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슈분석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文 정부, 북한 의식해 슬그머니 ‘건국 100주년’ 주장 후퇴

글 : 주익종  이승만학당 교사·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실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이승만, 한성정부 法統 계승 주장… 제헌헌법은 臨政 계승보다 3·1 독립정신 계승 강조
⊙ 박정희 정권 이후 臨政 부각… 1987년 9차 개헌 시 臨政 법통론 헌법에 명시
⊙ 1980년대 등장한 민중사학, 臨政 부정하다가 사회주의 붕괴 이후 反日종족주의로 도피하면서 ‘金九의 臨政’ 부각시켜

朱益鐘
1960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同 대학원 경제학 박사 /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실장 역임. 現 이승만학당 교사 / 저서 《대군의 척후》 《고도성장시대를 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 26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열었다. 사진=뉴시스
  장면1.
 
  1987년 2월 26일 광복회 등 독립유공자단체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3·1절 기념 학술대회를 열었다. 기조연설을 맡은 김준엽(金俊燁·전 고려대 총장)은 “5·16 후 헌법 전문(前文)에서 임시정부 언급을 삭제한 것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부정한 것이니, 새 헌법 전문에 건국정신과 그 통치권원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명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해 6월 민주항쟁 후 확정된 새 헌법 전문에는 김준엽의 말대로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했다고 명시되었다.
 
 
  장면2.
 
  딱 32년 후인 2019년 2월 26일 문재인(文在寅) 대통령과 국무위원 일동은 효창공원 백범 묘소를 참배하고 백범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또 하나의 퍼포먼스였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같이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우선, 임시정부는 역사적으로 단일 실체라 보기 어렵다. 사회주의자까지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망라된 1919년 출범 당시의 임시정부와 1923년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떠난 후의 임시정부, 윤봉길과 이봉창이 의열(義烈) 투쟁을 한 임시정부, 그리고 태평양전쟁기의 임시정부는 실상 같은 조직이라 하기 어렵다.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면 어떤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말일까. 적어도 1923~1937년의 14년간 임시정부는 대표성 있는 독립운동 조직이 아니었다.
 
  게다가 김구(金九) 등 임시정부 세력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다. 그해 6월8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백범은 ‘국회 개회식 때에 이 박사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언명한 바가 있었는데 귀견이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할 아무런 조건도 없다고 본다”고 답했다. 임시정부의 대표가 ‘임정(臨政) 계승론’을 부정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임정 계승론은 성립하기 어렵다. 그전 8차까지의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계승이 한 번도 명시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1987년 이후 대한민국은 몸에 안 맞는, 남의 옷을 입은 건 아닐까.
 
 
  대한민국 건국자들의 ‘3·1 독립정신 계승론’
 
  그렇다면 대한민국 건국 당사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이승만(李承晩)의 입장은 ‘한성정부 계승론’이었다. 그는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 연설에서 “앞으로 수립될 정부가 3·1운동의 결과 서울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곧 자신을 집정관총재로 선출한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정부”라고 말했다.
 
  그런데 제헌헌법 전문에는 그와 달리 표현되었다. 즉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했다. 제헌국회는 한성정부로 특정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건립해서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3·1 독립정신 계승론’이었다.
 
  정치학계나 한국사학계는 제헌헌법의 이 구절을 임정 계승론으로 해석해왔다. 이승만이 ‘한성정부 법통론’을 언급했으며, 또 국회 본회의에서 이승만의 제안에 따라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선포한”이란 구절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3·1 독립정신’을 꾸미는 수식어일 뿐, 문장의 요지는 3·1 독립정신을 계승해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거였다. 임시정부를 ‘건립’하여 ‘선포’한 매우 한정적 사건을 언급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도 임시정부 승계를 시사하지 않는다. 이승만 정부는 건국훈장 포상에서 임시정부 요인을 포함한 독립유공자 포상에 인색했다. 5등급 중 상위 3등급(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 포상자 23명 중 21명이 밴플리트와 장제스(蔣介石) 등 외국인이고, 한국인 2명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李始榮) 초대 부통령이었다.
 
  또 이승만 정부 때 국사 교과서에 임시정부를 간단히 언급했다. 한 교과서(홍이섭 저)는 “이때 상해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21년에는 중국의 승인을 받았다”고만 했으며, 또 다른 교과서(역사교육연구회 저)는 “특히 상해에서는 우리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고만 했다.
 
 
  ‘임정 계승론’으로 변질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은 박정희(朴正熙) 정부 때 달라진다. 정부가 독립운동가에 대한 훈·포장 수여 및 독립운동사 연구·교육 강화로 독립운동을 대대적으로 현창(顯彰)했다. 그 결과, ‘3·1 독립정신 계승론’이 ‘임정 계승론’으로 바뀐다.
 
  먼저, 제3공화국 헌법 전문에서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라고 했다. 이후 1980년 제5공화국 헌법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헌법 전문엔 여전히 대한민국의 3·1 독립정신 계승론이 담겼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크게 선양했다. 우선, 독립운동가에 대한 건국훈장 서훈(敍勳)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1962년 3·1절에는 독립운동가 208명에게 1~3등급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1등에 최익현·이준·안중근·김구·안창호·윤봉길·이승훈·한용운 등 18명, 2등에 이상설·장인환·이봉창·이상재·김성수 등 58명, 3등에 유관순·조병옥·최현배 등 132명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3년 3·1절에도 이범석 등 229명에게, 1968년에도 103명에게 1~3등급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박정희 정부 때 훈장을 받았다.
 
  역사교육에서도 3·1운동과 임시정부를 포함한 독립운동사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그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 한국사 교과서에선 3·1운동과 임시정부에 관한 서술이 늘었다. 임시정부를 설명하면서 이승만과 더불어 김구가 거명되었다.
 
  특히 1960년대 말 이후 박정희 정부의 민족문화 진흥, 민족정신 진작 사업을 거치며, 임시정부는 한국사의 정통 지위를 부여받는다. 1974년 발간된 새 국정 교과서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사실은 한민족이 일제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민족사적 정통성을 되찾으며…”라 해서 임시정부의 정통 지위를 분명히 했다. 나아가 전두환(全斗煥) 정부 때인 1982년 나온 새 교과서에는 임시정부에만 4쪽을 할애하면서, 임시정부를 ‘정통 정부’라 표현했다.
 
 
  1980년대 ‘임정 법통론’으로 승격
 
  ‘임정 정통론’은 1980년대에 ‘법통론’으로 강화되고, 1987년 ‘민주’ 헌법 전문에까지 자리를 잡는다.
 
  여기에 앞장선 이가 사학자 이현희다. 임시정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임시정부의 수립을 ‘민주공화국의 출범’이라 명명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을 6년이나 역임한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부통령과 국무총리 모두 임시정부 요인이었으며, 여러 임시정부 인사가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에 들어간 점에서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연결성을 주장했다. 이것이 임시정부의 법통성이라 했다.
 
  장면1에서 언급한바, 1987년 2월 광복회 등의 3·1절 기념 학술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한 김준엽은 과거 학병에서 탈출해 광복군을 한 임시정부 출신 인사다. 그는 1982년 이현희의 연구서를 평하면서 임정 법통론에 동의한 바 있다.
 
  이렇게 제기된 임정 법통론은 1987년 10월 공포된 개정 헌법 전문에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됐다. 김준엽은 “당초 여당 안에는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로 되어 있었는데, 여당 이종찬 의원에게 ‘정신’을 ‘법통’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야당 이중재 의원에게는 ‘법통 계승’을 관철해달라고 부탁한 결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가계(家系)상 임시정부와 관련 있는 이종찬도 자신이 이강훈·김준엽 등에게서 부탁받고 현경대 의원에게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로 하자고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87년 헌법 개정의 핵심은 대통령직선제와 국회 국정감사제 부활, 헌법재판소 설치와 국민 기본권 보장 강화 등이었다. 그런데 충분한 검토 없이 임시정부 관련 인물들의 작용으로 ‘3·1 독립정신 계승론’이 ‘임정 법통론’으로 바뀌었다. 이는 이후 대단히 큰 혼선을 불러온다.
 
  그런데 1980년대 한국사학계에는 위와 달리 임정 법통론을 부정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북한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은 젊은 대학원생과 소장(少壯) 교수들이 계급사관의 일종인 민중사학을 제창하고 나선 것이다.
 
  이 젊은 연구자들은 기성 한국사학계에 반발하여, 새로 1988년 한국역사연구회(한역연)를 창립했다. 이들은 민중이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 한국사의 변혁을 어떻게 담당했는지 구명함으로써 당대 한국 사회를 전복할 방안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이를 ‘민중사학’이라 불렀다.
 
  한역연은 재야의 역사문제연구소와 함께 1989년 3·1운동 제70주년 기념으로 《3·1민족해방운동연구》를 출판했다. 이 책은 3·1운동사만이 아니고 한국사 연구에서 이른바 ‘분수령’적 의미를 갖는다. 참가자들이 자신의 스승, 선배들이 내놓은 기존 연구를 ‘박제화(剝製化)’한 관변 측 연구라 매도하고, 그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그들은 3·1운동 과정에서 ‘민족대표’의 외세의존적 타협적 성격이 드러났으며, 대신 노동자 계급을 선두로 한 식민지 민중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고 역설했다.
 
  이 인식은 새로운 게 아니었다. 과거 조선공산당, 더 나아가서는 그를 조종한 코민테른의 민족해방운동론을 되풀이한 데 불과했다. 조선공산당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논강〉(1928. 3)에서 “3·1운동 때 오래지 않아 봉건적 세력의 대부분, 부르주아지의 일부는 투쟁으로부터 탈락하며 공산주의운동이 개시된다”고 했다.
 
  이 연구에선 임시정부가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적 지도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고,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는 1923년에 이르게 되면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만다”고 하면서 임시정부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당시 젊은 국사학 연구자들은 여러 논문에서 임정 정통론을 부정했다.
 
 
  계급론에서 민족근본주의로
 
  민중사학이 본격 대두한 바로 그 무렵, 민중사학의 지반이 무너졌다. 바로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가 붕괴한 것이다. 민중을 주체로 한 민족해방운동론, 그다음 단계의 프롤레타리아혁명론은 힘을 잃었다. 민중사학도들은 민중사학을 계속 내세우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한때 경멸한 민족주의로 도피했다. 단, 그것은 일제에 대한 비(非)타협적 투쟁만 인정하는 민족주의였다. 의열투쟁(항일테러 활동), 무장투쟁(독립군 기지 혹은 유격대 활동), 적색 농민 노동운동 등이 상찬(賞讚) 대상이었다. 실력양성운동이나 외교독립운동은 여전히 폄훼했다. 김구, 김원봉, 무정, 김일성 등이 부각되었다.
 
  이들의 새 입장이 민족주의에 속했지만, 실상 그것은 극단적인 민족지상주의·민족근본주의였다.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악이고 일제에 대한 직접적 투쟁만이 선이라는 인식이었다. 이는 훗날 일본만 공격하는 민족주의, 반일종족주의(tribalism)로 치달았다.
 
  이 입장에선 임시정부의 배타적 정통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김구의 임시정부 외에도 비타협적 투쟁을 한 세력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헌법상의 임정 법통론을 예전과 다른 이유에서 부정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비타협적 항일운동가가 필요했던 그들은 김구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과거 그렇게 배척했던 임정 법통론을 수용 내지 묵인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2000년대에 들어와 이영훈 서울대 교수 같은 학자들이 한국사 교육의 좌편향성을 비판하고, ‘대한민국 긍정론’과 ‘이승만 정통론’을 제기했다. 국사학자들에게는 이승만을 꺾을 대항마로서 김구의 가치가 더 커졌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임정 법통론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臨政’에서 ‘김구의 臨政’으로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를 서울 효창공원에서 가졌다. 사진=조선DB
  국사학자들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특정 학설을 거부했다가 반대로 그를 수용·지지했다. 국사학계에선 아무도 그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들은 학계보다는 정계에 몸담은 것과 다름없었다.
 
  여하튼 이제 이승만·안창호의 임시정부보다는 김구의 임시정부가 집중 조명됐다. 좌파 정부의 홍보물이나 전시물에는 김구의 임시정부 사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김구 존숭(尊崇)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홍보하느라 만든 〈대한민국 그 이름에 희망이 있습니다〉란 영상에는, 임시정부 요인 중 ‘사람 좋게’ 활짝 웃는 김구 사진이 쓰였다.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親日)인명사전》 편찬 보고회장 예약이 취소되자, 효창공원의 김구 묘소에서 보고회를 열었다. ‘1949년에 못다 한 친일청산 작업을 이제야 마쳤다’고 보고하는 자리였다.
 
  민족대표 33인과 같은 우파 민족주의자에 대한 폄훼는 더 심해졌다. 수능시험 한국사 과목 학원강사로 인기를 얻은 설민석은 2017년 허위 사실과 모욕적 언사로 33인의 독립선언을 조롱했다. 그는 “33인이 우리나라 최초 룸살롱인 태화관에 가 낮술을 먹으며 기미독립 선언을 외쳤다”면서 “그 집(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독립선언을 주도한) 손병희랑 사귀었다”고까지 말했다.
 
  심지어 ‘친일파가 만든 독립영웅’이라며 유관순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010년대 8종 교과서 중 절반인 4개 교과서에서 유관순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는데, 2014년 8월 춘천교대 교수 김정인은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어서 교과서에 실을 가치가 없다”고 말해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런데 실상 이들은, 본심으론 여전히 임정 법통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를 공개 발설하지 않을 뿐이다. 바로 위에 언급한 김정인 교수는 2018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학계에서는 다수가 임정 법통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임정 법통성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경계하며 부정하는 풍토가 지배적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역사라는 것이다.”
 
 
  종착점, ‘1919년 건국론’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1월 2일 국립현충원 방명록에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썼다.
  임정 법통론에서 더 나아가면 ‘1919년 건국론’에 이른다. 이를 앞장서 주장한 이가 단국대 교수 한시준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에 세워지고 1948년에 재건되었다고 설명했다.
 
  우파의 ‘1948년 건국론’에 맞서 좌파의 ‘1919년 건국론’이 나온 후, 교과서에선 1948년 건국 서술이 사라졌다. ‘좌편향의 끝판왕’이라 할 2003년 금성출판사판 교과서에도 ‘1948년 대한민국의 수립’이라 했는데, 2010년대의 새 교과서에선 일제히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만 썼다. 이로써 교과서에서 대한민국 건국은 실종 상태가 되었다.
 
  1919년 건국론자들은 1919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1948년에 친미·친일 분단 독재 정부로 잘못 재건되었으나, 그 후 민중민주혁명을 통해 바로잡아 왔다고 본다. 한마디로 기괴한 인식이다.
 
  2017년 등장한 문재인 정권은 아예 정권 차원에서 ‘임시정부 수립=건국’이라고 선언했다. 문재인은 취임 첫해 8·15 경축사에서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언급하고, 그날 효창공원의 김구 묘소 방명록에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썼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에는 7월 3일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해, “우리에게는 민주공화국 100년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어느 때부턴가 입장을 바꾸어 ‘건국 100주년’ 표현 대신, ‘지난 100년’이라고만 표현하기 시작했다. “불필요하게 건국 논란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입장이 2019년 초 보도됐지만, 문재인 정부가 우파 지식층의 반발을 우려한 건 아니다. 탈(脫)원전, 최저임금 인상, 환북(북한에 환장) 행보를 무조건 밀어붙이는 자들이 그 정도 논란을 두려워할 리 없다.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건국 100주년’ 주장이 사라진 이유
 
  이는 1919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면, 남북한 체제를 설명할 수 없고 북한이 반(反)국가단체가 되기 때문이다.
 
  ‘1919년 대한민국 건국설’을 전제하면, 남한에선 이를 계승해 정식 정부가 1948년 세워졌다고 보면 그만이다. 남한은 제헌 이래 3·1 독립정신 혹은 임시정부 계승을 주장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
 
  반면, 북한은 임시정부와 무관한 나라다. 북한은 1919년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국호와 건국 시점 모두 임시정부와 전혀 다르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8년 건국). 1919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하면, 북한은 이 대한민국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별도 국가를 세운 반역 집단이 된다. 국가보안법에서 규정한 반국가단체와 같은 것이다.
 
  본디 문재인 대통령 등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지우기 위해 억지로 1919년 건국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전혀 의도한 바와 달리 북한을 부정했다. 지력(知力)이 모자란 결과였다. 이런 줄도 모르고 3·1운동 100주년을 공동 기념하자고 북한에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북한을 노엽게 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들은 황급히 ‘건국’ 표현을 없애고, 또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일 임시공휴일 지정도 거둬들였다. 임시정부를 진정 성대히 기념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마치 자기 다리가 꼬여 스스로 고꾸라진 모양새다.
 
 
  3·1 독립정신 계승이 답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홍보 시설물. ‘건국 100주년’은 사라지고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등장했다. 사진=배진영
  대한민국 제헌의원들은 대한민국이 3·1 독립정신을 계승해서 세운 나라라고 선언했다. 이 정체성(正體性)을 한국인의 집단기억으로 확립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대한민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승만·박정희 정부는 3·1 독립정신을 구체화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고, 3·1운동의 단결 기억으로 국민을 각기 반공투쟁과 조국 근대화에 동원하는 데만 주력했다. 3·1운동에서 표출된 자유와 자립, 평화와 교류를 추구하는 정신을 구명하는 일은 없었고, 오로지 ‘거족적 단결’만 기억되었다.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한국인은 ‘대한민국이 어떤 정신을 계승했는가’를 보는 대신, ‘대한민국이 누구를 계승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임정 법통론을 처음 주장한 역사학자는 1919년 임시정부에 집결한 좌우의 광범위한 독립운동 세력을 염두에 두었고, 이는 1948년 성립한 대한민국을 지지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급혁명 지향의 민중사학과 배타적인 민족근본주의 사학이 횡행하면서, 현재 임정 법통론자들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존숭하며 1948년의 잘못된 계승을 이야기하는 모순과 혼돈에 빠졌다.
 
  ‘대한민국이 누구를 계승했는가’라는 질문은 동시에 ‘누구를 계승하지 않았나’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것은 독립운동가를 가르고 국민을 분열시켜 배제하는 사고방식이다. 누가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싸웠느냐를 묻고, 그 기준으로 여러 인물과 많은 국민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대한민국이 무엇을 계승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당연히 답은 3·1 독립정신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1919년 3월의 한국인은 자유와 자립, 평화와 교류의 가치를 위해 거족적으로 일치단결했다. 3·1 독립정신이 자유와 자립, 평화와 교류를 추구하는 정신이며, 그를 계승해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는 데 정치세력들이 합의하고, 역사학자가 그를 뒷받침하며, 그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
조회 : 30891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2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whatcha    (2019-04-12) 찬성 : 7   반대 : 0
이 새x들과 더불어 한xx 는 마치 1919년부터 빨갱이들이 큰 활동을 한 것처럼 말하고 이승만을 역적으로 몬다.
  孤竹    (2019-04-11) 찬성 : 20   반대 : 0
잘 쓴 글이다. 공감한다.

201907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영월에서 한달살기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