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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권력의 ‘관음증’ 査察

거의 모든 정권에서 예외 없이 이뤄진 ‘사찰의 黑幕’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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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帝의 ‘고등경찰’이 사찰의 시초 격
⊙ ‘공화당 의원총회’ 도청한 뒤 분노한 김형욱
⊙ ‘긴급조치’ 이용한 學園 사찰, ‘보도지침’ 이용한 言論 사찰
⊙ 최초로 ‘민간인 사찰’ 폭로한 윤석양 이병
⊙ ‘공작 정치’의 최대 피해자라는 DJ도 국정원 통해 도청
  김태우 수사관(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원·왼쪽 사진)의 폭로로 촉발된 ‘청와대 민간인 사찰(査察) 의혹 사건’이 정국을 뒤흔들었다. ‘사람이 먼저다’를 내세우며 전(前) 정권과 차별화를 꾀했던 문재인 정부로서는, 사안의 진위 여하와 관계없이 체면을 구긴 꼴이 됐다.
 
  ‘권력에 의한 사찰 의혹’은 비단 문재인 정부 때만 불거진 건 아니다. 거의 모든 정권이 공직자뿐 아니라 정치인, 경제인 등 민간인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사찰을 벌여 왔다. 정권 차원의 이 같은 사찰은 매우 은밀하고, 또 지능적이었다.
 
 
  장면 부통령 저격의 배후였던 ‘사찰과’
 
1960년 8월 3일 장면 부통령 암살 미수사건과 연루된 피고인들에 대한 공판이 열리고 있는 법정. 사진=조선DB
  ‘조사하여 살핀다’는 사전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사찰은 부정적인 용어로 인식돼 왔다. 사찰의 뿌리를 일제(日帝)의 ‘고등경찰’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경찰은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조선인들을 감시함은 물론, 고문 등 폭력도 가하는 악명 높았다. ‘친일경찰’로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던 노덕술(盧德述·1899~1968)이 고등계 형사로 유명세(?)를 떨쳤던 이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고등경찰은 사라졌다.
 
  건국 직후인 1948년 11월, 내무부 치안국으로 경찰 조직이 구성될 때 그 산하에 사찰과를 설치했다. 건국 과정에서 좌익 세력의 준동을 경험한 이승만 정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찰과를 활용했다. 지금처럼 국정원이나 기무사 등 정보기관이 없던 시절이라 경찰 조직이 대공·공안 업무를 맡은 것이다.
 
  이 사찰과가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결정적인 계기는 1956년 장면(張勉) 부통령 저격 사건이다. 이는 당시의 사찰이 단순히 정치인들의 비행(非行)이나 동정(動靜)을 살피는 데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저격 사건의 전말은 대강 이러하다. 그해 9월 28일 장면 부통령이 소속해 있던 민주당은 서울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전당대회를 열었다. 장면이 부통령으로 취임한 지 한 달 남짓 됐을 때였다. 이날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은 대표최고위원에 조병옥(趙炳玉), 최고위원에 장면 부통령 등 네 명을 선출했다.
 
  장면 부통령이 연설을 끝마치고, 시공관 동문(東門)으로 나설 때 김상붕이란 자가 그에게 총을 쐈다. 탄환은 장 부통령의 왼손에 맞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수사 과정에서 저격 배후에 사찰과가 있다는 의혹이 일었다. 저격범 김상붕의 배후에 민주당원이었던 최훈이 있었는데, 수사 결과, 최훈의 상부선이 바로 성동경찰서 사찰과 소속의 이덕신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서(支署) 차원에서 이 같은 범행을 주도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판단을 한 민주당은 윗선을 규명하는 데 주력했지만, 끝내 이덕신의 윗선은 밝히지 못했다.
 
  사건의 전말은 4년이 지난 1960년 4·19혁명 후에야 비로소 드러났다. 저격 사건 당시 치안국장이던 김종원이 법정에 나와 ‘장면 박사 저격 사건은 전 서울시장 임흥순이 지시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즉,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익흥과 자유당 총무부장 임흥순(서울시장 역임)의 지시하에 치안국장 김종원, 치안국 특수정보과장 장영복, 중앙사찰분실장 박사일, 사찰과장 오충환 등이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치안 계통 핵심 인사들이 연루된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오점 중 하나로 기록됐다.
 
 
  사찰에 적극적이었던 김형욱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사진=조선DB
  5·16 혁명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권좌(權座)에 오른 후 사찰은 더욱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권력 보위’라는 지엄한 임무를 부여받은 중앙정보부가 사찰의 주체 격이었고, 그 대상은 정치인들이었다. 생래적으로 정치, 특히 국회의원들의 비효율적인 행태를 싫어한 박 대통령은 사찰을 통해 그들의 비위 등 은밀한 정보를 보고받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찰의 대상에 야당뿐 아니라 여당 국회의원을 비롯한 친(親)정부 인사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 시절 사찰에 가장 적극 나선 이 중 한 명이 ‘남산의 돈가스’로 불린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이었다. 1963년부터 6년간 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5·16 혁명 주체’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폭언과 완력, 심지어 고문(拷問)까지 예사로 행사하면서 박(朴) 정권의 충실한 ‘방탄조끼’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김형욱이 벌였던 사찰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은, 그의 육사 동기(8기)인 김종필(JP·2018년 별세) 전 국무총리다. 1968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내의 ‘JP 사조직’이란 의심을 받은 ‘국민복지회’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망타진되자 JP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알려진 대로 JP는 ‘박정희의 처조카’이자 명실상부한 정권의 2인자였다. JP 회고록 《소이부답(笑而不答)》에 나온 관련 대목이다.
 
  〈68년 5월 내가 국회의원을 포함한 모든 공직을 포기하게 된 이른바 ‘한국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도 6인방의 공동전선, 특히 김형욱의 음모와 협박·강압으로 꾸며진 것이다. … 김형욱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용태가 국민복지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었고 그가 ‘박정희 3선 개헌 공작을 저지해야 하며 71년 대선에서 우리의 대안은 오직 김종필 당의장이다’라는 ‘시국판단서’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시국판단서를 읽는 것을 목격한 증인까지 확보했다고도 꾸며 댔다. 그런데 나는 복지회니 뭐니 하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 김형욱이 정보의 수집·조사·판단 기능을 독점한 정보부 조직과 자금, 고문 등을 이용해 먼저 일을 꾸며 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다.〉
 
  JP는 “자기들이 문제를 조작한 뒤 대통령으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며 자신을 겨냥한 공작이 있었음을 단언했다. 김형욱은 그 여세를 몰아 JP를 가택연금까지 해 버렸다. 중정(中情) 요원들은 JP의 서울 청구동 자택을 에워쌌고, 그 바람에 JP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요원들에 의해 김형욱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보고됐다.
 
  JP의 부인 박영옥(朴榮玉·2015년 별세) 여사는 숙부인 박 대통령에게 “정보부가 바깥 양반(JP)을 탄압하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하소연할 정도였다. JP와 친분이 있던 한 공화당 의원은 “JP는 청구동 자택 2층에서 1층에 내려가기도 힘들었다. 그만큼 정보부의 감시가 혹독했다”고 회고했다.
 
 
  ‘영빈관 議總’ 도청한 김형욱
 
김형욱의 사찰을 폭로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 사진=연합뉴스
  1969년 정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윤치영(尹致瑛) 당의장, 길재호(吉在號) 사무총장 등 중진들이 3선 개헌의 필요성을 강하게 시사했고, JP 계열로 분류되는 국회의원들은 이를 공공연히 반대하고 나섰다. 같은 해 7월 29일 공화당은 서울 장충동 영빈관(迎賓館·현 호텔신라의 부속 건물)에서 이른바 ‘영빈관 의총(議總)’을 열었다.
 
  이날 의총에는 공화당 전체 의원 109명 중 101명이 모여 3선 개헌을 비롯한 정국 현안 등을 논의했다. 특히 권력을 전단(專斷)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온 이후락(李厚洛)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를 주도한 이는 이만섭(국회의장 역임·2015년 별세) 의원이었다. 이만섭씨가 2009년 《중앙일보》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전날 준비한 원고를 꺼내 놓고 그랬다고. ‘좋아요! 개헌한다고 칩시다! 하지만 지금의 공화당 꼬락서니 가지고 어떻게 국민을 납득시킵니까? 그래서 나는, 먼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5가지 선행조치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부장을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즉각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이랬더니 첫 번째 조건에서부터 상상도 못했던 이후락·김형욱 이름이 나오니까 의원들이 완전히 굳고 술렁거리는 거야.”
 
  이만섭 의원은 “김형욱과 이후락을 이 자리에 불러내자. 불러내 사표를 받자. 김형욱이 기관총을 갖고 오든 권총을 들고 오든 결판을 내자”며 동료 의원들을 부추겼다. 의총은 무려 18시간이나 이어졌다. 여기서도 김형욱의 ‘주특기’가 발휘됐다. 중앙정보부는 영빈관 내부에 도청 장치를 설치, 의총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 은밀히 감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섭의 생전 회고다.
 
  “김형욱은 부장실에서 녹음을 통해 회의 내용을 듣고 있다가 ‘이만섭이 이놈 새끼 죽이갔어. 이놈의 새끼 죽이갔어’ 하더니 청와대 이후락 실장 방으로 달려가더라는 거지. 그래가지고 이후락 앞에서 길길이 뛰면서 당시만 해도 김형욱이가 이후락한테 형님이라고 불렀거든. ‘형님! 이만섭이 이놈 죽입니다! 이만섭이 이놈이 이후락하고 김형욱이가 있는 한 공화당은 국민 앞에 낯짝을 들지 못한다고 했시요! 우리보고 부정부패의 원흉이고, 책임을 물어 즉각 몰아내야 한다고 그랬단 말이야요! 아 형님은 왜 입만 꾹 다물고 있습네까!’ 이랬다는 거예요.”
 
  박 대통령도 정보부 도청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았는지, 의총의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만섭씨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의총 얘기를 전해 듣고는 커피잔을 집어던지고, 책상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유신 이후 ‘學園 사찰’ 횡행
 
  1972년 ‘10월 유신’으로 사실상 종신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긴급명령권을 발동, 체제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억압했다. 이때는 박정희 권력이 극에 달했던 때라 야당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시기였다. 반면 학원(學園)을 중심으로 반(反)정부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긴급조치는 학원의 반발을 억제하는 데 요긴하게 이용됐다.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은 총 아홉 번의 긴급조치를 발동했는데, 그중 9호가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다. 1975년 발효된 긴급조치 9호 1항엔 “학교 당국의 지도, 감독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예외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를 전면 금지했다. 언론기관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위반한 학교나 언론기관은 주무 장관에 의해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 또는 폐쇄의 조치”를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른바 ‘불순세력’을 솎아내기 위해 당시 대학가에는 ‘학원 사찰’을 하는 정보기관 요원들이 은밀히 상주해 있었다. ‘학원 사찰’은 ‘막걸리 긴급조치’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유행어도 만들어 냈다. 대학생들이 선술집에서 술 한잔하면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해도 사찰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의 운명을 재촉했고, 결국 10·26사태로 박정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全 정권, 보도지침 통해 ‘언론 사찰’ 강화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학원 사찰’은 계속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 때는 대학가 운동권 내에서 NL·PD(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계열이 세(勢)를 불리던 시기다. 이들은 전두환 정권 퇴진에 열을 올리는 한편, 일부 세력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학원의 좌경화가 가속화하자 전두환 정권은 1985년 ‘학원안정법’이란 나름의 묘안을 내기도 했다. 물론 이 법안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전(全) 정권 역시 학원 안정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권을 대상으로 한 전두환 정권의 사찰은 뚜렷하게 알려진 게 없다. 전두환 정권 초반의 야당은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2중대, 즉 ‘관제(官製) 야당’이란 평(評)을 들었다. 야당이 여당의 뜻에 상당 부분 동조했기 때문에 굳이 야당을 겨냥해 사찰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계 감시를 보다 강화했다. 보도지침은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인 1980년 12월 제정된 ‘언론기본법’에 근거한 것이다. 그 한 달 전인 11월, 전(全) 정권은 ‘언론기관 통폐합’을 단행, 대다수의 언론사를 관제화(官製化)하고 반(反)정부 성향의 기자들을 해직했다.
 
 
  기사에 일일이 간섭한 全 정권
 
  문화공보부(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홍보조정실이 주도한 보도지침이란 언론사가 내보낼 기사를 당국이 사전에 검열, 정부에 불리한 내용을 다루지 못하도록 강요한 지침을 말한다. 기사의 내용뿐 아니라 기사의 분량, 사진 게재 방식 등 사소한 부분까지도 일일이 간섭했다. 언론을 겨냥한 ‘사찰’이자 ‘재갈 물리기’였던 셈이다.
 
  9시 ‘땡’하면 뉴스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동정을 알리는 보도가 나오는 걸 ‘땡전뉴스’라고 조롱한 것도 보도지침과 무관치 않다. 그만큼 현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밖에 없다. 1985년 한 언론사에 하달된 보도지침의 일부분을 살펴보자.
 
  〈■ 85년 10월 26일=‘국회의원 미행 도청 말라’ 보도하지 말 것. 국회 야당의원 보좌관 3명 검찰 소환으로 국회 유회(流會) 공전된 것은 스트레이트 3~4단으로 보도. 스케치 기사는 안 되고 해설 박스기사는 좋음. 야당 의원 의사진행, 신상 발언 등을 모은 박스기사 보도하지 말 것. 이재형 국회의장 ‘정부는 국회의원 미행 도청 잠복하지 말라’는 표현은 보도 말 것.
 
  ■ 11월 5일=국회 내무위에서 전경환 새마을중앙회장이 학생들의 화염병 투척사건을 보고하고 질의에 답변한 내용은 보도하지 말 것. 서울시경, 오늘 6시 주한상공회의소 학생 난입사건의 처리방침 발표 예정. 사회면 톱이나 중간 톱으로 다루지 않기를. 사이드 톱 정도가 좋다고 판단. 오늘 산발적 학생시위 일일이 떼지 말고 묶어서 크지 않게 보도.
 
  ■ 11월 18일=학생시위 ‘적군파식 모방’으로 쓸 것. 대학생들 민정당사 난입사건은 사회면에 다루되 비판적 시각으로 할 것. 구호나 격렬한 플래카드 사진 피할 것. 치안본부 발표 ‘최근 학생시위 적군파식 모방’ 발표문은 크게 하되 ‘적군파식 수법’이라는 제목으로 뽑을 것.
 
  ■ 12월 2일=예산안 변칙통과 책임은 야당에 있다. 국회 여(與) 단독으로 예산안 통과 관련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제작 바람. 여당은 정치 의안(議案)과 예산안을 일괄타결하려 했으나 야측, 특히 김대중의 반대로 결렬됐음. ‘변칙 날치기통과’라고 하지 말고 ‘여 단독처리 강행’ 식으로 할 것.〉

 
  언론의 비판과 감시 기능을 제약했던 보도지침은 1986년 9월 6일 발간된 월간 《말》지(誌)의 특집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듬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9차 개헌이 여야 합의를 통해 이뤄지면서 ‘언론기본법’은 폐지됐고, 보도지침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윤석양 이병의 폭로, 궁지에 몰린 盧 정권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카드들에는 사찰 대상자들의 신상과 활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민주화’ 열풍을 타고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 색채를 상당 부분 떨쳐낸 뒤 등장한 노태우 정권도 사찰에 있어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다. 1990년 보안사에서 사병으로 복무하던 윤석양(尹錫陽)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10월 5일, 보안사를 탈영한 윤석양은 서울 연지동 서울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국군보안사령부가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교수, 재야인사 등 민간인 1300명을 대상으로 정치 사찰과 동향 파악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윤석양은 동향 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3장, 네 명(노무현, 문동환, 이강철, 박현채)에 대한 개인신상카드, 개인별 동향 파악 내용이 들어 있는 컴퓨터 디스켓 30장(447명분)을 공개했다. 이 자료에는 대상자가 A, B, C, D 네 등급으로 나눠져 있었고, 사찰 대상자의 주요 활동이 면밀히 기록돼 있었다. 인적 사항, 가족 사항, 해외 여행 관계, 교우 및 배후 인물 등 9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자택의 담장 높이, 비상 탈출구, 예상 도주로 및 은신처까지도 세밀히 적혀 있었다.
 
  윤석양의 폭로 중 눈길을 끄는 건 보안사가 ‘현실문화사’라는 잡지사를 운영하며 《현실초점》이라는 계간지를 내고 있다고 한 것이다. 보안사 요원들이 기자 신분으로 위장해 접근할 경우, 사찰 대상자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실문화사’의 편집장은 보안사의 군무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윤석양은 또 보안사가 정보 수집을 위해 만든 위장 술집이 있다고 주장했고, 보안사 관계자들이 운영하는 위장 카페가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윤석양의 폭로는 엄청난 후유증을 낳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상훈 국방부 장관과 조남풍 보안사령관을 경질했고, 보안사는 ‘기무사령부’로 간판을 바꿔 달아야 했다. 제1야당 평화민주당(평민당)의 총재였던 김대중은 ‘보안사 해체’ 등을 주장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야당은 ‘노태우 정권 퇴진’ 집회를 열고, 정권을 압박하기도 했다. 사찰 대상에 올랐던 노무현, 한승헌, 김승훈, 문동환, 강동규, 이효재 등 148명은 1991년 6월 27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998년 7월 대법원은 국가가 각 200만원씩, 총 2억9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군(軍)이 민간인을 상대로 벌인 광범위한 사찰이 확인된 최초의 사례였다.
 
 
  ‘미림팀’의 비밀
 
  ‘최초의 문민정부’란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사찰로부터 자유로웠을까? 답은 ‘노(No)’다. 김영삼 정권의 사찰은 ‘미림팀’이란 조직을 통해 이뤄졌다. 미림팀의 연원은 노태우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석양 사건 이후 군의 민간인 사찰이 불가능해지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그 임무를 떠맡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미림팀이다. 미림팀은 1991년 조직돼 김영삼 정권 출범 직후인 1993년 7월 잠시 사라졌다가 이듬해 부활했다.
 
  미림팀의 주요 업무는 도청(盜聽)이었다. 전직 국정원 직원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공작’에 대해 폭로했던 김기삼씨가, 2010년 펴낸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에는 미림팀에 대해 자세히 수록돼 있다.
 
  김기삼씨는 이 책에서 “미림팀은 공운○ 팀장을 비롯해 3명으로 이루어진 초미니 조직이었다”며 “공 팀장과 그를 보조하는 젊은 직원이 두 명 있었다”고 소개했다. 김씨는 “미림 사업은 극비에 속하는 사업이었다. 안기부 직원들 중에서도 같은 부서 내 사람들만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대부분의 직원들은 몰랐던 사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림팀이 도청한 대상자들에는 국내 주요 인사들이 총망라돼 있었다. 야당 인사 외에 정부 고위직 인사, 여당인 민주자유당 내의 반(反)김영삼 세력, 재벌을 비롯한 각종 기업인 등이 대상이었다. 정치인의 수만 283명에 달했고, 수사 당국이 확보한 도청 테이프는 274개나 됐다.
 
  미림팀이 입수한 정보는 일차적으로 오정소 당시 안기부 1차장에게 보고됐고, 이후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을 비롯해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에게도 전달됐다고 한다. 극비 중의 극비 정보는 김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다고 한다. 김기삼씨가 책에서 밝힌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한다.
 
  〈미림팀이 수집한 정보는 손꼽을 정도의 인원만 볼 수 있는 안기부 내의 최고급 정보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야사(夜史)였다. 그(공운○-기자 주)가 작성한 미림 보고서는 오 실장(오정소-기자 주)이 직접 관리했기 때문에 내가 볼 수는 없었다. 부속실의 모든 보고서는 내가 책임지고 관리했지만, 미림 보고서만은 예외였다. 나는 어쩌다 오 실장의 책상 위에 놓인 미림 보고서를 힐끗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가 수집해 온 정보는 언제나 나라를 뒤집을 만한 폭발력이 있는 소재들이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지난번 언론에 소개된 대로,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 같은 사람도 미림 보고서 한 장에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이회창 국무총리나 박상범 경호실장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경질되었다.〉

 
  2005년 7월 미림팀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90여 분짜리 테이프의 존재도 드러났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이른바 ‘삼성X파일’이다. 이 테이프에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과 삼성그룹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신라호텔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 녹음돼 있었다. 《월간조선》(2005년 9월호)은 두 사람의 대화가 담긴 안기부 도청 테이프 녹취록과 안기부의 요약보고서의 전문(全文)을 게재하기도 했다. 미림팀의 도청은 김대중 정권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DJ 정권 출범 초부터 ‘사찰 의혹’ 불거져
 
  김대중 정권은 출범 첫해부터 사찰 의혹으로 홍역을 치렀다. 1998년 12월 31일 야당인 한나라당은 국회 본관 ‘529호실’에 안기부 요원이 상주하면서 야당 의원 동향, 도청 등 사찰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529호실 앞에 몰려가 사무실 공개를 촉구했다. 박실 국회 사무총장은 “안기부(현 국가정보원)가 사용하는 방이기는 하나 정치 사찰을 하는 곳은 아니다”라고 부인했지만, 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같은 날 밤 한나라당 의원들은 529호실의 문을 부수고 내부로 진입, 서류와 집기 등을 뒤졌다.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이를 ‘폭거’라고 규정, 강력 대응을 시사했다. 국민회의는 ‘국회 안기부 분실’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에 대해 “국회 정보위 자료실”이라고 반박했다. 안기부도 “직원들이 정보위가 열렸을 때 답변을 작성하거나 본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한 장소”라고 해명에 나섰다.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가 사건 발생 15일 만에 ‘유감’을 표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1999년 5월, 또 하나의 사건이 정국을 강타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특별검사제’를 도입하게 만든 ‘옷 로비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에도 사찰을 연상케 하는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때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사직동팀’과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실’이다.
 
  먼저 옷 로비 사건의 전말부터 알아보자. 1998년 말 외화 밀반출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른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구명을 위해 부인 이형자씨가 김태정 검찰총장의 부인 연정희씨의 고급 옷값을 대납(代納)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최순영 회장이 구속되자 이형자씨는 언론에 옷 로비에 대해 제보했고, 이는 1999년 5월 24일 한 일간지에 보도됐다. 그러자 5월 28일 연정희씨가 이형자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마침내 옷 로비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사건의 실체를 가장 먼저 포착한 곳이 바로 사직동팀이었다. 사직동팀은 옷 로비 첩보를 입수하고도 이를 ‘내사 종결’해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돼 있어 급하게 꼬리를 자르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낳은 것이다.
 
 
  ‘사직동팀’과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실’
 
2000년 9월 18일 한빛은행 대출비리 관련 진상조사를 위해 사직동팀 청사를 방문한 한나라당 권력형비리진상조사특위 위원들이 팀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사진=조선DB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해 있다고 해 ‘사직동팀’이라 불렸는데, 공식 명칭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였다. 형식상 경찰청 소속이었지만,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지휘를 받았다. 주로 고위 공직자나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비위 정보를 수집했다. 보고받은 청와대에서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검찰이나 경찰에 이첩하기도 했다.
 
  사직동팀의 역사는 꽤나 깊다. 1972년 ‘치안본부 특별수사대’(특수대)로 시작해 ‘특수1대’(1976년), 합동수사본부 5국(1980년),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일명 사직동팀·1991년)로 이름과 소속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옷 로비 사건’ 이듬해 김대중 대통령은 사직동팀을 폐지했다.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실도 고급 정보를 생산해 냈다. 《월간조선》(2018년 5월호)은 이 범죄정보기획관실이 김대중 정권 시절인 1999년 생산한 문건을 단독 입수해 상세히 보도했다.
 
  범죄정보기획관실의 문건을 살펴보니 당초 목적과 달리 범죄 정보뿐 아니라 이른바 ‘동향 정보’가 상당수였다. ‘옷 로비 사건’ 보고서를 비롯해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전 신동아그룹 박○○ 부회장’ ‘노무현 경남도지부장’ 관련 보고서 등이 있었다. 하나같이 정·재계에 파장을 일으킬 만한 내용의 보고서였다.
 
  범죄정보기획관실에서 근무했던 관계자는 “우리는 매일 만든 ‘동향과 정책’ 보고서를 컬러로 출력해 신승남 대검차장, 박순용 검찰총장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밀봉돼 곧장 대통령, 대통령 비서실장, 민정수석비서관, 법무부 장관에게 보내졌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보고서 중간 부분에 넘버를 찍어 보고서가 유출됐을 때 누구에게 한 보고서가 유출됐는지 알 수 있게 했다”고도 말했다. 결론적으로 범죄정보기획관실은 유력 인사들의 행적과 대형 사건을 은밀히 추적, 권력 핵심층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해 왔던 셈이다.
 
 
  DJ 국정원의 도청, MB 국무총리실의 사찰 의혹
 
  김대중 정권 국정원이 각계 인사 1800여 명을 상대로 전방위적인 불법 도청을 한 사실이 드러나 2005년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이 구속된 적도 있다. 국정원은 2000년 12월 이른바 ‘권노갑 퇴진 파문’ 당시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의 통화 내용을 비롯해 ‘진승현 게이트’와 ‘최규선 게이트’ 관련자들의 통화 내용도 도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사건 이전만 해도 “휴대전화는 기술적으로 도청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기지국을 중심으로 반경 200m 이내에서는 도·감청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국가정보원은 전화국을 통하는 유선중계통신망 도청 장비인 ‘아르(R)2’와 이동식 이동통신 도청장비인 ‘카스’(CAS)를 직접 개발해 도청에 활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친인척도 광범위하게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됐고,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도 구속되는 불운을 겪었다. ‘공작 정치’의 최대 피해자로 알려진 김대중 대통령도 국정원을 도청에 이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지탄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는 국정원을 동원해 도청을 했지만 당시 정보 당국 고위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국정원이 거꾸로 청와대도 도청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노무현 정권 때는 정보기관의 불법 도·감청이 드러나진 않았다. 다만 2004년 국가정보원은 외교 관련 기사를 보도한 일간지 기자들의 통화 내역을 조회해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이명박(MB) 정권 시절엔 국무총리실이 공무원과 민간인을 상대로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10년 6월 MBC PD수첩 〈이 정부는 왜 나를 사찰했나?〉 편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김종익(당시 KB한마음 대표)씨를 사찰했다는 내용을 다뤘다. 검찰이 수사에 돌입하자 청와대 고용사회비서실이 사찰에 관여한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남경필, 정두언, 정태근 등 여당 의원들을 사찰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해 8월 검찰은 이인규 전 청와대 공직윤리지원관과 김충곤 전 점검1팀장 등 3명을 김종익씨를 불법 사찰한 혐의로 기소했다.
 
  2012년 3월 초 최종석 전 청와대 행정관과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의 육성 대화록이 공개되면서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의혹은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해 3월 20일 KBS새노조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사찰한 내역 2619건을 인터넷에 공개, 사건은 새 국면을 맞았다.
 
 
  김태우 사찰 의혹의 핵심 쟁점은?
 
  이후 언론노조 산하 MBC, KBS, YTN, 연합뉴스 노조 조합원 800여 명이 집단 파업에 돌입했다. 언론노조는 기자회견문에서 “MB 정권의 불법 사찰과 언론 장악, 청와대가 직접 개입한 증거 인멸, 축소 은폐 수사는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범죄 행위”라며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통해 국민 앞에 민간인 사찰과 언론 장악의 전모를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언론노조는 “MB의 책임이 드러난다면 마땅히 하야를 결정해야 할 중대 사안”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의 모든 정권이 일상적으로 사찰을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체제를 위협하고, 국가의 안전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세력에 대한 사찰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적법한 절차에 의해 뚜렷한 대상을 상대로 사찰을 벌였는지 여부다. 문재인 청와대가 의심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사찰 대상도 아닌, 민간인들을 상대로 사찰을 했다는 정황이 김태우 수사관의 증언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가리는 게 사안의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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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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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딱은사회문제    (2019-02-07)     수정   삭제 찬성 : 1   반대 : 0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내용이 충실해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조성호 기자님 화이팅!

20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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