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眞露’는 ‘참못[眞池]’이라는 지명과 이슬이 맺히는 것 같은 ‘술을 빚는 과정’에서 유래
⊙ “100년의 기록은 국내 상장기업 중 9번째, 주류·식음료 기업 중 최초”
⊙ 원래 트레이드 마크는 원숭이… 1954년 부산에서 사업 재개하며 ‘차고 깨끗한 이슬을 받아먹는 長生의 동물’ 두꺼비로 바꿔
⊙ 이북(以北)은 소주, 이남(以南)은 막걸리… 6·25 전쟁 후 피란민 덕에 소주가 한국인의 술로 자리 잡아
⊙ 6·25 전쟁과 피란, 산업화와 민주화 뒤안길에서 겪은 희로애락, 소주로 씻어…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술”
⊙ 진로소주는 1924년 평남 용강 출신 장학엽이 증류식 소주로 시작… 1·4 후퇴 때 피란과 굴지의 종합주류회사로 키워
⊙ ‘독한 소주’의 공식 바꾼 참이슬… 저도화(低度化) 바람 불며 희석식 소주 출고량 반등
⊙ “100년의 기록은 국내 상장기업 중 9번째, 주류·식음료 기업 중 최초”
⊙ 원래 트레이드 마크는 원숭이… 1954년 부산에서 사업 재개하며 ‘차고 깨끗한 이슬을 받아먹는 長生의 동물’ 두꺼비로 바꿔
⊙ 이북(以北)은 소주, 이남(以南)은 막걸리… 6·25 전쟁 후 피란민 덕에 소주가 한국인의 술로 자리 잡아
⊙ 6·25 전쟁과 피란, 산업화와 민주화 뒤안길에서 겪은 희로애락, 소주로 씻어…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술”
⊙ 진로소주는 1924년 평남 용강 출신 장학엽이 증류식 소주로 시작… 1·4 후퇴 때 피란과 굴지의 종합주류회사로 키워
⊙ ‘독한 소주’의 공식 바꾼 참이슬… 저도화(低度化) 바람 불며 희석식 소주 출고량 반등
- 진로소주. 왼쪽 끝이 원숭이표 진로. 오른쪽 끝이 최근 출시된 진로 골드.
한국인의 술, 진로소주가 올해로 100세가 됐다. 하이트맥주 회사(전 조선맥주㈜·1933년 창업)가 지난 2011년 진로를 합병해 만든 하이트진로㈜에서 현재 ‘참이슬’과 ‘진로(眞露)’ 같은 소주를 만들고 있다. 진로소주의 모태는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창립한 진천양조상회(眞泉釀造商會)다.
1924년 이곳에서 진로가 태어났다. 창업주는 평남 용강 출신의 우천(友泉) 장학엽(張學燁·1903~1985년).
원래 이북(以北)은 된 발음의 ‘쐬주’, 이남(以南)은 막걸리였다. 기후와 상관관계도 있겠지만 이북에선 알코올 25도의 톡 쏘는 맛을 즐겼다. 6·25 전쟁통에 전통적 막걸리는 ‘정말 마구 걸러대서’ 형편없이 질(質)이 저하됐고, 피란민이 좋아하던 소주가 한국인의 술맛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장학엽은 1·4 후퇴 때 부산에 정착해 1951년 3월 동업자와 함께 ‘금련(金蓮)’ ‘낙동강’이란 이름으로 소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1954년 상경해 서광주조㈜를 따로 설립하면서 30년 전에 팔던 진로 이름을 가져와 상표 등록을 했다. 이북 진로가 이남 진로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장학엽의 진로소주는 승승장구해 1984년 경기도 이천에 당시 단일 종류의 술로는 세계 최대의 소주공장을 세웠고 89년에는 위스키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94년 ‘카스’ 맥주마저 출시해 종합주류회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때 진로는 노른자위 땅인 서울 강남구 양재동에 진로유통과 서울남부터미널 및 트럭터미널 등 약 3만 평의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유통·건설·방송·식음료·서비스 등 계열사만 24곳(1997년)에 달할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진로그룹의 1996년 매출액이 3조5000억원이었고 2010년 그룹 매출 목표를 38조원으로 잡을 만큼 포부가 장대했다. IMF 직전인 1996년 진로는 9억9000만 병을 판매, 성인 남자 1인당 연간(年間) 60여 병꼴로 마실 만큼 인기를 구가했다. 수십 년간 부동의 소주 판매 1위를 고수해왔다. 일본 시장에서도 전체 소주 브랜드 중 2위에 오를 정도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겪으며 진로그룹은 공중 분해됐고 2000년대 초반 사실상 완전히 해체됐다. 잘나가던 카스는 오비맥주, 소주는 하이트로 분해됐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하이트진로가 고객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장수 기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00년을 이끌어온 수많은 ‘최초’와 ‘1등’ 제품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하이트진로에서 생산하는 제품으로는 참이슬, 진로소주, 과일소주(에이슬 시리즈)를 비롯 테라, 켈리, 필라이트 등이 있다.
프롤로그
경상도가 고향인 기자는 어릴 때는 금복주밖에 몰랐다. 서울로 상경해서야 처음으로 진로를 알았다. 해거름 녘 실비집에서 막찌개 하나로 소주를 서너덧 병씩 축을 내는 직장인들 사이에 끼여 소주잔을 기울였다. 얼굴이 좀 불그레해진 뒤에야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셨지 주종목은 소주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엔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이 대세지만 배가 차거나 배에 가스가 차면 애주가들은 소주로 ‘각 일 병씩(1병씩)’ 마무리하는 술 문화에 익숙하다.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등 소주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술꾼들은 옛 향수를 떠올리며 진로를 찾는다. 진로소주의 상징인 두꺼비에 무슨 한(恨)이 서린 것도 아닌데 두꺼비 앞에서 온갖 시름을 쏟아내고 종국에는 두꺼비와 접신(接神)을 하기도 한다. 두꺼비 진로의 경계는 낮과 밤이 없었다. 낮술이야말로 진정한 술꾼들의 시간이다. 낮술은 ‘뼁끼’칠을 한 듯 얼굴을 불타오르게 만들고 환희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한다.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정현종의 시 ‘낮술’ 일부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서린동 낙지골목은 애주가들에게 추억의 공간이다. 매운 낙지 한 접시에 소주 한 잔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시끌벅적하고 생기에 찬 추억의 기념물이다. 미치게 매운 양념을 희석시키는 데는 소주만 한 게 없다. 그러고 보니 대개의 소주가 ‘희석식’ 소주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뒤안길에서 경험한 세상의 쓴맛, 매운맛을 반드시 소주로 씻어내야 하는 당위론을 한국인들은 일찌감치 체감했다. 이 가운데 진로소주 100년의 저력이 숨어 있다.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언어로 시를 쓴 백석(白石·1912~1996년)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보라.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거나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는 행(行)이 나온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군 태생이다. 쓴 소주 맛에 익숙한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런 시가 나왔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박인환(朴寅煥·1926~1956년)의 시 ‘목마와 숙녀’는 맨 정신으로 몇 번을 읽어봐도 잔뜩 취해서 쓴 시 같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혹은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든지,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술병에 별이 떨어’지거나, 가을 바람소리가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울 정도다. 이 시를 읽으면 박인환이 즐겨 마시던 술이 막걸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혹자는 그가 카바이드술이나 도라지 위스키 같은 악주(惡酒)를 좋아했다지만 그가 가짜 위스키인들 얼마나 마셨겠는가. 분명 소주, 그것도 진로를 좋아했음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토록 도회적(都會的)이면서 ‘쓰디쓴’ 낭만을 무심한 듯 찐하게 노래할 수 있었으리라.
“100년의 비결은 국민과 숱한 희로애락을 함께했기에”
먼저 하이트진로가 이뤄놓은 진로소주 1세기, 100년의 의미를 들어보았다. 하이트진로 마케팅실 오성택 상무와의 일문일답이다. 오 상무는 하이트진로그룹의 마케팅커뮤니케이션 팀을 이끈 뒤, 맥주브랜드 팀장, 마케팅실 총괄 팀장을 거쳐 2017년부터 마케팅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 진로가 올해 창립 100주년이라는 의미 있는 역사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100년의 기록은 대한민국 상장기업 중 9번째이고, 주류기업 중 최초로 달성한 겁니다. 또 식음료 상장기업 중에서는 첫 번째로 100년을 맞이했으니 영광스러운 일이죠.
하이트진로그룹의 100년 역사는 단순히 시간이 흘러 완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과 숱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하며 만들어 온 것이기에 더욱 뜻깊게 생각하고 있어요.”
― 참이슬, 진로가 100년간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광복과 산업화, 민주화, 외환위기, 최근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국민 가까이에서 기쁨과 탄식, 환희와 설움을 나눈 것이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시대의 흐름보다 반걸음 먼저 시장을 바라보고 본연의 맛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 국내 주류 시장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사랑받아온 원동력이라 생각하고요.”
― 100년의 역사 속에서 하이트진로의 명품 술 5가지만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100년 역사 속 5개 브랜드만 딱 꼽기 어렵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 또는 상징성이 있는 제품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약 40여 년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은 ‘크라운맥주’, 대한민국 맥주의 판도를 뒤집은 ‘하이트’, 창립 이래 100년간 이어오고 있는 브랜드 ‘진로’, 소주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참이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대정신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맥주 시장 턴어라운드의 청신호를 연 ‘테라’를 꼽겠습니다.
이 밖에도 최근 증류식 소주 시장의 성장세와 함께 품질 측면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일품진로’도 빼놓을 수 없는 명품 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오늘날의 마케팅 방식과 과거의 마케팅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궁금합니다. 현재를 중심으로 설명해주세요.
“어떤 분야나 비슷하긴 하겠지만 특히나 마케팅 분야에 있어서는 과거의 성공 방식이 현재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최대의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의 성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테라’와 ‘진로’의 성공을 어느 정도 인정받긴 했어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와 소비자 취향에 맞춰 디테일과 완성도를 추구하는 마케팅 활동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중성 앞에서는 겸손함을 잃지 않고 끌로 파는 노력을 하는 것만이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오 상무의 설명을 듣다 보니 소주보다는 맥주에 강세를 두는 듯한 느낌이 왠지 모르게 전해졌다.
하이트맥주가 진로소주를 끌어안았으니 사내(社內) 우선순위로 따지면 소주보다 맥주가 먼저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인이 좋아하는 술은 소주다. 압도적으로 소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주제를 토론하기 위해서는 맥주잔보다는 소주잔을 기울일 사람이 훨씬 많을 듯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2004년 평소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술 종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10년 뒤인 2014년, 5년 뒤인 2019년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15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2004년 5월 조사에서는 술을 마시는 이들의 65%가 좋아하는 술을 소주라고 답했다. 29%가 맥주, 각각 2%가 막걸리와 와인을 꼽았다.
10년 뒤인 2014년 10월 조사에서는 소주가 54%로 다소 줄고 맥주가 35%, 막걸리 7%, 와인 2%로 막걸리에 대한 선호도가 올라갔다. 강산이 변하는 만큼의 시간이 흘렀어도, 소주에 대한 선호도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5년 뒤인 2019년 5월 조사에서는 소주가 다시 61%로 늘어났다. 맥주와 막걸리는 31%와 5%로 감소했다. 와인은 2%로 동일했다. 결론적으로 애주가들은 뭐니뭐니 해도 소주파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세월이 흘러도 소주의 저변이 확대되는 이유는 저도화, 맛의 다양화 영향으로 보인다.
원숭이표 眞露의 탄생
100년 전인 1924년 진로소주가 세상에 등장할 때 인천의 조일(朝日), 부산의 대선(大鮮), 평양의 대평(大平)이 희석식 소주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장학엽은 증류식 소주를 팔면 틀림없이 승산이 있다는 동업자 홍석조, 강기욱의 주장에 처음에는 마음이 복잡했다고 한다. 그러다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증류식 소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있다 해도 평양과 함경도 등지에 밀집해 있었고, 생산량도 미미했고 주질(酒質) 또한 일정치 않아 인기가 없었다.
개인당 500원씩 출자하여 자본금 1500원을 확보한 세 사람은, 평남 용강군 지운면(池雲面) 진지동(眞池洞)에다 합자회사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하고 마침내 진로의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1924년 10월 3일이었다.
예부터 술은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특히 수질(水質)이 좋아야 뛰어난 명주(銘酒)를 빚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진지동은 지형이 섬세하고 수질이 좋아 입지조건이 양호했다고 전한다. 북쪽 강서군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303m의 석천산(石泉山), 서쪽으로 길이 50리에 이르는 인황천(仁皇川), 대동강변에 인접한 동쪽의 원당산(阮堂山) 등은 명주를 빚는 입지조건으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진지동은 평양에서 진남포에 이르는 평남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 또한 편리해 금상첨화였다.
간판을 내건 세 사람은 술의 이름과 상표를 정했다.
특히 술의 이름을 정하는데 여러 가지 안(案)이 나왔으나 결국 ‘진로’로 결정했다. 이 이름을 쓰게 된 데는 그만한 내력이 있었다. 애초에 참못이란 지명을 가진 마을 이름[眞池]에서 진자를 먼저 따기는 했으나 그 이면에는 아울러 참되고 옳으며 거짓이 없다는 ‘진정(眞正)’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露)’자는 술을 빚는 과정을 상징한다. 예부터 소주를 증류할 때 술방울이 이슬처럼 맺힌다는 의미의 ‘노주(露酒)’라는 운치 있는 단어가 있었다.
장학엽은 원숭이를 진로의 트레이드 마크로 택했다. 원숭이는 생김새가 사람과 비슷하고, 사람의 말을 이해하며, 술을 즐기는 기이한 짐승으로, 서북 지방에서는 예부터 복신(福神)으로 추앙받아온 영물이었다. 그리하여 세로로 ‘眞露’라는 붓글씨체 한자를 크게 박고, 양쪽에 원숭이 두 마리를 마주 보게 앉혔으며, 더불어 타원형 벼 이삭으로 감싸안는 도형을 상표로 제작했다. 이 모두를 뭉뚱그리면 쌀로 빚은 소주를 마시면 수복장수(壽福長壽)한다는 뜻이 된다.
진천양조상회 진천공장은 출발 첫해에 700석의 소주를 생산했다. 이듬해 850석, 1926년에는 880석, 1927년에는 900석을 생산, 적어도 생산량만큼은 해마다 증가세를 보였지만 경영 수지 면에서는 만성적인 적자가 누적되었다. 계속되는 동업자끼리의 갈등과 알력, 누적되는 부채로 1927년 11월, 창업 3년 1개월 만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자산을 정리해보니 남아 있는 것은 3만2000원의 부채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즈음 장학엽의 재산을 모두 정리해봐야 1만원 안팎이었고 당시 쌀 1석 값이 33원 안팎이었으니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부채인 셈이었다.
장학엽은 이듬해 1월 새로운 동업자의 도움으로 진천양조상회를 재건, 또다시 진로를 생산했다. 그는 이제 미경험자가 아니었다. 술에 관한 전문 지식이나 거래처에 대한 판매 전략에도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인 양조업자들이 주로 만드는 희석식 소주에 대항하는, 씁쓸하면서도 짜릿한 맛이 나는 증류식 소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자신이 공산당의 숙청 대상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 천신만고 끝에 남하해 피란수도 부산에 자리 잡았다.
부지런한 닭이냐, 多産의 두꺼비냐
장학엽은 부산에서 동화양조, 구포양조에서 동업으로 새로운 소주 사업을 시작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모두 정리하고 식솔과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곤 영등포구 신길동 170-8번지에 서광주조㈜를 설립했다. 1954년 2월이었다. 서광(西光)은 서쪽의 광명이란 뜻으로 평안도 서북 지방 사람들이 피란지에서 겪은 짙은 향수와 자부심이 물씬 배어 있는 단어였다. 소주 제조 면허가 나온 것은 그해 7월이었다.
소주 이름은 30년 전 진천양조상회 때 사용했던 ‘진로’로 다시 결정했다. 부산의 동화양조와 구포양조 시절, 장학엽이 동업자들에게 진로라는 이름을 쓰자고 제안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던 그 이름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그의 집념의 힘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어쩌면 이러한 집념이 오늘의 진로 100년을 있게 한 뿌리일지도 모른다. 그 무렵 서울 일원에서 이름을 날리는 소주 메이커로 명성(明星)이 있었고, 백마(白馬), 백양(白洋), 청로(淸露), 청천(淸泉), 새나라, 보배(寶盃), 보해(寶海), 미성(美星), 옥로(玉露), 제비원 등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중에서 업계의 선두주자인 명성은 하루 판매량이 무려 400상자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제품명을 ‘진로’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소주병 레이블에 그려 넣을 회사의 상징 동물을 놓고는 한참 동안 임원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개중(個中)에는 ‘닭’을 상품의 심벌로 삼자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술 주(酒)자에 닭 유(酉)자가 들어간다는 점에 착안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닭의 부지런함이 끌리기는 했지만 장학엽은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동물사전을 펴놓고 동물들의 특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손길이 머문 곳이 ‘두꺼비’였다. 의젓하고 중후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두꺼비의 모습도 끌렸지만 ‘떡두꺼비 같은 아들만 하나 낳으라’는 덕담도 복스럽게 느껴졌다. 그 순간 손바닥으로 무릎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가 외친 ‘유레카’가 오버랩된다. 두꺼비는 산란기에 7000~3만5000개의 알을 낳을 만큼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게다가 두꺼비는 아침저녁으로 차고 깨끗한 이슬을 받아먹는 장생(長生)의 동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한의 회고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장학엽 창업주의 일가(一家)를 만났다. 그는 한사코 얼굴 내밀기를 꺼려했다. 대신 장학엽의 자서전 《항심(恒心)의 세월(歲月)》(1977)을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시인이자 부흥부 장관과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주요한(朱耀翰·1900~1979년)이 쓴 책 서문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주요한 역시 장학엽과 같은 평안남도[평양] 출신이다.
〈… 대동강 하류의 작은 도시의 공장에서 전국적인 시장을 휩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기술과 성실한 경영 정책의 성과였다고 볼 것이다. 해방을 맞이하여 일본의 경제 세력은 물러갔으나, 뜻밖에 붉은 무리들의 국가 통제 경제와 정치적 박해 밑에서 무수한 고초를 그는 겪어야만 했다. (중략) 나중에는 1950년 공산군의 남침으로 다시 한 번 시설과 판로를 잃고 부산 지역으로 피란했다. (중략) 우천 장학엽이라는 한 사람이 이루어놓은 분투의 역사는 커다란 무엇을 가르쳐주는 바가 있으리라.…〉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진로소주의 상표는 타원형 상단에 JIN-RO라는 영문이 새겨졌고, 역시 타원형 벼 포기로 둘러싸인 가운데 眞露라는 한자(漢字)와 함께 두꺼비가 여유롭게 자리했다.
장학엽의 서광주조는 1966년 12월 23일 상호를 진로주조㈜로 바꿨다. 1975년 진로주조에서 ㈜진로로 상호를 다시 변경했다. 그리고 2011년 하이트맥주와 합병하면서 지금의 하이트진로가 되었다.
순한 소주 ‘참이슬’과 증류식 소주 ‘일품진로’의 등장
진로소주를 이야기하며 ‘참이슬’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98년 국내 소주 시장에 첫선을 보인 참이슬은 소주는 25도라는 상식을 깨며, 독한 소주의 이미지를 ‘부드럽고 깨끗하게’ 바꿔놓았다. 출시 당시 23도 제품으로 출발한 참이슬은 리뉴얼 과정을 통해 현재는 20.1도 참이슬 오리지널과 16도 참이슬 후레쉬로 두 개 브랜드가 국내 소주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진로소주 원년 멤버로 제품 연구소 등지에서 25년 근무 후 지난 2011년 퇴사한 이기호씨는 “출시 당시 대나무 숯 여과 공법을 도입해 잡미와 불순물을 제거하고, 깔끔한 끝맛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회고한다.
“희석식 소주는 주정에 물을 섞어 희석하며 제조합니다. 맛의 차별화는 각사의 여과공법의 차이에서 나는데 참이슬은 대나무 숯을 이용한 여과공법으로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죠.”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참이슬은 품질, 브랜드 파워, 판매량 등에서 소주 시장의 역사를 바꾼 획기적인 제품”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1993년 두산그룹이 경월소주를 인수한 후 이듬해 ‘그린’을 출시하면서 한때 진로의 1위 자리를 위협한 일이 있었어요. 절치부심해서 ‘참이슬’ 출시를 통해 반격에 나설 수 있었고 1위를 고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이슬은 1998년 출시 이후 2023년까지 누적 387억 병이 판매됐어요.”
참이슬 소주병을 누이면 지구 213바퀴를 회전, 달을 12번 왕복할 수 있는 판매량이란다. 우리에게 이렇게 셀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쌓였다는 의미일까. 기쁨을 나누며 기울인 잔이 더 많았으면 한다.
참이슬의 아성에 밀리던 두산은 2006년 ‘처음처럼’을 출시한다. 이후 2009년 롯데가 두산을 인수하며 롯데 처음처럼으로 참이슬을 흔들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지속하지만 참이슬은 여전히 우위를 지키고 있다.
이기호 전 부장은 또 1996년 6월 출시해 9개월간 1억 병을 판매한 ‘참나무통 맑은 소주’에 특별한 애착을 느낀다.
“오크통에서 10년 이상 숙성한 증류식 원액을 희석식 소주에 블렌딩하여 만든 프리미엄급 소주였어요.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단종됐는데 증류 원액 부족이 원인이었죠.”
진로소주는 처음부터 증류식 소주로 명성을 쌓았지만 1965년 정부의 양곡관리법 시행에 따라 희석식 소주로 변신했었다. 그러다 2007년 ‘일품진로’를 만들며 증류식 소주로의 귀환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하이트진로는 1만~200만ℓ 오크 7000t 이상, 목통 원액 약 160만ℓ를 보유하는 등 대규모 목통 저장 계획을 세웠다. 현재 증류식 소주 브랜드는 일품진로를 비롯해 진로1924 헤리티지, 일품진로 오크43, 일품진로 23년산 등 4종으로 구성된다.
하이트진로 마케팅실 관계자는 “2015년에 자몽에이슬 출시를 시작으로, 청포도에이슬, 자두에이슬, 딸기에이슬, 복숭아에이슬 등 다양한 맛으로 해외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三鶴소주 vs 眞露소주
1960년대 희석식 소주의 강자는 삼학(三鶴)소주였다. 삼학은 사카린을 첨가해서인지 몰라도 단맛의 소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진로는 증류식 소주로부터 축적된 쓴맛의 이미지를 살렸기에 쓰다는 대중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4년 12월 8일 박정희 군사정권이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 제조를 불허하는 주세법(酒稅法) 38조를 정부 입법으로 강행 처리했다. 대신 고구마로 만든 주정(酒精)에 물을 타는 ‘희석식 소주’는 허가했다. 1962년 대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해도 ‘증류식 소주’만 만들던 진로로선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진로가 행정소송을 걸었고 다행히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여 주세법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여기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6·25 전쟁을 거치며 쌀이 귀해지자 주정 원료를 밀로 대체했는데 미국의 잉여농산물(밀, 밀가루)이 막걸리와 재래식(증류식) 소주의 주원료로 1950년대를 장식했다. 이후 고구마와 강원도 옥수수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양곡 절약 정책으로 ‘국산 고구마’에 한해 술을 만들게 제한한 것이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주세법 대신 양곡관리법으로 다시 묶는 정책을 발표했다. 순곡소주(純穀燒酎)를 자랑해온 증류식 소주의 선두주자인 진로는 하루아침에 소주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1965년 8월부터 희석식 소주로 전환한 진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67년 상표를 바꾸며 두꺼비 삽화만 남기고 벼 이삭을 지워버렸다. 곡물을 한 알도 넣지 않았던 것이다.
삼학은 원래 정종 메이커였는데 1957년 목포에서 서울 청파동으로 자리를 옮겨 처음에는 주정에 증류식 소주를 섞고 첨가물을 배합해 단맛의 소주를 만들었다. 삼학은 대방동에 희석식 소주공장을 짓고 급속도로 시장점유율을 높여갔다. 진로가 쓴맛을 고수하는 동안 삼학의 단맛은 크게 인기를 끌었다. 반면 초기의 희석식 진로소주는 판매량이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7대 3으로 삼학소주가 우세했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당시 서광주조(진로소주)가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갖가지 기발한 판매 작전을 차례차례 펼쳐나갔다. 그 첫 번째 작전이 ‘밀림의 바’ 작전이었다”고 했다.
“당시 장충공원의 수목 지대를 비롯하여 남산과 후암동 일대의 수목 지대에는 이른바 들병소주 행상이 성행하고 있었어요. 돗자리를 끼고 다니면서 들병소주를 판매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속칭 ‘밀림의 바’라고 불렀죠. 얼핏 보기에는 대단치 않은 것 같아도 ‘밀림의 바’에서 소비되는 소주의 양은 상당한 것이었으며, 그 일에 종사하던 행상의 수도 한때는 600여 명에 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 행상 여인들은 1966년 중반까지만 해도 한결같이 삼학소주만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자 진로소주 판촉원들은 이들이 술병을 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보자기를 제공하는 한편 소주 행상에게 진로를 공급한 후 판촉원들이 다시 진로를 사 마시도록 했다. 계속된 하이트진로 관계자의 말이다.
“행상 여인 600여 명이 모두 ‘손님들이 삼학은 마다하고 진로만 찾는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될 때까지 날마다 진로소주 사 마시기 작전을 전개했죠. 그 결과 ‘밀림의 바’의 600여 명의 행상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로소주의 판촉원이 되어갔어요.”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출혈경쟁 이후
또 다른 아이디어로 왕관(병마개)을 사들이자는 기발한 판촉 전략이 등장했다. 진로소주를 팔고 그 왕관을 한 개에 2원씩 사들이기로 한 것이다. 연간 5000만원의 왕관 회수비를 지출한 결과, 시장 개척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또 병마개와 코르크 사이에 두꺼비 그림을 숨겨놓았다. 이 그림을 찾아 응모한 사람에게 추첨을 통해 경품을 증정했는데 나중에는 금·은·복 두꺼비를 찾아 응모한 사람에게 경품을 지급했다. 출혈경쟁에 가까운 기상천외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기자가 1960년대 후반의 소주업계 동향 자료를 보니 1968년 삼학과 진로를 제외한 군소 업체가 338곳이나 난립했다. 이듬해 69년에 이들 업체가 줄도산해 214곳으로 줄어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삼학과 진로는 죽기 살기로 PR 대전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1970년에 마침내 진로가 16.2%의 시장점유율로 삼학의 16.1%를 앞지르게 되었고 숙명의 라이벌 삼학은 그때부터 점차 퇴조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삼학은 납세필증을 대량 위조하다 검찰에 적발돼 사장 등 10여 명이 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은 《조선일보》 1971년 11월 25일 자 7면 기사 〈납세필증 삼학서 대량 위조〉 중 일부다.
〈…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은 24일 삼학소주 본포인 삼학산업 주식회사가 지난 수년 동안 위조납세필증을 사용, 수억원의 각종 세금을 포탈해왔다는 사실을 포착, 수사에 나서 이날 밤 영등포구 신대방동 522의2 삼학회사에서 위조한 납세필증 30여만 장을 압수했다.
검찰은 동 회사 사장 김상두(63)씨 등 회사 간부 10여 명을 마포구 노고산동 은혜여관에 연행, 긴급 구속 상태로 철야 신문하고 있으며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압수해온 경리 및 판매장부 등 관계 서류를 대조, 탈세액을 뽑고 있다.…〉
검찰조사 결과 삼학은 서울시내 100여 개소의 삼학대리점에서 팔고 있는 소주, 청주 등 주류에 붙어 있는 국가 검인의 납세필증의 70%가량을 위조했다. 심지어 주정 도수 30도도 어겼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물을 더 넣어 맹탕 소주를 만든 셈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양조업계의 지나친 출혈경쟁이 낳은 비극이었다. 매스컴을 통한 무리한 선전 공세, 각종 경품 경쟁이 소주 전쟁으로 촉발됐고 막대한 사채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나 결국 불법행위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진로 역시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자가 비싼 사채라 하더라도 감지덕지였다.
돈을 빌리기 위해 재벌을 찾아갔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는가 하면 전혀 예기치 못한 이에게 돈을 얻기도 했다. 평안도 고향 사람들이 선선히 돈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그 무렵 장학엽은 지프를 구입했다. 돈을 얻으러 다니기 위해서였다. 경향 각지로 돌아다니며 돈을 얻어 나르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지프 바퀴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작은 돈도 얻어다 댔고, 큰 돈도 얻어다 썼다.[《진로그룹 칠십년사》(1994) 참조]
국내 최초의 CM송 ‘진로 파라다이스’
증류식 소주를 생산하던 시절, 진로의 광고 문안은 ‘순곡소주 진로’ ‘마셔도 좋고 깨어서 좋은 주중(酒中)왕자 진로소주’ ‘진미(眞味)의 진로’ ‘소주라 하지 말고 진로라 불러주세요’ ‘소주의 진미는 역시 진로야!’ 등이었다. 진로나 두꺼비를 소주의 대명사로 인식시키는 브랜드 밸류 효과를 가져왔다. 또 희석식 소주를 은근히 견제하는 내용도 담았다.
〈진짜 소주의 맛은? 술맛이 달다고 좋은 소주로 아시면 큰 잘못입니다. 소주의 참맛은 100% 순곡으로 만들어진 진로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애주가 여러분!
소주를 선택하실 때는 병 이면에 첨부된 세무서 검사필증에 유의하시어 증표에 증류식 소주라고 쓴 것만이 재래식 순소주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애주가 여러분의 귀중한 위장(胃腸)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도 증류식 순곡소주 진로를 권하고 싶습니다.〉
진로소주의 광고는 주요 일간지에 게재됐고 광고 크기는 5단이거나 8단통으로 대형에 속했다. 진로의 트레이드 마크인 두꺼비가 배를 쑥 내밀고 앉아 진로 소주병을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1959년 4월 15일에 우리나라 상업 방송국의 개척자인 부산문화방송이 개국되었는데, 진로는 제1호로 상업 광고를 의뢰하고 당시 인기 프로였던 〈직장대항 노래자랑〉 프로그램의 스폰서가 되었다. 그해 1959년 11월 국내 최초로 CM송인 ‘진로 파라다이스’, 속칭 ‘차차차 송’을 만들어 전파 매체에 실었다. 이 CM송은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전국 각지에 널리 알려져 라디오 및 TV의 시청자들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진로 진로 진로 진로/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향기가 코 끝에 풍기면 혀끝이 짜르르하네/ 술술 진로소주 한 잔이 파라다이스/ 가난한 사람들의 보너스/ 진로 한 잔이면 걱정도 없다/ 진로 한 잔 하고 ‘크~’ 하면 진로 파라다이스〉
이 ‘차차차 송’으로 진로는 판매량이 25배가량 늘어나는 대전기를 마련했다고 한다. ‘차차차 송’은 당시 술좌석의 단골 노래 메뉴였으며 군대 훈련소에선 행진곡으로 부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1959년 국내 최초 CM송 ‘진로 파라다이스’로 전 국민에게 즐거움을 선물했고, 월남전 기간에는 국내 최초로 베트남에 맥주를 수출해 파병 군인들을 위로했다”며 “진로의 CM송 개발은 우리나라 광고, 선전활동 분야의 새로운 장을 여는 촉매제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골목마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진로 CM송 소리가 떠들썩하자 교육상 문제가 있다고 해서 가사를 고쳐 부르게 할 정도였다. CM송이 널리 알려지기 전만 해도 진로는 경북 안동에서 나오던 30도짜리 ‘금곡’, 전라도 ‘보해’, 마산 ‘무학’, 부산 ‘대선’에 짓눌려 오금조차 펴지 못했었다.
알코올 도수 낮추기의 비밀
1965년 30도로 출발한 소주 알코올 도수는 1973년 25도로 낮아진 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남원상이 쓴 《우리가 사랑하는 쓰고도 단 술 소주》(2021)에 따르면, 업계 1위였던 진로가 기존 30도 소주의 생산을 중단하고 25도 소주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주정 원료 수입이 억제됨에 따라 알코올 함량을 낮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수가 낮아 ‘물 탄 소주’라는 싸구려 취급을 받더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동시에 소주 가격도 인하했는데, 도수를 낮춰서인지 아니면 가격을 낮춰서인지 어쨌든 부담이 덜어진 것만은 분명해서 당시 판매량이 50%나 뛰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회사들도 속속 25도 소주 생산에 나섰고, 30도 소주는 사라졌다.
그러다 1982년 재래의 쓴 소주맛을 살려 30도의 진로드라이를 출시했다. 25도의 단맛을 줄이고 쓴맛에 접근시킨 드라이 타입이었다. 부드러운 25도와 쓴 30도를 기호에 따라 택할 수 있도록 했다. 보해양조는 1991년 9월부터 35도짜리를 시판하기 시작해 25도와 30도만 있는 소주 시장에서 알코올 도수 차별화를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소주 취향이 이미 순한 맛에 길들어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소주는 25도’라는 공식을 깬 건 1996년 부산 대선주조에서 내놓은 23도짜리 소주 ‘시원(C1)’이다. 시원은 13개월 만에 1억 병이 넘게 팔렸다. 진로가 25도 소주에서 23도로 낮춘 것은 참이슬을 출시할 무렵인 1998년 10월이었다. 참이슬 출시 전에도 23도짜리 순한 진로를 내놓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2001년 2월 참이슬 리뉴얼을 내놓으면서 22도로 낮췄고 3년 뒤 다시 21도가 되었다. 소주의 심리적 하한선인 20도를 깬 것은 2006년 8월이다. 참이슬 프레시 리뉴얼을 출시하며 19.8도로 다시 낮췄다. 이후 해마다 조금씩 낮아져 2021년 3월과 8월에 각각 출시된 진로 리뉴얼과 참이슬 프레시 리뉴얼의 도수는 16.5도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최근 들어 소비자 성향이나 트렌드가 빨리 변해 도수를 조정하는 주기도 빨라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작년 1월 출시한 진로 리뉴얼은 16도. 반면 참이슬 오리지널은 20.1도로 쓴맛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는 20도만 넘어도 독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여파로 홈술족이 늘고 여기다 MZ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들 사이에 저도수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 다양한 소비자의 기호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격과 방어를 끊임없이 반복한 주류 시장 100년 전쟁에 하이트진로는 또 다른 100년 전쟁을 위해 신형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지난 3월 출시한 소주 신제품 ‘진로골드’와 5월 말 출시할 증류주 신제품 ‘일품진로 오크25’로 라인업을 확대, 향후 점유율을 더욱 끌어올릴 계획이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진로골드는 하이트진로의 100년 양조 기술을 바탕으로 완성한 황금비율 레시피로 최상의 ‘부드러운 맛’을 구현해냈다. 과당을 사용하지 않은 ‘제로슈거’ 소주로, 쌀 100% 증류 원액을 첨가해 부드러운 맛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또 일품진로 오크25는 목통 숙성 원액 블렌딩으로 색과 풍미가 다른 프리미엄 소주이며, 국내 최대 규모의 목통숙성실에서 100년 노하우로 관리되는 최고급 원액을 사용했다.
에필로그
진로 100년의 역사 안에는 수많은 사람과 사건이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영화처럼 등장했다. 전쟁이 있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변이 있었으며 사활(死活)을 건 판매전과 기업의 흥망성쇠가 있고 살아남은 자와 끝내 잊힌 자가 있었다.
전쟁 중 피란수도에서 마시던 한 많은 ‘낙동강’ 소주가 있었고 호남선 야간 열차에서 먹던 ‘막소주’가 있었으며 뱃사람이 어선에 싣고 나가는 ‘됫병 소주’도 있었다. 메틸알코올로 만든 소주로 실명자가 생겼다는 이야기, 맥주병에 생쥐가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게 소주 한 잔에 울고 웃으며 그렇게 100년이라는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왔다. 그리고 다시 100년을 시작한다. 미래에도 깊은 시름을 소주로 달랠까. 소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술이 시장을 바꿔놓을까. 소주의 역할을 누가 대신할까. 소주는 환희와 애환이 농축된 우리의 집단기억 속 정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이미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인터뷰
손봉수 전 하이트진로 사장
“머지않아 한국인의 술맛이 세계인의 술맛이 될 터”
손봉수(孫鳳秀) 전 사장은 하이트맥주의 전신인 조선맥주에 1982년 입사해 거의 30년 만에 CEO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2011년 합병한 하이트맥주와 진로의 통합 법인인 하이트진로의 초대 생산총괄 사장, 하이트진로음료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태생이 다른 두 집단을 하나로 엮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손봉수 전 사장은 젊은 시절,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땀을 흘렸고 1994년 발효공학으로 경상국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에 입학한 지 7년 반 만에 얻은 값진 땀의 대가였다. 논문 제목은 〈Xanthomonas sp.EPS-1에 의한 고점도 다당류의 생산 및 이화학적 성질〉. 미생물이 생산하는 고분자 물질인 다당류를 개발하여 식품보조제로 사용하기 위한 균주를 연구한 논문이다.
당시 조선맥주에 박사 학위자가 그를 제외하고 1명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제가 입사할 당시만 해도 경쟁사인 OB맥주의 시장점유율이 70%이고 조선맥주는 30%밖에 안 됐어요. OB맥주는 연구소에 박사 학위자도 많았어요. 제가 발효공학으로 학위를 받으니 임원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손 전 사장은 “석·박사 과정을 다닐 때 회사에 전혀 말하지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회사와 대학 실험실을 오가며 살았다”고 했다.
1993년 하이트맥주가 출시되면서 주류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점유율이 30%에 불과한 회사가 순식간에 1등 회사가 된 것이다. 그는 품질관리팀장을 맡으면서 신제품 출시에서 양산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게 됐다.
“과거 크라운맥주와 하이트맥주는 근본적으로 맛이 달랐어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맥주였죠.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이 좋고 깨끗한 느낌의 맛이 났습니다. 그전에는 먹고 나면 맥주 냄새가 오래 남았는데 그게 품질 관리를 잘못해서 나는 잡냄새거든요.”
하이트맥주는 국내 최초 비열처리 맥주, 온도계 마크, 신선도 유지 시스템, 음용권장기간 표시제 등 다양한 성공 키워드로 시장 변화를 이끌었다. 하이트의 폭발적인 성장에 OB맥주는 1999년 진로의 ‘카스’를 인수한다. 이후 OB맥주는 세계 최대의 맥주 기업인 앤하이저부시(ABI)에 인수되면서 맥주 경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손 전 사장은 증류식 소주로 개발한 ‘일품진로’에 애착이 깊다. 제품 개발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사실 진로는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식 소주로 성장한 회사다.
“2006년 첫 출시 당시 천연 참나무목통(OAK)에서 10년 숙성 과정을 거쳐 수작업으로 빚어낸 술로 선을 보였어요. 그러니까 100% 국내산 순쌀 원료로 발효, 증류한 원액을 10년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시켰는데, 365일 24시간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반지하 창구에서 숙성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최상급 싱글몰트 위스키와 견줄 만큼의 품질을 갖췄다고 자부한다.
“대한민국 소주 명가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일품진로는 쌀로 빚은 술의 진가를 보여주는 제품으로 애착이 많이 갑니다.”
“소주, 맥주 구성원 간에 문화 차이 커”
손봉수 전 사장은 2011년 합병 당시 하이트와 진로 두 구성원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영업노조, 생산노조, 음료노조가 따로 있었고 소주와 맥주 쪽 구성원 간의 문화 차이도 컸어요. 서로 양해시키고 통합시키는 게 참으로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소주, 맥주 전 영업·생산직 직원들을 다 모아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어요.”
― 그 수가 수천 명은 되지 않나요?
“그렇죠. 우리나라의 한가운데가 충북 괴산입니다. 괴산의 공설운동장을 통째로 빌려 직원들을 다 불러 땀을 흘리며 뭉치게 했죠.”
하이트진로는 해외 80여 나라에 참이슬후레쉬, 참이슬오리지널, 진로이즈백, 에이슬시리즈(자몽에이슬, 청포도에이슬, 자두에이슬, 딸기에이슬 등), 일품진로 등을 판매 중이다.
― 향후 하이트진로의 100년을 어떻게 전망하나요?
“저는 미래가 아주 밝다고 생각해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주는 과거엔 진로, 지금은 참이슬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증류주가 참이슬이에요.
한국인의 술이 세계 1위 술입니다. 머지않아 한국인의 술맛이 세계인의 술맛이 될 겁니다.”
참이슬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로, 2001년부터 세계 증류주(Distilled Spirits) 판매량 부문에서 23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장엄하게 보이는 기록 뒤에는 보이지 않는 땀으로 빚어져 담아낸 이슬 방울들의 열정이 있지 않을까.⊙
1924년 이곳에서 진로가 태어났다. 창업주는 평남 용강 출신의 우천(友泉) 장학엽(張學燁·1903~1985년).
원래 이북(以北)은 된 발음의 ‘쐬주’, 이남(以南)은 막걸리였다. 기후와 상관관계도 있겠지만 이북에선 알코올 25도의 톡 쏘는 맛을 즐겼다. 6·25 전쟁통에 전통적 막걸리는 ‘정말 마구 걸러대서’ 형편없이 질(質)이 저하됐고, 피란민이 좋아하던 소주가 한국인의 술맛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장학엽은 1·4 후퇴 때 부산에 정착해 1951년 3월 동업자와 함께 ‘금련(金蓮)’ ‘낙동강’이란 이름으로 소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1954년 상경해 서광주조㈜를 따로 설립하면서 30년 전에 팔던 진로 이름을 가져와 상표 등록을 했다. 이북 진로가 이남 진로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장학엽의 진로소주는 승승장구해 1984년 경기도 이천에 당시 단일 종류의 술로는 세계 최대의 소주공장을 세웠고 89년에는 위스키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94년 ‘카스’ 맥주마저 출시해 종합주류회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때 진로는 노른자위 땅인 서울 강남구 양재동에 진로유통과 서울남부터미널 및 트럭터미널 등 약 3만 평의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유통·건설·방송·식음료·서비스 등 계열사만 24곳(1997년)에 달할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진로그룹의 1996년 매출액이 3조5000억원이었고 2010년 그룹 매출 목표를 38조원으로 잡을 만큼 포부가 장대했다. IMF 직전인 1996년 진로는 9억9000만 병을 판매, 성인 남자 1인당 연간(年間) 60여 병꼴로 마실 만큼 인기를 구가했다. 수십 년간 부동의 소주 판매 1위를 고수해왔다. 일본 시장에서도 전체 소주 브랜드 중 2위에 오를 정도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겪으며 진로그룹은 공중 분해됐고 2000년대 초반 사실상 완전히 해체됐다. 잘나가던 카스는 오비맥주, 소주는 하이트로 분해됐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하이트진로가 고객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장수 기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00년을 이끌어온 수많은 ‘최초’와 ‘1등’ 제품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하이트진로에서 생산하는 제품으로는 참이슬, 진로소주, 과일소주(에이슬 시리즈)를 비롯 테라, 켈리, 필라이트 등이 있다.
프롤로그
![]() |
진로소주의 창업주 우천(友泉) 장학엽(張學燁· 1903~1985년). |
요즘엔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이 대세지만 배가 차거나 배에 가스가 차면 애주가들은 소주로 ‘각 일 병씩(1병씩)’ 마무리하는 술 문화에 익숙하다.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등 소주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술꾼들은 옛 향수를 떠올리며 진로를 찾는다. 진로소주의 상징인 두꺼비에 무슨 한(恨)이 서린 것도 아닌데 두꺼비 앞에서 온갖 시름을 쏟아내고 종국에는 두꺼비와 접신(接神)을 하기도 한다. 두꺼비 진로의 경계는 낮과 밤이 없었다. 낮술이야말로 진정한 술꾼들의 시간이다. 낮술은 ‘뼁끼’칠을 한 듯 얼굴을 불타오르게 만들고 환희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한다.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정현종의 시 ‘낮술’ 일부
![]() |
《조선일보》 1954년 3월 29일자 4면에 실린 ‘소주의 명곡, 진로’ 광고. |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언어로 시를 쓴 백석(白石·1912~1996년)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보라.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거나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는 행(行)이 나온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군 태생이다. 쓴 소주 맛에 익숙한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런 시가 나왔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박인환(朴寅煥·1926~1956년)의 시 ‘목마와 숙녀’는 맨 정신으로 몇 번을 읽어봐도 잔뜩 취해서 쓴 시 같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혹은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든지,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술병에 별이 떨어’지거나, 가을 바람소리가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울 정도다. 이 시를 읽으면 박인환이 즐겨 마시던 술이 막걸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혹자는 그가 카바이드술이나 도라지 위스키 같은 악주(惡酒)를 좋아했다지만 그가 가짜 위스키인들 얼마나 마셨겠는가. 분명 소주, 그것도 진로를 좋아했음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토록 도회적(都會的)이면서 ‘쓰디쓴’ 낭만을 무심한 듯 찐하게 노래할 수 있었으리라.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 소주의 뜻은 ‘불사를 소(燒)’에 ‘술 주(酒)’다. 불로 끓여서 만든 술이란 의미. 즉 누룩으로 빚은 막걸리에서 맑은 부분만 정제한 청주를 불로 끓여서 생기는 증류수를 냉각시킨 것이다. 원재료의 향이 남아 있는 증류식 소주가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 소주다. 희석식 소주는 주정(酒精)에 물과 첨가물(감미료)을 넣어 희석한 술이다. 일반적으로 녹색 병에 담긴 술이다. 쌀, 보리, 고구마, 타피오카와 같은 곡물을 발효해 200번 넘게 증류해 불순물을 모두 제거한 뒤 95도의 주정에 물과 첨가물을 넣어 희석한 술을 일컫는다. 어떤 사람들은 물 탄 술이 술이냐고 꼬집기도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부터 줄곧 90만㎘ 이상을 기록해온 ‘참이슬’ ‘처음처럼’ ‘진로’ 같은 국내 희석식 소주 출고량이 2010년대 중후반부터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라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회식 문화의 변화와 사회적 거리 두기, 주 52시간제 시행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판매량이 줄자 소주 메이커들이 잇따라 순한 소주를 출시했는데 이에 반전이 일어났다. 저도화 바람이 불며 국내 희석식 소주 출고량은 2021년 82만6000㎘까지 줄었다가 2022년 86만2000㎘로 반등했다. |
“100년의 비결은 국민과 숱한 희로애락을 함께했기에”
![]() |
하이트진로 마케팅실 오성택 상무. |
― 진로가 올해 창립 100주년이라는 의미 있는 역사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100년의 기록은 대한민국 상장기업 중 9번째이고, 주류기업 중 최초로 달성한 겁니다. 또 식음료 상장기업 중에서는 첫 번째로 100년을 맞이했으니 영광스러운 일이죠.
하이트진로그룹의 100년 역사는 단순히 시간이 흘러 완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과 숱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하며 만들어 온 것이기에 더욱 뜻깊게 생각하고 있어요.”
― 참이슬, 진로가 100년간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광복과 산업화, 민주화, 외환위기, 최근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국민 가까이에서 기쁨과 탄식, 환희와 설움을 나눈 것이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시대의 흐름보다 반걸음 먼저 시장을 바라보고 본연의 맛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 국내 주류 시장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사랑받아온 원동력이라 생각하고요.”
― 100년의 역사 속에서 하이트진로의 명품 술 5가지만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100년 역사 속 5개 브랜드만 딱 꼽기 어렵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 또는 상징성이 있는 제품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약 40여 년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은 ‘크라운맥주’, 대한민국 맥주의 판도를 뒤집은 ‘하이트’, 창립 이래 100년간 이어오고 있는 브랜드 ‘진로’, 소주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참이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대정신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맥주 시장 턴어라운드의 청신호를 연 ‘테라’를 꼽겠습니다.
이 밖에도 최근 증류식 소주 시장의 성장세와 함께 품질 측면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일품진로’도 빼놓을 수 없는 명품 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오늘날의 마케팅 방식과 과거의 마케팅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궁금합니다. 현재를 중심으로 설명해주세요.
“어떤 분야나 비슷하긴 하겠지만 특히나 마케팅 분야에 있어서는 과거의 성공 방식이 현재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최대의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의 성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테라’와 ‘진로’의 성공을 어느 정도 인정받긴 했어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와 소비자 취향에 맞춰 디테일과 완성도를 추구하는 마케팅 활동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중성 앞에서는 겸손함을 잃지 않고 끌로 파는 노력을 하는 것만이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오 상무의 설명을 듣다 보니 소주보다는 맥주에 강세를 두는 듯한 느낌이 왠지 모르게 전해졌다.
하이트맥주가 진로소주를 끌어안았으니 사내(社內) 우선순위로 따지면 소주보다 맥주가 먼저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인이 좋아하는 술은 소주다. 압도적으로 소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주제를 토론하기 위해서는 맥주잔보다는 소주잔을 기울일 사람이 훨씬 많을 듯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2004년 평소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술 종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10년 뒤인 2014년, 5년 뒤인 2019년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15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2004년 5월 조사에서는 술을 마시는 이들의 65%가 좋아하는 술을 소주라고 답했다. 29%가 맥주, 각각 2%가 막걸리와 와인을 꼽았다.
10년 뒤인 2014년 10월 조사에서는 소주가 54%로 다소 줄고 맥주가 35%, 막걸리 7%, 와인 2%로 막걸리에 대한 선호도가 올라갔다. 강산이 변하는 만큼의 시간이 흘렀어도, 소주에 대한 선호도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5년 뒤인 2019년 5월 조사에서는 소주가 다시 61%로 늘어났다. 맥주와 막걸리는 31%와 5%로 감소했다. 와인은 2%로 동일했다. 결론적으로 애주가들은 뭐니뭐니 해도 소주파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세월이 흘러도 소주의 저변이 확대되는 이유는 저도화, 맛의 다양화 영향으로 보인다.
원숭이표 眞露의 탄생
100년 전인 1924년 진로소주가 세상에 등장할 때 인천의 조일(朝日), 부산의 대선(大鮮), 평양의 대평(大平)이 희석식 소주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장학엽은 증류식 소주를 팔면 틀림없이 승산이 있다는 동업자 홍석조, 강기욱의 주장에 처음에는 마음이 복잡했다고 한다. 그러다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증류식 소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있다 해도 평양과 함경도 등지에 밀집해 있었고, 생산량도 미미했고 주질(酒質) 또한 일정치 않아 인기가 없었다.
개인당 500원씩 출자하여 자본금 1500원을 확보한 세 사람은, 평남 용강군 지운면(池雲面) 진지동(眞池洞)에다 합자회사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하고 마침내 진로의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1924년 10월 3일이었다.
예부터 술은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특히 수질(水質)이 좋아야 뛰어난 명주(銘酒)를 빚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진지동은 지형이 섬세하고 수질이 좋아 입지조건이 양호했다고 전한다. 북쪽 강서군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303m의 석천산(石泉山), 서쪽으로 길이 50리에 이르는 인황천(仁皇川), 대동강변에 인접한 동쪽의 원당산(阮堂山) 등은 명주를 빚는 입지조건으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진지동은 평양에서 진남포에 이르는 평남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 또한 편리해 금상첨화였다.
간판을 내건 세 사람은 술의 이름과 상표를 정했다.
특히 술의 이름을 정하는데 여러 가지 안(案)이 나왔으나 결국 ‘진로’로 결정했다. 이 이름을 쓰게 된 데는 그만한 내력이 있었다. 애초에 참못이란 지명을 가진 마을 이름[眞池]에서 진자를 먼저 따기는 했으나 그 이면에는 아울러 참되고 옳으며 거짓이 없다는 ‘진정(眞正)’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露)’자는 술을 빚는 과정을 상징한다. 예부터 소주를 증류할 때 술방울이 이슬처럼 맺힌다는 의미의 ‘노주(露酒)’라는 운치 있는 단어가 있었다.
장학엽은 원숭이를 진로의 트레이드 마크로 택했다. 원숭이는 생김새가 사람과 비슷하고, 사람의 말을 이해하며, 술을 즐기는 기이한 짐승으로, 서북 지방에서는 예부터 복신(福神)으로 추앙받아온 영물이었다. 그리하여 세로로 ‘眞露’라는 붓글씨체 한자를 크게 박고, 양쪽에 원숭이 두 마리를 마주 보게 앉혔으며, 더불어 타원형 벼 이삭으로 감싸안는 도형을 상표로 제작했다. 이 모두를 뭉뚱그리면 쌀로 빚은 소주를 마시면 수복장수(壽福長壽)한다는 뜻이 된다.
진천양조상회 진천공장은 출발 첫해에 700석의 소주를 생산했다. 이듬해 850석, 1926년에는 880석, 1927년에는 900석을 생산, 적어도 생산량만큼은 해마다 증가세를 보였지만 경영 수지 면에서는 만성적인 적자가 누적되었다. 계속되는 동업자끼리의 갈등과 알력, 누적되는 부채로 1927년 11월, 창업 3년 1개월 만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자산을 정리해보니 남아 있는 것은 3만2000원의 부채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즈음 장학엽의 재산을 모두 정리해봐야 1만원 안팎이었고 당시 쌀 1석 값이 33원 안팎이었으니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부채인 셈이었다.
장학엽은 이듬해 1월 새로운 동업자의 도움으로 진천양조상회를 재건, 또다시 진로를 생산했다. 그는 이제 미경험자가 아니었다. 술에 관한 전문 지식이나 거래처에 대한 판매 전략에도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인 양조업자들이 주로 만드는 희석식 소주에 대항하는, 씁쓸하면서도 짜릿한 맛이 나는 증류식 소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자신이 공산당의 숙청 대상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 천신만고 끝에 남하해 피란수도 부산에 자리 잡았다.
부지런한 닭이냐, 多産의 두꺼비냐
장학엽은 부산에서 동화양조, 구포양조에서 동업으로 새로운 소주 사업을 시작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모두 정리하고 식솔과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곤 영등포구 신길동 170-8번지에 서광주조㈜를 설립했다. 1954년 2월이었다. 서광(西光)은 서쪽의 광명이란 뜻으로 평안도 서북 지방 사람들이 피란지에서 겪은 짙은 향수와 자부심이 물씬 배어 있는 단어였다. 소주 제조 면허가 나온 것은 그해 7월이었다.
소주 이름은 30년 전 진천양조상회 때 사용했던 ‘진로’로 다시 결정했다. 부산의 동화양조와 구포양조 시절, 장학엽이 동업자들에게 진로라는 이름을 쓰자고 제안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던 그 이름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그의 집념의 힘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어쩌면 이러한 집념이 오늘의 진로 100년을 있게 한 뿌리일지도 모른다. 그 무렵 서울 일원에서 이름을 날리는 소주 메이커로 명성(明星)이 있었고, 백마(白馬), 백양(白洋), 청로(淸露), 청천(淸泉), 새나라, 보배(寶盃), 보해(寶海), 미성(美星), 옥로(玉露), 제비원 등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중에서 업계의 선두주자인 명성은 하루 판매량이 무려 400상자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제품명을 ‘진로’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소주병 레이블에 그려 넣을 회사의 상징 동물을 놓고는 한참 동안 임원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개중(個中)에는 ‘닭’을 상품의 심벌로 삼자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술 주(酒)자에 닭 유(酉)자가 들어간다는 점에 착안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닭의 부지런함이 끌리기는 했지만 장학엽은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동물사전을 펴놓고 동물들의 특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손길이 머문 곳이 ‘두꺼비’였다. 의젓하고 중후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두꺼비의 모습도 끌렸지만 ‘떡두꺼비 같은 아들만 하나 낳으라’는 덕담도 복스럽게 느껴졌다. 그 순간 손바닥으로 무릎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가 외친 ‘유레카’가 오버랩된다. 두꺼비는 산란기에 7000~3만5000개의 알을 낳을 만큼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게다가 두꺼비는 아침저녁으로 차고 깨끗한 이슬을 받아먹는 장생(長生)의 동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한의 회고
![]() |
진로 창립 30주년 기념 복금 추첨을 마친 장학엽 사장(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1959년 2월 28일) |
〈… 대동강 하류의 작은 도시의 공장에서 전국적인 시장을 휩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기술과 성실한 경영 정책의 성과였다고 볼 것이다. 해방을 맞이하여 일본의 경제 세력은 물러갔으나, 뜻밖에 붉은 무리들의 국가 통제 경제와 정치적 박해 밑에서 무수한 고초를 그는 겪어야만 했다. (중략) 나중에는 1950년 공산군의 남침으로 다시 한 번 시설과 판로를 잃고 부산 지역으로 피란했다. (중략) 우천 장학엽이라는 한 사람이 이루어놓은 분투의 역사는 커다란 무엇을 가르쳐주는 바가 있으리라.…〉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진로소주의 상표는 타원형 상단에 JIN-RO라는 영문이 새겨졌고, 역시 타원형 벼 포기로 둘러싸인 가운데 眞露라는 한자(漢字)와 함께 두꺼비가 여유롭게 자리했다.
장학엽의 서광주조는 1966년 12월 23일 상호를 진로주조㈜로 바꿨다. 1975년 진로주조에서 ㈜진로로 상호를 다시 변경했다. 그리고 2011년 하이트맥주와 합병하면서 지금의 하이트진로가 되었다.
순한 소주 ‘참이슬’과 증류식 소주 ‘일품진로’의 등장
![]() |
하이트진로가 만든 참이슬 소주들. |
진로소주 원년 멤버로 제품 연구소 등지에서 25년 근무 후 지난 2011년 퇴사한 이기호씨는 “출시 당시 대나무 숯 여과 공법을 도입해 잡미와 불순물을 제거하고, 깔끔한 끝맛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회고한다.
“희석식 소주는 주정에 물을 섞어 희석하며 제조합니다. 맛의 차별화는 각사의 여과공법의 차이에서 나는데 참이슬은 대나무 숯을 이용한 여과공법으로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죠.”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참이슬은 품질, 브랜드 파워, 판매량 등에서 소주 시장의 역사를 바꾼 획기적인 제품”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1993년 두산그룹이 경월소주를 인수한 후 이듬해 ‘그린’을 출시하면서 한때 진로의 1위 자리를 위협한 일이 있었어요. 절치부심해서 ‘참이슬’ 출시를 통해 반격에 나설 수 있었고 1위를 고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이슬은 1998년 출시 이후 2023년까지 누적 387억 병이 판매됐어요.”
참이슬 소주병을 누이면 지구 213바퀴를 회전, 달을 12번 왕복할 수 있는 판매량이란다. 우리에게 이렇게 셀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쌓였다는 의미일까. 기쁨을 나누며 기울인 잔이 더 많았으면 한다.
참이슬의 아성에 밀리던 두산은 2006년 ‘처음처럼’을 출시한다. 이후 2009년 롯데가 두산을 인수하며 롯데 처음처럼으로 참이슬을 흔들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지속하지만 참이슬은 여전히 우위를 지키고 있다.
이기호 전 부장은 또 1996년 6월 출시해 9개월간 1억 병을 판매한 ‘참나무통 맑은 소주’에 특별한 애착을 느낀다.
“오크통에서 10년 이상 숙성한 증류식 원액을 희석식 소주에 블렌딩하여 만든 프리미엄급 소주였어요.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단종됐는데 증류 원액 부족이 원인이었죠.”
진로소주는 처음부터 증류식 소주로 명성을 쌓았지만 1965년 정부의 양곡관리법 시행에 따라 희석식 소주로 변신했었다. 그러다 2007년 ‘일품진로’를 만들며 증류식 소주로의 귀환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하이트진로는 1만~200만ℓ 오크 7000t 이상, 목통 원액 약 160만ℓ를 보유하는 등 대규모 목통 저장 계획을 세웠다. 현재 증류식 소주 브랜드는 일품진로를 비롯해 진로1924 헤리티지, 일품진로 오크43, 일품진로 23년산 등 4종으로 구성된다.
하이트진로 마케팅실 관계자는 “2015년에 자몽에이슬 출시를 시작으로, 청포도에이슬, 자두에이슬, 딸기에이슬, 복숭아에이슬 등 다양한 맛으로 해외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당대 酒豪들의 공간은… 문인들은 대체로 술을 많이 마신다. 위장(胃腸)을 뚫을 기세로 강소주를 들이켠다. 갈 곳 없는 예술인들은 주로 다방이나 단골 술집에 모여 시와 문학을 논하곤 했다. 과거엔 술과 관련된 일화와 기행(奇行)들이 넘쳐났다. 그 시절에는 내남없이 죄다 궁(窮)한 시절이어서 만만하고 속 편한 곳이 단골일 수밖에 없었다. 앉았다 하면 한 사람 앞에 빈 소주병이 서너 개씩 놓이도록 쉴 새 없이 입안에 털어 넣기가 예사였다. 요절한 작가들이 대개 술병을 앓았다. 이상(李箱)이 그랬고 김소월(金素月)이 그랬고 현진건(玄鎭健)·김유정(金裕貞)·최서해(崔曙海)가 그랬다. 이들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주호(酒豪)들이었다. 마음껏 즐겨 “부어라 마셔라”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다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염상섭[廉想燮·아호가 ‘옆으로 걷는다’는 뜻의 횡보(橫步)였다.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비뚤고 바르지 않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변영로(卞榮魯), 이효석(李孝石), 조지훈(趙芝薰), 박목월(朴木月) 등은 이른바 서울 종로통의 대폿집파였다. 옛 종로예식장 뒷골목에 위치한 안국동파 술꾼들로는 정지용(鄭芝溶), 오장환(吳章煥), 임화(林和), 서정주(徐廷柱) 등이 있었다. 1970년대 청진동에는 월간(月刊) 한국문학사와 세대사, 계간 창작과비평사와 문학과지성사, 그리고 소설가 천승세(千勝世)가 돈을 댄 일석기원(一石棋院) 등이 속칭 빈대떡 골목과 해장국 골목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관철동으로 내 집 장만을 해 가기 전까지 민음사가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동네였다. 싸구려 술집이 고만고만하게 이어진 그곳에 예술쟁이들이 몰려들었다. 고은(高恩), 이문구(李文求), 김주영(金周榮), 박상륭(朴常隆), 손춘익(孫春翼), 송기숙(宋基淑), 이호철(李浩哲) 등이 그 시절의 주역들이었다. 지난 2009년 서울역사박물관이 너덜너덜해진 하드 커버에 깨알 같은 글씨로 외상값이 적힌 ‘사직골 대머리집’ 외상장부 세 권을 공개한 일이 있다. 기자는 그해 《월간조선》 9월호에 〈가난한 인텔리·예술인의 고향, 사직동 대머리집〉이란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정식 옥호는 명월옥(明月屋). 하지만 1960~70년대 대머리집이라 부르며 당대 기자와 문인, 예술인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 무렵만 해도 생활이 옹색하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탓에 주객(酒客)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집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조선일보》와 《서울신문》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했던 신동한(申東漢)씨의 회상이다. “한 가지 특색은 대부분이 외상 술꾼이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거나 원로의 자리에 있는 언론인이나 문인치고 이 집 외상장부에 이름이 안 오른 주객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대머리집 현관이 미닫이였는지 여닫이였는지는 증언이 엇갈린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풍광은 이러했다. 방송작가 박서림(朴西林)씨의 얘기다. “길에서 한 계단 정도 내려가는 어둑한 홀에 널빤지로 상처럼 높직하게 만든 술청이 몇 줄 놓여 있고 의자는 드문드문, 서서 마시는 경우가 많았지요. 처음에는 안주값을 받지 않고 술값만 받았어요.” 1964년 동아방송 성우 2기로 데뷔한 연극인 조명남(趙明男)씨는 “일주일에 닷새는 대머리집에 들렀다”고 말할 정도로 한때 주당이었다. “퇴근하다 문을 열고 빠끔히 쳐다보면 반드시 아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고추전, 호박전, 노가리 구운 것, 계란찜, 두부부침도 맛있었어요. 가난한 연극쟁이들의 열정을 발산하는 곳이었다고 할까요? 술 다 먹고 갈 때마다 완전히 취하곤 했는데 외상장부를 굳이 확인 안 해도 믿었어요. 또 통금시각이 임박하면 택시비까지 받아 외상장부에 올리기도 했어요.”[《월간조선》 2009년 9월호, 이문구의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1994) 참조] |
三鶴소주 vs 眞露소주
![]() |
1980년대 서울 신길동에 위치한 진로 본사의 모습이다. |
이런 상황에서 1964년 12월 8일 박정희 군사정권이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 제조를 불허하는 주세법(酒稅法) 38조를 정부 입법으로 강행 처리했다. 대신 고구마로 만든 주정(酒精)에 물을 타는 ‘희석식 소주’는 허가했다. 1962년 대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해도 ‘증류식 소주’만 만들던 진로로선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진로가 행정소송을 걸었고 다행히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여 주세법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여기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6·25 전쟁을 거치며 쌀이 귀해지자 주정 원료를 밀로 대체했는데 미국의 잉여농산물(밀, 밀가루)이 막걸리와 재래식(증류식) 소주의 주원료로 1950년대를 장식했다. 이후 고구마와 강원도 옥수수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양곡 절약 정책으로 ‘국산 고구마’에 한해 술을 만들게 제한한 것이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주세법 대신 양곡관리법으로 다시 묶는 정책을 발표했다. 순곡소주(純穀燒酎)를 자랑해온 증류식 소주의 선두주자인 진로는 하루아침에 소주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1965년 8월부터 희석식 소주로 전환한 진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67년 상표를 바꾸며 두꺼비 삽화만 남기고 벼 이삭을 지워버렸다. 곡물을 한 알도 넣지 않았던 것이다.
삼학은 원래 정종 메이커였는데 1957년 목포에서 서울 청파동으로 자리를 옮겨 처음에는 주정에 증류식 소주를 섞고 첨가물을 배합해 단맛의 소주를 만들었다. 삼학은 대방동에 희석식 소주공장을 짓고 급속도로 시장점유율을 높여갔다. 진로가 쓴맛을 고수하는 동안 삼학의 단맛은 크게 인기를 끌었다. 반면 초기의 희석식 진로소주는 판매량이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7대 3으로 삼학소주가 우세했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당시 서광주조(진로소주)가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갖가지 기발한 판매 작전을 차례차례 펼쳐나갔다. 그 첫 번째 작전이 ‘밀림의 바’ 작전이었다”고 했다.
“당시 장충공원의 수목 지대를 비롯하여 남산과 후암동 일대의 수목 지대에는 이른바 들병소주 행상이 성행하고 있었어요. 돗자리를 끼고 다니면서 들병소주를 판매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속칭 ‘밀림의 바’라고 불렀죠. 얼핏 보기에는 대단치 않은 것 같아도 ‘밀림의 바’에서 소비되는 소주의 양은 상당한 것이었으며, 그 일에 종사하던 행상의 수도 한때는 600여 명에 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 행상 여인들은 1966년 중반까지만 해도 한결같이 삼학소주만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자 진로소주 판촉원들은 이들이 술병을 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보자기를 제공하는 한편 소주 행상에게 진로를 공급한 후 판촉원들이 다시 진로를 사 마시도록 했다. 계속된 하이트진로 관계자의 말이다.
“행상 여인 600여 명이 모두 ‘손님들이 삼학은 마다하고 진로만 찾는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될 때까지 날마다 진로소주 사 마시기 작전을 전개했죠. 그 결과 ‘밀림의 바’의 600여 명의 행상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로소주의 판촉원이 되어갔어요.”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출혈경쟁 이후
![]() |
《조선일보》 1971년 11월 25일 자 7면 〈납세필증 삼학서 대량 위조〉 기사다. |
기자가 1960년대 후반의 소주업계 동향 자료를 보니 1968년 삼학과 진로를 제외한 군소 업체가 338곳이나 난립했다. 이듬해 69년에 이들 업체가 줄도산해 214곳으로 줄어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삼학과 진로는 죽기 살기로 PR 대전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1970년에 마침내 진로가 16.2%의 시장점유율로 삼학의 16.1%를 앞지르게 되었고 숙명의 라이벌 삼학은 그때부터 점차 퇴조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삼학은 납세필증을 대량 위조하다 검찰에 적발돼 사장 등 10여 명이 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은 《조선일보》 1971년 11월 25일 자 7면 기사 〈납세필증 삼학서 대량 위조〉 중 일부다.
〈…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은 24일 삼학소주 본포인 삼학산업 주식회사가 지난 수년 동안 위조납세필증을 사용, 수억원의 각종 세금을 포탈해왔다는 사실을 포착, 수사에 나서 이날 밤 영등포구 신대방동 522의2 삼학회사에서 위조한 납세필증 30여만 장을 압수했다.
검찰은 동 회사 사장 김상두(63)씨 등 회사 간부 10여 명을 마포구 노고산동 은혜여관에 연행, 긴급 구속 상태로 철야 신문하고 있으며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압수해온 경리 및 판매장부 등 관계 서류를 대조, 탈세액을 뽑고 있다.…〉
검찰조사 결과 삼학은 서울시내 100여 개소의 삼학대리점에서 팔고 있는 소주, 청주 등 주류에 붙어 있는 국가 검인의 납세필증의 70%가량을 위조했다. 심지어 주정 도수 30도도 어겼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물을 더 넣어 맹탕 소주를 만든 셈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양조업계의 지나친 출혈경쟁이 낳은 비극이었다. 매스컴을 통한 무리한 선전 공세, 각종 경품 경쟁이 소주 전쟁으로 촉발됐고 막대한 사채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나 결국 불법행위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진로 역시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자가 비싼 사채라 하더라도 감지덕지였다.
돈을 빌리기 위해 재벌을 찾아갔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는가 하면 전혀 예기치 못한 이에게 돈을 얻기도 했다. 평안도 고향 사람들이 선선히 돈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그 무렵 장학엽은 지프를 구입했다. 돈을 얻으러 다니기 위해서였다. 경향 각지로 돌아다니며 돈을 얻어 나르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지프 바퀴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작은 돈도 얻어다 댔고, 큰 돈도 얻어다 썼다.[《진로그룹 칠십년사》(1994) 참조]
국내 최초의 CM송 ‘진로 파라다이스’
![]() |
하이트진로가 만든 맥주들. 왼쪽 끝이 크라운 맥주이고 오른쪽 끝이 테라다. |
〈진짜 소주의 맛은? 술맛이 달다고 좋은 소주로 아시면 큰 잘못입니다. 소주의 참맛은 100% 순곡으로 만들어진 진로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애주가 여러분!
소주를 선택하실 때는 병 이면에 첨부된 세무서 검사필증에 유의하시어 증표에 증류식 소주라고 쓴 것만이 재래식 순소주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애주가 여러분의 귀중한 위장(胃腸)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도 증류식 순곡소주 진로를 권하고 싶습니다.〉
진로소주의 광고는 주요 일간지에 게재됐고 광고 크기는 5단이거나 8단통으로 대형에 속했다. 진로의 트레이드 마크인 두꺼비가 배를 쑥 내밀고 앉아 진로 소주병을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1959년 4월 15일에 우리나라 상업 방송국의 개척자인 부산문화방송이 개국되었는데, 진로는 제1호로 상업 광고를 의뢰하고 당시 인기 프로였던 〈직장대항 노래자랑〉 프로그램의 스폰서가 되었다. 그해 1959년 11월 국내 최초로 CM송인 ‘진로 파라다이스’, 속칭 ‘차차차 송’을 만들어 전파 매체에 실었다. 이 CM송은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전국 각지에 널리 알려져 라디오 및 TV의 시청자들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진로 진로 진로 진로/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향기가 코 끝에 풍기면 혀끝이 짜르르하네/ 술술 진로소주 한 잔이 파라다이스/ 가난한 사람들의 보너스/ 진로 한 잔이면 걱정도 없다/ 진로 한 잔 하고 ‘크~’ 하면 진로 파라다이스〉
이 ‘차차차 송’으로 진로는 판매량이 25배가량 늘어나는 대전기를 마련했다고 한다. ‘차차차 송’은 당시 술좌석의 단골 노래 메뉴였으며 군대 훈련소에선 행진곡으로 부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1959년 국내 최초 CM송 ‘진로 파라다이스’로 전 국민에게 즐거움을 선물했고, 월남전 기간에는 국내 최초로 베트남에 맥주를 수출해 파병 군인들을 위로했다”며 “진로의 CM송 개발은 우리나라 광고, 선전활동 분야의 새로운 장을 여는 촉매제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골목마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진로 CM송 소리가 떠들썩하자 교육상 문제가 있다고 해서 가사를 고쳐 부르게 할 정도였다. CM송이 널리 알려지기 전만 해도 진로는 경북 안동에서 나오던 30도짜리 ‘금곡’, 전라도 ‘보해’, 마산 ‘무학’, 부산 ‘대선’에 짓눌려 오금조차 펴지 못했었다.
알코올 도수 낮추기의 비밀
![]() |
1930년대 조선맥주 본사와 2024년 하이트진로 서울 청담동 본사 전경이다. |
동시에 소주 가격도 인하했는데, 도수를 낮춰서인지 아니면 가격을 낮춰서인지 어쨌든 부담이 덜어진 것만은 분명해서 당시 판매량이 50%나 뛰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회사들도 속속 25도 소주 생산에 나섰고, 30도 소주는 사라졌다.
그러다 1982년 재래의 쓴 소주맛을 살려 30도의 진로드라이를 출시했다. 25도의 단맛을 줄이고 쓴맛에 접근시킨 드라이 타입이었다. 부드러운 25도와 쓴 30도를 기호에 따라 택할 수 있도록 했다. 보해양조는 1991년 9월부터 35도짜리를 시판하기 시작해 25도와 30도만 있는 소주 시장에서 알코올 도수 차별화를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소주 취향이 이미 순한 맛에 길들어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소주는 25도’라는 공식을 깬 건 1996년 부산 대선주조에서 내놓은 23도짜리 소주 ‘시원(C1)’이다. 시원은 13개월 만에 1억 병이 넘게 팔렸다. 진로가 25도 소주에서 23도로 낮춘 것은 참이슬을 출시할 무렵인 1998년 10월이었다. 참이슬 출시 전에도 23도짜리 순한 진로를 내놓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2001년 2월 참이슬 리뉴얼을 내놓으면서 22도로 낮췄고 3년 뒤 다시 21도가 되었다. 소주의 심리적 하한선인 20도를 깬 것은 2006년 8월이다. 참이슬 프레시 리뉴얼을 출시하며 19.8도로 다시 낮췄다. 이후 해마다 조금씩 낮아져 2021년 3월과 8월에 각각 출시된 진로 리뉴얼과 참이슬 프레시 리뉴얼의 도수는 16.5도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최근 들어 소비자 성향이나 트렌드가 빨리 변해 도수를 조정하는 주기도 빨라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작년 1월 출시한 진로 리뉴얼은 16도. 반면 참이슬 오리지널은 20.1도로 쓴맛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는 20도만 넘어도 독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여파로 홈술족이 늘고 여기다 MZ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들 사이에 저도수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 다양한 소비자의 기호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격과 방어를 끊임없이 반복한 주류 시장 100년 전쟁에 하이트진로는 또 다른 100년 전쟁을 위해 신형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지난 3월 출시한 소주 신제품 ‘진로골드’와 5월 말 출시할 증류주 신제품 ‘일품진로 오크25’로 라인업을 확대, 향후 점유율을 더욱 끌어올릴 계획이다.
하이트진로 홍보실 관계자는 “진로골드는 하이트진로의 100년 양조 기술을 바탕으로 완성한 황금비율 레시피로 최상의 ‘부드러운 맛’을 구현해냈다. 과당을 사용하지 않은 ‘제로슈거’ 소주로, 쌀 100% 증류 원액을 첨가해 부드러운 맛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또 일품진로 오크25는 목통 숙성 원액 블렌딩으로 색과 풍미가 다른 프리미엄 소주이며, 국내 최대 규모의 목통숙성실에서 100년 노하우로 관리되는 최고급 원액을 사용했다.
에필로그
진로 100년의 역사 안에는 수많은 사람과 사건이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영화처럼 등장했다. 전쟁이 있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변이 있었으며 사활(死活)을 건 판매전과 기업의 흥망성쇠가 있고 살아남은 자와 끝내 잊힌 자가 있었다.
전쟁 중 피란수도에서 마시던 한 많은 ‘낙동강’ 소주가 있었고 호남선 야간 열차에서 먹던 ‘막소주’가 있었으며 뱃사람이 어선에 싣고 나가는 ‘됫병 소주’도 있었다. 메틸알코올로 만든 소주로 실명자가 생겼다는 이야기, 맥주병에 생쥐가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게 소주 한 잔에 울고 웃으며 그렇게 100년이라는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왔다. 그리고 다시 100년을 시작한다. 미래에도 깊은 시름을 소주로 달랠까. 소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술이 시장을 바꿔놓을까. 소주의 역할을 누가 대신할까. 소주는 환희와 애환이 농축된 우리의 집단기억 속 정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이미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인터뷰
손봉수 전 하이트진로 사장
“머지않아 한국인의 술맛이 세계인의 술맛이 될 터”
![]() |
손봉수 하이트진로 전 사장. 초대 생산총괄 사장을 지냈다. |
손봉수 전 사장은 젊은 시절,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땀을 흘렸고 1994년 발효공학으로 경상국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에 입학한 지 7년 반 만에 얻은 값진 땀의 대가였다. 논문 제목은 〈Xanthomonas sp.EPS-1에 의한 고점도 다당류의 생산 및 이화학적 성질〉. 미생물이 생산하는 고분자 물질인 다당류를 개발하여 식품보조제로 사용하기 위한 균주를 연구한 논문이다.
당시 조선맥주에 박사 학위자가 그를 제외하고 1명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제가 입사할 당시만 해도 경쟁사인 OB맥주의 시장점유율이 70%이고 조선맥주는 30%밖에 안 됐어요. OB맥주는 연구소에 박사 학위자도 많았어요. 제가 발효공학으로 학위를 받으니 임원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손 전 사장은 “석·박사 과정을 다닐 때 회사에 전혀 말하지 않았다. 낮이나 밤이나 회사와 대학 실험실을 오가며 살았다”고 했다.
1993년 하이트맥주가 출시되면서 주류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점유율이 30%에 불과한 회사가 순식간에 1등 회사가 된 것이다. 그는 품질관리팀장을 맡으면서 신제품 출시에서 양산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게 됐다.
“과거 크라운맥주와 하이트맥주는 근본적으로 맛이 달랐어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맥주였죠.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이 좋고 깨끗한 느낌의 맛이 났습니다. 그전에는 먹고 나면 맥주 냄새가 오래 남았는데 그게 품질 관리를 잘못해서 나는 잡냄새거든요.”
하이트맥주는 국내 최초 비열처리 맥주, 온도계 마크, 신선도 유지 시스템, 음용권장기간 표시제 등 다양한 성공 키워드로 시장 변화를 이끌었다. 하이트의 폭발적인 성장에 OB맥주는 1999년 진로의 ‘카스’를 인수한다. 이후 OB맥주는 세계 최대의 맥주 기업인 앤하이저부시(ABI)에 인수되면서 맥주 경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손 전 사장은 증류식 소주로 개발한 ‘일품진로’에 애착이 깊다. 제품 개발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사실 진로는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식 소주로 성장한 회사다.
“2006년 첫 출시 당시 천연 참나무목통(OAK)에서 10년 숙성 과정을 거쳐 수작업으로 빚어낸 술로 선을 보였어요. 그러니까 100% 국내산 순쌀 원료로 발효, 증류한 원액을 10년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시켰는데, 365일 24시간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반지하 창구에서 숙성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최상급 싱글몰트 위스키와 견줄 만큼의 품질을 갖췄다고 자부한다.
“대한민국 소주 명가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일품진로는 쌀로 빚은 술의 진가를 보여주는 제품으로 애착이 많이 갑니다.”
“소주, 맥주 구성원 간에 문화 차이 커”
손봉수 전 사장은 2011년 합병 당시 하이트와 진로 두 구성원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영업노조, 생산노조, 음료노조가 따로 있었고 소주와 맥주 쪽 구성원 간의 문화 차이도 컸어요. 서로 양해시키고 통합시키는 게 참으로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소주, 맥주 전 영업·생산직 직원들을 다 모아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어요.”
― 그 수가 수천 명은 되지 않나요?
“그렇죠. 우리나라의 한가운데가 충북 괴산입니다. 괴산의 공설운동장을 통째로 빌려 직원들을 다 불러 땀을 흘리며 뭉치게 했죠.”
하이트진로는 해외 80여 나라에 참이슬후레쉬, 참이슬오리지널, 진로이즈백, 에이슬시리즈(자몽에이슬, 청포도에이슬, 자두에이슬, 딸기에이슬 등), 일품진로 등을 판매 중이다.
― 향후 하이트진로의 100년을 어떻게 전망하나요?
“저는 미래가 아주 밝다고 생각해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주는 과거엔 진로, 지금은 참이슬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증류주가 참이슬이에요.
한국인의 술이 세계 1위 술입니다. 머지않아 한국인의 술맛이 세계인의 술맛이 될 겁니다.”
참이슬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로, 2001년부터 세계 증류주(Distilled Spirits) 판매량 부문에서 23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장엄하게 보이는 기록 뒤에는 보이지 않는 땀으로 빚어져 담아낸 이슬 방울들의 열정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