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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사라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예금은 어디로 갔나

“일본군 위안부들의 대만은행 예금을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몰수했다”

글 : 그리셀다 몰레만스  논픽션 작가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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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첫 설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본격화된 ‘일본군 위안소’ 운영
‌⊙ 일본군의 침략전쟁과 ‘궤’를 같이한 대만은행과 요코하마정금은행의 해외 영업망 확장
‌⊙ 히로히토는 요코하마정금은행 최대 주주… 대만은행에도 ‘대리인’ 내세워 지분 참여
⊙ ‘애국’이란 미명의 ‘강제 저축’… 日帝는 위안부의 예금 등으로 전쟁비용 조달
⊙ 일제, ‘위안소’ 관련 증거 파기… 찾을 길 막막한 일본군 위안부의 ‘재산’
⊙ 대만은행, “오래전 일이라 확인 불가”… 미쓰비시UFG은행은 “답변 거부”
‌⊙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어
舊일본제국의 ‘조력자’였던 요코하마정금은행의 본부다. 요코하마정금은행은 지금의 미쓰비시UFG은행이다.
  《월간조선》은 2015년에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종전 70년: 끝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전쟁’이란 기획 기사를 보도했다. 해당 기사는 세계 각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또는 그 가족들의 증언·청취, 현지 관련 단체들의 활동상, 각국의 피해자 지원책 등을 고찰하는 내용이었다. 해당 기사 중에는 네덜란드 현지 취재 내용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였던 인도네시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1941년부터 인도네시아에 진주한 일본군은 네덜란드 여성들을 끌고 가 성적(性的) 착취를 했다. 네덜란드계 백인 아버지와 인도네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네덜란드의 논픽션 작가, 그리셀다 몰레만스(Griselda Molemans)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만행과 일본군 위안부가 겪은 참상을 담은 책을 내고 이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월간조선》이 네덜란드 현지 취재를 할 때 몰레만스는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그로부터 4년여가 흐른 지난 2월, 몰레만스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들이 강제로 대만은행(臺灣銀行)에 예금해야 했고, 일본 패전 이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이 대만은행을 국유화하면서 그 돈이 몰수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돈의 흔적을 추적하는 작업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재산권이 침해됐다면, 이를 바로잡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생각에 몰레만스의 제안에 동의하고,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언론기금’에 취재계획서를 함께 제출했다. 유럽언론기금에서 국가 간 비밀스런 자금 이동에 대한 취재를 돕는 ‘자금 흔적(money trail)’이란 프로그램의 운영진은 지원 의사를 밝혔다. 몰레만스는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의 국립문서보관소를 찾아 관련 자료를 탐색했다. 《월간조선》은 한국과 일본, 대만의 연구 자료 분석과 함께 대만 현지 취재를 맡았다.
 
 
  1932년부터 운영된 일본군의 ‘강제 매춘 시설’
 
1895년, 대만 타이베이로 진입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그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대만이란 첫 식민지를 얻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사전적 정의는, 일본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軍) 위안소’로 끌려가 성적 착취를 당한 여성들을 말한다. 국제연합(UN) 등 국제기구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일본군 성(性)노예’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태평양전쟁(1941년)을 일으키면서 동아시아 전역으로 침략전쟁의 전선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장병에 의한 주민 강간 방지, 군의 사기 진작과 성병 예방 등을 명목으로 ‘위안부 제도’를 고안했다. 일본의 ‘위안부 연구’ 권위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가 2000년에 낸 《공동연구 일본군 위안부》에 따르면, 일본군의 첫 위안소는 일본 해군이 1932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세웠다. 본격적으로 일본군 위안소가 설치·운영된 건 1937년 이후다. 일본군은 위안소의 설치 목적, 관리 감독, 위안부 동원에 대한 명확한 원칙을 세우고 계획적으로 실행했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제국 군대는 중국과 동남아, 태평양 점령지에서 ‘강제 매춘 시스템’을 이용해 여성들을 ‘성노예화’했다. 일제가 저지른 이 같은 전쟁범죄 피해자들의 출신지는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34개국(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호주·네덜란드·대만·필리핀·태국 등)에 이른다. 취재팀이 새로 발굴한 자료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위안부를 감금하고 ‘성 착취’를 한 것도 모자라, 대만은행과 일본 요코하마정금은행(橫浜正金銀行)의 해외 지점에 있던 그들의 예금마저 전쟁에 쏟아부은 정황을 보여준다.
 
 
  대만은행 주식 7566주 소유했던 ‘코라’의 배후는?
 
히로히토 일가가 ‘코라’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대만은행 주식을 보유한 사실을 증빙하는 문건이다.
  일본은 1895년 청나라로부터 대만을 넘겨받았다. 대만은 일본의 첫 식민지였다. 일본은 대만을 ‘일본제국 식민지의 전형’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일본은 대만의 경제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미쓰비시나 미쓰이 같은 일본 기업의 대만 진출을 돕기 위해 대만은행을 설립(1899년)했다. 대만은행 설립 당시 자본금은 500만 엔이었다. 대만은행은 표면적으로 대만 역내 통화 발행, 외화 환전, 무역금융 등을 담당했지만, 실상 그들의 주요 업무는 일본 군국주의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대만은행 본사는 타이베이(臺北)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총괄 지휘부는 일본 정부의 관료가 통제하는 도쿄 지점이었다. 일본 정부는 대만은행 자본금 전액을 출자하고, 동남아에서 두 번째로 큰 ‘일본 은행’으로 키웠다.
 
  대만은행의 첫 동남아 지점은 1912년 9월 개설된 싱가포르 지점이다. 대만은행은 1941년까지 ▲일본 4개소 ▲대만 15개소 ▲중국 10개소 ▲영국령 말라야(싱가포르) 1개소 ▲네덜란드령 동인도(바타비아) 1개소 ▲필리핀(마닐라) 1개소 ▲나우루 1개소 등 34개 지점을 열었다.
 
  당시 대만은행의 자본금은 3000만 엔(주당 100엔×30만 주)이었다. 1941년 3월 1일 기준, 주주 3209명이 액면가 100엔 가치의 주식 15만 주를 주당 25엔에 소유했다. 이 중엔 ‘코라’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7566주를 소유한 일본 황실도 있다.
 
  대만은행은 일본 정부가 파견한 감독관이 통제했다. 은행의 사업 집행과 내부 행정은 은행장과 부은행장, 국장들이 맡았다. 직간접적으로 일본 정부가 대만은행을 관리했기 때문에 주주들은 은행 사업에 관여할 수 있는 힘이 거의 없었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기 이전에 동남아 점령지에서 현지 통화와 같은 가치를 가진 다양한 ‘군표(군용수표)’를 유통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길더 군표’,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 북부에서는 ‘해협 달러 군표’, 버마(미얀마)에서는 ‘루피 군표’, 필리핀에서는 ‘페소 군표’ 남양군도에서는 ‘파운드 군표’를 발행했다. 일본은 이런 군표와 엔화의 환율을 조정했다. 엔화 대 파운드화 환율은 ‘1 대 10’, 나머지 통화의 경우는 ‘1 대 1’로 고정했다. 이런 강제적 ‘고정환율제’에 의해 일본 엔화 가치는 이전보다 올랐다. 이에 따라 구매력이 상승한 일본군의 위상도 강화됐다.
 
 
  일본 民·官·軍이 공동운영한 ‘강제 매춘 시설’
 
  1942년 1월 10일, 일본 해군이 원유 매장량이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보르네오를 침공했을 때 일본군의 ‘강제 매춘 제도’는 이미 시행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일본군의 강제 매춘 제도는 해군 장병의 성병 감염을 예방하면서 그들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됐다. 보르네오섬에 주둔한 일본 해군의 특경대(特警隊·헌병대)는 유럽인과 성직자들을 과거 영국군 막사였던 쿠칭(보르네오 북부 주요 도시, 현 말레이시아 사라왁주의 주도) 소재 바투린탕 수용소에 가두고선, 그들이 거주했던 건물들을 압류했다. 이들은 ‘항구도시’ 폰티아낙(보르네오섬의 주요 도시, 현 인도네시아 칼리만탄바랏주의 주도)의 선교관(Mission House)을 빼앗고 ‘부적절한 용도’로 쓰기 위해 건물 내부를 ‘쪽방’으로 개조했다. 현지 주둔군 사령관 우에스기 게이메이(上杉啓明)는 해당 건물을 ‘군 위안소’로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폰티아낙에서는 ▲일본 해군 사병용 3개소 ▲일본 민간인용 5개소 ▲일본 해군 민생부(民生部, 보건·복지 등 민사관리 부서) 고위층용 1개소 등 다수의 일본군 위안소가 운영됐다. 이 ‘군 위안소’는 일제의 국책기업 ‘남양흥발주식회사(南洋興發株式會社)’와 ‘호국협회(護国協會)’가 함께 만들었다.
 
  상기 내용의 출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네덜란드군 정보부(NEFIS)가 작성한 〈일본 해군 장병 신문조서〉다. 해당 문서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기밀’로 보관돼 있다가 2007년에 공개됐다. 이 문건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소’는 일본군 위안부를 대상으로 한 ‘성적 착취’는 물론 일본군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운영됐다.
 
 
  ‘성적 착취’도 모자라 각종 명목으로 돈도 갈취
 
대만 타이베이 베이터우 소재 옛 일본군 위안소다. 국민당의 대만 패주 후 ‘시안사변’의 장본인 장쉐량(張學良)이 이곳에 연금됐다.
  일본군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허가 없이는 ‘위안소’를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의 예금을 찾아 쓰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들이 위안소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일본군 고위 장교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는 매주 의료진의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들을 상대할 때 일본군은 콘돔(삿쿠)을 사용해야 했다. 관계를 가진 뒤에는 소독하고, 매일 목욕해야 했다. 위안부들은 자기 수입의 절반을 위안소 관리인에게 넘겨야 했다. 위안소 관리인 선급금(속칭 마에킹)과 옷값, 머리 손질 비용, 화장품값 등의 비용을 위안부들에게 요구했다. 이에 따라 위안부들은 빚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바타비아에서는 군정간부(軍政幹部)의 명령에 따라 위안소 관리인 아오치 와시오가 식당과 술집, 작은 집 20채로 구성된 ‘군 위안소’를 만들었다. 이곳은 ‘사쿠라 클럽’이라고 불렸다. 다수의 네덜란드계 백인과, 그 외 유럽과 아시아 각국 출신 여성들이 사기를 당해 수용소에서 끌려나와 1943년 9월 10일부터 일했다. 그중엔 11세, 14세에 불과한 소녀도 있었다. 사쿠라 클럽에서 위안부를 돌보던 간호사는 그곳 여성들에게서 “아오치에게 ‘숙박비 미납’ 등의 이유로 ‘빚’을 져 위안소를 떠날 수 없다”는 하소연을 들었다고 한다.
 
  일본군 치하의 나우루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있었던 조선인 주모씨는 종전 후 연합군 신문 당시 “손님이 계속 왔다. 그들이 원하는 걸 하지 않으면 얻어맞았다. 남자 7명이 나를 동시에 성폭행해서 기절한 적도 있다. 그때 우리는 죽은 것과 같았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 18세던 주씨는 나우루에 내리자마자 쪽방들로 이뤄진 위안소로 끌려가 성적 착취를 당했다.
 
  지금껏 일제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간 피해자 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쑤지량(苏智良) 중국 상하이대 교수는 일본군 대 위안부의 비율이 ‘4 대 1’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당시 중국 주둔 일본군이 약 80만명이었으므로, 중국 내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성적 착취를 당한 피해자는 20만명이 된다. 일본군이 ‘34개국, 200개 이상 민족’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착취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체 피해자 수는 50만명에 달할 수도 있다.
 
 
  일제 방침 따라 식민지·점령지에서 시행된 ‘보국저축’
 
  앞서 언급한 문건에 따르면, 폰티아낙 지역의 ‘일본군 위안소’를 방문한 군인들은 관리인에게 ‘고정 요금’을 먼저 내야 했다. 부사관은 주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 이들이 내는 ‘입장료’는 1.5길더였다. 일과 종료 후 위안소를 찾은 일본군 장교는 ‘젊은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비용으로 10길더를 냈다. 관리인은 당일 매상을 일일이 기록하고, 그 매출 내역을 당직 사관에게 보고했다. 폰티아낙 소재 일본군 위안소를 관리한 남양흥발주식회사는 월별 수입 내역을 따로 작성해 일본 해군 민생부 1국에 제출했다.
 
  일본군 위안소의 수입 중 3분의 1은 식대, 침구 비용 등의 명목으로 공제됐다. 나머지 3분의 2가 위안부의 몫으로 장부에 기록됐다. 법적으로 위안부들은 자신의 수입을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게 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수입은 폰티아낙의 대만은행 지점에 개설된 그들 명의의 계좌에 예금됐다. 당시 침략전쟁을 강행한 일본은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본토는 물론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소위 ‘보국저축’ ‘애국저축’을 강요했다.
 
  이와 관련해서 김민영 군산대 경제학과 교수와 일본의 대표적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자인 니시노 루미코(西野瑠美子)는 2002년 여성부(현 여성가족부)에 제출한 연구보고서 〈일본군 위안부문제와 기업책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렇게 해서 저축운동의 결과 국민소득 추계에 대해서 세(稅)와 저축이 점하는 비율은 해마다 누증하여 1939년에는 48%가 되고 1945년에는 87%에 달함. 물론 경제통제에 의한 소비재 생산 압박의 결과 사려고 해도 물건이 없다고 하는 것이 배경에 있었다고는 해도, 얼마나 대대적인 국민 재수탈이 행하여졌는가의 한 단편을 나타내는 것임. 각년도의 저축은 매년 목표를 상회해서 달성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각 사업장이나 마을 안에서 저축조합이 조직되고, 주부에게는 저축을 위한 내직이 강요되었으며, 국채나 채권의 할당소화가 강제되었음. 그 가운데 학생, 청년, 부인이 근로동원에 끌려나오고 그 보수를 저축하게 함.〉
 
 
  ‘강제 저축’된 예금은 ‘일본군 전비 조달용’ 국채 매입에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사실상 강매했던 ‘전쟁 공채’다.
  일제의 ‘저축 독려 방침’을 따라 조선총독부와 관변단체들은 대대적인 저축운동을 진행했다. 이런 사정은 조선과 같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도 같았다. 그 결과 저축 비율은 해마다 증가했다. 사실상의 ‘재수탈’ 정책에 따라 일본 식민지는 물론 점령지로 나간 위안부의 수입, 징용 근로자의 급료 역시 반강제로 은행에 예치됐다.
 
  조선총독부는 1942년에 발표한 ‘조선인 내지 이입 알선 요항’을 통해 각 사업소에 “임금은 생활비에 필요한 금액을 제하고 저축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시기, 일본 후생성 역시 ‘출근 근무자 훈련 복무 준칙’을 통해 “노무자는 저축보국의 결실을 맺도록 저축조합에 가입, 필요로 하는 송금 및 생활비 이외는 가능한 한 저금할 것이며, 저금통장은 각 사업장에서 보관하는 것으로 한다”고 지시했다.
 
  허광무 전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조사과장은 2014년에 발표한 ‘일제 말기 강제동원 조선인 노무자의 미불금 피해 실태’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치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저금이다. 당시 노무자들은 월급에서 애국저축, 보국저축 등의 명목으로 일정 부분이 강제로 공제되어 저축으로 돌려졌다. 대개는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해 고향으로 귀환할 때 목돈을 쥐여 주기 위함이라는 그럴듯한 설명이 수반되었으나, 실제로는 모자라는 전비를 충족하고 나아가 조선인 노무자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일제는 1931년부터 군비 증강 목적으로 국채(國債)를 발행하고, 이를 강매했다. 대만은행은 일본군 점령지에 퍼져 있던 지점들이 수탁한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 근로자들의 예금 등을 일본 국채를 사들이는 데 썼다. 이동준 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가 2013년에 쓴 《미완의 탈식민지화: 조선은행, 대만은행 재일재산의 전후처리》에 따르면, 대만은행은 폐쇄 당시 장부가격으로 13억 엔 상당의 국채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요코하마정금은행의 최대 주주는 히로히토
 
네덜란드군 정보국(NEFIS)이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지금의 인도네시아에 있던 요코하마정금은행 지점에서 확보한 문건이다. 출처=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1942년, 대만은행은 보르네오에 5개 지점을 열었다. 이 지점들은 일본 해군 수비대가 이용하는 ‘군 위안소’가 있던 항구도시에 개설됐다. 뒤이어 보르네오가 아닌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각지에서도 지점이 영업을 시작했다. 마나도(술라웨시 북부)·마카사르(술라웨시 남부)·암본·싱가라자(발리) 지점은 1942년, 마노크와리(파푸아) 지점은 1943년에 문을 열었다. 모든 지역 지점은 대만은행 은행장이 관리했다. 당시 대만은행 지점 현황에 따르면, 지금의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광저우 ▲마닐라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등 일본 해군이 주둔하던 다른 항구도시에도 대만은행 지점들이 있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얘기를 다시 살핀다.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일본 육군의 제16사단은 자바섬을 점령했다. 제25사단은 수마트라섬을 차지했다. 당시 일본 육군의 ‘주거래 은행’은 요코하마정금은행이었다.
 
  1880년, 요코하마에서 자본금 300만 엔으로 시작한 요코하마정금은행은 외화 환전과 대외 무역금융을 담당하는 일본 최대 특수은행이었다. 일제의 침략전쟁 당시, 이 은행의 최대 주주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였다. 그가 보유한 요코하마정금은행 지분은 22%였다.
 
  요코하마정금은행도 일본군을 따라 다니며 광범위한 해외 지점망을 구축했다. 요코하마정금은행은 일본 국내에서 요코하마 본점과 지점 4개소를 운영했다. 중국에는 지점 14개소를 설치했다. 이 밖에 싱가포르, 마닐라, 제셀톤(현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랑군(양곤), 바타비아, 수라바야, 수마트라에도 지점을 열었다. 1945년 종전 무렵에는 해외 지점이 100여 곳에 달했다. 이 같은 요코하마정금은행의 지점 영업망과 은행 자산 규모는 대만은행을 압도했다.
 
 
  요코하마정금은행도 일본군 위안부의 ‘주거래 은행’
 
  일본군 위안부는 요코하마정금은행에도 예금했다. 안병직(安秉直)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3년에 낸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에 따르면, 위안소 관리인의 업무 중 하나가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위안부들의 돈을 매주 또는 매달 은행에 대신 입금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대목이다.
 
  〈그런데, 일기에 의하면 군 위안부들은 일반적으로 저금도 하고, 고향으로 송금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키쿠수이 클럽의 쵸우바로 근무하는 기간의 저자의 일기에는 위안부들을 위한 저금과 송금 업무에 관한 기록이 아주 많다. “아침을 먹고 요코하마정금은행에 가서 위안부 저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발했다(1944. 3. 25)”라거나 “니시하라 군과 요코하마정금은행 지점에 가서 이번에 귀향한 이○옥과 곽○순 2명에 대한 송금을 하였다(1944. 4. 14)”라는 기사가 그 대표적인 것일 것이다.〉
 
  일본 육군과 해군의 전비 조달을 위한 금융기관은 또 있었다. 일본 대장성 산하 사업소 ‘남방개발금고(南方開發金庫)’다. 요코하마정금은행과 대만은행을 관리하기도 한 남방개발금고는 일본군의 동남아 점령지에서 현지 통화로 표시된 ‘남방개발금고권(남발권)’이란 ‘군표’를 발행해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도왔다.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청산된 일본의 재외 자산
 
1945년 3월 31일 기준 대만은행의 자산 현황을 보여주는 ‘대차대조표’다
  1944년 중반부터 전세는 일본에 급격하게 불리해졌다. 연합군은 동남아 전역에서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전쟁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을 투하하면서 끝이 났다. 1945년 8월 14일, 히로히토는 일본제국의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선언을 했다. ‘일제 침략전쟁의 첨병’ 노릇을 했던 요코하마정금은행과 대만은행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았다.
 
  일본 도쿄의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또는 GHQ)는 1945년 9월 30일, ‘식민지 및 외국은행과 특별전시기관의 폐쇄에 관한 각서(SCAPIN 74)’를 일본 정부에 건넸다. 이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대만은행, 요코하마정금은행 등 21개 금융기관과 일본 이외 지역에서 ‘식민지 개발 금융’ ‘군수 금융’을 목적으로 했던 기관들의 본점과 지점, 기타 영업소를 폐쇄하라는 지령이었다. 뒤에 기술하겠지만, 요코하마정금은행은 당시 해체되지 않고 살아남아 지금의 미쓰비시UFG(MUFG)은행으로 탈바꿈했다.
 
  요코하마정금은행의 해외 지점은 연합군의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해체됐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네덜란드 정부의 허가를 받은 군 정보국이 청산 작업을 맡았다.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으면서도 ‘위안소 운영 관리’와 요코하마정금은행 사이의 ‘거래’를 은폐하려고 수마트라 지점의 ‘암호 해독용 코드북’을 비롯해 모든 문서 기록을 파기하라고 현지 주둔군에게 지시했다. 인도네시아 주둔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정당들의 환심을 사려고 해당 지점의 예금 1억5000만 길더를 인출해 그들에게 줬다. 자바 지점의 예금 1억6900만 길더는 네덜란드군에 대항해 무장 독립투쟁을 하던 인도네시아공화국 군대(TRI)가 차지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네덜란드군 정보국은 요코하마정금은행 반둥 지점에서 3억1300만 길더를 압수하고, 자바 지점에서는 은행 재무 기록 문건 9건을 입수했다. 이에 따르면 전쟁 기간 요코하마정금은행을 통해 자바 주둔 일본 육군 제16사단에 지급된 봉급은 1억2627만 길더, 일본 해군의 경우엔 1억1574만 길더 등 총 2억4201만 길더였다. 이 돈의 일부는 육군과 해군이 각각 운영하던 ‘위안소’에서 지출됐을 것이다.
 
 
  대만은행 본토·지점 정리 과정에서 ‘몰수’된 ‘예금’
 
장제스의 국민당은 대만은행을 비롯한 일본의 자산들을 ‘국유화’했다. 그 과정에서 동남아 각지에서 예금된 ‘일본군 위안부’의 저금도 ‘몰수’됐을 가능성이 있다.
  1945년 10월 25일, 대만의 ‘통치자’는 일본에서 ‘중화민국’으로 바뀌었다. 당시 중화민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중국 대륙의 ‘합법 정부’였다.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당과 ‘국공내전’을 치르는 와중에 화남(華南) 방면 사령관 천이(陳儀)를 대만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대만을 접수하게 했다. 천이는 10월 24일에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일제의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安藤利吉)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다음 날 천이는 “대만은 국민당 정부의 주권 아래 놓이게 됐다”고 선포했다.
 
  천이와 그의 군대는 대만 주민을 ‘일제 부역자’로 간주했다. 이들은 대만을 사실상 점령지로 여기고 약탈했다. 대만에 있던 금융기관과 기업, 수십 곳을 국유화했다. 그 ‘전리품’은 본토에서 국공내전을 치르던 국부군(國府軍)의 군자금으로 이용됐다. 대만은행 역시 그 ‘전리품’에 해당했다. 국민당 정권은 중국 본토에 있던 대만은행 지점 7개와 출장소 3개의 자산을 ‘중국농민은행’을 통해 정리했다. 대만 역내 본점과 지점은 국가 소유가 됐다. 1945년 3월 31일 당시 작성된 대만은행의 대차대조표에 따르면 해당 은행의 자산 규모는 총 64억3580만 엔이었다.
 
  《대만은행사》에 따르면 천이는 1945년 10월 25일, ‘대만성 행정장관 제1호 명령’을 통해 대만은행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천명했다. 이에 따라 대만은행의 본점과 대만 소재 지점들은 청산 및 회계 변경 절차를 거쳤다. 이후 천이의 대만성 정부는 자본금 6000만 엔을 출자해 1946년 5월, 은행을 국유화했다. 이 같은 조치로 인해 일본군 위안부들의 예금이 대만 국민당 정권의 수중으로 들어갔을 수 있다.
 
 
  대만 국민당의 ‘黨庫’로 흘러 들어갔나?
 
대만 타이베이 소재 국민당 중앙당사다. 대만은행 국유화 과정에서 일부 자산이 국민당의 ‘당고’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밀려 대만으로 패주했다. 대만의 국민당 정권은 국유화한 대만은행 자금 등을 이용해 10년 동안 경제 기반 재건에 집중했다. 국민당 정권은 산업 전반에 개입해 경제 건설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들의 예금도 투입됐을 개연성이 있다. 과거 몰수한 일본의 자산 등으로 축적한 지금의 국민당 재산에 포함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까지 대만 내부에서는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어떤 언급도 없었다.
 
  대만에서 ‘일본군 위안부 권익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인사들은 이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해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왕칭펑(王淸峰) 대만 적십자사 총재는 대만에서 손꼽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전문가다. 왕 총재는 변호사로 활동할 당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대만 위안부 여성 피해 조사’ 작업을 지휘했다. 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대일(對日)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지원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정권에서 법무부장(우리의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문가이면서 정부 각료로 일한 만큼 왕 총재는 대만은행 국유화 과정에서 국민당 정권에 몰수된 일본군 위안부들의 예금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왕 총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소송을 통해 일본의 사과와 보상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평하면서도 대만은행 문제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그는 “지금껏 일본군 위안부의 예금과 대만은행 자산 몰수의 관련성에 대한 얘기를 들은 일이 없다”며 “관련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만의 사실상 유일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권익 보호 단체인 ‘부녀구조사회복리사업기금회’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내놨다. 이들은 “우리 단체는 대만에서 유일하게 위안부 인권 운동에 오랫동안 헌신하고 있다”면서도 “학술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대만은행은 이 개연성을 인정할까. 대만은행 본점의 대변인실은 “문의한 내용에 대해 알 만한 관계자는 이미 오래전에 퇴사했다. 답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관련 자료 보유 여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다.
 
  MUFG은행의 경우 답변을 거부했다. 해당 은행의 언론 담당 나카무라 모토하루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고 회신했다. MUFG은행은 앞서 얘기한 요코하마정금은행의 후신이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령에도 요코하마정금은행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잇고 있다는 얘기다. 요코하마정금은행은 1946년 7월, ‘주식회사 도쿄은행’으로 이름을 바꾸고 살아남았다. 요코하마정금은행의 후신인 ‘도쿄은행’은 1996년, 미쓰비시은행과 합병해 ‘도쿄미쓰비시은행’이 됐다. 2006년에는 또 UFJ은행과 합병해 MUFG은행으로 재탄생했다. MUFG은행은 현재 일본 최대 민간은행이자 자산 기준 세계 9위(2018년 기준)인 ‘초거대 금융기업’이다.
 
 
  對日 사과·배상 요구뿐 아니라 ‘재산 환수’도 병행해야
 
  일련의 과정을 살피면, ‘일본 침략전쟁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일본군 위안부들은 일제 패망 이후 ‘재산’마저 잃었다. 그들의 재산권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은 일제가 파기했다. 증빙 자료가 사라진 일본군 위안부들의 예금은 일본의 과거 식민지를 접수한 정권이나 일본에 빼앗긴 식민지를 되찾은 승전국이 일본의 재외자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몰수’됐다. 일제 패망 이후 일본 식민지와 점령지의 혼란상, 얽히고설킨 각국의 이해관계, ‘강제 매춘 피해자’란 특수성 탓에 문제 제기를 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들은 평생 자신의 피해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숨기려 했다. 과거가 알려진 경우에는 조롱의 대상이 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건 1991년 이후다.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金學順, 1924~1997)씨는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과거 일본군 위안부로서 겪은 피해 사실을 알렸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서구에서도 증언이 나왔다. 네덜란드계 호주인 얀 루프 오헤른(Jan Ruff O’Herne, 1923~2019)은 이듬해에 비(非)아시아권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 이후 전개된 일본군 위안부 관련 활동의 목표는 ‘일본의 사과와 배상’에 집중됐다. 앞서 밝힌 것처럼 그들의 ‘재산’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관련 기록이 사라지고, 여기 저기로 쪼개져 각국으로 흩어진 탓에 반환을 요구할 대상을 특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번 문제 제기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빼앗긴 재산을 환수하는 작업의 계기로 삼아 관련 당사국과 은행들의 책임 있는 후속 조치를 촉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MUFG은행과 대만은행은 ‘몰수’된 일본군 위안부들의 예금이 현재 두 은행의 ‘부(富)’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밝혀야 한다.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예금을 관리하던 지점들이 어디였고, 예금은 얼마나 있었는지 조사하고, 투명하게 관련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대만 정부 또는 국민당도 ‘강제 매춘 피해자’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종전 이후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식민지에 있던 대만은행과 요코하마정금은행의 지점들을 해체했던 ▲미국(필리핀) ▲영국(미얀마·말레이시아·홍콩) ▲프랑스(인도차이나) ▲네덜란드(인도네시아) 같은 ‘구(舊)종주국’들도 관련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
 
  이 기사는 유럽언론기금 ‘머니 트레일 프로젝트(www. money-trail.org)’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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