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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代行의 代行’으로 대한민국 운명 짊어진 최상목 부총리

“최상목이 권한대행 맡은 것은 정말이지 불행 중 다행!”(강만수 전 장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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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일을 맡겨도 한 번도 ‘노(No)’라고 하지 않아”(강만수)
⊙ “여야의 엄청난 압박 속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사람”
⊙ “보통 경제 관료들이 세제실이나 금융정책실 등의 경력을 쌓는데 최 대행은 특이하게도 경제 정책의 길 걸어”(김광림 전 의원)
⊙ “보수와 진보 정부를 떠나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책 펴”
⊙ 박세일 교수의 영향으로 司試 대신 行試 선택… 경제 관료의 길 걸어
⊙ “술을 못 먹어요. 거의 못 해요. 술 먹고 호탕한 성격이 아닙니다. 그게 단점”

崔相穆
1963년생. 서울대 법학과, 同 대학원 행정학과 졸업, 미국 코넬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29회,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 기획재정부 장관 정책보좌관, 기재부 경제정책국장, 기획재정부 차관, 농협대 총장, 대통령실 경제수석, 現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2024년 12월 27일 오후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며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최상목(崔相穆)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현재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백척간두(百尺竿頭)’ 대한민국 운명(運命)을 짊어지고 있다. 야당이 윤석열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에 협조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아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인 최 권한대행을 점점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최상목이, 최 대행이 누구냐고. 포털 사이트에 ‘최상목’을 치면 관련 검색어로 ‘부총리’ ‘권한대행’ 외에 ‘탄핵’ ‘고향’ ‘사의(辭意)’ ‘가족’ 등이 함께 등장한다.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국정(國政) 운영을 테크노크라트가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안도하는 사람들도 많다. 서슬 퍼런 5공화국 당시 “전두환이 테크노크라트를 대거 기용해 국정이 정상적으로 굴러갔던” 시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보수·진보를 떠나 “왠지 최상목 얼굴만 봐도 이재명(더불어민주당 대표)보다 잘할 것 같다”고 말한다. 전직 기획재정부 차관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도 정통 관료 출신이니 ‘저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탄핵 문제를 처리하나’ 이런 생각을 해보잖아요.”
 
  ― 어떻게 보세요.
 
  “가장 잘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여야의 엄청난 압박 속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사람이란 게 이분 평소 인품에서 느끼는 점입니다.”
 
 
  “원만한 관료가 무능한 관료보다 더 문제”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
  정치적 갈등이 극심하고 이념의 부침(浮沈)이 심한 우리 사회에서 공직자가 올바르게 처신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나라에서도 쉽지 않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변수(變數)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공직사회에 “발이 넓고 타협을 잘하는” 관료는 부지기수다. 무사한 관료는 한 것도 없고 그래서 욕 들을 일도 없다. 강만수(姜萬洙)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무능한 관료는 때로 실수를 하지만 가르치면 잘할 수 있습니다. 일을 피하는 원만한 관료가 무능한 관료보다 더 문제입니다. 실무진이 보고하는 것을 처리하며 실무자에게 끌려다니는 장관은 그가 장관이 아니라 실무자가 장관이죠. 최고 관료인 장관은 단호하게 일하고 결과로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 공직 경험에서 나온 공직자의 도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최상목 경제부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은 것은 정말이지 불행 중 다행입니다!”
 
  강만수 전 장관은 “역사는 용기를 갖고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 쓰인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패기 없는 관료는 비판받을 일도 없지만 평가받을 일도 없다.
 
  “국민은 소신을 갖고 일하며 결과로 말하는 관료를 원합니다. 대중은 비판에도 동참하지만 결과에도 동참합니다. 비판을 받고 물러난 관료는 나중에 평가를 남깁니다. 일하면 비판받습니다. 이것이 공직자의 숙명입니다. 일 잘하는 최 대행이 어떻게든 대한민국을 정상화시키리라 믿고 응원합니다.”
 
  이상배(李相培) 전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서울시장·총무처 장관 역임)은 이렇게 말한다.
 
  “일하다 보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사람은 그릇을 깨기도 합니다. 안방에 앉아 자기 몸단장이나 하는 사람은 그릇을 깨는 일이 없습니다. 그릇을 깼다고 해서 질책을 하거나 밉게 보면 다음에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할 사람이 없게 됩니다. 최상목 권한대행이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그분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행정도 기술입니다. 전문 관료를 테크노크라트라고 부르는 이유죠. 아무에게나 맡겨서는 안 됩니다. 특히 공직은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 맡아야 하고, 엄격한 채용 과정과 고도의 교육, 훈련을 받은 품성 바른 인재가 어우러져야 합니다.
 
  (최 권한대행은) 정부라는 큰 엔진의 구성요소로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제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할 사람이라 확신합니다.”
 
  톱니바퀴의 원리는 ‘맞물림’ ‘기계적인 힘의 전달’ ‘회전축을 중심으로 물체를 돌리려는 힘 조절’ 그리고 ‘방향 전환’과 같은 기술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행정의 원리도 공공기관과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며, 정책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을 조정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정부 행정 역시 톱니바퀴처럼 긴밀하게 연계되어, 각 부문이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조부는 ‘평소 알뜰하고 이웃을 아꼈던 사람’
 
대통령실 경제수석 시절의 최상목. 2023년 3월 14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 중회의실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 모습이다. 사진 가운데 발언하는 이가 추경호 경제부총리. 사진=조선DB
  최상목 권한대행은 서울 출신이다. 그의 선대 고향은 경북 봉화다. 조부가 봉화군 상운면에 위치한 반송교회의 장로를 지냈다고 전한다. 최 대행의 공직자 재산 신고서에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 반송마을 임야 3곳이 올라 있다. 해주 최씨의 선산이다.
 
  1월 10일 자 《영주시민신문》에 실린 배용호(裵龍湖) 전 영주교육장의 글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마을 안쪽 양지바른 산 아래 고즈넉한 반송교회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최상목의 조부가 이곳에서 장로로 활약했던 교회이다. 최 장로의 흔적으로는 최 대행이 재산 등록한 진등골 마루에 깔끔하게 자리 잡은 묘소와 진등골 뽕밭에 최 장로가 지었다는 잠실(蠶室)이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 장로는 평소 알뜰하고 이웃을 아꼈던 사람으로 전해오고 있다.〉
 
  반송마을은 약 300여 년 전 풍산 류씨가 개척했는데 당시 마을 입구에 큰 소나무가 울창했으며 숲 모양이 반(盤)처럼 생겨 반송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이후 단양 우씨가 이주해 오면서 풍산 류씨들은 떠나고 단양 우씨 단일 집성촌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우병우(禹柄宇) 민정수석의 고향이 바로 봉화다.
 
  배용호 전 교육장은 “근세 들어 단양 우씨들이 발 빠르게 기독교를 받아들여 계몽한 덕에 마을이 일찍 개화(開化)되었다”고 전한다. 경북에서도 오지(奧地)로 손꼽히는 봉화의 깊은 산골에서 최 대행과 우 전 수석이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아마도 일찍부터 꽃피운 교육의 힘 덕분일 것이다.
 
  굳이 따진다면, 최 대행은 서울대 법대 82학번, 우 전 수석은 84학번이다. 행정과 사법으로 길은 전혀 달랐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 공교롭게도 청와대 비서실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최 대행은 경제수석실 경제금융비서관(2014년 9월~2016년 1월)으로, 우 전 수석은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과 민정수석(2014년 5월~2016년 10월)으로 대통령 탄핵을 함께 겪었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지구’라고 불러
 
  최 대행은 3·1 운동 때 기독교 대표였던 남강(南岡) 이승훈(李承薰· 1864~1930년)이 세운 학교인 서울 오산고를 1982년 수석 졸업했다.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산중 최종후(崔鍾厚·76) 전 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제가 대학원 석사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영문 초록을 (최)상목이가 써준 기억이 납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학생이었고 학업에 열정적인 ‘학생 중 학생’이었죠.
 
  오산고는 민족지도자 남강 선생이 세운 학교입니다. 학생들에게 애국애족(愛國愛族) 정신을 강조했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오산 출신들은 다른 학교 출신들과 국가관이나 역사관이 남다르다고 자부합니다. 최 대행이 그때 가르침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믿어요.”
 
  오산고를 졸업한 최 대행은 그해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똥파리’라는 별칭이 붙은 82학번이다. 졸업정원제의 시행으로 법대 정원이 크게 늘어나 윙윙대는 똥파리란 악명(惡名)이 붙었다. 동기가 364명이다. 우선 떠오르는 굵직한 정치인만 꼽아도 나경원(羅卿瑗), 원희룡(元喜龍), 조국(曺國) 등 쟁쟁하다. 지금도 똥파리들이 관계, 법조계, 학계, 언론계 등 다양하고 굵직한 분야에 널리 퍼져 있다.
 
  법대 82학번 동기인 국악학자 김세중(金世仲)씨는 최상목 대행을 이렇게 기억했다.
 
  “법대에선 드물게 행시, 더 드물게 재경직을 봤다는 점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재학 시절, 공강 때는 물론이고 휴일과 방학에도 으레 도서관에 있었는데, 사실 대부분 법대생에겐 일상이었죠. 물론 성적도 좋았습니다. 지금처럼 얼굴이 까무잡잡했고, 그리고 지금과 사뭇 달리 머리의 가로세로가 똑같아서 초등학교 동창들이 ‘지구(地球)’라고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 4학년 때 행시 합격
 
2013년 7월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 시절의 최상목.
  1986년 2월 26일 서울대 졸업식이 열렸다. 영예의 대통령상은 조경목(경영학과), 국회의장상은 최상목(사법학과), 대법원장상은 서강문(수의과)이 각각 받았다. 조경목은 최근 국내 굴지의 정유사인 SK에너지㈜ 대표를 지내다 물러났다. SK㈜ 재무1실장 출신으로 그룹 내 핵심 리더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서강문은 서울대 수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최상목은 당시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알려진 대로 법대 수석 입학은 원희룡 전 장관이었다.
 
  당시 손제석(孫製錫) 문교부 장관은 졸업식 치사(致辭)에서 “선진조국 창조라는 민족적 과업 추진에 주역이 될 것”을 졸업생에게 부탁했고, 박봉식(朴奉植) 서울대 총장은 “앞으로 당면하게 될 모든 사회적 문제는 대학에서 갈고 닦은 학문과 인격의 바탕 위에 해결을 시도할 것”을 당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직의 정점(頂點)에 선 최상목 대행이, 40년 전 옛 스승이 당부한 ‘선진조국 창조’와 ‘민족적 과업 추진의 주역’, 그리고 ‘모든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운명적 과업(課業)과 맞닥뜨리게 됐다.
 
  다시 그날 졸업식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대학이 민주화 열기로 뜨겁던 시절이어서 박 총장이 식사(式辭)를 위해 연단에 올랐을 때 학부 졸업생 4500명 중 4000여 명이 “우~” 하는 야유와 함께 일제히 자리를 떴다. 일부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불렀다. 그렇게 식이 끝날 때쯤 박사 졸업생 및 일부 학·석사 500여 명만이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물론 수석 졸업한 최상목은 끝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최 대행은 대학 4학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래로 경제 관료의 길을 걸었다. 행시 29회 합격자 중에 경제 관료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이가 홍남기(洪楠基) 전 경제부총리, 송언석(宋彦錫)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이다. 한양대 경제학과를 나온 홍 전 부총리는 문재인 정부 시절 기획재정부 장관을 843일간 재임한 최장수 기록을 갖고 있다. 송언석 위원장은 서울 법대 동기이자 행시 동기로 30년 지기다. 송 위원장이 기재부 2차관을 할 때 최 대행은 기재부 1차관을 했다. 굳이 따지자면 송 위원장이 2개월 먼저 차관이 됐다. 공직의 길도, 성향도 달랐다. 송 위원장은 예산통(通)의 길을 걸었지만 최 대행은 거시경제 분야에 더 중점을 둬 둘의 공직의 결과 성향이 다르다. 송 위원장은 기재부 예산실장을, 최 대행은 기재부 경제정책국장을 역임했다.
 
 
  “내공이 쌓인 사람”
 
김광림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김광림(金光琳) 전 재정경제부 차관(현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3선 국회의원)은 “보통 재무부 출신들이 세제실이나 금융정책실, 예산실 등의 경력을 쌓는데 최 대행은 특이하게도 경제 정책이나 정책 조정의 길을 걸었다. 아주 이례적”이라고 했다. 그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역대 경제부총리를 보면 세제통이거나 금융통 등에서 잔뼈가 굵은 분인데 최 대행은 그런 면에서 아주 달랐어요. 무엇보다 제가 받은 인상은 굉장히 조용조용한 분입니다. 자기를 잘 나타내지 않는 분이랄까.”
 
  ― 서울대 법대 출신 경제 관료의 일반적인 특징과 많이 다른가요.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더러 자기주장이 강하고 추진력과 리더십을 갖추신 분이 많지요. 경제부총리나 기재부 장관을 역임한 전윤철(田允喆), 김진표(金晉杓), 이헌재(李憲宰), 강만수, 윤증현(尹增鉉) 등이 모두 서울대 법대 출신입니다.
 
  그런데 최 대행은 그런 성향과 관계가 없다고 할까요? 내공이 쌓인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윗대 어른이 신앙생활을 한 바탕에서 나오는 겸손함과 인품이 느껴집니다.”
 
  최상목 대행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은 고(故) 박세일(朴世逸· 1948~2017년) 서울대 교수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박세일이 미국 코넬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법대 82학번에게 미시경제, 거시경제, 법경제학 등 경제 관련 과목을 가르쳤다. 그러니까 최 대행은 박세일 교수의 첫 제자인 셈이다. 나중에 최 대행도 박 교수의 길을 따라 코넬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세일 교수
 
고 박세일 서울대 교수
  한편, 최 대행의 부인인 최정선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도 코넬대에서 일본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부부가 함께 미국에서 동문수학하며 학위를 딴 셈이다.
 
  최정선 교수는 흥미롭게도 불교와 관련한 논문을 여러 편 썼고, 1998년 연세대 국어국문과에서 받은 박사 학위의 주제도 불교적인 성격의 연구였다(논문 〈삼국유사(三國遺事) 관음설화(觀音說話)와 그 시적(詩的) 변용에 관한 연구: ‘일본 영이기(靈異記)’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관음보살은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로도 불리는데 중생을 자비로써 구제하는 보살을 말한다. 관음신앙은 신라 시대에 크게 성행했다. 고대 삼국의 역사 기록인 고려 승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는 사실 불교 설화집이다. 최 교수는 《신라인들의 사랑, 그 용기와 열정의 흔적을 찾아서》(2006), 공저 《향가의 깊이와 아름다움》(2009), 《향가의 수사와 상상력》(2010) 등 신라 향가와 관련된 연구서들도 펴냈다.
 
  동덕여대 재학생들의 커뮤니티에 들어가 최 교수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니 긍정적인 의견들이 가득했다. ‘가장 따뜻한 교수님 중의 한 분’ ‘흔치 않은 주제들로 토론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리포트 작성이나 발표의 경우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버리세요’ ‘편의를 많이 봐주려고 하시지만 편했던 수업은 아니었어요’ 등의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인간적인 따스함과 객관적인 판단력 사이에 균형감을 지녔다는 인상을 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경제학과 문학의 만남이라는 두 사람의 길을 떠올려 보았다. 경제학은 세상의 법칙을 풀어내는 수학적 언어다. 문학은 그 법칙 속에 숨겨진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예술적 소리다. 두 세계가 만날 때, 우리는 수치(數値) 뒤에 숨은 감정과 논리 속에 담긴 꿈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기자와 만난 법대 동기인 J 변호사는 익명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박세일 교수님은 생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학력고사에서 제일 좋은 점수를 받은 머리 좋은 이들이 너희 아니냐. 판검사는 상식만 있으면 된다. 법상식으로 기록을 읽고, 법상식으로 판단하면 된다. 너희는 기업에 들어가 해외를 개척해 돈을 벌어라. 아니면 정부에 들어가 국가 정책을 만들어 헌신해야 한다.’ 아마 최 대행도 그 말씀에 감흥 받아 사법고시 대신 경제 관료의 길로 나갔을 겁니다.”
 
  ― 스승인 박세일에게 영향받아 사시보다 행시로 방향을 튼 이들도 많겠네요.
 
  “그렇죠. 젊은 교수의 뜨거운 말에 법대생들 가슴이 크게 요동쳤을 겁니다. 스승이 ‘후진국에서 벗어난 대한민국을 어떻게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냐는 과제가 여러분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하셨으니까요. 그중 한 명이 최 대행이지 않을까요?”
 
 
  법경제학회
 
  서울대 법대 82학번인 박수영(朴洙瑩) 국민의힘 의원 역시 박세일 교수가 미국에서 귀국해 가르친 첫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박 의원은 “박 교수님께서 임종하시기 전, 마지막 힘을 짜내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박수영… 대한민국… 잘해라’ 하셨는데 지금도 따르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박세일 선생님이 ‘건국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대한민국은 앞으로 선진화로 가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경험한 우리 세대가 선진화 주역이 돼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어요.”
 
  박세일 교수가 ‘한국법경제학회’를 처음 만들었을 때 박수영 의원, 송언석 위원장, 최 대행 역시 참여했다. 법경제학회에서 동문수학한 서울대 법대 82학번은 김학균(金學均·전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위원장), 이상래(李相來·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을 비롯해 정규상(鄭圭祥·행시 29회·전 기재부 대외경제 정책위원), 신창동(申昌東·행시 30회·전 산자부 가스산업팀장), 안완기(安完基·행시 30회·전 한국가스공사 사장), 김용수(金容秀·행시 31회·전 과기부 2차관), 류순현(柳淳鉉·행시 31회·전 세종특별시 행정부시장), 김재정(金載晶·행시 32회·전 국토부 기획조정실장), 박순기(朴淳其·행시 32회·전 산자부 경제자유구역기획단장), 윤상수(尹相秀·행시 32회·전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정경순(鄭暻淳·행시 33회·전 감사원 공직감찰본부장), 최병환(崔炳煥·행시 33회·전 국무조정실 1차장), 정병원(鄭炳元·외시 24회·현 외교부 차관보) 등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박세일 교수는 2004년 6월 처음 발간한 한국법경제학회 학술지인 《법경제학연구》에 〈21세기 법경제학의 새로운 지평〉이란 권두언을 통해 ‘시장-국가-시민사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다음은 권두언 중 일부다.
 
  〈21세기는 신질서를 창출하는 시스템 구축자로서의 법경제학의 역할이 보다 크게 기대되는 시기이다. 앞으로 법경제학은 시장(효율과 자유)-국가(정의와 형평)-시민사회(우의와 연대)의 역할과 범위의 조화로운 재설정, 폭넓은 학제적 관점의 제시를 통한 새로운 지식의 창출,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에 필요한 법제도 시스템 구축 등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아주 탁월하게, 다른 선배나 동료들보다 더 열심히”
 
2025년 1월 8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가 국회에서 열린 비상 경제 안정을 위한 고위당정협의회에 국민의힘 권영세(오른쪽) 비상대책위원장, 권성동 원내대표와 함께 참석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최상목은 재무부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행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986년 4월 총무처 사무관 시보(試補)로 발령을 받았다. 보통 시보는 지방 수습부터 시작하지만 행시 29회 기수는 달랐다. 당시 86아시안게임 개최를 앞두고 있었다. 공직사회가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에 매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개척하던 대한민국이 유치한 가장 큰 국제대회였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 성공이 88올림픽의 성공과 직결돼 모든 관계부처와 공직자들이 총동원됐다.
 
  최상목은 아시안게임 뒤인 1987년 10월 재무부 기획관리실 산하 법무담당관실 행정사무관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이후 재무부 국제금융국에서 외환 정책 업무를 맡았다. 조직 명칭이 재무부에서 재정경제원, 재정경제부, 기획재정부 등으로 정권에 따라 이름이 바뀌는 과정을 모두 체험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강만수 전 장관의 회고다.
 
  “최상목 사무관이 재무부에 들어와 사무관으로 일할 때였어요. 그때 제가 국제금융국장으로 있으며 유심히 지켜봤지요. 당시 우리 경제는 수십 년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다가 개방화·세계화 시대에 맞게 외국환 관리법을 새로 정비하던 때였어요. 그러니까 한국 경제 시스템으로선 큰 전환점이 되는 대외 거래에 관한 방대한 법이었죠.
 
  최 사무관은 아주 탁월하게, 다른 선배나 동료들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저랑 같이 국회에 가서 (법안을) 통과시켰죠. 그런데 일이라는 게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이거든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이후 시행령을 만들어야 하고, 시행 규칙도 만들어야 합니다. 산 넘어 산이지요.
 
  그가 미국 코넬대로 유학을 준비 중이었는데 비행기 타는 바로 전날까지 일했죠. ‘유학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내가 다독였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상 장관을 대행해 업무 전반을 다 챙기며 2008년 글로벌 위기 극복해”
 
  ―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였나요.
 
  “옛 재무부의 전설 같은 이야기인데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100달러 이상을 환전(換錢)해 해외로 갈 때 대통령 사인을 받아야 했어요. 그걸 대통령 이름 끝자(字)를 따서 ‘가만(可晩) 사인’이라고 했습니다. (1961년) 5·16 이후에도 사정이 달라지지 않아 당시 환전소는 딱 한 곳(한국은행)밖에 없었고, 1000달러 이상은 장관 사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재무부 국제금융국 복도와 계단 난간까지 (사인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줄지어 선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 외국환 관리법의 풍경이었죠.
 
  그때 제가 최 사무관과 함께 네거티브 시스템, 그러니까 ‘법에서 이러이러한 것은 안 된다’는 규정을 제외한 모든 외환 거래를 허용하도록 제도를 고친 겁니다.”
 
  ― 초보(初步) 사무관에게 맡겨도 되는 업무인가요.
 
  “아닙니다. 일반 국민이야 모르겠지만 정부로서는 거대한 사업이었죠. 그걸 갓 들어온 사무관에겐 보통 잘 안 맡기거든요. 어려운 일을 맡겨도 한 번도 ‘노(No)’라고 하지 않았죠.”
 
  최 대행은 코넬대 박사를 받고 돌아온 뒤에도 강만수 장관과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장관 정책보좌관, 비서실장이 되어 늘 곁에서 업무를 챙겼다. 최 대행에게 대학 시절 학문의 스승이 박세일 교수였다면 공직 스승은 바로 강만수 장관이었다.
 
  “정책보좌관이 사실상 장관 비서실장이었죠. 실은 비서실 업무 대신 정책 업무만 맡겼어요. ‘내가 맡긴 정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항상 모니터링하고, 혹시 내가 잊어도 네가 알아서 다 챙겨라’고 지시했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최상목 보좌관이 사실상 장관을 대행해 업무 전반을 다 챙기며 위기를 극복했죠.”
 
  ― 맡긴 결과는 어땠나요.
 
  “2009년 7월 22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이 ‘서울 관료에게 경의를 보낸다’고 하지 않았나요? OECD는 한국의 재정금융 정책을 OECD 국가 중 최고로 평가했고 1997년 우리를 가르쳤던 IMF는 우리의 재정금융 정책을 ‘교과서적 사례’라고 평가했지요.”
 
  강 장관은 “당시 기획재정부 직원들은 2008년 한 해를 밤낮도 주말도 없이 위기와 싸웠다”며 “최 대행을 비롯해 차관에서부터 모든 실무자가 국가의 보루였다”고 회고했다.
 
 
  “시키는 대로 일하는 스타일 아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입었다. 당시 강 장관은 ‘강고집’ ‘킹만수’ ‘경제대통령’ ‘올드보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위기와 싸우는 것보다 정치권과 언론의 비판에 맞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 최 대행은 일종의 ‘예스맨’인가요.
 
  “아닙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내가 지시한 사항에 문제가 있거나 생각이 다르면 언제라도 이야기하라’고 했고 그렇게 실천했지요.”
 
  ― 최 대행의 단점은 무엇입니까.
 
  “술을 못 먹어요. 거의 못 해요. 술 먹고 호탕한 성격이 아닙니다. 그게 단점이죠.”
 
  ― 그럼 낙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 친구는 늘 자기 업무에 몰두하고 공부하고, 내가 어떤 걸 물어도 업무를 다 꿰고 있는 거지….”
 
  ― 그렇다면 공직보다 학계가 더 어울리는 것 아닌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죠. 워낙 성격도 조용하고…. 그러나 업무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요. 파이팅도 있고, 내가 지시한다고 시키는 대로 안 해요.”
 
  ― 최 대행에게 라이벌이 있었나요.
 
  “평소 스타일이 라이벌이 있을 스타일이 아닙니다. 남하고 다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맡은 일도 큰소리 내기보다 조용조용히 하는 스타일이에요.”
 
강만수 장관이 말하는 경제 관료 3가지 덕목
 
  강만수 전 장관은 “관료는 국가의 최후 보루”라고 강조한다. “관료가 대중에 영합하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대중영합주의 정치는 다수결 민주주의의 불가피한 비용이고 이런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는 “관료들의 사명감과 패기뿐”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모름지기 경제 관료란 ▲열정 ▲지식 ▲법적인 사고방식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저는 실무자일 때 주말에 한 번도 쉬지 않았습니다. 우리 경제의 어려운 과제들을 우연의 일치로 제가 다 맡았어요. 맡은 이유가 위에서 지시하면 열정적으로 일을 하니까….”
 
  ― 관련 분야의 지식은 경제부처에선 필수적이겠네요.
 
  “국민을 끌고 가는 사람이니까 배를 운항할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경제부처 복도에서 발에 차이는 게 하버드 박사고 예일 박사입니다. 미국 경제부처와 회의를 해도 우리 경제 관료들이 실력에서 절대 밀리지 않아요.”
 
  ― 경제 관료에게도 법적 사고방식이 필요한가요.
 
  “일본 정부의 3대 성(省)인 재무성, 통산성, 외무성에 도쿄대 법학과 출신이 90%입니다. 왜 그럴까요? 관료에게 있어 중요한 게 법이기 때문입니다. 정책도 법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판검사보다 더 적극적인 법률 전문가가 경제부처에 필요한 이유지요.”
 
  강 전 장관의 말대로 경제 관료 중 법학 전공자가 많은 이유는 경제와 법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으며, 법적 지식이 경제 정책과 제도 운영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DJ 정부 출범 당시 인사위 참여
 
  최상목은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 당시 인수위에 참여했고 재경부 경제정책국 서기관으로 있던 같은 해 8월 DJ 정부의 경제 기조를 담은 《DJ노믹스》를 발간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듬해 3월부터 1년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실에서 정책행정관으로 근무한 경력을 살펴보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최 대행은 이어 프랑스 파리로 떠나 OECD의 프로젝트 매니저 금융시장과에서 3년간 파견 근무를 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지난 2012년 12월 10일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연수원에서 열린 제9기 고위정책과정 강사로 나서 한 발언이다.
 
  〈파리에서 3년을 살았다. 프랑스는 케이블TV를 설치하려면 2~3개월이 걸린다. 그래도 유럽에서 프랑스는 빠른 나라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오늘 신청하면 내일 연결된다.
 
  (프랑스는) 기타 보험 등도 처리는 되는 선진국인데 좀 오래 걸린다. 유럽의 국민은 소비자이면서 근로자다. 근로자의 권리를 포기할 수 없으니 소비자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설렁설렁 사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유럽을 보면 유럽의 재정적 어려움은 3~4년, 10년 동안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행시 37회 출신으로 국회 지식경제위원장을 지낸 4선의 윤영석 의원(국민의힘)은 최 대행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다.
 
  “(최 대행의 공직의 길을 보면) 보수와 진보 정부를 떠나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던 분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극복하고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불평등 해소를 위해 진보적인 경제 정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균형 잡힌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민주당, ‘국정농단 부역자’라며 딴지 걸어
 
  그러나 경제 관료로서 그가 주도한 정책이 모두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으로 있을 때 미르재단 설립에 관여해 기업들의 출연(出捐)을 압박했던 사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한 탄핵안에 여러 번 이름이 거명되었다. 당시 책임자였던 안종범(安鍾範) 경제수석은 중형(重刑)을 선고받았지만 실무자였던 그에겐 책임을 묻지 않았다.
 
  2023년 12월 19일 열린 최상목 대행의 경제부총리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야당은 “국정농단 부역자가 다시 경제부총리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었다. 이를 두고 여의도와 경제부처 주변에선 “국정농단 판결문에 서른여섯 차례나 등장하는 최상목을 당시 불기소 처분한 것은 박영수 특검 수사팀장이던 윤석열 검사였고 서울대 법대 선배인 윤석열 검사가 봐줬다”는 설이 파다했다.
 
  어쨌든 문재인 정부에서 적폐로 찍혀 옷을 벗었던 그가 윤석열 정부의 인수위에 참여했고 곧바로 대통령실 경제수석으로, 경제부총리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일반적인 공직 관행으로 볼 때 결코 쉽지 않은 발탁이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게 있다. 지난해 4·10 총선 당시 선거판을 들끓게 했던 이슈가 R&D 예산 삭감이었다. ‘나눠 먹기식’ R&D 예산을 혁신(革新)해 선택과 집중으로 국가 R&D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당위론 때문에 선거 민심(民心)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R&D 예산 삭감은 최 대행이 경제수석으로 근무할 때 이미 주도한 사안이었다.
 
  2023년 초에 ‘최상목 경제수석’ 주관으로 대통령실에 국가 R&D 체계 혁신 TF가 구성, 운영되었었다. 이 TF에서 “정부 R&D 투자가 비용에 가까우며 비효율적이라는 기재부 일각의 인식이 관철되었고,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R&D 예산 구조조정안이 기획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현실이 그렇더라도 점진적으로, 체계적으로, 국민 여론을 살피며 R&D 예산 혁신을 이뤘으면 비상계엄도 탄핵 논란도 없었을 것이며 여소야대의 정치 지형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최 대행의 R&D 예산 삭감은 고약한 악수(惡手)가 아닐 수 없다.
 
  지난 2023년 12월 19일 열린 인사청문회 당시 민주당 이수진 의원과의 문답이다.
 
  이수진 의원 : 뭐라고 하셨어요? 대통령께 R&D 예산 삭감해야 된다고 하셨냐고요?
 
  최상목 후보자 : 사실은 그게 어떻게 말하면 R&D다운 R&D를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고요.
 
  이 : 처음에 삭감을 할 때 어떻게 기여를 하셨냐고요?
 
  최 : 그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대통령께서 R&D 개혁을 말씀하셨고요.
 
  이 : 대통령이 먼저 했고….
 
  최 : 예, 하시고, 물론 그 전에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하셨고요.〉

 
  보기에 따라 최 후보자는 책임을 대통령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청문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핵심은 R&D 삭감이 아니고요 R&D를 개혁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R&D 개혁 방향을 제시하셨고 그 방향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총선 이후로 R&D 혁신 논의를 늦췄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공직 생활 40년에 맞이한 운명
 
  최 대행은 꼭 40년 전인 1985년 11월 행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나섰다. 관료는 과정으로 말하지 않는다. 결과로써 말해야 한다. 그는 일을 피하지 않았고 열정적으로 공직 경험을 쌓았다. 일하는 과정에서 책임질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지뢰밭 길을 우여곡절 끝에 잘 헤쳐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깜깜한 시계(視界) 속을 헤쳐나가야 하는 운명 앞에 서 있다. 강만수 전 장관이 언급하듯이 “일하면 비판받고, 멀리를 보고 일하면 더 큰 비판을 받는 자리”가 공직이다.
 
  그의 공직 스승인 강만수 전 장관은 최 대행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진정한 관료는 맡은 일을 치밀하게 검토하고, 패기를 갖고 실패를 두려워 말고 일을 해야 합니다. 최 대행에게 국운(國運)을 맡긴 것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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