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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李漢彬의 시선으로 본 한국의 지식인

無교양주의와 ‘아니면 말고’, 좌우 陣地에 갇히다!

글 :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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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정치적 特需 혹은 출세의 길목을 의미했던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정치적 충원이 주로 법조계나 군부 혹은 관료로부터 이루어졌다면, 민주화는 대학교수가 정치인으로 대거 등용되는 기회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 한국의 관료제는 대한민국의 ‘資産’으로부터 ‘負擔’으로 변질
⊙ 1960~70년대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공무원 肅正’은 死語
⊙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정당정치도, 머신정치(machine politics)도 아닌 ‘캠프정치’
⊙ 진영 논리에 사로잡힌 역사학 분야는 학문이 종교적 ‘敎理問答’을 닮아
⊙ 대한민국에 권위를 자랑하는 시민운동의 宗家·名家는 존재하지 않아

全相仁
⊙ 57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同 대학원 석사·미국 브라운대 사회학 석·박사.
⊙ 한국미래학회장, 한림대 대외협력처장, 서울대 환경대학원 부위원장 역임.
    現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제2기 민간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편집자 주]
이 글은 한국미래학회의 창립자인 덕산(德山) 이한빈(李漢彬·1926~2004) 선생(전 경제기획원 부총리)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전상인 교수가 덕산의 시선으로 이 시대 지식인의 역할을 되새긴 서간체 글이다. 전 교수가 덕산으로 ‘빙의(憑依)’한 셈이다. 지난 10월 17일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덕산미래강좌>에서 발표했으며 뒤이어 연세대 김호기, 서강대 송의영, 한신대 윤평중, 이화여대 함인희 교수와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가 ‘우리 시대 공공지식인의 역할’을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태극기 아래 갈라진 보수와 진보세력. 양측의 충돌을 막으려 경찰이 인의 장벽을 만들고 있다. 지난 2008년 6월 서울시청 광장.
  내가 사랑하는 여러분 곁을 떠나 이곳으로 건너온 지도 올해로 10년이 됩니다. 모두들 참으로 그립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내가 평생 사랑했던 대한민국의 사는 형편이 그동안 좀 나아졌는지도 몹시 궁금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최근 이곳에 전해지는 내 조국(祖國) 이야기 가운데는 기쁘고 반가운 게 별로 없군요. 내가 그곳을 하직(下直)할 때보다 국민들의 삶이 점점 더 피곤해지고 각박해져 있지 않나 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놓고 선배 지식인의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내 생각을 전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른바 지식인으로 입신(立身)하여 나랏일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개인적 계기 가운데 하나는 1960년대 초 스위스에서의 외교관(外交官) 생활이었습니다. 그때 나한테 주어진 ‘수수께끼’는 ‘작으면서도 어떻게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가? 하나가 될 수 없는 땅이 어떻게 한 나라가 될 수 있는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땅이 어떻게 번영을 누릴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1965년에 귀국하자마자 출간한 《작은 나라가 사는 길(스위스의 경우)》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변이었습니다. 몹시도 가난했던 시절에 국록(國祿)을 먹고 외국생활을 한 나로서는 그 책을 고려 후기 문익점(文益漸)이 원(元)나라에서 갖고 들어온 목화씨에 종종 비유했었습니다.
 
덕한 이한빈 전 경제부총리.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기획했던 인물이다.
  스위스가 오늘날처럼 잘사는 나라가 된 이유와 배경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 나한테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든 지식인이 사회 현실에 참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작은 나라가 사는 길》에서 나는 ‘오늘날 세계에 있어서 국가운영에 관하여 지식인의 참여가 스위스처럼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나라는 드물 것 같다’고 썼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스위스에는 정치가 부업(副業)입니다. 정치는 특수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며, 국회의원들 역시 각자 본래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연방제 국가인 스위스에서는 대통령 또한 윤번제(輪番制)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의 부업화는 지식인들의 전면적인 사회참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곧 ‘대학교수, 언론인, 변호사, 목사, 의사가 직업적인 정객(政客) 이상으로 나랏일에 직접 나서니까 직업적인 정객군(政客群)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인이 사회현실에 참여하는 방식은 다양할 것입니다. 또한 개인의 취향이나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가운영에 직접 종사하는 일입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다음 1951년에 내가 얻은 첫 직장도 대한민국 정부였습니다. 6·25전쟁 탓에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시절, 기획처 예산국 공무원으로 채용된 겁니다.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있던 당시에는 지식인의 숫자 자체가 매우 적었습니다. 내가 관료생활을 하면서 대학에 계속 출강(出講)했던 것도 그런 배경에서입니다. 하긴 대학교수가 ‘투 잡(two job)’을 뛰는 일도 그때는 흔했습니다. 1950년대는 두말 할 나위 없이 국가건설이 가장 당면한 시대적 과제였습니다. 지식인이 정부에 들어가 나라 만들기에 앞장서는 일은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순리(順理)로 생각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시절에는 정부나 대학 말고 지식인을 받아 줄 만한 변변한 직장이 없기도 했습니다.
 
 
  肅正이 사라진 ‘公定’사회
 
공무원 숙정이란 말이 공직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사진은 경찰청장 주재로 공직기강 확립을 위한 전국 지휘관 회의 모습이다.
  내가 처음 접했던 당시의 우리나라 관료사회는 과업지향적이라기보다 다분히 ‘서기정신(書記精神)’에 안주하던 분위기였습니다.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전통하에 말하자면 호적서류나 토지장부 만지는 정도를 국가의 일로 생각했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초로 기획관료, 발전관료, 기술관료, 경제관료의 시대를 개척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구체적인 실천은 5·16 이후 박정희 정부에 의해 시작됐지만, 우리나라에서 경제개발 계획의 골격은 이승만 정권 말기이던 1950년대 후반에 나름 준비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해 낸 주역으로서 근대 관료집단의 공헌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전문성에 애국심까지 겸비했던 최고 엘리트 지식인 그룹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의 관료제는 대한민국의 ‘자산(資産·asset)’으로부터 ‘부담(負擔·liability)’으로 변질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한 각종 계획과 규제, 개입에 익숙해진 그들이 시나브로 우리 사회의 거대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가 공무원 개혁을 천명해 왔지만 그 결과는 늘 여의치 않았습니다. 요새 항간에서는 ‘공정(公正)사회’의 의미를 ‘공정(公定)사회’로 이해한다고 들었습니다. ‘공평하고 올바른’ 사회가 아니라 모든 것을 ‘공무원이 정(定)하는 사회’ 말입니다. 대한민국이 국가주도 개발연대의 관행을 탈피하지 못한 채 선진국 문턱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지도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관료제 집단의 시대착오적 엘리트 의식에 있다고 봅니다. 내가 공직생활을 할 때만 해도 청빈과 봉사, 그리고 열정을 직업공무원의 미덕이자 긍지로 여기던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습니다.
 
  그때에 비해 오늘날 관료사회는 정치지향성이 너무나 두드러져 보입니다. 나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서 일한 적이 있긴 합니다. 그것은 1979년 이른바 10·26 사태 후 과도정부 때였고, 국가적 위기관리에 참여하다가 1980년 5월에 자리를 그만두었습니다. 지식인 출신 관료로서 나는 정치권 자체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거나 선을 그었습니다. 내 경험에 비춰 볼 때 민주화 이후 선거로 날이 새고 날이 지는 오늘날 이 나라에서 공직자들이 정치권에 열심히 줄을 대는 모습은 보기에 몹시 민망합니다. 처음에는 고위공직자들의 행태였다가 요새는 하위직도 따라 하는 추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한민국 공직사회는 더 이상 하나의 유기적(有機的) 단일체(單一體)가 아니라 사적 이익이나 연고에 따라 움직이는 횡적・종적 ‘발칸화(balkanization)’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1960~70년대 신문 헤드라인을 가끔 장식했던 공무원 ‘숙정(肅正)’이 최근에는 거의 사어(死語)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떤 지도자나 정치인도 감히 공무원 ‘군기잡기’에 나서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성공을 이끌었던 지식인 관료사회가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있지나 않는지 나는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찰나주의에 빠진 지식인
 
한국미래학회의 월례발표회 모습. 미래학회는 덕산 이한빈 선생의 주도로 1968년 창립했다.
  5·16 이후 주(駐) 제네바 공사로 임명되는 것을 시작으로 나는 외교관이 되었습니다. 당시 나한테 주어진 공적 임무는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네 나라와 국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고, 그 일이 마무리될 무렵인 1965년에 주 스위스 대사직을 마지막으로 유럽을 떠났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의 처신과 마찬가지로 군사정권에 대한 관련은 최소화하려는 의지의 결과였습니다. 유럽에 살면서 외교관 생활 이상으로 나에게 보람 있었던 일은 한국의 미래를 학문적인 차원에서 보다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미래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귀국한 다음 ‘한국미래학회’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1968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요원하게 느껴졌던 21세기를 내다보면서 대한민국의 미래 청사진을 구상하고 토의하는 학술 모임이었는데, 나는 미래학회가 한국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만드는 데 적잖이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고리타분한 옛날 얘기 아니면 답답한 현실 불평을 주로 했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의 역할 가운데 내가 중시하는 것은 긴 안목으로 세상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개발의 연대(年代)’나 ‘발전의 세기(世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요구되는 지식인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은 미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크게 멀어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나의 분신(分身)과도 같았던 한국미래학회도 활동이나 동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게다가 작금의 사회적 환경은 지식인들을 ‘현재주의’ 내지 ‘찰나주의(刹那主義)’로 몰아가는 경향이 특히 강합니다. 미국의 미디어 이론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이를 ‘현재의 충격(present shock)’이라고 표현했더군요. 미디어의 폭발은 세상의 모든 것을 생중계이자 실시간 그리고 현재진행형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으며, 문제에 대한 대응과 해결 역시 즉각적(卽刻的)이고 반사적(反射的)이 될 수밖에 없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지식인들은 중심을 잡고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의 귀와 입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의 그것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 도대체 지식인들은 왜, 그리고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외교관 생활을 마친 다음 나는 1966년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국미래학회를 만든 것도 사실은 대학교수 시절이었습니다. 또 행정가나 운영자로서 우리나라 대학사회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숭전대 총장, 아주대 학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고 KAIST나 숙명학원의 이사장 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나는 일찍이 교육행정학자 코헨(Cohen) 등이 대학을 ‘조직화된 무정부(organized anarchy)’라고 표현한 것에 동의합니다. 한편으로 대학은 관료제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학은 공동체입니다. 나는 대학의 진정한 힘은 이 양자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때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대학이 ‘논문공장(論文工場)’으로 변질되고 교수가 ‘논문기계(論文機械)’로 전락하는 일이 계속될 경우, 나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점점 더 약화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은 당장 눈에 보이는 평가와 순위에 매몰된 채, 대학의 숨은 기능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학의 잠재력은 제도적 탄력과 관용 및 여유에 있다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물론 대학은 아카데미즘의 산실이자 보루입니다. 세속에 초연하고 시류에 무심한 학자형 지식인을 대학이 품고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순수 아카데미즘의 추구가 지식인 집단의 유일무이한 존재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적 현안을 고심하는 혹은 사회 참여를 중시하는 이른바 ‘공공지식인(公共知識人·public intellectual)’의 가치는 여전히 소중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공공지식인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여류 문필가 오지크(Cynthia Ozick)에 의하면 공공지식인과 ‘사적(私的) 지식인(private intellectual)’은 분명히 다릅니다. 우선 공공지식인은 행동주의(activism)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동의 동기는 사적 이해나 당파적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충성심(loyalty)과 책임감(responsibility)이라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公共지식인의 모습 보기 어려워져
 
지난 9월 4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송월주 이종윤 등 원로들이 검인정 교과서를 국정교과서 체제로 전환시켜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의 법률가이자 법경제학자인 포스너(Richard Posner)가 지적하다시피 ‘공공지식업(公共知識業·public-intellectual work)’은 역사적으로 나름의 시장(市場)과 직업(職業)을 확보해 왔습니다. 공공지식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존재하였고, 그것을 생활의 방편으로 삼는 이가 있어 왔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사실 지식만 갖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공공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지적 수준이 공공지식인의 필수 요건도 아닙니다. 포스너는 재화로서의 공공지식에는 세 가지 특징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정보가 재화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보재(情報財·information goods)’입니다. 둘째, 사회적 공감과 결속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연대재(連帶財·solidarity goods)’입니다. 셋째,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오락재(娛樂財·entertainment goods)’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통해 지식과 대중을 잇는 공공지식인의 역할 덕분에 세상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공공지식인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 원인에 대하여 포스너가 일차적으로 지목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대학입니다. 이제는 지식인의 대부분이 대학에 적(籍)을 두는 시대가 되었고, 대학에서의 지식체계는 당연한 듯 분화와 전문성에 입각해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식의 ‘학문화(academization)’입니다. 대학에 소속된 지식인은 지식의 폭보다는 깊이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며, 대중적 주제나 일반대중 앞에서는 ‘조심스러운 전문가(safe specialist)’로 처신하는 것을 직업적 미덕으로 여깁니다. 세간의 평가나 순위의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을 최다(最多) 보유하고 있는 미국에서 공공지식인의 부활을 희망하는 분위기가 가장 두드러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미국을 제외한 유럽이나 남미 등지에서는 지식인들이 훨씬 더 대중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에서는 저명한 지식인이 미디어 스타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인이 사회현실이나 보통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은 이 시대의 정보화 혁명(information revolution)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집단지능(集團知能·collective intelligence) 내지 협업지성(協業知性) 상황을 맞이하여 누구라도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전문가의 역할을 이제는 일반인들도 쉽게 수행하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대중의 세계로 들어갈 필요와 여지가 크게 줄어들고 있는 겁니다. 물론 정보화 시대에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는 것은 너무 많아졌지만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별로 없다(know too much, understand too little)’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대중을 위한 지식인들의 ‘번역기능(translation function)’이 대단히 절실해졌지만, 대학에 길들여진 오늘날 지식인들은 공공지식인의 역할을 맡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이는 캐나다의 정치가이자 정치학자인 이그나티에프(Michael Ignatieff)의 지적입니다.
 
  이그나티에프에 의하면 요즘 지식인들은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말장난’ 내지 지적 유희만 일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보화 혁명의 여파로 지식의 대중화 및 민주화 시대가 도래한 상황에서 보통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는 것을 오히려 지식인의 특권이자 징표로 생각하는 풍조를 언급한 것입니다. 포스너가 오늘날 대학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던 대목과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그나티에프에 의하면 소위 ‘68 혁명’ 이후 미국 대학을 학문의 ‘체제순응적 기능주의(conformist functionalism)’로부터 해방시켰던 이른바 ‘종신직(終身職) 급진파(急進派)(tenured radicals)’들조차도 네오마르크시즘, 해체주의, 비판이론과 같은 또 다른 학문적 순응주의의 방책(防柵)을 세우고 있을 뿐입니다. 대중과의 소통 부재 내지 소통 거부라는 점에서는 이념적 좌우의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글의 시대’를 대체한 ‘말의 시대’

 
국민에게 권위와 존경을 받는 시민운동가와 시민단체가 없다는 지적이다. 2012년 3월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이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처럼 공공지식인이 줄어드는 일이 완전히 낯선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대학들의 국제적 랭킹이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의 학문화 및 전문화가 심화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나라에서 공공지식인의 활동은 여전히 활발한 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대학교수가 도대체 끼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닐까 합니다. 내가 볼 때 우리나라의 진짜 문제는 공공지식인의 양적인 측면이 아니라 오히려 질적 차원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 정부나 대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공공지식인으로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하나는 언론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운동 영역에서였습니다.
 
  나도 언론 매체를 통해 시사적 현안에 대한 사회적 발언을 수시로 했었던 사람입니다. 옛날 이야기지만 내가 살았던 때는 대체로 ‘글의 시대’였습니다. 그만큼 지식인들이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일반대중을 만나던 대표적 방식은 신문에 칼럼을 쓰거나 월간지에 논설류(類)를 싣는 정도였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신문의 종류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효과나 영향력에 있어서는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에 비해 요새는 단연 ‘말의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나는 지식인들이 ‘말의 시대’에 휩쓸려 사는 모습을 다소 불편하게 여기는 축입니다. 물론 글도 글 나름이고 말도 말 나름이지만 ‘라이브(live) 방송’이나 소셜 네트워크 등에 자주 등장하는 지식인들을 보면 박사입네, 교수입네 하는 이력(履歷)의 가치가 헐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식인의 사회적 발언 창구로서 문자 매체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는 편입니다. 물론 지식인들이 ‘글의 시대’가 아닌 ‘말의 시대’에 재빨리 적응하는 것을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겠습니다. 대학생만이 아니라 대학교수마저 이제는 종이신문을 찾지 않는 시대라니 말입니다. 모쪼록 이런 현상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무교양주의(無敎養主義·philistinism)를 가속화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런저런 공직에서 물러나 있던 무렵, 나는 시민사회의 일원에 나가 본 경험이 있습니다. 대략 1980년대 말과 1990년 대 초의 일이었는데, 이는 우리사회의 민주적 이행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민주화합추진위원회 위원, 자유지성300인회 공동대표,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등이 당시 내가 가졌던 직함이었습니다. 시대정신에 대한 지식인의 동참이 가위 거국적(擧國的)이었던 그 시절, 우리들의 초심은 순수성과 공공성을 자부해도 좋았습니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대표적 공공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얼마 뒤 정치와 권력의 길에 진입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에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시민운동의 종가(宗家)・명가(名家)가 존재하지 않은 듯합니다. 나는 이를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더디게 만드는 대단히 불행한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민주화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정치적 특수(特需) 혹은 출세의 길목을 의미했던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정치적 충원이 주로 법조계나 군부 혹은 관료로부터 이루어졌다면, 민주화는 대학교수가 정치인으로 대거 등용되는 기회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란 곧 선거주의입니다. 그 결과,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에는 정당정치도 아니고 ‘머신정치(machine politics)’도 아닌 소위 ‘캠프정치’가 유행하게 되었고, 교수 출신 지식인이 캠프정치의 주역 가운데 하나로 활동하는 것은 한국정치의 일상적 풍경이 되었습니다. 캠프정치는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지식인들이 권력의 한 조각을 보상받는 정치적 거래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권력이 먼저 자리 잡은 다음 지식이 정책적 차원에서 동참하는 게 아니라, 집권 그 자체를 위해 처음부터 정치와 지식이 동업(同業)하는 경우라는 점에서 캠프정치는 일종의 정치공학적(政治工學的) 발상입니다.
 
 
  캠프정치가 대학 내부에 정치적 갈등 심어
 
지난 2012년 8월 대학교수 52명이 ‘안철수를 지지하는 대학교수 선언’을 하고 있다.
  물론 캠프정치에도 나름의 장점은 있겠습니다. 한 사회의 두뇌집단(brain trust)으로서 지식인 집단의 정치적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선거가 존재하는 한 어떤 나라도 캠프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적어도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는 사회 전반적으로도 폐해가 만만치 않은 데다가 그것의 부정적 영향은 지식인 사회에 특히 치명적인 것 같습니다. 비록 모든 지식인이 캠프정치에 가담하는 것은 아니지만, 캠프정치의 관행은 시나브로 바깥세상의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대립을 대학 내부로 고스란히 전이(轉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스스로의 학문적 권위를 상실한 채 각종 정치적 외풍(外風)과 유혹에 노출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캠프정치와 더불어 오늘날 캠퍼스 안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는 특임교수, 겸임교수, 초빙교수, 객원교수 등이 대학의 지식역량을 강화하면서 지식의 공공성을 제고하는 데 과연 얼마나 이바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보기에 캠프정치를 통한 지식과 권력의 동업 현상은 이른바 진보・좌파 진영에서 더욱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오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다양한 영역에 걸쳐 기득권을 쌓는 일이 여의치 않았던 터라, 교수 출신 지식인 그룹이 진보・좌파 정치세력의 유력한 권력자원(權力資源)으로 급부상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또한 이들은 지식과 권력의 합작(合作)을 통한 진보・좌파 시대의 개막이야말로 민주화의 성취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실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도 나는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지식인으로서 내가 주로 활동했던 시대에는 불행하게도 학문의 자유나 표현의 권리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과거 어두운 시대에 대한 일시적 반작용이 오늘날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에 남긴 총체적 자화상(自畵像)과 성적표입니다. 의도한 결과이든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든, 언제부턴가 한국의 대학가에는 문화혁명과 이념전쟁을 둘러싼 진지(陣地)와 전선(戰線)이 좌・우 간에 깊고 길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나는 공공지식인의 범람과 정치적 과잉이 혹시 현재의 대한민국을 또 다른 의미에서 학문의 자유가 위협받는 나라로 만들고 있지 않는지 걱정스럽습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행여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뿔을 고치려다 소를 잡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우리들은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린 잘못을 하지 않았을까요?
 
  무릇 학문의 자유와 발전은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연과학 영역도 그러하지만 사회과학 분야는 특히 그렇다는 것이 미국의 사회학자 콜린스(Randall Collins)의 주장입니다. 그에 의하면 학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회적’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첫째는 사회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합리화(合理化) 내지 탈주술화(脫呪術化·disenchanted)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을 종교나 미신, 신화 등이 지배한다면 사회‘과학’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지식인들이 그들만의 학문공동체(intellectual community)를 확실히 구축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할 경우, 사회제도로서의 학문을 외부적 간섭이나 억압으로부터 지켜 내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기준에서 볼 때 작금의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우선 학문의 세계에서 우상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도그마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 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 전체가 모종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릇 제대로 지식인 사회라면 모든 것을 자유롭게 묻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자기검열의 사전단계를 거치고 있습니다. 특히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역사학 분야는 학문이 종교적 ‘교리문답(敎理問答·catechism)’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학문이 이처럼 정치적으로 갈라서다 보니 우리나라의 지식인 사회에는 좌우를 뛰어넘는 직업적 동지의식이 취약합니다. 서로 생각이 같은 지식인과 정치인은 동업(同業)까지 해도, 서로 견해가 다른 지식인끼리는 동석(同席)조차 꺼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지식인 공통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형성해 왔던 서구 사회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대목입니다.
 
 
 
미디어 지식인들도 전문가적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확장해야

 
  지식인 사회의 이와 같은 진영적(陣營的) 대립과 경쟁은 비단 대학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자극하면서 무대까지 제공하는 언론계의 양극화는 더욱 더 심각해 보입니다. 내가 활동하던 시대를 회고하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언론자유에는 실로 천지개벽의 느낌이 있습니다. 나름 민주화 시대의 개가이자 보람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언론의 정치적 및 이념적 다양성이 반드시 언론의 공공적 순수성에 전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정치적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캠퍼스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미디어 지식인들도 하루빨리 그들만의 전문가적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확장해야 합니다. 직업적 공생까지 거부하면 결국은 공멸의 길을 함께 맞이할 것입니다.
 
  공공지식인의 최종적인 존재 이유는 다름 아닌 공공성입니다. 이 점에 관련하여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나라가 먼저지, 언제나 그렇지’라고. 혹시 누가 이를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국가주의적(國家主義的) 발상이라고 비난해도 나는 기꺼이 인정합니다.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 만들기’라는 당대의 의무에 충실히 부응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들 앞에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가 산적해 있겠지요. 그것이 무엇이라고 내가 먼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공공지식인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진정성을 갖고 대해야 한다는 말만은 꼭 덧붙이고 싶습니다.
 
  얼마 전 내가 있는 이곳으로 우스갯소리가 하나 들려 왔습니다. 지식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R&D일 텐데 요즘 한국에서는 그 의미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Research and Development’였는데, 요새는 ‘Recommend and Disappear’라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열정이나 책임감, 그리고 진정성 대신, ‘치고 빠지는’ 혹은 ‘아니면 말고’ 식의 지식인이 늘었다는 얘기이지요. 지식인 노릇조차 지금은 놀이삼아, 재미삼아 한다는 뜻이겠는데, 솔직히 부러워해야 하는 건지, 걱정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활동하던 시대에 비해 요즘 지식인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 보인다고 말하면 실례일까요? 무언가 사회적 차원에서의 절실함과 간절함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면 오해일까요? 세계적 수준의 고학력에다가 세련된 문화자본까지 갖춘 요즘 ‘신세대 지식인’을 보면서 조선조 후기의 ‘깍쟁이’ 경화사족(京華士族)을 떠올린다면 이것 또한 결례의 말씀일까요?
 
  이제 다시 여러분 곁을 떠나 본래 내 자리로 돌아가려 합니다. 내가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살아 왔던 길이 반드시 최선이나 모범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수한 것도 많고 후회하는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덕산미래강좌> 최종회에서 공공지식인의 문제를 놓고 토론이 있다고 하여 당사자로서 안부 인사를 겸해 몇 자 소회(所懷)를 편지 형태로 적어 보았습니다. 진행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건강과 미래학회의 발전, 그리고 무궁한 대한민국을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럼 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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