겨 붙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 정신과 내 육체가 분리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약하게 느꼈다.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있음을 더욱 명확히 느끼게 된 것은 수술과 항암치료의 여러 과정에서 부작용, 후유증을 본격적으로 겪으면서부터였다. 병원에서는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개인마다 어떻게 나타날지 예단하여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이는 거의 부작용 없이 넘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부작용을 다 겪는 이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나는 어떠할지 그저 막연한, 그러나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다. 대부분의 항암치료 환자들이 그러하듯, 나의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급격히 떨어져 갔다. 나는 떨어지는 벚꽃보다도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이 정신적인 명료함을 계속 지지해주고, 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이 우울한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나의 환경에 맞는 최적화된 내 인생의 새로운 활력소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영어학과 3학년에 편입하며 변화된 일상
이렇게 나는 한양사이버대 영어학과 3학년에 편입하면서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왔던 영어를 다시 깊이 있게 배울 기회를 맞게 되었다. 내가 새로운 평생학습의 길로 들어선 것은 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한 나의 무기력감과 우울한 좌절감을 극복하고 싶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배움’이 주는 즐거움이 더불어 나의 피폐해진 마음을 정서적으로 치유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편입학 지원서를 쓸 때만 하더라도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았기에 과연 학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 정도로 여러모로 쇠약해져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사이버대학교이기에 오프라인 학교처럼 큰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 편히 먹자고 다짐하면서 원서를 접수하고 입학시험을 치렀다. 다행히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첫 학기에 수강 신청하면서 학위과정의 여러 트랙 중에서 TESOL 트랙을 선택하여 학습 진로를 설정하기로 하였다.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영어 외의 모국어 사용자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한 트랙이었다. 한양사이버대는 이처럼 학습 진로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도록 몇 가지 경우의 트랙들을 마련하는 등 여러 가지 장점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만족할 만큼의 학습효과를 본 것은 영어학과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원어민 교수님과의 매주 토요일 오프라인 영어 회화 수업이었다.
50대에 시작한 원어민 교수와의 오프라인 수업
레지날드 리 교수님의 오프라인 수업은 모두 영어로만 진행되었다. 학기 토요일마다 2시간씩, 총 10번의 오프라인 영어 회화 수업이었다. 기초부터 시작하여 아주 쉬운 단어들을 중심으로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늘어나고 더불어 실력도 크게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반복적으로 말하기 훈련도 하고, 간간이 영어 노래 배우기로 듣기와 말하기를 지도하는 등 교수님은 다양한 구성으로 지루할 새 없이 2시간 수업을 꽉 채워서 열정적으로 강의하셨다.
교수님은 일상영어에 대해 명확하고 쉽게 설명하시고, 또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선명하게 발음하시는데, 이것을 계속 따라 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듣기와 말하기 실력이 크게 발전되어 있었다.
사실 50대라는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독해는 어느 정도 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취약한 것이 듣기와 말하기일 것이다. 그런데 반갑게도 이 오프라인 영어 회화 수업을 통해 두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사실 첫 학기에는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거의 1년여에 걸친 모든 치료를 끝내고 이런 좋은 강의들을 통해 새 세계로 다가서고 있다는 굉장한 사실에, 도리어 슬픔에 놓인 적도 있었다. 뭐랄까, 교수님들의 열강 덕분에 영어 실력이 느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영어학과 학위과정을 잘 마칠 수 있을까, 과연 나의 나머지 인생에서 영어를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양가감정에 순간순간 휩싸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배우고 나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위안하면서, “잘 될 거야” “힘내!”라고 소리쳐 다독이면서 오히려 초심에서 원했던 부분에만 만족도를 크게 느껴보자고 다짐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음의 부담은 점차 줄어들었고, 학습 과정에서 느끼는 만족도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매 학기 학업 성적표는 나의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해주는 성과였다.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없음을 스스로 느끼게 되면서 자신감이 거대한 풍선처럼 계속 부풀어 하늘로 점점 올라가는 듯했다.
나는 영어학과에 편입학한 첫 학기에 18학점을 신청하여 4.33의 성적을 취득하였고, 두 번째 학기에는 21학점을 신청하여 4.5 만점으로 1등이라는 성적 장학 A 등급을 받았다. 이러한 학습성과들로 인해 학문적 자신감이 과잉 충만한 때문인지, 2019년에는 일본어학과로 복수학위 과정까지 신청하면서 현재 기세등등하게 두 가지 학위과정을 당차게 수행하고 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바로 공부
나의 존재 증명을 위해 도전했던 이 평생학습은 갑자기 닥쳐온 인생의 우울한 시련을 어떻게 정서적으로 극복하는지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명쾌한 해답이었다. 요즘은 세계화, 다문화 시대인지라 외화는 물론 미드, 일드 등 해외 TV 드라마도 실시간 방영된다. 나는 영화 속의 영어를 자막 없이 보고 듣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일본어 TV 드라마를 이전보다 훨씬 더 친근한 마음으로 감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가끔 놀라게 된다.
‘배우는 즐거움’이 더욱 확실하게 나를 치유하고 내 시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은 이 평생학습이 치료법의 하나로 명명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긍정적인 기능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받아 보는 성적표는 내가 지금 무사히 잘 살고 있고, 나의 정신과 육체적인 회복속도가 점점 강해지고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명서였다. 이것은 결코 병원에서는 받을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무형의 치료성적표나 다름없다.
은상
노정남씨
한양사이버대 영어과 졸업, 한양사이버대학원 디자인 기획 전공
내 생명 끝날까지, 평생 공부하는 삶
남부 아프리카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 근교 5만여 평의 바람 많은 언덕에 서 있다. 해발 1300m의 넓은 고원에 있는 국가에 걸맞게 유달리 하늘이 가깝게 느껴진다. 머리 위로 손을 펼치면 흰 구름이 금방이라도 달콤한 솜사탕처럼 두 손 주위에 가득 넘칠 것 같다.
나는 2017년 이후 잠비아에서 청소년들을 위해 재능을 기부하는 자원봉사자로 지내고 있다. 젊을 때 건축공학을 전공했고 한때는 이 분야에서 일했었다. 지금은 청소년들을 위해 건강하고 특별한 마인드를 함양하는 일을 위한 자원봉사자의 길을 걷고 있다. 아프리카에 산 지는 만 4년이 지났다.
서부 아프리카 베냉에서 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바로 2년 전, 나는 이곳 잠비아로 옮겨왔다. 베냉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언어를 익혀가면서 활동하는 데에는 그 역시 어려움이 많았다. 베냉에 비해 잠비아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잠비아에 오기 전 나는 다시 언어로서 영어에 대한 부담과 걱정이 앞섰다. 프랑스어보다는 영어가 익숙하고, 영어를 좋아하긴 했지만 영어로 전문적인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었다.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해나가지?’
여러 사이버대를 알아보던 중에, 사회적인 명성과 신뢰도 부분이 가장 큰 한양사이버대학교를 편안한 마음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마침 영어학과가 개설되어 호감을 느끼고 지원 및 입학을 하게 되었고, 나의 영어 공부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주경야독! 이 사자성어가 내 삶을 직접 묘사하는 수식어가 될 줄은 몰랐다. 낮에 나는 주로 이곳 정부로부터 무상임대가 된 계획부지에 어떻게 청소년 복합센터를 건축할지를 설계도와 함께 고민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노트북 컴퓨터 앞에 앉아 늦은 시간까지 있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2년간 어려움도 참 많았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곳의 인터넷 사정이었다. 인터넷 서비스를 해주는 외국 업체가 여러 곳 있긴 하지만 내가 머무는 지역은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어떤 때는 고화질과 일반화질의 동영상 강의는커녕 음성으로만 강의를 들어야 하는 날도 허다했다.
그러나 늦은 밤 강의 시간에 배웠던 새로운 영어표현을 그다음 날 사용하고 싶은 학습욕구에 이끌려 2년간의 세월이 참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의 연속이기도 했었다. ‘내일은 이 표현을 한번 사용해봐야겠다.’
내가 서 있는 공사 현장에서 만나는 높고 낮은 많은 사람, 그들은 바로 내가 배운 영어를 연습하고 복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고마운 연습 대상이었다. 그렇게 보내는 2년은 영어 실력 향상이라는 성과 말고도 자신감을 키워주는 시간이었다.
4.13의 평점, 대학원에 진학하다
편입 이후 2년간 거의 매일 밤을 영어와 연애하듯 지냈기 때문에, 학점에 대한 욕심도 저절로 생겼다. 영어를 숙달해가는 과정에서 마음을 기울여 공부한 만큼 학점도 잘 받고 싶었다. 하지만 때로는 인터넷 사정으로 시험을 제대로 못 보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접속 불가능으로 아예 시험 자체를 못 보게 되었는데, 시험 시간 내내 학교에 전화하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런 경험들로 항상 유쾌할 수는 없었다. 학위보다 학습 자체에 대한 취지와 동기로, 젊을 때 건축을 전공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공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든 학기를 마친 후 최종 평점은 4.13이었다. 평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중간에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 나 자신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영어학과를 졸업한 후 나는 공학사에 이어 문학사가 되었다. 값진 학사 학위를 두 개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19년 상반기에 나는 한양사이버대학원 디자인 기획 전공에 입학했다.
경제적인 면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이 또한 학위 자체보다도 학문으로서 디자인 자체에 대한 관심과 2년간 다시 새로운 분야를 마스터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신감은 영어학과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부터 얻게 된 학위 이상의 가치관이다.
은상
허지미씨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졸업
변화, 그리고 더 큰 배움을 위한 知的 도전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46살이 된 허지미라고 합니다. 2015년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에 입학하여 중간에 한 번 휴학하고 5년이라는 시간 끝에 지난 8월에 졸업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엄마로서 한 집안의 가장이자 회사인으로서 학업을 병행해온 저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낍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시작한 저의 배움의 계기는 사실 고통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저는 고졸로 20년 넘는 사회생활 동안 월급의 차등과 보직의 어려움에도 그냥저냥 지내면서 가정을 꾸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던 중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사기를 당하게 되고 이혼을 겪게 되면서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어요. 문득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뭐라고 할까? 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가르치는 걸까?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심리학을 배워보기로 결심하게 되었죠. 괴로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거든요. 이렇게 시작한 공부는 저의 패기와는 다르게 한마디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20년여 만에 시작한 공부라 녹록지 않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온라인 수업 방식의 생소함에 당황했고 당최 들어본 적 없는 심리학 용어들에 제 머리와 귀는 따로 노는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회사 일은 바쁘고… 그래서 뭐 1학년 1학기 때 성적은 5과목 중 2과목이 F였고, 3과목이 C였습니다.
2016년 재도전! 한 번의 실수는 좋은 경험이 되어 차츰 공부하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출퇴근 시간이 길었던 저는 스마트폰으로 강의를 수강하기 시작했고 학교행사에 참석하여 정보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네? 같은 강의를 3~4번씩 듣는다고요? 교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3번을 정독하신다고요? 아 그렇게 하면 A+를 받는다고요?”
와우! 그동안 제가 안이하게 공부를 했다는 걸 깨달았죠. 점수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2016년 1학기 성적에 C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A도 없었고요. 2학기 성적엔 A도, A+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휴학한 학기 보충을 위해 계절학기도 수강하게 되었는데 짧은 학기 동안 많은 양을 배우기에는 무리라는 것을 느끼며 차츰 공부의 요령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들의 수업 운영방식도 시험 출제 방식도 다들 다르네….’ ‘그럼 이번에는 요렇게 7과목을 한번 들어 봐야겠다.’ ‘와우, A+가 4개나?’
‘알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에 의문을 가졌던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고통에 대한 답을 얻었을까요? 글쎄요. 그러나 핵심은 고통의 근원을 알고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죠. 먼저 답을 알려드리자면 ‘알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입니다.
아마 저의 변화와 성장에 점수를 준다면 A+가 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말해봅니다. 왜냐하면, 2015년 1학기 F 2개, C 3개에서 2018년 1학기 5과목 모두 A+ 받았거든요. 물론 성적과 성장이 같다고 할 수는 없죠. 다만 대응하는 방식과 문제 해결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점에서 자기 효능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가난을 탓하고, 나이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내가 공부를 한다고? 할 수나 있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지녔던 한 사람이 보다 적극적인 배움을 향해 전진하게 되었죠. 학과에서 진행하는 학습 경진전략 대회에 참가하여 PPT 자료를 만들고 배워보지 못한 이론을 독학도 해보고 공개적으로 발표도 하는… 그리고 대상을 받게 되었죠.
그리고 꿈을 꿉니다. ‘아, 내가 좋은 사람은 아닐 수 있고, 좋은 상담자도 아닐 수도 있지만 성장하는 사람으로 노력하는 상담자가 되어보자. 그리고 꼭 도움을 주고 있는 상담자가 되어 있자.’ 이렇게요….
상담자의 길이 또 녹록하지 않습니다. 상담 치료적 접근은 많은 연구와 여러 시도를 통해 기존의 이론과는 다른 새로운 영역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아마 평생 연구하며 새로운 접근법들을 공부해야 하겠지요. 특히 근래에는 자기 자비와 마음 챙김의 높은 치료 성과에 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주목받고 있는 이 두 개념이 불교적 가르침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저는 불교상담전문대학원을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동상
고연실씨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재학
나는 성장하고 변화 중이다
우리 부부는 강사입니다.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4년 전 대출을 받아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언니가 절반을 투자하였지만, 운영은 온전히 저의 몫이었습니다. 주방에 직원 1명을 두고, 저는 홀에서 서빙을 하며 휴일 없이 가게에서 12시간을 일했습니다.
임대료가 워낙 비싸서 가게를 쉬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학원에 출근하는 신랑이 가끔 오전에 일해주면 밀린 집안일을 하고 난 후 잠시 쉬었다가 가게로 가는 것이 저의 휴식이었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쳐가다가 2년 반쯤 되었을 때 저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의욕이 없고, 우울했고, 가게에서 우는 날이 많이 생겼습니다. 결국, 언니가 가게의 절반을 운영하기로 하면서 일주일에 4일만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3일의 휴일은 저를 숨 쉴 수 있게 했습니다. 너무도 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했습니다. 저는 상담심리학과를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2학년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이버대 수업방식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컴퓨터를 다루는 데 미숙한 저에게는 강의를 듣기 위해 준비하는 모든 것들이 도전이었습니다. 두 번째 학기는 좀 더 수월했습니다. 강의시스템에 익숙해졌고 그제야 심리학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일의 휴일, 그리고 사이버대 입학
수업에서 배웠던 이론들로 저와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수강과목 중 유서를 작성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나는 어떠한 생각을 할 것인가?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라는 교수님의 의도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살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죽음은 공포였고, 나와는 먼 이야기였으며, 오지 않을 것처럼 외면하고 살아왔습니다.
저는 신랑과 아들 그리고 친정엄마에게 글을 쓰며 제가 살아온 것에 대해 되돌아보았습니다. 신랑과의 15년 결혼생활은 이제 새로울 것 없고, 설렘도 없는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속에 있는 배경이었습니다. 유서를 작성하며 신랑이 저에게 얼마나 큰 의미와 위로가 되는지 깨달았습니다.
사춘기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처음 품에 안았을 때의 그 조심스럽고 벅찬 감정,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어주던 그 미소, 엄마라고 처음 나를 불렀을 때의 그 순간 등이 떠올랐습니다. 저의 유서가 가족에게 읽히게 될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것을 쓰면서 ‘나의 삶은 어느 방향을 지향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 번째 학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5월이 되면 조금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가게 매출은 형편없습니다. 지난 5월 12일 상가 재계약을 포기했습니다. 새로운 세입자가 없어서 몇천만원의 권리금도 포기하고 말았죠. 하지만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다행인 것은 나를 위로하는 방법과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중입니다.
동상
김준영씨
한양사이버대 인사조직·전략벤처학과 재학
자신을 ‘너무’ 사랑할 준비가 되셨나요?
“너 같은 아들을 꼭 낳아봐”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인제 와서 무서울 정도로 공부는 상위권이었지만 파란만장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보니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과 어울려 일을 하려면 학력이 필요하다는 말에 내심 오기부터 생겼습니다. 하지만 오기를 부려보아도 얻는 것은 없었기에 결국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성적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나름 자부심을 느꼈지만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말이 항상 남들에게 제가 무언가 보여주기도 전에 저를 평가하는 지표로 사용되고는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감이 자괴감으로 변해가고 저는 퇴장하기 직전의 악당처럼 피해의식, 악다구니만 남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의 가난한 삶이 싫었고 다시 무시당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이 오래 일하며 기술을 배웠습니다.
어느 정도 기술의 숙련도가 늘어나니 제가 책임지는 일이 생기고 외부 일보다는 내부 일을 배울 기회도 점차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2가지 문제가 생기고는 했습니다. 단순히 많이, 열심히 한다고 해결되는 일들이 아닌 상황이 생기고 나이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높은 학력을 기반으로 관리직이라는 직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자의 반 타의 반 상사로 모셔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그때 당시, 정부 정책상 ‘선 취업 후 진학’에 대한 내용이 뉴스에서 자주 회자될 때쯤 할아버지의 유언을 이행해보자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동안의 경력을 모두 내려놓고 다시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목표는 손가락 안에 드는 우리나라 기업 중 고졸을 뽑아주는 곳으로 도전하자였습니다.
운이 참 좋게도 짧은 준비 기간임에도 덜컥 대기업에 붙어버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성공 원동력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저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서점을 운영하던 이모 가게에 자주 맡기고는 하셨는데 온종일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모든 책을 반복해서 섭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응어리와 성장
새 회사에서 다행히 열정과 능력을 인정받아 점차 자리를 잡아갔지만 역시나 같은 문제에 부딪히기도 하고 회사에 목숨을 바치듯이 다니다 보니 조금씩 응어리지는 스트레스는 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떠오른 게 대학교였는데 다시 수능을 준비해서 대학교에 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이버대를 선택했고 ‘1등’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한양사이버대에 진학했습니다.
2019년, 현재 저는 학과대표 자리를 내려놓으며 되돌아보니 다양한 직업군, 나이대의 사람들을 이끌며 2배, 4배 성장해왔다는 걸 새삼 체감했습니다. 블루칼라를 시작으로 화이트를 거쳐 골든칼라로 입문한 저는 어느새 회사가 원하는 조직과 잘 어울리며 새로움을 선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변화의 시작점에는 한양사이버대가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더욱 올바른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지속해서 좋은 밑거름이 되어줄 것으로 믿습니다.
동상
김진선씨
한양사이버대 법학과 재학
법의 四季, “부진정부작위범이 뭐야, 위법성 조각 사유는 뭐고…”
배우 외에 다른 일을 몰랐던 나는 제주도의 한 호텔 매장과 관련해 투자 사기에 휘말렸다.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다. 내가 법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 내가 죄를 짓지 않아도 불안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공포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난 법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고 한양사이버대에 입학했다.
그 무렵, 조그만 옷가게를 열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월세 150만원짜리 독서실을 쓰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더 오래 공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초반엔 강의에 너무 빠져 손님이 왔다 갔는지 모를 때도 많았다. 이제는 단골손님들이 공부하고 있는 나를 직접 부른다. 하루하루 매일 아침 가게를 열고 컴퓨터를 켜서 강의를 듣기 전에 백건우씨의 피아노 연주곡을 틀면 이전과는 달라진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난 법을 배우며 그렇게 마음을 치유했고 이곳에 오는 단골손님인 어머니들을 통해 세상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법 과목 중 특히 형법을 좋아한다. 처음엔 용어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괜히 애꿎은 교수님 탓을 했다. “부진정부작위범이 뭐야, 위법성 조각 사유는 뭐고…. 법익의 침해라… 구성요건!!” 꺅 소리를 매일 질렀다.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막막했지만 조금씩 익숙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그 용어들이 자연스러워졌다.
한양사이버대는 나에게 지나간 시간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간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내게 또 다른 꿈을 향해 갈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만약 한양사이버대가 아니었다면 내가 다시 공부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시도 때도 없이 멘토 선배를 괴롭히고
학기 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더듬거리던 내게 멘토·멘티 제도는 아주 중요한 장치였다. “선배님, 민소 왜 이렇게 어려워요?” “선배님, 기업법 시험 문제가 수업이랑 완전 다르게 나왔어요” 하소연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멘토 선배를 괴롭히고 있다. 아동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나는 법학뿐 아니라 아동학과 놀이지도 등 아동학 관련 과목도 수강했고 이렇게 병행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법과 아동’이란 주제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면 이해될 때까지 계속 들을 수 있고, 때와 장소를 내 마음대로 정해서 들을 수도 있다. 매일 강의를 듣고 또 듣고, 틈틈이 일하고 시험 때만 되면 코피를 쏟고 퇴근해서 집에 가면 뻗는, 소처럼 사는 생활에 가끔 지칠 때는 ‘왜 시작했을까, 이 바보 바보’ 하다가도 ‘잘할 수 있어’라며 토닥거리기도 한다.
어김없이 컴퓨터를 켜서 강의를 듣고 교안을 찾아보고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 되면 다른 강의를 찾아보고 모르는 수많은 법학 용어들을 틈틈이 검색하고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법을 생각하고 찾아보는 일상을 살게 되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지금까지 성적은 평점 4.3을 유지하고 있고, 국가장학금도 받아서 어려운 환경도 잘 헤쳐나가고 있다.
동상
윤태훈씨
한양사이버대학원 외식 프랜차이즈 MBA 재학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 평생학습 도전하기
“맥도날드와 같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식 프랜차이즈가 나오는 데 이바지한다.”
부산 출신이었던 내가 경희대 조리서비스경영학과에 입학했던 이유였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던 2003년. 아웃백 스테이크, 베니건스, TGI 프라이데이 등 다양한 패밀리 레스토랑이 계속 매장을 늘려가고 붐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입학 후 선배들이나 다른 동기들처럼 유명한 레스토랑에 보조로 들어가서 실무 조리를 배우거나 해외 조리학교로 가서 조리 실력을 쌓는, 셰프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외식 프랜차이즈가 운영되는 원리, 시스템을 알고 싶었다.
대학 입학 후 CJ 푸드빌에서 운영하는 패밀리 레스토랑 빕스에 파트타이머로 지원하였다. 빕스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대다수는 직원이 아닌 4~6시간만 근무를 하는 파트타이머인데도 메뉴의 품질이 높았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정형화된 식음료 메뉴, 규격화된 식자재, 그리고 메뉴를 만들고 운영하는 매뉴얼이 있었다. 전문 조리사가 아니어도, 메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프랜차이즈 시스템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2007년,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쳤다. 전역하기 전부터, 미국에 가야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워싱턴DC 바로 근처의 리츠칼튼 펜타곤 시티에서 조리사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다. 호텔 총주방장(executive chef)과의 면접, 그리고 비자 인터뷰를 통과하여 조리사로 근무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하고 신선한 식자재를 보고 놀랐고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식자재 제조, 가공, 유통 기술에도 놀랐다.
외식 비즈니스저널 창간의 꿈으로
남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고 졸업 후 2010년 12월, CJ제일제당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소스 사업을 주관하던 기업외식 사업부로 발령이 났다. 기업외식 사업부는 맥도날드, 교촌치킨, 죠스떡볶이, 이바돔 감자탕 등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본사와 거래를 하며 원료나 상품을 기획, 개발하여 공급하는 업무를 주로 하는 곳이었다. 소스 이외에도 CJ제일제당이 제조하고 유통하던 다양한 제품을 고객사에 공급하고 있었다.
2018년 6월에 퇴사하기까지 7년 6개월을 근무하는 동안 담당했던 주 업무는 영업과 기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직의 성과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이미 다 경험해봤다. 실무와 경험을 넘는,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외식 프랜차이즈에 관해 공부해야겠다고 느꼈다.
한양사이버대학원의 외식 프랜차이즈 MBA 과정에 지원하였다. 이 MBA 과정에 지원한 이유는 “맥도날드와 같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식 프랜차이즈가 나오는 데 기여한다”라는 20대 시절의 비전이 영향을 미쳤다. 대학원 입학 후 독서 습관(학습)을 들이고 이를 통해 1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그간의 경험을 정리하여 책으로 썼다. 경험을 책으로 쓰겠다던 20대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책 쓰기 목표 달성과 기획/디자인 공부는 외식 비즈니스저널 창간이라는 조금 더 큰 꿈을 꾸게 만들었다.
동상
이민혜씨
한양사이버대 영어학과 졸업
아들과 같은 학번이 된 엄마의 대학 생활기
2015년 12월, 아들이 대학원서 접수를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아들이 아마도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지원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즈음, 나는 아들 몰래 대학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의 수입으로 감당이 안 되는, 갑자기 나의 가계경제에 큰 위협으로 떠오른 등록금, 기숙사비, 생활비라는 낱말이 그즈음 무거운 하늘을 인 것 같은 기분을 나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아들에게는 서울에 있는 대학만 지원하지 말아 달라고 해놓은 상태였다.
아들은 국립대를 가기로 했고 서울이 아닌 부산대학교를 지원했고 결국 합격의 기쁨을 안았다. 고맙고 눈물이 났다. 아는 지인을 통해 국가장학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학 등록금 문제 또한 잘 해결되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들의 합격을 기뻐하던 중, 등록금 지급이 문제가 없는지 보려고 한국장학재단 홈피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눈에 띄는 광고문구가 지나갔다. ‘국가장학금 신청 기간: 00월 00일~00월 00일까지 2차 접수’라는 배너였다.
그 순간 내 마음이 호수의 물결처럼 흔들렸다. 반짝거리는 물결에 일렁이는 햇살처럼 내 마음에 무언가 일렁거렸다. ‘나도 대학을 졸업할 수 있을까?’ 갑자기 마음이 바쁘게 움직였다.
몇몇 대학을 살펴보던 중 한양사이버대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홈피가 열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고 입학 사정을 살펴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일사천리로 원서를 쓰고 국가장학금 신청까지 마쳤다. 학과는 영어학과. 학과 선택에 이틀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평점 4.41로 졸업… 성적우수상은 덤
나는 대학을 2년 다니고 중퇴하고 2년 직장 다니다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이 내 이름으로 선물해준 많은 빚을 대신 떠안고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단칸방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녔다.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은 나에게 큰 치명타였고 내가 일할 만한 곳은 졸업장을 달라 했다. 그런 내가 대학을 들어가고 영어를 전공하게 된 것 아닌가. 이게 뭐지? 아들과 동시에 대학에 가게 되는 선물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에 매일 한두 강의를 기본으로 들었다. 서너 시간이 걸렸다. 아침에 눈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 집중을 다해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직장 스케줄 업무를 다 챙기고 학교 스케줄, 시간표, 시험 일정까지 챙겼다. 항상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점수 포인트가 높은 배점 영역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난도 높은 과목들은 더 많이 복습하는 시간표를 짰다. 보통 서너 번 복습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올 장학금으로 다녔고, 재학 중 성적우수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4학년 1학기에 조기 졸업을 하였으며, 당연 TESOL과정도 수료하였다. 나는 4년 평점 4.41로 성적우수상을 받고 작년 8월 ‘빛나는 졸업’을 하였다.
동상
이예환씨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재학
평범한 주부, 벼랑 끝에서 날개를 펼치다!
저는 월급쟁이 배우자를 둔 평범한 주부이자,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따로 크게 모으고 있는 돈이 없어도 퇴직금과 국민연금이면 노후를 위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남편 바라기 주부였습니다.
2015년 8월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남편의 실직! 배 속의 둘째를 유산하고, 친정에서 산후조리하고 돌아온 저에게는 심장이 멎고,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았어요. 누군가가 톡 건드리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때 생각했던 것이 ‘공부하자!’였어요. 그래서 많은 검색 후 편입학한 곳이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한양사이버대로 선택한 이유는 첫째, 한양대 캠퍼스 안에 사이버 학습관이 있고, 둘째 다양한 커리큘럼의 오프라인 강의들과, 셋째 심리상담센터가 있어서 1년 동안 인턴 수련을 받을 수 있고, 넷째 훌륭한 교수님들과 함께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으며, 다섯째 다양한 학사 일정과 엠티, 축제 등 각종 행사가 학생회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서 제2의 대학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었어요.
‘두 번째 스무 살’이란 표현답게 다시 대학생이 되어 즐기게 된 학교생활은 저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4세였던 딸아이를 데리고 오프라인 특강참석 및 각종 학교행사에 참석하고 상담공부를 하면서 실직 후 제일 마음 아파했을 남편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어요. 육아하면서 아이의 언행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고 믿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하였어요.
처음에는 온라인 강의와 시험이 너무 낯설고 어색했어요.
‘잘하고 있는 건가?’ ‘상담공부는 끝이 없다는데…’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죠. 그래서 더욱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학생회 임원 활동도 재밌게 했었고, 특히 14학번 4학년 대표를 맡았을 때는 한 학년의 대표로서 보람도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또한 공부하게끔 이끌어주시는 교수님들의 가르침에 대한 사랑. 교수님들의 사랑의 울타리는 지치고 힘들어 픽 쓰러지는 저를 오뚝이처럼 만들어주셨어요. 특히 ‘논문을 쓰라’고 말씀해주시는 저희 과 교수님들. 정말 감사했어요.
‘상담공부는 끝이 없다는데…’
한참 실험연구를 진행하느라 바빴던 작년 4월. 또 한 번의 남편의 실직. 점점 안정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위기는 정말 원망스러웠어요.
이 모든 것이 상담공부를 하고 있지 않았으면 마음 다스리기가 어려웠을 거 같아요. 그래서 더 해내고 싶었고, 이루고 싶었고, 해야 해서 더욱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논문은 작년 6월 무사히 발표도 끝낼 수 있었고, 운 좋게 지도교수님과 함께 그해 9월 29일 논문콘서트도 할 수 있었어요. 현재는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이번 평생학습 공모전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평생 학습자를 발굴, 배움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좋은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됐다. 개개인이 주체적 학습자로서 평생에 걸친 학습 생활을 스스로 주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다양한 연령대와 우수한 평생학습 사례가 접수되어 심도 있는 심사가 진행되었다. 심사위원장은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과)가 맡았다.
《월간조선》은 지난 10월 4일 한양사이버대 김성제(金誠濟) 부총장을 만나 평생학습과 공모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성제 부총장은 “노안(老眼)이 왔다”라는 말부터 기자에게 건넸다.
― 저는 일찌감치 노안이 온걸요.
그는 “(다초점 렌즈를) 쓰라고 쓰라고 해도 안 쓰다가 이제는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김 부총장의 첫인상은 깐깐해 보였다. 또 자기만의 시각이 단단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김 부총장은 영문과 교수 출신으로 현대 영미 희곡, 문화담론 기호학 등이 주(主)전공이다.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부학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등을 두루 거친 영문학자이자 대학 행정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공부 열망이 엄청나게 강한 국민이 한국인이죠. 그러나 뭔가 큰 의미에서의 평생학습 혹은 재교육이나 노동시장에서의 교육 복귀(return to education) 개념이 아직은 개념화가 덜 된 것 같아요. 실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분들도 (본받을 만한) 모델링이 없어 안타까웠다고 할까요.
재단 이사장님께서 ‘배움에 목말라하고 다양한 교육과 직업 목표를 가진 학생들에게 모델링을 제시하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셔서 수기공모전을 하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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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7일 열린 제1회 ‘평생학습 수기 공모전’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선일보》와 한양사이버대 주최로 열린 이번 공모전에는 총 321편의 수기가 접수됐고 금상 2명, 은상 2명, 동상 10명이 선정됐다. |
“‘일하면서 배우는’, 혹은 배움의 기회를 놓친 분들이 리스킬링(reskilling·새로운 기술을 습득한다는 의미), 업스킬링(upskilling·숙련도를 향상한다는 의미)하며 자기 주도, 혹은 협력 학습을 통해 성공한 모범사례를 널리 알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수상한 분들의 영상도 만들려고 해요. 다큐처럼 말이죠. ‘아, 이렇게 시작하면 되겠네’ ‘그래, 나도 할 수 있겠어’라고 느낀다면 좋겠어요. 시작이 반인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말이죠.”
‘빅 퀘스천’과 기술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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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사이버대 김성제 부총장. |
“그렇죠. 학생들에게 ‘정말 실력이 늘까?’ 하는 의심의 눈길이 있었죠. ‘에이, 교수님. 학위만 따러 왔으니 세게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했거든요. 그게 오히려 전체 사이버대 위기를 가져왔다고 진단합니다. 이제는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자는 겁니다. 기술적으로도 ‘빅 퀘스천’을 거의 해결했어요.”
학습자의 공부 의욕을 자극하고 시험이나 과제의 부정을 차단하는 엄격한 학사관리가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온라인상에서 학생의 집중도를 어떻게 점검하느냐, 시험 혹은 평가의 공정성과 엄정성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는 두 가지 의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플랫폼 교육 혹은 온라인 교육이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한양사이버대가 제일 앞서 있어요.
(학생들이) 콘텐츠를 접할 때 집중도를 점검하는 솔루션이 등장했고, 시험 볼 때도 화상으로 직접 구술시험을 보거나 어떤 환경에서 어떤 자세로 시험을 치는지 다 알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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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사이버대는 교육과정을 정비해 공유성과 융합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을 진행 중이다. |
“학생 누구나 ‘인터넷 강의’를 듣잖아요. 세계 최대의 인강 강국인데 오히려 발목이 잡힌 측면이 있었어요. 모든 학생이 인강으로 대입 수능을 준비하지만, 인강이 정말 효과적인지 의문이거든요. 자기 주도적인 학습자에겐 긍정적이나, 학습관리가 안 되면 교육 효과가 현격히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온라인 교육의 한계를 해결하니까 학생도 만족하고 학부모도 만족합니다.”
― 게다가 ICT 기술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5G 통신이 구축되면 VR(Virtual Reality), 즉 가상현실 체험 콘텐츠가 보편화될 겁니다. 까다로운 공학교육도 온라인으로 구현돼 과거 매뉴얼만으로 도저히 따라 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웠던, 실험·실습으로 얻을 수 있던 정보를 시뮬레이션으로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이죠.”
― 아까 공학교육 말씀하셨는데, 전통적으로 한양대는 공대가 강하잖아요.
“현재 4개 학부 8개 전공으로 이뤄진 한양사이버대 공학 계열의 문을 두드리는 입학 적령기 학생이 많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짐작건대 실업계 고교를 나와 현장에서 일하는 학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다른 사이버대도 조심스럽게 공학 계열 정원을 늘려나가는 것 같아요.”
과거 사이버대 재학생의 연령대는 30~40대가 가장 많았다. 재취업과 전업, 자기 계발, 혹은 학위를 따기 위해 온라인 고등교육의 문을 두드리는 이가 다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20대 비율이 가장 높다.
한양사이버대의 경우 2015년 1학기 지원자 중에서 20대 비율이 44.7%로 가장 많았고 30대 26.5%, 40대 19.2% 순이었다. 2019년 1학기도 마찬가지였다. 20대가 44.2%로 압도적이었고 30대(20.4%)와 40대(19.5%)가 엇비슷했으며 50대가 10.1%로 뒤를 이었다.
4–ever와 ‘小確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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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사이버대 학생들은 다양한 현장체험과 오프라인 소통에 참여한다. 요리 실습 후 단체사진 모습. |
“‘일하면서 배우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대개 세계적인 교육 추세가 업스킬링, 리스킬링인데 자신의 직무(職務)를 고도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정보나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배움의 문을 두드리죠. ‘일하면서 배우는’ 이들은 이 두 가지 개념을 다 겸비하고 있어요.
덧붙여 대학원 수요가 온라인 교육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죠. 상대적으로 오프라인 대학의 대학원 진학은 줄어드는데 말이죠.”
― 한양사이버대의 재학생 중 ‘일하면서 배우는’ 학생의 비율은 어느 정도입니까.
“직업이 있는 재학생 비율이 70%대로 파악돼요. 대학원의 경우는 90% 이상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직업 현장에서 리스킬링, 업스킬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잖아요. ‘일하면서 배우는’ 학생에게 ‘언제든지 얼마든지 대학으로 돌아와라!’ ‘편입학이 무거우면 미국 대학처럼 나노 디그리(nano degree) 과정을 만들어줄게!’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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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사이버대는 2019년 국내 사이버대학 최초로 2년 연속 K-MOOC 개별강좌 공모 사업에 선정돼, 올 하반기부터 K–MOOC를 통해 한양사이버대의 우수한 콘텐츠를 제공받을 수 있다. |
예컨대 기계제어공학과의 나노 디그리는 ‘연소 시스템 제어’ 과정이다. 기계공학개론, 유체역학, 기계요소설계, 자동제어, 연소공학, 내연기관 등 6과목을 이수하면 학위 수여 및 별도의 인증서를 준다. 자동차IT융합공학과의 ‘자동차구조학’ 나노디그리 과정은 자동차공학개론, 자동차P/T공학, 자동차엔진공학, 자동차전장시스템공학, 자동차메커니즘 등 5과목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같은 나노 디그리 프로그램이 31개에 이른다.
“나노 디그리 과정을 이수할 경우 나노 디그리 전공을 주 전공과 함께 표기해 학위를 수여하거나 별도의 인정서를 수여할 계획입니다. 실제로 공학계열 과정에 전공 학부생이 아닌, 시간제(학점은행제) 학생이 많이 찾아와요. 그런 학생들이 업스킬링, 리스킬링 수요거든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현상이죠.”
이 대목에서 김성제 부총장은 ‘소확성’이라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강조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성공’의 줄임말이다.
“직장인이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이 바로 사이버대입니다. 그래서 저는 4-ever라는 말을 써요. 영원하다(forever)는 의미에다 누구든지(whoever) 언제(whenever) 어디서나(wherever) 무엇이든(whatever) 공부할 수 있는 제일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으니까요.
‘소확행’이란 말이 있듯이 ‘소확성’이란 말을 강조합니다. ‘학습 성공’이 ‘졸업 성공’으로 이어져 ‘직업 성공’을 이루자는 발산적 개념이죠. 미국 대학에 가보면 ‘학생 성공(student success)’이란 개념을 많이 강조해요. 우리도 학생들에게 ‘잘 배웠니? 공부 잘하니? 실력이 향상됐니?’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 과목의 성공이 한 학기의 성공, 졸업 성공, 취업 성공, 나중에는 공헌과 기부로까지 연결되면 좋겠어요.”
《월간조선》은 이 시대를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불 밝히는 평생학습 달인(達人)들의 이야기를 지상(紙上) 공개한다. 지면 사정상 부분 요약해 전달한다.⊙
금상
한양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상담심리학과 졸업
晩學, 내 인생 제2의 꿈을 실현… 현재 在家 복지센터 운영

그 시절 나의 꿈은 열심히 공부하여 선생님이 되어 배고픔을 벗어나는 길이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쫓겨나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 되어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시름에 차 있을 때 진학을 못 한다는 소식을 들으신 내가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이 찾아오셨다. 신부님은 내 이야기를 한참 들으시고는 서류를 주시며 부모님 동의만 받아오면 가톨릭계 고등학교, 대학교를 무상으로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주신다고 하셨다. 단, 신부가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아버지의 일언지하 반대에 펼쳐보지도 못한 채 접고 말았다. 그나마 신부님 배려로 서울의 기숙형 전자기술학원 1년 과정 학원비를 지원받고, 아버지가 여비로 주신 1000원을 들고 1971년 서울로 올라왔다.
기술학원에 다니면서도 상급학교 진학의 꿈을 버리지 못해 학원장을 설득하여 학원비를 면제받는 조건으로 학원 청소와 야간 경비를 하며 고등학교 졸업 학력 인정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다행히도 시험에 합격해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취득하였다.
이제 대학 진학이라는 꿈이 하나씩 실현되는 꿈에 부풀어 학원 책상 위에서 잠을 자며 매일 끼니를 라면으로 해결하면서도 동료들에게 부끄럽거나 부러울 것이 전혀 없었다. 열심히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하며 하루 4시간을 자며 공부하여 드디어 한양대 전자공학과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기 암 치료를 위해 3년여 마련한 학비를 수술비로 모두 내어 드렸다. 인천공단의 대우전자에 취업, 결혼하고 20여 년을 가족과 부모님 부양에 정신없이 살아오면서도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에 항시 미련이 남아 있었다.
20여 년 근무한 대우전자에서도 중졸이라는 학력이 진급에 상당히 영향을 미쳐 1991년 퇴사하고 전자제품 제조에 뛰어들었다. 5년여 만에 상당한 위치에 올랐으나 IMF 파도를 넘지 못하고 파산하고 말았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위기는 곧 기회임을 되새겼다. 늦었지만 공부를 통해 내실을 다지기로 마음먹었다.
꿈속에 그리던 한양대학교 교정을 동경하여 경영대학원 최고지도자 과정을 이수하였다. 또 한양대학교 평생교육원에도 등록하여 5년간 기초와 교양을 다듬었으나 배움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내 인생 제2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복지사의 길을 장고 끝에 선택하였다. 그에 따른 전문 소양과 기술을 익히고 자격을 취득하여 사회복지시설을 경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양사이버대학에 입학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번민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복지학부 사회복지시설 경영 전공을 선택하고 입학식 날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늦은 나이지만 열심히 공부하기로 다짐하며 대학생이 되었다.
학생 신분임을 잊지 않으려 쑥스러움도 감내하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학부 MT, 축제, 오프라인 공부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학내 분위기를 익히고 적응하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늦은 나이에 대학공부를 한다는 자부심에 아들 또래의 선배들에게도 깍듯이 존대하며 교내외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다. 그러나 평생 기술계 용어에만 익숙한 나는 낯선 사회복지 용어와 온라인 학습방법에 참 많이 힘들었다. 물론 젊은 동급생을 따라가려 최선을 다해 공부하였다.
멘토가 되어 봉사상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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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평생학습 수기 공모전’ 시상식에서 김성제 부총장이 이상용씨에게 금상을 수여하고 있다. |
무엇보다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3학년에 편입한 새터민 출신의 김○○ 학생에게 마음이 갔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PC, USB 같은 영어단어는 물론 간단한 컴퓨터의 기초지식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대로는 온라인 수강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우리 회사 사무실로 불러 종일 온라인 수강을 하며 그때그때 질의응답에 응하고 출퇴근을 같이했다. 그런 생활을 2년간 한 뒤 졸업을 하여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학교 추천으로 5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장애인 시설에 생활지도 사회복지사로 취업하여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며 3년 차 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다. 대견하고 나 또한 자랑스럽다. 멘토링 프로그램에 멘토로서 3회 참석하여 지금도 10여 명을 정기적으로 만나 교분을 나눈다. 그 덕에 졸업 시 총장님의 봉사상도 받는 영광도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닌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60을 전후해 은퇴하여 사장되는 은퇴자들의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지식공유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 기관이나 시설도 실버 인력의 참여가 가능한 모델이다. 그러나 문턱이 높다. 새로운 정보를 찾아 관심 있는 강의에 열중하던 중 외부 강사를 초청한 협동조합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래 내가 생각하던 바로 이거다!’였다.
그리고 드디어 3학년 2학기에 ‘드림 플라이 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100세 시대’에 50을 전후해 은퇴 등 일자리를 상실하고 소일하는 전문인력에 그간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경력을 활용할 수 있는 평생 일자리 개발을 목표로 협동조합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니어들의 사회참여 욕구와 경제적인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직종과 근로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협동조합 설립과 재가 복지센터
직원이 함께 조합을 소유하고 관리하며, 안정적인 평생 일자리를 늘려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재가 복지센터를 개소하였다. 현재 15명의 요양보호사와 2명의 사회복지사의 일자리를 창출하며 운영하고 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재미에 흠뻑 취해 욕심을 부려 평소에 하고 싶었던 상담심리학을 복수 전공해 2급 사회복지사 자격증과 2개의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 요양보호사 1급, 건강가정사, 중증장애인 활동 보조인 자격을 취득하고도 2017년 8월 20일 한 학기를 앞당겨 조기 졸업하였다.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좀 더 심화 학습하고 싶었으나 조금 뒤로 미루고 비영리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려 동분서주하고 있다.
금상
이영미씨
한양사이버대 영어학과·일본어학과 재학
‘배우는 즐거움’이라는 치료법

지금 나는 그 열망이 나의 존재론적인 가치의 회복을 돕는 데 대단히 긍정적이었다고, 그리고 나의 인생에서 가장 바람직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양사이버대에 편입학하기 전해에 암 판정을 받았다. 당시 의사의 진단을 듣는 순간은 어찌나 놀랐던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귓속, 머릿속 전체가 윙 하면서 멍해지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진짜인가요? 사실인가요?’ 하면서 물어봐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입술은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접착제라도 붙인 양 꽉 엉겨 붙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 정신과 내 육체가 분리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약하게 느꼈다.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있음을 더욱 명확히 느끼게 된 것은 수술과 항암치료의 여러 과정에서 부작용, 후유증을 본격적으로 겪으면서부터였다. 병원에서는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개인마다 어떻게 나타날지 예단하여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이는 거의 부작용 없이 넘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부작용을 다 겪는 이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나는 어떠할지 그저 막연한, 그러나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다. 대부분의 항암치료 환자들이 그러하듯, 나의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급격히 떨어져 갔다. 나는 떨어지는 벚꽃보다도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이 정신적인 명료함을 계속 지지해주고, 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이 우울한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나의 환경에 맞는 최적화된 내 인생의 새로운 활력소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영어학과 3학년에 편입하며 변화된 일상
이렇게 나는 한양사이버대 영어학과 3학년에 편입하면서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왔던 영어를 다시 깊이 있게 배울 기회를 맞게 되었다. 내가 새로운 평생학습의 길로 들어선 것은 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한 나의 무기력감과 우울한 좌절감을 극복하고 싶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배움’이 주는 즐거움이 더불어 나의 피폐해진 마음을 정서적으로 치유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편입학 지원서를 쓸 때만 하더라도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았기에 과연 학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 정도로 여러모로 쇠약해져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사이버대학교이기에 오프라인 학교처럼 큰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 편히 먹자고 다짐하면서 원서를 접수하고 입학시험을 치렀다. 다행히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첫 학기에 수강 신청하면서 학위과정의 여러 트랙 중에서 TESOL 트랙을 선택하여 학습 진로를 설정하기로 하였다.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영어 외의 모국어 사용자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한 트랙이었다. 한양사이버대는 이처럼 학습 진로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도록 몇 가지 경우의 트랙들을 마련하는 등 여러 가지 장점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만족할 만큼의 학습효과를 본 것은 영어학과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원어민 교수님과의 매주 토요일 오프라인 영어 회화 수업이었다.
50대에 시작한 원어민 교수와의 오프라인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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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평생학습 수기 공모전’ 시상식에서 김성제 부총장이 이영미씨에게 금상을 수여하고 있다. |
반복적으로 말하기 훈련도 하고, 간간이 영어 노래 배우기로 듣기와 말하기를 지도하는 등 교수님은 다양한 구성으로 지루할 새 없이 2시간 수업을 꽉 채워서 열정적으로 강의하셨다.
교수님은 일상영어에 대해 명확하고 쉽게 설명하시고, 또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선명하게 발음하시는데, 이것을 계속 따라 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듣기와 말하기 실력이 크게 발전되어 있었다.
사실 50대라는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독해는 어느 정도 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취약한 것이 듣기와 말하기일 것이다. 그런데 반갑게도 이 오프라인 영어 회화 수업을 통해 두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사실 첫 학기에는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거의 1년여에 걸친 모든 치료를 끝내고 이런 좋은 강의들을 통해 새 세계로 다가서고 있다는 굉장한 사실에, 도리어 슬픔에 놓인 적도 있었다. 뭐랄까, 교수님들의 열강 덕분에 영어 실력이 느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영어학과 학위과정을 잘 마칠 수 있을까, 과연 나의 나머지 인생에서 영어를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양가감정에 순간순간 휩싸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배우고 나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위안하면서, “잘 될 거야” “힘내!”라고 소리쳐 다독이면서 오히려 초심에서 원했던 부분에만 만족도를 크게 느껴보자고 다짐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음의 부담은 점차 줄어들었고, 학습 과정에서 느끼는 만족도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매 학기 학업 성적표는 나의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해주는 성과였다.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없음을 스스로 느끼게 되면서 자신감이 거대한 풍선처럼 계속 부풀어 하늘로 점점 올라가는 듯했다.
나는 영어학과에 편입학한 첫 학기에 18학점을 신청하여 4.33의 성적을 취득하였고, 두 번째 학기에는 21학점을 신청하여 4.5 만점으로 1등이라는 성적 장학 A 등급을 받았다. 이러한 학습성과들로 인해 학문적 자신감이 과잉 충만한 때문인지, 2019년에는 일본어학과로 복수학위 과정까지 신청하면서 현재 기세등등하게 두 가지 학위과정을 당차게 수행하고 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바로 공부
나의 존재 증명을 위해 도전했던 이 평생학습은 갑자기 닥쳐온 인생의 우울한 시련을 어떻게 정서적으로 극복하는지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명쾌한 해답이었다. 요즘은 세계화, 다문화 시대인지라 외화는 물론 미드, 일드 등 해외 TV 드라마도 실시간 방영된다. 나는 영화 속의 영어를 자막 없이 보고 듣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일본어 TV 드라마를 이전보다 훨씬 더 친근한 마음으로 감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가끔 놀라게 된다.
‘배우는 즐거움’이 더욱 확실하게 나를 치유하고 내 시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은 이 평생학습이 치료법의 하나로 명명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긍정적인 기능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받아 보는 성적표는 내가 지금 무사히 잘 살고 있고, 나의 정신과 육체적인 회복속도가 점점 강해지고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명서였다. 이것은 결코 병원에서는 받을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무형의 치료성적표나 다름없다.
은상
노정남씨
한양사이버대 영어과 졸업, 한양사이버대학원 디자인 기획 전공
내 생명 끝날까지, 평생 공부하는 삶

나는 2017년 이후 잠비아에서 청소년들을 위해 재능을 기부하는 자원봉사자로 지내고 있다. 젊을 때 건축공학을 전공했고 한때는 이 분야에서 일했었다. 지금은 청소년들을 위해 건강하고 특별한 마인드를 함양하는 일을 위한 자원봉사자의 길을 걷고 있다. 아프리카에 산 지는 만 4년이 지났다.
서부 아프리카 베냉에서 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바로 2년 전, 나는 이곳 잠비아로 옮겨왔다. 베냉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언어를 익혀가면서 활동하는 데에는 그 역시 어려움이 많았다. 베냉에 비해 잠비아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잠비아에 오기 전 나는 다시 언어로서 영어에 대한 부담과 걱정이 앞섰다. 프랑스어보다는 영어가 익숙하고, 영어를 좋아하긴 했지만 영어로 전문적인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었다.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해나가지?’
여러 사이버대를 알아보던 중에, 사회적인 명성과 신뢰도 부분이 가장 큰 한양사이버대학교를 편안한 마음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마침 영어학과가 개설되어 호감을 느끼고 지원 및 입학을 하게 되었고, 나의 영어 공부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주경야독! 이 사자성어가 내 삶을 직접 묘사하는 수식어가 될 줄은 몰랐다. 낮에 나는 주로 이곳 정부로부터 무상임대가 된 계획부지에 어떻게 청소년 복합센터를 건축할지를 설계도와 함께 고민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노트북 컴퓨터 앞에 앉아 늦은 시간까지 있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2년간 어려움도 참 많았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곳의 인터넷 사정이었다. 인터넷 서비스를 해주는 외국 업체가 여러 곳 있긴 하지만 내가 머무는 지역은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어떤 때는 고화질과 일반화질의 동영상 강의는커녕 음성으로만 강의를 들어야 하는 날도 허다했다.
그러나 늦은 밤 강의 시간에 배웠던 새로운 영어표현을 그다음 날 사용하고 싶은 학습욕구에 이끌려 2년간의 세월이 참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의 연속이기도 했었다. ‘내일은 이 표현을 한번 사용해봐야겠다.’
내가 서 있는 공사 현장에서 만나는 높고 낮은 많은 사람, 그들은 바로 내가 배운 영어를 연습하고 복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고마운 연습 대상이었다. 그렇게 보내는 2년은 영어 실력 향상이라는 성과 말고도 자신감을 키워주는 시간이었다.
4.13의 평점, 대학원에 진학하다
편입 이후 2년간 거의 매일 밤을 영어와 연애하듯 지냈기 때문에, 학점에 대한 욕심도 저절로 생겼다. 영어를 숙달해가는 과정에서 마음을 기울여 공부한 만큼 학점도 잘 받고 싶었다. 하지만 때로는 인터넷 사정으로 시험을 제대로 못 보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접속 불가능으로 아예 시험 자체를 못 보게 되었는데, 시험 시간 내내 학교에 전화하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런 경험들로 항상 유쾌할 수는 없었다. 학위보다 학습 자체에 대한 취지와 동기로, 젊을 때 건축을 전공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공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든 학기를 마친 후 최종 평점은 4.13이었다. 평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중간에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 나 자신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영어학과를 졸업한 후 나는 공학사에 이어 문학사가 되었다. 값진 학사 학위를 두 개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19년 상반기에 나는 한양사이버대학원 디자인 기획 전공에 입학했다.
경제적인 면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이 또한 학위 자체보다도 학문으로서 디자인 자체에 대한 관심과 2년간 다시 새로운 분야를 마스터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신감은 영어학과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부터 얻게 된 학위 이상의 가치관이다.
은상
허지미씨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졸업
변화, 그리고 더 큰 배움을 위한 知的 도전

고등학교 졸업 후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시작한 저의 배움의 계기는 사실 고통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저는 고졸로 20년 넘는 사회생활 동안 월급의 차등과 보직의 어려움에도 그냥저냥 지내면서 가정을 꾸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던 중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사기를 당하게 되고 이혼을 겪게 되면서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어요. 문득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뭐라고 할까? 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가르치는 걸까?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심리학을 배워보기로 결심하게 되었죠. 괴로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거든요. 이렇게 시작한 공부는 저의 패기와는 다르게 한마디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20년여 만에 시작한 공부라 녹록지 않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온라인 수업 방식의 생소함에 당황했고 당최 들어본 적 없는 심리학 용어들에 제 머리와 귀는 따로 노는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회사 일은 바쁘고… 그래서 뭐 1학년 1학기 때 성적은 5과목 중 2과목이 F였고, 3과목이 C였습니다.
2016년 재도전! 한 번의 실수는 좋은 경험이 되어 차츰 공부하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출퇴근 시간이 길었던 저는 스마트폰으로 강의를 수강하기 시작했고 학교행사에 참석하여 정보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네? 같은 강의를 3~4번씩 듣는다고요? 교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3번을 정독하신다고요? 아 그렇게 하면 A+를 받는다고요?”
와우! 그동안 제가 안이하게 공부를 했다는 걸 깨달았죠. 점수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2016년 1학기 성적에 C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A도 없었고요. 2학기 성적엔 A도, A+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휴학한 학기 보충을 위해 계절학기도 수강하게 되었는데 짧은 학기 동안 많은 양을 배우기에는 무리라는 것을 느끼며 차츰 공부의 요령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들의 수업 운영방식도 시험 출제 방식도 다들 다르네….’ ‘그럼 이번에는 요렇게 7과목을 한번 들어 봐야겠다.’ ‘와우, A+가 4개나?’
‘알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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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의 변화와 성장에 점수를 준다면 A+가 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말해봅니다.” |
아마 저의 변화와 성장에 점수를 준다면 A+가 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말해봅니다. 왜냐하면, 2015년 1학기 F 2개, C 3개에서 2018년 1학기 5과목 모두 A+ 받았거든요. 물론 성적과 성장이 같다고 할 수는 없죠. 다만 대응하는 방식과 문제 해결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점에서 자기 효능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가난을 탓하고, 나이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내가 공부를 한다고? 할 수나 있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지녔던 한 사람이 보다 적극적인 배움을 향해 전진하게 되었죠. 학과에서 진행하는 학습 경진전략 대회에 참가하여 PPT 자료를 만들고 배워보지 못한 이론을 독학도 해보고 공개적으로 발표도 하는… 그리고 대상을 받게 되었죠.
그리고 꿈을 꿉니다. ‘아, 내가 좋은 사람은 아닐 수 있고, 좋은 상담자도 아닐 수도 있지만 성장하는 사람으로 노력하는 상담자가 되어보자. 그리고 꼭 도움을 주고 있는 상담자가 되어 있자.’ 이렇게요….
상담자의 길이 또 녹록하지 않습니다. 상담 치료적 접근은 많은 연구와 여러 시도를 통해 기존의 이론과는 다른 새로운 영역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아마 평생 연구하며 새로운 접근법들을 공부해야 하겠지요. 특히 근래에는 자기 자비와 마음 챙김의 높은 치료 성과에 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주목받고 있는 이 두 개념이 불교적 가르침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저는 불교상담전문대학원을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동상
고연실씨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재학
나는 성장하고 변화 중이다

임대료가 워낙 비싸서 가게를 쉬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학원에 출근하는 신랑이 가끔 오전에 일해주면 밀린 집안일을 하고 난 후 잠시 쉬었다가 가게로 가는 것이 저의 휴식이었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쳐가다가 2년 반쯤 되었을 때 저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의욕이 없고, 우울했고, 가게에서 우는 날이 많이 생겼습니다. 결국, 언니가 가게의 절반을 운영하기로 하면서 일주일에 4일만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3일의 휴일은 저를 숨 쉴 수 있게 했습니다. 너무도 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했습니다. 저는 상담심리학과를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2학년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이버대 수업방식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컴퓨터를 다루는 데 미숙한 저에게는 강의를 듣기 위해 준비하는 모든 것들이 도전이었습니다. 두 번째 학기는 좀 더 수월했습니다. 강의시스템에 익숙해졌고 그제야 심리학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일의 휴일, 그리고 사이버대 입학
수업에서 배웠던 이론들로 저와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수강과목 중 유서를 작성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나는 어떠한 생각을 할 것인가?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라는 교수님의 의도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살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죽음은 공포였고, 나와는 먼 이야기였으며, 오지 않을 것처럼 외면하고 살아왔습니다.
저는 신랑과 아들 그리고 친정엄마에게 글을 쓰며 제가 살아온 것에 대해 되돌아보았습니다. 신랑과의 15년 결혼생활은 이제 새로울 것 없고, 설렘도 없는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속에 있는 배경이었습니다. 유서를 작성하며 신랑이 저에게 얼마나 큰 의미와 위로가 되는지 깨달았습니다.
사춘기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처음 품에 안았을 때의 그 조심스럽고 벅찬 감정,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어주던 그 미소, 엄마라고 처음 나를 불렀을 때의 그 순간 등이 떠올랐습니다. 저의 유서가 가족에게 읽히게 될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것을 쓰면서 ‘나의 삶은 어느 방향을 지향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 번째 학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5월이 되면 조금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가게 매출은 형편없습니다. 지난 5월 12일 상가 재계약을 포기했습니다. 새로운 세입자가 없어서 몇천만원의 권리금도 포기하고 말았죠. 하지만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다행인 것은 나를 위로하는 방법과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중입니다.
동상
김준영씨
한양사이버대 인사조직·전략벤처학과 재학
자신을 ‘너무’ 사랑할 준비가 되셨나요?

어느 정도 기술의 숙련도가 늘어나니 제가 책임지는 일이 생기고 외부 일보다는 내부 일을 배울 기회도 점차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2가지 문제가 생기고는 했습니다. 단순히 많이, 열심히 한다고 해결되는 일들이 아닌 상황이 생기고 나이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높은 학력을 기반으로 관리직이라는 직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자의 반 타의 반 상사로 모셔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그때 당시, 정부 정책상 ‘선 취업 후 진학’에 대한 내용이 뉴스에서 자주 회자될 때쯤 할아버지의 유언을 이행해보자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동안의 경력을 모두 내려놓고 다시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목표는 손가락 안에 드는 우리나라 기업 중 고졸을 뽑아주는 곳으로 도전하자였습니다.
운이 참 좋게도 짧은 준비 기간임에도 덜컥 대기업에 붙어버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성공 원동력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저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서점을 운영하던 이모 가게에 자주 맡기고는 하셨는데 온종일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모든 책을 반복해서 섭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응어리와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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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가난한 삶이 싫었고 다시 무시당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이 오래 일하며 기술을 배웠습니다.” |
그러다 떠오른 게 대학교였는데 다시 수능을 준비해서 대학교에 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이버대를 선택했고 ‘1등’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한양사이버대에 진학했습니다.
2019년, 현재 저는 학과대표 자리를 내려놓으며 되돌아보니 다양한 직업군, 나이대의 사람들을 이끌며 2배, 4배 성장해왔다는 걸 새삼 체감했습니다. 블루칼라를 시작으로 화이트를 거쳐 골든칼라로 입문한 저는 어느새 회사가 원하는 조직과 잘 어울리며 새로움을 선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변화의 시작점에는 한양사이버대가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더욱 올바른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지속해서 좋은 밑거름이 되어줄 것으로 믿습니다.
동상
김진선씨
한양사이버대 법학과 재학
법의 四季, “부진정부작위범이 뭐야, 위법성 조각 사유는 뭐고…”

그 무렵, 조그만 옷가게를 열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월세 150만원짜리 독서실을 쓰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더 오래 공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초반엔 강의에 너무 빠져 손님이 왔다 갔는지 모를 때도 많았다. 이제는 단골손님들이 공부하고 있는 나를 직접 부른다. 하루하루 매일 아침 가게를 열고 컴퓨터를 켜서 강의를 듣기 전에 백건우씨의 피아노 연주곡을 틀면 이전과는 달라진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난 법을 배우며 그렇게 마음을 치유했고 이곳에 오는 단골손님인 어머니들을 통해 세상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법 과목 중 특히 형법을 좋아한다. 처음엔 용어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괜히 애꿎은 교수님 탓을 했다. “부진정부작위범이 뭐야, 위법성 조각 사유는 뭐고…. 법익의 침해라… 구성요건!!” 꺅 소리를 매일 질렀다.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막막했지만 조금씩 익숙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그 용어들이 자연스러워졌다.
한양사이버대는 나에게 지나간 시간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간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내게 또 다른 꿈을 향해 갈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만약 한양사이버대가 아니었다면 내가 다시 공부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시도 때도 없이 멘토 선배를 괴롭히고
학기 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더듬거리던 내게 멘토·멘티 제도는 아주 중요한 장치였다. “선배님, 민소 왜 이렇게 어려워요?” “선배님, 기업법 시험 문제가 수업이랑 완전 다르게 나왔어요” 하소연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멘토 선배를 괴롭히고 있다. 아동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나는 법학뿐 아니라 아동학과 놀이지도 등 아동학 관련 과목도 수강했고 이렇게 병행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법과 아동’이란 주제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면 이해될 때까지 계속 들을 수 있고, 때와 장소를 내 마음대로 정해서 들을 수도 있다. 매일 강의를 듣고 또 듣고, 틈틈이 일하고 시험 때만 되면 코피를 쏟고 퇴근해서 집에 가면 뻗는, 소처럼 사는 생활에 가끔 지칠 때는 ‘왜 시작했을까, 이 바보 바보’ 하다가도 ‘잘할 수 있어’라며 토닥거리기도 한다.
어김없이 컴퓨터를 켜서 강의를 듣고 교안을 찾아보고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 되면 다른 강의를 찾아보고 모르는 수많은 법학 용어들을 틈틈이 검색하고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법을 생각하고 찾아보는 일상을 살게 되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지금까지 성적은 평점 4.3을 유지하고 있고, 국가장학금도 받아서 어려운 환경도 잘 헤쳐나가고 있다.
동상
윤태훈씨
한양사이버대학원 외식 프랜차이즈 MBA 재학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 평생학습 도전하기

부산 출신이었던 내가 경희대 조리서비스경영학과에 입학했던 이유였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던 2003년. 아웃백 스테이크, 베니건스, TGI 프라이데이 등 다양한 패밀리 레스토랑이 계속 매장을 늘려가고 붐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입학 후 선배들이나 다른 동기들처럼 유명한 레스토랑에 보조로 들어가서 실무 조리를 배우거나 해외 조리학교로 가서 조리 실력을 쌓는, 셰프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외식 프랜차이즈가 운영되는 원리, 시스템을 알고 싶었다.
대학 입학 후 CJ 푸드빌에서 운영하는 패밀리 레스토랑 빕스에 파트타이머로 지원하였다. 빕스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대다수는 직원이 아닌 4~6시간만 근무를 하는 파트타이머인데도 메뉴의 품질이 높았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정형화된 식음료 메뉴, 규격화된 식자재, 그리고 메뉴를 만들고 운영하는 매뉴얼이 있었다. 전문 조리사가 아니어도, 메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프랜차이즈 시스템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2007년,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쳤다. 전역하기 전부터, 미국에 가야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워싱턴DC 바로 근처의 리츠칼튼 펜타곤 시티에서 조리사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다. 호텔 총주방장(executive chef)과의 면접, 그리고 비자 인터뷰를 통과하여 조리사로 근무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하고 신선한 식자재를 보고 놀랐고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식자재 제조, 가공, 유통 기술에도 놀랐다.
외식 비즈니스저널 창간의 꿈으로
남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고 졸업 후 2010년 12월, CJ제일제당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소스 사업을 주관하던 기업외식 사업부로 발령이 났다. 기업외식 사업부는 맥도날드, 교촌치킨, 죠스떡볶이, 이바돔 감자탕 등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본사와 거래를 하며 원료나 상품을 기획, 개발하여 공급하는 업무를 주로 하는 곳이었다. 소스 이외에도 CJ제일제당이 제조하고 유통하던 다양한 제품을 고객사에 공급하고 있었다.
2018년 6월에 퇴사하기까지 7년 6개월을 근무하는 동안 담당했던 주 업무는 영업과 기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직의 성과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이미 다 경험해봤다. 실무와 경험을 넘는,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외식 프랜차이즈에 관해 공부해야겠다고 느꼈다.
한양사이버대학원의 외식 프랜차이즈 MBA 과정에 지원하였다. 이 MBA 과정에 지원한 이유는 “맥도날드와 같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식 프랜차이즈가 나오는 데 기여한다”라는 20대 시절의 비전이 영향을 미쳤다. 대학원 입학 후 독서 습관(학습)을 들이고 이를 통해 1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그간의 경험을 정리하여 책으로 썼다. 경험을 책으로 쓰겠다던 20대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책 쓰기 목표 달성과 기획/디자인 공부는 외식 비즈니스저널 창간이라는 조금 더 큰 꿈을 꾸게 만들었다.
동상
이민혜씨
한양사이버대 영어학과 졸업
아들과 같은 학번이 된 엄마의 대학 생활기

나의 수입으로 감당이 안 되는, 갑자기 나의 가계경제에 큰 위협으로 떠오른 등록금, 기숙사비, 생활비라는 낱말이 그즈음 무거운 하늘을 인 것 같은 기분을 나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아들에게는 서울에 있는 대학만 지원하지 말아 달라고 해놓은 상태였다.
아들은 국립대를 가기로 했고 서울이 아닌 부산대학교를 지원했고 결국 합격의 기쁨을 안았다. 고맙고 눈물이 났다. 아는 지인을 통해 국가장학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학 등록금 문제 또한 잘 해결되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들의 합격을 기뻐하던 중, 등록금 지급이 문제가 없는지 보려고 한국장학재단 홈피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눈에 띄는 광고문구가 지나갔다. ‘국가장학금 신청 기간: 00월 00일~00월 00일까지 2차 접수’라는 배너였다.
그 순간 내 마음이 호수의 물결처럼 흔들렸다. 반짝거리는 물결에 일렁이는 햇살처럼 내 마음에 무언가 일렁거렸다. ‘나도 대학을 졸업할 수 있을까?’ 갑자기 마음이 바쁘게 움직였다.
몇몇 대학을 살펴보던 중 한양사이버대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홈피가 열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고 입학 사정을 살펴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일사천리로 원서를 쓰고 국가장학금 신청까지 마쳤다. 학과는 영어학과. 학과 선택에 이틀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평점 4.41로 졸업… 성적우수상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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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 집중을 다해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은 나에게 큰 치명타였고 내가 일할 만한 곳은 졸업장을 달라 했다. 그런 내가 대학을 들어가고 영어를 전공하게 된 것 아닌가. 이게 뭐지? 아들과 동시에 대학에 가게 되는 선물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에 매일 한두 강의를 기본으로 들었다. 서너 시간이 걸렸다. 아침에 눈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 집중을 다해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직장 스케줄 업무를 다 챙기고 학교 스케줄, 시간표, 시험 일정까지 챙겼다. 항상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점수 포인트가 높은 배점 영역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난도 높은 과목들은 더 많이 복습하는 시간표를 짰다. 보통 서너 번 복습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올 장학금으로 다녔고, 재학 중 성적우수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4학년 1학기에 조기 졸업을 하였으며, 당연 TESOL과정도 수료하였다. 나는 4년 평점 4.41로 성적우수상을 받고 작년 8월 ‘빛나는 졸업’을 하였다.
동상
이예환씨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재학
평범한 주부, 벼랑 끝에서 날개를 펼치다!

2015년 8월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남편의 실직! 배 속의 둘째를 유산하고, 친정에서 산후조리하고 돌아온 저에게는 심장이 멎고,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았어요. 누군가가 톡 건드리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때 생각했던 것이 ‘공부하자!’였어요. 그래서 많은 검색 후 편입학한 곳이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한양사이버대로 선택한 이유는 첫째, 한양대 캠퍼스 안에 사이버 학습관이 있고, 둘째 다양한 커리큘럼의 오프라인 강의들과, 셋째 심리상담센터가 있어서 1년 동안 인턴 수련을 받을 수 있고, 넷째 훌륭한 교수님들과 함께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으며, 다섯째 다양한 학사 일정과 엠티, 축제 등 각종 행사가 학생회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서 제2의 대학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었어요.
‘두 번째 스무 살’이란 표현답게 다시 대학생이 되어 즐기게 된 학교생활은 저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4세였던 딸아이를 데리고 오프라인 특강참석 및 각종 학교행사에 참석하고 상담공부를 하면서 실직 후 제일 마음 아파했을 남편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어요. 육아하면서 아이의 언행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고 믿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하였어요.
처음에는 온라인 강의와 시험이 너무 낯설고 어색했어요.
‘잘하고 있는 건가?’ ‘상담공부는 끝이 없다는데…’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죠. 그래서 더욱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학생회 임원 활동도 재밌게 했었고, 특히 14학번 4학년 대표를 맡았을 때는 한 학년의 대표로서 보람도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또한 공부하게끔 이끌어주시는 교수님들의 가르침에 대한 사랑. 교수님들의 사랑의 울타리는 지치고 힘들어 픽 쓰러지는 저를 오뚝이처럼 만들어주셨어요. 특히 ‘논문을 쓰라’고 말씀해주시는 저희 과 교수님들. 정말 감사했어요.
‘상담공부는 끝이 없다는데…’
한참 실험연구를 진행하느라 바빴던 작년 4월. 또 한 번의 남편의 실직. 점점 안정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위기는 정말 원망스러웠어요.
이 모든 것이 상담공부를 하고 있지 않았으면 마음 다스리기가 어려웠을 거 같아요. 그래서 더 해내고 싶었고, 이루고 싶었고, 해야 해서 더욱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논문은 작년 6월 무사히 발표도 끝낼 수 있었고, 운 좋게 지도교수님과 함께 그해 9월 29일 논문콘서트도 할 수 있었어요. 현재는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