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필 메모장 제목은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
⊙ 메모광 횡거 선생 글에 감명
⊙ 끊임없이 백성 의견 수렴한 名재상 관중 같은 지도자 되고 싶었던 듯
⊙ ‘금수저’지만 욕망 억누르고 소박한 삶 택한 혼아미 고에쓰 인정
⊙ ‘Treat your friend as if he might become an enemy’ 문구, 김재규 총탄에 맞아 서거한 아버지 때문에 적었나?
⊙ ‘言行은 군자가 되는 자격의 열쇠’(《계사전》 中)
⊙ ‘최고의 처세훈은 참을 줄 아는 것이며 지혜의 절반은 참는 데 있다’(에픽테토스)
⊙ 프랑스 68혁명 주역인 다니엘 콩방디의 글 옮긴 이유
⊙ 유영하 변호사가 최근 공개한 자필 편지 글씨체와 박 전 대통령 메모 글씨체 같아
⊙ 메모광 횡거 선생 글에 감명
⊙ 끊임없이 백성 의견 수렴한 名재상 관중 같은 지도자 되고 싶었던 듯
⊙ ‘금수저’지만 욕망 억누르고 소박한 삶 택한 혼아미 고에쓰 인정
⊙ ‘Treat your friend as if he might become an enemy’ 문구, 김재규 총탄에 맞아 서거한 아버지 때문에 적었나?
⊙ ‘言行은 군자가 되는 자격의 열쇠’(《계사전》 中)
⊙ ‘최고의 처세훈은 참을 줄 아는 것이며 지혜의 절반은 참는 데 있다’(에픽테토스)
⊙ 프랑스 68혁명 주역인 다니엘 콩방디의 글 옮긴 이유
⊙ 유영하 변호사가 최근 공개한 자필 편지 글씨체와 박 전 대통령 메모 글씨체 같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손 편지를 좋아한다. 받은 것은 물론 본인이 직접 쓴 편지도 많다. 그의 자필에는 진심과 정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고(故)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에 오는 편지를 다 읽어보고 일일이 답장해 보내거나 현장 방문한 모습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측근들은 자필 편지를 보내 소통하려 했다. 박근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명절 때마다 자필로 쓴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내는 수석도 있었다”고 했다.
4·15 총선을 42일 남겨둔 지난 3월 4일,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3월 구속 이후 1069일 만에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때 그의 자필 편지를 유영하 변호사가 대독하는 형식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자필 편지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해 “무능하고 위선적이며 독선적”이라고 했다. 이어 “기존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여러분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줄 것을 호소한다”고 덧붙였다. 지지자들에게 오는 4월 총선에서 보수 진영이 분열하지 말고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문재인 정권 심판에 나서라는 뜻으로 해석됐다.
1990~1999년 박근혜 자필 메모
자필 편지가 공개된 후 진위 공방이 벌어졌다. 유 변호사가 공개한 편지 글씨체가 박 전 대통령의 글씨체와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월간조선》이 박 전 대통령이 1990~1999년 자필로 쓴 메모장(노트 100장 분량)을 입수해 비교해본 결과, 유 변호사가 공개한 자필 편지 글씨체와 글씨체가 같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메모장의 일부를 2006년 공개했다. 박 전 대통령과 측근, 네티즌 지지자들이 공동 운영한 홈페이지 호박넷[호박(好朴·박근혜를 좋아하는) 네트워크]에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이란 제목으로 올린 것이다. 현재 호박넷은 폐쇄된 상태라 당시 공개된 박 전 대통령의 자필 메모는 사실상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월간조선》은 호박넷에 공개된 것 외에 다른 메모까지 총 75개를 박 전 대통령을 15년 넘게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김휘종 전 청와대 행정관에게서 jpg 파일 형태로 받았다.
김 전 행정관은 박 전 대통령과 호박넷을 함께 관리하던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두 달 전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친박누리’에 이 메모장의 일부를 공개해왔으나, “더 많은 분께 메모의 내용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며 《월간조선》에 가지고 있던 메모 일체를 제공했다.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
박 전 대통령의 친필 메모에는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이란 제목처럼 과거 읽은 책에서 감명받은 글이나 명언, 사색 등이 담겨 있다.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은 뒤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이후 성북구 성북동, 중구 장충동을 거쳐 1990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단독주택으로 옮겨왔다. 1997년 11월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다음 해 4월 15대 국회의원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될 때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삼성동에 머물면서 자신이 어떤 정치인이 돼야 하는지 고민하며 메모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뇌물수수·직권남용 등 혐의로 30년 가까이 징역을 살아야 하는 박 전 대통령은 이 메모를 썼던 삼성동 사저는 팔고 내곡동 집을 매입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영어(囹圄)의 몸이라 내곡동 집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메모의 달인’ 횡거 선생
박 전 대통령은 1991년 11월 11일 자필로 횡거 선생이 한 이야기를 적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오직 의리의 도(道)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비록 험난한 일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이에 대처해 마음이 형통하고 의혹하지 않으면 비록 험난하더라도 반드시 풀릴 수 있고 성과가 있을 것이다. (중략) 오직 의리만을 실천하여 나갈 따름이면 다시 무엇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직 마음만이 형통하여질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인의 ‘의리의 도’를 강조한 횡거 선생의 글을 옮긴 것은 정권 2인자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 아니었을까.
횡거 선생의 이름은 장재(張載)이고, 자(字)는 자후(子厚)다. 횡거(橫渠)는 호(號)다. 장안에서 태어나 횡거진(橫渠鎭·현재 산시성 미현 횡거)으로 옮겨 살다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제자들을 가르쳤기에 사람들은 그를 횡거 선생이라 불렀다. 횡거 선생은 벼슬살이할 때나 물러나 있을 때나 수양과 공부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좌우에 책을 쌓아두고 단정하게 앉아 머리를 숙이면 글을 읽었고 머리를 들면 사색에 잠겼다. 얻은 바가 있으면 글로 기록했는데, 간혹 한밤중에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글을 쓰기도 했다.
횡거 선생은 메모의 달인이었다. 그는 무언가 깨닫게 되면 시공간에 관계없이 무조건 기록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문방사우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메모한 기록을 바탕으로 《정몽(正夢)》이란 책을 썼다.
공교롭게 박 전 대통령도 메모광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물려받은 습관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여당인 친(親)노무현·문재인 세력은 당시 박 전 대통령을 ‘수첩공주’라고 폄하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시절 수첩공주라는 별명에 대해 “사실 시작은 야당에서 저를 공격하기 위해 만든 건데 그 별명이 싫지 않다”고 말했다.
욕망을 억누른 소박한 삶
박 전 대통령은 자기 욕심만 채우는 부자들을 비판한 혼아미 고에쓰(本阿彌光悅)의 말을 적기도 했다.
“부자들은 소유를 늘리고, 재산의 유지에 급급해서 정신의 자유마저도 잃고 있다.”
혼아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 도검 감정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교토의 상인 집안이다. 이 집안 사람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나 그 욕망을 억누르고 소박한 삶을 택했다. 칠기공예 대가인 혼아미 고에쓰는 평생 작은 집에 다다미 두세 장짜리 다실을 만들고 홀로 차를 즐기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그의 어머니 묘슈는 자손들이 옷이며 용돈을 줄 때마다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다. 세상 사람이 모두 가난한데 혼자만 많이 소유하는 것은 죄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Treat your friend as if he might become an enemy”
로마 시대의 풍류시인 푸블릴리우스 시루스(Publilius Syrus)는 노예 출신이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는지, 아니면 전쟁포로로 노예가 됐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는 시리아 중에서도 안티오키아 출신이었다. 주인이 그를 로마로 데려간 것은 12세 때였다. 그의 재주를 아낀 주인이 자유와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
시루스는 고대 로마 초기부터 인기 연극 장르던 마임(mime) 작가였다. 폭정으로 악명 높은 네로 황제가 마임에 직접 출연한 적도 있다. 이탈리아 지방 곳곳에서 명성이 자자한 시루스를 카이사르가 로마로 불러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자신의 탑수스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마임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시루스에게 상을 줬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마임에서 추려낸 명언을 담아 《문장(文章·Sententiae·Sentences)》을 냈다. 《문장》은 734~1000여 개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문헌이다.
박 전 대통령은 《문장》에 나온 한 문장을 직접 쓰며 마음에 새긴 모양이다.
“Treat your friend as if he might become an enemy.(친구를 대할 때는 그가 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대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은 1999년 9월 6일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크리스토퍼 드 빙크(Christopher de Vinck)가 쓴 《올리버 스토리》의 한 부분을 발췌했다.
“나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어떻게 32년 동안 올리버를 보살필 수 있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것은 32년간의 긴 시간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올리버를 굶기지 않을까 생각하며 보낸 하루하루일 뿐이란다’라고 말했다.”
《올리버 스토리》는 33년을 한 침대에 누워 부모·형제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은 올리버의 일화다.
불교 명언
박 전 대통령은 불교에서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비법으로 제시한 팔정도(八正道)를 적기도 했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이른다.
《노자 그 불교적 이해》의 한 대목을 메모하기도 했다.
“욕심부릴 만하다는 견해로 마음이 혼란해서는 안 된다. 이익이란 상주불변하는 실제가 아니라 거짓의 임시적인 물건이다. 사람들은 수나라 땅에서 생산되는 구슬을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기나 이를 새들에게 던지면 깜짝 놀라서 날아가버린다. 여색은 요염한 자태이다. 사람들은 여색 가운데 서시를 가장 아름다운 여색으로 꼽지만, 고라니나 사슴은 그를 보기만 해도 깜짝 놀라서 도망을 간다.”
《노자 그 불교적 이해》는 명나라 때 4대 고승 중 한 명인 감산덕청 대사가 노자를 불교적 입장에서 풀어서 쓴 책이다.
법구경(法句經) 제186절 “가령 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욕망을 채울 수는 없으리라. 욕망에는 짧은 쾌락과 많은 고통이 있다고 알고서 현자는 천상의 쾌락에도 기뻐하지 않는다”와, 제187절 “천상의 쾌락에도 기뻐하지 않는다. ‘바르게 깨달은 이’의 제자는 이 욕망이 다 없어짐을 기뻐한다”도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로 꼽았다.
‘중국 선불교의 완성자’로 불리는 혜능(慧能) 스님의 “늘 지혜를 활동시키는 것이 반야의 실천이라고 한다”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인도 고승인 산티데바(Shantideva) 스님의 말도 있었다.
“지금까지 재산을 모은 사람이나 명예를 얻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재산과 명예와 함께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 자취는 전연 알 길이 없다.”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많고 환락은 적다.”
“욕망을 두려워하고 고독에서 기쁨을 얻도록 하라.”
산티데바는 서기 800년경 인도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문수보살의 계시로 왕이 되는 대신 수행자가 되었고,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기독교 명언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가 쓴 《고백록(Confessiones)》에 담긴 이 글을 적은 뒤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곧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다. 그가 북아프리카 히포(Hyppo)의 대주교(大主敎)로 취임하자 반대자들은 그의 이교(異敎) 전력을 문제 삼았다. 그는 젊어서 9년 동안 동방종교인 마니교에 심취한 적이 있다. 따라서 회중(會衆)에 자신이 걸어온 길과 ‘이미 내가 누구인지’를 솔직하게 밝히고자 했다. 그래서 쓴 게 《고백록》이다.
《고백록》은 헛된 가치에 얽매여 방황하던 한 인간이 간절한 탐구와 통회(痛悔)를 통해 종교적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공식적으론 ‘무교(無敎)’다. 다만, 천주교와 인연이 깊다. 박 전 대통령은 과거 천주교재단인 성심여중·고와 서강대를 다녔다. 특히 1965년 성심여중 재학 시절 세례를 통해 ‘율리아나’란 세례명까지 받았다. 당시 머리에 미사포를 쓰고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사제 앞에 서 있는 어린 박근혜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율리아나는 이탈리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약자를 돌본 성녀의 이름이다.
사상집 《월든》
1993년 6월 22일 박 전 대통령은 미국의 자연주의 철학자이자 시인, 수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쓴 《월든(Walden)》의 여러 부분을 발췌하기도 했다.
“우리의 발명품들은 흔히 진지한 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뺏어가는 예쁘장한 장난감일 경우가 많다.”
“사치와 무모한 낭비, 그리고 치밀한 계산과 보람 있는 목적의 결여로 인하여 파산상태에까지 와 있다. 이런 가정과 이런 국가에 대한 유일한 구제책은 엄격히 절약하고 스파르타식 이상으로 생활을 간소화하고 목표 의식을 향상시키는 데에 있다.”
“만일 사람들이 진실만을 똑바로 보고 속임수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가 멀리 어디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월든》은 소로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남쪽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2개월 동안 홀로 생활한 나날을 기록한 사상집이다. 19세기에 쓰인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굴원의 《어부사》
전국시대의 정치가로서 중국 최초의 시인이자 최고의 시인이라 일컫는 굴원(屈原)의 《어부사》에는 ‘탁영탁족(濯纓濯足)’이 등장한다.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세상 깨끗하면 벼슬길에 나서고, 탁하면 발 씻고 떠나겠다는 뜻이다. 속된 인간 세상을 초탈하여 고결한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대목이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은 것 같다. 《어부사》는 민중을 위한 개혁정책을 펴던 굴원이 기득권층에 의해 쫓겨나 물가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난 어부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토머스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보낸 서신
1992년 5월 5일 박 전 대통령은 이렇게 적었다.
“문벌에 기초한 인위적인 귀족제도도 있습니다. 나는 자연의 귀족제도를 자연의 가장 귀중한 선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회를 교육하는 데뿐 아니라 사회의 위임을 받고 그것을 다스리는 데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이 자연적인 귀족들이 공직을 담당할 수 있는 깨끗한 선발제도를 갖춘 정부를 최선의 정부 형태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유층에게만 주어지는 지도자 훈련, ‘인위적인 귀족계층’ 위주에서 탈피해서 능력과 재능에 따라 형성되는 ‘자연적인 실력계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813년 3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2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다.
둘은 절친한 혁명 동지로 시작했다. 애덤스는 독립선언문 기초위원 중 한 명이었지만, 독립선언문 작성을 그보다 7년이나 어린 33세 제퍼슨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두 사람은 원수지간으로 변했다. 1796년 선거에서는 애덤스가 근소한 차이로 제퍼슨을 누르고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800년 선거에서는 제퍼슨이 애덤스를 누르고 3대 대통령으로 올라섰다. 두 선거 모두 초기 미국의 당쟁과 지역감정의 결정체였다. 애덤스는 북부 연방파를 대변했고, 제퍼슨은 남부 공화파를 대표했다. 인신공격이 난무한 선거였기에 두 사람이 받은 상처는 컸다. 선거에 패한 애덤스는 제퍼슨 취임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워싱턴을 떠나버렸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서로 피했다. 공적·사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1812년 초 두 사람은 화해했다.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애덤스지만 그 정황을 제공한 사람은 제퍼슨이었다. 애덤스가 염려한 것과 달리 제퍼슨은 집권 동안 연방파에 정치적 보복을 가하지 않았고, 포용의 정치를 펼쳤다. 이후 14년간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된다. 수많은 편지가 오간다. 두 사람은 서로 간에 그들 가족의 안부와 건강을 묻고, 과학과 철학을 논하며, 국가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소견을 주고받았다. 두 ‘건국의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끊임없이 서신을 교환하다가 미국 독립기념 5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1826년 7월 4일)에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애덤스는 향년 90세였고, 제퍼슨은 83세였다.
한나라당-새누리당에서 이어진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의 최근 역사는 친박계와 친이계(비박계) 간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기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맞붙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계파가 만들어졌고, 계파 갈등은 정권을 다시 내놓게 하는 주원인이 됐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한 이유
박 전 대통령은 답답하리만큼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했다. 중국의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으뜸으로 꼽히는 《주역(周易)》을 공자가 해설한 《계사전(繫辭傳)》에 나온 문구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계사전》은 공자가 《주역》 64괘·384효에 붙어 있는 경문을 풀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은 입으로부터 나왔을 때는 소수의 사람에게 전해지는 데 불과하지만, 나중에는 천하 만인에게 영향을 준다. 행동도 또한 가까운 데서 멀리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언행(言行)은 군자가 되는 자격의 열쇠로서 영예와 수치를 결정하는 요인인 것이다. 군자가 천지마저 움직임은 언행으로써 하는 것이매 군자는 언행에 극히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유대인의 잠언집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들도 필사했다.
“세상에 천재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세상의 모든 둔재들이 그를 악착같이 헐뜯는 것이다.”
“아무리 행운이 자신을 높이 올려놓아도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다.”
“유리 위에서 자꾸 미끄러져 뛰지 못한 벼룩은 유리를 치워도 뛰지 않는다.”
“삶을 지혜롭게 사는 길은 모든 면에서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을 보는 것.”
“부자를 보고 칭찬하는 것은 그 돈을 칭찬하는 것이다.”
‘탈무드’는 히브리어로 ‘교훈’이란 뜻인데 〈토라〉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토라〉는 〈구약성서〉 모세 5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신명기·민수기)을 바탕으로 정리된 일종의 율법서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보통 아이가 세 살 때부터 탈무드를 가르친다. 《탈무드》는 자녀 교육서이자 그들의 삶 자체인 셈이다. 《탈무드》의 교육 목적은 어려서부터 행동과 성품을 잘 다듬는 데 있다.
박근혜의 절제, 이 글 영향받았나?
“최고의 처세훈은 참을 줄 아는 것이며 지혜의 절반은 참는 데 있다.”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모진 세월을 인내하며 지켜온 절제, 즉 참을성이 큰 역할을 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며 로마의 다섯 현제(賢帝) 가운데 한 사람이던 15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 에픽테토스가 했다.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주인이 그를 화나게 해보려고 다리를 비틀었다. 에픽테토스는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그렇게 계속 비틀면 다리가 부러집니다.”
이 말에 화가 난 주인이 더욱 세게 비틀자 정말 다리가 부러졌다. 그때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보십시오. 계속 비틀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픽테토스는 주인이 사망하자 자유를 얻었다. 그 후 귀족 자제들에게 스토아 철학을 가르쳤다.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300년께부터 기원후 200년께까지 그리스·로마 시대를 풍미한 철학이다. 에픽테토스의 본명은 알 수 없다. 에픽테토스는 ‘획득한(acquired)’ ‘노예’ ‘하인’이란 뜻이다.
박 전 대통령은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인지좌여락(人知坐輿樂) 불식견여고(不識肩輿苦)’를 필사하기도 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의 ‘공직자상(像)’이었다.
프랑스 운동권 다니엘 콩방디의 글
“민주화운동이든 무엇이든 사회운동이 국가적 힘을 쟁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하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회운동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의식 변화라고 생각한다. 의식 변화를 통해 기존 제도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더 크다.”
1968년 3월 미국의 베트남 침공을 비난하면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자, 그해 5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 권위주의와 보수 체제를 거부하는 운동이 확산됐고, 이는 미국의 반전(反戰), 히피운동 등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의 프랑스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 68혁명(5월혁명)’을 학생 지도자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끈 이는 다니엘 콩방디(Daniel Cohn Bendit)다. 콩방디는 붉은 머리카락과 좌파적 정치 성향 때문에 ‘붉은 다니(Dany le Roug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68혁명 주역인 다니엘 콩방디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1968년 5월은 청산돼야 한다”고 하자 “1968년 5월은 이미 끝났다”면서 “지금은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즐길 수 있는 시대”라며 1968년과의 단절을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이든 무엇이든 사회운동이 국가적 힘을 쟁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콩방디의 글을 적으면서 우리 사회의 586, 즉 과거 386 운동권 집단이 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386세대 운동권은 2000년 총선 때 대거 정치권에 진입했다. 새천년민주당으로 당명을 개정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은 피 수혈’이라는 명분하에 386세대 운동권을 대거 정치권에 불러들였다. 송영길 의원, 이인영 원내대표, 우상호 전 원내대표,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오영식 전 의원이 그때 정치권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0~3000달러 수준에 머물던 1980년대에 읽고 토론한 것의 기억으로서,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된 오늘날의 한국을 진단하고 이끌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블레인 리의 글과 말 다수
박 전 대통령의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에는 리더십의 대가라 불리는 블레인 리(Blaine Lee)가 말했거나 책에 쓴 글이 특히 많았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갖는 존경심은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를 신뢰하는 것이며 그의 선함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할 때 우리는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된다.”
“성실함의 의미는 ‘말을 실천에 옮기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말한 바를 실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이 스스로의 삶의 가치와 일치함을 의미한다.”
“포용은 조건이 붙지 않기 때문에 큰 힘을 갖는다.”
“영향력의 핵심은 스스로 영향을 받겠다는 자세이다. 이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서는 다른 사람들과 오랜 기간 성공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리더가 될 사람들은 늘 신뢰성에 주목해왔다.”
블레인 리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고, 세계 각국을 돌며 강의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두려움을 이용한 강압적 지도력과 거래가 밑바탕에 깔린 실리적 지도력을 버리고 존경심을 기초로 한 영향력, 이른바 원칙 중심의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박 전 대통령은 대표적인 원칙주의자다. 박 전 대통령의 성심여고 동창생 장용희씨의 이야기다.
“국어 시간엔 매번 숙제가 있었는데, 처음 한두 번만 숙제검사를 하고 이후엔 검사를 안 했다. 어느 날 하루 선생님이 공책 검사를 했는데 같은 반 30명 학생 가운데 유일하게 박 전 대통령만 숙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를 하든 말든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자세, 누가 보든 안 보든 의무에 충실한 원칙이 박 전 대통령을 만들었다.”
“죽어서는 영원한 사상 남기도록 한다”
박 전 대통령은 1994년 10월 1일 “살아서는 불평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사상을 남기도록 한다”고 적었다.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문구다.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홍자성이 쓴 《채근담》은 청빈한 생활과 자연의 아름다움, 인격의 수련을 담은 책이다.
《채근담》에는 ‘대인춘풍지기추상(待人春風持己秋霜·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냉정하라)’이란 말이 나온다.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9년 이 말을 줄인 ‘춘풍추상(春風秋霜)’이 적힌 액자를 비서관실에 돌렸다. ‘문재인 정부가 2년 차에 접어들면서 기강이 해이해질 수 있는데 초심을 잃지 말자’는 취지였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정부는 이 말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측근들에게는 관대하고 정적들에게는 엄격하며, 자신에게 유리하면 정의고 불리하면 관행으로 몰고 가는 편의주의적 정의관에 매몰돼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 강점기 거문고를 통해 정악(正樂)의 맥을 이었고, 광복 후 국립국악원장과 국악고(高) 초대 교장을 지내며 수많은 국악도를 양성한 성경린 선생이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인간사를 보듯 화려하고 풍자적인 가야금에 비해 거문고는 격조가 있어요. 무딘 생김새에다 음량도 가야금보다 작지만, 이게 묘하게 악사장 노릇을 합니다. 이 나이(87) 살면서 매사를 삼가고 두렵게 여기며 지내는 것도 거문고에서 배웠습니다. 참고 견디며 정진하는 게 최선의 길입니다.”
박 전 대통령도 공감한 모양이다.
성 선생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지휘 보유자로, 한국 궁중음악 보존의 한길을 걸어온 큰 어른으로 꼽혔다. 그는 1926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 들어가 거문고를 처음 만났다. 그는 1988년 제5회 방일영국악상을 받았다.
朴, 수첩 들고 다니며 국민 목소리 적은 이유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제(齊)나라의 명(名)재상인 관중(管仲)의 정치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흡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끝없이 민심의 의향에 쫓아 처리한다. 이것이 관중의 정치였다. 따라서 정책을 논의할 때는 실행 면에 주안을 두고, 끊임없이 인민이 무엇을 구(求)하는가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정책 면에 반영시켰다.”
‘관중이 끊임없이 백성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문장을 적으면서 다짐해서였을까.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자세는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장점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오른 후에도 수첩을 들고 다니며 자신에게 하는 건의를 모두 적었다. 대통령의 모든 행사에는 민원비서관이나 직원이 빠짐없이 동행했다. 해외 순방 때도 민원비서관이 늘 동행했다.
중국 명(明)나라 때 대학자이자 정치가 뤼신우의 글도 박 전 대통령에게 영향을 줬다.
“학문할 때는 지식만을 쌓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부끄러움을 없애고 뜻에도 한 점 나쁜 생각이 깃들이지 않게 해야 한다.”
“세상의 일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는 것이 많고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낸다. 이것은 포용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뤼신우는 《신음어(呻吟語)》를 썼다. 그는 벼슬이 높은 것도 아니고 학문이나 사상도 공자나 맹자처럼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쓴 《신음어》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튀어나온 신음과 탄식처럼 가식 없는 표현들로 꽉 차 있다. 그는 동양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당시의 군자와 소인에 대한 기준을 정의한 바 있다.
《조선일보》 칼럼 언론사 글 중 유일
박 전 대통령이 자필로 쓴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 중에는 1988년 4월16일자 《조선일보》 〈아침논단〉에 실린 글도 있었다.
‘정치의 정상화’라는 제목의 글은 원로 사회학자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가 썼다. 글의 골자는 간단하다. 정치 근본은 ‘위민(爲民)’이란 것이다.
〈…정치의 근본이란 바로 위민에 있다는 것이다. 민(民)의 욕구를 살펴 태워주고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사회를 조직, 통합하고 자원을 동원하며 사회 각 부문 간의 이해 관심의 상충을 조정하는 일이 정치의 본래적인 기능이다.…〉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 중 언론에 실린 것은 이 글이 유일하다.
“말의 노예가 되지 마라”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명언 “Be not the slave of Words(말의 노예가 되지 마라)” 등도 박 전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쳤다.
칼라일은 19세기 영국 사상계에서 존 스튜어트 밀과 함께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저서 《역사에서의 영웅, 영웅 숭배 및 영웅정신》은 19세기 최고 베스트셀러 중 하나다.
이 밖에 박 전 대통령은 ‘조선왕(造船王)’으로 불린 헨리 카이저(Henry Kaiser)의 “대부분의 기회는 문제의 겉옷을 입은 채 우리를 찾아오는지도 모른다”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의 “네가 부자가 되고 싶으면 남을 부자로 만들라” 등 미국 성공한 사업가의 명언에도 감명을 받았다.
카이저는 1만 톤짜리 수송선을 단 4일 만에 건조(建造)한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카네기는 1901년 미국 철강시장의 65%를 지배하는 US스틸사를 탄생시켰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그는, 은퇴 후 2500여 개 도서관을 짓는 등 평생 모은 재산 3억5000만 달러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했다.⊙
박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측근들은 자필 편지를 보내 소통하려 했다. 박근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명절 때마다 자필로 쓴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내는 수석도 있었다”고 했다.
4·15 총선을 42일 남겨둔 지난 3월 4일,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3월 구속 이후 1069일 만에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때 그의 자필 편지를 유영하 변호사가 대독하는 형식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자필 편지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해 “무능하고 위선적이며 독선적”이라고 했다. 이어 “기존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여러분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줄 것을 호소한다”고 덧붙였다. 지지자들에게 오는 4월 총선에서 보수 진영이 분열하지 말고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문재인 정권 심판에 나서라는 뜻으로 해석됐다.
1990~1999년 박근혜 자필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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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필 메모의 일부를 2006년 공개했다. 박 전 대통령과 그 측근, 네티즌 지지자들이 공동 운영한 홈페이지인 ‘호박넷’(好朴(박근혜를 좋아하는)+네트워크의 합성어)에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이란 제목으로 올린 것이다. |
박 전 대통령은 이 메모장의 일부를 2006년 공개했다. 박 전 대통령과 측근, 네티즌 지지자들이 공동 운영한 홈페이지 호박넷[호박(好朴·박근혜를 좋아하는) 네트워크]에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이란 제목으로 올린 것이다. 현재 호박넷은 폐쇄된 상태라 당시 공개된 박 전 대통령의 자필 메모는 사실상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월간조선》은 호박넷에 공개된 것 외에 다른 메모까지 총 75개를 박 전 대통령을 15년 넘게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김휘종 전 청와대 행정관에게서 jpg 파일 형태로 받았다.
김 전 행정관은 박 전 대통령과 호박넷을 함께 관리하던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두 달 전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친박누리’에 이 메모장의 일부를 공개해왔으나, “더 많은 분께 메모의 내용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며 《월간조선》에 가지고 있던 메모 일체를 제공했다.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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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 4일 오전 한나라당 의원총회에 참석한 재·보선 당선자들. 왼쪽부터 신영국(문경예천), 정문화(부산서구), 정창화(경북의성), 박근혜(대구달성) 당선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시에도 자필로 공책에 ‘나를 생각을 키워준 글’을 썼다. |
‘메모의 달인’ 횡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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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박근혜 자필 노트 캡처. |
“정치를 하는 사람은 오직 의리의 도(道)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비록 험난한 일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이에 대처해 마음이 형통하고 의혹하지 않으면 비록 험난하더라도 반드시 풀릴 수 있고 성과가 있을 것이다. (중략) 오직 의리만을 실천하여 나갈 따름이면 다시 무엇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직 마음만이 형통하여질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인의 ‘의리의 도’를 강조한 횡거 선생의 글을 옮긴 것은 정권 2인자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 아니었을까.
횡거 선생의 이름은 장재(張載)이고, 자(字)는 자후(子厚)다. 횡거(橫渠)는 호(號)다. 장안에서 태어나 횡거진(橫渠鎭·현재 산시성 미현 횡거)으로 옮겨 살다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제자들을 가르쳤기에 사람들은 그를 횡거 선생이라 불렀다. 횡거 선생은 벼슬살이할 때나 물러나 있을 때나 수양과 공부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좌우에 책을 쌓아두고 단정하게 앉아 머리를 숙이면 글을 읽었고 머리를 들면 사색에 잠겼다. 얻은 바가 있으면 글로 기록했는데, 간혹 한밤중에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글을 쓰기도 했다.
횡거 선생은 메모의 달인이었다. 그는 무언가 깨닫게 되면 시공간에 관계없이 무조건 기록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문방사우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메모한 기록을 바탕으로 《정몽(正夢)》이란 책을 썼다.
공교롭게 박 전 대통령도 메모광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물려받은 습관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여당인 친(親)노무현·문재인 세력은 당시 박 전 대통령을 ‘수첩공주’라고 폄하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시절 수첩공주라는 별명에 대해 “사실 시작은 야당에서 저를 공격하기 위해 만든 건데 그 별명이 싫지 않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자기 욕심만 채우는 부자들을 비판한 혼아미 고에쓰(本阿彌光悅)의 말을 적기도 했다.
“부자들은 소유를 늘리고, 재산의 유지에 급급해서 정신의 자유마저도 잃고 있다.”
혼아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 도검 감정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교토의 상인 집안이다. 이 집안 사람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나 그 욕망을 억누르고 소박한 삶을 택했다. 칠기공예 대가인 혼아미 고에쓰는 평생 작은 집에 다다미 두세 장짜리 다실을 만들고 홀로 차를 즐기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그의 어머니 묘슈는 자손들이 옷이며 용돈을 줄 때마다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다. 세상 사람이 모두 가난한데 혼자만 많이 소유하는 것은 죄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Treat your friend as if he might become an enemy”
로마 시대의 풍류시인 푸블릴리우스 시루스(Publilius Syrus)는 노예 출신이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는지, 아니면 전쟁포로로 노예가 됐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는 시리아 중에서도 안티오키아 출신이었다. 주인이 그를 로마로 데려간 것은 12세 때였다. 그의 재주를 아낀 주인이 자유와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
시루스는 고대 로마 초기부터 인기 연극 장르던 마임(mime) 작가였다. 폭정으로 악명 높은 네로 황제가 마임에 직접 출연한 적도 있다. 이탈리아 지방 곳곳에서 명성이 자자한 시루스를 카이사르가 로마로 불러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자신의 탑수스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마임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시루스에게 상을 줬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마임에서 추려낸 명언을 담아 《문장(文章·Sententiae·Sentences)》을 냈다. 《문장》은 734~1000여 개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문헌이다.
박 전 대통령은 《문장》에 나온 한 문장을 직접 쓰며 마음에 새긴 모양이다.
“Treat your friend as if he might become an enemy.(친구를 대할 때는 그가 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대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은 1999년 9월 6일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크리스토퍼 드 빙크(Christopher de Vinck)가 쓴 《올리버 스토리》의 한 부분을 발췌했다.
“나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어떻게 32년 동안 올리버를 보살필 수 있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것은 32년간의 긴 시간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올리버를 굶기지 않을까 생각하며 보낸 하루하루일 뿐이란다’라고 말했다.”
《올리버 스토리》는 33년을 한 침대에 누워 부모·형제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은 올리버의 일화다.
박 전 대통령은 불교에서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비법으로 제시한 팔정도(八正道)를 적기도 했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이른다.
《노자 그 불교적 이해》의 한 대목을 메모하기도 했다.
“욕심부릴 만하다는 견해로 마음이 혼란해서는 안 된다. 이익이란 상주불변하는 실제가 아니라 거짓의 임시적인 물건이다. 사람들은 수나라 땅에서 생산되는 구슬을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기나 이를 새들에게 던지면 깜짝 놀라서 날아가버린다. 여색은 요염한 자태이다. 사람들은 여색 가운데 서시를 가장 아름다운 여색으로 꼽지만, 고라니나 사슴은 그를 보기만 해도 깜짝 놀라서 도망을 간다.”
《노자 그 불교적 이해》는 명나라 때 4대 고승 중 한 명인 감산덕청 대사가 노자를 불교적 입장에서 풀어서 쓴 책이다.
법구경(法句經) 제186절 “가령 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욕망을 채울 수는 없으리라. 욕망에는 짧은 쾌락과 많은 고통이 있다고 알고서 현자는 천상의 쾌락에도 기뻐하지 않는다”와, 제187절 “천상의 쾌락에도 기뻐하지 않는다. ‘바르게 깨달은 이’의 제자는 이 욕망이 다 없어짐을 기뻐한다”도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로 꼽았다.
‘중국 선불교의 완성자’로 불리는 혜능(慧能) 스님의 “늘 지혜를 활동시키는 것이 반야의 실천이라고 한다”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인도 고승인 산티데바(Shantideva) 스님의 말도 있었다.
“지금까지 재산을 모은 사람이나 명예를 얻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재산과 명예와 함께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 자취는 전연 알 길이 없다.”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많고 환락은 적다.”
“욕망을 두려워하고 고독에서 기쁨을 얻도록 하라.”
산티데바는 서기 800년경 인도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문수보살의 계시로 왕이 되는 대신 수행자가 되었고,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기독교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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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박근혜 자필 노트 캡처. |
박 전 대통령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가 쓴 《고백록(Confessiones)》에 담긴 이 글을 적은 뒤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곧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다. 그가 북아프리카 히포(Hyppo)의 대주교(大主敎)로 취임하자 반대자들은 그의 이교(異敎) 전력을 문제 삼았다. 그는 젊어서 9년 동안 동방종교인 마니교에 심취한 적이 있다. 따라서 회중(會衆)에 자신이 걸어온 길과 ‘이미 내가 누구인지’를 솔직하게 밝히고자 했다. 그래서 쓴 게 《고백록》이다.
《고백록》은 헛된 가치에 얽매여 방황하던 한 인간이 간절한 탐구와 통회(痛悔)를 통해 종교적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공식적으론 ‘무교(無敎)’다. 다만, 천주교와 인연이 깊다. 박 전 대통령은 과거 천주교재단인 성심여중·고와 서강대를 다녔다. 특히 1965년 성심여중 재학 시절 세례를 통해 ‘율리아나’란 세례명까지 받았다. 당시 머리에 미사포를 쓰고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사제 앞에 서 있는 어린 박근혜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율리아나는 이탈리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약자를 돌본 성녀의 이름이다.
사상집 《월든》
1993년 6월 22일 박 전 대통령은 미국의 자연주의 철학자이자 시인, 수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쓴 《월든(Walden)》의 여러 부분을 발췌하기도 했다.
“우리의 발명품들은 흔히 진지한 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뺏어가는 예쁘장한 장난감일 경우가 많다.”
“사치와 무모한 낭비, 그리고 치밀한 계산과 보람 있는 목적의 결여로 인하여 파산상태에까지 와 있다. 이런 가정과 이런 국가에 대한 유일한 구제책은 엄격히 절약하고 스파르타식 이상으로 생활을 간소화하고 목표 의식을 향상시키는 데에 있다.”
“만일 사람들이 진실만을 똑바로 보고 속임수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가 멀리 어디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월든》은 소로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남쪽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2개월 동안 홀로 생활한 나날을 기록한 사상집이다. 19세기에 쓰인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굴원의 《어부사》
전국시대의 정치가로서 중국 최초의 시인이자 최고의 시인이라 일컫는 굴원(屈原)의 《어부사》에는 ‘탁영탁족(濯纓濯足)’이 등장한다.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세상 깨끗하면 벼슬길에 나서고, 탁하면 발 씻고 떠나겠다는 뜻이다. 속된 인간 세상을 초탈하여 고결한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대목이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은 것 같다. 《어부사》는 민중을 위한 개혁정책을 펴던 굴원이 기득권층에 의해 쫓겨나 물가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난 어부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토머스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보낸 서신
1992년 5월 5일 박 전 대통령은 이렇게 적었다.
“문벌에 기초한 인위적인 귀족제도도 있습니다. 나는 자연의 귀족제도를 자연의 가장 귀중한 선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회를 교육하는 데뿐 아니라 사회의 위임을 받고 그것을 다스리는 데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이 자연적인 귀족들이 공직을 담당할 수 있는 깨끗한 선발제도를 갖춘 정부를 최선의 정부 형태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유층에게만 주어지는 지도자 훈련, ‘인위적인 귀족계층’ 위주에서 탈피해서 능력과 재능에 따라 형성되는 ‘자연적인 실력계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813년 3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2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다.
둘은 절친한 혁명 동지로 시작했다. 애덤스는 독립선언문 기초위원 중 한 명이었지만, 독립선언문 작성을 그보다 7년이나 어린 33세 제퍼슨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두 사람은 원수지간으로 변했다. 1796년 선거에서는 애덤스가 근소한 차이로 제퍼슨을 누르고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800년 선거에서는 제퍼슨이 애덤스를 누르고 3대 대통령으로 올라섰다. 두 선거 모두 초기 미국의 당쟁과 지역감정의 결정체였다. 애덤스는 북부 연방파를 대변했고, 제퍼슨은 남부 공화파를 대표했다. 인신공격이 난무한 선거였기에 두 사람이 받은 상처는 컸다. 선거에 패한 애덤스는 제퍼슨 취임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워싱턴을 떠나버렸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서로 피했다. 공적·사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1812년 초 두 사람은 화해했다.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애덤스지만 그 정황을 제공한 사람은 제퍼슨이었다. 애덤스가 염려한 것과 달리 제퍼슨은 집권 동안 연방파에 정치적 보복을 가하지 않았고, 포용의 정치를 펼쳤다. 이후 14년간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된다. 수많은 편지가 오간다. 두 사람은 서로 간에 그들 가족의 안부와 건강을 묻고, 과학과 철학을 논하며, 국가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소견을 주고받았다. 두 ‘건국의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끊임없이 서신을 교환하다가 미국 독립기념 5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1826년 7월 4일)에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애덤스는 향년 90세였고, 제퍼슨은 83세였다.
한나라당-새누리당에서 이어진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의 최근 역사는 친박계와 친이계(비박계) 간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기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맞붙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계파가 만들어졌고, 계파 갈등은 정권을 다시 내놓게 하는 주원인이 됐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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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박근혜 자필 노트 캡처. |
“말은 입으로부터 나왔을 때는 소수의 사람에게 전해지는 데 불과하지만, 나중에는 천하 만인에게 영향을 준다. 행동도 또한 가까운 데서 멀리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언행(言行)은 군자가 되는 자격의 열쇠로서 영예와 수치를 결정하는 요인인 것이다. 군자가 천지마저 움직임은 언행으로써 하는 것이매 군자는 언행에 극히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유대인의 잠언집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들도 필사했다.
“세상에 천재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세상의 모든 둔재들이 그를 악착같이 헐뜯는 것이다.”
“아무리 행운이 자신을 높이 올려놓아도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다.”
“유리 위에서 자꾸 미끄러져 뛰지 못한 벼룩은 유리를 치워도 뛰지 않는다.”
“삶을 지혜롭게 사는 길은 모든 면에서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을 보는 것.”
“부자를 보고 칭찬하는 것은 그 돈을 칭찬하는 것이다.”
‘탈무드’는 히브리어로 ‘교훈’이란 뜻인데 〈토라〉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토라〉는 〈구약성서〉 모세 5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신명기·민수기)을 바탕으로 정리된 일종의 율법서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보통 아이가 세 살 때부터 탈무드를 가르친다. 《탈무드》는 자녀 교육서이자 그들의 삶 자체인 셈이다. 《탈무드》의 교육 목적은 어려서부터 행동과 성품을 잘 다듬는 데 있다.
박근혜의 절제, 이 글 영향받았나?
“최고의 처세훈은 참을 줄 아는 것이며 지혜의 절반은 참는 데 있다.”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모진 세월을 인내하며 지켜온 절제, 즉 참을성이 큰 역할을 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며 로마의 다섯 현제(賢帝) 가운데 한 사람이던 15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 에픽테토스가 했다.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주인이 그를 화나게 해보려고 다리를 비틀었다. 에픽테토스는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그렇게 계속 비틀면 다리가 부러집니다.”
이 말에 화가 난 주인이 더욱 세게 비틀자 정말 다리가 부러졌다. 그때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보십시오. 계속 비틀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픽테토스는 주인이 사망하자 자유를 얻었다. 그 후 귀족 자제들에게 스토아 철학을 가르쳤다.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300년께부터 기원후 200년께까지 그리스·로마 시대를 풍미한 철학이다. 에픽테토스의 본명은 알 수 없다. 에픽테토스는 ‘획득한(acquired)’ ‘노예’ ‘하인’이란 뜻이다.
박 전 대통령은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인지좌여락(人知坐輿樂) 불식견여고(不識肩輿苦)’를 필사하기도 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의 ‘공직자상(像)’이었다.
프랑스 운동권 다니엘 콩방디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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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박근혜 자필 노트 캡처. |
1968년 3월 미국의 베트남 침공을 비난하면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자, 그해 5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 권위주의와 보수 체제를 거부하는 운동이 확산됐고, 이는 미국의 반전(反戰), 히피운동 등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의 프랑스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 68혁명(5월혁명)’을 학생 지도자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끈 이는 다니엘 콩방디(Daniel Cohn Bendit)다. 콩방디는 붉은 머리카락과 좌파적 정치 성향 때문에 ‘붉은 다니(Dany le Roug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68혁명 주역인 다니엘 콩방디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1968년 5월은 청산돼야 한다”고 하자 “1968년 5월은 이미 끝났다”면서 “지금은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즐길 수 있는 시대”라며 1968년과의 단절을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이든 무엇이든 사회운동이 국가적 힘을 쟁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콩방디의 글을 적으면서 우리 사회의 586, 즉 과거 386 운동권 집단이 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386세대 운동권은 2000년 총선 때 대거 정치권에 진입했다. 새천년민주당으로 당명을 개정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은 피 수혈’이라는 명분하에 386세대 운동권을 대거 정치권에 불러들였다. 송영길 의원, 이인영 원내대표, 우상호 전 원내대표,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오영식 전 의원이 그때 정치권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0~3000달러 수준에 머물던 1980년대에 읽고 토론한 것의 기억으로서,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된 오늘날의 한국을 진단하고 이끌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블레인 리의 글과 말 다수
박 전 대통령의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에는 리더십의 대가라 불리는 블레인 리(Blaine Lee)가 말했거나 책에 쓴 글이 특히 많았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갖는 존경심은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를 신뢰하는 것이며 그의 선함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할 때 우리는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된다.”
“성실함의 의미는 ‘말을 실천에 옮기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말한 바를 실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이 스스로의 삶의 가치와 일치함을 의미한다.”
“포용은 조건이 붙지 않기 때문에 큰 힘을 갖는다.”
“영향력의 핵심은 스스로 영향을 받겠다는 자세이다. 이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서는 다른 사람들과 오랜 기간 성공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리더가 될 사람들은 늘 신뢰성에 주목해왔다.”
블레인 리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고, 세계 각국을 돌며 강의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두려움을 이용한 강압적 지도력과 거래가 밑바탕에 깔린 실리적 지도력을 버리고 존경심을 기초로 한 영향력, 이른바 원칙 중심의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박 전 대통령은 대표적인 원칙주의자다. 박 전 대통령의 성심여고 동창생 장용희씨의 이야기다.
“국어 시간엔 매번 숙제가 있었는데, 처음 한두 번만 숙제검사를 하고 이후엔 검사를 안 했다. 어느 날 하루 선생님이 공책 검사를 했는데 같은 반 30명 학생 가운데 유일하게 박 전 대통령만 숙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를 하든 말든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자세, 누가 보든 안 보든 의무에 충실한 원칙이 박 전 대통령을 만들었다.”
“죽어서는 영원한 사상 남기도록 한다”
박 전 대통령은 1994년 10월 1일 “살아서는 불평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사상을 남기도록 한다”고 적었다.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문구다.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홍자성이 쓴 《채근담》은 청빈한 생활과 자연의 아름다움, 인격의 수련을 담은 책이다.
《채근담》에는 ‘대인춘풍지기추상(待人春風持己秋霜·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냉정하라)’이란 말이 나온다.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9년 이 말을 줄인 ‘춘풍추상(春風秋霜)’이 적힌 액자를 비서관실에 돌렸다. ‘문재인 정부가 2년 차에 접어들면서 기강이 해이해질 수 있는데 초심을 잃지 말자’는 취지였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정부는 이 말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측근들에게는 관대하고 정적들에게는 엄격하며, 자신에게 유리하면 정의고 불리하면 관행으로 몰고 가는 편의주의적 정의관에 매몰돼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 강점기 거문고를 통해 정악(正樂)의 맥을 이었고, 광복 후 국립국악원장과 국악고(高) 초대 교장을 지내며 수많은 국악도를 양성한 성경린 선생이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인간사를 보듯 화려하고 풍자적인 가야금에 비해 거문고는 격조가 있어요. 무딘 생김새에다 음량도 가야금보다 작지만, 이게 묘하게 악사장 노릇을 합니다. 이 나이(87) 살면서 매사를 삼가고 두렵게 여기며 지내는 것도 거문고에서 배웠습니다. 참고 견디며 정진하는 게 최선의 길입니다.”
박 전 대통령도 공감한 모양이다.
성 선생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지휘 보유자로, 한국 궁중음악 보존의 한길을 걸어온 큰 어른으로 꼽혔다. 그는 1926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 들어가 거문고를 처음 만났다. 그는 1988년 제5회 방일영국악상을 받았다.
朴, 수첩 들고 다니며 국민 목소리 적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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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이 끊임없이 백성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문장을 적으면서 다짐해서였을까.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자세는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장점이었다. |
“흡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끝없이 민심의 의향에 쫓아 처리한다. 이것이 관중의 정치였다. 따라서 정책을 논의할 때는 실행 면에 주안을 두고, 끊임없이 인민이 무엇을 구(求)하는가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정책 면에 반영시켰다.”
‘관중이 끊임없이 백성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문장을 적으면서 다짐해서였을까.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자세는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장점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오른 후에도 수첩을 들고 다니며 자신에게 하는 건의를 모두 적었다. 대통령의 모든 행사에는 민원비서관이나 직원이 빠짐없이 동행했다. 해외 순방 때도 민원비서관이 늘 동행했다.
중국 명(明)나라 때 대학자이자 정치가 뤼신우의 글도 박 전 대통령에게 영향을 줬다.
“학문할 때는 지식만을 쌓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부끄러움을 없애고 뜻에도 한 점 나쁜 생각이 깃들이지 않게 해야 한다.”
“세상의 일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는 것이 많고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낸다. 이것은 포용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뤼신우는 《신음어(呻吟語)》를 썼다. 그는 벼슬이 높은 것도 아니고 학문이나 사상도 공자나 맹자처럼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쓴 《신음어》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튀어나온 신음과 탄식처럼 가식 없는 표현들로 꽉 차 있다. 그는 동양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당시의 군자와 소인에 대한 기준을 정의한 바 있다.
《조선일보》 칼럼 언론사 글 중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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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이 자필로 쓴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 중에는 1988년 4월16일자 《조선일보》의 〈아침논단〉에 실린 글도 있었다. |
‘정치의 정상화’라는 제목의 글은 원로 사회학자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가 썼다. 글의 골자는 간단하다. 정치 근본은 ‘위민(爲民)’이란 것이다.
〈…정치의 근본이란 바로 위민에 있다는 것이다. 민(民)의 욕구를 살펴 태워주고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사회를 조직, 통합하고 자원을 동원하며 사회 각 부문 간의 이해 관심의 상충을 조정하는 일이 정치의 본래적인 기능이다.…〉
‘나의 생각을 키워준 글’ 중 언론에 실린 것은 이 글이 유일하다.
“말의 노예가 되지 마라”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명언 “Be not the slave of Words(말의 노예가 되지 마라)” 등도 박 전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쳤다.
칼라일은 19세기 영국 사상계에서 존 스튜어트 밀과 함께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저서 《역사에서의 영웅, 영웅 숭배 및 영웅정신》은 19세기 최고 베스트셀러 중 하나다.
이 밖에 박 전 대통령은 ‘조선왕(造船王)’으로 불린 헨리 카이저(Henry Kaiser)의 “대부분의 기회는 문제의 겉옷을 입은 채 우리를 찾아오는지도 모른다”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의 “네가 부자가 되고 싶으면 남을 부자로 만들라” 등 미국 성공한 사업가의 명언에도 감명을 받았다.
카이저는 1만 톤짜리 수송선을 단 4일 만에 건조(建造)한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카네기는 1901년 미국 철강시장의 65%를 지배하는 US스틸사를 탄생시켰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그는, 은퇴 후 2500여 개 도서관을 짓는 등 평생 모은 재산 3억5000만 달러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