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MCA 시절 이승만에게 배운 윤치영(초대 내무부 장관), 임병직(2대 외무부 장관), 이승만의 건국외교 도와
⊙ 전 공산주의자 조봉암(초대 농림부 장관), 사회주의 성향 경제학자 이순탁(기획처장)은 농지개혁 추진, 자유협동주의자 전진한(초대 사회부 장관)은 이익균점권 등 제안
⊙ 초대 감찰위원장 지낸 정인보, 建軍 주도한 이응준, 이승만의 외교 고문 올리버 등
⊙ 일부 건국 세력, 이승만에 등 돌렸지만 대한민국 긍정하고 반공노선 견지하는 ‘충성스런 야당’ 건설
⊙ 전 공산주의자 조봉암(초대 농림부 장관), 사회주의 성향 경제학자 이순탁(기획처장)은 농지개혁 추진, 자유협동주의자 전진한(초대 사회부 장관)은 이익균점권 등 제안
⊙ 초대 감찰위원장 지낸 정인보, 建軍 주도한 이응준, 이승만의 외교 고문 올리버 등
⊙ 일부 건국 세력, 이승만에 등 돌렸지만 대한민국 긍정하고 반공노선 견지하는 ‘충성스런 야당’ 건설
- 제헌국회 개원식.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는 다양한 경력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이승만 측근 그룹〉
尹致暎
초대 내무장관 지낸 ‘이승만의 비서실장’
윤치영(尹致暎·1898~1996)은 해방공간에서 이승만(李承晩)의 비서실장으로 활약했고, 건국 후에는 초대(初代) 내무부 장관, 국회부의장 등으로 이승만을 도왔다.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이 제일 먼저 부른 사람이 윤치영이었다는 데서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윤치영의 집안은 구한말 신흥 무반(武班)으로 이름을 떨쳤다. 군부대신·법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이 큰아버지고, 아버지는 삼남토포사 등을 지낸 윤영렬이다. 일찍이 개화에 눈뜬 집안으로 구한말 이래 정계·학계 등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윤치호가 윤치영의 사촌형, 윤보선 전 대통령이 조카이다.
윤치영은 고종의 시종무관을 지냈고 헤이그밀사사건에 연루됐던 형 윤치성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국제법과 국제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소년 시절 학교를 마치면 종로 YMCA로 달려가곤 했는데, 그가 이승만을 만난 것은 이때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 재학 중이던 1921년에는 상해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비밀결사 2월회를 조직했다. 김도연(초대 재무부 장관)·김준연·유억겸·백관수 등이 이때의 동지였다.
1923년 윤치영은 국내 야구단을 이끌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명분은 1년 전 방한(訪韓)했던 하와이교포모국방문단에 대한 답방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윤치호·윤치소·민대식 등으로부터 받은 독립운동자금을 이승만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3년간 이승만이 이끄는 동지회·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 등에서 일하는 한편, 《태평양잡지》 주필로 활약했다. 이때 그는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 기독교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윤치영은 1925년 미국 본토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 프린스턴대학, 아메리카대학, 조지워싱턴대학 등에서 국제법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1935년 귀국 후에는 YMCA 부총무로 활동했다. 1938년 이승만의 국내 조직인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9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해방 시까지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해 친일활동을 했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오점으로 남았다.
해방 후 윤치영은 한국민주당 외무부장,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승만이 귀국한 후에는 비서실장을 맡아 이승만과 국내 인사들, 미군정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46년 2월 미군정이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을 설립한 후에는 사무총장에 해당하는 비서국장을 맡아 의장인 이승만을 보필했다. 이승만이 1946년 말~1947년 초 외교활동을 위해 도미(渡美)했을 때에는 이승만을 대신해 국내 조직을 관리하고, 외교구락부를 만들어 외국 기자들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벌였다.
당시 윤치영이 한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유진산·이철승·박용만·김두한 등 우익 청년·학생운동을 관리, 지원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윤치영은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신사의 탈을 끈 갱단 두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48년 5·10총선 때에는 한민당 소속으로 서울 중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제헌국회에서는 초대 외무국방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정부 수립 당시 윤치영은 외무부 장관으로 유력시됐고, 본인도 그 자리를 원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를 내무부 장관으로 지명,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미군정 시절 수도경찰청장을 지냈고 내무부 장관으로 유력시되던 장택상이 외무부 장관으로 발표되자, 윤치영과 장택상의 자리가 잘못 발표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윤치영은 초대 내무장관으로서 미군정으로부터 경찰권을 비롯한 정부 기능 및 물자 인수, 4·3제주폭동 및 여순반란사건 진압 등 건국 초기의 난제들을 처리했다. 하지만 국회 및 장택상 외무부 장관, 전진한 사회부 장관 등과의 갈등으로 그해 1948년 12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임 후에는 이승만 지지 세력을 규합해 대한국민당을 만들어 최고위원을 지냈고,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1950년대에는 자신이 이승만의 비서로 끌어들였던 이기붕 등에게 밀려 정권에서 소외됐다. 5·16 이후에는 서울시장, 민주공화당 의장 등을 지내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뒷받침했다.
林炳稷
이승만의 ‘영원한 외교비서’
임병직(林炳稷·1893~1976)도 윤치영처럼 YMCA 시절 이승만의 제자였다. 1913년 이승만의 영향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난 후 제2대 외무부 장관이 되어 귀국한 1949년까지 36년간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을 도왔다.
이승만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대학교를 거쳐 디킨슨대학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오하이오대 재학 중에는 《한국학생평론》을 창간,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3·1운동 후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했다가 “자네가 애국심이 있다면 나를 따르게”라는 이승만의 말 한마디가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후 구미위원부, 동지회, 한인중앙학원, 한인기독학원 등에서 일하면서 이승만을 도왔다. 일제 말에는 화장품 판매원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이승만을 지원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구미위원부를 재건하고 다시 외교활동에 나서면서 이승만은 임병직을 구미위원부 무관(武官)으로 임명하고, 대령 계급을 달아주었다. 이후 그는 국제무대에서 ‘커널(Colonel) 임’으로 알려졌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국 OSS(전략사무국·CIA의 전신)와 접촉, 재미교포 특수부대를 만들어 국내에 침투시키는 공작을 추진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한 후 임병직은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구미위원부 위원장이 됐다. 그는 이승만을 대신해 미국 국무부를 상대로 “5000년 역사를 가진 한국을 야만토종(野蠻土種)처럼 자치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신탁통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1946년 12월 이후에는 미국에 온 이승만의 대미(對美) 외교를 지원했다. 이듬해 1월에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 영국으로 건너가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 데닝 외무부 부차관보, 파트리지 《런던 타임스》 주필 등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한국정부 수립이라는 유엔총회 결의가 소련의 반대로 표류하던 1948년 2월에는 “북한에 공산 정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유민주정부가 있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내용의 각서를 각국 대표들에게 돌려, ‘유엔감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한국 내 전 지역에서 선거 실시’라는 유엔소총회 결의안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임병직은 1949년 1월 제2대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귀국했다. 귀국 후 비행장에서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결혼한 부인과 36년 만에 재회했다. 임병직은 아내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 모자를 벗으면서 “부인! 반갑습니다. 임병직이라고 합니다”라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실상 외교를 전담하는 상황에서 그는 비서처럼 이승만을 보좌했다. 1951년부터 9년간은 주유엔대표부 대사로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주인도 총영사, 반공연맹 이사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지냈다.
로버트 T. 올리버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지원한 미국인 외교고문
로버트 T. 올리버(1909~2000) 박사는 벽안(碧眼)의 미국인이었지만, 여느 한국인보다 훨씬 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이해하고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이승만과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9월이었다. 당시 올리버는 펜실베이니아주 버크넬대에서 수사학(修辭學)을 가르치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식량관리계획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국 태생인 에드워드 장킨 목사가 그를 이승만에게 소개했다. 이승만은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던 그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 일제식민통치 등에 대해 설명했고, 올리버는 이승만의 애국심과 ‘억제된 위엄’에 매료됐다. 이승만은 그에게 한국을 위한 일을 해달라고 간청했고, 올리버는 1943년 3월 《워싱턴포스트》에 〈일본의 숙적-한국〉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후 여러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다수 기고했고, 1944년 9월에는 퍼블릭어페어즈출판사에서 《잊혀진 나라 한국》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승만은 1947년 1월 올리버를 자신의 외교고문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올리버는 사실상 이승만의 외교·홍보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올리버가 하도 충실하게 이승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은 “올리버를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펄펄 뛰기도 했다. 올리버는 건국 과정에서 미국 주류 언론이 한국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 상황 속에서 넉넉지 못한 보수를 받으면서 마이너 잡지나 신문, 소식지 등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전하려 무진 애를 썼다. 이승만의 국내 측근들은 올리버가 미국 주류 언론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비난했지만, 이승만은 건국 과정에서는 물론 그 이후에도 올리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올리버는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건국자, 아시아 민주주의 확산의 촉매자, 미국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인이 수호해 온 ‘도덕적 가치 기준’을 극동 지역에서 지켜낸 사람”이라면서 “그는 역사의 길이라고 믿으면 주저 없이 나섰고, 뒤늦게 쫓아오는 이들을 기다렸다. 그는 ‘위대한 정치적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야 할 인물이다”라고 평했다.
올리버는 미국에서는 수사학과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널리 알려진 학자이다. 5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중 8권은 한국에 대한 것인데, 《이승만-신화 뒤의 인물(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이 가장 유명하다.
李允榮
4번이나 총리 지명 받은 ‘越南民들의 대표자’
이윤영(李允榮·1890~1975)은 건국 초기 역사에 두 차례 등장한다. 한 번은 제헌국회 개원(開院) 시 국회의장 이승만의 요청으로 개원 기도를 한 사람으로, 또 한 번은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되었으나 부결된 사람으로….
이윤영은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되었고, 일제 말기에는 일본 감리교와의 통합에 반대하다가 목사직에서 파면되기도 했던 항일 목사였다. 해방 후에는 북한 지역 감리교의 대표적 인사로 장로교도인 조만식(曺晩植)을 도와 평남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민주당 부당수 등을 지냈다. 조만식과 함께 신탁통치에 반대, 가택 연금되었다가 1946년 2월 월남(越南)했다.
월남 후 이윤영은 민족통일총본부 정경부장, 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등으로 이승만 노선을 충실하게 따랐다. 1947년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었을 때에는 “이는 결코 남북을 분단하는 것이 아니고, 통일조선 건설을 위한 필연적 단계”라고 역설했다.
1948년 5·10총선 당시 정치1번지인 종로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이는 그를 월남민들의 대표자로 간주했던 이승만과 김성수의 배려 덕분이었다.
5월 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에서 의장 이승만은 그에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려달라고 했다. 이윤영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셨으며 세계인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써 역사적인 환희의 날이 우리에게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드러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라면서 “아직까지 남북이 둘로 갈린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씻어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했다. 제헌국회에서 이윤영은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다.
1948년 7월 22일 이승만은 그를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이승만은 “조만식씨의 유일한 정치단체인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으로 이윤영씨가 국무총리 책임을 맡는 것이 정치상 지혜로나 민족적 정의로나 가장 적당할 것”이라는 것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김성수가 총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던 한국민주당은 이윤영을 낙마시켰다. 이후 이윤영은 초대 내각의 무임소장관, 제2대 사회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이승만은 1950년 4월, 1952년 4월과 10월에 그를 다시 총리로 지명했지만, 번번이 부결됐다.
〈온건 좌파 출신〉
曺奉岩
농지개혁을 추진한 전향 공산주의자
이승만의 초대 내각 명단이 발표됐을 때,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인물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1899~1959)이었다. 인구의 80%가 농민이던 시절, 농림부 장관의 위상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그런 자리에 이승만은 전향한 공산주의자를 임명한 것이다.
조봉암은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에도 참여했던 공산주의자였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압송된 후 6년간 옥고(獄苦)를 치렀다. 해방 후에도 인천민주주의민족전선 회장을 지내는 등 좌익활동을 했으나, 1946년 5월 박헌영의 급진과격노선을 비판하는 편지를 발표하고 전향했다. 전향성명서에서 조봉암은 “현재 조선 민족은 공산당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의 전향이 미군 CIC의 정치공작 때문이라는 설(說)도 있다.
1948년 조봉암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조봉암은 후일 쓴 《나의 정치백서》에서 “미군정 3년을 지내고 우선 남한만으로라도 우리 민족이 정권을 이양받고 통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술회했다.
제헌국회에서 조봉암은 80여 명의 의원들을 거느린 무소속구락부 대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 의원으로 활약했다. 헌법심의 과정에서 그는 이승만이 주장하는 대통령중심제는 독재정치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조봉암은 “농정을 그르치면 중국에서처럼 이 나라가 공산화될 것이 필지(必至)인데, 한민당이 모든 개혁을 반대하니 그를 물리치고 대대적인 개혁을 지지해 준다면 맡아보겠다”면서 입각을 수락했다.
농림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조봉암은 농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 조봉암의 농림부가 내놓은 농지개혁안은 국회산업위원회안이나 기획처안 등과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에서 농민들에게 가장 유리한 것이었다. 호남 지주층을 기반으로 한 한민당은 반발했다. 그 영향으로 1949년 1월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 위원장 정인보)는 공금유용과 독직(瀆職)혐의로 그를 고발했다. 공금을 관사(官舍) 수리에 사용했다는 등의 혐의였다. 조봉암은 1949년 2월 사임했다.
이후 조봉암은 1950년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됐다. 1952년에는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 약 70만 표를 얻어 차점자로 낙선했다. 1956년 제3대 대선에서는 20.3%인 216만3000여 표를 받았다. 1956년 11월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됐다. 그러나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어 1958년 1월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1심에서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과 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처형됐다. 2011년 대법원 전원합의부는 진보당 사건을 재심, 무죄를 선고했다.
錢鎭漢
‘근로자 이익균점권’ 주장한 초대 사회부 장관
전진한(錢鎭漢·1901~1972) 초대 사회부 장관(지금의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에 해당)은 당대의 기인(奇人)이었다. 노년세대 중에는 아직도 ‘전진한다, 전진한다, 전진한!’이라는 그의 선거 캐치프레이즈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경북 상주에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난 전진한은 17세 때 상경, 김성수·송진우가 하숙하던 집에서 심부름하는 사환으로 고학을 했다. 1920년 기미육영회의 도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경제과를 졸업했다. 유학 시절 그는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협동조합운동에 눈을 떴다. 그는 항일운동단체 한빛을 결성, 이를 바탕으로 1926년 협동조합운동사를 결성했고, 신간회 일본지회 간사도 지냈다.
전진한은 귀국 후에도 협동조합운동을 계속, 전국에 수백 개의 협동조합을 결성했다가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잠시 함경남도 갑산에서 사립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그만두고 절로 들어갔다. 1933년 이후 해방될 때까지 금강산 신계사의 효봉 스님,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 밑에서 참선수행을 하며 지냈다.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위원장,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 등을 맡아 이승만의 건국노선을 지지하는 청년운동,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전진한은 평생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자유협동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자유와 협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면서 “협동에서 오지 않은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자유에서 오지 않은 협동은 진정한 협동이 아니라 굴종”이라고 주장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전진한은 제헌국회 헌법심의 과정에서 근로자 이익균점권(均霑權) 및 기업참여권, 토지개혁 등의 내용을 담은 ‘노농(勞農) 8개 조항’을 제안했다. 이 중 근로자의 기업참여권을 제외한 나머지 주장들이 제헌헌법에 반영됐다. 특히 논란이 됐던 것은 ‘기업주가 그 기업이익의 일부를 법률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임금 이외의 적당한 명목으로 근로자에게 균점시키는’ 근로자이익균점권이었다. 전진한은 이익균점권을 적산(敵産)기업 처리와 연결시켜 노자(勞資) 대립을 완화시키고 공산주의의 침투를 예방하자고 주장했다.
유진오 등의 헌법초안에 전혀 없던 이익균점권 제안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제헌헌법 논의 과정에서 일대 풍파를 일으켰다. 한국민주당·상공회의소 등에서는 결사반대하고 나섰으며 이틀 동안 10여 시간에 걸쳐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결국 이익균점권은 제헌헌법 제18조에 명문화되었다. 다만 산업기반이 전무(全無)한 상황에서 프로그램적 규정으로 머물다가 제3공화국 헌법에서 삭제됐다.
전진한은 이후 초대 사회부 장관, 제2·3·5·6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제2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노동법 제정에 앞장섰다. 1955년에는 자유협동주의를 내세운 노농당을, 1960년에는 한국사회당을 만들었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제3공화국 시절에는 보수야당에 참여, 민정당 최고위원·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등을 역임했다. 정계 은퇴 후 동국대 선학원 등에서 《금강경》을 강론했다. 후두암에 걸리자 단식, 참선하다가 “노동자로 이 세상에 왔다가 노동자로 돌아간다”는 말과 임종게송(臨終偈頌)을 남기고 입적(入寂)했다.
兪鎭午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자
미군정 시절부터 건국에 이르는 동안 여러 갈래에서 헌법초안을 모색했다. 신익희는 임시정부와 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일제하의 엘리트 관료들로 행정연구회를 만들어 헌법안을 연구하게 했다. 한국민주당과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편찬위원회에서도 헌법안을 준비했다. 5·10총선거로 제헌국회가 구성된 후에는 국회 내에 헌법기초위원회가 만들어져 헌법기초작업을 했다.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한 이가 유진오(兪鎭午·1906~1987)였다.
유진오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 예과에 수석입학하고 같은 대학 법문학부를 수석졸업한 당대의 수재였다. 재학 중에는 경성제국대학 내 좌익 성향 서클인 경제연구회에 참여, 활동했다. 졸업 후에는 경제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때 함께 활동했던 이들 가운데는 후일 해방공간에서 좌익활동을 하다가 월북해 북한 정권에 참여한 이강국·최용달·박문규 등도 있었다. 졸업 후 경성제대 강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헌법학의 선구자가 됐다.
유진오는 일제하에서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1927년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고, 1932년에는 근로대중을 위한 연극을 내세운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작가로서 그는 급진 성향의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좌파 성향을 내재한 작품을 쓰는 ‘동반가 작가’ 중 하나였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 강연과 기고 등을 해서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
해방 후 유진오는 좌익이 세운 조선인민공화국 헌법초안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한국민주당을 사실상 이끌던 김성수, 미군정청 사법부장 김병로의 요청으로 헌법초안 작성 작업을 했다. 그는 바이마르헌법을 모델로 하면서 내각책임제,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초안을 만들었다. 유진오는 경제 면에서는 농지개혁과 주요 기간산업체의 국유(國有)를 주장했다. 그는 김성수에게 “농지를 소유하지 않은 소작인은 쉽게 공산당으로 넘어가지만,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해 주면 농민이 모두 지주가 되므로 토지국유화를 부동(不動)의 기본정책으로 삼는 공산당의 책략에 넘어가지 않는다”면서 “농지개혁만이 공산주의를 막는 최량(最良)의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 자신이 호남의 대지주였던 김성수는 유진오의 말을 수용했다. 유진오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면서, 거기서 올 수 있는 폐단을 제거 또는 방지하느냐에 모든 관심을 쏟았다”고 술회했다.
유진오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참여, 이러한 그의 지론(持論)들을 헌법안에 담았다. 제5공화국 시절 민정당 대표위원을 지낸 윤길중 등이 그를 도왔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내각책임제는 대통령제를 고집하는 이승만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됐다.
유진오는 초대 내각에 법제처장으로 들어갔으나, 8개월 만에 그만두고 고려대학교로 복귀했다. 1952년부터 13년간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1952년에는 한일회담 대표, 5·16 후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해 만든 야당 신민당의 대표위원과 총재를 지냈다.
李順鐸
농지개혁 추진한 ‘조선의 가와카미 하지메’
이순탁(李順鐸·1897~?)은 대한민국 초대 내각에 참여한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었다. 전남 해남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때 《가난이야기》로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접했다.
이순탁은 1923년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가 된 후 언론 기고나 논문 등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전파, ‘조선의 가와카미 하지메’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자본가의 역할을 긍정하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는 유학 시절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그의 후원자였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1920년대에 그는 민우회·조선물산장려회·신간회 등 중도민족주의 노선의 단체에서 주로 활동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적화(赤化)사건’, 일명 ‘경제연구회’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구속됐다가 해직됐다.
해방 후 이순탁은 한때 한국민주당에 몸담았지만, 1946년 좌우합작에 찬성하면서 한민당을 탈당했다. 이후 민중동맹, 조선공화당, 민주주의독립전선, 민주독립당 등 중도좌파 성향 정당에서 활동했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위원 관선(官選)의원이 된 그는 토지개혁법 제정을 적극 추진했다. 유상매수(有償買收) 방식에 의한 토지개혁이 그의 주장이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절충한 경제, 중소농민과 중소기업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가 그의 이상(理想)이었다.
이순탁은 초대 내각에서 기획처장으로 발탁됐다. 1948년 9월 발족한 농지개혁법기초위원회에서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순탁의 기획처가 만든 농지개혁법안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세부 내용이 바뀌기는 했으나, 농지개혁의 골간이 됐다. 기획처장 시절 이순탁은 대일(對日)배상요구조서 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49년 7월 기획처장에서 물러난 후 중앙농지위원회 민간위원, 대한금융조합연합회 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때 납북됐다.
〈학자/군인〉
鄭寅普
초대 감찰위원장 지낸 국학자
역사학자이자 시조시인, 양명학자였던 정인보(鄭寅普·1893~1950)는 초대 감찰위원장(지금의 감사원장)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다.
정인보는 일제하에서는 연희전문학교 강사(1925~1937)로 있으면서 조선사와 조선문학, 한문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 그는 ‘혼(魂)’을 강조하고, 실학(實學)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한편, 시조부흥운동에도 힘썼다. 그는 작가 홍명희(북한 부수상 역임), 백낙준(문교부 장관, 참의원 의장 역임), 마르크스주의경제사학자 백남운(북한 교육상 역임),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등과 이념과 종교를 뛰어넘는 폭넓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백낙준이 후일 미군정하에서 교육법을 제정할 때 우리 교육의 이념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명시하자고 주장한 것은 정인보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정인보는 송진우와는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함께 ‘비밀스러운 일’을 논의하기도 했다. 순종의 가짜 유칙(遺勅)을 만들어 민족주의 세력을 선동,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 했는데, 성사되지는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1945년 송진우가 암살될 때까지 동지적 우정을 나누었다. 1937년 연희전문을 그만둔 후 정인보는 창동에 은거하면서 송진우·김병로 등과 만나 시국담을 나누곤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도 이들과 함께 맞았다.
해방 후 정인보는 언론과 교육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 앞장섰다. 1946년 9월에는 일제하에서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5000년간 조선의 얼〉을 엮은 《조선사연구》를 펴냈다. 1946년 3월에는 전조선문필가협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정인보는 중도우파적 입장에서 정치활동도 했는데, 1946년 2월 미군정 자문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그해 9월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1946년 11월에는 이상의 공직들에서 사퇴한 후, 국학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민주의원 등을 그만둔 것은 김규식 등이 당시 추진하던 좌우합작에는 찬성하면서도 좌우합작 추진 세력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을 마뜩잖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정인보는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초대 감찰위원장이 됐다. 그가 감찰위원장을 맡게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이시영 부통령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평생 학문만 하던 그가 공직에 나간 것은 관기숙정(官紀肅正)을 통해 새로 출발하는 독립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일조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조봉암 농림부 장관, 임영신 상공부 장관 등의 공금유용·독직사건을 엄히 다스리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그는 1949년 7월 “국민의 기대에 십분 보답하지 못해 유감”이라는 퇴임사를 남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인보는 학계로 돌아가 이순신·강감찬 장군, 영규대사(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등 민족영웅들의 현양(顯揚) 사업에 힘쓰다가 6·25 때 납북됐다.
李應俊
대한제국 무관학교 생도 출신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李應俊·1890~1985)은 군인으로서 비운(悲運)과 행운을 모두 맛본 인물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학교 생도로 군대 해산과 망국(亡國)을 경험했지만, 일제 35년을 겪어낸 후 해방된 조국의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평안남도 안주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응준은 16세 때 무작정 상경했다. 이때 그를 거두어준 사람이 군부대신(국방부 장관) 부관으로 있던 육군참령(參領·소령) 이갑(李甲)이었다. 이갑은 후일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어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응준은 나중에 이갑의 딸과 결혼했다.
이응준은 이갑의 주선으로 보성학교를 거쳐 대한제국 무관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때 대한제국군은 이미 해산됐지만, 군부와 무관학교는 명색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1909년 무관학교마저 해산되면서 무관학교 생도 42명은 일본육군유년학교에 편입됐다. 1914년 이응준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함께 일본 육사로 진학한 이들 가운데 3년 선배인 김광서(김경천), 동기생 지대형(이청천·지청천), 1년 후배 이종혁(마덕창) 등은 3·1운동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독립운동가를 장인으로 둔 이응준은 그러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에 순치(馴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이응준은 조선과 일본, 중국의 군부대에서 대대장, 병사(병무)담당 장교, 전문학교 배속장교(교련장교), 용산정거장사령관(병참장교), 원산항 수송관 등을 지내면서 대좌(대령)까지 승진했다. 해방 당시 그는 홍사덕 중장을 제외하면 한국인으로서는 최고위급 장교 중 하나였다.
일부에서는 이응준이 일제 말 학병권유 강연 등에 나섰던 것을 들어 친일파라고 비판하지만, 그는 민족정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중국 베이징에서 근무할 때에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원생과 자주 접촉했다가 일본 헌병대의 요시찰 대상이 됐다.
장인의 동지 안창호가 감옥에서 나와 투병생활을 할 때에는 그의 부인이 안창호를 간병하고 병원비와 장례비를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일제 말에는 서울 계동에 있는 김성수의 집에 출입하면서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시국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이번 전쟁에서는 일본이 질 것”이라고 했는데, 동석했던 장택상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후일 이응준이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된 것은 장택상이 그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한국민주당의 김성수 등이 그를 끌어당겼으나 “어제까지 일본군 고급장교였던 사람이 신생 조국의 건군(建軍) 작업에 나선다는 것은 양심상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은인자중했다. 1946년 1월 미군정의 아고 대령이 그를 불러 조선국방경비대 창설 계획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응준이 고사하자 아고 대령은 “일본을 위해 죽을힘을 다한 분이 어째서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못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따졌다. 결국 이응준은 군사고문관을 맡아 건군의 토대를 놓는 작업에 나섰다.
이응준은 남한 내 도청소재지마다 1개 연대(실제로는 중대 규모)를 창설한 후 이를 여단, 사단으로 확장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응준은 자신이 일본군 출신이면서도 가능하면 광복군의 정통성을 접목시키려 노력했다. 미군정 통위부장(국방장관)으로 대한제국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동렬을 추천한 이도 이응준이었다.
이응준은 1946년 5월 군사영어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생도들이 임관한 직후인 그해 6월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건국 후 이응준은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여순반란, 제주폭동, 무장게릴라 남파 등의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는 어려운 환경 아래서도 그는 5만명 수준이던 육군을 8개 사단 10만명 수준으로 증강하는 등 군사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949년 5월 제8연대 산하 2개 대대가 강태무·표무원 중령의 꾐에 넘어가 집단 월북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후 5사단장, 육군대학 총장 등을 지내다가 1952년 예편했다. 이승만은 그를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시켜 예우했다.
한국 야당의 뿌리
‘건국의 조력자들’의 삶 속에는 한국현대사의 비극과 모순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자식이 월북한 사람도 있고, 친구들과 이념 때문에 갈라선 사람도 있다. 일제 말 친일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도 있다.
‘건국의 조력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건국 후 이승만에 등을 돌리고 야당의 길을 걸었다. 일각에서는 그것이 이승만의 독선과 권력욕, 실정(失政)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거인(巨人) 이승만을 이해하고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국의 조력자들’과 이승만의 결별은 건국 세력의 분열이라는 점에서는 비극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건국 세력이 야당을 형성한 것은 신생 공화국을 위해 다행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법정신을 옹호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충성스런 야당(loyal opposition)’이었기 때문이다.
건국을 주도했던 이들과 그 후예들이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1980년대 좌파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야당으로 들어가서 주류(主流)가 되기 전까지 야당의 적자(嫡子)는 이들 건국 세력의 후예들이었다. 이들이 사라지고 정통 야당의 정체성(正體性)이 흔들리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긍정하는 ‘충성스러운 야당’의 전통도 사라지고 말았다.⊙
尹致暎
초대 내무장관 지낸 ‘이승만의 비서실장’

윤치영의 집안은 구한말 신흥 무반(武班)으로 이름을 떨쳤다. 군부대신·법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이 큰아버지고, 아버지는 삼남토포사 등을 지낸 윤영렬이다. 일찍이 개화에 눈뜬 집안으로 구한말 이래 정계·학계 등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윤치호가 윤치영의 사촌형, 윤보선 전 대통령이 조카이다.
윤치영은 고종의 시종무관을 지냈고 헤이그밀사사건에 연루됐던 형 윤치성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국제법과 국제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소년 시절 학교를 마치면 종로 YMCA로 달려가곤 했는데, 그가 이승만을 만난 것은 이때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 재학 중이던 1921년에는 상해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비밀결사 2월회를 조직했다. 김도연(초대 재무부 장관)·김준연·유억겸·백관수 등이 이때의 동지였다.
1923년 윤치영은 국내 야구단을 이끌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명분은 1년 전 방한(訪韓)했던 하와이교포모국방문단에 대한 답방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윤치호·윤치소·민대식 등으로부터 받은 독립운동자금을 이승만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3년간 이승만이 이끄는 동지회·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 등에서 일하는 한편, 《태평양잡지》 주필로 활약했다. 이때 그는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 기독교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윤치영은 1925년 미국 본토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 프린스턴대학, 아메리카대학, 조지워싱턴대학 등에서 국제법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1935년 귀국 후에는 YMCA 부총무로 활동했다. 1938년 이승만의 국내 조직인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9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해방 시까지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해 친일활동을 했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오점으로 남았다.
해방 후 윤치영은 한국민주당 외무부장,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승만이 귀국한 후에는 비서실장을 맡아 이승만과 국내 인사들, 미군정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46년 2월 미군정이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을 설립한 후에는 사무총장에 해당하는 비서국장을 맡아 의장인 이승만을 보필했다. 이승만이 1946년 말~1947년 초 외교활동을 위해 도미(渡美)했을 때에는 이승만을 대신해 국내 조직을 관리하고, 외교구락부를 만들어 외국 기자들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벌였다.
당시 윤치영이 한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유진산·이철승·박용만·김두한 등 우익 청년·학생운동을 관리, 지원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윤치영은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신사의 탈을 끈 갱단 두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48년 5·10총선 때에는 한민당 소속으로 서울 중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제헌국회에서는 초대 외무국방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정부 수립 당시 윤치영은 외무부 장관으로 유력시됐고, 본인도 그 자리를 원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를 내무부 장관으로 지명,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미군정 시절 수도경찰청장을 지냈고 내무부 장관으로 유력시되던 장택상이 외무부 장관으로 발표되자, 윤치영과 장택상의 자리가 잘못 발표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윤치영은 초대 내무장관으로서 미군정으로부터 경찰권을 비롯한 정부 기능 및 물자 인수, 4·3제주폭동 및 여순반란사건 진압 등 건국 초기의 난제들을 처리했다. 하지만 국회 및 장택상 외무부 장관, 전진한 사회부 장관 등과의 갈등으로 그해 1948년 12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임 후에는 이승만 지지 세력을 규합해 대한국민당을 만들어 최고위원을 지냈고,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1950년대에는 자신이 이승만의 비서로 끌어들였던 이기붕 등에게 밀려 정권에서 소외됐다. 5·16 이후에는 서울시장, 민주공화당 의장 등을 지내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뒷받침했다.
林炳稷
이승만의 ‘영원한 외교비서’

이승만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대학교를 거쳐 디킨슨대학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오하이오대 재학 중에는 《한국학생평론》을 창간,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3·1운동 후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했다가 “자네가 애국심이 있다면 나를 따르게”라는 이승만의 말 한마디가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후 구미위원부, 동지회, 한인중앙학원, 한인기독학원 등에서 일하면서 이승만을 도왔다. 일제 말에는 화장품 판매원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이승만을 지원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구미위원부를 재건하고 다시 외교활동에 나서면서 이승만은 임병직을 구미위원부 무관(武官)으로 임명하고, 대령 계급을 달아주었다. 이후 그는 국제무대에서 ‘커널(Colonel) 임’으로 알려졌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국 OSS(전략사무국·CIA의 전신)와 접촉, 재미교포 특수부대를 만들어 국내에 침투시키는 공작을 추진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한 후 임병직은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구미위원부 위원장이 됐다. 그는 이승만을 대신해 미국 국무부를 상대로 “5000년 역사를 가진 한국을 야만토종(野蠻土種)처럼 자치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신탁통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1946년 12월 이후에는 미국에 온 이승만의 대미(對美) 외교를 지원했다. 이듬해 1월에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 영국으로 건너가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 데닝 외무부 부차관보, 파트리지 《런던 타임스》 주필 등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한국정부 수립이라는 유엔총회 결의가 소련의 반대로 표류하던 1948년 2월에는 “북한에 공산 정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유민주정부가 있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내용의 각서를 각국 대표들에게 돌려, ‘유엔감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한국 내 전 지역에서 선거 실시’라는 유엔소총회 결의안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임병직은 1949년 1월 제2대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귀국했다. 귀국 후 비행장에서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결혼한 부인과 36년 만에 재회했다. 임병직은 아내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 모자를 벗으면서 “부인! 반갑습니다. 임병직이라고 합니다”라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실상 외교를 전담하는 상황에서 그는 비서처럼 이승만을 보좌했다. 1951년부터 9년간은 주유엔대표부 대사로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주인도 총영사, 반공연맹 이사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지냈다.
로버트 T. 올리버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지원한 미국인 외교고문

그가 이승만과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9월이었다. 당시 올리버는 펜실베이니아주 버크넬대에서 수사학(修辭學)을 가르치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식량관리계획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국 태생인 에드워드 장킨 목사가 그를 이승만에게 소개했다. 이승만은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던 그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 일제식민통치 등에 대해 설명했고, 올리버는 이승만의 애국심과 ‘억제된 위엄’에 매료됐다. 이승만은 그에게 한국을 위한 일을 해달라고 간청했고, 올리버는 1943년 3월 《워싱턴포스트》에 〈일본의 숙적-한국〉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후 여러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다수 기고했고, 1944년 9월에는 퍼블릭어페어즈출판사에서 《잊혀진 나라 한국》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승만은 1947년 1월 올리버를 자신의 외교고문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올리버는 사실상 이승만의 외교·홍보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올리버가 하도 충실하게 이승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은 “올리버를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펄펄 뛰기도 했다. 올리버는 건국 과정에서 미국 주류 언론이 한국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 상황 속에서 넉넉지 못한 보수를 받으면서 마이너 잡지나 신문, 소식지 등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전하려 무진 애를 썼다. 이승만의 국내 측근들은 올리버가 미국 주류 언론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비난했지만, 이승만은 건국 과정에서는 물론 그 이후에도 올리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올리버는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건국자, 아시아 민주주의 확산의 촉매자, 미국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인이 수호해 온 ‘도덕적 가치 기준’을 극동 지역에서 지켜낸 사람”이라면서 “그는 역사의 길이라고 믿으면 주저 없이 나섰고, 뒤늦게 쫓아오는 이들을 기다렸다. 그는 ‘위대한 정치적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야 할 인물이다”라고 평했다.
올리버는 미국에서는 수사학과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널리 알려진 학자이다. 5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중 8권은 한국에 대한 것인데, 《이승만-신화 뒤의 인물(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이 가장 유명하다.
4번이나 총리 지명 받은 ‘越南民들의 대표자’

이윤영은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되었고, 일제 말기에는 일본 감리교와의 통합에 반대하다가 목사직에서 파면되기도 했던 항일 목사였다. 해방 후에는 북한 지역 감리교의 대표적 인사로 장로교도인 조만식(曺晩植)을 도와 평남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민주당 부당수 등을 지냈다. 조만식과 함께 신탁통치에 반대, 가택 연금되었다가 1946년 2월 월남(越南)했다.
월남 후 이윤영은 민족통일총본부 정경부장, 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등으로 이승만 노선을 충실하게 따랐다. 1947년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었을 때에는 “이는 결코 남북을 분단하는 것이 아니고, 통일조선 건설을 위한 필연적 단계”라고 역설했다.
1948년 5·10총선 당시 정치1번지인 종로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이는 그를 월남민들의 대표자로 간주했던 이승만과 김성수의 배려 덕분이었다.
5월 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에서 의장 이승만은 그에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려달라고 했다. 이윤영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셨으며 세계인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써 역사적인 환희의 날이 우리에게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드러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라면서 “아직까지 남북이 둘로 갈린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씻어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했다. 제헌국회에서 이윤영은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다.
1948년 7월 22일 이승만은 그를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이승만은 “조만식씨의 유일한 정치단체인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으로 이윤영씨가 국무총리 책임을 맡는 것이 정치상 지혜로나 민족적 정의로나 가장 적당할 것”이라는 것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김성수가 총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던 한국민주당은 이윤영을 낙마시켰다. 이후 이윤영은 초대 내각의 무임소장관, 제2대 사회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이승만은 1950년 4월, 1952년 4월과 10월에 그를 다시 총리로 지명했지만, 번번이 부결됐다.
〈온건 좌파 출신〉
曺奉岩
농지개혁을 추진한 전향 공산주의자

조봉암은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에도 참여했던 공산주의자였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압송된 후 6년간 옥고(獄苦)를 치렀다. 해방 후에도 인천민주주의민족전선 회장을 지내는 등 좌익활동을 했으나, 1946년 5월 박헌영의 급진과격노선을 비판하는 편지를 발표하고 전향했다. 전향성명서에서 조봉암은 “현재 조선 민족은 공산당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의 전향이 미군 CIC의 정치공작 때문이라는 설(說)도 있다.
1948년 조봉암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조봉암은 후일 쓴 《나의 정치백서》에서 “미군정 3년을 지내고 우선 남한만으로라도 우리 민족이 정권을 이양받고 통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술회했다.
제헌국회에서 조봉암은 80여 명의 의원들을 거느린 무소속구락부 대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 의원으로 활약했다. 헌법심의 과정에서 그는 이승만이 주장하는 대통령중심제는 독재정치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조봉암은 “농정을 그르치면 중국에서처럼 이 나라가 공산화될 것이 필지(必至)인데, 한민당이 모든 개혁을 반대하니 그를 물리치고 대대적인 개혁을 지지해 준다면 맡아보겠다”면서 입각을 수락했다.
농림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조봉암은 농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 조봉암의 농림부가 내놓은 농지개혁안은 국회산업위원회안이나 기획처안 등과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에서 농민들에게 가장 유리한 것이었다. 호남 지주층을 기반으로 한 한민당은 반발했다. 그 영향으로 1949년 1월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 위원장 정인보)는 공금유용과 독직(瀆職)혐의로 그를 고발했다. 공금을 관사(官舍) 수리에 사용했다는 등의 혐의였다. 조봉암은 1949년 2월 사임했다.
이후 조봉암은 1950년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됐다. 1952년에는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 약 70만 표를 얻어 차점자로 낙선했다. 1956년 제3대 대선에서는 20.3%인 216만3000여 표를 받았다. 1956년 11월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됐다. 그러나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어 1958년 1월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1심에서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과 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처형됐다. 2011년 대법원 전원합의부는 진보당 사건을 재심, 무죄를 선고했다.
‘근로자 이익균점권’ 주장한 초대 사회부 장관

경북 상주에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난 전진한은 17세 때 상경, 김성수·송진우가 하숙하던 집에서 심부름하는 사환으로 고학을 했다. 1920년 기미육영회의 도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경제과를 졸업했다. 유학 시절 그는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협동조합운동에 눈을 떴다. 그는 항일운동단체 한빛을 결성, 이를 바탕으로 1926년 협동조합운동사를 결성했고, 신간회 일본지회 간사도 지냈다.
전진한은 귀국 후에도 협동조합운동을 계속, 전국에 수백 개의 협동조합을 결성했다가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잠시 함경남도 갑산에서 사립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그만두고 절로 들어갔다. 1933년 이후 해방될 때까지 금강산 신계사의 효봉 스님,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 밑에서 참선수행을 하며 지냈다.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위원장,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 등을 맡아 이승만의 건국노선을 지지하는 청년운동,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전진한은 평생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자유협동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자유와 협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면서 “협동에서 오지 않은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자유에서 오지 않은 협동은 진정한 협동이 아니라 굴종”이라고 주장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전진한은 제헌국회 헌법심의 과정에서 근로자 이익균점권(均霑權) 및 기업참여권, 토지개혁 등의 내용을 담은 ‘노농(勞農) 8개 조항’을 제안했다. 이 중 근로자의 기업참여권을 제외한 나머지 주장들이 제헌헌법에 반영됐다. 특히 논란이 됐던 것은 ‘기업주가 그 기업이익의 일부를 법률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임금 이외의 적당한 명목으로 근로자에게 균점시키는’ 근로자이익균점권이었다. 전진한은 이익균점권을 적산(敵産)기업 처리와 연결시켜 노자(勞資) 대립을 완화시키고 공산주의의 침투를 예방하자고 주장했다.
유진오 등의 헌법초안에 전혀 없던 이익균점권 제안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제헌헌법 논의 과정에서 일대 풍파를 일으켰다. 한국민주당·상공회의소 등에서는 결사반대하고 나섰으며 이틀 동안 10여 시간에 걸쳐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결국 이익균점권은 제헌헌법 제18조에 명문화되었다. 다만 산업기반이 전무(全無)한 상황에서 프로그램적 규정으로 머물다가 제3공화국 헌법에서 삭제됐다.
전진한은 이후 초대 사회부 장관, 제2·3·5·6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제2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노동법 제정에 앞장섰다. 1955년에는 자유협동주의를 내세운 노농당을, 1960년에는 한국사회당을 만들었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제3공화국 시절에는 보수야당에 참여, 민정당 최고위원·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등을 역임했다. 정계 은퇴 후 동국대 선학원 등에서 《금강경》을 강론했다. 후두암에 걸리자 단식, 참선하다가 “노동자로 이 세상에 왔다가 노동자로 돌아간다”는 말과 임종게송(臨終偈頌)을 남기고 입적(入寂)했다.
兪鎭午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자

유진오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 예과에 수석입학하고 같은 대학 법문학부를 수석졸업한 당대의 수재였다. 재학 중에는 경성제국대학 내 좌익 성향 서클인 경제연구회에 참여, 활동했다. 졸업 후에는 경제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때 함께 활동했던 이들 가운데는 후일 해방공간에서 좌익활동을 하다가 월북해 북한 정권에 참여한 이강국·최용달·박문규 등도 있었다. 졸업 후 경성제대 강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헌법학의 선구자가 됐다.
유진오는 일제하에서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1927년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고, 1932년에는 근로대중을 위한 연극을 내세운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작가로서 그는 급진 성향의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좌파 성향을 내재한 작품을 쓰는 ‘동반가 작가’ 중 하나였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 강연과 기고 등을 해서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
해방 후 유진오는 좌익이 세운 조선인민공화국 헌법초안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한국민주당을 사실상 이끌던 김성수, 미군정청 사법부장 김병로의 요청으로 헌법초안 작성 작업을 했다. 그는 바이마르헌법을 모델로 하면서 내각책임제,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초안을 만들었다. 유진오는 경제 면에서는 농지개혁과 주요 기간산업체의 국유(國有)를 주장했다. 그는 김성수에게 “농지를 소유하지 않은 소작인은 쉽게 공산당으로 넘어가지만,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해 주면 농민이 모두 지주가 되므로 토지국유화를 부동(不動)의 기본정책으로 삼는 공산당의 책략에 넘어가지 않는다”면서 “농지개혁만이 공산주의를 막는 최량(最良)의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 자신이 호남의 대지주였던 김성수는 유진오의 말을 수용했다. 유진오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면서, 거기서 올 수 있는 폐단을 제거 또는 방지하느냐에 모든 관심을 쏟았다”고 술회했다.
유진오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참여, 이러한 그의 지론(持論)들을 헌법안에 담았다. 제5공화국 시절 민정당 대표위원을 지낸 윤길중 등이 그를 도왔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내각책임제는 대통령제를 고집하는 이승만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됐다.
유진오는 초대 내각에 법제처장으로 들어갔으나, 8개월 만에 그만두고 고려대학교로 복귀했다. 1952년부터 13년간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1952년에는 한일회담 대표, 5·16 후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해 만든 야당 신민당의 대표위원과 총재를 지냈다.
李順鐸
농지개혁 추진한 ‘조선의 가와카미 하지메’

이순탁은 1923년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가 된 후 언론 기고나 논문 등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전파, ‘조선의 가와카미 하지메’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자본가의 역할을 긍정하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는 유학 시절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그의 후원자였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1920년대에 그는 민우회·조선물산장려회·신간회 등 중도민족주의 노선의 단체에서 주로 활동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적화(赤化)사건’, 일명 ‘경제연구회’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구속됐다가 해직됐다.
해방 후 이순탁은 한때 한국민주당에 몸담았지만, 1946년 좌우합작에 찬성하면서 한민당을 탈당했다. 이후 민중동맹, 조선공화당, 민주주의독립전선, 민주독립당 등 중도좌파 성향 정당에서 활동했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위원 관선(官選)의원이 된 그는 토지개혁법 제정을 적극 추진했다. 유상매수(有償買收) 방식에 의한 토지개혁이 그의 주장이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절충한 경제, 중소농민과 중소기업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가 그의 이상(理想)이었다.
이순탁은 초대 내각에서 기획처장으로 발탁됐다. 1948년 9월 발족한 농지개혁법기초위원회에서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순탁의 기획처가 만든 농지개혁법안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세부 내용이 바뀌기는 했으나, 농지개혁의 골간이 됐다. 기획처장 시절 이순탁은 대일(對日)배상요구조서 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49년 7월 기획처장에서 물러난 후 중앙농지위원회 민간위원, 대한금융조합연합회 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때 납북됐다.
〈학자/군인〉
鄭寅普
초대 감찰위원장 지낸 국학자

정인보는 일제하에서는 연희전문학교 강사(1925~1937)로 있으면서 조선사와 조선문학, 한문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 그는 ‘혼(魂)’을 강조하고, 실학(實學)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한편, 시조부흥운동에도 힘썼다. 그는 작가 홍명희(북한 부수상 역임), 백낙준(문교부 장관, 참의원 의장 역임), 마르크스주의경제사학자 백남운(북한 교육상 역임),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등과 이념과 종교를 뛰어넘는 폭넓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백낙준이 후일 미군정하에서 교육법을 제정할 때 우리 교육의 이념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명시하자고 주장한 것은 정인보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정인보는 송진우와는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함께 ‘비밀스러운 일’을 논의하기도 했다. 순종의 가짜 유칙(遺勅)을 만들어 민족주의 세력을 선동,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 했는데, 성사되지는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1945년 송진우가 암살될 때까지 동지적 우정을 나누었다. 1937년 연희전문을 그만둔 후 정인보는 창동에 은거하면서 송진우·김병로 등과 만나 시국담을 나누곤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도 이들과 함께 맞았다.
해방 후 정인보는 언론과 교육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 앞장섰다. 1946년 9월에는 일제하에서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5000년간 조선의 얼〉을 엮은 《조선사연구》를 펴냈다. 1946년 3월에는 전조선문필가협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정인보는 중도우파적 입장에서 정치활동도 했는데, 1946년 2월 미군정 자문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그해 9월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1946년 11월에는 이상의 공직들에서 사퇴한 후, 국학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민주의원 등을 그만둔 것은 김규식 등이 당시 추진하던 좌우합작에는 찬성하면서도 좌우합작 추진 세력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을 마뜩잖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정인보는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초대 감찰위원장이 됐다. 그가 감찰위원장을 맡게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이시영 부통령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평생 학문만 하던 그가 공직에 나간 것은 관기숙정(官紀肅正)을 통해 새로 출발하는 독립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일조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조봉암 농림부 장관, 임영신 상공부 장관 등의 공금유용·독직사건을 엄히 다스리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그는 1949년 7월 “국민의 기대에 십분 보답하지 못해 유감”이라는 퇴임사를 남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인보는 학계로 돌아가 이순신·강감찬 장군, 영규대사(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등 민족영웅들의 현양(顯揚) 사업에 힘쓰다가 6·25 때 납북됐다.
李應俊
대한제국 무관학교 생도 출신 초대 육군참모총장

평안남도 안주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응준은 16세 때 무작정 상경했다. 이때 그를 거두어준 사람이 군부대신(국방부 장관) 부관으로 있던 육군참령(參領·소령) 이갑(李甲)이었다. 이갑은 후일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어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응준은 나중에 이갑의 딸과 결혼했다.
이응준은 이갑의 주선으로 보성학교를 거쳐 대한제국 무관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때 대한제국군은 이미 해산됐지만, 군부와 무관학교는 명색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1909년 무관학교마저 해산되면서 무관학교 생도 42명은 일본육군유년학교에 편입됐다. 1914년 이응준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함께 일본 육사로 진학한 이들 가운데 3년 선배인 김광서(김경천), 동기생 지대형(이청천·지청천), 1년 후배 이종혁(마덕창) 등은 3·1운동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독립운동가를 장인으로 둔 이응준은 그러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에 순치(馴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이응준은 조선과 일본, 중국의 군부대에서 대대장, 병사(병무)담당 장교, 전문학교 배속장교(교련장교), 용산정거장사령관(병참장교), 원산항 수송관 등을 지내면서 대좌(대령)까지 승진했다. 해방 당시 그는 홍사덕 중장을 제외하면 한국인으로서는 최고위급 장교 중 하나였다.
일부에서는 이응준이 일제 말 학병권유 강연 등에 나섰던 것을 들어 친일파라고 비판하지만, 그는 민족정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중국 베이징에서 근무할 때에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원생과 자주 접촉했다가 일본 헌병대의 요시찰 대상이 됐다.
장인의 동지 안창호가 감옥에서 나와 투병생활을 할 때에는 그의 부인이 안창호를 간병하고 병원비와 장례비를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일제 말에는 서울 계동에 있는 김성수의 집에 출입하면서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시국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이번 전쟁에서는 일본이 질 것”이라고 했는데, 동석했던 장택상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후일 이응준이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된 것은 장택상이 그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한국민주당의 김성수 등이 그를 끌어당겼으나 “어제까지 일본군 고급장교였던 사람이 신생 조국의 건군(建軍) 작업에 나선다는 것은 양심상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은인자중했다. 1946년 1월 미군정의 아고 대령이 그를 불러 조선국방경비대 창설 계획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응준이 고사하자 아고 대령은 “일본을 위해 죽을힘을 다한 분이 어째서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못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따졌다. 결국 이응준은 군사고문관을 맡아 건군의 토대를 놓는 작업에 나섰다.
이응준은 남한 내 도청소재지마다 1개 연대(실제로는 중대 규모)를 창설한 후 이를 여단, 사단으로 확장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응준은 자신이 일본군 출신이면서도 가능하면 광복군의 정통성을 접목시키려 노력했다. 미군정 통위부장(국방장관)으로 대한제국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동렬을 추천한 이도 이응준이었다.
이응준은 1946년 5월 군사영어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생도들이 임관한 직후인 그해 6월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건국 후 이응준은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여순반란, 제주폭동, 무장게릴라 남파 등의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는 어려운 환경 아래서도 그는 5만명 수준이던 육군을 8개 사단 10만명 수준으로 증강하는 등 군사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949년 5월 제8연대 산하 2개 대대가 강태무·표무원 중령의 꾐에 넘어가 집단 월북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후 5사단장, 육군대학 총장 등을 지내다가 1952년 예편했다. 이승만은 그를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시켜 예우했다.
한국 야당의 뿌리
‘건국의 조력자들’의 삶 속에는 한국현대사의 비극과 모순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자식이 월북한 사람도 있고, 친구들과 이념 때문에 갈라선 사람도 있다. 일제 말 친일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도 있다.
‘건국의 조력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건국 후 이승만에 등을 돌리고 야당의 길을 걸었다. 일각에서는 그것이 이승만의 독선과 권력욕, 실정(失政)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거인(巨人) 이승만을 이해하고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국의 조력자들’과 이승만의 결별은 건국 세력의 분열이라는 점에서는 비극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건국 세력이 야당을 형성한 것은 신생 공화국을 위해 다행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법정신을 옹호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충성스런 야당(loyal opposition)’이었기 때문이다.
건국을 주도했던 이들과 그 후예들이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1980년대 좌파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야당으로 들어가서 주류(主流)가 되기 전까지 야당의 적자(嫡子)는 이들 건국 세력의 후예들이었다. 이들이 사라지고 정통 야당의 정체성(正體性)이 흔들리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긍정하는 ‘충성스러운 야당’의 전통도 사라지고 말았다.⊙