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사 시절 일심회 사건, 이재명 대표의 허위사실 공표, 폴크스바겐 디젤 게이트 등 수사지휘
⊙ 일심회 사건 주범 장민호 수사… 통일 문제, 어린 시절 얘기 나누며 인간적으로 설복시켜
⊙ “문 정권, 법무부 청사에 있던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법무연수원으로 옮겨”
⊙ “이재명, 자기 부하들은 엄청 잘 챙기고 반대하는 이는 완전히 쳐내버리는 사람”
崔基植
1969년생. 고려대 법학과 졸업 /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 검사, 주독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 법무부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 서울고검 송무부장검사, 국민의힘 의왕과천당협위원장 역임
⊙ 일심회 사건 주범 장민호 수사… 통일 문제, 어린 시절 얘기 나누며 인간적으로 설복시켜
⊙ “문 정권, 법무부 청사에 있던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법무연수원으로 옮겨”
⊙ “이재명, 자기 부하들은 엄청 잘 챙기고 반대하는 이는 완전히 쳐내버리는 사람”
崔基植
1969년생. 고려대 법학과 졸업 /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 검사, 주독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 법무부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 서울고검 송무부장검사, 국민의힘 의왕과천당협위원장 역임
“검사님, 방에 가서 담배 두 대만 피우고 나오겠습니다.”
2006년 일심회 간첩단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일심회 우두머리인 미국 시민권자 마이클 장(장민호) 앞에 마주 앉은 검사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1부 소속 최기식. 담배를 다 태우고 나온 장민호는 열흘에 걸쳐 973쪽 분량에 달하는 자백을 했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최기식 변호사는 그때의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백두산 천지 그림을 명함 뒷면에 새겨놓고 다녔는데, 그걸 (장민호에게) 줬지요.”
― 그렇게 마음대로 명함에 새겨 넣어도 되나요.
“그 정도는 상관없죠.”
― 아무튼, 그래서요?
“(장민호는) 아니, 검사 명함에 웬 백두산 천지냐는 반응이었죠. 그래서 나는 ‘나와 당신이 지향하는 건 통일인데 다만 가는 길이 다를 뿐이다’라고 했어요. 저는 제가 생각하는 통일이라든지, 한반도와 주변국의 정세, 뭐 이런저런 생각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힘들었던 저의 어릴 적 가정사(家庭事)까지도요. 그때부터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죠.”
최기식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통일과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졌다. 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력은 세 개 정도다. ▲일심회 간첩단 사건 수사 ▲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 수사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 역임 등이다. 가장 먼저 일심회 간첩단 사건 수사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변호사들이 묵비권 행사 종용
“이제 마음의 준비가 다 됐습니다. 검사님을 믿고 가겠습니다.”
이 말이 나올 때까지 검사 열 명이 달려들었다. 이 중엔 공안 수사만 10년 넘게 한 베테랑도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다른 간첩 사건도 마찬가지지만, 이 사건은 자백 없인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일심회는 점조직 형태로 움직였고, 중요한 증거는 북한과 해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원들이 입을 꾹 닫으면 미제(未濟) 사건으로 남을 수 있었다.
여러 검사가 구속된 일심회 조직원들에게 자백하라고 밤늦게까지 설득했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변호사들이 찾아와 묵비권(默秘權) 행사를 종용하며 입단속을 했다. 재판에 넘겨진 일심회 조직원은 5명이었다.
당시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일심회 변호인단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출신 변호사 36명이 주축이 돼 모두 37명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했다. 최기식 변호사도 “그때 민변 변호사들이 일심회 조직원들을 돌아가면서 접견해 ‘얘(다른 조직원은) 진술 안 한다, 너도 진술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자백을 안 하게 관리했다”고 설명했다.
장민호의 자백으로 드러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장민호를 비롯해 북한의 지령을 받은 86 세대 운동권 출신 간첩 5명은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났다. 일심회 조직원들이 북한에 넘긴 자료는 〈민주노동당 주요 당직자 344명 성향 분석〉 〈열린우리당·한나라당·민중연대·통일연대 등 관련 동향〉 〈탄핵 정국 시 국내 동향〉 〈2004년 총선 동향〉 〈2006년 지방선거 동향〉 〈북핵실험 이후 여론〉 등이었다. 트럭 한 대 분량의 방대한 자료 속엔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장민호는 1989년과 1993년, 1999년 방북(訪北)을 했다. 이때 북한에서 충성 서약을 하고 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일심회를 결성한 건 1997년이다. 장민호가 민노당 당직자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민노당 소속 일부 인사들이 넘겨줬기 때문이다. 일심회 사건의 여파로 민노당은 2008년 총선에서 5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심판(2013헌다1) 결정문을 보면 일심회의 이름이 총 40번 등장한다. 헌재는 통진당 주도 세력에 일심회 관련자들이 포함된 점 등을 주요 근거로 들어 재판관 8대 1의 의견으로 통진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최기식 변호사가 검사 시절 받아낸 장민호의 자백 973쪽은 모두 헌재에 제출됐다. 그의 수사가 통진당 해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공안1부 발령 한 달 만에 일심회 주범 수사
― 일심회 사건은 어쩌다가 맡게 됐습니까.
“2006년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였던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이 일심회 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제게 장민호씨 수사를 맡겼죠.”
― 장민호는 일심회 총책인데, 주범을 맡은 걸 보니 공안 수사 경험이 많았나 보죠?
“아니요, 그때 저는 완전히 초짜였어요. 제가 간첩 수사는 검사 생활을 통틀어 2년 정도 했는데, 일심회 사건의 경우 공안 부서에 발령받은 지 한 달밖에 안 된 상태에서 맡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말석(末席)에 가까웠죠.”
― 공안1부엔 어쩌다 가게 된 겁니까.
“북한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저는 2005년 3월부터 2006년 2월까지 독일 뮌헨대학교로 1년간 검사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 독일에서 통일에 대비한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귀국하자마자 서울중앙지검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때가 노무현 정부였죠. 원래 공안1부는 많은 검사가 선호했지만 이때만큼은 기피 대상이었어요. 이런 이유로 공안1부에 지원해서 가게 됐습니다.”
― 수사 외압은 없었나요.
“구체적으로 저에게 수사하지 마라, 이런 건 없었어요. 다만 제가 그때 받았던 느낌은, 국가정보원에서 이 사건을 더 깊게 수사하려고 하는 것 같진 않다는 거였어요.”
당시 안창호 차장검사는 왜 하필이면 공안 부서로 발령받은 지 한 달밖에 안 된 ‘초짜 검사’에게 주범 수사를 맡겼을까. 공안 검사들은 많았다.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이 나중에 밝히길 “일심회 간첩 사건은 주범의 자백으로 (수사에) 성공한 사건이었다”며 최기식 검사에게 장민호를 맡긴 배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여기서 담배나 피우면서 쉬다 가라’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받기 위해서는 수사 경험도 중요하지만, 피의자를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사에 참여한 검사들은 모두 실력과 인품을 갖췄는데, 그중 젊은 열정과 피의자에 대한 진실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검사라고 판단하여 최기식에게 주범에 대한 수사를 맡겼다.”
일심회 사건 이전에도 대공(對共) 사건, 그러니까 간첩 수사를 할 땐 국정원에서 피의자를 시쳇말로 ‘히야시(冷やし·차갑게 식힘)’해서 검찰에 넘기는 방식이 쓰이곤 했다. 살얼음 같은 수싸움을 통해 혐의가 있는 사람을 겁주거나 긴장하게 만들어서 수사에 진척이 생기길 기대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일심회 조직원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국정원에서도 묵비권을 행사하며 수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 어떻게 장민호의 마음을 열었습니까.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강압도 아니고 회유도 아니었어요. 그저 진심으로 대했을 뿐이에요.”
―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나요.
“장민호에게 가족관계를 물었어요. 아내와 아이들은 일심회 사건이 터지자마자 미국으로 떠났대요. 저도 어린 시절 가정 불화, 가난으로 힘들었어요. 그 얘길 했더니 그 사람(장민호)도 초등학교 때 (펌프질하는 시늉을 하며) 점심에 밥 대신 수돗물을 마셨다고 해요.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 매일 도시락을 싸다 주셨다고 했어요.”
최기식 당시 검사는 일심회 사건을 수사하면서 매일 장민호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취조하는 동안에도 사건 얘기보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얘기, 살아온 얘기를 나누며 “구치소는 고달프니까 여기서 담배나 피우면서 쉬다 가라”고 했다. 진심이었다. 최기식 검사는 그 마음이 장민호에게 전해졌다고 믿는다. 둘은 1년간 검사와 피고인의 신분으로 법정에서 마주했다. 장민호는 2007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된다. 재판이 끝나고 장민호가 대전으로 이감(移監)되기 며칠 전, 최기식 검사는 장민호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15년, 최기식은 언론 기고를 통해 장민호에게 전하고픈 말을 남겼다.
“2013년 가을,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 생활은 어떤지요? 가족들과 다시 만났는지요? 언젠가 다시 만나 통일 한국에 대해 대화를 나눌 날을 기다려봅니다.”
‘북한 관련 일’ 하고 싶어 공안 검사 돼
― 어린 시절 힘들었다고 장민호에게 했던 말, 진짜입니까.
“저는 밀양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때 집이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일본 징용 피해자셨는데, 어머니가 빨래터에서 돌아오시면 아버지에게 쌓인 감정을 터뜨리곤 하셨어요. 부모님은 이혼하셨다가 자식들을 생각해서 재결합하셨을 정도로 저희 집안은 화목하진 못했어요. 옆집 담벼락이 낮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싸우는 와중에 담장 너머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라고요. 서러움에 목이 끅끅 메었어요. 그때가 초등학교 3~4학년이었어요. 교회로 달려가서 바닥에 꿇어앉아 한참을 울었던 게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나요. 농약병을 쥐고 해선 안 될 생각까지 하기도 했고요. 손이 덜덜 떨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큰 불효를 저지른 건데. 그런 얘기들을 장민호에게 했죠.”
― 공안 검사 이미지에 어울리는 수사 기법은 아닌 것 같은데요.
“수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사람 대 사람으로 대했어요.”
‘통일’에 대한 깊은 관심은 최기식 변호사와 장민호가 말이 통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가 공안 검사가 된 이유도 ‘북한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북한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2017년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소장이 되었다. 지금도 탈북민들을 위한 무료 법률 지원을 하며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 탈북청소년대안학교 이사 등 북한과 관련 있는 여러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어린 시절 어렵게 자라난 탓에 솔직히 처음에는 그저 ‘소년등과(少年登科)’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사법시험에서 네 번이나 떨어졌을 때는 너무 힘들었죠. 그러다가 사시에 붙은 후 사법연수원 시절 ‘이렇게 힘들게 검사가 되었는데, 어떤 사명을 갖고 일해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북한과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북한 인권 도외시한 문재인 정권
법무부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2016년 박근혜 정부 때 설립됐다. 설립 근거는 북한인권법 제13조다.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최기식 검사는 법무부 통일법무과 과장이던 2013년부터 2015년,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했다. 이런 노력 끝에 2016년 이 법의 제정과 동시에 법무부에 북한인권기록보존소 현판이 걸렸다. 이후 그는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7년 8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이곳의 소장을 지냈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의 롤 모델은 서독(西獨)의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Zentrale Erfassungsstelle)다.
― 2016년 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 수사로 몸값이 엄청 뛰었는데,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 말고 더 좋은 자리로 가고 싶진 않았습니까.
“대검 미래기획단장이나 대변인, 법무부 대변인이나 어디 지청장 같은 좋은 보직으로 갈 기회가 있었는데, 며칠 고민하다가 초심을 떠올리면서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써냈어요. 문재인 정부 시절 누가 거기 가고 싶어 했겠습니까(웃음). 법무부에서 바로 오케이 하면서 발령 내줬죠.”
― 문재인 정부에서 북한 인권을 도외시했다는 비판이 나오는데요.
“몸소 느꼈죠.”
―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2017년 겨울에 탈북민 단체들의 모임을 (법무부) 장관께 보고했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못 하게 했죠. 또 가해자를 특정하는 일에 집중해 북한 인권 조사 매뉴얼까지 만들었지만 그때 정부에서 전부 누락시켜버렸어요. 그리고 법무부 청사 입구에 걸려 있던 북한인권기록보존소 동판(현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겼어요. 입구를 바라볼 때 기준으로.”
― 현판을 옮긴 게 딱히 문제가 되나요.
“법무부 현판 밑에 북한인권기록보존소 현판이 있어요. 장관 등이 참여하는 법무부 공식 행사가 있으면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곳이 법무부 현판 앞인데, 그런 사진에 안 나오게 하려고 그런 거죠.”
― 굵직한 일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많죠.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법무부 7층 장관실 바로 위층인 8층에 있었어요. 박근혜 정부는 그만큼 북한 인권에 의미를 두었다는 거죠. 그런데 2018년 9월 용인에 있는 법무연수원 분원으로 사무실이 옮겨졌어요.”
5년 뒤인 2023년 8월, 윤석열 정부는 쪽방 신세였던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사무실을 다시 법무부로 복귀시켰다. 현판도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서 검사 다 빼내”
― 또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제일 중요한 게, 사무실을 용인으로 옮기고 얼마 안 지나서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서 근무하던 검사들을 다 빼버렸어요. 원래는 소장도 검사, 평검사도 서너 명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 검사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내쳤어요. 그러곤 변호사 출신 사무관 한 명과 일반직 직원들로 채웠어요.”
― 구성원들이 꼭 검사여야 합니까.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범죄의 역사를 기록하는 곳이니까요. 그 기록을 토대로 나중에 형사 소추를 하려면 검사가 있어야 하잖아요. 독일의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에도 1961년 설립 이후 통일이 될 때까지 30년 동안 항상 부장검사가 파견 나왔어요. 두 기관의 목적은 같습니다. 인권 탄압과 유린을 자행하는 와중에도 누군가 이를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행동을 위축시키는 일반 예방적 효과가 있어요. 통일이 되면 이곳의 기록을 토대로 처벌받을 테니까. 처벌까지 이뤄지면 특별 예방적 효과죠. 동독은 서독의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를 극도로 싫어했어요.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서 검사들을 다 내친 건 두 가지 효과를 무력화(無力化)시킨 거죠.”
형 탈북시키려다 ‘간첩’으로 몰린 탈북자
최기식 변호사는 검찰을 그만두고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법률상담 등의 활동을 해왔다. 그에게 탈북민들이 겪는 법적인 문제를 물었다. 그는 “국가보안법 적용에 문제가 있다”고 대답했다.
― 국보법이 문제라니, 무슨 뜻이죠.
“이런 일이 있었어요. 국가보안법 제5조(자진지원) 위반 사건인데요, 탈북민 한 분이 북한에 남아 있는 친형을 데려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걸 알게 된 북한 보위부에서 그 형한테 가서 ‘동생한테 연락해라, 국경으로 나오라고 해라’라고 요구한 거죠. 그래서 결국 중국과 북한 국경에서 동생이 형을 만났는데, 보위부에선 형을 통해 뭘 보내라고 자꾸 오더(지시)를 했더라고. 이게 한 번이 아니라, 보위부가 계속 형을 인질 삼아 편의 제공을 요구한 거죠. 동생은 형을 탈출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건데. 그런데 이게 법정에서 다른 건 다 무죄(無罪)를 받았는데 ‘자진지원’ 하나에 걸려서 결국 국보법상 간첩에 해당됐어요. 국가안보사범은 (징역이) 7년 이상이에요. 감경(減輕)해도 3년 6개월. 근데 아시다시피 집행유예가 되려면 (형량이) 2년 6개월 이하여야 하는데, 결국 이 사람은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지금도 옥살이를 하고 있어요.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도 제청했는데….”
최기식 변호사는 검사 시절 공안뿐만 아니라 다른 수사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2016년부터 이듬해 8월까지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 부장검사로 있었는데, 이때 그가 맡은 사건이 《매일경제》가 ‘2016 올해의 경제사건’으로도 선정한 ‘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이다.
‘디젤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내용은 2015년 폴크스바겐을 비롯한 유럽 자동차 회사들이 디젤 자동차의 배출 가스 양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폴크스바겐은 한국에서만 보상금과 과징금(課徵金) 등 3400억원을 물게 됐다. 이 사건을 해결한 수사팀이 최기식 당시 부장검사가 이끄는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였다.
― 디젤 게이트는 어쩌다 맡게 됐습니까.
“사실 원해서 했던 사건은 아닌데, 형사5부에 발령이 났거든요. 여긴 교통과 환경 분야 수사를 맡아요. 주로 교통(사건)이 많죠. 환경은 사실 한강물 떠놓고 (수질 검사하는) 이런 거거든요. 형사5부장은 보통 보고거리도 없고. 그래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사건이 있나 봤더니, 폴크스바겐 사건 수사 의뢰가 들어왔더라고. 내가 오기 직전에 형사5부를 맡았던 부장은 경찰에 수사 지휘를 맡겼고. 그래서 검사장한테 우리가 하겠다고 보고하고 경찰이 갖고 있던 사건을 가져왔죠.”
― 이 건은 수사하는 데 어려웠습니까.
“검사 4명이 달라붙었어요. 배출 가스 조작이란 게 쉽게 밝힐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근데 수사를 하다 보니까 통관 서류가 눈에 띄더라고요. 독일에서 한국으로 수입하기 위한 서류. 그걸 조작한 게 포착된 거지. 그래서 2016년 2월부터 서울 강남구 폴크스바겐코리아 본사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했고요. 배출 가스도 여러 번 시험을 해보니까, 폴크스바겐이 검사소에서 검사받을 땐 배출 가스가 정상적으로 나오도록 (조작 프로그램으로) 조정해놓고 밖에서는 무제한으로 나오게 했더라고요.”
‘인생에서 가장 참담했던 시기’
그는 경기도지사 시절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수사한 적이 있다.
“수원지검 성남지청 차장검사였을 때, 그러니까 2018년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를 기소했죠.”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성남시장 재임 시절인 2012년 6월 보건소장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등에게 친형 이재선씨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도록 지시(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하는 등의 혐의를 받았다. 또한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TV 토론회에서 “친형을 강제 입원시키려고 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허위사실 공표 혐의도 받았다. 이 밖에도 검사 사칭 부인(허위사실공표), 대장동 개발 과장(허위사실공표) 혐의가 병합(倂合)돼 기소됐다.
수원지법에서 열린 1심은 모두 무죄(無罪) 판결했다. 이듬해 수원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선 친형 강제 입원과 관련한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을 유죄(有罪)로 보고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7대 5의 의견으로 파기(破棄) 환송했다.
이때 캐스팅 보트(casting vote·가부 동수 상황에서의 결정권)를 쥐고 있던 인물이 권순일 당시 대법관이다. 2023년 1월 13일 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천화동인 4호 소유주 남욱 변호사는 “김만배씨가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권순일에게 부탁해 대법원에서 뒤집힐 수 있도록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고 한다.
여하튼 무죄 취지로 하급심으로 돌려보내진 이 사건은 결국 ‘무죄’로 결론이 났다. 최기식 변호사는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참담했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이후 최기식 변호사는 미련 없이 검사복을 벗었다.
“내가 검사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은, 우리가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매 순간 정의로웠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수사하며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재명 사건은 권력자들을 법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에 대한 깊은 한계를 느끼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 수사를 하면서 유죄가 나올 거라고 확신했습니까.
“물론이죠. 그때가 문재인 정부였는데, 내가 출세하고 싶었으면 설렁설렁 대충 제쳐 기소 안 하면 됐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 수사해보니, 이재명이라는 인물은 어떻던가요.
“참 차가운 사람이다. 자기 부하들은 엄청 잘 챙기고 자기한테 반대하는 사람은 완전히 깔끔하게 쳐내버리는 사람 같았어요. 자기 사람은 정말 따뜻하게 관리를 하면서도 반대 세력은 완전히 제거한다는 느낌을 받았고요. 그리고 형수, 조카와의 통화 녹음을 듣고 많이 놀랐고. 저였으면 형수와 조카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을 것 같은데 안 하더라고요.”
‘우리가 가야 하는 길’
이후 최기식 변호사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최근 국민의힘 당협위원장들이 공천심사를 앞두고 일괄 사퇴하기 전까지는 국민의힘 의왕과천당협위원장을 맡아왔다. 현재는 4·10총선 출마를 준비 중이다.
―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는 인연이 있나요.
“같이 근무를 하거나 특별한 인연은 없습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과는 군법무관 훈련을 같이 받았고, 2006년 2월쯤에 한 달 동안 법무연수원에서 논문을 쓰면서 같이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 한 위원장은 특수금융 쪽으로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통일·북한 분야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했죠.”
인터뷰를 마치기 전에 최기식 변호사는 1986년 제10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동상(銅賞)을 수상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라는 노래 이야기를 꺼냈다.
“이 노래 가사에 제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담겨 있어요.
‘이 험한 세상 우리 가야 하는 길, 한발 두발씩 그냥 가야 하는 게 아니야. 모진 바람 속에 핀 저 들꽃마냥 마음 아픈 이들 위해 향기 드리며 가야 해….’”⊙
2006년 일심회 간첩단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일심회 우두머리인 미국 시민권자 마이클 장(장민호) 앞에 마주 앉은 검사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1부 소속 최기식. 담배를 다 태우고 나온 장민호는 열흘에 걸쳐 973쪽 분량에 달하는 자백을 했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최기식 변호사는 그때의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백두산 천지 그림을 명함 뒷면에 새겨놓고 다녔는데, 그걸 (장민호에게) 줬지요.”
― 그렇게 마음대로 명함에 새겨 넣어도 되나요.
“그 정도는 상관없죠.”
― 아무튼, 그래서요?
“(장민호는) 아니, 검사 명함에 웬 백두산 천지냐는 반응이었죠. 그래서 나는 ‘나와 당신이 지향하는 건 통일인데 다만 가는 길이 다를 뿐이다’라고 했어요. 저는 제가 생각하는 통일이라든지, 한반도와 주변국의 정세, 뭐 이런저런 생각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힘들었던 저의 어릴 적 가정사(家庭事)까지도요. 그때부터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죠.”
최기식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통일과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졌다. 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력은 세 개 정도다. ▲일심회 간첩단 사건 수사 ▲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 수사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 역임 등이다. 가장 먼저 일심회 간첩단 사건 수사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변호사들이 묵비권 행사 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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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독일형사법연구회 정기 세미나에 참석한 최기식 당시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최기식 |
이 말이 나올 때까지 검사 열 명이 달려들었다. 이 중엔 공안 수사만 10년 넘게 한 베테랑도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다른 간첩 사건도 마찬가지지만, 이 사건은 자백 없인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일심회는 점조직 형태로 움직였고, 중요한 증거는 북한과 해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원들이 입을 꾹 닫으면 미제(未濟) 사건으로 남을 수 있었다.
여러 검사가 구속된 일심회 조직원들에게 자백하라고 밤늦게까지 설득했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변호사들이 찾아와 묵비권(默秘權) 행사를 종용하며 입단속을 했다. 재판에 넘겨진 일심회 조직원은 5명이었다.
당시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일심회 변호인단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출신 변호사 36명이 주축이 돼 모두 37명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했다. 최기식 변호사도 “그때 민변 변호사들이 일심회 조직원들을 돌아가면서 접견해 ‘얘(다른 조직원은) 진술 안 한다, 너도 진술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자백을 안 하게 관리했다”고 설명했다.
장민호의 자백으로 드러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장민호를 비롯해 북한의 지령을 받은 86 세대 운동권 출신 간첩 5명은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났다. 일심회 조직원들이 북한에 넘긴 자료는 〈민주노동당 주요 당직자 344명 성향 분석〉 〈열린우리당·한나라당·민중연대·통일연대 등 관련 동향〉 〈탄핵 정국 시 국내 동향〉 〈2004년 총선 동향〉 〈2006년 지방선거 동향〉 〈북핵실험 이후 여론〉 등이었다. 트럭 한 대 분량의 방대한 자료 속엔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장민호는 1989년과 1993년, 1999년 방북(訪北)을 했다. 이때 북한에서 충성 서약을 하고 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일심회를 결성한 건 1997년이다. 장민호가 민노당 당직자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민노당 소속 일부 인사들이 넘겨줬기 때문이다. 일심회 사건의 여파로 민노당은 2008년 총선에서 5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심판(2013헌다1) 결정문을 보면 일심회의 이름이 총 40번 등장한다. 헌재는 통진당 주도 세력에 일심회 관련자들이 포함된 점 등을 주요 근거로 들어 재판관 8대 1의 의견으로 통진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최기식 변호사가 검사 시절 받아낸 장민호의 자백 973쪽은 모두 헌재에 제출됐다. 그의 수사가 통진당 해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공안1부 발령 한 달 만에 일심회 주범 수사
― 일심회 사건은 어쩌다가 맡게 됐습니까.
“2006년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였던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이 일심회 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제게 장민호씨 수사를 맡겼죠.”
― 장민호는 일심회 총책인데, 주범을 맡은 걸 보니 공안 수사 경험이 많았나 보죠?
“아니요, 그때 저는 완전히 초짜였어요. 제가 간첩 수사는 검사 생활을 통틀어 2년 정도 했는데, 일심회 사건의 경우 공안 부서에 발령받은 지 한 달밖에 안 된 상태에서 맡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말석(末席)에 가까웠죠.”
― 공안1부엔 어쩌다 가게 된 겁니까.
“북한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저는 2005년 3월부터 2006년 2월까지 독일 뮌헨대학교로 1년간 검사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 독일에서 통일에 대비한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귀국하자마자 서울중앙지검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때가 노무현 정부였죠. 원래 공안1부는 많은 검사가 선호했지만 이때만큼은 기피 대상이었어요. 이런 이유로 공안1부에 지원해서 가게 됐습니다.”
― 수사 외압은 없었나요.
“구체적으로 저에게 수사하지 마라, 이런 건 없었어요. 다만 제가 그때 받았던 느낌은, 국가정보원에서 이 사건을 더 깊게 수사하려고 하는 것 같진 않다는 거였어요.”
당시 안창호 차장검사는 왜 하필이면 공안 부서로 발령받은 지 한 달밖에 안 된 ‘초짜 검사’에게 주범 수사를 맡겼을까. 공안 검사들은 많았다.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이 나중에 밝히길 “일심회 간첩 사건은 주범의 자백으로 (수사에) 성공한 사건이었다”며 최기식 검사에게 장민호를 맡긴 배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여기서 담배나 피우면서 쉬다 가라’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받기 위해서는 수사 경험도 중요하지만, 피의자를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사에 참여한 검사들은 모두 실력과 인품을 갖췄는데, 그중 젊은 열정과 피의자에 대한 진실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검사라고 판단하여 최기식에게 주범에 대한 수사를 맡겼다.”
일심회 사건 이전에도 대공(對共) 사건, 그러니까 간첩 수사를 할 땐 국정원에서 피의자를 시쳇말로 ‘히야시(冷やし·차갑게 식힘)’해서 검찰에 넘기는 방식이 쓰이곤 했다. 살얼음 같은 수싸움을 통해 혐의가 있는 사람을 겁주거나 긴장하게 만들어서 수사에 진척이 생기길 기대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일심회 조직원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국정원에서도 묵비권을 행사하며 수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 어떻게 장민호의 마음을 열었습니까.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강압도 아니고 회유도 아니었어요. 그저 진심으로 대했을 뿐이에요.”
―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나요.
“장민호에게 가족관계를 물었어요. 아내와 아이들은 일심회 사건이 터지자마자 미국으로 떠났대요. 저도 어린 시절 가정 불화, 가난으로 힘들었어요. 그 얘길 했더니 그 사람(장민호)도 초등학교 때 (펌프질하는 시늉을 하며) 점심에 밥 대신 수돗물을 마셨다고 해요.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 매일 도시락을 싸다 주셨다고 했어요.”
최기식 당시 검사는 일심회 사건을 수사하면서 매일 장민호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취조하는 동안에도 사건 얘기보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얘기, 살아온 얘기를 나누며 “구치소는 고달프니까 여기서 담배나 피우면서 쉬다 가라”고 했다. 진심이었다. 최기식 검사는 그 마음이 장민호에게 전해졌다고 믿는다. 둘은 1년간 검사와 피고인의 신분으로 법정에서 마주했다. 장민호는 2007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된다. 재판이 끝나고 장민호가 대전으로 이감(移監)되기 며칠 전, 최기식 검사는 장민호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15년, 최기식은 언론 기고를 통해 장민호에게 전하고픈 말을 남겼다.
“2013년 가을,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 생활은 어떤지요? 가족들과 다시 만났는지요? 언젠가 다시 만나 통일 한국에 대해 대화를 나눌 날을 기다려봅니다.”
‘북한 관련 일’ 하고 싶어 공안 검사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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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시절 최기식 변호사는 통일·북한 문제 전문가로 활약했다. 사진은 2014년 3월 개성공단 국제상사중재위에 참석한 최기식 당시 법무부 통일법무과장. 사진=최기식 |
“저는 밀양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때 집이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일본 징용 피해자셨는데, 어머니가 빨래터에서 돌아오시면 아버지에게 쌓인 감정을 터뜨리곤 하셨어요. 부모님은 이혼하셨다가 자식들을 생각해서 재결합하셨을 정도로 저희 집안은 화목하진 못했어요. 옆집 담벼락이 낮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싸우는 와중에 담장 너머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라고요. 서러움에 목이 끅끅 메었어요. 그때가 초등학교 3~4학년이었어요. 교회로 달려가서 바닥에 꿇어앉아 한참을 울었던 게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나요. 농약병을 쥐고 해선 안 될 생각까지 하기도 했고요. 손이 덜덜 떨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큰 불효를 저지른 건데. 그런 얘기들을 장민호에게 했죠.”
― 공안 검사 이미지에 어울리는 수사 기법은 아닌 것 같은데요.
“수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사람 대 사람으로 대했어요.”
‘통일’에 대한 깊은 관심은 최기식 변호사와 장민호가 말이 통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가 공안 검사가 된 이유도 ‘북한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북한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2017년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소장이 되었다. 지금도 탈북민들을 위한 무료 법률 지원을 하며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 탈북청소년대안학교 이사 등 북한과 관련 있는 여러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어린 시절 어렵게 자라난 탓에 솔직히 처음에는 그저 ‘소년등과(少年登科)’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사법시험에서 네 번이나 떨어졌을 때는 너무 힘들었죠. 그러다가 사시에 붙은 후 사법연수원 시절 ‘이렇게 힘들게 검사가 되었는데, 어떤 사명을 갖고 일해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북한과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북한 인권 도외시한 문재인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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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북한인권기록소장 시절의 최기식 변호사. 사진=최기식 |
― 2016년 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 수사로 몸값이 엄청 뛰었는데,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 말고 더 좋은 자리로 가고 싶진 않았습니까.
“대검 미래기획단장이나 대변인, 법무부 대변인이나 어디 지청장 같은 좋은 보직으로 갈 기회가 있었는데, 며칠 고민하다가 초심을 떠올리면서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써냈어요. 문재인 정부 시절 누가 거기 가고 싶어 했겠습니까(웃음). 법무부에서 바로 오케이 하면서 발령 내줬죠.”
― 문재인 정부에서 북한 인권을 도외시했다는 비판이 나오는데요.
“몸소 느꼈죠.”
―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2017년 겨울에 탈북민 단체들의 모임을 (법무부) 장관께 보고했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못 하게 했죠. 또 가해자를 특정하는 일에 집중해 북한 인권 조사 매뉴얼까지 만들었지만 그때 정부에서 전부 누락시켜버렸어요. 그리고 법무부 청사 입구에 걸려 있던 북한인권기록보존소 동판(현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겼어요. 입구를 바라볼 때 기준으로.”
― 현판을 옮긴 게 딱히 문제가 되나요.
“법무부 현판 밑에 북한인권기록보존소 현판이 있어요. 장관 등이 참여하는 법무부 공식 행사가 있으면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곳이 법무부 현판 앞인데, 그런 사진에 안 나오게 하려고 그런 거죠.”
― 굵직한 일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많죠.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법무부 7층 장관실 바로 위층인 8층에 있었어요. 박근혜 정부는 그만큼 북한 인권에 의미를 두었다는 거죠. 그런데 2018년 9월 용인에 있는 법무연수원 분원으로 사무실이 옮겨졌어요.”
5년 뒤인 2023년 8월, 윤석열 정부는 쪽방 신세였던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사무실을 다시 법무부로 복귀시켰다. 현판도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서 검사 다 빼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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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18일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과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법무부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이전 현판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제일 중요한 게, 사무실을 용인으로 옮기고 얼마 안 지나서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서 근무하던 검사들을 다 빼버렸어요. 원래는 소장도 검사, 평검사도 서너 명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 검사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내쳤어요. 그러곤 변호사 출신 사무관 한 명과 일반직 직원들로 채웠어요.”
― 구성원들이 꼭 검사여야 합니까.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범죄의 역사를 기록하는 곳이니까요. 그 기록을 토대로 나중에 형사 소추를 하려면 검사가 있어야 하잖아요. 독일의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에도 1961년 설립 이후 통일이 될 때까지 30년 동안 항상 부장검사가 파견 나왔어요. 두 기관의 목적은 같습니다. 인권 탄압과 유린을 자행하는 와중에도 누군가 이를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행동을 위축시키는 일반 예방적 효과가 있어요. 통일이 되면 이곳의 기록을 토대로 처벌받을 테니까. 처벌까지 이뤄지면 특별 예방적 효과죠. 동독은 서독의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를 극도로 싫어했어요.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서 검사들을 다 내친 건 두 가지 효과를 무력화(無力化)시킨 거죠.”
형 탈북시키려다 ‘간첩’으로 몰린 탈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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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매일경제》는 ‘2016년 올해의 검찰수사 경제사건’으로 최기식 부장검사의 ‘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 수사를 선정했다. 사진=최기식 |
― 국보법이 문제라니, 무슨 뜻이죠.
“이런 일이 있었어요. 국가보안법 제5조(자진지원) 위반 사건인데요, 탈북민 한 분이 북한에 남아 있는 친형을 데려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걸 알게 된 북한 보위부에서 그 형한테 가서 ‘동생한테 연락해라, 국경으로 나오라고 해라’라고 요구한 거죠. 그래서 결국 중국과 북한 국경에서 동생이 형을 만났는데, 보위부에선 형을 통해 뭘 보내라고 자꾸 오더(지시)를 했더라고. 이게 한 번이 아니라, 보위부가 계속 형을 인질 삼아 편의 제공을 요구한 거죠. 동생은 형을 탈출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건데. 그런데 이게 법정에서 다른 건 다 무죄(無罪)를 받았는데 ‘자진지원’ 하나에 걸려서 결국 국보법상 간첩에 해당됐어요. 국가안보사범은 (징역이) 7년 이상이에요. 감경(減輕)해도 3년 6개월. 근데 아시다시피 집행유예가 되려면 (형량이) 2년 6개월 이하여야 하는데, 결국 이 사람은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지금도 옥살이를 하고 있어요.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도 제청했는데….”
최기식 변호사는 검사 시절 공안뿐만 아니라 다른 수사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2016년부터 이듬해 8월까지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 부장검사로 있었는데, 이때 그가 맡은 사건이 《매일경제》가 ‘2016 올해의 경제사건’으로도 선정한 ‘폴크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이다.
‘디젤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내용은 2015년 폴크스바겐을 비롯한 유럽 자동차 회사들이 디젤 자동차의 배출 가스 양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폴크스바겐은 한국에서만 보상금과 과징금(課徵金) 등 3400억원을 물게 됐다. 이 사건을 해결한 수사팀이 최기식 당시 부장검사가 이끄는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였다.
― 디젤 게이트는 어쩌다 맡게 됐습니까.
“사실 원해서 했던 사건은 아닌데, 형사5부에 발령이 났거든요. 여긴 교통과 환경 분야 수사를 맡아요. 주로 교통(사건)이 많죠. 환경은 사실 한강물 떠놓고 (수질 검사하는) 이런 거거든요. 형사5부장은 보통 보고거리도 없고. 그래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사건이 있나 봤더니, 폴크스바겐 사건 수사 의뢰가 들어왔더라고. 내가 오기 직전에 형사5부를 맡았던 부장은 경찰에 수사 지휘를 맡겼고. 그래서 검사장한테 우리가 하겠다고 보고하고 경찰이 갖고 있던 사건을 가져왔죠.”
― 이 건은 수사하는 데 어려웠습니까.
“검사 4명이 달라붙었어요. 배출 가스 조작이란 게 쉽게 밝힐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근데 수사를 하다 보니까 통관 서류가 눈에 띄더라고요. 독일에서 한국으로 수입하기 위한 서류. 그걸 조작한 게 포착된 거지. 그래서 2016년 2월부터 서울 강남구 폴크스바겐코리아 본사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했고요. 배출 가스도 여러 번 시험을 해보니까, 폴크스바겐이 검사소에서 검사받을 땐 배출 가스가 정상적으로 나오도록 (조작 프로그램으로) 조정해놓고 밖에서는 무제한으로 나오게 했더라고요.”
‘인생에서 가장 참담했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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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재직 시절의 최기식. 사진=최기식 |
“수원지검 성남지청 차장검사였을 때, 그러니까 2018년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를 기소했죠.”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성남시장 재임 시절인 2012년 6월 보건소장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등에게 친형 이재선씨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도록 지시(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하는 등의 혐의를 받았다. 또한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TV 토론회에서 “친형을 강제 입원시키려고 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허위사실 공표 혐의도 받았다. 이 밖에도 검사 사칭 부인(허위사실공표), 대장동 개발 과장(허위사실공표) 혐의가 병합(倂合)돼 기소됐다.
수원지법에서 열린 1심은 모두 무죄(無罪) 판결했다. 이듬해 수원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선 친형 강제 입원과 관련한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을 유죄(有罪)로 보고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7대 5의 의견으로 파기(破棄) 환송했다.
이때 캐스팅 보트(casting vote·가부 동수 상황에서의 결정권)를 쥐고 있던 인물이 권순일 당시 대법관이다. 2023년 1월 13일 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천화동인 4호 소유주 남욱 변호사는 “김만배씨가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권순일에게 부탁해 대법원에서 뒤집힐 수 있도록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고 한다.
여하튼 무죄 취지로 하급심으로 돌려보내진 이 사건은 결국 ‘무죄’로 결론이 났다. 최기식 변호사는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참담했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이후 최기식 변호사는 미련 없이 검사복을 벗었다.
“내가 검사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은, 우리가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매 순간 정의로웠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수사하며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재명 사건은 권력자들을 법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에 대한 깊은 한계를 느끼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 수사를 하면서 유죄가 나올 거라고 확신했습니까.
“물론이죠. 그때가 문재인 정부였는데, 내가 출세하고 싶었으면 설렁설렁 대충 제쳐 기소 안 하면 됐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 수사해보니, 이재명이라는 인물은 어떻던가요.
“참 차가운 사람이다. 자기 부하들은 엄청 잘 챙기고 자기한테 반대하는 사람은 완전히 깔끔하게 쳐내버리는 사람 같았어요. 자기 사람은 정말 따뜻하게 관리를 하면서도 반대 세력은 완전히 제거한다는 느낌을 받았고요. 그리고 형수, 조카와의 통화 녹음을 듣고 많이 놀랐고. 저였으면 형수와 조카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을 것 같은데 안 하더라고요.”
‘우리가 가야 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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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의왕·과천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진 최기식 예비후보(오른쪽)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왼쪽)과 악수하며 파이팅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진=최기식 |
―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는 인연이 있나요.
“같이 근무를 하거나 특별한 인연은 없습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과는 군법무관 훈련을 같이 받았고, 2006년 2월쯤에 한 달 동안 법무연수원에서 논문을 쓰면서 같이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 한 위원장은 특수금융 쪽으로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통일·북한 분야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했죠.”
인터뷰를 마치기 전에 최기식 변호사는 1986년 제10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동상(銅賞)을 수상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라는 노래 이야기를 꺼냈다.
“이 노래 가사에 제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담겨 있어요.
‘이 험한 세상 우리 가야 하는 길, 한발 두발씩 그냥 가야 하는 게 아니야. 모진 바람 속에 핀 저 들꽃마냥 마음 아픈 이들 위해 향기 드리며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