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 국가도 위기 상황 때는 독재권 발동… 본질적으로 자유민주헌정이 허용하는 것”(클린턴 로시터)
⊙ 유신 시대의 제한은 무책임한 선동 일삼는 僞善的 政商輩 세력의 ‘국민에 대한 접근 제한’
⊙ 링컨, 남북전쟁 당시 美연방 보존 위해 비상대권 행사
⊙ 유신 당시 한국은 건국 이래의 ‘상시적 비상 상태’에 주한미군 철수 등 ‘긴급한 비상 상황’이 더해진 위기 상황
⊙ 朴正熙는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일을 했다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 유신 시대의 제한은 무책임한 선동 일삼는 僞善的 政商輩 세력의 ‘국민에 대한 접근 제한’
⊙ 링컨, 남북전쟁 당시 美연방 보존 위해 비상대권 행사
⊙ 유신 당시 한국은 건국 이래의 ‘상시적 비상 상태’에 주한미군 철수 등 ‘긴급한 비상 상황’이 더해진 위기 상황
⊙ 朴正熙는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일을 했다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 1976년 5월 31일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조선DB
10월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관련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달이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維新)이 있었다. 그리고 9일 뒤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2022년 올해는 10월 유신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한국의 국제적 순위는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밑바닥이었다. 그랬던 한국이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천지개벽의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유신 시대에 본격화된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한국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朴正熙 부정론’의 逆說
이 같은 절대적 위업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정치’는 여전히 시비의 대상이다. 10월 유신에 대해선 특히 더 그렇다. 박정희의 업적을 인정한다 해도 유신만큼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리가 아직 높다. 기준은 민주주의다.
‘박정희의 정치’를 비판하는 이들은 어떻든 민주주의를 했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 비판론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아이러니한 문제가 발생한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것을 공허(空虛)하게 만들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는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결과다. 박정희의 정치를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객관적 결과’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원칙’과 분리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경제와 관련해선 민주주의라는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게 되고 만다.
이 역설(逆說)이 논박되려면 민주주의가 없는 상태에서의 경제발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마다 보릿고개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 앞에서 민주주의가 없으면 굶주림을 면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되면 비판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민주주의의 가치가 허무해지게 된다.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박정희 부정론에는 경제성장의 주역은 국민이었다는 것도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인정한다 해도 그 성과는 박정희의 업적이 아니라 국민의 업적이라는 논리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다음의 비판이 날카롭다.
“어떤 정치지도자는 국민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고도성장이 이루어진 것이지 박정희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정치인들을 보면 암담한 생각이 든다. 국민이 모두 열심히 일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지만, 이들의 얘기를 뒤집어보면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국민이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 된다.”(‘나는 왜 박정희를 존경하게 되었는가’ 《월간조선》 1991년 5월호, 김상기 당시 미국 남일리노이 대학 교수)
국민 운운은 감성적으로 일견 그럴듯하게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국민을 탓하는 논리가 되고 악한 지도자에게 면죄부(免罪符)를 주는 논리가 될 수 있다. 김상기 교수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덧붙인다.
“‘한국 경제가 성장한 것은 박정희 때문이라기보다 국민이 열심히 일한 결과이다’라는 주장은 ‘북한 경제가 낙후한 것은 김일성 부자(父子)의 위대한 영도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동포가 게으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라는 주장과 똑같은 낮은 수준의 오류이다.”
‘독재’라는 용어의 적용은 합당한가?
박정희를 폄훼하는 이들은 최종적으로 ‘독재(獨裁)’라는 용어로 ‘박정희 정치’에 대한 부정을 완결한다. 민주주의의 시대, 독재라는 딱지는 결정적인 비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간단찮은 문제가 있다. 객관성과 엄밀성이 허술하다.
수많은 독재자가 열거될 수 있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 폴 포트, 남미(南美) 군사독재, 이디 아민, 리콴유(李光耀) 등등은 어떻든 일단은 모두 독재자다. 이들을 동일선상에 놓고 ‘아무튼 독재’라는 범주로 묶어버리게 되면, 진짜 폭정(暴政)의 실체가 오히려 가려지게 된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등도 그렇지만 크메르루주(Khmer rouges)의 폴 포트는 단적인 경우다. 폴 포트는 800만 명 남짓의 자국민 가운데 200만여 명의 인명을 살해하는 대학살극을 자행했다. 그런 자를 그저 독재라는 용어로만 규정하는 것은 극히 안이하다. 그런 주장은 오히려 그자의 악행(惡行)을 가리게 된다.
리콴유의 경우는 반대의 문제점이 생긴다. 리콴유도 정치 행태로만 보면 독재라는 용어를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사실상 종신(終身) 집권을 했으며 권좌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폴 포트 등의 경우에 비춰보면 리콴유를 독재라는 동일선상의 용어로 규정하는 것은 시시비비를 떠나 일종의 모독이 된다. 박정희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발독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개발독재는 경제개발을 위해 불가피하게 민주주의를 억제했다는 논리지만 어떻든 ‘민주정에 대한 억압’이라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독재라는 개념은 여전하다. 게다가 프롤레타리아독재·인민민주독재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불가피성의 논리를 갖고 있다. 차이가 희석돼버린다.
독재를 정치 행태상의 범주적 용어로 사용하게 되면 같이 묶어선 안 되는 것을 동일 범주화시키는 문제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독재를 정치적 가치판단의 수사(修辭)로 사용하게 되면 폭정의 악행에 대해선 도리어 가림막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선 부당한 딱지가 된다.
金日成에 대해선 內在的 접근, 朴正熙에 대해선?
김일성(과 김가 일족)의 경우와 박정희의 경우를 대비하면 특히 그렇다. 김일성 일족 3대(代)의 통치 행태는 독재라는 용어가 싱겁다. 북한의 김일성 일족의 지배체제는 그냥 독재가 아니다. 전체주의(專制主義), 전제정이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앞세우면서 실제 지배는 공포의 폭정으로 행한다. 그러면서 이데올로기로 정신적 지배를 강제하여 구호와 폭정 사이의 간극을 메꾼다. 폭력을 동반한 사이비 종교집단과 같다. 범죄적 지배다.
그런데 박정희의 정치를 독재라고 비난하는 자들 대부분은 북한 김가 일족의 범죄적 지배에 대해선 독재라는 용어조차 삼간다. 마치 예의를 갖추듯이 조심스러운 접근을 한다. 이른바 ‘내재적(內在的) 접근(immanent approach)’이다.
재독(在獨) 사회학자 송두율이 대표적이다. 송두율은 “북한은 사회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잣대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을 기준으로 북한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핏 사회과학 방법론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의 시각으로 유대인 학살을 헤아리고 폴 포트의 시각으로 킬링필드를 이해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본색은 바로 그런 식으로 북한의 폭정을 변호하고 방어하는 논리다.
그럴 만했다. 송두율은 그냥 친북(親北)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1973년 북한을 처음 방문했는데, 이때 북한노동당에 입당(入黨)했다. 북한의 지원금을 받았다. 북한노동당 입당 이듬해인 1974년 독일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고, 독일에서 ‘유신독재 반대시위’를 했다.
모든 반(反)박정희 인사가 송두율과 같은 부류는 아니다. 하지만 반대 투쟁의 행적이 누적되면서 감염되듯이 닮아갔다. 김일성에 대한 내재적 접근은 그럴듯하게 여기면서도 박정희에 대해선 마치 천상(天上)의 기준과도 같은 잣대로 비난을 이어갔다. 이런 뒤틀린 의식이 어느덧 상식처럼 퍼져 급기야 교과서 서술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기왕의 일반적 통념에 있는 허점과 무관치 않다.
대통령제 자체가 ‘독재관’의 의미 내포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미국의 민주주의 안에는 ‘독재’가 제도적으로 내재화돼 있다. 바로 로마 공화정의 딕타토르(dictator), 즉 독재관(獨裁官) 제도다. 미국은 민주정(民主政)의 중우(衆愚) 정치의 위험성 예방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모델로 삼은 것은 고대(古代) 로마의 공화정(共和政)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정치제도는 로마 공화정의 제도와 매우 닮아 있다. 미국의 상원(上院)은 로마의 원로원(元老院)에, 하원(下院)은 민회(民會)에 해당한다. 미국의 상원(Senate)과 로마 원로원(Senatus)의 영어식 표기는 거의 같다. 대통령(President) 제도도 로마의 공화정 제도에서 착안하여 응용한 것이었다. 공화정 시대 로마는 평상시에는 임기 1년의 집정관(執政官·Consul) 2명을 선임하여 합의에 의해 통치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임기 6개월의 1인의 독재관(dictator)을 뽑아 전권(全權)을 위임했다.
마키아벨리(1469~1527년)는 《로마사 논고》(1517)에서 로마 공화정의 힘은 바로 딕타토르(독재관) 제도가 있었던 덕분이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이 같은 고대 로마의 독재관과 집정관을 합쳐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로마식 1인 독재관이 평상시에도 집정관의 임무를 겸하도록 한 셈이다. 이것은 대통령은 그 자체로 이미 독재관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독재라는 용어는 본래는 부정적 함의의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그 어원은 로마의 딕타토르이다. 그런데 권력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딕타토르의 성격을 갖고 있다. 딕타토르적이지 않은 권력은 둘 중의 하나다. 무능(無能) 아니면 무책임이다. 그래서 독재라는 용어를 정치적 수사로 사용하는 것은 부족하거나 부당한 것이 된다. 진짜 악랄한 폭정을 행한 자들에 대해선 부족한 용어이며, 위기에 맞서 단호하게 통치의 본질적 의무를 행한 경우에 대해선 부당한 용어가 된다.
링컨의 憲政的 독재
민주공화국은 스스로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를 제도적으로 내재화하고 있다. 대통령제 자체가 본래 그런 기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든 자유민주헌정은 위기에 대한 대응체제를 발현시킬 수 없으면 지탱할 수 없다. 그래서 ‘헌정적(憲政的) 독재(Constitutional Dictatorship)’를 기본원리로 허용한다.
미국 정치학자 클린턴 로시터가 1948년 펴낸 《헌정적 독재(Cons-titutional Dictatorship)》는 이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副題)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위기 정부(Crisis Government in the Modern Democracies)’다. 로시터는 민주주의 국가도 위기 상황에 봉착할 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비상대권의 독재권을 발동하게 되며, 이것은 형태상 독재의 모습을 띠어도 본질적으로 자유민주헌정이 허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남북전쟁 상황에서의 링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링컨은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비상 행정명령을 발동해 군사적 대응을 시작했다. 군(軍) 지휘관들이 군사작전상 필요하다면 영장 없이 미국 시민을 체포할 수 있도록 하는 명령도 내렸다. 링컨의 이 모든 조치는 의회의 승인이 없이 행해진 대통령 단독의 비상대권 행사였다. 즉 헌정적 독재였다.
링컨 대통령이 독재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미연방은 지켜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남북전쟁은 큰 희생을 치렀지만, 연방이 붕괴됐다면 이후의 희생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미 대륙 내에 수많은 국가가 난립(亂立)해 유럽이 그랬듯이 그들 사이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수 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 강국 미국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 그리고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제가 아닌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의 전시(戰時)내각이 행사했던 비상대권도 본질적 성격에선 동일했다. 자유민주체제라고 해서 그 같은 비상대권을 부정해버리면 오히려 그 자유민주국가 자체가 근본적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박정희 시대, 특히 유신 전후 시기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敵은 민주주의 자신
민주주의(democracy)는 본질적으로는 가치적 함의를 가진 주의(主義·ism)가 아니라 하나의 정체(政體)로서의 민주정(民主政)이다. 그러나 역사가 거듭되면서 민주는 정치적 가치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인식을 수용한다면 민주주의는 더욱이 섬세하게 고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중하게 여기는 이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해진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가장 흔한 통념은 독재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물론 실제 역사상으로도 틀린 생각이다.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체제는 때로는 헌정적 독재가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험은 오히려 민주주의 자신에 의해 발생한다.
민주주의는 기회와 유혹을 동시에 제공한다. 기회 자체가 유혹으로 작동한다. 부실한 자들도 정치적 영달을 꿈꾸게 만든다.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은 능력과 소명(召命)의식보다는 선동(煽動)의 기량에 더 치우치게 만든다. 그 결과 본질적으로는 싸구려 출세꾼인 정치적 사이비(似而非)들이 선동을 무기로 발호한다. 대중이 그에 현혹되면 정치에서 진정한 실력과 공적(公的) 책임의 덕목이 사라진다. 당선만을 목적으로 한 정치공학적 포장과 마케팅의 술수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는 건강성을 상실한다.
현명한 소비자가 시장의 건강을 지키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렇듯 민주주의는 양식(良識) 있는 시민이 있어야 건강이 유지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정은 그 속성상 양식과 책임감보다는 수적인 다수에 쏠리게 되는 경향이 있다. 포퓰리즘의 위험이 상존한다. 민주정의 이 같은 약점을 냉정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우상화(偶像化)하게 되면 결국에는 민주주의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建國과 近代化
그런데 이런 상황에 중대한 ‘국가적 과업의 추진’과 ‘국내외적 위기 대응’ 문제까지 겹쳐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신을 선포할 당시는 어땠을까?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을 제기할 수 있다. 그에 대해 각각 다른 입장이라 해도 원칙이 있음을 전제(前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입장을 갖든 그 ‘추상적 원칙’을 ‘구체적 현실’에 곧바로 대입하여 평가하는 것은 방법론상으로 오류(誤謬)다. 현실에 대한 분석이 먼저이며 그다음에 일반 원칙이 어떻게 구현돼갔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 순서가 바뀌면 현실은 증발하고 원칙은 관념으로만 남는다. 그런데 현실 없는 관념만의 원칙은 이미 원칙도 아니게 된다.
유신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실제 상황의 전개에 대해 살피는 것이 먼저이고 평가의 잣대를 갖다 대는 건 그다음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신성의 잣대로 삼아 유신 시대를 평가하고 싶다고 해도 순서는 그래야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建國)되었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국민국가다. 이로써 대한민국에 소속된 사람들은 신민(臣民)이 아닌 국민(國民)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건국이 국민에게 원하는 삶을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건국은 하나의 약속이요 시작일 뿐이었다. 국민다움도 곧바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근대(前近代)의 농민적 정체성(正體性)과 습속(習俗)이 여전하며, 시민사회적 성숙도 이제 막 시작된 것일 뿐이었다.
건물을 세우는 것은 완공(完工)으로 완결된다. 그러나 국가는 건국이 완공이 아니라 시작이며 국가 건설이 이어져야 한다. 국가는 그렇게 하여 부강함을 향해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동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노력이 함께해야 한다. 국민과 국가는 그렇게 하여 함께 성장해간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같은 과업을 이루어나가는 총체적(總體的) 과정을 ‘근대화(近代化)’라고 지칭했다. 즉 단순히 경제성장이 아니었다. 경제성장이 핵심이었지만 국민다움의 성장과 성숙도 함께였다.
‘성숙 상황’의 잣대로 ‘미성숙 상황’을 공격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의 원칙과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건국됐다. 하지만 건국과 동시에 이 같은 원칙과 원리가 곧바로 성숙한 수준에서 구현될 수는 없다. 경제가 그러하고 국가 자체가 그렇듯 국민주권의 민주정치 또한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것이다. 더욱이 대한민국은 건국하자마자 불과 3년 만에 6·25전쟁이라는 대한민국의 생존이 달린 중대한 시련을 경험한 터였다. 휴전이 된 뒤에도 그 위협은 계속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건설은 이 같은 위협에 맞서가면서 진행돼야 했다.
그런데 이승만(李承晩) 때도 박정희 때도 반대파들은 ‘국가 건설의 진행’에 힘을 함께 모으기보다는 ‘일반 원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앞세워 정치적 공격을 해댔다. 이것은 ‘성취기 상황’의 잣대로 ‘진행기 상황’을 재단(裁斷)하고 관념으로 현실을 공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다움의 성장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성숙 상황’의 잣대로 ‘미성숙 상황’을 공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미성년에게 성년다움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비판자들의 행태는 따지자면 그 자체가 미성숙이었다.
유신 시대 평가에서 또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비상 상황이라는 점이다. 우선 한국은 유신 당시만이 아니라 1948년 8월 15일 건국 때부터 상시적(常時的) 비상 상태였다. 건국부터가 양립(兩立)할 수 없는 적대적 대립 속에서 비상한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사태를 3년간 겪어야 했다. 그런데 그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일 뿐이었다. 북한 공산 세력은 그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전복을 겨냥한 도발과 공작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북한의 대한민국에 대한 이 같은 전복전에 의한 위기는 미국의 역사상 여러 시기의 경우와 비교해 가벼운 게 결코 아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엄중하다. 북한과 그 배후 세력인 공산전체주의 세력의 전복전(顚覆戰)을 막아내지 못하면 한국은 그냥 사라진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안보환경의 급변과 야당의 무책임
유신이 선포될 당시는 그 상시적 비상 상태에 더해 위험이 더한층 가중되어가던 상황이었다. 국제적으로 닉슨 독트린(1969년 7월 25일)이라는 안보 환경의 급변이 닥쳐오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같은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한국 안보의 틀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다. 그러나 닉슨은 주한미군의 철수는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미국은 1971년 3월 27일 한국에서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제7사단·2만2000명)을 결국 철수시켰다.
한국에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4월 27일)의 선거전이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상시적 비상 상태’에 ‘긴급한 비상 상황’이 더해진 위기였다. 유신이 선포되기 1년 전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당시 야당 신민당은 위기에 대한 대응은 외면한 채 반대를 위한 반대를 여전히 거듭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오도(誤導)하는 갖가지 포퓰리즘적 선동도 더해갔다. 정치적 야심만 있을 뿐 무분별했으며 무책임했다.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위해선 집권 세력의 양식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야당 세력도 집권 세력을 대체할 만한 능력과 양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권 교체는 안 하느니만 못 한 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반박정희 야당 세력들은 이 같은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야당 세력의 자질과 행태 자체도 대한민국의 중요한 위기 중의 하나였다.
한국 야당의 이 같은 문제점은 뿌리가 깊었다. 건국 당시 한국민주당(한민당)부터 그랬다.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발목을 끊임없이 잡았다. 내각제를 요구하며 대통령 이승만을 계속 공격했다. 내각제만 민주적이며 대통령제가 반민주적인 것일 수는 없다. 더욱이 한국은 신생국일 뿐만 아니라 6·25전쟁이 보여주듯 비상한 위기가 항상 동반(同伴)하는 나라였다.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체제가 필요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확립하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은 이에 계속 제동을 걸었다. 6·25전쟁 도중에도 그랬다.
한민당의 이 같은 문제점은 박정희 시대의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5·16 후 1963년 민정 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진영 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은 “먼저 당선되는 게 중요… 일단 당선되고 나면 상황을 분석… 동냥을 해서라도 국민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도 없고 계획도 없다. ‘일단 당선’은 조선 시대 양반 유생의 ‘입신(立身)’과 다르지 않다. 발상도 태도도 모두 전근대적이다.
야당의 이 같은 속성은 윤보선 이후에도 내내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상징적 사례가 김영삼(金泳三)이었다. 김영삼은 중학생인 소년 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는 걸 내내 자랑스럽게 말했다. ‘과업을 이루어내겠다’가 아니라 ‘지위에 올라가겠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은 그것이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임을 몰랐다. 김영삼은 당시 야당의 촉망받는 대표적인 젊은 정치 주자였다. 그런 사람의 의식 수준이 그랬다.
保守야당에 스며든 좌익 성향
그런데 야당의 문제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이념적 위험성이 스며들고 있었다. 한민당은 물론 그 맥을 계승한 한국의 야당은 기본적으로 반공(反共)정당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경과하면서 서서히 좌익적 성향이 배어들고 자라나고 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개발도상국 사이에 유행이 돼 있던 종속이론적 발상의 영향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계속 잔존(殘存)하던 좌익 성향 인사들의 영향도 있었다.
그 문제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김대중(金大中)이었다. 김대중의 내면적인 이념적 성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떻든 드러낸 정치적 면모는 좌익적 성향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선 1971년 대선(大選)을 앞두고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한 《대중경제론》은 좌파적 구상을 담고 있었다. 실제로 그 책을 쓴 박현채(朴玄埰·1934~1995년)는 소년 빨치산 출신이었다.
한편 김대중은 이에 더해 1971년 대선에서 ‘4대국 안전보장론’을 들고나왔다. 1971년 대선은 ‘닉슨 독트린’(1969년 7월 25일)으로 한국의 안보 환경에 중대한 시련이 닥쳐오고 있는 가운데 치러지는 선거였다. 그런데 김대중 후보는 안보태세 강화가 아니라 반대 방향의 공약을 내걸었다. 남북은 긴장 완화와 남북 교류를 통한 평화 지향으로 나아가고 미국·일본·중국·소련이 한반도의 안전보장을 해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예비군 폐지론’도 제기했다. 파격적 제안이었고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안보의 근간을 흔드는 파괴적 발상이었다.
북한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더 당연하게도 대남(對南) 적화(赤化) 책동을 멈춘 적이 없었다. ‘4대국 안전보장’은 미국이 한국에서 발을 빼려는 여지가 있음에도 한국에 소련과 중국의 간섭과 영향력 확대를 자청해서 불러들이는 꼴이었다. 북한과 공산권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안보 환경에 국제적으로 중대한 위기가 엄습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이런 위험한 공약을 들고나왔다. 그의 경제 공약대로면 이제 막 본격화되기 시작한 경제성장도 중단될 게 틀림없었다. 당시의 야당이 박정희 정권을 대신할 만한 대한민국을 위한 책임 있고 건강한 정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아니 대한민국은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을까?
유신은 政商輩 세력에 대한 제한
유신은 분명히 민주정의 일상적 원칙에 대해 제한을 가했다. 유신은 국민의 직접적인 대통령 선출권을 제한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토록 하여 국회의원 선출권도 제한했다. 그러나 그 제한은 본질적으로는 국민에 대한 제한이 아니라 무책임한 선동을 일삼는 위선적(僞善的) 정상배(政商輩) 세력의 ‘국민에 대한 접근 제한’이었다.
비상한 상황임에도 무책임한 무리가 정략적(政略的) 선동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위기 요인이었다.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당시 한국에 닥쳐온 국내외적 위기를 더욱 증폭시킬 위험이 있었다. 유신은 그 위기들을 이겨내고 절박한 국가적 국민적 과업을 중단 없이 이루어내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 결단을 비난하는 게 합당하려면 그만한 대안(代案)과 대안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이 직면했던 비상 상황을 이겨내고 역사적 성취를 해낼 가능성을 인정할 만한 대안 세력은 없었다. 당시의 야당은 그런 능력도 책임감도 없었다. 야당만이 아니라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 전반이 다 그런 수준이었다. 다음의 예화는 그 점을 보여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이력을 가진 어느 현대사 저술가가 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박정희를 비난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그는 박정희의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정희는 독재를 위해 경제성장을 추구했을 뿐이다.”
기괴한 논리다. 그가 이런 이상한 논리를 확신에 차서 펼치는 것은 ‘아무튼 독재는 나쁜 것’이라는 집착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언설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투쟁 세력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경제성장’이라는 당시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진정으로 좋은 일을 외면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그런 철없는 반대를 무릅쓰고 ‘좋은 일’을 해내기 위한 결단을 선택했다.
할 일은 한 박정희
“독재를 위한 경제성장 추구”라고 한 것은 박정희를 비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뒤집으면 예찬이 된다. ‘독재’가 ‘경제성장’이라는 좋은 일을 하게 했으니 결국에는 독재는 좋은 것이 돼버린다. 그런데 유신은 실제로 그랬다. 유신을 어떻게 비난하든 유신 시대는 결국 좋은 일을 해냈다. 유신 시대의 경제발전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기 때문이다.
유신은 당시에도 지금도 흔쾌하게 이해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일을 했다. 박정희는 ‘지금 여러 가지 불만과 비판이 있다 해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입장을 시종일관 고수했다. 달콤한 언사로 당장을 모면하는 게 아니라 단호하게 국민을 설득하며 결연하게 일을 추진해나갔다. 그리고 평가는 역사에 맡겼다. 그 평가는 분명하다. 어떤 시비가 있든 박정희 시대는 ‘기적의 역사’로 자리매김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한국의 국제적 순위는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밑바닥이었다. 그랬던 한국이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천지개벽의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유신 시대에 본격화된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한국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朴正熙 부정론’의 逆說
이 같은 절대적 위업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정치’는 여전히 시비의 대상이다. 10월 유신에 대해선 특히 더 그렇다. 박정희의 업적을 인정한다 해도 유신만큼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리가 아직 높다. 기준은 민주주의다.
‘박정희의 정치’를 비판하는 이들은 어떻든 민주주의를 했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 비판론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아이러니한 문제가 발생한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것을 공허(空虛)하게 만들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는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결과다. 박정희의 정치를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객관적 결과’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원칙’과 분리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경제와 관련해선 민주주의라는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게 되고 만다.
이 역설(逆說)이 논박되려면 민주주의가 없는 상태에서의 경제발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마다 보릿고개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 앞에서 민주주의가 없으면 굶주림을 면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되면 비판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민주주의의 가치가 허무해지게 된다.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박정희 부정론에는 경제성장의 주역은 국민이었다는 것도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인정한다 해도 그 성과는 박정희의 업적이 아니라 국민의 업적이라는 논리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다음의 비판이 날카롭다.
“어떤 정치지도자는 국민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고도성장이 이루어진 것이지 박정희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정치인들을 보면 암담한 생각이 든다. 국민이 모두 열심히 일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지만, 이들의 얘기를 뒤집어보면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국민이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 된다.”(‘나는 왜 박정희를 존경하게 되었는가’ 《월간조선》 1991년 5월호, 김상기 당시 미국 남일리노이 대학 교수)
국민 운운은 감성적으로 일견 그럴듯하게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국민을 탓하는 논리가 되고 악한 지도자에게 면죄부(免罪符)를 주는 논리가 될 수 있다. 김상기 교수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덧붙인다.
“‘한국 경제가 성장한 것은 박정희 때문이라기보다 국민이 열심히 일한 결과이다’라는 주장은 ‘북한 경제가 낙후한 것은 김일성 부자(父子)의 위대한 영도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동포가 게으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라는 주장과 똑같은 낮은 수준의 오류이다.”
‘독재’라는 용어의 적용은 합당한가?
박정희를 폄훼하는 이들은 최종적으로 ‘독재(獨裁)’라는 용어로 ‘박정희 정치’에 대한 부정을 완결한다. 민주주의의 시대, 독재라는 딱지는 결정적인 비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간단찮은 문제가 있다. 객관성과 엄밀성이 허술하다.
수많은 독재자가 열거될 수 있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 폴 포트, 남미(南美) 군사독재, 이디 아민, 리콴유(李光耀) 등등은 어떻든 일단은 모두 독재자다. 이들을 동일선상에 놓고 ‘아무튼 독재’라는 범주로 묶어버리게 되면, 진짜 폭정(暴政)의 실체가 오히려 가려지게 된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등도 그렇지만 크메르루주(Khmer rouges)의 폴 포트는 단적인 경우다. 폴 포트는 800만 명 남짓의 자국민 가운데 200만여 명의 인명을 살해하는 대학살극을 자행했다. 그런 자를 그저 독재라는 용어로만 규정하는 것은 극히 안이하다. 그런 주장은 오히려 그자의 악행(惡行)을 가리게 된다.
리콴유의 경우는 반대의 문제점이 생긴다. 리콴유도 정치 행태로만 보면 독재라는 용어를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사실상 종신(終身) 집권을 했으며 권좌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폴 포트 등의 경우에 비춰보면 리콴유를 독재라는 동일선상의 용어로 규정하는 것은 시시비비를 떠나 일종의 모독이 된다. 박정희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발독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개발독재는 경제개발을 위해 불가피하게 민주주의를 억제했다는 논리지만 어떻든 ‘민주정에 대한 억압’이라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독재라는 개념은 여전하다. 게다가 프롤레타리아독재·인민민주독재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불가피성의 논리를 갖고 있다. 차이가 희석돼버린다.
독재를 정치 행태상의 범주적 용어로 사용하게 되면 같이 묶어선 안 되는 것을 동일 범주화시키는 문제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독재를 정치적 가치판단의 수사(修辭)로 사용하게 되면 폭정의 악행에 대해선 도리어 가림막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선 부당한 딱지가 된다.
金日成에 대해선 內在的 접근, 朴正熙에 대해선?
김일성(과 김가 일족)의 경우와 박정희의 경우를 대비하면 특히 그렇다. 김일성 일족 3대(代)의 통치 행태는 독재라는 용어가 싱겁다. 북한의 김일성 일족의 지배체제는 그냥 독재가 아니다. 전체주의(專制主義), 전제정이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앞세우면서 실제 지배는 공포의 폭정으로 행한다. 그러면서 이데올로기로 정신적 지배를 강제하여 구호와 폭정 사이의 간극을 메꾼다. 폭력을 동반한 사이비 종교집단과 같다. 범죄적 지배다.
그런데 박정희의 정치를 독재라고 비난하는 자들 대부분은 북한 김가 일족의 범죄적 지배에 대해선 독재라는 용어조차 삼간다. 마치 예의를 갖추듯이 조심스러운 접근을 한다. 이른바 ‘내재적(內在的) 접근(immanent approach)’이다.
재독(在獨) 사회학자 송두율이 대표적이다. 송두율은 “북한은 사회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잣대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을 기준으로 북한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핏 사회과학 방법론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의 시각으로 유대인 학살을 헤아리고 폴 포트의 시각으로 킬링필드를 이해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본색은 바로 그런 식으로 북한의 폭정을 변호하고 방어하는 논리다.
그럴 만했다. 송두율은 그냥 친북(親北)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1973년 북한을 처음 방문했는데, 이때 북한노동당에 입당(入黨)했다. 북한의 지원금을 받았다. 북한노동당 입당 이듬해인 1974년 독일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고, 독일에서 ‘유신독재 반대시위’를 했다.
모든 반(反)박정희 인사가 송두율과 같은 부류는 아니다. 하지만 반대 투쟁의 행적이 누적되면서 감염되듯이 닮아갔다. 김일성에 대한 내재적 접근은 그럴듯하게 여기면서도 박정희에 대해선 마치 천상(天上)의 기준과도 같은 잣대로 비난을 이어갔다. 이런 뒤틀린 의식이 어느덧 상식처럼 퍼져 급기야 교과서 서술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기왕의 일반적 통념에 있는 허점과 무관치 않다.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미국의 민주주의 안에는 ‘독재’가 제도적으로 내재화돼 있다. 바로 로마 공화정의 딕타토르(dictator), 즉 독재관(獨裁官) 제도다. 미국은 민주정(民主政)의 중우(衆愚) 정치의 위험성 예방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모델로 삼은 것은 고대(古代) 로마의 공화정(共和政)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정치제도는 로마 공화정의 제도와 매우 닮아 있다. 미국의 상원(上院)은 로마의 원로원(元老院)에, 하원(下院)은 민회(民會)에 해당한다. 미국의 상원(Senate)과 로마 원로원(Senatus)의 영어식 표기는 거의 같다. 대통령(President) 제도도 로마의 공화정 제도에서 착안하여 응용한 것이었다. 공화정 시대 로마는 평상시에는 임기 1년의 집정관(執政官·Consul) 2명을 선임하여 합의에 의해 통치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임기 6개월의 1인의 독재관(dictator)을 뽑아 전권(全權)을 위임했다.
마키아벨리(1469~1527년)는 《로마사 논고》(1517)에서 로마 공화정의 힘은 바로 딕타토르(독재관) 제도가 있었던 덕분이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이 같은 고대 로마의 독재관과 집정관을 합쳐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로마식 1인 독재관이 평상시에도 집정관의 임무를 겸하도록 한 셈이다. 이것은 대통령은 그 자체로 이미 독재관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독재라는 용어는 본래는 부정적 함의의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그 어원은 로마의 딕타토르이다. 그런데 권력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딕타토르의 성격을 갖고 있다. 딕타토르적이지 않은 권력은 둘 중의 하나다. 무능(無能) 아니면 무책임이다. 그래서 독재라는 용어를 정치적 수사로 사용하는 것은 부족하거나 부당한 것이 된다. 진짜 악랄한 폭정을 행한 자들에 대해선 부족한 용어이며, 위기에 맞서 단호하게 통치의 본질적 의무를 행한 경우에 대해선 부당한 용어가 된다.
링컨의 憲政的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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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당시 비상대권을 행사했던 링컨 대통령. |
미국 정치학자 클린턴 로시터가 1948년 펴낸 《헌정적 독재(Cons-titutional Dictatorship)》는 이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副題)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위기 정부(Crisis Government in the Modern Democracies)’다. 로시터는 민주주의 국가도 위기 상황에 봉착할 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비상대권의 독재권을 발동하게 되며, 이것은 형태상 독재의 모습을 띠어도 본질적으로 자유민주헌정이 허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남북전쟁 상황에서의 링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링컨은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비상 행정명령을 발동해 군사적 대응을 시작했다. 군(軍) 지휘관들이 군사작전상 필요하다면 영장 없이 미국 시민을 체포할 수 있도록 하는 명령도 내렸다. 링컨의 이 모든 조치는 의회의 승인이 없이 행해진 대통령 단독의 비상대권 행사였다. 즉 헌정적 독재였다.
링컨 대통령이 독재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미연방은 지켜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남북전쟁은 큰 희생을 치렀지만, 연방이 붕괴됐다면 이후의 희생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미 대륙 내에 수많은 국가가 난립(亂立)해 유럽이 그랬듯이 그들 사이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수 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 강국 미국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 그리고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제가 아닌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의 전시(戰時)내각이 행사했던 비상대권도 본질적 성격에선 동일했다. 자유민주체제라고 해서 그 같은 비상대권을 부정해버리면 오히려 그 자유민주국가 자체가 근본적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박정희 시대, 특히 유신 전후 시기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민주주의(democracy)는 본질적으로는 가치적 함의를 가진 주의(主義·ism)가 아니라 하나의 정체(政體)로서의 민주정(民主政)이다. 그러나 역사가 거듭되면서 민주는 정치적 가치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인식을 수용한다면 민주주의는 더욱이 섬세하게 고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중하게 여기는 이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해진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가장 흔한 통념은 독재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물론 실제 역사상으로도 틀린 생각이다.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체제는 때로는 헌정적 독재가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험은 오히려 민주주의 자신에 의해 발생한다.
민주주의는 기회와 유혹을 동시에 제공한다. 기회 자체가 유혹으로 작동한다. 부실한 자들도 정치적 영달을 꿈꾸게 만든다.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은 능력과 소명(召命)의식보다는 선동(煽動)의 기량에 더 치우치게 만든다. 그 결과 본질적으로는 싸구려 출세꾼인 정치적 사이비(似而非)들이 선동을 무기로 발호한다. 대중이 그에 현혹되면 정치에서 진정한 실력과 공적(公的) 책임의 덕목이 사라진다. 당선만을 목적으로 한 정치공학적 포장과 마케팅의 술수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는 건강성을 상실한다.
현명한 소비자가 시장의 건강을 지키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렇듯 민주주의는 양식(良識) 있는 시민이 있어야 건강이 유지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정은 그 속성상 양식과 책임감보다는 수적인 다수에 쏠리게 되는 경향이 있다. 포퓰리즘의 위험이 상존한다. 민주정의 이 같은 약점을 냉정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우상화(偶像化)하게 되면 결국에는 민주주의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建國과 近代化
그런데 이런 상황에 중대한 ‘국가적 과업의 추진’과 ‘국내외적 위기 대응’ 문제까지 겹쳐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신을 선포할 당시는 어땠을까?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을 제기할 수 있다. 그에 대해 각각 다른 입장이라 해도 원칙이 있음을 전제(前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입장을 갖든 그 ‘추상적 원칙’을 ‘구체적 현실’에 곧바로 대입하여 평가하는 것은 방법론상으로 오류(誤謬)다. 현실에 대한 분석이 먼저이며 그다음에 일반 원칙이 어떻게 구현돼갔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 순서가 바뀌면 현실은 증발하고 원칙은 관념으로만 남는다. 그런데 현실 없는 관념만의 원칙은 이미 원칙도 아니게 된다.
유신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실제 상황의 전개에 대해 살피는 것이 먼저이고 평가의 잣대를 갖다 대는 건 그다음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신성의 잣대로 삼아 유신 시대를 평가하고 싶다고 해도 순서는 그래야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建國)되었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국민국가다. 이로써 대한민국에 소속된 사람들은 신민(臣民)이 아닌 국민(國民)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건국이 국민에게 원하는 삶을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건국은 하나의 약속이요 시작일 뿐이었다. 국민다움도 곧바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근대(前近代)의 농민적 정체성(正體性)과 습속(習俗)이 여전하며, 시민사회적 성숙도 이제 막 시작된 것일 뿐이었다.
건물을 세우는 것은 완공(完工)으로 완결된다. 그러나 국가는 건국이 완공이 아니라 시작이며 국가 건설이 이어져야 한다. 국가는 그렇게 하여 부강함을 향해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동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노력이 함께해야 한다. 국민과 국가는 그렇게 하여 함께 성장해간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같은 과업을 이루어나가는 총체적(總體的) 과정을 ‘근대화(近代化)’라고 지칭했다. 즉 단순히 경제성장이 아니었다. 경제성장이 핵심이었지만 국민다움의 성장과 성숙도 함께였다.
‘성숙 상황’의 잣대로 ‘미성숙 상황’을 공격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의 원칙과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건국됐다. 하지만 건국과 동시에 이 같은 원칙과 원리가 곧바로 성숙한 수준에서 구현될 수는 없다. 경제가 그러하고 국가 자체가 그렇듯 국민주권의 민주정치 또한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것이다. 더욱이 대한민국은 건국하자마자 불과 3년 만에 6·25전쟁이라는 대한민국의 생존이 달린 중대한 시련을 경험한 터였다. 휴전이 된 뒤에도 그 위협은 계속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건설은 이 같은 위협에 맞서가면서 진행돼야 했다.
그런데 이승만(李承晩) 때도 박정희 때도 반대파들은 ‘국가 건설의 진행’에 힘을 함께 모으기보다는 ‘일반 원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앞세워 정치적 공격을 해댔다. 이것은 ‘성취기 상황’의 잣대로 ‘진행기 상황’을 재단(裁斷)하고 관념으로 현실을 공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다움의 성장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성숙 상황’의 잣대로 ‘미성숙 상황’을 공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미성년에게 성년다움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비판자들의 행태는 따지자면 그 자체가 미성숙이었다.
유신 시대 평가에서 또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비상 상황이라는 점이다. 우선 한국은 유신 당시만이 아니라 1948년 8월 15일 건국 때부터 상시적(常時的) 비상 상태였다. 건국부터가 양립(兩立)할 수 없는 적대적 대립 속에서 비상한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사태를 3년간 겪어야 했다. 그런데 그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일 뿐이었다. 북한 공산 세력은 그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전복을 겨냥한 도발과 공작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북한의 대한민국에 대한 이 같은 전복전에 의한 위기는 미국의 역사상 여러 시기의 경우와 비교해 가벼운 게 결코 아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엄중하다. 북한과 그 배후 세력인 공산전체주의 세력의 전복전(顚覆戰)을 막아내지 못하면 한국은 그냥 사라진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안보환경의 급변과 야당의 무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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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들어 주한미군의 감축설이 보도되자 주한미군 감축 반대 운동이 벌어졌지만, 결국 이듬해 미7사단이 철수했다. 사진=조선DB |
한국에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4월 27일)의 선거전이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상시적 비상 상태’에 ‘긴급한 비상 상황’이 더해진 위기였다. 유신이 선포되기 1년 전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당시 야당 신민당은 위기에 대한 대응은 외면한 채 반대를 위한 반대를 여전히 거듭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오도(誤導)하는 갖가지 포퓰리즘적 선동도 더해갔다. 정치적 야심만 있을 뿐 무분별했으며 무책임했다.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위해선 집권 세력의 양식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야당 세력도 집권 세력을 대체할 만한 능력과 양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권 교체는 안 하느니만 못 한 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반박정희 야당 세력들은 이 같은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야당 세력의 자질과 행태 자체도 대한민국의 중요한 위기 중의 하나였다.
한국 야당의 이 같은 문제점은 뿌리가 깊었다. 건국 당시 한국민주당(한민당)부터 그랬다.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발목을 끊임없이 잡았다. 내각제를 요구하며 대통령 이승만을 계속 공격했다. 내각제만 민주적이며 대통령제가 반민주적인 것일 수는 없다. 더욱이 한국은 신생국일 뿐만 아니라 6·25전쟁이 보여주듯 비상한 위기가 항상 동반(同伴)하는 나라였다.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체제가 필요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확립하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은 이에 계속 제동을 걸었다. 6·25전쟁 도중에도 그랬다.
한민당의 이 같은 문제점은 박정희 시대의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5·16 후 1963년 민정 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진영 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은 “먼저 당선되는 게 중요… 일단 당선되고 나면 상황을 분석… 동냥을 해서라도 국민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도 없고 계획도 없다. ‘일단 당선’은 조선 시대 양반 유생의 ‘입신(立身)’과 다르지 않다. 발상도 태도도 모두 전근대적이다.
야당의 이 같은 속성은 윤보선 이후에도 내내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상징적 사례가 김영삼(金泳三)이었다. 김영삼은 중학생인 소년 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는 걸 내내 자랑스럽게 말했다. ‘과업을 이루어내겠다’가 아니라 ‘지위에 올라가겠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은 그것이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임을 몰랐다. 김영삼은 당시 야당의 촉망받는 대표적인 젊은 정치 주자였다. 그런 사람의 의식 수준이 그랬다.
保守야당에 스며든 좌익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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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제7대 대선 당시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4대국 안전보장’ ‘예비군 폐지’ 등을 주장했다. 사진=조선DB |
그 문제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김대중(金大中)이었다. 김대중의 내면적인 이념적 성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떻든 드러낸 정치적 면모는 좌익적 성향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선 1971년 대선(大選)을 앞두고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한 《대중경제론》은 좌파적 구상을 담고 있었다. 실제로 그 책을 쓴 박현채(朴玄埰·1934~1995년)는 소년 빨치산 출신이었다.
한편 김대중은 이에 더해 1971년 대선에서 ‘4대국 안전보장론’을 들고나왔다. 1971년 대선은 ‘닉슨 독트린’(1969년 7월 25일)으로 한국의 안보 환경에 중대한 시련이 닥쳐오고 있는 가운데 치러지는 선거였다. 그런데 김대중 후보는 안보태세 강화가 아니라 반대 방향의 공약을 내걸었다. 남북은 긴장 완화와 남북 교류를 통한 평화 지향으로 나아가고 미국·일본·중국·소련이 한반도의 안전보장을 해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예비군 폐지론’도 제기했다. 파격적 제안이었고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안보의 근간을 흔드는 파괴적 발상이었다.
북한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더 당연하게도 대남(對南) 적화(赤化) 책동을 멈춘 적이 없었다. ‘4대국 안전보장’은 미국이 한국에서 발을 빼려는 여지가 있음에도 한국에 소련과 중국의 간섭과 영향력 확대를 자청해서 불러들이는 꼴이었다. 북한과 공산권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안보 환경에 국제적으로 중대한 위기가 엄습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이런 위험한 공약을 들고나왔다. 그의 경제 공약대로면 이제 막 본격화되기 시작한 경제성장도 중단될 게 틀림없었다. 당시의 야당이 박정희 정권을 대신할 만한 대한민국을 위한 책임 있고 건강한 정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아니 대한민국은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을까?
유신은 政商輩 세력에 대한 제한
유신은 분명히 민주정의 일상적 원칙에 대해 제한을 가했다. 유신은 국민의 직접적인 대통령 선출권을 제한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토록 하여 국회의원 선출권도 제한했다. 그러나 그 제한은 본질적으로는 국민에 대한 제한이 아니라 무책임한 선동을 일삼는 위선적(僞善的) 정상배(政商輩) 세력의 ‘국민에 대한 접근 제한’이었다.
비상한 상황임에도 무책임한 무리가 정략적(政略的) 선동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위기 요인이었다.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당시 한국에 닥쳐온 국내외적 위기를 더욱 증폭시킬 위험이 있었다. 유신은 그 위기들을 이겨내고 절박한 국가적 국민적 과업을 중단 없이 이루어내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 결단을 비난하는 게 합당하려면 그만한 대안(代案)과 대안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이 직면했던 비상 상황을 이겨내고 역사적 성취를 해낼 가능성을 인정할 만한 대안 세력은 없었다. 당시의 야당은 그런 능력도 책임감도 없었다. 야당만이 아니라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 전반이 다 그런 수준이었다. 다음의 예화는 그 점을 보여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이력을 가진 어느 현대사 저술가가 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박정희를 비난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그는 박정희의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정희는 독재를 위해 경제성장을 추구했을 뿐이다.”
기괴한 논리다. 그가 이런 이상한 논리를 확신에 차서 펼치는 것은 ‘아무튼 독재는 나쁜 것’이라는 집착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언설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투쟁 세력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경제성장’이라는 당시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진정으로 좋은 일을 외면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그런 철없는 반대를 무릅쓰고 ‘좋은 일’을 해내기 위한 결단을 선택했다.
할 일은 한 박정희
“독재를 위한 경제성장 추구”라고 한 것은 박정희를 비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뒤집으면 예찬이 된다. ‘독재’가 ‘경제성장’이라는 좋은 일을 하게 했으니 결국에는 독재는 좋은 것이 돼버린다. 그런데 유신은 실제로 그랬다. 유신을 어떻게 비난하든 유신 시대는 결국 좋은 일을 해냈다. 유신 시대의 경제발전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기 때문이다.
유신은 당시에도 지금도 흔쾌하게 이해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일을 했다. 박정희는 ‘지금 여러 가지 불만과 비판이 있다 해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입장을 시종일관 고수했다. 달콤한 언사로 당장을 모면하는 게 아니라 단호하게 국민을 설득하며 결연하게 일을 추진해나갔다. 그리고 평가는 역사에 맡겼다. 그 평가는 분명하다. 어떤 시비가 있든 박정희 시대는 ‘기적의 역사’로 자리매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