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民主’는 이념과 가치를 담는 그릇에 불과… ‘민주’가 ‘이념’이 되면 유혈과 공포정치로 일탈
⊙ 자유의 반대편에 선 좌익의 민주주의는 압제체제 포장하는 기만적 장식물에 불과
⊙ 민주라는 집은 반드시 자유를 주인으로 해야… 자유가 떠나버린 집에 찾아드는 것은 사기꾼과 도적들
⊙ 자유와 이별 당한 민주는 자신도 파괴하면서 반민주가 돼버리고 만다
⊙ 자유의 반대편에 선 좌익의 민주주의는 압제체제 포장하는 기만적 장식물에 불과
⊙ 민주라는 집은 반드시 자유를 주인으로 해야… 자유가 떠나버린 집에 찾아드는 것은 사기꾼과 도적들
⊙ 자유와 이별 당한 민주는 자신도 파괴하면서 반민주가 돼버리고 만다
-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경축사에서 ‘빨갱이’라는 말을 ‘일제 잔재’라고 주장했다. 사진=뉴시스
이건 정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뜬금없는 얘기였다. ‘빨갱이’라는 말이 ‘친일(親日) 잔재’라는 것이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의 3·1절 경축사에서였는데, 그는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했다.
‘빨갱이’라는 말은 다 알다시피 공산주의자 등의 좌익 세력을 속되게 일컫는 용어다. 그런데 그 유래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일제(日帝)에서 찾는다? 우선 일제 총독부 관리가 누구를 애써 우리말로 ‘빨갱이’라고 불렀을지 생각해보자. 일본인이라면 발음하기도 힘들었을 터이고, 그래도 굳이 그렇게 부르고자 했다면 아마 ‘빠루갱이’라고 했을 텐데 그런 말은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만사 일제 잔재 친일 잔재 타령’에 젖어 있던 버릇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너무 막 던지는 얘기다. 그런 식으로 말과 용어에서 소위 일제 잔재를 문제 삼고 싶다면 그런 말, 정말 많다. 조희연 교육감이 “유치원(幼稚園)이라는 용어는 일제 잔재니 유아학교로 바꾸자”고 했는데, 맞기는 맞다. 유치원은 일본말이다. 하나 따지자면 ‘교육감(敎育監)’이라는 그의 직책도 그렇고, ‘학교(學校)’도 사실 일본식 한자어다. 학교라는 용어의 우리식 한자어를 찾자면 학당(學堂)이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근대 초엽 우리 교육기관들의 이름이다. 그래서 모든 학교를 학당이라고 바꾸어야 할까? 여론조사를 해보지 않았으나 국민들이 그러자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국민(國民)’도 사실 일본말이다.
‘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日帝 잔재의 범벅
좋든 싫든 지금 한국인이 쓰고 있는 한자 조어(造語)의 상당수는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특히 근대 문물과 관련된 용어들은 모두 일본식 한자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유치원도 빨갱이도 다 일제 잔재”라며 소동을 벌이는 이 사람들은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는 듯하다. 그렇게 말과 용어에서의 일제 잔재를 문제 삼으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욕하는 게 되는데, 그들이 알고도 그럴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 모르겠지만 ‘빨갱이’라는 말은 일본말이 아니지만 그 ‘빨갱이’들이 만든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따지자면 나라 이름부터가 일제 잔재의 범벅이다. 국명의 민주주의(民主主義), 인민(人民), 공화국(共和國) 모두가 일본이 번역하여 만든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법대로면 북한은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나라 이름을 뜯어고쳐야 한다.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라는 기치에 민족적 공감을 아끼지 않는 이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우리 민족끼리’의 ‘민족(民族)’도 일본이 만든 말인데 이건 또 어쩔 것인가?
소극(笑劇)이다. 일제시대 역사와 관련하여 벌이는 많은 소동이 대개 그렇지만 말과 용어를 붙들고 벌이는 일제 잔재 운운은 이렇듯 특히 더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맞게 된다. 하지만 덕분에 드러나고 포착된 문제들을 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民族’의 함정
우선 ‘민족’이라는 용어부터다. 독일어로는 ‘Volk’ 영어로는 ‘nation’에 해당하는 말을 민족이라고 번역했다. 한국인은 그 말에서 누구나 당연하게 종족주의적(種族主義的) 함의(含意)를 느낀다. 하지만 적어도 ‘nation’은 종족(tribe)·종족적(ethnic) 의미보다는 ‘국민(國民)’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메이지(明治) 시대 근대 일본의 건설자들이 그렇게 번역한 것은 약간 희망성 오역(誤譯)의 혐의가 있다. 일본인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그렇게 하여 강한 통합을 이루고자 한 바람이 반영돼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종족주의적 함의가 어떤 위험을 갖는지는 ‘Volk’를 종족적으로 강조한 나치독일의 인종주의적 폭주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도 그런 폭주의 길을 좇아갔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일제시대가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반일(反日)·친일(親日) 소동이 위세를 부린다. ‘반일’이 권력이 돼 있고 ‘친일’이라는 딱지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주홍글씨가 되곤 한다.
북한은 스스로를 ‘김일성민족’이라고 규정짓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김일성민족이 아니다. 그런데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 앞에선 그냥 흐물흐물해진다. 이건 국민의 실종이다. 착오와 고의(故意)가 뒤엉켜 작동하면서 빚어지는 일이다. ‘민족’이라는 용어가 내포하게 된 관념의 틈새에 의도를 품은 정치적 작용이 파고들어 만들어낸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誤譯
‘민주주의’라는 용어도 그런 문제를 갖고 있다. 이것은 더 분명하게 오역이다. 민주주의는 영어로는 ‘democracy’이다. 이것은 그리스어 ‘democratia’에서 비롯된 말로 ‘대중(大衆)’을 뜻하는 ‘demos’와 ‘정체(政體)’를 뜻하는 ‘cracy’의 복합어이다. 그래서 ‘민주정(民主政)’이나 ‘민주정체(民主政體)’로 번역해야 맞다. ‘cracy’는 ‘이념(理念)’이나 ‘사상(思想)’을 뜻하는 ‘ism’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의(主義)’로 번역하면서 ‘democracy’가 그 자체로 사상·이념으로 여겨지게 됐다.
물론 ‘democracy’가 그렇게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마치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가진 것처럼 강조된 적이 있기는 했다. 프랑스혁명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정치도덕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에서 “오직 민주정하에서만 국가는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의 조국이 된다”고 언명, 그 특별한 의의를 강조했다. ‘왕정과 귀족정’이라는 앙시앵레짐을 부정하며 등장한 프랑스혁명으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 민주정의 역사에서 프랑스 못지않게 아니 사실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위상을 갖는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와 다른 양상이었다.
영국은 민주정이 곧바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해 의회의 권한과 비중이 확대・강화돼 나가는 과정을 밟아가며 근대 의회민주주의 체제의 한 전형을 구축(構築)해갔다. 그리고 미국은 독립혁명을 통해 처음부터 왕이 없는 공화정체를 구축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정의 폭주가 초래할 수 있는 중우(衆愚)정치의 위험성을 예방할 수 있는 대의(代議)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여 또 다른 정치적 전형을 만들어갔다.
‘democracy’가 ‘主義’가 될 때…
그런데 영미의 경우와는 달리 민주정의 의의를 특별히 강조한 프랑스혁명은 다른 전개 양상을 보였다. 로베스피에르가 민주정을 말하던 그때는 바로 공포정치가 극으로 치닫던 시기(1793년 9월 5일~1794년 7월 27일)이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정의 이름으로 앙시앵레짐의 구세력뿐 아니라 혁명에 함께했던 이들까지 수없이 단두대(斷頭臺)로 보냈다. 그러다 결국 자신도 1794년 7월 28일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말았다. 프랑스의 경우는 ‘democracy’가 그 자체로 정체(政體) 이상의 주의(主義)처럼 받아들여지고 작동하게 될 때 어떻게 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일종의 역사적 선행(先行) 사례였다.
프랑스혁명 이래 그것을 모범으로 삼거나 찬양하며 진행된 모든 혁명이 예외 없이 그런 일탈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라 칭한 19세기 이래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로 이르는 20세기까지의 모든 시대에 발생한 혁명이 다 그러했다. 분식(粉飾)과 덧칠로 어느덧 신화화(神話化)된 프랑스혁명은 혁명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조장했지만, 그 모범을 따라간 실제의 혁명들은 덧칠 속에 숨겨진 프랑스적 혁명의 유혈과 공포정치를 반복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러시아혁명이었으며, 그를 뒤따라간 모든 좌익혁명이 그랬다. 그 혁명들은 하나같이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적 민주의 깃발을 흔들어댔다.
한국현대사는 ‘민주 對 反민주’의 역사?
이렇듯 ‘democracy’는 그 자체로도 이미 그 같은 폭주의 깃발이 될 수 있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처음부터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가치의 용어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면 내포된 속성은 최소한의 경계도 없이 더 증폭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그렇게 내세워지면서 건국 초부터 끊임없이 진통을 선사했으며, 지금도 그 요동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룩한 드문 나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 진영은 건국 이래 대한민국의 역사를 거의 전적으로 ‘민주’에 방점(傍點)을 두고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 대 반(反)민주’ 투쟁의 역사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취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마침내’ 이룩한 민주화다. 그들의 입장에선 산업화의 성취는 누가 했더라도 당연히 이루어지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그들에겐 오직 민주화야말로 독재 정권에 맞서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이룩한 가치 있는 성취다.
이른바 민주 진영 뿌리의 하나라는 한국민주당부터가 그랬다. 그들은 초대(初代)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게 처음부터 ‘민주’를 흔들어대며 정치적 공격을 가했다. 한민당은 건국 당초부터 내각제를 주창하고 이후 줄곧 그 입장을 견지했다. 대통령제가 독재이거나 내각제가 유일한 민주정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짓고 내각제만이 유일한 민주정인 듯 내세우며 공격을 했다.
그런데 그들의 내각제 정치에 대한 이해는 조선왕조 시대 양반 붕당(朋黨)정치적 발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을까? 이들이 4・19 이후 정권을 잡은 뒤 보인 정치행태는 그런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에 더해 더없이 무능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그 정권은 여하튼 민주정권이라 강변하고 그 무능과 혼란을 종식시킨 박정희(朴正熙)의 5・16은 그저 반민주적 정변(政變)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 내내 그들은 늘 그랬듯이 민주를 앞세우며 독재를 공격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박정희 시대는 그저 민주 대 반민주의 투쟁 시대일 뿐이다. 그 시대에 이룩된 한강의 기적은 그들의 민주논리 앞에선 어쨌든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자연적 발전일 뿐이다.
민주 깃발만으로 ‘한강의 기적’ 가능했을까?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직후의 상황은 ‘서울의 봄’이며, 그 끝인 5·18사태는 짓밟힌 민주항쟁이다. 그리고 전두환(全斗煥) 시대는 아무리 괄목할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어도 그 또한 저절로 이루어질 일이었으며, 여하튼 다시 한 번 되풀이된 군사독재의 시대일 뿐이다. 그 기나긴 정치적 암흑의 시대가 1987년 6월의 민주 쟁취로 마침내 끝나게 된 게 그들의 입장에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논법은 그들의 주관적 믿음일 뿐이다. 산업화의 성취는 결코 저절로 이룩된 게 아니다. 그 성취는 당연히 이루어질 일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도저히 이루어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때 그 시절, 이 같은 성취가 가능하다고 본 사람들은 나라 밖에도 없었지만 나라 안에도 없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끊임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거듭하며 수시로 전진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 자들이 흔들어대는 민주의 깃발만으로 ‘한강의 기적’이 과연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그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겠지만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지던 그 시절의 정치는 결코 본질적으로는 반민주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분식의 위선에 현혹된 환상이 초래할 위험을 방지하는 고삐였을 뿐이다.
좌익의 民主論
거듭 말하지만 ‘민주’는 ‘주의’가 아니라 ‘정체’다. 그 자체로 절대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 하나의 형식, 즉 이념과 가치를 담는 그릇이다. 물론 그릇 자체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갖기는 한다. 하지만 정치적 형식으로서의 그릇은 거기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운명 자체가 달라진다. 이 점을 잊으면 민주라는 그릇은 자칫 독배(毒杯)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전형적인 경우가 좌익 이념이 구사하는 민주론이다. 공산주의를 비롯한 모든 좌익 이념은 하나같이 먼저 스스로를 진짜 민주주의라 내세운다. 그 목적은 자유에 대한 공격이다.
자유는 곧 소유권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소산에 대한 침해를 받지 않는 온전한 소유가 곧 자유다. 소유권은 경제적으로는 재산권이며 재산권의 보장이 자유 보장의 핵심이다. 그 때문에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체제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된다.
공산주의는 이를 공격하기 위해 진정한 민주주의 운운의 논법을 구사하며 이러저러한 민주주의를 내세우곤 한다.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소비에트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신(新)민주주의 따위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것도 있다. 해방 공간 당시의 남북한 좌익들이 그런 표현을 동원했다. 좌익들에 대한 지지가 꽤 있었다곤 하지만 사실 공산주의의 적색(赤色) 이미지는 이미 ‘빨갱이’라는 말로 경원시하는 대상이 돼 있었다. 그래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그 어떤 수식을 붙이든 본질은 간단했다. ‘자유의 삭제’였다. 자유 없는 그런 민주가 결국 무엇을 뜻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례로 충분하다. 시진핑(習近平)이 사실상의 황제로 등극한 중공(中共)은 신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김가 일족 삼대(三代) 지배체제의 북한도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자유의 반대편에 선 그들의 민주주의란 결국 그처럼 압제체제를 포장하는 기만적 장식물로 전락할 뿐이다. 자유와 이별 당한 민주는 자신도 파괴하면서 반민주가 돼버리고 만다. 그래서 자유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민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여야 한다.
민주와 자유
자유는 민주라는 집(형식・政體)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민주라는 집도 반드시 자유를 주인으로 해야 한다. 자유가 떠나 빈집이 돼버린 민주는 더 이상 살 만한 집으로 남아 있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인이 떠난 집에는 원치 않는 불청객이 들게 되니, 가장 흔히 찾아드는 객은 사기꾼과 도적들이다. ‘민중(民衆)’을 앞세우며 그럴듯한 말, 달콤한 말을 떠들어대며 세상을 속이고 훔치려는 ‘빨간’ 무리이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했지만 사실은 악령(惡靈)이다. 자유가 떠나버린 민주라는 집은 그렇게 사기꾼과 도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악귀들만 남는 흉가가 된다.
민주는 자유의 보금자리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 그렇듯 자유민주체제의 국가라 해도 처음부터 좋은 집을 바랄 수는 없다. 지하 단칸방이나 옥탑방에서 시작했지만 땀 흘려 노력해 점차 부를 쌓아 좀 더 좋은 집을 갖는 것처럼, 자유체제의 보금자리 민주도 그렇게 성장하는 가운데 점차 나아지는 것이 이치다.
이승만・박정희 시대 한국의 민주정치는 분명 선진국에, 그리고 오늘의 한국인들이 당연시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대에도 대한민국이 건국 때 선택한 자유민주체제의 기본 원칙은 지켜졌다. 물론 당시 민주정치의 구현 수준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이들을 만족시킬 만큼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정치를 아무리 나쁘게 말한다 해도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따위가 달고 있는 ‘민주’라는 간판의 기만성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그 시대의 위정자들을 독재자라고 질타한다 해도 히틀러・스탈린・마오쩌둥(毛澤東)・김일성 등에 비할 바는 못 된다.
1948년 8월 15일은 ‘자유의 생일’
오늘날 한국인들은 ‘자유’를 당연시한다. 온갖 난장(亂場)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정작 ‘자유의 삭제’에는 아무런 긴장을 갖지 않을 만큼 당연시한다. 그러나 이 ‘당연한’ 자유를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한반도의 휴전선 이남에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 절반만의 자유도 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남쪽 5000만명이 누리는 자유에는 분명한 생일이 있다. 1948년 8월 15일이다.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한반도에 자유가 강림(降臨)했다. 자유를 이념으로 한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구체적 제도와 체제로서의 자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의 생일은 동시에 한반도에 자유가 탄생한 날이다.
다른 모든 나라의 자유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도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해방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3년, 격렬한 정치적 진통이 이어졌다. 해방의 감격에 뒤이은 소박한 민족주의적 열망이 팽배했던 때였다. 어떻든 남북 단일의 하나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가 있었다. 우리 민족이 앞으로 어떤 이념과 체제로 살아갈 것인지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편한 대로 택하거나 사이좋게 조화시킬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운명을 건 선택이요, 양립 불가능한 생사(生死)의 선택이었다. 이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북한은 결국 현존하는 지옥도가 되었지만 대한민국은 유례 없는 번영의 길로 나아갔다. 북한은 ‘공산’을 택했지만 대한민국은 ‘자유’를 택한 결과였다.
‘반공민주정신’은 反민주가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재인 정권의 사람들은, 민주는 자신을 과시하는 신성의 깃발로 앞세우면서도 자유는 헌신짝 다루듯 한다. 아니 아예 자유민주에서 자유를 삭제하는 데 혈안이다. 자유를 덜어낸 민주에 무엇을 담으려는 것인가? ‘붉은 독(毒)’을 담으려는 것인가?
형식에는 집착하면서도 붉은 독을 막는 것, 즉 반공(反共)을 잊은 민주는 결국 자신도 그 독에 의해 부식되고 파괴당하게 된다. 1968년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은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라고 갈파(喝破)했다. 〈국민교육헌장〉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 지 오래고, 반공도 어느덧 ‘꼴통의 유물’ 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동서세계 모든 나라의 현대사는 ‘반공민주정신’이 없는 민주주의는 결국에는 민주주의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는 더없이 취약하고 허약한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반공민주정신’을 굳건히 했기에 지켜지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가 다시 능멸당하고 훼손되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김일성 만세도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 자가 설치더니, ‘김정은 위인 맞이 환영단’이 등장하고,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라는 현수막을 앞세운 자들이 광화문광장을 활개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걸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가?⊙
‘빨갱이’라는 말은 다 알다시피 공산주의자 등의 좌익 세력을 속되게 일컫는 용어다. 그런데 그 유래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일제(日帝)에서 찾는다? 우선 일제 총독부 관리가 누구를 애써 우리말로 ‘빨갱이’라고 불렀을지 생각해보자. 일본인이라면 발음하기도 힘들었을 터이고, 그래도 굳이 그렇게 부르고자 했다면 아마 ‘빠루갱이’라고 했을 텐데 그런 말은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만사 일제 잔재 친일 잔재 타령’에 젖어 있던 버릇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너무 막 던지는 얘기다. 그런 식으로 말과 용어에서 소위 일제 잔재를 문제 삼고 싶다면 그런 말, 정말 많다. 조희연 교육감이 “유치원(幼稚園)이라는 용어는 일제 잔재니 유아학교로 바꾸자”고 했는데, 맞기는 맞다. 유치원은 일본말이다. 하나 따지자면 ‘교육감(敎育監)’이라는 그의 직책도 그렇고, ‘학교(學校)’도 사실 일본식 한자어다. 학교라는 용어의 우리식 한자어를 찾자면 학당(學堂)이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근대 초엽 우리 교육기관들의 이름이다. 그래서 모든 학교를 학당이라고 바꾸어야 할까? 여론조사를 해보지 않았으나 국민들이 그러자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국민(國民)’도 사실 일본말이다.
‘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日帝 잔재의 범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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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3일 평양 5·1 경기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등 방북단을 환영하기 위해 열린 아리랑 공연에 ‘우리민족끼리’ 카드섹션이 등장했다. 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
그들은 잘 모르겠지만 ‘빨갱이’라는 말은 일본말이 아니지만 그 ‘빨갱이’들이 만든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따지자면 나라 이름부터가 일제 잔재의 범벅이다. 국명의 민주주의(民主主義), 인민(人民), 공화국(共和國) 모두가 일본이 번역하여 만든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법대로면 북한은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나라 이름을 뜯어고쳐야 한다.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라는 기치에 민족적 공감을 아끼지 않는 이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우리 민족끼리’의 ‘민족(民族)’도 일본이 만든 말인데 이건 또 어쩔 것인가?
소극(笑劇)이다. 일제시대 역사와 관련하여 벌이는 많은 소동이 대개 그렇지만 말과 용어를 붙들고 벌이는 일제 잔재 운운은 이렇듯 특히 더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맞게 된다. 하지만 덕분에 드러나고 포착된 문제들을 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民族’의 함정
우선 ‘민족’이라는 용어부터다. 독일어로는 ‘Volk’ 영어로는 ‘nation’에 해당하는 말을 민족이라고 번역했다. 한국인은 그 말에서 누구나 당연하게 종족주의적(種族主義的) 함의(含意)를 느낀다. 하지만 적어도 ‘nation’은 종족(tribe)·종족적(ethnic) 의미보다는 ‘국민(國民)’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메이지(明治) 시대 근대 일본의 건설자들이 그렇게 번역한 것은 약간 희망성 오역(誤譯)의 혐의가 있다. 일본인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그렇게 하여 강한 통합을 이루고자 한 바람이 반영돼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종족주의적 함의가 어떤 위험을 갖는지는 ‘Volk’를 종족적으로 강조한 나치독일의 인종주의적 폭주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도 그런 폭주의 길을 좇아갔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일제시대가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반일(反日)·친일(親日) 소동이 위세를 부린다. ‘반일’이 권력이 돼 있고 ‘친일’이라는 딱지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주홍글씨가 되곤 한다.
북한은 스스로를 ‘김일성민족’이라고 규정짓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김일성민족이 아니다. 그런데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 앞에선 그냥 흐물흐물해진다. 이건 국민의 실종이다. 착오와 고의(故意)가 뒤엉켜 작동하면서 빚어지는 일이다. ‘민족’이라는 용어가 내포하게 된 관념의 틈새에 의도를 품은 정치적 작용이 파고들어 만들어낸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誤譯
‘민주주의’라는 용어도 그런 문제를 갖고 있다. 이것은 더 분명하게 오역이다. 민주주의는 영어로는 ‘democracy’이다. 이것은 그리스어 ‘democratia’에서 비롯된 말로 ‘대중(大衆)’을 뜻하는 ‘demos’와 ‘정체(政體)’를 뜻하는 ‘cracy’의 복합어이다. 그래서 ‘민주정(民主政)’이나 ‘민주정체(民主政體)’로 번역해야 맞다. ‘cracy’는 ‘이념(理念)’이나 ‘사상(思想)’을 뜻하는 ‘ism’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의(主義)’로 번역하면서 ‘democracy’가 그 자체로 사상·이념으로 여겨지게 됐다.
물론 ‘democracy’가 그렇게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마치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가진 것처럼 강조된 적이 있기는 했다. 프랑스혁명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정치도덕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에서 “오직 민주정하에서만 국가는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의 조국이 된다”고 언명, 그 특별한 의의를 강조했다. ‘왕정과 귀족정’이라는 앙시앵레짐을 부정하며 등장한 프랑스혁명으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 민주정의 역사에서 프랑스 못지않게 아니 사실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위상을 갖는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와 다른 양상이었다.
영국은 민주정이 곧바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해 의회의 권한과 비중이 확대・강화돼 나가는 과정을 밟아가며 근대 의회민주주의 체제의 한 전형을 구축(構築)해갔다. 그리고 미국은 독립혁명을 통해 처음부터 왕이 없는 공화정체를 구축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정의 폭주가 초래할 수 있는 중우(衆愚)정치의 위험성을 예방할 수 있는 대의(代議)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여 또 다른 정치적 전형을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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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공포정치를 펴던 로베스피에르는 자신도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
프랑스혁명 이래 그것을 모범으로 삼거나 찬양하며 진행된 모든 혁명이 예외 없이 그런 일탈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라 칭한 19세기 이래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로 이르는 20세기까지의 모든 시대에 발생한 혁명이 다 그러했다. 분식(粉飾)과 덧칠로 어느덧 신화화(神話化)된 프랑스혁명은 혁명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조장했지만, 그 모범을 따라간 실제의 혁명들은 덧칠 속에 숨겨진 프랑스적 혁명의 유혈과 공포정치를 반복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러시아혁명이었으며, 그를 뒤따라간 모든 좌익혁명이 그랬다. 그 혁명들은 하나같이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적 민주의 깃발을 흔들어댔다.
한국현대사는 ‘민주 對 反민주’의 역사?
이렇듯 ‘democracy’는 그 자체로도 이미 그 같은 폭주의 깃발이 될 수 있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처음부터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가치의 용어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면 내포된 속성은 최소한의 경계도 없이 더 증폭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그렇게 내세워지면서 건국 초부터 끊임없이 진통을 선사했으며, 지금도 그 요동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룩한 드문 나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 진영은 건국 이래 대한민국의 역사를 거의 전적으로 ‘민주’에 방점(傍點)을 두고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 대 반(反)민주’ 투쟁의 역사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취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마침내’ 이룩한 민주화다. 그들의 입장에선 산업화의 성취는 누가 했더라도 당연히 이루어지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그들에겐 오직 민주화야말로 독재 정권에 맞서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이룩한 가치 있는 성취다.
이른바 민주 진영 뿌리의 하나라는 한국민주당부터가 그랬다. 그들은 초대(初代)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게 처음부터 ‘민주’를 흔들어대며 정치적 공격을 가했다. 한민당은 건국 당초부터 내각제를 주창하고 이후 줄곧 그 입장을 견지했다. 대통령제가 독재이거나 내각제가 유일한 민주정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짓고 내각제만이 유일한 민주정인 듯 내세우며 공격을 했다.
그런데 그들의 내각제 정치에 대한 이해는 조선왕조 시대 양반 붕당(朋黨)정치적 발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을까? 이들이 4・19 이후 정권을 잡은 뒤 보인 정치행태는 그런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에 더해 더없이 무능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그 정권은 여하튼 민주정권이라 강변하고 그 무능과 혼란을 종식시킨 박정희(朴正熙)의 5・16은 그저 반민주적 정변(政變)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 내내 그들은 늘 그랬듯이 민주를 앞세우며 독재를 공격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박정희 시대는 그저 민주 대 반민주의 투쟁 시대일 뿐이다. 그 시대에 이룩된 한강의 기적은 그들의 민주논리 앞에선 어쨌든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자연적 발전일 뿐이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직후의 상황은 ‘서울의 봄’이며, 그 끝인 5·18사태는 짓밟힌 민주항쟁이다. 그리고 전두환(全斗煥) 시대는 아무리 괄목할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어도 그 또한 저절로 이루어질 일이었으며, 여하튼 다시 한 번 되풀이된 군사독재의 시대일 뿐이다. 그 기나긴 정치적 암흑의 시대가 1987년 6월의 민주 쟁취로 마침내 끝나게 된 게 그들의 입장에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논법은 그들의 주관적 믿음일 뿐이다. 산업화의 성취는 결코 저절로 이룩된 게 아니다. 그 성취는 당연히 이루어질 일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도저히 이루어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때 그 시절, 이 같은 성취가 가능하다고 본 사람들은 나라 밖에도 없었지만 나라 안에도 없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끊임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거듭하며 수시로 전진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 자들이 흔들어대는 민주의 깃발만으로 ‘한강의 기적’이 과연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그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겠지만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지던 그 시절의 정치는 결코 본질적으로는 반민주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분식의 위선에 현혹된 환상이 초래할 위험을 방지하는 고삐였을 뿐이다.
좌익의 民主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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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2013년 11월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통진당 해산 반대 108배를 하는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사진=조선DB |
그런 전형적인 경우가 좌익 이념이 구사하는 민주론이다. 공산주의를 비롯한 모든 좌익 이념은 하나같이 먼저 스스로를 진짜 민주주의라 내세운다. 그 목적은 자유에 대한 공격이다.
자유는 곧 소유권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소산에 대한 침해를 받지 않는 온전한 소유가 곧 자유다. 소유권은 경제적으로는 재산권이며 재산권의 보장이 자유 보장의 핵심이다. 그 때문에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체제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된다.
공산주의는 이를 공격하기 위해 진정한 민주주의 운운의 논법을 구사하며 이러저러한 민주주의를 내세우곤 한다.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소비에트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신(新)민주주의 따위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것도 있다. 해방 공간 당시의 남북한 좌익들이 그런 표현을 동원했다. 좌익들에 대한 지지가 꽤 있었다곤 하지만 사실 공산주의의 적색(赤色) 이미지는 이미 ‘빨갱이’라는 말로 경원시하는 대상이 돼 있었다. 그래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그 어떤 수식을 붙이든 본질은 간단했다. ‘자유의 삭제’였다. 자유 없는 그런 민주가 결국 무엇을 뜻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례로 충분하다. 시진핑(習近平)이 사실상의 황제로 등극한 중공(中共)은 신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김가 일족 삼대(三代) 지배체제의 북한도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자유의 반대편에 선 그들의 민주주의란 결국 그처럼 압제체제를 포장하는 기만적 장식물로 전락할 뿐이다. 자유와 이별 당한 민주는 자신도 파괴하면서 반민주가 돼버리고 만다. 그래서 자유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민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여야 한다.
민주와 자유
자유는 민주라는 집(형식・政體)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민주라는 집도 반드시 자유를 주인으로 해야 한다. 자유가 떠나 빈집이 돼버린 민주는 더 이상 살 만한 집으로 남아 있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인이 떠난 집에는 원치 않는 불청객이 들게 되니, 가장 흔히 찾아드는 객은 사기꾼과 도적들이다. ‘민중(民衆)’을 앞세우며 그럴듯한 말, 달콤한 말을 떠들어대며 세상을 속이고 훔치려는 ‘빨간’ 무리이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했지만 사실은 악령(惡靈)이다. 자유가 떠나버린 민주라는 집은 그렇게 사기꾼과 도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악귀들만 남는 흉가가 된다.
민주는 자유의 보금자리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 그렇듯 자유민주체제의 국가라 해도 처음부터 좋은 집을 바랄 수는 없다. 지하 단칸방이나 옥탑방에서 시작했지만 땀 흘려 노력해 점차 부를 쌓아 좀 더 좋은 집을 갖는 것처럼, 자유체제의 보금자리 민주도 그렇게 성장하는 가운데 점차 나아지는 것이 이치다.
이승만・박정희 시대 한국의 민주정치는 분명 선진국에, 그리고 오늘의 한국인들이 당연시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대에도 대한민국이 건국 때 선택한 자유민주체제의 기본 원칙은 지켜졌다. 물론 당시 민주정치의 구현 수준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이들을 만족시킬 만큼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정치를 아무리 나쁘게 말한다 해도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따위가 달고 있는 ‘민주’라는 간판의 기만성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그 시대의 위정자들을 독재자라고 질타한다 해도 히틀러・스탈린・마오쩌둥(毛澤東)・김일성 등에 비할 바는 못 된다.
1948년 8월 15일은 ‘자유의 생일’
오늘날 한국인들은 ‘자유’를 당연시한다. 온갖 난장(亂場)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정작 ‘자유의 삭제’에는 아무런 긴장을 갖지 않을 만큼 당연시한다. 그러나 이 ‘당연한’ 자유를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한반도의 휴전선 이남에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 절반만의 자유도 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남쪽 5000만명이 누리는 자유에는 분명한 생일이 있다. 1948년 8월 15일이다.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한반도에 자유가 강림(降臨)했다. 자유를 이념으로 한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구체적 제도와 체제로서의 자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의 생일은 동시에 한반도에 자유가 탄생한 날이다.
다른 모든 나라의 자유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도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해방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3년, 격렬한 정치적 진통이 이어졌다. 해방의 감격에 뒤이은 소박한 민족주의적 열망이 팽배했던 때였다. 어떻든 남북 단일의 하나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가 있었다. 우리 민족이 앞으로 어떤 이념과 체제로 살아갈 것인지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편한 대로 택하거나 사이좋게 조화시킬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운명을 건 선택이요, 양립 불가능한 생사(生死)의 선택이었다. 이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북한은 결국 현존하는 지옥도가 되었지만 대한민국은 유례 없는 번영의 길로 나아갔다. 북한은 ‘공산’을 택했지만 대한민국은 ‘자유’를 택한 결과였다.
‘반공민주정신’은 反민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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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이른바 ‘위인맞이환영단’ 주최로 ‘김정은 위원장 환영단 발족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조선DB |
형식에는 집착하면서도 붉은 독을 막는 것, 즉 반공(反共)을 잊은 민주는 결국 자신도 그 독에 의해 부식되고 파괴당하게 된다. 1968년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은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라고 갈파(喝破)했다. 〈국민교육헌장〉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 지 오래고, 반공도 어느덧 ‘꼴통의 유물’ 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동서세계 모든 나라의 현대사는 ‘반공민주정신’이 없는 민주주의는 결국에는 민주주의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는 더없이 취약하고 허약한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반공민주정신’을 굳건히 했기에 지켜지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가 다시 능멸당하고 훼손되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김일성 만세도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 자가 설치더니, ‘김정은 위인 맞이 환영단’이 등장하고,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라는 현수막을 앞세운 자들이 광화문광장을 활개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걸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