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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 가는 것들

종이문화 명맥 지키는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인쇄업은 시간이 생명… 새벽에 나와 기계 돌리며 불황 이겨냈다”

글 : 신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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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지역 인쇄업의 60~70% 차지… 5000곳 가게에 1만5000명 근로
⊙ 인터넷 종합인쇄업체, 저가공세로 물량 다수 확보… 소매업 경쟁력 하락
⊙ 상인들 “열심히 사는 것밖에 도리 없어… 노하우 담긴 서비스로 고객 확보”
⊙ 중구청 “시설정비·인재교육·경영컨설팅·품질인증지원 등 진흥책 마련 중”
충무로 인쇄골목의 풍경. 충무로는 영화의 거리 못지않게 인쇄업의 상징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서울 충무로가 ‘영화판’으로 알려질 때부터 인쇄업은 활황을 맞았다. 1910년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 생기면서 전단을 찍기 위해 을지로 일대에 인쇄소가 들어섰다. 1950~60년대 영화산업이 부흥하면서 필동·인현동·충무로 등으로 그 숫자가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가 된 뒤로는 선거 홍보물 수요가 많아졌다. 충무로는 영화의 거리 못지않게 인쇄업의 상징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충무로 인쇄골목의 경기 온도는 겨울 날씨만큼이나 서늘해졌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가시화된 전자문명과 첨단산업은 종이문화를 쇠락시켰다. 명함은 디지털 원격 주문이 대체했고 달력은 스마트폰 안에 내장됐다. 수첩이나 다이어리 같은 기록용 지면은 전자 메모지에 밀려났다. 포스터·전단 계약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업계 종사자들의 목소리다.
 
  이제는 인공지능의 파고(波高), ‘4차산업혁명’까지 운위되는 시대다. 이대로 충무로 인쇄골목은 문명사의 뒤안길로 물러날 것인가.
 
  그곳에는 아직도 밤낮없이 종이를 썰고, 색을 입히고, 인쇄기를 돌리고, 포장지를 나르는 이들이 있다. 제본을 뜨고, 코팅을 입히고, 교정을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손으로 인쇄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충무로 인쇄골목은 서울 지역 인쇄업의 60~70%를 차지한다고 한다. 5000여 곳에 달하는 가게에서 1만5000여 명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인쇄업의 전통과 명맥을 지키는 상인들에게서 종이문화의 오늘과 내일을 읽을 수 있었다.
 
 
  연말연시 ‘성수기’라지만…
 
  서울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에서 내려 국민연금 건물을 끼고 돌아 내려간다. 기획부터 편집·출력·인쇄·제본에 후가공까지 인쇄업의 모든 과정을 책임지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사거리를 가로질러 명보극장 사이로 접어들면 전선으로 얽힌 하늘 아래 용달차와 지게차, 오토바이가 오가는 골목이 나온다. 사방에서 울리는 종이 써는 소리, 팰릿(Pallet·화물을 쌓는 운반대) 내려놓는 소리가 귓전을 메운다.
 
  바쁘게 돌아가는 기계음은 그곳의 밀려든 주문을 짐작게 했다. 기자가 만나본 인쇄업자들마다 불황을 한탄했지만 그래도 연말연시는 역시 ‘종이의 성수기’였다. 소박한 연하장부터 새해 달력과 수첩, 신년 기획 홍보물까지 가릴 것 없이 찍어내는 시기였다. 용달차에 전단을 싣고 가던 한 노인은 “요즘은 예전보다 인쇄가게가 더 많아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의 분주한 겉모습으로는 시장 경기를 예단할 수 없었다. 인쇄골목 인근에 있는 중부경찰서 관계자는 “예전에는 골목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밀집해 있었다”며 “지금은 군데군데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아직까지 더 많다”고 전했다.
 
  충무로에서 15년간 가게를 운영한 라면집 주인도 “15년 전만 하더라도 저기 있던 빌딩 너머가 다 인쇄공장이었다”며 “달력도 엄청 찍어내고 했는데 있던 분들도 다 떠나는 추세가 됐다. 밥 먹으러 오는 박스공장 사람들이 ‘일거리가 없어서 일찍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까지 하더라”고 말했다.
 
 
  “7~8년 전에는 24시간 기계 돌렸다”
 
박판열 효성문화 대표가 돌아가는 인쇄 기계를 가리키고 있다. 15년간 인쇄업에 종사한 박 대표는 “인쇄업은 시간이 생명”이라며 “정부에서 절차나 규제를 줄여서 상인들도 직통으로 효과를 볼 수 있게 해야 된다”고 말했다.
  소규모 납품업체 여러 곳을 방문한 끝에 한 인쇄전문 업소에서 실제 경기 현황을 들을 수 있었다. 박판열 효성문화 대표는 15년간 인쇄업에 종사했다. 주로 달력과 도록, 월간지와 동화책 등을 만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인쇄 경기는 하향세를 타서 매출의 변동 폭이 컸다.
 
  “지금은 어쩌다 한 달을 제대로 벌면, 그다음 달에는 매출이 20% 정도 삭감되는 일이 빈번합니다. 옛날의 물동량이 100이라면 지금은 50이에요. 7~8년 전만 해도 수요가 많았죠. 물동량이 넘쳐서 여기 근처 사장님들만 해도 24시간 기계를 돌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7시면 퇴근이에요. 가격도 싸져서 박리다매로 하다가 적자를 보기도 합니다.”
 
  박 대표는 지난해 어지러운 정국에 소비심리가 냉각되고 중국의 사드 보복까지 겹쳐서 힘들었다고 했다. 중국 등 외국에 수출하는 인쇄물량 주문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공서 자료집이나 달력 주문이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요즘은 최저임금도 인상돼 인건비도 고민이라고 했다. 특히 인쇄 상인들이 정책 혜택을 입지 못하는 점을 지적했다.
 
  “나라에서 만든 정책 효과가 여기 밑에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너무 걸려요. 국가에서 발주한 사업이 있어도 혜택을 받으려면 4~5개월 걸립니다. 인쇄업은 시간이 생명이에요. 부도가 나는 기업도 많아요. 주무부서에서 절차나 규제를 줄여서 상인들도 직통으로 효과를 볼 수 있게 해야 돼요.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신뢰를 갖고 정보를 빨리 공유해야 해요.”
 
 
  “남들보다 1시간 더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
 
  박 대표는 인근 빌딩 지하와 1층 가게에 인쇄소를 차렸다. 그는 2층 사무실을 오가며 모든 공정을 직접 관할했다. 1000부, 1만 부를 납품하더라도 한 장의 오류 없이 완벽해야 한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꼼꼼하게 확인해서 납품하기 때문에 하자가 거의 없다”는 그만의 자부심은 충무로를 지키는 인쇄업자들의 자부심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경기가 불황이고 정책 수혜도 번거로워 힘든 날도 많지만, 박 대표는 앞으로 잘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가 남들보다 1시간 더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다.
 
  “대학생 자식들 기르느라 목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새벽에 나와 기계를 돌리면서 이겨냈죠. 세상에 한탄도 많이 했지만 남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살았어요. 성공한 사람들 한 번 보세요. 다 부지런합니다. (웃음) 물동량이 조금 줄어도 절약해서 살고 꾸준히 한 우물 판다는 식으로 하면 다 먹고살 수 있어요. 저희는 직원들하고도 서로 신뢰가 있어요.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조금씩 어려울 때 서로가 양보하면서 살아왔죠. 큰 불황도 이겨내리라 봅니다.”
 
  기자가 만난 상인들에 따르면, 디지털 문명의 발달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인쇄업종은 명함이라고 말했다. 요즘은 지면(紙面)보다는 SNS로 서로를 소개하고 양쪽이 소통하는 문화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남은 수요마저도 종합인쇄업체들이 인터넷으로 저가공세를 펼쳐 대량으로 확보하기 때문에 소량 주문을 받는 인쇄골목의 경쟁력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고 한다.
 
  허름한 벽돌집 명함가게로 들어갔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선 가게는 3평 남짓 되는 공간으로 2종의 명함 기계가 있었는데, 멈춰 있었다. 주인은 임대료 고지서를 빼 들어 보이며 탄식했다.
 
 
  “요새는 명함도 다 디지털로 해요”
 
김미화 금화봉투 사장이 납품할 봉투 품질을 검사하고 있다. 김 사장은 충무로 인쇄골목에서만 “20년 이상 봉투업을 했다”며 “경험과 노하우도 많이 쌓여서 신규 인터넷 업체들하고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고 자부했다.
  “물량이 40%가 줄었어요. 하루에 많으면 5만원 보통 2만~3만원 버는데 저녁에 소주 한 잔 먹는 데 1만원 쓰면 뭐가 남겠어요. 여기 세(貰)나 내겠습니까. 큰 회사가 명함 다 잡아먹으니까 우리한테까지 피해가 오죠. 이제는 인쇄물도 컴퓨터로 자체적으로 빼 쓰잖아요. 명함도 다 디지털로 해요. 남아봤자 2000원에서 1500원 남는데 재료비는 오르고 가격은 떨어져서 너무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잘사는 사람은 잘살고 어려운 사람은 어려워요.”
 
  명함집 주인은 IMF 때 오히려 명함 장사가 잘됐다고 말했다. 구직(求職)이나 사업상으로 여기저기 명함 돌릴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인은 “옛날에는 지방에서도 원고를 싸 들고 충무로로 올라와서 맡기고 그랬다”고 부연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회사들이 원격작업에 택배 서비스까지 겸하면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주인은 “앞으로 인쇄업이 좋아질 확률은 작다”며 “명함 같은 영세업종은 큰 회사들이 손을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양쪽 갈래로 뻗어 나간 골목을 휘젓고 다니다 보면 잉크와 기름 냄새로 코가 젖는다. 마스크를 쓴 채 빗자루로 종이 톱밥을 치우는 사람들을 지나 봉투가게가 모인 곳으로 길을 잡는다.
 
  ‘금화봉투’의 김미화 사장은 얼마 전 외국에 한국의 명소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시종 씁쓸한 얘기만 들었던 터라 김 사장 역시 어떤 고충을 토로할지 귀를 기울여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 톤은 예상외로 밝았다. 천장에 걸린 현판을 보니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왼편의 화이트보드에는 ‘돈이 재산이 아니라 사람이 재산이다’ ‘진상도 손님이다’ 등 잠언으로 보이는 말들이 쓰여 있었다.
 
 
  고객들과 ‘대면하는 문화’가 인쇄골목의 정(情)
 
자매 사이인 김미숙(위) 사장과 김미화(아래)씨가 작업 중이다. 언니 김미숙 동성봉투 사장은 “서민들 고생하는 것 좀 알아주시고 윗사람들도 나쁜 짓 하면서 살진 말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새벽 5시에 나와 저 문장들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해요. 고객들을 위해서 기도하죠. 다 소중한 인연 아니겠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 대면하는 맛이 또 있는 거지요.”
 
  김 사장은 자신의 업장을 소개할 때마다 화색을 잃지 않았다. 그는 원격 주문을 받는 인터넷 사업장들을 마트, 자신이 운영하는 오프라인 업장을 백화점이라고 표현했다. 업주의 프로 정신, 고객 서비스가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그만큼 손님 한 사람 찾아오는 것을 소중한 인연으로 여긴다. 흡족한 손님이 다른 이에게 추천해 준 적도 있다.
 
  “시장 경기가 인터넷 문화로 바뀌어서 가다 보니까 예전보다는 못한데, 그래도 손님들이 매일 방문해 주세요. 이곳은 봉투 제작 하청을 맡는 제1단계 사업장이에요. 제일 밑바닥 민심을 다 경험할 수 있어요. 여기서만 20년 이상을 했어요. 경험과 노하우도 많이 쌓여서 신규 인터넷 업체들하고는 비교가 되질 않죠. 손님들이 많이 만족해 주시는 걸 보고 보람을 느껴요.”
 
  여느 업종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봉투 제작은 경력이 없으면 견적 설계도 어렵고 제품 이상도 많이 생긴다고 한다. 김 사장은 자신이 축적해 온 ‘봉투 제작 노하우’에 자부심이 있었다.
 
  “저는 앞으로도 가게 홈페이지를 만들지 않을 거예요. 고객들과 대면해서 일하는 게 인쇄업이죠. 저는 끝까지 손님맞이를 해요. 싸우지도 않고 돈 떼일 리도 없으니 신뢰가 커서 손님들도 더 찾아오세요. 충무로 인쇄골목에는 전통도 있고 한국 특유의 정(情) 문화도 있잖아요. 친절하다고 입소문이 나서 대기업이랑 대형병원하고도 계약을 했어요. 세상에 공돈이 어디 있나요. (웃음) 경기가 안 좋아서 어차피 오는 고통이라면 이기고 지나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이동하던 중 봉투가게 한 곳이 더 눈에 들어왔다. 철제 유리문을 열자 난로 하나를 피워둔 채 능숙하게 봉투를 접고 시험지를 검토하는 한 중년의 자매가 있었다. SBS 〈생활의 달인〉 등 여러 생활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동성봉투’의 김미숙·김미화 자매였다. 김미숙 대표의 동생은 공교롭게도 금화봉투 사장과 동명이인이었다. 소문만큼 봉투와 지면을 접는 속도와 꼼꼼한 확인 작업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인쇄업 죽었다지만 봉투 없이 살겠나”
 
  “언니는 50년 동안 봉투를 만들었어요. 10년간 경력을 쌓고 자기 가게를 열어 40년이나 일했죠. 저는 이제 10년 됐어요. 방송도 자주 나갔는데 아마 거래처에서 방송국에 ‘여기 손 빠른 사람 있다’고 제보를 했나 봐요. 그렇게 여러 곳에 한 여섯 번인가 나갔어요.”
 
  동생은 언니 김 대표를 방송에 나온 그대로 ‘달인’이라고 표현했다. 단순히 손이 빠르다는 것을 넘어서 마감이나 품질 면에서 고객들과의 신뢰를 최우선으로 챙기기 때문이다. 일처리로 바쁜 언니 김 대표를 대신해 동생 김씨가 최근의 인쇄업 중 봉투 경기에 대해 말했다. 그의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동생은 “아무리 인쇄업이 죽었다지만 봉투 없이 어떻게 살겠는가”라며 “하다못해 방송국에서 시상식 할 때도 봉투에 넣어 줄 테고 원서 같은 것을 넣을 때도 봉투를 쓰고 회사에서도 서류 봉투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저희는 물량이 항상 꾸준하다”며 “자주 서서 일하는 게 힘들긴 해도 둘이 서로 손발이 맞고 돈 버는 보람 때문에 산다”며 웃어 보였다.
 
  언니 김 대표는 귓가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수시로 걸려오는 납품 전화를 받아 즉시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밀려드는 주문을 적자마자 다시 봉투를 접어 옮기는 순발력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종이더미를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한 김 대표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경기, 어렵죠. 우리 앞에만 봐도 벌써 두 군데나 비어 있잖아요. 여기 한쪽 공간 얻어서 일하던 두 사람도 나갔어요. 명함 기계 하나를 놓은 적이 있었는데 임차료도 안 나와서 없앴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내 주어진 일부터 착실하게 하는 거죠. 경제 같은 나랏일이야 윗사람들이 다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머리 짧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겠냐마는, 서민들 고생하는 것 좀 알아주시고 윗사람들도 나쁜 짓 하면서 살진 말았으면 합니다.”
 
 
  “수량과 품질 맞출 때 성취감 느껴”
 
  김 대표가 깨달은 성공의 행로는 단순했다. 꾸준히 성실히 일하는 길뿐이었다. 그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열심히 사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며 “남에게 약속한 시간 맞춰주면서 스스로 일하다 보면 뿌듯할 때가 많다. 주문받은 봉투 수량이랑 품질을 최선을 다해서 완성시킬 때 돈을 떠나서 성취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공들여 만든 봉투를 들고 고객들이 좋아하며 돌아갈 때 김씨 자매는 진짜 ‘생활의 달인’처럼 일하고 싶은 의욕이 샘솟는다고 했다.
 
  인쇄업의 경기 전반이 어렵다지만 이렇듯 상인들과 업주들의 근로 의지는 여전히 충만했다. 주문량이 과거에 비해 줄었다지만 아직도 찾는 손님들이 있었다. 충무로 인쇄골목이 가지고 있는 전통과 내력의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개선책과 발전책이었다. 관할 당국인 서울 중구는 충무로 인쇄골목의 보존과 혁신, 경기 부흥을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을까. 작년 7월 중구는 “인쇄산업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 지원 방안부터 인쇄 클러스터 구축, 영세 인쇄업자 보호 대책, 지식형 산업으로의 변화 방안을 위주로 올해(2017년) 안에 산업진흥계획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중구청 시장경제과는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인쇄 특정개발진흥지구’ 지정을 비롯한 인쇄산업 진흥계획 수립을 위해 노력 중이라고 전했다. 시장경제과 관계자는 “주민들 생각과 인쇄업자들의 서비스 개선안을 수렴 중이다. 2018년 2월에 중구의회 의견을 청취한 다음에 서울시에 진흥계획 승인 요청을 보낼 방침”이라고 밝혔다.
 
  관계자는 “인쇄거리 도로가 협소하고 시설 면에서 어려움이 많다. 정부 차원에서 공공시설을 지어 소상공인을 입주시키는 형식을 추진 중”이라면서 “경영컨설팅, 인재양성교육, 품질인증지원 등 다양한 인쇄업 진흥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구청 “인쇄산업 진흥계획 수립 중”, 인쇄조합 “사업장 개선 관련 현안 토의 중”
 
충무로 인쇄골목의 한 풍경. 중구청 시장경제과는 “경기도 일산이나 파주 쪽으로 인쇄업체가 많이 떠났다고 하지만 출판 쪽으로만 갔고 아직 산업인쇄는 중구에 많이 남아 있다”며 “저희가 좀 더 체계적으로 지원해 준다면 올해부터 많이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경기도 일산이나 파주 쪽으로 인쇄업체가 많이 떠났다고 하지만 출판 쪽으로만 갔고 아직 산업인쇄는 중구에 많이 남아 있다”며 “특히 후가공 면에서는 다른 쪽보다 월등히 기술력이 높기 때문에 경쟁력은 충분하다. 저희가 좀 더 체계적으로 지원해 준다면 올해부터 많이 발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수 서울인쇄산업협동조합 이사는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인쇄업자들의 가장 큰 소원이 ‘자기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다. 공장 자체가 오래된 건물인 데다가 내 공장이 아니니까 못 하나 박기도 힘들다”며 “‘나만의 안전한 사업장’을 만들기 위해 조합 내에서도 특별위원회를 신설, 중구청과 같이 현안을 토의 중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서울 중구를 인쇄산업 진흥지구로 지정하는 사업을 구청장과 함께 추진 중”이라고도 했다.
 
  이 이사는 “서울 중구는 지하철 2호선에서 6호선까지 지나가서 누구나 찾아오기 쉬운 곳이고, 전통문화는 물론 100년이 넘는 인쇄산업의 역사까지 보존된 곳”이라며 “앞으로 충무로 인쇄골목을 좀 더 계승 발전시켜서 사업하기 좋은 터전으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만영 한영인쇄소 대표
 
  “작년에 도산(倒産)한 곳 많아… 규제 완화와 투자 지원 시급”
 
  업계에 따르면 수년 전부터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에 인쇄소가 모여들었다. 충무로 등 서울 중심지의 지대(地代)가 올라 부담이 된 일부 인쇄소들이 비교적 저렴한 지역으로 이전해 간 것이다.
 
  경기도 일산에서 ‘한영인쇄소’를 운영하는 박만영 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서울 마포에서 사업을 하다 십수 년 전에 일산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박 대표는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임차료 때문에 충무로에 있다가 경기도로 이전해 온 인쇄소들도 불황으로 도산하는 곳이 많다”며 “특히 작년에는 나라도 혼란하고 정권이 바뀌면서 최저임금도 오른다고 해서 내가 아는 사업장 중 50~60%가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이어 박 대표는 “모든 업종이 어렵겠지만 그래도 인쇄는 문화 아닌가. TV에서도 등한시하지 말고 옛날처럼 ‘책을 봅시다’ 이런 프로그램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교양 프로그램을 통한 독서 캠페인 활성화가 인쇄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리라 본 것이다. 그는 “지금은 10대, 20대 젊은 세대들이 오락 프로그램에만 집중하고 있다”며 “종이문화를 홍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이 없어져서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옛날에는 한쪽 업체가 도산하면 다른 업체가 시설을 받아서 이어나갔다”며 “그런데 지금은 장비를 다 동남아 쪽으로 넘겨 버린다. 이를 막을 당국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정부 차원의 진흥 정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인건비도 문제지만 일단 더 많은 사람이 인쇄업에 투자할 수 있게끔 저금리(低金利) 융자·대출을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면서 “환경이나 안전 같은 분야는 당연히 준수해야겠지만 실제 사업을 하다 보면 지나친 규제들도 많다. 일정 부분 완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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