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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無知는 사악함에 기회를 준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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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從北단체들이 反日 퍼포먼스 벌이는 독립문은 反日이 아닌 反中의 상징
⊙ 4·3의 본질은 대한민국 建國 반대
⊙ 30대 보수당수 탄생… 젊음의 열정도 성찰과 함께해야 바른 성취가 있다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전인 2017년 3·1절 기념행사를 독립문 앞에서 가졌다. 사진=뉴시스
  발생하는 모든 일이 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역사는 단지 사건의 발생이 아니라 기억되는 바다. 역사는 역사의식과 불가분(不可分)이다.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역사의식의 바탕을 이루며 역사의식은 또 발생한 사건을 기억하는 관점을 규정하게 된다.
 
  역사는 무엇보다 사실 자체가 우선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의식과 결코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올바른 관점이 중요하다. 그런데 무지하면 언제든 농단을 당한다. 수많은 격동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역사는 특히 더 그렇다.
 
  지난 6월 2일 한 대학생 단체 회원이라는 자들이 독립문 앞에서 욱일기(旭日旗)를 불태우는 시위를 벌였다. 몇 차례의 종북(從北)·반미(反美) 행동으로 이름을 알린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회원인데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한 도쿄올림픽과 일본 정부를 규탄한다며 벌인 시위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반일(反日) 시위를 독립문 앞에서 벌인다는 건 실소(失笑)할 일이다. 하지만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그런 독립문 앞 퍼포먼스는 문재인 정권이 선수다.
 
  2019년 문재인 정권은 3·1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독립문 앞에서 벌였다. 그것이 처음은 아니다. 2018년 3·1절 때도 그랬다. 문 대통령은 기념식을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개최하고 반일 연설을 했다. 그러고 나서 참석자들과 함께 독립문으로 행진해 그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삼창을 했다. 그 이전 장면도 있다. 2012년 대선(大選)을 앞두고 6월 17일 출마 선언을 할 때도 독립문 앞에서였다.
 
  독립문에 그런 상징성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대통령부터가 이런데…’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런 문제를 굳이 따져야 한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다.
 
 
  독립은 反中으로부터 시작
 
  독립문은 반일의 기념물이 아니다. 심오한 문제가 아니다. 인터넷 검색 한 번이면 바로 확인된다. 독립문은 1896년 11월 착공되어 1897년 11월 20일 완공되었다. 일제(日帝)시대가 아니었다. 독립문은 청(淸)나라 책봉(冊封) 체제에서 조선이 독립한 기념으로 사대(事大)의 상징이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낸 자리에 세운 것이다.
 
  독립문 건립 운동을 주도한 주체는 독립협회였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7월 2일 협회를 정식 발족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추진한 것이 독립문 건립이었다. 독립문의 독립은 일제가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이다. ‘독립’이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애초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지칭하는 데서 시작됐다.
 
  독립협회부터가 그랬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결성되었는데, 결성을 주도한 이들은 개화파 인사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나중에 독립협회 회장도 맡게 된 서재필(徐載弼)은 1894년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바 있다.
 
  한편 개화파는 ‘독립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개화파를 반대하는 유림(儒林)을 비롯한 수구파(守舊派)들이 특히 그렇게 불렀다. 칭찬이 아니라 비난의 뜻에서였다. 개화파를 반대하는 이들은 개화파를 “감히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독립은 반중에서 시작됐다. 독립문은 반일이 아니라 반중의 상징이다.
 
  개화는 후대(後代)의 표현을 빌리면 근대화(近代化)이다. 개화파는 근대화파이며, 그 첫걸음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보았다. ‘개화=근대화’와 ‘반중 독립’은 하나였다. 반중 독립이 ‘개화=근대화’의 첫걸음으로 간주된 것은 중국이 바로 전근대성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독립문은 반중인 동시에 근대화의 출발을 상징한다.
 
 
  日帝,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
 
  독립문이 반일 상징물이 아니었음에 약간의 ‘합리적 의심’이 간다면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반일 기념물이라면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독립문은 일제시대에 그냥 남아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할 뿐만 아니라 거액을 들여 보수공사까지 했다. 일제는 1928년 독립문을 보수하기 위해 당시로는 상당한 거금인 4100원의 예산을 써서 수리 공사를 했으며, 1936년에는 독립문을 조선 문화재로 지정하고 고적(古蹟) 제58호로 등재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독립문이 대한민국의 정식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5·16군사혁명 후 군정(軍政) 때다. 독립문은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史蹟) 제32호로 지정되었다.
 
  문 대통령 등이 독립문과 관련한 이런 역사적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그간 ‘중국몽(中國夢)’을 찬양하는 등 노골적인 친중(親中) 행각을 이어왔다. 그렇듯 친중에 여념이 없으면서 일부러 반중 독립의 역사적 기념물 앞에서 비장한 퍼포먼스를 벌일 리 없는 것 아닌가? 몰라서, 다시 말해 무식해서일 것이다.
 
  무식은 비웃음거리가 되지만 그 자체로 곧바로 악의적(惡意的) 느낌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역사에 대한 무식은 사악함의 숙주(宿主)가 된다. 독립문 앞에서 반일 소동을 벌인 대진연은 그 한 본보기다.
 
  대진연은 김정은을 찬양하며 광화문에서 김정은 서울 방문을 요구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미국대사 관저를 월담한 바도 있었다. 나름 신념을 갖고 있겠지만 무식에 더해진 사악함이다. 무슨 논리를 어떻게 동원해도 김정은은 찬양할 만한 존재일 수 없다. 사악함에 물들었다 할 수밖에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름 행세를 한다는 이 정권 관련 먹물 인사들도 김정은 찬양 언사를 거리낌없이 해댔다. 문재인 정권의 행태도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연속이다.
 
  이 패거리 행태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휘둘려왔다는 게 진짜 문제다. 한국인은 ‘독립’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떠올린다. 독립문의 독립도 그렇게 여기곤 한다. 지적을 하면 깨닫기는 한다. 그러나 설명이 없으면 대개는 놓친다. 이 같은 무지(無知)와 몰각(沒覺)이 사악함에 기회를 준다. 독립문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다. 우리 현대사 많은 부분이 그런 농단에 휩싸여 있다.
 
 
  제주 4·3사건의 본질
 
  제주 4·3사건 문제도 그중 하나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建國)에 반대한 남로당 세력에 의한 봉기가 본질이다. 그러나 ‘양민(良民)의 희생’이라는 감성적 논리가 위력을 발하면서 사건의 본질은 밀려나고 그냥 대한민국 정부와 군경(軍警)의 잘못이라는 식이 돼버렸다. 보수정당이라는 국민의힘도 그 논리에 굴복하고 있다.
 
  4·3사건에서 양민의 희생이 있은 것은 분명히 역사적 아픔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드러난다.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좌익세력의 봉기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좌익적 기준의 잣대로도 문제가 포착된다.
 
  좌익 진영은 제주 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주 지역 서북청년단 등 우익청년단과 경찰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당한 저항이었다는 논리다.
 
  그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찰 등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강조한다. 발단으로 드는 것은 1947년 제주 3·1절 기념식 이후 벌어진 사건이다. 기마경관의 말에 어린이가 채인 일이 발생했는데 이에 항의하는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좌익 진영은 이것이 4· 3사건의 발발 원인이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바로 한 달 뒤 4·3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4·3사건은 1년 뒤인 1948년 4월 3일 일어났다. 1년 만에 마침내 자연발생적으로 봉기가 일어났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좌익 진영은 4·3사건이 남로당 지령에 의한 게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를 내세운다. 1948년 2~3월 무렵 제주 신촌에서 있은 회의 기록이다. 도당(道黨) 책임자 등 19명이 모인 회의였는데, 당시 참석자 이삼룡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김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가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김달삼
 
4·3사건 주동자 김달삼.
  1949년 6월 공비(共匪) 양생돌을 포획하면서 입수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도 관련 기록으로 내세운다. 4·3 직전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중앙당 직속이던 국방경비대의 문상길 소위를 만나 “무장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 궐기해야 한다”고 권한다. 그러나 문 소위는 ‘중앙의 지시가 없으니 동참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런데 이들이 내세우는 사실에 4·3사건의 문제가 드러나 있다. 김달삼이 남로당 중앙당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무장폭동을 감행했다는 게 된다. 좌익 진영이 4·3사건은 정당한 민중적 저항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공산당의 원칙에 따르면 용납할 수 없는 맹동주의(盲動主義)다. 김달삼이 성격이 급해서라고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공산당 특유의 표현으로 말하면 이건 소(小)부르주아적 공명심(功名心)이다.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이다. 1923년 8월 4일, 전라남도 제주(당시)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이 대구로 이사하면서 대구에서 유소년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부친은 술도가로 대구에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성분상 부르주아 자산계급인 셈이다. 이런 집안 덕분에 김달삼은 일본 유학을 갔는데, 일본인 명문가 자제의 출세 코스인 교토 세이호중학교(聖峰中學校)를 거쳐 주오대학(中央大學)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김달삼은 주오대학 경제학과 2학년 재학 중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지원하여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다. 일본군 복무 중인 1945년 초 오사카에서 군수공장 납품업체를 운영하던 강문석(姜文錫)을 만나고 그의 장녀 강영애와 혼인한다. 강문석은 공산주의자였으며 김달삼이라는 이름이 본래 그의 가명(假名)이었다. 김달삼(이승진)은 일제가 패망(敗亡)하자 혼자 귀국한다.
 
  귀국 후 김달삼은 대구에 체류하다 1946년 10월 폭동에 가담한다. 10월 폭동 후 경북의 좌익 검거 선풍을 피해 12월 고향 제주도로 옮겼다. 김달삼은 제주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소조를 만들고 좌익세력 규합에 나섰다. 그러다 1947년 3월 남로당 제주도당책에 임명되었다. 군사부장까지 겸했다. 그 1년여 뒤 김달삼은 4·3사건을 일으킨다.
 
 
  先制공격을 하고 협상도 깨뜨린 김달삼
 
제주 4·3사건의 본질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무장봉기였다는 사실이다.
  4·3사건은 김달삼의 제주 남로당 무장대의 선제(先制)공격으로 시작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여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제주도 내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를 공격했다. 남로당 무장대는 경찰관과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도 습격했다. 좌익 진영 주장에 따르면 중앙당 승인 없이 감행한 무장폭동이었다. 제주도 경찰과 서북청년회 소속 토벌대는 이들 세력을 진압하러 나섰다.
 
  그런데 4월 18일 제주 주둔 미군정 당국이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국방경비대 김익렬 연대장은 4월 22일 남로당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살포했고, 이에 김달삼이 호응하면서 4월 28일 두 사람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김달삼도 일단 휴전에 합의하여 양측은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28협상이 있은 바로 다음 날인 4월 29일에 오라리 마을의 대동청년단 부단장과 단원이 행방불명되고, 4월 30일에는 제주읍 오라리 대동청년단원의 아내 2명인 강공부와 임갑생이 김달삼 무장대에 납치되었다. 두 여인 중 강공부는 임신부였다. 강공부는 살해되고 임갑생은 가까스로 탈출해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5월 1일 강공부의 장례식이 치러진 뒤 방화(放火)사건이 발생했다. 장례식에 참여한 대동청년단 단원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남로당 무장대원 20여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대동청년단을 추적, 이 과정에서 경찰관 가족 1명(김규찬 순경의 어머니)이 피살됐다. 이리하여 협상은 깨졌는데 따지자면 김달삼 측이 협상을 깬 것이다.
 
  좌익 진영은 5월 1일의 방화사건만 말하며 협상결렬이 우익청년단 때문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런데 애초에 강경하게 봉기를 주장하고 선제공격까지 주도한 김달삼이 휴전에 적극적이었겠는가? 논리적으로 안 맞다. 만약 김달삼이 진짜 적극적으로 휴전하려 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최초 봉기 강행이 과오였음을 인정하는 게 된다. 물론 김달삼은 그러지 않았다.
 
 
  김달삼, 해주에서 4·3 공적 자랑
 
  협상은 깨지고 그렇게 일을 벌여놓은 상태에서 김달삼은 1948년 8월 이덕구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월북(越北)했다. 월북한 김달삼은 8월 21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 여기서 그는 제주 4·3 봉기를 자신의 공적으로 적극 선전했다. 해주대회에서 김달삼은 다음과 같이 연설을 했다.
 
  “첫째로는 30만 제주도 전체 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의 남조선 분할 식민지 침략정책을 단호히 반대하고 조국 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주도 무장구국항쟁은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남조선 전체 인민들의 위대한 구국투쟁의 일환인 까닭입니다. 전국에서 투쟁이 있었기에 적들이 제주도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김달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에 맞선 무장대의 ‘전과(戰果)’ 등을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이 외치며 연설을 마쳤다.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이 연설은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노획하여 미국의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RG242, 북한노획문서19, 제주도〉로 분류된 문서에 수록돼 있었다. 나중에 한국에도 전해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2년에 펴낸 《4·3사건토벌작전사》에 실렸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항쟁에 대해 의의를 내세운 김달삼은 박수갈채를 받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국기훈장 2급 수여에 북한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출세한 셈이었다.
 
 
  김달삼의 맹동주의
 
  북한에서 공식적으로는 김달삼을 제주 인민봉기의 공로자로 추켜세운다. 가묘(假墓)도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김달삼에 대한 평가는 매우 비판적이다. 과거 좌익운동권 핵심세력에선 의식화 학습 과정에서 4·3사건에 대해 학습할 때 그런 비판적 평가를 학습하곤 했다. 김달삼 등의 맹동주의가 문제였다는 게 골자다.
 
  우선 지도부의 확실한 승인 없이 제주도당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인 것부터 문제였다. 그래놓고는 사태가 여의치 않게 진행되는 상태에서 월북했다. 그러고 나서 공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4·3사건을 계기로 제주의 남로당 조직은 결국 궤멸되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제주 4·3사건의 여파가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해당 지역의 군내(軍內) 남로당 조직에 의한 반란사건이다. 제주폭동 진압 파견 거부가 발단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내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진행돼 결국 군내의 남로당 조직이 무너졌다.
 
  만약 이 일이 없었다면 군내 좌익조직은 그대로 살아남았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6·25를 맞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으로 결과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4·3사건에서 여순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적 경과는, 남로당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군사조직을 붕괴시켰다는 사실이다.
 
  북한학 연구자인 이지수 교수는 박헌영은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의 20만 남로당원이 봉기해서 인민군의 진격을 도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그리고 6·25전쟁 한 달 전인 1950년 5월 17일에도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黨)·정(政) 간부와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도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고 한다. 물론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 20만 봉기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옛 소련 문서에 잘 드러나 있듯이,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
 
 
  사건 내막 무시도 역사 농단
 
  하지만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1953년 7월 휴전 후 김일성이 전쟁실패 책임을 박헌영과 남로당 일파에게 돌리고 숙청하는 빌미가 되었다. 김일성은 1953년 8월 3일 박헌영을 체포한 뒤 1954년 12월 23일 조선인민군 군·정 간부회의에서 “박헌영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비난했다. “남조선에 당원이 20만명은 고사하고 1000명만 있어서 부산쯤에서 파업하였더라면… 남반부의 군중적 기초가 튼튼하고 혁명세력이 강하였더라면…”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1955년(혹은 1956년) 김일성은 박헌영을 처형했다.
 
  김일성의 주장은 분명 책임 떠넘기기다. 그러나 그럴 여지가 있었다. 남로당 조직이 무너져간 책임이 일련의 모험주의적 행동 때문이라 몰아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좌익운동권들, 특히 종북 주사파 세력들은 확실히 그런 논리로 김일성의 박헌영과 남로당 숙청을 정당화했다. 김달삼의 나중 행적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최종적으로는 태백산지구로 남하해 빨치산 활동을 하다 사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살아남았더라도 박헌영과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함께 처단됐을 게 거의 틀림없다.
 
  제주 4·3사건 과정에서 발생한 양민 희생을 함부로 다루자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쌍방이 주고받은 것을 간과할 수 없다. 한편 그런 문제와는 별도로 김달삼 등의 맹동주의가 문제였음은 분명하다. 뭔가 시급하게 성과를 내고자 하는 주도세력의 조급성과 공명심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번질 일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양민 입장에선 더욱이 그 점을 따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김달삼의 남로당 무장대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군경과 우익 인사에 대한 선제공격을 했다. 협상을 우익이 깼다는 것도 핑계다. 김달삼 등은 협상이 여하히 이루어져 수습되길 원치 않았다. 당시 발생한 양민의 희생을 함부로 폄훼해선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무시하는 것도 역사적 아픔에 대한 농단이 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은 여순사건으로 검거된 것을 계기로 좌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만약 여순사건이 아니었더라면 박정희는 그냥 남로당 군사조직의 일원인 상태에서 6·25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점에서 당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박정희라는 역사적 인물을 놓고 살피면 마치 섭리(攝理)와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런 게 역사에서 이성(理性)의 간지(奸智)인가 싶기도 하다.
 
  1963년 민정(民政) 이양을 위한 대선에서 윤보선(尹潽善)은 박정희의 여순사건 관련 전력을 들어 사상 시비를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박정희가 5·16을 결행하면서 내건 혁명공약의 첫 번째는 “반공(反共)을 국시(國是)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그 원칙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업을 추진해나가고 성공했다. 기적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성공이다.
 
  그런 박정희의 노선을 혹자는 ‘사회주의적 전체주의’라고 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얘기다. 그래도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회주의적 전체주의의 유일한 사례가 된다. 그런데 그렇다면 ‘도대체 수많은 사회주의적 전체주의가 모조리 실패하고 유독 박정희 노선만 어떻게 성공을 거둔 것이냐’고 묻게 될 수밖에 없다. 또 ‘북한의 김가 일족은 사회주의적 전체주의가 아니라서 실패했느냐’고 묻게 된다.
 
 
  역사교육의 실패
 
  이런 아이러니한 착오도 따지자면 역사교육의 실패, 이념교육의 실패와 무관치 않다. 박정희 폄훼에 몰두해온 좌익세력의 문제점은 더 논할 것도 없다. 그런데 자유주의 우파 진영 일부에도 헤아림의 부족이라는 문제가 있다. 이런 부족함은 불순한 무리의 사악함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한국 헌정사상(憲政史上) 처음으로 30대 보수당수가 탄생했다. 갖은 시시비비를 떠나 소중한 일대 전진이다. 젊은 열정은 그 자체로 힘이다. 열정이 세상을 움직이고 바꾼다. 그러나 젊음의 열정은 성찰과 함께해야 바른 성취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의도치 않게 함정에 빠지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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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트리235    (2021-06-28) 찬성 : 3   반대 : 0
많은 이들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반론할 수 있고, 사실을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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